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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4

같은 값이면 복짓는 마음을 쓰자 | 마음을 제대로 쓰는 방법 | 원불교 좌산상사 마음수업


조현

좌산 이광정 상사는 현존하는 원불교 최고 어른이다. 좌산 상사는 1916년 대각해 원불교를 개창한 교조 소태산 박중빈, 2대 정산 송규, 3대 대산 김대거에 이어 1994년 58살 나이에 종법사가 되어 원불교를 12년간 이끌었다. 그는 70살에 종법사에서 퇴임해 미륵산 아래 머물고 있다. 상사란 종법사를 지낸 어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좌산은 이 시대 마음공부의 스승이다. 그가 낸 '마음수업' '믿음수업'(휴 펴냄)은 마음의 원리를 알고 이를 삶과 사업에 구현하려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초탈한 탈속파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산골에 살지만 교단의 일과 사회·정치·통일 문제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고 있다. 그를 만나본 이들은 그의 구체적인 조언에 혀를 내두른다. 따라서 그는 진리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삶과 사업에서 구현되게 하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외할머니인 고 김혜성 종사와 그의 자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의 멘토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2019년말 쓰러져 심장수술을 받고, 연이어 암수술까지 받았는데도 좌선과 운동을 통해 90이 다된 노구에도 회복해 주위를 놀라게 하고있다. 

평생 수행 수도하며 원불교 신자들을 지도해온 좌산 상사는 대담에서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길인지, 어떻게 해야 일처리를 잘하고, 성공할 수 있는지까지 상세히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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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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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경과 역경

"잘나갈 때(순경) 오만해질까 경계하고, 도리어 시련을 겪을 때(역경)를 단련의 계기로 삼아라!"
ㅡ좌산상사 어르신의 법문 중ㅡ

개인적으로 잘나갈 때 깝죽대다 두어 번 아주 낭패를 본 적이 있는 제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어르신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습니다. 섬뜩합니다.

조현 기자의 휴심정에서 경청한 어르신의 법문을 통해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님의 도력의 높이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선각자 그 이상의 위의가 느껴집니다. 

2.  마음보다 마음의 원리를 배워야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종교, 철학, 과학 등등 모두 마음이 만든 겁니다."

왜 마음의 원리를 알아야 하는지 이 말씀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그 동안 내 자신이 알게모르게 유물론에 빠져 있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홍석현 씨가 '인성교육진흥법'을 만드는 일에 힘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그랬던 양반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만났다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기 힘듬. 윤 총장이 만나자고 하더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인성교육진흥법의 입법정신에 부합하거니와 사사로이 비밀리에 검찰총장과 독대를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패공화국으로 망가뜨린 정경유착으로써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위법행위임).

어르신!
홍석현 이 양반, 혼구녕을 좀 내주십시오. 인성교육법을 만드는 데 일조한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3.  결론

"논어를 읽기 전이나 논어를 읽은 후나 똑같다면 논어를 읽은 것이 아니다."  
ㅡ 정자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니다만, 사실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헌데 오늘 어르신의 법문을 듣고 구체적인 공부법을 배웠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대로 해보겠습니다.

어르신께 큰절 올리고 갑니다.
그리고 조현 기자님!
감사하다는 말 말고는 할말이 없네요.

2021/07/20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 네이버 블로그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 네이버 블로그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강주영

2021. 7. 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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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집강소강의록



-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 임자의 철학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만민편등을 바란 동록개의 꿈이 있는 원평집강소, 지척에 10대의 전녹두와 전창혁 선생이 살던 황새마을이 있고 김필상 그러니까 김덕명 선생이 사시던 원평에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게 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0대 후반 전녹두는 이곳 황새마을에서 봉남으로 글을 배우러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그만 배우겠다고 했답니다. 그때 스승이 너는 내 이름도 마을 이름도 잊으라고 했답니다.

난세에 한쪽에서는 동학사상이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동학과 무관하게 혁명조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조직이 서로 다른 경로로 자라고 만나서 1894년의 동학혁명이 났다고 봅니다.

지금 시대의 고통은 1,800년대보다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습니다. 분단, 지구대분할, 기후위기, 코로나 괴질, 디지털 빅브라더, 지역 소멸 방식의 지구자본화, 나라와 나라•사람과 사람의 극심한 빈부 격차, 자본주의형 사람만을 기르는 교육 등은 과연 우리가 지구공동체의 주민인가 의심에 의심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철학 또는 사상 동학을 하는 까닭입니다. 철학 또는 사상은 무엇을 정의正意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폭력을 없애는 일입니다.

오늘 동학에 관한 말은 신앙으로서의 동학이 아닌 사상으로서 동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학의 말씀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중요한 말은 한자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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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東學은 어떤 사상인가

여러분 동학하면 무슨 말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동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자기통치(줄여서 자치, 지방자치의 자치가 아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살리며 삶을 살아내는 생성生成(기르는)을 하며,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을 물리치자는 사상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람은 살리다 살다에서 온 말입니다.

동학은 나를 살림으로서 세상을 살리자는 사상입니다. 동학은 나를 나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지구를 지구답게 하자는 사상입니다.

2. 심학心學과 몸학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 이 두 경로가 동경대전 읽기, 동학하기의 바탕이라 생각합니다.

비유하면 해월은 성자요, 전녹두는 혁명가입니다.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두 분다 혁명 품은 개벽꾼입니다.

굳이 말하라면 해월은 심학이요. 전녹두는 몸학입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둘은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며 보완하는 동이상보同異相輔요. 서로 가르치며 서로 크는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사이입니다.

심학心學은 마음공부, 마음 수련을 말합니다. 몸학은 생성生成과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믾은 분들이 동학은 기氣

주체 심학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현대 최신 양자역학과 생물학에 의하면 마음과 몸은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몸은 마음의 거처요, 마음은 몸의 생령生靈이요, 몸의 기운입니다. 마음이 거처를 잃고 떠돌면 떠도는 유령이나 도깨비불이 됩니다. 마음은 곧 기이도 한데 마음 또는 기운이 거처를 잃으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릅니다.

3. 생성生成과 조화정造化定

동학에는 조화정과 불연기연不然其然이 있습니다. 저는 불연기연을 뭣뭣다움너머(불연, 원평다움너머, 사람다움너머), 뭣뭣다움(기연, 원평다움, 사람다움)이라고 풉니다. 여기서는 기연이요, 저기서는 불연입니다. 생성은 기연과 불연이 갈아드는 과정입니다.

동학사상가 이돈화는 불연기연을 '반대일치의 논리'라고 하였고 김지하는 '아니다', '그렇다'의 '혼돈'과 '질서' 카오스모스 Chaosmos라고 하였습니다. 코스모스는 cosmos 질서가 가득한 우주입니다. 카오스모스와 코스모스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질서와 혼돈의 평형 상태가 사물 또는 생명이고 이 평형이 깨지면 사물 또는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이 차원이동을 사람들은 진화進化•진보進步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귀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귀하기에 진화진보는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차원 이동은 이쪽에서는 죽음과 파괴요(불연), 저쪽에서는 생성과 자람입니다.(기연) 동학의 말로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입니다.

4. 생성과 창발創發 - 엔트로피entropy와 진보

물리학 복잡계이론은 차원이동을 '창발'이라고 합니다. 창발은 창조와 달리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창발적 진화'創發的進化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명은 단백질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생명은 단백질에서 온 것은 맞지만 생명과 단백질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단백질 50조 개(우리 몸 세포 수)의 합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부분들의 단순 합이 아닙니다.

거처 잃은 마음, 기운을 서양말로 하면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무질서도)라고 합니다. 동학은 이것을 혼원지기(渾元之氣)라고 합니다. 혼원지기 또는 엔트로피는 같은 계, 고립계에서는 무질서도이지만 열린계(지구와 태양)에서는 쓸모 있는 기운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나무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고립계로 보면 엔트로피, 혼원지기는 증가하기 때문에 멸망은 필연의 일이 됩니다.

엔트로피법칙은 진화•진보의 끝은 멸망이기에 진화•진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보'라는 관념이 지구와 사람을 망치는 폭력입니다. 진보의 다른 이름은 우승열패 약육강식입니다.

5. 기氣, 이치理致, 접신강령接神降靈

기란 우리 말로 하면 숨, 기운 서양 말로 하면 에너지입니다. 동학에서는 혼원지기, 기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 기가 움직이는 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동학에서는 그 이치를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라고 합니다. 기가 무위이화의 이치로 움직이는 것을 '기화'氣化 또는 "기화지신' 氣化之神이라고 합니다. 이 기화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통찰이라고 부르고, 절집에서는 '한소식 들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을 때 '접신강령'했다고 합니다. 접신강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잡신강령雜神降靈인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 동학이 아닌 개동학도 있습니다. 돈벌이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잡신강령의 대표적인 경우가 민주당 대선주자 9명의 출마선언문입니다. 농사의 농, 기후위기의 기, 생태의 생자 한 마디도 없습니다. 제대로 접신강령한 대표적인 경우는 나락 크는 소리를 듣는다는 여름지기(농사꾼의 우리말)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 사람과 만물을 기르는 생명의 천지부모 지구마음이야말로 접신강령일 것입니다.

6. 산알, 복승(複勝), 주파수

북한의 김봉한이라는 분이 1960년대에 동의학에서 말하는 경락, 즉 기의 실체를 과학적 실험과 관찰로 증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의 원조는 단백질이 아니라 '기'라는 것입니다. 세포를 생성하고 조절하는 기를 김봉한은 '산알'이라 이름했습니다. 산알이 다니는 길이 경락이요, 침자리입니다.

​이 기운의 입자와 파동이 곧 마음입니다. 우리가 빛을 입자와 파동이라고 하잖아요. 엄마의 마음이 아기에게 가면 아기가 방긋 웃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보기만해도 엔돌핀이 납니다. 라디오 주파수가 있습니다. 아기와 엄마, 연인들끼리는 서로 주파수가 맞습니다.

그것을 때맞춤(동기화同期化)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주파수와 나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 동기화하는 것,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것이 곧 심학이요. 몸학입니다. 이 주파수를 맞추는 것, 산알이 움직이는 것은 생성입니다. 생성은 '복승'(複勝)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것은 숨어있는 차원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근원적 우주 생명의 솟음입니다. 김봉한(金鳳漢)의 '산알'입니다. 이것이 동학 주문의 조화정입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면 저와 주파수가 맞아서 당신 마음의 입자는 제 가슴에 꽂히고, 파동은 제 심장을 뒤흔들 것입니다.


7. 동東은 무엇인가?


여기서 동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없습니다. 동은 해동성국할 때의 동이지 서양의 서에 대칭•대립되는 말로 좁혀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땅에서 나고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道인즉 천도天道이나 학學인즉 동학東學"이라는 말은 지구와 우주 곳곳에 천도는 있으나 조선에서 천도를 모시는 방법 혹은 체계를 말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우분투ubuntu가 있습니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뜻의 우분투가 남아공의 동학입니다.

세계를 동과 서로 나눌 까닭은 없습니다. 동양, 서양은 없고 지구와 우주만 있습니다. 동학은 서학에 대립하여 생긴 것만은 아닙니디. 그렇다면 지구적 보편성이 없습니다. 그것도 1860년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여건의 특수성에 갇히게 됩니다.

천도란 지구학이자 우주학이며 나의 마음학이요 몸학입니다. 지구란 것도 결국은 내가 담는 것입니다.

8.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동학에 말 중에 보국안민이 있습니다. 흔히 듣는 말입니다. 흔히 듣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보국안민에서 국을 지구나 우주로 바꾸면 혹은 나로 바꾸면 어떤가요. 세상은 "공유된 불안'에 갇혀 있습니다. 억압, 폭력, 불평등이 넘칩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우주여행을 합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이 가득합니다.

