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1

원혜덕 -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5주기 추도일.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 이야기

원혜덕 -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5주기 추도일이다. 식구들이 다 함께 아버지 산소 앞에 모여 추모 예배를 보았다.... | Facebook


원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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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5주기 추도일이다. 식구들이 다 함께 아버지 산소 앞에 모여 추모 예배를 보았다. 큰 형부와 둘째 형부, 그리고 오빠가 말씀을 인도하고 기도를 했다.
1년 전 늦가을에 <씨알의 소리>에서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했다.
'씨알의 소리'는 1970년도에 함석헌 선생님께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하여 창간한 잡지다. 함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후학들이 뜻을 이어받아 격월간으로 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함석헌 선생님과 나의 아버지가 생전에 각별한 사이셨기에 딸인 내게 부탁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씨알의 소리'에 실을 추도사를 나의 남편에게 부탁했었다.
내가 쓴 글이 들어있는 <씨알의 소리>는 작년 연말에 나왔다.
그 때는 온 나라가 촛불집회로 활활 타오를 때였다. 워낙 엄중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 글을 페북에 올리지 않았다.
1년이 지난 이제 올린다. 아버지의 신앙을 중심으로 쓴 글이다. '씨알의 소리'에서 자세하게 써달라고 해서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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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원경선 선생
- 믿음에 따른 실천을 평생 해나가시다. -
아버지, 참 좋았다!
몇 년 전에 나의 오빠 원혜영 의원이 쓴 책의 제목이다.
오빠가 책의 마지막에 쓴 문장, <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참 좋았다.>를 보고 출판사에서 정한 제목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할 때마다 나도 아버지와 함께 한 이제까지의 나의 삶이 참 좋았고 고마운 것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하신 말 중에 널리 퍼진 말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김경재 목사님께서 아버지가 생전에
하셨던 이 말을 '원 선생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라면서 어느 글에 인용하신 것을 보고 놀랐다. 이 말이 아버지의 삶의 한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1. 나는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올시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께서 어느날 저녁에 나와 내 동생을 앉혀놓고 긴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느 한 소년의 배고팠던 어린 시절 이야기, 가난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했던 이야기, 청년시절에 남의 집 소를 돌보며 첫새벽에 일어나 소젖을 짜던 이야기, 그 젖을 소독하여 자전거를 실고 선교사들 집에 매일 배달해 주던 이야기, 자전거로 우유를 실고 가다 사고 날 뻔한 이야기, 등이었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끝났을 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그게 누구 이야기인 줄 아니? 네 아버지 이야기야.”
하셨다. 나는 그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냥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어리기도 했고 이미 아버지는 내 앞에 바위처럼 굳건히 서 계신 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풀무원 회사가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계시던 괴산 집을 <원경선 기념관>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일의 진행과 책임을 맡게 된 사람이 보자고 연락을 해 왔다. 내용을 정리하려는데 나의 오빠는 공적인 일로 바쁘니까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다. 자기가 아버지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자료를 다 찾아보고 정리하겠지만 혹시 잘못 기록된 것은 없는지, 보완할 내용은 없는지 점검해 달라고 했다.
그이가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오기도 하고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후에는 내가 서울 사무실에 가서 자료를 함께 검토하기도 했다. 그는 자료가 한 단락씩 완성될 때마다 내게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차례차례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기도 하고 빠진 내용을 보충하는 작업을 1년 가까이 하면서 나의 아버지로서만이 아닌, 아버지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을 “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로 규정했다. 전도하는 일을 평생의 일에 중심으로 놓고, 생활을 꾸려가는 수단으로 농업을 택하셨다.
다음과 같은 말씀을 꽤 여러 번 하셨다.
“전도는 내가 평생 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약속한 일이다. 그러나 자비량 전도는 내가 택한 것이다. 바울이 장막 짜기를 해서 자급전도를 했듯이 나도 농사일로 내 생계를 스스로 꾸려나가면서 전도를 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아버지의 농업은 아버지의 애초 생각을 넘어 우리나라 농업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한다. ‘원경선’을 기독교 신앙의 전도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한국 유기농업의 창시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아버지가 하시던 농업, 그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농업이 바로 아버지가 원하시던 전도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풀무원 회사와 함께, 아버지께서 평생 하신 일을 정리하다 보니 한 사람이 한 번의 생을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기독동신회(교회) 지도자.
□ 40여 년간 거창고등학교 이사장
□ 최초의 유기농업 단체 정농회의 창시
□ 한국기아대책기구의 창설과 참여
□ 환경정의 이사장
□ 사회복지 활동(전쟁고아들의 아버지 해리 홀트와 함께)
□ 풀무원 공동체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평생 계속 해 오실 수 있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어떠한 일이 앞에 닥쳤을 때 신앙 양심에 비춰서 해야 할 일이다 싶으면 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편이, 우리 내외가 지금처럼 농사 짓는 일이 아버지가 하시던 농업의 그루터기가 된 것이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지켜본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에서도 평생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 모습이다.
