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작성자 바보새 16-01-29 01:53 조회1,740회 댓글0건
검색목록
제12장 박티 요가
 
 
 
 
크리슈나는 7장에서 카르마 요가를 완전히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경험적 또 영적지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8장에서는 말로 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는 브라만의 모습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뚜렷한 길을 ‘신앙의 길’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0장, 11장에서, 그 길에서는 자연 만나게 될 것인 그 능력의 나타냄, 그 우주적 모습의 보여줌을 다 마치고 나서, 11장 끝에 가서 모든 것의 마무름으로 그는 아르쥬나를 보고 모든 행동을 정성된 신앙을 가지고 또 집착함이 없이 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지금 아르쥬나는 묻는 것이다. “7장과 8장에서는 저에게 변하는 또는 변하지 않는 견지에서 볼 때, 최고 주재자의 인식을 뛰어넘는 모습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더 공경해야 할 것이라 하시고 나서는, 카르마 요가를 성취하려면, ‘인식을 뛰어넘는 불멸의 님’을 공경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7:19, 24, 8:21) 그리고는 저에게 요가에 전심을 모으고 싸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9장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이’를 공경하는, 볼 수 있는 길을 설명해주시고 난 다음, 당신께서는 제게 모든 행동을 최고 주재자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9: 27, 34, 11: 55) 그러면 그 두길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이 질문 중의 ‘인식할 수 있는 이’를 공경한다는 말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는 말의 의미는 예배의 다른 대상에 대하여서 공경을 드리란 말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하는 예배의 진정한 뜻은, 어떤 상징이나 대상을 향하여서 했든간에, 그 예배는 ‘아니 계신 곳이 없이 계시는 오직 한 분인 최고 주재자’에 대하여서 하는 것으로 믿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장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그러한 의미의 것이다. —틸라크
이미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환상은 오직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된다. 그러면 신앙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가 자연 문제된다. 다른 장은 다 못하더라도 이 12장만은 따로 다 외도록 해야 한다. 이 장은 가장 짧은 장이다. 믿는 자의 특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주의 깊이 보아야 한다. —간디
11장과 12장, 이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 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이’의 가지가지의 모습을 파노라마적으로보여주는 이 환상, 그와 같이 하여서 우리를 신앙에 대해 준비를 시켜놓고는 크리슈나는 12장에서 신앙의 짬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이 장은 아주 짧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따로 욀 수가 있고,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곧 쉽게 마음속에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청년인도」(1927. 1.12)
 
아르쥬나 말하기를
 
1. 그와 같이 언제나 마음을 다해 당신을 예배하는 사람과 불멸이시요 나타나 뵈지 않는 이를 예배하는 사람과 누가 더 요가를 잘 아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절대자와 하나되기를 원한다. 즉 하나이면서 인격적이 아니요, 이 우주와는 관계되어 있지 않는 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과 자연 속에 나타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한다. 그중에 누가 요가를 더 잘 아느냐 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현상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변함이 없고 나타나 뵈지 않는 세계만을 향해 힘을 쓸 것인가, 아니면, 나타나신 모습에 대해 정성을 다하고 그를 받들어 섬기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예배할 것은 절대냐 그렇지 않으면 인격신이냐? 브라만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슈바라냐?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마음을 내게다 쏟고, 언제나 마음을 오로지하여 지극한 믿음으로 나를 예배하는 사람, 그 사람을 나는 최상의 요기라고 생각한다.
 
3. 그러나 ‘불멸이신 이’ ‘형언할 수 없으신 이’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는 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이’ ‘불가사의이신 이’ ‘불변이신 이’ ‘부동이신 이’,그리고 ‘안고하신 이’를 예배하며,
불멸(不滅) 아크샤라(akshara).
형언할 수 없는 아니르데샤(anirdeshya).
나타나 뵈지 않는 아박타(avyakta), 미현현(未顯現).
아니 계신 곳 없으신 사르바트라가(sarvatraga), 편만(遍滿).
불가사의(不可思議) 아친챠(acintya).
불변 쿠타스다(kutastha), 변하지 않음(unchanging).
부동 아찰라(acala), 확고한(immovable).
안고(安固) 드루바(dhruva), 고정된(fixed).
 
4. 모든 감각을 다스리고, 어떤 경위에 처해서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모든 생류의 안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내게로 올 것이니라.
다스리고 산니야먀(sanniyamya).
크리슈나께서 감각을 ‘다스리’ 라고 했지, 물리치(to reject)라고 하지 않았다. —라다크리슈난
자기가 곧 우주적 자아(Self)와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세상의 복지를 위해 일한다. 5장 25절에 보면 해탈을 얻은 사람은 모든 피조물의 복지를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가 정진에 근본적 필요조건인 것을 말씀해주신 것이다.「마하바라타」에는 이러한 기도문이 적혀 있다. “오, 내가 어떻게 하면 고통당하는 모든 가슴속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고통을 지금, 또 영원히 내 몸에 질 수 있을 것인가. 그 길을 내게 가르쳐주실 이는 누구이실까.” —라다크리슈난
또 투카람(Tukaram)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참이다.
고통하는 이를 제 가슴에 안는 그 사람.
그런 사람 속에는
하나님 자신이
존엄하신 모습으로 살아 계신다.
그런 사람의 가슴은
자비, 온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그는 버림받은 사람을 제 것으로 안는다.
(That man is true
Who taketh to his bosom the afflicted:
In such a man
Dwelleth, augustly present,
God Himself:
The heart of such a man is filled abrim
With pity, gentleness and love:
He taketh the forsaken for his own.)(간디,「감옥에서 나오는 노래」)
 
5. ‘나타나 뵈지 않는 이’ 에다 마음을 부치는 사람의 어려움은 더욱 클 것이니, 나타나 뵈지 않는 이는, 몸을 가진 자에게는, 그 지극한 데 이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니라.
육신을 가진 인간은 나타나 뵈지 않는 이나 비인격적인 존재에 대하여는 다만 상상할 뿐이고, 말로 충분히 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네티(Neti) 네티”(그것도 아니, 그것도 아니) 하듯이 부정적으로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우상파괴주의자들도 결국에는 우상숭배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어떤 책을 숭배하고, 어떤 교회에 가고, 혹은 어떤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는, 그런 것은 다 형상없는 이를 무슨 형상이나 우상 속에서 예배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상 파괴자나 우상 숭배자나 다 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어서, ‘생각할 수도 없는 이’ ‘형상도 없는 이’ ‘인격적도 아닌 이’ ‘변함이 없으신 이’ 그 어떤 무엇이 있다는 일이다. 정성된 신자의 최고의 목적은 자기 신앙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박타(bhakta, 신자)는 자기를 없애버리고 바가반(Bhagavan, 거룩하신 주) 속에 녹아든다. 그가 되어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는 최상의 길은 자기를 어떤 형상에다 바치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타나 뵈지 않는 이’에게 가는 지름길은 사실은 가장 멀고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말이 있다. —간디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홀로 나신 하나님이 그를 알려주셨다. —「요한」1: 18)
 