폭력을 없애고 사람과 지구를 평화롭게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동학입니다. 그런 뜻에서 '동'은 밝을 동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폭력으로부터 바로잡자는 학이 동학입니다. 보국안민의 보는 지킬 보保가 아니라 바로잡을 보輔입니다. 나 너머 나라와 지구까지 바로잡을 계책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9.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 - 생명의 자기 발현

보국안민에서 민은 사람을 말합니다. 민은 인과 달리 지배받는 사람 또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연과 만물은 서로가 자기본질을 발현하며 산다는 뜻에서 자연自然한 존재들입니다. 자연하다는 말은 어떤 조작이나 변형없이,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는 삶입니다. "자연한 가운데 화해 난다"는 동학의 말은 다윈의 말처럼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경쟁과 다툼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꿀벌이 수분작용을 도와 꽃이 핍니다. 자연의 생존체는 단지 생존의 필요로만 먹이 사슬을 구성합니다. 자연은 먹이사슬 전체로 보면 상호부조 협동과 환대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이화의 삶이며, 자연한 삶입니다. 함이 없다는 것은 이치를 좇아 이치에 더하는 조작의 함이 없음이요, 함이 있다는 것은 이치를 좇는 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한 이치가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 있고(시자侍者는 내유신령內有神靈) 그 만물은 서로 상호부조로 엮여져 있으며(외유기화外有氣化) 이 협동의 망에서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지불이各知不移)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10. 사람은 최고령자最高靈者

- 동학은 사람을 바로잡는 학

​생존이 아닌 탐욕과 쾌락의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고통받게 나아가 지구까지 아프게 하는 것은 만물 중에 오직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신령스럽다는 수운의 말은 사람만이 위대하거나 고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제일 신령스럽기에 제일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신령하되 사람만이 유독 만물을 괴롭힐 수 있는 존재라는 경계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 쓰면 사람과 지구를 살리나 잘못쓰면 사람과 지구를 죽이는 독입니다.

보국안민을 보민안민으로 바꿔 읽으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사람을 바로잡아서 모든 인류와 지구까지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인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사람만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바로잡으려 생각했는데 곧 좌절에 빠집니다. 핵, 기후위기, 전쟁, 폭력, 빈부격차, 온갖 불평등과 차별, 코로나 대유행...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크고 많은데 나는 너무나 작고 힘이 없습니다. 당장 내 눈 앞의 삶도 버거운데 핵이며, 기후위기, 사회불평등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거창하고 멉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든데 뭘 할 수 있겠어. 맞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라도 내 가족만이라도 잘 먹여 살려야지. 맞습니다. 그것이 모심, 모실 시侍입니다. 내 새끼들을 위해 이 한낮의 뙤약볕 속에서도 일을 합니다. 저녁에 가족과 삼겹살을 함께 먹을 생각을 하면 엔돌핀이 솟습니다. 성경신誠敬信! 내 가족에 정성을 다하며, 내 가족을 공경하며, 내 가족에 거짓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로빈슨크로소처럼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크로소는 선주민 이름을 유럽식으로 바꿔 부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수탈입니다.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내 가족에게는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사기, 권력 등 억압을 합니다. 익명의 수용소인 도시에서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이웃과 상호부조하고 서로 모시는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초까지만해도 농사는 두레라는 협동망 없이는 농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횃불은 세상을 태워서 바꾸고, 촛불은 영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영성은 우정과 환대로 모시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크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만큼의 크기로만 있습니다. 나, 가족, 집, 집강소만하게, 황새마을만하게, 원평만하게, 금구, 김제, 전라북도, 대한민국, 아시아, 유라시아, 지구, 우주...눈을 감고 잠시만 생각해봅니다. 어디까지 보입니까? 보이는 만큼만 사랑하시면 됩니다. 애써 대한민국까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 바꾸면 기분만 좋지 바뀌는 것은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허구헌날 대통령은 누가 누가 좋아 하는 분들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나를 가족을 마을을 대한민국을 지구를 담는 것도 결국은 나입니다. 내가 지구이고 내 마을이 지구입니다.





생태계니 핵이니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바로잡히면 지구도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동학하는 마음입니다.









11. 자치自治•자급自給•자연自然 - 동학의 생성론





기계의 타율성이야말로 인간 자율성과 자기생성을 억압합니다. 즉 트랙터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트렉터를 지배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렉터 주인은 철저하게 기계적 법칙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게 됩니다. 하늘의 주파수가 기계의 주파수로 동기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동귀일체 방향은 불행히도 천지인의 한살림 연결이 아니라 인공생명=인공지능로봇=AI입니다.





이렇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됨으로서 기계는 인간을 대리자로 하여 자기증식하게 되고 인간은 더더욱 기계에 종속된 타율적 존재가 됩니다. 기계는 이제 사물연결망 사물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적 연결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낙관과 비관이 엇갈립니다. 인류 오만 년의 지식을 단 몇시간에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구글 ,아마존, 알리바바(년간1400조 매출, 한국 2020년 GDP 실질 1,836조 8,811억 원 ) 같은 소수의 과두 지배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지구마을 전체로 영성있는 사람들의 연대망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 한 명은 5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활공동체입니다. 이 50조 개의 세포는 그 각각이 신경계, 소화계, 호흡계, 근골격계, 생식계, 면역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50조 개 인간의 주인인 셈입니다. 이 몸의 원리를 가족, 마을, 나라, 지구로 확장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살을 빼려고 합니다. 내 몸의 비만은 몸이라는 50조 개의 세포공동체가 만든 잉여의 축적물입니다. 비만이라는 잉여를 내 몸에서는 다이어트라며 돈을 써가면서까지 없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잉여는 그 잉여를 독차지하기 위해 소수지배의 폭력을 낳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생존의 기본 바탕도 없어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폭력입니다.





자치•자급•자연은 소농 삶이나 윌든의 오두막 같은 낭만적 말이 아닙니다. 자치는 폭력과 수탈이 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자급은 자치할 수 있는 삶의 바탕이 물질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자연은 지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지구와 사람의 삶이 서로 어우러지며, 스스로 그러한 생명의 발현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12. 하늘의 마음 임자의 마음





하늘은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이라며 자기 마음을 수운에게 줍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마음=사람마음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늘이 수운에게 주었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도대체 하늘은 무엇 때문에 자기 마음을 사람과 만물에 주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개벽 이래 5만 년 동안 뼈빠지게 하늘이 일하였으나 이룬 게 없다고, 노이무공勞而無功하였다고 하늘은 탄식합니다. 하늘이 탄식하는 그 마음은 곧 수운의 마음일 터인데 그 마음은 온갖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과 만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일까 합니다.





이제 하늘은 수운에게 말합니다. 수운 너와 더불어 이제 다시 이루려 하니(다시개벽) 기분 좋다고 합니다. 이루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 버려진 사람들, 이루지 못한 만물에 대한 안타까움의 절절한 무궁하고도 무극한 하늘의 마음 앞에서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경천敬天입니다.





오심즉여심은 이제 나(하늘)와 더불어 이루자 하는 주체실현, 자기생성, 자기창발의 선언입니다.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것은 생명의 자기발현 자기통치가 아닙니다. 오심즉여심은 뭔가 잘못 가고 있는 문명에 대한 통렬한 전복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동학의 놀라운 실천성, 현실성을 봅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수운은 아주 뚜렷하게 아주 간단히 말합니다. 동학의 주문에 있는 "조화정"을 이루라고 합니다. 사람과 하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의 하늘로의 조화(생성)를 이루라고 합니다. 여기서 조화정은 造化定이지, 잘 어울린다는 조화調和가 아닙니다. 동학의 선배님들은 하늘모심을, 하늘생성을 한 이를 '신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조화정을 무위이화라고 수운은 말합니다. 한자를 글자 그대로 풀면 함이 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절로, 그냥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함이 없으나 혼원지기(우주생성의 기운)가 하늘의 함으로서 내게 있으며, 성경신誠敬信의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함을 다하면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생물학에서 단백질이 생명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단백질과 생명현상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새로 생성된 것은 이전의 어떤 요소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생성물은 어떤 요소들의 단순합이 아닙니다.





단백질에서 생명으로의 질적인 전환, 생성의 차원 이동은 하늘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지극한 모심의 함으로 하늘이 감응하여 하늘의 함이 있어 새롭게 이루니 하늘이 하는 일은 내게는 무위이화입니다. 수운의 무위이화의 주체는 생명과 기운으로 가득찬 영성적 실재로서 노자의 자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위이화는 결국 주체의 자기실현입니다. 하늘인 나로서의 자기실현에 헛되이 함(돈, 명예, 권력, 지배욕, 소유욕, 폭력 같은 하늘마음 아닌 것을)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의 생성체의 본질로서 스스로 그러함을 하라는 말입니다. 동학은 사람과 만물은 스스를 구원함으로서 일체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늘님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함이 없이 되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지극한 농부들은 나락이 익을려고 발싸심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락도 지극한 함이 있습니다. ( 이 지극한 농부들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들입니다. 요새 능력주의 논쟁은 참 웃기는 논쟁입니다.) 무위이화란 결국 하늘이 함이요, 나 또한 성경신誠敬信으로 지극한 함을 하면 이룬다는 주체의 자기생성입니다.







13. 동학 자기생성론 - 오심즉여심





동학은 "자기생성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성을 우리말로 하면 '새끼를 낳다'의 '나다'란 말입니다. 이 '나다'는 나가 나지 뉘여 할 때의 '나다' 즉 '생성물'입니다.





'낳다', '나다'를 줄이면 '남'인디 이 말이 참 그렇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할 때의 '남'이잖아요. 이때의 '남'도 결국에는 '낳은 것'입니다.





동학은 '남사상', '나다사상', '낳다사상'입니다. '남', '나다', '낳다' 한자를 써서 '자기생성론'이라고 이름해 봅니다.





그럼 동학이 어찌서 생성론이냐? 수운이 그랬습니다. '오심즉여심"이라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하늘 마음이 네 마음이다. 그런데 하늘마음이 어떻게 내 마음이 되는가?





그것이 '무위이화'로 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기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심즉여심이란 말입니다. 그 마음과 몸을 기루는 것이 곧 자기생성입니다. 나를 기를려면 끝도 없이 하늘과 내가 기화를 해야합니다. 무궁무극한 하늘 마음과 내가 끝도 없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동귀일체' 란 말이니 그것이 곧 오심즉여심이란 것입니다. 오심즉여심은 한 번 그런게 아니고 무궁하고 무극한 일입니다. 오심즉여심은 늘 '다시개벽'의 과정이란 말이지라.





원광대 조성환 선생은 이것을 움직말(동사) '하늘하다'라고 찾아냈지요.





"나에게는 이기적인 나와 공공적인 내가 있으니, 이기적인 나를 끊은 연후에 내 마음을 천하고 내 기운을 천한다.

我有私我公有私我니 絶其私我然後에 天我心天我氣야 守正之積이 始著니라"

<천도교회월보 제2호> 1910, 09, 15





조성환은 위 문장을 발굴하고 천아심천아기天我心天我氣에서 천을 "하늘한다"는 움직말로 하자고 했습니다.

하늘한다는 것은 즉 동학한다는 것은 곧 하늘을 낳고 기루(양천)는 것, 늘 다시개벽의 오심즉여심입니다.





마음이 사람에게만 있겠습니까? 것들(물건)에도 있습니다. 돌에도 물에도 나무에도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에게만 오심즉여심하겠습니까?





"모든 것들에 하늘이 있고 (물물천物物天) 모든 일마다 하늘이 있다(사사천事事天)"는 해월 - 이천식천 편의 말씀은 만물생성과 기룸(변화)의 말씀입니다.





