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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보새 16-01-21 00:14 조회1,1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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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무 바람 없이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바람 기대(expecting), 욕망(desire).
형상을 깎아 껍데기를 버리고 마음을 씻어 욕심을 버리고 사람 없는 들에서 노닌다(刳形去皮 洒心去欲 而遊於無人之野). — 장자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 이것은 앞절에서 말한 “아무것도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평행되는 말이다. ‘소유’ 란 사람이 자기 주위에 모아놓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자아(아트만)를 내놓은 그 밖의 일체의 것이다. 자아 밖의 모든 것을 내버린다는 것은 상대적 존재의 세계 전부를 내버리는 일이다. 3성이 없어지는 일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샹카라나 마두수다나(Madhusudana)는 육체를 지지해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해석했고, 베단타 데시카(Vedanta Desika)에 의하면 몸으로만 하는 행동이다. 덕행이나 죄악은 바깥 행동에는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이 애욕과 자기 의지를 떠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다. 인간의 혼이 거룩한 의지의 순수한 통로가 돼버린다.—라다크리슈난
가장 순결한 행위도 ‘자기’ 에 의해 물이 들 때 얽어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비치는 정신으로 이루어질 때 그 얽어매는 힘이 없어진다. 자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 일하는 것은 오직 몸일 뿐이다. 예를 든다면 사람이 잘 때는 몸만이 일을 한다. 죄수가 징역을 살 때는 자기 몸을 형무관에게 아주 내맡긴 것이므로 그의 몸만이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의 죄수로 내맡긴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 간디
22.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우연히 내가 찾음 없이. 이 우주는 자연, 스스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자연에 따라 지도된다. 그것이 그에게 근심 걱정이 없는 이유다. 그의 필요는 우주의 필요다. 우주는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으므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기구일 뿐이다.—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란 상대세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상대 없이는 감각하고 인식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 저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참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가 “천하가 다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아나 그것은 미운 것뿐, 다 착함의 착함됨을 아나 그것은 착하지 않은 것뿐”(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 之爲善 斯不善已)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 없음”(至樂無樂)이라고 한다.
이 우주는 지고자의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얽매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행위에 대하는 마음의 태도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다. 그 무지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제각기 좋고 언짢고를 가리고 택하는 서로 떨어진 개인들로 망상하고 있다. 스승은 여기서 행하는 자와 일과 행동이 어떻게 한 지고자의 서로 다른 나타냄인 것과 지고자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라다크리슈난
23. 집착을 떠나 해탈하여,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 그 행동, 희생을 위하는 사람의 행위(業)는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
19절에서부터 23절까지는 자유로운 행위의 모든 조건을 묶어서 설명하는 말이다. 3장 9절에서는 희생을 위한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희생은 카르마, 곧 업까지도 소멸시킨다고 한다. 업이란 이제 앞으로 열매를 맺을 행위다. 희생은 그와 같이 얽어맴을 예방도 하고 고칠 수도 있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구자라트의 신비가 나라신하 메다(Narasinha Mehta)는 무지한 사람을, “굴러가는 차 밑을 걸어가면서 자기가 그 차를 끌고 가거니 하고 믿는 개와 같다”고 말하였다. 판디트 살타발레카르(Saltavalekar)는 지혜 있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했다. “차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차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정말 움직이는 것은 차뿐이 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찾아 제 몸이라는 차를 타고 나가는데, 그 몸은 움직이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다.” — 간디
이 절의 네 가지 표현은 앞의 다섯 절에서 각각 설명하고 있는 네 가지 표현의 발전을 결론짓는 것이다. 이 발전을 아래와 같이 표할 수 있다.
