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58 m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대표적 담론가이자 열심한 현장운동가이기도 한 사발 주요섭선생이 이번에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정식 이름은 ‘김지하의 사회사상 연구’로, 부제를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쳬계이론을 경유하여’라고 달았다.
아직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내가 무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우선 외우(畏友) 주선생이 이런 역작을 내기까지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이제 학자로서도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앞으로 사발님이 생명운동가이자 학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고 성원한다.
나는 사발님과 이른바 생명운동을 함께 해오면서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다. 그가 생명담론을 통해 새롭게 제시하는 여러 견해는 ‘생명’과 ‘생명운동’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발님이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을 깊게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생명담론으로 새롭게 풀어가는 것이 내게도 좋은 공부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금 사발님 만큼 노겸 김시인의 삶과 사상을 깊게 연구하는 학자도 드물 것이라 싶다. 그런 그의 연구작업은 그간 진영의 편파성으로 이해하고 평가해왔던 노겸시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위기의 이 시대, 생명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향 제시와 그 실천에 대해서도 크게 기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는 사발님처럼 나도 생전의 노겸시인에게 대한 마음의 짐이 여전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번 사발님의 논문 가운데, 노겸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여러 키워드가 있지만 그 가운데 나에게 깊게 다가오는 개념 하나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말이다. 이 말, 이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접해오던 익숙한 것인데, 이번 논문과 사발님이 생명운동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제시하는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불속 지부지
차시 이변비중
(道不屬 知不知
此是 離邊非中)’.
우리 집 안방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귀이다.
오래전에 스승께서 써주신 것인데, 스승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도 어느새 삼십 년이 다 되었으니 사십 년 넘게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글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이 단어를 만나왔음에도 아직도 그 의미를 선명히 깨우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이번에 사발님의 학위 논문과 담론제시를 통해 새삼스럽게 들었다. 오래전에 이 글귀를 써서 주셨을 때는 나에게 이 뜻을 잘 새겨 그렇게 살라고 일러주신 것일 텐데도 여태껏 제대로 새겨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온 것이라는 뒤늦은 자각이라고 할까.
그동안 나는 이 글의 출처가 막연히 도덕경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좌계선생 등 한학을 하는 분들께 물어보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 문장은 도가와 불가의 두 개념을 스승께서 하나로 합쳐 만드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中)이란 개념은 유가에서도 중용과 시중(時中)과 같은 중심 개념의 하나이니 포함 삼교(三敎)라는 말처럼 유불선(儒佛仙)을 회통(會通)하는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道)가 앎의 영역을 떠난 것이란 말은 도덕경을 통해서도 익숙히 들어온 것이고 어렴풋이 짐작은 되는데, 문제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의미라 하겠다. 이 말을 흔히 불교의 중도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닌 전체적인 차원 변화의 진정한 중도"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풀이 또한 내게는 흔쾌히 다가오지를 않는다.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존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머물러야 하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지금 내게 들어와 있는 한 생각은 그 자리가 ‘매이지 않은 마음자리’라는 한 생각이다.
세계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머무는 자리 또한 고정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편, 저편이라고 하는 이른바 진영논리도 이런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디엔가 머문다면 그곳은 가장자리(변)거나 중앙일 수밖에 없다. 그곳은 결코 이변비중의 자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변비중의 자리를 어디라고 지칭하는 그 ‘매이는 마음을 떠난 자리’라 싶은 것이다. 이는 마치 양자물리학의 이른바 ‘관찰자 효과’에 보이는 입자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전자 등 미립자가 관찰자에 따라 그 모습과 위상이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만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어떤 자리(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다시 다른 사건에서는 또 다른 위치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 중에 이변비중의 그 자리가 혹시 공(空)이나 점(點)의 자리일 수도 있을까 싶은 생각도 잠시 떠올랐지만, 그곳은 존재 이전의 자리인 까닭에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相)' 없이 머물 수가 있다면 그런 자리가 방불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두서없는 이런 내 생각은 저 원효선사가 금강삼매경에서 설했다는 그 이변비중의 뜻이나 무위당선생 또는 노겸시인이나 사발님이 말하는 그 이변비중의 개념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그냥 내 식으로 떠오른 생각인데, 엉뚱한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꺼낸 것은, 그동안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그런 생각에 너무 붙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그래야 뒤늦게라도 스승께서 나에게 머물러라고 한 이변비중의 그 자리를 찾아 잠시나마 머물러 볼 수 있을 것이라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이지 않은 마음자리’가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것인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아야 알 것이라 싶다. 남은 날의 화두처럼 품고 가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사발 주요섭선생 덕분에 학위 취득 축하도 할 겸 두서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스승께서 오래전에 내게 주셨던 그 당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어 고맙다.
