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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0

Namgok Lee 팔정도(八正道)의 다섯 번 째는 정명(正命;바른 삶)이다.

 Namgok Lee

어떻게 하다 보니까, 팔정도를 다 써보게 된다.

우선 내 생각을 정돈해보기 위해서다.

팔정도(八正道)의 다섯 번 째는 정명(正命;바른 삶)이다.



라즈니쉬의 해설이다.

<삶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 복잡해서는 안된다고 붓다는 말한다.
삶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 욕망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필요성은 전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대는 음식을 필요로 하고, 의복을 필요로 하고, 거처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관계를 필요로 한다. 전적으로 좋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필요는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욕망들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좀 더 민감해져야 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을 모으느라 자신의 인생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가난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 단지 필요성에 따라 산다면 가난은 정말로 충만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대는 충족을 느끼는 부자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동감한다.

다만 단어에 어떤 의미를 두느냐에 차이가 있겠지만, 필요와 욕망을 칼로 자르듯이 구별할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예를 들어 거처를 필요로 하는데, 보다 ‘쾌적한’ 거처는 필요인가? 욕망인가?

관계를 필요로 하는데, 보다 ‘우아한’ 관계는 필요인가? 욕망인가?

채워질 수 없는 욕망 즉 탐욕이 아니라, 욕망의 진화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동물에서 출발한 1차적 본능에만 그치는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게 특유한 2차적 본능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네 번째에서 이야기한 에크하르트의 ‘거룩함’ 같은 것은 2차 본능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더욱 신장시키는 것을 욕망 또는 욕구의 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나 나눔 같은 정신적 가치의 기쁨을 확대하고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열어간다면, 물질적 욕망은 자연스럽게 감소할 것이다.

이른바 ‘쾌적한’이나, ‘우아한’은 화려하고 과시적이거나 번잡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순소박한 것을 내용으로 갖게 될 것이다.

내가 빈이락(貧而樂)과 부이호례(富而好禮)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진 사람들도 많아졌고, 추위와 굶주림에서는 대부분 벗어나 있는(기본적 필요는 충족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당위나 의무 사명감보다 기쁨의 질, 욕구의 질이 바뀌는 것이 문명 전환의 동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명(正命)을 위한 객관적 환경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구체적 삶 속에서 단순 소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 전환의 과정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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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한국불교의 상명하복식 유교적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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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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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스님의 한국 불교에 대한 비판이 불교계에서 찬반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그 글을 보았다.

승가의 현실과 종단의 내막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뭐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그 비판 가운데 ‘한국불교의 상명하복식 유교적 관습’이란 말이 나오는데, ‘유교적 관습’과 ‘공자’를 함께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점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런 ‘유교적 관습’이 한국 사회의 도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유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의 사상이나 실천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60이 넘어 공자의 사상에 접한 말하자면 아마츄어지만, 내가 접한 공자는 신분‧ 계층‧ 나이를 그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차원으로 넘어선 소통의 달인(?)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제자들이 본 공자의 모습은 다음의 문장 속에 표현되어 있다.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다. 毋意‧ 毋必 ‧ 毋固 ‧ 毋我가 그것이다’

석가의 깨달음과 표현은 달라도 비슷한 것으로 내게는 다가왔다.

내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聖人들의  깨달음이나 가르침이 2500여년 간 인류 정신의 축(軸)으로 작용해 왔지만, 실제로는 그의 후계자들과 권력이나 기득권층 등에 의해 왜곡되어온 것으로부터 그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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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이병철



이른바 축의 시대의 스승들의 깨우침과 그 메시지가 그후 어떻게 왜곡되고 어떻게 이용되어왔는가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겠지요. 문제는 지금도 종교집단이나 권력이나 사회집단들이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과 체제유지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선각자들의 가르침에 다가가는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싶습니다.



