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7

한국 불교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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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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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역사 또는 한국 불교사는 한국에서 전개된 불교의 역사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에 전래된 것은 372년고구려에 전래된 것이다. 이 글은 이때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한국에서의 불교의 전개를 서술하고 있다.

목차

삼국 시대 (372~676)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삼국 시대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전래편집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

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372~668)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고구려 전래편집

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편집

고구려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4]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담징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편집

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5]

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5]

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5]

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5]
백제 (384~676)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제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편집

백제(百濟)에는 불교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들어왔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직접 환영하여 맞이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며 예로써 공경하였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직접 맞이하였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6]

그 뒤 140년쯤 지나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때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번창했다. 왕은 겸익(謙益)을 인도에 보내어 계율을 연구하게 했는데, 526년 산스크리트어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하게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성왕 23년(545)에 장륙(丈六) 불상을 조성,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했다. 동 30년(552)에는 불교일본에 전파했으며,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이다. 그때 백제는 여러 가지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불교를 전함으로써 백제의 승려와 예술가와 기능공들이 건너가 일본의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 백제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다.[2]

법왕 1년(599)에는 나라 안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널리 방생(放生)을 행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연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수도 부여왕흥사(王興寺)를 세웠고, 무왕때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했는데,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많았었다는 사실이 중국의 문헌에도 전해지고 있다.
백제 불교의 특징편집

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 예술 불교, 외교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2][7]

인도로 유학하였던 겸익(謙益: fl. 526)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백제 성왕 9년(531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7][8][9] 귀국 시에 겸익성왕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후 흥륜사(興輪寺)에 있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7]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 중 음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의 율부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10] 그러나 끝내 음광부의 율부는 중국으로 전해지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백제에 《오부율》 전체가 전해지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율부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11]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7] 중국에서 율종이 성립된 때는 당나라도선(道宣: 596-667)이 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을 강설하고 저술한 624년인데,[10] 백제에서 겸익에 의해 율종이 성립된 때(526년경)는 이보다 1세기 앞선 것이다.

백제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 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 예술을 진작시켰다.[2]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편집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한 때는 성왕(聖王) 30년(552)이었며 많은 승려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달솔(達率)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파견하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과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 경론(經論)을 보낸 것이 일본 불교의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일본 군신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예경(禮敬)하였는데,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용도나 의미는 몰랐다. 그때 일본(日本)에 와서 있던 고구려 승려 혜편(惠便)을 발견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여자 승려(尼僧)를 배출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최초의 일본 불교신자가 되었다. 곧이어 2년 후 성왕담혜(曇惠) 등 9인의 승려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을 위시한 7인의 백제 승려가 집단적으로 이미 일본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比丘尼) · 주금사(呪禁師) · 불공(佛工) · 사장(寺匠)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그들을 맞아 난파(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라(日羅)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동(同)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공(寺工) · 화공(畵工) · 와장(瓦匠) 등을 보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백제(百濟) 승려(僧侶)를 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묻는 등 백제와 일본 간의 교류는 빈번하였다. 이때 일본 최초의 비구니(比丘尼)인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혜총(惠聰) · 영근(令斤) · 혜식(惠寔) 등의 사문(沙門)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일본에 보냈다. 이 일행 가운데 혜총은 계율에 정통하여 그곳 대신인 소아마자에게 수계를 행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도일(渡日)한 승려로는 영조(聆照) · 영위(令威) · 혜중(惠衆) · 혜숙(惠宿) · 도엄(道嚴) · 영개(令開) 등을 들 수 있다.[12]

무왕(武王) 3년(602)에는 관륵(灌勒)이 천문(天文)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遁甲) · 방술(方術) 분야의 책을 일본에 전했지만 그는 본래 삼론(三論)의 학장(學匠)으로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승단의 기강을 정하는 등 불교계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의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 후 혜미(惠彌) · 도흠(道欽) · 의각(義覺) · 도장(道藏) · 도녕(道寧) · 다상(多常) · 원각(願覺) · 원세(圓勢) · 방제(放濟) 등 많은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시대(飛鳥文化時代: 538~710)를 꽃피운 인물들이 되었다.[12]
신라 (263/479~661)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의 불교입니다.
불교의 신라 전래 및 전개편집

고구려백제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불교가 받아들여졌지만, 반도의 동남쪽에 자리잡아 대륙과의 소통도 없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신라에는 백제보다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

최초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6]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 신자요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공포하고 연호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 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진흥왕과 불교 정책편집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그의 치세중의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부인 역시 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13]
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
왕 10년(549) 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
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
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
왕 26년(565)에 (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
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
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

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13]
밀교의 전래편집

밀교태장계 만다라

밀교금강계 만다라

신라밀교(密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4년(635)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승려 자장(慈藏)의 외숙(外叔)으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신인비법(神印秘法) 혹은 문두루비법(文頭婁秘法: Mantra)이라는 방위신(方位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인 신앙을 들여왔다. 밀교대승불교를 난숙하게 발달시켜 타력신앙(他力信仰)을 강조하다 파생된 신앙형태로서, 주술을 통해 병귀(病鬼)와 악귀를 쫓고 초자연적 힘을 구사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등 실리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교파이다.[14]

명랑은 이러한 밀교신라에 처음 전래하여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고, 같은 시대의 밀본(密本)도 비밀법(秘密法)을 통해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유하여 밀교 전파에 공헌하였다.[14]

그 후 혜통(惠通)은 당나라에서 인도 밀교선무외(善無畏)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여 크게 교풍(敎風)을 일으켰다. 후대에 혜통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을 정도로 그의 밀교 전파에 대한 공로는 큰 것이었다. 혜통 이전까지 전래된 밀교잡밀교(雜密敎)여서 주술적인 면이 강조된 반면, 혜통은 영묘사승(靈妙沙僧)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순밀교(純密敎)를 처음 신라에 전하여 태장법(胎藏法)과 금강법(金剛法)에 의해 불교의 오의(奧義)를 터득하는 길을 열었다.[14]

신라 후대의 불교신앙미신과 결부된 주술밀교신앙이 횡행하여 본래의 탄력을 잃고 타락적인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14]
신라 불교의 특징편집

신라의 불교호국불교(護國佛敎)의 경향이 강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을 단합시켰던바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九層塔)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은 모두 불교정신에 의해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2]

팔관재회불교를 배우기 위한 범국민적 집회였으며, 백고강좌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호국적인 사상을 익히는 법회였으며,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자장(慈藏: 590~658)이 중국에 가서 본국의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면을 보좌하고 국가 권위를 세울 것을 암시받고 돌아와 인접 9개국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9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四天王)이 신라를 호위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원광(圓光: 542~640)의 세속오계호국의 표준이념이 되었다. 또한 원승(圓勝), 혜숙(惠宿: fl. 600[15]), 혜공(惠空: fl. 7세기 후반)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와 능히 삼국을 통일(676년, 문무왕 7년)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 왔다.[2]
인도 구법순례승의 활동편집

백제겸익(謙益)이 삼국시대에 구법(求法)순례를 위해 인도를 방문한 이래 많은 승려들이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로 떠났다. 삼국 통일기(676)를 전후하여 이들 유학승(留學僧)의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으나 그들은 거의 대다수는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일부는 인도에서, 일부는 귀국 도중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16]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唐) 정관년간(貞觀年間: 627~649)에 장안(長安)을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다. 당시 불교학의 최고학부인 인도 나란타사(那爛陀寺 · Nalanda)에 머물면서 연구하다가 70여 세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혜업(慧業)도 같은 시기에 나란타사에 머물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60여 세로 일생을 마쳤다. 현각(玄恪)은 당나라 승려 현조(玄照)와 함께 인도로 들어가 대각사에서 공부하다가 40세를 겨우 넘어 병으로 죽었다.[16]

현태(玄太)는 영휘년간(永徽年間: 650~655)에 티베트 방면을 통해 중인도(中印度)에 들어가 고타마 붓다가 대각(大覺)을 얻은 부다가야(佛陀伽耶 · Buddhagaya)의 보리수를 참배하고 이어서 그곳 대각사(大覺寺)에서 연구를 한 다음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그 후 무엇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혜륜(惠輪)은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던 승려로, (唐) 인덕(麟德) 3년(666)에 인도에 들어가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간 유학을 마친 다음 토카라 지방(Tokharistan: 현재의 발크(Balkh))의 사원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구법순례 도중 수마트라(Sumatra)섬 서해안 파로사국(婆魯師國 · Baros)에서 병사한 2인의 신라 유학승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16]

대범(大梵)은 신라 무열왕(재위 654∼661) 때 인도 대각사에서 연구를 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중국 불교계를 위해 공헌하였다. 원표(元表)는 경덕왕 때 입당(入唐)한 후 천보년(天寶年)에 다시 인도로 들어가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으로 돌아왔다. 귀국시 그는 《화엄경(華嚴經)》 80권을 가지고 왔으며 지제산(支提山) 석실(石室)에 들어가 고행(苦行)과 연구를 계속했다.[16]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로 유명한 혜초(慧超: 704~787)는 일찍 당나라에 들어가 당시 인도에서 나와 있던 고승 금강지(金剛智 · Vajrabodhi)에게서 사사(師事)하다가 인도로 들어갔다. 그는 벵골만(Bengal灣)에 있는 니코바르 군도(Nicobar群島)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고, 거기서 갠지스강(Ganges江) 유역 비하르(Bihar) 지방의 마가다국(Magadha國), 고타마 붓다의 열반지(涅槃地)인 쿠시나가라국(Kusinagara國)과 성도지(成道地)인 부다가야 등의 성지를 순방하고 중인도 · 남인도를 거쳐 서인도 · 북인도를 두루 순방하고 나서 토카라국을 거쳐 아무다리아강(Amudarya江)을 지나 사마르칸트(Samarkand) 지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어 동튀르케스탄(東Turkestan)을 거쳐 타슈켄트(Tashkent)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국(Kucha · 龜慈國)으로 돌아왔으니 이때가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이었고 신라 성덕왕(聖德王) 26년이었다. 으로 돌아온 후 혜초금강지(金剛智)와 그의 제자 불공(不空 · Amoghavajra)에게 밀교(密敎)를 배우며 밀교 경전을 번역하다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죽었다.[16]

혜초의 이 기록은 프랑스동양학자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1910년 둔황(敦惶)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 석실(石室)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의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혜초의 이 기행기는 동서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의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종교 · 풍습 · 인종을 알려주는 희귀한 문헌 중 하나가 되었다.[16]
남북국 시대의 신라 (661~935)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국 시대의 불교입니다.
시기 구분 및 역사편집

남북국 시대신라 불교를 크게 3분하면 다음과 같다.[17]
전성기(全盛期): 문무왕(재위 661~681)에서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
침체기(沈滯期):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헌덕왕(재위 809~826) 때까지
선법전래기(禪法傳來期): 흥덕왕 원년(826)에서 신라 멸망기(935)까지
전성기 (661~780)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전성기(全盛期)는 문무왕(재위 661~681)에서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로서 수많은 학승(學僧)을 배출하여 대승(大乘)의 종파와 교학이 크게 일어나게 된 학해불교(學解佛敎) 문화의 극치를 이룬 시기이다.[17]

신라는 제30대 문무왕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전성기에는 많은 고승들이 속출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원효(元曉) · 의상(義湘) · 원측(圓側) 등이 있다.[17]
침체기 (780~826)편집




가지

실상

희양

봉림

동리

성주

사자

사굴·도굴

수미
vdeh선종 구산(9산선문)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침체기(沈滯期)는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헌덕왕(재위 809~826) 때까지로, 불교(佛敎)가 국가사회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 시기이다.[17]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까지 활발했던 신라불교는 그 후 점점 침체되어 갔다. 이 무렵에 직절 간명한 선(禪)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새로운 선풍(禪風)은 중국에서 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禪宗)으로 성립 ·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六祖)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북선(北禪)과 남선(南禪)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 온 것이다. 신수(神秀: ?~706)의 북선(北禪)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남선(南禪)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선법전래기 (826~935)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 불교의 선법전래기(禪法傳來期)는 흥덕왕 원년(826)에서 신라 멸망기(935)까지로서 실천활동으로서의 선불교(禪佛敎), 특히 중국달마선(達摩禪)이 전래, 성행하게 된 시기이다.[17]

한국에 전해진 선법은 6조 혜능남선(南禪)의 후손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자가 도의(道義: d. 825)이다. 그는 선덕왕(宣德王) 5년(784)에 으로 가서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고제자 서당(西堂) 지장(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현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설(魔說)이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도의설악산에 은거,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니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890)에게 법을 전했다. 설악산에서 도의(道義)의 법을 배운 체징(體澄)은 837년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신라로 돌아와서 장흥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쳤다.[18] 이로써 선종 9산의 일파로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18] 이렇게 해서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주요 승려편집

신라 불교 전성기의 대표적인 인물 의상

신라 불교의 전성기(661~780)는 또한 한국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황금기이기도 하다. 이 때의 주요한 승려로는 원효 · 의상 · 원측이 있으며, 이들의 사상과 활동은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효신라 불교는 물론이요 한국 불교의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19][20]
원효편집

원효(元曉: 617~686)는 45세때(문무왕 원년, 661) 의상(義湘)과 함께 에 가던 도중 참된 법을 체험하고 도중에 돌아와 저술과 교화에 힘쓰다가 신문왕 6년(686)에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은 240여 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이며 오늘날 20부 22권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중심사상은 일심사상에 의한 원융회통(圓融會通)으로, 모든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서로 상통하는 원리를 구현시키고 있다.[17]
의상편집

의상(義湘: 625~702)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학명을 떨치고, 문무왕 11년(671)에 돌아와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여 화엄교학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3000여 제자가 운집했으며 그 중에 뛰어난 제자 10인을 상문10덕(湘門十德)이라고 했다. 원효는 교화 · 연구 · 저술에 힘쓴 반면 의상은 후진교육 · 교단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17]
원측편집

원측(圓測: 613~696)은 왕손으로서 15세때 에 유학하여 고승들에게 유식론(唯識論)을 배우고 산스크리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당 태종에게서 도첩(圖牒)을 받고 유가론(瑜伽論) · 유식론(唯識論)을 강의했다. 그는 규기(窺基)의 전통적 유식사상보다 앞선 대가였다.[17]
기타편집

이 밖에도 성덕왕(재위 702~764) 때의 혜초(惠超), 경덕왕(재위 742~764)때의 대현(大賢) · 진표(眞表), 고구려 출신의 승려 보덕(普德) · 혜량(惠亮) 등의 고승들이 있었다.[17]
승관 제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승관 제도입니다.

승관 제도(僧官制度)는 신라 시대 사원(寺院) 및 교단(敎團)을 통솔하기 위한 승직제도(僧職制度)이다. 이 제도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그 직무가 무엇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직계(職制)가 존립했었음을 알 수 있다.[21]
국통(國統) 또는 승통(僧統)
대서성(大書省)
소서성(小書省)
대도유나(大都維那)
도유나랑(都維那娘)
주통(州統)
군통(郡統)

이 밖에 국통 밑에 군승정(軍僧正)이 있었고, 9명의 주통과는 달리 절주통(節州統)이 있었다.[21]

원성왕 원년(785)에 정관(政官, 혹은 政法典)이 설치되었고 그 장(長)을 정법사(政法事)라 하였는데, 이들 승관(僧官)은 행정사무를 관장하는 한편 국민교화의 지도자로서의 직분도 부여받았으며, 또 군사적인 기능까지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비롯한 7개 사원에는 그 사찰의 운영과 영선(營繕)을 맡아보는 사성전(寺成典)을 두었다.[21]
신라원과 적산 법화원편집

남북국 시대 신라(唐)의 교역이 성하던 산둥반도(山東半島)와 장쑤성(江蘇省) 등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설치되었던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하며 이곳에 세운 사찰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한다. 신라원은 재당(在唐) 신라인의 신앙 의지처이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예배처였다.[22]

흥덕왕(재위 826~836) 때 장보고산둥반도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은 특히 유명했던 신라원이다. 이 적산 법화원은 해외 포교원(布敎院)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내지(內地)와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여 신라의 도당승(渡唐僧)은 물론 일본 승려들이 이곳을 거치며 많은 도움을 입었다. 일본 천태종의 승려 엔닌(圓仁)은 그 좋은 예다. 적산 법화원은 많은 재력(財力)을 갖고 있었으며 담표(曇表), 법청(法廳), 양현(諒賢), 성림(聖琳) 등 30여 명의 승려들이 상주하였고, 그 중에는 궤범(軌範), 혜각(惠覺), 법행(法行), 충신(忠信) 등의 선사(禪師)들도 있었다. 연중행사로서 신라의 예를 따라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간의 축제를 열고 또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를 여는 등 활발한 불교행사를 행하였다.[22]
사원 경제편집

사원 운영을 위한 재원(財源)은 신도들의 재물(財物) 시납(施納)에 의존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원경제가 형성되었다. 사원의 재산 형태는 토지노예가 있고, 토지는 국가에서 주는 사전과 일반 신도들이 기진(寄進)하는 장전(莊田)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외에도 사찰이식(利殖)을 도모하여 대곡(貸穀)의 형식으로 재원을 증대시켰고, 한편 사원에서 시주된 토지는 국가에서 면세조처를 받을 수 있어 수많은 전답이 사원에 기진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사원경제를 비대하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재원을 고갈시켰다. 또 이식(利殖)의 증대를 위한 대곡제(貸穀制)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 가난에 허덕이게 하였다.[23]

이러한 폐단은 이미 문무왕 4년(664)에 재화(財貨)와 전지(田地)를 불사(佛寺)에 시주하는 일을 금하는 영(令)까지 내리게 하였으나 전지(田地)의 시납(施納)은 계속되어 효소왕(孝昭王) 2년(693)에 백률사(柏栗寺)에 1만(頃)의 전지가 시주되었고, 혜공왕(惠恭王) 15년(779)에 취선사(鷲仙寺)에 30(結),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는 봉암사(鳳巖寺)에 500전지가 시납되었다. 한편 사원측에서 다량의 전답을 매입한 사실도 있어 그 매입문서가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불교 사원은 유력한 토지소유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사원경제는 국가경제와 직결되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여 군신들로 하여금 수차에 걸친 전답 시주 금지의 상소를 올리게 하였으며, 불교측으로는 내부적인 부패를 초래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23]
사원 노비편집

사원 노비(寺院奴婢)는 신라 시대의 사원에 거주하던 비승려(非僧侶)로서, 사승(寺僧)을 도와 사원의 경영 및 제반 업무에 종사하던 신분이다. 이들은 후대에 와서 그 신분이 비천해졌지만 처음에는 농노제(農奴制) 사회에 있어서의 노비와는 따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성별에 따라 남자는 사노(寺奴), 여자는 사비(寺婢)라 불리었는데 그 성분은 다음 세 종류로 구분되었다.[24]
왕족궁척(王族宮戚): 법흥왕(재위 514~540)이 사문(沙門)이 되어 흥륜사에 들어갈 때 궁척들을 사예(寺隸)로 사찰에 시주하였다. 그 후 한동안 사예는 왕손(王孫)이라 호칭되었다.
귀족: 귀족의 자녀가 스스로 불사(佛寺)에 몸을 바쳐 사원 노비가 되었다.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때 재상 김량도(金良圖)는 자기의 두 딸 화개(花開), 연보(蓮寶)를 사비(寺婢)가 되게 하였다.
죄인: 역적이나 죄인의 일족을 노비로 삼았으니 태종 무열왕 때 역신(逆臣) 모척(毛斥)의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고려 시대 (918~1392)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의 불교입니다.
고려 전기·중기 (918~1101)편집
고려 전기·중기 불교의 개요편집

고려 태조

대각국사 의천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 충목왕 4년 (1348), 대한민국 국보 제 86호

고려 태조(재위 918~943)는 신라 말기에 출현한 도선(道詵: 826~898)의 도참설, 즉 불교선근공덕(善根功德) 사상에 도교음양오행풍수지리를 가미한 과도기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도선의 사후에도 그를 숭배했다. 태조불교 신앙에 의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운의 가호를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불교 외호(外護)에 힘쓰고 을 짓고 법회를 열었다. 송도(松都)에 호국도량(護國道場)으로 10개의 을 짓고 서경(西京)에 9층석탑을 세우며, 몸소 불교를 널리 펼 것을 발원하는 글을 썼다. 특히 계계승승 왕가에서 불교를 믿도록 하기 위해 〈훈요10조(訓要十條)〉를 만들고,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燃燈會)를 열 것을 당부했다. 불교의 의식과 법회에 의해서 나라를 보호하려는 태조의 염원은 고려불교의 성격과 방향을 개국 초부터 굳혀버린 것이다. 고려조 전체를 통하여 이와 같이 고정화되어 버린 속신적(俗信的) 기복(祈福)의 저속성은 국민사상을 구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시대정신을 선도할 역량을 교단에서도 잃어버렸다.

