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困から繁栄へ、さらに共存に向けて(第1部)
2016.08.26
雪雨山共同体の総括企画者の曺喜夫さん。彼は農耕社会から産業化、情報化社会につながる韓国社会の「圧縮成長」が小さい共同体にも表れていると語る
1945年、植民支配から解放されたばかりの韓国はまた戦争という未曾有の試練に直面した。少数ながら残っていた産業施設は破壊され、極限の貧困にあえいだ。とくに農村地域の苦痛は深刻なものだった。干ばつや洪水による慢性的な飢饉に苦しめられ、増え続ける人口が食べる食料の供給は絶対的に不足していた。それに農村の若者たちは仕事をみつけることができず、日雇い労働者になるか都市の貧民として生きていくはめになった。
食っていけ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本能、さらには豊かに暮らしたいという韓国人の意志はいつよりも強くなっていた。独立以降に体験した西欧の、とくにアメリカに代表される豊かさは羨望の対象だった。韓国で一番小さい自治体で、陸地で囲まれている内陸地域の忠清北道(チュンチョンブクト)。なかでも一番の僻地として挙げられる槐山郡(クェサンぐん)沼寿面(ソスミョン)の雪雨山(ヌンビサン)村も例外ではなかった。
1968年、アメリカのメリノール宣教会から派遣された神父たちが槐山家畜組合とモデル牧場を造成した。1974年からは韓牛の肉牛、現物の貸し付け、子牛の契約生産といった農民支援事業を展開し、農民教育院を設立して畜産技術と協同組合の教育を実施した。有機農業や有精卵の生産も開始した。村の裏山の雪雨山(標高546m)の下に広がる25万坪の土地には、林野と草地・畑・養鶏場・お菓子工場・キノコ栽培場など様々な施設がある。養鶏場は狭い場所で工場のように鶏を生産する通常のそれとは明らかに違う。広々としたスペースで風通しが良く、温度と湿度を管理するため常に快適な状態を維持する。底に敷いた稲がらが糞と一緒に自然発酵されるため臭うこともない。広いスペースにオスとメスが自然に暮らしながら生んだ有精卵がほとんどだ。生で食べても香ばしく、黄身の色が鮮明で弾力がある。1万羽以上の産卵鶏が一日に8千~9千もの卵を産む。生産された卵は自然食品・オーガニック食品売場にすべて出荷される。卵を原料とするお菓子も全量販売される。ここで農業を学ぼうとする志願者の数は厳しい審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多い。生活には活力と意欲が溢れる。こうして50年が過ぎていく間、韓国の農村は貧困や低開発から豊かさと高効率を実現した姿へと変化した。
曺喜夫(チョ・ヒブ、66)さんは雪雨山共同体の初期から現場で努力してきた人物。釜山(プサン)の名門である慶南(キョンナム)高校と韓国の中核人材を生んだソウル大学法科大学を卒業した彼は、若い頃様々な経験を経て農村を選んだ。今年は20代に農村生活を始めてからちょうど40年になる年だ。その彼に会って疾風怒濤を連想させる農村のダイナミックな変化と未来について話を聞いてみた。この小さな農村の現在は、かつて韓国社会が経験した貧困、豊かになるための努力、目標の実現と成長痛を縮小したようである。
雪雨山共同体の養鶏施設。 雪雨山(一番後ろ)の下、25万坪規模の林野に位置している
- 今年4月に円仏教の創始100周年記念セミナーに「生命の大転換」というテーマのパネルとして参加したと聞く。21世紀にどのような転換を迎えるという意味なのか。
ここで生活しながらまず感じるのは、深刻な気候変動ですべての命が生存における困難を経験しているという事実だ。今年は大変暑く、雨は降らないし、梅雨はないに等しい。これでは農業だけでなく生命体全体の脅威になるので何か大きな変化が必要だと考えている。今のままだと人類はもちろん他の動物も危機を迎えることになるというのは、すでに1970年のローマクラブ報告書にも登場した内容だ。理論・談論のレベルを超えて大きな変化が必要な時期になってきていると思う。もう手遅れなのかもしれない。それでもできる限りのことはやるべきだと思う。
- 1989年に「人類が自由・平等・進歩をモットーに汗水垂らして実現した今日の文明世界は、物質の豊かさをもたらした反面、人間を抑圧・疎外させ、さらには人類の生存基盤となる地球の生態秩序を毀損・破壊している……。」というハンサリム宣言が発表された。そこから手にしたものと現在の懸案について説明してもらいたい。
1986年にハンサリムが始まっているから、今年はハンサリム設立30周年となる。農民の数は減り続け、農民の力だけでは韓国の農業を守りぬく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判断から、都市の消費者と連携しようと考えたのがハンサリムの始まりだった。都市の方々には安心して食べられる農産物を供給することにもなる。
そこで日本の事例を調べたり、ここ槐山地域の農産物をハンサリムに提供したり、他地域では失敗に終わったヤマギシ式養鶏法を試してみたり……。そうやってハンサリムのスタートから現在にいたるまで一緒に頑張ってきた。
これまでの成果は国内で安全な農産物、農薬や肥料を控えた農産物を大量に生産して普及を拡大したことにあると思う。一般の人が農業に参加できる道を開いたこともあげられる。ハンサリムの都市組織は協同組合の形になっているので、韓国で消費者協同組合を開拓したとも言えるだろう。
ただ、参加組合で実質的な組合員の参加率は低い。組合員は自発的に参加してお金を出し意思決定も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が、ほとんどは普通の購買者にとどまっているので、こうした部分は改善する必要があると思う。景気が悪いのもハンサリムに少し響いているし…。新しい変化が必要な段階に来ている。
