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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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 퀘이커 300년- 7. 모임공동체(1)
작성자 바보새 16-01-07 10:57 조회4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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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임공동체(1)

예배와 사무의 두 가지 작용을 하는 퀘이커의 모임은 하나의 공동체(community)를 이룹니다. 그것이 그 기능을 잘 발휘하기만 한다면 하나의 융합된 단체가 되어서, 그 안에서 개인은 마치 유기체 안에 있는 세포와 같이 전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유기체(organism)란 말은 자기의식을 가지는 자유하는 인격들이 모여서 되는 단체 안에 있는 것 같은 그러한 통일을 가리켜서 말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각 부분 안에 아무 개성도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 생물학적 유기체 안에 있는 결합과는 다릅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 한번만 하는 자유 선택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선택을 해감으로써 되는 통일은 비교적 조그만 단체에서만 어려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성공하면 그 다음은 그 같은 개인들로 보다 큰 단체로 쉽게 확대되어 갈 수 있습니다. 조그만 단체 안에서 이루어진 행동의 습관은 반드시 더 넓은 모임 속으로 번져나가는 법입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가정이란 것은 커다란 공동체 안에서 올바른 행동의 훈련장소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그만 단체입니다. 정상적인 가정의 각 분자는 서로 협력을 하고 한집의 세간을 같이 나누기 때문에 약한 것들도 강한 것들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식탁 위에 차려놓은 음식은 각각의 필요에 따라 분배되지, 움켜 갈수 있는 힘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은 저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령 어떤 지방에서 석유가 발견됐다 해보십시오. 그러면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은 생각할 여지없이 될수록 제가 많이 퍼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정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같이 나누는 습관을 익힌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가정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 후에도 대개는 계속해 그 습관을 지키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 안에서의 행동기준과 가정 밖에서의 행동기준의 차이는 줄어들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단체도 그 안에서 교리와 습관의 직접적인 결과로 얻은 행동의 습관을 교단 밖에 나가서도 나타낼 수 있도록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노예제도를 죄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내어서, 도망해 나가서 크리스찬이 된 그 노예를 다시 찾아오도록 하라고 권고할 때에, 교회 안에서는 주인이나 종이 평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가지는 평등이 기독교로 하여금 마침내 모든 노예제도는 죄라고 선언하게 했습니다.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오랜,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보다도 오랜 것이요, 날 때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혼의 그러한 옹근 사람의 교육은 성격의 깊은 속에까지 스며드는 것입니다. 단체 활동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은 형식적인 교육보다도 살림에 의하여 배우게 됩니다. 물론 교육도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생활에 참여하는 일은 관념의 지경보다도 더 깊이 의지를 움직이는 감정에까지 들어갑니다. 교실이나 책에서 받는 관념 그것만 가지고는, 이러한 더 깊은 과정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그것은 행동을 하게 하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행동에 의하여 실력이 붙도록 되어야 합니다. 사상과 행동 사이에 걸쳐진 다리를 자주 건너다니게 되면 사상과 행동이 아주 하나로 녹아들어서 그 결과로 가장 깊고 영구적인 훈련이 이루어집니다.

사회적 관심의 기원
퀘이커의 실천에서 모임이 가지는 의미를 그림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는 빛이 기다리고 있는 모임 위에 내려옵니다. 그 빛은, 길이 열려 있기만 하면, 세 가지의 결과를 냅니다. 일치와 지식과 능력입니다. 그 결과 예배나 사무모임에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할 만한 행동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특징으로 인하여 그 나타나는 행동은 아주 포괄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네 가지로, 공동, 조화, 평등, 간소(簡素)라는 말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행동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는 것이요, 첨에는 친밀한 단체 속에서 일어나서, 그 개인개인이 그 국한된 범위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감에 따라 차차 넓게 적용되게 됩니다. 회원들은 그 모임 안에서 어떤 사업에 종사를 하든간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습관을 붙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습관들은 조그만, 취미 맞는 비교적 동질적인 단체 안에서만, 별 반대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도 조건이 나쁜 일반 사회에서는 부득이 어느 정도의 적응과 타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회원 중에서도 더 열심이 있는 사람은 타협을 아니하려고 할 것입니다.





속의 빛의 미는 힘의 결과로 퀘이커 공동사회 안에 일어난 관심은 일반사회로 향하게 됩니다. 관심은 이성이나 전통의 힘으로 일어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퀘이커의 방법의 전형적인 것은 아닙니다.