태조불교를 외호하는 데 있어서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무인적인 성격에서 자연 선종을 좋아하여 선승(禪僧)에게 귀의하였고,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958년 관리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쓴 데에 견주어, 승려의 위계질서를 가리려고 승과(僧科)를 설치했다. 이것은 승려를 존경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9산선문고려에 와서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파의 성립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법의 영향으로 여러 종파의 교학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남북국 시대의상(義湘: 625~702)이 화엄을 널리 펼친 이래 끊임없이 연구되어 고려에 계승된 것이다. 화엄교학고려조 전체를 통해 선종이나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연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균여(均如: 923~973)의 《보현십원가》도 이 화엄교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많았는데, 의천(義天: 1055~1101, 대각국사(大覺國師))은 문종의 제4왕자로 11세에 출가하여, 영통사왕사 난원(爛圓)에게서 화엄을 배웠다. 그는 (宋)에도 유학하였으며, 그때 천태학(天台學)을 전수받고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敎觀)을 널리 강설했다. 그는 또 교장도감을 설치, 국내외의 논저(論著)를 널리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출판했다. 대각국사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 천태종이 성립(1097)되었다.[25]
고려 태조와 불교편집

왕건(877~943)은 고려태조(재위 918~943)가 되어 왕위에 오르자 고려국의 건설은 불법(佛法)의 가호(加護)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불교귀의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운의 번영을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불교 옹호에 힘썼다.[26]

태조는 즉위 원년(918)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고, 이것을 연례행사로 삼았다. 동 2년에는 송악(松嶽: 개성)에 천도하고 성내에 법왕사(法王寺), 자운사(慈雲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의 10대사(十大寺)를 세웠으며, 많은 사탑을 새로 개수하였다. 고승을 맞아들여 사사(師事)하였고, 또 자기의 옛집을 광명사(廣明寺)라는 절로 만들었으며, 사문(沙門) 홍경(洪慶)이 에서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왕은 친히 이를 맞이하여 제석원(帝釋院)에 안치하였다. 그 후 태조 23년(940)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고 낙성화엄법회(落成華嚴法會)에 왕이 소문(疏文)을 짓기도 했다. 또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연례행사로 베풀었고, 그의 제5대 왕자 증통국사(證通國師)는 출가까지 시켰다. 그 외에도 왕은 경유(慶猷)와 충담(忠湛)을 왕사로 삼고 현휘(玄暉)를 국사로 삼았으며, 신라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고사를 본떠서 통일의 대업을 이룩고자 개성7층탑, 평양9층탑을 세웠다. 개국사(開國寺)를 지을 때는 병사들을 동원하였으며 병기를 건축자재에 충당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심(信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500곳의 사원을 세웠으며 불상과 탑을 모두 합하면 3,500여개나 된다고 한다.[26]
고려 중기·후기 (1101~1392)편집
고려 중기·후기 불교의 개요편집

고려는 초기부터 (禪)이 성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중기에는 재래의 선종(6조 혜능의 영향을 받은 조계종)은 심히 부진하게 되었다. 이때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나와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었다. 많은 선승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후기는 선종 일색이 되었는데, 지눌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에 특기할 것은 역시 《고려대장경》의 판각이다. 태조(재위 918~943) 때부터 강조된 국가를 위한 신불(信佛) 사상은 《고려대장경》이란 거대하고 찬연한 민족문화 사업을 이루어 놓았다. 이 《고려대장경》은 양과 질에 있어서 세계 모든 대장경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화유산을 남긴 불교이지만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국권의 쇠퇴와 함께 불교도 함께 기울어졌다. 그런 중에도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 ?~1363)과 태고(太古: 1301~1382) · 백운(白雲: 1299~1375) · 나옹(懶翁: 1320~1376) 등 4선승은 고려말을 장식한 찬란한 별들이었다.
사원경제편집

사원경제의 구성요소는 인적자원(人的資源)으로서의 각종 노비(奴婢)의 증대 및 그들 노비에 의한 다양한 노역(勞役)과 물적자원(物的資源)으로서의 왕실귀족(王室貴族) 등에 의한 사여전(賜與田) · 시납전(施納田), 양민(良民)에 의한 투탁전(投託田), 기타 점탈(占奪)에 의한 전지(田地)의 증대 등이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재원(財源)을 토대로 사원 내의 승려들은 각종 수공업(手工業)과 상업을 진흥시켜 사재(寺財)의 충실을 기하였다.[27]

사원의 특권적 지위는 사령내(寺領內)의 전토(田土)에 대한 면세권(免稅權) 행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귀족 및 양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사원 명의로 하여 과세(課稅)를 면하려 하였으며, 또 정부의 주구(誅求)를 피하기 위하여 전지를 투탁(投託)함으로써 사원의 소작인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원은 곡물(穀物)과 주류(酒類)를 양조하고 또는 염전을 경영하여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사재(寺財)를 확충시켰다.[27]

이와 같은 경향은 한편으로 승려의 사생활을 호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극단의 사치생활을 영위하게 하였으며,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승려들의 수가 늘어나자, 세인(世人)의 반감과 원성이 높아지고 유신(儒臣)들의 배불론(排佛論)이 대두하기에까지 이르러 국가 발전에 장해를 주기도 하였다.[27]
교단의 문란편집

지나치게 번잡한 불교행사는 고려(918~1392) 사회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사탑(寺塔)의 남설(濫設)과 행사(行事)의 번다로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은 극도로 궁핍하였으며, 또한 병역(兵役)의 의무를 피하여 출가를 가탁(假託)하는 자가 많아 승려의 질이 저하되었다.[28]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에 와서는 권신(權臣) 최우(崔瑀: 1166~1249)의 서자 승(僧) 만종(萬宗) · 만전(萬全)이 악승(惡僧)을 모아 재화를 늘리는 일로 업(業)을 삼아 금은곡백(穀帛)을 쌓았으며, 그 문도(門徒)들은 각 사원에 분산되어 심한 횡포를 부렸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는 원조(元朝)의 위압(威壓)이 컸으며 토번승(吐蕃僧: 西藏僧)들이 인심을 무혹(誣惑)하였고, 또 라마미신은 신앙계를 흐려 놓았다. 특히 요술(妖術)로 사녀(士女)들을 유혹하고 사설(邪說)로 인심(人心)을 어지럽히는 사례가 많았다.[28]
배불론의 대두편집

불교의 지나친 부패와 타락은 필연적으로 유생들 사이에 배불론(排佛論)이 대두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상서(上書)를 비롯하여 갖가지 불교의 폐단과 부패를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상소가 있었으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10년에는 왕이 조칙을 내려 "계율(戒律)을 어기고 영리와 음주, 노래와 춤으로 법도를 어기니 기강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때의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 이색(李穡: 1328~1396)과 이조판서(吏曹判書) 강회백(姜淮伯)은 조불조탑(造佛造塔)으로 국가재정이 탕진되는 폐단을 시정하도록 촉구하기도 하였다. 창왕(昌王: 재위: 1388~1389) 때의 조인옥(趙仁沃: ?~1396),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의 김자수(金子粹) · 김초(金貂)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박초(朴礎) 등의 상소는 불교의 폐해를 극간(極諫)한 것이었다.[29]
고려시대 불교의 종파편집
고려 불교의 종파편집

5교종(五敎宗)과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미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처럼 뚜렷한 종지(宗旨)를 갖고 종파를 이루지는 못했다. 뚜렷한 종파를 가진 종파가 형성된 때는 고려 시대에 들어서이다.[30]

불교 종파의 기록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 자료는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 일 것이다. 숙종 6년(1101)에 찬(撰)한 개성 흥왕사(興王寺)의 대각화상 묘지(墓誌)에는 계율종(戒律宗) · 법상종(法相宗) · 열반종(涅槃宗) · 법성종(法性宗) · 원융종(圓融宗) · 선적종(禪寂宗) 등 6종(宗)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대각국사 당시의 학불자(學佛者)종(宗)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고려 초기에 6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근거는 없다.[30] 이 중 선적종선종(禪宗)이라 하여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31]

선종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신라 후기에 20여 개 선파(禪派)가 개창되었던 것을 나말 여초(羅末麗初)에 정리하여 9산(九山)이라고 불렀다. 9산(九山)은 가지산(迦智山)의 도의(道義: 804~880)선사, 실상산(實相山)의 홍척(洪陟: 828~888)선사, 사굴산범일(梵日: 810~889)선사, 사자산(獅子山)의 철갑선사, 희양산(曦陽山)의 진감(眞鑑: 774~850)선사, 봉림산(鳳林山)의 현욱(玄昱: 787~868)선사, 수미산(須彌山)의 이엄(利嚴: 866~932)선사 등을 말한다. 이리하여 6종(六宗) 혹은 5교9산(五敎九山)으로 통칭하였던 것이다.[31]

그러나 대각국사(大覺國師) 이후에는 5교9산5교양종(五敎兩宗)으로 바뀌었다. 5교양종이란 고려 원종 때(1206)부터 조선 태종(1418) 때까지의 각 종파를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7종이 성립된 시대이다. 대각국사(宋)나라에 다녀온 후 중국에는 교종(敎宗)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天台宗)이 한국에서는 선종(禪宗)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5교(五敎)도 개명되었으니 다음과 같다.[31]계율종(戒律宗) → 남산종(南山宗)법상종(法相宗) → 자은종(慈恩宗)원융종(圓融宗) → 화엄종(華嚴宗)법성종(法性宗) → 중도종(中道宗)열반종(涅槃宗) → 시흥종(始興宗)

6종 시대에는 5교 9산으로 통칭했으나 7종 시대에는 5교양종(五敎兩宗)이라고 통칭했다. 5교양종이란 5교종양선종(兩禪宗)이란 뜻으로서, 양선종이란 조계종천태종을 가리킨다. 천태종중국에서 창종된 것으로 교종의 하나였으나 고려에서는 선종의 하나로 취급되었다.[30]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통하되 교종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禪)의 입장에서 (禪) · (敎)의 일치(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이 두 사상이 양종(兩宗)의 대조적 선풍을 이루게 되었다.[31]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상가는 보조국사 지눌인바 한국의 독자적 선(禪) 사상을 개발하여 조계종을 중흥하고 새로운 면목을 세웠으며, 그 후 혜심(慧諶) · 진각(眞覺) 등 16국사(國師)가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다.[31]

고려 말(高麗末)에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가 9산선종(九山禪宗)을 통합(統合)하였으니 이 점에서 선계의 모든 스님들은 태고(太古)에 맥(脈)을 댔었다. 이후의 사계(嗣系) 문제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31]
의천과 천태종의 성립편집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의 주요 인물인 관세음보살




가지

실상

희양

봉림

동리

성주

사자

사굴·도굴

수미
vdeh선종 구산(9산선문)


신라에도 현광(玄光)이나 연광(緣光) 같은 천태교학에 밝은 학승(學僧)은 있었으나 천태종이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한 뒤부터이다(1097). 숙종 4년(1099)의 식년(式年)에는 제1회 천태종승선(僧選)을 행하였다. 이로부터 천태종은 공인(公認)된 한 종이 된 것이다.[25]

국청사천태종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하고 천태학을 강의하여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9산선문이나 화엄종의 승려도 많았다. 이리하여 근본도량인 국청사 외에도 전국에 6대본산(六大本山)을 두어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25]

당시 불교(禪)과 (敎)가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폐단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폐단을 타파하고 전(全)불교가 대동단결하는 종합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를 수립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의 통일적 사상을 전개한 것이 천태종이었다.[25]
지눌과 조계종지의 성립편집

조계종(曹溪宗)이란 말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계종지(曹溪宗旨)가 성립된 것은 지눌(1158~1210)에서부터였다. 지눌은 일찍이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라는 것과 화엄원돈지(華嚴圓頓旨)와 선지(禪旨)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고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힘을 얻은 바가 있었다.[32]

이와 같이 그는 화엄 · 천태 · 선학 등을 정혜겸수(定慧兼修)로써 포괄하고, 그 위에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창하였다. 당시 9산선문은 모두 이 종지(宗旨)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종사(禪宗史)에 획기적인 비약을 가져왔다.[32]

지눌은 또 (禪)의 입장에서 염불문(念佛門)을 흡수하여 자심미타(自心彌陀)의 도리를 밝혔다. 가 저마다의 주장에 치우친 편견을 시정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 사상을 주장하고, 정혜겸수를 제창하여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종풍(宗風)을 수립했다.[32]
보우와 구산선문의 통합편집

고려 말에 이르러 승려가 타락하고 사원의 규범이 무너져 승단(僧團)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타서 유신(儒臣)들은 배불(排佛)하기 시작하였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의해 조계종지로의 내면적 통일은 되었다 하지만, 9산의 문파(門派)가 열립(列立)하여 각각 자기의 산문(山門)을 자부(自負)하고 피차의 우열을 논하기를 능사(能事)로 삼았다. 그때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9산선문(九山禪門)의 병폐를 우려하고 서로간의 우열을 없애기 위하여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9산을 통합하고자 그 취지를 공민왕(재위 1351~1374)에게 헌언(獻言)하였다. 공민왕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9산을 통합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조국사 지눌에 의하여 한국 특유의 종지가 확립되어 내면적인 통일이 되었고, 공민왕 5년 태고 보우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통일된 조계종이 이루어졌다.[33]
대장경 조판편집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으로 만든 경전의 한 페이지 (1371)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입니다.

고려 시대에 있어서 《대장경》의 조판은 전후 두 번에 걸쳐 있었다. 처음은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때이고, 다음은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이다. 이것을 《초조장경(初雕藏經)》·《재조장경(再雕藏經)》이라 한다.[34]
초조장경편집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2년(1010)에 거란(契丹)의 성종(聖宗)이 쳐들어와서 의주(義州) · 선천(宣川)을 빼앗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이때 법언(法言) 등 승려들도 적병을 물리치고자 싸웠으나 적군은 수도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왕은 나주(羅州)로 피란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 판목의 조조(雕造)에 착수하였다. 왕이 《대장경》 조판을 시작한 것은 적을 물리쳐 국난을 극복하고자 불법(佛法)에 기원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의 명복까지도 빌기 위함이었다고 한다.[35]

그 뒤 적은 물러가고 이어서 덕종(德宗: 재위 1031~1034)과 정종(靖宗: 재위 1035~1046)을 거쳐서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에 이르기까지 전후 약 40년에 걸쳐 《대장경》 조판을 완성하였다. 이 《대장경》은 1,106부 5,048권으로 《고려 구장경(舊藏經)》 또는 《초조장경》(初雕藏經)이라 한다.[35]

이 대장경판을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하여 국가를 진호(鎭護)하게 하고 국민의 신앙이 집중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19년(1231)에 몽고병이 쳐들어와서 부인사의 장경판과 황룡사(皇龍寺)의 9층탑을 태워버렸다.[35]
재조장경편집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19년(1231)에 몽고병이 침입하여 이듬해 왕은 강화도로 천도(遷都)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 24년(1236)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대장경》 재조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앞서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 《대장경》을 조조(雕造)하여 외적을 퇴치시키고자 한 것처럼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부처의 가호(加護)를 빌기 위한 것으로《재조장경(再雕藏經)》이라고 한다.[36]

고종은 전국의 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강화(江華)에 대장도감 본사(本司)를 두고 진주(晋州)에 분사(分司)를 두어 국력을 기울여 16년간이나 걸려 왕 39년(1251)에 완성을 보았다. 총 81,258판을 양면에 새겼으므로 162,516면이나 된다. 여기에 수록된 경이 1,512부 6,791권이다. 당시 각종 이판(異板)들과 대교(對校)하여 정밀히 교정했기 때문에 각국에서 개판(開板)된 어떤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한역대장경》이며 한국 문화의 지보이다.[36]

현재 해인사(海印寺)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판(板)을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하며 속칭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36]
승과제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승과제도입니다.

승과제도(僧科制度)는 승려의 선발을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제도로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승려의 선발제도로서는 국가적인 승과제도에 앞서 해회(海會)라는 것이 태조(太祖: 재위 918~943) 4년(921)에 있었으나, 국가적인 제도로서 승과가 실시된 것은 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 이후이다. 확실한 명문은 없으나 광종 10년(958) 이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광종 10년에 국가에서 관리의 등용문(登用門)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일반 과거법을 따라서 승려도 선발 · 등용하고자 승과(僧科)를 실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37]

승과에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의 구별이 있었다. 종선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였으며, 각 종파 내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대선에 응시하게 된다. 대선은 국가에서 행하는 것으로 선종대선(禪宗大選)과 교종대선(敎宗大選)의 구별이 있다. 선종대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선종(禪宗)의 승려에게 실시하였고, 교종대선왕륜사(王輪寺)에서 교종(敎宗)의 승려에게 시행하였다.[37]

이나 나 다 같이 대선(大選)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라는 초급법계(初給法階)를 주어 차례로 승진하게 하였다. 선종법계대선(大選)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의 차등이 있었고, 교종법계대선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수좌(首座) · 승통(僧統)의 차례였다. 이와 같은 법계를 밟아 올라가서 각종(各宗) 모두 삼중대사 이상, 즉 선종선사 · 대선사, 교종수좌 · 승통법계에 이르면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받들어지게 되었다.[37]

이러한 승과제도고려조에는 물론 조선시대 중엽까지 계속되었다.[37]
승록사편집

승록사(僧錄司)란 불교의 제반 사무를 맡아보기 위해 중앙에 둔 관청이다.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고려에 와서는 초기부터 관련의 기록이 보이고 있다. 양가(兩街)라든가 좌가승록(左街僧錄) · 우가승록(右街僧錄) 또는 좌우양가도승록(左右兩街都僧錄)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모두 승록사 또는 그 일부의 직제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기능과 역할, 구성조직 같은 것을 알기는 힘들다.[38]

다만 표면상의 기록과 명칭에 의하면 승록사에는 좌우 양가(兩街)가 있어서 그 양가에 각각의 승록이 있었다. 승록은 그 가(街)의 승려와 교단의 제반사를 관리하고 모든 불교행사를 주관하였던 것 같다. 양가의 승록 위에 도승록(都僧錄)이 있어 전(全)승록사를 대표하고 양가를 총괄하여 관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38]
법회편집

고려시대법회는 종류와 명칭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법회들은 법회(法會) · 법석(法席) · 대회(大會) · 도장(道場) · (齋) 등으로 나눌 수 있다.[39]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 등은 모두 신라에서부터 전해 온 것으로서 백고좌법회팔관회호국적(護國的)인 불교행사였다.[39]

태조 때 화엄법회(華嚴法會) ·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창설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비로자나참회법회(毘盧遮那懺悔法會) ·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 · 장경도장(藏經道場) · 소재도장(消災道場) · 기상영복도장(祈祥迎福道場) · 금광명경도장(金光明經道場) · 오백나한도장(五百羅漢道場) · 금강경도장(金剛經道場) · 인왕도장(仁王道場) · 우란분재(盂蘭盆齋) · 금광법석(金光法席) · 오교법석(五敎法席) 등이 있었다.[39]

이들 법회의식이 지닌 성격과 내용을 분류하면 기복(祈福) · 양재(穰災) · 진병(鎭兵) · 치역(治疫) · 시식(施食) · 기우(祈雨) · 기청(祈晴) 등으로 나눌 수 있다.[39]
조선 시대 및 대한제국 (1392~1910)편집
조선 시대 불교의 개요편집

조선고려 후기의 사원경제의 폐해 등의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억불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5교양종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뀌게 되었다.[40] 특히, 조선억불책의 일환으로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해 처음에는 도첩제를 시행하였고,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에는 이마저 폐지해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렸다.

세종 7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 · 천태종 · 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40] 또한 조선의 불교가 쇠퇴를 거듭했다 견해가 존재하지만(대표적으로 다카하시 도오루의 이조불교) 최근에는 김용태 교수 등이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손성필 또한 조선시대를 단순한 불교의 쇠퇴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였다.가령 불국사의 경우 사찰 재건에 유림이 기여하기도 하였다.

