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7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책을 읽으며...

처음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게 하는 두려움을 동반한 묘한 궁금증을 안겨주며 시작되는 이야기의 신부로 신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신자와 사제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페레이라 신부가 ‘구멍매달기’라는 고문에 못이겨 배교를 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는 당신들의 존경해마지 않던, 그 인자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에 가득찼던 스승 신부님의 배교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고에 자신들의 눈으로확인하고 오겠다는 목적과 함께 일본 선교를 자청하여 들어간다. 시기적으로 워낙 위험하였으나 젊은신부들의 확고한 신념과 굳건한 믿음아래 결국 그들의 일본 선교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면서 일본 선교에 나선 로드리고 신부의 보고서를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 되어간다.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라는 아주 특이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일본 열도로 무사히 잠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일본에 대한, 일본에서의 보고 느끼는 자신의 상황과 일본 신자들에 대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교황청에 올리게 된다.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이어진 보고서라책의 3분의 1을 읽을 때까지는 나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소설’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만약 책날개에 붙어있는, 엔도 슈사쿠가 소설가라는 그에 대한 소개말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에필로그를 읽을 때까지 보고서인줄 알고 읽었을 터였다.



‘침묵’을 읽기 시작하며 나를 치고 들어온 감정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절절한 사랑에 대한 고통이었다. 



그분들은 기도는 커녕 성호도 제대로 그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리워했는데, 정작 박해도 받지 않으며 마음껏 ‘당신을 사랑한다’고 세상에 외칠 수 있는이 평화로운 세상에 태어난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건가..? 하는 부끄러운 죄책감에서 오는 아픔이 가슴 깊은 한 켠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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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들 중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은 의아스럽게도 바로 일본인 기치지로였다. 한없이 교활하고, 때마다 배신하고 배교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부지를 위해 로드리고 신부까지 신고하면서도 끝까지 신부 곁을 떠나지 못하고 고해성사를 해달라며 울부짖는 기치지로. 그의 비굴하면서도 ‘신뢰’란 단어는 사전에 없는 듯 제몸하나 살리고자 배신행위를 우습게하는 기치지로서도그는 끝까지 신부 곁에서 맴돌며 그를 챙겨도 주고, 자신도 카톨릭 신자라고 잡아가라고 외쳐대면서도 고문이 다가올라치면 두 번 생각 안하고 성화를 밟고 배교하고 풀려나고 그리고는 또 신부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구하는 거머리 같다 못해 구더기 같은 기치지로.. 읽으면서 더러운 구더기 같은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과연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치지로 역시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밝고 활발하고 환영받는 신자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한탄대로 그는 약하게 태어났고, 그것이 그의 십자가이며, 그래서 늘 배교하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과 그것에 대한 양심 속에 그는 늘 괴로워하며 로드리고 신부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비겁한 나약함에 고해성사를 구한다.



기치지로, 처음엔 그를 보며 어떻게 저럴수가 있을까? 싶었지만.. 점점 이야기의 흐름 속에 기치지로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진저리가 처졌다. 내가 필요할 때는 ‘하느님 사랑해요 도와주세요’ 절절한 외침으로 찾으면서 정작 내가 조금 편해지면 외면하고 마치 나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듯 그렇게 내 삶 속에 푹 빠져 지내곤 한다. 성화를 밟는 배교는 아니나, 얼마나 많은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가..



“밟아라..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며 우리보다 우리의 고통을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며 눈물이 흘렀다. 피눈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그렇게 짓밟음으로써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상기시켜드려야 했을까...? 신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밟으세요 밟아도 좋아요” 라고 외치는 로드리고 신부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 예수님 마음이 이러셨겠지...



매 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잘 이겨낸 로드리고 신부.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신자들을 보며, 예수님이 만약 당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간다면 어떡하셨을까



이것은 내 자신을 위한 신앙인가..?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일으키는 신부의 고뇌를 보며, 나 역시 그 고뇌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셨다면로 인해 아무 죄없이 죽어가는 이 순진한 신자들을 보며 ‘당신의 아버지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순교하시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차라리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위해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너희를 위해 이 세상에 죽으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자꾸만귓가에서 들리는 듯 하다..

침묵하는 예수님을 흔들어대며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셔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계셔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62)



로드리고의 신부의 절규가 가슴에 소낙비되어 내린다.



겉으로 드러난 ‘배교’라는 그림은 비슷했을지 모르나. 어쩜 로드리고 신부가 선택한 사랑의 실천은 옳은 선택이 아녔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서 계속 맴돈다. 하느님만은 로드리고 신부의 당신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당신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사랑하는 그 진실된 사랑을 아실 것이라는 마음생떼를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격렬하게 질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P294)



로드리고 신부의 고백이 내 가슴에 메아리되어 남는다. 신부님의 결정이 옳으셨다고, 하느님께서는아신다고,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거라고... 우리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내가 그분 옆에 있었다면 신부님의 손을 꼬옥 잡아드리고 싶었다...



책을 덮으며...

비록 로드리고 신부는 엔도 슈사쿠가 지어낸 인물이긴 하지만. 일본을 선교하러 간 많은 사제들리고 수많은 일본 신자들이 어떻게 고문을 당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며 순교를 했는지는 하임언니의 일본 순례여행 후기를 읽으며 이미 알고 있었던 터, 하임 언니가 왜 그렇게 ‘나가사키’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젖이 아파오는지. 하임 언니가 왜 그렇게 나가사키와 사랑에 빠지셨는지알 것만 같았다. 일본 순례 여행을 다녀오시며 지옥이 따로 없었다며 그렇게 절절한 느낌을 전해주시던 언니.. 소설가 한수산씨가 “나가사키는 역사와 로망을 안고 오늘도 아름답다. 보랏빛으로

2010.04.22 10:24

엔도 슈사쿠의 <침묵>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침묵(보급판)(믿음의글들9)  상세보기
지은이 엔도 슈사쿠
출판사홍성사
출간일 200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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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었다.  17세기 서양과 무역으로 재미를 본 일본 권력자들이 처음엔 기독교의 선교 자체에 호의적이었으나, 곧 정치적이나 경제적 목적에 휘둘려, 무자비한 기독교 박해를 시행한다.  파송된 신부들을 비롯해 수많은 일본의 카톨릭 신도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끝에 처형되고, 남겨진 이들은 배교를 종용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루투칼에서 파송된 덕망높고 신심깊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영광된 순교를 거부하고 고문의 위협에 눌려 배교라는 치욕스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로마교황청에 접수된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제명되고, 이런 불명예스런 배교를 저질렀다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된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 로드리고는 일본에 입국, 비밀리에 신도들을 만나다 결국 체포되어 투옥되고, 우여곡절끝에 완전한 일본인으로 변신한 스승 페레이라와 옥중에서 재회하게 되는데, 교회와 하나님께 영광인 아름다운 순교를 거부하고,  구차하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배교를 선택한 그는, 열심히 자신의 배교 행위를 로드리고 제자에게 설득하려 든다. 강한 신앙심으로 순교를 결심한 로드리고는 흔들리는데.....결국 로드리고 신부도 페레이라의 뒤를 이어, 성화를 밟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배신하는 배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들은 신부로서 명예로운 죽음인 순교를 포기하고,  배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이 과정에서 종교와 세속의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부를 통해, 무엇을 보려주려 하는걸까?

