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3강 『노자』와 무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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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노자』와 무위 1

◆ 『노자』와 무위


▲ 노자 해석의 다양성

원래 처음에 예고했던 것과는 조금 순서가 바뀌었죠. 바뀐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을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뒤에 것을 얘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고, 여기에 대한 이해가 사실은 노자 철학의 이해 전반과 완전히 엇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좀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먼저 하고 나면, 나중에 원래 하려고 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많은 다른 얘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목이 좀 특이하죠. 마키아벨리즘인가, 아나키즘인가? 제목을 잘 뽑아요 원래 제가. 그런데 좀 낯설죠. 예를 들면 동아시아 사상에서 마키아벨리라고 이른 바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노자가 아니라 한비자죠.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흔히 무시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한비자의 정치술적인 사상이 도가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을 깔고 나왔다라는 식의 얘기는 철학사에서 흔히 하는 얘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무위를 해석할 때와 한비자의 무위를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달리 해석해요. 바로 그 부분에 관한 고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테고요.

또 하나는 아나키즘이라는 용어인데요. 아나키즘이라는 말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 들어오는 바람에, 상당히 논의에 대한 헌탁이 큰 데요. 원래는 희랍어에서 온거죠. 권위의 중심이 되는,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없다는 뜻인데요.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 아나키즘이 최근에 부활하고 있죠. 동아시아 근대 사상을 이야기할 때도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고요.

특히 노자와 관련해서 아나키즘은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였던 진독수(천두슈 , 陳獨秀)가 노자 사상을 지칭하면서 노자에 들어있는 아나키즘 요소 때문에 젊은이들을 혁명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비판하는 글이 「신청년」에 개재되기도 했다고 해요. 제가 원 텍스트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요.

크릴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 무위에 대한 해석의 기조는 20세기 초반 거휘로부터 오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아니면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게 했던 어떤 주석적인 근거가 그 이전 문헌들 속에 있던가. 분명히 그런 방식의 해석의 기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고대 텍스트로서의 노자, 그것만 갖고 애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누가적 해석을 하든 도가적 해석을 하든 전혀 불가능해요.


▲ 무위의 본래 의미

자 그러면 아주 쉬운 얘기부터 시작을 해보죠. 보통 무위라고 하는 말을 無爲, 쉬우니까 한자로 써볼게요. 그냥 풀면 함이 없다인데요. 그런데 실제 위라고 하는 말은 두가지의 뜻을 갖고 있죠. 하다, 그리고 되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무위란 말을 그대로 텍스트의 맥락속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좋은데 우리의 뇌리 속에는 두 글자가 첨가되어 반드시 같이 들어와요.

自然 이 말이 들어오지 않아도 이 말을 끼고 해석을 하는거죠.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무위자연이란 말이 같이 나오는 텍스트는 후안시대 철학자 왕충의 책에서 비로소 나오고 한 대, 전한 시대 문헌 어디에도 이 두 가지가 같이 등장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해요.

그런데 더 재미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붙기 쉬워요. 과거 전통 속에서 무위자연이란 말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데 지금 우리들이 자연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를 붙여 읽으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自然 이 말이 서양의 nature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비롯되는 문제에요. 自然이라는 말이 무엇과 대립되느냐 文明. 이것과 대립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죠.

그래서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는 노자는 문명비판, 누가로 대변되는 이른 바 예교주의자들 혹은 문명론자들에 대해서 자연을 옹호하는 자연주의자라고 거의 도식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족보가 없는 해석이에요.

오늘 이런 개념에 대한 의미 맥락들을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될텐데요. 自然과 文明 이 말은 기본적으로 연속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알고 있는 맹자의 사단설을 생각해보세요. 왕필이 노자를 해석하면서 그와 같은 기조가 그대로 들어와요.

사단설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풀이하면 단초라고 하는데요. 본래 맹자가 그런 말을 쓸 때의 용어 방식은 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아요. 식물적인 은유로 하는거에요.