생기 있고 박력 있는 모임에서 예배 혹은 사무모임에서 어떤 관심이 일어날 때, 맨 처음 나타날 때는 그것은 회원에게만 적용될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조그만 범위를 떠나 널리 일반사회에서야 이루어질 것임을 알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여서 회원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어려움 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원조를 해야 한다는 관심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임의 회원끼리 평화적으로 대하는 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까지 평화적으로 하는 습관으로 되어갈 것입니다.
어떤 요구가 일어날 때 속의 빛이 개인의 영혼 위에 일한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권위의 강요하는 힘이나 이성 활동의 논리적 귀결로 인해서 오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으로 하는 퀘이커의 방법과는 다른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권위와 이성은 속의 인도에 없어서는 아니되는 보조이기는 합니다. 물론 그것이 없으면 부족한 상태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니됩니다. 특별한 실례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병역에 소집되기를 거부했을 때, 그 거부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지키는 결과로 왔을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철학적 또는 과학적 이론의 결과로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또 전쟁이 쓸데없다는 실례를 안 고로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룩한 빛의 비쳐줌을 입은 양심의 지도로 됐을 수도 있습니다.

퀘이커들은 밝아짐을 입은 양심의 지도를 강조하고, 밝아진 이성과 권위는 그것을 증험하기 위하여 씁니다. 그의 입장은 그 자신의 눈에도, 이성과 존중할 권위에 반대되는 것같이 보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 안에 있는 빛이 분명한 지도를 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것을 종교 도덕의 진리를 확증해주는 근본 기관으로 여기고 거기 복종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사색이 제 분야에서 인식하는 힘이 있듯이 양심은 또 제 분야에서 인식을 합니다. 심리학자 융은 정신의 주요 기능을 사고, 감정, 직관, 감각이라고 설명하며, 사고와 감정을 인식하는 힘으로 꼽고 있습니다. 감정은 우리에게 가치를 알려줍니다. 이점은 퀘이커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퀘이커의 예배나 사무모임에서는 말을 하는 사람이 “나는……생각합니다” 하는 일은 별로 없고 흔히 “나는……느낍니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 동감일 때는 그는 아마 “내 느낌과 같습니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되면 나도 참 좋겠습니다” 혹은 아마 “매우 마음 편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속에 일어나는 켕김 혹은 불쾌의 감정은 흔히 어떤 일이 되어져야 한다는 표정으로 해석이 됩니다. 속에 평화의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일이 올바르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권위와 이성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쓸 수 있는 증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는데 있어서 그것은 없어서는 아니되는 것들입니다. 양심의 고민에서 나오는 감정은, 마치 미적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넣을 수 없듯이,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옮겨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빛이 모든 사람 속에 있어서 모든 양심을 동감으로 이끈다는 이론에 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양심에 호소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 안에 있는 빛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빛에, 조지 폭스의 비유의 말로, ‘대답’(answer)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가장 힘있게 되는 것은 조그만 예배모임에서입니다.

