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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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원효 元曉 | |
성씨 | 설(薛) |
본명 | 사례(思禮)/ 서당(誓幢)/ 신당(新幢) |
법명 | 원효(元曉) |
자칭 | 소성거사(小性居士) |
시호 |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
골품 | |
종교 | |
출생 | |
사망 | |
아버지 | 담날(談捺) |
부인 | |
자녀 | 아들 설총 |
1. 개요[편집]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2]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元曉大師)고,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少性居士)다.
나타나는 모습이 천백 가지라지만,
마치 손바닥 같은 모습뿐이다.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삼국시대 중기 신라의 승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모든 건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해골물 일화로 유명하며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이다. 삼학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지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국통일기에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신라의 탄생을 봤다.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3]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근거는 6세기 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로 백제 승려 혜균(慧均)의 생각과 많이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 통일에는 사상적 통합이 선행됐고 원효가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 여몽전쟁 때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문서 최상단에 있는 초상화가 남아있다. 일본 교토의 고잔지(高山寺)에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를 소장하여 현대까지 보존한다. 이 그림들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에(明恵)[4]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원효를 존경해 신라 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한 것이다. 지금은 신라의 원본이 멸실되었으므로, 묘에의 이모작이 당대의 원효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라고 여긴다.
실제로 화풍에서 일본풍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므로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다고 추정한다. 족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이 옛날 형식이고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이 문헌 기록에 남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고려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어진이 현대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중일 불교계에 걸친 원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속성은 경주 설씨(薛氏)[5], 이름은 사례(思禮),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6]
2. 생애[편집]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7]에서 내마(奈麻)였던 담날(談捺)[8]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9]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10]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는 추정일 듯.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원효에 대해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는 송고승전에서 관채지년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11] 29살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알려져 있지만 문헌적으로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1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지선사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는 굴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지선사의 가르침을 청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이 낭지선사라는 사람이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에 영취산(靈鷲山)에 법장을 열었다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으로,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취사를 지어서 머물었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보아도 도무지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었다는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하며, 애초에 이 두 문화재의 발견부터가 반고사터를 발견하기 위한 폐사지 답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번의 입당 시도를 하다가 실패,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12]으로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13][14]
다만 원효의 아내가 요석궁의 과부 공주라는 이야기는 일연이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당전, 행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대신에 향전에서 한 두가지의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송고승전이나 서당화상비, 삼국사기 등에서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석 공주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15]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니거나,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혹은 산,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원효는 파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었고 여러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 교화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10]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는 추정일 듯.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원효에 대해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는 송고승전에서 관채지년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11] 29살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알려져 있지만 문헌적으로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1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지선사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는 굴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지선사의 가르침을 청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이 낭지선사라는 사람이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에 영취산(靈鷲山)에 법장을 열었다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으로,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취사를 지어서 머물었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보아도 도무지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었다는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하며, 애초에 이 두 문화재의 발견부터가 반고사터를 발견하기 위한 폐사지 답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번의 입당 시도를 하다가 실패,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12]으로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13][14]
다만 원효의 아내가 요석궁의 과부 공주라는 이야기는 일연이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당전, 행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대신에 향전에서 한 두가지의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송고승전이나 서당화상비, 삼국사기 등에서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석 공주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15]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니거나,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혹은 산,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원효는 파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었고 여러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 교화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16]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 참석을 반대했다.
왕비가 병이 나자 약을 찾아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바다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얻어 돌아왔다. 그런데 용왕이 준 불경은 처음부터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인 데다 내용도 어려워서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왕명을 받고 순서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안 또한 "불경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승려는 원효 한 사람뿐"이라며 풀이하기를 사양했다.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달라는 왕명을 받고 소를 타고 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4일만에 소(疏, 해설집) 5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4일만 더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3권을 써서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친 뒤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7]
2.1. 입당 시도와 깨달음[편집]
젊을 적 원효는 촉망받는 유능한 승려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 했었다. 첫 번째 입당은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입당 시도에서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져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차에 동굴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 잠결에 목이 말라 웬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벌컥 들이키며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서 주변을 보니 충격과 공포. 동굴은 파묘(破墓)[18]된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건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경악한 그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 이 때 같이 가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바로 이 일화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안다는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이다. 해골물 일화에서 파생된 드립으로 인터넷상에선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니었다.', '~인 줄 알았을 땐 만족했는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니까 화난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한다. 미미쿠키가 대표적인 예. 원효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해골물을 검색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별 상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하며, 와 샌즈! 드립이 확대된 이후로는 샌즈물 드립도 생겨났다.
다만 이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는 송나라 말기에 저술된 임간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꽤 후대에 등장하는 요소다.