1. 행위에서 무행위를 보는 사람(18)
그 모든 경영이 욕심을 떠난 사람(19)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20)
아무 바람 없이(21)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22)
집착을 떠난 사람(23)
2.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고(18)
(그의 모든 경영은) 야욕을 떠나(19)
언제나 족한 줄을 알고(20)
자아와 마음을 제어하고(21)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22)
해탈하여(23)
3. 사람 중에서 깨달은 이요, 요가를 닦은 이(18)
그 모든 행위는 지혜의 불로 살라져버린 바 되고(19)
어떤 것에도 의뢰하지 않고(20)
모든 소유를 내버리고(21)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22)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23)
4.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18)
그 사람을 지혜있는 자들은 어진이라 불렀느니라.(19)
아무리 행위 속에 빠져 있어도 그는 아무것도하는 것이 없느니라.(20)
다만 몸으로만 행동하는 자는 죄를 범함이 없느니라. (21)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22)
희생을 위하여 하는 사람의 행동은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23)
24. 희생을 바치는 행동도 브라만이요, 바치는 물건도 브라만이다. 브라만에 의하여 브라만이 불 속에 바치어진다. 그와 같이 브라만에 바쳐진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이는 결단코 브라만에 도달하고야 말 것이니라.
희생(yajna) 공희(供犧) 불교에서 공양(供養)이라고 하는데 해당한다. 베다 종교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쳤는데 불교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하기 때문에 동물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의복, 음식, 눕는 기구, 탕 약 같은 것을 바치게 됐다. 그것은 원주민들이 하는 기름 바르기, 향 피우기, 꽃이나 물을 드리는 것, 등불을 켜는 것 등을 채용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베다의 야즈나를 더 넓게, 정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야즈나를 바치는 자는 행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는 땅 위의 생활을 영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망티크 테르」 (Mantiqu't Tair)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이때껏 살아오고, 보고, 하고, 생각했지만
네가 아니고 나다, 내가 보고, 살고, 했다.
순례자도, 순례도, 길도,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한 것이요,
내 문간에서 나를 만난 것일 뿐이니라.
오라, 너 잃어진 분자야, 네 중심으로 오라.
먼 곳을 헤매었던 광선아
돌아오라. 넘어간 네 태양으로 다시 돌아오라.
(All you have been, and seen, and done and thought,
Not you but I, have seen and been and wrough.........
Pilgrim, pilgrimage and Roda,
Was but Myself toward Myself; and your
Arrival but Myself at my own door...........
Come, you lost Atoms, to your centre draw...........
Rays that have wandered into Darkness wide,
Return, and back into your Sun subside.) —라다크리슈난
25. 어떤 수행자들은 다만 신들을 예배함으로써 희생을 바치고 또 다른 이들은 희생 그것을 희생으로 브라만 불 속에 바친다.
샹카라는 후 반절의 야즈나를 아트만의 의미로 해석해서 “다른 이들은 자아를 자아로 브라만 불 속에 바친다”라고 한다. — 라다크리슈난
24절의 수행자는 그 행동이 무한과 서로 가락이 맞는 사람이다. 그것은 성 어거스틴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한 생활이다. 즉, 당신에 대해 기뻐하고 당신을 기뻐하고 당신을 위해 기뻐함이다. 여기 보여주는 수행자는 희생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희생으로 바치고, 그를 위해 바친다(Makes a sacrifice to Him, for Him).
25절의 후반은「베다경」의 말을 본따서 한 것이다. “신들은 희생의 희생을 바쳤다.”(The gods offered sacrifice of sacrifice) 또 샹카라(Shankara)는 야즈나를 자아로 해석해서 “제한된 자아가 그 자신이 곧 무제한의 자아(unconditioned)와 하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 희생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것만이 지식 희생 곧 즈나나 야즈나(jnanayajna) 라는 뜻은 아니다. 자아가 지고자에 도달하여 그와 하나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희생이다. 혹은 무수한 지식의 희생이다.
다른 주석자는 이런 의견을 말하는 이도 있다. 즉 25절 후반에서 말하는 희생은 곧 자기가 희생을 바친다는 그 생각을 희생으로 바치는 희생이다. 즉 자기를 궁극의 무로 축소시킴이다. — 마하데브 데자이
크리슈나의 말은 신들을 예배하는 일을 브라만에게 희생으로 바친다면 그러한 바침도 또한 하나의 희생이라는 뜻이다. 신들을 예배하는 일을 어떻게 브라만에게 바치느냐, 또 브라만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게 야즈나가 되느냐 그것을 분석해보면 뜻이 자연 분명해진다.
우주의식이 브라만의 상태다. 우주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아의식이기 때문에 예배에 의하여 우주의 식을 성취하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초월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예배의 행동이 오묘한 지경에 이르기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조직적인 방법으로만 가장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 즉 신의 이름이나 형상을 취하여 그것을 오묘한 지경에서 체험하면 마침내 그 지경을 초월하여 초월적인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아주 강하게 감정적으로 된 사람은 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올림에 의하여 희생을 바치는 과정에서도 초월을 이룰 수 있다.
