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성찰 뉴에이지운동과 기독교 성찰 / 소논문
2016. 8. 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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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성찰
최 석 우
(2011.12. 제3권. 한영연구논문)
서 론
기독교적 입장에서 뉴에이지는 환영 받을 수 없는 운동임은 확실하다. 이 운동의 핵심적 사항들이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뉴에이지 운동은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 된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꿔 말하여 이 운동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거센 항의를 받아 왔다. 기독교의 뉴에이지에 대한 비판은 결국 교리적 측면이며 이것을 밝히기 위해 거시적 방법을 사용했다.
뉴에이지 운동은 현대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자리를 굳건히 잡고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뉴에이지가 기독교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을 만큼 기독교에 대한 독소적 요소가 풍성함에도 굳건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시각으로는 해악적일지 모르지만 비기독교적으로는 환영받을 만한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의 태동과 진행을 함께 연구함이 현재 자리 잡고 있는 뉴에이지의 정체를 완전하게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연구 방법에 있어 시기적으로 뉴에이지의 태동과 관련하여, 특별히 그것이 두각을 나타나게 된 때를 중점으로 연구를 하려 한다. 물론 과거의 것을 들춰내어 현대에 적용시키려는 작업이 촌극과 같은 것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편일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에 필자는 오히려 성찰을 염두에 두려 한다. 즉 시대적 책임이 기독교에도 있음을 상기하여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본 연구는 먼저 뉴에이지의 시작점을 살펴보고 이어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배경을 조명할 것이다. 여기에는 뉴에이지가 환영받을 이유가 있었고, 또한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이것들을 대치할 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에이지 운동의 태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통해 자성하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Ⅰ. 뉴에이지의 태동
뉴에이지의 움직임은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중심이 된 초월론은 진리를 찾는 도구로 직관력을 우위에 두었다. 그러므로 에머슨에게 있어서 신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러셀 챈들러(Russell Chandler)는 초월론자들이 동양의 경전을 절충적으로 빌려 왔고, 그것들이 자율성과 개인적 결정을 미국적 기준에 적합하도록 혼합시켜서 130년 후 각광을 받게 하였고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에머슨 사후 100년 뒤 매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은 직관을 초월적 논리로 해석하고 에머슨의 뒤를 잇고 있음을 공식화했다.
또 다른 움직임이 19세기 말 헬레나 블라바츠스키(Helena Petrovna Blavatsky)에 의해 설립되어진 신지학회를 통해 등장한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신지학은 초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되어온 대 지식으로 일종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지혜의 대사라는 초인은 진화하여 인간 이상의 단계, 즉 영통한 단계에 도달하고 동시에 자연의 창조자와 합체하여 자연을 보게 된다는 것이며 바로 이런 견해 속에서 신지학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필수적인 사안은 진화다. 신지학의 존재 가치도 이것으로 설명하는데, 만물형태의 진화를 통해서 생명진화의 학설을 제공하는 희망찬 진화설을 설명하는 것이 신지학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들의 주장에서 신의 개념은 비인격적인 것이 되며 모든 피조된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물활론을 주장한다. 이것을 통해 오컬트(Occult) 부흥의 전기가 예고되었다.