권위와 이성밖에, 또 실제적인 증험방법도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그 결과가 좋으면 옳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 증험방법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가정할 때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은 과거의 같은 행동에 비추어서 보는 수밖에 없으므로, 이성의 방법과 근사한 데가 있습니다. 이성은 비교를 해가지고 같은 조건에서 과거에 결과가 좋았으면 미래에도 좋을 것이고 과거에 나빴으면 미래에도 나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실제적인 증험법은 감정에도 그 근거를 두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과의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것은 감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제적인 증험방법만을 썼다면 우리는 아마 결정을 못 짓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눈앞의 결과는 그 앞의 결과로 판단해야 하는 고로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궁극의 결과가 어떠할 것을 내다볼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떤 증험을 하려면 완전히 실제적인 것만은 아닌 어떤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친우들은 보통 그 하려고 하는 행동의 보람을, 나타나는 결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 가지 실례로써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로 사업가로 양면에서 크게 성공을 한 월리엄 알렌(William Allen)은 그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가 종교적인 일에서는 큰 것을 구하지 말고 늘 간소한 것을 따르며, 점점 더 이치를 대고 결과를 걱정하기를 그만두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존 울만은 그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요사이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의무를 지키고 하나님의 섭리가 정해주는데 만족하는 것이 내가 배워야 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교훈이라는 것이 새삼 분명해졌습니다. 내 노력의 결과에만 주목하지 말고, 그 관심이 거룩한 사랑에서 나오느니만큼, 그것의 순수한 움직임과 참 모습에 더욱더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하려고 하는 어떤 계획에 관하여 인도해주시기를 구할 때 우리는 스스로 네 가지의 주요한 테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권위와 이성과 결과와 직감입니다. 네 가지가 다 일치되면 우리는 행동의 확실한 근거를 잡은 것입니다. 권위를 쓸 때는 우리는 그 하는 판단을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이 이룬 통찰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 지식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경험보다도 다른 사람의 것에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이 테스트가 아마 가장 흔히 쓰이는 표준일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과학자가 자기 과학 지식을 증험할 때에 자기 실험을 가지고 하는 것은 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실험에서 얻은 지식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찬도 성경의 기자들과 교부들과 자기네 종교 단체의 뛰어난 인물, 또 그밖에 자기가 성자로 존경하는 인물들의 깨달음에 의존해야 될 것입니다. 이성의 증험도 중요합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일관성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실제적 증험도 유효합니다. “그 열매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도덕의 분야에 있어서는 궁극에 있어서 느낌의 증험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느낌이라 할 때는 진리의 빛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파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느낌에 의하여 우리는 어떤 권위를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물리칩니다. 느낌에 의하여 우리는 어떤 전제를 우리 이론의 근거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물리칩니다. 느낌에 의하여 우리는 어떤 결과를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물리칩니다. 초기의 친우들이 빛을 성경이나 교회나 이성이나 얕은 체험의 결과보다도 위에 놓았을 때, 그들은 견고한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퀘이커들이 만일 그 느낌의 증험의 기초를 순전히 개인적인 진리파악에만 두었더라면 그들 입장은 실천에 있어서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각개인의 속으로 받는 인도를 확실케 하기 위하여 모임 전체에 호소하는데 유효한 증험법이 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개인이 단체가 잘못이라고 분명히 강하게 느끼는 경우에는 그는 그 판단을 무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퀘이커『일기』에 보면 단체에 호소하고 난 후에는 감정에 의한 증험 밖에는 모든 증험을 다 무시했던 실례가 드물지 않게 나와 있습니다. 토머스 실리토(Thomas Shillitoe)의 생애의 한 사건 같은 것이 그 한 견본입니다. 유럽에서 전도여행을 하다가 1821년에 그는 독일의 함부르크 시에 갔는데 사람들이 안식일에 종교 생각은 터럭만큼도 하지 않고 그 날을 즐겁게 노는 날로만 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도시 안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는 독일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도한 후 그는 그 모양을 고쳐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시민들을 대하여 하는 연설을 준비한 다음 그것을 런던으로 보내어 거기 있는 친우들의 찬성 불찬성을 물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연설문은 독일말로 번역이 되어 런던 친우들의 찬성이 덧붙여져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그 호소문을 온 시에 뿌렸습니다. 그가 잡힘으로써 그의 관심은 도리어 적지 않게 선전이 됐고 관청 직원들과 말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요한 목적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깨어있었습니다. 즉, “나의 주님 앞에서 언제나 깨끗한 나이고 싶은 것이 내 소원의 전부였습니다.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그는 “내 몸이 또 한 번 이와 같이 자유로운 것을 느끼고 내 마음은 기쁨에 날뛰었습니다” 했습니다. 이 자유는 그가 이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토머스 실리토는 자기 한 일이 분명 아무 결과도 못 거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속의 평화를 느끼면서 함부르크를 떠났습니다. 그는 그의 이성이 그 일에 희망이 없다고 했을는지도 모르는 때에 그의 감정을 쫓아서 했습니다. 그는 자기 모임과 양심의 찬성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실례를 하나만 더 들면 충분할 것입니다. 1762년 존 울만은 필라델피아에서 200 마일 되는 데 있는 인디언들을 방문하자는 ‘사랑의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에 벌써 어느 정도 하나님의 능력에 접하여 거칠고 사나운 짐승 같은 성격이 수그러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월회, 사계회, 춘기 총회에 내놓아 그 찬동을 얻었습니다. 떠나기 바로 전에 그는 그 인디언들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지도를 구했습니다……. 양심은 말할 수 없이 괴롭고 주를 향해 큰 소리로 부르짖는 이 영혼의 혼란 속에서 나는 옴짝 달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정결한 진리의 영의 움직임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여행을 계속해나감에 따라 영국 사람과 전쟁이 있는 여러 가지 증거를 보았습니다. 잡히고 고문을 당할 위험도 많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크신 자비로 내게 내맡기는 마음을 주셨으므로 나는 평온하게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인디언들과 만족할 만한 모임을 가지고, 존 울만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여행으로 무엇이 이루어진 것이 있느냐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존 울만은 그의 전쟁 받음에 대해 한 순간도 의심한 일이 없었습니다. 옳은 전쟁을 받았다는 증거는 속에 끊임없이 있는 평화와 내맡김의 심정에 있지, 눈에 잘 뵈는 결과에 있지 않습니다.