예배의 행동을 초월하는 것을 예배를 브라만에게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또 우주의식의 발전을 돕게 되는 이로운 점이 있다. 초월에 의하여서 예배자는 야즈나의 궁극의 완성에 이를 수 있고 우주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 지경에 가면 모든 행동이 다 야즈나가 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6. 어떤 이는 들음 또는 그 밖의 감각들을 제어의 불들로 바치고, 또 다른 이는 소리 또는 그 밖의 감각의 대상들을 감각의 불들로 바친다.
감각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기관, 즉 안(眼), 이(耳) 비(爲), 설(舌), 신(身)을 오관(五官)이라 혹은 오근(五根)이라 한다. 오근은 인도 말의 판차 인드리야(panca indriya)의 번역이다. 그래서 안근(眼根, caksur-i), 이근(耳根, srotra-i) 비근(鼻根, ghrana-i), 설근(舌根, jhva-i), 신근(身根, kaya-i)이라 부르고. 또 오근에 대하여 오경(五境)이 있다. 경(境)이란 대상이란 뜻이다. 오경은 또 오욕(五欲)이라 하기도 한다.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경(pancavisaya)은, 색(色, rupa), 성(聲, sabda), 향(香, gandha), 미(味, rasa), 촉(獨, sprastavya)이다.
불들 불들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감각을 제어하는 요가의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다라나(dharana, 집중, 통일), 쟈나(dhyana, 명상, 참선), 사마디(samadhi,삼매, 몰입), 이 모든 것을 다 합해서 자제(自制, sanyama)라고 한다. — 마하데브 데자이
세상에는 두 가지 형의 사람이 있다. 감각을 자꾸 활동시켜 대상을 즐기는 사람과, 가지가지 방법을 써서 그것을 억제하는 사람과. 크리슈나가 감각을 제어의 불로 바친다 할 때는 바로 이 둘째 형의 사람을 말한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7. 또 어떤 이는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활동을 지식으로 살라 일으키는 자제의 요가 불로 바친다.
생기(生氣) 숨쉼, 호홉.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지고자를 명상하는 가운데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 간디
일반이 알기로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반드시 자제(혹은 克己)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크리슈나가 여기서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는 특별히 자제는 깨달음에 이른 결과라고 하고 있다.
초월적인 명상 중에 마음이 체험의 오묘한 지경에 이르면 모든 감각의 활동이 점점 약화되어 나중에는 멎게 되고, 호흡도 점점 고르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멎는 상태에 간다. 이것이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숨쉼을 요가의 불로 바치”는 일이다.
자제는 자아가 바깥으로 헤매나감 없이 자기 안에 안주함을 의미한다. 마음의 통제를 완전히 한다는 것은 마음이 바깥으로 헤매나가지 않고 제 속에 가만히 있다는 뜻이다. 마음의 통제가 덜 되면 바깥 어디 지시하는 데로 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각의 제어도 완전히 하면 감각의 밖 헤매임 없이 제 안에 가만있을 것이고, 통제가 덜 되면 바깥 어디나 원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깨달음(지식)에 의하여 불살라진 자제란 자아를 즉 마음과 감각을 완전히 통제하는 상태다. 그 의미는 즉 깨달음의 지경, 혹은 순수한 의식의 지경, 본체의 지경에서는 마음과 감각은 제 속으로 향해 밖으로 헤매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무 활동도 없는 초월적인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 초월적인 의식상태가 부동지경에 들어가서 우주의식으로 변형하게 되면 그때는 마음이 본체 속에 닻을 내리고 가만있으면서 밖의 세계에 대해 제 원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마음이 활동을 하면서도 자제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감각은 언제나 마음의 구조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자체의 이러한 자제 상태에 있을 때는 감각의 활동도 자제의 지경 안에 자동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곧 감각이 자동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깨달음의 지경에 이름으로 인하여서 감각의 활동과 호흡작용을 요가의 불로 바치게 되느냐 하는 경로다. 그러기 때문에 요가의 불이 먼저 켜져야, 그런 다음에야 통제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 자제를 우주적인 수준에서 성취함으로 인해서 우주적 생활의 창조와 진화의 활동이 우주의 본체 곧 하나님은 활동에 버물리움 없이 가만히 있는데도, 3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주적 생활의 내면적 활동양상이다. 그것을 보면 자제에 기초를 두는 자발성과 정밀성에 의하여 이 우주적 생활활동은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요가는 깨달음에 의하여 초월적 의식 안에서, 그러기 때문에 또 우주적인 의식상태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실현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자제의 상태라고 설명되었다. 신의식은 깨달음의 최고의 지경이다. 이 지경이 얻어짐에 따라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하던 자제도 우주적 생명의 수준에서 하는 자제로 올라가게 된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28. 어떤 이는 재산을 희생으로 바치고, 어떤 이는 고행을 바치고, 어떤 이는 요가를 바치고, 또 맹세를 굳게 지키는 다른 수행자들은 경문 읽기와 지식을 희생으로 바치기도 한다.