수운이 논학문에서 말하기를 "일마다 하늘이 있으며, 일마다 하늘이 이뤄준다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 無事不命)"는 말은 돌덩이에도 지구에도 하늘 마음이 있다는 오심즉여심인 것이지요.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며(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나는 너를 낳고 기루고 너는 나를 낳고 기른다는 말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 한 번이 아니고 자라는 것이 곧 '낳음-생성"의 연속 과정 늘 다시개벽입니다. 해월이 "나는 나로서 내 마음을 고마워해야 하늘이 기뻐한다. (아심아경 천역열락 我心我敬 天亦悅樂 -해월 수심정기 편)" 이야말로 생성의 기쁨입니다.





동학인들은 '믿는다'하지 않고, '동학한다'로 말합니다. 이는 '사인여천'이나 '인내천'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하늘이고 하늘이 나이기에 나와 동떨어진 절대자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늘과 나의 역동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학한다'는 '하늘한다'와 같은 말입니다. '하늘한다'는 곧 날마다 새로운 하늘을 여는 다시개벽이자 나아가 자기 개벽성이 발현하는 즉 동학의 표현으로 말하면 '외유기화'이고 만인만물의 이천식천으로서 날마다 우주를 '다시개벽' - 생성하는 일입니다.









14. 나는 국민이 아니고 나의 임자(주체)





수운의 하늘은 나를 따라댕겨라 안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을 부려먹지(지배) 않을 테니 너희들도 당하고 살지 말아라 이럽니다. 사람도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도, 직장에 가도, 심지어는 가족들끼리도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갑질이잖아요. 수운의 하늘은 갑질이 없습니다. 그 하늘은 참 순하고, 정 많고,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다고 수운의 하늘은 사람과 만물을 가만두지는 않습니다. 너희들 안으로 나를 모셔라 그래요.(내유신령) 그런데 사실 모실 것도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위이화의 기화로서 이미 내 안에 깃들어있습니다.





동학의 전부라 할 모실 시侍는 내 안에 이미 깃든 하늘을 나의 '함'으로서 자각하고 자기생성하라는 임자(주체)의 말입니다.





수운의 하늘은 개벽하고 오만년 동안 힘써 일했으나 공이 없다고(노이무공勞而無功) 폭폭하다고 투덜댑니다. 아니 아주 겸손하다고 해야 맞겄네요. 그러면서 너를(수운) 만나 성공하니 너도 좋고 나도 좋다고 합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용담가) 참 순박합니다.





노이무공은 사람과 만물은 신의 지배물도, 신의 창조물도 아니요, 신과 평등한 것도 아니요, 도리어 사람과 만물을 하늘보다도 먼저 내세우는 말입니다. 사람과 만물은 신의 앞잡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임자(주체)와 자기생성의 기화지신(氣化之神)입니다. 자기생성의 기화지신이 곧 내유신령이란 것입니다.





노이무공은 확 뒤집는 전복의 선언입니다. 임자(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기생성, 자기통치하라고 신과 만물의 관계를 아주 쎄게 전복합니다. 수운의 하늘은 나타나면서부터 만물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개벽"해냅니다. 그러고는 수운의 하늘은 당신을 몽땅 사람에게 줍니다. 그 선언은 이렇습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 吾心卽汝心 동경대전 논학문 6절)





수운의 하늘은 자신의 일을 함이 없는 무위이화로 하기에 사람과 만물이 임자(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위이화의 일은 형상은 없으나 자취는 있습니다. (천도자 여무형이유이유적 天道者 如無形而有迹, 동경대전 논학문 1절)





그러니 만물은 자기의 임자(주체가)가 되고 자기의 생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만물이 자기생성자, 자기통치자, 자기임자(주체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람은 국가라는 신을 모시는 국가의 머슴인 국민이 아닙니다. 사람은 민족으로서 민족에 갇힌 경계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지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더 더구나 인종의 흑인,백인, 황인도 아닙니다. 노동에 지배 당하는 노동자도 아니요, 무산자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며. 교회의 신자도 아닙니다.





여기서 요새 유행하는 '공동체' 말씀 좀 드립니다.





서로 무위이화의 조화로서 이천식천 외유기화하는 협동과 상호부조망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공동체의 국민이데올로기, 민족공동체, 노동공동체, 학교공동체, 교회공동체, 직접민주공동체, 대안공동체는 모두 어떤 생각과 가치를 내려 꽂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어떤 공동체에 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처럼 내가 원하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인다는 머슴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 나는 개인주의할 때의 개인과 같은 말은 아닙니다. 우리말 '나'는 태어나다 할 때의 '나다'. 새끼를 낳다의 '나다'에서 온 말입니다. '나'는 곧 나를 낳는 임자이지 국가의 자배를 받는 국민은 아닙니다.





나는 곧 내유신령해서 만물이 화해 낳는 (만물화생 萬物化生,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편) 생성의 기화지신을 가진 생성자입니다.







- 끝 -



사진 박홍규 작 <새날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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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영

건축기술사, 기후난민, 노동난민, 신동학, 한옥, 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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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호연지기 뜻 : 네이버 블로그

호연지기 뜻 : 네이버 블로그나의 일상


호연지기 뜻

디모데명

2019. 8. 19.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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浩然之氣(호연지기)

浩 넓을 호, 然 그럴 연, 之 갈 지, 氣 기운 기



옛날 중국 제나라 시절 맹자와 제자인 공순추와 나눈 대화입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대신이 되어 도를 널리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최고 실력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도 자극을 받아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내 나이 40이 지나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네"



"선생님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맹자는

"한 마디로 용(勇, 용기)이라네"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어떠한 것이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대용(大勇, 큰 용기)"라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부동심(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과 고자의 부동심과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고자는 중국 제나라 시대 사람으로 맹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맹자와의 논쟁에서 "사람의 본성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람의 성품이 원래부터 선한 것이라고 보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고자는 납득이 가지 않은 말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소극적이지. 나는 알고 있다(知言)"

"거기에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있다."



"호연지기요? 선생님, 호연지기가 무엇입니까?"



"말로써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기운이 크고 강해서 바르게만 기르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는 것이라네. 또 그 기는 의(義)와 도(道)를 따라 길러지며 이것이 없으면 시들고 말지. 이것은 자신 속에 올바른 것을 쌓아 올림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네"



따라서

호연지기의 뜻은 하늘과 땅 사이에 왕성하게 뻗친 기운이라는 뜻으로, 의에 근거를 두고 흔들리지 않은 바르고 큰마음,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 잡다한 일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
호연지기(浩然之氣)
주요 정보
대표표제 호연지기
한글표제 호연지기
한자표제 浩然之氣
관련어 맹자(孟子), 부동심(不動心)
분야 문화/인문학/유학
유형 개념용어
집필자 이형성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호연지기(浩然之氣)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세종실록』 18년 5월 12일, 『명종실록』 1년 8월 4일, 『명종실록』 3년 3월 22일, 『숙종실록』 7년 3월 4일, 『정조실록』 5년 3월 18일, 『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넓고 큰 기상을 지칭하는 맹자의 가르침.

목차
1 개설
2 내용 및 특징
3 변천
4 참고문헌
개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맹자(孟子)가 한 말로, 단순한 육체적 기운이 아니고 의(義)와 도(道)에 합치되고, 특히 ‘의’가 쌓여서 생기는 것이다. 유학자라면 『맹자』를 애독하면서 호연지기를 자주 언급하는데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 역시 수양을 통해 도의와 조화된 천지의 올바른 호연지기를 지향하였다.

내용 및 특징
호연지기는 맹자가 제자 공손추(公孫丑)에게 부동심(不動心)을 언급하면서 나온 말이다. 공손추가 호연지기를 묻자, 맹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서 그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차 있을 만큼 넓고 커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기상인데 이는 의를 쌓아서 생겨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호연(浩然)은 성대히 유행하는 모양이고 기는 몸에 충만한 것이라 한다. 즉 몸에 충만한 기가 성대하게 활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변천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몸을 수양하여 호연지기를 길러 배양하려 하였다. 조선초기 김일자(金日孜) 등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 후학들에게 무궁한 배움의 길을 열어준 권근(權近)이 호연지기의 기상으로 이단을 배척한 면을 들어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세종실록』 18년 5월 12일). 명종대에 호연지기는 사기(士氣)로 여겨졌다. 명종은 그러한 사기를 양성하면 진작되고 억제하여 꺾이게 하는 것은 객기(客氣)이므로, 항상 ‘직(直)’으로 호연지기를 배양해야 함을 말하였다(『명종실록』 1년 8월 4일). 그저 고담준론(高談峻論)만을 숭상하면 객기에 불과하므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특히 호연지기는 마음공부를 통해야 그 묘리(妙理)를 알 수 있기에 스스로 상도(常道)를 돌이켜 부끄러운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명종실록』 3년 3월 22일). 홍문관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호연지기와 심성정(心性情)·리기(理氣)를 나누어 도표를 만들고 선유들의 설을 유별로 모아놓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송시열(宋時烈)은 천지 사이에 가득한 호연지기에 대한 공부를 임금의 성학(聖學)으로 삼았고(『숙종실록』 7년 3월 4일), 정조대에는 의(義)가 축적된 선유들의 말을 호연지기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맹자가 "천만 명이 앞에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고 한 말에서 호연지기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5년 3월 18일). 특히 정조는 학문하는 방법을 말하며, 직내방외(直內方外)의 공정을 터득해야 왕도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직내는 경(敬)으로 뜻을 견지하는 것 같은 것이고, 방외는 의(義)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

참고문헌
『맹자(孟子)』
분류: 문화인문학유학왕실왕실문화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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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호연지기 (浩然之氣)
입력2019.07.15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마음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호연지기 (浩然之氣)
▶ 한자풀이

浩: 넓을 호
然: 그럴 연/불탈 연
之: 갈 지
氣: 기운 기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던 어느 날, 제자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 대신이 되어 도(道)를 행하시면 제를 천하의 패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 선생님도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다.” 공손추가 다시 물었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으신지요.” “그건 용(勇)이니라.”

맹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음속에 부끄러운 게 없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게 대용(大勇)이다.” 공손추가 재차 물었다.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의 부동심은 무엇이 다른지요.” 맹자가 답했다. “고자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태도다. 나는 말을 알고 있고(知言), 호연지기(浩然之氣)도 기르고 있다. 호연지기는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다. 기(氣)는 광대하고 올바르고 솔직한 것으로, 이것을 기르면 우주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 지언(知言)은 편협하고 음탕한 말, 간사하고 꾸미는 말을 구별하는 밝음(明)이 있다는 의미다.

고자(告子)는 맹자의 논적(論敵)으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한 사상가다. 그는 “출렁대는 물은 방향이 없으며 동쪽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를 뿐”이라며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했다. 이에 맹자는 “물은 아래로 흐른다. 아래를 막으면 물이 거슬러 오르고, 손으로 때리면 물이 허공으로 솟구치지만 그건 인간이 본성에 인위를 가한 때문”이라고 되받아쳤다.

《맹자》 공손추편에 나오는 호연지기는 원래 천지에 가득찬 큰 원기, 공명정대한 도덕적 용기, 속세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뜻한다. 현대적 의미인 ‘당당한 기상’보다 뜻이 넓고 깊다. 그릇이 커야 큰 것을 담고, 뜻이 곧아야 바르게 서고, 시야가 넓어야 두루 본다. 기(氣)·덕(德)·의(義)·지(智)는 어느 것 하나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그건 모두 마음을 모아 키워야 하는 것들이다.