말하자면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 혹은 식물에 비유한다면 내 씨앗 속에 도덕적인 마음이 활성화 된다거나, 보통 발한다고 하죠. 그렇게 될 수 있는 장치가 내 몸속에 유전자처럼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거에요.

그것이 적절한 상황, 환경, 체험에 의해서 적절하게 물이 들어가고 햇빛을 받고 할 때 싹이 점점 커 나가는 것처럼 자라나는 것이에요.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당위에 의해서 혹은 억지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발화하듯이 내 몸속에 드리워져 있는 도덕적인 프로그램이 주변 환경에 따라서 적절하게 발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아요.

그렇게 이루어진 인륜적 질서가 바로 문명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반하는 것입니까 자연에 순하는 것입니까. 유가학자들이 꿈꾸었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인력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회적 질서에 구현하려고 했던 곳 바로 공맹유학전통이에요.

순자에 들어가서 상당히 인위적인 개입, 제도적인 간섭과 같은 요소들이 많이 등장해요. 공맹전통에 대해서 신조가들이 그렇게 옹호했던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던 것이고 이런 점은 최근에 진화론적인 용어로 해석할 때 훨씬 더 부드럽고 쉽게 해석됩니다. 이것은 잠시 접기로 하고요.

무위라고 하는 말은 노자에서 두 가지 용어를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도와 관련해 서술할 때의 무위를 빼놓고 인간과 사회와 관련해서 무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경우는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이 의미를 잘 곱씹어 보세요. 과연 이런 요소가 있는지.

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해도 결국 무위는 자기가 하고자 했던 것을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의미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생각이 될겁니다.

爲 ― 則無不治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효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데요. 다른 아주 비견한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결국 싸움의 끝은 화해잖아요. 부부간에 힘든 것이 아침에 싸워도 저녁에 꼭 얼굴을 봐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화해를 해요. 저희 집 사람도 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누가 잘못을 했는지 따져보자 하면서 그 날 일부터 십년 전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 얘기까지 다 나와요. 그러니까 부부간 싸움에서 합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방법을 바꿨어요 한동안. 막 뭐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미안한 표정만 지으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화해를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게 한동안은 써먹혔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말을 안 하면 ‘너 불만 있냐?’ 그러죠. 이제 약발이 안되는 거죠. 여기에서 무위라는 것이, 계속 말을 통해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자. 그 origin을 따져봐서 니 잘못이면 니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내가 받아주면 되고 그렇게 해서 해소되던 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안되요. 사실 연애할 때는 됐는데 결혼하니까 바로 안 되더라구요.

이 말은 무위라는 글자가 황제가 정무를 보는 용상, 의자 뒤에 금박으로 붙어 있다고 했죠. 누구의 행위인가를 바로 직결해 해석할 때, 그 이후에 사대부들이 쓰는 해석이라든가 다양한 해석을 통해서 예를 들면 불교의 열반을 해석할 때 무위라는 용어를 쓰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죠.

하지만 선진 텍스트에서 무위는 특히 노자에서 무위는 이것이 대표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반문명의 대명사가 되고요. 따라서 노자는 자연주의자이고 문명대신에 환경을 인위대신에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바로 20세기 동양철학 해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서구철학의 반대급부로 도식적으로 해석해온데 있어요. 저쪽은 악이고 우리는 선이에요. 이와 같은 사고를 조장했던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중체서용론이고 동도서기론이에요.

그러니까 기술문명, 과학문명이 결국 1, 2차 대전 혹은 식민지 지배와 같은 폭력을 낳았다면 한국에서 말하는 도 중국에서 말하는 체 이런 것들은 우위의 것이다. 따라서 중체서용론, 동도서기론에서 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근대 철학적 용어로 따진다면 주체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해요. 거기에 온갖 것을 더하면 내용물이 공허합니다 사실. 추상적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정치적인 용어로 특화시켰을 때는 그것이 주권이고 주체고, 민족이 되는거죠. 나중에 그걸로 엮어내려고 했던 것이요.