존 울만이 노예를 소유한 친우들에게 노예를 놓아주기를 권고하는 한 위원회의 회원으로 있을 때에, 그의 한 호소에는 노예제도의 나쁜 결과를 말하는 것은, 전혀는 아니지만, 거의 없었습니다. 호소는 노예를 가지고 있는 자의 심정에 대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종으로 매어두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평안했을까? 노예 소유자들은 솔직히 마음이 평안치 못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는 노예를 소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여 견디어나가려면 노예를 둘 수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노예 소유에 뒷받침을 해주는 권위 있는 말을 성경에서조차도 인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정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면, 그에게 속의 평화를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퀘이커가 행동을 지도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두 가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위해 방문을 다니는 위원과 질문서입니다. 18세기 초에는 방문 위원은 점점 교회 일, 특히 도덕문제에 관한 일을 돌보기 위하여 임명된 목회자(overseers)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혹은 그 목적을 위해 임명된 특별위원)는 보통 모임에 속해 있는 가정들을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방문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실수를 한 사람은 사랑과 동정으로 붙들어주고, 회개를 하면 그 잘못을 자백하는 글을 써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가서 월회에 내도록 했습니다. 잘못을 한 사람이 자백하기를 거절하는 때면 위원들은 적어도 일년 동안은 계속해서 그 사람을 위해 힘을 썼습니다. 그래도 고치거나 회개하는 빛이 없고, 또 그 잘못이 상당히 중대한 것일 때는 그 사람은 모임에서 제명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질문서에 따라서 일을 하였는데, 그것은 윗 모임이 물은 데 대해 아랫 모임이 대답을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명된 대표가 구두로 하다가 후에는, 1775년부터는 문서로 하게 됐습니다. 질문서에 대한 대답은 회원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잘 나타내도록 돼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계회는 월회의 상태를 알 수 있고 연회는 사계회의 상태를 알 수 있어서 필요한 조언이나 원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서는 일종의 단체 고백 같은 것이어서, 그것으로써 각 개인 각 모임이 일년 혹은 그 이하의 일정한 기한을 두고 정기적으로 실제 행동을 이상적인 표준에 비추어 검증해볼 수 있었습니다. 질문서에는 견고한 친우로서 가져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도덕적 사상이 우세해지고 낡은 증거들이 힘이 없어지게 됨에 따라 자주자주 개정됐습니다.
다음에 싣게 되는 사즈베리 월회 의사록(1780)으로 그 취해진 방법의 효과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종교 모임에 틀림없이 꼭꼭 열심으로 나오는 일, 또 말과 행동과 옷차림, 세간살림 잡은 것을 간소하게 하는 일, 또 그 밖에 질문서 중에서 주의시켜주는 여러 가지 결점들에 관해 개선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지명을 받은 위원들은 그들이 그 임무를 실행한 결과 많은 사람이 그 결점을 고치려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쓸데없는 것으로 보였던 여러 가지 것이 이미 없어졌더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한 위원회가 성공을 거두려면 올바른 정신으로 일해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1719년의 필라델피아 연회는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이 모임은,누구누구와 말을 하거나 서로 일을 할 때에는 크리스천의 사랑과 친절의 정신으로 할 것이요,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는 힘써 겸손한 태도로그 잘못을 일러주어서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하며 될 수 있으면 다시 돌아오도록 권고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진리를 놓쳐버린 사람은 그가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비록 성급해지기가 쉽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참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들을 가르치고 충고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평화의 증거를 가질 뿐 아니라, 또 상대하는 그 친우에게도 감화를 주어, 그로 하여금 우리가 그를 향하여 진정으로 크리스찬인 의무와 형제애의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퀘이커 모임은 본래부터 그래 왔고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하나의 종교적 단위인 동시에 경제적 단위이기도 합니다. 회원들은 물질적으로 서로 붙들고 돕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초창시대에 벌금과 감옥살이로 재산을 많이 잃던 때에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의 주의 때문에 지금까지 해오던 직업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령 예하면 사치품이나 무기를 만드는 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경제적 의존은 지금도 어느 정도로는 남아 있어서 매년 하는 질문서의 제목이 되어 있습니다.
1737년 각 모임은 원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열명기(列名記)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회원명부의 시작이요, 이것으로써 정회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회원의 아이들도 원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열명기에 올랐습니다. 이것으로 마침내 태어난 회원권이라는 규정이 생기게 됐습니다. 태어난 회원권이라는 것은, 한 모임은 그 회원들이 물질적인 필요를 위해서뿐 아니라 지식적 정신적인 복지를 위해서도 서로 의존하는 하나의 큰 가족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결론되어 나온 것 입니다. 아이들은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과 꼭 같은 의미로 모임에 태어난 것입니다. 가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성년이 되면 거기서 자유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들의 아이인 동시에 또 모임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은 모임의 책임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학비를 못 내는 경우에는 모임이 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그날 때부터 모임의 회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요소입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힘있는 교육의 한 방식입니다. 출생, 혼인, 사망, 생활의 모든 중요한 사건이나 위기가 다 모임의 관심거리요 따라서 거기 대한 주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임의 회원이 되는 것은 한 공동체의 분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회원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공동체에 적응해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입니다. 회원은 그 모임 속에 났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모임 특유의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해서 입회한 사람들입니다. 회원 자격에 대한 시험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체험이 있다거나 혹은 어떤 일정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신조를 승인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된 종교적 체험과 올바른 종교 신앙은 중요는 하지만 그것은 모임의 활동에 참여해가는 동안에 자라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모임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서 그가 전체를 도울 수 있고 전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다 회원 될 자격이 있습니다.
다음의 초기 의사록 발췌는 모임 공동체 안에 발달했던 경제적 상호 원조의 성격을 보여주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전형적인 것들입니다.