조선에도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는데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등이 있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때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비호로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 1515~1565)는 불교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한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 양종판사(禪 · 敎兩宗判事)가 되어 인재를 발굴, 억불정책 속에서도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켜 왔다.[40]

이러한 소수의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전체적으로는, 조선의 불교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신라고려에서 보여주던 왕성한 교학적 성격을 띄진 않는다.
조선 전기 (1392~1506)편집
조선 전기 불교의 전개편집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조선(1392~1897) 건국을 주도하였던 관학파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말 불교의 많은 폐단을 봄에 따라, 도첩제를 시행하는 등 국가적인 억불책을 펼쳤다. 고려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유생(儒生)들의 배불(排佛)운동은 불교를 사교(邪敎)로 이단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을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억압책 속에서 불교계에서는 태조의 창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무학(無學: 1327~1405)을 비롯한 고승들이 나오기는 했으나, 교학상 혹은 선리(禪理)상 독창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태조(재위 1392~1398) 자신은 개국공신인 정도전조준 등의 진언으로 억불정책을 쓰면서도, 역성(易姓)혁명으로 인한 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업을 두려워하고 개국 초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전시대의 신앙을 존중하려 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에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인출하여 탑 속에 안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였다. 태조 6년(1397)에는 왕후 강씨를 위해 흥천사를 세우고, 수륙재를 베풀어 고려 왕씨들의 원혼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재위 1400~1418)은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위해, 즉위하자 곧 불교 탄압에 착수, 종파를 병합하고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켰으며, 사찰 토지를 몰수하고 왕사국사의 제도를 철폐하였다.

세종(재위 1418~1450)도 태종억불정책을 계승, 더욱 강행하였다. 이러한 억불책 때문에 세종 1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로 가서 국내의 심한 박해를 호소한 일도 있었다. 세종 때에는 여러 종파들을 (禪) · (敎)의 양종으로 폐합하고 성 밖의 승려에게 성안 출입을 금하게 하였다.

한편 세조(재위 1455~1468)는 일찍부터 신미(信眉) · 학조(學祖) 등의 당시 고승들을 가까이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정책(護佛政策)을 썼다. 승려들에게는 다시 도성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관속들이 함부로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 중에도 세조의 업적으로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의 번역과 간행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월인석보》 등을 간행하고 《대장경》을 인출했다.
조선 태조와 불교편집

태조는 창업(創業)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으며 불교 신자였다. 그는 즉위하기 전에 이미 태고(太古) · 나옹(懶翁) 등의 고승들에 사사(師事)하였으며, 특히 무학대사(無學大師)와는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그의 창업에 전기(轉機)를 가져다 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에는 승장(僧將) 신조(神照)의 도움이 컸으며 등극(登極) 후에는 곧 무학왕사(王師)로 삼고 어려운 건국사업(建國事業)을 완성코자 하였다.[26]

태조는 즉위 초에 연복사(演福寺塔)을 중창(重創)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海印寺) 고탑(古塔)을 중수(重修)하고 《대장경》을 탑 속에 안치하여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번영을 빌었다. 태조 3년(1394)에는 천태종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삼고 승(僧) 100명을 내전(內殿)에서 반사(飯食)하였다. 6년(1397)에는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조계선종(曹溪禪宗)의 본사(本寺)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강화(江華)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 이 밖에도 건국경찬사업(建國慶讚事業)으로 《대장경인경(印經)과 금은자 사경(金銀子寫經)을 하게 하였다.[26]

실록(實錄)》에 전하는 불교행사만 해도 인경(印經) 12회, 소재회(消災會) 14회, 불사법석(佛事法席) 35회, 반승(飯僧) 9회 등을 들 수 있다. 주위 여론이 (僧尼)를 도태시키고 사원(寺院)을 혁파(革罷)해야 한다고 했으나 태조는 개국(開國) 초기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여 척불(斥佛)에 휩쓸리지 않았다.[26]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등도 척불을 주장했으나 태조의 신불(信佛)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호(自號)를 송헌거사(松軒居士)라 하였고, 왕위를 떠난 뒤에도 염불삼매(念佛三昧)로 만년을 보냈다.[26]
배불정책편집

불교 자체의 부패와 유생들의 척불(斥佛)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즉위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단행하게 하였다.[41]①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수를 줄이며 승려를 환속(還俗)시켰다.② 사찰 토지를 국유(國有)로 몰수하고 사원에 딸린 노비(奴婢)를 군정(軍丁)에 충당하였다.③ 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하고 왕사 · 국사를 폐지하였다.④ 능사(陵寺)의 제도(制度)를 금하였다.

태종 2년(1402)에 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에 좇아 경외(京外)의 70사(寺)를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전(土田) ·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노비를 제사(諸司)에 분속(分屬)시켰다.[41]

태종 5년(1405) 11월에는 의정부(議政府) 상서에 좇아 개성(開城)과 신경(新京: 지금의 서울)에 각종(各宗)의 사원 1사(寺)씩, (牧)과 (府)에는 선종 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 (郡縣)에는 선종 · 교종 가운데서 1사(寺)씩만 두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그러나 연경사(衍慶寺) · 화장사(華藏寺) · 신광사(神光寺) · 석왕사(釋王寺) · 낙산사(洛山寺) · 성등사(聖燈寺) · 진관사(津寬寺) · 상원사(上元寺) · 견암사(見岩寺) · 관음굴(觀音窟) · 회암사(檜巖寺) · 반야사(般若寺) · 만의사(萬義寺) · 감로사(甘露寺) 등만은 노비(奴婢)와 토지를 감(減)하지 않았다.[41]

이듬해 태종 6년(1406) 3월에는 의정부(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다음과 같이 정하여 이밖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41]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해서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을 합해서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을 합해서 30사
남산종(南山宗) 10사
시흥종(始興宗) 10사

그리고 · 양경(兩京)에는 선종 · 교종의 각 1사(寺)에 200(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 ·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려 10명을, 읍외(邑外)의 각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釋省敏)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41]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역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세종 원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明帝) 성조(成祖)에 호소한 사실에 의해서 세종배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세종 6년에는 종단을 폐합하여 (禪) · (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242개 사찰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개사로 줄였으며, 성외(城外) 승려에게 성내(城內) 출입을 금하였다.[41]

다음 문종(文宗: 재위 1450~1452)도 역시 승려의 왕성(王城) 출입을 금하고 민간인의 출가(出家)를 막았다.[41]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일반이 상(喪)을 당했을 때 불승(佛僧)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국왕의 탄신일에 신하가 사원에 가서 설재(設齋)하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도승법(道僧法)의 폐지와 승려환속으로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다.[41]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선종(禪宗)의 본사(本寺)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興德寺) · 대원각사(大圓覺寺)를 폐하고 관가의 건물로 삼았다.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를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성내(城內)의 니사(尼寺)를 헐고 니승(尼僧)은 궁방(宮房)의 비(婢)로 삼았다. 또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취처(娶妻)하게 하였으며, 사사(寺社)의 토지를 모두 관부(官府)에 몰수하였다. 이때 승과(僧科)도 중지되고 양종(兩宗) 본사(本寺)도 없애버렸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은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圓覺寺)를 헐어 그 목재를 연산군 때 헐린 민가(民家)의 재축(再築) 자재로 나누어 주었다.[41]

이러한 국가적 배불정책의 결과로 조선 시대 전체를 걸쳐 불교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41]
종파의 폐합편집

태종 6년(1406) 3월의 의정부(議政府) 상계(上啓)에는 조계종(曹溪宗) · 총지종(摠持宗) ·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 천태법사종(千台法事宗) · 화엄종(華嚴宗) · 도문종(道門宗) · 자은종(慈恩宗) · 중도종(中道宗) · 신인종(神印宗) · 남산종(南山宗) · 시흥종(始興宗) 등 11종(宗)의 명칭이 보이는데, 다음 해 의정부 계서(啓書)에는 조계종 ·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총남종 · 시흥종6종의 명칭만 보인다. 이에 의하면 태종 6년(1406) 3월까지는 11종이 있었으나 곧 총지종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으로 만들고, 중도종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으로, 천태소자종법사종을 합쳐 천태종으로 만들어 7종으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42]

그러나 세종 6년(1423) 예조(禮曺)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7종이던 종단을 폐합하여 2종으로 하였으니, 즉 조계종 · 천태종 · 총남종선종(禪宗)으로 하고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 양종(兩宗)으로 만든 것이다. 이리하여 양종 각각 18개사, 합하여 36개사만 남기고 모든 사원을 폐지하였다.[42]

이와 같이 불교 종파의 폐합은 사찰의 수와 종파를 축소시킴으로써 많은 사재(寺財)와 노비를 몰수하고 재정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배불(排佛)의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42]
세조의 호불정책편집

세조는 본래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평소에 신미(信眉) · 수미(首尾) · 설준(雪峻) · 홍준(弘濬) · 효운(曉雲) · 지해(智海) · 해초(海超) · 하지(斯智) · 학열(學悅) · 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가까이 하며 그들에게 사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를 좋아했고 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정책(護佛政策)을 썼다.[43]

세조의 호불정책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43]
승려의 권익 옹호
사원 중흥 · 삼보(三寶) 숭봉 등에 의한 불사 진흥
불경의 역간(譯刊)

세조의 호불정책에 따라 승려의 성내(城內) 출입이 자유롭게 되고 출가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범죄의 혐의를 받은 승려라도 먼저 국왕에 계청(啓請)해서 허가를 받고 신문(訊問)하며, 관속(官屬)이 함부로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도승선시(度僧禪試)의 법을 정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기(明記)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준거(準據)하게 하였다.[43]

왕은 지금의 파고다공원 터인 흥복사(興福寺)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불상을 세웠다. 그 외에도 해인사(海印寺) · 상원사(上院寺) · 월정사(月精寺) 복천암(福泉庵)과 금강산 · 오대산의 명찰(名刹)을 찾아 공양하고 불사(佛事)를 일으켰다.[43]

왕은 또 불전(佛典)의 국역(國譯)과 인경(印經) 사업을 장려했다.[43]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印出)하였으며,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월인석보》는, 앞서 세종 때 왕명에 의하여 자신이 편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이 보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 하여, 각각 별책으로 간행되었던 이 두 가지를 세조 5년(1459)에 합하여 하나의 체제로 간행한 것이다. 또 세조 6년(1460)에는 불교음악 영산회상곡(靈山會相曲)을 작곡하였으며, 세종 4년에 폐지한 바 있는 도성경행(都城經行)을 부활시켰다. 이듬해 6월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경을 국역 · 간행하였다.[43]
조선 중기 (1506~1637)편집
조선 중기 불교의 전개편집

세조(재위 1455~1468)의 호불(護佛)이 있은 뒤 성종 · 연산군 · 중종을 거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박해를 받게 되는데, 13대 명종(재위 1545~1567)이 즉위하자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섭정을 하면서 불교는 잠시 부흥의 기운을 보았다. 왕후는 유생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폐지되었던 · 양종제(兩宗制)를 부활시켜 허응 보우(虛應普雨: 1515~1565)를 선종판사, 수진(守眞)을 교종판사로 삼아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케 했다. 조선 불교의 거승(巨僧)인 휴정(休靜: 1520~1640)과 사명(泗溟: 1544~1610) 등이 모두 이 때의 승과 출신들이었다.

휴정과 그의 동문 부휴(浮休: 1543~1615)는 조선 일대의 고승이었으며, 그들의 문하는 번창하여 (禪) · (敎)의 명승들이 다수 배출되어 한때 장관을 보였다. 휴정의 제자 사명1604년 일본강화사(講和使)로 건너가 임무를 완수,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목숨을 바쳐 구국의 길에 앞장을 서기도 했던 것이다. 서산사명이 없었던들 조선 불교는 적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수난으로 조선승려들은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대(對)사회적인 기능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의 규탄자가 있었으니 그는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의 백곡 처능(百谷處能: 1617~1680)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국가의 배불정책에 분개한 그는 8만여 언(言)의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로써 척불(斥佛)정책을 규탄했다. 그러나 억불책(抑佛策)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승려들은 산중으로 들어가 도성(都城) 안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편집

세조의 호불정책이 있은 후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 중종(中宗)을 거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한 뒤 그의 모후(母后)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44]

문정왕후중종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명종 6년(1551)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의 허응당 보우(普雨)를 맞이하여 불교를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유생들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봉은사(奉恩寺)에 선종을,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어 양종제(兩宗制)를 부활시켰다. 보우를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住持)로 삼고 수진(守眞)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奉先寺) 주지로 삼았으며, 도승제(度僧制)와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하였다.[44]

명종 6년(1551)에 승과 예비시험을, 7년(1552)에 본(本) 시험인 승과를 행하여 교단은 활기를 띠고 유능한 인물이 모여들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도 이때의 승과 출신이었으며, 교종판사 · 선종판사를 역임한 바 있다. 사명당 유정(惟政) 역시 그 후에 승과에 등용되었다. 이때 사방에서 보우 타도의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고,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관(館)까지 비우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44]

그 후 명종 20년(1565)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 사업은 중도에서 꺾어지고,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몰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끝내 목사(牧使) 변협(邊協)으로 하여금 장살(杖殺: 형벌로 매를 쳐서 죽임)하게 하였다.[44]

또다시 배불이 시작되어 명종 21년에 양종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15년간의 흥불사업은 교계에 유능한 인물을 배출시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국난(國難)을 구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44]
휴정과 유정편집

서산대사 휴정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은 승과에 급제하여 선 · 교 양종판사(禪 · 敎兩宗判事)의 승직을 가지고 교강(敎綱)을 바로 잡고 문도(門徒)를 양성하였다. 왜병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국란을 당하게 되자 70노구로 전국 사찰에 격문(檄文)을 띄워 승군(僧軍)을 모집하고 참전하여 공을 이루었고 이에 선조(宣祖)가 선교도총섭부종수교(禪敎都摠攝扶宗樹敎)의 사호(賜號)를 내렸다. 특히 그의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시불심(禪是佛心) · 교시불어(敎是佛語)를 제창하여 의 동체 2면(同體二面)을 주장하고, 불교 총화에 노력하였다.[45]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은 휴정의 문하로서 임진왜란 시에 승병(僧兵)을 통솔하여 공을 이루었고, 전후에는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가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나라를 구하고 국민을 살렸다는 공적으로 보제생령 홍제존자(普濟生靈弘濟尊者)라는 법호(法號)를 받았고, 조선 시대 불교 중흥의 기초를 마련했다.[46]
간폐석교소편집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는 조선 시대척불책(斥佛策)과 배불사상을 논파(論破)한 유일한 소문(疏文)이다.> 당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이 즉위하여 억불책(抑佛策)을 강행하였다. 현종 4년에는 서울 장안의 니승(尼僧)을 성밖으로 축출하고 문정왕후의 내원당(內願堂)으로서 5,000의 니승을 수용했던 자수(慈壽) · 인수(仁壽) 두 니원(尼院)을 폐하였으며, 모든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位田)을 본사(本司)에 돌리게 하고 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이때 백곡 처능(百谷處能: 1617~1680)이 불교의 탄압에 항의하는 (疏)를 올린 것이다. 이 소문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긴 상소문(上疏文)이기도 하며,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척불의 부당함과 불교의 정당성을 간쟁(諫諍)한 오직 한 번뿐인 소문이다. 그러므로 처능의 《간폐석교소》는 불교사의 중요한 자료이다.[47]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1637~1910)편집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불교의 전개편집

명종 20년(1565)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 사업이 중도에서 꺾어지고 억불책이 다시 시행되었다.[44] 그 후 승려들은 도성 출입이 다시 금지되었고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32년(1895) 4월 입성(入城)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그것도 일본 승려들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때 일본의 승려들은 마음대로 성안 출입을 하는데 정작 자국의 승려들은 출입을 금지당한 모순을 보고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佐野)가 총리대신 김홍집에서 상서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城) 안에 자유로이 전교할 수 있게 되자 암담했던 불교는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제(日帝)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는 일본의 각 종파의 승려들이 드나들면서 전도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뒤늦게서야 배불정책을 지양하고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고,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首寺刹)을 삼고, 13도에 각각 1개의 수사(首寺)를 두어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불교계 자체에서도 전국 사찰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8년 3월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그동안 종명(宗名)마저 없어져 버린 한국불교를 개탄하고 원종(圓宗)이라고 종명을 의정(議定)했다. 그때 해인사 주지이던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추대했다.
선문수경과 선론편집

선문수경(禪文手鏡)》은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저술로서 선학(禪學) 연구의 한 지침서가 되었으며, 새로운 선론(禪論)이 일어나게도 하였다. 백파는 《선문수경》에서 (禪)에 3종(三種)을 세워 조사선(祖師禪) · 여래선(如來禪) · 의리선(義理禪)이 있다고 하였다.[48]

그러나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반론을 폈다. 의순은 그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에서 의리선(義理禪) · 격외선(格外禪) · 여래선(如來禪) · 조사선(祖師禪)의 4변(四辯) 또는 살인검(殺人劍) · 활인검(活人劍) · 진공(眞空) · 묘유(妙有)의 4변(四辯)으로 백파의 선론을 반박하였다.[48]

우담 홍기(優曇洪基: 1822~1881)도 백파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지어 백파의 선론에 반대했다.[48]

이에 대하여 백파의 문인(門人)이며 법손(法孫)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은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의순의 《선문사변만어》와 홍기의 《선문증정록》을 번박(飜駁)하였다.[48]

그 후 서진하(徐震河: 1861~1926)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백파의 《선문수경》과 의순 · 홍기 · 유형의 모든 선론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백파의 설에 대해 찬 · 반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나 선론을 집대성(集大成)하고 총정리하지는 못하였다.[48]

이와 같이 백파의 선론을 중심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에 기석(記釋)과 이론의 쟁변(諍辯)이 있었던 것은 조선 말기 불교의 특징이다.[48]
미타신앙편집

신라 후기에도 미타신앙(彌陀信仰)이 성하였으나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 사찰염불당(念佛堂)을 두어 만일회(萬日會)를 베풀고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염원하였다.[49]

건봉사(乾鳳寺)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대법회를 가졌었다. 처음은 순조(純祖: 재위 1801~1834) 때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 번째는 철종(哲宗: 재위 1850~1863) 때 벽오(碧梧)가, 세 번째는 만화(萬化)가 고종(高宗) 18년(1881)에 시작하여 융희(隆熙) 2년(1908)에 마쳤다.[49]
승려 입성의 해금편집

고종 32년(1895) 4월에 승려의 입성(入城) 금지령(禁止令)이 해제되었다. 그때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佐野)는 한국승려가 성내에 들어오지 못함을 보자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 상서하고 다시 김홍집고종(高宗)에 상주(上奏)하여 비로소 승려의 입성이 허가되었다.[50]

그 뒤 3년이 지나서 광무(光武) 2년(1898)에 또다시 성 안의 승려를 축출하는 영(令)이 내려져 의 입성을 금하였으나 이것은 실행되지 않고 해제되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승려의 성내 출입이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또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50]
승단의 국가관리편집

광무(光武) 3년(1899년)에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首寺刹), 즉 한국 불교총종무소(總宗務所)로 삼고 13도(道)에 각각 하나씩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사찰 통일의 뜻을 관철하고 나아가 국가 관리로 하기 위하여 광무 6년(1902)에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51]

이에 관리서에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 즉 사찰령(寺刹令) 36조를 발포하고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일체 사무를 맡아 보았다. 이리하여 관리서에서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中法山)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관리했다. 원흥사가 국내 수사찰로서 대법산이 되고, 중법산은 각 도내 수사찰로 16개 사찰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국내의 사찰승려는 이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 들게 되었다.[51]

그러나 그 후 관리서대법산도 오래 가지 못하고 광무 8년(1904) 1월에 폐지되어, 관리서의 소관사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에 옮겨졌다가 동년 2월에 칙령 제15호로써 사사(寺社)에 관한 사무는 내부지방국(內部地方局)의 주관으로 되었다.[51]
불교연구회편집

관리서가 폐지된 뒤 광무 10년(1906) 2월에 홍월초(洪月初) · 이보담(李寶潭) 등이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창립하여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불교연구회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서 정토종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그리고 불교 교육기관으로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홍월초, 그 뒤를 이어 이보담이 회장이 되고 명진학교 교장(校長)을 겸직하였다.[52]
원종의 성립편집

융희(隆熙) 2년(1908) 3월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회의하고, 원종 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세웠다. 배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종명(宗名)마저 없었던 일부 불교계에서는 일본 불교의 각 종파(宗派)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종명(宗名)을 밝힐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승려대표자회의를 열어 원종(圓宗)이라 결의하고 대종정(大宗正)으로 이회광(李晦光)이 추대되었다.[53]

융희 4년(1910)에는 각황사(覺皇寺)를 창건하여 조선불교중앙회의소중앙포교소(中央布敎所)로 하였다. 이해 가을 종정 이회광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관장(管長) 이시가와(石川素童)를 만나 원종일본 조동종의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를 보고 7조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 교계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 조약이 조선불교일본에 팔아먹는 매교행위(賣敎行爲)라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53]
이판승과 사판승편집

조선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천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유역(油役) · 지역(紙役) · 혜역(鞋役) · 잡역(雜役) 등의 천대가 극심했다. 이에 견디기 어려워 황폐한 사원이 많이 생겼으며, 이때 이판승사판승의 두 유별(類別)이 생기게 되었다.[54]

당시 수행에 전념하는 유능한 승려들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다소 무식한 승려들이 사원을 맡아 그 실무를 보며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 말기 교단의 혜명(慧明)을 유지하고 심한 관가(官家)의 주구(誅求)와 잡역을 감당하며 사원을 지켜온 공은 컸다. 이때부터 참선(參禪) · 간경(看經) · 염불(念佛)을 비롯한 수도(修道)에 종사하는 승려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사원의 운영 실무를 맡아 보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했다.[54]
일제 강점기 (1910~1945)편집
일제 강점기 불교의 전개편집

1910년각황사(覺皇寺)를 창건, 중앙회 사무실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이회광이 그해 가을 일본 조동종과 임의로 연합조약에 합의하자, 국내 교계에서는 크게 반발,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행위라고 규탄하였다.