뉴에이지 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블라바츠스키는 심령술사로 신지학협회 3대 회장이었던 앨리스 베일리(Alice Bailey)에게 심령술의 영향이 전가되었다. 앨리스 베일리는 매우 활발한 활동으로 뉴에이지의 실질적 기초를 수립했다. 19권에 이르는 책을 지었으며 심령과 비술적 명상에 기반을 둔 아르카나(arcana) 학파를 창설했다. 1922년에는 루시퍼 출판사(Lucifer Trust)를 설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월드 굿 윌(World Good Will)이라는 유엔 산하 비정부조직을 이끌어 내었다. 이 기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 준비를 도우는 선한 이들의 협력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일리의 의도는 뉴에이지의 세계적 시민권으로 단일의 세계 정부를 꿈꾸고 있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1913년 신지학에서 파생되어진 인지학 역시 신비학과 관련이 있다. 인지학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에 의해 생겨났는데, 인지학을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라고 하였으며 사람 안에 있는 정신을 우주 안에 있는 정신으로 이끌고자 한다고 하면서 사람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바람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감각-인식이 끌고 간 경계에서 인간 영혼 자체를 통하여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뉴에이지는 과학을 또한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는데, 19세기 발생하여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를 불신케 함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론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부패하거나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런 인본주의 바탕의 진화 과학이 피조 된 세계의 궁금증을 해결함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필요성은 자연히 감소되었다. 소위 이적이란 유(類)가 비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설명되기 시작하였다. 뉴에이지 과학은 이성 밖 분야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처럼 뉴에이지는 중세 후기 르네상스 이후 더욱더 보강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직관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등을 기반으로 점차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대 세계적 혼잡의 기류 틈새 속에서 뉴에이지는 새로운 대체적(代替的) 세계관으로서 마치 시식거리와 같이 제공되었으며 1970년대 드디어 본모습을 가지고 당찬 활기를 띠고 활동하게 된다.
Ⅱ. 뉴에이지의 성격
뉴에이지의 확산 일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의 즈음 무렵에 거의 일치하고 있다. 1960년대의 세계적 상황은 김외식의 말을 빌리자면 ‘혁명’ 이란 한 단어로 소개될 수 있다.
1. 대체종교
뉴에이지의 종교적 성격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궁극적 삶을 위한 문화운동이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초자연적 절대자로의 회귀라는 면에서 그러했다. 실제로 마약 복용으로 인한 황홀 경험은 중세 수도사들이 고행으로 얻은 경험과 같은 대아(大我)와의 합일 체험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대두되면서 초탈의 방법으로 동양종교에 눈길을 돌렸다. 비틀즈의 단윈 중 한사람은 “동양종교가 나에게 신 중의 하나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라고 하였다.
뉴에이지는 반문화운동에서 요구하는 새 의식에 대한 대답에 적극적이었다. 뉴에이지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타파하려는 민중들의 요구에 전인적 세계관으로 답했다. 뉴에이지는 조각나고 분리된 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주었다.
이런 차로 뉴에이지는 대체종교로서의 만족스러운 변환기능과 함께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도 평화추구의 목적을 강하게 지님으로 인해 기존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일탈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만들어주었다.
2. 사회운동
반문화운동의 사회운동으로서의 문화적 특성으로 먼저 종래의 적자생존이란 다윈의 자연관을 거부하고 모든 생물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개념적인 지식보다 감각적인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육체적으로 자연에 밀착한 생활양식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합일을 갈망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핵가족 같은 인위적인 사회단위보다 원시사회처럼 집단적 공동생활을 주장하며, 경제적인 성장이나 기술적 발전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연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뉴에이지는 이것들을 동양의 종교들과 혼합하여 대중문화화 하였다. 사회학적으로는 이것을 변형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였다. 즉 사회와 개인을 변용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자기 변용을 이루는 다양한 운동들은 초능력 개발을 위한 기공, 단전, 초월명상, 요가, 초감각적 지각,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들이 있다.
비록 이것들이 사회운동의 결과로 이어진 대중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지만 이 운동에 포함된 중심적 사상은 신과의 합일을 위한 비의적(秘儀的) 인본주의 사상이다. 즉 인간 안에 있는 초월적 재능을 개발, 고양하여 우주와의 합일이 되는 것, 곧 어떤 조물주와 같은 신적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Ⅲ. 뉴에이지와 반문화 운동의 관계
뉴에이지를 사회 운동적 성격으로만 한정한다면 굳이 반박하거나 비판 받아야할 내용들이 포함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이번 장에서 논의되어질 주제들은 일반적으로 악의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이 주제들도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이들 주제들 모두의 근저에는 동양 종교의 비의적 요소와 비성서적 정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 반문화운동
1960년대 세계는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프랑스에서는 5월 혁명으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쿠바의 위기 속에 나타난 핵전쟁 위협, 동남아의 베트남 전쟁 등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이다.