칼렙 퓨시와 월터 포세트에게 명해서 루디만 미망인에게 암소를 한 마리 삯으로 빌어오는 일을 주선해주도록 했고, 사계회는 그들에게 그 일을 위해 30실링을 주기로 했다. (체스터, 1689)

W.P.가 매우 가난하여 어렵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므로, 모임은 A.B.에게 좋은 가죽 바지 한 벌과 좋은 저고리 하나, 조끼 하나, 양말과 구두를 한 켤레씩 사주게 하고 그 비용을 다음 모임에 보고하도록 했다. (폴스, 1701)

J.C.(버크 주의 한 친우)가 화재로 162파운드에 해당하는 재산을 잃었다는 상황이 보고되었으므로 이 모임은 매주일 모임에서 헌금을 모으기로 하고 두 사람이 그것을 받기로 했다. (체스터, 1690)

메리 무트에 관한 조사를 위해 지명됐던 친우들은 그가 우리 모임에 회원권을 가졌고 사실로 구조가 필요하다고 보고해왔으므로 우리는 이 모임의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기 위하여 임명될 친우들에게 그를 해당자로서 추천한다. (콩코드, 1763)

다음의 의사록은 독립전쟁 때 뉴잉글랜드 연안의 봉쇄로 피해를 입은 회원 아닌 사람들을 친우회원들이 돌봐준 이야기입니다.

뉴잉글랜드의 가난한 사람 구제를 위하여 기부금을 모집하도록 임명된 친우 들은 33파운드 14실링의 신입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다비, 1775)

모임은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늘 가난을 방지하는데 힘썼습니다. 회원들이 사업에서 지나친 모험을 하지 않도록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지 않도록 늘 주의를 주었습니다. ‘친우들은 그 분에 맞게 살림을 하며 장사나 사업에서 중용을 지켜갑니까?’ 하는 것이 오래 두고, 매년 하는 질문서 내용의 하나였습니다. 다음에 보는 연회 의사록은 1710년에 낸 것입니다.