#고사성어 #호연지기 #생글생글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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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

알라딘: 70일간의 마음공부 : 천년 동안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이야기

알라딘: [전자책] 70일간의 마음공부 : 천년 동안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이야기

송석구,장경 (지은이) 2017




70일간의 마음공부 : 천년 동안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이야기

종이책 페이지수 280쪽

알라딘: 인생의 공식 64 - [주역>이란 책의 64괘를 새로 풀어 씀, 장경 (지은이)

알라딘: [전자책] 인생의 공식 64:

 인생의 공식 64 - 흐름에 맞게 나를 지켜내는  epub 
장경 (지은이)추수밭(청림출판)2019-04-06 

종이책 페이지수 436쪽,

eBook > 인문학 > 동양철학 > 동양철학 일반
eBook > 자기계발 > 성공 > 성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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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정보들과 복잡한 관계망으로 얽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주 혼란을 느끼고 불안해진다. ‘알고 맞으면 덜 아프다’는 속담처럼 인간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상하기 마련이고, 상상은 곧 불안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근래 유행하고 있는 레트로 감성 또한 이러한 불안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때 그 시절’이 희망찰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 문 열어놓고 살았던 따뜻한 시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그러한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면을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안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 책은 이처럼 불안하기에 다가오는 내일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우리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64괘를 중심으로 《주역》을 새로 풀어 씀으로써 삶이라는 안개 속을 헤매는 우리에게 지침으로 참고할 수 있는 선명한 ‘인생 예보’를 알려준다. 나아가 삶의 전 과정을 《주역》의 64괘에 맞춘 64가지 상황으로 정리해 도식화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고비마다 그 지혜를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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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글 알면 두렵지 않다

1부 내 안의 스승, 주역을 만나다
《주역》 을 배운 자는 주역점을 치지 않는다
1장 갈림길에서 만난 안내자 | 2장 64개의 지형, 삶의 지도를 걸어놓다 | 3장 선택과 직관, 당장 떠오른 생각이 정답이다 | 4장 직관의 세 가지 조건, 비우고 정리하고 모을 것 | 5장 직관과 주역, 기도하듯이 간절하고 솔직해질 것 | 6장 역의 세 가지 이치, 변하고 합하고 쉬운 것 | 7장 64괘로 가는 길, 1, 2, 4, 8, 64 | 8장 64괘 기초 원리 강화, 정, 비, 응 | 9장 소인의 역점, 군자의 역점

2부 첫 번째 호흡 전쟁과 평화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전쟁을 치르고 태평성대를 이루다
1장 정상에 올랐으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삼가라 | 2장 땅으로 몸을 숙여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 3장 얼음을 만났다면 깨뜨리려 하지 말고 서서히 녹여라 | 4장 어두울 때 무작정 나서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 5장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어른이 된다 | 6장 다퉈야 하는 상황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 용기다 | 7장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전쟁 전에 결정되어 있다 | 8장 사냥개를 삶아 먹어야 사냥이 진짜 끝나는 것이다 | 9장 지름길만 찾게 되면 오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 10장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호랑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 11장 평화란 넘치면 덜고 모자라면 보태는 것이다 | 12장 침몰하는 배에서는 당장 짐부터 버려야 한다 | 13장 뜻을 함께하는 사이에서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 | 14장 밝은 달빛이 천 개의 강에 두루 비치다 | 15장 마무리를 지을 때의 자세는 낮고 또 낮아야 한다

3부 두 번째 호흡 축적과 양육
세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다음 성인의 도를 세상에 실현하다
16장 미리 가늠할 수 있다면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17장 이익을 좇는 데에도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 | 18장 썩은 것을 방치하면 곧 나 자신까지 썩게 된다 | 19장 모든 조직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있어야 한다 | 20장 풍경을 눈에 담고 싶다면 천천히 걸어야 한다 | 21장 어른이 단단한 까닭은 무수한 고난을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 22장 자신을 속이는 삶을 살면 인생 전체가 거짓말이 된다 | 23장 내일을 당겨 오늘을 버틴다면 결국 내일을 맞지 못하게 된다 | 24장 길을 잘못 들었으면 헤매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라 | 25장 빈손으로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더라도 무엇이 아쉽겠는가? | 26장 가지가 높고 무성하면 그만큼 뿌리도 깊고 단단하다 | 27장 음식을 씹으려면 윗니와 아랫니가 함께 있어야 한다 | 28장 과일이 너무 익으면 썩게 된다 | 29장 늪에 빠졌을 때 발버둥을 치면 더욱 깊은 곳으로 빠진다 | 30장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으니 사방이 그림자 없이 환하다

4부 세 번째 호흡 사랑과 축제
부부가 가문을 일으켜 왕국을 벌이고 축제를 벌이다
31장 상대방도 나처럼 공감할 수 있기에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통한다 | 32장 살아가며 겪는 세월 가운데 똑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 33장 때로는 스스로를 땅에 묻은 채 세월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 34장 자신 있게 휘두른 칼은 때로 자신까지 놀라게 한다 | 35장 황무지에 깃발을 꽂으니 곧 나의 땅이 된다 | 36장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내일 다시 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 37장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야 밖에서도 실수가 없다 | 38장 물들이려 할 때에는 먼저 물들여져야 한다 | 39장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부축해줄 어른을 찾아라 | 40장 배는 항구에 묶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41장 때로는 적극적으로 손해를 봐야 할 때가 있다 | 42장 노련한 장사꾼은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 43장 가장 나쁜 선택은 선택 자체를 미루는 것이다 | 44장 무심코 던진 돌 하나에 호수 전체가 일렁인다 | 45장 내일을 품고자 하는 자는 오늘의 실수를 끌어안는다

5부 네 번째 호흡 여행과 다시 여행
길을 떠난 왕자, 세상의 끝까지 여행하다
46장 높이 날아오를수록 추락하는 충격이 크다 | 47장 내가 넘어진다면 기꺼이 내 시체를 밟고 넘어가라 | 48장 우물이 깊을수록 물은 달콤해진다 | 49장 밭을 엎고 불태워야 보리가 자랄 흙이 만들어진다 | 50장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에게 기대야 한다 | 51장 엉덩이가 무거운 만큼 일어서면 절대 뒷걸음질하지 않는다 | 52장 겨울잠을 자야 봄을 기다릴 수 있다 | 53장 꾸준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위도 뚫는다 | 54장 현명한 소는 언덕을 가려가며 몸을 비빈다 | 55장 넘치는 곡식을 거두며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라 | 56장 먼 길을 나서니 신발끈을 단단히 고쳐 매라 | 57장 쉼 없이 부는 바람이 되려다 바람에 쉼 없이 휘날리지는 말라 | 58장 크게 웃으려면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줘라 |59장 오늘 곤궁한 곳을 떠났기에 내일 갈 곳을 걱정할 수 있는 것이다 | 60장 끊긴 다리를 새로 놓고 건널지, 그대로 머무를지를 선택하라 | 61장 사랑은 쪼개진 거울도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다 | 62장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멀어도 거꾸로 걸어서는 안 된다 | 63장 결함을 인정해야 완벽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 64장 최고의 안정은 떠나고 떠나는 그 자체에 있다

나가는 글 먼 길을 떠나는 이를 위해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역경》을 처음 접하고선 한동안 아침마다 역점을 치면서 등교했다.
“자로야, 물속에 들어가 이무기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어부의 용기다. 운명이 궁하면 통한다는 것을 알기에 큰 고난을 맞아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성인의 용기다.” 공자의 말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해답을 미리 갖고 있다면, 혹은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는 직관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지금 처한 상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알고 맞는 매가 덜 아프다는 말이 있다. 알면 두렵지 않다. _〈이치를 알고 있다면 변화가 두렵지 않다〉 중에서  접기
난세에는 말이나 사냥개 같은 전투에 뛰어난 짐승의 덕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 공동체에서는 빠르고 맹렬하게 공을 세우는 능력보다 여럿이 어울려 함께 갈 수 있는 덕목이 더 중하게 요구된다. 사업가가 정치를 하거나 사회생활 혹은 가정에서 종종 난관에 봉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업가는 효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소수를 버리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동체가 효율만 중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큰 사업은 정치와 비슷하다. _〈제8괘 수지비, 사냥개를 삶아 먹어야 사냥이 진짜 끝나는 것이다〉 중에서  접기
한 집안이든 기업이든 조직에는 제대로 된 어른이 있어야 한다. 요즘 시절을 비판적으로 볼 때 자주 쓰는 표현 중의 하나가 ‘어른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 그 후유증은 이제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남아 있다. 옛 지혜는 끊겼고 당연한 말을 하면 꼰대로 불린다. 늙은이는 젊은이를 이기적이고 패기가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젊은이는 늙은이를 생각이 굳고 막무가내라는 식으로 매도한다. 서로를 괴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어른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른을 스스로 구축해야 하는, 독특한 책임을 가진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_〈제19괘 지택림, 모든 조직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있어야 한다〉 중에서  접기
중산간이 단순히 옴짝달싹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중수감은 피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중수감은 4대 난괘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맞아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삶의 미학과 원칙을 간직하고자 노력한다면 당장 위기를 벗어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긴 호흡으로 보면 훗날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진로는 대개 어려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_〈제29괘 중수간, 늪에 빠졌을 때 발버둥을 치면 더욱 깊은 곳으로 빠진다〉 중에서  접기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궁합이 딱 들어맞는 좋은 인연이 따로 있기보다는 사람을 대할 때 내가 먼저 상대방을 좋은 인연으로 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삼류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좋은 사람도 내가 인상을 쓰고 험악하게 대하면 나에게만큼은 험악한 사람이 되고, 거칠고 까다로운 사람도 내가 인간적으로 다가가면 나에게만큼은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_〈제44괘 천풍구, 무심코 던진 돌 하나에 호수 전체가 일렁인다〉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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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기자명 나세윤 기자
입력 2016.01.01
호수 1783

온전한 '조선''한국'만드는 자체가 정신개벽
▲ 백낙청 교수는 남북화해사업에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안타까움을 표하며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병신년(丙申年) 원숭이해를 맞아 특별인터뷰를 준비했다.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고 오랫동안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을 이끌었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 〈정산종사법어〉 영역작업을 비롯 최근 창비의 표절시비 등 현안에 대해 질의했다.

- 새해 〈원불교신문〉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말씀 해주시죠.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원기101년에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외국의 선교사나 선교자금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자력으로 이만큼 성장한 것은 참으로 자랑할 일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나라가 두루 어지럽고 교단도 매사가 잘되는 것만은 아닐 터인데 올해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 〈창작과비평〉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이었고,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어려울 때 중심 추(錘)역할을 해왔습니다. 군부에 의해 폐간을 당하는 큰 시련도 있었는데요. 쉬지 않고 한국사회의 담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수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고 믿어준 덕분이고, 더 크게 본다면 한반도의 어변성룡(魚變成龍)하는 기운을 탔다고 말해야겠지요. 새해가 창간 50주년인데, 저는 편집인에서 퇴임하는 대신 제 공부에 더 열중해서 창비와 한국사회의 변화에 한층 슬기롭게 공헌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 그런데 지난해 한동안은 백 교수님과 창비가 이른바 표절시비와 관련해서 많은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지요.

예. 표절시비가 걸린 작가 본인은 물론 저와 창비도 그를 두둔한다 해서 돈에 눈이 어두운 문학권력으로 비난을 받았지요. 지금은 거의 잠잠해졌는데 저는 두가지 이유로 이번 사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첫째 논란 자체가 창비의 어리석은 초기대응으로 확대되었다는 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다른 여러 부족함도 함께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기에 고마운 일이고, 둘째로는 창비가 온갖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작가에 대한 과도하고 일방적인 단죄 여론에 끝까지 합류하지 않고 버텨냄으로써 향후 지속적인 발전에 필요한 도덕성을 확보했다고 믿어서 감사하는 거지요.

- 백 교수님은 이론가이자 문학평론가, 영문학자로서 살아오셨고, 한국 문학에 분단체제론이라는 사회과학적 이론을 세우셨습니다. 분단체제의 여정은 언제 끝이 날까요.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날씨예보 하듯이 언제 끝날 거라고 예측할 성질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근년에 남북관계가 악화되니까 흔들리던 분단체제가 다시 고착되었다고 판단하는 분들이 계신데 지금은 말기국면의 혼란상이요 더욱 위험해진 국면이지 분단체제가 안정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분단체제론은 사회분석의 도구이긴 하지만 기존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새로운 인문학이기도 합니다.

