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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1

Namgok Lee 정수일 선생의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를 일단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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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정수일 선생의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를 일단 다 읽었다.

읽는 동안 그의 천재성과 불요불굴의 의지에 경탄하면서도, 그의 소명감이 한국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넘어서지 못해서 스스로 좌절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수구화한 어떤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천재적 능력과 자기 나름의 소명감이 결합하는데서 오는 단정적(확증편향적) 태도에 당혹감을 느꼈다.

나는 그의 업적을 평가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의 천재성과 의지 앞에서 어떤 비판을 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작아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동 시대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면서,  지식인의 혁명적 열정을 가지고 비슷한 소명감으로 출발하였으나, 여러 외적 내적 경계에 부딪치면서 스스로 변화시켜 도달한 그 세계관이나 문명관, 민족주의나 통일관 등을 보면서, 경탄과 동시에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함께 함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큰 거시적 안목에서의 일치와 
현실 판단에서의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심지어는 대립적인 판단과 정서, 
이런 느낌은 한국의 저명한 학자나 이론가들에게서 이미 여러 차례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변혁하며, 인류 보편의 이상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거시담론이 북극성이라면 현실에 대한 실사구시적 판단은 항해의 나침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북극성은 함께 바라보지만, 나침판이 다르거나 나침판에 이상(異狀)이 있으면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횡 세계일주를 통해 어렵사리 ‘세계의 일체성’을 발견하고 확인했으며 선양해 왔다.
그 일체성은 인류가 공통적 조상에서 진화했다는 인류의 혈통적 동조(同祖), 세계 역사는 공통적 발전  법칙을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의 통칙(通則), 문명 간에 부단한 소통과 교류가 이어져 왔다는 문명의 통섭(通涉) 그리고 숭고한 보편가치를 다 같이 누리려 한다는 보편가치의 공유(共有), 이 네가지 공통요소에서 발현되고 있다. 아울러 이 일체성이야말로 미래의 인류를 다 같이 공생공영할 수 있게 하는 역사의 원초적 뿌리이며 밑거름이라는 불변의 확신을 갖게 했다“

위에 언급한 내용이 그의 사상과 소명을 잘 나타내는 문장 같아서 발췌 소개했다.
이 속에 내가 공감하는 거시적 안목과 동시에 내가 껄끄러워지는 그의 단정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역사의 통칙(通則)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가졌던 세계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가 생각하는 보편가치 또한 그의 경험 세계와 소명감이라는 주관적 태도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의 민족주의 담론은 그의 문명교류에 대한 학문적 업적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닌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특히 통일에 대해서 남쪽 사상계나 이론계의 여러 담론들을 거침없이 비판 때로는 비난하면서, 그가 들고 나오는 ‘진화통일론’이 내가 제안하는 두 국가의 공존을 통한 민족주의나 통일의 발전적 전개와 어떻게 다른지,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인지를 묻고 싶다.

북(北)의 현실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그런 태도가  어떻게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이상적인 세계나 그것에 부합하고 그것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민족주의 담론과  통일 담론을 전개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다.

물론 그가 회고록의 말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지만,  그가 출옥한 이후 
종횡 세계일주를 통해서 ‘문명교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굴절되고 험난한 역사 속에서도 발전해 온 한국의 역동적인 현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상기하게 된다.  

회고록의 마지막 말에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온 그의 감상을 들으면서, 비록 같은 시대, 다른 세계를 살아왔지만, 노년의 감회를 함께 나누게 된다.

“이제 나는 그 ‘불급함’을 내일의 여명을 잉태한 낙조에 고이 묻고 미련 없이 훨훨 떠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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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여태권
어렵지만 공유하여 이해 가능할 때까지 읽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Reply4 h

임진철
공감이 갑니다ㆍ 대의민주주의중앙집권통치체제인 한국의 87년체제도 낡고 부패한 기득권카르텔체제가 되어버렸습니다ㆍ이체제는 1:9:90% 헬조선신양반제사회를 만들어왔으며 이체제를 그대로두면 이 불의한 사회를 더욱 고착화시킬것입니다ㆍ
그러나 네오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하는 4차산업혁명의 물결과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민치에의 요구는 직접민주주의민치(시민정치+주민자치+공론정치)와 대의민주주의통치(대의정치+관치)가 이중적으로 구동되는 직접민주주의자치분권협치체제를 만들어갈것입니다ㆍ각기 자기결정권을 가진 시군구단위 지역당과 읍면동단위 동네정당을 기반으로 보충성의 원리와 연방제의 원리에 의거하여 직접민주주의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실천적 흐름이 단적인 예가 될것입니다ㆍ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자치분권협치국가의 흐름으로부터 북한도 예외일수없기에 선생님의 견해에 공감이 가는게지요ㆍ
Reply2 h

문용식
저는 선생님이 비판하시는 그 대목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수일 선생이 북한에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무하마드 깐쑤가 되기 위한 교육에 들어간 게 1984년 3월이고,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공안기관에 체포된 게 1996년 7월입니다.
 이번 회고록은 그 사이 22년 5개월간의 기록은 거의 빠져 있습니다.

이 시기가 얼마나 격변의 시기입니까? 국내적으로는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적 정통성을 갖춘 정부가 들어섰고, 국제적으로는 소련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냉전체제가 무너졌습니다.
이 격변의 시기에 깐쑤의 통일관, 통일운동 노선도 틀림없이 커다란 변화를 맞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활동 내용에서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이 회고록은 깐쑤가 되기까지의 과정, 깐쑤가 되어 활동한 내용, 그 활동에 대한 회고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정수일 회고록>일 뿐, 선생이 가명을 쓰고 활동했던 <무하마드 깐쑤 회고록>이 아니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추후에 <무하마드 깐쑤의 회고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정수일 선생님의 건강이 과연 이를 허락할까 걱정입니다.
Reply1 h

Namgok Lee
문용식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겠습니다.
저도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위에 적은 독후감은 역시 제 자신의 감각과 판단일 뿐입니다.
정 선생님의 '민족주의론'이나 '진화통일론'은 제 자신 오랫 동안 고민했던 테마들입니다.
저는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만, 민족에 대한 애정과 긍지는 남 못지 않게 높은 편입니다.
정서적으로는 저의 진화통일론은 옛 사람의 다음 싯구에 가깝습니다.
萬國活計南朝鮮
文明開化三千國
감사합니다.









