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9
2016/08/28
영성교육기관-펜들힐(Pendle Hill)답사기 원불교신문
영성교육기관-펜들힐(Pendle Hill)답사기 | |||||||||||||||||||||||||||
신앙과 실천의 하나됨 위한 만남의 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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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 이후 '아미쉬 공동체'는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됐다. 검박한 생활의 상징인 검은 양복과 흰색 셔츠, 전기를 거부하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닐 만큼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물질문명의 총아인 미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큰 이슈가 되었다. 아미쉬 마을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는 세계적인 영성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이 있다. 아미쉬교도들이 세상과의 거리를 둔 신앙공동체로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이곳 펜들힐은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운동은 물론 여성운동과 평화 운동에 앞장서온 퀘이커 교도들의 영성학교다. 간디와 함석헌이 머물렀던 수행시설로 알려진 곳이다. 펜실베니아가 이처럼 다양한 영성문화의 산실이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7세기 영국 교회는 외형적 성장의 그늘이 커지고 있었다. 권력자가 되어버린 성직자들은 타락했고, 교회는 부패했다.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참다운 신앙의 길을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구원과 저주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각 개인에게 달려있으며 기도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인의 영적성장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신앙은 '미신'으로 규정하며, 세상의 평등과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교회나 성직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실천적 영성운동에는 엄청난 종교적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던 중,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채권 대신 신대륙의 넓은 땅을 갖게 된다. 펜은 아버지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그 땅의 이름을 'Penn의 숲(sylvania)', 펜실베니아로 정하고,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한다. 영국 내에서 종교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아미쉬 교도들과 퀘이커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펜실베니아로 대거 이주를 했고, 곳곳에 공동체를 형성했다. 미국의 대공항기인 1931년에 퀘이커들은 교육과 기도를 위한 터전을 마련했는데, 퀘이커의 창시자 조지 폭스가 첫 깨달음을 얻었던 묵상 장소의 이름과 같은 '펜들힐'로 명명했다. 답사팀이 펜들힐 공동체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다. 식사를 함께 하자는 안내자의 말에 공동체 식당을 향했다. 다른 수행시설들과 마찬가지로 유기농야채 위주의 음식이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음식을 먹기에 앞서 자원봉사자가 오늘 자신이 준비한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하는 대목이었다. 함께 먹고 일하고 기도하는 수행공동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엿보는 듯 했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이들 가운데 동양인 학생도 눈에 띄었다. "계절 학기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왔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장학금을 받습니다." 독일에서 대안교육을 전공한 어머니의 소개로 이곳을 찾았다는 한국인 고등학생이었다.
강의 내용에 따라서 집중적인 워크샵을 하기도 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배우는 유기농법 강의,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 커뮤니케이션 훈련 'AVP(Alternative to Violence Project)훈련 강좌',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배우는 Beyond Deversity101 강좌 등 이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영국교회가 내면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성경을 다시 보고 예수의 실천을 닮아가자는 영성운동을 펼쳤던 퀘이커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영성운동을 펼치는 방식을 '교육'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좌를 듣는 이들은 고등학생에서 칠십대를 넘긴 고령 은퇴자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나무의자가 있는 조용한 기도실에 모여 기도를 올리고, 자신이 겪은 영적인 변화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형식도, 지도자도 따로 없지만 내면에 충실한 기도와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학생수는 적지만 학교 도서관에는 100만권이상의 장서가 있고, 철저한 토론식 수업, 가장 글을 많이 쓰게 하는 교육 등으로 스와스 모어를 졸업하면 글을 잘 쓰는 전문가가 되어 대학원 진학은 물론 전문직 취업이 보장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때문에 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는 하버드대학 등 아이비리그 대학에 동시에 합격해놓고도 스와스 모어를 선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펜들힐과 스와스 모어 대학은 시설뿐 아니라 프로그램들을 공유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얻어왔다고 한다. 수행과 교육이라는 숙제를 풀어갈 국제마음훈련원과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의 모델이 될 법도 하다. 펜들힐 공동체의 운영을 맡았던 사회학박사 파커 팔머는 80년이 넘는 펜들힐 공동체의 목표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용서를 위한 끊임없는 교육과 실천'이라 했다. 신앙과 실천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퀘이커 신앙을 압축하는 말이다. 또한 펜들힐은 그러한 교육과 실천을 위한 의미 있는 만남의 장이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한 시대와 다음 시대가 만나는 것이다. 개교 100년을 앞두고 수행과 생활이 하나임을 알아가는 삼학(三學)수행의 새 배움터, 국제마음훈련원이 마련되고 있다. 펜들힐의 80년처럼 차분하게 배우고,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교육과 수행의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을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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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2012 - 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자료실 - 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http://www.hanism.org/han/7012013.01.24 14:40:53 63453143
함석헌, 누구인가? -그의 삶과 씨사상
은호기 <미국·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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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삶과 한국현대사 100년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 90여년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고난의 역사이었던 한국현대사 100년에 그대로 포개진다. 조선조의 멸망, 일본의 식민지, 해방, 외국점령군의 통치, 분단, 동족상잔, 분단체제의 국제화, 분단독재. 이 모순과 고난의 역사를 함석헌은 온몸으로 안고, 부딪치며 살아왔다. 힘들고 거친 세월이었다. 이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그는 자신을 무섭도록 단련하고 확인해왔다. 넓게 공부하고, 깊게 생각하면서도, 흰 수염 휘날리는 겉모습과는 달리 꾸밈없는 들사람의 모습으로 계산 없이 대들며, 부딪치며 살았다. 그 고비, 고비마다에서 그의 삶은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교육자, 종교인, 사상가, 언론인, 시인 등의 호칭을 얻게 되었으며, 감옥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올곧음은 민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뜻한 바나 원한 바가 아니었다. 순전히 사회가 만들어 불러준, 호칭들이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이토록 가열차게 산, 실천적 지성인이 몇이나 될까? 많이 배우고, 경지를 이룬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거개가 시대의 권력에 구부러지거나 꺾여 살았다. 자기이기를 포기한 삶. 우리의 슬픈 역사다. 함석헌의 삶이 돋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이, 무슨 생각이 그를 그토록 치열하게 살게 하였을까? 차분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한 낱말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씨. 그렇다, 씨이다. 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씨을 억압하는 무리나 장치를 뚫고 나아가 온전히 되어지려는 뜻의 역동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모순과 고난은 오히려 씨에게는 도전과 축복이었으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한 몸이 되려는 사랑과 희망이었다.
함석헌의 씨
씨이란 무엇인가? 민(民)을 말한다. 민초(民草), 풀뿌리 삶을 말한다. Grass root다. 인민을 뜻한다. People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민대중의 민중을 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씨의 값에 적확(的確)하진 않다. 함석헌의 씨은 이미 보통명사의 의미를 넘어 함석헌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으며, 함석헌 사상의 대표어이기 때문이다.
씨알이란 말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민초들이 흔하게 쓰는 말이다. 씨알이란 종자를 일컫는다. 내일의 농사를 위해서 끝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밑천이다. 구태여 떼어 설명하자면, 씨는 식물의 종자요, 알은 동물의 모체이다. 그러니까 씨알은 만물의 근원이며, 시작이랄 수도 있다.
이 씨알이란 말을 사회학적으로 처음 쓴 분이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이었다 한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씨은 유영모의 씨알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민(民)의 번역어를 뛰어넘는다. 달리 말하면, 함석헌은 평생을 씨이라는 말과 씨름하면서 살았다. 그 의미를 따지고 내용을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우렸다. 따라서 씨이라는 말에는 함석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씨은 함석헌 사상의 출발이며, 과정이며, 목표이다. 함석헌의 전부이다. 그러기에 《씨의 소리》사 편집진과 함석헌 연구가들은 ‘씨알’ 아닌 ‘씨’로 쓸 것을 주문하며, 의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ㆍ'은 내재적인 하늘 즉 자아를,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의미임을 강조한다.
씨과 종교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다. 자신의 말마따나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일까, 별난 기독교인이다.
그는 동경 유학시절,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우치무라 간지(內村鑑三)가 지도하는 무교회(無敎會)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여, 공부하였다. 후에 무교회주의를 내건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었으며, 김교신 주도로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무교회주의란 말 그대로 성직이나 조직을 거부하는 신앙이다. 종교란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그 뜻을 찾아가는 씨의 몸부림이며, 버릇’이다. 따라서 씨은 종교의 주체이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 사이엔 아무 것도 끼어들 틈이 없으며, 끼어든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게 할뿐더러 신앙을 오도할 염려 때문일 터이다.
함석헌은 1961년, 오철, 이행우 등과 함께 한국퀘이커 모임을 만듦으로써 퀘이커인이 된다. 퀘이커교는 성직도 설교도 없다. 명상과 토론 중심의 모임이다. 그럼에도 영국, 미국 퀘이커는 세계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우려왔으며, 그 공헌을 인정받아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퀘이커는 남북의 화해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함석헌이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차례나 올랐던 것도 미국퀘이커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종교는 곧 ‘생명의 버릇’이라는 그의 정의는 모든 종교에 적용된다. 그러기에 함석헌은 불교도 노장사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노불(老佛)사상을 억지로 기독교성서적으로 해석하려들지도 않을뿐더러 기독교성서를 노불사상으로 해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교섭과 조화, 즉 인류평화의 근간으로 삼고자 한다. 생명의 근본원리를 ‘고(苦)’라 한 점이나 억지로 꾸며 해서는 안 된다는 ‘무위’(無爲)사상의 강조는 그의 이해의 폭과 깊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함석헌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과학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발전된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면 ‘낡은 종교’로 떨어지게 된다며 과학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성장이라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사물’의 세계인 과학과 ‘의미’의 세계인 종교가 구분되긴 하지만 다같이 씨의 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으며, 창조론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진화론을 인정하되 그 과정과 뜻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상을 무한히 끝없는 변천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과정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끝으로,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인류공통체에 가 닿고 있다. 씨은 모두 같으며, 그 씨들의 몸부림이 곧 종교일진데 가는 길이 인류공동체인 것은 당연하다. 어느 한 종교나 국가가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씨의 어우러짐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평화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함석헌을 세계주의자, 평화주의자로 보는 까닭이다.