2. 아버지의 젊은 시절
나의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전인 1914년에 평안남도 중화에서 산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소농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농지를 가지고 있어서 아들인 나의 아버지에게 독선생을 들이기도 할 정도의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하는 바람에 술에 빠져서 있던 땅들을 다 팔아 없애고 먹고 살 길을 찾아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수안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나이 열한 살 때라고 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 간 동네에는 교회가 있었다. 옆집 친구가 교회에 가면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해서 아버지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갔다고 한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는데 예배시간에 모두가 눈을 감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 집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 말고 하늘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때 들었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평생의 신앙에 바탕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공부를 가르쳐주던 그 교회의 전도사는 얼마 후 그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할아버지에게 보내달라고 해서 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했는데 2년을 다니고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더 이상 수업료를 내 줄 돈이 없다고 학교를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데 동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어찌나 부끄럽고 부러웠던지 친구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나무 뒤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여러 날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담임 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의 사정을 알게 된 학교에서는 회의를 해서 그 전에 주던 장학금을 두 배로 주기로 결정하고 아버지에게 계속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아버지의 총명하고 성실한 성품을 알아보았으니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매달 장학금으로 받았던 10원을 아껴 썼고 일 년을 지나 졸업할 때보니 1원 50전이 남았더란다. 아버지는 그 돈을 학교에 돌려주었다. 깜짝 놀란 선생님이 그 돈으로 공부에 필요한 것을 사서 쓸 것이지 왜 남겼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학비로 쓰라고 준 돈이니까 다른 데 쓸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감동을 받은 일본인 교장은 훈화 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얘기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였겠지만 교장은 몇 년 후에 총독부에서 특별사업비로 내려온 토지구입비와 영농비를 아버지가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술을 좋아했던 할아버지가 빚만 물려주고 돌아가신 뒤였다. 그러한 아버지에게 장기간 저리로 24년에 걸쳐 원금을 상환하는 대출조건은 다시 없는 좋은 기회였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농장을 구입하고 개간하여 열심히 일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소 두 마리 값인 빚 40원도 갚았다. 농사일에 더욱 재미를 붙여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날 군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위에서 농장 시찰을 나온다는 통보였는데 주일에 나오겠다고 했다. 말이 시찰이지 그런 식으로 해서 한 턱 얻어먹을 심산이었을 것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교회 주일학교의 교장도 맡고 있었고 한참 신앙에 불이 붙어 있어 교회에 빠지면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면에다 주일날이라 안 되겠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말만 그렇지, 아무리 큰 은혜를 입은 네가 준비를 해놓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그대로 시찰단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회에 가고 농장에 없었다.
화가 잔뜩 난 군청 직원들이 아버지를 불러들여 그런 배은망덕한 짓이 어디 있냐고 호통을 쳤다. 아버지는 그들이 그럴 줄 알고 미리 땅문서를 챙겨가셨다고 한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간섭한다면 당신들이 준 땅을 돌려주겠다.”
하고 챙겨간 땅문서와 계약서류를 다 꺼내 책상 위에 놓고 나와 버렸다고 한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속이 다 시원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빌 줄 알았던 군청 직원들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시원하게 느낀 것은 사실이겠지만 여러 해 동안 피땀 흘려 일군 농장을 내던지는데 어찌 마음이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다 큰 다음에 비로소 했다.
아버지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하고 싶었던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 여동생을 데리고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왔다. 그 때는 완전히 시골이었던 홍제동의 한 목장에 목부로 들어갔는데 황해도 수안에 살 때 목회자로 왔었던 분이 운영하는 목장이었다고 한다. 수안에 있던 교회의 목사님의 아들과 아버지가 친구지간이었기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소 집 청소를 하고 먹이 주고 젖을 짜서 자전거를 타고 선교사들 집에 우유를 배달하고 돌아와 다시 소를 돌보는 고된 일상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종로에 있는 YMCA가 운영하던 야간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다른 공부는 다 혼자 할 수 있어도 영어만은 혼자 공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YMCA 영어학원을 석 달 다녔을 때 자전거 사고로 죽을 뻔한 일이 생겼다. 하루 종일 목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종로까지 가서 공부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잠이 극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선교사들 집에 배달하려고 자전거에 우윳병을 잔뜩 실고 가는데 졸면서 자전거를 운전했다고 한다. 말이 조는 것이지 실제로는 자면서 자전거를 몰았다고 했다. 바로 눈앞에서 전차의 땡땡거리는 소리가 나서 놀라 눈을 떠보니 바로 코앞까지 전차가 와 있는 게 보였다고 한다. 급히 자전거 핸들을 꺾어 전차와 충돌 직전에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우윳병은 깨져서 유리 조각이 사방에 깔리고 길바닥에는 우유가 흥건했다. 아버지는 살면서 그 후로도 죽을 뻔한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이 자전거 사고가 그 첫 번째였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YMCA 영어공부를 중단하였다. 계속 하다가는 결국 사고로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형편이 나아지면 계속하려고 했던 공부는 그것으로 끝났다.
후에 감신대에서 초청이 와서 신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할 때 아버지는
“나도 젊은 시절에 여러분들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신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우게 하려는 뜻이 있으셨다고 생각한다.”