박한영 · 진진홍 · 한용운 등이 궐기하여 1911년 1월 영남호남의 승려를 모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도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자, 불교도 국운의 쇠퇴와 함께 식민지 통치 아래 들고 말았다. 이때 전국 사찰30본산으로 나누어 유기적인 관계를 단절해 놓았다.

이 무렵 불교청년회불교유신회가 생겨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임제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임제종입니다.

1910년원종(圓宗)이 일본조동종과 연합한 데 반대하여, 박한영(朴漢永) · 진진응(陳震應) · 한용운(韓龍雲) 등이 궐기하여 이듬해 1911년 1월 · 호남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55]

임제종 임시종무소를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仙巖寺)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연로하여 한용운이 대리로 종무(宗務)를 맡게 되었으니 광주 등지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원종과 대치하여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견지하려 하였다.[55]

그러나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사찰령 7조를 발포하고, 7월에 사찰령 시행규칙 8조를 발포하여 모든 사원승려의 문제를 규제하였다. 이리하여 원종임제종은 모두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다.[55]
사찰령과 교단의 체제편집

1911년 6월 3일 사찰령(寺刹令)이 제정 · 발포되고, 동년 7월 8일에 사찰령시행규칙이 발포(發布)됨으로써 교단은 조선불교 30본산(本山)(1924년화엄사가 승격되어 31본산으로 됨)으로 형성되어 30개 교구역(敎區域)으로 나뉘었다. 이 사찰령에 의하여 동년 11월부터 30본산의 제1대 주지(住持)를 차례로 인가하였으며 이듬해(1912)부터는 사찰령에 의한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56]

또한 조선 불교선교 양종(敎禪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5월에 각황사(覺皇寺)를 중앙포교당으로 하여 30본산 회의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30본사(本寺)는 각각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고 각 사찰에 시행함으로써 사찰령의 취지를 실현하게 되었다. 사법(寺法)은 각 사찰에서 각각 제정하였으며 모두 총칙(總則) · 사격(寺格) · 주지(住持) · 직사(職司) · 회계(會計) · 재산(財産) · 법식(法式) · 승규(僧規) · 포교(布敎) · 포상(褒賞) · 징계(懲戒) · 섭중(攝衆) · 잡칙(雜則)의 13장(章)으로 하였고 그 내용도 거의 같았다.[56]
30본산연합회편집

1915년 30본산에서는 포교 및 교육의 일원화를 위해 본사 주지들이 회의를 하여 30본산연합제규(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각황사(覺皇寺)에 30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위원장은 30본산의 주지 가운데서 선정하여 연합사무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30본산이 교구로 성립되고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유기적인 관계가 결여됨으로 인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사찰을 총괄하고 전 승려를 통제하지는 못하였다.[57]
총무원과 종무원편집

조선 불교계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자, 신진 소장 승려들이 주동하여 신성한 종교가 행정관청의 지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전국승려대회를 열었다.[58] 이러한 움직임에 의하여 1921년 각황사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총무원)을 설치하고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58] 그러나 30본사 주지 중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 이듬해(1922)에 별도의 기구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종무원(종무원)이 역시 각황사에 설치되었다.[58] 이리하여 같은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을 걸고 총무원(總務院)과 종무원(宗務院)이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58]

1925년 마침내 총무원종무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양원(兩院)은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교무원)으로 되었으며, 교단은 통일적인 중앙종무기구를 갖게 되었다.[58]
조계종의 성립편집

일제 치하의 한국 불교 교단은 그 종명(宗名)을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보다 선명한 종명이 필요하였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을 삼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하여 1941년 4월 23일부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寺法) 전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었다. 제1대 종정한암 중원(漢岩重遠)을 추대하고 종회법 · 승규법을 차례로 제정 · 발포하였다.
불교지의 간행편집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불교계가 최초로 잡지를 발간한 것으로는 1910년 12월의 《원종(圓宗)》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종》지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機關誌)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終刊)되었다.[59]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문화기구로서의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1912년 2월에 발간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월보》(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이며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동년 11월에 《해동불보(海東佛報)》(편집인 및 발행자: 박한영(朴漢永))가 발간되었다가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다가 동년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다.[59]

1916년 4월에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으나 겨우 3호를 내고 동년 6월에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행되어 1920년 5월에 21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24년 7월에는 《불교(佛敎)》(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가 발행되어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정간되었으며,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불교신(佛敎新)》이라 하였는데 해방 전까지 계속되었다.[59]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통도사(通度寺)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동년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支會)의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 발행인 《불일(佛日)》, 동년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했던 《일광지(一光誌)》 등이 있었다.[59]
현대 (1945~현재)편집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승단정화(僧團淨化)의 기치를 내세워 1962년 4월 12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고 25교구(敎區) 본산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帶妻僧) 측은 끝내 불응하여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을 별립(別立)해 나갔고, 조계종단은 교세를 단합하여 한국불교가 직면한 3대불사(도제양성 · 포교사업 · 역경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관련 주제편집
한국의 불교
한국 불교의 사상
삼국 시대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
백제의 불교
신라의 불교
남북국 시대의 불교
고려의 불교
조선의 불교
현대 한국의 불교
주요 승려편집
삼국시대편집
승랑(僧朗)
겸익(謙益)
원광(圓光)
자장(慈藏)
원측(圓測)
원효(元曉)
의상(義湘)
고려시대편집
의천(義天)
지눌(知訥)
보우(普愚)
조선시대편집
보우(普雨)
의승(義僧)
휴정(休靜)
유정(惟政)
주요 불교 서적편집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교장총록(敎藏總錄)
선가귀감(禪家龜鑑)
선문수경(禪文手鏡)
기관편집
간경도감(刊經都監)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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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진 (1989).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각주편집

중국에는 기원전 2년경에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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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고구려불교의 일본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 불교의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겸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삼국시대의 사상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 겸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고익진, p. 123.
고익진, p. 124.
고익진, pp. 123-124.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백제불교의 일본 전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삼국시대의 불교 > 진흥왕과 불교정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밀교의 전래,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운허 & 동국역경원, "惠宿(혜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불교 사전》. 2011년 6월 5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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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과 구산의 선 사상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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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영불교연구소

2019. 10. 3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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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과 九山의 禪 思想 比較 硏究



1999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종교학 전공



박 정 환



목 차



Ⅰ 序 論 1



1. 硏究의 目的 1



2. 硏究의 方法 4



Ⅱ 知訥의 生涯와 韓國佛敎傳統 6



1. 知訥의 생애와 禪風의 振作 6



2. 知訥의 불교사적 업적 8



Ⅲ 九山의 生涯와 宗風振作 12



1. 九山의 출생과 求道 12



2. 교화와 禪의 중흥 18



Ⅳ 知訥과 九山의 禪思想 比較 21



1. 知訥의 禪思想 21



1) 禪思想의 형성 21



2) 心性論 24



3) 修行論 30



(1) 頓悟論 30



(2) 漸修論 32



(3) 看話論 37



2. 九山의 禪思想 40



1) 心性論 42



2) 修行論 47



(1) 三要 48



(2) 三學 49



(3) 看話論 51



(4) 頓悟漸修 55



(5) 定慧雙修 60



Ⅴ 結 論 63



참고문헌 67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ompare Gusan with Chinul. I



investigated their places in the history of korean Zen Buddhist thought. I



traced Chinul and Gusan in their writings and ascertained their enormous



achivements and also pursued the samenesses and differences between



Chinul and Gusan.



The first chapter shows the significance of the purport and method of



this study.



In the second chapter, I deal with the life of Chinul in the background



of the Korean tradition of S o ˘n. He aimed to reform the corrupt Koryo



buddhism. This made his contribution to the Koryo Buddhist society.



In the third chapter, I study the life of Gusan. Gusan devoted himself to



his own self-cultivation and the mission toward foreigners. He spread



Koean Buddism in the world, and made many pupils. So there are many



disciples in the Songgwang-Sa and in the foreign countries. In this chapter



I showed how important his place and activity was in Songgwang Sa.



Forth chapter is the most important, because I refer to the essential



samenesses and differences of Chinul and Gusan in this chapter. Gusan



followed Chinul with a little modification. But his concept of self-awareness



shows some differences. Gusan's kanhwa s o ˘n(看話禪) is somewhat



different from Chinul's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頓悟



漸修) In this chapter, I aimed to compare their theories of mind(心性論)



and theories of cultivation,(修行論) analyzing the thoughts of these two



Korean Buddhist monks.



In the last chapter, I explain the places of Gusan and Chinul inside the



Korean Buddhist history. To sum up, through the comparison of Gusan



and Ghinul, I clarified the characteristic places of their Zen Buddhist



thoughts.



국문초록



본 논문은 지눌과 구산의 선사상을 비교하여 한국선에 있어서 양자의 위치



와 두 선사의 사상적인 특색을 밝히고자 한다.



지눌의 사상을 축으로 해서 구산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검토해 양자를 비교하



여 일치점과 차이점을 구분하고자 한다.



먼저Ⅰ장에서는 연구의 목적과 방법을 제시한다. 문헌에 대한 설명과 비교



방법 등을 제시 하다.



Ⅱ장에서는 한국불교전통과 지눌의 생애를 다룬다. 그는 고려시대에 철저한



자기 수행과 함께 정혜결사를 실행하여 혼탁한 시대의 불교를 바로잡고자 노



력하다. 그의 생애와 불교사적 업적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 보



았다.



Ⅲ장에서는 구산의 생애를 검토하다. 구산은 사상못지 않게 포교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던 선사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해외에 전파하고 외국인



제자들을 양성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노력한 선사이다.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많은 제자를 두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송광사에서의 그의



위치와 활동을 비롯해 해외에서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Ⅳ장은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지눌과 구산의 선사상을 비교한



다. 구산의 사상은 지눌의 사상과 거의 유사하다. 특히 심성론이 더욱 그러하



다. 즉, 구산이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는 것이다. 단 약간의 변형된 형태의 계



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수행론에서 간화론에 대한 차이점이 드러나기 때



문이다. 따라서 구산의 간화선과 지눌의 돈오점수론을 대비해 다루어 보았다.



구도는 심성론과 수행론으로 나누어 양자 모두 이 구도에 따라 분석해 보았



다.



Ⅴ장 결론에서는 이제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산과 지눌의 일치점과 차이



점을 도출해 보았다. 한국의 불교전통에 있어 그들은 어떠한 존재는지를 살



펴 보았다. 그리고 비교를 통해 각자가 지니는 선사상의 특징등을 살펴보면서



그 일단을 정리해 보고자 하다.



Ⅰ 序 論



1. 硏究의 目的



현재 우리 사회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古代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가 발생했다가 소멸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종교는 간단한 原理로 생겨나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해석과 실



천에 의해 그 내용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2,5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한 불교에는 많은 실천



적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佛性을 찾아 깨달



음에 이르는 自覺的 방법을 대표하는 것이 禪이라 할 수 있다.



禪은 思惟修나 靜慮 그리고 定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一



境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게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법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禪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수행자들에게 행해졌던 수행법의 하나다. 석가



모니 부처님께서 思惟修에 의해 正覺을 이루어 성불하신 이후 불교에 있어서



는 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禪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하나의 宗派로서 형성되기에 이르고, 禪宗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표방하



면서 불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본격적인 禪의 전래는 新羅末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간헐적인 전래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전래는 신라 말쯤에 들어오기



시작한 南宗禪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禪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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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禪을 연구하는 작업은 우



리 스스로가 한국불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이며 새로운 실천불교를 이룩하



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禪思想을 주창한 고승은 많았다. 그 가운데 고려시대의



知訥(1158∼1210)은 단연 돋보이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적과 사상은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1) 그만큼 그의 불교사적 위상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12세기의 고려불교가 정치적인 혼란시기에 교단



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정법이 멀어진 상태에서 불교 본연의 자세를 堅持하는



데 헌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눌의 정신은 그가 창건한 송광사를 중심으로 면면히 계승되었고,



16국사가 배출되면서 고려후기부터 수행의 중심처가 되었다. 그리고 排佛政策



으로 불교계의 위상이 저하된 조선시대에도 지눌의 사상은 면면히 계승되었



다. 특히 근·현대 인물로서 이러한 지눌의 사상을 드높이는데 앞장선 분은



九山(1909∼1983)이라 할 수 있다.2) 현재에도 송광사에는 지눌의 사상을 연구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87년 창립된 ‘보조사상연



구원’이다.



구산은 오래 동안 송광사에 머물면서 많은 불사를 행하다. 그런 불사 가



운데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한 활동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지눌이 송광사



에 세운 修禪社를 다시 재건하면서 지눌의 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결사의 정신



을 되새기는 한편 本分事를 요달하여 국사의 慧命을 이어가자는 내용에서 그



가 얼마나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3)



1) 지금까지 지눌에 관한 연구성과는 다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普照關係資料目 錄 , 보조사상 , 제1집- 제11집, 보조사상연구원, 1987- 1999. 2) Robert E. Buswell JR, The Zen M onastic Experience, Princeton Univ Press 1992, pp. 59∼64. 3) 구산문도회, 구산선문 , 불일출판사, 1995,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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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山은 이런 결사의 의미 이외에도 禪을 지도하면서 修禪者의 이해를 돕는



내용의 상당법어를 펼칠 때 많은 부분에서 지눌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구산은 지눌



의 시호를 딴 佛日會를 발족하여 그의 慧命이 이 땅에 계승되기를 기원하는



한편, 佛日國際禪院을 개설하여 그의 제자 Buswell로 하여금 지눌의 법어집을



번역케 하여 서구 세계에 지눌의 사상을 알리는 등 지눌의 사상이 함축된 佛



事를 행함으로써 시공을 초월한 사상적 계승에 전념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



다.4) 따라서 본 연구는 九山의 선사상에 지눌의 사상이 어떻게 계승되는지 구



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九山의 사상이 지눌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쉽게 가정



할 수 있겠지만 반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九山의 생애와 그 사상에 대한 연구



는 전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산의 생애가 연구 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입적 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시간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구산의 사상을 구명하는데 어려운 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눌



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연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지눌과 구산은 그들의 생존연대에서 보여지듯이 752년이란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활동이 판이하게 달랐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방향은 禪의 부흥을 통한 불교 본연



의 모습을 찾는 데 있었다. 특히 구산의 사상이 대부분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



고 있음을 볼 때,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성이 현존함을 인식하는 계



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본 논문이 추구하는 목적이다.



4) 구산문도회,『구산선문 , 608∼6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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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硏究의 方法



한 禪師가 남기고 간 발자취를 더듬고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 이 논문을 쓰며 부딪히는 어려움은 知訥은 많은 저술과



역사적 활동을 통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어 그의 사상과 불교사적 위치를 비교



적 수월하게 알 수 있는 반면, 근·현대에 걸쳐 자신의 삶과 사상을 펼쳐온



九山은 그와 같은 위상을 조명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知訥과 九山



의 사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두 선사의 생애를 비교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들이 가진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다. 지눌은 고려시대 혼탁한 사회상



황 속에서 定慧雙修의 기치를 내걸며 한국 선을 크게 융성 시킨 한국선종사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가 크게 존경받는 것은 당시의



혼탁하고 부패해진 수도공동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지눌의 생존시기



인 12- 13세기는 혼란한 시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기간의 무신정권의 통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왕실과 매우



접한 관계에 있었고, 정치적 배후를 등에 업은 불교는 현실과 접한 관련



을 맺게 됨으로 해서 본연의 모습을 떠난 세속과의 결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눌은 이런 사회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불교를 혁신적으로 개혁하고자 하



다. 이것이 정혜결사 운동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교단을 정화시킴과 동시



에 그의 독특한 사상체계도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러한 정신이 어떻게 전승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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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가를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한편 구산은 1937년 불법에 귀의한 이래 교단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다.



특히 스승인 효봉 스님을 도와 1954년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정화운동에서 한



국불교의 전통을 살리고자 노력한 점은 시대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69년부터는 정법구현과 보살도를 실천하며 조계종풍과 목우가풍



을 다시 일깨워 제2의 정혜결사 운동을 염원하면서 조계총림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그 후원회로 불일회를 두어 국제선원을 설립하여 수행과 포교에 힘썼



다.



그렇지만 구산은 그러한 佛事의 중흥보다는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여 한국



불교의 禪風을 진작시키는 한편 수행자로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주된 관심



이었다. 따라서 구산은 인간본성을 추구하는 眞性의 탐구가 그의 화두다. 구



산은 그런 진성의 탐구를 위해 여러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의 자료가 빈약한 구산에 대해서는 다



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하다. 구산에 관한 자료로는



먼저 구산선풍 과 구산선문 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구산의 제자들이 구



산의 법어를 모아 사후에 편찬한 책이다. 구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책의 분석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선사상을 전개하



기보다는 게송과 그의 들이 체계가 없이 나열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지눌



의 사상과의 비교를 통하여 구산의 사상체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두 권의 법어집에 수록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지눌이 제시하고 있는 심



성론과 수행론의 체계에 구산의 심성론과 수행론의 체계를 대비시켜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는 면과 차이점을 찾아봄으로써 시대적 차이를 두고 보여주고



있는 두 선사의 사상을 비교하고자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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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知訥의 生涯와 韓國佛敎傳統



1. 知訥의 생애와 禪風의 振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지눌은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역사적으로는 禪·敎



를 통합하여 교단의 융화를 모색하으며, 사상적으로는 頓悟漸修와 定慧雙修



를 제청하여 문란한 僧風을 회복하다는 점에서 그가 철저한 수행을 중심으



로 한 실천가음을 보여준다.5)



知訥은 고려 의종 12(1158)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부친 鄭光遇와 어머니 趙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諱는 知訥이며 스스로를 牧牛子라 불다. 우리가 普照



國師라 함은 희종이 내린 시호가 佛日普照國師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부모는 부처님 전에 기원하기를 병이 나으면 출



가시킬 것을 결심하고 기원대로 병이 낫자 宗暉禪師에게 귀의하여 득도케 하



다.



출가 후 지눌은 다음과 같이 몇 차례의 계기로 인해 禪에 귀착하는 계기를



맞게 됨을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수행하다가 1182년 승



과에 합격하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普濟寺 담선 법회에서 뜻을 같이한 10



여 명과 結社를 약속하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전남 나주에 있던 淸源寺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중생의 眞性은 萬象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함을 깨닫게



5) 朴相國,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저술 , 普照思想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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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큰 전기를 맞이하다.