'함이 없이 한다'는 말을 되뇌이는 며칠 동안이었습니다.
그 시간과 생각이 연결되어 기분나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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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비중(離邊非中)’ - Google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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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이변비중(離邊非中)
프로필
선우
2013. 9. 4.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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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비중(離邊非中),
중도란 변을 떠난 것이며 또한 가운데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운데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한 변입니다.
중도란 중생이 보는 상대의 세계 즉 변견을 타파하기 위한 표현으로서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 성품, 마음, 법계, 연기등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변도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도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만법이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만법의 참모습이 중도입니다.
중도에 있어서 중이란 양변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중도란 변견을 타파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중생은, 항상 없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추구하여 구합니다.
내가 있어서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과 대립합니다.
항상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시기 질투와 투쟁이 있습니다.
중생의 관점은 항상 상대의 변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만법의 참모습을 바로보지 못한 허물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바다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법화경의 신해품에서의 돌아온 장자의 아들 비유처럼 우리는 본래로 무한 재벌의 장자입니다.
다만 깨닫지 못하여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의 무한 재산은 외면한체 남의 티끌을 탐하여 영원토록 구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법의 참모습인 우리의 성품은 중생이 그토록 추구하는 구경의 진선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바로 자기의 성품을 바로보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의 것은 결국에는 허망하여 부질없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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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화쟁사상-Ⅱ
기자명 법보신문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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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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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비중(離邊非中),
중도란 변을 떠난 것이며 또한 가운데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운데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한 변입니다.
중도란 중생이 보는 상대의 세계 즉 변견을 타파하기 위한 표현으로서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 성품, 마음, 법계, 연기등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변도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도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만법이 중도를 떠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만법의 참모습이 중도입니다.
중도에 있어서 중이란 양변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중도란 변견을 타파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중생은, 항상 없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추구하여 구합니다.
내가 있어서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과 대립합니다.
항상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시기 질투와 투쟁이 있습니다.
중생의 관점은 항상 상대의 변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만법의 참모습을 바로보지 못한 허물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바다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법화경의 신해품에서의 돌아온 장자의 아들 비유처럼 우리는 본래로 무한 재벌의 장자입니다.
다만 깨닫지 못하여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의 무한 재산은 외면한체 남의 티끌을 탐하여 영원토록 구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법의 참모습인 우리의 성품은 중생이 그토록 추구하는 구경의 진선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바로 자기의 성품을 바로보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의 것은 결국에는 허망하여 부질없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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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화쟁사상-Ⅱ
기자명 법보신문
21세기 왜 다시 원효인가?
