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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의 시조다!
K스피릿 2014.12.25
박성수 명예교수의 역사에세이 25편
일본으로 가는 세 항로
신라인이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임금이 되었다는 전설이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유명한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야기다. 때는 서기 157년 연오랑 부부는 동해안(迎日灣:영일만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초를 따다가 갑자기 나타난 바위(또는 고래)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녀가 바닷가에서 남편을 기다렸는데 그 때 또 고래 한 마리가 나타나 그녀를 일본으로 실어갔다. 가서 보니 남편은 일본의 임금이 되어 있었으므로 세오녀는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 사자가 일본으로 가서 연오랑에게 돌아가자고 호소하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로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니 돌아갈 수 없다. 여기 아내가 짠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져가서 제사를 지내면 다시 옛날과 같이 해와 달이 빛을 발할 것이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하니 해와 달이 빛을 회복하였다. 신라에서는 비단을 창고에 고이 간직하여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그런데 『고사기(古事記)』라는 일본 사기에는 수사노오(素戔鳴: 소전명, 생명을 해치는 소리)라는 신라의 신(神)이 고국(根國)을 떠나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出雲)에 도착했고 여덟 마리 큰 뱀이 사람들을 해친다 하여 칼로 뱀을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 한, 일 두 나라 사서의 이야기가 매우 흡사하여 『삼국유사』의 연오랑이 곧 『고사기』의 수사노오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사노오가 큰 뱀을 퇴치하였다는 『고사기』의 이야기는 기실 이즈모 평야를 흐르는 뱀처럼 생긴 히이가와斐伊川(일명 히노가와日野川)의 홍수를 막았다는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강의 이름은 본시 신라강(新羅江)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사노오의 직업은 무엇이었나? 연오랑은 어부였으나 수사노오는 제철기술자(製鐵技術者)로서 신라의 광석이 바닥이 나자 일본으로 철광을 찾아 나선 인물이었다. 수사노오가 일본에 가 보니 전혀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였다. 그래서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堤防)을 쌓고 사철(砂鐵)을 캐어 농구와 칼을 만들었다. 수사노오 즉 연오랑은 아직 철이 무엇인지 몰랐던 일본 땅에 문명을 심어준 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신으로 모실 리 만무하였다. 즉 철의 나라 신라와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기술자가 농구와 칼을 제작하여 산업혁명을 일으켜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의 임금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한반도 남쪽의 자그마한 섬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섬 중 제일 큰 섬을 혼슈(本州)라 하고 그 다음이 큐슈(九州) 그리고 시꼬구(四國)라 한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일본으로 가는데 세 항로가 있었다. 첫째 부산 또는 거제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북큐슈로 가는 남해항로가 있었다. 둘째로 남해항로를 더 연장하면 북큐슈에서 일본 오사카(大阪) 나라(奈良)로 간다. 이 항로를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항로라 한다. 셋째가 울산이나 영해만을 떠나 울릉도, 독도 그리고 일본 오끼(隱岐)섬을 거쳐 이즈모(出雲)로 가는 항로 즉 동해항로가 있었다. 이 마지막의 동해항로는 앞의 남해항로보다 거리가 멀지만 파도가 잔잔하고 조류가 흘러 노를 젓지 않아도 20일이면 이즈모 땅에 상륙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가야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 번갈아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로 떠났던 것이다.
이즈모(出雲)는 혼슈의 서해안 쪽, 우리 쪽에서 보면 동해안 쪽 해안인데 동해로 뾰쪽 돌출한 부분이다. 이곳을 이즈모(出雲) 즉 구름이 나오는 곳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가 바로 일본의 시조 신(神) 즉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남편 수사노오 아니면 연오랑과 세오녀였다. 구름을 일본 말로 ‘구모’라고 한다. ‘구모’는 ‘구마’ 즉 곰(熊)이란 말이며 구마는 ‘가미’ 즉 신(神)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출운이란 곧 “신이 구름처럼 나타난 곳”이라는 뜻이다.