라는 내용으로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YMCA의 영어공부는 이렇게 석 달로 끝났다. 그 때 아버지는 그곳에서
한 분을 만났다.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 선생이시다. 그때 만난 이현필 선생과는 그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까이 지내셨다. 이현필 선생의 후임자이신 정인세 원장님과도 깊은 교류가 있으셨다. 정선생님이 동광원의 일을 의논하려고 가끔 부천 우리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오셨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는 밥값을 내야 한다면서 풀무원 연수생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달라고 청하셨다.
정인세 선생님은 하룻밤 주무시고 광주까지 갈 길이 멀어서 아침 일찍 떠나셨다. 아버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을 하느라고 바쁜 어머니 대신 나에게 간단한 아침을 차려드리라고 했다. 그 때 우리는 젖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우유를 떠다가 끓이고 닭장에서 계란 두 알을 가져다 부쳐드리라고 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과 계란 후라이를 두 개 접시에 담아서 쟁반에 갖다 드리고 나왔는데 선생님이 가신 다음에 보면 우유 한잔만 마시고 계란 두 개는 그대로 남겨 놓으셨다. 계속 그러셨다. 본래 아침을 안 드신다고 하는 정인세 선생님은 아버지의 성의를 봐서 우유만 드셨던 것 같다.
아버지도 어느 때부터인가 동광원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셨다. 동광원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씀을 들려줄 어른들이 안 계시게 되자 동광원 식구들이 아버지께 말씀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매년 정초마다 동광원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시는 일은 아버지의 거의 말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원장님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 되면 내게 전화를 주신다. 동광원 식구들이 아버지 기일을 맞은 날 아침이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같이 기도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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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어머니 지명희
누구에게나 배우자는 중요하다. 남과 더불어 같이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내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아버지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평생 일을 할 수 있으셨던 것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함께 하신 어머니가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72년을 해로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에 많이 배운 덕에 수원 경찰서 부서장이 되셨는데 일제가 온 국민에게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부서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오신 외할아버지는 화신 백화점 수위로 들어가셨다가 거기서도 쫓겨나셨다. 틈만 나면 성경을 읽는 외할아버지를 미워해서 그랬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전에 수원에서 서울로 유학 오셨다. 수원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배화여고 전신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해당하는 전문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던 차에 외할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셨던 것이다.
맏딸이었던 어머니는 졸지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문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명동에 있는 어느 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취직하셨다. 여학교를 나온 어머니는 그 당시에 최고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주일날이면 새벽 우유 배달을 마치고 자전거를 돈의동에 있는 기독동신회 교회 마당에 세워 놓고 들어와 예배를 보았다. 아버지가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던 어머니는 외할머니께 아버지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역시 아버지를 좋게 보셨던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물으셨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괜찮은 처녀가 있는데 그 처녀와 결혼하지 않겠는가?”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오히려 되물으셨다고 한다. “보시다시피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남의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누가 나하고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외할머니는 그 처녀가 당신 큰 딸이라고 하셨다. 놀란 아버지는 당신이 일하시던 목장 근처의 사과 과수원에서 어머니를 만나자고 하여 물었다고 한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와 결혼하면 고생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가? 진짜 본인의 생각이 맞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그리 생각하시는 건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 성경 말씀을 보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생겨났노라고 했다. 신앙 안에서 살기만 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같이 손잡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결혼을 약속한 것이니까 아버지는 그게 약혼한 것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정도이면 좋은 신랑감이 많았을 텐데 자전거를 타고 우유 배달하던 청년을 평생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그의 속사람을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참된 가치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보는 눈이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 인격의 크기에 있을 것인데 어머니는 그 가치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때 주례를 서 준 분은 그 교회의 원로인 김태희 선생이었다. 그 분은 한학자이고 명필가였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함석헌 선생님의 선생이었던 유영모 선생이 스승으로 모셨다고 했다. 김태희 선생은 일본이 조선을 포함하여 연 미술전람회에서 서예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분이다. 당시 도쿄대 총장이던 야나이하라(시내원,矢內原) 선생이 김태희 선생에게 부탁해 글씨를 써달라고 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야나이하라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로 유명한 우찌무라 간조(내촌감삼內村鑑三)의 제자이다.
<神卽愛也>- 신즉애야,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니라.
전쟁 후 야나이하라의 자손은 그 글씨를 한국에 돌려주는 게 맞다면서 돌려주었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께서 그 글씨를 받으셨는지 여쭤보지는 못 했다. 아버지는 이 글씨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셨다. 그 글씨가 6.25 난리 통에 잘못될까봐 간수하느라 애쓰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가 가져다 벽에 걸어놓았다.
그 김태희 선생이 주례사에서 말했다고 한다. “신부는 땅 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다.”
아버지께서 부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시작하셨을 때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때라 사방에 부모 없는 아이, 자식 잃은 어른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미 군목이 자기들이 임시로 데리고 있던 아이들을 아버지한테 갖다 맡기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많은 사람들의 밥을 삼시세끼 차리고 밭일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 하나하나의 마음과 형편을 헤아리고 걱정도 해 주셨다. 철없는 젊은 사람이 옷을 빨아 달라고 하면 밤중 늦게라도 그 옷을 빨아주셨다.
어머니는 평생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했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 남쪽에서 농촌교육개발원 원장 일을 보던 목사님 내외가 우리집에 와서 며칠간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부인과 어머니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이가 내게 물었다.
