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4

[뉴스파워] 윤회는 가짜다?!

[뉴스파워] 윤회는 가짜다?!



윤회는 가짜다?!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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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기사입력 2018-06-20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 석가가 힌두교적 윤회사상을 거부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i] 이런 면에서 석가는 힌두교의 종교개혁자임이 분명하다.[ii]왜냐하면 힌두교의 자연 신들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힌두교의 영혼사상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온갖 힌두교의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들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윤회사상이다. 석가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영혼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에게 있어 윤회는 단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휴스톤 스미드는 석가의 이러한 무아론적 윤회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영혼의 단독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윤회설을 믿기는 하였지만 당시 브라만교도들이 믿는대로의 윤회설을 믿지 않았다. 그는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가 보는바 윤회설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등불을 켜서 그 불을 또 다른 등불에 옮기고 또 옮긴다고 하자. 그때 맨 마지막에 옮겨진 불꽃은 틀림없이 처음의 그 불꽃과는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그와같이 같은 영혼이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로서의 개체의 영혼은 그것으로 그치고 다만 한 등불이 다른 등잔에게 불씨의 역할을 하여 주는 것과 같이 다른 또 하나의 존재의 원인이 되어주며 원인-결과의 유대를 가질 따름이다...... 결국 윤회과정에 있어서 부처는 물체설을 부인한다. 물체설을 부인하는 까닭은 삼라만상의 생성 윤회과정에 있어서 물체는 유한되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1]







전통 힌두교의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윤회설은 업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운명의 주체가 바로 신이다.  하지만 석가의 상징적인 윤회설은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윤회설이다. 그러기에 운명의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석가는 인간 스스로 운명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가르친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그의 저서 <인간붓다, 그위대한삶과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고 결정된다면 누가 악한 일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해도 그것으로 과보를 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어떠한 의지도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즉 모든 행위가 신에 의한 것이라면 악행을 해도 그것은 신이 시켜서 한 일이지 인간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숙작인론이란 인간이 받는 현재의 모든 고락은 과거 전생 업의 결과라는 주장으로, 우파니샤드나 자이나교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의 모든 것이 전생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면 모든 행위는 자기 의지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을 필요도 없으며, 또한 인간이 스스로 수행한다든가 노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라면 지금의 행동도 전생에 규정된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써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무인무연론은 모든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며, 인과란 인간이 지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숙명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주체 의지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어떠한 인과 원칙도 없이 단지 우연한 사건의 나열이라면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사고나 행위가 단지 우연이라면 인간에게는 올바른 목적을 갖고 수행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 가지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것이 신의 의지이든, 전생 업의 결과이든, 우연한 사건이든 간에 그러한 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한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나 전생의 업 또는 물질적인 여러 요소의 결합에 의한 사건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 사상의 참 뜻이 있다 하겠습니다.[2]







휴스톤 스미드도 석가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가모니는 윤회설로서 카르마의 교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모든 사물이나 생명체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원인과 결과의 생성 과정가운데서도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는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수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







이제 석가가 힌두교의 유아론적 윤회설을 부정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석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석가가 그 모든 숙명적인 업보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는 무슨 말일까? 이는 석가가 말하는 해탈은 바로 반윤회(실제로 윤회는 없다는 주장)를 통한 탈윤회(윤회의 올무에서 벗어남)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윤회가 허구내지는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윤회를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 모든 고통과 짐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윤회라는 말은 거칠다. 한마디로 ‘윤회는 없다’는 것으로 ‘반(反)’은 ‘무(無)’’의 뜻을 갖는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윤회와 상치시키기 위해 이 말을 쓰는 것인데, ‘윤회설과 윤회를 부정하는 입장’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명제로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는 윤회는 무아론과 모순된다.’….. 윤회설을 긍정하면서 신분제도에 신음하는 인도인을 구원할 방도는 없다. 윤회설은 내운명에 대한 지나친 수긍으로 앞으로 나가기 어렵다. 숙명론은 수행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불교의 교리와 자칫하면 부딪힌다. 내 죄를 씻는 것은 내 몫이다. 반윤회는 윤회가 우리가 벗어버릴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탈(脫)’윤회야말로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석존은 탈윤회를 통해 우리가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4]







어쩌면 석가가 전통 힌두교가 주장하는 윤회설의 미신적인 요소들, 특별히 사람이 짐승으로 환생한다는 주장들을 전적으로 부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석가가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힌두교 윤회설이 어느 정도로 미신적일까? <우빠니샤드>에 나타나는 윤회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윤회세계에 들어가는 존재들은 마을에 사는 속인들로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올리고 보시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은 뒤 화장을 하면, 그들은 화장불의 연기속으로 들어간다. 그 연기에서 밤으로, 밤에서 어두운 15일(보름 다음 날부터 그믐 날까지)로, 어두운 15일에서 태양이 남쪽을 향해 내려가는 여섯 달로 간다. 그들은 여섯 달로부터 조상들의 세계로, 조상들의 세계에서 소마의 왕인 달로 간다. 달에 도착하면 그들은 신들의 음식이 된다. 거기서 신들은 이 음식을 먹는다. 죽은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선행이 고갈될 때까지 거기에 머문다. 이 단계가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들은 달에서 허공 속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허공에서 공기 속으로, 공기에서 비 속으로, 비에서 땅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면 그들은 땅 위에 쌀, 보리, 풀, 나무, 깨, 콩이 되어 나타난다. 남자가 쌀과 보리 등을 음식으로 먹고 정액을 여자에게 사정해 줌으로서 다시 삶으로 되돌아온다. 좋은 행동을 한 자들은 좋은 생을 얻게 된다. 그들은 브라흐만, 끄샤뜨리아, 바이샤로 태어난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한 자들은 나쁜 생을 받게 되는데, 개, 돼지, 천민으로 태어난다.[5]







인간이 동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론은 윤회론을 옹호하는 사람들 조차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베이치 교수는 비록 윤회론을 확신하는 철학자이지만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윤회론의 내용은 거부한다. 그는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는 윤회론을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베이치 교수는 주장한다,







윤회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들에서는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가능성이 거의 배제됩니다. 윤회는 최소한 3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전해진, 아주 오래된 관념입니다. 그 동안 이 관념은 종종 원시적, 민중적 믿음과 뒤엉키곤 했지요. 예컨대 인간은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난다는 식이지요…..이것은 아이들에게 도덕적 행동을 가르치고 성인들을 교화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윤회론과 어긋나는 점이 많습니다.[6]   







사실 힌두교도들은 현세의 부귀를 전생에 의한 보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세의 고난을 내세의 보상을 받기 위한 기회로 여긴다. 그러기에 각자의 신분에 만족하며 법[iii]에 따라 선한 행위를 쌓아야 한다. 이러한 힌두교의 윤회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분제도를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지키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iv]하지만 석가는 사회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윤회설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즉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는 숙명적 윤회설을 거부한 것이다. 그 대신에 사람들로 하여금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극제로서만 윤회설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힌두교의 미신적인 윤회설을 부정하였다. 이를 위해 석가는 먼저 힌두교가 있다고 주장하는 영혼이라는 무형적인 물체를 부정한다. 그리고 힌두교의 미신적인 윤회설을 대체하기 위한 좀 더 합리적인 윤회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사후세계나 업보에 얽매여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대중들의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선한 삶을 독려하고 악한 삶을 멀리하라는 윤리적인 자극이나 경고로서만 윤회설을 활용하였던 것이다.[7]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길 원했다. 또한 그 개척된 운명의 결과까지도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력적인 구원을 가르친 것이다.[v] 이는 철저히 신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라는 것이다. 즉 인본주의적 구원을 가르친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숲속에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듯,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39)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 적의가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42)







그렇다면 왜 석가는 힌두교의 숙명적 윤회설을 하나의 도덕적 윤회설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석가가 힌두교의 내세관, 즉 힌두교가 주장하는 사후세계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내세관을 가진 것이다.  니르바나, 즉 극락의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서 믿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극락에 관한 석가의 설명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 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 부른다.[8]







석가가 극락의 존재를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와 사후세계는 서로 원인과 결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혼의 실체를 믿지 않는 석가의 무아론과도 같은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무신론적 내세관은 힌두교와 기독교의 유신론적인 내세관과는 정반대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윤회(힌두교)가 종교라면 연기(불교)는 철학이다. 윤회(힌두교)가 신화라면 연기(불교)는 과학이다. 윤회에는 절대자가 있지만 연기에는 절대자가 없다. 윤회는 신의 이름으로, 연기는 도덕의 이름으로 움직인다. 윤회는 나도 모르는 것에 책임이 지워지고, 연기는 내가 알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 윤회는 힌두교의 것이고, 연기는 불교의 것이다. 힌두교는 윤회하는 내가 있어야 하지만, 불교는 연기하기 때문에 나란 없다. 윤회는 고정된 나를 전제하고, 연기는 나의 실체를 부정한다. 싯다르타는 연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으로 힌두교의 윤회를 대체한다.[9]







결론적으로 석가의 내세관은 윤회를 부정하는 반윤회 사상이다. 즉 석가는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내세관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베이치는 주장한다, “유물론은 아예 영적 세계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윤회론이 들어 설 여지가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석가의 인생관은 무신론적 유물론에 가까운 것이고, 이는 영적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사상에는 힌두교적 윤회론이나 기독교적 천국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만일 불자나 수행자가 윤회를 부정한다면 해탈을 얻기 위한 이생에서의 그 모든 고행이나 수행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수행이나 거룩한 삶의 목적이 윤회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회도 없는데 왜 헛수고를 하는가라는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윤회가 없는 세상이라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바로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사라진다. 그래서 자살 행위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사후세계나 천국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고 허무하다면 이러한 현실을 도피하면 된다. 즉 자살하면 된다. 아니면 반대로 세상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될 것인가. 쾌락이나 범죄도 모두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사후세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믿는다. 그러기에 한번 뿐인 우리의 삶을 아주 소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살아가야 한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4)





















[1]세계의 종교들, 86-87.



[2]법륜,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서울: 정토출판, 2010 개정판), 34.



[3] Ibid, 86.



[4]윤회와 반윤회, 60.



[5]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61-63쪽에서  A형 윤회에 대하여 요약 편집함.



[6]윤회의 본질, 101.



[7]윤회와 반윤회, 45.



[8]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79쪽에서 간접 인용.



[9]윤회와 반윤회, 54-55.





[i]토마스 하트먼과 마트 젤먼은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힌두교에서는 우리안에 영혼이라는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목샤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편 불교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포함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것을 깨우침으로써 니르바나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종교 산책, 53. 불교의 무아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자기자신을 부정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하지만 무아설은 또한 아트만, 즉 영혼이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는 아트만, 즉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힌두교의 유아설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아설에 대해 이태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아설은 아(我) 즉 아트만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후에 4법인중 제법무아로 정리되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된다. 아트만이 없다는 것은 우파니샤드에서 보듯 윤회의 주체 또는 인간의 심신을 총체적으로 통괄하는 내적 본질이나 주재자와 같은 존재로서의 아트만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트만에 의해 심신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신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서로 관계하여 우리의 삶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원리를 붓다는 연기라고 표현하고 일체의 존재는 연기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아트만과 같은 절대적인 실체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아트만이란 개념은 윤회의 주체로서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 무아설과 같이 아트만이 없다면 죽은 후에도 아트만은 없어야 한다. 붓다는 영혼으로서의 아트만과 같은 존재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인도철학산책, 91-93. 이런 면에서 영혼의 존재가 없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윤회설의 주체인 영혼의 실체를 부정하게 되어 결국에는 윤회설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석가모니가 무신론적 철학을 견지하면서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영혼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극히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석가모니는 영혼이 인간의 실체를 무엇으로 보았을까? 석가모니는 인간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로 보았고, 이러한 심신 복합체로서의 인간은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물질, 감정, 인지, 타고난 체질이나 성향, 의식 등이 하나로 뭉쳐서 정신적이면서도 육체적인 복합체를 이루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신은 어느 날 분해되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Y. Masih, A Comparative Study of Religion, 222.



그렇다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석가모니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중도의 입장을 취한다고 한다. 유물론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은 인간의 죽음은 그 모든 육체와 정신의 소멸로 끝장이 난다고 믿지만, 전통 브라만교 신앙을 소유한 유신론자들은 사후에도 살아 남아서 생존하는 영혼이 있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두양극적인 입장을 거부하였는데, 유신론자들의 입장을 거부한 이유는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고, 유물론자들의 입장을 거부한 이유는 만일 사후의 심판이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해이나 무질서 상태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아노미 상황이 초래될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이었다. Ibid, 230.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윤회설을 견지할때 어떠한 논리로 전개했을까? 윤회는 하나의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복합체로서의 개체(Individuality)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생을 거듭할 때마다 그 개체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개체가 전생의 그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석가모니의 대답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체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새롭게 태어난 그 개체가 전생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복합적 개체로서의 자아가 윤회의 끊임없는 속박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기에 상당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심신의 복합적 개체는 하나의 경험적 자아로서 이해되어지고, 그로인해 출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동일한 요소들을 그대로 지닐 수도 있고 동시에 어느 정도 변화되어진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패턴의 윤회의 체인이 지속되는 한, 각 순간마다 각 개체가 지닌 책임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촛불이 다른 촛불을 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의 촛대에 있는 촛불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촛대에 불을 전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Ibid. 여기에서 필자는 윤회설에 대한 석가모니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추론하게된다.



