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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16-01-22 01:41 조회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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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진 이는 학식 있고 겸손한 브라만이나, 소나, 코끼리 나, 개나, 개를 먹은 자까지도 평등한 눈으로 보느니라.
어진이 판디타(pandita), 식자, 학자, 현인, 지혜자, 철인, 간디는 자아실현자라고 했다.
‘학식 있고 겸손한’ 이란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현상에서 온다.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주위가 캄캄한 것을 더욱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촛불을 켜고 나면 어둠의 짙음을 안다. 우리의 아는 것을 우리가 아지 못하는 것에 비해보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다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잘 아는 뉴튼의 말이 이것을 밝혀준다. “세상에서는 내가 많은 것을 아는 줄로 알지만, 아닙니다. 내 보기에는 내가 바닷가에서 노는 한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따금씩 반질반질한 조약돌이나 이쁜 조개껍질을 얻어들고는 명성을 날리기는 하지마는, 내 앞에는 막막한 미지 (未知)의 진리의 대해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핸리 애덤즈(Heny Adams)의 한 귀 절을 빌어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쨌거나 사람은 위대한 것이 뭣인지를 조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날 제 무지가 얼마나한 것임을 톡톡히 알고 나서야 엎드려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라다크리슈난
그 의미를 말한다면, 그들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나 필요에 따라 꼭같이 봉사해준단 말입니다. 브라만과 개 먹는 자를 꼭같이 대접한다는 말은, 그 어진 이는 개먹는 자가 독사에 물렸을 때 그 독을 빨아내주기를 브라만이 독사에 물렸을 때와 꼭같이 그렇게 달가운 마음으로 정성으로 해준단 말입니다. —간디
간디옹은 이 절을 어떤 천민 노동자 모임에서 길게 설명한 일이 있다. 그는 그들도 다른 누구나와 꼭 같은 평등한 신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코 모든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있는 차별을 누가 능히 없앨 수 있습니까? 브라만과 개 사이에, 개 먹는 자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까? 사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과학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즉, 그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는 없습니다. 마치 코끼리나 개미나 야만인이나 과학자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도 없습니다. 야만인은 과학자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겠지만, 그렇다고 학자는 제가 높거니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리잔」(1935. 1. 11)
“거기 대하여 또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점에서 다 평등합니다. 즉 다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 골탄 칠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그 탄생에서부터 부정(不淨)합니다. 우리가 우리 속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많거나 적거나간 다 부정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는 하나’라는 것이 생명의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형상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채우는 정신은 (혹은 깨닫게 하는 영은) 하나입니다(The forms are many, but the informing spirit is one).
모든 것을 평등한 눈으로 본다는 것은 요가와 즈나나의 공통된 특징이요,「기타」의 곳곳에 나온다. 6장 9절, 12장 18절, 14장 25절을 보면 거기서는 친구와 원수를 꼭같이 생각하는 것이 요가와 박티와 구나티타(gunatita, 초월적 상태)의 특징의 하나라고 했다. ‘평등’ ‘동등’ 하는 말들이 그들의 문맥 속에서 가지는 의미는 누구나 잘 아는「마태복음」의 귀절 속에서 ‘완전’ 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것과 같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는 햇빛을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비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5: 44〜45,48) 마지막 절은 문구조차도 이 절과 매우 근사하다. —마하데브 데자이
브라만과 소와 코끼리와 개를 한데 관련시켜 말한 것은 사람이나 그외 여러 가지 짐승으로 태어나온 그것들의 본체는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요, 또 본체의 동일성 위에 굳게 서서 다양함 밑에 있는 초월적인 것의 통일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감의 평등관(平等觀)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학식과 겸손에 대하여’ 살펴보자. 지혜가 생기면 겸손해진다. 어진 이는 창조 속에 있는 차별 차이는 일시적인 것이요, 그 모든 것 밑에는 하나의 구경의 실재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사물을 중대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 같이 끝나는 운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어진 이의 속에 있는 이 본체의 자연적인 성격을 겸손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사실 겸손은 그것이 생명의 동일성, 만물의 궁극적 일체성에 대한 생각이 높아질 때에 나오는 것이므로 지혜의 표준이 된다.
겸손이라면 보통으로 자기의 유한성, 무지성, 무의미성을 솔직이 인정하는 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본체의 성격 속에 있지 마음의 어떤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본체의 상태에. 생명의 동일성에, 폭 배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자연히, 어떤 것을 보았든간 그 영감이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나타나 보이는 상대계의 차별상이 그의 생각 속에 차별을 능히 일으키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은 소와 개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는 소를 소로 보고 개를 개로 본다. 그러나 그 소의 형상, 개의 형상이 그의 눈을 어둡혀서 둘 속에 꼭같이 있는 자아의 동일성을 못 보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소와 개를 보기는 하지만 그의 자아는 소의 본체와 개의 본체, 곧 자기의 본체 속에 굳건하게 서 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개를 먹는 자’ 란 글자 그대로 직역한 것인데, 제 계급에서 내쫓음을 당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 중에서 가장 멸시를 받는 자다.
