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곧 춤… ‘잘해야지’ 하는 집착이 없다
춤꾼 홍신자 데뷔 50년
곽아람 기자
입력 2023.09.14.
‘구도(求道)의 춤꾼’으로 불리는 무용수 홍신자(83)에게 “당신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는 무엇이냐” 묻자 “자유”라는 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왜 아니겠는가. 1993년 출간돼 70만부 팔린 그의 산문집 제목은 ‘자유를 위한 변명’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우선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집착이 없어야 하고. 사람들은 보통 물질에 집착한다. 원하는 만큼 물질이 충족되지 않을 때 남과 비교하게 되고 거기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저 사람은 저런 가방을 들었는데, 나는 들지 못했다’ ‘저 사람은 집을 샀는데 나는 사지 못했다’…. 집착이 없고 자유가 없는 ‘나는 나’인 상태가 곧 ‘자유’다.”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의 한 전통 찻집에서 홍신자를 인터뷰했다. 그는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신고 있던 신발을 벗더니 몸짓 자체로 춤이 되었다. /이태경 기자
올해는 홍신자가 뉴욕서 데뷔한 지 50주년 되는 해. 그의 데뷔작 ‘제례(Mourning)’는 우리의 전통적인 곡(哭) 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해 장례 의식(儀式)을 변형해 구성한 춤이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든 이 작품을 보고 객석의 서양인들이 엉엉 울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이 일제히 호평했고, 만 28세에 춤을 시작한 이 늦깎이 무용가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두 주자로 자리했다. ‘죽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유’와 함께 홍신자의 또 다른 화두다.
‘자유를 위한 변명’을 다듬고
죽음에 대한 성찰을 더해
최근 낸 산문집 ‘생의 마지막 날까지’(다산책방)에 홍신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언제나 죽음과 어깨동무하며 친해지는 중이다. 아마 전보다는 훨씬 더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죽음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을, 죽음은 나를 매일 지켜본다.”
그는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이니까. ‘그래, 죽음. 거기 있니? 나의 그림자! 거기 있어? 그래, 알고 있어. 하나야 우린….’ 뭐, 그렇게 하나가 되는 거죠” 하더니 깔깔 웃었다.
70세 때 재혼한 독일인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전(前) 한양대 석좌교수와 함께 5년 전부터 제주 서귀포에서 살고 있는 그는 “‘데드 앤드 다잉(dead and dying) 센터’를 설립하는 것이 말년의 꿈”이라고 했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죽는 것이 이상적인가를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다가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쉽지는 않다. 마지막 가는 길에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 기쁨 등을 바람에 띄우듯 보내버리는 제의적인(ritualistic) 죽음을 사람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물으니 홍신자는 답했다. “죽음이 다가오면 열흘간 서서히 곡기를 끊는다. 그 과정을 주변 사람들이 참여하며 지켜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싶다. 시 낭송이나 영상 관람 같은 것도 포함되겠지만, 핵심은 물 위에 둥둥 떠 모든 걸 다 놓아버리는 연습을 나와 참가자들이 다 같이 해 보는 거다. 죽음은 ‘놓는 것’이니까. 놓지 못하니 다들 악을 쓰다 가는 거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놓아버리는 것이 ‘자연사’라 생각한다.”
홍신자는 평생 시대를 앞서 간 ‘아방가르드’였다. 서른여섯에 “이른 성공이 허무하다. 내가 누군지 깨닫고 싶다”며 인도로 떠났다. 히말라야 오두막에서 해골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으며 살았다. 3년 후 돌아와 한국 사회에 명상과 채식 열풍을 일으켰다. 마흔에 열두 살 연하의 화가와 결혼했고, 임신 7개월의 부른 배를 드러내고 춤을 췄다. 1993년 영구 귀국 후엔 경기도 안성에 머물며 누드 캠프를 열기도 했다. 경외와 찬탄의 대상이자 논란의 중심이기도 한 이 예술가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춤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노화는 곧 성숙”이라고 홍신자는 말한다. 여전히 무대에 선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80이 넘으니 무대와 익숙해졌고, 그 위에서 자유로워졌다. ‘잘해야지’ ‘이거 틀리면 안 되는데’ 같은 두려움이 더 이상 없다.”
“당신에게 춤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팔을 죽 뻗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물으니 홍신자는 답했다. “죽음이 다가오면 열흘간 서서히 곡기를 끊는다. 그 과정을 주변 사람들이 참여하며 지켜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싶다. 시 낭송이나 영상 관람 같은 것도 포함되겠지만, 핵심은 물 위에 둥둥 떠 모든 걸 다 놓아버리는 연습을 나와 참가자들이 다 같이 해 보는 거다. 죽음은 ‘놓는 것’이니까. 놓지 못하니 다들 악을 쓰다 가는 거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놓아버리는 것이 ‘자연사’라 생각한다.”
홍신자는 평생 시대를 앞서 간 ‘아방가르드’였다. 서른여섯에 “이른 성공이 허무하다. 내가 누군지 깨닫고 싶다”며 인도로 떠났다. 히말라야 오두막에서 해골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으며 살았다. 3년 후 돌아와 한국 사회에 명상과 채식 열풍을 일으켰다. 마흔에 열두 살 연하의 화가와 결혼했고, 임신 7개월의 부른 배를 드러내고 춤을 췄다. 1993년 영구 귀국 후엔 경기도 안성에 머물며 누드 캠프를 열기도 했다. 경외와 찬탄의 대상이자 논란의 중심이기도 한 이 예술가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춤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노화는 곧 성숙”이라고 홍신자는 말한다. 여전히 무대에 선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80이 넘으니 무대와 익숙해졌고, 그 위에서 자유로워졌다. ‘잘해야지’ ‘이거 틀리면 안 되는데’ 같은 두려움이 더 이상 없다.”
“당신에게 춤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팔을 죽 뻗어 올리며 말했다.
“춤은 내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자유로운 것 자체다. 내가 서 있는 그 자체가 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