그걸 뒤집었던 이택후가 서체중용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사람만 독특해요. 그런데 서체중용론이라고 하는 이택후의 말은 일반적인 중체서용론의 논리와 거꾸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이 똑같아요. 왜냐하면 이택후라는 사람이 중국 정신 혹은 중국 문명의 핵심이 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선진시대의 무위라는 말이 <노자>에만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노자>하면 무위, 무위자연이 너무 특화되다 보니까 마치 노자이외에는 무위를 이야기 하지 않은 것처럼, 분명히 텍스트 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데 문제가 있죠.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와 같은 커다란 지형도를 살펴봄으로써 <노자>의 무위가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 무위의 기원

1페이지를 보시면 거기 유가문헌에서도 몇 번씩 나와요. 하지만 특별히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들을 해왔죠. 그런데 현대 무위 연구에서 독특한 분수령을 이룬 사람이 H.G. 크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시카고 대학에 있던 사람인데요.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지 않은 <What is Taoism>라는 책에 논문들을 묶어서 냈는데요.

이 사람에 의하면 거기 한 번 보세요. 글 가운데 무위의 기원에 관하여 라는 글을 썼어요. 이것이 중국이 아닌 외국에서 나온 황로학과 관련한 최초의 논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무위가 <노자>에는 12번 <장자>에는 56번이 나오는데요. <노자>는 50%, <장자>는 32%가 통치와 관련한 맥락에서 쓰입니다. <장자>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특이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장자 네 편에는 무위라는 말이 세 번 밖에 안나와요. 그래서 <장자>의 무위 개념이 아주 독특하고 장자가 말하는 무위개념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유의미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충분히 현대사회에서도 계승할 수 있는 개념내용들을 갖고 있다면 노자의 무위 개념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저항해야할 형식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크릴은 이와 같은 빈도수를 통해서 유학 쪽에서는 무위와 관한 관심이나 활용이 적었던 반면 오히려 노장 쪽에 자주 빈출하는 것을 보죠. 크릴이 이 논문을 쓸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구조가 본래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라고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말이죠. 그런데 크릴은 그 설을 따지지 않고 고사변파의 목소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노자>가 기원전 3세기경에 편집돼 문헌이라는 것 것을 지지해요. 따라서 이 사람 성격에 의하면 <장자>가 <노자>보다 앞선 책이에요. 그 논리에 따르면 장자 속에는 굉장히 관조적인 내용들이 풍부하죠. 분명히 엄존합니다. 따라서 훨씬 관조적인 지형도에서 <노자>는 특별한 어떤 관점을 특화시켜서 나온 도가라고 하는 해석을 이 사람은 지지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위라고 하는 개념의 기원은 <노자>나 <장자>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라 신불해(申不害) 라고 하는 이른바 형명법술(刑名法術) 혹은 형명지술(形名之術). 형명법술은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고요. 형명지술을 달리 말하자면 신하를 다스리기 위한 방법이에요. 형명지술은 통치술이면서 요즘 식으로 하면 부하직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형명지술을 이야기했던 신불해로부터 그 이후에 이른바 주술적 무위라고 할 수 있는, 통치술로서의 무위라는 개념이 발화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속에서 한나라 무제 때 이른바 과거제도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는 것이 크릴이란 사람의 주된 논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과거제도라는 것이 유학에서 주장하는 제도처럼 알고 있죠.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써. 하지만 유학이 주장했던 선발제도는 천거제에요. 유학은 천거제죠. 그것을 나쁜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얘길 하는데요. 달리 말하면 아는 사람을 추천해서 쓰는거에요. 그럼 뭡니까. 끈이론이죠.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하는거에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끈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을 쓸 수가 없죠. 모르는 사람을 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거혈량이라고 하잖아요. 거혈량. 지혜롭고 도덕적인 사람.