다음은 지눌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1185년 普門寺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李通玄의 화엄론을 읽고 부처님의 말이 禪과 계합함을 깨닫고



禪敎不二 禪敎會通을 주도하게 되었다.6) 이후 지눌은 본격적인 禪의 수행을



주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修禪結社이다. 결사운동은 자신이 25세 때 마음에 두



었던 것으로 여기서 그는 부처님의 말은 道에 들어가는 문턱인 戒와, 그 핵



심으로서의 定과 慧를 균등하게 닦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눌은 자신의 나이 41세(1198)가 되던 해 지리산 上無住庵에



은거하면서 투철한 정진으로써 깨닫게 된다. 여기서 그는 禪定의 근원을 깨닫



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얻은 그의 감회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보문사에서부터 이미 10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시간



을 헛되이 보낸 일은 없었으나 아직 情見만은 버리지 못하여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리산에 있을



때 『大慧普覺禪師語錄』을 보니 여기에 “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 하여 응하는 곳도 있지 않



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을 버리고



참구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



일임을 알 것이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치어 저절로 걸려 있는 가



슴이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 편하고 즐거워졌다.7)



이러한 깨침은 지눌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지눌의 나이



6) 강건기,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 , 인문논총 제 14집, 1985, 49쪽. 7) 金君綏 撰, 普照國師碑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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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1200)가 되면서 자리를 松廣寺로 옮겨 1210년 입적할 때까지 禪을 닦으



며 대중을 교화하여 한결같이 깨우침에 의한 자비와 실천을 위해 매진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눌의 생애는 禪學을 융성하게 한 것이 가까이나 멀리에서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다는 평가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 후 지눌은 定과 慧를 고루 닦아 禪과 敎를 함께 하는 수행으로 문란해



진 교단의 수행풍토를 개혁하고 禪敎의 대립을 지양하는 會通을 위해 매진하



다가 1210년 그의 나이 53세가 되던 해 대중에게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입적



하다.8)



2. 知訥의 불교사적 업적



지눌은 고려시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음은 물론 그의 사상



은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처럼 그의 사상이 계승됨은 불교



사적 업적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이 남긴 불교사적 업적을 살펴보면 우선적으로 고려불교의 비판을 통



한 목표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다음으로는 그의 사상이 후대에 계



승되면서 한국불교사상에 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지눌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비판의 주된 내용은 수행자의 자세에 관한 면모



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당시 수행자들의 경향은 현



실적 이양에 떨어져 공부를 게을리 하며,9) 문자에 집착한 교학자의 병과 깨침



8) 강건기, 앞의 , 51쪽. 9) 지눌, 勸修定慧結社文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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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닦음의 본말을 모르고 무조건 앉아 있는 것을 禪으로 착각하는 선학자의



痴禪, 그리고 눈뜬 종사들의 말을 겉으로 흉만 내며 닦음을 포기한 채 날뛰는



무리들이 마치 모든 수행을 다 마친 양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0)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눌이 결사를 생각한 것이 선풍의 회복



과 선교의 회통이었다. 지눌이 본격적으로 결사운동을 전개한 것은 1190년(명



종 20)에 팔공산 居祖寺에 있을 때 禪客들의 청을 받고 머물게 되면서 법회를



열고 定慧社를 결성하고 결사문을 지으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1200년 定慧社



를 吉祥寺로 옮기고 그 이름을 修禪社로 개명하고 11년 동안 대중을 교화하



여 많은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으며,11) 이러한 결사운동을 통해 당시의 문란한 僧風을 회복하고



일상생활에서 禪修行이 생활화 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



다.12)



선의 중흥뿐만 아니라 지눌은 당시 불교계가 지니고 있는 禪과 敎의 문제



점을 여실히 지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병폐는 지눌이 살았던 고려불교의



과제으며 지눌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진력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부처의 입으로 말한 것은 敎이고 祖師의 마음에 전한



것이 禪이므로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이 결국엔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禪·敎 學者들은 그 근원을 알려하지 않고 각기 자신이 익힌 곳에



안주하여 논쟁만을 일삼아 시간만 헛되이 보낸다는 것이다.13)



이와 같은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敎로서 그 방향을 분명히 한 다



음에 닦아야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禪敎會通이야말로 수행자



10)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3∼117쪽. 11) 金君綏, 앞의 . 12) 權奇悰, 고려 후기 불교와 보조사상 , 보조사상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25쪽. 13) 知訥, 華嚴論節要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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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녀야 할 본분임을 알려주고 있다.14)



다음으로는 지눌의 사상이 후대에 계승되어 그것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눌의 모든 교학



과 선이 일치한다는 견해는 선을 중심으로 한 교학의 융합이라는 전통을 남겼



으며, 선풍 진작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창적이고 체계를 갖추어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하고 이것이 후대에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15)



지눌의 결사운동을 효시로, 이후 한국불교에서는 많은 결사가 이어져왔다.



이러한 결사는 불교 자체내의 모순과 부패를 없애고 정법불교로 새로워지려는



움직임이다. 그 가운데 정혜결사와 같은 시기에 나타나 이후까지 전개된 백련



결사는 지눌의 향을 받아 了世에 의하여 결성되었는데 당시 불교계의 타락



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을 띄었다.16)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눌의 회통적이고 실천적인 전통은 서산에 의해



계승됨을 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하여 禪敎·悟修 등



의 융회(融會)는 물론 타교와의 융회(融會)까지도 꾀하여 불교의 위상을 새롭



게 정리하다고 할 수 있다.17)



근대에 이르러 지눌의 결사운동은 鏡虛에 의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



다. 경허에 의하면 당시 정법이 사라진 시대, 혼돈의 시대, 더 나아가 개혁을



시도할 시기로 보고 있으면서 그 방법은 정혜를 닦는 것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18)



지눌의 사상은 결사운동으로만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측면에서도



14) 知訥,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3쪽. 15) Hee Sung Keel, Chinul, The Founder of the Korean S n Tradition, berkl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pp. 163∼177. 16) 채상식, 고려후기 불교사상연구 , 일조각, 1991, 70∼71쪽. 17) 서산, 禪家龜鑑 , 동국역경원, 1976. 18) 김경집, 鏡虛의 定慧結社와 그 思想的 意義 , 韓國佛敎學 , 제21집, 한국불교학 회, 1996, 376∼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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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업적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불교계에서 실행하고 있는



강원교육의 특성과 교과목에서 지눌의 저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



기 때문이다.



먼저 현재의 강원교육은 禪敎를 겸수하는 교육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부터 계승되어온 교육 방법임은 물론 지눌 이후로 보여지는 전



통적인 禪敎觀과 일치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로 나누어져 있는 강원의 교육 과정에서 지눌이 저술한『계초심학인



문』과『법집별행록병입사기』가 사미과와 사집과에 포함되어 있으며, 지눌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 혜심이 찬집한『선문염송집』이 대교과에 포함된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19)



더 나아가 지눌이 평소 즐겨 인용하던 경전들이 강원교육의 교과목에 편성



되어 있음은 그의 정혜쌍수와 선교회통의 사상이 그대로 한국불교의 강학이념



과 수행법풍으로 계승되어온 그의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20)



19) Hee Sung Keel, ibid. pp. 175∼176. 20) 종범, 강원교육에 끼친 보조사상 , 보조사상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7 5∼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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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九山의 生涯와 宗風振作



1. 九山의 출생과 求道



구산 스님은 1909년 1월 27일(음 1909. 12. 17)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내



척리 509번지에서 아버지 蘇在衡과 어머니 崔姓女 사이에서 4남 2녀 중 3남으



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농사일에 종사하여 그리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런 생활



에서도 구산은 1922년(14세) 일제 식민지하에서 용성 소학교를 졸업하다. 그



후 漢學을 공부하던 중 1923년(15세)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청년기에 가사



를 돌보며 이발관을 운하다. 훗날 부처님 10대 제자 중 이발사 출신인 우



바리 존자를 상기시켜 ‘우바리존자’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다.



불교와의 인연은 구산의 나이 26세가 되던 해에 이루어졌다. 1934년 그 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던 중 진주에 사는 河處士라는 불심이 강한 居士를



만나 무상 법문을 듣고 인생 무상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의 출가는 다음해인 1935년에 이루어졌다. 거사로부터 ‘몸은 마음의



그림자며, 사람마다 누구나 원만히 갖추어 있는 自性자리는 본래 淸淨하거늘



어디에 병이 있겠느냐.’ 라는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집안일을 정리하고 불법에



귀의하고자 먼저 지리산 원사에서 백일간 관음기도를 시작하여 이를 성취하



자 차츰 육신의 병이 쾌차하게 되고 불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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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8세다.



그 후 스승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의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송광사에 금강산



도인 曉峰禪師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자신을 문하에 받아 줄 것을



간청하여 1937년(29세) 음력4월8일 효봉선사를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사



미계를 받았다.



이와 같이 불교에 인연을 맺은 구산은 남보다도 굳은 의지로 수행에 전념



해 갔다. 구산의 나이 31세가 되던 해인 1939년 음력 4월 15일 통도사에서 해



담 화상을 戒師로 比丘戒를 받고 여름 안거를 백련암 선원에서 보냈다. 그 후



에도 구산은 1941년(33세) 가야산 백련암에서 정진하면서 化主소임을 맡아 백



련암 중건불사를 이룩하고, 이듬해 34세에 선원에서 안거를 마친 후 상노사인



석두스님과 은사인 효봉스님께서 수행했던 금강산의 산사들을 참배하다.



1943년(35세). 경북 금릉군 불산 청암사 수도암에서 정각토굴을 짓고 착실히



정진하기도 하다.21)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후의 행적은 한국 불교의 정통을 바로 세우고



일제하에서 크게 변질된 종단을 정화하여 올바른 수행인을 양성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그는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한국불교



최초로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은사 효봉스님



의 부름을 받고 가야총림 선원의 도감과 원주소임을 번갈아 보면서 지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수행이 부족함을 깨닫고 정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1947년(39세) 은사의 허락을 받고 가야산 정상봉 밑에 법왕대 토굴을 짓고 용



맹정진 하다. 그렇지만 한 철이 지나도록 별로 소득이 없어 하산을 결심하



고 짐을 챙기니 그날 밤 꿈에 산신이 나타나“이 곳은 스님과 인연 터이니 떠



나지 말고 한 바탕 더욱 용맹 정진하라”고 당부하며 “현세의 복으로는 공부



21) 구산문도회, 구산선풍 , 29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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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가 어려우니 내생 복을 당겨 받으시오” 라고 지침을 내려주었다고 한



다.22)



이와 같은 기이한 꿈을 꾸고 난 후 필사적인 정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心眼



이 열리고 큰스님의 인가와 함께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



을 남겼다.



달이 일천 강에 비치고 파도는 달을 비추니



하늘은 만물을 안고 나는 하늘을 안았도다.



일체의 명상이 그대로 진리이거늘



어찌 장엄 법계가 진리를 말하리요.23)



6·25 사변으로 내외의 사정이 어렵게 되자 해인사 가야총림도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구산은 진주 의석사로 거처를 옮겨 동안거를 보냈으며,



세수 44세에 이르러서는 통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 선원에서 모시던 효봉스



님을 미륵산 정상봉에 토굴을 지어 주거케 하고, 1953(45세)에는 경남 통군



산양면 운리 뒷산 미륵산의 편백나무 숲 속에 스승님을 모시기 위해 미래사



를 창건 한 후 초대주지가 되기도 하다. 1954년(46세), 음력 3월 미래사 법



당을 낙성한 후 미래사의 좌우 산자락에 토굴을 짓고 상노사(석두)와 효봉노



사를 모시는 등 수행에 힘썼다.



한가로이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던 구산에게 당시의 교단은 그를 놓아주지



22) 같은 책, 301∼302쪽. 23) 구산선풍 , 302쪽. 月印千江波印月 天藏萬物我藏天 一切名相元理足 莊嚴法界豈 言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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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내외의 사정은 물론 교단에서도 혼란의 기미가 보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다. 이른바 정화불사에 참여하신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 정화운동은 일제의 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 속에서 변질



된 불교계의 모습과 함께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나타난 종단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규의 시작은 독신 승려의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다.



특히 1952년 11월 경주 불국사에서의 승려대회는 수행풍토를 저해하는 대처승



들의 사찰내의 생활을 지적하고, 다음해 4월에는 조계종의 부활 등이 논의



되기도 하다. 이런 작은 움직임 등이 1954년 5월 21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유시에 힘입어 점차 대립적 양상으로 변해가



게 되었다.



이승만의 유시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발표되지만 주된 내용은 일제불교의



잔재를 일소한다는 취지에서 사찰에서의 음주, 가무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었



다. 이러한 유시를 계기로 비구승들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정통이라



는 주장을 피력하고, 대처승들은 태고사에서 법통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후 정부의 중재로 여러 차례 합의와 결렬이 반복되면서도 비구 측과 대



처 측은 최종적인 합의까지 협의되었지만 타결되지는 못하다. 그 결과 쌓인



감정의 대립과 함께 재산권의 분배에 따른 이견으로 말미암아 분규는 계속되



었고 이것은 결국 법정싸움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다.24)



지금까지 세연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구산도 이런 종단적 사태에는 방관만



24) 이러한 분쟁은 5·16 이후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불교계의 법적 단체로의 등록이었다. 당시 불교계의 중재를 맡았던 문교부에서는 1961년 12 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를 제시하여 양측의 화합을 도모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후 양측은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등록하지만 비구 측에 유리한 면이 강조된 탓에 대처 측은 이를 수락하지 않고 다시 분종을 선언하여 1970년 1월에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설하여 문교부에 등록하게 되어 불교분쟁은 막 을 내릴 수 있었다. 정병조, 불교의 대중화운동과 전망 , 대한불교총람 , 대한불교진흥원, 1993,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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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54년 음력 8월 17일 여름 안거를 마친 후 효봉스님을



모시고 상경하여 종단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 머물면서 전국 비구니 대회를 개최하여 정화불사를 위한“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다.



그 후 1955년 음력 6월 15일 500자 혈서로서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알리는



탄원서를 당시 이대통령에게 보내어 정화의 결의를 굳게 다졌으며, 같은 해에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전남종무원장’에 취임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다.



그 후에도 그는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부터 1967



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임되어 종단일에 관여하다.



1957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르러서 종단정화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자 수행정진만이 見性成佛하고 교화중생의 길임을 절감하여 전남 광양 옥용



면 소재 백운산 상백운암의 옛터에 삼 칸 토굴을 중건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으시



니 이때 선사의 나이 53세다.



깊이 보현의 터럭 속에 들어가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동짓날에 소나무가 저절로 푸르니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간다.25)



구산의 정진은 나이에 관계없이 지속되었다. 그의 나이 70이 되었을 때도



동분서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헌신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25) 같은 책, 305쪽. 沈入普賢毛孔裡 捉敗文殊大地閑 冬至陽生松自綠 石人駕鶴過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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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년에 가장 애를 쓴 것은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표충사에서 송광사로



옮겨온 후 16년에 걸쳐 중창불사를 이룩하여 오늘과 같이 한국에서 최초로 국



제선원을 개설하는 등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은 의지의 스님도 世緣이 다함을 막지 못하셨다. 1983년 3월 26일 전국



불일회 총회에서 제8차 중창불사를 결의하여 공사가 시작되자 기뻐하면서 설



계와 공사현장을 두루 살펴보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



후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첫째, 내 몸에 주사를 놓지 말아라.



둘째, 坐禪의 자세로 장례를 치르라.



셋째, 和合하여 살아라.



넷째, 禪風에 累가 되지 않게 하라.



또한 “자기를 속이는 중노릇하지 말고 거듭 발심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라”



고 유촉하며 다음과 같은 열반게를 남기셨다. 이때가 1983년 12월16일로 그의



나이 75세이며 법납 46년이었다.



온산의 단풍이 봄꽃보다 붉으니



삼라만상이 그 바탕을 온통 드러내었도다.



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 하니



부처의 삼매 중에 미소지으며 가노라.26)



26) 같은 책, 313쪽. 滿山想葉紅於二月花 物物頭頭大機彰 生也空兮死也空 能仁三昧微 笑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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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화와 禪의 중흥



구산이 근·현대의 격변기에서 한국불교를 위해 크나큰 족적을 남겼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을 요약해 본다면 한국불교의 正體



性 확립과 국제화로 요약할 수 있다.



구산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것은 교단의 정화와 많은



불사를 추진하여 쇠락한 교단을 부흥시킨 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



화의 기운이 일어나자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 머물면서 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혈서로써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노력하다.



이런 노력 가운데 그는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전남종무원장’ ‘대한불교 조계



종 중앙감찰원장’ 등의 교단의 주요한 자리에 취임하여 불안한 교단의 안정에



주력하다. 그리고 정화이후인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으로 선임되어 종단 일에 관여하는 등 교단을 위해 헌신하다.



정화불사가 일단락 되자 그의 관심은 허물어져 가는 가람을 중창하는데 뜻



이 모아졌다. 1962년 그의 나이 54세인 4월 11일 오랜 분규가 종식되고 통합



종단으로 탄생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효봉스님이 추대되자 종정의



거주 사찰로 지정된 대구 팔공산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봉서루 등 중창불사



를 시작하고, 금당선원 산내암자 등을 수행 도량으로 불사하다.



1966년 구산의 나이 58세가 되던 해 노환중인 효봉 대종사가 앉은 자세로



입적하면서 승보사찰인 조계산 송광사를 재건하라는 유훈을 남기자 구산은 이



를 자신의 평생 사업으로 받들었다.



1969년 그의 나이 61세 때는 은사인 효봉스님의 유훈인 송광사의 복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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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여 한국불교에 있어 해인총림에 이은 조계총림을 발기하고 하안거 결제



일에 개원식을 거행하다. 이때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스님을 추대하



고, 자신은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다.



총림을 개원 한 후에도 총림의 수행적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불일회(佛日會)를 전국적으로 결성하여 대구 불일회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 광주, 대전, 서울 등 대도시마다 불일회의 지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에게



생활불교의 지표인 7바라 사상을 실천하도록 선양하다.27)



그 후에도 구산은 전국의 여러 곳의 도량을 중창하다. 대략적으로 살펴



보더라도 1971년 6·25사변으로 폐사가 된 山內庵子 감로암의 중건을 필두로



1974년 ‘法蓮寺’의 개원, 1975년 산내암자인 ‘불일암’의 중건, 조계산 상봉아래



‘ 인월정사’의 창건, 그리고 1976년에는 호남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광주시에 광



주 분원인 ‘원각사’를 개원하여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이러한 구산의 업적이 두각을 보인 것은 바로 한국불교를 세계로 알린 것



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구산의 나이 58세가 되던 해 세일론에서 개최된 ‘세



계불교승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을 필두로, 1972년(64세) 12월에는



한국불교 최초로 미국 가주 카멜시 근교에 한국 사찰인 ‘三寶寺’가 설립되어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첫 번째 미국 순방 길에 올랐다. 이어 1973년(65세)



에는 미국의 LA, 뉴욕, 시카고, 등 동 서부와 동부지역을 순방하고 3월 13일



귀국 길에 미국 LA의 최초 사원인 ‘達摩寺’ 개원 법회에 참석하여 설법하는



등 한국불교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구산의 한국불교의 해외 소개는 자신의 방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973년



여름 안거부터 조계총림에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인 ‘佛日國際禪院’을 개설하여



27) 요일별로 지켜야 할 규율이다. 월요일부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만 행을 지킬 것을 구산은 강조했다. 생활불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206∼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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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에 관심 있는 해외의 스님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그런 구산은 또한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문판 법어집인



Nine mountains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향은 뒤에 외국인으로 송광사에



서 출가 수행한 Buswell(慧明)이 지눌의 법어집을 문으로 번역하여 서구세



계에 지눌의 사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다.28)



1980년 그의 나이 72세가 되던 해 10월 14일 두 번째 미주 순방 길에 올라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기 설법으로 선풍을 진작 시켰고, 12월 21일에는 송광사



‘ 불일국제선원’의 LA분원 ‘高麗寺’를 개원하다.



1982년 세 번째 미국 순방 길에 올라 미국 각지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원들을 순방하여 법회를 개최하고, 서구인들을 위한 수련 도량의 개설



을 위해 유럽을 순방하기도 하다. 그 해 6월 17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구산은 ‘불일국제선원’을 개설하려 하으나 여의치 않아 스위스 제네바로 옮



겨 ‘佛乘寺’를 개원하고 7일간 개원기념 법회를 개최하다. 이어 프랑스, 스위



스, 이태리, 독일 덴마크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법회를 주관하다.



그 해 여름 미국을 다시 방문한 구산은 캘리포니아 카멜시에 ‘大覺寺’를 개



원하고 많은 미국인에게 수계법회와 참선법회 등을 개최하여 한국 선 불교를



고취시키고 10월 12일 귀국하기도 하다.



이러한 활동에 만족하지 않은 구산은 문판 법어집인 The Way of



Korean Zen을 발간하여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



에게 한국의 선을 이해시키는 데 노력하다.