석가모니는 애초에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윤회설 자체도 부정하려고 하였는데, 당시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유신론과 윤회설을 정면으로 맞설 수가 없기에 신의 존재에 관하여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영혼의 존재만을 부정하는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윤회설은 겉으로만 인정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현실적인 타협을 할 수 밖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 즉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상황들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와 종교를 장악하고 있는 브라만교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유신론과 유아론을 믿으면서 카스트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윤회설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이나 비판은 너무나 커다란 반작용을 감내해야 하기에 석가모니로서는 중도적인 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유무를 가려달라고 물어볼 때는 침묵으로 답하였고, 단지 유아론만을 부정하면서 무아론을주장하므로 브라만교와 자신의 변별력을 확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윤회설은 당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와 이어져 있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에 석가모니로서도 함부로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비록 무아설로 윤회설의 근간은 무너뜨렸다고 하더라도 윤회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천민들이 일어나 카스트제도를 무너뜨리고 폭동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해이 현상이 벌어지게 되기에 석가모니로서는 윤회설의 겉모양은 유지해야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폭동이 일어나거나 석가모니가 위험한 사상을 유포한다고 하여 브라만들이나 정치나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제거해 버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ii]토마스 하트먼과 마트 젤먼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힌두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새로운 종교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석가모니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굴레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세계종교 산책, 54.



Peter Harvey는 석가모니가 종교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부처 석가모니의 시대에 대부분의 브라만들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하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고 살았다. 그 방법들로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베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그리고 희생제사를 드리거나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브라만의 일부는 가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지만, 다른 브라만들은 부유하고 거만하여 방자한 삶을 살았다. 이들 브라만들은 왕들이나 귀족들이 바치는 아주 크고, 값이 나가는 희생제물의 피흘리는 제사를 통해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민간 신앙차원에서 브라만교는 마법과 주술에 기초한 제의들을 포함하였고, 브라만교 이전에 성행하였던 정령숭배(애니미즘)조차도 의심할 것없이 병행하였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



11. 니니안 스마트는 그의 저서 <세계의 종교>에서 석가모니 당시의 브라만 문화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도문명 전체에서 가장 항구적으로 지속된 요소는 브라만 문화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자처하면서 굉장한 특권을 누렸다....... 브라만 가운데에는 의례를 집전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인도인들은 소나 그 밖의 값진 물건으로 희생제물을 장만하는 제주(祭主)에게는 번영과 성공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또한 브라만의 제의전통은 태초부터 영원한 권위, 즉 최고의 성스러운 소리를 듣고 세베다의 찬송집을 편찬한 현인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한다... ... 브라만은 신성한 찬송과 성스러운 언어를 전문으로 하고, 또한 왕과 왕자및 보통 사람들을 위한 길고 복잡한 의례를 집전할 수 있는 이들로, 인도종교를 창조한 주된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 부르는 것도 대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을 가리킬 정도이다.”니니안 스마트, 윤원철역, 세계의 종교 (서울: 도서출판예경, 2004), 75-76.



니니안 스마트에 의하면, 이러한 브라만교에 강력한 도전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바로 떠돌아다니며 금욕을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라는 거대한 사회계층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사문이라 불리는 떠돌이 수행자들은 이러한 카스트라는 신분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일상의 사회적 의무를 초월한 존재들로 자신들을 생각했다. 이들이 이미 집과 가족을 떠나 출가한 상태이었기에 그 모든 고리(세금과같은각종의무)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브라만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관여하였기에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사문이 많이 등장하여 존경을 받으면서 브라만들과 쌍벽을 이루는 권위를 부여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아리아인들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델리주변이 이런 종교의 발상지였고,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바라나시와 파트나 같은 신흥도시들이 성장했다. 강력한 왕국과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안정되면서 새로운 상인계급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새로운 종교운동, 특히 불교에 이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Ibid, 71, 75, 80-81.





김은수 교수도 불교는 인도의 계급제도와 브라만교의 다신교적 신앙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발생되었다고 주



장한다. 석가모니를 비롯한 사문들은 브라만교가 만사형통으로 여겨왔던 자연신들에 대한 제사의 한계를 깨달



아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제시하며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실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은수, 비교종교학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31-132. Martin Forward에 의하면, 불교는 하나의 급진적인 종교개혁이다. 불교는 힌두교의 신앙 속에서 자라나 힌두교 신앙과 반응하면서 결국에는 힌두교 신앙의 문제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신분제도에 반발하고,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힌두교의 명상적 수행에 반발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지나친 고행과 금욕에 반발하여 불교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석가모니가 힌두교의 업보개념과 윤회설을 받아들인 면에서 힌두교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힌두교의 근간인 초월적 신의 존재와 아트만, 즉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 면에서 볼 때에는 과격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종교개혁임에는 틀림이 없다. Martin Forward, Religion: A Beginner's Guide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2006 South Asian Edition), 65-66.



다신교적 유신론의 전통적인 브라만교가 인도사회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에 무신론적인 불교의 출현은 인도의 전통문화에 충격 그 자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불교의 무아설은 그동안 유아설을 주장해온 힌두교 철학에 커다란 충격과 함께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태승 교수는 불교가 태동시에 인도철학과 종교에 미친 그 영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비정통 철학가운데 불교는 특히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윤리,도덕적인면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다. 무아설로 대표되는 불교의 기본철학은 베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사상에 대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유물론과 달리 체계적인 교학을 가진 불교가 무아설을 주장하는 것은 전통 철학에 가히 충격이었다.



그리고 불교의 교세가 커짐에 따라 무아설은 체계적인 교학을 바탕으로 기존의 철학사상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교리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철학적 개념은 인도철학을 정통파와 비정통파 즉 유파와 무파로 구분지어 끊임없는 논쟁과 대립 구도를 낳게 하였다. 따라서 인도에서 불교의 역사는 기존의 전통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힌두 철학과의 끊임없는 논쟁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인도철학산책, 89-90.         



[iii]다르마(산스크리트어: Dharma)는 법(法)으로 번역된다. 이때 '법'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에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기도 하며 모든 생명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질을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말하는 다르마는 석가모니가 발견한 진리를 말한다.





peter Harvey에 의하면,  “불교는 그 오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하나로 통합되며, 자비심이 많아지게 되고 결국에는 헛된 망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수 많은 가르침들을 사용해 왔다고 한다. 헛된 망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집착하게 하고, 그 집착은 그 집착하는 사람과 또한 그 집착하는 사람이 교류하는 사람들조차도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집착, 그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져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하나로 통합되어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승화되다가 결국에서 그 모든 헛된 망상과 집착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가이드를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다르마는 부처나 부처들에 의해 발견된 영원한 진리들 내지는 전 우주적 법과 질서(원리)를 의미하는데, 불교는 본질적으로 이 다르마를 이해하고, 실천하여서 결국에 다르마를 실현하는 것이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 우주의 법과 질서로서의 다르마는 부처로서 석가모니가 깨닫거나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었던 진리인데, 다르마는 역사적으로 아주 유일하고도 독특한 현상으로 간주되어진다.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는 다르마의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라 재발견자이고, 석가모니 이전에도 다른 부처들이 이미 발견하였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마의 재발견,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석가모니의 역할에 역사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발견한 다르마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온전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완벽해서 아주 드문 다르마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즉 누구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가 발견한 구원의 진리는 보편적이고도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J. A. Dinoia, O. P., "Pluralist Theology of Religions: Pluralistic or Non-Pluralistic?" in Christian Uniqueness Reconsidered: The Myth of a Pluralistic Theology of Religions, edited by Gavin D'Costa (Maryknoll: Orbis, 1990), 119-20.     





[iv]힌두교에서는 이러한 윤회의 교의를 부정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정당한 과보를 받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벌어들이게 된다는 도덕적 법칙을 부정 또는 무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v]석가모니의 구원관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바로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신을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바로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종교간의대화, 145쪽에서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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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윤회는 불교적인가

 이재형 국장 승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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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출간된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가 서점가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대형서점에서 불교분야의 상위권에 링크돼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윤회 문제를 초기경전에 근거해 세계의 구조, 업과 윤회의 관계, 죽음 직전의 모습과 재생연결, 윤회의 원리와 구조, 무아인데 윤회하는 이유 등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다음 세상에 좋은 곳에 태어났으면 하는 불자들에게도 그렇지만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본질이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무아론이기에 윤회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논쟁과 해석이 끊이질 않는다.



초기불교 수행법을 전하는 제따와나선원장 일묵 스님은 책 서두에서 “윤회를 믿지 않는 불자가 의외로 많다. 심지어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불교학자나 스님들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윤회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아는 것이고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이다”라며 윤회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묵 스님이 언급하듯 불교계에서 윤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흐름은 꽤 일찍부터 있어왔다. 그 배경에는 윤회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함께 불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분석이 이뤄진 영향이 적지 않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고 히라카와 아키라(1915~2002) 박사는 “석존의 불교는 윤회사상을 인정해야만 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물론 윤회사상과 모순되는 것은 없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것은, 생존이 윤회적이라면 그 윤회의 생존으로부터 해탈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윤회사상을 적극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었다”며 윤회가 불교의 핵심 사상이 아님을 시사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윤회론은 인도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해 본격화된 비(非)바라문적인 문화의 소산이다. 그런 윤회론이 인도문화에서 주류로 정착된 것은 철저한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를 윤회론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서다.



초기불교의 윤회사상을 잘 드러나는 ‘자타카’에서 붓다의 본생으로 제시된 547생들 간에는 전생과 후생의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불교의 윤회론 목적이 보살행의 강조와 연관됐다는 분석이 있다. 정암 스님은 ‘문학 사학 철학’(통권 9호, 2007년)에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는 윤회론이라면 그 윤회론적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며 “이것은 붓다에게 있어서 수용된 윤회론이 인도문화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고려한 방편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윤회론에 있어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윤회론의 실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상통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윤회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학자는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다. 그는 2008년 ‘윤회와 반윤회-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라는 저술을 통해 ‘윤회는 신분차별을 공고히 하는 힌두교 것이고 불교는 이를 비판하고 극복한 것이므로 반윤회’라고 말한다. 힌두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하고 현생의 내가 다음생의 나를 규정한다고 하여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有我]을 주장하므로, 불교에서처럼 나라는 것을 부정하면 윤회의 근본이 무너진다. 이것이 곧 윤회의 근본인 자아를 부정한 무아의 깨달음, 즉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재형 국장

팔만대장경에는 윤회론을 옹호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내용과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렇기에 윤회를 부정하면 불자가 아니라거나 반대로 윤회를 인정하면 힌두교도라는 주장은 과격하다. 그 같은 주장이 한쪽으로 쏠릴 경우 불교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측면을 크게 상실할 수 있다. 오히려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불교의 핵심사상에 부합하면서도 비불자도 긍정할 수 있는 현대적인 윤회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다.



mitra@beopbo.com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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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더보기

불교의 믿음은 '지혜가 있는 믿음' 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부터 수용하고

차츰 지혜와 선정을 개발하다보면

윤회와 인과, 무아와 공성에 대해 실증적으로

알게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그리고 믿음이 없다하여도 단순히 교학적인

추론만 해보더라도 윤회를 부정하고는 불교의

핵심인 인과, 연기법, 사성제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상좌부, 대승 막론하고 어느

부파에서건 강조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또한 실제 많은 수행자들이 숙명통의 경지를 체득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알 수있는 드러난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답글쓰기4 0

나그네 2019-03-04 21:06:37더보기

그런데,



일묵비구의 "무아의 윤회설,'

그 견해는

진정 모순된 설이다.



만약,

그 대목이 경전상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 설은,

붓다의 정설이 아니다.



무아의 경지란,

중생의 근본을 초탈한 경지이며,

불교수행의 궁극처인 Nirvana의 경지이며,

유위를 초탈한 무위의 경지이며

중생근본의 해탈 경지 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지를 체득한자가

이제 남은 중생 삶을 마치면 돌아갈 본지이다.



헌데,

"무아의 윤회"를 거론하며

무아의 해석을 "일묵비구"식으로 왜곡해석하려는 것인가?

분명한 답을 해야할 것이다.

----. .

답글쓰기4 3

동의어렵죠 2019-02-27 12:31:02더보기

지금도 왕권불교는 남방불교 대부분 지역이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에 벌써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벗어났나고 봅니다.

답글쓰기3 1

보리 2019-02-25 20:49:42더보기

부처님은 출생이 브라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브라만을 결정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집배층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불설도 무시하실건가요? 절대왕권사회에서는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지배층의 입맛에따라 왜곡되었습니다. 오늘날같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무아만을 논하다 막행막식하여 반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깨달음과는 더욱 멀어지며 대중에게 지탄받는 부작용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답글쓰기3 0

보리 2019-02-25 20:06:43더보기

힌두교와 불교는 윤회의 주체가 다릅니다. 힌두교는 영원불변한 아트만이라 하지만 불교는 끊임없이 변하는 의식의 흐름이라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불교는 현생의 업도 중요시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업 뿐만 아니라 현생에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사에 의거한다면 정세근교수님 말씀은 불설을 면밀히 고찰하지 않은 주장같아 보입니다

답글쓰기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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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윤회는 부처님 가르침인가요


승인 2005.05.07 10:01
호수 152




갈애.무명 있으면 윤회는 계속돼 상응부 등 경전 ‘오도송’서도 언급Q: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A: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고 부릅니다.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입니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입니다.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법구경 153-154)는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vikaa)’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합니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습니다.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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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윤회와 반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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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반윤회 - 그대는 힌두교인가, 불도교인가?  | 충북대학교 인문.사회연구총서 6 

정세근 (지은이)충북대학교출판부(CBNUPRESS)2013-01-18초판출간 2008년







윤회와 반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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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쪽150*225mm730gISBN : 978897295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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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장 불평등에 대하여



제1장 말에서 뜻으로 가는 길



제2장 힌두교의 신



제3장 인도의 3대 종교개혁



제4장 불교의 발전과 쇠퇴



제5장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



제7장 윤회를 넘어서



부록1 간디와 인도에 대한 15가지 물음



부록2 추천의 글



부록3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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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세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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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철학과 교수. 국립대만대 박사.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상담학회, 한국공자학회, 한국서예학회, 율곡학회 등의 이사 그리고 한국철학회 부회장으로 남북철학자대회와 인문진흥위원장 일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쌍둥이 책인『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읽는『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서예 이론의 결정판인 『광예주쌍집』(상,하)을 해제와 도판을 넣어 번역했고, 중국어로는 대만 학생서국에서 『장자기화론』(莊子氣化論,중국철학총간34)을 냈다. 학술원과 문화부의 우수학술도서로 다수 선정되었으며, 공저를 포함하여 30여 권의책과 1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국내외에서 60회 이상 학술발표를 했고,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등단한 미술평론가다.