뜻으로 본 역사
함석헌은 식민지 때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 《성서조선》(발행인 김교신)에 연재하였다. 해방 후,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낸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서울)이다.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들이밀었다. 이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조는 문학, 예술,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이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조선의 모든 것은 헛것이 되었고, 미신으로 배척되었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인 실증사학(實證史學)에 의해 이제까지의 조선역사는 서당훈장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전락되었다. ‘실증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과학적인 접근법에 의해 5천년의 조선역사는 2천년 역사로 쪼그라들었고, 스스로 국가를 경영할 수없는 형편없는 민족으로 규정되었다. 생존경쟁에서 강한자만이 살아남듯이 국제사회에서도 강한 민족(국가)이 약한 민족(국가)을 지배,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회진화론을 내밀었다. 그럴까? 우리도 우리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했고 (영웅사관), 광활한 땅에서 웅혼(雄渾)한 역사를 펼쳤던 상고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조선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였으며, 고난의 역사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며 그 뜻을 “믿는 자의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을 가지고 해석해 본 역사가 바로 이 역사서다. “사실(史實)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긴다면서 “역사가 이렇게 흐르게 하는 밑의 정신, 뜻”을 밝히려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는 전혀 색달라서 분노와 힘을 솟구치게 하지만,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함석헌은 이 역사서를 쓸 당시에는 그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하였다. 그래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씨사상이 발전하면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생명의 버릇”이며, “정신의 숨쉼이 곧 종교”라는 깨달음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 ‘뜻’이 기독교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의 것일 수도 있다는, 넓어진 시각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뀌었고, 내용도 이에 따라 손질되었다.
함석헌의 우리말 사랑과 언론
함석헌은 1958년 여름,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한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들이댄 칼날이었다. 이 글 한 편으로 그는 당장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실로 오랜만에 침묵을 깬 것이다. 북조선의 해방공간에서 새나라 교육의 꿈을 안고 평안북도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의 일을 맡았으나 신의주학생사건(반소, 반공항쟁, 1945. 11.)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당국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자 월남(1947. 2.)한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있는듯없는듯 살아온 터였다. 그러나 그 글 때문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서대문형무소는 그가 일제당국에 의해 감옥살이를 했던 곳, 그곳에 ‘해방된 우리의 정부’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으니. 이를 계기로《사상계》와의 관계는 깊어졌다. 발행인 장준하의 튼실한 버팀목이었다. 장준하가 머뭇거릴 때면 그가 먼저 치고 나갔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상계》 1961. 7.), 소위 ‘5.16군사혁명’을 맨처음 비판한 이도 함석헌이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한낱 씨이었으니까. 군사정부와의 모질고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체포, 구금, 재판의 연속이었다. 함석헌의 팔자가 사나운 것일까, 역사가 미쳐 지랄을 한 것일까? 일제식민지 때에도 감옥살이, 해방된 북조선에서도 감방살이, ‘자유 대한’ 남한에서도 감옥살이.
조선 식민지 통치에 앞장섰던 일본군장교 출신 박정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광복군 출신 장준하를 파멸시킨다. 《사상계》는 강제 폐간되었다. 그나마 말길이 막혔다. 함석헌이 나섰다. 1970년,《씨의 소리》를 창간,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지치지 않고 강연을 하며 글을 썼고, 잡지를 창간, 운영했음에도 그는 언론인 체하지 안했다. 시집을 냈어도 시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이면서도 성직을 부정하였다. 사상가이면서도 대학 강단에 서질 안했다. 그가 꼿꼿이,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며 섰던 곳은 오직 재판정뿐이었다.
함석헌은 민중(씨)의 말투와 말씨에 철저하였다. 글도 순 한글로, 말하듯 썼다. 《사상계》에 처음 실렸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도 구어체의 순 한글로 쓰였다. 이른바 지식인 잡지로 평가 받았던 《사상계》는 물론이려니와 일간신문조차도 사회면을 빼고는 온통 한문투성이의 글로 메우던 그 때에 순 한글로 말하듯 글을 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함석헌의 이 글은 《월간조선》(2000. 7.)이 선정한 <한국의 명문>에 들었다.) 이 역시 씨의 확인이요, 씨과 함께하려는 노력이었다.
함석헌 삶의 참값
한국현대사에서 함석헌만큼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폭넓게 안으면서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있는 지성인도 흔치 않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불교와 노장사상을 받아들이고, 종교와 과학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고 있다. 과학으로서 진화론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중심에 두면서도 과정철학적 접근을 허용한다. 한마디로 규정하고 특정지울 수 없는, ‘근대 백년 논쟁의 인물’ (<교수신문>2010. 4.)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의 참값은 실천적 삶에 더 있다. 그렇다, 실천적 삶, 행(行)이다.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다지는 것도 값있는 일이지만, 보다 값진 일, 누구나 할 수 없는 가치는 행(行)에 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했거니와 이에 더해 행이 따라야 한다. 행(行)이 따르지 않는 학(學), 사(思)는 씨을 밀어내고 억압하는 도구로 떨어진다는 사실(史實)을 역사는 누누이 밝히고 있다. 학과 사는 행을 전제하며, 행을 거쳐서만이 학과 사가 더 튼튼해지고 힘을 얻게 될 터이다. 행은 다른 말로 하면 부딪침이다. 세월 좋을 때, 과연 역사에서 세월 좋은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만은 그 세월과 함께 쫄랑대고 나대는 것이 실천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 때,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무리들과 그들이 만들어 논 장치에 대드는 것, 참 실천이다. 일제에 대들고, 외군통치에 대들고, 독재체제에 대들었던 것이 참실천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 성과를 늘 지배층의 공으로 둔갑시키고 있지만, 실은 씨이 대든 역사 아니던가?
당연히 함석헌은 평생을 들사람[野人]으로 살았다. 시대와 타협하고 상황에 그럴듯하게 부합하지 않았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상황은 그로서는 도저히 타협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일제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당시로는 드믄 인재였다.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제2고보)는, 경성고보(제1고보), 대구고보(제3고보), 함흥고보(제4고보), 전주고보(제5고보) 등 일제가 각도에 세웠던 엘리트 식민교육기관이었으며,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시 일본에서도 손꼽이는 대학이었다. 그렇지만 식민교육기관을 통해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넓혀갔을지언정 그는 일제의 식민교육목적을 거부하였다. 이미 평양고보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퇴학을 당하였음은 물론 일본인 교장이 제시한 복교조건(반성문)을 단호히 거부한 데서 그의 결기를 읽을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일제하의 학벌과 경력이 그대로 힘을 발휘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야인의 길을 고집하였다. 그의 학력이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함석헌, 그는 진정 씨, 그 자체였다. 씨인 그는 언제나 씨과 함께였으며, 씨의 되어짐에 온 정신과 마음과 몸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승을 떠났다. 그의 허연 수염, 흰 두루마기는 씨의 다짐이었으며, 끊임없는 자기확인에 다름 아니었다. (*)
*이글은 <LA사람사는세상>이 마련한 <함석헌탄신111주년기념강연회>(로스앤젤레스, 2012. 3. 9.) 강연원고이다. 소개에 중점을 두었으며, 인용주는 생략하였다.
엮인글 주소 : http://www.hanism.org/han/701/c71/trackback
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http://www.hanism.org/han/7012013.01.24 14:40:53 63453143
함석헌, 누구인가? -그의 삶과 씨사상
은호기 <미국·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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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삶과 한국현대사 100년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 90여년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고난의 역사이었던 한국현대사 100년에 그대로 포개진다. 조선조의 멸망, 일본의 식민지, 해방, 외국점령군의 통치, 분단, 동족상잔, 분단체제의 국제화, 분단독재. 이 모순과 고난의 역사를 함석헌은 온몸으로 안고, 부딪치며 살아왔다. 힘들고 거친 세월이었다. 이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그는 자신을 무섭도록 단련하고 확인해왔다. 넓게 공부하고, 깊게 생각하면서도, 흰 수염 휘날리는 겉모습과는 달리 꾸밈없는 들사람의 모습으로 계산 없이 대들며, 부딪치며 살았다. 그 고비, 고비마다에서 그의 삶은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교육자, 종교인, 사상가, 언론인, 시인 등의 호칭을 얻게 되었으며, 감옥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올곧음은 민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뜻한 바나 원한 바가 아니었다. 순전히 사회가 만들어 불러준, 호칭들이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이토록 가열차게 산, 실천적 지성인이 몇이나 될까? 많이 배우고, 경지를 이룬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거개가 시대의 권력에 구부러지거나 꺾여 살았다. 자기이기를 포기한 삶. 우리의 슬픈 역사다. 함석헌의 삶이 돋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이, 무슨 생각이 그를 그토록 치열하게 살게 하였을까? 차분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한 낱말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씨. 그렇다, 씨이다. 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씨을 억압하는 무리나 장치를 뚫고 나아가 온전히 되어지려는 뜻의 역동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모순과 고난은 오히려 씨에게는 도전과 축복이었으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한 몸이 되려는 사랑과 희망이었다.
함석헌의 씨
씨이란 무엇인가? 민(民)을 말한다. 민초(民草), 풀뿌리 삶을 말한다. Grass root다. 인민을 뜻한다. People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민대중의 민중을 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씨의 값에 적확(的確)하진 않다. 함석헌의 씨은 이미 보통명사의 의미를 넘어 함석헌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으며, 함석헌 사상의 대표어이기 때문이다.