28) Robert E. Buswell JR,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Univ of Hawaii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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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知訥과 九山의 禪思想 比較



1. 知訥의 禪思想



1) 禪思想의 형성



지눌(1158- 1210)은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선사기에 그의 구도 역정을



통해 많은 정신적 방황을 해야만 했다. 지눌의 선사상은 결코 그 자신의 證驗



없이 전개된 단순한 이론적 사변이 아니었다. 그가 선에 관한 이론적 저술을



통해서 후학들의 선 수행에 지침을 마련해 주고자 한 것도 자신의 정신적 방



황의 경험을 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제시한 선 수행의 길은 모



두 자기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지눌에게 있어 이론과 실천, 사상과



체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선사상은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로 하여금 선적 진리로 이끌어 준 如



實言敎에 근거하여 동시에 그 자신이 터득한 진리의 표출로 볼 수 있다.29) 그



것은 사상은 반드시 체계가 있으며 체계가 있으면 구조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



29) 길희성, 지눌의 선사상 구조 , 지눌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 정신문화연구원, 1996,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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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지눌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선사상을 구축하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선적 진리와 그 진리를 중득 하게 하는 수행의 길을 향해 있었다. 지



눌은 자신의 구도역정을 선에 관한 확고한 이해를 얻게 될 때까지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전적들과 씨름해야 했으며 여러 사상가들의 향을 받게 되었



다. 그의 선사상은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지눌의 선은 지적일 뿐만 아니라 포용적이고 포괄적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정혜결사 운동을 통해서 당시의 타락한 불교계를 정화하여 불교 본연의 길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의 폭은 단지



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혜결사 운동은 초종파적인 것이었고 불교 밖의 인



사들로부터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따라서 지눌의 선은 매우 포괄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다양한 근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알맞은 수행법들을 제시함으로



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선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는 지눌의 선사상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지눌의 선사상 체계란 결과적으로 생겨



난 것이지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지눌은 그의 저술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선



사상 전체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의 상관 관계를 밝히는 종합적인 성찰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



는 의도적으로 선 사상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지눌의 선사상의 체계를 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저술에 암묵적



으로 내재하고 있는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지눌 자신이 명시적으로 밝히거나



인정하는 체계는 아니다. 지눌의 선의 체계란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혹은 구



성하는 체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불가피하게 지눌 선의 전



체적 성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일 수밖에 없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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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눌의 선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생애를 기록한 다음과 같은



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에 권하여 암송하는 것은『金剛經』으로 했고 법을 세우고 뜻을 설



명한즉 반드시『六祖壇經』에 뜻을 두었으며 거듭 이통현의『華嚴經』과



『大慧語錄』으로 양 날개를 삼았다. 문을 열매 三種이 있었으니 곧 惺寂



等持門, 圓頓信解門, 徑截門이다. 이에 의거하여 수행하여 믿어 들어가는



자가 많았으니 선학의 융성함이 옛날이나 근래에나 이에 비함이 없었다.31)



이것은 지눌 선 수행론의 전모를 三門으로 요약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금



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수행론이 이 세 가지로 요약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수행체계라고 말할 수 없고 지눌의 선사상에 있어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는 心性論이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지눌은



선 수행의 길만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眞心의 세



계, 곧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眞如 혹은 實在의 세계에 대해서도 수행자들



을 위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눌의 선사상은 구조



적으로 심성론과 수행론이라는 두 부분을 갖게 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32)



이러한 견해를 뒤받침하고 있는 것이 지눌의 저술 가운데 그의 말년에 저



술된 것이라고 하는『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



다.



지눌의 선사상에서 법의 두 측면인 불변과 수연은 지눌의 心性論이라 할



30) 길희성, 앞의 , 69∼70 쪽. 31) 金君綏, 앞의 . 32) 길희성, 앞의 ,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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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으며, 돈오점수로서 모든 성현들이 따랐던 길은 곧 修行論으로 볼 수 있



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눌은 선행에서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것이 徑截門(지름길)으로서 화두를 看하는 看話禪이다. 돈오점수가 선의 시작



과 과정이라 한다면 간화선은 지눌에 있어서 선의 완성을 기하는 길이며 불법



에 대한 문자 적이고 개념적 이해의 자취를 말끔히 씻어버린 證俉를 성취하는



선 특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33)



2) 心性論



지눌은 그의 저서인『眞心直說』에서 眞心을 體와 用으로서 고찰하고 있



다. 지눌은 원래 그의 생애에 있어서 大慧禪師의 간화선을 접한 후 선의 원리



가 어떠한 知的인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그것을 자신의 저서



에서 역설하고 있다.



지눌은 진심의 진리는 조사들에 의하여 마음에서부터 전하여 오다가 하택



신회가 드디어 知라는 한 자는 모든 妙함의 門이라는 말로서 말없는 以心傳



心의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마음의 본성을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법이 꿈과 같다고 여러 성인들은 다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



각도 원래 고요한 것이요, 티끌의 경계도 본래 空한 것이라, 공하고 고요한



마음은 신령스러이 알아 어둡지 않나니 이 공하고 고요한 마음은 곧 과거



에 보리달마가 전한 깨끗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미혹하여도 미혹한 그대로



33) 길희성, 앞의 ,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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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깨달아도 깨달은 그대로로서, 마음은 본래 스스로 아는 것이라. 인연을



따라 생기지도 않고 경계로 인해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



한 때에는 번뇌이지만 그것이 번뇌가 아님을 알고, 깨달을 때에는 신변이



지만 그것이 신변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아는 것(知)이라는 한 자는 온



갖 묘한 이치의 근원이다.34)



이러한 견해는 모든 법이 다 空한 곳에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아 무정한



것과는 같지 않게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러이 아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중생들



이 지니고 있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며,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의 깨끗하



고 맑은 마음으로 중생들이 깨달아야 하는 성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35) 그



것은 마음의 세계는 단지 모든 현상적 다양성이 다 사라져 없어진 조용한 공



의 세계가 아니라, 이 空한 경지를 동시에 어떤 스스로 밝게 아는 것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앎이야말로 眞心의 세계를 아무 감각과 사고도 없



는 無情의 세계와 구별시켜 주는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지눌은 이 앎을 중생에게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佛性 혹은 覺性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눌은 心體의 양면 즉 空寂과 靈知를 또 하나의 체와 용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法과 이치를 세운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 가지의 문이 定과 慧 아님



이 없다. 그 강령을 들면, 그 둘은 體와 用이라는 자성의 양면이니 앞에서



말한 바 空하고 고요하여 신령스런 앎이 바로 그것이다. 定은 體요 慧는



用이나, 體는 곧 用이므로 慧는 定을 떠나지 않고, 用은 곧 體이기 때문에



34)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4쪽. 謂諸 法如夢 諸聖同說‥‥然知之一字 是衆妙之源. 35)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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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은 慧를 떠나지 않는다. 定이 慧이기에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慧가 定이



기에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마치 조계가 혼란 없는 心地가 자성의 定이요



어리석음 없는 심지가 자성의 慧라 하는 것과 같다.36)



지눌은 이러한 진심의 내용을 설득하기 위하여 능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知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37) 이와 같이 知와 寂의 관계를 定과 慧



와 같이 진심의 體상에 있는 體用의 관계로 보는 것은 바로 신회의 선사상이



나 단경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외부 세계와의 감각을 통한 접촉을 끊고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면 고요한 상태가 나타나며, 이 상태는 결코 단순한 空의 세계가 아니라 어



떤 밝고 어둡지 않은 것, 즉 어떤 앎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서 지눌은 우리의 진심의 체는 고요하나 앎이 있어 한편으로는 앎이 있으나



고요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하나 앎이



없는 무정의 세계와도 다름을 피력하고 있다.38) 지눌은 이와 같은 진심을 體



와 用의 양면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밝힌 바 空寂靈知는 비록 분별을 하는 식도 아니고 깨달음을 체험하



는 지혜도 아니지만 識과 智慧를 산출해 낼 수 있다. 범부도 되며 성인도



되며 선도 짓고 악도 짓는다. 마음에 들거나 거슬리거나 하는 용의 힘이



만 가지로 변한다. 그 이유는 그 체가 知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났을 때 모든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을 구별한다.39)



36)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39쪽. 若設法義 入理千門 ‥‥ 心地無痴自定慧. 37)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36쪽. 38) 지눌, 眞心直說 , 普照全書 , 65쪽. 39)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143쪽. 今之所明空寂靈知 ‥‥ 能分 別一切是非好惡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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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고요하고 불변한 진심의 체가 동시에 우리의 일상생활에



서 경험하는 모든 특수성과 차별성을 되살려 내는 모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심의 體가 知이기 때문이다. 즉 진심이 그 체에 있어서 밝고



투명한 면이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항상 외적인 대상의 세계가 지닌 다양성



에 대하여 그대로 알 수 있으며, 이 다양성의 세계가 진심의 체를 떠나서 따



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심의 체가 앎을 갖고 있기 때문



에 동적인 用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하나의 마음에 고



요하고 변치 않는 眞如의 면과 수시로 변하는 生滅의 면이 동시에 있으며, 이



두 면을 연결시켜 주는 원리가 다름 아닌 심진여 자체상의 앎을 말하는 것으



로 볼 수 있다.



지눌은 이 寂과 知라는 두 측면이 모두 진심의 體의 세계이지만 양자를 다



시 體와 用의 관계로 해석한다. 지눌에 의하면 진심의 空寂한 측면은 우리의



自性에 내재하는 定이며 靈知는 자성의 慧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과 혜 사이



의 관계는 불가분적 체용의 관계이다.40)



지눌이 말하는 空寂靈知心에서 空寂의 개념은 물론 空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用적 측면인 知는 보다 세심한 주의와 고찰을



요한다. 지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중생은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선하



거나 악하거나 혹은 금수의 차별 없이 가진 바 心性이 모두 자연히 언제나



환히 알아 木石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대상에 따라 분별하는 의



식이 아니며 깨달음의 지혜도 아니다. 다만 진심의 自性이 무감각한 허공



40) 金呑虛, 縣吐譯解 普照全書 , 회상사, 1963,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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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달라 본성이 스스로 항시 앎이 있다는 것이다.41)



여기서 지눌은 이 진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앎(知)은 우리가 대상을 분별



하는 일상적인 인식이 아니며 또한 ‘깨달음의 지혜’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앎이다. 그것은 따라서 앎이 아닌 앎이다.



지눌에 의하면 이 知가 비록 보통의 인식과도 다르고 깨달음의 지혜와도



다르지만 우리의 모든 인식활동의 바탕이 되며 깨달음을 얻는 지혜의 근거도



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심의 體와 구별되는 진심의 用에 관한 지눌의



이론에 접하게 된다.42)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는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진심의 體가 동



시에 우리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모든 차별적 조건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하



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진심



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심의 妙用적 측면일 뿐이라는 것이



다. 진심의 세계에서는 따라서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 시간과 원, 그리고



생성과 존재의 대립이 극복된다. 화엄철학의 술어로 말하자면 理事無碍의 세



계인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진심이 이렇게 수연적 성격을 띠는 것은, 다시



말해 진심의 體가 변하는 用적 측면을 띨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진심의 體 자



체가 지니고 있는 知라는 용적 측면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體가 知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눌의 心性論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모든 차별성



과 다양성이 사라진 공적 한 진심의 체에서 일상적 세계가 역동적으로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은 진심 자체가 지니고 있는 知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이 신비를 우리에게 가장 잘 이해시켜 주는 종이 사용한 摩尼珠의 비유



를 살펴보면서 지눌의 심성론을 요약하고자 한다.



41) 안진호 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 四集合本 , 법륜사, 1973, 766쪽. 42) 안진호, 앞의 , 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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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주가 오로지 둥고 깨끗하고 맑아서 일체의 차별적 색상을 전혀 가지



고 있지 않듯이, 하나의 靈的 心性이 비고 고요하고 항시 알며 본래 아무



런 分別도 없고 일체의 선악도 없다.



그 체가 맑기 때문에 바깥의 사물들을 대할 때 일체의 차별적 색상을 나타



낼 수 있듯이, [심성의] 體가 앎(知)이기 때문에 여러 조건들을 대할 때 모



든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을 분별할 수 있으며 世間과 出世間의 온갖 종류



의 일들을 수행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隨緣의 측면이다.



비록 색상 자체는 差別이 있으나 맑은 구슬은 일찍이 변한 일이 없듯이,



비록 어리석음과 지혜, 선과 악 자체는 차별이 있고 걱정과 기쁨, 미움과



사랑 자체는 생기고 사라지는 일이 있지만, 아는 마음은 일찍이 그침이 없



다. 이것이 불변하는 면이다43)



이 비유의 핵심은 마니주가 깨끗할 뿐만 아니라 맑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



내고 있다. 즉 진심의 體가 寂할 뿐만 아니라 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왜냐



하면 바로 이 맑음의 면이 있기 때문에 구슬이 바깥 대상들과 접할 때 여러



가지 색상을 취하여 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구슬 자체가 대상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지눌은 寂과 知[구슬의 깨끗함과 맑음]의 관계를 진심의 體가 가지



고 있는 體와 用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眞心의 體안에 있는 불



변의 用[구슬의 맑음]이 진심의 변하는 用[구슬 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상



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심의 知를 알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며, 知야말로 衆妙之門이라 할 수 있다.



43) 안진호, 앞의 , 6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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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修行論



(1) 頓悟論



지눌은 자신의 수행관을 정립하면서 깨침을 닦음에 종속시켜 漸門을 세운



澄觀의 입장과, 닦음을 깨침에 종속시켜 頓門을 세운 宗密의 입장을 두루 섭



렵한 다음, 그들의 돈과 점을 아울러 자신만의 頓悟漸修를 확립하다.



그가 이러한 돈오점수를 채택한 것은 수심의 올바른 길이 먼저 마음의 性



品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친 후 점차로 닦아 가는 先悟後修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을 모두 성인의 길로 보고 있



다.44)



보조의 견해대로 수행과정의 순서를 둔다면 먼저 돈오를 들 수 있다. 돈오



란 우리 마음의 實相에는 번뇌 망상이 空하여 본래 부처와 똑같은 지혜가 갖



추어져 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다. 즉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며, 자기 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頓悟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



기의 성품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靈知가 참 부처인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 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



44)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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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히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頓悟라 한다.45)



지눌에게 있어서 깨침이란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



다. 그것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미혹한 범부이기 때문에 진리의 원천이



성품 가운데 있음을 모르며, 거짓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참다운 나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허망 된 생각을 마음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밖으로 향했던 마음의 빛을 안으로 돌이키면 스스로의 성품, 즉 본래 참다운



모습이 밝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눌의 頓悟論은 宗密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의 頓悟論에는



종과는 다른 새로운 면들이 있다. 지눌은 구도기에 수 차례 깨침의 체험을



한 일이 있다. 그 가운데서 지눌의 돈오관에 커다란 향을 준 것은『華嚴



經』과 이통현의『華嚴論』을 읽다가 얻는 깨침의 경험과 『大慧語錄』을 통



해 얻은 깨침의 경험이었다. 전자는 지눌의 華嚴的 頓悟論의 배경이 되었고



후자는 우리가 나중에 고찰할 그의 看話禪 곧 화두를 통한 깨침의 길인 敎外



別傳的 頓悟論의 배경이 되었다. 양자 모두 종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



상이다.



지눌은 자신이 禪師임에도 불구하고 頓悟가 결코 禪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



달았다. 宗密이 禪과 敎의 일치를 이론적 혹은 사상적 차원에서 보여주고자



했다면, 지눌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화엄적 돈오의 체험을 통해 선교일



치를 몸소 확인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두 저술,『華嚴經節



要』와『圓頓成佛論』에서 화엄적으로 돈오의 길을 천명하고자 했다. 이것이



곧 그가 제시한 圓頓信解門인 것이다. 이를 통해 지눌은 頓悟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고 顯敎化시킬 뿐 아니라, 禪의 관점에서 華嚴을 해석함으로써 - 혹



45)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4쪽. 頓悟者 凡夫未時 ‥‥ 分毫不殊 故 云頓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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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華嚴의 관점에서 禪을 해석함으로써- 敎를 禪안으로 끌어안았다. 이것은



고려 불교계의 골칫거리던 禪敎의 갈등에 대한 그의 해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 즉 見成에 대한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눌에 의하면 悟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解悟이



고 다른 하나는 證悟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것은 解悟로써, 如實言敎에



따라 반조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의 체험이다.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점은, 解悟라 해도 결코 그것이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것은 이해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이해이며 오직



내적 자기성찰의 행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깨침의 체험이기 때문이다.46)



(2) 漸修論



깨침이 아는 것이라면 닦음은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는 닦음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지눌에 의하면 깨친 즉시 행동이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



로 깨친 후에도 수행이 필요한데 이것이 漸修이다. 지눌은 자신의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점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漸修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



혀온 習氣를 모두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



차로 익히어 공이 이루어지고 오래 오래 소질을 길러서 성인이 되기 때문



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충실하지 못하므로 상당한



46) 길희성, 앞의 ,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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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47)



이와 같이 지눌은 성품을 깨친 사람을 바로 성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의한다면 깨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며, 그



자질은 점수의 과정을 거칠 때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



눌은 깨친 후 닦음의 과정을 소를 먹이는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진심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하고 전에 익히던 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을 수가 있다.



마치 소를 먹일 때 그것을 잘 다루어 이끄는 대로 따르게 되었더라도 그래



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이 부드럽고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 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손을 놓



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



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48)



이와 같은 지눌의 견해로 본다면 한 번 깨침으로 모든 일을 다 마쳤다고



닦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리한 무리들이 별



로 힘들이지 않고 깨쳐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는 것을 크게 경계하다.



지눌은 점수의 필요성에 대해 바람의 비유를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



눌의 견해에 따른다면 바람이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이고, 이치는 나타났



47)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4쪽. 漸修者 雖悟本性 ‥‥ 故云漸修也. 48) 지눌, 진심직설 , 보조전서 , 64쪽. 學道之人 已得眞心現前時 ‥‥ 自然無傷苗 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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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망념은 아직 침노할 수 있다는 것이다.49)



이 견해는 출이는 물결을 재우고 망념을 대처하는 공들임은 다름 아닌



점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망념을 지혜로 살필 때 완전한 결지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깨달은 후에 필요한 닦음인 것이다.



왜 지눌이 修後의 悟가 아니라 悟後의 修를 주장하는가? 지눌에 의하면



悟없는 修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채 돌로 뿌리를 누르는 행위와 같다고 보



고 있다. 누르면 누를수록 맹렬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눌은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이 空함을 모르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몸과 마음을 억제하면서 이것이 마음 닦는 것이라 한다. 이는



크게 미혹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聲聞은 마음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되 끊으려는 마음 자체가 적이 된다”고 했다. 단지 살인, 절도, 간



음, 거짓말이 性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觀하면, 일어남이 곧 일



어남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단박 고요해지니, 어찌 다시 그것들을 끊을 필요



가 있겠는가? 고로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딜까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만일 생각이 일어



나면 곧 깨닫고, 깨달으면 곧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50)



따라서 頓悟의 세례를 받지 않은 漸修는 지눌에 의하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억압일 뿐이고, 처음부터 진 싸움이나 다름없다. 修에



대한 이러한 억압적 관점은 北宗뿐만 아니라 모든 방편적 가르침에서도 발견



49)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8쪽. 50) 김탄허, 앞의 , 5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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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지눌은 禪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형태의 修를 따르지 말고, 닦음이



없는 닦음, 번뇌를 끊음이 없되 끊는 진정한 修를 하라고 촉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가르침 중에서 法의 相에 관련된 방편적 가르침에



집착하여 스스로 비굴한 마음을 내어 수고로이 점진적 수행을 닦아 性宗을



어긴다. 그들은 여래가 말세의 중생을 위해 비을 여는 비결을 열어 놓으



신 것을 믿지 않고, 종전에 들었던 바를 고집하여 황금을 버리고 삼을 지



고 간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매우 빈번히 만났다. 비록 그들에게 설



명을 해 주어도 끝내 그들은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단지 의심과 비방



을 더할 뿐이다. 어떻게 그들이, 心性은 원래 깨끗하고 번뇌는 원래 空한



것임을 모름지기 먼저 믿고 이해하되 그러한 이해에 의거하여 薰修함을 방



해받지 않는 사람들과 같을 소냐? 외적으로는 [이 후자의 사람들은] 戒律



과 儀禮를 지키되 구속과 집착이 없으며, 내적으로는 고요한 생각[禪, 禪那]



을 닦되 억누르지 않는다. 가히 악을 끊되 끊음이 없는 끊음이요, 선을 닦



되 닦음이 없는 닦음이기에 참다운 닦음이요 끊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다.51)



우리는 頓悟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진정한 修를 역설적 修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번뇌가 본래 공하고 중생이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다는 통찰



에 근거한 닦음이기에 쉽고 가벼운 修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오가 반드시



漸修에 선행해야 하는 이유이고, 이것이 漸修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頓悟



이전의 수행, 즉 억압과 수고로움의 수행으로 다시 회귀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점에 대해 지눌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51) 김탄허, 같은 책,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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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록 後修가 있다 해도,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대번에 깨달았기 때문에 악을 끊음에 있어서 끊되 끊음이 없고 선을



닦음에 있어서 닦되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참된 닦음이요 참된 끊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만 가지 행을 갖추어 닦는다 해도 오직 아무런 생각



이 없음(無念)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2)



이제 점수의 요점만을 말하자면 지눌은 定과 慧 혹은 性과 寂, 止와 觀의



균형 있는 닦음을 주장한다. 이른바 定慧雙修, 惺寂等持門이다. 그러나 이 닦



음이 어디까지나 오후의 수이기 때문에 지눌은 수행에서 自性定慧와 隨相定慧



를 구별한다. 수상정혜의 定은 수행자가 그때그때 직면하는 상과 사로서의 번



뇌에 꾸준히 대처해 나가는 삼매이며 慧는 제법 하나 하나에 대하여 미혹됨이



없이 그 공을 관하는 반야를 말한다. 지눌에 의하면 이런 수상정혜의 수는 북



종이나 기타 방편적 가르침들에서 행하는 수의 길로서 결코 최상승선이 아니



다. 반면에 자성정혜란 자신의 본성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정과 혜를 의미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진심의 체가 지니는 두 측면인 寂과 知,



定과 慧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성정혜를 닦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심성 속



에 내재해 있는 것을 닦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곧 修 아닌 修인 것이다. 이



런 역설적 닦음이야말로 진정한 修, 無念修이다. 자성정혜란 따라서 일반적 의



미의 닦음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라기 보다는 돈오에 의해 이미 자신의 현실로



서 자각되는 定慧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정과 혜를 이루기 위해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정과 혜는 이미 우리의 심성 속에 내재하고 있기에



다만 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정혜의 수에서는 정신집중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인 결가부좌나 호흡조절 그리고 정신적 혼침을 막기 위해



성성함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 모든 것이 필요 없다. 그리고 자성정혜의 수에



서는 정과 혜 사이에 수행 순서상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진심의 체의 양면으



52) 김탄허, 같은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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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정과 혜는 불가분적 통일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며, 하나를 위해 다른 하



나를 닦아야 할 필요도 없으며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자성정혜의 수에서는



또한 닦음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寂과 知는 수의 대상



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53)



(3) 看話論



지눌이 간화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바로 大慧의 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거주하면서 내관과 함께 대혜의 어록을



읽었는데 대혜가 끊임없이 재가신자들에게 일상생활 본연의 업무 가운데서 간



화 수행을 권하고 있는 점에서 크게 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눌의 간화선은 대혜의 향을 받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



고 있다. 즉 간화선을 수용하고 있으면서 돈오점수의 길을 포기하거나 무시하



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지눌에 있어서 하나의 특색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의 근기에 따른 여러 가지 방편을 인정한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수승한 경계로서 간화참구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4)



강 저편 언덕에 다다른 수행자는 타고 간 뗏목을 지체 없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지눌에 따르면 바로 이 버림이 뗏목을 타는 일 못지 않게 어렵고 때로



는 그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 버림을 위해서 별도



의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곧 話頭 공부, 즉 看話禪이다. 그 뿐



아니라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 이른바 過量之機의 소유자들은 여실



53) 길희성, 앞의 , 104쪽 54) 지눌, 법집별행록병입사기 , 보조전서 ,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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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교에 의존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바로 眞心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것이 곧 徑截門으로서, 지름길로 진리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것이 간화선이



다.