曺さんは、雪雨山共同体は農村の貧困、アメリカ宣教会の支援、東西の共同体営農方式、豊かになるための努力など、多くの状況が影響し合いながら今の形になったと話す
雪雨山共同体はどのように始まったのか。
雪雨山共同体はアメリカのメリノール宣教会のデイビス神父の主導で始まった。貧しく飢える農民たちを見た神父は「肉牛」を導入することにした。牛を育てるにはまず青年たちがその方法を学ぶ必要があるので、体系的・組織的にそれを行うために村に協同組合を設立し、牛や資金は協同組合が支援する形になった。信用協同組合は低金利で営農資金を貸し出し、高い利息で苦しんでいた農民たちに活力を吹き込むことになる。
当時韓国にいた牛はすべて「役牛」、つまり農業を行う牛だったのでそれを食べるという認識がなかった。そのため斑点のあるアメリカ牛を導入して肉牛として育てた。この外国牛を韓牛と交配させ品種改良を行ったりもした。こうして作られた肉牛でソウル市役所前にあるプレジデントホテルでの試食会も開いた。販売につなげ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だが。
西洋の神父たちが畜産業を普及させた地域はここだけではない。任実(イムシル、チ・ジョンファン神父)、済州島(チェジュド、イ・シドル牧場)などもある。そちらははるかに規模が大きい。デイビス神父の目的は大きな牧場を作ることよりは農家の人々を教育することにあった。牛はこうやって育てるんですよ、とお手本を見せてあげる感じだった。
その後に開かれた韓日会談の結果で得た日本からの資金により急激な産業化が進められ、若者たちは工場へと離脱した。人手が足りなかったので農業機械が導入され、牛は役牛から肉牛に変わり、牛を育てていた組織・支援組織はハンサリムの肉を加工する工場になった。その50年間で圧縮成長といえるほど大変な変化があった。
雪雨山共同体の養鶏施設。広々としたスペースをオスとメスが自由に歩き回れるように配慮した
- 養鶏法は日本のヤマギシ会の影響を受けたのに、農場の運営方式は全く違う。
ヤマギシ会の農場は共同体の種類ではキブツに分類される。これには私有という概念がない。生産も商品も個人のものでなく、分けるという概念もない。皆が分け合って使うことになっている。またイスラエルに、生産は共同で、消費は個人でするモシャブという方式もある。
山岸巳代蔵(1901~61)さんは陽明学系で、知行合一を主張していた。知識は余り重要ではない。肝心なのは実践だ。日本の共同主義思想を謳い、農業も重視していた偉大な思想家といえる。山岸語録を勉強したこともあるが、大衆化するには無理があると判断して韓国に合った新しい共同体を作ろうと決心した。
世界的にも共同体を成しているのは修道院と、農業共同体としてはアメリカにアーミッシュが残っているし、原始的に暮らす共同体がいくつかあるが、ほとんどがなくなっている。人間とは何か、生命とは何かといった研究もたくさん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国家が革命により取り組んだこともあるがすべて失敗に終わった。人間の本性と合わないのは長続きしないようだ。ヤマギシ会もうまく行かなかった。個人が自由を選ぶことを徹底的に保障した上ですべてを共有するという思想に最初は同意できるかもしれないが、共同体を出て行く人にはそれまでの寄与分を支給しない。だからいかさま集団に見られることもある。
個人の自由、選択の自由を保障しながらも、共有して協力しながら生きていけるのか。非常に難しいことである。釈迦でもイエスでも誰だっていい。人生について深く考えてたくさん悩んだ人の意見に耳を傾けつつ、頑張りながらもそれにこだわったり執着したり埋もれたりせず、常に1歩下がって自分自身を眺める。他人に左右される人生を生きる必要もない。自分に自信があれば他人の視線など気にしなくなる。
(第2部に続く)
対談:コリアネット ウィ・テックァン記者
編集:コリアネット チャン・ヨジョン記者
写真:コリアネット ウィ・テックァン記者、カナン農君学校
翻訳:イム・ユジン
whan23@korea.kr
===
빈곤에서 번영으로, 더욱 공존을 향해 (제 1 부)
2016.08.26
설우산 공동체의 총괄 기획자인 소키오씨. 그는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정보화사회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이 작은 공동체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1945년 식민지배에서 해방된지 얼마 안된 한국은 또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시련에 직면했다. 소수이면서 남아 있던 산업시설은 파괴되어 극한의 빈곤에 굶주렸다. 특히 농촌지역의 고통은 심각한 것이었다. 가뭄과 홍수로 인한 만성 기근으로 고통받고 계속 증가하는 인구가 먹는 식량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농촌 젊은이들은 일을 찾지 못했고, 일자리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본능, 심지어는 풍부하게 살고 싶다는 한국인의 의지는 언제보다 강해지고 있었다. 독립 이후 체험한 서구의,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풍요로움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지자체로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지역 충청북도.