국가온라인공개강좌인KMOOC에서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세계종교 기행’(무료강의, Englishcaption)을 진행하고 있으며, 칼럼으로 수년간 연재한 ‘인문학으로 세상읽기’에 이어<교수신문>에 ‘철학자의 가벼움’(지상 및 모바일)을 매주 연재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철학으로 비판하다>,<도가철학과 위진현학>,<노장철학과 현대사상>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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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슬슬 문득문득, 그리고 언젠가는 점점 삶의 이런 저런 의미를 더 찾기 시작할 자슥들에게 전해주는 손가락에 꼽는 몇권의 책중의 하나다. 곁에 두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진지하게 읽게 될 날이 올거라고 했다.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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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믿을까 말까? - 현대불교신문

윤회, 믿을까 말까? - 현대불교신문





윤회, 믿을까 말까?

이일야
승인 2020.01.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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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해의 길 29

언젠가 출가의 연을 맺은 벗이 전생의 내 모습이 보인다며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전생에 내가 티베트의 학승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놀랍기도 했지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벗의 말처럼 내가 전생에 승려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는 검증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문제라 할 것이다.

업과 윤회가 불교의 고유 사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불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고유 신앙이다. 그들은 착하게 살면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에 태어난다는 지극히 소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그들의 신앙을 수용하여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부파불교에 이르러 업과 윤회는 하나의 학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된다는 윤회설은 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업이라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윤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파불교에 이르면 전생과 내생이 실제로 있다고 보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세계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부파에서는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와 삶을 영위하는 기간인 본유(本有), 삶을 마치는 순간인 사유(死有), 그리고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인 중유(中有)를 설정하였다.

윤회와 관련해서 중유라는 과정이 주목된다. 이는 사람이 죽은 후 살면서 행한 선업과 악업을 계산하는 시간인데, 보통 10일에서 49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49재(齋)를 지내는 모습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 사람의 전체 삶이 평가되고 그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육도윤회(六道輪廻), 즉 지옥과 아귀, 축생, 수라, 인간계, 천계가 바로 그것이다. 살아서 선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도 선한 결과를 받고 현생에 악한 행위를 하면 내생에도 악한 결과를 받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윤회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믿게 되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전생의 업이나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삶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또 다른 형태의 숙명론일 뿐이다. 언젠가 개신교로 개종한 한 불자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힘든 일이 있으면 절에 가서 상담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말이 상처가 되어 불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개종까지 했다고 한다. 윤회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가져온 결과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언제부턴가 윤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힌두교의 산물인 업과 윤회사상을 불교에서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윤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붓다가 강조한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이를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칫 붓다가 부정한 영원불변하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을 오히려 윤회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윤회와 관련해서 죽음 이후의 문제는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이를 실존적으로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속으로 우리는 매 순간 윤회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은 이미 금수와 아귀, 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깊은 명상 속에서 고요를 느낄 때 그곳은 천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윤회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 상징으로 해석하면 불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불교는 무조건적 믿음에 철학적 메스를 가하는 합리적 종교다. 윤회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다. 그리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일야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서현욱 기자
승인 2016.10.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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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테너스’ 토크콘서트.ⓒ불교닷컴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는 ‘참나’와 ‘윤회’를 크게 비판했다. 강 교수는 불교계 큰 스님들이 말하는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통해 “참나불교와 윤회불교는 환망공상(幻妄空想)이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즈’ 토크콘서트에서 “스님들이 자주 언급해 온 ‘참나’와 ‘윤회’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하지만 다수의 청중들은 강 교수가 힌두교의 윤회를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통적인 불교 교리를 배운 청중들은 강병균 교수의 과학적 불교교리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부 청중은 ‘참나’ ‘윤회’ 등 교리 논쟁 보다 현실문제에 불자들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에서 벌어진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한다. 첫째 인신 공격의 오류다. 논점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다. 그 사람의 주장이 있는데 다른 허수아비가 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토론해 달라.

고명선(문예출판사) : 여래장불교와 대승기신론 자체를 비판 바람이 불고 있다. 대승기신론 안에 참나 찾는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선불교가 그런 식으로 간 것 아니냐 문제 제기하는 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원효를 위대한 성인으로 대접한다. 원효는 여래장불교로 전체 불교 통합한 분이다. 대승기신론과 여래장불교 자체를 비판하면 원효까지 비판하는 셈이다. 일반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너무 큰 문제다. 세 교수님이 여래장 그 자체, 원효까지도 비판해야 한국불교가 훌륭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인지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대승기신론은 이원구조가 문제”

강병균(포항공대 교수) :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칼럼을 <불교닷컴>에 썼다. 보기 바란다. 과거 사람을 밟지 않으면 진보가 없다. 과거 사람을 밟는 것은 밟히는 사람도 굉장히 즐거워 할 것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봉불살불(逢佛殺佛)’했는데 어찌 ‘봉조살조(逢祖殺祖)’가 안 되겠는가. ‘봉원효살원효(逢元曉殺元曉)’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대승기신론은 진여라는 것과 생멸심이라는 이원구조가 문제다. 진여가 오염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이론으로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이원 구조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이원구조면 부처님 무아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진화론이 이야기하는 의식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렁이에게도 진여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승기신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논서다. 당시 열악한 과학이나 인문사회 수준으로 볼 때 놀라운 서적이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는 위대한 이론이지만 현재 와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당시는 아주 훌륭했지만 지금은 조금 부족하다.




우희종(서울대 교수) : 여러 층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한가 묻고 싶다. 원효 부정이 가슴 아플 정도라면 사실 여래장사상 이런 거 있나 없나, 참나니 이런 거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할 때 여래장 사상이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불교학자들에게만 중요할 수 있다. 여래장이나 원효의 일심이나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 손가락이 좋은 손가락이냐, 나쁜 손가락이냐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여래장이라든지 초기 연기설을 볼 때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 맞나 틀리나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하다. 옳다 그르다 이전에, 원효를 부정하느냐 아니냐 이전에 여래장, 일심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가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 말씀 실천하는데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만수(동국대 교수) : 힘든 시기 나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했다. 명상 기간은 평화로웠는데, 명상이 끝나거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큰 변화가 없다. 명상하는 나와 일상 속의 나는 분리되는 존재인가? 강 교수 말씀에 명상 단계가 높아지면 일상 명상의 나가 통일되는 어떤 것을 말씀했다고 생각한다. 생활하는 삶과 명상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일상 속에서 벗어난 나와 둘이 어떻게 만나 통합되는지 말씀해 달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혜로 관조해야”

강병균 : 우리 속담에 ‘선정만 닦다가는 멍청한 중 늙은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앉아서 묵조선을 한다든지 해서 마음의 고요함만 닦으면 완전히 고요하다. 그러다 경계를 만나면 당장 흐트러진다. 그래서 그걸 굉장히 경계를 하는 거다. 그런데 진리는 항상 드러나 있고 간단하다. 그래서 계(戒)·정(定)·혜(慧)를 얘기한다. 계·정·혜 순서로 얘기한다. 혜가 마지막 순서다. 불교를 인도종교에서 분류할 때 지혜의 종교라 해서 즈나나 요가라고 분류한다. 지혜가 선정을 닦은 거 외에 지혜가 개입되면 절대 그런 일 없다. 비근한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고민이 있고 괴로운 순간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에 내가 마음을 두면서 걱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상당히 경감이 되고 사라지고 그런다. 지혜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하면, 단지 지로서가 아니라 관으로서 관조를 하면 그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 진각종 호당 정사가 수행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불교닷컴

호당 정사(진각종) : 논제가 ‘한국불교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이다. 과학 전공 교수들인데 불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보는 것인가, 과학적 차원에서 보는가? 또 하나 아까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인도 말씀했지만 사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한 인연론이다. 인이 있다고 해도 이를 도울 연이 없다면 세상 모든 만물이 성장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이, 지식이 한쪽에 치우친 특수한 시대에서는 스님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지금은 지식이 보편화되고 지식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승단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속인들이 출가인들을 보면서 진정한 우리들의 인연을 깨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 정치나 종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시대적 인연이 악인 많으면 악인이 지도자 된다. 선인이 많으면 선인이 지도자 된다. 그것이 시절의 인연이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가 속가에서 출가를 바라보는 관점도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강 교수 말씀 중에도 일체유심조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보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잘못된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도덕적인 걸 보충할 수 있는 스승인 게 아닌가 한다. 잘못된 승려를 보면서우리들이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병기 : 명상하는 나와 일상생활의 나가 분리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듣고 싶었다.

“대중을 통해 내가 끼우치는 것”

호당 정사 :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을 떠나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간 떠나 출세간 말씀한 것도 아니다. 산을 보려면 들로 나가야 한다. 들을 보려면 산으로 가야 하다. 중생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 출가라는 방편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생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이 깨침 아닌가. 그것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그릇, 내 크기만큼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르게 아는 게 깨침이라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명상을 할 때 나의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되지 않으면 관념 이상의 가르침 속에 빠져서 가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진각종은 정사 전수가 마주보고 불사를 본다. 왜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깨침은 내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것이 자기를 깨치는데 가장 좋다. 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연이 부부다. 그러면 흔히 내 반쪽이라고 하는 아내를 쳐다보고 남편이 깨치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깨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는 교수님을 통해 나를 깨치는 것이고, 교수님은 대중을 통해 깨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생활 속 명상, 깨침을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정모경 : 강병균 교수님 책(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잘 읽었다. 책 중에 자아가 없다는 증거로 사람을 두 쪽으로 자른다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명해 달라.

강병균 : 사람에게 좌뇌 우뇌 둘이 있다. 둘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뇌와 우뇌가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좌뇌는 언어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걸 자르면 의식 분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상태에서 좌뇌와 우뇌에 다른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면 그 의식이 둘로 갈라진다. 인간이라는 것은 최소 두 개 의식의 공화국이다. 인간 마음속에는 의식이 많다. 의식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수많은 마음을 관장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지혜를 수련하면 그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번뇌를 이길 수 있지 않나. 한만수 교수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다.

임상실험 결과를 보면 어릴 적이든 선천적이든 한쪽 뇌 없는 사람은 잘 산다. 그러나 나이 들어 한쪽 뇌가 없어지면 힘들어한다. 그런 면에서 좌뇌와 우뇌가 독립적으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좌뇌와 우뇌를 딱 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생물학계 석학 교수에게 물어봤는데 그도 대답을 못했다. 내가 볼 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면 독립된 두 개의 사람이 나타난다. 마치 지렁이를 둘로 나누면 두 마리의 지렁이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참나는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참나는 둘로 갈라졌나?’, ‘영혼이 둘로 갈라질 수 있나’라는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영혼이 둘로 갈라질 일도, 참나가 둘로 갈라질 일도 없다. 왜냐면 참나나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환망공상(幻妄空想)이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고 해야만 좌뇌 우뇌 분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중층구조 논의를 동일 층위에 두면 혼란”

우희종 : 좌뇌와 우뇌를 나눴을 때 두 개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감각기간에 의해 형성된 의식, 안이비설신의와 모든 현상의 근간인 형태, 사랑도 칼로 찌르는 사랑도 사랑이고 아카페적 사랑도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보고 듣거나 하는 의식이 참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만 어느 층위에서 그것을 얘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 토론처럼 다양한 중층구조 논의를 서로 동일 층위에 놓고 이야기하면 혼란스럽고 알아듣기 힘들다. 하나의 질문에도 담겨 있는 중층 논의구조를 이해하면 논의하기 쉬울 것이다.