29. 또 다른 이들은 숨쉬기를 희생으로 바치어서 날숨을 들숨에 바치기도 하고, 들숨을 날숨에 바치기도 하며, 날숨 들숨을 다 막아버리기도 한다.
날숨 프라나(prana).
들숨 아파나(apana).
30. 또 다른 이들은 음식을 억제하기도 하고, 숨을 숨에 바치기도 하나니, 이들은 다 희생을 아는 이들이요, 그로써 그 죄는 소멸되느니라.
신체의 기능은 호흡을 통하여서 되는 것으로 믿었는데 거기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29절에서는 그 두 가지를 말했고 30절에서는 그 전부를 다 말했다.
푸라카(puraka)는 숨을 들여쉰 다음 내쉬기를 그치는 것인데, 29절에서 날숨(prana)을 들숨(apana)에 바친다 한 것이다. 레차카(rechaka)는 숨을 내쉰 다음 들이쉬기를 그치는 것인데, 29절에서 들숨을 날숨에 바친다 한 것이다. 쿰바카(kumbhaka)는 날숨, 들숨을 다 내쉬고 들이쉰 다음 한참씩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름이 서로 다른 것은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생리적 기능이 서로 다른 데서 오는 것이다. 그 작용이 호흡인 경우는 그것을 프라나(날숨)라 하고 결장(結膓)이나 방광(膀胱)에 있을 때는 아파나(들숨)라 하고, 그것이 소화와 하나로 될 때는 사마나(samana)라 하고 그것이 피의 순환으로 나타나 모든 기계적인 힘을 다스릴 때는 브야나(vyana)라 하고, 그것이 후두(喉頭)를 통해서 작용할 때는 우다나(udana)라 한다.
프라나와 아파나가 아닌 다른 세 가지 숨, 브야나는 전신에 퍼져서 모든 기계적인 작용을 통제한다고 생각됐고, 우다나는 죽을 때에 빠져나간다 했고, 사마나는 음식의 정수(精粹)를 전신에 돌려서 소화를 돕는다고 생각됐다. 一마하데브 데자이
사람이 음식을 억제하면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위한 산소의 필요량이 적어지기 때문에, 따라서 호흡도 옅어진다.
음식을 절제한다는 것은 대상을 가지고 감각을 길러주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행동이나 생각함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활동에 관계 아니하려면 신진대사를 줄여야 하며, 그것을 위하여는 또다시 호흡을 줄여야 한다. 이 앞의 절에서 크리슈나가 호흡을 호흡에 바친다고 한 이유다.
위에 든 것은 모두 다 몸을 정결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즈나라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죄가 소멸된다. 「브라마빈두 우파니샤드」 (Brahmabindu Upanishad)에는 죄의 태산이 초월적인 명상에 의하여 도달 되는 하나됨(union)에 의하여 부스러져 없어진다고 했다. 그것 아니고는 길이 없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모든 희생의 짬은 억제다. 그러므로 모든 희생은 영적(靈的) 성장의 방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31. 희생에 바치고 남은 음식은 감로니, 그것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만에 이르느니라. 쿠루사타마야, 이 세상도 희생을 바치지 않는 자를 위하여는 있지 않거든, 하물며 이 다음의 세계겠느냐.
감로 아므리타(amrita).