2023/01/10

Namgok Lee 원불교는 인류적 보편성을 가진 위대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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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오늘 새벽에 ‘아무래도 나라가 망할 것 같다’라는 글을 올린 후, 한 원불교 교무님으로부터 따뜻한 댓글을 선물 받고 댓글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은 아마 미국에서 활동 중이신 것 같다.
내가 원불교를 만난 것은 70년대 말의 자신의 사상적 전환기와 스스로 관계를 끊은 단체와의 인연으로 4년간의 징역을 살고 나서, 우연히 어떤 지인(知人)으로부터 원불교 교전을 선물 받아서 그 첫 장을 열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구호를 보면서였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내가 그 동안 고민해 온 내용이 함축되어 있엇다.
내가 지금까지 전류가 흐르는 듯한 만남 가운데 하나였다.

대학시절부터의 벗인 고(故) 휴암스님이 계시던 은혜사 기기암에 보름 정도 머물면서, 그 동안의 생각을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징역 살고 얼마 안되었을 때이니까,  3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그 때 썼던 글은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는데, 그 제목이 ‘혁명(革命)에서 개벽(開闢)으로’ 였던 것은 기억한다.
물질 개벽은 과학기술에 의한 생산력 발달과 넓게는 사회제도까지를 포함하고, 이것은 인간이 외부를 변화시키는 행위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 개벽은 인간 자신의 가치이념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즉 아집(我執)과 소유(所有)라고 하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정신 혁명이다.

이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의 필연적인 모순을 물질이 개벽되기도 전에 예견한 소태산 선생의 예지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원불교는 이 땅에서 출현했던 종교 가운데서도 인류적 보편성을 가진 위대한 종교라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지금 이 구호는 더욱 실감 있게 다가온다.

특정한 종교를 떠나 정신이 개벽된 즉 아집과 소유를 넘어선 사람들 1%면 세상을 바꿀 수 잇다. 이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시민 르네상스도, 새로운 정치운동도, 새로운 경제 시스템도 만들어간다면, 아마 세계 역사에 가장 선구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의 절망을 저녁의 원대한 꿈으로 바꿔본다.
‘나’를 넘어선 동지들이여, 단결하자! 그리고 새 세상을 건설하자!

2022/12/28

Namgok Lee |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
220604
  · 
오래전에 후배로부터 선물받은 책을 보기 시작했다.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다.
후배의 소개로 한 번 뵌 적이 있는 선생님이시다.

내가 논어를 접한 것은 60이 넘어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 하나의 필연처럼 느껴진다.
불교는 청년 시절부터 접했지만, 노자와 장자, 묵자는 논어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접하게 되었다.
중용도 한번 슬쩍 본 것 같은데, 나에게는 논어가 가장 깊게 다가왔었다.
요즘은 불경(佛經)을 많이 보게 되는데, 논어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성경(聖經)도 훨씬 편견없이 읽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 같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전(古典)이 더 빛을 발한다.
한 쪽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 균형을 잡지 못하면 위험하게 된다.
지금의 문명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뇌과학을 비롯해 인간의 정신에 관해서도 과학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 분야에서도 고전(古典)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물질과 정신, 과학과 종교, 특히 고금합작(古今合作)을 생각하게 된다.

청년들보다는 나이 든 세대(世代)가 고전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고도화한 것도 원인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사이클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논어 산책을 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세대 간의 역할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같다.
나이 든 세대는  나이 들어갈 세대에게 고전의 가치를 잘 전승해 줄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읽은 중용의 문장이다.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발이개중절위지화(發而皆中節謂之和)
중야자천하지대본야(中也者天下之大本也)
화야자천하지달도야(和也者天下之達道也)

성재 선생의 번역이다.
<기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함이 발(發)하지 않음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다 절도(節度)에 맞음(中)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통달(通達)한 도(道)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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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220612
  ·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 중에서.
蓋中無定體 髓時而在 是乃平常之理也

‘대개 중(中)은 정(定)한 체(體)가 없고 때를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이에 평상(平常)의 이치라“


강해

‘가운데(中)’란 정체(定體)가 없어요. ‘이것이 중(中)이다’라고 이름을 지어 놓는다고 중(中)이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것을 가지고 ‘옳다’고 해놓으면 세속 사람들이 그것만 옳은 줄 알아요.
이치가 바뀌지 않으니까 수백년이 지나더라도 원리야 변동이 없지만, 원리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는 늘 변동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중(中)은 체(體)가 없어요.
‘시(時)’자는 오전 오후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초까지 논해요. 초에도 변하고 분에도 변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회는 더 변동됩니다. 지금이 격변기이거든요.

독후감 

‘가운데(中)’란 정체(定體)가 없다.
다만 ‘이치가 바뀌지 않으니까 수백년이 지나더라도 원리야 변동이 없지만, 원리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는 늘 변동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중(中)은 체(體)가 없어요.’라는 강해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무슨 원리가 있어서 그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가 변한다는 것은 좀 뒤바뀐 것 같이 들린다. 
현상이 그러니까, 그것을 나타내는 말로 ‘중무정체(中無定體)’란 원리(관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같은 격변기에 격변하는 현상과 좀처럼 변하지 않는 강고한 관념(의식)의 괴리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관념을 현상에 맞추게 되겠지만, 그 과정의 더딤이 인류라는  종(種)에 치명상(致命傷)을 입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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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3] 
221227
  ·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中庸) 강해’를 한꺼번에 읽지 않고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유교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 때문에 읽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그 진의(眞義)가 마음 깊이 느껴질 때가 많아 귀한 보물을 접하듯이 읽게 됩니다.
역사나 인류의 정신이 크게 변화할 때 ‘귀(歸)’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상향(上向)의 나선형 순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재 선생님의 중용강해 가운데 오늘 읽은 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공부 전체가 ‘진실로 성(誠)’입니다. 그렇다면 ‘성(誠)’이란 무엇이냐? 이치의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은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써 눈을 부릅뜨고 하는 것인데, 그 정성은 얼마가지 않아 피곤해져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참의 정성이 아니겠지요. 우리의 정성은 고집부리는 ‘혈성(血誠)’입니다.
그러면 참의 정성(精誠)은 무엇이냐? 사념(私念)이 하나도 없고 천지원리로 된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거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고,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정성은 사념이 자꾸 이렇게 침범하니까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려서 사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을 쌓고 또 쌓아서 사념이 제거된, 옳은 성(誠)의 경지에 가서 오직 그 자리만 있게 되면 참의 정성이 됩니다“