이미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 1차 전쟁 그리고 미소간의 냉전 같은 상황 속에서 세계는 지쳐있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주의의 정치적 개념이 그 중심에 있었다. 가장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도 이념적 갈등과 경제위기가 만들어낸 참상이었다. 여기서 발생된 문화적 특징은 비트세대(The Beat Generation)의 등장이다. 이들 역시 기성세대의 주류 가치관을 거부하였다. 이들을 통해 1960년대 자유분방한 청년 문화의 시대가 문을 열게 된다.
이같이 반문화운동은 전통적 제도들의 약속이 쇠퇴하고 부패하는 징조를 보임에 따라 소외와 이탈 현상이 힘을 얻으면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모습을 헌팅턴은 “저항의 시대”, “분노의 시대”, “폭로의 시대”라는 세 가지로 묘사했다. 반문화운동의 중심에는 인간성 회복의 요구가 짙게 깔려있었으므로 반문화의 중심내용은 내적 자유, 내적 풍요 같은 자신의 의미 확대였으며, 종교적 투사, 문화적 억압, 기술만능 같은 여러 비인간화적 요인들로부터의 회복에 있었다. 그리고 일시성, 다양성의 기술문명 특징으로부터 인간의 내면 개발추구도 중심에 있었다. 초월이라는 단어도 반문화와 관계가 깊다. 그것은 미래적 초월, 인간 내부적 초월을 강조했다. 김외식도 반문화운동의 핵으로 초월주의를 말하고 있으며 황홀 체험운동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반문화운동은 정치, 문화, 집단 등과 관련하여 나타난 의식 혁명이었으며 사회 운동이었다. 이것은 또한 대중문화와 만나면서 기술진보와 물질문명을 거부하는 진영과 이것을 인정하여 더욱 개발시키는 진영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거부하는 것은 탱크, 최루탄, 이데올로기, 기계화, 경제개혁, 컴퓨터 같은 것들이며 의식의 혁명적 도구로는 록음악, 공동체 생활, 동양적 신비주의, 마약, 여성해방 등이었다.
여기서 나타난 반문화운동의 결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뉜다. 전자는 기존 자유주의의 가치가 재평가되었다는 결과이다. 즉 개인의 욕구와 희망, 개인의 주도력, 창의력, 시장의 자유경쟁 같은 자유주의에서의 가치들이 새삼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사회 전체 이익을 강조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등한시된 개인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기존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입지는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반문화운동 후 미국은 이른바 ‘미국병’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이 항의의 시대, 폭력의 시대 후 미국은 전통적 가족제도의 혼란을 야기했다. 이혼율의 증가, 방만한 성생활 만연, 특히 이것은 에이즈의 급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빈곤층의 증가, 범죄의 동반적 상승이 있는데 범죄의 다른 특징은 마약과의 밀착과 관련이 있었으며, 환경오염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반문화운동의 세대들이 바라보는 기독교는 매우 우울했다. 로버트 존슨(Robert L. Johnson)은 라이히의 말을 빌려 반문화 세대가 바라보는 기독교는 인간을 새롭게 하는 종교로서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는 예언적 사명, 신비적 사명, 목회적 입장 모두를 실패했다.” 그루두이스(Douglas R. Groothuis)는 좀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잠자는 교회의 앉은뱅이 영성과 지쳐빠진 세속 인본주의, 물질주의 둘 다 ‘새의식’의 문책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장 베르네트(Jean Vernette)도 뉴에이지의 급속 확산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같이 급속히 확산된 결과의 이유로서 사회나 교회가 제공하는 모델은 인간의 욕구나 필요성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결책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고 지적한다.
