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묘지도
작성자 환공(桓公)|
작성시간19.11.04|
조회수85
현묘지도
국유현묘지도 왈 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모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읍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나라에 현묘지도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
설교의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있다.
들어오면 집에서 효이고 나가면 나라에 충이니 노사구의 가르침이고
함이 없으면서 일하고 말없이 행하며 가르치니 주주사의 종지이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봉행하니 축건태자의 화함이다.
이런 글이 생소한 사람은 너무 생소한 것이고
익숙한 사람에겐 또 너무 익숙한 말이다.
난 이걸 접하긴 오래전인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이 저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노자나 부처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할 정도로 내가 알지를 못하겠다.
그래서 이런 말을 처음 접하면서 "장난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걸 흉내내서 한 두 마디로 이들의 가르침을 정의하면서 안다는 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지적수준이 엉터리로 보일 뿐이었다.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정의하는지 그걸 되묻고 싶다.
이런식으로 글쓰게 되면 비판이 되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는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우선 위글을 보면 효나 무위지나나 제악막작이라고하는 것이나 같은 말의 반복이다.이게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한 거라는 의미를 알게 된다.
다만 말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오해가 너무 많아지는 문제를 낳았다고 해야겠다.효로인해 나이 먹은 자들이나 윗사람이라는 자들의 거만함을 불렀고
무위라하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었으며 악을 짓지 말라고 하니 악이 있는지 알고 되고 착한 척하게 만드는 기만을 낳았다.
뭐라고 말하든 언제나 곡해는 있다.
그래도 말하면서 친절을 배풀어야 한다고 본다.
곡해하는 대다수라도 한 둘의 길을 가는 것에 등불이 됨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해서이다.
그러니 내 글도 오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면
공자와 같고 노자와 같고 석가와 같은면 공자와 다르고 노자와 다르고 석가와 다르다는 것이 되기도 하지 않나 이런 것을 다 합쳐야 하나가 되나 아니면 내말처럼 같은 것을 세가지로 말한 것인가
이런 세사람의 주장과도 다른데 이런 것으로 기대서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는데도 그러한 가르침이나 전통이 내려오지 않는 건 뭔가
그걸 배웠거나 자기가 그 전래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학문의 저열함은 차마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이니 가짜라는 것이고 그 흔적도 발견하기 힘든건 왜그런 것인가 조선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집요하게 전래된 것을 박멸한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 우리 내면이 미숙한 것은 어찌 된 것인가 이런 정도에 불과한 조상들이 그와는 다른 전통을 형성시킨 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건 어쩌나
이런 것을 다시 가르치려고 내가 말을 꺼낸건 아니다. 그렇게 "이게 진짜다." 하면서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라도 알길 바라는 것이어서 이런다고 생각한다.
정말 도라는 것이라면 세계를 보는 가르침이라면 우리의 내면을 발현하고 더 창발하고 드날리게 하는 것이었으면 해서이다.석가는 하지 못하게 하는 듯이 말하고 노자는 안해도 되는 듯이 말하고 공자는 멀하라고 하는지 모르게 말하고 말은 이렇게 어렵다. 앞으로의 우리 가르침은 뭔가 하라고 했으면 한다. 이미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많으니 우린 하라고 하고 싶다.
비우고 물러나고 마음 모으는 것은 다 가르친다. 물론 이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어렵다는 것은 아는데 그래도 하라고 해야 한다. 해가면서 알아가는 것이고 해가면서 사는 것이고 해가면서 이루어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고대부터 도가 있었다고 한다는데 그게 왜 굳이 우리 도는 이런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런 것과 같고 저런 것과도 같고 이렇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했을까이다.정의의 곡해를 걱정해서인가 아니면 정의하기 난감한 것이 있어서인가 삼국시대는 뭐지 모르겠고 고려는 불교였으며 조선은 유교였다.
지금은 없거나 과학이거나 철학이거나 기독교이거나 불교이거나 유교이거나 그외 나처럼 이런 저런 것이거나 그럴 것인데 종교라는 것이 정의가 어찌 되는지 그건 알바 아니고,종족이나 민족이나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가 있으면 그들이 살아가며 역사가 되어가면서 행동의 규율이 나오게 되고 마음 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며 가치관 같은 판단의 기준이 만들어져 가게된다.
그걸 관념형태라고 하든 세계관이라고 하든 그런 구조적인 지적 체계나 사회체계와 감정체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누군가 정의하면서 이런 것이고 이런 것이어야 하고 이러면서 정리하면 종교가 된다.
가르침이라고 하고 그것을 행동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넓게 요구해가면서 도라고 정의해가게 된다.
어떤자가 그 도를 억지쓰면서 영토확장으로 이용해가면서 못된 습관이 생기기도 하고 자기 이해를 위해 수단으로 하기도 하면서 웃기는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데 우린 우리가 정리하면서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그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준비하거나 하지는 못한 것인지 했지만 없어진건지 안 한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은 어차피 과거의 일이다.