이런 정신은 고대에도 희귀한 것입니다. 
하물며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런 글들이 어떻게 다가갈지, 말투도 고어(古語)체지만, 내용이 다가가기 힘들 것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같은 단어가 과거 악(惡)한 전체주의와 연결되어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도 같습니다.
 인류 역사와 인류 정신의 진화 과정에서 ‘개인의 해방’은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입니다.
 과거의 개인(私)이 억압된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보(進步)의 명백한 표징으로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해방이 자본주의와 개인중심민주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폐단은 그 긴 여정을 지나 다시 공(公)의 세계를 돌아보게(歸)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단어가 활사개공(活私開公)입니다. 자신을 최대로 살리는 과정이 공(公)이 열리는 즉 공(公)을 위하는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은 옳지만 어렵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신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나도 원하지만, 그랬다가는 나만 낙오된다’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재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오상(五常;仁義禮智信)을 그대로 기른다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육신이 있기에 육신의 사사(私邪)가 오상(五常)을 , 천연성(天然性)을 침범하려는 것을 제재(制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전부요 정치의 전부입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가 현대적인 어법(語法)으로(좋게는 bts의 노래와 춤으로) 달빛 속에서 햇빛 속으로 나왔으면 합니다.
교육과 정치의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교육이나 정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선공후사(先公後私)’ '선사후득先事後得'
  정도의 선구성(先驅性)은 있어야 그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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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 
221228
  · 
성재 선생님의 ‘중용강해’를 읽습니다.

“학문이나 정치가 민심의 기본에 자연스럽게 맞아야 합니다. 민심에 배반하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 끼어 있기에 민심에 배반됩니다. 순후(淳厚)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민심(民心)의 기본’ ‘민심’은 무엇일까요?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추상적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요?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것은 대단히 낙관적인 진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은 동물계로부터 진화한 인간의 특성이 동물적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숭고지향성’을 갖는 존재라는 관점입니다.
그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떠나서, 나는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그 입장에 서 있습니다.
‘군주(君主)’주의 시대에는 군주(를 비롯한 지배층)가 주(主)가 되어 이 ‘민심의 기본’을 앙양(昂揚)하는 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성왕(聖王)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왕(聖王)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을 쟁취하며 유지하기 위한 정치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유교는  ‘성왕(聖王)’이라는 도덕정치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왕권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민주(民主)’주의입니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시대이지요.

이제는 윗물이 민(民)입니다. ‘민심의 기본’을 앙양(昂揚)하는 주체는 이제 민(民)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군주(君主)’주의의 의식이 여기 저기 남아 있습니다.
북(北)의 경우는 노골적이어서 실제로도 군주(君主)의 모습이지만, 많이 민주화된 남(南)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런 의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민(民) 스스로 주(主)가 되는 의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로 되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정치, 경제, 학문 사상, 종교)권력을 주무르는 자(者)들이 ‘민심의 기본’을  타락시키는 작업을 일삼고 있는 것을 중단시켜야합니다.

이 두 과제는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윗물(민심) 맑히기’로 아랫물(정치권력)을 맑히는 것이 민주(民主)의 제대로 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되는 민주화(民主化)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와 실천의 물줄기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감지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름의 방략에 대해 생각도 하고 제안도 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중층적이고 복잡할 때는 그를 풀어가는 일의 순서가 있고,  방식이 있습니다.
힘과 지혜를 잘 모아야할 때입니다.
새벽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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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Namgok Lee 공자가 일관되게 추구한 정치는 바로 인(仁;사랑)의 사회적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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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서경(書經)을 예로 들면서 “효(孝)와 우애(友愛)를 넓히는 것이 바로 정치인데, 어찌 따로 정치를 한다하겠습니까?” 하는 구절이 논어 위정편에 나온다.
천하의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정치를 논하면서 초상집개(喪家狗)라는 비아냥까지 받던 공자의 이미지와는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대목이 공자의 진면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가 일관되게 추구한 정치는 바로 인(仁;사랑)의 사회적 확장이었다.
국가 정치는 하나의 수단,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적 정치론이고, 일상(日常)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일상화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공자 시대보다 비할 수 없이 진전된 시대를 살고 있다.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 형태로서 지역 정당 운동은 꽉 막힌 중앙정치(4류정치)에 ‘돌파구’를 내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마증물’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이 상응해야 지역정당운동은 정치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역정당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실천할 수 있는 장(場)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의 이미지를 ‘권력과 이익을 놓고 싸우는 정치’로부터  ‘생활밀착형 정치’ ‘밝고 명랑한 정치’로  바꾸는 것이다.
내일 포럼을 준비하면서 든 생각의 일단이다.
1)정치의 일상화(일상의 정치화)ㆍ다원화;
 마을자치운동, 마을만들기, 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 환경운동, 성평등운동, 노동운동, 기업운동(ESG 등), 협동운동, 사회적 경제운동, 나눔운동, 돌봄 운동, 문화예술운동, 인문운동들이 지역 정당을 통해 정치운동으로 녹아들 수 있다.
2)일상적인 정치학교;
토론, 합의, 삶의 새로운 문화를 일상적으로 연습하는 학교.
①‘내 생각은 틀림없다’로부터 ‘내 생각은 틀릴 수 있다’는 자각
② 나와 다른 생각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검토의 대상
③ 물질의 추구가 아니라 행복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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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9