6. 그러나 모든 행동을 내게 맡기고, 내게 매달려 정말 갈라짐 없는 마음의 요가로 나를 명상하며 예배하는 사람은,
 
7. 그 생각이 그와 같이 나에게 꽉 박혀 있는 사람은, 오 프리다의 아들아, 나는 그를 멀지 않아서 살고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낼 것이니라.
꽉 박혀 있는 아베쉬타(aveshita). 고정된(fixed)
살고 죽음의 바다 산사라 사가라트(sansara sagarat), 생사유전(生死流轉)의 도(道).
「로마서」의 바울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까?”(7: 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8: 2)—마하데브 데자이
하나님은 건져주시는 이요 구주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진심을 그에게 바칠 때 그는 우리를 죽음의 바다에서 들어내어 영원한 안식처에 두신다. 그 마음이 바이라갸(vairagya), 곧 내버림에 완전히 깊이 젖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신앙으로 하는 헌신의 길이 더욱더 바람직하다.「바가바타」 (Bhagavata)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앙의 길은 세속에 대해 싫증이 난 것도 아니고 애착을 하는 것도 아닌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길이다.” 프라브리티 다르마(pravritti dharma), 즉 행동의 길을 취하느냐, 니브리티 다르마(nivritti dharma), 즉 내버림의 길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성격의 문제일 뿐이다. —라다크리슈난
 
8. 네 마음을 내게만 꽉 박아놓아라. 네 이성을 내게다 왼통 붙들어두라. 그와 같이 하여 너는 이 앞으로 의심 없이 내 안에서만 살 것이니라.
마음 마나스(manas).
이성 부디(buddhi), 확신(conviction). 이해(understanding).
 
9. 가멸음을 차지하는 자야, 네가 만일 네 생각을 내게 굳게 집중할 수 없거든, 그때는 끊임없는 요가를 닦음으로써 내게 이르기를 원하여 라.
그러한 정신적 경지에 자연히 이르러지지 않을 때는 우리는 부단하고 끈질긴 정진의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지시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점차적으로 실천하는 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 성격을 점진적으로 정복하신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이는 나면서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힘들게 하여서 배우나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하나니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學之 及其知之一也) —공자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히 가리고, 도탑게 행할 것이니. 배우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배우거든 잘하지 못하는 것을 두지 말며, 묻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묻거든 알지 못하는 것을 두지 말며, 생각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생각하거든 얻지 못한 것을 두지 말며, 가리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가리거든 밝히지 못한 것을 두지 말며, 행치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행하거든 도탑게 하지 못한 것을 두지 말아, 남이 한 번에 한다면 나는 백 번해서 될 생각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한다면 나는 천 번해서 될 생각을 하여서, 이 길을 정말 잘 따른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요,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 有弗 問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強) —「중용」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어야만 능히 제 바탈을 다할 수 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중용」
그담은(성인같이 나면서 저절로 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능히 할 수 있는) 어느 부분에서 지극히 참되게 하는 것인데, 한 부분에서라도 잘한다면 성(誠)된 지경에 갈 수가 있다. (전체 천성을 한꺼번에 다는 못하지만 부분에서라도 참은 참이다.) 그러므로 곡(曲), 곧 어느 한 부분을 통해서도 성(誠)의 지경에 이를 수가 있다. (誠은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철저해지면) 형상에 나타나게 되고, 나타나면 알아볼 수가 있게 드러나고,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저절로 작용이 일어나고, 작용하면 달라지고, 달라지면 나중에는 마침내 자유자재하는 활동 곧 화함(化, 새로 난 지경)에 이르게 된다.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중용」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되시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5:7〜9)
 
10. 네가 만일 끊임없는 요가를 닦을 능력조차도 없거든, 내게 봉사하는 것을 최고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되어라. 모든 행동을 나를 위해서 함으로써 너는 완전에 이를 수 있느니라.
완전 시딤(siddhim), 성만위(成滿位).
나를 봉사 마트카르마(matkarma), 내 일(my-work).
정신통일이, 마음의 바깥 버릇, 혹은 주위 환경 때문에 하기가 어려울 때는 모든 행동을 주를 위해 하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나 영원한 참이 원지를 알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었다.…“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도 많은 일로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지만, 정말 요긴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으니,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말라.—「누가복음」(10:39∼42)
마트카르마는 때로는 ‘주님 봉사’ (service of the Lord)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예배. 꽃이나 열매를 바치는 일, 분향, 성전 세움, 경전 외기 같은 것들이다. —라다크리슈난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 머리에 부었다……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견하지 말라.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이 여자는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내 장례를 위하여 이 향유를 부어준 것이다.” ―「마가복음」(14:3~9)
 