공자의 깨우침이 유교라는 체계에 갇두어질 때 유교주의라는 폐단이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대표적인 병폐가 종교와 종파주의일텐데

붓다나 예수의 깨달음이 종교화될 때

거기에서 붓다와 예수의 참모습을 만나기란 숲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쉽지 않으리라 싶습니다.



현각스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의 지적은 불교계 안에서 이미 수없이 제기되었던 문제라 싶습니다. 차제에 대개혁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땅의 불자들에게도 큰 복연이되리라 싶습니다. 그럴 수 있기를 함께 마음 모읍니다.

 · Reply · 4 y

진영우

이른바'역사적 예수'연구는 많이 되어 그의 참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역사적 석가' '역사적 공자'연구는 매우 부족하더군요^^

 · Reply · 4 y

이병철

진영우 붓다에 대한 것은 팔리어로 기록되어 남아있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읽어도 좋겠네.

근래에 팔리어 초기경전에 대한 역경작업이 많이 진행되었지.

몇해전에 모임에서 예수공부를 할 땐 도마경을 중심으로 했던 적이 있네.



 · Reply · 4 y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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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영

저도 기사 중 그 부분이 딱 걸렸는데 이렇게 설명해주시니ᆢ감사합니다^^

 · Reply · 4 y

Namgok Lee

최근에 소개를 받은 책인데,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 Reply · 4 y

문현동

저는종교가 세속적인 사람과 정치사회문제와더불어 자연적 순리의 양단에치우치지않고 중용의 입장에서 각종교의 교리에 충실해야된다고보는데 너무세속적인면에 치우처다보니 이런사단이....

 · Reply · 4 y

2020/06/19

Namgok Lee 고전 읽기와 산책을 생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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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 hrs  · Shared with Public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데 좋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근래 고전 읽기와 산책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아침 산책 나가기 전에 짧게라도 고전(古典)을 읽습니다. 그리고 산책하면서 그것을 음미합니다.

자기 안에서도 그 의미가 다르게 보여 오는 경험을 가끔 하게 됩니다.

원문을 해석하는 자신의 잣대를 달라지게 하는 여러 경험이나 정보들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이어서 “군자의 현대적 의미—자유와 진보에 대한 근본 성찰”이라는 주제로 작년에 사람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자주적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1)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주체적’ ‘자주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립(自立)의 의미가 중요하게 포함된다.

남에게 굴종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집이 강하거나 자기주장을 여간해서 꺾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는 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착각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怒)가 나는 경우가 많다.

노(怒)는 노예(奴隸)의 마음(心)이 합성된 단어다.

다른 사람의 생각 때문에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심하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자주성을 뺏기는 상태다.



2)  단정(斷定)하지 않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4편)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인문운동이 최전선(最前線)이 되는 것도 이것이 최대의 테마로 되기 때문이다.

단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사람으로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단정은 도덕적으로 하자(瑕疵)가 있는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전혀 근거 없는 반(反)과학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연재 첫 장에서 상세히 이야기한바가 있다.

(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가겠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벗을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1편)

무겁다는 것은 중심(重心)이 잡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래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忠)과 신(信)을 바탕으로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나 권력을 앞세운 권위주의(權威主義)와는 질이 다른 것이다.



학즉불고(學則不固)야말로 진정한 권위의 바로미터다.

‘배워도 완고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탐구할수록 더 유연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언제든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고칠 수 있는 자유인이며,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풍요로운 인간이며,  흔들리지 않음과 유연함이 조화된 진취적인 인간인 것이다. >>

2020/06/01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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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hrs ·







‘있는 그대로 본다’ ‘있는 그대로를 보라’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의 주관이나 감각 정서에 사로잡혀 보지 말라는 당위(當爲)나 도덕(道德) 지향의 말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과학적이지 않다.

사람은 자기 감각이나 판단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에 가깝다.

나도 상대도 누구도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적 태도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독선이나 아집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태도다.

도덕 지향이나 마음 수련 등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지적 활동과 결합되어야 무리가 없다.

나에게는 논어(論語)가 대단히 과학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큰 보물창고(寶庫)처럼 다가올 때가 많다.

