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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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을 읽고 있다.
“1912년 4월, 대서양을 건너 처녀 항해를 하던 타이타닉 호는 빙산을 들이받고 바다에 가라앉았다. 충돌이 있기 훨씬 전부터 지휘관들은 앞에 빙산이 놓여 있다는 여러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로가 정해진 이상 아무도 항로의 방향을 바끄려고 하지 않았다. 그 배가 생존하리라는 확신은 끝이 없었고, 정규 항로로 운행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배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으므로 날마다 신경 써야 할 배의 관리와 승객의 안전은 무시했다. 여기서 ‘가라앉지 않을’ 선박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비유할 수 있다”
요즘 나는 알게 모르게 인간중심의 진화사관(進化史觀)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과연 내가 생각해 온 것이 진정한 ‘진화(進化)’인가?
요즘 함께 보고 있는 논어의 한 구절이다.
<공자 말하기를, “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에 실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고,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나라에 실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문헌만 충분하다면 내가 능히 증거할 수 있다.”(3-9)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 部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나는 공자의 인간관이나 사회관, 특히 깨달음과 현실정치를 융합하려하는 태도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의 복고적 태도에 동조하기 힘들었다.
이 문장에서도 그는 주례(周禮)를 하나의 이상적 준거로 생각하면서, 그 원천인 하례夏禮와 은례殷禮의 문헌들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나의 진화사관(進化史觀)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 떠오르는 말이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고증할 수 있는 문헌들이 없다.
당시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여서 ‘홍익인간’이 지금처럼 인간중심의 자연약탈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홍익만유(弘益萬有)’와 같은 의미다.
진화의 방향을 이처럼 적실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원시로 회귀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인류사의 뿌리를 다시 보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문명의 진로를 새로 열어가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타이타닉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