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7
알라딘: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알라딘: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반한 |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김남희 (지은이)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2010-06-19초판출간 2010년
미리보기
정가
13,800원
판매가
12,420원 (10%, 1,380원 할인)
마일리지
69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세액절감액
560원 (도서구입비 소득공제 대상 및 조건 충족 시)
배송료
무료
수령예상일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오늘(17~21시) 수령
최근 1주 88.7%
(중구 중림동 기준) 지역변경
일본여행 주간 27위, 종합 top100 3주|
Sales Point : 1,388
8.5100자평(21)리뷰(24)
이 책 어때요?
카드/간편결제 할인
무이자 할부
수량
장바구니 담기
바로구매
선물하기
보관함 +
전자책 출간알림 신청
중고 등록알림 신청
중고로 팔기
기본정보
반양장본
344쪽
152*223mm (A5신)
482g
ISBN : 9788983946126
주제 분류
신간알림 신청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기타
국내도서 > 에세이 > 여행에세이 > 해외여행
국내도서 > 여행 > 일본여행 > 가이드북
국내도서 > 여행 > 일본여행 > 여행에세이
국내도서 > 여행 > 테마여행 > 걷기/배낭여행
시리즈
일본의 걷고 싶은 길 (총 2권 모두보기)
신간알림 신청
전체선택
보관함 담기
장바구니 담기
[품절] 일본의 걷고 싶은 길 2 : 규슈.시코쿠 -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반한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반한
이벤트
<여행할 땐 책> 김남희 작가와의 만남
12월 특별 선물! 본투리드 보온병(이벤트 도서 포함, 국내서.외서 5만원 이상)
이 시간, 알라딘 굿즈 총집합!
책소개
북으로 홋카이도에서 혼슈.규슈.시코쿠를 거쳐 남으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2년에 걸쳐 일본의 걷기 여행 코스들을 찾아 헤맨 도보여행가 김남희의 신작. 한 나라에 대한 여행기로서는 이례적으로 2권으로 묶어내야 했을 만큼 일본 열도 전역의 주요 트레킹 코스를 총망라했다. 김남희 특유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유려한 문체와 정감 넘치는 입담으로 마치 일본의 시골길을 직접 거니는 듯한 풍성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홋카이도에서는 꽃의 부도(浮島)라 불리는 ‘레분토’, 일본의 마지막 비경으로 세계적인 불곰 서식지인 ‘시레토코’, 일본에서 가장 예쁜 마을로 꼽히는 ‘후라노’와 ‘비에이’를 돌며 천상의 화원이 선사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혼슈에서는 3천 미터급 봉우리들이 우뚝 솟은 북알프스 ‘다테야마’, 후지산의 경이로운 면모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묘진가타케’와 ‘미쓰토게야마’(하코네)를, 규슈에서는 수령 1천 년이 넘는 삼나무만 2천여 그루가 살고 있는 ‘야쿠시마 섬’ 등을 오르며 자연의 장대한 야성미에 흠뻑 젖었다. 유혹하듯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공항으로 가 일본 행 비행기를 타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될 것이다.
목차
1부 홋카이도.여름
고운 님 앞세우고 말없이 걷고 싶은 꽃길 _ 레분토
호기롭게 시작한 야영은 하룻밤 소동으로 끝나고 _ 리시리토
불곰을 기다리며 울창한 원시림을 거닐다 _ 시레토코
아쉽게 놓쳐버린 일본 최대의 습지 산책 _ 구시로 습원
겨울눈 위로 여름꽃 피어나는 홋카이도의 지붕 _ 다이세쓰잔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든 거대한 조각보 _ 후라노와 비에이
2부 혼슈.가을
이글거리는 분화구와 깎아지른 절벽의 야성적 매력 _ 북알프스 다테야마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도시 _ 마쓰모토
에도 시대 나그네가 되어 찾아간 역참 마을 _ 쓰마고와 마고메
3부 혼슈.늦가을
눈 내리는 새벽길을 지나 가을의 절정 속으로 _ 닛코 센조가하라
긴긴 기다림 끝에 벼락처럼 나타난 후지산 _ 하코네 묘진가타케와 미쓰토게야마
고요한 가을빛처럼 이 땅에 평화가 내려앉기를 _ 히로시마 산단쿄
단풍과 함께 타들어가는 절간의 오후 _ 교토 다이몬지 산
4부 혼슈.겨울에서 봄으로
가도 가도 그리운 옛 도읍 _ 교토 아타고 산과 아라시야마
첨단 기술과 미신이 공존하는 수수께끼의 나라 _ 교토 구라마와 기부네, 히가시야마
경주를 닮은 옛 수도 _ 나라 공원과 도다이지
벗들과 함께한 문화유산 답사 _ 가마쿠라 덴엔 하이킹과 다이부쓰 하이킹
짧지만 강렬하게 벚꽃처럼 피고 싶어라 _ 교토 오하라와 기누카케노미치
접기
책속에서
P. 21 곧 어두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못해 여덟 시간 코스로 들어선다. 이곳부터는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완만한 구릉이 펼쳐진다. 멀리 바다가 흘깃 얼굴을 드러낸다. 풍경에 취해 걸음은 절로 느려진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길을 만들었을까? 바람에 몸을 내맡긴 꽃들과 꼭 한 사람이 걸어갈 만한 흙길, 엎어놓은 ... 더보기
P. 37 홋카이도를 떠올릴 때면 늘 겨울의 눈 쌓인 풍경이었다. 나 역시 몇 년 전 겨울, 삿포로와 오타루를 여행했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듣던 대로 눈의 나라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고 굵은 눈발이 하루 종일 흩날리곤 했다. 흔적도 없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는 폭설은 경이로웠다. 눈은 쌓이고 또 쌓여 홋카이도 전체를 설국으로 만들고 ... 더보기
P. 118~119 내가 사랑하는 도시의 조건은 이렇다.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곳. 산으로 둘러싸인 곳.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규모. 너무 번잡하지도 너무 적막하지도 않은 분위기. 도시로서의 편리함을 갖추었지만 미적 품격도 느껴지는 곳. 내가 머물고 있는 도시 마쓰모토는 그 모든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이 도시는 동서남북이 모두 산에... 더보기
P. 178~179 에이칸도를 나와 ‘철학의 길’로 접어든다. 주택가 한가운데 비와코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2킬로미터 남짓한 길이다. 붉게 물든 벚나무가 늘어선 양쪽으로는 예쁜 가게며 카페, 식당이 눈길을 끈다.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는 여름밤에 이 길은 또 얼마나 정겨울까. 이 길이 철학의 길로 불리게 된 이유는 교토 대학의 철학자인 니시다 기타로 ... 더보기