공자가 평생 간직할 말로 추천한 ‘서(恕)’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으로 읽힌다.

‘서(恕)’는 평화(平和)와 사이좋음의 출발이다.

논어 제 1편에 나오는 말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나도 상대도 누구도 있는 그대로를 알 수 없다(無知).

더구나 상대로 하여금 나를 알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상대를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 뿐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서로 알아가는 ‘관용’과 ‘서’ ‘사이좋음’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주체는 나이고, 그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이니시아티브’다.

이것이 과학적 인식 태도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누가 나를 몰라주거나 오해하면 화가 난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양이나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學)만으로는 부족하고 오래된 관성에서 벗어나는 연습(習)이 필요하다.

과학적 태도와 수행(연습)이 서로를 보완해야 자유로운 인간(君子)으로 된다.

논어 첫 장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이렇게 다가온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 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인부지이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새벽의 논어 산책.

2020/02/08

2001 이남곡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


Namgok Lee
7 hrs ·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을 가져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자신이 가진 감각과 판단(정보에 대한 선택)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혼란과 도전이 축의 시대 선구자들의 '인간 정체성'을 흔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특히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가진 두 분야의 괴리가 폭발적으로 커져서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 능력은 전인미답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데, 그것을 개발하는 인류의 관념체계(가치체계)는 아집과 소유 ㆍ자기중심적 개별관에 아직도 갇혀 있다.

그것은 물질 ㆍ과학 기술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ㆍ제도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특히 현대자본주의와 생태기후위기의 모순 속에서 물어지는 것이다.

결국 진보의 핵심과제는 인간 자체가 갖는 그 능력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은 소유와 아집에 갇혀 있으면서 사회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허위의식'은 더 이상 진보라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생태파괴문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유와 아집 그리고 개별관에 갇혀 있는 인간의 관념을 정상화하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능력은 멈춰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가르는 것은 우리 인류가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이 밝히고 실천한 그 인간정체성을 보편화 ㆍ현실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혁명이라고 불리워왔던 것들과는 질이 다른 혁명(이것을 개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이 요구되고 있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진행 속도가 과학기술능력의 발달 속도에 못미치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인간 자체의 질적 진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최대의 낙관론이다. ㅎㅎ

변화가 도둑처럼 온다는 말도 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나타내는 말로도 들린다.

2020/01/30

Namgok Lee - 살다 보면 개인의 일생에서도 전혀 상상도 안했던 일이 일어나는 경우



Namgok Lee - 2년전 글이군요.



Namgok Lee
30 January 2018 ·



살다 보면 개인의 일생에서도 전혀 상상도 안했던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다.
내가 60세 이전에 죽었다면, 공자나 유학은 나와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50세 이전에 죽었다면 무소유 사회의 실험에 동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50대에 무소유 사회의 실험 즉 야마기시와 만남을 통해 연찬(硏鑽)에 접하고 우연히 시작한 논어 강독 모임에서 공자를 발견하면서 60대 중반부터 근 10여년 인문운동의 주요 소재로 공자를 활용하고 있다.
연찬(硏鑽)이라는 소통과 탐구 방식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공자를 만났더라도 아마 달랐을 것이다.
처음 논어 강독을 하다가 실망하고 중간에 그만 두었을 가능성도 크다.
나에게 그 순서는 절묘한 것이었다.
우연 같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연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느껴질 때가 있다.

당분간 논어와 공자를 더 활용하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 역사에 끼친 공과가 크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많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 접근하는 테마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수구반동’ ‘봉건제의 옹호자’ ‘인본주의’ ‘민본’ 등 그 공과가 주로 공자나 유학이 끼친 정치와 관련이 많다.
지금도 비난이나 옹호에 이런 측면이 많이 거론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공자가 아니다.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그는 무지(無知)의 자각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불가지론이나 종교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신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단정(斷定)과 고정(固定)이 없이 철저히 구명하려고 
한 축의 시대 제1기 르네상스의 대표 주자의 한 사람이었다.