그리 긴 분량이 아니지만, 이 소설은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의 무게가 어느 작품 못지 않는 문제작이다.  작가는 로드리고 신부를 통해 작품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눈앞에서 일본인 신도들이 권력자들의 잔인한 폭력앞에 쓰러져간다.  이천년전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신도들이 죽어간다. 그들은 사실, 신부인 자신들이 가르쳐준 성경과 교리를 지키고자 한 것 밖에 죄가 없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에게 신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짧게 기도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목이 잘리거나 구멍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바닷가에 매달려 수장되고 있다. 그들의 처형뒤에 무슨일이 있는가?  세상은 파리의 날개짓 조차 들을 수 있을만큼 조용하고, 한가하고, 평화롭다.  그들을 처형한 무사들은 희희낙낙하며,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이 거룩한 순교앞에서 세상은 어찌 이렇게도 거룩하지 못할까?  그리고 대체 하나님은 왜 역사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내리지 못하는 걸까?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왜 `침묵'만을 지키시는가?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예루살렘의 밤, 한 사나이의 운명에 아무 관심도 없이 불에 손만 쬐고 있던 몇 사람의 모습. 그들처럼 이 파수꾼들도, 인간이란 이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그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지껄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엔도 슈사쿠,<침묵>,p.136

사실, 신부들은 아름다운 순교로 죽음을 선택했어야 맞을것도 같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은 일본인 신도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나 페레이라는 배교하고 만다. 언뜻보기에 이것은 모순같다.  이노우에라는 최고권력자는 로드리고 신부와 옥중에서 일본사회와 신앙에 대한 논쟁을 통해, 일본은 문화적 특수성으로 타종교가 뿌리내릴 수 없는 늪지대와 같다고 비유한다. 어떤 종교건, 일본으로 건너와 자체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한체로 포교될 수 없다. 그들이 믿는것은 신부가 가르쳐준 하나님이 아니라, 일본인의 다신사상속에서 섬김을 받고 있는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부에게 표면상의 배교를 종용한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품고 있건 상관없이, 표면상의 배교, 즉 발로 성화를 밟고 지나가고 말로 배교한다고 선포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노우에의 주장은 정치권력자로서 통치의 수단으로 기독교의 사상이 맞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의 포교를 허락하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신부는 자신의 배교가 신도들의 목숨과 연계돼 있다는 현실적 딜레마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순교는 교회 자체의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의 신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실제적으로 신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저 신부의 입장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또 어떤 모습을 로드리고에게 바랐을까?  하나님의 침묵가운데서 신부는 결국 배교를 선택한다.  성직도, 신앙도, 그리고 그렇게도 사랑했던 하나님의 얼굴조차 밟고 지나간다. 이 처절한 선택의 고뇌와 행위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일본인 특유의 절제된 문장력으로 작가 엔도는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은 지상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이 가리키는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 신부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침묵을 깨시고 이 지상에 그 힘으로 역사하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가 품고 있을만한 신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앞에서도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있는 모든 심적,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마지막을 장엄히 마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 로드리고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구한 신도들의 죽음앞에 하나님의 침묵을 질타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요구의 부당함을 신학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그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신부나 신자였다면, 과연 그 이론이 유용할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부로서 죽어가는 신도들을 도울 방법은 오직 자신의 배교 행위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지금 그 순간 신도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후의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화를 밟고 또 배교행위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행위를 이제 제자인 로드리고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수꾼이 견디다 못해 몽둥이를 쥔 채 밖으로 나오자 기치지로는 도망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p.177

성직도 잃고 신앙도 잃었지만, 로드리고 신부는 결코 마음속의 하나님은 잃지 않았다. 교황청의 파문조차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일본인 신도들이나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기독교가 공인된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자신이나 배교를 선택한 기지치로라는 사람이나 모두, 아름다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로드리고 신부는 교회에서 파문당한것이지만, 하나님께 파문당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하나님의 침묵의 바른 뜻을 해명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가 힘들때, 우리가 시련에 놓였을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능력있을때, 우리가 행복할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신앙에 불타다가도 때로 신앙을 잃기도 하며, 다시 하나님앞에 볼낯을 붉히며 되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죄짓고, 또 죄를 회개하며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며, 사랑한다 말해놓고 배신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비굴하고, 교만하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며,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에게 침뱉고 모욕하는 순간에도, 그에게 영광돌린 순간처럼 그와 함께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이고, 그분의 성품이다. 이 소설은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며 자비로우심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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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침묵」 | 가톨릭평화신문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4) 엔도 슈사쿠의 「침묵」 | 가톨릭평화신문



엔도 슈사쿠의 「침묵」
불러도 대답없는 주님, 눈물 흘리고 계셨네
2009. 03. 29발행 [1012호]
홈 > 문화출판 >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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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없는 주님, 눈물 흘리고 계셨네


▲ 김윤성(가브리엘) 시인이 우리말로 옮겨 바오로딸에서 출간한 엔도 슈사쿠의 「침묵」 한국판.

▲ 정길연(베트라, 소설가)

   정길연(베트라, 소설가)

   고백하면,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나는 종교주의자가 아닙니다, 라고 대꾸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지구상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독선과 야만, 종교가 야기한 모든 갈등과 적대감에 대체로 아전인수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종교가 외적 성장에 치우쳐 지나치게 화려해지고 타성적이 돼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 나가던 동안 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내 믿음을 믿지 못했다. 순정하지 않았고,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습관적 출석과 입에 밴 기도문 암송으로 외형상 착실하게 종교적 행위를 했을 뿐이었다. 물론 내 영혼이 허약한 탓이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고백하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는 오히려 더 꾸준히, 더 집중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는 듯했다. 회의하고 투정하고 고꾸라지고 일어나면서, 말씀 안에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음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면서, 비록 종교주의자는 아니지만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하느님은 존재한다고 떠듬거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완전한 승복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믿음에 대해 내놓고 말하기가 불편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악몽 같은 현실을 떠올리면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에 의해 제 땅 제 집에서 쫓겨나는 난민들, 핍박받는 하층민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맨발로 쓰레기더미를 뒤져야 하는 어린아이들……. 이 불공평하고 절망적인 세계를 납득할 수 없어서다.

 하느님의 손이 절대적으로 절실한 이 순간에도 어떻게 아무런 메시지가 없을 수 있는가?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을 내버려 두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시 찾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질문과 새롭게 맞닥뜨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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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작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 지방의 가톨릭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포르투칼 신부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내밀한 고뇌와 번민을 다룬 소설이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문을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밀항한 로돌리코 신부 일행은 교활하고 비굴한 인물 기치지로와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얽힌다. 동료 신부 가르페가 순교한 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듯이 기치지로 또한 로돌리코를 팔아넘기지만,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의 주변을 맴돌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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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던 로돌리코를 후미에(성화판을 발로 밟음으로써 배교를 증명하는 행위)로 이끈 건 옥사 너머로 들려오던 코 고는 소리의 진실이었다.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 직전에 들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나도 저 소리를 들었다.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말이다."

 그 말이 그치자 다시금 코 고는 소리가 높게 낮게 귀에 들려 왔다. 아니, 그것은 이미 코 고는 소리가 아니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지쳐 떨어진 숨이 끊길 듯 끊길 듯한 신음소리라는 것이 신부에게도 지금은 뚜렷이 느껴졌다'(195쪽).

 결국 로돌리코 신부 또한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성화판에 발을 올리고 만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눠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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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배교자 바오로, 오카다 산우에몬이 된 로돌리코가 고백성사를 애원하는 기치지로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경멸하고 저주했던 기치지로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며, 그조차 용서하고 품는 것이 예수의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성직자들은 이 모독적인 행위를 몹시 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226-227쪽).

 교회법으로 보자면,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후미에는 배교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 종교적 불명예는 예수 사랑이라는 통찰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처절하고도 숭고한 자기희생, 또 다른 의미의 순교다. 스스로 아름답고 자랑스럽고자 하는 순교는 종교적 명예심에 붙들린 제스처에 불과하다.