P. 198~199 오늘은 나 혼자 교토를 돌아다니는 날. 집에서 가까운 아라시야마로 향한다. 아라시야마 역에 내려 도게쓰쿄(渡月橋)를 건넌다. 오이가와 강 위에 걸린 이 다리는 ‘달님이 건너는 다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녔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1272년, 나들이에 나섰던 천황이 “환한 달이 다리를 건너가는 듯하구나”라고 탄복한 후 새 이름을...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남희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여행가. 다른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 더 많이 감사하고, 좀 더 겸손하고, 더 자주 웃는 자신을 보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는 항상 책이 있었다. 멀리 갈 수 없을 때도 책을 읽고, 멀리 떠나가서도 책을 읽는 그녀는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 말한다. 너무도 매혹적이라 책을 읽다 그곳으로 향하게 만든 책, 삶을 바꾸는 한 번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 오롯이 책을 위해 떠나는 여행…. 이 책은 그렇게 여행지와 그녀를 연결해준 책에 관한 이야기다. 읽다 보면 떠나고 싶고, 읽다 보면 또 ... 더보기
최근작 : <여행할 땐, 책>,<길 위에서 읽는 시>,<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총 2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자유로운 삶과 결혼한 도보여행가 - 2008.06.24
SNS : //twitter.com/walkingonmyway
Editor Blog
[7월 1주] 돌아온 이야기꾼, 황석영 장편 <강남몽> 출간 l 2010-07-02
강남몽황석영지음 / 창비"황석영이 아니면 불가능할, 압도적 서사로 그려낸 강남형성사"강남이라는 단어가 지명이 아닌, 어떤 상징으로 사용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꿈처럼 무너져 내린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출발한 압도적인 이야기를 들고 황석영이 돌아왔다. 연예계에서 시작해 화류계에서 꽃을 피운 김진의 세컨드 박선녀, 만주 벌판의 밀정에서 출발해 친일의 총아로...
출판사 소개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출판사 페이지
신간알림 신청
최근작 : <불량소년, 날다>,<빅스비 선생님의 마지막 날>,<아이를 빌려드립니다>등 총 98종
대표분야 : 청소년 소설 11위 (브랜드 지수 110,703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풍경에 취해 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길을 만들었을까?”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2년 만에 펴낸 걷기여행 신작
북으로 홋카이도에서 혼슈.규슈.시코쿠를 거쳐 남으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2년에 걸쳐 일본 최고의 걷기 여행 코스들을 찾아 헤맨 도보여행가 김남희의 신작. 한 나라에 대한 여행기로서는 이례적으로 2권으로 묶어내야 했을 만큼 일본 열도 전역의 주요 트레킹 코스를 총망라했다. 김남희 특유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유려한 문체와 정감 넘치는 입담으로 마치 일본의 시골길을 직접 거니는 듯한 풍성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일본 여행기들이 주로 접근이 용이한 유명 도시나 관광명소를 무대로 하는 데 반해, 이 책은 일본의 다양한 풍경을 탐색해 들어간다. 보통 일본 하면 도쿄, 홋카이도 하면 삿포로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에 그런 유명 도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잘 알려진 곳보다는 덜 알려진 곳들을 찾고 싶었고, 도시보다는 자연과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여행한다는 건 진한 화장을 한 게이샤의 무표정한 얼굴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일 같았다. 몸에 밴 친절과 예의 속에 감춰진 진심을 들여다보고픈 갈망. 그런 내 시도는 때로는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다. 길 위에서 만난 일본은 매혹적이었다. 사람들은 상냥했고, 음식은 담백했고, 시골 마을 구석구석에 전통문화가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 놀랍도록 잘 보존된 자연 환경이 부러웠다. 여행을 할수록 나는 이 나라가 좋아졌다. 가까이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웃이 있다니, 이토록 거대한 자연이 남아 있다니……. (‘프롤로그’에서)
처음엔 사전 준비 없이 그냥 가볍게 떠난 여행이었다. 시코쿠만 걸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본 일본은 그동안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일본의 매혹적인 풍경들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니 2년 사이에 아홉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게 되었다. 정작 오랫동안 꿈꿔온 중남미 여행 계획은 뒷전으로 미룬 채.
홋카이도에서는 꽃의 부도(浮島)라 불리는 ‘레분토’, 일본의 마지막 비경으로 세계적인 불곰 서식지인 ‘시레토코’, 일본에서 가장 예쁜 마을로 꼽히는 ‘후라노’와 ‘비에이’를 돌며 천상의 화원이 선사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혼슈에서는 3천 미터급 봉우리들이 우뚝 솟은 북알프스 ‘다테야마’, 후지산의 경이로운 면모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묘진가타케’와 ‘미쓰토게야마’(하코네)를, 규슈에서는 수령 1천 년이 넘는 삼나무만 2천여 그루가 살고 있는 ‘야쿠시마 섬’ 등을 오르며 자연의 장대한 야성미에 흠뻑 젖었다.
어디 자연뿐인가. 도시 전체가 미적 품격을 갖춘 ‘마쓰모토’, 세월을 거슬러 에도 시대로 돌아간 듯한 역참 마을 ‘쓰마고’와 ‘마고메’, 일본 정원의 교과서로 불리는 소겐치 정원이 있는 ‘덴류지’와 대나무숲길 ‘지쿠린’, 주민들이 살기 좋은 마을이 훌륭한 관광지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후인’,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이시다다미 돌길’(오키나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비견되지만 오셋타이라는 특유의 공양 전통이 살아 있는 ‘시코쿠 순례길’ 등은 일본 문화의 단아하면서도 웅숭깊은 매력으로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자, 이래도 일본에 안 갈 테야?” 하고 유혹하듯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공항으로 가 일본 행 비행기를 타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될 것이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꼼꼼한 성찰, 걷기 여행에 관한 빛나는 아포리즘은 덤이다. 접기
집중수행이 끝난 뒤 나는 물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요?” “네...