이 모임은 몇 개의 사계회에 대해서 우리 가운데 가산이 기울고 있다고 보이는 집이 있는 경우에는 실력 있는 친우들을 지명해서 방문을 하도록 권고한다.

모임이 전회원을 다 한 가정의 가족으로 감독하고 있었던 것은 다음에 드는 잘못에 대한 고백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로버트의 아들 월리엄 월리엄즈와 제임즈 퓨의 딸 조안이 모임 앞에서 자기네가 서로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밝혔고, 그는 자기가 그 아버지의 승낙의 얻기 전에 젊은 여자에게 자기 속을 말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일을 진행시켜도 좋다고 허락했다. (고센, 1723)

내 아내가 죽은 지 넉 달도 못 되어 젊은 여자와 교제를 하고 청혼을 서두른 것은 잘못이었음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뉴 가든, 1740)

18세기 처음에는 사무모임은 분별력이 높은 사람들만이 초청을 받아서 하였고, 그래서 가난, 개인적인 과실, 회원 사이의 싸움에 대한 조언 같은, 공개돼서는 아니되는 일들은 비밀리에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무회는 회원 누구에게나 또 일반에게까지도 공개되어 있으므로 개인적인 일은 특별한 위원회에서 따로이 종용하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임의 이러한 일에 대한 실례는 옛날 의사록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임 공동체는 사회 안정의 한 요소로 옛날보다도 오늘은 더 한층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불안정한 경제조직에 있어서 사회를 휩쓸고 있는 폭풍에 맞서 버티어나가기에는 우리 가정은 너무도 작고 무력 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조부모, 숙모, 숙부까지 포함하는 커다란 족장 가족의 시대에는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위해서는 친우회는 언제나 전력해서 교육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 있는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왔었습니다.
오늘날은 국가가 어느 정도 경제적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너무 크기 때문에 그 기능은 인격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경제적 지지는 해줄 수 있지만,마찬가지로 필요한 심리적 지지를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정은 너무 작은 단위고 국가는 너무 커서 모임이나 교회 같은, 그 안에서는 모든 분자가 서로서로의 복지에 관해 강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종교 단체야말로 그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 안에서는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필요한 원조를 해줄 수 있습니다. 사회구조가 갈수록 더 원자화 분산화해가는 오늘에 있어서 그것을 메우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경제적 상호 의존을 하는 이러한 정도의 크기와 성격을 가지는 단체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농촌식의 살림, 올라가서는 오랜 대가족주의 살림이 없어짐에 따라, 근대 사회는 고독한 개인의 갈가리 찢어진 물커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화
모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이미 사무모임에서의 결의 방법에 관련해서 말한 것입니다. 조화라는 말의 의미는, 개인의 권위라든가 소수파에 대한 다수파의 압력이라든가 하는 어떠한 강제도 쓰지 않고 일치한 행동에 이르도록 하자는 평화주의의 기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치의 근원으로 속의 빛에 호소할 때 그것은 한 개인이나 한 당파가 다른 어느 개인이나 당파를 이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겼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약한 편에 있는 때가 많습니다.
친우회 안에서 가장 오래 계속해서 쓰여온 질문서는 이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사랑과 통일이 유지되어옵니까?’ 이것은 1682년에 시작됐습니다. 단체 안에 있는 분쟁이나 불화는 어떤 것이든지 모임의 관심거리였고, ‘불일치가 일어났으면 그것을 빨리 끝내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하는 오래 된 질문서는 대개 긍정으로써 대답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퀘이커와의 불일치를 소송으로 해결하는 것은 퀘이커 수양법에 위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퀘이커라면 그는 모임에 호소해야 합니다. 모임이 그 충돌을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는 것은 실례를 몇 개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셉 리처드와 찰즈 아샴 사이에 토지 측량에 대해 불화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생각한 결과, 전기 조셉이 이 이상 더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거기 대하여 찰즈에게 돈을 물어줄 것에 의견이 일치됐다. 그것이 그들 사이에 끝이 나고 모임이 보는 앞에서 돈은 물어줬다. (콩코드, 1684)

조셉 리처드와 월리엄 우드만시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모임에 내놓았다. 월리엄 우드만시는 자기가 어리석게도 그를 런던의 쓰리장이 같다고 말했던 것을 자백하고, 거기 대해 유감되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했으며, 조셉 리처드는 그것을 받아들여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온 싸움이 끝이 나기를 바라고 원한다고 했다. (체스터, 1686)