11.네가 만일 그것마저 할 수 없거든, 그때는 나의 요가에 돌아와, 자아를 극복하면서, 일체 행동의 열매를 내버려라.
나의 요가에 돌아와(madyogam ashrita) 곧 크리슈나의 요가, 곧 놀라운 능력으로 돌아와, 혹은 귀의하여.
자아를 극복하면서(yatatmavan) 점차적으로 자기를 통제 하여서.
일체의 행동을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가 없을 때는, 그 하는 일을 결과를 바라지 말고 해야 한다. 니슈카마카르마(nishkamakarma) 즉, 욕심 없이 하는 행동의 요가의 길이다. 그러면 제 힘으로 하자는 생각을 다 버리고 자신을 전수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내맡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기 훈련에 힘써, 온전히 결과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동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12. 진실로 지식은 끊임없는 닦음보다 나으며, 명상은 지식 보다 낫고, 행동의 열매를 내버림은 명상보다 나으니, 그 내버림으로 인하여 즉시로 평화가 오느니라.
지식 즈나나(jnana)
닦음 아뱌사(abhyasa), 정신통일.
명상 쟈나(dhyana), 선정(禪定).
내버림 챠가(tyaga), 사리(捨離).
슈리다라(Sridhara)는 해석하기를 즈나나는 아베샤(avesha), 곧,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이라 했고, 쟈나, 즉 선정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됨이라 해서 그것이 영혼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되는 데서 완전에 이른 다고 했다.
「수랴 기타」(Surya Gita)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앙(혹은 헌신)은 지식보다 낫고, 바람 없는 행동은 신앙보다 낫다. 이 베단타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이 최상의 사람이다.” 신앙, 명상, 정신통일은 행동의 열매 내버림(karmaphatalyaga)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이 나중 것이 마음의 불안의 근원을 부숴버리고 깊은 속의 고요와 평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그것이 영적 생활의 바로 주춧돌이다. 박티(신앙심에 의한) 요가의 이 강조는 지식 명상보다도 헌신적인 신앙심과 모든 하는 일은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몇 절의 말들은 카르마 요가(실행에 의한 요가)의 견지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말이다. 거기서 처음에 엄격한 수련, 지식, 기도, 그밖의 여러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하는 카르마 요가를 성취하는 좋은 방법으로 말하고 나서는, 가지가지 방법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리고는 12절에서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 즉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desireless karma yoga) 의 우수성을 내세운다. 그렇다고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의 우수성을 말한 것이 여기에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분명히 3장 8 절에도, 5장 2절에도, 6장 46절에도 있다. 그리고 아르쥬나는 카르마 요가를 행동의 결과 포기의 형식으로 하라는 조언을 여러 곳에서 들었다. 그런데「기타」의 종교와는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의론은 자기네의 주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위의 절들의 말, 특히 12절을 왜곡해서 해석하려고 한다. 순전한 지식주의, 다시 말해서, 삼캬론의 주석가들은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이 역시 지식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즈나나’라는 말을 단순한 학문적인 지식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행동의 결과를 버리는데 대한 찬양은 하나의 ‘아르다바다’(arthavada), 즉 묵어버린 찬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파탄잘리 요가(patanjali-yoga)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행동의 결과의 포기를 끊임없는 엄격한 수련(abhyasa)의 길보다 높은 자리에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오직 신앙의 길만을 주장하는 사람, 즉 신앙 외의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행동의 결과 포기를 명상, 즉 신앙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카르마 요가 안에 신앙도 포함되어 있고, 「기타」는 그 길을 권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파탄잘리 요가와도 즈나나 요가와도, 그리고 신앙의 길과도 다른데, 그것은 사실상 지금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훈을 지지하는 주석은 얻어볼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기타」의 주석에서는 행동의 결과 포기에 대한 찬양은 묵은 찬양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잘못이다. 누구나 「기타」가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 절의 의미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낄 것이 전혀 없다. 일단 사람이 행동을 아주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바람 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날 때 글자 그대로 하는 행동의 포기를 강조하는 ‘지식의 길’(jnana-marga) 또 생리기관의 재주넘이나 강조할 뿐인 ‘파탄잘리 요가’, 또 모든 행동에 대해 못 본 체할 뿐인 ‘신앙의 길’,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카르마 요가’ 보다 낮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와 같이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의 뛰어남이 증명될 때 남는 문제는 오직 이것이다. 그 길에 도달하는 데 가장 필요한 평등관을 그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그 방법은 세 가지다. 즉 끊임없는 닦음(abhyasa)과 영적 지식(jnana)과 명상(dhyana, 禪定)이다. 이 셋 중에서 만일 끊임없는 닦음을 할 수 없거든, 남은 둘, 즈나나와 쟈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할 것이다.「기타」는 말하기를 이 방법들은 차례로 든 그 순서대로 쉬운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할 수 없거든, 곧 카르마 요가를 시작하라고「기타」는 말한다. 이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즉 끊임없는 닦음도, 영적 지식도, 명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카르마 요가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카르마 요가가 가장 쉬운 길(易行道)이라는 말은 무의미한 소리라고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반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12절은 행동의 결과 포기를 대번에 해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도, 우선 크리슈나가 가르쳐주는 카르마 요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타타’(tatah), 그런 다음 다시 하고 다시 해서 차츰 숙련된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아무런 모순도 없다. —틸라크
‘닦음’. 아뱌사는 명상의 요가를 닦고 심리 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지식’, 즈나나는 지적인 노력을 이름이요, ‘통일’, 쟈나는 정성으로 하는 예배다. 만일 이 세 가지를 다하고 나서도 행동의 열매를 내버리는 데 가지 못한다면 ‘닦음’도 ‘닦음’이 아니요, ‘지식’도 ‘지식’이 아니며, ‘명상(통일)’도 ‘명상’이 아니다.
이절은 이날껏 모든 번역자, 주석자에게 완전히 수수께끼다.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것을, 그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려고 힐(Hill)같이 감히 영웅적인 시도를 해본 이도 있다. 그 여러 가지 설명들을 다 말하는 것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간디까지도 넣어 대개의 설명이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중 하나가(비노바가 낸 것) 샤스트리(Bhide Shastri)에 의해 일부분 지지를 받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이날껏 나온 것 중에 가장 좋다. 그것을 나의 역주 속에 인용하였는데, 그 일부를 여기 쓴다.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을 11절에서는 가장 쉬운 길로 제시하였고, 12절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쉬운 길이 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 다음 보다 높은 지경, 그것은 첫 단계의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것은 내버림의 비결에 대한 지식이다. 그보다 높으면서 또 낮은 것의 당연한 결과로 오는 지경은 통일 즉, 그 방법에 대해 통일(집중)된 열성이다. 그것이 종국에 가서 행동의 결과를 완전히 내버린 것으로 결과를 이룬다. 이 완전한 내버림이 영원한 평화를 의미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13. 일체의 산 물건에 대해 악의를 품는 일이 없고, 그저 우애하고 자비스러우며, 내 것이란 생각도, 나란 생각도 없고, 고통과 안락을 한가지로 여기며 용서하고,
 
14. 언제나 만족하고 요가를 닦으며, 자기를 제어하고 결심이 굳으며, 마음과 이성을 내게 바치는 사람, 그는 나를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5. 세상 사람이 그를 싫어하지도 않고, 그가 세상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즐거움, 노여움, 두려움, 괴로움을 다 벗어난 사람, 그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6. 무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고, 정결하고 일에 능숙하며, 관심거리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으며, 모든 경영을 내버린 사람, 그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7. 제 기뻐하는 일도 없고, 언제 원망하는 일도 없으며, 언제 슬퍼도 아니하고, 언제 바라지도 아니하며, 선, 불선을 떠나서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8. 적과 벗에게 평등이 하며, 명예, 불명예를 같이 보고, 추위, 더위, 괴롬, 즐거움에도 한결같으며, 애착을 버리고,
 
19. 난과 칭찬을 같이 보며, 잠잠하여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을 곳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턱 가라앉아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있을 곳이 없이’ (aniketah)란 일정한 처소 없이, 집이 없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는 하면서도 어느 가정에도 집에도 매여 있지 않다. 이런 혼들은 이 가족 혹은 저 사회단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정한 집이 없다. 그들은 어떤 한곳에 매여 있거나 어떤 한 공동체에 갇혀 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매여 있지도 않고 어떤 한 불변하는 권위를 지킬 필요도 없다. 전체 인류의 안녕이 그들의 관심거리다. 이러한 산야신들(sannyasins, 出家僧)은 어떤 사회단체에서도 날 수 있다.「마하바라타」에 “어떤 옷도 입고 어떤 음식도 먹고 어떤 데서도 자는 사람들, 신들은 그들을 가리켜 브라만(brahmin)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
천하의 넓은 집에 있으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한길을 걸어, 뜻 얻으면 씨로 더불어 말미암고, 뜻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걸어, 부귀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하고, 가난과 천함으로도 능히 뜻을 고치게 못하며, 위엄과 힘으로도 능히 굽히게 할 수 없으니, 이를 일러 사내라 하느니라.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 行其道 富貴下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
 