2. 강화된 인본주의
인도의 구루(Guru)인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는 자기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상태를 죄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 그 자체를 신성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에게서의 신성은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부분을 일컫는다. 라즈니쉬에게 있어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공동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 『기독교와 선』8장에서 다루는 가족에 대한 의견에서도 그는 가정을 공동체로 바꿀 것을 강조한다. 가족은 서로의 이기주의로 인해 행동의 제한이 주어지지만, 공동체는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원만한 구성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래 발전되어 온 인본주의는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음에 분노했다. 1960년 이래 나타난 반문화는 카프라(Fritjof Capra)의 지적처럼 융합보다는 자기주장을, 종합보다는 분석을,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을, 종교보다는 과학을, 협동보다는 경쟁을, 보전보다는 확장에 편중한 결과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된 것으로 보았다.
반문화의 요구는 산업화된 그들 삶의 불만족에 대한 해결이었다. 뉴에이지는 이것을 상호의존, 불가분의 관계라는 도식으로 만족을 주었다. 맥클레인(Shirey MacLaine)은 그의 저서 『빛 안에서 춤』에서 주장하기를 천국은 스스로에게 주어졌으며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자유가 주어진다 하였으며, 또 주장하기를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기에 저마다의 자신들은 우주가 된다는 것이었다.
카프라는 과학과 동양 종교를 하나로 묶어 해답을 제시했는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답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유기적, 전일적, 상대적의 용어들로 그의 물리학을 피력한다. 그의 이런 입장은 우주를 수많은 물체로 이루어진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분할할 수 없는 역동적인 전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 또는 모든 피조물과 창조자는 하나가 된다.
뉴에이지 이론의 기초는 “만물은 하나”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만물은 신이라는 이론도 도출된다. 그 결과 인간이 곧 신이 되는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직 의식의 변화에서만이 가능하므로 서구 문화에서 제한되고 억눌린 참된 정체성을 계몽, 즉 명상이나 요가, 마인드 콘트롤 같은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삶에서 이런 방법들을 통하여 그리고 계속되는 진화적 윤회의 삶을 통하여 완전한 신의 경지인 브라만(Brahman)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달라이라마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철인이라고 칭송한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는 종교가 한계를 주장하면서 서로를 분리시키는 기능으로 한정하고,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미지이며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이미지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신성의 축복이 주어진 사람은 내적으로 철저하게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존재 가능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뉴에이지는 이 세계의 모든 혼잡이 과학적 계몽으로 점철되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파편화된 것으로 진단하고 오직 모든 것을 하나로 합체시킴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 새롭게 강화된 인본주의는 유일한 신개념조차도 대립적 요소로 간주했다. 과학과 이성은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도출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신을 부정했지만, 뉴에이지는 인간 삶의 풍요를 위해 신을 희생시키고 있다. 이제 인간의 과학적 이성과 직관적 감각은 하나가 되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빠졌던 함정을 하나님에게로 책임을 떠안기고 새로운 신 부정의 길을 개척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한계상황에 대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허무주의라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뉴에이지는 간과하고 있다.
3. 생태보호 이론
뉴에이지는 만물이 하나이며, 그러므로 만물이 신이 되는 사상 속에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된 것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본다. 뉴에이지는 이렇듯 범신론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카프라의 저서들이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뉴에이지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호 의존성, 상호 보완성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것은 가이아론(Gaia theory)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요점은 “지구 전체의 생물권이 하나의 단독적인 생물 조직으로 자체의 계속적인 존재와 진화를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함께 협력하여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문화운동과 뉴에이지운동의 일치점은 세속적 세계관의 좌절에서 출발이라는 것이다. 세속적 세계관은 철저한 인본주의로 모든 우주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 따라서 모든 자연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할 이유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실패한 사실로 드러나자 인간은 새로운 세계관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1962년 스코틀랜드 북부에 핀드혼 공동체(The Findhorn Foundation)가 설립되었다. 이들의 강조는 상호연결성의 신비적 연합으로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은 에너지로 말미암은 가시적 실현체가 되는데, 이들에게 우주는 에너지 집합체이므로 모든 것을 신성화하며, 여기서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정령의 세계를 믿도록 유도하여 신적 실체와의 접촉을 최우선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신적 실체는 기독교의 창조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에서 자연중심의 세계관으로 변이 과정은 범신론으로 말미암는 자연스런 귀결이 될 소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심의 변화 경향성은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이나 지혜를 복원하고 복귀하려는 흐름을 워하게 되는데 이것이 갖는 영향력은 자못 크다. 대게 미지의 원주민들은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매우 친밀하다.