송재형(용주사 신도비대위 사무총장) : 오늘 기적과 같은 자리가 마련됐다. 15일부터 간화선 대법회를 한다. 간화선이 불교를 새롭게 세계화시켜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참나불교로 나 혼자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종교라 할 수 있는가? 간화선 추구하는 것이 세계 고통 멸할 수 있는 대단한 것인가? 소승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해서 권승이 판치고 조계종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대들보 내려앉고 불타고 있다. 불교는 고통을 없애는 것인데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계율 살아야 변태불교서 본래불교로 돌아갈 것”

박병기 : 경전에 계·정·혜 삼학(三學)이 함께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출발은 계라고 전제하고 있다. 선불교 정착 발전 과정에서 계를 쉽게 무시할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계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한다. 율장은 금서처럼 인식됐다. 한국불교가 본래 불교로, 변태불교에서 본래 불교로 돌아가는 출발점은 계율이 이 시대에게 맞게 살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승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역시 시대에 맞는 계율을 찾아야 하고, 불자들이라면 어떻게든 계를 지켜야 한다. 불자라면서 범계하는 풍토가 일반화돼 있다. 이번에 범계 스님을 대상으로 한 심판의 화살이 재가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자성으로 가야 의미가 될 것이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방 지적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직면한 범계 상황은 심각하다. 그런 것 정리하지 못하는 승단의 자정능력은 문제다.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독화살 중 하나다.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에 대해 질문하는 김영국 연경불교전책연구소장.ⓒ불교닷컴

김영국(연경정책연구소 소장) : 참나란 없다. 윤회가 없다. 큰스님들이 참나나 윤회 이야기를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부처님 경전에 숫하게 이야기하는 게 참나, 윤회 없다는 거다. 큰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방편이 아닌가? 강병균 교수는 그런 부분을 문자에 집착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가. 큰스님들이 진짜 참나 있다, 윤회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회는 ‘종 쇼비니즘’…윤회 진설로 받아들여 문제”

강병균 : 향봉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찾아갔다. 향봉 스님이 “윤회는 방편이다” 하니 성철 스님은 “윤회는 진설이다.” 했다. 성철 스님에게 윤회는 방편설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윤회가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윤회 사례, 학자들 주장을 수집해 책을 냈다. 진제 스님이나 연세 되는, 법랍이 되는 스님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몸뚱이 버리고 저 몸뚱이로 간다’, ‘주인공이 몸뚱이를 떠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몸뚱이가 썩는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확신이다. 이것은 소위 임사 체험과도 관계가 있다. 그분들이 명상을 통해 임사 체험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의식의 장난에 속아 주인공이 자기 몸을 빠져나간다고 망상을 한다. 현대 의학에서 인위적으로 임사체험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임사체험 대가였던 사람, 이를테면 수잔 블랙모어라는 여자가 있다. 마음대로 유체이탈 하던 여자인데,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일 하는 것을 봤는데 사실이냐” 하니 친구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거기서 충격을 받고 그 여자가 임사체험이라는 건 마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회는 큰 스님들에겐 방편이 아니고 진설이다.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chauvinism)’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모든 생명계의 생명체를 흉악한 존재로 만드는 쇼비니즘이다. 백인들이 흑인, 황인종을 열등종족이라 하고, 하나님이 실수로 흑인을 만들었다고 하는 종쇼비니즘에 해당한다. 동물들이 무슨 죄를 짓는가? 토끼가, 사슴, 노루, 참새가 무슨 죄를 짓는가. 죄 짓는 거 없다. 우리는 선업을 쌓지 못하면 토끼, 돼지, 말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실제 인간이 가장 흉악한 존재다. 다 잡아먹는다. 거꾸로 인거 같다. 흉악한 짓을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윤회론이라는 것이 경전에 나와 있다고 부처님의 진설이거니 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불합리한 점을 간과한 점이 있다.

김영국 : 성철 스님이 윤회는 진설이라고 한 법문이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할 때가 1970년대다. 법문 하면서 “윤회가 있더라” 했다. 그 당시 서구에서 애드가 체이시 등의 임사체험이나 환생체험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성철 스님이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셨는가. 알고 있다면 답변해 달라. 내가 볼 때는 티베트불교의 환생이나, 서구의 환생, 임사체험 이런 책을 보고 한 때 경도가 됐을지는 모르겠는데, 실제 내가 아는 성철 스님은 윤횐느 방편이라 생각하셨다. 교수님이 성철 스님의 1970년대 생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강병균 : 성철 스님이 말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성철 스님이 아니더라도 티베트불교에서 윤회는 바뀔 수 없는 진리다. 달라이 라마는 환생신들에게 인가해 주고 그랬다. 스페인 가서 태어난 환생신이 있다. 그 젊은이가 스무 살에 “나를 이런 불교적인 틀에 가둬서 고문하느냐”하며 뛰쳐나와 지금 영화공부 중이다. 그렇듯 윤회라는 것은 환망공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달라이 라마를 너무 신격화해서 그렇다. <불교닷컴> 칼럼에 에드가 케이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 있다. 읽어보셨으면 한다. 전부가 애드가 케이시의 망상이다.

우희종 : 층위가 다른 것을 지금 얘기한다. 또 하나는 깨달았다는 이에게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 이대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깨달았다고 할 때 불교적 지향성, 연기실상에 대한 깨달음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경전에는 헛된 망상이 윤회한다는 표현도 있다. 스님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각 종파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티베트불교가 바라보는 것, 선종에서 바라보는 것 관점이 다르다. 이런 게 섞이게 되면 혼란스럽다. 사랑을 끈끈한 사랑이 사랑이냐, 아카페적인 사랑이 사랑이냐 논의 한다면 층위를 정해놓아야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병기 : 윤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티베트불교이다.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는 분에게 얘기 들어보자.

“윤회 않는 중생에게 윤회 멈추라 했겠나”

김준영 : 티베트 명상을 하고 있지만 간화선도 하고 있다.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있다 없다 이 자리에서 증명 불가하다. 어찌 보면 희론에 가까울 수도 있다. 중요한 신념이 있을 것이고, 신념 속에 체험적으로 깨달음에서 본 것도 녹아 들어갈 것이고, 시대적으로 지금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벗기기 위해 방편으로도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멈추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부처님이 윤회를 멈추는 것 말씀하셨을 때는 분명히 윤회를 인정했기 때문에 말씀하셨지, 윤회하지 않는 중생에게 윤회를 멈추라고 한 것 아닐 것이다.
▲ 강병균 교수에게 질문하는 김준영 씨.ⓒ불교닷컴

조계종이 사랑의 매를 많이 맞는 거 같다. 대한민국 불교를 대표하는 게 조계종이라고 누가 얘기하고 있는가, 불교 지키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이들이 출가자라고 한정돼 있다는 건 어느 법인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세워 놓고 우리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참나, 무아의 반대 개념으로서 유아적 참나인가? 그러면 유아론이 몇 분 선지식, 진제, 송담 그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조사선, 간화선의 기본적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묻고 싶다.

강병균 : 중요한 질문을 했다. 간화선 조사어록을 보면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선불교가 혁명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는, 특히 옛날 스님 법문에는 거의 윤회론이 나온다. 나는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근자에 들어와 유행하는 현재 한국불교의 참나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김준영 : 내 경험으로는 윤회는 사실이고, 윤회는 욕망이 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면 욕망을 쫓아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윤회의 조건이라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여쭙겠다. 달라이 라마 존자가 미국 의학자들과 이야기 하다가 기관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왔을 때 “뇌라는 기관은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아닐까?” 이야기했다. 그때 “그런 가설을 한 번 세워볼 필요가 있다” 해서 그런 가설을 만든 분이 강 교수님이 발표할 때 명상의 효과에서 뇌의 변화를 말씀하실 때 잠깐 언급했던 존 카밧진 교수로 알고 있다.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뇌’라는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근이 안경 만날 때 안식 생긴다”

강병균 : 명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윤회는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명제다.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씩 드리겠다.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다. 내가 빌게이츠인데 당신에게 100억 원을 당장 준다. 단 조건은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기억은 다 잃고 갓난아기 같은 백지 상태로 돌아간다면 수락하겠는가? 여러분은 수락하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림이 즉각 거부한다. 어떤 사람은 “죽는 것과 같다. 난 안한다.” 이런다. 윤회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도 지구상에 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달라이 라마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가 어렸을 때 기억한 거 같은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그 윤회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하는데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거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 마음이 수단으로 쓰는 것이 뇌이지 않은가 하는 것은 정확히 심신이원론이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얘기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안근(眼根)이 안경(眼境)을 만날 때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돼 있다. 안식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근이 안경을 만날 때 안식이 생긴다 한다. 이건 현대과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나온 빛이 우리 망막을 때릴 때 생체전기가 발생한다. 생체 전기가 열심히 달려 우리 시각중추로 가면 본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전기가 열심히 달리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기를 넣어 작동하기 전까지 컴퓨터는 그냥 죽은 물건인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안식이라는 게 미리 우리 두뇌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마음이 뇌를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볼 때 ‘마설(魔說)’이다. 부처님 근본 사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티베트불교를 귀신불교라 부른다. 귀신불교인 티베트불교엔 국가 신탁이 아직도 있다. 티베트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무당 같은 이가 존재한다. 귀신불교 입장에서 영육 이원론을 이야기한다. 영, 마음이 육, 뇌를 움직인다. 불교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는 어긋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방편설로 여래장 충분히 의미 있다”

김준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가 존 카밧진 교수에게 ‘마음이 사용하는 기관으로서 뇌’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에 감사한다. 왜냐면 그래서 탄생된 MBSR이라는 의료명상에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래장사상은 방편설이라 생각하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수행 측면, 실제 공부하는 데서도 그렇고 자기 상대적 대비적으로도 그렇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데 여래장사상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방편설로서 여래장사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강 교수님에게 고맙다.

우희종 : 나는 윤회 유무에 대해 믿지만, 또 믿지 않는다. 개인이 죽어서 나쁜 짓하면 개가 되고 돼지가 된다는 그런 윤회는 믿지 않는다. 방편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한 것처럼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윤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선적 시간 속에서 윤회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한 육근 세계에서 내가 태어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시작과 종(끝)으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 속이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현장에서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육도 윤회를 하고, 몸 또한 이 세계와 열린 상태에서 단 한 순간도 윤회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뇌가 마음이라고 하니까 다양한 개념이 들어와 혼란스럽지만, 예를 들어 손이 물건을 쥔다. 물건을 쥐고 글 쓰는 것이 손이 하는 것인가? 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뇌가 뭐 생각하고 한다는 데 이것 역시 마음, 그 무엇의 표현력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과학적 자세다. 지금의 과학 수단,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또 다른 논의이다. 저에게 그 질문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도 손 자체가 쥐는 게 아니라 뇌가 지시해서 손이 그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물건을 쥐는 것은 아니다. 뇌도 그 무엇에 의해서 변하는 기관일 수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열어놓고 있다.

“강 교수 윤회 비판은 힌두교 윤회 비판”


▲ 강 교수의 윤회불교 비판을 재비판하는 보성 정사(진각종).ⓒ불교닷컴

보성 정사(진각종) : 수행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에서 무아(無我), 아(我)를 알아야 한다. 아를 모르고는 무아를 알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강병균 교수는 참나를 유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진정한 참나는 무아라고 알고 있다. 참나는 무아적인 참나다. 나는 그런 이론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강 교수의 참나에 대한 해석은 유아적인 참나이다. 개념적 정의가 너무 과학적으로 치중돼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하지 않나 비판해 본다.

윤회는 불교 탄생 이전에 브라만에서 나온 단어이고 교리적 체계이다. 강 교수는 윤회라는 것을 불교가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적인 윤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하는데, 불교적 윤회와 힌두교적 윤회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대승불교, 밀교로 넘어오면서 힌두교적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대부분 말씀하신 것이 힌두적인 윤회다. 강 교수의 윤회에 대한 비판은 힌두교적 윤회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강병균 : 정사님 질문이 충격적이다. 첫째는 한국 선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눈이 보느냐. 아니다. 마음이 본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반격을 한다. “눈이 본다면 어떻게 송장은 보지 못하는가?”, “마음이 보는가? 그러면 왜 송장이 보지 못하는가?”, “봉사는 마음이 있는데 왜 보지 못하는가?” 내게는 항상 원칙이 있다. ‘간단한 질문에 답을 못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원칙이다.

서암 전 종정 스님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는 이 주인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존재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히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한국 모든 선사들도 만장일치이다. 참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화해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의식을 네 가지로 나눈다. 각성시 의식, 꿈꿀 때 의식, 숙면시 의식, 투리야 의식 네 가지 이야기하다. 투리야는 브라만의 의식이라고 얘기한다. 참선하면서 자기가 겪는 의식 상태를 참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한국에 힌두교 성자들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하나는 스님들은 청담 스님도 그렇고, 대부분 선사들은 생각은 참나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 참나는 실체다. 결코 방편설,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정확히 자기 몸 끌고 다니는 실체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윤회 말씀하지 않았다니…”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 비판에 혼란스럽다는 한 불자.ⓒ불교닷컴

방명숙(직장인) : 재가자로 혼란스러울 때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그때마다 무한한 생을 달려왔고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했다. 힌두교적이든 대승불교적이든 윤회하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나라는 실체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안하지만 연기법, 존재의 실상이라는 거 뭔가 연결된 연기식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선정 명상의 단계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과 종류가 달랐다는 것인가. 그런 여러 가지를 꿰뚫어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병균 : 부처님이 보통 ‘견명성 오도’했다고 한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됐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밤새 사유하다 새벽이 온 것이다. 깨달음 얻었을 때 그때가 새벽이었다가 맞는 말이다. 초기경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고 나온다. 내가 참나를 찾았다 이런 말은 절대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얘기한 것이 전부 거짓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만약 참나를 깨달았다면 브라만교의 브라흐만을 깨달았다는 것과 같다.

선정 단계 이야기기했는데, 부처님이 처음에 색계 사선정을 버렸다. 그런데 색계 사선정의 특징은 일선에는 심이 있고, 이선에서 사가 있고 이런 식이다. 심사희락정으로 간다. 심사는 사유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나에게 사유력, 정진력, 인내력이 없었으면 나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일주일 동안 버티시며 사유를 하신 결과 나온 게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에 의한 종교이지 참나를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참나가 나왔는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분명히 연기법에 의한 깨달음이다. 연기법에 의한 측면으로 보면 소위 윤회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꼭 자아 정체성이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가 있다. 사실은 부처님 생사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 부처님의 DNA만 복원하면 32상 80종호를 복원할 수 있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유전자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추적을 하면 언젠가는 32상 80종호를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DNA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통도사 사리에는 DNA가 없다.