친우들이여, 나는 내 권리라 생각하고 어떤 시냇물의 길을 그 본래의 방향으로 돌리려 하다가 내 이웃인 쉬리엄 쉽풀리와 다툼을 일으켜서 서로 불화에까지 이르렀고, 싸움을 하는 동안에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늪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의 그러한 행동은 친우의 올바른 길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앞으로 그와 화목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벗 조수아 웨이로부터. (월밍톤, 1751)

어떤 때는 모임이 서로 싸움을 했던 친우들이 화해했노라고 발표하는 것을 믿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콩코드의 친우들이 존 러킨과 로버트 파일의 사건에 있어서 제 할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속으로는 서로 악의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둘 사이에 사랑과 우정을 회복한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데 그것을 그냥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언제까지나 진리의 증거가 침해를 당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까지보다 좀더 사랑이 그들 사이에 나타나지 않는 한 친우들이 그들에 대해 분명히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보고는 규칙을 범한 그들과 두 해 동안이나 두고 고심해오던 끝에 1769년 콩코드 월회의 열두 사람의 위원에 의하여 서명이 됐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회원에서 제명이 됐습니다.

평 등
평등은 퀘이커들의 한 사회적 증거의 맨 첫번 것입니다. 퀘이커들이 평화주의자가 되기 전에 벌써 퀘이커 군인들이 장교들을 상관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해서 군대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증거는 아마 얼마쯤은 퀘이커 전에 있었던 매우 강하게 평등감을 가지고 있던 종교단체인 레빨 러즈(Levellers)나 디거즈(Diggers)들에게서 전해받은 것일 것입니다. 레밸러즈의 지도들을 릴번(Lilburne)은 퀘이커가 됐고 디거즈의 지도자 원스턴리(Winstanley)는 되지 않았습니다. 원스턴리의 생각은 그 공산주의적인 점을 내놓고는 조지 폭스의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퀘이커의 평등론은 능력이나 경제적 자원이나 혹은 사회적 신분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등한 존경, 따라서 계급적 인종적 사회적 차별로부터 오는 모든 말과 행동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그것은 사업주와 고용인, 주인과 심부름꾼을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퀘이커들은 각 사람은 제 천직(天職)을 지켜야 한다는 데서 청교도와 일치합니다. 천직이란 각자의 능력과 흥미에 따라 어떤 특정한 직업을 담당해 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다는 종교적인 말입니다. 평등의 교리를 따르면 서로 다른 직업 사이에 있는 귀천의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심부름꾼의 대우에 대한 충고가 벌써 1656년에 한 교회 훈련에 대한 성명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듀스버리는 어떤 편지 속에서 “이제는 마님과 식모는 좋은 친구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합니다. 초기 퀘이커의 가장 유명한 여자 전도자 중의 몇 사람은 식모였습니다. 술탄과 터키 궁정을 향해 연설을 했던 메리 피셔(Mary Fisher)가 그 한 사람이고, 또 뉴욕 시가에서 설교를 했다 해서 피터 스타이브산트(Peter Stuyvesant)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갔던 도로디 와우(Dorthy Waugh)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주인과 심부름꾼이 서로 이름을 맞불렀고 심부름꾼이 가족과 한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모임 안에서는 나이나 남녀의 성이나 재능에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참석할 수 있다는 데 평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임에서 의논을 할 때 그 천품이 뛰어난 까닭으로 해서 남보다 더한 무게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는 수가 있지만 아무도 특별한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모임 밖에서는 이 교리 때문에 퀘이커는 평판이 대단히 좋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반으로 통행되는 모든 습관은 고도로 계급화한 영국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우들은 이러한 풍습을 무시하지 않으면 아니 됐기 때문에 거칠게, 버릇없게 뵈는 때가 많았습니다.
친우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의미로 하는 존칭의 사용이나 절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퀘이커들은 계급이나 인종에 근거를 두는 모든 사회적 차별을 인정하는 생각을 철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떤 형식으로든 자만심을 길러주기 쉬운 아첨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대개의 존칭은 사실과는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17세기에 일반으로 통용되던, 높은 사람에 대해 너(thou)라고 하지 않고 어른들(you)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바클레는 한 사람을 보고 어른들(you)이라고 하는 데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말법(語法)은 교만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거지나 심부름꾼을 보고는 단수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만입니까. 또 기도할 때 하나님보고도 그럽니다. 그래서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과 거지를 같은 표준에다 놓았습니다.