집중수행이 끝난 뒤 나는 물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요?” “네...
7 hrs ·
집중수행이 끝난 뒤 나는 물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요?”
“네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아이를 사랑할 때 어떻게 해요?”
“저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줍니다. 시간과 마음. 물질을 아무 조건없이 계산없이 그냥 줍니다.”
“아이에게 하듯 본인에게 그렇게 하시면 돼요”
따귀를 맞은듯 잠시 얼얼해졌다. 이 기간동안 내스스로 등에 얼마나 많은 짐을 지웠는지 어린시절 부모의 책임을 떠안으며 그들의 결핍된 에고와 신념에 빨려 오래도록 허덕였는지 또 내 것이 아닌 투사에 휘둘리고 육체의 감각을 외면하고 억압해왔는지 그리고 손발을 노예처럼 다루며 몸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자신을 가꾸는데는 인색했는지 보았다.
문을 열면 거기 묻어두고 밀쳐두었던 상처들이 그대로 있었다. 다음 문을 열면 거기 그대로 불안해하는 아이가 다음문을 열면 두려워하는 처녀애가 상처받은 얼굴로 아무데도 가지않고 그냥 거기 그대로 앉아있다.
예기치못한 복병들처럼 잠복해있다 덮쳐 들어오는 이미지들에 눈물을 여러번 쏟아내고 들었던 물음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을 모르겠다는 마음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 전서 13장(성경)을 묵상하며 자기사랑에 대해 느낌 점을 기록해둔다.
자기사랑
사랑은 언제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을줄 알고 기다리며
사랑은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사랑은 타인이 가진것을 시기해 자기를 열등하게 만들지 않으며 타인과 비교해 상대적인 우월감으로 자기 에고를 확장하지 않는다.
사랑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상대에게 결핍을 채우려 들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의 몸을 돌보며 아끼고
사랑은 자기 감정을 알아차리고 존중한다.
사랑은 상호연결된 전체속의 개별적인 나를 인식할 줄 알고
사랑은 세상의 불의와 불공정과 타협하지않고 진실을 추구한다.
사랑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를 멈추며
사랑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수용한다.
사랑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흔들려도
자신에게 희망의 가능성의 보며
진리를 향한 자신의 참된 성장을 기뻐한다.
그리고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숨을 느끼고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것이다.
원본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13장1-13)
2019/12/10
조선적 일본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적 일본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적 일본군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6년 7월)
육군특별지원병령(1938년 칙령 제95호)를 게재한 1938년 2월 26일의 조선총독부 관보
조선적 일본군인(朝鮮籍日本軍人) 또는 조선인 일본병(일본어: 朝鮮人日本兵) 또는 조선계 일본군인(朝鮮係日本軍人)은 일본 제국 육해군에 소속되어 군무원으로 복무한 조선인 군인, 포로 감시원 등 군인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한 군속 등이며, 그 중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자를 가리켜서는 조선인 BC급 전범(朝鮮人BC級戰犯)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군과 연합군에 의해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다.
목차
1개요
2모집
3군인 군속 통계
4일본군의 조선인 장성
4.1중장
4.2소장
5연표
6배상 및 보상
7참고 자료
8같이 보기
9각주
10외부 링크
개요[편집]
처음에 육군에 조선인이 대규모로 도입된 것은 1910년에 창설된 헌병보조원 제도에서였다. 헌병 보조원은 육군 일등을 졸업하고, 이등 졸업에 준하는 처우를 받을 수 있는 군속이었다. 1919년에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면 헌병보조원은 조선총독부 경찰의 경찰관으로 전관되었다. 1938년에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 1943년에 해군 특별지원병 제도가 각각 도입되었다.
특별지원병 제도 시행 이전에는 조선인이 일반 사병으로 육해군에 입대할 수 없었으며, 조선인 일본 군인은 홍사익으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한 자, 이병무처럼 구 대한제국 군대에서 조선군인으로서 일본 제국 육군에 전입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해군사관학교, 해군기관학교 등 해군 사관을 양성하는 여러 학교는 시종 조선인의 입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4년부터 징병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군인, 군속으로 일하게 된 조선인 군인, 군속은 ‘적국에 부역한 신민’으로 간주하여 일본인으로서 재판을 받았다. 상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면제받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조선인, 대만인의 전범을 만들어 낸 요인이 되었다. 버마 철도(태면철도, 泰緬鐵道) 건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정부가 〈제네바 조약〉을 지키겠다고 연합국 각국에 약속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처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약에 반하는 명령, 처우, 실행 책임을 말단 군속에게도 물은 것이다.
조선인 전범은 148명 중 군인은 3명이었다. 1명은 홍사익 중장(사형)이었으며, 두 사람은 지원병이었다. 이 밖에 통역병도 있었던 조선인 16명이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그 중 8명은 사형을 당했다. 3,016명의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 129명 전원이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징용되어 타이, 자바, 머레이의 포로수용소에 배속된 군속이었다. 이들 중 14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적국의 부녀자를 비롯한 민간인을 억류한 자바군 억류 장소의 감시에도 조선인 군속이 맡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법정에서도 전범이 되었다.[1]
조선인, 대만인 전범은 일본인이 ‘내지 송환’이 될 때 함께 일본으로 송환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일본인 전범은 형집행을 지속하도록 했지만, 조선인 전범 등의 국적이 이미 일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과 대만인은 예외로 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에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의 최고재판소(대법원)는 구금 당시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형기를 마쳐야 한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가석방된 조선인 전범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아무런 생활 지원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가석방 상태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의지할 기반조차 없어서 온갖 차별에 시달리며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생활고와 비관으로 자살한 이들도 있었다.[2]
한국인 BC급 전범 기소자들은 1955년 4월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하고 명예회복과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 입법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쳐왔으며, 60주년이 된 2015년 4월 1일 현재 생존자는 이학래(90세, 일본 동진회 회장) 씨등 5명에 지나지 않는다.[3]
일본 통치 하에서 군무원으로 들어가 전몰자가 된 한반도 출신자 가운데 조선인, 일본군을 포함 약 2만 1000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모집[편집]
인원[4]연도 지원자 입소자 선발율 지원배수
1938년 2946명 406명 16.2% 7.3배
1939년 12,348명 613명 4.9% 20.2배
1940년 84,443명 3,060명 3.6% 27.6배
1941년 144,743명 3,208명 2.2% 45.1배
1942년 254,273명 4,077명 1.6% 62.4배
1943년 303,394명 6,000명 1.9% 50.6배
군인 군속 통계[편집]
일본 후생노동성 (1990년, 1993년 반환 명단, 당시 후생성)의 통계[5] 에 따르면 조선인 군인, 군속은 24만 2,341명이며, 그 중 2만 2,182명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 또는 행방불명이 되어 귀국하지 않았다.