 하느님은 이 참혹한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

 「침묵」에서도 되풀이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부당한 폭력 앞에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또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나 가난으로 비참함을 느낄 때마다 하늘에다 종주먹을 들이대듯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가슴이 먹먹할 때, 그 먹먹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짓누른 채 차오르는 설움을 토해낼 때, 모멸감과 무력감에 치를 떨 때에야 비로소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지 않는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앞에 현현하지도, 직접 나서서 어떤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신의 자비로 고통을 면할 방법은 없다.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이다. 껴안아 내 뜨거움으로 녹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나 해결책을 듣지 못할 때 버릇처럼 하느님이 침묵한다고 절규한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페레이라와 로돌리코가 배교 직전에 깨닫게 된 것처럼, 침묵하고 계시는 게 아니라 함께 괴로워하고 계시는가?…라고.

 정녕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라면, 고통의 눈물은 닦아주시리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비로소 평화를 허락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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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열두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3년 게이오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50년 프랑스 리옹대학으로 건너가 현대 가톨릭문학을 공부하던 중 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반만에 귀국해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종교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묵직한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 걸로 알려졌으나, 의외로 밝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일상적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산문으로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가톨릭문학과 순수문학을 잘 아우른 격조 있는 작품들로 양쪽에서 모두 성공적 평가를 받은 행복한 작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 「침묵」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백인」 「여자의 일생」 「지금은 사랑할 때」 등 작품을 남겼다.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됐다.

 최근에는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등 영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2010년쯤 개봉 예정으로 「침묵」의 영화화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Silence: A Novel (Picador Modern Classics) Shusaku Endo, William Johnston, Martin Scorsese: Books

Amazon.com: Silence: A Novel (Picador Modern Classics) (9781250082275): Shusaku Endo, William Johnston, Martin Scorsese: Books

Silence: A Novel (Picador Modern Classics) Paperback – January 10, 2017

by Shusaku Endo  (Author), William Johnston (Translator), & 1 more

4.5 out of 5 stars    232 customer re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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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

A Novel of Undeniable Power

Bympon June 17, 2001

Format: Paperback

"Silence" is an excellent novel. Comparisons between Shusaku Endo and British novelist Graham Greene are apt, as both deal with the relationships that develop between individuals, Catholicism, and the world. "Silence" is an extremely intense historical novel. While knowledge of Catholicism may be helpful for some of the situations and terminology, the issues of doubt and faith, in God and in people, are readily available to any reader.



"Silence" is set in sixteenth century Japan, where Portuguese missionaries must contend with traders from rival European nations and the persecution of Christians by Japanese feudal lords. The feudal lords want to drive Christianity out of Japan, and try to do so by torturing priests into apostasy, denying their faith. This is done symbolically by stepping on a "fumie," a Christian image, like a picture of Mary or a crucifix. Two Portuguese priests, Sebastian Rodrigues and Francis Garrpe, make a dangerous journey to Japan, both to locate and comfort Japanese converts, and to discover the truth about a supposed apostate priest, Ferreira.



"Silence" makes use of several narrative approaches, third person omniscient at the beginning and ending, while the middle portion of the novel is written in the style of a diary and letters from Rodrigues' point of view. The main protagonist, Rodrigues must deal with the validity of his faith, the propriety of the Christian mission in Japan, the suffering of Japanese converts, and the silence of God in the midst of so much hardship.

Rodrigues' trials are exacerbated by his physical and cultural isolation, as he and Garrpe are forced to conceal themselves in a small hut dug out of the side of a mountain near Nagasaki. Culturally, he must confront being in a nation whose language and customs are mostly alien and threatening to him. The most perplexing external difficulty Rodrigues faces is from an ambiguously motivated local named Kichijiro. Rodrigues' relationship with Kichijiro forces the priest into his deepest and most troubling reflections on faith and the Bible.

"Silence" was an absolutely fascinating read. The historical and cultural milieus of the novel are complicated by Endo's own background. Endo's perspective on Christianity and Catholicism in particular, as a Japanese writer, and writing about Japanese history forced me, at least, as a Westerner, to look at issues of faith and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a radically different perspective than even the foreign-based novels of Graham Greene that I have read, like "The Heart of the Matter" or "The Power and the Glory," the latter of which is thematically very similar to Endo's "Silence". Overall, a tremendous and powerful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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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

A marvelous, soul-wrenching work

BySnickerdoodleon October 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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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ence" towers above what passes for most religious fiction for its evocative and unflinching treatment of faith and suffering.

While the theology of pain has been touched on in much of Western literature, most of it recently seems either an apology for God's permitting suffering, rants against God for permitting suffering, or pep talks for believers going through suffering. Philip Yancey has provided a great service on the issue in his books on pain, but even they take a somewhat detached view. By contrast, Shusako Endo seems to write from within the terrible grasp of suffering in "Silence", one of the most moving novels I have ever read.

The plot centers around a band of Portugese priests who land in Japan in the 1600's to spread the gospel on a culturally and spiritually unfertile soil. Their theology is eventually challenged in ways that only persecution and suffering can do: can I carry on here? should I? can I forgive my tormentors? should I? Ultimately, they wrestle with public apostasy and with whether or not they could ever be forgiven if they commit such an act.

This is not a feel-good book by any stretch. It deals with failure, defeat, abandonment, pain, and the 'silence' of God through it all. But at the same time it opens the window wide on what the Man of Sorrows went through on our behalf and on how we need God's grace not because of our strength but because of our weakness. Highly recomm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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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out of 5 stars

The blood of martyrs is met with silence.

ByPeter S. Bradleyon July 3, 2015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I am conflicted in my assessment and understanding of this book. The book is elegantly written. The prose and story are somber and direct. The setting is rich and I think it offers some insight into the relevant society and culture. I am not sure, however, what the author intended me to get out of the book or whether what I got out of the book is "right" or my projection. I am going to describe the events of the story, so if you are not interested in "spoilers" do not read on.



This book is set in Japan circa 1630, well into the period when Japan had outlawed and cruelly repressed Christianity. Christianity had been introduced into Japan around 1550 by Portuguese Jesuits, where it had met with success. By the late 16th century, it is estimated that 400,000 Japanese had converted; some conversions were shallow and superficial, but others were deep and authentic, deep enough for a number of Japanese Christians to welcome martyrdom, and for others to go underground as "Hidden Christians" (Kakure Kurishitan) where they would keep a strange and mutated form of Christianity alive for 300 years. The survival of even a mutated form of Christianity in Japan is a story worth telling in light of the horrible repression that was visited upon the Kakure Kurishitan community, repressions involving stepping on the "fumi" - an image of Christ - and horrible tortures designed to force Christians to renounce Christianity.



The story opens with a Jesuit priest Sebastio Rodriguez and two other Jesuits leaving Portugal to travel to Japan to investigate the truth behind the news that their mentor, Cristóvão Ferreira, Cristóvão Ferreira, had been tortured into apostatizing. The opening part of the book is told in the form of letters home by Rodriguez as he endures the difficulty of traveling to the Orient, being told by his superiors that Japan has been closed to missionary activity, and then being permitted to travel to Japan with his one companion, Garrpe, who is not too ill to travel. Rodriguez and Garrpe enter Japan with the assistance of a loathsome, cowardly, lazy, drunk renegade Japanese person named Kichijiro, who is obviously a Christian, but who may have apostatized. Kichijiro denies being a Christian but leads the Jesuits to a Christian village.



The story turns into a first person contemporary account of how Rodriguez and Garrpe are taken in by the village, who are delighted to have a priest hear their confessions. Their mobility is restricted, as they have to stay within a hut for months. The Japanese Christians have organized themselves into a society where the "Jiisama" baptizes and the "Tossama" teaches the prayers and keeps the Christian calendar. Rodriguez and Garrpe split up and Rodriguez travels to another village with Kichijiro. After some time in that village, Rodriguez returns to the village, but the village is betrayed and the local leaders do not apostatize but are tied to stakes in the ocean until they drown. Rodriguez goes on the run with Kichijiro, until he is betrayed by Kichijiro and captured by the governor of the province, a former Christian named Inoue.