입력 2005.10.11
둘이 아니되 하나 또한 고수 않는 신묘한 논리
양 극단 긍정-부정 포함하는 논리 전개
다른 것 똑같이 만드는 획일화는 反화쟁
이번에는 『금강삼매경론』의 한 구절 살펴보고 원효의 화쟁론에 대해 계속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설명>서당화상비편 탁본. 이 비는 신라 애장왕(800~808) 때 원효의 후손인 설중업이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앞의 두 구는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들어 평등의 뜻을 나타낸 것이요(前之二句 融俗爲眞 顯平等義)
아래의 두 구는 진제를 녹여 속제로 만들어서 차별의 문을 나타낸다.(下之二句 融眞爲俗 顯差別門)
이것을 총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실되다 속되다라고 말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곧 그것은 일심이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본체를 들어 둘로 삼아 이와 같이 이름해서 일심이문이라고 한다.(摠而言之 眞俗無二而不守一 由無二故 卽是一心 不守一故 擧體爲二 如是名爲一心二門)
불교를 처음 듣는 분들은 이 말이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사실 불교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도 헤매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원효의 논리는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인 통일의 논리와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남쪽이냐 북쪽이냐, 흑이냐 백이냐, 찬성하느냐 찬성하지 않느냐를 캐묻습니다만 A가 아니라고 반드시 B인 것은 아닙니다. A가 아니면서 동시에 B도 아닐 수 있는 것이고 A면서 B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양자택일로 가지 않습니다. 또 변증법은 상반된 두 가지 관계를 동시에 보기보다는 정이 있고 반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양자를 모순이나 양립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합을 도출해 냅니다만 불교에서는 양자가 함께 존립할 수도 있다고 보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럼 원효가 자주 사용했던 용어들, 즉 둘을 융합하되 하나는 아니라는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 두 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 돌쩌귀에 들어맞듯 묘하게 계합한다는 ‘묘계환중(妙契環中)’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둘이나 변(邊)이라고 하는 것은 두 극단입니다.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같다거나 다른 이러한 극단을 변이라고 합니다. 이 두 극단을 떠나는 것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럼 중도는 100센티의 중간인 50센티를 말하는 것이냐 이런 게 아닙니다. 또 앞장서면 사진도 찍히고 회유, 협박을 당하고 또 너무 뒤에 있으며 손가락질 받으니까 적당히 중간 쯤 회색분자로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나서는 게 옳을 때 나서는 것이 중도고 따지는 게 옳을 때 따지는 것이 중도입니다. 여기서 중은 가운데 중이 아니고 적중의 중입니다. 딱 들어맞는 것 그것이 바로 적중입니다. 그런데 적중이라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화성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려고 한다면 지구도 움직이고 우주선도 움직이고 화성도 움직이는 종합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고도의 분석과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중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것, 마치 게임기에서 돈이 좌르륵 쏟아지는 순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런 것을 장자에서는 환중(環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환이라고 하면 고리지요. 그 고리에 딱 들어맞듯 또 돌쩌귀가 딱 들어맞는 것처럼 묘하게 계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이라, 그 극단을 떠났다고 해도 중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끝일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고, 공중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겁니다.
원효는 있다거나 없다거나(有無), 긍정한다거나 부정한다거나(立破), 전체적으로 열어서 말을 하거나 통합적으로 말하거나(開合), 이론적이거나 사실적이거나(理事), 하나거나 많거나(一多), 같거나 다르거나(同異) 상반된 두 개념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파악하기보다 하나도 아니되 둘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없습니다. 노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지만 불교에서는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에, 모두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나도 변하고, 사물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기본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게 모든 것은 전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즉 수없이 많은 것들의 인연으로 얽혀서 되어있고, 거기에 실체란 없으며 그저 무상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 공(空)이라고도 합니다. 무아(無我)와 무상이 곧 공입니다.
그런데 이 공에 집착해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공병(空病)을 다스리기 위해 공(空)도 공(空)이라고 합니다. 즉 공공(空空)입니다. 이 공공에 다시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공공 또한 공이라고 부정합니다. 이를 삼공(空相亦空, 空空亦空, 所空亦空)이라고 합니다. 원효도 삼공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그는 또 『열반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신불의 공덕은 모습도 벗어나고 자성에서도 벗어나 있다(報佛功德 離相離性).
자성에서 벗어났기에 상주하는 속성에서 벗어나 지극히 역동적이다(以離性故 離常住性).
지극히 역동적이라 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그래서 상주함이 없다(最極暄動 無所不爲 故說無常).
<사진설명>기신론해동소.
그리하여 양면긍정이나 양변부정까지를 포함하는 사구(四句)의 논리로 화쟁을 시도합니다. 같고 다름(同異)에 관한 원효의 설명을 『금강삼매경론』에서 살펴보지요. 다음의 이 구절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애매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대단히 단순하기 때문이지 원효에게 문제가 있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같다면 무엇을 가지고 같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르다면 무엇을 가지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결과적으로 같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양 극인데 그게 서로 동전의 양면입니다.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고,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문을 보겠습니다.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같으면서 다른 것이고(不能同者 卽同而異),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곧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다(不能異者 卽異而同也).