어느 나라이건 신에는 토착신(土着神)이 있고 외래신(外來神)이 있다. 2세기의 이즈모에는 사람이 몽매하여 토착신이 없었다. 그런 곳에 한국에서 외래신이 온 것이다. 이즈모에는 지금 유난히 신사가 많고 그 신사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외래신 즉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를 모셔놓았다. 일본에서는 신라 신을 어디서 건너 간 신인지 모르게 도래신(渡來神)이라 한다. 이즈모의 신사 이름이 모두 가야, 신라, 고려 등 한국의 국명이 붙어 있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조상이 신라인이나 가야인이라면 곤란하니까 국적을 속여 도래인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연오랑을 모신 일본신사
한국계 신사는 일본 도처에 널려 있다. 특히 연오랑 부부가 건너 간 이즈모 지역의 경우는 거의 전부 한국계 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 한국 신을 모신 곳이다.
가라신, 신라신사韓神, 新羅神社
텐신 가키신사天神垣神社
시라기신사白鬚神社
가라구니니타시신사韓國伊太氐神社
등등이 그 좋은 예이다. 제일 앞의 가라신이라 이름하고 다시 신라신사라고 한 것은 이중으로 한국의 국명을 표기함으로서 토착신을 모시지 않고 도래신을 모신 신사니 영험(靈驗)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국명이 밝혀져 있는 신사가 아니더라도 이즈모의 신사라면 거의 모두가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 간 개척자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고들 대답한다. 가령 한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인 시마네반도(島根半島) 동단의 비호오신사(美保神社)에 가보면 연오랑 부부의 첫 아들을 모셨다고 대답한다. 그곳이 바로 연오랑 부부가 도착한 지점이다. 이 신사의 “연혁”을 읽어 보면 이 신사의 “북쪽에 오끼(隱岐) 섬이 있고 그 북쪽에 독도가 있다. 그 다음에는 울릉도가 있고 다시 배를 타면 조선에 다다른다”고 적혀 있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듯이 신사의 위치가 한국과 가깝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닭을 신성시한 신라의 풍속을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으니 대단한 풍습이다. 그리고 독도 바로 남쪽에 있다는 오끼섬은 이즈모에서 불과 40킬로 거리에 있는데 신라에서 이즈모로 오는 징검다리다. 이 섬에 머문 신라인들은 고국의 소싸움을 아직까지도 즐기고 있고 그 소가 한국토종의 흑우(黑牛)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소를 몰고 와서 한일전을 하는 것도 이섬의 소들이다.
신사뿐만 아니라 지명에도 뿌리의 나라, 근국(根國)인 한국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고려산이 가장 인상 깊은 이름인데 곧 삼신산이다. 봉우리가 셋으로 이루어져 환인 환웅 단군을 상징하는 삼신산임에 틀림이 없다. 이 고려 산을 가라야마(韓山)이라 부르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가라 산이 있으면 가라 촌이 있기 마련인데 가라산 기슭에서 수많은 고분이 발굴되어 보기 드문 신라의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천조대신은 소머리 신
이즈모에 처음 상륙한 인물이 신라의 소머리 신이었다. 일본고기에 나오는 수사노오가 우두신인데 수사노오는 일명 소시모리(素尸毛犁)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소머리 신 즉 우두신(牛頭神)이다. 한국 춘천에 우두산과 우두벌이 있고 그밖에도 우두산 우두벌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강원도 춘천의 우두산이다. 그런데 처음 일본 큐슈로 건너 간 소시머리 즉 소머리신은 자기 천조대신과의 사이에 많은 아이를 낳았는데 북큐슈에는 딸 셋이 각각 세 종상신사(宗像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렇게 많은 아이를 낳은 천조대신은 남편인 소머리신과 헤어져 일본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되었다. 그녀의 무덤과 신사는 남큐슈(南九州)의 가라쿠니다케(韓國岳한국악·1,700m) 아래에 있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소머리신은 수사노오인데 그가 천조대신과 헤어져서 신라로 되돌아갔고 다시 바다를 건너 동해항로를 따라 이즈모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사노와 그 아들 신이 각각 구마노신사와 이즈모 대사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필자가 연오랑과 세오녀의 나라를 찾아 이즈모로 간 것은 20년 전의 일이었다. 현지에 가서 보니 거의 모든 신사가 연오랑을 모셨다고 주장하고 있어 연오랑의 권위가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구마노대사(熊野大社)였다. 구마노신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기 때문에 그 중 구마노대사를 찾아간 것이다.
