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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작성자 바보새 16-01-29 01:53 조회1,7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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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박티 요가
크리슈나는 7장에서 카르마 요가를 완전히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경험적 또 영적지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8장에서는 말로 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는 브라만의 모습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뚜렷한 길을 ‘신앙의 길’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0장, 11장에서, 그 길에서는 자연 만나게 될 것인 그 능력의 나타냄, 그 우주적 모습의 보여줌을 다 마치고 나서, 11장 끝에 가서 모든 것의 마무름으로 그는 아르쥬나를 보고 모든 행동을 정성된 신앙을 가지고 또 집착함이 없이 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지금 아르쥬나는 묻는 것이다. “7장과 8장에서는 저에게 변하는 또는 변하지 않는 견지에서 볼 때, 최고 주재자의 인식을 뛰어넘는 모습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더 공경해야 할 것이라 하시고 나서는, 카르마 요가를 성취하려면, ‘인식을 뛰어넘는 불멸의 님’을 공경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7:19, 24, 8:21) 그리고는 저에게 요가에 전심을 모으고 싸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9장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이’를 공경하는, 볼 수 있는 길을 설명해주시고 난 다음, 당신께서는 제게 모든 행동을 최고 주재자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9: 27, 34, 11: 55) 그러면 그 두길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이 질문 중의 ‘인식할 수 있는 이’를 공경한다는 말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는 말의 의미는 예배의 다른 대상에 대하여서 공경을 드리란 말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하는 예배의 진정한 뜻은, 어떤 상징이나 대상을 향하여서 했든간에, 그 예배는 ‘아니 계신 곳이 없이 계시는 오직 한 분인 최고 주재자’에 대하여서 하는 것으로 믿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장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그러한 의미의 것이다. —틸라크
이미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의 환상은 오직 외곬으로 믿는 마음에 의해서만 된다. 그러면 신앙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가 자연 문제된다. 다른 장은 다 못하더라도 이 12장만은 따로 다 외도록 해야 한다. 이 장은 가장 짧은 장이다. 믿는 자의 특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주의 깊이 보아야 한다. —간디
11장과 12장, 이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 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이’의 가지가지의 모습을 파노라마적으로보여주는 이 환상, 그와 같이 하여서 우리를 신앙에 대해 준비를 시켜놓고는 크리슈나는 12장에서 신앙의 짬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이 장은 아주 짧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따로 욀 수가 있고,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곧 쉽게 마음속에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청년인도」(1927. 1.12)
아르쥬나 말하기를
1. 그와 같이 언제나 마음을 다해 당신을 예배하는 사람과 불멸이시요 나타나 뵈지 않는 이를 예배하는 사람과 누가 더 요가를 잘 아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절대자와 하나되기를 원한다. 즉 하나이면서 인격적이 아니요, 이 우주와는 관계되어 있지 않는 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과 자연 속에 나타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한다. 그중에 누가 요가를 더 잘 아느냐 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현상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변함이 없고 나타나 뵈지 않는 세계만을 향해 힘을 쓸 것인가, 아니면, 나타나신 모습에 대해 정성을 다하고 그를 받들어 섬기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예배할 것은 절대냐 그렇지 않으면 인격신이냐? 브라만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슈바라냐?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마음을 내게다 쏟고, 언제나 마음을 오로지하여 지극한 믿음으로 나를 예배하는 사람, 그 사람을 나는 최상의 요기라고 생각한다.
3. 그러나 ‘불멸이신 이’ ‘형언할 수 없으신 이’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는 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이’ ‘불가사의이신 이’ ‘불변이신 이’ ‘부동이신 이’,그리고 ‘안고하신 이’를 예배하며,
불멸(不滅) 아크샤라(akshara).
형언할 수 없는 아니르데샤(anirdeshya).
나타나 뵈지 않는 아박타(avyakta), 미현현(未顯現).
아니 계신 곳 없으신 사르바트라가(sarvatraga), 편만(遍滿).
불가사의(不可思議) 아친챠(acintya).
불변 쿠타스다(kutastha), 변하지 않음(unchanging).
부동 아찰라(acala), 확고한(immovable).
안고(安固) 드루바(dhruva), 고정된(fixed).
4. 모든 감각을 다스리고, 어떤 경위에 처해서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모든 생류의 안녕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내게로 올 것이니라.
다스리고 산니야먀(sanniyamya).