At this point, the story shifts from the first person narrative to a third person narrative. The shift is subtle; I didn't notice until I reread the story for this review. Clearly, we are being distanced from an immediacy with the priest in the latter part of the story for narrative effect.



Inoue's goal is not to kill the priest, but to cause him to apostatize, so that other Christians will lose faith and return to traditional Japanese spirituality. Rodriguez has several discussions with Inoue about the nature of truth and the ability of Japan to absorb the foreign spirituality of Christianity. I am not sure if Inoue is the foil for the Shusaku Endo's view of Japan and Christianity; Inoue argues that "Japan is a swamp" and that the roots of Christianity have been cut and that Japan will distort and corrupt Christianity. To a certain extent, this was historically correct, as the Kakure Kurishitan culture mutated Christian belief into an entirely new form that although somewhat recognizable to Catholic Christians is a caricature of belief and doctrine. (See Beginning of Heaven and Earth: The Sacred Book of Japan's Hidden Christians (Nanzan Library of Asian Religion & Culture).)



On the other hand, Inoue's argument implies that (a) Japan would never have accepted Christianity and (b) a true form of Christianity could not have endured even if there had not been Japanese persecution. This seems obviously wrong; Kakure Kurishitan communities survived for 300 years, there must have been something in Christianity attractive and congenial to Japanese culture that allowed it to endure under such horrible circumstances.



What that factor might have been is alluded to in passing by Endo.



Rodriguez notes early on:



"Yet the magistrate of Nagasaki exacts from them an exceedingly harsh revenue. I tell you the truth for a long, long time these farmers have worked like horses and cattle; and like horses and cattle they have died. The reason our religion has penetrated this territory like water lowing into dry earth is that it has given to this group of people a human warmth they never previously knew. For the first time they have met men who treated them like human beings. It was the human kindness and charity of the fathers that touched their hearts." (p. 32.)



This rings true with the history. (See In Search of Japan's Hidden Christians: A Story of Suppression, Secrecy and Survival.) And, of course, there was also the promise of a paradise in the next world.



Rodriguez responds with the Western notion that truth is universal, and to this there is no response.



Eventually, the Japanese magistrate hits upon what seems to be a tried and true technique for obtaining the apostasy of priests; he threatens to kill Japanese Christians, and does so when there is any hesitation, all the while telling the priest that this is the priest's fault.



The first time this happens, people known to Rodriguez are wrapped in mats and thrown into the ocean to drown. Father Garrpe rushes into the ocean to save them and also drowns.



The second time, Rodriguez is left in a room where he hears snoring, except the snoring is not snoring; it is the moan of pain of Christians who, although they have already apostatized, have been tied up and suspended upside down over a pit of excrement, with tiny cuts behind their ears so that they are slowly bleeding to death.



On this occasion, Rodriguez is visited by Ferreira, who has gone native, and taken the name and wife of a dead Japanese man. Ferreira explains that he also apostatized when faced with this cruel and apparently meaningless suffering, but that now he is "useful" because he translates Western books of astronomy for the governor. We also learn that Ferreira is writing a counter-apologetics text for the Japanese, although Ferreira is ashamed to mention this. Inoue also appears and advises Rodriguez that his quest is futile, Japan will never become Christian, the roots are cut, he is alone, and his prideful efforts are causing the Japanese to suffer. Rodriguez is presented with the fumi and told that stepping on it is a mere formality that need have nothing to do with his true feelings. Rodriguez has a vision where he understands that even Christ would have apostatized in those circumstances and Christ tells Rodriguez "Trample! Trample! I more than anyone know of the pain in your foot. Trample! It was to be trampled on by men that I was born into this world. It was to share men's pain that I carried my cross." This chapter concludes:



"The priest placed his foot on the fumie. Dawn broke. And far in the distance, the crock crew." (p. 171.)



Rodriguez is then given clothes and a nice place to live, although his movements are restricted. Eventually he is given the name and family of a Japanese man who has died.



The story ends with two "odd" notes. First, Kichijiro comes to Rodriguez for confession. This appears to be authentic on the part of Kichijiro. Rodriguez knows that he has been disgraced and that his priestly faculties have been removed, but since he is the only priest - apostate or not - who can do it, he hears Kichijiro's confession. Second, near the end of the story there is an interlude consisting of diary entries from a Dutch shipping clerk which imply that Ferreira is implicating the Dutch with secretly importing Catholicism into Japan. Does this mean that in some way, Ferriera is taking revenge on the Protestants who undermined the Catholic mission? But if he was a real apostate, why would he do that?



Sprinkled throughout the book is what I took to be Endo's post-modern contribution, namely, the idea that God is silent in the face of the suffering of His followers. On one level this struck me as being an entirely artificial and anachronistic injection of post-modern ideology into the story. Endo points out that there is a lot of suffering in this world; the voyage to Japan is suffering; the repression of the peasants is suffering; the torture is suffering. However, this all seems to hit Rodriguez like a ton of bricks only when he is in Japan, and he doesn't seem to have any philosophical resources to deal with it. I don't buy it. This aspect of the story reminded me of The Sparrow: A Novel (Ballantine Reader's Circle) - a science fiction story with much the same theme. The fact is that Catholicism isn't surprised by suffering; theologies of suffering, offering up suffering, joining personal suffering to that of Christ, etc., are all the bread and butter of Catholicism, particularly in this period when the suffering of the Saints was a subject of artistic flourish.



However, on a deeper level, I wonder if there isn't an answer to this question of "God's silence." Obviously, to the Japanese Christians who were being tortured, God was not silent; not only did they have their faith but their prayers for release were answered by Rodriguez's apostasy. Presumably, when Rodriguez apostatized, the victims were taken down from their torture and returned to their villages. So, God does work in mysterious ways. Further, the idea that God was silent in Japan is bizarre; the faith of the Kakure Kurishitan in the core of Christianity, however mutated, that God loves each person individually through his son, screams like a siren to anyone with ears to hear.



Further, did Rodriguez really apostatize? On his terms it seems he did since he did not get his glorious martyrdom, but on Christian terms - as Endo explains - he fulfilled the Christian commandment to love; if there is no greater love than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neighbor, then what kind of love is there in laying down one's faith and dreams? And then there is the end where Kichijiro confesses: if Rodriguez's hearing of Kichijiro's confession meant that Kichijiro was saved, that is a victory.



If the book ignores these theological aspects, then it is shallow and well-tuned to the superficial theologizing of post-modernity, which may be why Martin Scorsese is making a movie out of this book. (I do not expect anything more from Scorsese than a film that confirms his view that there really is nothing there after all.) On the other hand, if these grace notes - which exist in the barely spoken subtext of the book - are true,then there is a Catholic story here.



Now, admittedly, I am not comfortable with a theology that says that the highest form of love is apostasy or that Christ would encourage apostasy, but Catholicism is a religion that counts prudence as a virtue, and a formal apostasy out of love is not entirely imprudent.



Incidentally, there is a truth behind the story of Christovao Ferreira. The historical Ferreira (1580-1650) was appointed Vice Provincial of the Japanese Jesuits. The historical Ferreira was tortured over the excrement-filled pit and apostatized after six hours. Thereafter, he assisted in torturing other priests and breaking them physically and psychologically. Like other priests who apostatized, he was given a Japanese name and a Japanese wife (often the widow of a criminal) and he wrote an anti-Christian tract called "A Disclosure of Falsehood."