현대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전히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부정적인 여러 현상들을 낳게 한 것으로부터 공자를 해방하는 것은 비단 유교권 문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축의 시대 동서양의 다른 선구적 사상에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한국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 류의 폐단으로부터 공자와 유학을 벗겨내는 일은 그 뿌리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 보고 있다.

아마 내가 더 살면서 또 누구를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건강과 정신활동이 가능한 동안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설렘이 사라지면 굳는 것이고 굳는 것은 죽어 가는 것이다.

새벽의 단상이다.

2020/01/18

협동조합 안에서 실천적 과제로 만나면 진짜가 된다.



Namgok Lee
16 January 2019 at 09:04


많은 사람들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탐(貪)은 탐욕을 말하는데, 무엇인가에 끌리는 것을 말한다. 주로 부(富), 권력(權力), 명예(名譽) 등이 그 대상이다.
진(瞋)은 성냄인데, 무엇인가를 밀쳐내는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나 취향이 다르면 밀어내려고 한다.
치(癡)는 어리석음인데,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독선과 또 어떤 것(사람)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다.


어둠(불의)과의 투쟁을 통한 사회진보와 경쟁과 갈등을 통한 생산력 향상에는 한계와 모순이 따른다.
이제 밝음이 개화하는 진정한 생명력이 커져야 한다.

협동조합운동이나 마을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은 밝음을 실현하는 운동이다.

‘생산성’과 ‘의식성’이 서로를 떠받쳐 주는 것이야말로 밝음의 핵심이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개별적인 수행에 집중하다보면 관념에 그치고 말아 진짜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많다.
협동조합 안에서 실천적 과제로 만나면 진짜가 된다.

탐(貪)은 양보를 통해, 진(瞋)은 수용(받아들임, 동조와는 다름)을 통해, 치(癡)는 독선이나 단정에서 벗어나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관념’을 넘어 진짜로 탐진치를 넘어서는 과정이 된다.
나는 이것이 밝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방향이나 목표는 분명하게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01/07

2001 Namgok Lee - 서로 대화하고 소통해서 해결하자는 원론적인 이야기에는 동의 -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가면 꽉 막히고

 Namgok Lee - 서로 대화하고 소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해결하자는 원론적인 이야기에는 동의하는...


Namgok Lee  3 hrs ·

서로 대화하고 소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해결하자는 원론적인 이야기에는 동의하는 사람들도 막상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가면 꽉 막히고 금방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나는 인문운동의 분야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직접화법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너무 어려워 ‘논어(공자)'를 매개로 ’간접화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자가 21세기에 보내는 메시지를 소개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 대표적 메시지의 하나로 우선 소개하는 것이 있다.

“무지의 자각(사람은 누구나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바탕으로 일체의 단정(斷定)이 없이 그 시점에서 무엇이 가장 옳은가(누가 옳은가가 아니라)를 함께 찾아서 편가름하지 말고 사안 별로 실천하자”라는 것이다.

5~6년 전 서울에서 여러 분야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가지고 만났었는데, 이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공교롭게 한국이 원자력 발전을 시작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고 당시는 은퇴한 분과 환경운동 분야에서 원자력 발전 반대운동을 앞장서서 하고 있던 분이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곧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환경운동을 하던 분이 보다 공격적이었고 심지어는 끝나고 헤어질 때 나에게 와서 왜 자기 편을 들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반대하는 쪽이라 당연할지 모른다.