표1 각 지역별 인원과 사망자지역 분류
동원 복원 행방불명 또는
전사 행방불명 또는
전사율
조선[6] 전체
242,341명 240,159명 22,182명 9.2%
군인
116,294명 110,116명 6,178명 5.3%
군속
126,047명
110,043명
16,004명
12.7%
대만 전체 207,183명 176,879명 30,304명 14.6%
군인 80,433명 78,287명 2,146명 2.7%
군속 126,750명
98,590명 28,160명 22.2%
일본 본토 전체 7,814,000명 5,514,000명 2,300,000명 29.4%
BC급 전범의 재판의 결과[7]
표2. BC급 전범의 재판지역 유죄 사형
조선 129명 14명[8]
대만 173명 26명
일본 본토 5369명 922명
일본군의 조선인 장성[편집]
중장[편집]
홍사익(洪思翊)
조동윤(趙東潤)
이병무(李秉武)
조성근(趙性根)
니시카와 당이치 (西川潭一) (어담(魚潭)에서 개명)
이은(李垠)
소장[편집]
이희두(李煕斗)
우쓰모니야 긴고 (宇都宮金吾) (김응선(金應善)에서 개명)
왕유식(王瑜植)
연표[편집]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을사조약 (1910년 조약 제4호)
1917년 7월 20일 군사부조법 시행 (1917년 7월 19일 조선총독부법률 제1호, 칙령 제204호)
1918년 조선군인 및 조선군인 유족 부조령 (1918년 칙령 제299호)조선군사령부 조례 (1918년 군령 육 제4호)
1921년 조선군 군법 회의에 관한 법률 (1921년 법률 제86호)
1938년
3월 3일 육군특별지원병령 시행 세칙 (육군 정령 제11호)
4월 1일 국가총동원법 (1938년 법률 제55호) → 국가총동원법 및 전시 응급조치법 폐지 법률 (1945년 법률 제44호) 초록
4월 2일 조선총독부 ·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규정조선총독부 ·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학생 채용 규칙 → 육군병 특별 지원
5월 4일 공포 (5월 5일 시행) 국가총동원법, 조선, 대만 및 사할린에 대한 시행 건 (1938년 칙령 제316호)
1941년 조선총독부 상이군인 요양소 관제 (1941년 칙령 제313호)
1943년 전시행정특례법 및 허가 인가 등 임시조치법에 대한 조선, 대만 및 사할린 시행 건 (1943년 칙령 제242호)7월 27일 해군 특별지원병령 (1943년 칙령 제608호)
1944년 조선 징병 검사 ⇒ 훈련 중에 종전
10월 28일 군수회사법 조선 및 대만에 대한 시행 건 (1944년 칙령 제605호) ← 군수회사법 (1943년 10월 31일 법률 제108호)
1945년 군사특별조치법, 조선과 대만 뉴 시행 스루노 건 (1945년 칙령 제256호)군사 특별조치법, 조선과 대만 시행에 대한 건 (1945년 칙령 제256호)전시 비상조치법, 조선과 대만 시행에 대한 건 (1945년 칙령 제377호)
1946년 조선인 중화민국인, 일본인 및 본적 북위 30도 이남(쿠치노시마도 포함) 가고시마 현과 오키나와 현에 있는 자 등록령 (1946년 후생, 내무, 사법성 령 제1호)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장소 : 샌프란시스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1996년 12월 18일 발효)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협정 체결 (1996년 12월 18일 발효)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 (법률 제144호) 공포 (1996년 12월 18일 발효)
1987년 대만주민 전몰자의 유족 등에 대한 조위금 등에 관한 법률 (법률 제105호) 공포, 시행
배상 및 보상[편집]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에 따라 일본 국적을 이탈한 조선인 일본군 (군속 포함)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부에서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및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 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라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본래 대한민국이 그 보상의 의무가 다양한 역사적 경위와 정치적 사정을 감안하여 평화 조약 국적 이탈자 등 〈전몰자 유족 등에 대한 조위금 등의 지급에 관한 법률〉 (법률 제114호 (1,2,6,7))에 의해 다음의 내용으로 조위금, 위로금을 지급했다. 또한 일본은 재일 한국인, 일본군 군인 군속 등에 대한 보상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 경제 협력 협정에 의해 법적으로는 한일 양국 간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조약을 근거로 하여 일본 법원은 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들이 제기한 모든 소송에서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91년 11월 12일 한국, 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 7명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져야 할 전쟁 책임을 대신했다고 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했다.