同이란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요(同者 辨同於異),
異란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異者 明異於同).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明異於同者),
같은 것을 쪼개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非分同爲異也).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辨同於異者),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非銷異爲同也).
실로(良由)
同이란 다른 것들을 녹여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同非銷異故),
그것이 (언제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不可說是同),
異란 같은 것을 쪼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異非分同故),
그것들이 (언제나)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不可說是異).
다만(但以)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말한다든가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둘이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說與不說 無二無別).
원효에 의하면, 같은 것(同)과 다른 것(異)도 서로 바라보고(相望) 있고 서로 비추고(相照) 있는 관계일 뿐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명이 되는 거죠. 이게 화엄철학의 기본 아닙니까. 아프리카에 가서 내가 너무 피곤해 앉아서 지나가는 흑인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나가며 날 구경하고 있습니다. 화엄철학에서는 샹들리에 구슬들이 수천 개 있는데 그 구슬들 하나하나는 모든 것을 받고 반사하고 서로 얽히고설키어 있듯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같다(同)고 하는 것도 다른 것(異)을 녹여서 다 똑같이 만든 것이 아니다(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원효의 이 말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다 몰아낸 뒤에 같은 견해로 획일화하는 것이 화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가끔 획일화하려고 도모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똑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끊어서 오리 다리에 잇는 것도, 산을 무너뜨려 골짜기를 메우는 것도 아니다.” 『직지심체요절』을 쓴 고려 백운(白雲)화상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많은 시비를 종식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의 화쟁논리가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요.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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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비중(離邊非中) 중도진영 정권잡는 정치변혁 가능할까?
2017 대선, 보수- 진보- 중도진영의 삼각구도 경쟁 본격화
강도원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2/07 [18:18]
▲ 손학규 의장(중앙)은 “자신을 갖고 나섰다. 광장 민심, 국민 마음이 70년 적폐청산, 과거청산이었지만 그 이후가 중요하다. 대통령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위하여 성공하는 대통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떻게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국민들에게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통합의 능력을 갖춘 준비된 사람을 국민과 당원들은 찾을 것이다. 그 때 과감히 내가 있다고 외칠 것”이라며 경선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이 7일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 대한민국은 3대 위기에 처했다"며 "국민생활의 위기, 동아시아의 위기, 정치의 위기가 그것"이라고 꼽았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을 대개조해서 새판을 짜야 한다.”며 “민주당의 패권주의 집단이 정권을 잡는 것도 정권교체가 아니다. 그것은 박근혜 패권세력에서 또 다른 패권세력으로 바뀌는 패권교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또 그는 “국민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정치세력 간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통합력을 가진 개혁세력”인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이 바로 새로운 정치, 국가 대개혁의 중심”이고 “정권교체를 이루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주역”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손 의장의 정치적 이념과 성향을 한마디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은 “국민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정치세력간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통합력을 가진 개혁세력”이란 말이다.
내가 아는 그는 ‘중도론’자다. 근래 우연히 10년 전 이변비중의 중도론를 피력한 김지하 시인이 신동아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손 의장을 언급한 대목을 본 일이 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중도는 디지털 논리와 같아요. 예스, 노. 노, 예스. ‘온’ 하면 ‘오프’ 하고 ‘오프’ 하면 ‘온’ 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천장을 치면 바닥으로 내려가고 바닥을 치면 천장으로 올라가는 원리지요. 이처럼 양쪽을 다 보고 중간도 보고 전체를 들어올리자는 거예요. 공자가 ‘시중(時中)’이라는 말을 했지요. 중용의 조건은 시중입니다. 중용은 균형이고 시중은 중심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면서 기우뚱하는 거예요. 이것을 기우뚱한 균형 또는 역동적 중도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중도라고도 하고. 그런데 중도라고 일의 선후가 없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시장과 분배, 성장과 복지가 맞설 경우 양쪽 다 끌어안되 상황에 따라 더 중요한 쪽을 배려해야 한다는 거죠. 성장과 분배가 결합된 것이 일자리예요. 그런 것을 손학규 같은 사람이 얘기하니 내가 좀 점수를 쳐주는 거지. 비즈니스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그 비즈니스가 옳은 건지 그릇된 건지 따지고 들면 복잡해지지만.”그는 손학규를 치켜세우면서 중도론은 노사문제와 남북관계에도 적용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경총과 민노총,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갈등이 큽니다. 이런 문제를 화해와 상생의 방향으로 부드럽게 해결할 방안이 없는지 따지는 게 중도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중도의 원리가 적용돼야 해요. 당근과 채찍이 다 필요해요.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더라도 핵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때렸어야 해. 왜 그것을 병행하지 못해요? 조여가야 해요. 칠 때는 쳐야지. 그게 다 중도입니다. 가운뎃길로 가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중도가 아니에요. 이변비중(離邊非中). 양 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거죠.”