Namgok Lee 박석 교수의 서양 철학사 지적 호기심 -- 실천을 중시한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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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그 판단에 동의 여부는 별개로 하고, 서양 철학사를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한 글을 처음 접한다. 그래서 소개 겸 찬찬히 적어볼 마음이 들었다.
박 석 교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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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이래 그리스의 초기철학은 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연보다는 윤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명확한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엿다. 그 명확한 정의의 중요성이 플라톤에게서는 사물의 본질, 이데아로 나타나게 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가시적인 세계의 너머에 있는 영원한 본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 이래의 자연철학과 스승 플라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고대 철학을 완성하였는데, 그는 초월적인 이데아를 지상으로 끌어내려서 사물의 본질인 형상(形相)은 초월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료와 더불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스토아 학파와 고도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활약하엿다. 
로마는 위대한 철학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세상은 인간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의 투쟁이며 결국 천상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신국론을 펼치면서 중세를 열었으며 말기에 가서는 아랍에서 역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세 철학을 집대성하였다.
이 기간 중에 철학적으로는 보편자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만 이름에 그치는 것인가를 다루는 보편자논쟁이 삭막한 중세의 철학을 간간이 적셧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의심으로 고대와 중세의 철학적 개념들을 다 청소하고 세상에는 물질이라는 실체와 정신이라는 실체 둘밖에 없으며, 물체의 본질은 연장이고 정신의 본질은 사유라고 규정하면서 근대 철학이 시작되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존중하면서도 세계를 두 개의 실체로 나눈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 하나의 실체를 주장하엿고, 라이프니츠는 세계는 수많은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비해 영국의 로크는 이성 자체에 회의를 품고 인간의 의식은 백지와 같은 것이어서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엿다.
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본적인 인과율과 필연성조차도 거부하면서 그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의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개연적 지식에 불과하다고 단언하엿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갈등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종식되었다. 
칸트는 우리의 감성 속에 공간과 시간이라는 틀이 있고, 우리의 오성 속에는 12가지의 멈주가 있어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다고 주장하엿다. 결국 우리는 감성과 오성의 틀에 비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사물 그 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칸트는 자신의 주장을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하엿다.
헤겔 또한 의식이 대상의 전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이나 대상의 아무런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때의 이론이다.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의식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경험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대상도 변화되고 대상의 변화가 다시 의식에 영향을 미쳐 의식을 변화시킨다. 이런 식으로 의식은 성장하여 결국 절재정신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가 의식과 대상 간의 관계르 정태적으로 보았다면 헤겔은 그 관계를 동태적으로 보아 의식의 발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헤겔을 정점으로 주지주의가 중심이 되는 전통적 의미의 서양철학은 막을 내리고 이후 다양한 갈래로 흩어졋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목표는 세계에 대한 지적 탐구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엿고, 키르케고르는 보편적 이성, 추상적 사유를 반대하고 개개 존재자의 실존적 불안과 고독을 이야기하여 실존주의의 길을 열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데아는 이 세계의 피상적 표상일 뿐이고, 실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의지라고 주장하면서 주지주의를 반대하고 주의주의(主意主義)를 제창하였다.  특히 그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염세적 요소가 강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면서 이성의 종언을 주장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가 되었다. 현대 서양철학은 워낙 다양한 갈래로 흩어져 그 중심점을 찾기가 힘들다.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적 탐구이고 자아에 대한 탐구도 주로 인식론의 문제에 치중되었다. 그것은 결국 세계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세계의 실상에 대한 탐구만 중시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관심 분야는 아주 폭이 넓엇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이상국가의 건설에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정치학 윤리학 등에 관심을 보였다. 그 뿐인가?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는 세계에 대한 탐구보다는 마음의 행복을 얻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엿다. 근대의 철학자 중에서도 윤리적 사회적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앗다.
그렇지만 서양철학의 주된 특징은 역시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 있다.


이상이 박 석 교수가 ‘지적 탐구를 중시한 서영철학’‘실천을 중시한 중국철학‘과 비교하기 위해 서양 철학을 요약한 내용이다.
이렇게 어떤 틀을 가지고 비교하는 것과 그 틀 속에서  요약 정리하는 것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흐름을 대관(大觀)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적으면서 음미해 보았다.
박 교수가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음에 나올 책이 궁금하다.

2022/11/06

Namgok Lee 독서 vs 명상, 정명(正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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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구절은 안중근 의사의 글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독서(讀書)’는 인류의 보편적인 지적 자산과 만나는 통로다. 
형극(荊棘)이 생긴다는 것은 자신의 아집이 주는 괴로움이다. 
아집이 가시처럼 입 안을 찌르는 것을 자각한다면, 
독서가 단지 지식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되는 것이다.

요즘은 이 말이 실감날 때가 많다. 명상도 해보지만, 나에게는 독서가 더 익숙한 명상일 때가 많다. 

독서는 나와 저자와의 대화다.
때로는 시대와 시대의 대화, 이편과 저편의 대화다.

수요 논어 산책이 앞으로 두 번 남았다.


다음 주는 자로(子路)편을 다룬다.

이 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문답이 많고, 특히 정명(正名)론은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말이지만,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정치의 과제를 논하는데 아주 좋은 테마로 생각된다.
나는 60대에 논어를 처음 읽으면서 
그 역사적 배경을 모른채 정명(正名)이라는 말을 접하는 순간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뜻으로 바로 다가왔다. 
내 자신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우리 시대 정치의 혼돈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이 문장 속에서 읽힌 것이다.
나중에 천천히 전통적인 여러 해설도 보면서 그 역사적 배경 등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읽은 방식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를 나 자신의 테마, 이 시대의 테마로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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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와 공자의 대화다.

.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명(名)을 먼저 세운다 하십니까?”
.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불순해지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13-3)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 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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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논어산책에서 만나게 된 인연으로 익산의 문화행사인  관례식에 어른 역할로 참여했다. 처음으로 옛 전통복식을 갖추고 이런 의식을 경험했다.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 가정에서 성인식으로 치룬 것을 재현한 것이다.
단지 옛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하나는 이것이 신분계급제와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수의 상류 지배층 문화여서 그 자체로는 현대의 삶과 너무 멀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의 한 단면을 고증하는 정도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드는 생각은  지금의 교육 환경을 생각하면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같은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15~6세의 나이는 인생의 사이클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를 입시나 취업 시험을 위한 교육으로 온통 보내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최대 문제로 보인다.

비록 지금의 교육환경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고, 더구나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피해야 하겠지만, 개별 고등학교가 선택하고, 또 그 학교 안에서도 개개인이 자유의사로 선택해서 해 볼 수 있는 그런 방식의 프로그램이 없을까 하는 것을 교육계에 제안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2022/11/04

Namgok Lee 기존 정당 간의 연합정치가 어려운 상황에서 ‘연합정치’를 강령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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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나는 지금 우리의 시대정신을 ‘통합과 전환’이라고 표현해 왔다.
통합은 ‘사회통합’과 ‘연합정치’를 의미하고, 전환은 ‘정치전환’과 ‘문명전환‘을 의미한다.

둘 다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용어나 태도를 넘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용어나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 그 동력(動力)을 강화하는 것으로 된다.
부정적인 태도는 상호 악순환에 빠져들기 쉽고, 확증편향의 퇴행적 편가름의 늪에서 인류적 위기와 나라의 위기를 헤쳐나갈 동력을 잃기 쉽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자기 주체성을 잃고 휩쓸려 망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모습 가운데 안타까운 현실의 하나다.