다만 불교로 정리하든 유교로 정리하든 결국 그런식으로 행동하면서 맞춘 것인지 그것이 우리가 해온 도는 아니고 우리의 욕구나 바람도 아니다. 현묘한 도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역시나 그런 것은 우리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소리가 된다.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에 다르게 할 것인데 이런 것이라고 미리 정해버리며 다른 것을 하기에 걸리적거린다.정하지 못하면 행동도 못하는 것이기도 한데 정해서 행동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누구를 위해서 규칙과 지식을 만들지는 그 공동체들의 수준이지만 역사는 정하지 못하면 행동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발전한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엔 정의한 종교도 없고 도는 더욱 없으며 철학도 없다. 사상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니 도대체 있는게 뭐냐고 할 그런 나라이다.
그래서 골동품이나 과거 유물에 집착할지도 모르고 고대사를 날조하면서 우리 고대사를 위대한 것으로 조작할지도 모르는데 난 그런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뭔 열등감에 우리 조상이 이런걸 만들었다. 고대는 이렇게 위대했다. 이런 유산이 있다 전통이 있다. 그런다지만 안타까운 마음의 여림이지 성숙한 마음이 할 하소연이나 자랑은 아니다. 그것보단 고대사를 이해하면서 그로인해 지금의 우리 현실를 보게하고 인류의 방향제시를 위한 지적 발전에 도움되는 도구로서 연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 고대가 대단하다고 하는 식의 역사는 의미가 없고 수준의 하등함을 알아야 한다. 역사는 그런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세계에 이바지할 지적인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라면 그냥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병적 지랄이다.
지금 우린 정해진게 없으니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나올 것이고 그런 전통을 이룰 것인데 어쩌다 정리한 남의 것과 비교하면서 이런 것과 같고 저런 것과 같고 이러면서 우리를 다른 것으로 어떻게든 재단해 보려는 것인지 애석하기도 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정의해갈 것이다. 하지만 그 정의가 구애되는 것으로 되면 버려야 한다.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인데 대개는 못하는 짓이다. 날 버리면 깨달음이지만 버리는 사람이 있나. 종교를 버리고 과학이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나아감에 자기가 뒤쳐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할 수 있는 것도 있으면서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참 이상한 종족이 인간이다. 우리가 앞으로 미래에 어떤 종족적인 특성을 발현할지 모르지만 이미 폐기처분된 종교적인 성향을 드러낸다면 종족족인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뭔가 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뭔가 하지 말게 하는 것으로 하면 역시나 억누름이 된다.행동하게 하기위한 정의를 하자는 것이다. 못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저 현묘지도라 말한 사람은 알까? 그렇게 말한 것인가? 그렇게 이런 것도 같고 저런것도 같다고 하는데 공자등과 같은 그런 건 우리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것만 하지는 않는다. 인가?
말하려든게 어긋나고 엄한 곳으로 나가는데,
우리가 앞으로 정해가며 정의하는 종교라고 하든 도라고 하든 철학이라고 하든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든 정치체제나 사회체계라고 하든 그런 것을 해가면서 행동할 수 있는 규율이고 정의여야 한다는 것인데 아마 이러기엔 아직은 어려움이 많은 것이긴 하다.
이런 의미를 보는 것을 하는 자들이 아직 없다보니 그저 구분하고 정의하며 막고 제어하면서 그러해야 하고 안그러면 안되고 이게 맞고 그건 틀리며 이게 옳은 것이고 그건 아니며 이러면서 설명하고 주장하며 규제해가는 것을 하려고한다.더 하고 다르게 하고 변화하는 방법을 신선하고 새로우며 창발적인 것을 하게 하는 그런 도를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도 도를 만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하고 있고 이미 시작되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난 괜히 더 잘 할 수 없을까 하면서 이런 이상적인 도를 주장한다.아마 이렇게 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래도 이상을 추구해야 그 비슷한 것라도 나올까 해서 말해본다.
능동적인 도덕이어야 하는 가치체계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현묘라고 한다.
뭔지 말하기 어렵고 말할 수도 없는데 그건 말하고 정의하면 더 이상의 신선함이나 새로운 발상도 못하고 행동도 못하니 그렇다. 현묘는 이름이 아니라 뭐라 말하고 규정하기 힘든 그래서 오묘한 것이라는 형용인데 그걸 이름이라고 착각하면 언제나 그렇게 단정지어서 규정하길 바라는 정도라서 그렇다.
규정하지 않으면서 활성적인 정의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말을 배우는게 고대에도 있었던 과목이지만
지금은 말을 배우는 게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할 순 없나
말하는 것에도 방법이 있고 다른 것이며 말을 만들고 살게 하며 돌아오게 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풍류라고 해봐야 그게 그거 아닌가 바람이나 흘러간다는 것이나 그게 멈춤이 없다는 것이고 시시때때 다르다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라는 것이지 이름이겠나 달라져가는 그것을 보는 것이지 그게 이거라고 정의하지 않는 그걸 해낼 수 있을 건가
음~~ 안하든데 할 수 있다는 것조차 그런 봄이 가능 하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