‘평등한 눈으로 본다’ (samadarsinah) 함은 영원한 것은 만물 속에 다 같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에게나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브라만에게나 마찬가지로 멸시받는 추방자에게도 있다. 브라만의 빛은 모든 속에 다 있는 것이요, 그것이 비쳐주는 몸들의 차이 때문에 변동이 생기는 것은 조금도 없다.
지극히 높은 이의 특성은, 그 본체나, 의식이나, 복됨이나 어떤 존재 속에도 다 같이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 차이란 것은 그것들의 이름이나 형상, 즉 그 나타나는 형식에 관계된 것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궁극의 실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평등한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적인 이원론은 정신과 자연의 이원(二元)이지 영혼과 육체의 이원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는 차이다. 자연이란 객관화(客觀化)의 소원화(疎遠化)의 결정성(決定性)의 세계다. 거기서 우리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차별을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들은 다 제 속에 비객관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다. 주관과 실재는 그 어느 것 속에도 다 들어 있다. 이러한 바닥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은 경험적인 다양성과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다. 샹카라조차도 유일 영원한 실재가 계속적인 현현(顯現)의 단계를 통하여 자신을 점점 더 높이 계시하는 것을 인정했다. 경험적인 차이가 우리 눈을 가리워서 만물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형이상적 실재를 볼 수 없게 할 수가 없다. 이런 견해를 가질 때에 우리는 우리의 동류, 산 물건들을 친절과 자비로 봐줄 수가 있다. 어진 이는 만물 속에서 한 하나님을 보고 거룩하신 이의 특성인 평등관(平等觀)의 정신을 길러간다. —라다크리슈난
19. 평등으로 보는 자리에 꽉 선 사람은 이 생에 있어서도 세계를 제어할 수 있다. 브라만은 흠이 없고 어디서나 한모양이므로 그들은 브라만 안에 안주하느니라.
꽉 서 있다 절 끝에 있는 안주나 같은 말이다. 변동없이 머물러 있음.
이생 이 땅위에서라고도, 이 생애에 있어서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를 ‘이 지어진 세계를’ 혹은 ‘이 생사의 바퀴를’이라고도 번역된다.
흠이 없고 완전하다는 뜻.
한모양 사마(sama), 같다, 평평하다, 평행, 평등, 동일.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된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는 사람은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 브라만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간디
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2: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 1서」(4:16)
우리의 궁극의 목표인 해탈의 지경은 우리가 현세에서 도달할 수 있는 지경이다. —라다크리슈난
마음이 초월적 명상의 공부에 의하여 우주의식에까지 높아지게 되면, 절대 생명이 마음의 본성 속에 영구 부동적으로 거하게 된다. 그러면 그 마음은 브라만의 지경, 즉, 보편적인 본체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면 마음은 자신이 창조의 극대극소의 지경을 다 고동시키고, 통제하고, 명령 할 수 있는 정도의 생활에까지 올라간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정원사가 나무의 진액의 운동까지를 다룰 줄 알게 되면 나무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물체의 원자 혹은 아원자의 작용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 무슨 재주를 부려서 그 물체의 존재의 어떤 층에라도 마음대로 원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마음이 행동의 세계를 자기와는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러 거기 확고히 서 있는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행동에 말려드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사실로 행동의 노예인만큼 우주의 노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 부동(不動)의 지경을 얻어서 자연적인 평등의 지경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는 우주는 나와 떨어진 것이요, 사환꾼과 마찬가지로, 내 필요에 자동적으로 응해주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본체가 행동에서 독립해 있는 지경, 그것이 평등한 마음의 기본인데, 그 지경은 요가로도 삼캬로도 도달할 수 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0.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얻어도 크게 기뻐함 없고, 마음에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얻어도 심히 슬퍼하지 않는 사람, 그렇듯 깨달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브라만을 아는 사람이요 브라만에 안주하는 사람이니라.
21. 그 정신을 바깥 접촉에 잡히지 않게 하는 사람은 자아 속에 즐거움을 가지느니라. 그와 같이 그 자아가 브라만으로 더불어 하나됨을 얻은 사람은 영원한 복을 누리느니라.