내가 동학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감시와 비판’은 동학 정신을 현대에 살리는 ‘최저선(最低線)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학농민혁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인 ’집강소‘를 현대에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
‘무엇 무엇에 반대한다’는 그 내용을 ‘이렇게 이렇게 하자’는 표현 속에 담아내는 운동이 진전해야 한다.
‘사회통합’은 실재하는 진영 간의 갈등과 대립을 어물 어물 봉합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성공할 수도 없다.
그 대립과 갈등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인간의 보편적 선의지(善意志)를 바탕으로 해결하는 문화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인문운동’과 ‘종교’가 이 역할의 큰 담당자다.
책을 왜 읽고, 종교를 왜 갖는가?
확증편향과 편가름, 증오와 분노를 확대하는 방향이라면 그것은 ‘이슬’을 ‘독(毒)’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연합정치’는 고질적인 분열과 대립의 정치를 지양(止揚)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 즉 계급(계층)문제, 경제문제, 민족문제, 국가 문제 등을 지금까지와 같은 정치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마련한 성과들을 살려 ‘전환’과 ‘도약’의 밑천으로 쓰지 못하고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일대 분수령에 서 있다.
자체 정화력(淨化力)과 진화력(進化力)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기존의 양 대 정치세력은 남의 칼을 빌려 스스로의 환부를 도려내는 듯한 모습으로 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언젠가 양대 정당이 진화해서 연합정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난망(難望)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근래 나는 지역정당과 같은 새로운 정치운동에 주목을 하게 된다.
자치나 분권운동을 적극적인 정치운동으로 하자는 것에 관심이 간다.

그 것은 풀뿌리정치운동의 진화를 통해 ‘저항으로부터 권력으로’라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지방정부(행정부와 의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 권력은 ‘강제(국가 권력)’나 ‘매수(경제권력)’가 아닌‘설득과 공감’에 바탕한 시민(또는 사회)주체권력이다.
 현실과 먼 이상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어디선가 이런 모델들이 나타나면 꽉 막힌 정치를 뚫어내는 거대한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는 다른 하나는 지금과 같은 기존 정당이나 정치문화로는 어려운 ‘연합정치’를 이런 정당 속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있다.
기존 정당 간의 연합정치가 어려운 상황에서 ‘연합정치’를 강령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당연한 가치로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문명전환을 추구하는 녹색정치’ 삼자(三者)를 포용하고 융합하는 정강과 정책을 담을 수 있는 정당이 그것이다.
이런 내용을 갖춘 지역정당이 지방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우리공동체의  오랜 정치사에 큰 변혁의 물꼬를 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단히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지금의 꽉막힌 정치 현실과  절박한 시대적 요구는 어쩌면 현실로 성큼 다가오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과 확산력이 애매한 기존의 소수 정당들과 자체 정화력과 진화력이 허약한 양대 정치세력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이 헤쳐 모일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도 지역정당운동이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현실정치와는 무관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는 노인이지만, 나는 인문운동을 통해서 ‘정치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화되고 일상적인 활동과 삶의 현장들이 ‘정치’로 되는 ‘새로운 질’의 정치와 정당을 그려보는 요즘의 심경을 적어본다.


6 comments
양재석
선생님의 말씀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어둡다는 것이고
현실가능성이 있다면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전자에 손이 더 가고있으니...
Reply1 h
Namgok Lee
양재석 현실이 어두울수록 빛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Reply1 h


이항근
이 울림이 유장한 흐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ply1 h
권오국
지금 우리 지식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中道나 中庸에서 말하는 中에 대한 해석이 지극히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지평에 머무르거나 같은 中을 말하지만 서로 차원이 다른 논의나 말을 하는데 그것을 같은 범주의 말로 치환해버리는 범주오류(Category Error)를 너무나 쉅게 빠져버리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중은 좌우의 문제도 있지만 상하의 문제도 있으며 좌우 상하를 제대로 융합,내지 통합해냈을 때 的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식 즉알음알이의 말이 지혜의 언어를 차원이 다른 지혜의 언어를 꺼집어내려 소위 토론하는 현실이 우리의 지적풍토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십자가의 언어를 평면에다가 끌어내려 버리면 거기에 애시당초 구원은 없으며, 구원을 받을 정신적 깊이도 없는 겁니다.
진짜 깊은 공부와 성찰이 없는 우리 지식인사회와 대학,종교가 병들었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할 생각조차 없는 것이 우리사회를 진짜 희망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건 아닌가? 삼가 두려울 뿐입니다.

Reply45 m
Namgok Lee
권오국 동감입니다
Reply17 m
권오국
이남곡 거친 말에 공감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진짜 큰 사랑으로 깊이 고민하면서 치열하게 공부 또 공부하고 정진해야할 사명이 이 나라의 지식인들과 사회의 정신적 리더들에게 있다. 그들이 못하면 누구라도 나서서 반듯이 해야할 일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합니다.
Reply14 m

2022/09/18

Namgok Lee ·오늘 정읍 논어 산책에서는 제8 태백(泰伯) 편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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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오늘 정읍 논어 산책에서는 제8 태백(泰伯) 편을 다룬다.

이 편에는 민주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구절들이 들어 있다.
이런 구절을 읽음에 있어서는 ‘그것 봐라, 공자야말로 봉건전제주의를 옹호한 고루한 사상가가 아닌가?’라거나 공자를 억지로 변호하려는 옹색한 논리를 펴기보다는 그 시대적 사회적 한계 속에서 공자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그 뜻을 현대 속에서 살펴볼 일이다.

이런 구절을 함께 산책할 정도가 되면 현대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악하여 올바른 정치 및 사회운동을 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거론하고 싶은 문장이다. 
ㅇ 공자 말하기를 “백성을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8-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우민화(愚民化)하여 봉건 전제정치에 따르게 하는 사상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을 만한 문장이다.

일단 공자의 시대나 사회를 선반에 올려 놓고 생각해보자.
요즘 현대민주주의국가에서 나타나는 비이성적 때로는 반이성적 ‘팬덤’현상과 ‘낡은 이념이나 정서에 바탕을 두고 혐오와 분노의 편가름 현상’은 어떤가?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에서 말하는 다음 문장도 참조할만 하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결국 현대에 있어서도 미래 정치는 강제나 매수가 아닌 ‘납득’에 있는 것이다.
강제나 매수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납득’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 아닌가?
다만 공자가 ‘可使由之 不可使知之’로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可不可(가불가)’로 표현하기보다 ‘빈이무원난(貧而無怨難) 부이무교이(富而無驕易)’에서 사용한 ‘난이(難易)’ 정도로 말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실제로 공자는 자로 편 마지막 장에서 ‘가르치지 않은 백성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以不敎民戰 是謂棄之)’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거론하고 싶은 문장이다.
ㅇ 공자 말하기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 (8-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언론의 자유나 비판 반대를 봉쇄하는 말로 들리기 쉽고, 실제로 과거 역사에서 이 말이 부정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 말을 현대민주주의에서 검토한다면, 이제 시민(인민, 국민)이 통치의 객체에서 정치의 주체로 실질적 힘을 갖추기 위한 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권리와 책임의 공존’이 아닐까 한다.
주인이 가져야할 덕목이다.