쿠루사타마(Kuru-sattama) 쿠루족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자, 곧 아르쥬나를 가리킴.
희생은 정화(淨化)의 길이다. 그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마침내 초월에까지 이르게 한다. 희생이 바쳐지면 마음이 정화되어 일단 높은 의식에 들어간다. 그것이 결국은 복된 의식에 이르게 하는데 그것을 크리슈나는 ‘감로’ 라 했다. 그 복스러움은 희생이 지나간 후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누리는 사람을 크리슈나는 “영원한 브라만에 이른다”고 했다. 그 이유는 희생을 끊지 않음으로써 이 초월적인 복된 의식이 차차 자라 우주의식에 이르고, 마침내는 신의식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도,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준다.
모든 희생 중 가장 힘있는 것은 초월적인 명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직접 마음을 절대적 정결에 이르게 하여 무진장의 생명력과 지혜에 접촉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2. 그렇듯 가지가지의 희생이「베다경」속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행위에서 나온 것을 알지어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해탈하리라.
「베다경」속에 이 말은 다른 곳에서는 “브라만의 얼굴 앞에 벌여놓여 있다” 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희생을 바치기 위하여는 행동이 필요하다. 희생을 실지로 바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이론도 필요하지만, 이론이 직접 결과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여기서 행위라 한 것은 정신적 신체적 영적 활동을 의미한다. 이 세 겹의 행위 아니고는 희생은 있을 수 없고, 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 이것을 알고, 그 앎을 실행하는 것이 희생의 비밀을 아는 일이다. 사람이 제 신체적 정신적 영적의 모든 선물을 인류를 위한 봉사에 바치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도둑일 뿐이다. 지능만을 쓰고 육체를 아끼는 사람은 완전히 희생을 바친 것이 못된다. 마음과 몸과 영혼을 합해서 쓰지 않으면 그것들은 인류를 위해 옳게 봉사할 수가 없다. 그런 조화된 활동을 하려면 신체적 정신적 영적 정결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제 모든 기능을 발달시키고, 정화하고, 최선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심하여야 한다. — 간디
33. 재물의 희생보다 지식의 희생이 더 낫다. 대적을 뇌쇄시키는 자야, 오, 프리다의 아들아, 모든 행위는 예외 없이 지식에서야만 그 절정에 이른다.
무식하게 하는 사랑이 도리어 큰 해가 되는 일이 많음을 모를 사람이 누구일까? — 간디
31. 겸손한 공경으로, 거듭하는 질문으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스승에게서 그것을 배울지어다. 참을 본 지혜자는 네게 지식을 주리라.
참을 본 지혜자 성인.
지식을 위한 이 세 가지 조건을 명심하라. — 간디
이 절은 정신생활에서 믿음이 먼저고 그담 지식, 그담 체험이 오는 것을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
35. 판두의 아들아, 이것을 앎으로써 너는 다시 미혹에 떨어짐이 없으리라. 또한 이로 인하여 너는 만유를 남김없이 자아 안에 볼 것이요, 또 내게서 볼 것이니라.
36. 설혹 네가 모든 악인 중에서 극악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너는 다만 이 지식의 배에 의하여 모든 죄악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라.
37. 마치 타는 불길이 그 연료를 재로 만들어버리듯이, 오, 아르쥬나야, 지식은 모든 행위를 재로 만드느니라.
38. 이 세상에 지식처럼 정결케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느니라. 요가에 의하여 완전한 지경에 이른 이는 때가 이르면 스스로 자아 안에서 이것을 발견하리라.
39. 믿음이 있고, 감각을 제어하여 전심으로 구하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니, 지식이 있으면 멀지 않아 최고의 평화에 도달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지식이 없고, 믿음이 없고, 의심하는 성질의 사람은 망하느니라. 의심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안락도 있을 수 없느니라.
41. 부를 차지하는 자야, 요가에 의하여 모든 행위를 내버리고 지식에 의하여 의혹을 헤쳐버리고, 제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행위가 얽어매지 못하느니라.
42. 그러므로 지혜의 검으로 무지로부터 나와 네 가슴속에 박혀 있는 의혹을 잘라버리고, 요가에 머물라. 일어나라, 오. 바라타의 아들아.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안에 있는 절대의 학문, 요가의 경전,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의 끝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