So, a Catholic is not in the position of saying that such things never happened or that there was a 100% rate of martyrdom. Some priests - in fact, in the case of Ferreira, one of the highest ranking - did apostatize. In many ways, Endo has "softened" the blow of the apostasy in this story, since Ferreira apostatizes out of horror at, and love for, his Japanese Christian flock, rather than "merely" to avoid a horrible and lonely death. (Nonetheless, one has to note the importance of psychological blackmail and the propaganda value of creating traitors even at this early date in human history.)



So, yes, this is a conflicted text, well worth pondering. One thing is for certain, if you don't want a book that is depressing or if you have a weak faith, this is not a book that you will find worthwh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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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5

"당신이 안 풀리는 건 조상신 業과 恨 때문일 수도" :사건의내막

"당신이 안 풀리는 건 조상신 業과 恨 때문일 수도" :사건의내막



"당신이 안 풀리는 건 조상신 業과 恨 때문일 수도"
[자연사상 칼럼니스트 노병한 박사의 조상영가 산책]
글/노병한(자연사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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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0/20 [11:3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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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神의 觀念波動인 靈波의 감응 따라 자손들의 운명 좌우 
자손들의 곁에서 고통받는 조상신의 존재 알리기 위해 訓罰
 

왜 나는 불행한가? 왜 나는 되는 일이 없는가? 왜 나는 불치의 병에 고통을 받고 있는가? 왜 나는 운(運)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를 하는가? 차마 산 목숨을 끊지 못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왜 나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까? 누가 나의 운명을 지배하고 좌우하는가? 한숨을 쉬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신을 둘러싼 조상신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절에 산(生者) 조상과 죽은(亡者) 조상을 찾는 이유를 아는가? 선대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를 아는가? 선대의 조상신이 자손을 돕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방해를 하기도 하는 처지와 이유를 알고나 있는가?

 
▲ 조상신들은 자손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손들의 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조상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양태로 자손들을 훈벌(訓罰)하며 다양한 고통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대의 조상신이 자손을 돕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아는가? 또 선대의 조상신이 자손을 방해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아는가? 조상신 관념파동(觀念波動)인 영파(靈波)의 감응에 따라 자손의 운명이 행복과 불행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 
영계(靈界)의 비밀을 아는가? 조상령(祖上靈)의 영파(靈波)가 어떤 작용력을 갖고 있는지 아는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그건 바로 자신의 조상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가? 조상이 생전에 지은 업(業)과 한(恨) 때문에 천당과 극락정토에 가지 못하고 자손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조상신들이 있음을 알고는 있는가?
영계(靈界)에서 고통받고 있는 조상신들은 자손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손들의 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조상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양태로 자손들을 훈벌(訓罰)하며 다양한 고통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일에 장애와 막힘이 생기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음인 것이다. 
자신이 소망하고 도모하며 추진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반드시 있음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자손은 그러함의 이유를 찾기에 이르고 결국은 자기의 조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업력(業力)에 의해 태어나서 평생 살아가면서 선업(善業)이든 악업(惡業)이든 쌓아간다. 그런데 죽은 후에는 영혼이 영계로 가서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간 업(業)의 대상인 친인척이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업력(業力)의 영파(靈波)가 작용해 행복이든 불행이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어떤 고통받는 영혼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기생충같이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증, 정신질환, 도둑질, 폭력행사, 살인 등의 나쁜 일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고통받는 영혼의 이러한 행동은 두터운 업력(業力)의 소산이기에 약(藥)이나 의술(醫術)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대상이다. 그래서 조상신에 대한 영가천도를 통해 그러한 업력을 풀어내 주어야만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절차를 바로 구병시식(救病施食)이라고 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에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인과법칙이 섭리로 윤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에 막힘이 많거나 불치병에 어려움을 겪을 경우에는 영계나 구천에서 헤매고 있는 조상영가 친인척영가 낙태아영가 등의 업장을 풀어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업장과 죄장도 함께 풀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자손을 따라다니면서 하는 일마다 막힘과 장애를 주는 조상신령도 있고, 한편으로는 자신과 나쁜 인연으로 원한을 품은 원영(怨靈)이나 자신과 관련된 억울한 낙태아영혼의 원영(怨靈)이 늘 산사람들의 일을 막고 방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살아생전에 업장과 죄장이 두꺼웠던 조상신령은 저승에서 당연히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런 조상신령은 자손이나 친인척들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한과 업장을 풀어내주어 천당과 극락세계로 보내달라고 관념파동(觀念波動)인 영파(靈波)로 늘 호소를 하고 있지만 자손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자손들에게 훈벌(訓罰)을 주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훈벌을 받은 자손의 가족들은 대개가 가정불화 사업부진, 사업실패, 교통사고, 불치병, 난치병, 가족생리사별 등의 재난과 재앙에 시달리게 됨은 물론 하는 일마다 매사불성으로 고통을 받기에 이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이 다해 일단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이 죽으면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져버리는 존재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눈에 보이는 유형의 육신은 소멸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영혼만은 절대로 죽어 소멸해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명을 불교에서는 불사(不死)라고 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영생(永生)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사후(死後)에 가는 저승이라는 영계(靈界)에서 살고 있는 망자(亡者)의 영혼(靈魂)과 살아생전(生前)의 이승이라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금 산사람(生者)과의 상관관계를 잘 모름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이 잘되면 자기 탓이고 일이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는가? 이 말 속에는 2가지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자기 탓과 조상 탓’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 없는 자손이 없음이니 말이다. 
업보는 왜 만들어지는가? 사람의 마음(心理)속에는 기본적으로 악행(惡行)이나 악업(惡業)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심성(心性)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악행과 악업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늘 한쪽이 거슬리고 걸리(業)게 되어있음이다.
이러함이 바로 업장이 쌓이는 과정이고 대우주의 질서이자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현생(現生)에서 지은 업장에 따라 이승의 영계(靈界)나 아니면 다음의 내세(來世)에서 천벌을 받는 고통스러운 영혼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오염된 영혼이 주어진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는 신음소리가 그 조상신 영혼의 관념파동(觀念波動)으로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원리에 따라 가족·자손·친족 등에게 전파되고 교류되면서 고통·막힘·장애 등이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통사고·사업실패 ·가정파탄·생리사별·반신불수·암·난치병 불치병과 같은 원인불명의 일들이 발생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함은 바로 영계에서 업장과 죄장이 두꺼워 고통 받고 있는 영혼과의 영파(靈波)교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결과일 수밖에 없음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 
첫째 방법은 조상신 영혼의 고통을 제거해 덜어주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뾰적한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상신 영혼의 고통을 제거해 덜어주기 위해서는 조상신 영혼의 정화(淨化) 과정이 필요한 것이니 이와 같은 바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바로 자손이나 가까운 인연 줄이 있는 친족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함의 이유는 바로 동기감응의 원리와 천지감응의 원리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의 고통을 제거해주기 위해서는 자손들이 스스로 봉사·나눔·보시·선업·적선 등 선파(善波)를 통해서 조상신 영혼의 악업을 대신 보상해주어 그 보상의 정도에 따라 조상신 영혼의 죄장과 업장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덜어 가볍게 해주는 길밖에 없음일 것이다. 
둘째 방법은 조상신의 영혼이 지은 악업과 죄장을 뉘우치고 참회하며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고통받는 영혼이 이러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자손들이나 특별한 연고가 있는 사람이 조상공양을 통해 법공양(法供養)이나 진리공양(眞理供養)을 올리게 되면 그러한 영혼이 스스로 자각을 해 악업과 죄과를 점진적으로 소멸하기에 이르고 여래(如來)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됨인 것이다. 이리 하면 조상신 영혼에게 선보(善報)가 되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조상신 영혼의 자손·가족·친족들에게 긍정적인 관념파동(觀念波動)이 전해짐으로써 무병장수 ·가정화목·가운융성·관직승진·사업번창·출세명성·부귀공명 등의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천지신명께 자기 조상신의 업장을 풀어달라는 기도를 한 후에, 조상신을 초령(招靈)하여 음식공양을 하고 업장을 풀어내는 경전을 독송하여 드리면 조상신이 미궁(迷宮)에서 깨어나고 업장이 풀어짐으로써 굴레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나 자손들을 방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힘을 갖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영가를 전문적으로 천도해주는 스님·무당 박수 등에게 의뢰하여 조상영가 천도를 행함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조상천도를 할 경우에는 비용부담이 만만치가 않음이 현실적인 문제이다. 
누구나 조상영가 천도를 스스로 할 수만 있으면 비용부담도 적고 좋으련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런 조상영가를 천도해주는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영계(靈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조상신(神)에 대해 누구나 본인이 직접 조상공양과 조상천도를 할 수 있도록 배우고 읽힐 수 있는 지침서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이런 지침서가 될 수 있는 칼럼을 쓰기로 한 이유이다.