20. 러나 이미 말한 대로, 불멸의 다르마를 쫓으며, 믿음을 가지고, 나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는 신앙자, 그는 나의 가장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불멸의 다르마’(dharmyamrita) 이것을 라다크리슈난은 ‘불멸의 지혜’라 번역했고, 간디는 ‘거룩한 교훈의 감로(甘露)’라 했으며, 마하데브 데자이는 ‘다르마의 짬’ 이라 했고, 틸라크는 ‘감로 같은 교훈’ 이라 했으며, 다까구스(高楠順次郞)는 ‘법(法)의 감로’ 라고 했고,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불멸의 진리의 능력’(the lawful power of immortality)이라고 했다.
‘믿음을 가지고’ 라 한 것은 체험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영혼이 믿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 속에는 마음과 생명의 승낙이 들어 있다.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는 일이지만 그밖의 사람에게는 그것은 믿음이요, 부름이요, 강요다.
모든 것 속에 ‘한 나’(the One Self)를 보았을 때, 평등한 마음, 이기적인 욕심에서 벗어남, 우리 마음 전부를 ‘속에 계시는 영에 내맡김’과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일어난다. 이런 힘들이 나타나게 될 때 우리 신앙은 완전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된 후에는 우리 생활은 이미 애착과 반발, 벗과 대적, 쾌락과 고통의 힘에 끌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 자신을 하나님께, 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인 세계봉사에 바치자는 충동에 따라서만 된다.—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 12장 박티 요가의 끝이니 브라만의 지식의 일부인 요가에 대한 학문에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하는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8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작성자 바보새 16-01-29 01:37 조회1,126회 댓글0건
검색목록
제 11장 일체상(一切相)
 
 
 
 
앞장에서 거룩하신 주께서 자기의 나타나 뵘을 말씀하시자, 아르쥬나는 그 일체상(一切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장에는 아르쥬나의 요구에 따라 크리슈나가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황홀한 지경이어서 이것을「기타」의 절정이라고 하고, 다른「기타」를 쓴 사람들이 다 이것을 베껴 썼다. ―틸라크
일체상 비슈바루파(vishvarupa), 비슈바(vishva)는 모든 방향으로, 루파(rupa)는 모습, 상(相).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저에 대한 특별하신 은총으로 가장 높은 신비의 영적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미혹은 벗겨졌습니다.
미혹 모호(moho).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저 스스로 존재한다는 생각,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고 움직인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라다크리슈난
 
2. 연꽃 같은 눈을 가지신이여, 모든 것의 나고 사라짐을 당신께로부터 자세히 풀었습니다. 또한 당신의 다함이 없으신 대아(大我)의 영광도 들었습니다.
 
3. 오, 지극히 높으신 주여, 당신은 스스로 그렇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4. 오, 주시여, 만일 저로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든, 오, 요게슈바라시여, 당신의 불멸의 몸을 제게 보여주시옵소서.
요게슈바라(Yogeshvara) 요가의 주.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복음」
삶 있음은 삶 없음에서, 달라짐 있음은 달라짐 없음에서, 나지 않는 것이 나게 할 수 있고,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달라짐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것은 나지 않을 수 없고 달라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늘 나고 늘 달라진다. 늘 나고 늘 달라지는 것은 나지 않는 때가 없고 달라지지 않는 때 없다.(有生不生 有化不化 不生者能生生 不化者能化化生 者不能不生 化者不能不化 故常生常化 常生常化者 無時不生 無時不化) ―열자
이름 없어 하늘 땅의 비롯, 이름 있어 모든 것의 어미,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서 그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서 그 끄트머리를 본다. 이 둘은 한가지로 나와서 이름이 다르니, 한가지로 일러 깜, 깜 중 또 깜이 모든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의 문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맨첨에 없음이 있어, 있음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하나가 일어나는 데여서, 하나가 있을 뿐, 꼴이 없다. 모든 것이 그것을 얻어 사니 일러서 큼이라 한다. (泰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而生 謂之德) ―장자
‘연꽃잎 같은 눈을 가진 이’ (kamala-patraksha) 연꽃 이파리 같은 까맣고, 보드랍고, 큰 눈을 가진 크리슈나를 가리킨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것 속에 영원의 영이 들어 계시는 줄을 아는 것과 그 모습을 보는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다. 아르쥬나는 그 뵈지 않는 영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꼴, 그 일체상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이는 모든 산 것의 근본이요 또 무너짐이다. 추상적인 형이상의 진리가 볼 수 있는 실체로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는 1절에서 영적 지식(ashyatma)이라는 말로 나타나는 최고 주재자(Parameshvara)의 불멸, 불가사의한 모습을 알게 됐다. 그것은 크리슈나가 7장, 8장에서 말한 것이다. 또 그외에 7장에서 즈나나, 비즈나나를 말한 다음 9장, 10장에서 말한 가지가지의 인식할 수 있는 모습에 관해서도 알게 됐다. 2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근원과 종말”이라는 말은 인식할 수 있는 허다한 것들이 어떻게 홀로 하나인,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3절의 아래 위 두 부분을 서로 딴 문장으로 보고 아래와 같이 읽는다. “오, 지극히 높으신 주시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오, 지극히 존귀하신 이시여, 저는 당신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두 부분은 한 문장으로 합해 보는 것이 옳다.「파라마르 다프라파」(Paramarthaprapa) 주석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4절에 나오는 ‘요게슈바라’란 말은 요가의 주라는 말이지, 요기(요가 닦는 사람)의 주란 말이 아니다. ‘요가’라는 말을 인식할 수 없는 것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내는 힘 혹은 방법의 뜻으로 해석하는 예는 전에도 있었다(7:25, 9:5). 크리슈나는 지금 자기의 우주적인 모습을 그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보여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요게슈바라’라는 명칭은 고의로 사용한 것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프리다의 아들아, 볼지어다. 내 모습은 백 가지 천 가지 종류요 거룩하고, 여러 빛깔이요 모양이니라.
하나님의 경악케 하는 자기 나타냄의 능력이 우주의 변화와 궁극의 참 의미를 이해한 아르쥬나의 앞에 나타났다.「마하바라타」6장 131에는 크리슈나가 두료다나에게 다가갔을 때 두료다나가 그를 포로로 잡으려 하자 크리슈나는 자기의 세계적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 환상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영적 체험이다. 종교적 체험의 기록 안에는 그러한 환상이 수두룩하다. 예수의 변모, 사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콘스탄틴의 “이 표적을 가지고 정복하라”는 표어가 붙은 십자가, 잔다르크의 환상 같은 것은 다 아르쥬나의 것과 비슷한 것들이다.
성 힐데가드(Saint Hildegard)는 환상 속에 뚜렷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가 자기를 누구라고 했다는 것이 흡사히「기타」에 있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모든 생명의 불꽃을 불어 보내는 그 지극히 높고도 두려운 힘이다. 죽음은 내 안에 그림자도 없지만, 나는 그것을 여기 저기 보낸다. 그러므로 나는 지혜를 날개처럼 몸에 두르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들 속에 빛나는 그 거룩한 본체의 살아 있는 무서운 본질이다. 나는 물 속에서 반짝이고, 해와 달과 별 속에서 불탄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의 신비로운 힘도 내 것이다. 나는 모든 산것들의 숨을 붙들어주며, 숲 속에도 불고 꽃 속에도 불며, 물들이 산것처럼 흘러갈 때 그것도 나다. 온 땅을 버티는 기둥을 내가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사는 것은 나 때문이요, 나는 그 속에 있고 그 생명이다. 나는 지혜요, 우뢰같이 몰아치는 말씀의 바람으로 내가 만물을 지었다. 나는 모든 것을 꿰뚫어 그들을 죽지 않게 한다. 나는 생명이다.” ―라다크리슈난
 