뉴에이지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혼합한 일체사상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환경 보호적 측면과 생명 경시에 대해 이것은 환영받을 만한 이론이다. 그러나 물질의 기원이나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보증하지 못한다. 뉴에이지는 지금 현 상태에서의 존재에 대한 답만 제공해주므로 일시적 쾌락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성경은 인간은 창조주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4. 단일적 세계정부
라즈니쉬는 국가, 종교, 인종의 구분에 대한 철폐를 요청한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상,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성함만이 있다”고 한다. 뉴에이지의 본격적 활동이 혼란한 세계의 정황 속에서 자리 잡았음을 유추해 볼 때, 라즈니쉬 구루의 주장은 세상에 대해 설득력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뉴에이지의 세계관이 유기적 세계관이고 일원론의 개념을 가지므로 단일의 세계 정부 요청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이들의 합법적 활동은 UN과 함께 일하는 것에서 보장된다. 데이빗 주니어 차(David Jr. Cha)는 그의 책 『The Final Sign』에서 미국의 카터 행정부 당시 안보고문을 역임했던 쯔비그뉴우 브르제진스키(Zbigniew Kazimierz Brzezinski)의 직접적 인용을 통해 UN의 성격을 진단했다. 그는 “UN은 세계정부의 집권부가 되고 정치와 종교와 경제를 단일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모든 나라들은 핵무기를 축소 또는 감축시키고 대신에 각 나라의 군대를 UN군으로 편입시켜서 결국은 UN군이 보안을 담당하게 한다.”고 하였다. 실로 UN은 향후 단일의 세계 정부를 이루는 도구의 기능을 감당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시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반 기독교적이어서 신경이 쓰이게 된다. UN의 정치, 경제를 통합하는 방법으로서 구체화시킨 것이 있는데 이른바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것이다. 이것의 라틴어 의미는 “Novos ordo seclorum”으로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자유, 곧 하나님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단일적 세계정부는 과거의 중단된 바벨탑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매우 우려가 된다.
한편 노길명의 논문 중 사람들이 뉴에이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를 밝히는 아홉 가지 내용 중 하나가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경향에 부응하여,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열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안식, 치유, 통합, 존엄성, 조화, 평화 등과 같은 가치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이런 해법은 상당한 매력을 지닌다. 뉴에이지의 시나리오라면 세계 평화는 당연한 것이다.
뉴에이지는 국가적, 민족적, 이념적, 종교적 대립을 방지하는 것으로 변형을 다룬다. 개인의 변형뿐 아니라 사회의 변형을 위한 사회운동이 뉴에이지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뉴에이지의 윤리성이 나타나는데, 뉴에이지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우주적 영과의 합일이 되는가, 불화가 되는가이다.
뉴에이지에게 있어 세계 평화는 단일의 정부를 통해서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 개인의 변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변형은 인간 자신의 신성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타인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유기적인 관계임을 알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뉴에이지의 신념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성을 위한 환생의 과정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악은 실제로 존재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기독교의 절대적 윤리의식을 비판하고 윤리적 상대주의를 격찬한다.