씨알이란 말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민초들이 흔하게 쓰는 말이다. 씨알이란 종자를 일컫는다. 내일의 농사를 위해서 끝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밑천이다. 구태여 떼어 설명하자면, 씨는 식물의 종자요, 알은 동물의 모체이다. 그러니까 씨알은 만물의 근원이며, 시작이랄 수도 있다.
이 씨알이란 말을 사회학적으로 처음 쓴 분이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이었다 한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씨은 유영모의 씨알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민(民)의 번역어를 뛰어넘는다. 달리 말하면, 함석헌은 평생을 씨이라는 말과 씨름하면서 살았다. 그 의미를 따지고 내용을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우렸다. 따라서 씨이라는 말에는 함석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씨은 함석헌 사상의 출발이며, 과정이며, 목표이다. 함석헌의 전부이다. 그러기에 《씨의 소리》사 편집진과 함석헌 연구가들은 ‘씨알’ 아닌 ‘씨’로 쓸 것을 주문하며, 의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ㆍ'은 내재적인 하늘 즉 자아를,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의미임을 강조한다.
씨과 종교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다. 자신의 말마따나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일까, 별난 기독교인이다.
그는 동경 유학시절,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우치무라 간지(內村鑑三)가 지도하는 무교회(無敎會)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여, 공부하였다. 후에 무교회주의를 내건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었으며, 김교신 주도로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무교회주의란 말 그대로 성직이나 조직을 거부하는 신앙이다. 종교란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그 뜻을 찾아가는 씨의 몸부림이며, 버릇’이다. 따라서 씨은 종교의 주체이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 사이엔 아무 것도 끼어들 틈이 없으며, 끼어든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게 할뿐더러 신앙을 오도할 염려 때문일 터이다.
함석헌은 1961년, 오철, 이행우 등과 함께 한국퀘이커 모임을 만듦으로써 퀘이커인이 된다. 퀘이커교는 성직도 설교도 없다. 명상과 토론 중심의 모임이다. 그럼에도 영국, 미국 퀘이커는 세계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우려왔으며, 그 공헌을 인정받아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퀘이커는 남북의 화해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함석헌이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차례나 올랐던 것도 미국퀘이커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종교는 곧 ‘생명의 버릇’이라는 그의 정의는 모든 종교에 적용된다. 그러기에 함석헌은 불교도 노장사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노불(老佛)사상을 억지로 기독교성서적으로 해석하려들지도 않을뿐더러 기독교성서를 노불사상으로 해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교섭과 조화, 즉 인류평화의 근간으로 삼고자 한다. 생명의 근본원리를 ‘고(苦)’라 한 점이나 억지로 꾸며 해서는 안 된다는 ‘무위’(無爲)사상의 강조는 그의 이해의 폭과 깊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함석헌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과학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발전된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면 ‘낡은 종교’로 떨어지게 된다며 과학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성장이라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사물’의 세계인 과학과 ‘의미’의 세계인 종교가 구분되긴 하지만 다같이 씨의 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으며, 창조론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진화론을 인정하되 그 과정과 뜻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상을 무한히 끝없는 변천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과정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끝으로,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인류공통체에 가 닿고 있다. 씨은 모두 같으며, 그 씨들의 몸부림이 곧 종교일진데 가는 길이 인류공동체인 것은 당연하다. 어느 한 종교나 국가가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씨의 어우러짐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평화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함석헌을 세계주의자, 평화주의자로 보는 까닭이다.
뜻으로 본 역사
함석헌은 식민지 때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 《성서조선》(발행인 김교신)에 연재하였다. 해방 후,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낸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서울)이다.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들이밀었다. 이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조는 문학, 예술,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이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조선의 모든 것은 헛것이 되었고, 미신으로 배척되었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인 실증사학(實證史學)에 의해 이제까지의 조선역사는 서당훈장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전락되었다. ‘실증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과학적인 접근법에 의해 5천년의 조선역사는 2천년 역사로 쪼그라들었고, 스스로 국가를 경영할 수없는 형편없는 민족으로 규정되었다. 생존경쟁에서 강한자만이 살아남듯이 국제사회에서도 강한 민족(국가)이 약한 민족(국가)을 지배,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회진화론을 내밀었다. 그럴까? 우리도 우리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했고 (영웅사관), 광활한 땅에서 웅혼(雄渾)한 역사를 펼쳤던 상고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조선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였으며, 고난의 역사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며 그 뜻을 “믿는 자의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을 가지고 해석해 본 역사가 바로 이 역사서다. “사실(史實)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긴다면서 “역사가 이렇게 흐르게 하는 밑의 정신, 뜻”을 밝히려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는 전혀 색달라서 분노와 힘을 솟구치게 하지만,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함석헌은 이 역사서를 쓸 당시에는 그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하였다. 그래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씨사상이 발전하면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생명의 버릇”이며, “정신의 숨쉼이 곧 종교”라는 깨달음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 ‘뜻’이 기독교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의 것일 수도 있다는, 넓어진 시각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뀌었고, 내용도 이에 따라 손질되었다.
함석헌의 우리말 사랑과 언론
함석헌은 1958년 여름,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한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들이댄 칼날이었다. 이 글 한 편으로 그는 당장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실로 오랜만에 침묵을 깬 것이다. 북조선의 해방공간에서 새나라 교육의 꿈을 안고 평안북도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의 일을 맡았으나 신의주학생사건(반소, 반공항쟁, 1945. 11.)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당국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자 월남(1947. 2.)한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있는듯없는듯 살아온 터였다. 그러나 그 글 때문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서대문형무소는 그가 일제당국에 의해 감옥살이를 했던 곳, 그곳에 ‘해방된 우리의 정부’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으니. 이를 계기로《사상계》와의 관계는 깊어졌다. 발행인 장준하의 튼실한 버팀목이었다. 장준하가 머뭇거릴 때면 그가 먼저 치고 나갔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상계》 1961. 7.), 소위 ‘5.16군사혁명’을 맨처음 비판한 이도 함석헌이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한낱 씨이었으니까. 군사정부와의 모질고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체포, 구금, 재판의 연속이었다. 함석헌의 팔자가 사나운 것일까, 역사가 미쳐 지랄을 한 것일까? 일제식민지 때에도 감옥살이, 해방된 북조선에서도 감방살이, ‘자유 대한’ 남한에서도 감옥살이.
조선 식민지 통치에 앞장섰던 일본군장교 출신 박정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광복군 출신 장준하를 파멸시킨다. 《사상계》는 강제 폐간되었다. 그나마 말길이 막혔다. 함석헌이 나섰다. 1970년,《씨의 소리》를 창간,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지치지 않고 강연을 하며 글을 썼고, 잡지를 창간, 운영했음에도 그는 언론인 체하지 안했다. 시집을 냈어도 시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이면서도 성직을 부정하였다. 사상가이면서도 대학 강단에 서질 안했다. 그가 꼿꼿이,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며 섰던 곳은 오직 재판정뿐이었다.
함석헌은 민중(씨)의 말투와 말씨에 철저하였다. 글도 순 한글로, 말하듯 썼다. 《사상계》에 처음 실렸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도 구어체의 순 한글로 쓰였다. 이른바 지식인 잡지로 평가 받았던 《사상계》는 물론이려니와 일간신문조차도 사회면을 빼고는 온통 한문투성이의 글로 메우던 그 때에 순 한글로 말하듯 글을 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함석헌의 이 글은 《월간조선》(2000. 7.)이 선정한 <한국의 명문>에 들었다.) 이 역시 씨의 확인이요, 씨과 함께하려는 노력이었다.
함석헌 삶의 참값
한국현대사에서 함석헌만큼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폭넓게 안으면서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있는 지성인도 흔치 않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불교와 노장사상을 받아들이고, 종교와 과학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고 있다. 과학으로서 진화론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중심에 두면서도 과정철학적 접근을 허용한다. 한마디로 규정하고 특정지울 수 없는, ‘근대 백년 논쟁의 인물’ (<교수신문>2010. 4.)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의 참값은 실천적 삶에 더 있다. 그렇다, 실천적 삶, 행(行)이다.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다지는 것도 값있는 일이지만, 보다 값진 일, 누구나 할 수 없는 가치는 행(行)에 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했거니와 이에 더해 행이 따라야 한다. 행(行)이 따르지 않는 학(學), 사(思)는 씨을 밀어내고 억압하는 도구로 떨어진다는 사실(史實)을 역사는 누누이 밝히고 있다. 학과 사는 행을 전제하며, 행을 거쳐서만이 학과 사가 더 튼튼해지고 힘을 얻게 될 터이다. 행은 다른 말로 하면 부딪침이다. 세월 좋을 때, 과연 역사에서 세월 좋은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만은 그 세월과 함께 쫄랑대고 나대는 것이 실천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 때,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무리들과 그들이 만들어 논 장치에 대드는 것, 참 실천이다. 일제에 대들고, 외군통치에 대들고, 독재체제에 대들었던 것이 참실천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 성과를 늘 지배층의 공으로 둔갑시키고 있지만, 실은 씨이 대든 역사 아니던가?
당연히 함석헌은 평생을 들사람[野人]으로 살았다. 시대와 타협하고 상황에 그럴듯하게 부합하지 않았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상황은 그로서는 도저히 타협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일제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당시로는 드믄 인재였다.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제2고보)는, 경성고보(제1고보), 대구고보(제3고보), 함흥고보(제4고보), 전주고보(제5고보) 등 일제가 각도에 세웠던 엘리트 식민교육기관이었으며,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시 일본에서도 손꼽이는 대학이었다. 그렇지만 식민교육기관을 통해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넓혀갔을지언정 그는 일제의 식민교육목적을 거부하였다. 이미 평양고보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퇴학을 당하였음은 물론 일본인 교장이 제시한 복교조건(반성문)을 단호히 거부한 데서 그의 결기를 읽을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일제하의 학벌과 경력이 그대로 힘을 발휘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야인의 길을 고집하였다. 그의 학력이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함석헌, 그는 진정 씨, 그 자체였다. 씨인 그는 언제나 씨과 함께였으며, 씨의 되어짐에 온 정신과 마음과 몸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승을 떠났다. 그의 허연 수염, 흰 두루마기는 씨의 다짐이었으며, 끊임없는 자기확인에 다름 아니었다. (*)
*이글은 <LA사람사는세상>이 마련한 <함석헌탄신111주년기념강연회>(로스앤젤레스, 2012. 3. 9.) 강연원고이다. 소개에 중점을 두었으며, 인용주는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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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ment for a New Society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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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ment for a New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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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vement for a New Society (MNS) was a U.S.-based network of social activist collectives, committed to the principles of nonviolence, who played a key role in social movements of the 1970s and 80s.