337개의 청동검
한편 천조대신은 남큐슈의 한국악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니 아래 신사에 모셔져 있고 그녀와 헤어진 오빠이자 남편이었던 소머리는 이즈모의 구마노대사(熊野大社)에 모셔져 있다. 근친상간한 사이요 또 이혼하기도 했던 사이다. 천조여신과 소머리신은 처음 가야를 떠나 남해항로로 일본 큐슈로 가서 수많은 남매를 낳아 행복하게 살았으나 마침내 이혼하였다. 천조와 헤어진 소시머리는 가야로 귀국하여 다시 배를 탔다. 요번에는 이즈모로 가는 동해항로를 택했는데 상륙하여 보니 여름이면 강물이 넘쳐나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힘을 발휘해서 이즈모 평야를 개간하여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구마노대사는 텐구산 즉 천구산(天狗山) 아래에 있었다. 천구산은 바로 천궁산(天宮山)이었다. 모신 신은 수사노오인데 그는 천궁산의 산신이었다. 성인들은 죽어서 산신이 된다는 것이 고대인의 사상이었다. 단군이 아사달에서 신이 되었듯이 수사노오도 천궁산의 산신이 된 것이다. 신사의 사무소에 가서 설명을 들으니 이즈모 대사는 일본 제일의 신사이지만 그보다 위의 신사가 구마노대사다. 거기에서 먼저 원궁산(元宮山) 개제(開祭)를 올리지 않으면 이즈모대사에서 천제를 지내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 신이 수사노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을 모신 이즈모 대사에서는 아버지 제사를 지낸 뒤에야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마노대사에서 제일 먼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천구산 정상에 있는 삼신 바위에다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에 산 중턱의 신단수에 제사 드린다. 그런 뒤 세 번째로 대사로 내려와 본제(本祭)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최대의 이즈모 대사에 수사노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 모셔져 있다 이즈모대사는 일본 최고 최대의 신사다. 이름하여 이즈모대사(出雲大社)라고 하는데 이즈모대사로 들어가는 문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를 신문이라 하는데 일본어로는 새가 있다는 뜻의 도리이(鳥居)다. 도리이는 엄청나게 크다. 누가 일본을 축소지향의 나라라 했던가? 일본인들의 확대지향성 다시 말해서 침략성을 잘못 보고 한 말이다. 안에 들어가서 신사의 본전을 보아도 엄청 크고 현관문에 늘어뜨린 금줄도 크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연오랑의 아들을 모신 신사요, 우리 민족의 조상숭배 문화가 건너간 것이다.
우리는 제사 때 두 번 읍(揖)하고 두 번 절하고 한 번 더 읍하는데 일본 신사에서는 먼저 두 번 절(二拜)하고 두 번 박수(二拍手)치고 한 번 절(一拜)한다. 형식은 달라도 한 일 두 나라의 종교문화는 다 같은 조상숭배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즈모는 일본인들에게 [신의 나라(神國)]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열도 자체가 신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이즈모 대사를 보지 않고서는 신국 일본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즈모에서 보아야 할 곳은 많다. 특히 최근 수사노신 계곡(荒神谷)에서 발굴된 337개의 청동검(靑銅劍)은 일본 땅에 상륙한 우리 조상들이 원주민과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평화적으로 공생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즈모에는 수많은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귀중한 유물이 나와 현지 박물관에 고즈넉이 소장되어 있다. 이즈모에서 벌어진 우리 민족사에 관해서는 우리 역사교과서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가서 눈으로 역사망실의 현장을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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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명예교수 culture@ikoreanspiri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