2017/01/16

양심적 병역거부 ... :: 네이버 뉴스

양심적 병역거부 ... :: 네이버 뉴스



[유엔 인권이사회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갈등 해소를 위해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동안 북한과 대치 중인 특수한 안보 상황 때문에 대체복무제 도입이 어렵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 결과 유엔 인권이사회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분석보고서'를 보면 2013년 세계 각국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해 교도소에 갇힌 사람이 723명인데, 이중 한국인이 92.5%인 669명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2017/01/14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 - Wikipedia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 - Wikipedia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独:Biologisch-dynamische Landwirtschaft。ビオダイナミックビオディナミバイオロジカルダイナミック農業BD農法生命力動農法シュタイナー農法とも)とは、人智学ルドルフ・シュタイナーによって提唱された有機農法・自然農法の一種で、循環型農業である。ドイツやスイスで普及しており、人智学運動の一角を担っている。通常の有機農業と異なり、生産物が有機的であることだけでなく、生産システムそのものが生命体(organic)であることが意識される[1]。「理想的な農場はそれ自身で完成した個体である」というシュタイナーの思想に基づき、外部から肥料を施すことを良しとせず[2]、理想的には農場が生態系として閉鎖系であることを目指す。これは、当時成立しつつあった生態学や社会学の有機体論との関係が指摘されている。神智主義の有機栽培実践家に有機栽培の神智学的な基礎付けを求められたルドルフ・シュタイナーが、亡くなる前年の1924年ドイツのコーバーヴィッツで行った8回に及ぶ講演、通称「コーバーヴィッツ農業講座」に基づいており、神智学または人智学を根拠にするとされる。元来ドイツで伝統的に行われていた農法を神智学的に再解釈して作られたと理解されているが、その際に、伝統的には効率や有効性を根拠に理解されてきた事柄が、シュタイナーの農業への幻想により希釈されたり、場合によってはそれは機械化の否定として現れているという。
シュタイナー自身が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を実践していた証拠はない。農業経済学者の藤原辰史は、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名付け親の一人エルンスト・シュテーゲマンが1922年から化学肥料を用いない農法を試していることから、シュタイナーが農法を発明したと言うより、シュテーゲマンらが行なっていた農法に対して理論を構築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察している[3]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は、鉱物製肥料の使用を中心としたそれまでの農法を否定し、土壌と植物、動物の相互作用だけでなく、宇宙の力を土壌に呼び込み、様々な天体の作用を農作物の生育に生かすことを目指す[4]太陰暦占星術に基づいた「農業暦」にしたがって種まきや収穫、調合剤の攪拌などを行い、また牛の角や水晶粉などの特殊な物質を利用する。ホメオパシー療法のような物質を、満月など定められた時刻に土壌へ加えることで、土壌の改良を目指す。そのため限界があり、微量元素の少ない土壌、またはpHが高いなどの理由で植物が利用可能な微量元素に乏しい土壌には適さない[5]
シュタイナーの農法では効率はほとんど重視されず、経済効率を超越しており(この点が経営を成り立たせる側にとって大きな欠陥となっている)、「手作業」の優越性や娯楽の問題として判断がなされ、超自然的作用だけでなく、農民の具体的な「手触り」が重視されている。シュタイナーは「動物は人間より賢い」と断言し、現在も動物との共生が重視される。農地という空間、有機体において人間を一つの構成要素に過ぎないものと考え、作物以外の植物の有効性を認め、家畜以外の動物の有効性を認め、農地を再構成しようとした。それは、農地の空間と人間に対する制限を前提とするものであった。シュタイナーの農法には、既存の自然と人間の関係、農業における「人間中心主義」を変革する可能性があり、同時に閉鎖性と排他性を抱えていた。[6]
ナチス時代、生産量の低さから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は公的には禁止されたが、ハインリヒ・ヒムラーリヒャルト・ヴァルター・ダレなどナチスの支持者によって実質的に研究や実践が続けられ、それは強制収容所にも及んだ[3][7]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は、欧米の提携運動の一種で、特定の範囲の地域の中で農業生産者と消費者が会を作り長期間にわたって食料品の供給・購入を直接行う「コミュニティー・サポーテッド・アグリカルチャー英語版」(CSA、地域が支える農業)として、スイスやドイツで行われ、近年アメリカやイギリスにも広まった[8]。実践には非常な大きな労力が必要であるが、困難さの度合いは、ドイツの伝統に由来するこの農法が、実践される気候風土に適しているかどうかによっても大きく異なる[9] 。日本は農法の実践はほとんどないが、超自然的世界観や魔術的側面が肯定的にとらえられたり、ロハスな商品と認識され、一部で商品が流行している[10]。一方、ドイツの最大手週刊誌「デア・シュピーゲル」が2006年に「シュタイナーの突飛な思いつきの一つ」と紹介し「疑似科学信仰システム」と呼んでいるなど、魔術的思考に基づく疑似科学であるという批判もある[10][11]。この農法が通常の有機農法に比べてより有効であることは証明されていないが、生産物の一部は品質について一定の評価を得ている[9]

名称[編集]

シュタイナーの死後、かれの理論づけた農法は、西洋近代の農法と区別するために「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独:Biologisch-dynamische Landwirtschaft)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ナチス時代に活躍した指導者のひとりエアハルト・バルチェによる施肥の生物学的調整という側面に注目した「生物学的」という形容詞と、エルンスト・シュテーゲマンによるエーテル的力とアストラル的力の関係性をあらわす「ダイナミックな」という形容詞が冠されることがあったが、両人が妥協しあう形で「バイオダイナミック」という形容詞が使われるようなった。[12]

世界観[編集]

シュタイナーは、眼に見える自然の背後には超自然の霊的世界が存在し、地球に由来する霊的なフォース(力)と宇宙に由来する霊的なフォースがあり、生物はこれを互いに放出・吸収しあっていると考えた。人類の霊的な成長、完璧な直観力の獲得は、霊的なフォース(力)に富んだ食料によって助けられるとし、化学肥料の使用で食料品の霊的品質が落ちると考え、人間の霊的発展のためにフォースを食料にいかに導くかを教えた。[13]

背景[編集]

シュタイナーが提唱した当時は、ハーバー・ボッシュ法による窒素ガスと水素ガスからのアンモニア合成が始まった時期で、これは火薬の材料に用いられたが、第一次世界大戦が終了すると、無機の窒素肥料が工場で合成されるようになり、広く利用された。合成化学農薬の普及は化学肥料より少し遅い。農学者の西尾道徳は、シュタイナーは無機肥料や化学農薬による作物や食べ物の霊的な質の低下を憂慮したが、農薬の普及の時期もあり、農薬よりも無機化学肥料の影響を強く懸念していたようであると述べている。[13]