According to a description from the MNS publication, Building Social Change Communities (1979),
- Movement for a New Society (MNS) is a nationwide network of groups working for fundamental social change through nonviolent action. Together we are developing an analysis of present-day society; a vision of a decentralized, democratic and caring social order; a nonviolent revolutionary strategy; and a program based on changed values and changed lives.
Contents
[hide]History[edit]
The precursor to the MNS was A Quaker Action Group (AQAG), founded by Lawrence Scott in 1966. Dissatisfied with the response of the mainstream Quaker church to the United States involvement in theVietnam War, Scott founded AQAG with the intention of sparking a renewed commitment to the Quaker Peace Testimony.
Frustrated by their failure to achieve this end, AQAG members including Scott and Quaker George Willoughby, refashioned the group as the Movement for A New Society in 1971. Other founding members included Bill Moyer, George Lakey and Lillian Willoughby.
The members of MNS consciously sought to develop tools and strategies that could be employed to bring about revolutionary change through nonviolent means. The three-part focus of MNS included training for activists, nonviolent direct action and community. The main location for MNS activity was in West Philadelphia. Other locations included Boston, Minneapolis, Seattle, Tucson, Western Massachusetts, and more.
During the 1970s and early 1980s Philadelphia was the base for weekend, two-week and nine-month programs that trained US and international activists in direct action organizing, group process, consensus decision-making, liberation/oppression issues and more. Activist training also happened in other locations and through traveling trainers programs.
MNS did not focus its energies exclusively on one issue or injustice. Its members were involved in working for social change on many fronts, most notably in the movement to end US involvement in the Vietnam war, and during the citizen-led opposition to the expansion of the US nuclear industry in the mid to late ‘70s. MNS members were also active in the anti-nuclear weapons movement, the Pledge of Resistance (anti-US intervention in Central America), feminism, GLBTQ, community organizing, and food/worker cooperatives.
MNS was unusual in combining feminist group process, broad analysis of interrelated people's struggles including class and culture, and personal empowerment techniques ranging from music and street theater as political organizing tools to Re-Evaluation Counseling. With their group process skills, MNS members often played roles of facilitating meetings and training peacekeepers for large protests. Several MNS techniques, including small-to-large-group consensus decision making, an action structure based on affinity groups, and the idea that proper training was key to successful actions, were widely adopted by several social change movements, starting with theClamshell Alliance occupation of the Seabrook nuclear power plant construction site, continuing through the network of affinity-group-based alliances that took direct action for safe energy nationwide and worldwide, and also influencing later movements such as the 1999World Trade Organization protests in Seattle and the Occupy movement of 2011-2012. Gene Sharp, a theoretician of nonviolence with ties to MNS, was a major influence in social justice movements around the world, including the nonviolent liberation of South Africa and the Arab Spring.
The sense of community and the quality of interpersonal relationships was important to MNS members and many lived in cooperative households, practiced Revaluation Co-counseling, and went through waves of exploring issues of race, class, gender and sexual orientation. Learning from these experiences informed the training for activists. In Philadelphia many MNS members lived in cooperative houses loosely networked as the Life Center Association. Initially several buildings in Philadelphia were land trusted to serve as training centers and an organizational office and, as class consciousness grew, a number of cooperative houses were transferred to the land trust from private ownership. The land trsut was incorporated as a non-profit Life Center Association[1] and survives to this day.
Through the cooperatively owned and managed New Society Publishers, MNS members published numerous pamphlets and books providing practical advice on working for social change, as well as republishing important works on non-violence (e.g. We Are All Part of One Another a Barbara Deming Reader in 1984[2]). The publications of NSP, most notably the cooperatively authored Resource Manual for a Living Revolution (known affectionately within movement circles as the “monster manual”) were a primary source of inspiration and guidance for citizens across the United States as opposition to nuclear expansion grew, and influenced movements as far afield as the Tasmanian Wilderness Society’s campaign to prevent the damming of the Franklin River. NSP also published Marshall Rosenberg's Handbook on Nonviolent Communication which became the basis for Rosenberg's work with the Center for Nonviolent Communication.
After several years of decline, MNS was dissolved by its members in 1988. Other social change organizations declined and/or folded during this time. During harder economic times for activists during the years of the Reagan presidency, many moved from being active members of revolutionary organizations such as MNS to more mainstream organizations or to college and graduate school. Internal issues included its inability to achieve its objective of becoming multi-cultural, the lack of unifying focus for its activism, and the decline of the training programs in Philadelphia as many skilled trainers moved away. It could also be argued that MNS had achieved its primary goal of making Gandhian style non-violent action a primary method that American social change activists use to effect change.
Legacy[edit]
New Society Publishers, now based in British Columbia, continues to publish social-change related titles, with an increased emphasis on the practical aspects of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Douglas & McIntyrebought New Society Publishers in 2008. It was repurchased by the original Canadian New Society publishing group in 2013.
In 1995, members of the New Society Publishers Philadelphia office started a website, Nonviolence.org, which continues to publish resources, inspiration and analysis. Until his death in October, 2002, Bill Moyer continued to teach his influential eight-stage model for social change movements, the Movement Action Plan, to activists around the US and around the world. George Lakey, as founder of the Philadelphia-based Training for Change organisation, continued to promotenonviolence as a powerful technique for resisting injustice, along with other MNS members Betsy Raasch-Gilman and Erika Thorne. Other former MNS members (Felice Yeskel, Chuck Collins, Betsy Leondar-Wright, Jerry Koch-Gonzalez, Anne Slepian Ellinger, Christopher Mogil Ellinger) were key in founding and sustaining organizations focused on class issues, such as United for a Fair Economy, Class Action, Bolder Giving, and the Program on Inequality and the Common Good. Other MNS alumni have taken leadership in creating amore environmentally friendly and socially conscious business culture, including Shel Horowitz, Herb Ettel, and D. Dina Friedman.
References[edit]
Further reading[edit]
- Cornell, Andrew (2011). Oppose and Propose: Lessons from Movement for a New Society: AK Press. ISBN 978-1-84935-066-2
- Coover, Virginia ... [et al.] (1985). Resource Manual for a Living Revolution. Philadelphia, PA : New Society Publishers. ISBN 0-86571-015-5
External links[edit]
- New Society Publishers
- Training for Change
- The Movement Action Plan by Bill Moyer
- The Movement Action Plan by Bill Moyer (text)
- "Heaven is a mixed neighbourhood"
George Lakey | Training for Change
George Lakey | Training for Change
George Lakey, 76, was co-founder of Training for Change with Barbara Smith, and directed the group for 15 years before retiring. He has led 1,500 workshops on five continents, taught peace studies at colleges and universities, and authored seven books on nonviolent social change, peace, and organizational development. Here he was photographed in 2013 while being arrested while occupying PNC Bank to protest its funding of mountaintop removal coal mining in Appalachia.
He has led activist organizations on local, state, national, and international levels. His first time arrested was in the civil rights movement of the nineteen-sixties. During the Vietnam War he sailed into the war zone on a Quaker peace ship, to deliver medicines for suffering Vietnamese and protest the war. More recently he was part of the first team of Peace Brigades International giving protective accompaniment in Sri Lanka to human rights activists threatened with assassination.
Lakey's most recent books are Facilitating Learning Groups and Moving toward a Living Revolution. Other books include Powerful Peacemaking and Grassroots and Nonprofit Leadership: A Guide for Organizations in Changing Times. His first book, A Manual for Direct Action, was a handbook for the civil rights movement of the '60s. In 2003 he co-authored the most extensively researched training curriculum in the field of civilian peacekeeping: Opening Space for Democracy (634 pp., seewww.TrainingforChange.org). He writes a regular column for the on-line blog, WagingNonviolence.org.
He is visiting professor in peace and conflict studies at Swarthmore College, 2006- . He has taught peace studies at Haverford College, Temple University, and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in addition to giving lectures and leading seminars at universities around the world.
His training work took him illegally to a guerrilla encampment in the jungles of Burma, to the coal mine fields of West Virginia to prepare miners nonviolently for the Pittston Strike, most hard-fought coal strike in recent history, and to Cambodia within hearing range of Khmer Rouge fighting. He led peacekeeping workshops in South Africa in the midst of pre-election violence in that country.
On ten training trips to Thailand (1989-1998) he worked with pro-democracy students, environmentalists, Buddhist monks, labor organizers, and feminist organizers. Also in the 1990s he made repeated trips to the former Soviet Union to train a network of consultants and trainers for civil society.
He's led strategy workshops for labor, neighborhood, and community organizers in Taiwan and student organizers in the United Kingdom. For the United Nations Institute for Training and Research (UNITAR) in Switzerland he trained indigenous leaders in nonviolent strategy, and also worked with the Mohawk Nation near Montreal, Canada on peacekeeping techniques.
He was a presenter at the fir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nonviolence training (Perugia, Italy, 1965) and more recently trained young adult leaders from several Balkans countries at a program sponsored by the University of Bologna, Italy.