그리고 충분히 그 위인됨을 확인해봤기 때문에 따라서 저 사람을 공직에 앉혀놓아도 딴짓할 리가 없다. 이것이 기본적인 기반이에요.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 따라서 조절할 수도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모르는 사람은 통제 못하죠.

법관은 모르는 사람을 통제해야 한다에 기초해 있어요. 그러니까 선발하는 거죠. 그리고 상호경쟁과 감시, 이것이 한비자의 신하통치술의 핵심입니다. 요즘에 그런 책이 많이 나오잖아요. 처세에 관한 것. 처세에 관한 것이 한편으로는 필요성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런데 갈수록 처세의 문제가 도덕적인 처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처세와 관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무한경쟁의 틀 속에서 처세로 귀결되다 보니까, 사실 전통사회와 우리의 문화적인 풍토와 윤리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그것이 완전히 나쁜 말로 들리는데요. 전통사회에서는 문화적인 기제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중국 역대, 조선조 역대 관료들의 부패라고 하는 문제는 있죠. 하지만 그것은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오히려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지 않습니까.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것처럼.

그래서 유학이라는 학문의 진정한 정신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반 시민윤리 차원이라고 하기보다는 공직자 윤리에요. 부패방지를 위한 심신수양이지, 우리는 심신수양할 기회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기도 버겁단 말이죠. 심지어.

그래도 술 마실 때는 즐거워야하는데 그래서 폭탄주라는 문화 웬만하면 익숙하시죠. 요즘은 기업에서들 잘 안마시고 그러는데요. 폭탄주 문화를 퍼뜨린 것이 군인집단하고 법조계 그것이 경제계까지 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폭탄주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소맥은 괜찮더라구요. 제일 많이 먹었던 것이 열다섯 잔까지 먹어봤는데 아침에 부담이 적어요. 양주랑 먹을 때 비해서. 저는 독주가 맞는 것 같아요. 술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닭갈비나 꼼장어 놓고서 맥주 마시고 소주 마실 때는 친구랑 편한 사람들이랑 매일 공자왈 맹자왈 이야기하니까 즐겁단 말이에요. 그런데 폭탄주 마시고 좋은 술 마시는 자리는 그 술자리는 거의 정치이거나 아부해야하고 잘 보여야 하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 자리죠. 사실은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결혼하면 잠자는 자리도 힘들죠.. 잠자는 시간까지 합쳐서 스트레스 속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심신수양? 불가능하죠. 주어진 일이나 어떻게 편하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같은 사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있죠. 땡땡이. 땡땡이가 좀 있어야 하는데. 장자가 말하는 소요라는 것이 당시 서민들에게 적용된다면 요즘말로 땡땡이에요. 너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땡땡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해야 해요. 우리의 삶의 입장에서 고전을 읽어야지요.. 조금 나아간 얘기네요.


▲ 무위를 이해하는 네 가지 방식

3페이지 보면 에임스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선진 제자백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용어가 무위이고 특히 순자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위는 군주의 덕이 드러나는 행위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또 확인해 볼 겁니다.

더군다나 슬린저랜드라는 사람은 무위를 주제로 해서 책 한권을 썼어요. 이 사람이 뭐라고 평가를 하냐면 자기수양과 관련되는 공통의 개념적 은유이자 정신적 이상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상당히 기존의 해석과 가까운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공통의 용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논어에서부터 모든 텍스트들에는 거의 다 무위가 들어 있고 예를 들면 <여씨춘추전>에는 무위가 안 나와요. 이렇게 한 두 문헌을 빼놓고는 대개 다 무위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무위가 같은 뜻이겠느냐 다르다는 것이죠. 노자의 무위말고 훨씬 다양한 무위의 세계가 있는데 선진시대로부터 한 대까지만 제한하더라도 대략 네 가지 정도 의미의 무위를 추출할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천이라든가 도와 같은 우주론이라든가 형이상학을 제외하고 인간과 관련한 분야에서 얘기할 때만 네 가지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주술, 두 번째는 소요, 세 번째는 양신, 네 번째는 덕화입니다. 대략 출전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죠.