이변비중은 원효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 당시 승려들이 서로 자기만의 불교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을 현혹하여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설파한 사상으로, 불교 백가의 이론을 화합하여 서로 다른 이론이 살아 있으면서도 또 하나의 결론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탁월한 중도의 길이자 극단을 달리는 여러 현황의 통합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차원을 달리하는 논쟁의 해결책이다.
▲ 강도원 ©브레이크뉴스
중도론은 좌우 극단의 우리 정치현실에서 아직 성공한 사례는 없다. 임시정부 말기 좌우합작 노선이 주류를 이루면서 성공을 거두는 듯 했지만 광복 이후 뜻을 펼치지 못했다. 우리의 현대사는 중도세력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보수나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아도 앞서 손 의장이 지적한 "국민생활의 위기, 동아시아의 위기, 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중도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가능한 경우의 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안철수, 손학규, 정운찬, 김종인 등 중도성향 정치인들의 세력형성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고, 보수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기 어렵게 됨으로서 보수 표가 중도로,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하면, 안희정 지지표는 중도로 이동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2017 대선은 보수, 진보, 중도진영의 삼각구도가 펼쳐질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여기에서 이변비중의 중도가 집권하는 정치변혁의 기적이 나올지 주목된다.
===
원효의 사상
작성자아마데우스|작성시간07.07.14|
1. 화쟁(和爭)의 방법
(1) 극단의 떠남
① 우선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이론들을 부정한다.
②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 쟁론을 화해시키기 위한 일차적인 방법이다.
(2) 긍정과 부정의 자재(自在)
① 그러나 ‘부정’만으로 집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부정’ 자체에 집착할 수가 있다.
② 뿐만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용한 부정의 형식이 오히려 긍정을 말하 는 경우도 있다. 가령 ‘이중부정’과 같이 ‘아닌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경우는 ‘긍정’의 표현인 것이다.
③ 이것은 “동의하지도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설한다.”는 방법으로 ‘긍정’과 ‘부정’ 보다 ‘태도’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이다.
(3) 여러 경전들의 폭 넓은 이해
① 어느 하나의 경전에 집착하지 않고 두루 두루 불경의 내용을 이해하여 폭넓은 시각을 가 짐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쟁사상 <윤리와사상 지도서> p134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서문에서 '대승' 곧 '진리의 참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대승의 참모습이란 깊고도 고요하고, 맑고도 평화로운 것, 깊고도 깊으니 어찌 그 모양을 말할 것이며, 고요하고도 고요한 그것은 오안으로 볼 수 없고, 사변으로 능히 말할 수 없다. 크다 할까, 어느 구석에도 들어가지 못하지 않고, 작다 할까, 어떤 큰 것이라도 감싸지 못함이 없다. 있다 할까, 한결 같이 텅 비어 있고, 없다 할까, 만물이 다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으므로 감히 이것을 대승이라 할 것이다.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원효의 논리는 화쟁의 논리로 일관되어 여러 종파의 사상을 지양하고 평상의 생활 속에서 생동하는 불교를 건설하려 했다. 백가로 하여금 각기 그의 고집을 버리게 하고 화합귀일케 하고자 한 것이 그의 일심 화쟁사상인 것이다. 원효의 화쟁의 논리는 개합과 종요의 논리, 입파와 여탈의 논리, 동이와 유무의 논리, 이비변중의 논리로 나누어진다.