원효의 깨달음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고승전의 의상전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원효와 의상이 입당을 시도하였는데 비가 와서 어느 토감(土龕) 사이에 머물러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본인들이 묵은 장소가 해골이 있는 오래된 무덤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땅이 질척여 무덤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그런데 무덤인 것을 알고 나니 두려운 귀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원효는 전날에는 평범한 토굴인 줄 알아서 편하게 잤었지만 지금은 해골이 널부러져 있는 무덤인 것을 알고는 귀신을 보게 되었다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그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게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원효가 사실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하였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관련 기사)
경악한 그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 이 때 같이 가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바로 이 일화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안다는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이다. 해골물 일화에서 파생된 드립으로 인터넷상에선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니었다.', '~인 줄 알았을 땐 만족했는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니까 화난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한다. 미미쿠키가 대표적인 예. 원효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해골물을 검색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별 상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하며, 와 샌즈! 드립이 확대된 이후로는 샌즈물 드립도 생겨났다.
다만 이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는 송나라 말기에 저술된 임간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꽤 후대에 등장하는 요소다.
원효의 깨달음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고승전의 의상전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원효와 의상이 입당을 시도하였는데 비가 와서 어느 토감(土龕) 사이에 머물러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본인들이 묵은 장소가 해골이 있는 오래된 무덤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땅이 질척여 무덤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그런데 무덤인 것을 알고 나니 두려운 귀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원효는 전날에는 평범한 토굴인 줄 알아서 편하게 잤었지만 지금은 해골이 널부러져 있는 무덤인 것을 알고는 귀신을 보게 되었다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그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게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원효가 사실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하였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관련 기사)
3. 평가[편집]
"<대승기신론>은 대승을 본질로 한다. 그것(대승)은 텅 비어 고요하며, 깊고 그윽하다. 그윽하고 또한 그윽하지만 어찌 만상(萬像)밖을 벗어난 것이겠으며, 고요하고 또한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허나 만상 밖을 벗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5안(眼)으로도 그 형체를 능히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4 변(辯)으로도 능히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적은 것(無內)에도 충분히 들어가며, '작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큰 것(無外)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을 '존재'라고 하자니 진여도 그것으로 인해 공이 되고, '비존재'라고 하자니 만물이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굳이 말로 하자면 '대승'이다."대승기신론소, 원효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불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나 혼간지로 유명한 일본의 정토진종(또는 일향종一向宗)도 원효의 책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의 영향하에서 세워진 종파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3번 절했다고 써져 있다. 불교에서 3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19]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20]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21]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원효의 손자인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薛仲業)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자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 감동했는데(嘗覽元曉居士所著金剛三昧論)
그 사람을 보지 못해 깊이 아쉽거늘(深恨不見其人)
이제 그 후손과 만나니 기쁘도다(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해야지(乃作詩贈之)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22]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23][24]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지 200년이 지난데다, 1명이 추던 것이 12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3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 같고 목은 여름 자라 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 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고려시대에도 숙종, 의천, 김부식, 이규보, 일연 등 인물들이 언급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신라 중기의 불교 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이처럼 불교 이론가, 교종으로서의 면모가 매우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인물인데, 민중에게 있어 '불교의 경전은 이해가 어려우니 그런거 너무 신경쓰지 말고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라.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면 된다'는 내용으로 대표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생활 불교인으로서의 면모도 상당한 인물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사실상 '발굴'한 것도 그의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비롯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기타[편집]
원효는 뛰어난 능력과 특이한 행동만큼 관련된 일화/야사도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661년 김유신이 평양을 포위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러 고구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전달해준 군량을 받고 김유신에게 송아지와 난새(鸞鳥)의 그림을 그려서 보냈는데, 원효가 이 그림이 "속히 돌아가라."하는 암호문임을[27]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유신은 돌아오면서 고구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외에도 뛰어난 신통력이나 승려로서의 뛰어남을 자랑하는 설화나 야사들이 꽤 되는 편이다.
이전까진 '나무아미타불'[28]이란 염불을 창시했다고 쓰여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무아미타불 등의 염불을 외우는 것은 원효 이전부터 정토교에서 강조했던 것이며 원효 역시 이 정토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이 원효로 인해 가난하거나 무지몽매한 이들도 나무(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얘기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만큼 원효에서 따온 이름들도 많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가 대표적이며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는 일제강점기에는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원효로 역시 원효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의 46대손이 승려 석우다.# 그러나 의외로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효의 행적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되었는데… 물론 이런 '자칭'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지만 스스로를 땡추로 지칭하고 파격적인 발언과 행동을 행한 승려들도 제법 많다.
원효결서라는 예언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 발견자라고 하는 말이 어디선가 전달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고, 결국은 남사고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격암유록[29], 송하비결 같은 위서라는 의견이 회의주의자 사이에서 대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둘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떡밥이 되기라도 했지 원효결서는 그냥 묻혔다. #
해골물 일화가 하필 해골물 이다보니 언더테일 이후 와! 샌즈가 유명해지자 이것과도 엮이기도 했다.