1996년 9월 9일 도쿄 지방 법원에서 제1심 판결 청구를 전면 기각
1998년 7월 13일 항소심 판결 - 원고 청구 기각
1998년 10월 19일 대법원에 상고
1999년 12월 20일 대법원 판결 언도 - 상고 기각 · 판결 확정
참고 자료[편집]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우쓰미 아이코, 이호경, 동아시아, 2007년 08월 15일 출판, ISBN 8988165845원서는 《朝鮮人BC級戰犯の記錄》 內海愛子
《조선인 BC급 전범》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경초서방, 1982), (이호경 역, 동아시아출판사)
《해방 후 BC급 戰犯이 된 한국인 포로 감시원》(『한국근현대사연구』제29집, 2004년)
《BC급 전범재판과 조선인》 (김용희 『法學硏究』 제27집, 2007)
《해방 후 BC급 戰犯이 된 한국인 포로감시원 = 韓國人부虜視員に對したBC級戰犯處理と問題點》, 채영국 『한국 근현대사 연구(Journal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Vol.29 No.- (2004)
《해방 전후 자바지역 한국인의 동향과 귀환활동》, 김도형 『한국 근현대사 연구』Vol.24 No.- (2003)
《한국인 B·C급 전범’ 재판과 피해보상 청구 소송》, 김은숙,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1)
《戰爭과 犯罪》(War and Crime), 이동과, 서원대학 논문집, Vol.10 No.- (1981)
같이 보기[편집]
BC급 전범
각주[편집]
↑ 한국인 BC급 전범과 전범재판에 대하여 -재판과정을 중심으로-, 김범식, 2019년 10월 1일 확인
↑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제5화, 누가 이 청년을 전범으로 만들었는가?) Archived 2015년 9월 23일 - 웨이백 머신,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2015년 3월 27일, 2015년 9월 23일 확인, 링크오류 수정 2019년 10월 1일
↑ 전범 멍에, 식민지 조선인 모임 동진회의 슬픈 환갑잔치, 2015년 4월 1일 연합뉴스
↑ 『朝鮮及台湾ノ現状/1 朝鮮及台湾ノ現況 1 REFCODE B020312847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4700
↑ 第071回国会 社会労働委員会 第16号 昭和四十八年七月三日(火曜日)午前十一時十五分開会 (参議院)議事録 政府委員答弁より作成
↑ 1990년 후생성
↑ 중국과 소련 분 제외
↑ ここでは군인군속だけを計上している。その他의 정의によれば、23명
외부 링크[편집]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선인 BC급 전범 148명 (일요서울)
전범이라 낙인 찍힌 조선 청년들, 알고 계세요? (오마이뉴스)
일본군/조선인 - 나무위키
일본군/조선인 - 나무위키
일본군/조선인
최근 수정 시각: 2019-11-17 21:50:10
분류
일본군/조선인
일본군
旧日本軍
[ 펼치기 · 접기 ]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한반도 출신자를 가리키는 표현. 그 특성상 대다수, 특히 장교는 거의 전원이 육군이고 해군은 드물다.
1. 개요2. 조선지원병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5. 알려진 사람들
5.1. 조선군인5.2. 일본 육군5.3. 일본 해군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
6.1. 문학작품6.2. 드라마6.3. 영화6.4. 논픽션
1. 개요[편집]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육해군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겠단 야욕을 드러냈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일으켰다. 그 후 1910년에 강제 병합을 했다. 총독부 산하의 행정기관에도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나, 일본군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에 있는 경우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군인들이 일본 육군으로 들어온 경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인은 조선 왕족 출신이거나[1]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나마 해군은 장교는커녕 말단 수병조차 조선인을 받지 않고 있었다.[2] 1930년대 이후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본토 출신들이거나 조선이나 대만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강제병합 이후 치안을 유지한단 핑계로 경찰 조직 대신에 헌병을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헌병보조원으로 일부의 조선인을 뽑았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조선인이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공직이었기에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일본제국 경찰로 대신하고 조선인들을 보다 많이 채용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군에 끌고 가거나 군속(군무원)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3] 실제로는 군 복무에서 철저히 분리하여 관리했으며 조선인들은 전장에서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4] 그리고 일본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의 친족도 징병에서 제외하였다. 전후에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조선인은 129명이었고 이들 중 14명은 사형되었다. 도쿄 재판에 오른 A급 전범은 당연하지만 없다. 차별 등으로 조선인이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다. 일본군 고위급에 오른 조선인의 대다수는 대한제국군에서 편입한 친일파나 왕공족이었다. 홍사익만이 예외적인데 일본군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 이름을 유지하는 그를 진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용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이와는 별개로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 중에 자위대 직원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일본 방위성 정보 본부에서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계 일본인 정보원이 한국에서 사찰하다가 추방된 적이 있다. 프랑스 기사
육군병의 경우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다 (생존률 93.8%).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951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생존률 30.6%). 뉴기니 등도 마찬가지였다 (2,877명 중 1,014명 귀환, 생존률 35.2%).[5]
2. 조선지원병[편집]
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편집]
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편집]
약간 표현에서 기술적인 차이가 있는데 조선군인은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한 친일파나 1938년 지원병을 받기 전에 일본 정부의 특례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을 말한다. 아래는 1910년 9월 1일에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인원이다. 전원이 육군 장교이다. 총원이 25명이다.
중장(부장)
2
소장(참장)
2
대령(정령)
1
중령(부령/2등군의장[6])
4
소령(참령)
4
대위(정위)
8
중위(부위)
1
소위(참위/삼등사[7])
3
이들 외의 조선군인으로는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다.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이었다. 이중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 때 편입한 33명이다.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육사 출신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자를 포함해 다섯이다. 조선인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없고 일본 내지인 호적으로 들어가 입학한 경우는 일부 있다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는 상태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및 고급 장교 가운데 일본 해군 출신은 없으며,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등 소수의 만주군 인맥이 있으나 대부분 해병대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부족한 조종사 충원을 위해 해군 예과 연습생(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약칭 예과련.) 일부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으나, 종전까지 임관한 사람은 없다. 예과련 출신 중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규가 유명한데, 그 역시 후보생으로만 있다 광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는 일부 입학자가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중에도 두 명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군속 신분으로 일하던 헌병보조원도 군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들은 일등병과 이등병 사이의 대우를 받았다. 1910년 당시에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1,012명이었다.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다.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경찰이 업무를 맡았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 경찰의 순사가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육군의 경우 1938년부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작했고 해군은 1943년부터 육전대(해병대)와 지상근무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고졸 이상으로서 간부를 임용하는 제도의 경우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병사의 경우 보통학교 4년 졸 이상이면 일본어, 산수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조선인을 징병할 때[8] 일본 육군에서는 주로 보병 (약 2/3)으로 데려갔다. 그 외에는 치중병, 비행병, 공병, 고사포병, 산포병, 야포병으로 각각 1~5%씩 데려갔지만, 전차병, 야전중포병, 철도병, 통신병, 선박병, 항기병, 병기병으로 복무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 해군 역시 주로 수병과 공작병 (각각 1/3)으로 데려갔다. 나머지는 정비병, 기관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으로 복무했다.
5. 알려진 사람들[편집]
5.1. 조선군인[편집]
홍사익: 한국인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 중일전쟁 시기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일본의 육사로 유학갔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같이 유학을 간 친구들은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으며 탈영한 조선인 일본군을 숨겨주는 등 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일본군 장군에 있었다는점과 중일전쟁시기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교전 지휘했다는점, 그리고 2차대전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다.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중장.