6. 볼지어다, 바라타족의 아들아, 아디차들을, 바수들을, 루드라들을, 저 두 아슈빈들을, 그리고 마루트들을, 일찍이 보지 못한 여러 기이한 것들을.
아디챠들(Adityas) 열 두 태양신들.
바수들(Vasus) 여덟 세천(世天)들.
루드라들(Rudras) 열 한 황신(荒神)들.
아슈빈들(Ashvins) 두 구생신(俱生神).
마루트들(Maruts) 마흔 여넓의 풍신(風神)들.
 
7. 볼지어다, 구다케샤야, 오늘 이 내 몸 안에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온 우주가 온전히 하나 되어 있느니라. 또 네가 보기 원하는 그 밖의 어떤 것도.
 
8. 그러나 너는 네 그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내 네게 하늘눈을 주리니 그것으로 내 신비의 능력을 보라.
어떤 육신의 눈도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인간의 눈은 그런 빛을 뛰어넘은 것을 보게는 되어 있지 않다. 디뱌차크수스(divya-caksus)는 하늘눈(天眼)이고 맘사차크수스(mamsa-caksus)는 육안이다.
인간의 눈은 외양을 볼 뿐이고, 속의 혼은 영적 눈에 의하여서만 알 수 있다. 지식에는 우리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즉 감각의 전달과 지능의 활동에 의하여 되는 지식과, 우리가 은총의 영향을 받아서 되는, 즉 영적 실재의 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다. 신의 환상은 신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전체가 하나님의 신성 속에 있는 우주적인 다양성의 통일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 시적인 이야기로 된다.
환상이란 하나의 정신적 구성이 아니라 유일한 마음의 저쪽에서 하는 진리의 열어 밝힘이다. 체험의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것이 여기서 드러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산자야 말하기를
 
9. 임금이시여, 이렇듯 말씀하시면서 위대하신 요가의 주, 하리께서는 프리다의 아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슈바라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산자야 1장에 나오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에게 전장의 모양을 설명하는 마부.
하리(Hari)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를 가리키는 칭호.
이슈바라 자재주(自在主).
 
10. 가지가지의 입과 눈을 가지고, 가지가지의 놀라운 다르샨을 가지고, 여러 가지 거룩한 장식을 하고, 여러 가지 거룩한 무기를 높이 들고,
다르샨(darshan) 바라봄, 목격(sight).
 
11.하늘 꽃줄 하늘 옷을 늘이시고, 하늘 향을 바르시며, 모든 기묘한 것을 갖추시고 눈이 부시며, 한이 없으시고, 모든 방향으로 보시는 낯을 가지신 하늘 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2. 만일 천 개의 해가 하늘에 나타나 그 빛을 단번에 쏟는다면, 혹 그 높으신 이의 광채에 비슷하올까.
 
13. 판두족의 왕자는 거기서 가지가지로 갈라져 있는 온 세계가 신 중의 신이신 그 한 몸 속에 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
 
14. 그때에 그 가멸음의 정복자는 놀람에 맞아 머리터럭이 곤두서고 머리를 조아려 주 앞에 절하며 합장하고 사퇴기를,
 
아르쥬나 말하기를
 
15. 오, 주시여, 저는 당신의 몸 안에 모든 천신들과 또 여러 이상한 생물의 무리와, 연꽃 위에 앉으신 모든 신들의 주이신 브라마와, 모든 성인들과 또 모든 하늘 용들을 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면 시야가 넓어져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기 쉬운 시끄러운 근심 걱정의 속세의 저쪽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조그만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우주의 하잘것없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르쥬나는 이제 우주에 가득 차는 무한 무수의 영의 무리를 본다. ―라다크리슈난
 
16. 저는 허다한 팔과 배와, 허다한 입과 허다한 눈을 가지시고 사방에 무한한 모습을 나타내시는 당신을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끝과 중간과 맨첨을 저는 보지 못합니다. 오, 일체의 주시요 일체의 모습이신 주시여!
 
17. 제가 보니 당신은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드시고, 윤보(輪寶)를 가지시고 사방으로 광채를 발하시는 빛의 덩어리시요, 타오르는 불꽃같이 태양같이 헤아릴 수 없어 눈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18. 당신은 불멸이시요, 깨달아 이르는 지극히 높으심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궁극의 근본이시오, 당신은 무너짐 없는 영원한 진리를 지켜주시는 이이십니다. 당신은 으뜸 사람이시라 저는 믿습니다.
 
19.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으시고 힘이 한이 없으시며, 한없는 팔을 가지시고, 해 달로 눈을 삼으시는 당신이 입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이 우주를 불사르고 계신 것을 제가 봅니다.
 
20. 이 궁창과 땅 사이의 공간과 또 모든 방향이 오직 당신 하나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오, 마하트마시여, 당신의 이 놀랍고 무서운 모습을 보고 삼계가 부르르 떱니다.
 
21. 저 모든 천신의 무리가 당신께로 들어가고, 더러는 두려워 합장하고 찬송하며, 대성인과 성만위(成滿位)에 이른 성자들의 떼가 “복이 있도다”를 외며 울려퍼지는 찬미로 당신을 노래하옵니다.
 
22. 루드라들, 아디차들, 바수들, 사드야들, 비슈바데바들,. 아슈빈들, 마루트들, 우슈마파들, 간다르바들, 야크샤들, 아수라들, 싯다들의 모든 무리가 놀람으로 당신을 바라보옵니다.
사드야들(Sadhyas) 성취신(成就神).
비슈바데바들(Vishvadevas) 일체신(ᅳ切神).
우슈마파들(Ushmapas) 조신(祖神).
야크샤들(Yakshas) 야차신(夜叉神).
아수라들(Asuras) 수라, 아수라(阿修羅).
 