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승지로 꼽히는 권산군 늪수면(소수면)의 눈비산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8년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서 파견된 신부들이 가미야마 가축 조합과 모델 목장을 조성했다. 1974년부터는 한우 육우, 현물 대출, 종아리 계약생산 등 농민지원사업을 전개하고 농민교육원을 설립하여 축산기술과 협동조합 교육을 실시했다. 유기농업과 유정란 생산도 시작되었다. 마을의 뒷산의 설우산(고도 546m) 아래에 펼쳐지는 25만평의 토지에는, 하야시노와 초지·밭·양계장·과자 공장·버섯 재배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가금류 농장은 좁은 장소에서 공장처럼 닭을 생산하는 정상적인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넓은 공간에서 통풍이 좋고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기 위해 항상 편안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바닥에 깔린 쌀가루가 대변과 함께 자연 발효되기 때문에 냄새도 없다. 넓은 공간에 수컷과 암컷이 자연스럽게 살면서 낳은 유정란이 대부분이다. 생으로 먹어도 고소하고 황신색이 선명하고 탄력이 있다. 1만 마리 이상의 산란닭이 하루에 8천~9천개의 계란을 낳는다. 생산된 계란은 자연식품·오가닉 식품 매장에 모두 출하된다. 계란을 원료로 하는 과자도 전량 판매된다. 여기서 농업을 배우려는 지원자의 수는 엄격한 심사를 해야 할 정도로 많다. 생활에는 활력과 의욕이 넘친다. 이렇게 50년이 지나가는 동안 한국의 농촌은 빈곤과 저개발에서 풍요로움과 고효율을 실현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조희부(조희부, 66)씨는 설우산 공동체 초기부터 현장에서 노력해 온 인물. 부산 명문인 경남 고등학교와 한국의 핵심 인재를 낳은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어린 시절 다양한 경험을 거쳐 농촌을 택했다. 올해는 20대에 농촌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그 그를 만나 질풍 분황을 연상시키는 농촌의 역동적인 변화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작은 농촌의 현재는 한때 한국사회가 경험한 빈곤, 풍요로워지기 위한 노력, 목표 실현과 성장통을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설우산 공동체의 가금류 시설. 설우산(가장 뒤) 아래 25만평 규모의 임야에 위치하고 있다
- 올해 4월 엔불교의 창시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 '생명의 대전환'이라는 테마 패널로 참여했다고 들었다. 21세기에 어떠한 전환을 맞이한다는 의미인가.
여기서 생활하면서 먼저 느끼는 것은 심각한 기후변화로 모든 생명이 생존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매우 덥고 비는 내리지 않으며 장마는 없다. 이것은 농업뿐만 아니라 생명체 전체의 위협이 되므로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물론 다른 동물도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1970년 로마클럽 보고서에도 등장한 내용이다. 이론·담론의 수준을 넘어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능한 한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1989년에 “인류가 자유·평등·진보를 모토로 땀수 늘려 실현한 오늘의 문명세계는 물질의 풍요로움을 가져온 반면 인간을 억압·소외시켜 심지어 인류의 생존 기반이 된다 지구의 생태질서를 훼손·파괴하고 있다… 거기에서 손에 넣은 것과 현재의 현안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1986년 한살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올해는 한살림 설립 30주년이 된다. 농민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농민의 힘만으로는 한국의 농업을 지키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도시 소비자와 연계하려고 생각한 것이 한살림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분들에게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공급하게 된다.