조동윤: 1871-1923.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에 이르렀다. 다만 이는 실적 등으로 진급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한제국군의 고위 장교였고 친일 행적 등으로 받은 계급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작 직위를 받기도 했다.
이병무: 1864-1926. 조동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음. 경술국치 후 귀족작위 받아 떵떵거렸다. 친일파로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
조성근: 1876-1938. 조동윤, 이병무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들어간 친일파. 최종 계급 일본군 중장.
어담: 1881-1943. 위의 조성근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을 지낸 친일파.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일본 참의원을 지냈으며 지원병 제도가 생기자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은: 1897-1970. 영친왕. 왕공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에 연대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도쿄에 주둔하기도 했다. 최종계급은 일본군 중장. 다만 자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잘 분류되지는 않는다.[9][10]
이희두: 1869-1925.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넘어간 친일파.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할 수 있게 도왔다.
김응선: 1881-1932.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우츠노미야 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육사로 유학했다. 그후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한제국군으로 다시 파견되어 열심히 친일질 했다.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왕유식: 1870-1930. 이름과 달리 존나 무식했던 모양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친일파가 된 대한제국군의 군인. 원래는 대한제국군 대위로 박영효가 임명한 친일파 장교를 견제하려고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보냈는데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5.2. 일본 육군[편집]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 본명은 김영길로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도야마 대학교를 나온 뒤에 일본군 병(군악부)으로 입대했다. 음악가로 테너로 활동했다. 일본군을 독려하는 음반 등을 발표했다. 전후에 갑산파성향을 띄다 재일교포 북송에 참여해 북한으로 갔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빨갱이로, 친일 종북 월북 그랜드슬램 그거 심영(...) 그러나 북한 공연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자로 몰려 가택연금 등을 당하다가 풀려난 뒤에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내는 일본인인데 자녀들은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이 자가 부른 노래는 한 곡이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는데 일본 군가 정복하자 런던이다.
김달삼 : 학병 출신으로 소위 임관. 복무 중 종전을 맞고 귀국하였다. 일본군 복무 경험은 이후 4.3사건에서 김달삼의 유격대 지휘통솔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석원 :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중일전쟁 전선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다. 신생 한국 육군에도 장성으로 임관해 한국전쟁 때도 일본군도를 패용하고 지휘했다.
김수환 :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징집되어 장교로 교육을 받다가 탈락하고 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장준하 : 자원입대하여[11] 중국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7월 탈영한다. 탈영 직후 국민당 유격대에 의탁했으나 그 유격대는 일본군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어찌어찌 빠져나와 김준엽과 다른 조선인 탈영병들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합작 기획한 국내 진공 작전 요원으로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편입되지만, 8월 15일 광복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하였다. 이 여정을 함께 했던 광복군 장병 분들이 90대의 춘추로 몇 분 살아계셔서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언을 하였다.
김준엽 :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하여 중국에 있던 일본군 자대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 기지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투항해 중국군 기지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광복 후 귀국까지의 행적은 장준하와 거의 동일하다.
탁경현 :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 나오자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에 추모비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식이 치뤄지지 못했다.#
이응준
이종찬
이형근
채병덕
5.3. 일본 해군[편집]
김기택: 전 영남대학교 총장. 입대 시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입대 전에 만주흥업은행 본점에서 근무했고 한국전쟁 때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경리장교로 입대했던 것을 보면 일본 해군에서도 주계과(경리, 보급, 행정을 맡는 병과)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시 대위였다.
김재규: 일본 해군 예과 연습생 출신으로,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아 임관 못 하고 돌아왔다. 대한민국에선 육군 장교가 되었다.
이외에 기관과 등 지원병과 중심으로 출신자가 있다. 심지어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 전투기 조종사도 있었다. 또한 당시 상선학교(도쿄상선, 고베상선학교 등) 출신의 해기사는 의무적으로 해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었으므로 이곳 출신 조선인들 중 군함에 탄 이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므로 생존자나 후손들도 대개 공개하지 않는다.
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편집]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룬 작품에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많이 나온다.
6.1. 문학작품[편집]
《태백산맥》(조정래, 한국) - 김범우, 심재모
6.2. 드라마[편집]
여명의 눈동자(MBC, 1991, 한국) - 장하림, 최대치
제 3공화국(MBC, 1993, 한국) - 청년기의 박정희 전 대통령
6.3. 영화[편집]
일제 어용영화 지원병(志願兵)(1941, 조선)
일제 어용영화 병정님(兵隊さん)(1944, 조선) - 조선군 보도부의 지원으로 제작된 개소리 모음집선전 영화.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1963, 일본) - 일제 침략전쟁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 병사들의 삶과 이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니혼 TV를 통해 방송된 25분짜리 영화이다. 극중 일본 정부는 조선인 부상자 문제에 대해서 조선은 1945년 이후 외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징병된 이들 역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이 일본군에 부역하는 상황에서 입은 부상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관성과 한국정부의 지원 의무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청구할 것을 못박았다.[12] 감독은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일: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영:Merry Christmas, Mr. Lawrence)(1983, 일본•영국) - 조선인 병사를 연합군 포로를 성폭행하고 처벌받을 처지에 놓이자 자살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해 국내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俺は、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2007, 일본)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탁경현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마이웨이(2011, 한국) - 주인공이 노몬한 사건에 참전한 조선인이라는 설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한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에서 영화의 모티프를 따왔다.
손님(2015, 한국) - 촌장[13]
6.4. 논픽션[편집]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김효순, 한국) - 관동군에 징병되어 만주 작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 병사들의 애환과 배상 문제를 다룬 책.