1945년의 광복과 동시에 분단된 우리 민족은 6·25전쟁의 참극을 겪고 무력통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전쟁이 아닐 뿐 온전한 평화도 될 수 없는 정전협정 아래에서 분단이 일종의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이런 체제를 제대로 알아서 더 나은 한반도체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인식능력이 필요하고 개개인의 마음공부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전환이 요청됨을 강조하는 것이 분단체제론입니다.

- 민중문학론에서 근대성 담론으로, 다시 분단체제론으로 나간 지적 모험이 경이롭습니다. 연세대학교 김호기 교수는 교수님을 "영문학자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른 '르네상스적 사상가'였다"고 말했는데요.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말씀하신 근대성 담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가설일 텐데 분단체제론보다 늦게 제출됐고 근년에 와서야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 서양의 담론계에서도 조금씩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김호기 교수의 평가는 저로서는 면구스러워요. 참다운 인문학은 마땅히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것이므로 그걸 추구했다고 르네상스적 운운할 건 아니고요. 게다가 우리나라의 전통적 선비들만 해도 학문과 정치적·사회적 실천을 병행하면서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는데 그 기준으로 봐도 저는 무척 초라하지요.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께서 물질적 가난말고도 여러가지 가난이 있고 그런 걸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셨으니 그 가르침을 따라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 〈원불교신문〉도 그렇지만, 〈창작과비평〉도 젊은 독자층 확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짧고 격정적인 스낵 컬처가 유행입니다. 이런 세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화(문학 포함)적 전망을 하신다면.

지난날의 너무 엄숙한 문학이나 논설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일부 젊은 세대의 풍조 역시 무조건 지지해줄 수는 없습니다. 선천시대가 후천시대로 바뀌는 세상의 혼란에 우리 모두가 휩싸여 있거든요. 어떤 묘책으로 단방에 해결될 사태는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각기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적공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 〈정전〉, 〈대종경〉 영역작업에 참여하셨습니다. 창교 100년을 맞은 원불교가 어떤 혁신과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전>, <대종경>에 이어 올해는 <정산종사법어> 번역을 마무리 짓게 돼서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전과 교서는 읽을수록 한국사회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불교 등 아시아의 전통에 생소한 나라와 대중들에게 가장 맞춤한 현대의 교법이 아닌가 해요. 원불교의 재가출가 여러분이 이 교법을 연마하고 실행만 한다면 무엇을 혁신하고 변화시킬지 저절로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교단의 규모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만, 일원대도와 삼동윤리를 몸에 익힌 교도가 일정 수만 되면 원불교보다 훨씬 큰 종교나 세속의 운동들에 대해서도 능히 정신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교단 통일운동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전해주시죠.

요즘 남북화해사업에 대한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시국과 정부당국이 그렇게 만든 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아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남북의 화해와 협력, 나아가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종사께서 '조선이 다시 조선이 된다(朝鮮更朝鮮)'고 하셨을 때의 '조선'은 반도의 절반인 '남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기억해야 하고 온전한 '조선', 온전한 '한국'을 만들어가는 공부와 사업 자체가 정신개벽의 일환이며 '물고기가 용이 되는' 과정임을 더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합니다.


☞ 백낙청 교수는

ㆍ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
ㆍ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ㆍ〈창작과비평〉 편집인 겸 발행인
ㆍ시민방송RTV 명예이사장
ㆍ제2회 심산상 / 제1회 대산문학상
ㆍ제14회 요산문학상
ㆍ제5회 만해상 실천상
ㆍ제11회 늦봄통일상
ㆍ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ㆍ제3회 김대중학술상
ㆍ저술 〈흔들리는 분단체제〉 외 다수

나세윤 기자 nsy@wonnews.co.kr

2021/05/02

대념처경 大念處經 마음챙김의 확립 (Mahaasatipat*t*haana Sutta, D22)

아침숲속 * 마음공부

[스크랩] 대념처경 (전문) -각묵스님번역 | 불해탐주(佛海探珠)/불해탐주


아침숲속 2016. 10. 5. 

http://blog.daum.net/sanbo1950/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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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념처경 大念處經

마음챙김의 확립(Mahaasatipat*t*haana Sutta, D22)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빠알리어에서 한글로 직접 번역.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초기 불전 연구원 지도법사)




경의 차례


I. 서언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II-5.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II-6.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III. 느낌의 관찰[受隨觀]

IV. 마음의 관찰[心隨觀]

V. 법의 관찰[法隨觀]
V-1. 다섯 가지 장애[五蓋]
V-2.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V-3.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V-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V-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V-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V-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V-5-3.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V-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VI.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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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언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꾸루 지방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족들의 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1-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II. 몸의 관찰[身隨觀]


II-1.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외진 처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II-2. 네 가지 자세[四威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있으면서 ‘앉아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3. 분명하게 알아차림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kāri).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4. 몸의 32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5-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이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빨·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대념처경 주석 2-4. 몸의 32부위

5-2. 비구들이여, 이는 마치 양쪽에 아가리가 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밭벼·논벼·콩·완두·기장·현미 등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떤 눈 밝은 사람 이 그 자루를 풀고 일일이 헤쳐 보면서 ‘이것은 밭벼, 이것은 논벼,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라 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5.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6.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地]의 요소, 물[水]의 요소, 불[火]의 요소, 바람[風]의 요소가 있다’고.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6.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7. “다시 비구들이여, ①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 된 시체가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upasamharati).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8. “다시 비구들이여, ②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가 마구 쪼아 먹고, 솔개가 마구 쪼아 먹고, 독수리가 마구 쪼아 먹고, 개가 마구 뜯어먹고, 자칼이 마구 뜯어먹고, 수없이 많은 갖가지 벌레들이 덤벼들어 파먹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9. 다시 비구들이여, ③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가 묻은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④ 해골이 되어 살은 없이 피만 엉긴 채 힘줄로 얽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⑤ 해골이 되어 살과 피는 없고 힘줄만 남아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⑥ 해골이 되어 힘줄도 사라지고 뼈들이 흩어져서 여기에는 손뼈, 저기에는 발뼈, 또 저기에는 정강이뼈, 저기에는 넓적다리뼈, 저기에는 엉덩이뼈, 저기에는 등뼈, 저기에는 갈빗대, 저기에는 가슴뼈, 저기에는 팔뼈, 저기에는 어깨뼈, 저기에는 목뼈, 저기에는 턱뼈, 저기에는 치골, 저기에는 두개골 등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10-1. “다시 비구들이여, ⑦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해골이 되어 뼈가 조개껍질 색깔같이 하얗게 백골이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⑧ 해골이 되어 풍상을 겪어 단지 뼈 무더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⑨ 해골이 되었다가 다시 삭아서 티끌로 변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도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10-2.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III. 느낌의 관찰[受隨觀]

11-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꿰뚫어 안다.”

11-2. “이와 같이 안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느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IV. 마음의 관찰[心隨觀]

12-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탐욕을 여읜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② 성냄이 있는 … 성냄을 여읜 … ③ 미혹이 있는 … 미혹을 여읜 … ④ 위축된 … 산란한 … ⑤ 고귀한 … 고귀하지 않은 … ⑥ [아직도] 위가 남아있는 … [더 이상] 위가 없는[無上心] … ⑦ 삼매에 든 … 삼매에 들지 않은 … ⑧ 해탈한 …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라 꿰뚫어 안다.”

12-2.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V. 법의 관찰[法隨觀]


V-1. 다섯 가지 장애[五蓋]

13-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감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감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 욕망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감각 욕망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감각 욕망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2. 자기에게 악의가 있을 때 ‘내게 악의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악의가 없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악의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 한 악의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3. 자기에게 해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해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게 해태와 혼침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해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해태와 혼침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4. 자기에게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게 들뜸 과 후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들뜸과 후회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5. 자기에게 회의적 의심이 있을 때 ‘내게 의심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의심이 없을 때 ‘내게 의심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의심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의심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13-6.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2.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14.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상카라[行]들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관찰하며 머문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3.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

15.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안다. 형상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귀를 꿰뚫어 안다. 소리를 꿰뚫어 안다. … 코를 꿰뚫어 안다. 냄새를 꿰뚫어 안다. … 혀를 꿰뚫어 안다. 맛을 꿰뚫어 안다. … 몸을 꿰뚫어 안다. 감촉을 꿰뚫어 안다. … 마노를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법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16-1.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있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16-2. 자기에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가 있을 때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가 있을 때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가 있을 때 …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가 있을 때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가 있을 때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있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16-3.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17.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V-5-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18-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18-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태어남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태어남, 출생, 도래함, 생김, 탄생, 오온의 나타남, 감각장소[處]를 획득함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어남이라 한다.”

18-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 가운데서 이런 저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함, 부서진 [이빨], 희어진 [머리털], 주름진 피부, 수명의 감소, 감각기능[根]의 허약함 ― 이를 일러 늙음이라 한다.”

18-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죽음인가? 이런 저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이런 저런 중생들의 종말, 제거됨, 부서짐, 사라짐, 사망, 죽음, 서거, 오온의 부서짐, 시체를 안치함, 생명기능[命根]의 끊어짐 ― 이를 일러 죽음이라 한다.”

18-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근심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현상에 맞닿은 사람의 근심, 근심함, 근심스러움, 내면의 근심, 내면의 슬픔 ― 이를 일러 근심이라 한다.”

18-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탄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한탄, 비탄, 한탄함, 비탄함, 한탄스러움, 비탄스러움 ― 이를 일러 탄식이라 한다.”

18-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육체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고통, 몸의 불편함, 몸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육체적 고통이라 한다.”

18-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적 고통인가? 비구들이여, 정신적인 불편함, 마음에 맞닿아 생긴 고통스럽고 불편한 느낌 ― 이를 일러 정신적 고통이라 한다.”

18-9.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절망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저런 불행을 만나고 이런 저런 괴로운 법에 맞닿은 사람의 실망, 절망, 실망함, 절망함 ― 이를 일러 절망이라 한다.”

18-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태어남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늙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병들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죽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을 하기 마련인 중생들에게 이런 바람이 일어난다. ‘오 참으로 우리에게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하는 법이 있지 않기를! 참으로 그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우리에게 오지 않기를!’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원함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것도 역시 괴로움이다.”

18-11.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인가?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요컨대 취착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2.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19-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19-2.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19-3. “눈의 감각접촉[觸]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19-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일으킨 생각[尋]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3.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20-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지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20-2.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지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지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알음알이는 … 귀의 알음알이는 … 코의 알음알이는 … 혀의 알음알이는 … 몸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20-3. “눈의 감각접촉은 … 귀의 감각접촉은 … 코의 감각접촉은 … 혀의 감각접촉은 … 몸의 감각접촉은 …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인식은 … 귀의 인식은 … 코의 인식은 … 혀의 인식은 … 몸의 인식은 … 마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20-4. “눈의 의도는 … 귀의 의도는 … 코의 의도는 … 혀의 의도는 … 몸의 의도는 … 마노의 의도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갈애는 … 귀의 갈애는 … 코의 갈애는 … 혀의 갈애는 … 몸의 갈애는 … 마노의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일으킨 생각은 … 귀의 일으킨 생각은 … 코의 일으킨 생각은 … 혀의 일으킨 생각은 … 몸의 일으킨 생각은 … 마노의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눈의 지속적인 고찰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지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지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V-5-4.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21-1.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2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21-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21-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21-5.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21-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21-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21-8.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21-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 pī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하게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앴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

21-10.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들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법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VI. 결어

22.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이와 같이 칠 년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究竟智)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칠 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육 년을 닦는 사람은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 일년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일곱 달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일곱 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여섯 달을 … 다섯 달을 … 네 달을 … 세 달을 … 두 달을 … 한 달을 … 반달을 … 반달은 그만두고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칠 일을 닦는 사람은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구경지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설하였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설법을 기뻐하였다.