그 장면이 가끔 머리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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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합의민주주의와 협치시대의 요구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원론적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들어가면 앞에 이야기한 것과 같은 사례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까 협치는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실제로는 힘의 대결로 된다.
결국 다수결로 해결하고, 그 다수를 점하기 위한 싸움에 올인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나쁜 쪽이라도) 다음에 정권을 교체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미국이나 영국도 그러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우리 현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고 본다.
이 시대 새로운 정치와 정치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갈등을 힘 대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면(민주주의와 선거의 이름으로) 회복 불능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산적한 과제들, 양극화의 해소 그 중에서도 노동의 양극화 극복을 위한 노동계의 새로운 태도, 복지와 경제를 둘러싼 여러 입장들, ‘탈원전’을 둘러싼 정책, 교육 정책, 지역 격차, 과거사에 대한 입장 등 구체적인 사안에 들어가 ‘실사구시’하고 ‘구동존이’할 수 있는 인문적 토양이 너무나 아쉽다.

요즘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많이 나오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눈앞의 선거를 목표로 한 일시적인 현상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나라의 현실이 새로운 정치를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내세우는 정책의 합리성이나 가치관(價値觀) 못지않게 그 정책이나 로선을 세우는 과정의 ‘인문적 토양 즉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태도가 진실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로선이라도 우리의 고질적인 정치문화를 넘어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55신영숙, Suyong Jang and 5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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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표 자찬훼타하는 현실 속에서 남곡 선생님의 회통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諸行無常,
時中,
求同存異를 떠올려 보며 오늘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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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찬훼타(自讚毁他)ㆍ자신을 높이기 위해 남을 짓밟는다


· 3h

최영대 선생님 글을 읽을 때마다 저 자신을 많이 되돌아 봅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싸움을 완화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진영논리에 갇히지 말고, 지금까지 과학에 근거하고 통계가 말해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을 수 있고 아직 규명되지 않은 너무 많은 분야가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과학이 밝혀낸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많이 배웠다는 분들에게조차도 철벽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선입견에 갇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는 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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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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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 
Pronunciation [ 실싸구시 ] 
  •  
  •  

뜻풀이부

noun
  • 1.
    철학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공리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객관적 학문 태도를 이른 것으로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 태도에서   있다조선 시대 실학파의 학문에  영향을 주었다.
Source : Standard Korean Dict.

Meaning 9

실학파  [실학파]  
  • noun 조선 후기에이용후생을 실천하고 실사구시 연구하던 학파.
Standard Korean Dict.
이중환 1  [ː중환]  
  • noun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1690~1752). 자는 휘조(). 호는 청담()ㆍ청화산인(). 벼슬은 병조 좌랑에 이르렀다이익의 실사구시 학풍을 계승하여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연구하였다저서에 ...
Standard Korean Dict.
한치윤  
  • noun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1765~1814). 자는 대연(). 호는 옥유당().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심하였으며실사구시 무징불신() 고증학적 학술 방법을 소개하였다. ≪해동역사...
Standard Korean Dict.
유득공  [유득꽁] 
  • noun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1749~1807). 자는 혜풍()ㆍ혜보(). 호는 영재()ㆍ영암()ㆍ고운당(). 사가()  사람으로벼슬은 규장각 검서풍천 부사에 이르렀다박지원의 문하생으로 실사구시  방법...
Standard Korean Dict.
김정희  [김정히] 
  • noun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실사구시 주장하였고서예에서는 추사체를 완성하였다고증학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다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세한도()> 따위가...
Standard Korean 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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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실사구시  ]

요약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실사구시이다.
이것은 한서() 권()53 열전() 제()23 경십상왕전() 중 <하간헌왕덕전()>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에서 비롯된 말로 청()나라 초기에 고증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송명이학()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 ·고염무() ·대진() 등을 들 수 있고 그들의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이 실학사상은 조선 중기, 한국에 들어와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켰으며 이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이 땅에 실학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탄압을 받고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 때문에 경세치용적()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방법론이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희()이다. 그에 앞서 홍석주()는 성리학과 고증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에 섰지만, 김정희는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실천을 역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사구시 [實事求是] (두산백과)

지식백과 구동존이 [求同存異]

`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의 구동존이는 중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다. 2016년 9월 5일 중국에서 열린 G20 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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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존이(求同存異)는 “공통점을 구하고 차이점은 놔둔다”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협상 전술이다. 이 전략은 1955년 당시 중국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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