주술이라는 표현은 회남자의 한 편명입니다. 이것은 에임스라는 사람이 그 편을 번역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사용했던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해요. 이것은 뭐라고 번역했냐면 Art of Rulership. 군주 노릇하는 예술, 총체적이라는 것이죠. 주술은 굉장히 폭넓습니다. 이 논의 속에서 크게 보면 양신이 주술에도 포함이 되죠. 하지만 양신이 반드시 주술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빼긴 했습니다. 노자에서는 주술과 양신이 대표적입니다. 천과 도에 관한 서술적 용법 빼놓고는 주술과 양신이 가장 기조적으로 커요. 하지만 본 텍스트에서는 주술쪽이라면, 하상공 주석에서 두 가지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부분은 양신과 주술입니다.

그리고 소요는 <장자> 소요에 나오는 포현입니다. 그래서 소요 방식의 무위개념이 다른 것과 차별되고 독특합니다.

그리고 양신은 나중에 도교 계열로 이어져서 굉장히 신비주의화 되고 다양한 방식의 갈래들이 나옵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하자면 명상술이에요. 다만 우주론 혹은 기론 그 다음에 당시의 의학사상 등과 긴밀한 연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양신이라는 용어를 쓴 겁니다. 즉 정신을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그래서 무위가 정신을 기르는 행태를 표현하는 말 혹은 그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도 나옵니다. 장자에서도.

그다음에 덕화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가적인 개념입니다. 유가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군주의 덕이 온 천하에 실현되는 것 그것은 곧 치의 상태를, 치천하를 이룬 거죠. 그것이 곧 덕화고 그와 관련된 것을 무위라고 표현합니다. 논어에도 나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고, 왕필이 <노자>를 해석할 때 무위 개념은 바로 그것과 연결하는데 있어요.


▲ 함석헌의 무위 해석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또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4페이지를 보시면 먼저 두 가지를 묶었는데요. 제가 원래대로 하면 주술과 양신을 묶는 것이 훨씬 좋아요. 그런데 왜 주술과 소요를 묶었느냐 하면 대비를 위해서입니다.
부제가 무엇이냐면 현실과 초월의 이중주라고 했죠. 무위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 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어요. 그것의 당시의 정치의 지형도를 반영하고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에요. 현재 우리 학계에서도 두 가지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두 분의 주장을 올려놓았는데요.

어떤 분은 모든 문명적 요소의 부정과 자유방임이라고 무위를 해석해요. 이것이 바로 기조입니다. 이 기조를 우리나라에 퍼뜨린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요. 함석헌 선생님도 본인이 독창적으로 했다기 보다 톨스토이가 노자를 번역까지 하려 했었고 꽤 많은 글을 썼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이 톨스토이 평화사상에 심취했었죠.

톨스토이마저도 노자의 무위를 극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쪽을 연결시켰고 특히 함석헌 선생님이 그런 예를 들었죠. 50년대 초반, 일제 때 동원전쟁 때문에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 산에 조림사업을 하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산림전문가를 초빙을 했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공항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자연을,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let it be 라고 답했다고 하죠.

그래서 도올 선생님은 노자와 20세기 강의할 때 let it be 음악 틀면서 노래까지 했잖아요. let it be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냅둬유. 간섭하지 마라, 건드리지마라 라고 하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사회에서는 노장사상하면 자연주의, 환경, 생태 쪽으로 연결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계기였던 거죠. 노자나 장자라는 텍스트 속에 환경에 관한 고민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우리에게 소중한 노자나 장자는 함석헌 선생이라는 얘기에요. 얼마나 파급력있습니까. 제가 책 몇 권 쓰는 것보다 함석헌 선생이 한 번 얘기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힘을 가진 담론이라고 하는 거죠.

노자의 원래 텍스트가 이렇고 저렇다는 학적인 것보다 실제로 우리 삶속에서 노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노자가 무슨 진리를 갖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자에 빙자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거죠.