궁금한 이야기 Y / 17세 소년은 왜 자살특공대가 되었나(2014.02.28 방송, 한국)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박동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이 알고싶다 328회 / 야스쿠니의 神이 된 소년 특공대원(2005.02.26 방송, 한국) - 만주국의 수도였던 장춘의 방송국에서 발견된 박동훈의 유언이 담긴 레코드와 그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와 보통국가화 문제를 지적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1137회 / 화태(樺太)에서 온 편지 - 국가는 왜 날 버렸나?(2018.09.15 방송, 한국)
[1] 당시에 일본은 왕공족으로 이들을 분류하였다.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단 높게. 간단히 줄여 이왕(李王)가라고 불렀다.[2]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감안하면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조선인들의 입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3] 윤치호 등 친일파는 정말로 이것을 믿고 '드디어 내지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구나!'하고 기뻐하기도(...)믿으면 곤란하다[4] 단, 일단 입대하고 나면 계급 우선주의에 입각했기에 조선인이라도 하급자 일본인은 그들을 함부로 못 대했다. 괜히 조선인들이 오장 달 때까지만 참자며 버틴 게 아니며, 실제로 오장으로 진급하여 동네로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주재소장(오늘날의 파출소장 내지는 지구대장) 싸대기부터 때리고 봤다고 하는 게 아니다. 홍사익 중장의 경우에도 일본인 부하들이 홍 중장이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구름위의 존재 같은 중장이 일본인도 아니고 대한제국 황족도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외경심을 느꼈다 한다.[5] 일본군의 병력동원 규모와 추이[6] 군의관 별도의 계급으로 중령에 상당한다. 3등군의장은 소령.[7] 소위에 상당하는 계급으로 보이는데 아는 위키러의 추가바람.[8] 관련 문헌은 정안기 (pdf 논문 본문) 및 엑셀 보충 자료를 참조할 것.[9]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친왕 이은 경우, 태어나자마자 아주 어린시절부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경우였고...[10] 1950년 전후로 한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이승만대통령의 입김으로 그는 정상적 입국절차를 받지 못해 결국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본에 지냈다. 하지만 그는 육군 장교자격으로 2.26사건의 진압부대의 일원이었을 뿐,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교전, 특히 독립군전선 혹은 중국전선을 밟은 적 조차 없다. 또한 그는 자신의 국적을 계속 잊지 않고 1910 경술국치이후 1945 8.15 광복까지의 35년간 한국어를 잊지 않아 1945년 이후 주변의 한국인들과는 유창한 한국어로 소통했다고 한다. 참고로, 1945년 전까지 그의 주변에는 한국인이 없어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35년간 일본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계속 한국어를 되뇌었다는 것이다.[11] 고향친구 최기일은 말리는거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고 말했고 본인 자서전 돌배게에서도 부모님이 걱정 되었다고 이유를 들면서도 자원했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뒷배경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정신대로 징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입대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돌베개, 고상만 저. p38>[12] 단 영화의 촬영시기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대일청구권등 보상논의 역시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며 당시의 한국 경제 역시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실시되기 이전의 참담한 수준이었고 당시의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당시 부상당한 참전 용사들의 복지 문제도 손을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일기본조약체결 이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13] 영화 속에서 촌장은 나환자촌의 환자들을 배신해 학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무당마저도 동굴에 가두고 산 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지으면서 본인이 부리는 패악을 "살려고 지은 죄는 용서받는다."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주인공 부자와의 약속을 배신한 것도,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여버리고 마을을 차지한 것도, 일본군에 입대한 것도 본인이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
학도병 - 나무위키
학도병 - 나무위키
학도병
최근 수정 시각: 2019-10-23 22:00:30
분류
군인
學徒兵
1. 개요2. 한국의 학도병3. 일본의 학도병4. 다른 나라의 사례
UN 아동권리협약 제38조 ① 당사국은 아동과 관련이 있는 무력분쟁에 있어서, 당사국에 적용 가능한 국제인도법의 규칙을 존중하고 동 존중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
②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③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의 징병을 삼가야 한다. 15세에 달하였으나 18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 중에서 징병하는 경우, 당사국은 최연장자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 무력분쟁에 있어서 민간인 보호를 위한 국제인도법상의 의무에 따라서, 당사국은 무력분쟁의 영향을 받는 아동의 보호 및 배려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10조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 (중략) ③ 국제적 무력충돌 또는 국제적이 아닌 무력충돌과 관련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5. 15세 미만인 자를 군대 또는 무장집단에 징집 또는 모병의 방법으로 참여하도록 하거나 적대행위에 참여하도록 하는 행위
⑥ 제2항·제3항 또는 제5항의 죄를 범하여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은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⑦ 제1항부터 제5항까지에 규정된 죄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1. 개요[편집]
의미 자체로는 국가의 학생들을 징집한 병력을 의미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학생은 대부분 고등학생 이하의 10대 어린 소년들이기 때문에 징집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윤리적으로 크나큰 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법 상의 문제도 있어 설령 전쟁에서 이긴 국가라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강제로 징집한 후폭풍을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를 징집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자국민의 저항과 종전 후 국제사회에 국가 지도층을 전범으로 고발하는 학도병 피해자들 등. 인권이라는 개념이 문명화된 사회라면 강력하게 작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학도병은 국가 입장에서 또한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당장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쟁 중인 시리아에서조차 소년병들은 무장단체들에게서만 볼 수 있을 뿐 정부군이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징집하지 않는다. 이는 소년병과도 연결되는 점이다.
학도병을 징집하지 않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는데, 과거 한국과 일본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실할 경우 손해가 큰 고급 인적자원인 대학생에게도 병역면제 혜택을 준 시기가 있었다. 이는 서구권도 비슷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석박사급 인력들이 단순 징발로 말단 병사나 수병이 되어 참호에서 갈려나간 뒤 이 후유증이 컸던 관계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공계 고급인력이나 숙련공 등에게 많은 대체복무의 길을 열었다.
이와 같이 나이나 학력 때문에 징병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학생들이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원에 의해 군대에 참여한 것을 학도병이라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군대에 지원한 한국 청소년들을 가리켜 학도의용군이라고도 하며, 일본이 편성한 학도병은 더 줄여서 학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사 서적에서 학병은 일본군 참여자[1], 학도병은 한국군 참여자로 구분하면 쉽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학도병,학병은 공통적으로 대국민 총력전을 독려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애들도 총잡고 나라 위해서 싸우는데 부끄럽지 않냐.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싸우자!" 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소재로 사용된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좀 더 발전하면 패전 직전의 일본과 독일처럼 여자와 노인도 병사로 끌어들인다.