E-mail him at GeorgeLakey@yahoo.com
비폭력직접행동 - 비폭력직접행동국제전문활동가겸 훈련가 조지 레이키 방문-사진
비폭력직접행동 - 비폭력직접행동국제전문활동가겸 훈련가 조지 레이키 방문-사진
2008.05.05 08
우로부터 Daniel Hunter, George Lakey, 박성준 선생, 이행우 선생, 박성용 선생
2008.4.26. 길담서원에서
====================
George Lakey: 국제적으로 저명한 비폭력 직접행동 훈련가겸 활동가, 퀘이커
- 베트남전 반대 평화운동이후 5개 대륙에 걸쳐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1500회 이상의 강연, 650곳의 워크숍, 60여 곳의 국제적인 훈련을 위해 여행.
2008.05.05 08
우로부터 Daniel Hunter, George Lakey, 박성준 선생, 이행우 선생, 박성용 선생
2008.4.26. 길담서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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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Lakey: 국제적으로 저명한 비폭력 직접행동 훈련가겸 활동가, 퀘이커
- 베트남전 반대 평화운동이후 5개 대륙에 걸쳐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1500회 이상의 강연, 650곳의 워크숍, 60여 곳의 국제적인 훈련을 위해 여행.
-정의, 평화, 환경,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가 훈련 전문기관인 Trainging for Change의 설립자
-저서: Powerful Peacemaking, Grassroots and Nonprofit Leadership: A Guide for Organizations in Changing Times. Opening Space for Democracy
- 첫 저서인 A Manual for Direct Action은 60년대 시민운동의 유명한 경전이 되었음.
- 현재 Swarthmore College의 방문교수로서 평화와 사회변화를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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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Hunter: 비폭력 직접행동 전문 훈련가
- Training for Change 소장 역임
- 현재 Philadelphia Casino Free movement 담당자
- Opening Space for Democracy 공동저자
==================
이행우 선생: 해외 평화통일 원로/ NAKA 의장/ 퀘이커
- 종교친우봉사회(AFSC) 이사로서 존 페퍼등을 통해 한국에 갈등해결 프로그램 연결(90년말 2000년초)
- 통일운동 3자연대 미주 대표로서 그리고 AFSC대표로서 60년대부터 북한 30여차례 방문, 해외국제기구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에 농장지원.
-함석헌 선생의 제자
- 퀘이커 훈련센터인 펜들힐(Pendlehill)의 이사
-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위한 친한국 의원들을 조직하여 한국문제를 위한 모임과 포럼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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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생: 퀘이커, 비폭력 평화물결 공동대표, 길담서원 대표
박성용 선생: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비폭력훈련 훈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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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Hunter: 비폭력 직접행동 전문 훈련가
- Training for Change 소장 역임
- 현재 Philadelphia Casino Free movement 담당자
- Opening Space for Democracy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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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우 선생: 해외 평화통일 원로/ NAKA 의장/ 퀘이커
- 종교친우봉사회(AFSC) 이사로서 존 페퍼등을 통해 한국에 갈등해결 프로그램 연결(90년말 2000년초)
- 통일운동 3자연대 미주 대표로서 그리고 AFSC대표로서 60년대부터 북한 30여차례 방문, 해외국제기구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에 농장지원.
-함석헌 선생의 제자
- 퀘이커 훈련센터인 펜들힐(Pendlehill)의 이사
-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위한 친한국 의원들을 조직하여 한국문제를 위한 모임과 포럼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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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생: 퀘이커, 비폭력 평화물결 공동대표, 길담서원 대표
박성용 선생: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비폭력훈련 훈련가
Pierre Teilhard de Chardi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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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Teilhard de Char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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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Teilhard de Chard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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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 1 May 1881 Orcines, Auvergne, France |
Died | 10 April 1955 (aged 73) New York City, New York, U.S. |
Nationality | French |
Fields | Paleontology, philosophy,theology, cosmology, evolutionary theory |
Known for | The Phenomenon of Man,The Divine Milieu, the synthesis of theology and science |
Influences | St. Paul, St. John the Evangelist, Origen, St. Gregory of Nyssa, St. Ignatius of Loyola, Henri Bergson,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Friedrich Schleiermacher |
Influenced | Henri de Lubac, Thomas Berry, Theodosius Dobzhansky, Léopold Sédar Senghor, Pope Benedict XVI |
Pierre Teilhard de Chardin SJ (French: [pjɛʁ tejaʁ də ʃaʁdɛ̃] ( listen ); 1 May 1881 – 10 April 1955) was a French idealist philosopher and Jesuit priest who trained as apaleontologist and geologist and took part in the discovery of Peking Man. He conceived the idea of the Omega Point (a maximum level of complexity and consciousness towards which he believed the universe was evolving) and developed Vladimir Vernadsky's concept ofnoosphere.
During his lifetime, many of Teilhard's writings were censored by the Catholic Church because of his views on original sin. Recently Teilhard has been praised by Pope Benedict XVI and other eminent Catholic figures. The response to his writings by evolutionary biologists has been, with some exceptions, decidedly negative.
Contents
[hide]Life
Early years
Pierre Teilhard de Chardin was born in the Château of Sarcenat at Orcines, close toClermont-Ferrand, France, on May 1, 1881. On the Teilhard side he is descended from an ancient family of magistrates from Auvergne originating in Murat, Cantal, and on the de Chardin side he is descended from a family that was ennobled under Louis XVIII. He was the fourth of eleven children. His father, Emmanuel Teilhard (1844–1932), an amateur naturalist, collected stones, insects and plants and promoted the observation of nature in the household. Pierre Teilhard's spirituality was awakened by his mother, Berthe de Dompiere. When he was 12, he went to the Jesuit college of Mongré, in Villefranche-sur-Saône, where he completed baccalaureates of philosophyand mathematics. Then, in 1899, he entered the Jesuit novitiate at Aix-en-Provence, where he began a philosophical, theological and spiritual career.
As of the summer 1901, the Waldeck-Rousseau laws, which submitted congregational associations' properties to state control, prompted some of the Jesuits to exile themselves in the United Kingdom. Young Jesuit students continued their studies inJersey. In the meantime, Teilhard earned a licentiate in literature in Caen in 1902.
Academic career
From 1905 to 1908, he taught physics and chemistry in Cairo, Egypt, at the JesuitCollege of the Holy Family. He wrote "... it is the dazzling of the East foreseen and drunk greedily ... in its lights, its vegetation, its fauna and its deserts." (Letters from Egypt (1905–1908) — Éditions Aubier)
Teilhard studied theology in Hastings, in Sussex (United Kingdom), from 1908 to 1912. There he synthesized his scientific,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knowledge in the light of evolution. His reading of L'Évolution Créatrice (The Creative Evolution) by Henri Bergson was, he said, the "catalyst of a fire which devoured already its heart and its spirit." Teilhard was ordained a priest on August 24, 1911, at age 30.
Paleontology
From 1912 to 1914, Teilhard worked in the paleontology laboratory of the Muse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 in Paris, studying the mammals of the middle Tertiaryperiod. Later he studied elsewhere in Europe. In June 1912 he formed part of the original digging team, with Arthur Smith Woodward and Charles Dawson at thePiltdown site, after the discovery of the first fragments of the (fraudulent) "Piltdown Man", with some even suggesting he participated in the hoax.[1][2] Professor Marcellin Boule (specialist in Neanderthal studies), who so early as 1915 astutely recognized the non-hominid origins of the Piltdown finds, gradually guided Teilhard towards human paleontology. At the museum's Institute of Human Paleontology, he became a friend ofHenri Breuil and took part with him, in 1913, in excavations at the prehistoric paintedCaves of Castillo in the northwest of Spain.
Service in World War I
Mobilised in December 1914, Teilhard served in World War I as a stretcher-bearer in the 8th Moroccan Rifles. For his valour, he received several citations including theMédaille militaire and the Legion of Honour.
Throughout these years of war he developed his reflections in his diaries and in letters to his cousin, Marguerite Teillard-Chambon, who later edited them into a book: Genèse d'une pensée (Genesis of a thought). He confessed later: "...the war was a meeting ... with the Absolute." In 1916, he wrote his first essay: La Vie Cosmique (Cosmic life), where his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thought was revealed just as his mystical life. He pronounced his solemn vows as a Jesuit in Sainte-Foy-lès-Lyon, on May 26, 1918, during a leave. In August 1919, in Jersey, he would write Puissance spirituelle de la Matière (The Spiritual Power of Matter).
Teilhard followed at the Sorbonne three unit degrees of natural science: geology,botany and zoology. His thesis treated of the mammals of the French lower Eoceneand their stratigraphy. After 1920, he lectured in geology at the Catholic Institute of Paris, then became an assistant professor after being granted a science doctorate in 1922.
Research in China
In 1923, he travelled to China with Father Emile Licent, who was in charge in Tianjin of a significant laboratory collaboration between the Natural History Museum inParis and Marcellin Boule's laboratory. Licent carried out considerable basic work in connection with missionarieswho accumulated observations of a scientific nature in their spare time. He was known as 德日進 (pinyin: Dérìjìn) in China.
Teilhard wrote several essays, including La Messe sur le Monde (the Mass on the World), in the Ordos Desert. In the following year he continued lecturing at the Catholic Institute and participated in a cycle of conferences for the students of the Engineers' Schools. Two theological essays on Original Sin sent to a theologian at his request on a purely personal basis were wrongly understood.
- July 1920: Chute, Rédemption et Géocentrie (Fall, Redemption and Geocentry)
- Spring 1922: Notes sur quelques représentations historiques possibles du Péché originel (Note on Some Possible Historical Representations of Original Sin) (Works, Tome X)
The Church required him to give up his lecturing at the Catholic Institute and to continue his geological research in China.
Teilhard traveled again to China in April 1926. He would remain there more or less twenty years, with many voyages throughout the world. He settled until 1932 inTientsin with Emile Licent then in Beijing. From 1926 to 1935, Teilhard made five geological research expeditions in China. They enabled him to establish a general geological map of China.