거기서 일본의 사례를 조사하거나, 여기 가마야마 지역의 농산물을 한살림에 제공하거나, 다른 지역에서는 실패에 끝난 야마기시식 양계법을 시험해 보거나… 그렇게 한살림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함께 노력해 왔다.
지금까지의 성과는 국내에서 안전한 농산물, 농약과 비료를 앞둔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해 보급을 확대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이 농업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도 들 수 있다. 한살림의 도시조직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되어 있으므로 한국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을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참가조합에서 실질적인 조합원의 참가율은 낮다. 조합원은 자발적으로 참가해 돈을 내고 의사결정도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보통 구매자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가 나쁜 것도 한살림에 조금 울리고 있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단계에 오고 있다.
조씨는 설우산 공동체는 농촌의 빈곤, 미국 선교회의 지원, 동서의 공동체영농 방식, 풍부해지기 위한 노력 등 많은 상황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설우산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설우산 공동체는 미국 메리놀 선교회 데이비스 신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가난하게 굶주리는 농민들을 본 신부는 ‘육우’를 도입하기로 했다. 소를 키우려면 우선 청년들이 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에, 체계적·조직적으로 그것을 실시하기 위해서 마을에 협동조합을 설립해, 소나 자금은 협동조합이 지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 신용협동조합은 저금리로 영농자금을 대출해 높은 이자로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당시 한국에 있던 소는 모두 ‘역소’, 즉 농업을 하는 소였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반점이 있는 미국소를 도입하여 육우로 키웠다. 이 외국소를 한우와 교배시켜 품종 개량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육우로 서울시청 앞에 있는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시식회도 열렸다. 판매에 연결할 수 없었지만.
서양의 신부들이 축산업을 보급시킨 지역은 여기만이 아니다. 임실(임실, 지종환 신부), 제주도(채주도, 이시돌 목장) 등도 있다. 그쪽은 훨씬 규모가 크다. 데이비스 신부의 목적은 큰 목장을 만드는 것보다는 농가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소는 이렇게 키워요, 라고 표본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그 후 열린 한일회담의 결과로 얻은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에 의해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어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이탈했다. 인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농업기계가 도입되어 소는 역소에서 육우로 바뀌고, 소를 키우고 있던 조직·지원 조직은 한살림의 고기를 가공하는 공장이 되었다. 그 50년간 압축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설우산 공동체의 가금류 시설. 넓은 공간을 수컷과 암컷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양계법은 일본 야마기시회의 영향을 받았는데 농장 운영 방식은 전혀 다르다.
야마기시회의 농장은 공동체의 종류에서는 키부츠로 분류된다. 이것에는 사유라는 개념이 없다. 생산도 상품도 개인의 것이 아니고, 나누는 개념도 없다. 모두가 나누어 사용하게 되어 있다. 또 이스라엘에 생산은 공동으로 소비는 개인으로 하는 모샤브라는 방식도 있다.
야마기시 巳代蔵(1901~61)씨는 양명학계로, 지행합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지식은 너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본의 공동주의 사상을 구가하고, 농업도 중시하고 있던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야마기시 어록을 공부한 적도 있지만 대중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한국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결심했다.
세계적으로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수도원과, 농업 공동체로서는 미국에 아미쉬가 남아 있고, 원시적으로 사는 공동체가 몇개인가 있지만, 대부분이 없어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연구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가 혁명에 의해 임한 적도 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 같다. 야마기시회는 잘 가지 않았다. 개인이 자유를 선택하는 것을 철저하게 보장하고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사상에 처음에는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동체를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동안의 기여분을 지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집단에서 볼 수 있다.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일이다. 석가라도 예수라도 누구라도 좋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한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열심히 하면서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집착하거나 묻히지 않고, 항상 한 걸음 내려 자신을 바라본다. 타인에 좌우되는 인생을 살 필요도 없다. 자신에게 자신이 있으면 타인의 시선 등 신경쓰지 않게 된다.
(제2부에 계속된다)
대담:코리아넷 위태광 기자
편집:코리아넷 장요정 기자
사진:코리아넷 위태관 기자, 가나안 농군학교
번역: 임유진
whan23@korea.k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