"사모님은 당신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 못 하셨다면서요?"나는 처음 듣는 말이기도 했지만 어이가 없어서,"아니, 그게 말이 되나요? 어떻게 자기 자식하고 남의 자식하고 구별을 못 해요? 구별을 안 하셨다는 말이겠지요?"
했더니 그이는 그 말이 맞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이는 또 물었다. “대한민국 목사들은 다 선생님 댁에 들러서 사모님이 해주신 밥을 먹고 갔다면서요?”
그이가 목사 부인이니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먼 길 온 사람이면 때가 지났어도 배 고프겠다고 밥을 차려주셨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손님에게도 밥을 해주셨다. 늘 여유있게 밥을 해놓으셔서 우리 형제들은 남은 찬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공동체에 같이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가 계실 때나, 안 계실 때나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 일곱을 키우면서 평생 전도일과 농사일로, 그리고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일로 바쁜 아버지를 돕느라고 고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사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셨다. 사람들을 돌보는 달란트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셨고 그것은 아버지의 전도만큼이나 귀한 것이라는 말씀도 자식들인 우리들에게 하셨다.
어머니를 가장 많이 의지한 분은 아버지가 아니셨는가 싶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도 그러했겠지만 심신이 많이 약해지시는 걸 보고 자식들인 우리 형제들은 염려를 많이 하였다.
4. 풀무원 공동체의 시작, 부천에서.
결혼 후 얼마 후에 북경에 가서 인쇄소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오셨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건축토목 사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버지는 돈이 잘 벌리는 청부업을 시작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YMCA에서 3개월간 배운 영어실력으로 영국군의 통역관을 하셨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그 때만 해도 아버지 정도의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귀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영어가 가능한 덕분에 아버지는 미군정의 간부들하고도 사귈 수 있었다. 사람 사귀기를 워낙 좋아하시기도 했다. 그들이 돈 잘 벌리는 청부업을 하라고 했다. 건설업자에게 하청을 주기만 하면 되니까 돈 벌기가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없었다고 한다.
미군정에서는 공개 입찰 형식을 갖추긴 했다. 그러나 입찰을 하려는 사람 중에 영어 도면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으므로 저절로 아버지의 단독 입찰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많이 그러하지만 그 시절에는 뇌물이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미군들도 다를 바가 없어서 조금만 집어주면 사업을 따내기가 쉬웠다고 했다. 미군 관계자에게 그때로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무비 카메라를 사다 주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뇌물을 주는 것에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사업이 번창해지면서 그런 것도 다 없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청부업을 하면서 돈을 잘 벌었다. 처가에 집도 사 주고 생활비도 대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미군 트럭을 타고 사업현장으로 가다가 차가 길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뒤집어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참회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청부업을 정리하고 부천(당시 소사)으로 내려왔다. 정직하게 직접 일해서 먹고사는 농부가 되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전도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을 ‘나는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 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인식은 그 때부터 생겨났던 게 아닌가 한다.
아버지는 부천에 땅 1만평을 구입하고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자급 전도를 시작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때라 많은 사람들이 와서 같이 살았다. 주먹을 쓰던 사람들도 왔다. 그 사람은 무슨 일만 생기면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애를 많이 먹었는데 그는 후에 결혼도 하고 착실한 사회인이 되었다.
뜻있는 젊은 사람들도 여럿 농장에 함께 들어와 같이 일하며 살았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사는 풀무원 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문을 잠근 적이 없다. 누구든지 원하면 와서 함께 살자고 하였다.
풀무원에서는 한나절 일하고 한나절 공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농사를 짓고 있으니 실제로는 여름에는 일하고 겨울에는 공부하는 형태가 되었다. 공부는 성경공부가 중심이었고 아버지를 찾아오거나 아버지가 모신 분들의 강의가 때때로 있었다. 새벽기도회는 아무리 바쁜 여름철이라도 이어져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동네사람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고 지방을 다니면서 성경 말씀을 전하셔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원 목사’라고 불렀다. 아직도 나이 드신 동네 분들 중에는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년 전에 어떤 분의 초대를 받아 경남 함양에 간 적이 있는데 남편을 초대했던 사람이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니, 원 목사님 사위세요?” 하고 놀라워했고 우리는 그가 아버지를 원목사라고 칭하는 것을 듣고 오히려 놀랐다. 함양이 거창과 가까웠고 거창에 아버지가 40년 넘게 이사장으로 계시던 거창고등학교가 있어서 아버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타고 다녔는데 할머니와 어머니가 농사지은 콩, 팥 등 곡식을 팔아 여비로 쓰셨다.
아버지는 부천에서 농사를 짓고 살 때에도 뇌물 문제에 부딪혔다. 친구를 통해 구입한 부천의 땅이 이른바 적산토지로 취급되어 억울하게 강제 몰수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되찾아 아버지 명의로 등기하려니까 담당 공무원들이 돈을 달라고 했다. 그 당시 누구나 하듯 적당히 뇌물을 주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기서 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으셨다고 한다. 이 일을 담당한 세무서 직원이 3만원만 주면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것을 뿌리치고 결국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고 한다.