그리고 무형의 유전자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온 동양, 서양에 퍼져 있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적 사리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사리이지 육체적인 사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전자가, 정신적 유전자가 세상에 퍼진다, 그런 것을 윤회로 해석을 해야지, 좁은 의미의 윤회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윤회는 철저히 개인주의다. 내가 복을 지어서 다음에 좋은 몸을 받겠다는 것이지 내가 좋은 업을 지어서 일체중생이 해탈을 얻겠다가 아니다. 대승불교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설한다. 아무 연 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그것은 내가 윤회를 못하더라도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연자비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윤회라는 것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다.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즉 자기가 하는 행동이 민족, 동양, 인류, 생명계에 얼마나 기여하고 무연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네가 다음에 윤회 한다 안 한다, 네가 고생 안하려면 복을 쌓아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을 크게 폄훼하는 거라 생각한다.

“무아, 윤회 논쟁 지금 무슨 쓸모가 있나”


▲ 이혜숙 금강대 교수는 교리 논쟁 보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불교닷컴

이혜숙(금강대 객원교수) : 유아냐 무아냐, 윤회가 있냐 없냐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윤회를 믿는 사람이면 다르게 사는가, 안 믿으면 또 다르게 사는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어느 법회에 가든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지금 물 맞아 죽은 노인이 있다. 그 일은 윤회를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안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대한민국이 정신 건강이 매우 나빠서 죽고 살기가 날마다 세계 1위인데, 여기 진지한 불자들은 그 아파서 혼자 죽는 그 수행에 대해서 무아며, 혹은 무아가 아니며, 어떻게 하시는 건가. 그거 생각해보자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박병기 : 박광서 교수에게 총평을 듣겠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 총평을 하는 박광서 종자연 상임대표.ⓒ불교닷컴

박광서(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임대표) : 우리가 불교라는 것을 인연으로 만났다면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고, 그것이 사는데 힘이 됐으면 좋겠고, 학술적으로도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섰으면 좋겠다. 더 나가야 간다면 이혜숙 교수의 말처럼 우리들이 여기서 이런들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더 고민해야 한다. 오늘은 좁고 깊게 교리에 대한 논의가 되겠구나 그런 바람 가지고 왔다. 이혜숙 교수 말처럼 큰 바람은 없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끊으면서 자극을 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불교를 믿는가. 나는 왜 불교를 믿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불교공부는 3개월만 하면 끝난다. 그 다음엔 연습하면 된다. 그 다음엔 불교 공부한 것으로 연습해야 한다. 평생 가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에서 연습해야 한다. 그걸 안하고 평생 배우다 내생까지 미루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박병기 :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신행이 기본이다. 신행은 행, 삶, 실천이 중심이다. 과연 우리가 불교적 믿음에서 신행에 충실하고 있는지, 충실하기 위해 교리공부하고 있는지, 교리공부 자체가 독립된 목표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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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06더보기

불교의 믿음은 '지혜가 있는 믿음' 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부터 수용하고

차츰 지혜와 선정을 개발하다보면

윤회와 인과, 무아와 공성에 대해 실증적으로

알게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그리고 믿음이 없다하여도 단순히 교학적인

추론만 해보더라도 윤회를 부정하고는 불교의

핵심인 인과, 연기법, 사성제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상좌부, 대승 막론하고 어느

부파에서건 강조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또한 실제 많은 수행자들이 숙명통의 경지를 체득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알 수있는 드러난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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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9-03-04 21:06:37더보기

그런데,



일묵비구의 "무아의 윤회설,'

그 견해는

진정 모순된 설이다.



만약,

그 대목이 경전상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 설은,

붓다의 정설이 아니다.



무아의 경지란,

중생의 근본을 초탈한 경지이며,

불교수행의 궁극처인 Nirvana의 경지이며,

유위를 초탈한 무위의 경지이며

중생근본의 해탈 경지 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지를 체득한자가

이제 남은 중생 삶을 마치면 돌아갈 본지이다.



헌데,

"무아의 윤회"를 거론하며

무아의 해석을 "일묵비구"식으로 왜곡해석하려는 것인가?

분명한 답을 해야할 것이다.



한마디 더,

Nirvana(무위)의 경지의 체득이

진정,

유위적 Sati의 방식으로 계발될 조건인가를,

아무리 전설이라고 하지만

한번쯤

고민해 봤으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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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렵죠 2019-02-27 12:31:02더보기

지금도 왕권불교는 남방불교 대부분 지역이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에 벌써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벗어났나고 봅니다.

답글쓰기3 1

보리 2019-02-25 20:49:42더보기

부처님은 출생이 브라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브라만을 결정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집배층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불설도 무시하실건가요? 절대왕권사회에서는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지배층의 입맛에따라 왜곡되었습니다. 오늘날같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무아만을 논하다 막행막식하여 반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깨달음과는 더욱 멀어지며 대중에게 지탄받는 부작용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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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2019-02-25 20:06:43더보기

힌두교와 불교는 윤회의 주체가 다릅니다. 힌두교는 영원불변한 아트만이라 하지만 불교는 끊임없이 변하는 의식의 흐름이라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불교는 현생의 업도 중요시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업 뿐만 아니라 현생에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사에 의거한다면 정세근교수님 말씀은 불설을 면밀히 고찰하지 않은 주장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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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YES2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지은이)민족사2013-12-27

304쪽

책소개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은
  1.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2.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3.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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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_ 13

제1장 붓다로의 시간 여행

027 붓다의 위대한 도전
불교의 탄생
030 붓다, 반고행주의의 성공
붓다의 깨달음
034 붓다, 수행 방법을 ‘업그레이드’ 하다
탈고행주의, 중도 수행
037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붓다, 진정한 승리자의 서원

제2장 붓다, 다르마를 설하다

043 힌두이즘을 제압하다
붓다의 연기緣起
045 인과는 연기의 부분집합이다
연기緣起 속의 인과因果
049 붓다에 주파수를 맞추라
연기, 산은 산 물은 물
052 엉뚱한 자문자답
이율배반도 연기緣起로 해결된다
055 물에 가라앉는 돌을 뜨게 할 수는 없다
업, 고
058 인因과 연緣의 결과물
060 정해진 업業은 없다
업의 개념이 안고 있는 업
066 붓다, 연기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다
업과 윤회는 일반언어
068 무아無我가 아니라 공아空我다
무아와 윤회
073 윤회를 바로 보라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077 진화해야지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업과 윤회의 논리
093 다른 사상을 알아야 불교가 제대로 보인다
6사외도와 불법
098 겉은 불교, 속은 자이나교인가?
자이나교와 불교의 업과 윤회
100 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오온
102 이해관계 없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라
12처 18계

제3장 붓다, 제자들과의 기막힌 인연

107 붓다, 세월을 함께 할 유일한 분
출가
110 왜 사람들은 붓다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출가했을까?
붓다의 출가주의
112 유마경에서 만난 부처님의 으뜸제자들
10대 제자
116 조로아스터교의 개종 제자
가섭 3형제를 제도하다
119 붓다의 아들 사랑
외아들 라훌라를 교화하다
122 데바닷다는 극악무도한 자인가?
억울한 데바닷다
126 붓다의 말씀을 되살려 낸 아난존자
억울한 아난
129 현명한 불자, 바보 같은 불자
붓다와 춘다의 대화
133 붓다의 최고 후원자,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

제4장 경전의 바다에서 붓다를 만나다

141 각 나라와 지방의 언어로 법을 전하라
초기 경전들의 언어적 격의 문제
144 극락에 가서나 만날 수 있는 붓다라면
석연치 않은 삼처전심
147 중생의 필요에 따른 맞춤 구원
삼신불과 다불·다보살 사상
151 붓다의 진심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금강경과 법화경
157 열린 마음, 창의적으로 해석해야
열반경 속의 무상과 적멸
160 마음을 해부할 수 있는가?
중관과 유식
167 인류 최고·최상의 희망
여래장, 불성
172 고통이 피워낸 희망사항
정토사상, 미륵사상

제5장 붓다의 깨달음, 수행이 희망이다

179 일어나는 마음만 집중 관찰하라
사념처와 위빠사나
183 사람에 따라 수행법도 달라야 한다
위빠사나와 간화선
190 간화선 제일주의 이대로 좋은가?
간화선
193 보면 사라진다
마음 관찰하기
196 이타행, 수행의 척도
수행과 자비
201 사람은 왜 화를 낼까?
화, 수행
204 깨달음과 중생 구제
대승사상과 보살
209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꼭 실천해야 할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사섭법


제6장 붓다, 과학을 끌어안다

215 불교의 요체와 과학의 극적인 통섭
일체유심조

219 과학, 미래의 불교를 위한 새로운 대비책?
과거심·현재심·미래심

225 현대, 신神들의 최대 수난기
진화론과 연기


제7장 중생이 있으므로 붓다가 있다

235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는가
삼보三寶
238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라
삼귀의
241 붓다가 되겠나이다, 붓다처럼 살겠나이다
서원, 출가는 신분 상승인가
247 말귀부터 알아들어야
춘성 스님의 일화와 원각경
252 막간 우스갯소리
미국 법정에서 오간 대화들
255 용서가 반드시 최선은 아니다
인욕의 양면성
258 중생의 소원에 따라 진화된 만능 불·보살
불·보살의 본원
262 믿음을 저버린 ‘양심’이 더 종교적일 수 있다
종교적 신념과 믿음의 공허
266 신비주의 주의보
수행의 마장을 경계하라
270 단지 감각의 오류일 뿐
우주인, 임사체험, 심령현상
275 종교인의 오류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뉴턴은 종교인이 아니었다
278 중생이 바라는 대로 맡기겠나이다
기복불교, 원력불교
283 다른 눈으로 세상 보기
사이언톨로지교와 라엘리안 무브먼트
289 동서양을 넘나든 종교적·문화적 아이콘
만卍자, 나치 문양, 십자가 문양
292 힌두이즘의 쓰나미가 덮치다
인도에서 불교의 멸망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_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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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국불교의 현재는 따지고 보면 염세주의보다 훨씬 위험한 낙관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붓다 입멸 후 1,500여 년이나 지나 중국에서 발생한 선불교禪佛敎의 선사들의 입에서 나온 “네가 곧 부처다”라는 말을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로 인식하는 엄청난 착시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수행을 하는 데는 무식할수록 유리하니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도 보면 안 되고, 세간의 이치와 논리는 하찮은 것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차단해야 비로소 바른 수행이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 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선불교)의 근본적 한계인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공空함을 강조하는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승가의 끝없는 욕심과 증명된 무능력은 따지고 보면 ‘배고픈 신도에 배부른 승가’에 그 원인과 해법이 있습니다. 승가는 해방 이후 타종교인에 비해 너무나도 편안하게 살아왔고, 지금은 오히려 종단과 본사에 돈이 넘쳐 출가정신을 다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머리말 중에서-  접기
P. 48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이理와 사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연기緣起입니다. - 44p -
인과응보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인과에 징벌적 도덕률을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연기의 부분집합으로 벌어지는 인과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인간의 자기 편의적 분별이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과는 연기의 한 단면이고 연기는 우주와 법계의 존재 그 자체와 질서로, 인간의 분별심이 오염시킬 수 없는 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이 원리를 깨달으셨기에 시비와 분별, 선과 악, 태어남과 죽음, 이런 온갖 양변을 여의고 중도의 자리에 안착하셨던 것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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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성법 (지은이) 

20세에 출가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현재 고양시 대한불교조계종 용화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신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바른 불교’를 알려 주고, 바른 신행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2001년부터 경전 전산화 불사의 원을 세워,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의 장(場)인 불교경전총론 세존사이트(www.sejon.or.kr)를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다.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 모든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사이버 불사(佛事)와 불서(佛書) 저술과 아울러 지난 2017년 설립한 세존학술연구원 원장으로 세계불교 학술명저 번역 출간 불사(세존학술총서 출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 기존의 훈고학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해석한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와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함과 아울러 현재의 ‘비불교적’ 요소를 날카롭게 비판한 『이판사판 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 해설서인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칼럼집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그래도 불교>,<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이판사판 화엄경>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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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지난 한 해를 반조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12월 말, 지금까지 왜곡되고 잘못 인식해 온 불교 교리, 승가의 잘못된 행태 등에 대해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한 책이 민족사에서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매우 돋보인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57세)은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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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답답했던 점을 스님이 풀어주어서 고맙다.”
“불교를 믿고 공부하면서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의심의 덩어리를 성법 스님의 글을 읽고 확연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나마 바른 생각, 바른 소리를 하는 스님을 만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는 독자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다.

7장과 부록으로 나뉘어 편집된 이 책은 그동안 출간되었던 경전 해설서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총망라하여 다룬 만큼 성법 스님의 사상과 견해를 응축해 놓은 문자사리 같은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불교의 탄생부터 붓다의 깨달음, 교리 발달사, 수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순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인간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의 기호에 가미되지 않았는지 반문하고, 중국에서 발달한 선수행, 한국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이 내세우는 간화선과 선사들의 가르침의 전달 방법은 완전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현대인들에 맞는 수행법을 창안하여 제시하고 있다.