그 이야기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 같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노자를 통해서 환경을 아껴야되고 그것은 간섭하지 않는 데 있고, 또 마찬가지로 독재가 국민의 삶에 간섭하지 않을 때 그들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무위 개념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간섭과 그리고 치자, 정권의 국민에 대한 불간섭. 즉 자유와 민주죠. 달리 말하면 우파담론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담론의 대명사 속에서 역할을 해온거죠. 오늘날에 그 지형도가 깨지고 나니까 약간 복잡해졌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세화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오히려 다석 유영모,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선생님 같은 이런 분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계승할만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보수주의자들이다.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요즘 말하는 보수는 뭘까요. 참 알쏭달쏭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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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3_02.htm

◆ 주술로서의 무위 개념 이해


▲ 주술의 무위

바로 네 가지로 들어가도록 하죠. 이 부분이 굉장히 재미난 동양철학적인 감수성이 아니면, 서구적인 철학에서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라거나 에피소드에 가까운데요. 사실 동양철학은 딱딱한 논리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적법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야지 문학과의 연계성도 쉽게 확보할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면 텍스트를 이것은 철학책이다라고 규정하고 읽으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회자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다른 데로 빠지면 안되니까 계속 가죠.

먼저 주술의 무위부터 보죠. 주술의 무위는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형명법술을 보통 원리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형이라고 하는 글자가 아주 독특한데요. 이 形 (형)은 보통 모양 (형)이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이것은 보통 刑 과 혼용되거든요.

刑 (형)은 뭐에요. 형벌이죠. 그래서 이것은 옛날에 춘향전 할 때마다 나오는 칼 쓰고 있는 것 있죠. 그거거든요. 그래서 이 形(형) 자는 인간의 신체라는 뜻도 들어있어요. 그래서 形神 (형신) 혹은 무협지 보면 神形(신형)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단 말이에요. 이것이 몸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形神(형신), 神形(신형)이죠.

그런데 이 형명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크릴에 따르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면 퍼포먼스 (performance) 수행이란 뜻입니다. 수행. 어떤 목적이 있는 혹은 의도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것 그래서 形(형)은 사실은 인간의 신체라고 하는 것도 되지만 특정한 목적을 따라서 인간의 신체를 활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행위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는요.

刑(형) 이 형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요. 이 形(형) 이라는 글자가 形名이라고 할 때는 이른바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혹은 군주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신하들이 행해야하는 모든 활동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따라서 규범화 된 코드화된 행동들을 지칭하는 말이 形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形爲 (형위) 라고 구분하자고 한 분도 있었습니다. 논문으로 나온 것은 아니고 사석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런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가를 대표하는 말이 유위라면 도가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장자적인 소요의 무위가 있고 그 다음에 형위가 있죠. 우리는 지금 이런 방식으로 텍스트를 해석하지는 않죠.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관점을 다른 것이에요.

예를 들면 법가들에게 있어서는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하고 마누라하고 어떻게 무슨 말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다만 그 드러난 행동, 드러난 행동이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부합하는 행동이냐 아니냐만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 부합하는 말이 바로 形 이고 따라서 거기에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刑을 가하는 것이에요.

形名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지난번에도 제가 간략하게 얘기했지만요. 어떤 군주가 있어요. 특히 요즘 무협TV라든가 중화TV 이런 데 보면 선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죠. 무협드라마, 무협영화.

거기 보면 회의하는 장면을 잘 보세요. 회의하는 장면을 잘 보시면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신하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으면 무슨 사안이 생긴다 하면, 이 형명지술에 의하면 군주는 무언, 말 할 필요가 없어요. 또 어떤 의견을 제출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을 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무지라고 하죠. 無知(무지). 사실 무지라고 하는 말은 안다라는 뜻보다는 판단이라는 뜻에 가까워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어떤 아이디어도 제출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에요. 무위하는 것이죠.