내가 내 땅 찾는 일에 빚까지 지고 몸과 마음이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인천의 한 교회의 간증집회 중에 이 일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 이 문제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으로 해결되어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인천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 중에 세무서 직원이 있었고 아버지의 신앙 간증에 감동을 받은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준 것이었다. 그 분이세무서 직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보다 아버지가 더 자주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다.
역시 부천에서 풀무원농장을 꾸려나가던 공동체 초기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국내에 비료공장이 없어 정부가 비료를 전량 수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비료가 농민의 손에 들어오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중간업자들이 끼지 않고 정상적인 단계를 거쳐 배급되는 비료를 제때 공급 받아야 농사를 망치지 않는데 그러려면 담당 면직원에게 웃돈을 얹어주어야 했다. 아버지는 포도를 기르고 있었다. 논이 없으니까 돈이 되는 포도를 길러서 공동체 식구들이 먹을 쌀을 구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포도 이야기를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아버지의 평생 스승이요, 동지이자 친구이셨던 함석헌 선생님이다. 함 선생님께서 천안 씨알농장에 계실 때 포도를 기르신 적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께 씨알농장에 와서 포도를 봐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포도송이를 보여주며 송이가 너슬너슬한데 왜 그런가 물으셨다. 아버지가 보니 포도를 솎아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올해 포도는 단념하시라고 했더니 그만 낙담을 하시더라고 했다.
다시 풀무원의 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뇌물을 줄 수는 없었으나 함께 사는 공동체 식구들의 동의가 필요한지라 가족회의를 열었다. 학교 선생을 하다 공동체에 뜻을 가지고 합류했던 김종북이라는 청년이 나서서 고구마만 캐 먹고도 겨울을 날 수 있으니 뇌물을 주지 말자고 했다. 그 해의 포도 수확은 단념했다. 그 때 아버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하셨다.
5. 최초의 유기농단체 정농회를 만들다.
아버지가 유기농업을 하실 생각을 하신 것은 일본에 있는 유기농 단체인 애농회의 창시자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만나고 나서부터이다. 아버지는 1974년에 일이 있어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다녀오다가 일본에 들렀는데 그 때 오사카 부근 미에 현에 살고 있는 고다니 선생을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고다니 선생이 내던 ‘성령’이라는 신앙지를 통해서 유기농업에 대한 글을 읽은 아버지는 그 분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두 분은 늦도록 신앙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고다니 선생을 한국으로 초청하였다.
고다니 선생은,
“이제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를 초청하였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그 초청을 받아들이겠다.”
고 하였고, 이듬해 9월에 부천 풀무원 농장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공동체 외부에서 좋은 분을 모시면 사방에 연락을 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듣도록 하였는데 그때도 예외 없이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약 4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고다니 선생의 강연을 듣도록 했다. 고다니 선생의 강연은 4일간 계속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공동체를 이끌면서 먹고 사느라고 생긴 부채로 경제가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그 모임을 위해 돈을 많이 들여 양계장을 개조하여 숙소와 강의실을 만들었다.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면 아무리 어렵고 비용이 들더라도 즉각 실천에 옮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기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고다니 선생은 강연에 앞서 일본이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고통을 주었던 것에 대해 사죄하였다.
또한, 한국이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는 일본의 농업을 따르고 있는데 그대로 가면 10년 후에는 한국도 일본처럼 농약과 제초제의 피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기 말을 듣고 한국 사람들이 그런 죽음의 농사를 벗어나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시작한다면 일본이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 되겠다고 했다.
그 때 일본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던 공해와, 유기농업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었다. 강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깊은 울림을 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에 아버지는 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하였고 처음에 참석하여 고다니 선생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다시 불러 강연을 듣도록 했다. 강연 마지막 날 아버지를 비롯한 모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그동안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던 농사에 대해 회개하고 그러한 것들을 쓰지 않는 농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정농회(正農會)’를 결성하였다. 정농회는 한국 최초의 유기농 단체였는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신앙 양심에 따라 결성했다는 것에 그 의미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인 사람들이 처음에는 단체의 명칭을 ‘한국 애농회’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아버지는 그 이름이 좋기는 하지만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질 것을 생각해야 된다고 하였다. 한국 애농회라는 이름을 쓰면 마치 일본 애농회의 한국지부로 인식될 수도 있다고 하며 정농회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모두 동의하여 정농회로 하기로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모두 아버지에게 정농회의 회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나는 한평생 전도하며 살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농회를 뒤에서 열심히 돕겠다”
고 하며 사양하였다.
부회장은 맡을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요청은 받아들여 14년 간 정농회 부회장으로 일을 하며 정농회의 회장이 된 오재길 선생님과 함께 정농회를 이끌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정농회 연수회와 교육도 오랜 기간 풀무원농장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누구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 않는 유기농업이 좋은 줄을 알고 정부에서도 유기농업을 권장하고 지원해 주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농업의 최고의 목표가 증산이던 시절이었기에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정부는 이들을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로 보았던 것이다.