(대념처경 끝)

출처 : 바라밀
글쓴이 : 위빠사나포도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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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3

이인자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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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tSp5onhhsoredsh  ·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원불교의 살림사상
물질을 활용하여 문명을 창조하자

원불교는 나에게 커다란 원이다. 서울에 있는 인사동 거리처럼 광주 시내에도 예술의 거리가 있다. 거기에 원불교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나갈 때 보게 되는 커다란 원...
하나의 또 다른 종교일 뿐 관심의 대상 밖에 존재했던 원불교.

동아시아의 사상 전통이 원불교에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4월2일 오늘 들은 것이 내가 원불교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이다. 
나의 공부의 연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불교의 영향이 있긴 하나 차이점(고통의 원인에 접근하는 관점과 해결책이 다르다 한다)이 있고 물질이나 과학을  배척하기보다는 활용하자고 한다(만물을 활용하되 생명평화를 해치는 방향이 아닌 보장하는 방향으로).
원불교의 핵심교리는 
  1. 일원우주(일원의 우주론),
  2. 사은윤리(사은의 윤리론),
  3. 삼학수행(삼학의 수행론).
이 중 다른 개벽종교와의 차이가 
유불도 삼교의 수행론을 집대성하고 현대화하는 데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는 것이고 
원불교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마음공부라 한다.

앎이 있으되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일원
  • 모든 것이 하나이다.
  • 동기연계(만물은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불교가 이 땅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는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 
수행(실천)이 있고 경전(앎/교리-정전)이 있다. 
하나의 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나의 하나됨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확장하고 연결해 나갈 것인가? 하나가 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자기개벽,사회개벽,천지개벽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로 나아가며 어디서 만날 것인가? 
인간의 영성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 종교는 어떻게 새롭게 인류사에 재등장 할 것인가?

(원불대학교 한복판에 수덕호라는 호수의 둘레에는 예수,공자,붓다,소크라테스 인류의 사대성인이 있다는데 언젠가는 가보리라..

화두를 가지고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데 호수에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을까?)
** 우리의 스승(안내자/연결자)은 왜 우리(나)에게 다시 개벽을 이야기 할까요?

................(중략)

이 중심 없는 중심, 또는 모두가 중심이라는 생각을 
동학에서는 하늘로,원불교에서는 일원으로 표현했습니다. 

  • 이로써 이제 주변인에 머물렀던 이들도 당당하게 개벽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한국 근현대사에 개벽운동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 개벽적 주체관을 확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다만 개벽의 주체라는 기억이 망각되어 있어서 화산처럼 단발적으로 솟아나고 있을 뿐입니다. 
  • 그 기억을 되살렸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21세기의 다시 개벽의 역사의 첫 걸음을 디딜 수 있습니다. 
  • 제가 사상사 복원작업에 힘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벚꽃이 나를 부릅니다.ㅎ
이만 총총...

2021/04/02

13] 【지구수양학】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

 13] 【지구수양학】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


요약문   

인류세에 대한 논의를 기점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고 있다. 바이러스와 기후 온난화 문제, 소외와 혐오 등 지구적 차원의 위험현상들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를 지양하며, 전 지구적 존 재들의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는 지구인문학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 중 지구수양학은 개인의 마음을 닦는 행위와 지구적 연대를 통합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사상 및 방법론을 다루는 학문이다. 한국 신종교 사상들은 한국인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온 종교적 심성, 즉 만물 간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들은 담론 제시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마음바탕을 수양하는 일에 있어서도 개인의 인격성장만이 아닌 전 지구적 존재 와 덕을 나누는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구인문학적인 수양학, 즉 ‘지구수양학’으로서의 특성을 보인 다.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됨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더해졌고, 탈종교 현상과 아울러 종교 본연의 역할에 대 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난다. 이러한 급변의 시대에 종교는, 하비 콕스가 강조했듯, 교리적 지식이나 도덕주 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유기체적으로 모든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 여 한국의 신종교 사상들에 담긴 지구수양학으로서의 사상, 그리고 이들 사상을 반영한 지구적 수양법, 즉 개인의 완성과 아울러 지구공동체의 연대를 함께 추구해가는 방식을 탐색하고자 한다.

===

차 례

Ⅰ. 머리말 

Ⅱ 지구위험시대의 수양학

Ⅲ.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

Ⅳ.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Ⅰ. 머리말

종교학자 류병덕은 “한국인의 종교혼은 자연을 지배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생명의 근원, 무한 생 성력, 고맙기만 한 자연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1) 이 연구는 한국의 동학과 천도교, 그리고 원불교가 제시한 지구중심적 사유와 실천법에 주목하여, ‘은(恩)적 네트워크’ 기반의 ‘공경과 불 공의 윤리’, 나아가 수양법을 종교적 이념에 국한시키지 않고 지구위험시대를 극복할 실천적·보 편적 담론으로 사회화하기 위한 시론적 연구이다.

동양의 수양학은 마음을 닦는 일과 존재의 근원적인 진리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 관심을 바탕으로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의 마음 닦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에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자연 본연의 생명성이나 당시 사회문제들을 함께 궁구함으로써 개인 의 단독적 진화가 아닌 주변과의 공진화(共進化)를 실천하려 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지금 시대의 수양학, 즉 지구위험을 극복하려는 수양학으로서 ‘지구수양학’은 그 명맥을 이어 인간중심주의 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심성 도야와 지구적 공경을 함께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제시했던 지구수양학적 특성에 주목한다. 이들 종교의 공공성 은 외세의 침입과 불안정한 시국, 신분차별로 고통 받던 근대 한국에 요청되던 ‘민중적 공공성’ 이었다. 근대에 필요했던 이 공공성은 지금의 지구위험시대에 이르러 ‘지구적 공공성’으로 새롭 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지구적 공공성은 전 지구적 존재들로 구성되는 ‘은(恩)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발현된다. 은 (恩)적 네트워크는 인간과 비인간, 사사물물 등 모든 존재들이 긴밀한 은(恩)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제한다. 은(恩)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들 종교는 ‘지구에 대한 공경과 불공의 윤리’를 제시 한다. 그리고 수양방법들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해체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들 수양법이 지구 수양학의 방법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심성을 도야하는 과정이 지구 구성원들에 대한 공경 및 불공과 통합적으로 실천되기 때문이다. 이 통합적 실천으로 물질과 정신, 인간과 비인간, 땅과 하늘, 문명과 자연, 남성과 여성의 이원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지구수양학, 즉 은(恩)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공경과 불 공의 윤리, 수양 방법론에 대해 논의한다. 지구수양학은 곧 개인의 심성 도야와 지구적 공경·불공 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데 필요한 윤리와 방법론, 나아가 지구공동체를 위한 수양학의 사회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실질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구위험시대에 유의미한 연구가 될 것이 다.

1) 류병덕, 근·현대 한국 종교사상 연구, 서울: 마당기획, 2000, 18쪽.

Ⅱ. 지구위험시대의 수양학

1. 시대에의 응답 최근 들어 지구를 향한 시선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에콰도르는 신헌법에 ‘자연권’ 을 명시했고, 2010년에 볼리비아는 ‘어머니 지구법’을 채택했다. 이밖에도 2017년 왕거누이강(Wanganui)에 법인격을 부여한 뉴질랜드의 움직임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한국에서도 2020년에 지구 를 위한 법학이 출간되는 등, 인간중심적이던 법적주체를 지구중심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일 어나고 있다. 그밖에 의학 및 생태 분야에서도 ‘원 헬스(One Health)’, 즉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의 긴밀한 상호의존성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 등장했다. 원 헬스는 ‘인간-동물-환경을 아우르는 건강(health)은 하나(one)’라는 믿음 아래 인간 중심의 건강 관점에서 탈피하여 동물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균형 잡힌 건강과 안녕(well-being) 확보를 목적한다. ) 이러한 변화들은 신종 감염병 과 기후문제 등 전 지구에 닥친 위험들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지구의 권리, 인간과 지구의 관계성에 주안점을 두는 이 시도들은 지구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 된다고 볼 수 있다. 지구인문학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지구’를 사유의 중심에 두 고자 하는 인문학을 말한다. 지구인문학적 관점을 지닌 대표적 지구신학자로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지구공동체’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땅·생물·인간이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지구인문학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던 관점을 해체함으로써 그간의 위계적 사고로 인한 타자화와 폭력을 지양한 다.4)

지구인문학으로서 지구수양학에 대한 선행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이 연구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근대 한국 신종교 사상의 지구인문학적 요소에 대한 논의는 2020년부터 있어왔다. 지구인문학 연구들은 이들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인간관과 우주론을 지구 구성원의 상호 의존관계나 지구중심주의에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어디까지나 지구인문학 이라는 상위 범주를 구축하는 논의이기 때문에, 수양학적 관점으로 이들 종교에 접근하거나 지구 수양학적 윤리와 방법론을 세부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한편 근대 한국 신종교의 생태담론에 관련해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이들 종교에 담긴 생태

적 요소가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추구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담론을 담은 사상적 특이성을 다루고 있어도 실제 수양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경우는 미미하 다. 또한 근대 한국 신종교 사상을 수양학적 측면에서 논의해온 결과물은 다수가 있다. 그러나 지 구위험에 대한 인식 아래 직접적인 실천을 요하는 수양학적 논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는 과제로 남겨져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지구 위험시대에 적용하기 위한 수양학으로서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한다.  

2. 지구수양학의 방향성 수양(修養)은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다. ) 동양의 학문은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 못지않게 실천의 문제를 중시  )해왔고, 그래서 이성 중심의 서구에서와 달리 수양은 주된 과제로 자리매김해 왔다. 수양은 인간에게 실재하는 ‘경 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사유 이전에 실재하는 경험이란 것을 일회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니, 이것이 바로 수양이다.  ) 

수양에 대한 논의를 주로 많이 다루어 온 유학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고 마음을 닦는 것을 수양의 기본으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이 개인의 인격 수양만을 주장하진 않았다. 군자의 과업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통합을 강조했다는 장점을 가 진다.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함께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수신제가치국 평천하’의 사상은 사실 유학적 전유물이 아니며, 중국 제자백가의 학설 중에도 ‘수신’과 ‘치 국’, ‘평천하’ 중 하나라도 부정한 경우는 없었다. 

노자의 수양론도 도덕허무주의가 아닌 현실사회를 최종 지향점으로 하며, 무욕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여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 그리고 노자철학을 이은 장자 또한 허정(虛靜)의 수양을 통한 무위(無爲)의 통치론을 제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수양론을 사회적·정치적으로 구성 하였다.10)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라는 뜻이며, 존 재 간의 연결 관계에 주목하는 연기론은 사회 갈등은 물론 생태적 공공성을 살릴 수 있는 개념이

다. 이런 이념적 기반을 바탕으로 불교에서도 수양은 사회적, 대중적 성격을 병행해 왔다. 근대기 우리나라 불교잡지들을 검토한 결과 1919년 3.1운동 전후로 불교계의 혁신과 개혁운동을 지향하는 대중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불교교화를 위한 대중의 수양론이 등장했었다는 연구 보고 )도 있다. 어쨌든 동양의 수양학이 근본적으로 수양의 주 대상으로 삼은 것은 마음이며, 이에 따라 수양인

은 수심(修心)을 하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중점을 둔 서구적 사유법 과 달리 동양의 수양학은 마음을 닦는 일과 존재의 근원적인 도달점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 관심 을 바탕으로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 닦는 일에 멈추지 않고, 인간의 삶 에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자연 본연의 생명성이나 당시 사회문제들을 함께 궁구함으로써 개인의 단독적 진화가 아닌 주변과의 공진화(共進化)를 실천하려 했다.