23. 오, 억센 팔을 가지신이여, 많은 입과 많은 눈과 많은 팔, 다리, 발과 많은 배와 많은 끔찍스런 이빨을 가진 당신의 엄청난 몸을 보고 온 세계도 저도 놀랍니다.
 
24. 당신의 하늘 닿는, 갖가지 빛의 불길이, 입을 쩍 벌리고 이글거리는 눈을 하신 모습을 보고, 오, 비슈누이신 이여, 제 속의 혼은 무서워 떨고, 가만 있을 수도, 맘이 평안할 수도 없습니다.
 
25. 저는 당신 입의 그 무서운 이빨을 볼 때, 타오르는 멸망의 불길을 보는 것 같아, 어디가 어딘지를 잊어버리고 평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오, 신들의 신이시여, 세계의 피난처시여!
열망의 불길 칼랄라나(kalalana), 겁화(劫火).
 
26. 저기 있는 모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왕자들, 모든 나라 왕의 무리들, 비슈마와 드로나와 또 카르나와, 그리고 한가지로 우리 편의 우두머리 되는 용사들,
 
27. 휩쓸려 당신의 무섭게 벌린 입의 이빨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것은 이빨 사이에 끼여 그 대가리가 부서지고 가루가 된 것이 보입니다.
 
28. 마치 많은 시냇물의 사나운 물결이 한데 밀려 바다로 들이닫듯이, 그들 세상의 날쌘 영웅들이 불타는 당신 입 속으로 달려들어 갑니다.
 
29. 마치 부나비들이 타는 불 속으로 몰아쳐 들어가 타 죽듯이, 모든 사람이 죽기 위해 당신 입 속으로 몰아쳐 들어갑니다.
 
30. 오, 비슈누 신이시여, 당신은 사면에 있어서 불타는 당신의 입으로 삼켜 씹어 온 세계를 먹어치우십니다. 당신의 무서운 불빛이 온 세계에 충만하여 그 불꽃으로 그것을 살라버립니다.
 
31. 그렇게 끔찍한 모습을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씀해 주시옵소서! 당신께로 나갑니다. 모든 신 중에 가장 크신 주시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맨첨이신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하자는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무지로 인하여 눈이 어두운 인생들은 자기 멸망으로 달음질치는데, 거룩하신 주재자는 그것을 그대로 두신다. 그들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원할 때는 그 결과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행동은 우리를 결과에다 붙들어 맨다. 이 원인 결과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의 한 발현이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실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을 통하여서, 이 온 우주가 그 크기와, 아름다움과, 두려움과, 신들, 축복받은 영혼들, 동물들, 식물들, 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계시므로 자기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에 잡히고, 어떤 때는 저런 생각에 잡힌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신다. 거기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2. 나는 시간이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자다. 다 자랐다. 이제 나는 모든 세계를 삼켜버리려 나타났다. 네가 아니더라도, 저기 마주서 진을 벌이고 있는 모든 무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라.
시간 칼라(kala)
시간은 우주의 원동자(原動者)다. 하나님을 만일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끝없이 창조하는 이요 끝없이 파괴하는 이다. 시간은 끝없는 유전(流轉)이다.
최고의 주재자는 창조와 파괴를 다 주장한다.「기타」는 누구나 보통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선을 주장하고 사탄은 악을 주장한다는 사상에 찬성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유한한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 생명도, 창조도, 고통도, 죽음도 그에 게서 나온다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시간 밖에 서기 때문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시간 위에 올라서게 된다면 그것을 주장할 수 있다. 시간 뒤에 서시는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멀리 내다보시고, 모든 사건을 어떻게 주관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르쥬나에게 일의 원인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작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막아낼 수 없는 자연적인 결과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대적들의 멸망은 벌써 오래 전에 저지른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이 되어 있다. 비인격적인 운명이란 것이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섭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하나의 일반적인 우주적 필연이다. 즉 모이라(moira)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면의 나타남이므로 그의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사람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는 제 뜻으로 하는 모든 항의가 다 소용이 없다. —라다크리슈난
 
33.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라. 그리하여 네 영광을 얻을지어다. 네 대적을 정복하고 풍성한 왕국을 누릴지어다.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하여 부서졌느니라. 오, 왼손잡이야, 너는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
왼손잡이 사뱌사친(Savyasacin), 좌우 양손을 다 잘 쓰는 사람, 아르쥬나.
다만 그 잡은 것 니미타마트람(nimittamatram, merely the occasion, just the cause, no more than an instrument), 외인(外因)뿐.
 
34. 드로나 장군, 비슈마 장군, 쟈야드라다 장군, 카르나 장군, 그밖의 용사들도 이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느니라. 너는 그들을 죽여라! 겁내지 말라! 싸워라! 너는 싸움에서 대적을 정복할 것이다.
쟈야드라다(Jayadratha) 위대한 전사.
운명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했으므로 아르쥬나는 그 잡은 것이 되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전능자의 손에 쥐인 한 개의 피리다. 그러면 그는 자기 목적대로 행하여 위대한 진화를 성취하신다. 아르쥬나가 만일 자기의 불완전한 판단에 따라 행하려 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한테 속게 된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특권에 침입할 수는 없다. 무기를 들지 못하겠다 했을 때 아르쥬나는 건방짐을 범했다.
‘다만 그 잡은 것’이 되라고 했을 때 저자는 하나님의 예정설을 지지하고 있고, 개인은 완전히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의 의지와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정은 이미 되어 있는 것이므로 아르쥬나는 그것을 변경할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개의 힘없는 잡힌 거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되는 대로 하는 이가 아니다. 이 두 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흔히 있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모든 것을 홀로 주장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속에 하나님에게 온전히 의지하자는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은 (완전히 타자)로서 우리와 절대적 대립 속에서 있는 이라는 뜻이 여기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직관이 여기 나와 있다. 그것은 욥기나 바울의 서간에도 나와 있다. “지음을 받은 자가 어찌 지으신 이를 향하여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할 수 있느냐?”
우리가 우주의 과정을 다 예정의 전개로만, 즉 미리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를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행동은 미리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영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의 어느 순간 속에도 영원이 다 현존해 있다는 뜻을 긍정하려 하고 있다. 시간내에서 되는 진화의 각 순간의 이 극단적인 특이성이 하나님의 영원과 양립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다 인간의 기구적인 성격을 통해서 된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우리는 하나님 손 안에 잡힌 것답게 행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온전히 내놓아 하나님으로 하여금 온전히 흡수해버리게 하여 자아의 형적을 남겨두지 않게 한다. 우리는, “당신의 뜻 속에 우리 평화는 있습니다”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그의 명령을 받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23:46) 아르쥬나는 ‘당신의 뜻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직 하시는 것이고 저는 다만 잡힌 것일 뿐입니다’ 하고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끔찍한 참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인간의 표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막이 올라가고, 그리하여 전능하신 이의 목적이 드러났을 때 그는 거기 가만히 순종할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원하던 것, 그가 이 세상에서 또는 오는 세상에서 이렇게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이제는 다시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뒤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그것을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거기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모든 행동이 다 그것을 뛰어넘는 저 먼 어떤 것의 상징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아미 나에 의하여 죽여졌다’(maya hatan) 함은 하나님에 의하여 운명이 결장되었음 뜻한다.
하나님은 그들 생애의 가는 방향, 그 종착점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미미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르쥬나는 섭리의 사무를 집행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외적으로는 자연의 주요, 내적으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거기서 초연하고 있을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여호와의 칙령을 들으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시편」(2:7∼9)
 