정농회 연수회 등 모임이 있을 때마다 형사들이 찾아와 뒤에 앉아서 어떤 내용을 말하나 하고 듣기도 하고 참가자 명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농장의 연수생들을 위해 강사로 초청한 분 중에는 함석헌 선생 등 소위 말하는 반체제 인사들도 여러 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5. 가족 공동체의 시작, 양주 풀무원 농장
아버지는 정농회가 결성되던 그 해 1976년에 유기농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고 가족 공동체를 시작하시려고 부천에서 양주로 농장을 옮겼다. 부천은 이미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땅값이 많이 올라있어서 농사지을 땅을 구입할 형편이 안 되었다. 부채를 갚느라고 본래 있던 땅을 많이 처분한 상태이고 그 당시 하던 젖소와 양계를 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사를 중심으로 다시 시작하려면 넓은 땅이 필요해서 그 당시에는 오지인 양주로 농장을 옮겼다.
그 즈음 부천 풀무원 농장에서는 농사와 양계를 함께 해서 경제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축산을 다 정리하고 농사만으로 새롭게 공동체 경제를 꾸려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양주로 옮길 때 부천 농장의 이삿짐을 꾸린 사람은 나의 남편이었다. 그 때 우리 두 사람은 아직 결혼을 하기 전이었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나는 부천 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양주 풀무원에는 처음에 부천에서부터 함께 온 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후에 몇 가정이 합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가족공동체였다. 차차 많은 젊은 사람들도 신앙과 유기농업을 배우기 위해 풀무원 농장에 모여들었고 그들 중에는 몇 년씩 연수생으로 함께 살며 일하고 난 후에 고향에 돌아가거나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아 그 지역의 유기농 지도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는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1955년에 부천에 자리 잡은 풀무원 공동체의 삶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 생활을 해결하고 개개인의 바른 생활을 정립하자는데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동체가 성숙해졌고 우리 이웃에게도 마음을 열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한다는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행하기 위해 양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왔다. ”
당시 양주는 아주 깊은 시골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4만평 가까운 땅을 싼 값에 넘겨주었다. 그는 6.25 전쟁 후 선교사의 농촌 선교를 돕다가 그 선교사로부터 좋은 일에 쓰라고 그 땅을 무상으로 넘겨받았던 것인데 나의 아버지가 유기농업을 시작하려고 땅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3 가격에 해당하는 돈만 받고 땅을 넘겨준 것이다.
아버지에게 닥친 마지막 어려움은 양주 풀무원 농장을 시작한지 20여 년 만에, 농장의 회계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자기 고향 선배한테 어음 사기를 당해 대부분의 농장 땅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였을 것이다. 그가 구속될 지경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구해주느라 땅을 많이 팔았다. 옆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돈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며 그 사람을 구해주느라고 땅을 거의다 팔았던 것이다.
그 어려운 때에 처음에 선교사로부터 땅을 받았다가 그 땅을 아버지께 싸게 넘겨주었던 사람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 1만평을 도로 달라고 하여 찾아갔다. 남은 땅도 결국 부채 때문에 매각해야 했고 농장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시던 집까지 부채를 갚느라고 내어주어야 했다. 매우 힘든 시기였는데도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쌓아온 신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양주 풀무원 농장이 다 정리되고 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홀트 고아원에서 와서 30년간 데리고 살았던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을 데리고 풀무원 회사에서 마련해 준 괴산으로 내려가셨다. 이제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어려움을 겪어 다른 사람 같으면 실의에 빠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연세가 91세셨다. 그 곳을 평화원이라 이름짓고 아버지는 건강이 허락된 마지막 5년 간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평화운동을 펼치셨다.
6. 행함이 있는 신앙
아버지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헬라어를 공부하셨다. 헬라어를 누구에게 배우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독학하신 건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사전을 뒤져가며 헬라어 성경을 읽으시는 것을 어려서부터 보았다.
잘못 번역된 성경구절을 바로잡은 것도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마태복음 6장 34절 말씀이다.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라고 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런 내용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영어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찾아 바른 해석을 하여 대한성서공회에 알려 주었다. 그 성경 구절은 <표준새번역>부터 다음과 같이 바로잡혔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아버지가 소속된 교회는 처음에 말했듯이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이다. 이 모임은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영국국교에 대항하여 초대교회의 경건주의로의 환원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지식인들로 구성된 신앙인들이 주창하여 목회자를 두지 않고 각자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만인사제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신도 모임인 형제교회(Brethren Church)이다.
이 교회에서는 매주 성만찬을 한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며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들이 형식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하시던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만찬상 다리부터 부러뜨릴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아무리 많이 먹고 마셔도 자기의 삶을 남에게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요즘 교회가 ‘예배’라는 말을 남용하고 본래 예배에 담긴 뜻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찬송과 기도, 성가대 찬양과 말씀선포와 헌금 등 개신교 예배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은 그 자체가 예배행위가 아니고 삶으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마음에 다짐을 하는 예비모임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는 온 삶으로 드리는 예배다. 장사하는 사람은 속이지 말며, 사업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해야 하며, 교육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하며, 농사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농산물을 만들어야 된다”
특히 농사에 있어서 농약, 제초제 등을 사용하는 행위는 ‘간접 살인’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농약과 제초제 등을 사람이 먹을 농산물에 뿌리고 교회에 와서 아무리 기도하고 많은 헌금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 예배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농약을 사용하여 생산한 농산물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없으며 아울러 모든 생명체의 기반인 토양과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은 삶 속에 뿌리를 박을 때 참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삶을 통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한국교회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을 받는 것은 삶을 통한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하는 의식예배에만 치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를 따라 개개인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바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수직의 축 한가지로만은 결코 온전한 십자가가 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종(縱)과 사랑을 실천하는 횡(橫), 이 둘이 다 있어야 십자가는 이루어질 수 있다.”