크리슈나께서 감각을 ‘다스리’ 라고 했지, 물리치(to reject)라고 하지 않았다. —라다크리슈난
자기가 곧 우주적 자아(Self)와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세상의 복지를 위해 일한다. 5장 25절에 보면 해탈을 얻은 사람은 모든 피조물의 복지를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가 정진에 근본적 필요조건인 것을 말씀해주신 것이다.「마하바라타」에는 이러한 기도문이 적혀 있다. “오, 내가 어떻게 하면 고통당하는 모든 가슴속에 들어가 그들의 모든 고통을 지금, 또 영원히 내 몸에 질 수 있을 것인가. 그 길을 내게 가르쳐주실 이는 누구이실까.” —라다크리슈난
또 투카람(Tukaram)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참이다.
고통하는 이를 제 가슴에 안는 그 사람.
그런 사람 속에는
하나님 자신이
존엄하신 모습으로 살아 계신다.
그런 사람의 가슴은
자비, 온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그는 버림받은 사람을 제 것으로 안는다.
(That man is true
Who taketh to his bosom the afflicted:
In such a man
Dwelleth, augustly present,
God Himself:
The heart of such a man is filled abrim
With pity, gentleness and love:
He taketh the forsaken for his own.)(간디,「감옥에서 나오는 노래」)
5. ‘나타나 뵈지 않는 이’ 에다 마음을 부치는 사람의 어려움은 더욱 클 것이니, 나타나 뵈지 않는 이는, 몸을 가진 자에게는, 그 지극한 데 이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니라.
육신을 가진 인간은 나타나 뵈지 않는 이나 비인격적인 존재에 대하여는 다만 상상할 뿐이고, 말로 충분히 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네티(Neti) 네티”(그것도 아니, 그것도 아니) 하듯이 부정적으로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우상파괴주의자들도 결국에는 우상숭배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어떤 책을 숭배하고, 어떤 교회에 가고, 혹은 어떤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는, 그런 것은 다 형상없는 이를 무슨 형상이나 우상 속에서 예배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상 파괴자나 우상 숭배자나 다 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어서, ‘생각할 수도 없는 이’ ‘형상도 없는 이’ ‘인격적도 아닌 이’ ‘변함이 없으신 이’ 그 어떤 무엇이 있다는 일이다. 정성된 신자의 최고의 목적은 자기 신앙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박타(bhakta, 신자)는 자기를 없애버리고 바가반(Bhagavan, 거룩하신 주) 속에 녹아든다. 그가 되어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는 최상의 길은 자기를 어떤 형상에다 바치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타나 뵈지 않는 이’에게 가는 지름길은 사실은 가장 멀고 가장 험난한 길이라는 말이 있다. —간디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홀로 나신 하나님이 그를 알려주셨다. —「요한」1: 18)
6. 그러나 모든 행동을 내게 맡기고, 내게 매달려 정말 갈라짐 없는 마음의 요가로 나를 명상하며 예배하는 사람은,
7. 그 생각이 그와 같이 나에게 꽉 박혀 있는 사람은, 오 프리다의 아들아, 나는 그를 멀지 않아서 살고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낼 것이니라.
꽉 박혀 있는 아베쉬타(aveshita). 고정된(fixed)
살고 죽음의 바다 산사라 사가라트(sansara sagarat), 생사유전(生死流轉)의 도(道).
「로마서」의 바울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까?”(7: 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8: 2)—마하데브 데자이
하나님은 건져주시는 이요 구주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진심을 그에게 바칠 때 그는 우리를 죽음의 바다에서 들어내어 영원한 안식처에 두신다. 그 마음이 바이라갸(vairagya), 곧 내버림에 완전히 깊이 젖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신앙으로 하는 헌신의 길이 더욱더 바람직하다.「바가바타」 (Bhagavata)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앙의 길은 세속에 대해 싫증이 난 것도 아니고 애착을 하는 것도 아닌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길이다.” 프라브리티 다르마(pravritti dharma), 즉 행동의 길을 취하느냐, 니브리티 다르마(nivritti dharma), 즉 내버림의 길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성격의 문제일 뿐이다. —라다크리슈난
8. 네 마음을 내게만 꽉 박아놓아라. 네 이성을 내게다 왼통 붙들어두라. 그와 같이 하여 너는 이 앞으로 의심 없이 내 안에서만 살 것이니라.
마음 마나스(manas).
이성 부디(buddhi), 확신(conviction). 이해(understanding).
9. 가멸음을 차지하는 자야, 네가 만일 네 생각을 내게 굳게 집중할 수 없거든, 그때는 끊임없는 요가를 닦음으로써 내게 이르기를 원하여 라.