산자야 말하기를
 
35. 이렇듯 케샤바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관을 쓴 이는 떨며 합장하고 절한 후, 다시금 두려움으로 크리슈나 앞에 업디어 더듬는 말로 했습니다.
케샤바(Keshava) 피발천(被髮天),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보관을 쓴 이 아르쥬나를 가리킴.
 
아르쥬나 말하기를
 
36. 오, 흐리쉬케샤시여, 온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여 즐거워하고 알뜰히 사모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옵니다. 나찰들은 두려워 사방으로 도망갔고, 모든 싯다상가들은 당신 앞에 업디어 절 하옵니다.
흐리쉬케샤(Hrishikesha) 머리터럭 거슬린 이,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나찰(rakshasa) 악한 귀신.
싯다 상가(siddha-sangha) 깨달아서 완전한 지경에 이른 성자들.
아르쥬나는 한편 경탄하고 한편 고뇌하는 영적 황홀 속에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양한다. 그는 시간의 파괴력을 보는 동시에 또 우주를 다스리고 있는 법칙이 임해 계신 것을 보았다. 그 첫번 것은 두려움을 주었고, 그 둘째번 것은 황홀한 기쁨을 주었다. —라다크리슈난
 
37. 오, 마하트마시여, 또 그들이 어찌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맨첨의 창조주시요, 브라만보다도 더 크시고, 무한의 신이시며 만신의 신이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십니다. 당신은 불멸이시요, 있음이요, 안 있음이시며, 또 그것을 뛰어넘으신 이십니다.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 위대하신 이, 대성(大聖).
맨첨의 창조주 아디카르트레(Adikartre).
우주의 피난처 쟈간니바사(jagannevassa), 그 안에 온 우주가 거하는 하나님.
있음, 안 있음(sat-asat) 유와 비유(有, 非有), 원인 결과.
맨 처음의 창조주, 혹은 당신은 브라마의 창조주이시기까지 하옵니다. —라다크리슈난
「기타」(7: 24, 8:20, 15:16)를 보면 사트(sat)와 아사트(asat)란 말은, 여기서는 인식할 수 있는, 인식할 수 없는(vyakta and avyakta)의 뜻으로, 혹은 변하는 또는 안 변하는(kshara and akshara)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사트아사트를 뛰어넘는 원리를「기타」에선 불멸의 브라만(akshara-brahman) 이라고 한다. 13장 12절에 나온 말대로 한다면 “나는 사트도 아니요, 아사트도 아니다.” 아크샤라라는 말을「기타」에서는 프라크리티에 대해 쓰고, 어떤 때는 파라브라만에 대해서 쓴다. —틸라크
 
38. 당신은 맨 처음의 신이시요, 한 옛적의 으뜸 사람이시며 이 온 우주의 궁극의 쉴 곳이십니다. 당신은 아시는 이요, 또 알려질 것이며, 그 모든 것의 돌아갈 곳이십니다. 끝이 없는 형상을 가지신이여, 당신으로 이 우주는 꿰뚫려 있습니다.
 
39. 당신은 바유시요, 야마시오, 아그니시요, 바투나시요, 또 샤샹카시요, 프라쟈파티시요, 프라피타마하십니다. 당신 앞에 절하고 다시 절합니다. 다시금, 다시금, 천번도 더 다시금 당신께 절 드리옵니다.
바유어(Vayu) 바람.
야마(Yama) 죽음의 임금.
아그니(Agni) 불의 신.
바루나(Varuna) 물의 신.
샤샹카(Shashanka) 달.
프라챠파티(Prajapati) 창조주 브라마.
프라피타마하(Prapitamaha) 조상의 조상.
브라마데바(Brahmadeva)의 마음으로 낳은 일곱 아들들이 있다. 그중 첫째 가마리치(Marici)인데 그에게서 카샤파(Kasyapa)가 나왔고, 카샤파에게서 그밖의 모든 자손이 나왔으므로 이 마리치와 그밖의 것들을 합해서 프라쟈파티들(자존들의 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프라쟈파티란 말을 어떤 이는 카샤파란 뜻으로, 또 어떤 이는 프라쟈파티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프라쟈파티의 단수를 썼으므로, 브라마데바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브라마데바는 마리치와 그밖의 아들들의 아버지기 때문에, 즉 모든 자손의 할아버지기 때문에 아래 있는 조상의 조상(프라피타마하)이라는 말에 맞는다. —틸라크
 
40. 당신 앞에서 절합니다. 당신 뒤에서 절합니다. 일체의 신이시여, 일체의 방향에서 당신께 절합니다. 당신은 능력이 한없으시고, 힘이 한없으십니다. 당신은 일체를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체이십니다.
 
41. 당신을 친구로 알아, “오 크리슈나, 오 야다바, 오 친구여” 하면서 당신의 이 위대를 모르고, 혹은 경솔함으로, 혹은 친애하는 마음에서 당신을 향해 전에 했던 모든 말,
야다바(Yadava) 크리슈나의 다른 호칭.
 
42. 또 농담으로, 쉬는 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밥을 먹는 동안, 혹은 혼자서, 혹은 여럿 앞에서 당신께 버릇없이 한 모든 행동을, 오 변함없으신 이시여, 용서하옵소서. 오, 불가사의하신 이시여, 이제 당신 앞에 비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사람은 자기가 아무 값어치 없는 물건이라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란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것을 보았을 때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내 왕을 눈으로 뵙다니?” 했다. —라다크리슈난
 
43. 당신은 이 흔들리는, 또 흔들리지 않는 세계의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은 신들의 예배를 받으실 분이요, 존경을 받아야 하는 스승이십니다. 당신 같으신 이는 없습니다. 당신보다 더 큰이가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삼계에서 비할 자가 없는 능력이십니다.
 