그래서 이 말을 현대에 하고 싶으면 ‘비판이나 반대를 하려면 먼저 자신이 책임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정도가 아닐까?
며칠 전 벗과의 통화 내용이다.
“저는 요즘 ’저항에서 권력으로‘ 라는 말을 합니다”
나는 이 ‘권력’이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제 시민이 통치의 객체에서 진정한 주체로 되어야 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금의 권력 정치와는 '다른' 권력은 어떻게 창출되는가?
이런 점들을 고찰하는 논어 산책이 되면 좋을 것 같다.


3 comments
이무열
첫 번째에서 미래 정치는 납득 보다는 공감, 감응, 공명 이런 말이 선생님 뜻에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

Reply1 d
김재형
논어는 약간의 다시 쓰기 필요합니다.
고전 대부분이 조금 고쳐쓰기하면 감각적인 글이 됩니다.

2022/07/12

Namgok Lee 220624 지리산 정치학교 1.2.3기 수료자들의 연찬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지난 6.24~6.26 2박3일 DMZ 평화생명동산에서 지리산 정치학교 1.2.3기 수료자들의 연찬이 있었습니다. 6.25 연찬의 테마가 ‘새로운 문명을 향한 정치 강령’이어서 연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날 새벽 핸드폰으로 생각나는대로 써 본 것입니다.
주로 젊은이들이 참가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라서 연찬이 끝나고 나중에라도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거칠게라도 적어본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 생각입니다.

===
<새로운 문명을 향한 정치강령에 대하여>
                                                    이남곡

○인간
1. 인간은 생태계의 일원이며, 그의 높은 자유욕구와 지적능력으로 생태계에서 특수한 지위와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 
2. 인간은 동물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바탕으로 하는 1차적 본능과 함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2차적 본능 즉 '숭고지향성'을 갖는 존재다. 
3. 타자(인간 상호간, 인간과 자연 간)에 대한 침범을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으로 된다. 
4. 정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과 조화 공생하는 기술이다. 
○인식, 소통, 탐구, 합의
1. 인간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필터를 거친 '상'을 인식할 뿐이다. 
2. '내 생각은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3. 일체의 단정이나 고정 없이, 그 시점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찾아가는 토의문화를 발전시킨다. 
(단정 없이 정의를 찾고 실천한다)
(마주보고 누가 옳은가를 다투는 토론문화에서 같은 방향에 서서 무엇이 옳은가를 탐구하는 연찬문화로)
4. 일단의 결정에 합의하더라도, 고정하지 않는다. 소수의 의견은 존중한다. 
○삶, 행복
1. 정신적ㆍ예술적ㆍ영적가치의 즐거움을 확장하여, 단순소박한 삶의 풍요를 지향한다. 
2. 자아실현을 자발성ㆍ전념ㆍ기쁨을 통해 이룬다. 
3.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지향한다. 
○정치
1. 공동체적 가치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민주주의, 문명의 전환을 추구하는 녹색 정치의 삼자연합정치를 지향한다. 
2. 자립과 자치, 전환의 능력을 신장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길이다.
3. 문명전환의 물질적 ㆍ제도적 기반을 구축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4.차별에 반대하고, 차이를 존중한다.(다원성과 다양성)
○생산력, 생산관계
1. 자본주의의 물질적 진보에 대한 기여를 포섭하고, 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좋은 생산력과 좋은 생산관계를 지향한다. 
2. 기업의 진화, 노동조합의 진화, 협동조합의 진화를 유기적으로 추구한다. 
○국가, 민족, 통일
1. 중심교역국가, 새문명의 선도국가는 상호보완적 목표다. 
2. 남북 두 국가의 일반국가관계의 정립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미래를 열어간다. 
3. 남북이 상이한 경로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고, 인류의 보편가치에 대한 보편적 접근(내재적 접근이 아니라)이 가능해 지면, 통일을 추진할 수도 있고 남북이 아시아 연방의 주된 동력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필수적 목표가 아니라 선택적 목표이다)
*1국 2체제(이른바 연방제)보다는 1민족 2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장기적으로 민족의 큰 꿈을 그려볼 수 있다고 생각함
                          2022. 6. 25  새벽, 평화생명동산에서
===
정읍 논어 산책을 준비하느라고 5편 공야장(公冶長) 편을 보고 있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공자의 면목을 볼 수 있다.
이 편을 처음 볼 때는 좀 밋밋하다고 느꼈는데, 시대를 넘어 자신의 일로 생각하면 사람(자신)의 진실한 심층의식을 볼 수 있게 한다.
1장(章)이다.
공자가 공야장을 일러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감옥에 구속된 일이 있어도 그의 죄는 아니었다.”하고, 자기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 妻之
‘당신은 어떤 사람을 사위나 며느리로 삼고 싶은가?’
‘무엇을 먼저 보는가?’
당신이 관념이나 표층의식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이 속마음이 당신의 진실이다.
이 속마음들이 변할 때라야 문명은 진정한 전환의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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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years ago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 산다.