그러한 정신적 경지에 자연히 이르러지지 않을 때는 우리는 부단하고 끈질긴 정진의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지시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점차적으로 실천하는 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 성격을 점진적으로 정복하신다. —라다크리슈난
어떤 이는 나면서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힘들게 하여서 배우나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하나니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學之 及其知之一也) —공자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히 가리고, 도탑게 행할 것이니. 배우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배우거든 잘하지 못하는 것을 두지 말며, 묻지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묻거든 알지 못하는 것을 두지 말며, 생각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생각하거든 얻지 못한 것을 두지 말며, 가리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가리거든 밝히지 못한 것을 두지 말며, 행치 않는 일이 있을지언정 행하거든 도탑게 하지 못한 것을 두지 말아, 남이 한 번에 한다면 나는 백 번해서 될 생각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한다면 나는 천 번해서 될 생각을 하여서, 이 길을 정말 잘 따른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요,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學之弗能弗措也 有弗 問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強) —「중용」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어야만 능히 제 바탈을 다할 수 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중용」
그담은(성인같이 나면서 저절로 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능히 할 수 있는) 어느 부분에서 지극히 참되게 하는 것인데, 한 부분에서라도 잘한다면 성(誠)된 지경에 갈 수가 있다. (전체 천성을 한꺼번에 다는 못하지만 부분에서라도 참은 참이다.) 그러므로 곡(曲), 곧 어느 한 부분을 통해서도 성(誠)의 지경에 이를 수가 있다. (誠은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철저해지면) 형상에 나타나게 되고, 나타나면 알아볼 수가 있게 드러나고,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저절로 작용이 일어나고, 작용하면 달라지고, 달라지면 나중에는 마침내 자유자재하는 활동 곧 화함(化, 새로 난 지경)에 이르게 된다.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중용」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되시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5:7〜9)
10. 네가 만일 끊임없는 요가를 닦을 능력조차도 없거든, 내게 봉사하는 것을 최고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되어라. 모든 행동을 나를 위해서 함으로써 너는 완전에 이를 수 있느니라.
완전 시딤(siddhim), 성만위(成滿位).
나를 봉사 마트카르마(matkarma), 내 일(my-work).
정신통일이, 마음의 바깥 버릇, 혹은 주위 환경 때문에 하기가 어려울 때는 모든 행동을 주를 위해 하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나 영원한 참이 원지를 알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었다.…“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도 많은 일로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지만, 정말 요긴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으니,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말라.—「누가복음」(10:39∼42)
마트카르마는 때로는 ‘주님 봉사’ (service of the Lord)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예배. 꽃이나 열매를 바치는 일, 분향, 성전 세움, 경전 외기 같은 것들이다. —라다크리슈난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 머리에 부었다……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견하지 말라.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이 여자는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내 장례를 위하여 이 향유를 부어준 것이다.” ―「마가복음」(14:3~9)
11.네가 만일 그것마저 할 수 없거든, 그때는 나의 요가에 돌아와, 자아를 극복하면서, 일체 행동의 열매를 내버려라.
나의 요가에 돌아와(madyogam ashrita) 곧 크리슈나의 요가, 곧 놀라운 능력으로 돌아와, 혹은 귀의하여.
자아를 극복하면서(yatatmavan) 점차적으로 자기를 통제 하여서.
일체의 행동을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가 없을 때는, 그 하는 일을 결과를 바라지 말고 해야 한다. 니슈카마카르마(nishkamakarma) 즉, 욕심 없이 하는 행동의 요가의 길이다. 그러면 제 힘으로 하자는 생각을 다 버리고 자신을 전수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내맡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기 훈련에 힘써, 온전히 결과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동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12. 진실로 지식은 끊임없는 닦음보다 나으며, 명상은 지식 보다 낫고, 행동의 열매를 내버림은 명상보다 나으니, 그 내버림으로 인하여 즉시로 평화가 오느니라.
지식 즈나나(jnana)
닦음 아뱌사(abhyasa), 정신통일.
명상 쟈나(dhyana), 선정(禪定).
내버림 챠가(tyaga), 사리(捨離).
슈리다라(Sridhara)는 해석하기를 즈나나는 아베샤(avesha), 곧,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이라 했고, 쟈나, 즉 선정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됨이라 해서 그것이 영혼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되는 데서 완전에 이른 다고 했다.