‘바깥 접촉에 잡히지 않음’이란 것을 바로 실천하려면 우리 심정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제해버리고 텅 빈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심정을 독차지하시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텅 비게 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독차지하실 수 없듯이,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하시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텅 빈 대로 남겨두지 않으면 하실 수가 없다. (I know, that, for the right practice of it, the heart must be empty of all else; because God wills to possess the heart alone; and as He cannot possess it alne unless it is empty of all else, so He cannot work in it what He would unless it be left vacant for Him.)—로렌스형제
저의 집은 가난하여서 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 파를 먹지 않은지 몇 달이 됩니다. 이만하면 깨끗이 했다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것은 제사로 하는 깨끗이지 마음의 깨끗이 아니다. 회(回)가 묻는다. 감히 묻잡습니다. 마음의 깨끗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중니(仲尼)가 답한다. 네 뜻을 하나로 모아서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는다는 것은 귀에 그치는 것이요, 마음은 바탈에 그칠 뿐이다. 기란 것은 비게 하여 가지고 무엇을 기다림을 말하는 것이다. 도는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을 깨끗이 함이다. (回之家貧 唯不飮酒不茹葷者數月矣 若此則可以爲齋乎 曰 是祭祀之齋 非心齋也 回曰 敢問心齋 仲尼曰 若ᅳ志 無聽之以耳 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 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氣也者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心齋也) —장자(人間世)
바깥과의 접촉에서 물러난다는 것과 브라만과의 하나됨의 광명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일의 두면이라, 이는 마치 돈 한 닢의 앞뒤 두 면과 같다. — 간디
22. 감각의 접촉에서 나오는 쾌락이란 고통의 원천이 될 뿐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다. 쿤티의 아들아, 지혜 있는 자는 그런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느니라.
‘고통의 원천’ (duhkha-yonayah)을 고통의 탯집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요나야(yonayah)에는 탯집과 원천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감각의 접촉은 고통의 묘상(苗床)이라 했다. 여기 관하여는 신약 「골로새」(2:20~22)를 보라. “잡지 말고, 맛보지 말고,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다 한 번 쓴 다음에는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마하데브 데자이
감각의 대상에 대한 경험이 보통 깨어 있을 때의 것과 우주의식에서 하는 것과가 서로 다르다. 마치 같은 물체라도 여러 가지 색유리를 통해서 보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깨달은 사람은 그 전과 같이 모든 것을 단순히 즐기는 입장에서만 대하지는 않는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3. 이 세상에서, 몸에서 해방이 되기 전에 애욕과 분노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능히 이겨내는 사람은 이미 브라만과 하나 됨을 얻은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다.
시체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고 쾌락도 고통도 모른다. 살아 있으면서도 그와 같이 그런 것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참으로 산사람이요 참으로 행복하다. —간디
속의 평화와 자유와 즐거움이 나오는 근본인 무집착의 지경은 이 지상에서도 실현이 가능하다. 인간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혼의 평안에 이를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을 일반으로 오해하여서,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브라만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리하여서 가지가지의 고행주의(苦行主義)가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다만 브라만과 하나 되는 것과 정욕을 자연스럽게 이겨내는 것을 평행으로 놓았을 뿐이다. 이 상대계에서 그런 능력을 가지는 것은 절대계에서 거룩한 이와 하나 됨을 얻은 표시다. 그 둘 중에 거룩한 이와의 하나 됨에 도달하기가 더 쉽다. 이것이 정욕을 이기는 능력의 기반이 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4. 행복을 속에 가지고, 즐거움을 속에 가지고, 빛을 속에 가지는 이가 요가를 닦는 이이니, 그는 브라만이 될 것이요 브라마니르바나에 이를 것이니라.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 범열반(梵涅槃), 영원한 평화, 지복(至福).
25. 죄를 끄고, 의심을 끊고, 마음을 다듬어, 모든 산 것에 대해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성자는 브라마니르바나에 이르느니라.
지혜와 평화를 얻은 혼은 또한 사랑과 자비를 가지는 혼이다. 모든 존재를 지극히 높으신 이 안에 보는 사람은 또한 거룩한 이를 타락한 죄인 안에서도 보고 사랑과 동정을 가지고 그들한테로 나간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육체적 쾌락을 주는 것도 생활을 향상시켜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성을 발견하여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영원한 실재에 대한 명상은 우리 동류 생물에 대해 봉사하자는 열의와 힘을 준다.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내세적(來世的)이 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적 책임을 피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기타」는 종교의 두면, 즉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다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속에 발견하고 그 신성이 인간을 꿰뚫게 되어야 하는 것이요, 사회적으로 한다면, 사회를 정복하여서 신상(神像)에까지 이르게 하여야 한다. 개인은 그 자유와 독특성에 있어서 자라 마침내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까지 그 존엄성을 보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계(靈界)에까지 올라가기도 해야지만, 또 짐승에까지 내려가기도 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26. 애욕과 분노를 떠나 마음을 정복하고 자아를 아는 근엄한 행자(行者)는 어디를 행해도 브라마니르바나가 있느니라.