農法としての特徴[編集]

有機栽培の一種であり、農薬化学肥料を使わない。天体の動きとの調和、動物との共生、独自の調合剤の使用を特徴とする[1]

農業暦[編集]

月やその他の天体の動きが植物に与える作用を重視した農業暦を用いた栽培を行う。ただし重視しているのは重力放射線などの実際の力学的な作用ではなく、占星術などで培われた知識を元にした秘教的・非科学的なものである。太陰暦だけでなく、黄道十二宮や惑星の位置と関連させて決定される。

調合剤[編集]

シュタイナーは、499番からなるホメオパシーの延長として、500番から508番の9種類の調合剤(プレパラート)を考案した[14]。なお材料はその地方でとれたものを使う。早稲田大学教授の子安美知子は、調合剤の利用は、あくまで「力」の伝播であって、「物質」の投入ではなく、これは人智学のすべての分野に共通する決定的な点であると述べている[15]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調合剤
番号調合剤使い方目的
500雌牛の糞雌牛の角に糞を詰て土の中に冬につくり、雨水で希釈し散布根の強化
501水晶(長石石英)の粉砕いて雌の牛角に詰めて6ヶ月土中に埋め希釈し散布根の強化
502セイヨウノコギリソウの花アカシカの膀胱につめて一冬寝かし、夏にまく硫黄の供給
503カモミールの花秋に牛の小腸につめて、春にまく石灰分の供給窒素量を調整
504イラクサの腐葉土乾燥させておいて、使う時に煎じる。いつでも利用してよい。窒素と鉄分の供給
505オークの樹皮樹皮を細かく砕き、家畜の頭蓋骨につめて一冬寝かせたもの
506タンポポの花牛の腹膜につめて一冬越したもの珪酸の供給
507セイヨウカノコソウの花絞った汁を発酵させたもの リンの供給
508スギナ陰干しして乾燥させ、煮出して使うサビ病など病害を防ぐ
牛の角は、その中に詰めた材料にフォースを受け取り、濃縮する特別な力があるとされる[13]。たくさんの胃袋を持つ牛は強力な消化力を持つが、そのエネルギーは角に阻害され体外に抜けることができず、角にエネルギーが集中しており、また角には宇宙のエネルギーを漏斗のように集める効果があるのだという[15]。冬の地中では精神の世界とつながりあう生命活動が活発に行われるため、角に糞を詰めて冬に地中に埋めておくと、冬の間の高次の生命が角を通して牛糞に注がれる[15]。冬に活発だった地中の生命がいなくなると鉱物の結晶力が強くなるため、水晶の粉を砕いて角に詰め春に地中に埋めると、夏中鉱物界の力が水晶に注がれ、しっとりと純化したものになるという[15]。腐植調合剤は地球のフォースの含量を高め、水晶(シリカ)の調合剤は、光や熱とつながった宇宙のフォースの含量を高めるとされる[13]
調合剤を攪拌したものを畑にまくが、この水には調合剤の元の物質は何も残っておらず、調合剤に蓄えられた諸力が水に伝えられ、畑や野菜に作用するとされる。調合剤の攪拌作業は、独自の暦(カレンダー)によって宇宙と呼応する日を選んで行われるが、攪拌作業は水中に太陽系を生じさせ、しばらく動かしてからこれを壊す、という作業であり、これにより調合剤に蓄えられたフォースが水に伝えられるのだという。この水によって、土壌の力が強まり、宇宙の諸天体と大地の呼応関係が活発になると考えられている。[15]

団体と品質認証の基準[編集]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を実践する生産者団体デメター[16](1924年設立)は、1946年に品質認証のための自主基準を作った。おそらくこれが、初めて作られた有機農産物の基準であるといわれている。デメターは基準を策定することで、加盟する農民に栽培の指針を示し、外部に対しては信用が落ちるような事態を防ぎ、品質を保証することで権益を守った。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は、生産団体が自ら農法の研究、生産物の品質保守、販売のあっせん(デメターは商取引そのものは行わなかった)までを行うという形で広まってい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17]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グループは、デメター以外にも存在する。
1997年に19のグループがデメター・インターナショナル(Demeter International)を結成し、2015年時点でこの組織に登録されている農場数は4950、農地面積は約16万haで、ヨーロッパ、アメリカ、ブラジル、エジプト、ニュージーランド、インド、チリなどに多い。日本には生産者や加工業者はないが、3つの販売業者が登録されている。[18]各国から18の認証団体が参加し世界的ネットワークが作られており、世界約40か国から認証された3500を超える商品が流通している[1]
デメターは1992年に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業の基準を定めており、農業生産、加工、ラベル表示、養蜂の4つの基準がある。農産物の認定には以下の条件を守る必要がある。(これ以外にも細かい条件がある)
  1. 有機農業の認証を受ける:EUの「有機農業規則」および「有機農業実施規則」、アメリカの「1990年有機食品生産法」および「全米有機プログラム」(National Organic Program)、オーストラリアの「国定有機農業およびバイオダイナミック生産物規則」のいずれかの認証が必要とされる。
  2. 占星術による作業日程調整や調合剤を使用する:シュタイナーの思想に基づき、黄道十二宮を巡る月の周期から播種などの時期を選定する占星術や、地球フォース(力)や宇宙フォースといったフォースを集める調合剤の使用が必須である。
  3. EUの有機農業基準よりも厳しい家畜飼養密度や、肥料としての家畜ふん尿使用量の上限を守る:作物輪作にわたって平均して家畜ふん尿によって供給して良い窒素の最大量は、農場が自ら生産した飼料によって維持する動物によって生産される量を超えてはならず、農場の全面積当たり、最大1.4家畜ふん尿単位/haを超えることができないと規定している。ただし例外条件がある。
  4. 生物多様性のを保護する:農場は生物多様性維持の誓約を提出し、農場と直接隣接地内の生物多様性の保護地が全農場面積の10%に達していない場合には、その達成プランをチェック機関に提出し、承認を受ける。[18]

産物[編集]

種子の供給[編集]

種苗の市場は、現在では少数の多国籍企業がほとんど独占し、扱われるのは短期間で育成された広域適応性のある新しい改良品種のハイブリッド種子[19]である。各作物は少数の品種が栽培の大部分を占め画一化が進んでおり、農家が自分の播きたい種子を入手することが困難な状況すらある。有機農業ではハイブリッド種子は扱わず、放任受粉によって自家採種されたOP品種を用いる。ドイツでは伝統品種の育種、種子生産、流通において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が大きな役割を担っており、ヨーロッパで注目を集めている。種子会社、研究所、種子生産を行う農家グループがある。[1]

ワイン[編集]

シュタイナーはアルコールを忌避していたので、本来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とワインは無関係であるが、有機栽培の変種として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で使われる調剤や農業暦を応用したぶどう栽培と、酸化防止剤としての二酸化硫黄を使わない醸造が行われている。また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を実践しているとされているワイン農家のいくつかは、必要に応じてボルドー液などの農薬を使うことや農業暦に関しても柔軟に対応していることを明言している。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認証は非常に厳格であるため、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ブドウを使う醸造家の多くは、生産年によってブドウをどのように栽培するかを自由に選択したいという思いから、認証の申請を行わず、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を利用していることをラベルに表示していない。コラムニストのデイヴィッド・コッボルドは、この農法を採用している生産者の中で経済的に成功しているのはごく少数であると述べている。[9]

化粧品[編集]

日本で知られる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商品に、スイスに本社のある医薬品企業で、日本ではコスメティック・ブランドとして認知されているヴェレダ社の商品がある。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で栽培された植物を原料として作られる。ファッション誌「VOGUE」はヴェレダ等の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で栽培された植物を使った製品を「シュタイナーコスメ」と名付け、シュタイナーが提唱したロハスな思想が信頼できるオーガニックコスメの礎となっていると紹介している。[10](「ロハス」は現代のマーケティング概念で、シュタイナーの時代には存在しない。)