한국은 그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세계최빈국으로부터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나라도 작고 부존자원도 빈약한 빈국(貧國)이 오직 인적자원에 의존해서 이런 성과를 이루었다.
라인강의 기적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작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이 개방경제를 선택하고, 그것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중심교역국가(中心交易國家), 그것이 앞으로도 한국의 위상이 되어야 한다.
그 동안은 매판, 사대 등의 여러 비판적 요소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진정한 중심(中心)에 걸맞게 발전하여야 한다.
지정학적 위치와 인적자원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 자산이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선진자본주의와 개발국의 중심이다.
최대의 걸림돌은 남북분단과 전쟁위험, 미일과 중러의 한반도를 둘러싼 패권경쟁이다.
휴전협정이라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은 휴전협정의 당사자도 아니다.
냉철하게 봐서 전쟁을 막는 근본적인 길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통일이고, 하나는 남북이 두 개의 국가로 수교(修交)하여 일반국가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더 실사구시해보자.
전쟁으로 통일하는 것은 민족이 자멸하는 길이다.
평화통일 밖에 없다.
지금의 남북의 국가적 과제의 다름과 그 동안의 대립 불신은 연방제를 포함한 모든 평화통일방안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은 평화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흡수하는 통일이다. 
그것도 북이 남을 흡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남이 북을 흡수하는 것인데, 가능한가?
아마 북의 정변이 일어나 이른바 급변사태가 생겨 붕괴하는 경우인데, 그것도 국제환경 상 통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북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더 깊이 들어가 통일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다른 길은 남북이 수교하여 일반국가관게로 전환하는 것이다.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각각의 방위동맹 인정 등이 내용이 될 것이다.
휴전선이 국경선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차가운 국경선에서 점차 따뜻한 국경선으로 되는 것이다. 남북교류도 체제의 위협없이 더욱 활발하게 될 것이다.
잘 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남북 경제공동체’도 현실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
지금의 휴전협정 체제에서는 이른바 passing korea 가 언제든지 일어날 소지가 크다.
분단의 고착화라든지 종래의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 국가로 민족의 생명력과 번영을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아야 한다.
미일중러를 설득하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한국 내의 좌우 보혁 의 여러 입장들을 설득해야 한다.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남방삼각관계와 북방삼각관계의 대립의 첨병으로서 불안정하고 위험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 부담스럽고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 대륙과 해양,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연결의 중심 역할을 주체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외세에 의한 분단의 고착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주체적 선택으로 두 국가를 운영해 보자는 것이다.
얼마든지 중심교역국가로서의 위상을 발휘할 수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라!
사드를 둘러 싼 갈등은 ‘종기’에 불과하다.
이제 근본을 해결해야 한다.
미일중은 설득의 대상이다.
반미나 반일, 반중으로 나가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빅카드(남북수교에 이은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북핵해법)를 들고, 주위 강대국들을 상대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움직이기 바란다.
중심교역국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선진복지국가라는 꿈을 그려보자.
언젠가는 남북인민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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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햇살이...
아침 일찍 기차를 탄다.
DMZ 평화동산에 가는 길이다.
지리산정치학교 여름 '깊은 연찬'이 오늘 부터 2박3일 열린다.
내일이 6.25다.
DMZ에서 생명과 평화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향한 정치강령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시기와 장소 등이 여러 감회를 부른다.
3 comments
임경환
조심히 다녀오세요. 선생님
Reply2 w
Namgok Lee
임경환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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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문적토대ᆞ화쟁ᆞ중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절충적ᆞ타협적 통합이나 화해'를  하자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 길이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며, 따라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참으로 거칠지만 중도를 향하여 나아온 과정이었다.
전쟁과 혁명의 폭풍을 거치면서...
엄청난 인민의 희생 위에서...
민주주의는 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  중도를 찾아갈수 있게 하는 인류 역사의 집적(모여 쌓임)이다.
이제 인민의 집단적 지혜로 평화롭게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해방이후의 우리 역사만 하더라도 대단히 거칠게 '중도'를 향해  나아온 과정이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논리'와 '정서'에는 이 거침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화쟁'이나 '중도'를 이야기하면,
양방향에서 거친(?) 거부감과 만난다.
그러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의지로 거칠지 않게 참된 중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는 거칠게라도 나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런 방식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화쟁'이나 '중도'를 말하는 것이 참으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오해ᆞ비난ᆞ비아냥을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할 수 있지만, 그 길이 평화와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원효는 화쟁의 방법으로 '비동비이이설(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말한다)'
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진실이나 사실에 대한 인간의 인식능력은  크게 장님의 비유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뇌과학을 비롯한 과학의 성과에 뒷받침되는 이제는 평범한 상식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개인이나 사회문제로 돌아오면 아직도 '내(우리)  생각이 진실이다'라는 '단정'이 우세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원체 오랫 동안 '단정'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이것을 과학적태도로 바꾸자는 것이 우리가 우리가 세우고 싶어하는 '인문적 토대'다.
원효처럼 '전적으로 옳다고 하지 않으니까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지 않으니까 정을 해치지  않는다'는 태도를 길러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난마처럼 얽힌  현실을 타개하여 위대한 민족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원효의 시대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진 조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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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오랜(50년 가까운) 벗님들과 만났다.
최병규 선생과 허훈순 선생.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세상 사는 오묘함을 느낀다.
찰라찰라 이어지는 전생과 후생.
허 선생은 익산 오산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최 선생은  카이스트 교수 정년 퇴직한 이후  7년째  이민자 엄마와 아이들 중등 교육에 기쁘게 헌신하고 있다.
이민자 후예들의 소외문제를  진지하게 염려하는 그의 실천에 깊게 공감한다.
우리공동체가 머잖아 직면할 가장 중요한 분야일  것이다.
 그의 진실함과 성실성 그리고 철두철미함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덕분에 냉장고도 가득 찼지만, 옛 정으로 즐거운 하루였다.
요즘은 내가 안내하는 코스가 금산사다.
어제 여러 질문들이 있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요즘 검색 기능 때문에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ㅎㅎ

2022/05/07

Namgok Lee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생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가장 핵심적인 운동

 Namgok Lee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생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가장 핵심적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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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6월에 사회적 경제와 협동 운동의 이야기 마당에 초대를 받아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의 인문적 토대’라는 주제를 준비하면서 서론으로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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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생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가장 핵심적인 운동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여(이윤동기와 경쟁에 의한 생산력)와 그 폐단(소외, 양극화, 소유와 소비 중심의 물신 숭배) 그리고 그 폐단을 자본주의의 단절로 해결하려 했던 시도(국가 사회주의)의 실패 등을 거치며, 협동운동은 새로운 역사적 위상을 갖게 됩니다.

사회적 경제도 자본주의의 비정한 세계로부터 인정이 흐르는 세상으로 진화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영역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영역의 진보는 세상을 진보시키는 아주 중요한 거점으로 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동물계로부터 그 지적능력과 자유 욕구로 자신을 구별하면서 지구생태계의 최상위 존재로 되었습니다.

그 자유를 향한 여정은 결국 행복(기쁨)을 확장하는 것인데,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은 길들을 거칩니다.

첫 째는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물질적 자유입니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은 이 분야에서 가장 혁혁한 성과를 달성하였습니다.

둘 째는 사람들 사이에 침범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와 규범을 갖추는 것입니다.

사회적 자유입니다.

이 분야도 꾸준히 진화하여 왔습니다.

성별, 계급, 가족, 인종(피부색), 국가, 민족, 지역 등에 의한 집단적 침범과 개인과 집단 간의 침범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 모든 침범의 가장 밑바탕에 있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가장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근대 민주주의 혁명으로 알려진 영국 미국이나 프랑스의 혁명들에서도 여성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뉴질랜드(1893) 오스트레일리아(1902)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3) 등이 시작입니다.