개인 내적인 완성과 더불어 사회 참여를 지향했던 학문으로서 수양학은 정치·경제·인간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제시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 수양학을 혁신적으로 계 승한 근대한국 신종교들은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부딪히는 가운데 민중의 주체성을 보존할 수 있 는 수양학을 제시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의 위험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동양의 수양학의 명맥을 이어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버전의 수양학으로서 그 역할 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의 발달 속에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지구적 위험, 그리고 차별과 소외, 혐오 등이 발생해왔다. 이러한 지구위험의 주된 요인인 ‘인류세’에 대한 논의와 성찰이 활발해짐에 따라 요즘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지구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지구인문학으로서의 수양학, 즉 지구수양학은 개 인의 내적 완성과 더불어 지구적 연대를 지향하게 된다. 이때 지구적 연대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 과 사물을 포괄하는 전 지구적 존재들 간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간 동양의 수양학이 개인의 완성 과 더불어 사회적 실천을 병행해 왔다면, 지구의 위험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이 지구수양학은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바탕으로 개인적 심성 도야를 통한 내적 완성 및 지구적 연대를 함께 추구한다. 

지구수양학은 전 지구적 존재들이 지구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긴밀한 상호의존관계에 있으

며, 따라서 수양을 통한 개인의 완성도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구공동체의 조화로운 운용과 더불어 진행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려는 두 종교 외에도 근대한국 의 신종교 사상은 이와 같은 지구수양학적 윤리와 방법론을 담지하고 있다. 동학·천도교에서 ‘천지부모는 일체’라 하여 지구가 곧 모든 존재들의 부모이자 포태임을 강조했던 점, 정역이 ‘十五一言’과 ‘十一一言’을 통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가 필요함을 주장했던 점, 대종교의 ‘삼일(三一)사상’, 그 중에서도 ‘사물사상’에서 사물이 내재한 신성을 드러냈던 점, 원불교의 삼동윤리 등은 지구수양학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다. 

따라서 한국의 신종교를 단순히 민족, 민중 운동의 틀 안에 매몰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

적 종교심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종교운동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 종교적 이념이라는 틀 내에서가 아닌, 근대에 등장한 한국의 자생적 담론으로서 ‘지구위험에 대응하는 한국 發 윤리와 방법론’으로 조명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종교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신영성운동14)에서 도  인간과 자연의 친화를 강조하며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언급하고 있다. ) 한국의 신영성운 동 단체들의 경우 기수련을 통한 명상과 함께 타자, 나아가 전 지구를 배려하고 연대하고자 한다 는 점에서 지구인문학적 사유에 근접해 있다. 그럼에도 일부 신영성운동을 가리켜 ‘인류의 보편 적인 가치나 윤리 덕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개인의 육체적·정신적인 건강과 안녕, 그리고 심리적 평화만을 강조’ )한다는 비판은 외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은 신영성운동의 핵심이자 실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체계가 개인의 내적 자아완성에 방점을 찍음으로 인해 지구공동체를 향한 이타적 사랑의 강조는 단지 ‘도덕적 강령’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세션스(Sessions)는 신영성운동이 근본 생태론과 정반대라 고 지적한다. 신영성운동가들은 인간을 지구 진화 과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 이는 비인간 존재와의 연대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인간의 위치를 위계 중심적으로 설정함으로 인해, 결국 ‘인간중심적인 지구중심주의’라는 오류 로 환원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지구화시대의 위험에 관련하여 지구적 차원의 바이러스나 환경문제, 소외와 차별, 혐오문제,  인

간중심주의나 자본주의로 인한 양극화 현상 등이 존재한다.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아닌 ‘지구의 중심에 위치한 존재’로 인간을 위계화 하는 방법으로는 지금의 패턴을 벗어나 전 지구 적 존재들의 연대를 이룰 수 있을지는 재고해 볼 문제다. 지금의 지구위험시대에 필요한 수양학은 개인의 심성도야,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적 사유의 해체를 함께 실천하는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Ⅲ.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

1. ‘은(恩)적 네트워크’ 기반 공경의 윤리

 

 1) 은(恩)적 네트워크 동학의 교조 수운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도를 이루었고, 그로부터 1년 후에 「포덕문(布德文)」

을 냈다. 「포덕문」에는 그의 득도 과정과 함께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우려가 담겨 있다. 그가 구도에 몰입했던 것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득도 후 제시한 21자 주문,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과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는 누구나 이 주문으로 천인합일을 이룰 수 있게끔 하는 대중적 수련법이다. 수양의 출 발점은 백성과 함께 하는 데 있었다.

원불교 수양학의 특징도 시대상황과 맞물려 나타난다. 대산은 마음공부를 가리켜 ‘마음공부로 도덕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여, 개인의 내적 수양력이 외부로 확 산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원불교의 수양학이 대사회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물질이 개벽되 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 외세의 침략과 분단의 아픔, 그리고 도탄에 빠진 창생, 개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정신개벽’이라는 변혁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 이다. 

동학·천도교, 그리고 원불교의 공공성은 ‘개벽(開闢)’이라는 기치 아래 ‘민중 스스로의 공공 성’ )으로 발동되었으며, 이에 따라 각 수양법도 민중적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다. 동학과 천도교 에서 매일매일, 매 끼니 매 순간을 모두 의례의 연속이라고 보아 이를 역행하는 제천의례를 중시 하지 않는다거나 ), 원불교 ‘무시선법(無時禪法)’이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마치를 든 공장(工匠)도 선을 할 수 있다’22)고 하여 누구나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시한 점을 보면 확인되 는 부분이다.

이러한 공공성은 당시 시대상에 요청되던 사회적 공공성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동학·천도교, 원불교 모두 ‘지구’라는 공동체의 공공성을 지향한다. ‘시천주’는 인간뿐 아니 라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을 뜻하고, ‘일원상의 진리’에서도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 하여 사사물물에 전부 일원의 진리가 갊아 있음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존재 모두가 곧 진리의 실상이라 본다는 점에서 공공성의 영역을 사회를 확장한 지구로 설정할 수 있고, 따라 서 민중적 공공성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으로 확대하여 실천할 필요가 있다.

베리가 말한 지구공동체는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가설’을 전제한다. 지구는, 그리고 지구의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며 각자의 권리를 가진다. 반면 인간은 그간 지구를 약탈해 왔다는 게 그의 견해다. 마찬가지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도 인간이 자 연과 사회를 이원화함으로 인해 부주의하게 하이브리드를 양산해왔고, 이로부터 지구의 손상이 발 생했다고 본다. 베리와 라투르의 이 견해들을 통해 지구적 공공성의 발현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유기체로서의 지구와 개별 구성원으로서의 전 지구적 존재들이 일방적 ‘약탈’이 아닌 ‘상 호작용’을 해나갈 때,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전 지구적 존재들의 상호의존성에 대해서는 현대 서구 이론가들도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 다. 특히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통해 인간과 사물이 어 떻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지 밝힌다. 그에게 ANT는 ‘이질적 존재자들의 연합의 전개를 묘사하는 방법’ ), 즉 인간과 비인간을 막론한 ‘행위소’들이 하이브리드 공간인 연결망에서 서로 ‘관 계’를 형성한다는 관계론이다. ANT 이론은 모든 존재들이 이 연결망에서 서로에 의해 규정된다 고 보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중 특정한 무언가가 우선시 될 수 없게 된다. 라투르와 같은 신유물 론자의 견해는 인간이나 비인간 내지는 사물이 지니는 상호의존성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지구공동체 구성원들의 이 연관성은 일찍이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사상에서 다뤄진 바 

있다. 그는 ‘천지부모는 일체’,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 )라고 말하여, 지구는 곧 모 든 존재들의 부모와 같은 ‘포태’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천지가 아니면 나를 화생함이 없고 부 모가 아니면 나를 양육함이 없을 것이니, 천지부모가 복육하는 은혜가 어찌 조금인들 사이가 있겠 는가.’ )라고 하여, 지구와 개별 존재간의 관계를 ‘은혜’로 표현한다. 

소태산의 ‘사은(四恩)’에서도 이 관계성을 천지은·부모은·동포은·법률은의 네 가지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늘의 공기, 땅의 바탕, 일월의 밝음, 풍운우로의 혜택, 금수초목 등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도 나에게는 은혜로운 존재이며, 이들과 주체의 관계를 가리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 또한 정산이 언급했던 ‘삼동윤리’의 ‘동기연계(同氣連契)’ 강령에서는 인류뿐 아니라 금수 곤충까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이니 대동화합해야 함을 주장한다. 전 지구적 존재들 간의 긴밀한 상호의존성, 나아가 ‘은혜로운 관계’라고 설명되 고 있는 이 관계성, 집약하여 표현하건대 ‘은(恩)적 네트워크’는 지구수양학이 추구하는 윤리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동학·천도교, 그리고 원불교가 지구의 ‘은(恩)적 네트워크’에 중심을 두었다면, 라투르와 같은 이론가들은 –비유적으로 표현하건대- ‘연합 네트워크’에 중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은(恩)적 네트워크 중심의 관점은 이 지구를 모든 존재를 키워주는 부모 같은 존재임을, 그리고 전 지구적 존재들 각자가 서로를 먹이고 받쳐주는 형제 같은 존재임을 전제하는 데 반해, 연합 네트워크 중 심의 관점은 각 존재들이 부모나 형제가 아닌 ‘행위자’로 작용한다고 본다. 지구 구성원 간의 관계 구조를 사유하는 데 있어 어떤 부분에 무게를 두느냐의 차이라 여겨진다.

2) 공경과 불공의 윤리 수운이 여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던 일화, 그리고 해월이 베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이라 이 름 했던, 또는 소태산이 어느 노부부에게 불효하는 며느리를 부처님 공경하듯 위해주도록 권유했 던 일화가 있다. 이 일화들은 공경 또는 불공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해월의 ‘삼경(三敬)’ 사상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세 가지를 말한다. 삼경사상은 그의 ‘우주적 연 대성에 대한 공감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타자의 개체적 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본질적 화(和)의 관계를 정립한다. ) 해월신사법설에는 공경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상당수 보인다. 해월 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 하거나,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어린아 이 같이 하라’거나,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고 말한다. 특히 「내수도문」에서는 밥을 하거나 방아를 찧을 때, 식사하거나 다른 집을 왕래하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 공경의 윤 리를 실천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의 경우 곳곳에 위치한 모든 존재를 부처로 정의하고 일마다 불공할 것을 권장하는 소태 산의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 사상을 기반으로 ‘불공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 다. 정전 「불공하는 법」에서는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 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이 불공 법(事事佛供)’이라고 하여, 전 지구적 존재들이 전부 법신불이라 는 궁극적 실재의 응화신이므로 등상불이 아닌 각 실재에 사실적인 불공을 할 것을 강조한다.