“업은 지금도 왜곡되어 불자들의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으나 힘에 부쳐, 스님에게 해법을 의논하면 “그건 네 업이니 참고 지내라”는 3,000여 년 전의 정답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작 문제는 정답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승가, 그중에서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수록 ‘자신의 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행태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65쪽 중에서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68쪽 중에서

스님은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영혼과 순수성을 담보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힌두교인지 자이나교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방편에 물들어 거래를 하고 있는 듯한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모습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의 근본교리인 연기법과 업설의 개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놓고 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는 단순 마음 정화학(淨化學) 수준의 개인적 평안을 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마음을 화두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뇌과학과 진화심리학, 일반 도덕론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불교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중생들과 더불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머리말 중에서

성법 스님은 지난 2001년부터 경전전산화불사의 원을 세워 불교경전총론(www.sejon.or.kr) 세존사이트를 운영해 오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을 통해 방대한 자료의 장(場)을 만들고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이버 불사를 하는 스님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실시간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비록 수십 년이 걸릴 지라도 붓다의 참된 가르침(s 라인)을 대·소승 경전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해 나가는 제 5결집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는 ‘붓다께서 진정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이고 그에 대한 대안이다. 스님은 세상의 물질적 혁명은 결국은 정신적 세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불교도 혁신을 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오늘날 붓다의 수행 방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이에 대해서도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위빠사나, 명상, 선수행의 장단점은 무엇이고, 스님이 경험을 바탕으로 창안한 현대인에게 맞는 수행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승가는 수행의 ‘마장’ ‘장애’의 개념조차 사라져 원로스님들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짚고 있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 승가에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 모양을 천 개 만 개 조성해 복 지으라며 팔고, 사법(邪法)을 내 말이라고 중생들을 현혹하면서 정작 내 가르침의 진위에는 관심조차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중에서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은 성법 스님이 한국불교의 총체적 문제들을 하나씩 지적한 내용으로 이 책의 정수요, 이 책에서 설파하고자 한 메시지를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법 스님의 원력에 뜻을 같이 한 세존아카데미 재가불자 학인들의 보시에 힘입어 지난 2012년 불교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연재해 실었던 내용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비교적 긴 머리말부터 부록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태동과 교리, 경전, 수행, 한국불교 등 불교 전반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바른 불교를 세우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날카롭고 까칠한 지적만큼이나 보석 같은 지혜와 대안이 돋보이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불교계에 이런 스님도 있구나’ ‘아직은 자정 능력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책을 읽는 동안의 이런저런 불편함에서 해탈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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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중도를 말하면서 착시에 빠져있고, 염세주의보다 훨씬위험한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질타하는 참수행자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승가의 욕심과 무능력을 꾸짖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스님의 죽비와 같은 정신이 불자들의 가슴에 널리 스며들기를 기대한다.  구매
현정 2018-05-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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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연기를 통해 바로보는 부처의 가르침

성법스님을 처음 알게된 것은 2006년경에 해인사에서 구입했던 한권의 책이 인연이 되었다. 그책은 성법스님의 저서는 아니었고, 만현이라는 사이비 중이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써낸 "21세기 붓다의 메세지"라는 책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매력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관심을 가지고 왕성하게 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찾아보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만현이라는 자가 썼던 책은 아주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사이비 처럼 여겨졌으나 - 2014년에 누군가가 자신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스스로를 재림예수 혹은 재림붓다라고 칭한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해인사 경내에 있는 서적 코너에서 당당하게 팔리고 있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판매하는 보살님께 여쭈어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법보사찰" 이라고 불리우는 절이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그런책이 해인사 경내에서 당당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 맥이 빠지는 일 아닌가? 기독교는 워낙에 수많은 종파가 있으니 비교가 힘들지만, 명동성당 서점에서 재림예수라 칭하는 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당당히 팔리고 있고 그 누구하나 그 책에 대해서 비판조차 없다고 생각해 보면 이건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인터넷으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검증해 보던 중 그 책과 저자에 대해서 조목 조목 비판을 하고 있던 스님이 유일하게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성법스님이었다. 또한 세존싸이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도 그렇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서 이미 대중은 거의 승가의 부패에 무감각해져 버린 듯한 2014년의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 대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스님을 찾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그럴 듯한 현실도피와 신비주의로 포장되지 않은, 석가모니라는 실존했던 한 인간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당당하게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는 분도 극히 드물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성법스님의 가르침을 신뢰했고 보다 많은 사람이 스님의 가르침에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이제 막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 냉철한 이성으로 깨달음이라는 신비주의를 경계하지만 부처의 위대한 가르침과 지혜는 무엇이었는지 진실로 궁금한 그 어떤 사람도 성법스님의 신간에서 바른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스님의 신간을 아래와 같이 간추려 본다. 성법스님의 신간은 300페이지가 넘는다. 보다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인연이 닿기를 바란다.

14p. 불교는 끊임없는 자기반조와 참다운 가치에 대한 의문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반 염세적인 메시지를 핵심으로 삼는 다는 말씀입니다.

16p.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 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이렇듯 理의 세계인 진여문에서 한국불교의 착시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事의 세계인 생멸문에서의 착시현상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으로 공덕도 살 수 있고 악업은 보시를 해서 소멸시킬 수 있고, 앞으로 받아야 될 업도 지금 보시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법당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면 공덕중의 공덕으로 삼대가 복을 받는다고 자신합니다. 이것 역시 낙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空함을 강조하는 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37p. 우주적 진리인 연기를 관하신 붓다께서는 그 마음의 여운을 간직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5비구에게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경지를 자신 있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가 5비구에게 설한 내용은 4성제 였습니다. 붓다께서 이들에게 12연기를 처음 설하셨다는 단 한 줄의 증거도 없습니다. 이건 상식에 어긋납니다. 즉, 5비구에게 설한 첫 가르침이 12연기법이어야 기존의 주장에 맞는데 실상은 4성제를 설하신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12연기가 아니라 4성제를 최초로 설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은 해결 방법은 12연기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고, 연기적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설하셨다고 결론짓는 겁입니다. 붓다께서는 5비구에게 12연기가 아닌 법계의 '연기성'을 언어적이 아니라, 4성제라는 의미적으로 재차 확인해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접근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과감한 추론을 한다면, 붓다께서는 연기법의 부분인 '인과'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에 상당한 고민을 하셨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연기에는 의도나 선악이 없지만, 세상은 인과에 의도와 선악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44p.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理와 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는 상의 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緣起입니다.
 
45p. 물질(事)과 정신 혹은 마음(理)은 상호 緣起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과는 간단 없는 이와 사의 한 단면을 '사건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46p. "연기는 내(여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여래)가 멸한 후라도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 연기에 확철한 경계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작위로 인한  인因과 연緣을 엮어 가서 만들어 내는 과果라는 것을,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일로 여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의 무한 팽창을 이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인간이 어떤 문제에 자신의 마음의 10%쯤 빼앗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반인 5%로 줄여 집착과 번뇌 역시 반으로 줄이는 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10배로 확장 시킨 다면 이 역시 빼앗기는 마음을 10%에서 1%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음을 극대화시켜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초기 수행의 방법론이며, 번뇌의 불을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단속한 붓다의 열반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도 곳곳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야단치고, 우열도 가리고, 갈증이 일 때는 목말라 하며, 늙고 병드는 육체적 고통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연기의 관점에서는 마치 태양에 물 한방울 더한 것과 같은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48p. 대부분의 경전과 논서들에서 인과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불이 있으면 뜨거우니, 인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생에 가난한 인은 과거생에 인색하기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모범적인 경전적 해석과 의존은, 붓다의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원죄론적 인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연기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과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50p. 세상의 시공의 변화와 관계없는 영원한 가치는 오직 연기를 체득하여 세상의 고와 낙, 생과 사를 무상으로 인식하며, 집착과 오욕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이 실은 무아無我(空我)라는 진리라고 '느끼라' 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이 '느끼라'의 방법론(수행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생하게 되니 지금과 같이 불교가 아주 번잡스러워진 것입니다. '번잡'이라는 것은 문화적.시대적 다양성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단순히 수행론의 번잡만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해 버린 것이 문제 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앙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신앙성 즉, '믿음'은 연기라는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 법계에 편재한 곧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느낀, 바로 그 마음의 파장에 나도 하나가 되어 같은 파장을 이룰 수 있다는, 법신불法身佛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불교의 종교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53p. '불법이 무상.무아에 해당이 되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해당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의 줄임이고, 무아는 제법무아의 줄임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를 사事의 논리로 표출한 것이고, 제법무아는 연기를 이理의 논리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삼법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이와 사가 원융되고 다시 진아와 합일되는 안팎세계의 불이가 바로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모조리 연기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67p. 그 '무엇'은 바로 연기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업과 윤회도 연기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러우지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12연기가 아닌 그냥'연기'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첨언하면, 아무런 대안 없이 '지식'을 깨달음의 장애로 매도하는 禪병에 대해 인간의 지성과 통찰력을 확신하는 저로서는, 선은 물론 지식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연기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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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 2014-02-03 공감(1) 댓글(1)
Thanks to
 
공감
     
진정 불자라면 꼭 봐야 할 책입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불법의 틀을 좀 더 크고 확실하게 전달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불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개굴된장 2015-07-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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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리뷰 :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 YES24 블로그 - 내 삶의 쉼표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벤투의스케치북 2014.01.25 댓글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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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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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는 지난 2001년부터 세존 사이트(www.sejon.or.kr)를 운영하고 있는 성법 스님이 한국 불교에 대해 던진 고언(苦言)이다. 세존 사이트는 경전 전산화 불사(佛事)의 원(願)에 따라 초기불교에서 대승경전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실은 사이트이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낙관주의라는 착시현상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신다. 스님의 눈에 비친 한국 불교는 상당 부분 힌두화(또는 자이나교화)가 진행된 불교이며, 기복불교보다 더 큰 문제일 수 있는 진리의 관념화에 빠진 불교이다.

스님은 탐진치를 벗어나면 단박 깨달은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법계를 아우르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 말씀하신다. 스님의 가르침은 담담하게 들리지만 공력은 만만치 않고 내용은 래디컬하다. 붓다가 깨달은 후 최초로 설법하신 것이 4성제(4聖諦)였고 12 연기(緣起)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라는 말씀, 무아(無我)보다 공아(空我)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말씀, 베다와 우파니샤드, 힌두이즘을 제압할 수 있는 붓다의 가르침은 (12 연기가 아닌) 오직 연기(緣起)라는 말씀, 윤회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 등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만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렇게 이러한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76 페이지)란 말씀을 보라. 사실 불교도가 아닌 나에게도 12 연기는 윤회를 실체로 상정하는 힌두교의 가르침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반면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주지(主旨)로 하는 연기(緣起)는 초기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이 담긴 핵심 사안이다. 이는 성법 스님의 근본 취지이기도 하다.

스님에 의하면 연기는 마음과 물질이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스님은 인과(因果)에는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오직 식(識)만이 있고 밖의 경계인 물질은 없다는 세친의 유식무경(唯識無境)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했다고 비판하신다. 그러나 불교에도 신앙이 있다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 신앙이란 연기의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는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불교는 자신의 의사나 행위와 무관하게 일어난 결과까지도 자신의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럴 경우 업은 기독교의 원죄(原罪)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스님은 업은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살아 있는 나도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데 죽은 내가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며 영혼과 윤회를 부정하신다. 스님이 인용한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가 말하듯 영혼과 윤회를 말하고 가르치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름이 없는 종교다.

스님은 불멸(佛滅) 후 400년 경에 있었던 4차 결집(結集) 이후 단 한 차례도 사상 점검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결집과 유사한 것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제 5차 결집을 제안하신다.(스님은 경전 전산화 불사를 제 5차 결집의 시작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역시 무상(無常)의 진리(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가르침)에 해당한다는 스님의 말씀 역시 파격적이다. 물론 모든 세부 사항에서까지 그 분들의 문제의식이 같지는 않지만 스님과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분들도 꽤 있다. 학계에서는 ‘윤회와 반윤회’를 쓴 충북대학교 정세근 교수가 그렇고, 불교 수행자 가운데에서는 각묵 스님이 그렇다.

각묵 스님의 경우 금강경에 의거해 한국 불교의 힌두화를 집중 거론한 분으로 유명하다.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지만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강조한 경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소의 경전이란 기본적으로 의거하는 텍스트라는 의미이다.) 각묵 스님은 금강경의 메시지를 ‘산냐(sanna)’ 한문 경전의 용어로는 ‘상(相)‘을 극복할 것을 강조한 경전으로 설명하신다. 극복할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修者相) 등 네 가지 상이다. 각묵 스님에 의하면 금강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보시 바라밀은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산냐(인식, 관념, 개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금강경에는 붓다는 수보리에게 중생이라는 산냐, 자아(自我)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個我)라는 산냐가 생긴 자는 보살(菩薩: 구도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본문과 관련해 내가 참조한 금강경 해설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와, 감산(憨山: 1546 - 1632)이 번역하고 오진탁 교수가 해설한 ‘감산의 금강경 풀이‘ 등이다. 전자는 65 페이지, 후자는 33 페이지에 산냐(상)가 생긴 자는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철저히 분석한 뒤 구마라집역본과 현장역본을 대조하고, 번역, 대역, 주해(註解)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空) 사상이 설파되고 있지만, 경전의 어디에도 공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 필자의 글이다. 이 필자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공을 공이라 하면 이미 공이 아니라는 ’노자‘의 지취(旨趣)를, 공적(空寂)하게 보이려는(드러내려는) 것일까?“란 말을 한다.(김영민 교수 지음 ’보행‘ 18 페이지)

김영민 교수는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상호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이라는 말을 인용하지만 공을 가르친 금강경에 공이란 단어가 없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바꾸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공(空)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일 뿐이다.(’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70 페이지) 각묵 스님은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무아(無我) 또는 공(空)을 가르치셨는데 대아(大我), 진아(眞我) 등을 내세워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힌두교적 발상의 외도선(外道禪)이 되어가는 것이라 비판하신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각묵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반야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면 이처럼 반야를 따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척파되어야 할 산냐 중의 산냐 아니겠습니까? 증도가는 환여피익이투화(換如避溺而投火) 즉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 불로 뛰어든다고 했습니다. 물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다시 불로 뛰어들면 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산냐를 척파하면 되지 따로 반야를 설정하는 것은 물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란 말씀이다. 각묵 스님은 산냐의 척파가 반야의 실천이라 말씀하신다.(참고로 말하자면 척파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추측하건대 척파는 척결(剔抉)의 척(剔: 뼈 바를 척)과 논파(論罷)의 파(罷)를 결합한 척파(剔罷)이거나 척결(剔抉)의 척(剔)과 격파(擊破)의 파(破)를 결합한 척파(剔破)가 아닐까 싶다.