아버지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것이 기억에 있는 것만도 일곱 번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 한 점, 피 한 방울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쓰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이기적 사유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기아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고, 군대없는 세계를 만들고, 공해로부터 인류를 건지려는 환경운동과 생명보호운동의 삶으로 확대된 것인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평생을 벼려온 아버지의 신앙이 있었다.





Yeonsook Lee

오래 전 감명깊게 읽었던 책.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 이야기>가 원혜덕님의 선친이셨군요.. 자손들도 아름답게 사시니 감동스럽습니다.
원혜덕
말씀 고맙습니다!
Junghee Kim
저도 외국에서 살 때 브레드린 처치에 다녔어요. 한국에도 그 브레드린 처치가 있었다니 놀라워요. 좋은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혜덕
브레드린 어셈블리를 아시는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말씀도 고맙습니다.
박순섭
감동입니다
강귀숙
진솔한글 잘 읽었습니다.
소설 한편을읽었습니다.
미루
사랑합니다 ♡ 존경합니다
장석근
그 아버지에
그 딸입니다.
아버지처럼 소박하게
끊지않고 쭈욱
단숨에 읽었습니다.
떨림으로ᆢ
Kyzbma Yang
성서 기록대로라면, 그리고 원경선님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더라면 두 도시는 유황불 재난을 면했으리라.
나와 동시대에 이런 義人이 사셨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슈퍼에서 풀무원 식품이 팔리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원 목사님의 전도사업이 생산물 판매에 힘입어 부천을 근거로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순전히 풍문과 추측만으로 내가 만든 허구였음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욥의 시련을 의연히 겪어내신 원 목사님의 정신은 평화나무의 거목으로 日益靑靑하시리라 믿습니다.
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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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선
어쩜 이리도 기억해내 글로 옮겨 놓다니. 참 뜻있는 글 잘 읽었어요.
Stellar Park
'우리교육'에서 출판한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 이야기'를 아이와 함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신앙인의 아름다운 삶이십니다.
정인조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박석현 신앙문집 속에 나오는
어르신과 박석현 선생의 편지를
통해서 어렴풋이 알았던 부천풀무원을 상세히 알게되었습니다.
Hyunju Park
원경선선생님이 살아께실때 남편과 포천 평화나무 농장을 방문한적이 있어요
거동이 불편하신 선생님을 유리창이 천장에 ㅇㅆ는 거실옆방에서 뵈었었어요 그 멋있었던 백발이 눈에 선하요
이번 육가공교육 너무 기대되요
정동수
아버님, 어머님에 대한 일생을 기억을 되살려 진솔하게 기록해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제가 1967년 의정부 미 1군단 비행중대 카투사 시절 절친이었던 펜실바니아에서 온 Ralph p. Stahle가 United Brethren in Christ 교단소속 교인이었죠. 진실한 믿음의 친구였고 그의 부모님과는 40여년 간 서신으로 교제했지요. 지금은 고인들이 되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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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희 
참 좋은 아버지를 두시고 그 아버지의 삶을 잇는 남편과 원혜덕쌤~~~멋진 분과 친구여서 기분 좋은 밤~♡
Changbon Han
잘읽었습니다ㆍ
원경선 원로 선배님을
가까이서 뵙기는 했어도 오래전에는 청년의 나이로는 감히 가까이대할수 없는 부끄러움들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ㆍ
세세히 살아오신 인생은 그 다지 잘 몰랐는데 글을 읽는내내 짓누른 내면의 무게에 더 숙연해집니다
대를이어 한평생
보듬고 살아오신 '올바른것이 좋은것이다' 말씀을
다시한번 가슴에 새김니다 ㆍ
새해 새날에도 원경선 지명희선생님 일가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ㆍ
Jin Lee
숨가쁘게 그러나 한자한자 정독했습니다.
제가 어릴때 풀무원이라는 이름은 참예쁘다.
라는 생각을했었는데...너무 신기해요. 신앙에대해 또 하나님께서 내 삶을통해 요구하시는 질문에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카랑카랑한목소리가 들리는듯하네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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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ju Choi
귀한 삶을 이어가시는 모습 또한 아름답습니다
최성희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사는 한평생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김범용
잘 읽었습니다
넘 좋은글 고생하셨어요.
Hun Jung Cho
까미노 순례길 중에 읽으니 아버님의 삶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
김종덕
글 잘 읽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일을 하신 원경선 어르신, 지명희 어머님 그리고 부모님의 정신과 철학을 이어가는 원혜덕 님과 김준권 선생님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글을 읽으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Hoyoung Jang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셔서 어려운시기 선구자로 살아오신 분이시네요.존경합니다.