批判・論争[編集]

畑中の微生物の多様性や数について、農薬を使わない分たしかに農薬を使っている畑に比べて多いが、他の有機栽培に比べて、調剤や太陰暦を用いた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が特に優れている証拠は全くない。ドメーヌの当主であるロランス・ファレルは、「有機農法との対比で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特別な貢献を評価することは難しい」と述べている[9]
シュタイナーは霊的向上のための食料の生産に注目したが、環境上の懸念や自然の保全、生産物の生化学的品質の低下は眼中になく、土壌の環境問題については特に指示はなかった。[13]
シュタイナーの超自然的世界観は、自然科学とは合致しない。また、調合剤について「カリウムとカルシウムが窒素に変換される」と説明しているが、これは正しい理解ではなく、シュタイナーの自然科学についての理解には誤りも多いと指摘されている。[13]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では、ホメオパシー療法のような物質を独自の暦に従って土壌へ加えることで、土壌の改良を目指す。しかし、この方法には限界があり、熱帯地域のアレノソル(新しい砂丘、海岸の砂など未熟な砂質土壌)のような、微量元素の少ない土壌、pHが高いなどの理由で植物が利用可能な微量元素に乏しい土壌の場合、植物の成長にこれらの元素が不足するため、植物から栄養を摂取している人間を含む動物は元素が不足する。[5]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実践者には、シュタイナーの思想やシュタイナー自身を信奉している人もいれば、必ずしもその思想を受け入れていない人、思想には頓着しない人もいる。シュタイナーの教えを厳密に実践している人も、一部を取り入れているだけの人もいる[9]
デイヴィッド・コッボルドは、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で作られたワインについて語る際に、ホメオパシーを応用して得られたと思われる“恵み”と、土を耕すといった実際に増大した手のかかる作業による“恵み”を切り離すことはほとんど不可能であり、ブドウ栽培という複雑なプロセスにおいて結果を厳密な価値量として見極めることは非常に困難であると指摘している。この農法の“活性化”という部分は、科学というより秘儀といったほうが良いものであるが、有効性の根拠はともかく、成果は生産されたワインに表れており、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が有機農法以上のものでないとしても、ブドウ栽培について考える良いきっかけにはなると述べている。[9]

アルバート・ハワードによる批判[編集]

シュタイナーの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と双璧をなす初期有機農業の源流アルバート・ハワード英語版(1873 – 1947年)は、インドで農業研究に携わるうちに化学肥料中心の西洋の近代農学に疑問を持ち、現地の農業を研究し、インド、中国や日本の伝統的な農法をヒントに「インドール方式」という農法を作り上げた。彼は西洋の近代農法を批判したが、同時にシュタイナーの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も批判している。シュタイナーは、人糞尿の肥料としての利用を「肥料としてごくわずかな効果しかない」「人糞尿で育った植物には、人糞尿の段階のままでとどまっているものが含まれる」という漠然とした説明で、「できる限り用いないほうが良い」としており、シュタイナーの門弟たちは「人間の排泄物の施用は有害である」としていた。ハワードはこの点を批判し、「ルドルフ・シュタイナーの門弟たちが、自然の諸法則を本当に解明し、彼ら理論の価値を実証する実例を提示できたとは考えられない」と述べた。[3]
また、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業の肥料の配合方法は秘儀的な要素が強く、農法の伝承も人智学徒以外に必ずしも開かれているとはいえないが、ハワードはこの点も批判している。ハワードは著書で、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業の名を明示はしないが、明らかにわかる形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インドール式には何の秘密もなく、秘法的知識に基づいたり健康と幸福が促進されると主張する「糞と魔法の混合」とでもいうべき農法のような主張は一切しない、インドール式は単に自然の土の中で行われていることの模倣である、と述べている。[3]
シュタイナー自身は、講演会における「どのような人間が作業をするのかということは、意味を持つ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誰でも作業をしていいのでしょうか。作業をするのは、人智学的なものに関心のある人で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という聴衆からの問いに、次のように答えている。
瞑想的な生活を営むことで心の準備ができている人が、そういう仕事を見事に為しうるのです。瞑想している人は、イマジネーションを含み持つ窒素に対して、ほかの人と全く異なった関わり方をします。…わたしはこうした事柄について公衆の面前で自由に語るのは気が進まないのです。— ルドルフ・シュタイナー、藤原辰史『ナチス・ドイツの有機農業 「自然との共生」が生んだ「民族の絶滅」』
藤原辰史は、ここでシュタイナーは精神修行を行った人智学徒に限る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が、自らの農法を伝える相手を厳しく制限することを望んでいたことは間違いないと述べている。シュタイナーが一方的に教えるという関係は揺らぎないものであり、「授ける側」-「授けられる側」という権威的な構図が固定しており、聴衆が問いシュタイナーが答えるという形しかなかった。ハワードは、インドール式は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と違い、明快で開かれた農法であると自負していた。[3]

ナチス支配下での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編集]

ナチス時代、生産量の低さから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は公的には禁止されたが、ハインリヒ・ヒムラーリヒャルト・ヴァルター・ダレなどナチスの支持者によって実質的に研究や実践が続けられ、実践者の側からもナチスへの歩み寄りが図られ、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秘儀的性格からの脱却がもたらされた[7]。東方占領地では入植ドイツ人によって行われ、ヒムラーは強制収容所で囚人の強制労働による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菜園を経営した[3]。藤原辰史は、ナチス支配下のドイツで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がナチス農本思想と「混淆」し、「変容」を遂げていく過程を検証し、「人間非中心主義」が「他民族との共生」を拒む凶器と化すという「自然との共生」がはらむ暴力性を具体的に論じた[3]ルドルフ・ヘスはナチスがシュタイナーの人智学を禁止した後もBD農法全国連盟の活動を守ろうとし、ダレは戦後、バイオダイナミック施肥法の闘士となった[3]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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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 b c d 藤原 2007.
  2. ^ 小川 2004.
  3. a b c d e f g h 藤原 2005.
  4. ^ 近藤 2001.
  5. a b 北里大学学長通信 情報:農業と環境と医療 67号(最終号) 北里大学学長室 2012年06月01日
  6. ^ 藤原 2005. pp. 45-46.
  7. a b 伊藤淳史 (2006年10月). “<書評>藤原辰史『ナチス・ドイツの有機農業』”. 人環フォーラム 19. 20151125閲覧。
  8. ^ 桝潟 1994.
  9. a b c d e f デイヴィッド・コッボルド (2009年3月). “UNCORK バイオダイナミックは本物か黒魔術か”. WANDS online. 20090911閲覧。
  10. a b c 井上 2007.
  11. ^ Smith, D. (2006). “On Fertile Ground? Objections to Biodynamics”The World of Fine Wine (12): 108–113.
  12. ^ 藤原 2005, p. 46.
  13. a b c d e f No.263 有機農業は当初,生命哲学や自然観の上に創られた 西尾道徳の環境保全型農業レポート 2014年11月25日
  14. ^ シュタイナーによる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 有限会社マカイバリジャパン
  15. a b c d e 子安 1997.
  16. ^ デメターは、ギリシャ神話の農業・結婚・社会秩序の女神の名である。
  17. ^ 桝潟 1994.
  18. a b No.289 バイオダイナミック農法の生産基準 西尾道徳の環境保全型農業レポート 2015年11月24日
  19. ^ 異なる性質の種をかけ合わせた雑種の1代の種子で、2代以降はメンデルの法則の通り、優れた品質は安定的に受け継がれない。

参考文献[編集]

外部サイト[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