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

[인터뷰] 블라디보스토크 믿음교회 김영원 목사:통일신문



[인터뷰] 블라디보스토크 믿음교회 김영원 목사:통일신문



[인터뷰] 블라디보스토크 믿음교회 김영원 목사

“북한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통일에 기여”


통일신문 ㅣ 기사입력 2016/05/12 [10:30]



1990년대 옛 소련해체와 공산주의붕괴, 러시아공화국의 탄생과 시장경제도입 등은 한반도 남과 북의 정치상황에도 변화를 주었다. 소련(지금의 러시아)은 1950년 북한 김일성을 무력으로 지원하여 6·25전쟁을 일으키게 한 나라이다. 소련공산당의 일당독재로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는 없었고 생활도 형편없이 낮았다.
1988년 소련은 우방이고 혈맹인 북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였다. 30여 년 전 자신들의 군사원조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모스크바도 하지 못한 ‘지구촌 축제의 꽃’인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니 속으로 무척 놀랐고 부러웠을 것이다.
1990년 6월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통해, 그해 9월 미국 유엔본부에서 양국 외교장관이 한소수교를 맺었다. 과거 적대적이던 한소관계는 1970년대 동서진영의 긴장완화가 시작되면서 상호입국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어 왔다.
북한에게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과거 소련의 경제원조에 벌목 및 건설노동자 송출 등으로 교류를 진행하던 북한이다. 그러데 이제는 남한의 자동차, 의류, 가전제품 등이 러시아로 들어오며 러시아근로자들이 돈 벌려 서울로 가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교류는 관광객 방문은 물론 이주 및 상대국 체류활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블라디보스토크(사할린 주도, 한국 도에 해당)에는 한국산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웠으며 곳곳마다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이며 기업들이 눈에 띈다. 이 도시 찾는 관광객 절반 가까이가 한국인이다.
이곳에서 20년간 거주하면서 무기농산물 재배와 선교사역을 하는 분이 있다. 바로 블라디보스토크 호롤 산 믿음교회 김영원 담임목사이다. 러시아 영주권자인 김영원 목사님에게서 특이한 점은 우리의 동포인 북한주민들을 돕는 일에도 손을 걷어 부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있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이 분명하다.
▲북한동포 지원을 언제부터 했나.
지난 2010년부터 지금까지 북한(함경북도) 나선특별시에 들어가 4개 농장에서 미생물농법을 지도하고 있다. 조금 아쉽다고 할까, 남북관계는 정치적 문제로 영향을 많이 받는데 개인적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 한 번 들어가면 보통 4~5일 체류하고 나온다. 대부분 사모와 함께 동행을 한다.
▲미생물 농법이 뭔가?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농산물은 대부분 농약과 비료에 의해 재배되는 것이다. 현대과학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생물 농법은 비료와 농약이 없이 순수 자연산 거름으로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내용을 주제로 여러 농업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으며 또 중국, 미국 등지에 시험농장도 갖고 있다.
▲북한 농촌의 실태는 어떤가.
우리나라의 1950년대 수준이라고 할까, 아직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먹기도 하고 달구지를 농촌 길에서 쉽게 본다. 거기에 2년 전에 맞은 태풍으로 인해 일부 농촌지역은 잿더미로 변했으나 간신히 복구했다. 농장간부들의 업무스타일이 참 특이하다. 국가에서 1000톤의 곡식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든 그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들이다. 분명 500톤 정도 밖에 내지 못할 농지에서 말이다.
▲ 어떤 일을 하였나.
지난 2012년 미국부흥집회에서 받은 사례, 후원금으로 전부 농기구를 구입하여 북한농장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기계도 전기와 원유가 있어야 쓰는데 또 기계라는 것이 자주 써야 녹이 쓸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북한을 돕고 싶은 마음은 항상 굴뚝같다.