간화선은 처음부터 아예 말을 듣고 의미를 이해하는 일없이 곧바로 증입할



수 있는 파격적인 길이다. 곧 徑截門으로 바로 꺾어 들어가는 참구의 길이다.



이것은 돈오점수 혹은 先悟後修라는 도식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證悟의 길이며, 여기에는 인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눌에 있어서 이 새로운 깨침은 점수상의 막연한 어떤 지



점이 아니라 점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어떤 계기를 이룬다. 解悟가 하나의



뚜렷한 체험이듯이 화두 참구를 통한 證悟 역시 하나의 독자적인 체험의 계기



를 형성하는 것이다. 지눌의 看話決疑論은 바로 이러한 화두 참구를 통한 선



만이 아는 頓門에 대한 논의이다. 거기서 지눌은 화두선의 특성, 그 수행 방



법,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침이 교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지를 논하고 있다.



대혜 스님이 이렇게 주해를 붙여 화두를 주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자는 하



루 24시간, 걷거나 머물러 있거나 앉거나 눕는 모든 행동 속에서 다만 [화



두를] 붙잡고 깨달으려 할뿐이니, 심성의 도리에 관하여 離名絶相[이름을



떠나고 형상을 끊음]의 알음알이가 전혀 없고 緣起無碍[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기는 것이기에 서로 막힘이 없다는 진리]의 알음알이 또한 없다. 불



법을 머리로 이해해서 알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열 가지 알음알



이의 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모두 내려놓되, 내려놓았다거나 내려놓지



않았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헤아림조차 없다. 홀연



히 재미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화두에서 한 번 단박 깨치면 一心의 法



界가 환히 밝아진다. 그러므로 심성에 갖추어 있던 수백 수천의 삼매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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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없는 이치의 문이 구하지 않아도 완전하게 얻어진다. 종전의 치우친 뜻



과 이치, 그리고 듣고 이해함으로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종



경절문에서 화두를 참구하여 證得해 들어가는 비결이다.55)



『간화결의론』에서 길게 인용한 위의 에서 우리는 대혜 선사와 간화선



에 대한 지눌의 견해를 알 수 있다. 지눌이 대혜의 간화선을 채택하면서 우선



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점은 알음알이의 병(知解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지눌이 경절문을 세운 것은 순전히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함에 있어서 화두



가 지니는 위력을 절감한 그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통 속에서 알음알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열망이 가장 잘 표현



된 곳은 空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般若部 계통의 경전들이다. 특히 『金剛



經』같은 경전에서는 진리에 대한 언술과 더불어 생기는 진리의 대상화를 거



부하고 언표 자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자기 해체적 언술들이



거듭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화두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처음부터 언어의 분별적 작용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말 아닌 말이다. 지눌은



이 화두 참구야말로 모든 분별지와 알음알이의 병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행법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선 수행자들은 先行하는 어떤 문도 거치지 않고 바로 화두



를 붙잡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돈오점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화두선에 들어



갈 수도 있다. 지눌은『간화결의론』에서는 전자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에『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후자의 길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



제는 궁극적으로 각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다만 지눌 자신이 그



55) 김탄허, 앞의 , 120∼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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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도 역정에서 따랐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려해 볼 때, 그는 필경 전자



보다는 후자의 길을 더 권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徑截門을 선의 완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특출한 근기의 소



유자라면 돈오점수라는 예비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간화선을 시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지눌에 의하면 최고의 수행이라 할 수 있는 무심합도도



화두라는 格外的 방법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눌에 있어서 禪行의 세 번째 문인 徑截門은 頓悟 혹은



圓頓信解門의 완성이자 漸修 혹은 惺寂等持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계에는 알음알이의 걸림돌이 제거되고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해소되며 정과



혜의 구별조차 무의미하게 되어버려 수행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단지 無心으로 道와 일치하는 완전한 자유의 경지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



지눌은 실로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간화선의 전통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



헌을 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어느 선사로부터 특정한 선의 법맥을 친히 전수



받은 일없이 無師獨悟한 자지만, 간화선의 확립에 있어 지눌의 공헌은 결정



적이었다. 지눌 이후 곧 간화선은 더 이상 이론적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었다. 이것은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를 주도한 眞覺國師 慧諶



에게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흔히 지눌의 禪 사상을 논할 때 頓悟漸修論



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지눌 선의 일면만을 논하는 것이다.



看話徑截門은 그의 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길이다. 그것으로써 지눌의 선은



완성되기 때문이다.56)



2. 九山의 禪思想



56) 길희성, 앞의 , 113∼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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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想이란 오랜 생각의 所産이라 단편적인 생각이 아니라 일정한 체계는 물



론이고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九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구산이 文字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행에 전념하



기 위해 불필요한 言說을 삼가고자 했던 의도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산은 출가후 많은 시간을 통해 확고한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부



처님의 말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이고 참선을 통한 자기체험을 위해 노력하



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일정한 체계를 형성하여 사



상으로 발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여러 사상가의 향이



다. 구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듯이 時空을 초월하여 지눌로부터 향을



받아왔음을 그의 저술에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을 찾



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즉 심성론은 지눌과 많은 일치감을 보이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수행론에서



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구산과 지눌의 돈오사상의 차이점이다. 구산이



간화선을 돈오점수보다 더 중요시하으므로 이점을 근거로 양자에 나타나는



돈오의 개념을 살펴 그 차이점을 밝힐 것이다.



단 어려운 점이 있다면 현존하는 구산의 연구가 전무한 상태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따라



서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구산에게 가장 많은 향을 주고 있는 지



눌의 사상적 체계에 대비해서 구산의 사상을 체계화 하고자 한다. 그러면 구



산의 선 사상적 특징이 돋보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구산의 禪 사상에서는 앞서 살펴본 지눌의 선사상과 같이



심성론과 수행론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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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心性論



지눌은 인간의 마음을 眞心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구산은 인간의 마음을 다



룸에 있어 眞性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구산에 의하면 진성은 다름아닌 인



간의 본래 모습이다. 따라서 진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진성은 인간 고유의 밑바닥에 있는 가장 깨끗한 인간의 본래 성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의 참성품을 깨달으면 그대로 佛祖가 된



것이요, 참된 나를 잃게 되면 중생이라 부르게 될 것이며, 자기의 주인공을 밝



혀내면 바로 피안에 이르는 것이요, 자기의 주인공을 모르게 되면 그대로 사



바세계라는 것이다.57)



그래서 수행자가 진성을 깨달으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나와 한몸일



뿐 아니라 산하 대지도 일시에 같이 증득하며 일체 중생도 나와 다름이 없게



되지만, 眞性에 미혹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고



전도를 이루며 모든 고뇌가 생겨나서 생사를 스스로 부르게 되어 삼계의 윤회



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58)



구산은 깨달아야 할 대상을 진성이라 명명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부처



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선과 교에서는 이를 일컫는 많은 용어들이 존재



하며 나름대로 인간의 참성품을 밝힌다. 진성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상태이고



그 상태에 인간은 묘한 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산은 지눌과 마찬



가지로 空寂靈知라 하다.



한 물건이 신령하여 묘용이 많으니



57) 구산선풍 , 28쪽. 58) 같은 책,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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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부터 생사가 없는 줄을 알겠는가



根塵을 벗어나서 전체가 드러나니



산하와 대지가 이대로 내 집일세.59)



空寂한 靈知는 범부성을 초월하니



자비 광명 비춘 곳에 道는 더욱 친해지네



南海에서 구름 일고 北山에서 눈 내리니



氷 와 玉骨을 한 바늘에 꿰었구나.60)



구산은 이러한 空寂靈知에 대해 예전이나 현재에 있어 뚜렷하고, 범부와



성인을 초월하여 밝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묘용이 毘盧遮那의 정수리를 드러



내고 四相이 푸른 하늘 밖에 멀리 떨어질 정도여서 십불이 이 가운데 언제나



자재 하다는 견해이다.61)



인간의 마음은 고요한 가운데 앎이 있다라는 커다란 전제아래 한편으로는



‘ 寂’하고 한편으로는 ‘知’한 것이다. 구산은 지눌과 같이 이 구도를 다시 ‘定’과



‘ 慧’ , ‘寂’과 ‘惺’ , 그리고 ‘體’와 ‘用’으로 구별한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도리를 알게 되면 제각기 모든 것이 기틀이요, 사물마



다 온통 밝게 드러내게 되어 菩提와 열반도 오히려 눈 속의 티끌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일하여 이러한 공적지를 알지 못하면 생사의 괴



로운 굴레가 心身을 사로잡는 것이 마치 벌겋게 단 쇠 바퀴 위에서 누르고 밑



에서 받치면서 갈아대는 것과 같아서 그 지극한 괴로움이 끝이 없다는 것이



59) 구산선문 , 202쪽. 60) 같은 책, 425쪽. 61) 같은 책,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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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62)



구산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공적지는 사실 구산의 독자적 思考는 아니



다. 이 知라고 하는 언어는 하택신회, 종, 지눌로 이어지는 개념으로 구산이



위의 선사들의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63)



구산은 선가에서 언급하는 진리의 체를 위와 같이 靈知라고 하는 언사로



표현했다. 하택신회는 진심의 진리는 조사들에 의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오다가 드디어 ‘知’ 라고 하는 한 자로 진리를 밝혔다고 하다. 종에 따



르면 신회의 특별한 공헌은 종전의 無爲, 無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언사들을



넘어서서 심의 체를 ‘知’라는 한마디로 적극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에 있다.



즉 선의 궁극적 실재인 진심의 체를 空하고 寂 할뿐 아니라 이 空한 경지



에 동시에 어떤 스스로 밝게 아는 앎(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앎이야말로 진심의 세계를 아무 감각과 사고도 없는 무정의 세계와 구별시켜



주는 결정적인 차이라는 것이다.64)



이와 같이 구산은 진성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칠 것



을 주장한다. 이것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근거(佛性)로서 부처를 부처이게끔 하



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산은 자기의 참성품을 어둡게 하면 부처가 중



생이 되고 참성품을 밝히게 되면 중생이 부처를 이루게 되니, 밝고 어둠의 차



이는 있으나 성품은 둘이 없는 것이니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경계에 빠져서



바깥을 향하여 구하게 되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65)



구산에 의하면 이 진심을 깨닫게 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하게 되니 그



때에야 만물의 장이라 부를 만하며, 생사를 해탈하여 세간이나 출세간에 걸



림 없이 자재 하게 되니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큰 스승이라,



62) 같은 책, 28쪽. 63) 구산선문 , 224∼225쪽. 64) 길희성, 지눌의 심성론 , 역사학보 제3집, 1982, 4∼6쪽. 65) 구산선풍 ,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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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운데서 하늘이요, 부처 가운데서도 참 부처라는 것이다.66)



이몸이 태어날 때 따라 난 것 아니고



이몸이 죽을 때에 따라가지 않는다.



한결같은 참성품은 끝없이 원하니



신령스런 광명이 법계에 두루하네67)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부터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한 眞性이 있다. 그



러나 이 진성을 망각하고 오랫동안 육체 본위로 살아왔기 때문에 환경에 사로



잡혀 망상을 진성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가 善性이 따로 있고 惡性



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혹은 착해지기도 하고 혹은 악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햇빛 그 자체에는 본래 명암이 없으나 어느 때는 비가 오기도 하



고 구름이 끼어 어두워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밝은 햇빛이 나기도 하는 것과



같고, 또 저 푸른 하늘은 본래 변함이 없건만 기후 변화가 측량키 어려운 것



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변화무쌍한 것은 중생심



이요 기후는 변하여도 日光은 불변하듯이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저 맑은 하늘



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이 세상 천지 만물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如如不動한 것이



청정법신이며, 우주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도 不增不減하는 것이 곧 우리의 眞性이라 표현하고 있



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眞性은 부처님으로부터 인간과 미물 산천초목에 이르



66) 같은 책, 135쪽. 67) 같은 책,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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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이 본래 구족하여 있는 것이다.68)



구산은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미묘한 법은 모든 선악경계의 八風에도 움



직이지 않고 뜻은 태산처럼 굳게 서며 다만 自性에 의지하여 정과 혜를 함께



닦고 공적한 지를 마음대로 쓰더라도 天眞스러워 하는 것이 없으며 動과 靜



이 언제나 禪이 되어야만 쇳덩이를 다루어서 황금으로 만들게 될 것이니 뜻이



있는 장부는 모름지기 간절하게 힘써야 할 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69)



그래서 구산은 범부가 수심하여 眞性을 깨치면 성불한다고 보고 있다. 그



렇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만을 ‘나’라 하고 心靈을 망각하여



眞我를 상실하고도 상실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인간이라 하면서도 眞我를 모르고 사



는 것은 사이비 인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전도되어 자유 없이 속박된 노



예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아를 망각하면 잠잘 때만 夢幻이



아니라 일체의 생활이 전부 다 夢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몽에 의해 假我



에 집착하고 유위법에 속박되어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그래서 구산은 중생들이 이러한 진성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70) 왜냐하면 구산이 말하고 있는 본



래의 성품 즉 眞性은 성인이라고 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범부라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성은 深淺의 차별과 優劣의 차별이 없



다는 것이다.71) 그래서 참된 수행을 한다면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불성인 眞



我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72)



68)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155∼156쪽. 69) 구산선풍 , 169쪽. 70)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61∼63쪽. 71)『구산선문 , 548쪽. 72) 구산, 석사자 ,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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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修行論



여기에서는 구산이 인간의 본성을 眞性이라 표현했는데 그 진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수행론을 다루고자 한다. 구산이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



다고 하는 것은 구산의 수행론 역시 지눌의 수행론에서 많은 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지눌의 심성론을 구산이 계승하기 때



문이다.



먼저 우리가 여기서 검토할 것은 두 禪師의 사이에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간화선에 관한 두 선사의 입장 차이



이다. 지눌은 圓頓信解門, 惺寂等指門, 徑截門을 거치는 수행의 구조를 지향한



다. 따라서 그에게는 앞의 두 문과 간화선은 별도의 수행관으로 여겨도 무방



하다. 곧 간화선은 상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의 저서 속에도 이러한 점



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구산에 있어서는 간화선이 그의 사상을 지탱하는 축이다. 결론에 가



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여기서 한가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이 있



다. 그것은 구산의 어록 속에는 돈오점수나 정혜쌍수와 같은 사상에 간화 즉



화두가 항상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사상은 간화선이라



는 커다란 틀 안에서 모든 사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지눌과 구산



의 차이점을 결정적으로 구별짓는 중요한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구산의 수행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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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要



구산은 수행의 근본으로 다음과 같은 三要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삼요



가 중생이 진성을 찾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먼저 구산은 眞性을 찾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三要가 그 근본이 됨을 말하



고 있다. 여기서 三要란 大信과 大憤心, 두 번째 大勇猛心 마지막으로 大疑心



을 말한다.



이러한 삼요는 오래 전부터 禪家에서는 공안 참구의 조건으로 거론되어 왔



으며,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가면 범부에서 성현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다.73)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런 사실을 믿지 않고



온갖 罪業만 짓고 생사윤회만 익혀 성현의 세계와 열반의 경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세계와 惡道의 고해에 빠져 무량한 고통을 받고, 늙고 병들고



신음하는 중생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古人의 행적을 거울 삼아 믿고 難行苦



行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大勇猛心이다. 이는 세간에 존재하는 순간



의 즐거움을 끊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세간에 존재하는 즐거움에 대해 구



산은 財慾, 色慾, 名譽慾, 貪慾, 睡眠慾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생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욕락을 너무 즐기게 되면 생활의 안전성을 가져올 수 도 없고 수



행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을 자면서만 꿈을 꾸는 것



이 아니라 눈을 뜨고서도 二重, 三重의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면 우리 중생들이 생각하는 명예와 권력, 부모형제 怨親恩愛가 모두 一場春夢



과 같으므로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大勇猛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73) 구산, 石獅子 , 불일출판부, 1980,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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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진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大疑心을 일으켜야 한다는 견해이



다. 그것은 三世佛祖와 천하의 선지식들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간절한 마



음으로 말하셨지만 듣는 중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自心을 깨닫지 못하



므로 佛祖의 誠言인 公案을 참구함에 있어 큰 의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조의 성언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와 같고



자비와 聖行을 보되 보지 못하니 눈이 있어도 눈먼 봉사와 같기 때문에 이런



악도에서 벗어나려면 眞我를 찾아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의심을 갖고 공안을



참구해야 한다는 견해이다.74)



(2) 三學



삼학은 선의 참구만이 아닌 계율과 지혜의 均修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



에 화두를 중요시 여기는 禪家의 전통에서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렇지만 구산은 화두를 참구하는



것 못지 않게 삼학이 제대로 갖추어지기를 바랐다. 즉 구산은 간화선을 강조



하면서 동시에 戒, 定, 慧와 같은 수행도 중요시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법의 그릇을 이루는 공력이 定慧를 雙修하고 惺寂을 等持하



는 功임을 피력하면서 육근이 경계를 대하더라도 마음이 경계를 따르지 않는



것을 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空하여 밝은 거울처럼 미혹함이 없는



것을 慧라 보고 있다. 또한 법망경에서 계의 그릇이 청정하고 정의 물이 맑아



야 혜의 달이 밝게 나타남을 인용하면서 본분납자가 수행하고자 한다면 戒,



定, 慧 삼학은 솥의 세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고



74) 구산, 石獅子 , 불일출판부, 1980, 48∼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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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75)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부터 眞性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산은 아무리 환경이 변하여도 맑은 하늘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이며 원히 不增不滅 하는 것이 우리의 眞性이라는 것이다.76) 중생이 모



든 선악경계에 흔들림이 없이 뜻을 굳게 세우고 자성에 의지하여 定과 慧를



함께 닦아 진성을 깨치면 성불한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생이 눈에 보이



는 육신만을 ‘나’라 하여 眞我를 상실하고 망각하면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77)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戒行을 지켜야 하고 계행을 지키면 禪定이 생기



며, 선정이 생기면 지혜가 생기므로 어지러운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불안한 마



음이 사라져 즐거움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대중들은 옛사람



의 금언을 거울삼아 부지런히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구산의 견해이다.78)



계, 정, 혜 三學이란 바로 그러한 목표를 위해 수행하는 바른 길이다. 그래



서 구산은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戒요,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



이 자성의 定이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자성의 慧라는 견해임을 밝



히고 있다79)



75) 구산선문 , 32쪽. 76)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155- 156쪽. 77) 같은 책, 61- 63쪽. 78) 구산선문 , 588쪽. 79) 같은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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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看話論



