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1

소설보다 재미있는 '오메들'의 생애구술사 - 오마이뉴스

소설보다 재미있는 '오메들'의 생애구술사 - 오마이뉴스

소설보다 재미있는 '오메들'의 생애구술사
[서평] 우록리 할매들 이야기, 최현숙 지음 '할매의 탄생'
19.10.29 
이정민(jl3264)

"미물(메밀)을 푹푹 씻어가, 일러 건져가, 말려가, 한푼 살짝 태워가, 까불러가, 뜨슨 물에 씻어가, 깨끗하게 빠사갖고 해야 되거든예."

대구 달성군 우록리에 사는 여든둘 조순이 할매가 미물묵을 만드는 과정이다. 웬만한 글쟁이도 흉내내기 힘든 말의 리듬이 들리는 것 같다. 할매들의 말은 살아 있다. '다글다글' 돈을 긁어모으고, '포실포실' 비가 내리고, '불룩불룩'한 성질이 미운가 하면, 기억은 '아롬아롬'하다. 늦깎이 한글 공부는 또 어떤가.

"마 콩나물 물 주드끼(주듯이) 그래 생각코 기양 하는 거라. 콩나물 기를 때 물을 주마, 물이 다 빠져나오는가 싶어도 콩나물은 크거든예. 거랑 똑같다 싶어예. 다 잊어뿌는 거 같아도 하나씩 남는 거가 있더라꼬예. 그래가 아는 글자가 하나씩 생기니 그기 좋고."

'콩나물 물 주드끼' 한글을 공부하는 우록리 여섯 할매들의 삶을 구술한 책이 <할매의 탄생>이다. 생애구술사란 '과거의 경험을 기억을 통해서 현재로 불러와서 구술자와 역사가가 대화를 통해서 쓰는 역사'다.



▲ 할매의 탄생- 우록리 할매들의 분투하는 생애 구술사. 글항아리. 2019. "오메"는 전라도 사투리로는 "어머나"라는 감탄사지만 경상도 사투리로는 "엄마"를 뜻한다.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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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에서 아흔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깡촌 할매들이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근현대사 속에서 '땅을 숨구고' 자식을 길러낸 이야기에는 "고생 마이 했어예" 한 문장에는 담기지 않는 아픔이 있다.


"빨개이한테 밥해주믄 낮에는 저기서 와서 두드리 패제, 안 해주면 빨개이들이 두드리 패제, 이래가지고 애묵었다 카데. 낮에는 퍼렇고 밤 되마 뻘겋고."

뻘겋고 퍼런, 이념의 대립에서 오는 폭력을 몸으로 겪은 할매들의 말을 읽으니 극작가 차범석의 희곡 '산불'이 겹친다. 국군에게 밥을 해냈다고 죽이고 빨갱이에게 아부했다고 경을 친다며 마을 사람들이 탄식하는 장면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 곽판이 할매는 "처자들도 군대 뽑아 간다꼬 훈련을 마이 받았다"라고 회상한다. "간호 그런 거도 받았지만 총 쏘고 칼로 찌르고 그런 거도 다 받았다"라며, 할매는 "나무로 총이랑 칼이랑 깎아가 했지"라고 군사 훈련을 부연한다.

농촌 여성들까지 군사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가가 주해를 덧붙였듯 관련 구술을 확보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생애구술사의 가치는 개인의 삶을 통해 미처 알려지지 않았거나 소외된 이웃의 역사를 드러내고 밝히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에는 이삼십 대 여성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출산 이야기도 담겨 있다.

"가가 유월 초사흗날 거꾸로 나와가 애를 묵었어예. 머리 안 나오고 다리 먼저 나오고 궁디 나오고. 그라느라 내도 아도 죽는다 캐가 우리 동서들이 울고불고했어예. …… 산파가 오데 있십니까? 거때는 죽어도 집에 놔두는데, 오새 같으믄 벌써 병원에 실어갔을 거고마."

조산사 없는 출산과 산모 사망은 내가 일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오지 문제인 줄만 알았는데 불과 2세대 전 한국 여성 생식보건도 그에 못지않게 열악했던 것이다. 책을 내려놓고 저녁밥 짓는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남들 다 아는 사실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신다.

새삼 옛 여성들이 느꼈을 출산의 공포가 엄습하며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근현대사의 역경을 몸으로 부딪친 할매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을 갈고 모를 심는다.

"죽은 사람은 죽어도 산 사람은 모를 숨궈야(심어야) 하는 거라."

할매들의 힘은 땅을 일구는 데서 나온다. 할매들이 제일 고마워하는 대상은 영감도 자식도 아니고 땅이다. "몸뚱아리 하나 말고는 암것도 없는 사람인데 애쓴 만큼 내주고, 힘들다 밉다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해마다 주고 또 주는" 존재가 땅이다.

생태적 관점은 이미 땅과 더불어 식민 역사와 전쟁, 가난과 개발을 겪어낸 그녀들의 삶에 녹아 있다. 구술생애사를 통해 우록리 할매들은 고난을 이겨내고 희망을 일군 여성 농부이자 어머니로, 한국 근현대사의 주체이자 전달자로 '탄생'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