In 1926, Teilhard’s superiors in the Jesuit Order forbade him to teach any longer. In 1926–1927 after a missed campaign in Gansu, he traveled in the Sang-Kan-Ho valley near Kalgan (Zhangjiakou) and made a tour in Eastern Mongolia. He wrote Le Milieu Divin (The Divine Milieu). Teilhard prepared the first pages of his main work Le Phénomène Humain (The Human Phenomenon). The Holy See refused the Imprimatur for Le Milieu Divin in 1927.
He joined the ongoing excavations of the Peking Man Site at Zhoukoudian as an advisor in 1926 and continued in the role for the Cenozoic Research Laboratory of theGeological Survey of China following its founding in 1928.
He resided in Manchuria with Emile Licent, then stayed in Western Shansi (Shanxi) and northern Shensi (Shaanxi) with the Chinese paleontologist C. C. Young and withDavidson Black, Chairman of the Geological Survey of China.
After a tour in Manchuria in the area of Great Khingan with Chinese geologists, Teilhard joined the team of American Expedition Center-Asia in the Gobi Desertorganised in June and July, by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with Roy Chapman Andrews.
Henri Breuil and Teilhard discovered that the Peking Man, the nearest relative ofPithecanthropus from Java, was a faber (worker of stones and controller of fire). Teilhard wrote L'Esprit de la Terre (the Spirit of the Earth).
Teilhard took part as a scientist in the Croisiere Jaune (Yellow Cruise) financed byAndré Citroën in Central Asia. Northwest of Beijing in Kalgan, he joined the Chinese group who joined the second part of the team, the Pamir group, in Aksu. He remained with his colleagues for several months in Urumqi, capital of Sinkiang. The following year the Sino-Japanese War (1937–1945) began.
In 1933, Rome ordered him to give up his post in Paris.
Teilhard undertook several explorations in the south of China. He traveled in the valleys of Yangtze River and Sichuan in 1934, then, the following year, in Kwang-If andGuangdong. The relationship with Marcellin Boule was disrupted; the museum cut its financing on the grounds that Teilhard worked more for the Chinese Geological Service than for the museum.
During all these years, Teilhard strongly contributed to the constitution of an international network of research in human paleontology related to the whole Eastern and south Eastern zone of the Asian continent. He would be particularly associated in this task with two friends, the English/Canadian Davidson Black and the Scot George B. Barbour. Many times he would visit France or the United States only to leave these countries to go on further expeditions.
World travels
From 1927 to 1928, Teilhard stayed in France, based in Paris. He journeyed to Leuven, Belgium, to Cantal, and to Ariège, France. Between several articles in reviews, he met new people such as Paul Valéry and Bruno de Solages, who were to help him in issues with theCatholic Church.
Answering an invitation from Henry de Monfreid, Teilhard undertook a journey of two months in Obock, in Harrar and in Somalia with his colleague Pierre Lamarre, a geologist, before embarking in Djibouti to return to Tianjin. While in China, Teilhard developed a deep and personal friendship with Lucile Swan.[3]
From 1930–1931, Teilhard stayed in France and in the United States. During a conference in Paris, Teilhard stated: "For the observers of the Future, the greatest event will be the sudden appearance of a collective humane conscience and a human work to make."
From 1932–1933, he began to meet people to clarify issues with 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regarding Le Milieu divin and L'Esprit de la Terre. He metHelmut de Terra, a German geologist in the International Geology Congress inWashington, DC.
Teilhard participated in the 1935 Yale–Cambridge expedition in northern and centralIndia with the geologist Helmut de Terra and Patterson, who verified their assumptions on Indian Paleolithic civilisations in Kashmir and the Salt Range Valley. He then made a short stay in Java, on the invitation of Professor Ralph van Koenigswald to the site ofJava man. A second cranium, more complete, was discovered. This Dutchpaleontologist had found (in 1933) a tooth in a Chinese apothecary shop in 1934 that he believed belonged to a giant tall ape that lived around half a million years ago.
In 1937, Teilhard wrote Le Phénomène spirituel (The Phenomenon of the Spirit) on board the boat the Empress of Japan, where he met the Raja of Sarawak. The ship conveyed him to the United States. He received the Mendel Medal granted by Villanova University during the Congress of Philadelphia in recognition of his works on human paleontology. He made a speech about evolution, origins and the destiny of Man. TheNew York Times dated March 19, 1937 presented Teilhard as the Jesuit who held thatman descended from monkeys. Some days later, he was to be granted the Doctor Honoris Causa distinction from Boston College. Upon arrival in that city, he was told that the award had been cancelled.
1939: Rome banned his work L’Énergie Humaine.
He then stayed in France, where he was immobilized by malaria. During his return voyage to Beijing he wrote L'Energie spirituelle de la Souffrance (Spiritual Energy of Suffering) (Complete Works, tome VII).
1941: Teilhard submitted to Rome his most important work, Le Phénomène Humain.
1947: Rome forbade him to write or teach on philosophical subjects.
1948: Teilhard was called to Rome by the Superior General of the Jesuits who hoped to acquire permission from the Holy See for the publication of his most important work Le Phénomène Humain. But the prohibition to publish it issued in 1944, was again renewed. Teilhard was also forbidden to take a teaching post in the College de France.
1949: Permission to publish Le Groupe Zoologique was refused.
1950: Teilhard was named to the French Academy of Sciences.
1955: Teilhard was forbidden by his Superiors to attend 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Paleontology.
1957: The Supreme Authority of the Holy Office, in a decree dated 15 November 1957, forbade the works of de Chardin to be retained in libraries, including those of religious institutes. His books were not to be sold in Catholic bookshops and were not to be translated into other languages.
1958: In April of this year, all Jesuit publications in Spain ("Razón y Fe", "Sal Terrae","Estudios de Deusto") etc., carried a notice from the Spanish Provincial of the Jesuits that Teilhard's works had been published in Spanish without previous ecclesiastical examination and in defiance of the decrees of the Holy See.
1962: A decree of the Holy Office dated 30 June, under the authority of Pope John XXIII warned that "... it is obvious that in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matters, the said works [Teilhard’s] are replete with ambiguities or rather with serious errors which offend Catholic doctrine. That is why... the Rev. Fathers of the Holy Office urge all Ordinaries, Superiors, and Rectors... to effectively protect, especially the minds of the young, against the dangers of the works of Fr. Teilhard de Chardin and his followers". (AAS, 6 August 1962).
1963: The Vicariate of Rome (a diocese ruled in the name of Pope Paul VI (who had just become Pope in 1963) by his Cardinal Vicar) in a decree dated 30 September, required that Catholic booksellers in Rome should withdraw from circulation the works of Teilhard, together with those books which favour his erroneous doctrines. The text of this document was published in daily L’Aurore of Paris, dated 2 October 1963, and was reproduced in Nouvelles De Chrétienté, 10 October 1963, p. 35.
Death
Pierre Teilhard de Chardin died in New York City, where he was in residence at the Jesuit Church of St. Ignatius Loyola, Park Avenue. On March 15, 1955, at the house of his diplomat cousin Jean de Lagarde, Teilhard told friends he hoped he would die on Easter Sunday.[4] In the Easter Sunday evening of April 10, 1955, during an animated discussion at the apartment of Rhoda de Terra, his personal assistant since 1949, the 73-year-old priest suffered a heart attack; regaining consciousness for a moment, he died a few minutes later.[5] He was buried in the cemetery for the New York Province of the Jesuits at the Jesuit novitiate, St. Andrew's-on-the-Hudson in Poughkeepsie,upstate New York.[6]
Teachings
His posthumously published book, The Phenomenon of Man, sets forth a sweeping account of the unfolding of the cosmos and the evolution of matter to humanity, to ultimately a reunion with Christ. In the book, Teilhard abandoned literal interpretations of creation in the Book of Genesis in favor of allegorical and theological interpretations. The unfolding of the material cosmos, is described from primordial particles to the development of life, human beings and the noosphere, and finally to his vision of theOmega Point in the future, which is "pulling" all creation towards it. He was a leading proponent of orthogenesis, the idea that evolution occurs in a directional, goal-driven way, argued in terms that today go under the banner of convergent evolution. Teilhard argued in Darwinian terms with respect to biology, and supported the synthetic model of evolution, but argued in Lamarckian terms for the development of culture, primarily through the vehicle of education.[8] Teilhard made a total commitment to the evolutionary process in the 1920s as the core of his spirituality, at a time when other religious thinkers felt evolutionary thinking challenged the structure of conventional Christian faith. He committed himself to what the evidence showed.[9]
Teilhard makes sense of the universe by its evolutionary process. He interprets complexity as the axis of evolution of matter into a geosphere, a biosphere, into consciousness (in man), and then to supreme consciousness (the Omega Point.)
Teilhard’s unique relationship to both paleontology and Catholicism allowed him to develop a highly progressive, cosmic theology which takes into account his evolutionary studies. Teilhard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bringing the Church into the modern world, and approached evolution as a way of providing ontological meaning for Christianity, particularly creation theology.[10] For Teilhard, evolution was "the natural landscape where the history of salvation is situated."[11]
Teilhard’s cosmic theology is largely predicated on his interpretation of Pauline scripture, particularly Colossians 1:15-17 (especially verse 1:17b) and 1Corinthians 15:28. Teilhard draws on the Christocentrism of these two Pauline passages to construct a cosmic theology which recognizes the absolute primacy of Christ. He understands creation to be "a teleological process towards union with the Godhead, effected through the incarnation and redemption of Christ, ‘in whom all things hold together’ (Col. 1:17)."[12] He further posits that creation will not be complete until "participated being is totally united with God through Christ in the Pleroma, when God will be ‘all in all’ (1Cor. 15:28)."[12]
Teilhard's life work was predicated on the conviction that human spiritual development is moved by the same universal laws as material development. He wrote, "...everything is the sum of the past" and "...nothing is comprehensible except through its history. 'Nature' is the equivalent of 'becoming', self-creation: this is the view to which experience irresistibly leads us. ... There is nothing, not even the human soul, the highest spiritual manifestation we know of, that does not come within this universal law."[13] There is no doubt that The Phenomenon of Man represents Teilhard's attempt at reconciling his religious faith with his academic interests as apaleontologist.[14] One particularly poignant observation in Teilhard's book entails the notion that evolution is becoming an increasingly optional process.[14] Teilhard points to the societal problems of isolation and marginalization as huge inhibitors of evolution, especially since evolution requires a unification of consciousness. He states that "no evolutionary future awaits anyone except in association with everyone else."[14] Teilhard argued that the human condition necessarily leads to the psychic unity of humankind, though he stressed that this unity can only be voluntary; this voluntary psychic unity he termed "unanimization." Teilhard also states that "evolution is an ascent toward consciousness", giving encephalization as an example of early stages, and therefore, signifies a continuous upsurge toward the Omega Point,[14]which for all intents and purposes, is God.