구산의 선사상 저변에는 항상 간화선이 깔려 있다. 그것은 수행의 완성을



간화론을 통한 깨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화선에 대한 흐름은 지



눌이후 한국 선종에서 볼 수 있는 전반적인 경향으로 지눌의 제자인 혜심과



고려말의 보우,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산과 그 법통을 계승한 인물들에



서 나타나는 전통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80)



구산은 먼저 화두를 들 때의 방법과 자세에 대해 도 있게 설명하고 있



다. 구산의 견해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선정을 닦아 眞性을 발견하고 범



부를 고쳐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공안을 결택하여 간절하게 참구해 나



가되 사량 분별로써 이리저리 헤아리지 말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81)



그리고 화두를 결택하여 공부를 지어갈 때에 바깥경계는 寂寂하고 안의



경계는 惺惺하게 하여 간절히 추구해 가되 급하거나 느슨하지 않게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이 하면서 간절히 참구해 나갈 것을 당부하면서 화두에 집중할 때



는 연속적인 자세가 필요하므로 망상이 생기더라도 화두를 놓아버리지 말고



뜻은 태산처럼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와 같이 하여 부지런히 할 것을 당부



하고 있다.82)



구산이 화두에 집중할 때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은 선 수행에



있어 본참공안을 성성하게 의심하거나 혼침과 망상이 일어나게 되면 眞性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시



적인 집중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괴롭게 생각하거나 생각과 생각을 서



80) Hee Sung Keel, ibid. pp. 167∼175. 81) 구산선풍 , 32쪽. 82) 같은 책,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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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번뇌는 저절로 사라지고 의심 덩어리는 뚜렷이 드러



내어 마음이 깨끗하기가 차가운 눈과 서리 같이 되고 눈빛은 새벽별처럼 초롱



초롱하게 되어 점차 좋은 경지에 들어가서 마침내 크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이 구산의 생각이다.83)



그래서 예전부터 참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다만 화두를 들 때 혼침과 망



상이 화두와 서로 다투게 되면 오히려 끊임없이 이어가며 화두를 들어 망상을



물리치는 자세를 견지 하여하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혼침과 망상이 공부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 생각이 도리어 혼침과 망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일이 됨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84)



이런 상태에서 구산은 망상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자세를 지니



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방법은 과거사는 이미 지나갔으니 잊어버리고, 미래사



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생각을 안 하면 마음은 자연히 앞과 뒤가 끊어지고 망



상이 공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더욱 성성하게 화두를 참구한다면 진



실하고 간절하게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85) 그러다 보면 시절인연에



이르게 되고 ‘할’하는 한 소리에 홀연히 칠통을 타파하고 佛祖를 붙잡게 되어



참으로 쾌활하고 쾌할 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86)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간화선에 있어 수행자들은 선문 조사의 화두나



공안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지시 받는다. 한편 간화선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체



험에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정·혜와 같은 점진적 수행 덕목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념적 사유의 과정에



서 자유롭게 되어 수행자는 본래부터 깨친 상태로 있는 그의 마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신의 깨달음을 저절로 실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



83) 같은 책, 32쪽. 84) 같은 책, 49쪽. 85) 같은 책, 93쪽. 86) 같은 책,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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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전부터 간화선에 정통한 선사들은 닦음은 깨달음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87)



구산은 수행시 부딪히는 번뇌 망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연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간화선의 수행은 번뇌 망상을 버리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번뇌 망상에 즉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



구하는 데 그 요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그러한 번뇌에 대해 원래



空한 것이라 하며, 보리는 길고 짧다는 생각마저도 끊어져 변함없는 이름인



金剛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88) 이제는 無心을 최고 수행 단계로 보아 그에 대



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눌에 따르면 자성정혜는 여전히 의미 작용의 자취를



완전히 털어 버리지를 못한다. 그러나 무심합도의 경지에서는 구태여 어떤



수행의 방법을 논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행의 형태



이지만 결국은 아무런 수행도 아닌 오히려 자유로운 삶 그 자체를 말한 것이



다. 이 무심합도문의 사상은 구산에게서도 같은 맥락으로 발견된다.



봄바람이 평등하여 온갖 꽃을 피우지만



흰구름은 흩어져서 오고감을 싫어하네



오고감이 분명함이 어느 곳에 돌아가나.



흔들리는 바람가지 달빛 어린 물이로다89).



구산은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공적하게 관하고 오직 한 마음만 있어서 외



로이 드러내어 홀로 서고 진심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음을 강조하고



87) 길희성, 앞의 , 115- 117쪽. 88) 구산선문 , 559쪽. 89) 같은 책,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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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90) 그러면서도 구산은 그의 선사상에서 無念과 無心에 관한 이론을 전개



하면서 일체의 망상을 털어버린 후의 가장 자유롭고 높은 수행의 단계임을 보



여주고 있다.



모든 생각 돌이켜 無念으로 돌아가면



툭 터지는 한 소리에 만상을 거두리라



한 조각 녹음 속에 원한 여름이요



밝은 달빛 가득하니 온 누리가 가을이네.91)



모든 인연 쉬고서 無念이 되면



한 법에 일체 지혜 두루 갖추고



백천 가지 삼매를 모두 닦으니



천만갈래 함께 모여 한맛 이루네92)



무심합도문의 경지에서는 구태여 어떤 수행의 방법을 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수행이지만 결국은 아무런 수행도 아닌, 오히려 자



연스러운 삶 그 자체라 할만한 것이다. 결국 道와 합한다는 최고의 수행방법



은 수행을 넘어선 자유로운 삶이다. 오히려 화두를 넘어서는 경지로 무심으로



참 자아와 하나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93) 이와 같은



이유로 간화선은 깨달음에의 경절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94)



90) 같은 책, 467쪽. 91) 같은 책, 118쪽. 92) 같은 책, 412쪽. 93) 길희성, 앞의 , 116쪽. 94) 김호성, 간화선에 대한 양자 택일적 관점과 돈오점수와의 관련성 , 보조사상 , 4집, 451-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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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은 화두로 들어가 바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따라서 화두의



참구는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화



두에 관해서 구산은 상세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공안을 참구하여 깨닫기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산은 화두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성스런 마음을 더하여 뜻은 태산과 같이



세우고 믿음과 원행을 철두철미 하여 본참공안에 대해 생명처럼 여기어 간절



하고 간절하게 참구해야만 조금이라도 나아갈 分이 있게 될 것으로 보고 있



다. 그래야만 禪定을 익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점점 좋은 경지를 얻게



된다고 하다.95)



그래서 진실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본참공안을 간절하게 참구 하여야만



점점 깨끗한 경지에 들어가 不二法에 계합하게 되며, 이렇게 된다면 다시 공



력을 들여 의심을 흐릿하게 하지 말고 성성하고 적적함을 같이 지녀서 한덩어



리를 이루게 되면 즉 이것이 잠잘 것과 먹을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때라는 것



이다. 그래서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잊지 말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면



홀연히 대쪽 맞듯 맷돌 맞듯 칠통을 타파하여 불조를 잡아 거꾸러뜨리고 부처



나 조사들이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을 곳을 잡아내게 된다는 것이다.96)



(4) 頓悟漸修



구산은 돈오점수에 있어서는 지눌과 큰 이견을 내지 않고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돈오점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구산은 돈오점수보다 간화선에 비중을 많이 두었기에 간화선에서



95) 구산선풍 , 23쪽. 96) 구산선문 ,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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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그의 頓悟觀을 지눌의 돈오점수의 頓悟觀과 간략히 비교하여 돈오의



의미를 검토한 후 구산의 돈오점수를 언급하겠다.



지눌에게 있어 돈오의 의미는 일차적인 깨달음, 돈오(解悟)가 있어야만 점



수가 가능하다고 하다. 그렇지 않고 돈오의 세례를 받지 않은 점수는 단순



한 억압일 뿐이라고 하다.97) 따라서 지눌에게 있어서 궁극적 깨침에 이르기



위해서는 점수 이전에 돈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구산이 강조한 간화선의 경우는 先頓悟가 없이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가능하다. 즉 근기에 상관없이 바로 간화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구산



은 말한다. 따라서 간화선에 있어서 돈오는 수행의 전제조건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산과 지눌이 지니는 돈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눌에



게는 수행에 돈오가 전제조건이기에 돈오점수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반면



구산의 간화선에 있어서 돈오는 일정기간 동안의 점수 끝에 궁극적으로 얻는



깨우침인 것이다. 따라서 양자간의 돈오의 의미는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화선에서는 닦음은 깨달음과 동시에 이루



어지는 것이다.98) 따라서 이때의 돈오의 의미는 닦음보다 앞선 지눌의 돈오의



개념과 일치점을 보인다. 즉 돈오아래 점수를 해야 하는 지눌의 돈오점수이론



과 돈오와 동시에 깨닫는 순간의 닦음은 돈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양쪽



다 돈오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이론은 이와 같은 일치점도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산의 간화선과 지눌의 돈오점수론에 나타난 돈오의 의미를 간



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구산이 계승한 돈오점수 이론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산의 돈오점수는 지눌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97) 길희성, 앞의 , 101쪽. 98) 길희성, 앞의, 115-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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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고 있다.



구산은 먼저 수행적 자세에 대해 당부하고 있다. 그는 비록 중생이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으니, 바람이 고요해도 물결은 아직 솟구치듯 이치가 드



러나도 생각은 오히려 침입한다고 하으며, 또 이르기를 한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 헛꽃이 떨어진다고 하으니 법을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99)



그런 자세로 깨달음을 추구해 가면 깨달음이란 찰나에 있는 것이요, 수행



함은 만겁에 있는 것이니, 모든 집착은 녹아버리고 온갖 의혹을 부수어서 선



입견이나 잘못된 주견을 흩어버리고 법을 간택하여 관조하되 크게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고 닭이 알을 품듯이 하여 오래오래 계



속 하다보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100) 이러한 구산의 돈



오점수론은 지눌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돈오 후에도 습기가 남아있



기 때문에 계속 수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돈오점수의 사상이기 때문



이다.



돈오란 단박에 깨치는 것이다. 즉 돈오란 공적지한 마음에 대한 눈뜸이



다. 그 자리는 본래 일체의 번뇌 망상이 없는 여여한 부처의 자리이다. ‘마음



이 부처’ 라는 말은 이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그러면 무엇을 깨치고 닦는다는



것인가. 다음의 게송에서 구산은 그 답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생각에 빛을 돌려 자성을 보게 되면



한량없이 묘한 지혜 걸림 없이 쓰게 되네



원래부터 번뇌 없고 애욕강물 맑았으니



달빛아래 태연하게 젓대를 희롱하네.101)



99) 같은 책, 47쪽. 100) 구산선풍 ,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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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깨침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깨침이 아니다. 종교적 체험은



결코 다른 어떤 체험으로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며 선 불



교에서의 깨침 또한 마찬가지이다.102) 논의하고자 하는 ‘깨침’이란 것은 엄



한 의미에서 가르쳐 줄 수 없고 깨닫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깨침의



내용을 규명하고자 함은 그 비합리적 요소를 무시하여 합리화하자는 뜻이 아



니며 비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남기자는 것이다.103) 그렇다면 돈오



는 자신의 참자아(眞我), 즉 허망한 꿈과 같은 미혹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참마음을 홀연히 발견하게 됨을 의미한다104).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은 그 내용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등불 밝혀 장님이 눈뜸이여



천 년간 어둡던 방 한순간에 밝아지네



마음 쉬고 망상 없앰 이 또한 아니라



광대한 자비로서 중생을 위함이네.105)



佛祖께서 법을 설하시는 것은 병을 따라 약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병이 없다면 약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自性을 어둡게 하는 것은 오직



망상이며, 이 망상에 의해 좋고 궂은 경계에 근본을 버리고 枝末을 쫑으면서



흐름 따라 망령되이 행동하게 되니 이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



101) 구산선문 , 384쪽. 102) 이동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동시적 고찰 , 각 , 민족사, 1994 306쪽. 103) 구산선풍 , 307쪽. 104) 길희성, 같은 책, 90쪽. 105) 구산선풍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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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는 지음이 없는 대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일체 모든 경계를 단번



에 놓아버리고 마음이 벽을 대하듯 해야만 한다는 것이 구산의 頓悟觀이



다.106)



구산은 돈오 이후에도 습기가 남아 있으니 계속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



다. 이것은 돈오점수의 가장 기본으로서 지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



다.



구산이 이러한 점수를 주장하는 것은 등불이 비록 밝기는 하지만 햇빛으로



견줄 수가 없고 햇빛이 밝다해도 자신의 광명과는 비교할 수 없고, 지금 만일



닦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져서 온갖 괴로움이 몸을 얽어매고 벗어날 기약이 없



게 되어 괴롭고 괴로울 뿐이며 고난만 가득하리니 닦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다.107)



구산의 이러한 점수론은 중생의 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근기에 맞



춘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산은 중생의 근기를 셋으



로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上根大智는 일언지하에 생사를 단박 뛰어 넘을 수



있지만 중근기나 하근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사를 돌보지 않



고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정진하여 겨우 화두가



조금 익어졌다가도 정진의 기간이 지난 후 할 일없이 분주하게 남북으로 왔다



갔다하면서 本分事를 방일하게 되고 이때 옛 부터 익혀온 번뇌의 가림이 돌로



풀을 누른 듯이 다시 되살아나서 도를 장애하게 되는 것이 말로 다할 수가 없



다는 것이다.108)



그것은 頓悟하면 비록 부처와 같이 되나 이미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



서 바람이 고요해도 물결은 아직 솟구치듯 이치가 드러나도 생각은 오히려 침



106) 구산선문 , 511쪽. 107) 구산선풍 , 154쪽. 108) 구산선문 , 406∼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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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는 것처럼 법을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서 옛 사람도 참되게 수행하는 자는 갈수록 어렵다고 한 것을 들어 자기 마음



을 밝히지 못한 자는 수행한 자취를 여의지 말고 큰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



간절하고 부지런히 힘쓸 것을 강조하면서109), 깨달은 뒤에도 선지식을 찾아



탁마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110)



(5) 定慧雙修



구산은 지눌이 언급한 바와 같이 定과 慧를 반드시 함께 닦을 것을 강조했



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과 해석은 구산이 직접 그의 어록에서 언급하고 있



다. 이러한 점이 보조와 구산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지눌이 언급



한 성적등지란 정혜쌍수의 다른 이름으로 이것은 결사문에 보이듯이 정과 혜



를 겸수하자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구산은 정혜쌍수를 설명하면서 보조의 견해를 많이 따르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바깥 경계는 적적하게 되어 가는 먼지



하나라도 묻을 수가 없게 된 것을 定이라 하고, 마음 경계가 성성하여 화두가



어둡지 않은 것을 慧라고 보고 있다. 구산은 이러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지눌



이 성성함과 적적함을 같이 지녀 성적등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라고 한



점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11)



더 나아가 六根이 경계를 거두어서 마음이 攀緣을 따르지 않는 것을 정이



109) 같은 책, 47쪽. 110) 구산, 석사자 , 68쪽. 111) 구산선풍 ,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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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하여 밝게 비추어 미혹함이 없는 것을 혜라고



하면서 이것이 비록 相을 닦아 들어가는 정, 혜 이지만 점점 닦아 들어가는



수행이라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112) 구산은 이러한 의미를 다음과 같은 게



송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과 혜를 같이 닦아 헛된 꿈을 깨고 보니



한밤중에 밝은 해가 시방세계 비추도다.



털끝 속에 바다 품고 모래알에 천지 안아



무수 가지 끝에 꽃은 절로 붉었구나.113)



이와 같이 살펴본바 惺惺寂寂과 定慧雙修가 그의 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성적적은 지눌의 惺寂等持門과 유사한 의미로 寂은



定에 해당하고 惺은 慧에 해당되며, 寂寂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리고 뒤에



惺惺으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114)



그러나 특이한 점은 구산은 지눌과는 달리 성적등지를 화두참구의 일환으



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구산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좌선한다는 것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坐라는 것은 바깥경계가 적적하고 안의 경계가



성성하여 화두가 이곳에 견고하게 머물러서 끊어지지 않고 역력한 상태를 말



하고 있으며, 선이란 것은 안의 경계가 성성하고 바깥경계가 적적하여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드러나서 흩어지지 않고 간절하게 참구하는 것을 선이라 말하



고 있는 것이다.115) 이는 성성함과 적적함을 함께 지니고 정과 혜를 함께 닦



112) 같은 책, 162∼163쪽. 113) 구산선문 , 426쪽. 114) 같은 책,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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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함을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어느 누가 무생법(無生法)을 깨닫고자 한다면



성성적적(惺惺寂寂) 함께 지녀 정(定)과 혜(慧)를 밝히어라



털끝이 바다 삼켜 광명을 통달하니



무수(無影樹) 가지마다 꽃향기가 절로 나네.116)



공부를 지을 때에 그저 空한 定만 지키지 말고 惺惺함과 寂寂함을 지녀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거니와 망상이 성



성한 것은 잘못이며,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지만 적적한 가운데 혼침에



빠지는 것은 잘못된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깥의 경계는 적적하고 안으



로는 화두가 성성하여 적적함과 성성함을 가지런히 지니고 선정과 지혜를 함



께 닦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은 있고 지혜가 없으면 무명만 더



욱 늘어나고 지혜는 있으나 선정이 없으면 삿된 견해만 늘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7) 그러한 점을 구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성성적적 함께 지녀 정과 혜를 밝히니



티끌세계 국토마다 큰 기틀을 드러내네



두 쪽 견해 내지 않고 평등하게 행동하면



115) 같은 책, 556쪽. 116) 구산선풍 , 47쪽. 117) 같은 책,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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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마저 모두 건져 극락세계 이루리라.118)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산의 선사상에는 성성적적과 정혜쌍수적 사상



을 확연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구산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수행자들이 위없는 菩提道를 이루고자 한다면 惺惺과 寂寂함을 함께 지녀 定



과 慧를 밝히기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119)



Ⅴ 結 論



지금까지 지눌과 구산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선사의 생애



에 있어서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는 두 선사



118) 구산선문 , 557쪽. 119) 구산선풍 ,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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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애와 활동에 있어 교단의 상황이 혼미한 때 교단의 쇄신에 전념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두 선사의 생존연대가 대략 칠백 여년이 넘는



차이는 있지만 교단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은 동질의 것이라고 보



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러한 종단의 부흥을 禪風의 振作으로 이끌어 간 점



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사상적인 면을 살펴본다면 구산은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여



러 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心性에 대한 견해(心性論)와 이를 찾



기 위한 수행의 방법에서 지눌과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지눌의 眞心이라



는 개념이 구산의 眞性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져 인간의 참성품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어 인간의 본래 순수한 마음을 찾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적



지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寂과 知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이 공적지는



인간을 가장 순수한 불성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역사적으



로 계승되는 지눌의 선사상과 일치하는 점이다.



수행론에 있어서 두 선사의 공통되는 면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 看話禪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단 지눌은 最上根機에만 화두를 들라고 한 반면 구산은



간화선을 보다 더 대중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눌에 있어 간화선이



禪의 최종 단계라면 구산에 있어서는 간화선이 禪의 모든 것이라는 견해를 보



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눌의 선사상과 구산의 선사상을 구별



짓는 결정적인 내용인 한편 지눌과 구산이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단서이



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눌은 원돈신해문, 성적등지문이라는 수행을 지나 간화론을 세



워 화두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할 수 있는 강한 수행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세 번 째 문인 경절문은 돈오, 혹은 원돈신해문의



완성이자 점수 혹은 성적등지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구산의 수행론은 간화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사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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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을 간화선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는 수행의 바탕이 온통 간화



선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구산이 주장하는 간화선에는 항상 점수의 이



론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구산과 지눌은 차이점을 보인다.



구산은 근기의 상하에 관계없이 모든 수행자에게 간화선을 제시하면서 정과



혜를 닦는 것도 간화선과 함께 수행해야 하며 공안을 참구함에 점수적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을 제외한 수행론에 있어서도 두 선사간의 견해에는 몇 가지 공통되



는 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지눌은 先頓悟 後漸修를 주장하며 전통적인 頓悟



漸修說을 주장한다. 구산도 이러한 지눌의 수행관을 계승하여 돈오점수를 주



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눌이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解悟와 證悟



를 구분하여 먼저 돈오한 후 점수를 계속 닦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음



이 특징인데, 돈오점수론에 있어 구산도 頓悟를 시작으로 하여 계속 漸修해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교로써 심성론과 수행론에 나타난 두 선사의 특징들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구산의 생애와 법어집에서 지눌의 저서가 자주 인용되



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져 많이 답습



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두 선사를 비교했는데, 지눌의 禪思想은 변형된 형태



이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가 창건한 송광사의 방장 九山에게 면



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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