21세기의 페미니즘은 인류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우는 대단히 선진적인 것 같지만,  1973년까지 계속돠 백호(白濠)주의라는 인종 차별 정책이 190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근래 수백년 간에 걸쳐 인류라는 종(種)의 자연에 대한 침범이 가속화되어 그 결과 인류 스스로 존속이 물어지는 위기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류라는 종(種) 안에서의 자유 확대와 생태계 안에서 조화라는 두 개의 목표가 하나로 되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마침내 그 생산력 수준이 타자를 침범하지 않아도 될 정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생산이 가능해진 것이 이미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작동 원리가 타자에 대한 침범과 자연에 대한 침범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적 범위에서 양극화나 풍요 속의 빈곤, 물신의 지배, 차가운 이기주의 등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기후 위기 등 생태적 재앙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과학기술면에서 그 행위능력(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켰지만, 인간의 가치체계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면에서는 그다지 진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의 괴리가 낳고 있는 결과가 ‘핵전쟁’  ‘기후위기’에 의한 인류절멸의 위기나 고도의 과학기술을 장착한 디스토피아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자유의 확장이 가장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테마가 되는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인 관념계 안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산력이나 제도를 초월하여 이미 인류의 가장 선구적인 사람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특히 2500여년전 축의 시대에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의식의 진화’입니다.

핵심은 ‘자기중심성’의 벽을 넘어서 자유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침범’을 부끄러워하고 더 나아가 ‘양보 하고 싶어지는' 의식의 진화입니다.

숭고지향성은 인간의 제2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 가치를 더욱 신장하고 보편화하게 되면 물신의 지배라는 전도된 가치관에서 벗어나 ‘단순소박한 삶의 풍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아름다운 미래입니다.

민주주의도 더욱 발전해 진정으로 ‘민(民)’이 ‘주(主)’가 되어, 아름다운 질서의 무정부(無政府)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허황한 꿈이 아닙니다. 이미 그를 위한 물적 토대와 상당히 진척한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21세기의 ‘인민운동’은 바로 인민이 이러한 의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입니다.

협동운동이나 사회적 경제, 자치와 자율을 추구하는 지역 운동이나 마을 운동, 차가운 각자도생의 개인주의를 넘어 따뜻한 인정이 흐르는 공동체 운동 들은 21세기 인민운동과 민주운동의 선두 부분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은 동료들과의 사이좋음으로 일터가 즐겁고, 그래서 각자가 자기가 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기뻐서 생산성이 좋아지는 운동이고 조직입니다.

말하자면 ‘생산성(물질)⇄행복(정신)’으로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동력입니다. 

이것이 문명전환에 협동운동이 기여하는 역할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산성(물질)⇄행복(정신)’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부터 본론이 되겠습니다.

2022/05/04

연찬문화연구소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Daum 카페

연찬과생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남곡추천 
13.05.18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필부지용 - 나무위키
11 Jan 2022 —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함부로 부리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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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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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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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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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
나와 같은 인문운동가에겐 고전(古典)이야말로 중요한 인문운동의 도구다.
고전 가운데 가장 신뢰할만한 것은 고등종교의 가르침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보며, 민주주의의 생활화나 새로운 시민운동 그리고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들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생각한다.
원자화된 차가운 개인주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 결코 과거의 공동체가 서 있던 집단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실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낀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집단주의에서는 ‘나’라는 개인이 집단 속에 묻혀 있다.
이 개인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 개인이 해방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환호하지만, 얼마 안가 서로 부딪치는 차가운 이기주의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일체성(一體性)의 자각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사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자각을 통과해서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는데,
이 단계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을 뭐라고 부를까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공인주의(公人主義)라고 부르는게 어떨까 생각한다.
공인(公人)이란 일체성(一體性)을 자각한 개인을 말한다.
사실은 자각하던 안하던 모든 사람은 공인(公人)이지만,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에 임하는 현실적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예컨대 공인의 자각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하면, 저항성을 넘어 책임성과 관용 그리고 공공성과 세계성을 가지게 된다.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이다.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 실제적인 민주적 운영의 능력 등이 바로 이 공인(公人)의 자각이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공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지금의 역사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전에 썼던 글이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에서 발췌>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 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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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30

Namgok Lee 박석 교수의 뇌중심 명상

(2) Facebook:

박 석 교수의 명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5월에는 뇌중심편을 하려고 하는데, 그 설명을 들으면서 아마 가장 어려운 코스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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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뇌의 각 부분과 기능에 대해서, 그 위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할 것 같다.
뇌과학의 최신 성과를 명상과 관련시킨 박 교수의 천재성이 놀랍다.
그리고 평소 생각하던 내용들이 이렇게 만나지는구나 하는 기쁨도 있지만, 실제로 이 편의 명상은 우선 사전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몇 문장을 소개한다.

‘뇌 과학자들은 우리가 눈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뇌가 구성한 틀에 비추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참으로 맞는 이야기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인간의 뇌의 틀에 비쳐서 나타난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우리와는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고 개미나 잠자리는 더욱 다르게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의식 수준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도 각각의 수준에 맞게끔 세상을 바라본다.
여기서 사물들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은 사물의 궁극적인 실제 모습을 보자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필요한 긴장이나 고정 관념으로 시각을 왜곡시키지 말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자는 뜻이다. 평소에 바로 보이는 사물들도 불필요한 긴장으로 인해 마음이 잔뜩 긴장되어 있거나 편견이나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에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명상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바라보기 명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폐단을 벗어던지고 사물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런 수련법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들 수련법은 자아를 느끼는 뇌 영역들을 비활성화시켜서 무아와 무한을 체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자아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지만, 평소 우리가 잘 자각하지 못하는 그 영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자아를 좀 더 확실하게 자각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정체를 모르는 대상은 통제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지만, 그 정체를 알게 되면 점차 통제와 조절의 길이 열린다. 예컨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정체를 모르면 그것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면 아름답게 꽃피울 수도 있고 제대로 버릴 수도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감정은 조절하기가 힘들지만, 그 출처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감정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 자아도 그렇다. 그 정체를 제대로 알 때 잘 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확장할 수 있다.’
바라보기 명상에서는 무념무상을 강조하지 않는다.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명상만으로는 되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사고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사고력과 판단력을 담당하는 영역은 이마앞엽이다. 이 부분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 부분이 지나치게 비활성화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개념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볼 때 정말 기본적인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마엽의 본래 기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유가 아니라 운동이다. 물론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운동과 어떤 실천적인 행동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후자는 훨씬 더 강한 의지의 힘을 요구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생각을 아무리 깊게 넓게 해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과 말은 빠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과 말이 많은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잘 옮기는 사람이 더욱 성숙한 인간이다. 공자는 항상 제자들에게 말보다는 행동을 우선시하라고 가르쳤고, 말은 어눌해도 행동이 민첩한 제자를 칭찬했다. 지금의 시대는 생각과 말이 실천적 행동보다 너무 앞서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은 결국 실천적 행동을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새겨야 한다.’
다음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뇌는 우리 마음을 만들어내는 기관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기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崔明淑, 박길수 and 1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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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호
    잘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어찌 되나요? 꼭 좀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