Teilhard also used his perceived correlation between spiritual and material to describe Christ, arguing that Christ not only has a mystical dimension, but also takes on a physical dimension as he becomes the organizing principle of the universe—that is, the one who "holds together" the universe (Col. 1:17b). For Teilhard, Christ forms not only the eschatological end toward which his mystical/ecclesial body is oriented, but he also "operates physically in order to regulate all things"[15] becoming "the one from whom all creation receives its stability."[16] In other words, as the one who holds all things together, "Christ exercises a supremacy over the universe which is physical, not simply juridical. He is the unifying centre of the universe and its goal. The function of holding all things together indicates that Christ is not only man and God; he also possesses a third aspect—indeed, a third nature—which is cosmic."[17] In this way, the Pauline description of the Body of Christ is not simply a mystical or ecclesial concept for Teilhard; it is cosmic. This cosmic Body of Christ "extend[s] throughout the universe and compris[es] all things that attain their fulfillment in Christ [so that] . . . the Body of Christ is the one single thing that is being made in creation."[18] Teilhard describes this cosmic amassing of Christ as "Christogenesis." According to Teilhard, the universe is engaged in Christogenesis as it evolves toward its full realization at Omega, a point which coincides with the fully realized Christ.[12] It is at this point that God will be ‘all in all’ (1Cor. 15:28c).
Our century is probably more religious than any other. How could it fail to be, with such problems to be solved? The only trouble is that it has not yet found a God it can adore.[14]
Relationship with the Catholic Church
In 1925, Teilhard was ordered by the Jesuit Superior General Wlodimir Ledóchowski to leave his teaching position in France and to sign a statement withdrawing his controversial statements regarding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Rather than leave the Jesuit order, Teilhard signed the statement and left for China.
This was the first of a series of condemnations by certain ecclesiastical officials that would continue until after Teilhard's death. The climax of these condemnations was a 1962 monitum (reprimand) of the Holy Office cautioning on Teilhard's works. It said in part:[19]
The above-mentioned works abound in such ambiguities and indeed even serious errors, as to offend Catholic doctrine... For this reason, the most eminent and most revered Fathers of the Holy Office exhort all Ordinaries as well as the superiors of Religious institutes, rectors of seminaries and presidents of universities, effectively to protect the minds, particularly of the youth, against the dangers presented by the works of Fr. Teilhard de Chardin and of his followers.
The Holy Office did not place any of Teilhard's writings on the Index Librorum Prohibitorum (Index of Forbidden Books), which existed during Teilhard's lifetime and at the time of the 1962 decree.
Shortly thereafter, prominent clerics mounted a strong theological defense of Teilhard's works. Henri de Lubac (later a Cardinal) wrote three comprehensive books on the theology of Teilhard de Chardin in the 1960s. While de Lubac mentioned that Teilhard was less than precise in some of his concepts, he affirmed the orthodoxy of Teilhard de Chardin and responded to Teilhard's critics: "We need not concern ourselves with a number of detractors of Teilhard, in whom emotion has blunted intelligence".[20] Later that decade Joseph Ratzinger, a German theologian who became Pope Benedict XVI, spoke glowingly of Teilhard's Christology in Ratzinger's Introduction to Christianity:[21]
It must be regarded as an important service of Teilhard de Chardin’s that he rethought these ideas from the angle of the modern view of the world and, in spite of a not entirely unobjectionable tendency toward the biological approach, nevertheless on the whole grasped them correctly and in any case made them accessible once again. Let us listen to his own words: The human monad "can only be absolutely itself by ceasing to be alone". In the background is the idea that in the cosmos, alongside the two orders or classes of the infinitely small and the infinitely big, there is a third order, which determines the real drift of evolution, namely, the order of the infinitely complex. It is the real goal of the ascending process of growth or becoming; it reaches a first peak in the genesis of living things and then continues to advance to those highly complex creations that give the cosmos a new center: "Imperceptible and accidental as the position they hold may be in the history of the heavenly bodies, in the last analysis the planets are nothing less than the vital points of the universe. It is through them that the axis now runs, on them is henceforth concentrated the main effort of an evolution aiming principally at the production of large molecules." The examination of the world by the dynamic criterion of complexity thus signifies "a complete inversion of values. A reversal of the perspective...This leads to a further passage in Teilhard de Chardin that is worth quoting in order to give at least some indication here, by means of a few fragmentary excerpts, of his general outlook. "The Universal Energy must be a Thinking Energy if it is not to be less highly evolved than the ends animated by its action. And consequently ... the attributes of cosmic value with which it is surrounded in our modern eyes do not affect in the slightest the necessity obliging us to recognize in it a transcendent form of Personality.
Over the next several decades prominent theologians and Church leaders, including leading Cardinals, Pope John Paul II and Pope Benedict XVI all wrote approvingly of Teilhard's ideas. In 1981, Cardinal Agostino Casaroli, on behalf of Pope John Paul II, wrote on the front page of the Vatican newspaper, l'Osservatore Romano:
"What our contemporaries will undoubtedly remember, beyond the difficulties of conception and deficiencies of expression in this audacious attempt to reach a synthesis, is the testimomy of the coherent life of a man possessed by Christ in the depths of his soul. He was concerned with honoring both faith and reason, and anticipated the response to John Paul II's appeal: 'Be not afraid, open, open wide to Christ the doors of the immense domains of culture, civilization, and progress.[22]
Cardinal Avery Dulles, S.J. said in 2004:[23]
In his own poetic style, the French Jesuit Teilhard de Chardin liked to meditate on the Eucharist as the first fruits of the new creation. In an essay called The Monstrance he describes how, kneeling in prayer, he had a sensation that the Host was beginning to grow until at last, through its mysterious expansion, 'the whole world had become incandescent, had itself become like a single giant Host.' Although it would probably be incorrect to imagine that the universe will eventually be transubstantiated, Teilhard correctly identified the connection between the Eucharist and the final glorification of the cosmos.
Cardinal Christoph Schönborn wrote in 2007:[24]
Hardly anyone else has tried to bring together the knowledge of Christ and the idea of evolution as the scientist (paleontologist) and theologian Fr. Pierre Teilhard de Chardin, S.J., has done. ... His fascinating vision ... has represented a great hope, the hope that faith in Christ and a scientific approach to the world can be brought together. ... These brief references to Teilhard cannot do justice to his efforts. The fascination which Teilhard de Chardin exercised for an entire generation stemmed from his radical manner of looking at science and Christian faith together.
Pope Benedict XVI, in his book Spirit of the Liturgy incorporates Teilhard's vision as a touchstone of the Catholic Mass:[25]
And so we can now say that the goal of worship and the goal of creation as a whole are one and the same—divinization, a world of freedom and love. But this means that the historical makes its appearance in the cosmic. The cosmos is not a kind of closed building, a stationary container in which history may by chance take place. It is itself movement, from its one beginning to its one end. In a sense, creation is history.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modern evolutionary world view, Teilhard de Chardin depicted the cosmos as a process of ascent, a series of unions. From very simple beginnings the path leads to ever greater and more complex unities, in which multiplicity is not abolished but merged into a growing synthesis, leading to the "Noosphere", in which spirit and its understanding embrace the whole and are blended into a kind of living organism. Invoking the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Colossians, Teilhard looks on Christ as the energy that strives toward the Noosphere and finally incorporates everything in its "fullness’. From here Teilhard went on to give a new meaning to Christian worship: the transubstantiated Host is the anticipation of the transformation and divinization of matter in the christological "fullness". In his view, the Eucharist provides the movement of the cosmos with its direction; it anticipates its goal and at the same time urges it on.
in July 2009, Vatican spokesman Fr. Federico Lombardi said, "By now, no one would dream of saying that [Teilhard] is a heterodox author who shouldn’t be studied."[26]
Evaluations by scientists
According to Daniel Dennett, "it has become clear to the point of unanimity among scientists that Teilhard offered nothing serious in the way of an alternative to orthodoxy; the ideas that were peculiarly his were confused, and the rest was just bombastic redescription of orthodoxy."[28]
In 1961, the Nobel Prize-winner Peter Medawar, a British immunologist, wrote a scornful review of The Phenomenon Of Man for the journal Mind:[29] "the greater part of it, I shall show, is nonsense, tricked out with a variety of metaphysical conceits, and its author can be excused of dishonesty only on the grounds that before deceiving others he has taken great pains to deceive himself".