「수랴 기타」(Surya Gita)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앙(혹은 헌신)은 지식보다 낫고, 바람 없는 행동은 신앙보다 낫다. 이 베단타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이 최상의 사람이다.” 신앙, 명상, 정신통일은 행동의 열매 내버림(karmaphatalyaga)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이 나중 것이 마음의 불안의 근원을 부숴버리고 깊은 속의 고요와 평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그것이 영적 생활의 바로 주춧돌이다. 박티(신앙심에 의한) 요가의 이 강조는 지식 명상보다도 헌신적인 신앙심과 모든 하는 일은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몇 절의 말들은 카르마 요가(실행에 의한 요가)의 견지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말이다. 거기서 처음에 엄격한 수련, 지식, 기도, 그밖의 여러 가지 의식을 신앙으로 하는 카르마 요가를 성취하는 좋은 방법으로 말하고 나서는, 가지가지 방법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리고는 12절에서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 즉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desireless karma yoga) 의 우수성을 내세운다. 그렇다고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의 우수성을 말한 것이 여기에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분명히 3장 8 절에도, 5장 2절에도, 6장 46절에도 있다. 그리고 아르쥬나는 카르마 요가를 행동의 결과 포기의 형식으로 하라는 조언을 여러 곳에서 들었다. 그런데「기타」의 종교와는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의론은 자기네의 주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위의 절들의 말, 특히 12절을 왜곡해서 해석하려고 한다. 순전한 지식주의, 다시 말해서, 삼캬론의 주석가들은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이 역시 지식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즈나나’라는 말을 단순한 학문적인 지식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행동의 결과를 버리는데 대한 찬양은 하나의 ‘아르다바다’(arthavada), 즉 묵어버린 찬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파탄잘리 요가(patanjali-yoga)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행동의 결과의 포기를 끊임없는 엄격한 수련(abhyasa)의 길보다 높은 자리에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오직 신앙의 길만을 주장하는 사람, 즉 신앙 외의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행동의 결과 포기를 명상, 즉 신앙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카르마 요가 안에 신앙도 포함되어 있고, 「기타」는 그 길을 권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파탄잘리 요가와도 즈나나 요가와도, 그리고 신앙의 길과도 다른데, 그것은 사실상 지금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훈을 지지하는 주석은 얻어볼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기타」의 주석에서는 행동의 결과 포기에 대한 찬양은 묵은 찬양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잘못이다. 누구나 「기타」가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 절의 의미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낄 것이 전혀 없다. 일단 사람이 행동을 아주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바람 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날 때 글자 그대로 하는 행동의 포기를 강조하는 ‘지식의 길’(jnana-marga) 또 생리기관의 재주넘이나 강조할 뿐인 ‘파탄잘리 요가’, 또 모든 행동에 대해 못 본 체할 뿐인 ‘신앙의 길’,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카르마 요가’ 보다 낮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와 같이 ‘바람 없는 카르마 요가’의 뛰어남이 증명될 때 남는 문제는 오직 이것이다. 그 길에 도달하는 데 가장 필요한 평등관을 그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그 방법은 세 가지다. 즉 끊임없는 닦음(abhyasa)과 영적 지식(jnana)과 명상(dhyana, 禪定)이다. 이 셋 중에서 만일 끊임없는 닦음을 할 수 없거든, 남은 둘, 즈나나와 쟈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할 것이다.「기타」는 말하기를 이 방법들은 차례로 든 그 순서대로 쉬운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할 수 없거든, 곧 카르마 요가를 시작하라고「기타」는 말한다. 이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즉 끊임없는 닦음도, 영적 지식도, 명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카르마 요가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카르마 요가가 가장 쉬운 길(易行道)이라는 말은 무의미한 소리라고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반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12절은 행동의 결과 포기를 대번에 해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도, 우선 크리슈나가 가르쳐주는 카르마 요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타타’(tatah), 그런 다음 다시 하고 다시 해서 차츰 숙련된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아무런 모순도 없다. —틸라크
‘닦음’. 아뱌사는 명상의 요가를 닦고 심리 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지식’, 즈나나는 지적인 노력을 이름이요, ‘통일’, 쟈나는 정성으로 하는 예배다. 만일 이 세 가지를 다하고 나서도 행동의 열매를 내버리는 데 가지 못한다면 ‘닦음’도 ‘닦음’이 아니요, ‘지식’도 ‘지식’이 아니며, ‘명상(통일)’도 ‘명상’이 아니다.
이절은 이날껏 모든 번역자, 주석자에게 완전히 수수께끼다.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것을, 그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려고 힐(Hill)같이 감히 영웅적인 시도를 해본 이도 있다. 그 여러 가지 설명들을 다 말하는 것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간디까지도 넣어 대개의 설명이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중 하나가(비노바가 낸 것) 샤스트리(Bhide Shastri)에 의해 일부분 지지를 받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이날껏 나온 것 중에 가장 좋다. 그것을 나의 역주 속에 인용하였는데, 그 일부를 여기 쓴다.