2. 원효의 화쟁 논리
① 개합(開合)과 종요(宗要)의 논리 : 분석과 종합
- 종 : 하나에서 여러 가지로 전개됨
- 요 : 여러가지를 하나로 통합
- 진리 연구법: 개합의 논리 / 경론의 연구: 개합과 종요의 입장
② 입파(入破)와 여탈(與奪)의 논리 : 긍정과 부정의 자재
- 입 : 긍정적 정립
- 파 : 부정적 논파의 자세
- 여 : 환허,
- 탈 : 불허, 부정의 탈
③ 동이(同異)와 유무(有無)의 논리 :
④ 이변 비중(離邊非中)의 논리 : 극단의 떠남
3. 불교의 대중화
① 정토사상
② 무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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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돋아나다 .
by김준식
Mar 15. 2021아래로
見芽
係妙停涬冥 (계묘정행명) 미묘함에 얽혀 혼돈에 머무르니,
不知而大寧*(부지이대녕) 지극한 도는 알 수 없어라.
予侗時微昧 (여동시미매) 내 어리석음으로 시절도 희미하니,
行垂否中現*(행수부중현) 변두리를 떠나지만 중심은 아님을.
2021년 3월 14일 오전. 산행 중에 새싹을 본다. 미세한 잎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돋아나는 장면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한 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으로 옮겨간다. 새싹의 신묘함에 몰입함이 오히려 혼돈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대한 의문. 진리의 모습이 하나 일리는 없다. 다만 스스로 혼돈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일종의 경계를 두는 것이다. 1400년 전 원효는 그의 책 대승기신론 소에서 이변 비중을 말씀하셨다. 玄寂한 진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진리의 변두리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변두리를 떠난다고 해서 중심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은 나뿐일까? 하루 종일 뿌연 하늘을 본다. 내 마음처럼, 봄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다.
* 『장자』 列禦寇(열어구) 3장의 마지막쯤에 있는 ‘大寧’은 지극한 도를 의미한다.
* 離邊非中(이변비중): 흔히들 ‘이변 비중’을 ‘중도’로 오해하고 있다. 이상한 시인의 혀놀림으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평면적이 경지를 표현한 말이 아니다. 이변 비중은 空사상의 표현으로 空사상은 인간의 언어 논리에 의한 판별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원효는 인간의 몇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것을 두고 중도니 어쩌니 하는 말은 매우 경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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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芽
係妙停涬冥 (계묘정행명) 미묘함에 얽혀 혼돈에 머무르니,
不知而大寧*(부지이대녕) 지극한 도는 알 수 없어라.
予侗時微昧 (여동시미매) 내 어리석음으로 시절도 희미하니,
行垂否中現*(행수부중현) 변두리를 떠나지만 중심은 아님을.
2021년 3월 14일 오전. 산행 중에 새싹을 본다. 미세한 잎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돋아나는 장면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한 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으로 옮겨간다. 새싹의 신묘함에 몰입함이 오히려 혼돈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대한 의문. 진리의 모습이 하나 일리는 없다. 다만 스스로 혼돈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일종의 경계를 두는 것이다. 1400년 전 원효는 그의 책 대승기신론 소에서 이변 비중을 말씀하셨다. 玄寂한 진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진리의 변두리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변두리를 떠난다고 해서 중심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은 나뿐일까? 하루 종일 뿌연 하늘을 본다. 내 마음처럼, 봄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다.
* 『장자』 列禦寇(열어구) 3장의 마지막쯤에 있는 ‘大寧’은 지극한 도를 의미한다.
* 離邊非中(이변비중): 흔히들 ‘이변 비중’을 ‘중도’로 오해하고 있다. 이상한 시인의 혀놀림으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평면적이 경지를 표현한 말이 아니다. 이변 비중은 空사상의 표현으로 空사상은 인간의 언어 논리에 의한 판별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원효는 인간의 몇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것을 두고 중도니 어쩌니 하는 말은 매우 경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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