The evolutionary biologist Richard Dawkins called Medawar's review "devastating" andThe Phenomenon of Man "the quintessence of bad poetic science".[30] Similarly,Steven Rose wrote that "Teilhard is revered as a mystic of genius by some, but amongst most biologists is seen as little more than a charlatan."[31]
Sir Julian Huxley, the evolutionary biologist, praised the thought of Teilhard de Chardin for looking at the way in which human development needs to be examined within a larger integrated universal sense of evolution.[32] Theodosius Dobzhansky drew upon Teilhard's insistence that evolutionary theory provides the core of how man understands his relationship to nature, calling him "one of the great thinkers of our age".[33]
George Gaylord Simpson, however, felt that if Teilhard were right, the lifework "of Huxley, Dobzhansky, and hundreds of others was not only wrong, but meaningless", and was mystified by their public support for him.[34] He considered Teilhard a friend and his work in paleontology extensive and important, but expressed strongly adverse views of his contributions as scientific theorist and philosopher.[35]
David Sloan Wilson, an evolutionary biologist, wrote that Teilhard has been "largely forgotten as a scientist" but believes that he remains "amazingly relevan[t]" and anticipated his own work in multilevel selection theory.[36]
Legacy
Brian Swimme wrote "Teilhard was one of the first scientists to realize that the human and the universe are inseparable. The only universe we know about is a universe that brought forth the human." [37]
Pierre Teilhard de Chardin is honored with a feast day on the liturgical calendar of the Episcopal Church (USA) on April 10.[38] George Gaylord Simpson named the most primitive and ancient genus of true primate, the Eocene genus Teilhardina.
Teilhard and his work continue to influence the arts and culture. Characters based on Teilhard appear in several novels, including Jean Telemond in Morris West's The Shoes of the Fisherman[39] (mentioned by name and quoted by Oskar Werner playing Fr. Telemond in the movie version of the novel) and Father Lankester Merrin in William Peter Blatty's The Exorcist.[40] In Dan Simmons' 1989–97 Hyperion Cantos, Teilhard de Chardin has been canonized a saint in the far future. His work inspires theanthropologist priest character, Paul Duré. When Duré becomes Pope, he takesTeilhard I as his regnal name.[41] Teilhard appears as a minor character in the playFake by Eric Simonson, staged by Chicago's Steppenwolf Theatre Company in 2009, involving a fictional solution to the infamous Piltdown Man hoax.
References range from occasional quotations—an auto mechanic quotes Teilhard inPhilip K. Dick's A Scanner Darkly[42] – to serving as the philosophical underpinning of the plot, as Teilhard's work does in Julian May's 1987–94 Galactic Milieu Series.[43]Teilhard also plays a major role in Annie Dillard's 1999 For the Time Being.[44] Teilhard is mentioned by name and the Omega Point briefly explained in Arthur C. Clarke's andStephen Baxter's The Light of Other Days.[45] The title of the short-story collection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 by Flannery O'Connor is a reference to Teilhard's work. The American novelist Don DeLillo's 2010 novel Point Omega borrows its title and some of its ideas from Teilhard de Chardin. Robert Wright, in his book Nonzero: The Logic of Human Destiny, compares his own naturalistic thesis that biological and cultural evolution are directional and, possibly, purposeful, with Teilhard's ideas.
Teilhard's work also inspired philosophical ruminations by Italian laureate architectPaolo Soleri, artworks such as French painter Alfred Manessier's L'Offrande de la terre ou Hommage à Teilhard de Chardin and American sculptor Frederick Hart's acrylicsculpture The Divine Milieu: Homage to Teilhard de Chardin.[46] A sculpture of the Omega Point by Henry Setter, with a quote from Teilhard de Chardin, can be found at the entrance to the Roesch Library at the University of Dayton.[47] Edmund Rubbra's 1968 Symphony No. 8 is titled Hommage à Teilhard de Chardin.
Several college campuses honor Teilhard. A building at the University of Manchester is named after him, as are residence dormitories at Gonzaga University and Seattle University.
The De Chardin Project, a play celebrating Teilhard's life, ran from November 20 to December 14, 2014 in Toronto, Canada.[48] The Evolution of Teilhard de Chardin, a documentary film on Teilhard's life, is expected to be released in 2015.[48]
Influence on the New Age movement
Teihard ha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New Age movement and has been described as "perhaps the man most responsible for the spritiualization of evolution in a global and cosmic context".[49] New Age figure and self-described evolutionary biologist Jeremy Griffith described Teilhard as a "visionary" philosopher and a contemporary "truth-sayer" or "prophet".[50]
Bibliography
The dates in parentheses are the dates of first publication in French and English. Most of these works were written years earlier, but Teilhard's ecclesiastical order forbade him to publish them because of their controversial nature. The essay collections are organized by subject rather than date, thus each one typically spans many years.
- Le Phénomène Humain (1955), written 1938–40, scientific exposition of Teilhard's theory of evolution
- The Phenomenon of Man (1959), Harper Perennial 1976: ISBN 0-06-090495-X. Reprint 2008: ISBN 978-0-06-163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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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Groupe Zoologique Humain (1956), written 1949, more detailed presentation of Teilhard's theories
- Man's Place in Nature (English translation 1966)
- Le Milieu Divin (1957), spiritual book written 1926–27, in which the author seeks to offer a way for everyday life, or the secular, to be divinised.
- The Divine Milieu (1960) Harper Perennial 2001: ISBN 0-06-093725-4
- L'Avenir de l'Homme (1959) essays written 1920–52, on the evolution of consciousness (noosphere)
- The Future of Man (1964) Image 2004: ISBN 0-385-51072-1
- Hymn of the Universe (1961; English translation 1965) Harper and Row: ISBN 0-06-131910-4, mystical/spiritual essays and thoughts written 1916–55
- L'Energie Humaine (1962), essays written 1931–39, on morality and love
- Human Energy (1969) Harcort Brace Jovanovich ISBN 0-15-642300-6
- L'Activation de l'Energie (1963), sequel to Human Energy, essays written 1939–55 but not planned for publication, about the universality and irreversibility of human action
- Activation of Energy (1970), Harvest/HBJ 2002: ISBN 0-15-602817-4
- Je M'Explique (1966) Jean-Pierre Demoulin, editor ISBN 0-685-36593-X, "The Essential Teilhard" — selected passages from his works
- Let Me Explain (1970) Harper and Row ISBN 0-06-061800-0, Collins/Fontana 1973: ISBN 0-00-623379-1
- Christianity and Evolution, Harvest/HBJ 2002: ISBN 0-15-602818-2
- The Heart of the Matter, Harvest/HBJ 2002: ISBN 0-15-602758-5
- Toward the Future, Harvest/HBJ 2002: ISBN 0-15-602819-0
- The Making of a Mind: Letters from a Soldier-Priest 1914–1919, Collins (1965), Letters written during wartime.
- Writings in Time of War, Collins (1968) composed of spiritual essays written during wartime. One of the few books of Teilhard to receive an imprimatur.
- Vision of the Past, Collins (1966) composed of mostly scientific essays published in the French science journal Etudes.
- The Appearance of Man, Collins (1965) composed of mostly scientific writings published in the French science journal Etudes.
- Letters to Two Friends 1926–1952, Fontana (1968). Composed of personal letters on varied subjects including his understanding of death. See Letters to Two Friends 1926–1952. Helen Weaver (translation). ISBN 9780853911432.OCLC 30268456.
- Letters to Léontine Zanta, Collins (1969)
- Correspondence / Pierre Teilhard de Chardin, Maurice Blondel, Herder and Herder (1967) This correspondence also has both the imprimatur and nihil obst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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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also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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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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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pe Benedict XVI, The Spirit of the Liturgy (Ignatian Press 2000)
- Pope Benedict XVI, Introduction to Christianity (Ignatius Press, Revised edition, 2004)
- John Cowburn, S.J., Pierre Teilhard de Chardin, a Selective Summary of His Life (Mosaic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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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ablers, T.C., 2015. 'Hominising - Realising Human Potential'. Available:http://www.laceweb.org.au/rhp.htm
- Robert Faricy, SJ, Teilhard de Chardin's Theology of Christian in the World (Sheed and Ward 1968)
- Robert Faricy, SJ, The Spirituality of Teilhard de Chardin (Collins 1981, Harper & Row 1981)
- Robert Faricy, SJ and Lucy Rooney SND,Praying with Teilhard de Chardin(Queenship 1996)
- David Grumett, Teilhard de Chardin: Theology, Humanity and Cosmos (Peeter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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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trich von Hildebrand, Trojan Horse in the City of God
- Dietrich von Hildebrand, Devastated Viney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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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sula King, Spirit of Fire: The Life and Vision of Teilhard de Chardin [1](Orbis Book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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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H. Lane, The Phenomenon of Teilhard: Prophet for a New Age (Mercer University Press)
- Lubac, Henri de, SJ, The Religion of Teilhard de Chardin (Image Books,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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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bac, Henri de, SJ, The Eternal Feminine: A Study of the Text of Teilhard de Chardin (Collins, 1971)
- Lubac, Henri de, SJ, Teilhard Explained(Paulist Press, 1968)
- Mary and Ellen Lukas, Teilhard(Doubleday, 1977)
- Jean Maalouf Teilhard de Chardin, Reconciliation in Christ (New City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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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F. Salmon, S.J., 'Pierre Teilhard de Chardin' in The Blackwell Companion to Science and Christianity (Wiley-Blackwell, 2012)
- Louis M. Savory, Teilhard de Chardin – The Divine Milieu Explained: A Spirituality for the 21st Century (Paulist Press, 2007)
- Robert Speaight, The Life of Teilhard de Chardin (Harper and Row, 1967)
- Helmut de Terra, Memories of Teilhard de Chardin, (Harper and Row and Wm Collins Sons & Co., 1964)
External links
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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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quote has quotations related to:Pierre Teilhard de Chardin |
- Works by or about Pierre Teilhard de Chardin at Internet Archive
- Teilhard de Chardin (A site devoted to the ideas of Teilhard de Chardin)
- The Teilhard de Chardin Foundation
- The American Teilhard Association
- Teilhard de Chardin A personal website
Contra
- Warning Regarding the Writings of Father Teilhard de Chardin The Sacred Congregation of the Holy Office, 1962
- Medawar, Peter (1961). "A review of The Phenomenon of Man". Mind. 70: 99–106.
- McCarthy, John F. ♦ A review of Teilhardism and the New Religion by Wolfgang Smith 1989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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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istic evolutionists
- University of Paris alumni
- Villanova University alu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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