행동의 결과를 내버리는 것을 11절에서는 가장 쉬운 길로 제시하였고, 12절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쉬운 길이 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 다음 보다 높은 지경, 그것은 첫 단계의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것은 내버림의 비결에 대한 지식이다. 그보다 높으면서 또 낮은 것의 당연한 결과로 오는 지경은 통일 즉, 그 방법에 대해 통일(집중)된 열성이다. 그것이 종국에 가서 행동의 결과를 완전히 내버린 것으로 결과를 이룬다. 이 완전한 내버림이 영원한 평화를 의미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13. 일체의 산 물건에 대해 악의를 품는 일이 없고, 그저 우애하고 자비스러우며, 내 것이란 생각도, 나란 생각도 없고, 고통과 안락을 한가지로 여기며 용서하고,
14. 언제나 만족하고 요가를 닦으며, 자기를 제어하고 결심이 굳으며, 마음과 이성을 내게 바치는 사람, 그는 나를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5. 세상 사람이 그를 싫어하지도 않고, 그가 세상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즐거움, 노여움, 두려움, 괴로움을 다 벗어난 사람, 그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6. 무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고, 정결하고 일에 능숙하며, 관심거리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으며, 모든 경영을 내버린 사람, 그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7. 제 기뻐하는 일도 없고, 언제 원망하는 일도 없으며, 언제 슬퍼도 아니하고, 언제 바라지도 아니하며, 선, 불선을 떠나서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18. 적과 벗에게 평등이 하며, 명예, 불명예를 같이 보고, 추위, 더위, 괴롬, 즐거움에도 한결같으며, 애착을 버리고,
19. 난과 칭찬을 같이 보며, 잠잠하여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을 곳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턱 가라앉아 믿는 사람, 그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있을 곳이 없이’ (aniketah)란 일정한 처소 없이, 집이 없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는 하면서도 어느 가정에도 집에도 매여 있지 않다. 이런 혼들은 이 가족 혹은 저 사회단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정한 집이 없다. 그들은 어떤 한곳에 매여 있거나 어떤 한 공동체에 갇혀 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매여 있지도 않고 어떤 한 불변하는 권위를 지킬 필요도 없다. 전체 인류의 안녕이 그들의 관심거리다. 이러한 산야신들(sannyasins, 出家僧)은 어떤 사회단체에서도 날 수 있다.「마하바라타」에 “어떤 옷도 입고 어떤 음식도 먹고 어떤 데서도 자는 사람들, 신들은 그들을 가리켜 브라만(brahmin)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
천하의 넓은 집에 있으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한길을 걸어, 뜻 얻으면 씨로 더불어 말미암고, 뜻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걸어, 부귀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하고, 가난과 천함으로도 능히 뜻을 고치게 못하며, 위엄과 힘으로도 능히 굽히게 할 수 없으니, 이를 일러 사내라 하느니라.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 行其道 富貴下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
20. 러나 이미 말한 대로, 불멸의 다르마를 쫓으며, 믿음을 가지고, 나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는 신앙자, 그는 나의 가장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불멸의 다르마’(dharmyamrita) 이것을 라다크리슈난은 ‘불멸의 지혜’라 번역했고, 간디는 ‘거룩한 교훈의 감로(甘露)’라 했으며, 마하데브 데자이는 ‘다르마의 짬’ 이라 했고, 틸라크는 ‘감로 같은 교훈’ 이라 했으며, 다까구스(高楠順次郞)는 ‘법(法)의 감로’ 라고 했고,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불멸의 진리의 능력’(the lawful power of immortality)이라고 했다.
‘믿음을 가지고’ 라 한 것은 체험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영혼이 믿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 속에는 마음과 생명의 승낙이 들어 있다.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는 일이지만 그밖의 사람에게는 그것은 믿음이요, 부름이요, 강요다.
모든 것 속에 ‘한 나’(the One Self)를 보았을 때, 평등한 마음, 이기적인 욕심에서 벗어남, 우리 마음 전부를 ‘속에 계시는 영에 내맡김’과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일어난다. 이런 힘들이 나타나게 될 때 우리 신앙은 완전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그렇게 된 후에는 우리 생활은 이미 애착과 반발, 벗과 대적, 쾌락과 고통의 힘에 끌려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 자신을 하나님께, 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인 세계봉사에 바치자는 충동에 따라서만 된다.—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 12장 박티 요가의 끝이니 브라만의 지식의 일부인 요가에 대한 학문에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하는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