배옥금
정말 세상을 밝게 만들고 계시는 분입니다. 저희도 귀농을 했는데, 있는 곳에서 조금이나마 더 이웃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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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g-hoon Park
언제 어디서 접해도 가슴 뭉클한, 위대한 역사입니다. 정말 하난님의 크신 은총을 구하시고 받으신 절절한 간증!!!
손정희
단숨에 읽었습니다
보연(유정이로 이름바꿨어요)
풀무학교농장실습때 유정이 아빠랑 양주 찾아갖는데 훵하니 풀무원농장이 없어서
다시 찾아간 기억이 납니다
가게를 이어서 내려오는 하느님사랑 이웃사랑 생명사랑이 평화나무농장을 통해서 전수되고있음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아랫집 김옥분과 2월쯤 1박다녀오자고 하는중입니다.
Kyung Chae
언뜻언뜻 들었던 아버님 원경선농부님의 삶을 따님이신 원혜덕님으로부터 들으니 감동스럽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게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씀, 온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예배라는 말씀은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참 신앙이고 참된 예배였습니다. 요즘은 신앙공동체 안에서조차 선 악의 경계가 없어지고, 돈이 모든 것의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이어서 낙담스러웠는데, 아버님의 신앙을 대하며 희망을 봅니다. 아버님과 어머님 두분의 신앙과 삶이 여전히 이어지는구나, 느껴집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귀한 기억들, 함께 나눠주시어 고맙습니다.
Ĝu Ĝungsik
아, 원경선 선생님! 그리고 늘 웃으시던 지명희 사모님! 그립습니다. <씨알의 소리>에서 읽었던 글, 다시 큰 감동으로 잘 읽었습니다. 두 분을 쏙 빼닮은 혜덕 님과 준권 형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김창승
존경합니다
Jong Su Kim
영생을 이땅에서 누리는 삶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원론적 신앙생활로 게토화 되어가는 한국교회에 다시 한번 세상 속의 빛과 소금 되라는 말씀을 신앙의 선배님들을 통해 듣습니다. 응원합니다. 작지만 마을에서 보냄받은 곳에서 복음의 씨앗이 되어 살겠습니다.
JeongIl Jeon
어린이들과 함께 읽은 책 내용이 떠오르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평화나무농장에 어린이들과 갈 날을 꿈꿉니다^^
김수로
귀감으로 삼고자 공유해 갑니다~!!
Inhwan Cho
고맙습니다.
김주연
그 어려운 시절~ 참 훌륭한 아버님이시네요. 유영모선생님의 제자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유선생님이 광주 동광원에 오실때면 가끔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Tek Lim
참 귀하고 의로운 삶을 사신 아버님이십니다. 감동받고 존경합니다. 자녀분들이 아버지 정신이어 받았으니 이 또한 귀한 일입니다
김홍준
감사합니다.
Youngsoon Jeon
수안군 은율면 배미
울 아버지 고향입니다
원경선샘 수안군에
사셨다니 더욱 반가움
원혜영 전 의원도
참 좋으신 분 같아
응원했어요
Youngsoon Jeon
감동받으며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아버님 어머님이시고
그분의 자녀시네요
Choi Ildo 
저의 신학생 시절부터
영적인 멘토요 믿음의 아버지인 원선생님을 떠올리자니 너무 그리워 눈물부터 흐릅니다!
원 선생님에게 배운 로마서와 복음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귀한 가르침이었고 부성애적인 사랑은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감사, 감사 합니다~~!!♡
Min Hyung Lee
원경선 선생님 삶을 직접 들려주셔서
더욱 가슴이 뭉클합니다..
정직한 삶, 땅과 생명을 사랑하는 농사, 성서 실천의 삶...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니다.
제주도 정농회 연수에 풀무 다니는 두 아들과 함께
가족 모두 참가합니다...
새해 건강 과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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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hee Lee
제가 아버님 뵙고 인터뷰한 곳이 양주 풀무원입니다.
이서윤
우리나라 최고농부 원경선 선생님
아이들과 책으로
읽었던기억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함석헌선생님 모두모두 이시대의 스승이시지요
최들풀
잼나게 잘읽었습니다. 93년 키부츠챔버오케스트라 내한공연때
원경선 선생님을 직접 뵈었었지요. 제 어릴적 친구였던 고 임종원전도사에게서 거고 이사장님이셨던 선생님에 관한 이야길 많이 들었었고 원의원님이 쓴 아버지, 참 좋았다는 나중에 읽었지요. 하중조 형님은 오래전 마이애미서 만났었는데 지난 해 국회의원회관서 했던 남북평화미술전을 중조형님과 원의원님 덕분에 성공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괴산이라도 함 들려야겠네요 🎵
Jinmi Seok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책입니다.
아주 귀한 울림이 두고 두고 들려옵니다.
지금은. 평화나무농장 두분 선생님의. 삶을 통해. 다시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도형
원주 남한강변으로 귀촌을 해서 생협을 조직하고 유기농운동을 흉내를 내보기도 하면서 20년을 보냈습니다. 원경선선생님 말씀을 이분 저분들에게 들어서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 글을 읽게 되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어려서 하고 교회로 인해 늘 방황했는데, 나머지 삶에서 실천하는 믿음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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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 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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