동학·천도교의 공경과 원불교의 불공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까지 그 대상으로 삼고 있 다는 점에서 ‘지구에 대한 공경과 불공의 윤리’를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토마 스 베리 외에 래리 라스무쎈(Larry L. Rasmussen)도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을, 마찬가지로 신 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로 책임과 연민 )을 제 시한 바 있다. 이로부터 한국의 신종교뿐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지구중심주의적 공경의 윤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구의 모든 존재들을 공경하거나 불공하는 건 타자를 ‘한울님’, ‘부처님’으로 여길 때 그 

극치를 이룬다. 천도교 사상가인 이돈화는 ‘한울은 범신관적(汎神觀的)이며 만유신관(萬有神觀)으 로 해석’ )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김용준은 이돈화의 이 견해를 가리켜 ‘범신론적 일신관’으로 정의했다. 수운이 신비체험 때 신과 대화한 것은 일신론의 근거이고, 이돈화는 ‘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등의 구절은 범신론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대일치’의 원 리를 써서 일신론과 범신론을 조화하고 통합하려 했다고 본다. )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 또는 내재적인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며,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담지한 존재로 보고 있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인 ‘법신불 사은’에 대해 노권용은 ‘범재불론적 내지 범재은론적 성격’

을 띤다는 의견이다. 그는 ‘법신불’이 절대유일의 총상 또는 총덕이며 ‘사은’은 그 구체적 별 상 또는 별덕이라고 해석한다.  ) 전체를 총괄하는 유일무이의 궁극적 실재인 ‘법신불’, 그리고 이 법신불의 개별적인 나타남으로서 ‘사은’은 하나로 통합되는 동시에 구분될 수도 있는 ‘일이 이(一而二)’의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견해다. 이찬수도 유사한 견해를 보인다. 그는 정산의 ‘동기 연계’에서 ‘동기성(同氣性)’이 범재신론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한다. ‘동기’ 자체가 만유를 살 리고 포섭하는 선행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은사상도 범재신론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 다.33)

이와 같이 동학·천도교, 원불교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공경 또는 불공의 대상을 내 앞에 현현하는 존재로 설정할 수 있다. 개별 존재 각각이 궁극적 실재인 동시에 전 지구적 존재들을 품어 안는 법신불에, 한울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들 사상이 범신 (불)론적 관점에 국한되었다면, 법신불이나 한울과 동일한 위격의 궁극적 실재가 수 없이 많이 등 장했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개별 신들을 숭배하는 샤머니즘적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될지언정, 지구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한 기운으로 연결된 형제, 즉 상호의존적 관계의 존재들로 인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사사물물을 공경과 불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개별자들을 각각 한울님, 부처님으로 봄과 동시에 서로간의 긴밀한 연결 관계도 함께 고려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가 ‘자신이 곧 부처’라는 진리 아래 단독적으로 자신의 인격 완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완 성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 ‘은(恩)적 네트워크’에서라 야 완성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동학·천도교, 원불교의 지구수양학이 개인의 완성만을 추구 하지 않고 전 지구적 연대를 함께 지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자기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동학과 천도교의 수양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마음을 잘 보존하여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 이는 마음과 기운을 함께 다루고자 함으로, 수심(守心), 즉 마음을 보존하는 것과 정기(正氣), 즉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밀접하다는 걸 의미한다. 수심정기를 지향한다는 것 은 ‘마음과 기운’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수양을 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지식의 유무 나 계급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수심정기를 추구할 수 있다. 성리학의 수양법이 ‘독서행위 에 기초한 학습행위’로 변질되고, 이에 고급관료가 되기 위한 교과과정으로 고착화된 것에 대한 수운의 대응이 이렇게 수심정기 수양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원불교의 수양도 누구나 실천 가능한 방법을 지향한다. 원불교 개교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물질과 정신을 병행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의지를 그대로 반 영한 수양법들을 제시한다. 원불교 표어, 즉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 (無時禪) 무처선(無處禪)’, ‘동정일여(動靜一如)’, ‘영육쌍전(靈肉雙全)’,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은 심성의 도야를 통해 실제 삶을 바르게 운용하고, 삶을 바르게 운용 하는 일이 곧 심성 도야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남성, 고용인, 부유층, 지식인들만이 아 닌 여성, 피고용인, 지식이 적은 사람도 수양을 할 수 있도록 하며, 이를 위해 ‘일상수행의 요 법’과 ‘일기법’을 비롯한 생활 속 수양법들이 존재한다.

동학·천도교, 원불교의 수양은 이와 같이 민중 누구나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개벽종교로서의 경향 자체가 모든 존재들의 평등성을 지향하기 때문이기도 하거 니와, 정신적 영역뿐 아니라 물질적·신체적 부분을 함께 가꾸어 간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물 질과 정신 이원론을 지양하고 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원불교는 창립 초기에 방언공사 외에도 작농과 양잠, 축산, 원예 등 산업과 더불어 황무지를 개 간하거나 과원을 경영했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단지 종교 산업만이 아닌 영육쌍전, 이사병행(理事並行),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수양으로 보았다. 소태산은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 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구분을 지양함으로써 도학과 과학, 이치와 일, 동과 정을 구분하는 것을 반 대한 것이자,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수련을 쌓는 생활과정이 세간을 떠난 데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지양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게 하는 대중적 수양을 추구한 것은 곧 ‘개인적 심성 도야와 공경·불공의 통합’ 이라고 정리된다. 

동학과 천도교의 주문 수련이 어떻게 해서 개인적 수양에 한정되지 않고 지구 구성원들을 향한 

공경의 실천과 통합이 가능한지는 다음의 견해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주문 수련을 열심히 한 결과 내 안에 한울님을 확실히 모시게 되면,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존재 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실 수 있는 것(事人如天)이다. 다른 사람을 한울 님처럼 모시면 그 사람 또한 감응하여 나를 한울님처럼 모시게 된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 이 모이고 기화(氣化)가 상통하므로, 하는 일도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사람들에 게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실천하면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38)

원불교의 경우 지구공동체의 은혜에 주목하는 사은(四恩) 사상을 ‘일상수행의 요법’을 통해 직 접 실천하도록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 중 다섯 번째 조목인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

자.’는 사은에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이것이 곧 내 마음을 요란하게 하는 ‘경계(境界)’임을 알아차려 즉시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자는 실천법이다. 정산은 이러한 ‘일상수행의 요 법’을 가리켜 ‘자성 반조의 공부’로서 ‘천만 경계에 항시 자성의 계정혜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 즉 개인이 일상 속에서 원망할 일이 생길 때 본래 성품을 회복함으로써 원망심을 버리고 감사심을 얻는 수양법으로, 후일 대산이 설명했듯 ‘전 생령이 구원을 받는 방법, 세계 평 화의 근본, 온 인류가 서로 잘 사는 묘방’ ), 개인의 마음을 닦는 수양이 곧 ‘전 생령의 구원’ 과 통합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방식 아래 개인의 심성을 도야하는 수양, 그리고 지구공동체 구성원을 향한 공경과 불공의 실천이 통합되는데, 이로부터 인간과 비인간, 땅과 하늘, 문명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관점 또한 수양을 통해 해체할 수 있게 된다.  해월의 ‘이 심치심(以心治心)’은 자신이 지닌 한울의 마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면 ‘화가 바뀌어 복이 되고 재앙이 변하여 경사롭고 길하게’ ) 됨을 강조한다. 지극한 수양으로 한울을 모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면 실제로 복이 넘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얻 게 된다. 

이는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

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고 한 해월의 설명과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수양으로 내게 한울의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사사물물이 전부 시천주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날짐승이건 털벌레건 모 두 공경하게 되고, 이는 곧 지구적 공공성의 실천으로 이어져 그 ‘복’이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 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의 이원화를 지양할 뿐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이원론적 구분을 해체하게 

되는데, 지구수양학이 가지는 이러한 성격은 하나의 특이성이자 시사점을 지닌다. 바로 지구 구성 원들과 궁극적 실재 간의 수직적이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은 ‘지금껏 하등하다고 여겨진 생명체나 기계를 향한 성찰’ )에서 시작된 탈인간중심주의에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강조한 ‘정치생태학’ )은 비인간 존재들의 권리 에 주목하여 그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시키고, 그래서 인간과 비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확립 하려 한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소중한 타자성’ )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화를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려종이 될 수 있는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이 수평적 관계의 대상을 한울 또는 법 신불까지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수운에게 한울은 절대자이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러면 서도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임을 깨달아 각자가 궁극적 실재를 모시고 있음을 밝혔 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함께 인정했던 한편으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믿음보다는 깨달음이 강조 되는 방향으로 한울에 대한 함의가 더욱 풍부해졌고 깊어졌다. ) 해월의 ‘베 짜는 한울’ 이야기 는 이러한 수평적 관계를 반영하며, 궁극적 실재의 영역을 수직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태산은 진리의 실상인 ‘일원상의 진리’를 ‘제불 제성의 심인’이자 ‘일체 중생의 본 성’으로 믿는 것이 곧 신앙임을 말하여, ‘일원상의 진리’는 모든 존재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 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어느 노부부에게 ‘그대들의 집에 있는 며느리가 곧 산 부처’라고 했던 소태산의 설득은 ‘하늘만 높이던 사상을 땅까지 숭배하게’ ) 한다는 대산의 설명과 더불어, 궁 극적 실재와 지구 구성원들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는 동시에 수평적으로 구축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지구수양학은 전 지구적 존재들의 수평적인 관계를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로까지 확장

한다. 그래서 탈인간중심주의가 그 동안 하등하다고 여겼던 비인간 존재들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전환했다면, 지구수양학은 이들 존재를 평등한 동시에 ‘공경과 불공을 받아 마땅한 존 재’로 정의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즉 비인간의 주체성과 상호작용에 중점을 두는 탈인간중심주의 에 지구수양학이 공경과 불공이라는 실천성을 보완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수평적 관 계를 인간·비인간·궁극적 실재의 수평적 관계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학·천도교와 원불교가 지닌 지구수양학적 특성은 개인적인 수양이 지구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공경과 불공과 통합된다는 점이다. 개인의 심성을 도야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가 는 과정이 다른 존재를 향한 공경과 불공을 실천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동학·천도교와 원 불교가 인식하듯 지구 존재들 간의 관계가 ‘은(恩)적 네트워크’, 즉 긴밀한 상호의존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공경과 불공을 실천함으로써 이 네트워크를 더욱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음을, 이로부터 연대를 실천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연대는 다른 존재와 함께 더불어 하는 것을 주된 요소로 삼는다. 강수택은 자유, 평등, 박애 같

은 관념들이 연대의 전제가 된다고 말한다. 즉 연대 자체가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수평적 관계에서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 그리고 김용해는 연대에 대해 인류를 위한 상호책임을 지는 것, 재난재해 같은 위험을 줄여나가는 예비적 상호보험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 전 지구적 존재들을 향한 공경과 불공, 이를 통한 ‘은(恩)적 네트워크’의 활성 화는 지구위험에 대비하는 상호보험, 수평적·집합적인 노력으로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하나의 실 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수양과 통합되는 공경과 불공’은 자유, 평등, 박애와 더불어 지구 위험시대 연대의 새로운 전제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이 연구는 지구위험시대에 대응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발한 지구인문학적 사유와 그 맥을 함께 

한다. 특히 자연을 도구화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공경과 불공의 대상 으로 삼는 것이 결국 인간 스스로의 내적 도야와도 분리되지 않는 일임을 논의하고자 했다. 또한 그만큼 모든 존재가 빠짐없이 긴밀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단독으로 심성 을 도야하여 그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따라서 관계 속에서 타자를 위한 공경과 불 공을 실천하는 행위가 곧 자신의 심성을 도야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이 점은 지 구위험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구위험을 기점으로, 우리는 전 지구를 대상으로 개인의 수양과 지구적 윤리 실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지닌 지구수양학적 요소들은 후일 서구적 사유에서 제시하지 않은 관점 들을 이미 담지하고 있었다. 이는 지구위험시대에 부응하는‘한국적 독창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

다. 금수초목과 공기를 비롯한 물질들에 이르는 비인간 존재들까지 주체적 존재, 긴밀한 관계성의 존재로 본다는 점은 서구에서 출발한 신유물론이나 포스트휴머니즘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하지 만 이들 서구적 사조에서 중점을 두지 않는 윤리와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은(恩) 적 네트워크’, 공경과 불공의 윤리, 개인적 수양과 이 윤리 실천의 통합에 따른 한국적 독창성이

다. 이 독창성은 지구위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수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구현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적 이념의 울타리 내에서가 아닌 보편적, 대중적 성격의 윤리와 방법론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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