2. 한국의 학도병[편집]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수많은 학도병들이 징집 혹은 자원입대해서 북한군과 싸웠다. 서류상 자원입대자들도 많았으나 문제는 학교에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다가 그대로 학도병이 된 사례들도 자원으로 집계되어 사실상 개중에서도 강제가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강제로 입대당한 경우도 생각보다 꽤 많았는데, 이 경우도 자원입대라고 여겨졌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초반에 주인공 형제가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된다. 당시 관점으로써도 어린 학생을 전선에 투입한다는 게 비극으로 비춰줬지만 병력도 무기도 부족했는데 기습까지 당해서 병력을 갈아넣어서라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해야 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미성년자를 징집했다는 뼈아픈 비난과 공격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또한 별도의 소년병들도 존재했는데 미성년자들이 징집됐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지만 학도병은 군번을 부여받지 못했고, 소년병은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았다.[2]* 이들은 현충원 등지에서 추모비도 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국방부의 흑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재일교포 청소년들이 재일학도의용군을 편성하여 참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학도병들은 대한민국 육군에 배치됐다. 소년병은 아니지만 20대 대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가기도 했는데, 이 중에선 한국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있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입장에서 소중한 자원인 대학생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건 아주 최악의 행위이기에[3] 대부분 다른 보직을 맡았다. 실제로도 당시에는 대학생 이상의 학력은 병역 대상이 아니었고 대학생 이상이 군복무를 하면 대부분 갑종장교였다. 김영삼 역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기에 육군 정훈병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전황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였기 때문에 저렇게 배치되기만 해도 상당한 행운이었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자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초대 원장이었던 외과의사 민병철도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을 다니면서 간신히 졸업했는데,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전히 거리에서는 육군의 신병 징집이 있었고 신분에 관계없이 일단 잡혀가면 얼마간의 기초 훈련만 받은 채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나도 여러 번 아슬아슬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잡혀서 타고 가던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적도 있었다"라고 한다. 다행히 본인은 졸업 후 대한민국 해군 군의관에 지원해서 중위로 진해 해군병원에 배치받았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는 정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이와 같은 무질서한 자원입대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어린 애들도 나라 지킨다고 스스로 총 잡고 싸우는데 니들은 뭐하냐는 식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해 먹기도 딱 좋기 때문이다.[4] 심지어 이런 학도병들을 희생양으로 써먹은 작전까지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하면 되지만, 당시 이 작전을 구성, 운영한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면서 51년 3월 복교령을 내려 학도병으로 입대한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는데, 학도병들이 제대하지 않고 군에 계속 남은 사례는 크게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학생 본인의 의지로 정식 군인이 되어 계속 군대에 남은 사례이고, 하나는 병력 손실을 꺼린 일선 부대장들이 고의적으로 학생들에게 복교령 발표 사실을 알리지 않아 그대로 군복무를 계속한 사례이다.
군대에 남은 학도병들은 나이보다 일찍 군대에 들어가서 실전을 겪고 술과 담배, 여자를 배웠기 때문에 학생으로서의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다. 50년대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사진들을 보면 학생이라고 보기에 많이 삭은 아저씨들이 많은데, 한국전쟁 때 징집되었다가 제대 후 다시 재학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후 빈곤한 가정 형편 때문에 취업하다 재학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20대 후반의 중고생들도 꽤 많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도병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애국심은 가상하지만, 그렇다고 상술됐듯이 학도병이라고 모두가 다 자신의 의지로 입대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전체로 보면 전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소년병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미성년자들을 함부로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군사적으로도 비효율적이고, 국가의 미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현재는 병역법으로 금지하지는 않지만,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그런 행위들이 심각한 인권 침해로 인식되고 한국도 UN 아동권리협약에 비준함으로써 꽤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21세기가 된 지금 또한 일부 현역 군인 간부나 예비역이 중고등학교에 안보교육 목적의 특강을 갔을 때 학도병의 희생을 들먹이면서 "여러분도 전쟁나면 총 잡고 싸우게 된다"고 히죽대기도 한다.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애들 놀리는 게 재밌어서 하는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소년병 징집은 국제형사범죄법으로 금지되므로 UN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일단 대한민국에서 만 18세미만의 청소년의 참전은 있을 수 없다. 어디 이름도 처음 듣는 전시 상황인 후진국에서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학도병이 생길 가능성은 제로다. 단, 대학생은 성인이기 때문에 소년병의 기준에서 예외이며 매우 극한 상황이라면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징집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은 학도병의 선례와 미화시킨 이미지가 있어서 필요하면 이런 짓을 하는데 거부감이 없다.[5][6]
3. 일본의 학도병[편집]
학병 항목과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항목, 히메유리 학도대 항목을 참고할 것.
4. 다른 나라의 사례[편집]
독일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패망으로 몰리자 11, 12세의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을 연합군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1944년에는 아예 1927년생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무장친위대 이병으로 군적에 올리고 부사관과 장교들을 타 부대에서 차출해 편성한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라는 부대도 있다.
[1] 사실 이 경우는 지원을 빙자한 강제 징집에 가깝다.[2] 보통은 이등병으로 갓 입대할 정도의 나이에 일등중사 계급으로 전역을 한 사람도 있을 정도.[3] 당시에는 대학생이 드물었다. 현대의 박사학위자나 그 이상의 취급을 받았다고도 한다.[4] 애들을 전선에 투입하는 게 자랑인가 싶지만 선동용으로는 쓸만 했다고 한다.[5] 사실 대한민국이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징집해야 할 정도로 막장인 상태라면 어린 나이에 징집당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닌 도망쳐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겁쟁이라고 비난받고 나라를 버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6] 대한민국이 미성년자들을 징집할 상황이면 이미 일선의 현역 장병들은 궤멸되고 동원예비군에 보충역까지 죄다 갈려 나간 후, 민방위와 그것조차 끝나가는, 혹은 아예 그것조차 끝난 중장년층이 전선으로 끌려가는 2차대전 말기 독일의 상황과 동일할 것이다. 국민돌격대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항복하는 게 아니라 총만 들 수 있는 사람이면 죄다 긁어모아 전선으로 내보내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거 저승길 동무로 다같이 죽자." 라는 의미, 혹은 국민을 총알받이로 세워두고 높은 사람들은 벙커에서 망명루트 짜고 있거나 정말 그런 전략으로 승산이 바뀔거라 망상하는 것이다. 애국심이 얼마나 투철하든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들을 사람으로 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