친우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른들(you)이라는 말을 써서 이 차별을 없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의 말법으로는 그것은 아첨으로 보였습니다. 또 ‘어른들’(you)은 복수기 때문에 진실치 못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미스터’니 ‘미세스’니 하는 존칭은 낮은 사람에게는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습니다. ‘각하’(your honor), ‘전하,(your highness) ‘귀하’(sir), ‘귀관’(your honor) ‘천한 종,(your humble servant), ‘존사’(the reverend)’ ‘폐하’(your majesty), ‘충성된 종’ (your obedient servant) 하는 칭호 등은 아첨 일 뿐만 아니라 저 쪽을 거짓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폐해버렸습니다. 덧붙여서 쓰는 ‘성’ (saint) 이란 말은 지명에서 까지 빼버렸습니다.

정말로 존경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른 사람 아닙니까? 거룩한 사람 아닙니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 그런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 노동자, 어리숙한 어부 중에는 없겠습니까?

‘평범한 말씨’ (plain language)라는 속에는 달이나 요일의 이름을 대개 평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 보통 쓰이는 명칭을 쓰지 않고 수자로서 이방 것도 들어 있었습니다.(출애굽 23:13) 한때는 ‘평범한 말씨’를 쓰는 것은 ‘평범한 옷’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위기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고, 새 생활 방식과 ‘십자가를 지는’ 표지였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말씨는, 목적격의 ‘네게’(thee)를 주격으로 쓰는 것까지 포함시켜서, 미국에서는 신앙 간증으로보다는 가족적인친밀감, 종교적 우정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퀘이커들은 이런 일 저런 일로 재판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경우 그들은 재판관을 존경하는 의미로 하는 모자 벗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에 노염을 사서 가혹한 대우를 받곤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는 그가 누구이거나 모자를 벗은 일이 없지만, 예배시간에 소리 내어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으로 머리를 내놨습니다. 젊은 개종자들이 부모 앞에서 모자를 썼기 때문에 엄한 책망을 듣고 매를 맞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토머스 엘우드(Thomas Ellwood)란 젊은이는 잠깐 동안에 모자를 셋이나 잃었습니다. 어떤 때는 스티븐 그렐레가 교황 앞에 뵈었을 때 됐던 것같이, 사환이나 관리의 손으로 살짝 묘하게 벗기 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회에서 낸 권고는 모든 ‘절과 무릎 꿇음’ 과 온갖 형식의 비굴한 짓을 잘못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노예들을 놔주기 전에도 그들을 점잖게 대우하고 있었습니다. 서인도제도에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건만 노예를 모임에 데리고 갔고, 그 아이들을 백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보내는 일도 많았습니다. 친우들이 노예는 심부름꾼 같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더 지나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극히 적은 수의 예외, 1695년에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의 살림을 제안했던 존 밸러즈(John Bellers)라든가 로버트 오원(Robert Owen)과 한가지로 뉴 라나크(New Lanark)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월리엄 알렌(William Allen)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친우들은 사회제도를 극단적으로 변혁하는 데는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람이 운영하기만하면 어떤 제도도 좋습니다” 하고 월리엄 펜은 말했습니다. 친우들은, 울만이 그의『부자에의 명심록』(Remembrance to the Rich)에서 말하듯이, 소유욕 속에 전쟁의 씨가 들어 있다고 보는 때에 가장 극단적인 사회주의에 가까왔습니다.

최근의 질문서는 현대의 친우들이 사회질서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거해줍니다. 퀘이커의 사업가들이 그들의 공장경영에 상당한 정도로 노동자를 참가시킨 실례가 적지 않게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주의할 만큼 널리 행해진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 구제사업가들은 자신을 자기네가 그 속에 들어가 일하는 그 사람들과 평등하게 놓으려는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것은 특히 미국 친우회 봉사단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인종적 평등은 오늘날 친우회의 학교에서 조금씩 되어가고 있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퀘이커들이 온갖 종류의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위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셉 존 거니(Josehp John Gurney)가 말한 ‘피부의 귀족주의’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