세계평화를 위해 상대주의적 윤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극찬이며 동시에 인권 침해의 보호막이다. 절대 윤리를 부정하려 했던 옛 공산주의의 결말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고 판단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결과로 이어지는 국경, 민족, 이념적 초월만이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Ⅳ. 기독교의 자성
20세기에 반문화로 탄력 있게 일어난 뉴에이지는 당대뿐 아니라 21세기의 현대에 이르러 대중문화 속에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두고 많은 경계를 해왔다. 뉴에이지의 만물이 하나라는 기본이념은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인 유일신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한 뉴에이지가 종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므로 더더욱 기독교는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조금 수정해서 살펴보았다. 뉴에이지를 두둔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의 위치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얻기 위해 뉴에이지를 활용해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뉴에이지는 기독교와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도 수정되어야할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에 대해 반감을 품지 않았다. 기독교는 여기서 그것이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한 대처로 활동할 때 기독교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아야 한다. 반문화운동도 문화라고 간주할 때, 이 신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의 대처는 배격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재고해보아야 한다. 기독교는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 나아가서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 밖에서 존재하는 비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니버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그리스도는 문화와 사회에 몸담은 인간을 회심시키시는 분으로서 문화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인간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주제들로 세속문화와의 긴장 속에서 기독교가 검토해야할 사항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뉴에이지의 기본이념인 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은 인본주의를 강화시켰고, 생태보호 이론으로 세인의 환심을 받았으며, 세계적 단일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는 구실을 만족시켰다. 이것들을 조목조목 조직신학적으로 다루어 그것들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도 유익하겠지만 이미 다른 책들이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뉴에이지의 기본이념을 상대로 기독교의 나아갈 좌표를 수립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정체성 확립
뉴에이지 태동 시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가지 기독교 진영은 전통적인 핵심 교리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와 현대 철학으로 전통을 수정하려는 신학 자유주의로 나누어진다. 1920년에는 가히 전투적이라 불릴 수 있는 보수주의인 근본주의가 등장한다. 이처럼 교회 내부는 사회문제보다 전통적 교리 확보를 주목적으로 활동한 보수주의(또는 근본주의)와 복음의 윤리성과 종교적 체험을 강조한 자유주의 진영 간의 논쟁으로 세계 도처에 나타난 문제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앞서 그루두이스를 통해 밝힌 대로 기독교는 시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뉴에이지에게 내어준 것이 된 셈이다.
과거 뼈아픈 경험을 전통적 교리 수호, 윤리적 삶, 종교적 체험의 분쟁 속에서 살펴보았다. 실상 이들 모두는 기독교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통해 기독교는 문화를 개혁하는 작업을 이제 시도해야 한다.
강화된 인본주의로 뉴에이지는 세상에 만족을 주었다. 태초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해결 방안은 신개념을 바로 잡는 일이다. 기독교 강요 1권의 주제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셨으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에게 반역을 했다.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죄책이 주어졌으며 영원한 부패를 그 후손들에게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길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들에게 빛을 비추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십자가 구원의 방법을 사용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정체성은 이신칭의와 성화된 삶이다. 개혁교회 신학자 칼빈(John Calvin)도 이미 기독교강요를 통해 이것을 거론했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믿음으로 신자는 성화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졌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어질 수 없는데, 결국 개혁주의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성화가 된다. 여기서 성화는 거룩함의 완성을 뜻하지 아니하고 완성을 향한 목적이 된다. 신자의 성화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다.
기독교의 믿음은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근거를 둔다. 여기서 지식은 신적인 뜻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화는 믿음을 고백한 중생한 성도에게 나타나는 신적 작용이다. 바꿔 말하여 중생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또한 거룩한 수행이 증대되게 하는 영혼 안에서의 신적 작용인 것이다.