이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24절에서는 영원한 해탈을 요가를 통하여 약속했고, 25절에서는 그것을 삼캬를 통하여서 했으며, 이 절에서는 그 같은 영원한 해탈을 내버림의 이치로 설명한다. 이 세 절의 관계는 3장, 4장,5장의 제목의 관계이다. 이와 같이 하여서 그 내버림의 철학을 완성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7,28. 모든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시력을 미간에 모으고 앉아, 날숨과 들숨을 고르게 하여 콧구멍으로만 통하게 하며, 감각과 의식과 이성을 제어하여 해탈을 목적하고 욕망과 공포와 분노를 내버리는 성자는 이미 해탈을 얻었느니라.
이 절은 요가수트라(yoga-sutras)속에 제정되어 있는 요가 닦는 방법에 관하여 하는 말인데, 거기 대하여는 다소 주의할 만한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방법들은 마치 운동이나 체조가 세속적인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요가 닦는 사람들에게 준다. 신체의 운동을 해두면 쾌락을 느끼는 기관으로 하여 언제나 계속해서 정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요가 기술도 요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건강하여 감각을 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기술에 능한 사람은 지금 시대에는 아주 드물고, 좋은 효과를 보여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자기 훈련의 기초를 완전히 닦은 사람, 즉 해탈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좋다 언짢다의 상대관(相對觀)을 떠나 이미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기술을 닦으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훈련을 겪은 사람만이 이런 방법을 씀으로써 자기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 수가 있다. 몸과 마음. 둘 다 정결할 것이 절대 필요조건이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잘못되어서 아주 깊은 미망에 빠지기 쉽다.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실지 경험에 의하여서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기 때문에 요가의 왕이라 할 파탄잘리(Patanjali)가 야마(yama, 기본맹세)와 니야마(niyama, 보조맹세)를 첫 머리에 세워서 오직 준비 훈련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요가기술을 닦는 자격을 준 것이다.
다섯 기본 맹세란 비폭력, 참, 도둑질 아니함, 동정(童貞),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이며, 다섯 보조 맹세는 신체적 정결, 족한 줄을 앎, 경전 공부, 극기, 하나님에 대한 명상이다. ᅳ간디
간디의 이 경고의 말은 명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내 경험으로도 증거할 수 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그 안에서 우연히 정신 통일법을 안다는 사람을 만나 시작해본 일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체험도 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후 또 만난 어떤 다른 노인으로부터 잘못하면 그런 것 하다가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경고를 들었고, 그후 다른 글들을 통해서 동기가 순수해야, 호기심이나 야심(비록 정신적이라 하더라도)이 터럭만큼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 또 타고난 천품을 따라 그런 것은 누구나 다 할 수도, 또 할 필요가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또 기독교계에서 성신받는다, 방언한다 하는 현상에서 그 실지 증거를 보는 것 아닌가? 나도 파탄잘리의 책을 읽어보았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이해하고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예로부터 그것은 위대한 스승(그루) 밑에서 해야 한다고 일러온다. 그러기 때문에 믿을 만한 스승이 없는 경우는 경솔하게 제나름으로 하지 말 것이요, 다만 우리 마음을 깨끗이하여 내게 필요한 것이면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법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신통한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쉬이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옳은 길일 것이다. ᅳ함석헌
29. 나를 희생과 고행을 받으시는 이로, 모든 세계의 대주재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벗인 이로 아는 자는 평화에 이르 느니 라.
이 절은 이 장의 14,15절의 말과 또 그 외에 있는 그런 뜻의 말들과 모순되는 듯이 뵐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시는 이인 동시에 또 아니하시는 이요, 누리시는 이인 동시에 또 아니 누리시는 이다. 그는 형언할 수 없으신 이요 인간의 말을 초월하신 이다. 인간은 어떻게해서든간 그의 어렴풋한 모습이라도 보고자 애쓰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이런 속성 저런 속성, 그리고 반대되는 속성까지도 그에게 붙여보는 것이다. —간디
이것이「우파니샤드」에서 「바가바드기타」라 부르는 책의 제5장 산야사 요가, 내버림의 요가 끝이니, 그것은 주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요가의 학문에 대하여 하는 문답이요, 브라만 지식의 한 부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