2012년 미국부흥집회서 받은 사례·
후원금으로 농기구 구입, 농장에 기증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기계도 전기·원유 있어야 쓸 수 있어
기계는 자주 써야 녹이 쓸지 않게 돼
그러나 후회 안 해…어떻게든 북한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굴뚝같아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는 분들도 있나.
그렇다. 북한선교를 하는 목회자 분들 중에 북한에 들어가 빵공장, 약공장 등을 세운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런데 모두 시련을 겪었다. 나는 그런 것 보다는 북한에 나무심기를 주장한다. 나무 한 주가 500원, 1000원이다. 정부와 교회가 통일기금을 모아놓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다고 본다.
▲ 북한주민들의 애환이 뭔가?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김 선생은 남조선에서는 어땠는지 모르나 러시아에서는 확실히 성공하지 않았나. 우리들은 늘 배가 고프다. 우리의 배를 좀 채워 달라!” 정말 그때만큼은 가슴이 짠하다. 우리와 한 핏줄을 나눈 동포들인데 언제나 배를 곯으면 춥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44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1972년 미국유니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이후 한국으로 들어와 예비군 교관, 새마을 지도자로 농촌지도운동을 주로 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보수합동)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1996년 10월 23일 야탑교회 1호 파송선교사로 러시아에 파송되었다.
▲러시아 어디 지역인가.
내가 간 곳은 사할린 코르사코브시(市) 이다. 옛 소련의 땅, 러시아에 들어가 6개월 만인 이듬해 4월 15일 ‘신광농업전문학교’(2년제 정부설립인가취득)를 설립하였다. 이틀 뒤 ‘코르사코브시 복음교회’를 창립하였다. 본 교회는 현재 자립교회로 성장하였으며 부목사 1명 전도사 2명, 통역간사 1명 있다.

그들이 내게 말했다
“김선생, 우리들은 늘 배가 고프다
우리의 배를 좀 채워달라”
정말 가슴이 짠해지며 아팠다
한핏줄을 나눈 동포인데 배를
곯으며 춥게 산다는 것이 안타깝다

▲또 어떤 일을 하였는가?
2008년 10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하롤시에 군부대 폐기 공지 1만 2000평을 매입하여 ‘극동선교센터’를 건축 준공하였다. 아마도 외국인이 현지에서 지은 첫 선교센터인 것으로 안다.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극구 말렸다. 미련한 짓이라고,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끈기 있게 밀고 나갔다.
▲ 현지 농업지도자 이던데…
그렇다. 현재 극동지역 미생물유기농업 연구원장으로 한국, 러시아, 중국 지역의 농업지도 및 교육을 하고 있다. 이 분야의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주재국에서 허가를 받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극동지역 ‘영성회복센터’ 원장으로 교도소 수감자 입소 2년간 재활교육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유기농업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재소자들을 사회인으로 자립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왜 러시아 선교인가?
러시아는 세계최대 군사강국이며 동시에 세계최대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 어찌 보면 100년간 공산주의화 되어왔던 과거에서 멈춰버렸다고 봐야 한다.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아직도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 교육, 문화 등은 공산주의 향수와 풍토아래 있다. 영적으로 피폐화된 그들 모두가 우리의 선교대상이라고 본다.
▲현지에서 어려움은 없나.
러시아는 외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비교적 관대한 나라이다. 그러나 15살까지의 청소년을 부모의 동의 없이 선교하거나 교회로 인도하면 안 된다. 또한 특정종교 세력이 어느 정도 커지는 것은 은밀하게 경계한다. 예를 들어 어느 목사님이든 운영하는 교회가 200명 이상 넘으면 그렇다.

북한선교 하는 목회자 중에 빵공장,
약 공장 세운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어
그런 것 보다 나무심기를 권장하고 싶다
나무 한 주가 500원, 1000원이다
정부·교회가 통일기금 모아놓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적절하고 유익하다 믿어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은 남한으로 치면 부산과 유사한 국제항구문화도시이다. 남한과의 경제교역이 많으며 그래서인지 남한에 대한 인식이 북한보다 좋은 것이 사실이다. 한 편으로는 아직도 치안, 외국인 차별 등 여러 문제가 있어 때로는 알게 모르게 불편을 겪는 경우도 있다.

김영원 목사는 여덟 살 때부터 형제 중 가장 먼저 신앙생활을 했다. 허나 진정은 아니었다. 그는 요란하게 하나님을 믿는 형이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형을 통해 우연히 교회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부터 변했다.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96년에는 아예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가방 1개만 달랑 들고 선교지로 떠났다. 주위에서 무모한 짓이라며 눈을 흘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더 많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말이다.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행복하고 또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그에게서 새로운 사도행전을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
러시아는 땅은 비록 넓지만 버려지고 못 쓰는 땅이 많다. 그나마 쓸 만한 땅도 뒤떨어진 농업기술로 농산물 수확량이 적은 편이다. 허나 이곳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선진 농업기법을 전하며 꿈을 잃어버렸던 젊은이들이 모이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아직도 어딘가 모르게 군인의 기풍이 묻어 있는 김 목사는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내놓았다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나갔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도하는 그는 러시아 사역뿐 아니라 또 다른 사역도 하고 있다. 러시아 영주권자인 김영원 목사님에게서 특이한 점은 우리의 동포인 북한주민들을 돕는 일에도 손을 걷어 부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있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이 분명하다. 림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