2. 올바른 종말사상
뉴에이지는 진화를 거듭하는 환생으로 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윤회의 삶은 그러므로 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염세에 대한 도피라는 허무주의의 맹점을 지닌다. 현대에 이르러 자살의 증가 추세를 보이는 현저한 이유도 결코 이런 사상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뉴에이지의 인본주의는 그들 식의 단어를 빌려 나타낸다면 차안의 세계뿐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주인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사상이 뉴에이지나 윤회를 말하는 동양 종교들과 다른 점은 수평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보상과 징벌이 뉴에이지 사상과 차이를 가진다. 삶에서의 절제를 요구하는 기독교와 무질서하더라도 인간 자신의 잠재력 개발을 위한 목적이라면 선하다고 보는 뉴에이지를 비교할 때, 인본주의를 기초로 하는 뉴에이지의 주장은 기독교의 종말 개념을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독교에서 죽음의 의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벌콥(Louis Berkhof)의 견해를 빌리자면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 백성의 성화를 위해 정해 두신 형벌의 극치이며 교만한 자들을 겸비하게 하며, 육욕을 억제케 하며, 세속적인 마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영적인 마음을 촉진시킨다.” 벌콥은 계속하여 신자의 죽음을 “신자의 믿음의 힘에 대한 최고의 시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듯이 외관상 패배처럼 보이는 시간에 오히려 승리를 의식하게 되는 눈부신 현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신자의 죽음은 영혼의 성화를 완성하는 완전한 생활의 시작이 된다.”고 보았다. 비록 죽음이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아픔과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 올지라도 이것은 신자들의 경우 삶에 큰 유익을 가져온다. 성화의 완전의 신비인 신자의 종말은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서 늘 긴장 상태 속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말사상은 현실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가져가는 것에 활력을 준다. 성경은 인생의 일회성을 말하고 있으며 죽은 후 모든 이에게 나타날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 신앙 속에서의 신학
기독교가 반문화운동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세속화였다.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 존재했고 사회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고 못했다. 따라서 세속적 인본주의에 지친 자들을 향해 기독교는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기독교 신학이 교리만을 유산으로 간직한다면 다음 세대에 나타날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유기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복음의 인도가 없다면 신자는 하나님에게 나가는 바른 길을 취할 수 없다. 믿음과 말씀은 분할 불가한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은 말씀을 근거로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 또한 함께 작용하는데, 성령은 믿음의 원천이 되며 오직 성령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인격 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 성령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공동체여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신자는 거룩한 삶의 변화와 함께 완전한 성화를 도약하며, 복음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는 능력과 은사들로서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종교적 체험의 신앙 속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올바른 신학이 수립된다. 이런 신학이 전파될 때 세상에서 가치 있는 지혜로, 사람을 바꾸는 능력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뉴에이지로 말미암아 나타난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곽용화는 예배의 회복을 제시한다. 예배의 회복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성령운동은 인간이 이루는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활동하도록 자리를 내어줌이다. 성령은 뉴에이지에서 불확실하게 주장하는 신비적 요소를 말끔하고 확실하게 처리해 주는 구체적 능력이다. 여기서 성령은 뉴에이지와 같은 어떤 신비스런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된다. 성령은 신자들을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설득하신다. 따라서 성령의 구체적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로 심령을 변화시키고, 심령이 변화되는 순간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게 되고, 삶의 모습이 바뀌고, 자진하여 영적 훈련을 실천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는 모범적 시민이요, 교회적으로는 친절한 봉사자가 된다.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병든 영과 육을 치유할 수 있으며, 은사를 통해 교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함에 있어서 개인적 체험과 주변에도 간접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결론
반문화운동 속에서 뉴에이지는 새로운 대체문화로 선을 보였다. 이것은 기독교와 같이 체계적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진 매력이었다. 뉴에이지의 주된 사상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완전히 부정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 윤리적 삶의 정의 까지도 바꾸었다. 이로 인해 비록 기독교 일각의 비판을 면하지 못했지만 성장주의, 물질주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실증을 느낀 반문화 세대들에게 만족을 주었다는 것과 인간의 고질적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소외와 무기력이 있는 곳에 교회가 요구되어야 하며, 아노미 상황에서 교회는 해답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 사회변혁의 책임을 무한히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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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성찰|작성자 Eng of 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