44. 그러므로 당신께 절하고 업디어 빕니다. 찬양하올 주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친구가 그 친구에게 하듯,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에게 하듯, 저를 참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것은 힌두교에는 흔히 있는 사상이다.「리그베다」에는 “우리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하듯, 스스로 빛을 발하시는 주시여, 우리와 함께 계시어서 복을 주시옵소서” 했고 또「야쥬르베다」에는 “오 주여, 당신은 우리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처럼 우리를 가르쳐주시옵소서” 했다. 구약에도 아버지의 상에 대해 씌어 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듯이 주께서는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사상이 그 가르침의 중심이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해석자들은 프리야(priyah), 프리야야르하시(priyayarhasi)를 “사랑 하는 자”, (여자들인 경우는) “내 사랑”이라 하지만, 내 해석으로는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프리야야르하시란 말을 문법적으로 볼 때 프리야야(priyayah)와 르하시(rhasi)를 끊어서 볼 수 없고, 비교를 표시하는 말인 이바(iva)가 이 절 안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리야 프리야야르하시(priyah priyayarhasi)를 세째 비교로 보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 비교의 주제목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틸라크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법상의 토론은 약하기로 하고, 틸라크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를 “부부의 비유로 보려 하지 않고(사실 원문에는 남편이란 말도, 아내란 말도 없다) 그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고 “그의 사랑”(받는 자)을 아르쥬나 자신으로 보아서,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사해주고, 친구가 친구의 잘못을 사해주듯, 그렇듯 사랑하시는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받는 제 잘못을 사해주옵소서 하는 뜻으로 해석하자는 것이다.”—함석헌
 
45.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저는 기쁨에 찼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주시여, 당신의 모습을 제게 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만유의 주시요, 우주의 피난처이신 당신이시여!
초월적인 존재, 우주적인 존재의 무서운 모습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또 무서움에 질린 이 죽을 인생에게 다시 용기를 주는 인격신의 모습, 신성(神性)에 대한 명상의 상징이 되는 모습도 또 있다. 크리슈나의 옹근 모습의, 부숴버리는 광명의 불꽃 밑에서 견디어 설 수 없어하는 아르쥬나는 이제 보다 더 즐거운 모습을 원한다. 세계의 저쪽에 항상 빛나는 그 빛은 또 제 속에 있는 빛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제 속에 있는 스승과 친구다. —라다크리슈난
 
46. 전같이 왕관을 쓰시고 권세의 지팡이를 잡으시고, 윤보를 드신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오,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 바라옵나니, 네 팔의 모습으로 보여주시옵소서!
윤보(輪寶) 우내(宇內)를 통일 지배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보기(寶器).
아르쥬나는 이제 비슈누의 화신으로서의 크리슈나의 모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47. 아르쥬나야, 내가 네게 만족했으므로 내 요가의 힘에 의하여 나의 최고의 모습을 네게 보여주었으니, 이것은 광명으로 이뤄진 것이요, 온 우주요, 무한이요, 맨 처음이니라. 너를 내 놓고는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느니라.
최고의 모습 일천 팔의 하나님, 무한형상의 주님을 가리킴.
환상이 사람이 찾는 것의 구경은 아니다. 그렇다면「기타」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한때 번쩍이고 지나가는 환상이 찾는 자의 늘 있는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황홀 혹은 사마디(三昧)는 신앙생활의 목적도 또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다. 눈을 캄캄케 하는 빛, 법열 속에 떠다님이 영구적인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아르쥬나는 그가 본 치떨리는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것을 자기 생활 속에 박아넣지 않으면 안됐다. 환상은 다만 열어줌일 뿐이다. 그것은 튼튼케 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본 것을 다른 감관의 증거로써 시험해보고 확인하고 하듯이 환상으로 얻어진 지식도 생명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라다크리슈난
옹글참됨은 하늘길이요, 옹글 참되게 함은 사람의 길이다. 옹글참되게 한다는 것은 착함을 골라 굳게 잡음이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중용」
 
48. 오, 쿠루족의 가장 뛰어난 용장아, 베다나 희생이나 공부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제사의식에 의해서도, 무서운 고행에 의해서도,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너를 내놓고는 아무도 될 수 없느니라.
 
49. 나의 이러한 무서운 모습을 보고 너는 두려워도 말고 어쩔 줄 몰라 하지도 말라. 두려워 말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나의(전의) 모습을 보라.
 
 
산자야 말하기를
 
50. 그렇듯 아르쥬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바수데바께서는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시었습니다. 마하트마는 다시금 자기의 인자하신 형상에 돌아가시어서 무서움에 질린 아르쥬나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1. 오, 쟈나르다나시여, 당신의 이 인자하신 모습을 뵈오니 제 마음이 가라앉고 제 본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2. 나의 이 지극히 보기 어려운 모습을 너는 이제 보았느니라. 모든 신들조차도 이 모습을 보기를 항상 원하느니라.
 
53. 베다에 의해서도, 고행에 의해서도, 자선에 의해서도, 희생에 의해서도, 네가 지금 본 나의 그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54. 아르쥬나야, 그러나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나는 나대로 알 수 있고,참대로 볼 수 있고, 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오, 파란타파야!
 
55. 판두족의 아들아, 나를 위해 일을 하고, 나를 자기 목적으로 알고, 나를 진심으로 믿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으며, 모든 물건에 대하여 악의를 품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내게로 오느니라.
이것이 박티 신심(信心)의 짬이다. 12장 13절을 보라. 이 절이「기타」전체의 교훈의 주지다. 우리는 우리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어떤 생명체에 대해서도 적대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직업이 무엇이었거나, 우리 성격이 어떠하였거나, 또 우리가 창조적인 사상가였건, 혹은 명상적인 시인이었건, 아무런 천부의 재능도 가진 것 없는 비천한 한 남자 한 여자였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구가 될 수 있고, 그의 사랑과 목적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산 영(靈)들의 넓은 세계가 하나님에게 가락을 맞추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다.
「기타」는 그 놀라운 초월적인 환상의 체험이 있은 다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월적인 아트만의 큰 비밀, 곧 있는 모든 것의 근본인 그 자체는 아직도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고자가 유한한 것의 끝없는 과정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아르쥬나는 이 진리를 보았지만 그 안에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기의 온 천성을 변화시켜야 했다. 한때 반짝 하고 지나가는 환상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한 것이고 그 영향이 아무리 영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도달은 아니다. 영존(永存)하는 실재에 대한 탐구, 즉 궁극의 탐구는 감정적인 만족감이나 발작적인 체험으로 끝날 수 없다. —라다크리슈난
그때 갑자기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였다. 그의 옷은 눈부시게 빛나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초막 셋을 지으십시다. 그래서 하나는 선생님이 계시고,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도록 합시다” 했다……바로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했다……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그들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보니, 큰 군중이 둘러서 있는……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 하셨다. —「마가복음」(9:2∼29)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제 11장 일체상의 끝이니 브라만의 지식의 일부 요가에 대한 학문에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하는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