의상ㆍ자장ㆍ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분포 척 봐도 원효의 일대기와는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고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절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승려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해도 모자랄 판이다.
태권도의 유단자 품새 중 하나이자 마지막 품새인 일여(一如)가 원효대사의 사상을 토대로 엮어졌다.
이전까진 '나무아미타불'[28]이란 염불을 창시했다고 쓰여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무아미타불 등의 염불을 외우는 것은 원효 이전부터 정토교에서 강조했던 것이며 원효 역시 이 정토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이 원효로 인해 가난하거나 무지몽매한 이들도 나무(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얘기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만큼 원효에서 따온 이름들도 많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가 대표적이며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는 일제강점기에는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원효로 역시 원효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의 46대손이 승려 석우다.# 그러나 의외로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효의 행적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되었는데… 물론 이런 '자칭'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지만 스스로를 땡추로 지칭하고 파격적인 발언과 행동을 행한 승려들도 제법 많다.
원효결서라는 예언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 발견자라고 하는 말이 어디선가 전달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고, 결국은 남사고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격암유록[29], 송하비결 같은 위서라는 의견이 회의주의자 사이에서 대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둘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떡밥이 되기라도 했지 원효결서는 그냥 묻혔다. #
해골물 일화가 하필 해골물 이다보니 언더테일 이후 와! 샌즈가 유명해지자 이것과도 엮이기도 했다.
의상ㆍ자장ㆍ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분포 척 봐도 원효의 일대기와는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고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절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승려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해도 모자랄 판이다.
태권도의 유단자 품새 중 하나이자 마지막 품새인 일여(一如)가 원효대사의 사상을 토대로 엮어졌다.
6. 관련 문서[편집]
[1] 음력 3월 30일[2]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내린 시호. 자기 동생이자 해동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의천이 원효를 높인 이유는 본인이 추진하는 불교계 통합에 원효의 사상이 유용하다는 정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이때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3] 이름은 중국 삼론학이라고 하나 중국 삼론학 역시 5세기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朗)이 시작하였다. 이후 길장(吉藏)이 승랑의 교학을 이어 삼론교학을 완성하였다. 길장의 조상은 안식국 출신으로 그 조상중에는 안세고가 있다.[4] 생몰년도: 1173년 ~ 1232년[5]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元)'자에 '새벽 효(曉)'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6]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2005, p190[7]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만들어져 있다.[8]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9]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10] 원효와 그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순창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 6부의 촌장 가운데 '호진'의 자식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되었다 하여 가문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11] 관채지년은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올리는 어린 나이를 뜻하는 말인데 이게 15~16세 정도의 시기를 말하느냐, 8~9세 정도의 시기를 말하는냐에 대한 이견이 있다. 어쨌든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는 것이 현재로선 정설이다.[12] 거리에서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무열왕은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 장차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나쁠 것이 없다며 자신의 딸인 요석궁의 과부 공주를 이어준다.[13]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14] 일연은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파계가 아니라 실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게 되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열왕이 말한 현인 탄생의 필요성 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15] 소성은 마음이 작다는 것, 거사는 재가불자를 의미한다. 즉 원효가 계를 어긴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이다.[16] 태조 왕건에도 인왕백고좌회가 나온다. 나라의 이름 높은 승려들을 두루 모아 여는 법회이다. 여기서는 도선이 법력으로 날씨를 바꾸고 황룡사 목탑을 기울이는 허구가 가미되었다.[17] 고선사 터는 덕동댐이 만들어져 수몰되었고 절터에 있던 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 보관 중이다.[18] 무덤이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19]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20] 산스크리트어(범어)로는 Dignāga, 한자로 뜻을 풀이하여 (대)역룡(大)域龍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21] 고대 덴노의 시호들을 일거에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22] 나머지는 고려 중기의 선승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고려 후기의 승려 야운이 지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23]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24] 이는 달리 말하면 원효가 범어나 범자를 알고 있어 노래 가사를 지을 정도였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원효가 신라 국내파임을 고려하면 당대 신라 불교계의 교육 역량이 범어 교육에도 미쳤음을 보여준다. 참고:삼국시대에 이미 범어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논문[25] 박균섭,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통해 본 전시동원체제와 식민교육의 성격>[26] 물론 가사의 내용들은 모두 제목과 따로 노는 플로우를 자랑한다.[27] '송아지 그림과 난새 그림'이라는 말은 한자로 적으면 화독화란(畵犢畵鸞)인데, 각 글자의 음을 반절(半切)씩 떼서 읽으면 '혹한(ㅎ/ㅗㄱ+ㅎ/ㅏㄴ)'으로 중고한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환(速還)이라는 말과 음이 같다고 한다.[28] 설명하자면 아미타불은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내생을 보장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여기에 관세음보살을 더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한데 동시에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둘을 묶어 염불한다고 해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렇게 묶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29] 현재 전해지는게 필사본이라는데, 그 필사라는게 사실상 천부교측에서 위작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