지난 2002년 홍제동 수미정사에서 열린 10주 일정의 아미담마 강의를 통해 직접 말씀을 들을 때 스님의 배대라는 말씀에 낯설어 했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역시 국어 사전에는 없는 배대라는 말은 배配와 대對의 결합어가 아닌가 싶다. 배정과 대응의 개념을 아우른 말로 보인다. 언제 다시 그 분을 뵐 수 있을까?)

서유럽의 불교학자들은 고다마 싯다르타의 삶을 위대한 포기라 표현하지만 포기라는 말은 싯다르타의 욕망과 기득권을 포기한 소극적 의미를 담는 데에 그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붓다의 삶은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수식되어야 한다. 붓다는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사장인 브라만을 신성시하고 피지배 종족들을 영원히 굴복시키기 위해 업과 윤회를 무기로 네 가지 차별적 계급제도를 강제한 아리안들의 제도와 사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 했던 분이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명확히 한 붓다의 면모 역시 중요하지만 붓다의 위의(威儀)는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여실하게 드러난다.

아리안들은 출생 역시 계급별로 신체의 각기 다른 곳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제사장인 브라만들은 머리에서,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는 옆구리에서, 평민인 바이샤는 허벅지에서, 천민인 노예인 수드라는 발가락 사이에서 각각 태어난다는 것이다. 붓다 역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경전은 전한다. 붓다는 크사트리야 계급이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2천년 경 현재의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 남쪽에 위치했던 한 종족으로 우월한 기동성과 호전성 등을 무기로 페르시아를 거쳐 남진해 인더스 문명과 마주친 세력이다. 이들은 다수의 토착민들을 평민 이하로 지배했다. 윤회와 업 등은 이 지배 과정의 산물이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를 읽는 것은 초기 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도를 정복한 이, 도를 말하는 이, 도에 사는 이, 도를 더럽히는 이를 말씀하신 붓다는 원음의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도를 정복한 이는 의혹을 넘어서고 번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이며, 도를 말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을 가장 최상의 것으로 알고, 법을 설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심을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며, 도에 사는 이는 잘 설해진 가르침에 의지해 살며 스스로 자제하고 허물없는 삶을 사는 수행자들이며, 도를 더럽히는 이는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 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거짓이 있으며 자제함이 없고 말이 많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이다.

스님은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듯 대승 불교 흥기 후 무려 2,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불교가 또 한 번의 사상적 진화를 이루어 내지 않으면 후대 언젠가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설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신다.(146 페이지) 스님 역시 금강경을 언급하신다. ”불법을 한 마디도 설한 바 없고, 한 중생도 구제한 바 없다.“는 부정을 통해 금강경 자체를 초월적 믿음의 단계로 승화시킨 붓다에 대한 언급이다. 각묵 스님이 금강경을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셨듯 스님은 금강경을 붓다의 진심이 가장 잘 담긴 가르침이자 신앙성이 거의 배제된 경전이라 말씀하신다.(153 페이지)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같은 가르침으로 모양 있는 것으로서의 공덕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금강경은, 법화경이 있는 곳에 탑을 쌓아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비단 등으로 장식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라는 불멸 이후의 대승경전인 법화경(154 페이지)과 너무 다르다. 아니 법화경이 금강경과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은 방편을 쓴 법화경에 의해 일어나는 신앙이 금강경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말씀을 하신다.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의 비교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스님에 의하면 세친(世親)이 유식학에서 말한 아뢰야식 연기가 붓다께서 깨달으신 연기에 부합이 된다면 후대에 더 깊은 식(識)인 8, 9, 10, 11 식까지 고려해야 할 까닭이 없다. 붓다의 사상을 후대에 보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수행의 목적지는 중관(中觀)의 공(空)인데 방법론은 유식을 들어 설명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163 페이지)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유식 불교가 말하는 근본 마음인 제 8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근본 마음은 대아, 진아 등의 논의에서 지적된 무아와 배치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스님은 조계종을 대승이라 칭하고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한국 불교가 구족계를 제대로 받은 스님이 없어 지난 1973년 비구로서 상좌부 율맥을 이어온 태국의 스님들을 모셔와 구족계를 수계한 사실을 언급하신다.(불교평론 44호: 2010년 가을호 마성 스님 글 참조)

스님은 불교의 살 길은 양자역학, 불확정성 원리, 유전공학, 뇌과학 등 최신 과학의 성과를 적극 수용해 불법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치신다. 진화론을 믿지 육도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스님은 붓다는 업과 윤회에서 떠나야 하고 오로지 연기만이 진리라고 누누이 말씀했지만 당시 사성계급제와 더불어 거의 일상화된 업과 윤회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는 윤회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씀하며 하지만 붓다께서 사용한 업이라는 용어는 브라만들이 사성제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악용했던 의미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결과로 인간의 힘으로는 역전시킬 수 없는,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하신다.(230 페이지)

스님은 윤회 또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우주적 윤회라 해석하면 업과 더불어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본원적 질문에 고민할 이유도 없게 된다고 가르치신다.(230, 231 페이지) 그렇다면 불교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스님이 말씀하셨듯 사실과 현상을 망상과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스님은 한국의 사찰들이 지금부터라도 승가의 이익이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의 불교 최초의 사찰인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의 본래 취지에 맞게 모든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길 서원(243 페이지)하신다.

화를 잘 내신다고 자신을 드러내신 스님은 절의 주지임에도 인터넷 전법에 전념하며 입시기도나 천도재 등 일체의 기복 행위를 하지 않고 10여 년을 그렇게 순수 보시에만 의존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절 살림이 난감해지는 사태를 겪으면서도 붓다 흉내 내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 당신이 스스로 야속할 때가 있다고 고백하신다.(265 페이지) 불교 신자들의 돈이 출세와 성공, 안락을 위한 조건부로서 입시기도 하고 천도재 하는 절로 몰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스님은 임사체험도 죽음을 맞기 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그 농도가 아주 미약해지면 뇌세포들이 에러를 내는 것이라는 과학 실험 결과를 소개하신다.(272 페이지)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너희 구성원은 4부대중이 아닌 4부계급제로구나, 총무원 직책과 본사 주지는 바라문, 말사 주지는 왕족, 일반 출가자는 평민, 재가신도는 천민 아니냐“라고, 도박하고 술집 드나들고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승가에 ”데바닷다가 교단을 혼란케 하고, 야사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었지만 지금의 너희들은 나보다 그들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불교도도 아닌 나에게까지 아프게 다가온다.

스님이 제기한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시리즈는 35 개에 이른다. 핵심적인 것만 간추려졌을 것이다...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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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반윤회 - 그대는 힌두교인가, 불도교인가?



 | 충북대학교 인문.사회연구총서 6 

정세근 (지은이)

충북대학교출판부(CBNUPRESS)2013-01-18초판출간 2008년



416쪽





목차

서장 불평등에 대하여



제1장 말에서 뜻으로 가는 길



제2장 힌두교의 신



제3장 인도의 3대 종교개혁



제4장 불교의 발전과 쇠퇴



제5장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



제7장 윤회를 넘어서



부록1 간디와 인도에 대한 15가지 물음



부록2 추천의 글



부록3 서평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정세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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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철학과 교수. 국립대만대 박사.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으며 여러 철학회에서 연구위원장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철학상담학회, 한국공자학회, 한국서예학회, 율곡학회 등의 이사 그리고 한국철학회 부회장으로 남북철학자대회와 인문진흥위원장 일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쌍둥이 책인『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읽는『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서예 이론의 결정판인 『광예주쌍집』(상,하)을 해제와 도판을 넣어 번역했고, 중국어로는 대만 학생서국에서 『장자기화론』(莊子氣化論,중국철학총간34)을 냈다. 학술원과 문화부의 우수학술도서로 다수 선정되었으며, 공저를 포함하여 30여 권의책과 1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국내외에서 60회 이상 학술발표를 했고,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등단한 미술평론가다.

국가온라인공개강좌인KMOOC에서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세계종교 기행’(무료강의, Englishcaption)을 진행하고 있으며, 칼럼으로 수년간 연재한 ‘인문학으로 세상읽기’에 이어<교수신문>에 ‘철학자의 가벼움’(지상 및 모바일)을 매주 연재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철학으로 비판하다>,<도가철학과 위진현학>,<노장철학과 현대사상>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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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슬슬 문득문득, 그리고 언젠가는 점점 삶의 이런 저런 의미를 더 찾기 시작할 자슥들에게 전해주는 손가락에 꼽는 몇권의 책중의 하나다. 곁에 두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진지하게 읽게 될 날이 올거라고 했다.  구매

알라딘(최란)은 댓글농단을 멈춰라 2018-11-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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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는 연습 - 코이케 류노스케: '인간 실격' 스님의 행복하게 살기 연습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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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는 연습 - 코이케 류노스케: '인간 실격' 스님의 행복하게 살기 연습

프로필

토마노타

2017. 4. 20.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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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는 연습

저자 코이케 류노스케



출판 21세기북스



발매 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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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필자 소유의 다른 블로그 계정인 riproskaie.blog.me에 올렸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2010년부터 꾸준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 '생각 버리기 연습(원제: '생각하지 않는 연습')'의 저자인 코이케 류노스케(小池龍之介)의 책입니다.



코이케는 ​어떻게 보면 2010년대 초에 한참 불었던 불교 힐링열풍의 선구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코이케는 2010년 '생각 버리기 연습'이 한국에 출간되면서 순식간에 유명해졌습니다. 그 뒤로 저 위의 '나를 버리는 연습'을 비롯해서 코이케가 쓴 다른 책들 역시 줄줄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온 책들은 '생각 버리기 연습'만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이 스님이 쓴 나머지 책들이 번역되었을 때는 힐링열풍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 때였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이 스님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해도 항상 누군가가 빌려가서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 책의 리뷰를 처음 쓰게 된 2015년 무렵만 해도 쉽게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힐링열풍이 잦아든 이유가, '힐링'이라는 단어 자체가 '위로'랑 같은 뜻으로 쓰이면서 여기저기서 남발된 감도 있고, 이런 책들 때문에 힐링류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렇게 된 것도 있긴 합니다. 코이케의 책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앞서 말한 '생각 버리기 연습'은 우리나라에서 대개 좋은 평도 많이 받았지만, 짠 평가도 만만찮게 받았던 책입니다. '좋은 얘기인데,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그냥 똑같은 자기계발서'라는 이유도 있었고, 특정 종교(불교)의 사상을 일반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읽혀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베스트셀러, <생각 버리기 연습>

(이미지 출처: 네이버 책)







 이런 평가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코이케의 모국인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생각 버리기 연습>에 앞서, 2008년 <침묵 입문>이 출판되면서 코이케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도쿄대를 나온 신세대 스님'이라는 타이틀로 여타 일본 내 스님들보다도 두드러질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스님이 일본에서 낸 책은, 2015년 기준으로 17권이나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코이케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들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몇몇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막말에 가깝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이렇게(출처는 2ch 및 일본 웹).



<책 내용에 대한 비판>

"책은 많이 나오는데, 내용이 계속 중복되고 이전만큼 짜임새있지도 않다. 단지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계속 비슷한 내용의 책을 내는 것이 아니냐."



"주지스님이라는, 일본에서는 고수익 직종에 해당하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저술활동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사는데, '버리지 않는 연습(원제: '빈핍(貧乏)입문')' 같은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 위선적이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본인이 편한 대로 적당히 풀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뇌과학적인 설명은 '도파민의 작용'이라는 말 하나로 때워서 설명하니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도쿄대학 학력은 간판이고 사실은 공부도 제대로 안 한 거 아니냐."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설명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함종(*주: 2차대전 이후 세워진 일본의 초기불교계통 신흥종교. 그런데 알고 보면 아함종의 교리는 완전히 아함경의 내용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닙니다. 밀교 수행법과 짬뽕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비스무리한 '코이케 교'같은 사이비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냐. 마침 자기네 절이 정토진종으로부터 독립까지 했겠다, 그냥 신흥종교를 세우려는 걸로 보인다."



"책에서는 불교명상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부작용 위험도 있거니와 현대 과학 시대에 종교적인 수행법을 치료약이라며 들고 나오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코이케 류노스케 개인에 대한 비판>​

"​항상 자기 얼굴을 책에 찍어서 내는데, 스님치고는 오만한 마케팅 수법으로 보인다. 출판사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그걸 용인하는 본인도 책임이 있다. 이제 좀 있으면 40대가 되는 아저씨가 징그럽게 얼굴팔이하는 거냐."​



"​고민 상담을 하는 여자에게 "당신처럼 '받아 마땅하다'라고 생각하는 건방진 사람과 누가 사귀고 싶을까요" 같은 막말을 하다니. 심하다. 인생경험이 적어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미성숙해 보인다."​



​"쇼와(昭和) 시대 때의 서생 코스프레라도 하는 거냐. 혼자서 고상해보이는 척한다."



​"태국에서 초기불교 명상을 수행한 적이 있는 스님치고는 계율도 제대로 안 지키는 것 같다."



"문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아스퍼거증후군 환자같다." (이 정도면 비판이 아니라 인신공격 수준.)





사실 2ch에 올라오는 글들은 사이트 성격상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곤란한 게 많습니다. 애초에 "한국은 정신질환자가 많으니까 코이케의 책들이 인기를 끄는 거다" 같은 혐한성 발언이 난무하는 곳인지라. 그렇지만 저런 평들 중에서, 평소에 이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품어왔던 궁금증들이랑 겹치는 부분들도 있었기에, 그냥 넘어가기에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기계발서 작가라는데 실상은 인간성이 영 아닌 걸로 드러나서 책의 신뢰도까지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 스님이 하는 말을 과연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까요?

 ​

  그리고 저 위에서 '정토진종으로부터 독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정토진종 집안입니다. 하지만 정토진종의 '종교적'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종단과 갈등이 있었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절 쇼겐지(정현사, 正現寺) 주지 자리를 물려받을 때쯤 종단으로부터 제적당합니다. 교리에 어긋나는 저술, 강의, 출판활동을 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코이케는 여기에 대응해 단가(우리나라로 치면 '시주댁'이랑 비슷하지만, 좀더 사찰 운영에 대한 권한이 센 집안)들의 지원을 받아서, 자기 집안의 절을 종단으로부터 독립된 종교재단으로 인가받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느 정토진종 스님들과는 달리, 코이케는 독경도 하지 않고, 장례식도 지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독립 종교재단을 만드는 건 취지는 좋아 보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새로운 종교를 차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살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뢰성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저는 이런 '훈남' 스님이 어떤 생각으로 저런 욕을 들으면서까지 세속인들을 위한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하게 됐는지가 순수하게 궁금해졌습니다, 그냥 돈 때문인지, 자기과시인지, 아니면 순전히 공익을 위한 것인지.



그래서 찾아보게 된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할 책, <나를 버리는 연습>이었습니다.



<나를 버리는 연습>은 간단히 말해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자서전 내지는 '젊은 날의 과오'에 대한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코이케는 출가하기 전 상당히 무절제한 망나니에 가까운 삶을 살았지만, 불교 명상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반성 과정을 덤덤하고 관조적인 문체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의식 강한 아이​



코이케는 어렸을 때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큰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책 초반부에서 본인은 부모님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내버려둘 때마다 큰 소리로 울어젖히고,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던 아이였다고 고백합니다. 코이케의 부모님은 아들의 이러한 버릇을 고치게 하려고 수영교실도 보내보고, 피아노 학원도 보내봤지만, 코이케가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둘 다 그만두는 바람에 허사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류 군'(귀엽다...?)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다가 또래 친구에게 '여자애같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받고 나서 이 버릇을 고쳤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코이케는 이러한 자신의 옛날 모습이 다름아닌 강한 자의식, 그러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만(慢)'의 번뇌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코이케의 설명으로는, 아무리 순진무구해 보이는 아기들일지라도 태어나는 순간에는 이러한 자의식이나 자기보호 본능을 지니고 태어나며, 이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아 그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남는다고 합니다. 이는 어느 아기들이든 한 번쯤은 경험하는 보편적인 상처겠지만, 이 스님은 다른 아기들보다도 그걸 받아들이는 정도가 좀 심했던 모양입니다.



코이케는 가족으로부터 충족받지 못했다고 느낀 만의 번뇌를 친구 관계에서 충족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받기를 반복했습니다. 잘 나가는 친구에게 집착한 나머지 자신하고만 놀아주지 않는 상황이 되면 상처를 받는다든지. 아이들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곤 했는데, 롤링페이퍼 시간에 '짜증나'라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든지.



  이런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코이케는 학교에서도 산만한 아이로 낙인찍혔다고 합니다. 이 역시 굶주린 자의식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다 보니, 문득 이 분이 초등학교 시절 요즘 기준의 정신과검사를 받았다면, 농담 좀 보태서 ADHD(주의력집중장애)나 위의 평 말마따나 아스퍼거증후군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코이케의 이러한 증상은 심리학적으로는 경계선 성격장애로 분류될 법한 증상입니다. (본 의견은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개인의 의견입니다.)





코이케 류노스케의 <인간 실격>



코이케는 어린 시절을 우리나라의 경상도와 비슷한 분위기의 도시라는 오사카에서 보내면서, 거친 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쯤 야마구치현으로 이사하면서 문화 차이 때문에 그곳 아이들에게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사랑받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노력했는데도 새로 이사온 곳에서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결국 코이케는 "처음부터 사랑따윈 필요없었어"라는, 요즘 들으면 말 그대로 중2병스러운 자기합리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쯤, 코이케는 다자이 오사무의 그 유명한 소설 <인간 실격>을 읽게 됩니다.





인간 실격

저자 다자이 오사무



출판 더클래식



발매 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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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오오바 요조)에게 공감하면서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이케 본인은 이 당시의 어리석은 자신이 상처입은 자의식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로 <인간 실격>을 활용했던 것에 더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는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말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같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입버릇처럼 읊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가 '스님 실격(坊主失格)'인 건, 바로 이 시절의 자신에 대한 코이케의 연민어린 자학개그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코이케의 청년기 인생은 정말 <인간 실격>의 주인공마냥 갖은 풍파를 겪게 됩니다.  ​



쿨한 척으로 어둠의다크한(?)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코이케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자신이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에 아이들이 재미있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사랑받고 싶다는 자신의 만의 욕망을 '개그맨'의 성격을 연기하는 걸로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사랑받고 싶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자, 마음에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연기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려 한 것처럼. 그리고 친구에게 자신의 가면을 간파당해버린 요조처럼, 코이케 역시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성격을 얼마 안 가 간파당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개그맨인 척 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자, 코이케는 계속해서 상처받는 자신의 자존심을 '죽어버릴까'라는 말을 해서 시선을 끄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의 삶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코이케는​ 여자관계를 통해 내면의 어둠을 잊으려고 했던 요조처럼 숱한 여성편력을 거쳐 나갔습니다. 물론 요조처럼 자살시도까지 한 건 아니었지만, 유부녀와 사랑의 도피를 하기도 하고, 여러 명의 여자를 한꺼번에 사귀기도 하고, 여자친구를 함부로 대한 나머지 자살시도를 하게 만들기도 하고, 학생 신분으로 결혼했다가 아내를 손찌검하기도 하고...



여자관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코이케는 아버지에게는 폭언을 하고, 어머니에게는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밀치는 등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은 코이케의 만의 번뇌는, 중구난방으로 헛돌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대인관계뿐 아니라, 코이케의 정신은 개인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지적 우월감에 취해있었지만 공허한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오히려 (머리를 무리하게 써서인지) 몸에 병을 얻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멋진 옷을 숱하게 사 모아도 마음의 구멍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코이케의 상태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대고 '헤뇨헤뇨헤뇨', '게리 쿠퍼(??)'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놀라게 만들기를 즐기는 지경까지 악화됐습니다. 이 정도면 정신분열 같은 걸로 분류돼서 병원에 집어넣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요조가 소설 거의 막바지에 인간관계는 물론 마음까지 산산이 망가진 채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던 것처럼.



그러나 다행히도, 코이케의 <인간 실격>은 이쯤에서 끝을 고했습니다.





​명상으로 거듭난 <인간 실격>



통제불능이었던 ​코이케의 만의 번뇌를 멈추어준 것은, 다름아닌 '명상'이었습니다.



교사로 일하다가 가업을 따라 주지스님이 된 그의 아버지 코이케 노리오는, 점점 미쳐가던 아들을 보다못해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 스님이 개발한 명상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코이케는 젊은 세대답게, 처응에는 불교 수행법 자체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미 당시부터 법적으로는 스님이었고, 고등학교 때 승려라는 가업을 이어받아 잠깐 승려교육과정을 이수하기도 했지만, 열흘짜리 속성 교육과정이라 오히려 종파 불교에 대한 환멸만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음을 성찰한다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신앙심을 요구하는 정토진종의 분위기에도 회의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정토진종은 기독교와 비슷하게 인간을 죄스러운 존재로 보고, 자비로운 부처에 의한 타력구원에 의존하는 불교 종파입니다.)



이러한 환멸에도 불구하고, 한때 엄하고 폭력적이었던 자기 아버지 역시 이 명상법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보고 류노스케 스님은 자신의 방황을 멈춰줄 그 무언가를 명상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하시 스님의 수행법은 부처의 사후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 생겨난 종파불교가 아닌, 초기불교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수행방법인 '위빠사나'로부터 비롯된 수행법이었습니다. 독경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저 숨을 쉴 때 배의 들고 나는 움직임을 관찰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일주일간 명상을 하기로 결심했고, 또 실제로 수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코이케는 이 일주일간의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명상이 계속될수록, 그는 점점 자신의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을 덤덤하게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는 나란 본래 없고 조건반사적인 의식의 작용이 있을 뿐이라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실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명상 덕분에 자신이 이제야 '인간다운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님 실격'



정리하자면, 코이케는 정토진종의 교리와는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도, 불교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 과정도 다릅니다. 코이케는 종단으로부터 제적되기 전에도, 위빠사나 수행법을 한다는 이유로 이미 한 차례 추궁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의견대립 및 종단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것입니다.



또한 코이케 본인은 이 책 서문에서 신자를 늘리거나 포교를 하려는 목적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책의 원제가 '스님 실격'인 이유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 불교라는 특정 종교를 전파하거나 신자를 늘리기 위한 목적은 없다. '좌선 명상'은 다른 종교나 사상을 가진 사람, 혹은 무신론자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명상의 하나로 좌선 명상을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승려로서는 실격일지도 모른다. 좋은 스님이 아니라 그저 명상이나 즐기는 한 사람의 땡중에 지나지 않으니까. ―책 6페이지



결국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스님은 되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되겠지만 스님이라는 형식에 매이지는 않겠다는. 그래서인지 계율을 별로 지키지 않는 듯하다는 사람들의 평도 아마 코이케 본인의 이러한 생각 때문에 비롯된 듯합니다. 그래도 채식을 하고, 안거(安居: 스님들이 여름이나 겨울 등 일정한 기간 동안 외출하지 않고 한곳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것)에 들고 하는 것을 보면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채식을 시도해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저 두 가지만 제대로 하기도 참 쉽지 않으니까요. 본인은 '스님 실격'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제 개인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일본 스님 중에서는 꽤 드물게 '스님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자기계발서 작가로 유명한 코이케 류노스케가 아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인간 군상으로써 코이케 류노스케의 삶을 들여다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책을 읽고 나서도, 이 사람이 고백한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코이케의 어린 시절과 어릴 적의 제 모습이 여기저기 겹치는 점들이 많아서, 오히려 공감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혼란스러운 내면의 문제 때문에 어릴 적부터, 심하면 죽을 때까지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님이 그렇게 자기가 한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비슷한 내용의 책을 내는 것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갈 만도 합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본인이 불교 명상을 통해 어느 정도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 방법을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부류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그래도 솔직히, 좀 양산형처럼 책이 나오는 것 같긴 하지만...읍읍)



물론 불교명상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코이케 본인도 다른 책에서 '명상 과정에서 좋지 않은 무의식의 기억이 올라오면 우울증이 심해질 수도 있으니, 명상 전 미리 정신과의사와 상담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인용했던 코이케의 여러 논란이 된 언행들을 보면, 아직 본인의 그 '만의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걸로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이 불교 명상으로 인해 변화한 코이케의 모습이라면, 저는 차라리 저 사람이 그렇게 홍보하는 명상을 응원해줄지언정 대놓고 비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의 책을 읽고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인간 실격'급 망나니가 그나마 저 정도까지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상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코이케 본인도 자신의 책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 올라오던 자만심에 대해 고백하고 반성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창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오히려 이렇게 겸허한 태도를 보이는 건, 설령 예의상이라도 쉽지 않으니까요.



다만 명상의 효과에 대한 내용을 과학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전문가들과 책을 같이 쓰거나 하는 작업들을 통해서 좀더 논거를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저자가 스님이다보니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기보다는, 자신을 직접 명상으로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편인데, 아무래도 독자들 입장에서는 객관성 면에서 의심이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명상 관련 서적이나, 명상 전통에 뿌리를 둔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저 역시 항상 느끼는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얼굴 팔이' 논란은... 개인적으로는 얼굴을 당당히 책 표지에 걸고 활동하시는 스님들이 우리나라에 정말 많다 보니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유별나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논란은 코이케 본인이 종교인이다보니 계속해서 따라다닐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나를 버리는 연습>은, 이 스님이 쓴 책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책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책 외에 나머지 읽기에 좋은 책들로는 <코이케 류노스케의 명상수업>, <생각 버리기 연습>, <번뇌로 마음이 소란할 때> 등을 추천합니다. 나머지 책들은 좀 내용이 많이 겹치는 관계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