그러면 지난번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제가 어떤 나라의 군주에요. 신하들이 쫙 있는데 갑자기 옆나라에서 쳐들어온다 라고 사태가 일어났어요. 그럼 이 문제를 어이할꼬? 하면 A라고 하는 문신이 제가 그 옆 나라에 가서 저 쪽을 출병시켜서 지난번에 우리와의 맹약을 지켜서 배후를 치도록 하면 저들이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장군인 A라는 사람이 나서서 제가 5,000의 군사를 이끌고 어디를 가서 성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또 어떤 사람이 저에게 3,000만 주신다면 뒤로 돌아가서 기습공격을 해서 저들을 무너뜨리겠습니다.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거기에 맞는 관직과 직책을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名(명)이에요, 名. 그래서 어떠어떠한 직무를 담당한 누구라고 해서 군대의 출정을 할 때 장군에게 온갖 긴 명칭을 줘서 내보내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名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리고 적을 격투했다, 이 사신은 갔다가 왔는데 설득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나라와 우리나라가 더 사이가 벌어졌다. 그러면 形과 名이 수행한 결과가 일치하지 않죠. 그러면 벌을 주고 오히려 관계가 돈독해지고 저쪽에서 출병을 제 때하는 바람에 이쪽에서 빨리 회군하게 됐어요. 그 때에 장군 A라는 사람이 가서 딱 지키고 있었고, B라는 사람이 가서 급습을 해서 엄청난 타격을 줘서 오히려 저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우리가 배상금을 받게 됐다. 커다란 승리, 전과를 올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수행결과와(形) 그 사람이 본래 제안했던(名) 내용, 직무수행, 직무와 비교를 해서 形 과 名 양자가 일치하면 상을 주고 불일치하면 벌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形名은 상벌이에요. 바로 가장 기본적인 형명지술로 이야기되는 것이 주술입니다.

오른쪽 6페이지에 보면 레오.S. 장이라고 하는 분이 황제사경이라고 하는 책을 연구하면서 이 주술개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했는데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경쟁국가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천하에 대한 유일한 지배에 이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며, 모든 사람의 평안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마련된 정책들’

이것 전체가 주술이에요. 이 속에서 중요한 것, 그 속에 무위라는 개념이 들어간 까닭이 무엇이냐면 이 모든 행동들을 할 때 이 사람은 권력의 중심으로서 가만히 있는 것이지,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올바른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적절한 전략들’
그 다음에 세 번째.
‘정치 투쟁에서 군주의 지위를 강화하고 관료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기술 또는 전술’ 이것이 특히 형명지술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 다음 네 번째.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충분한 정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 훈련 또는 수양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 이것은 바로 양신과 바로 연결되는 부분이에요.

주술이라고 하는 개념은 가장 커다란 개념이에요. 하지만 주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말하면, 군주가 천하를 통치하고 유지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모든 술수와 전략, 정책들을 통칭하는 거라면 그러한 주술, 군주로서의 테크닉을 수행하는 과정에 군주의 행동이 드러나는 양식을 지칭하는 표현은 바로 무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무위라고 하는 개념이 주술이라고 하는 이른 바 군주 통치술에 행위 방식으로써의 개념, 그것이 특히 노자나 한비자, 신불해와 같은 사상가들의 책 속에 드러나는데 5페이지 보면 박스 속에 들어 있는 문장이 있죠.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신불해라고 하는 사람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요. 거기에 나오는 중요한 구절이에요.
【통치자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으니, 거울은 무위하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통치자는 균형을 잡는 저울과 같으니, 저울은 무위하지만 무거움과 가벼움이 저절로 얻어진다. 통치자가 이러한 방법에 따라 다스리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일삼는 것이 없게 된다. 일삼음이 없음에도 천하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
거기에서 일삼음이 없음이 무사, 이것은 무위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유를 보세요. 거울이라고 하는 비유가 나오고 저울이라고 하는 비유가 나오죠.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뭐합니까? 거울은 가만히 있는데 그냥 비춰지는 것이죠. 또 저울이 뭘 합니까? 이것은 양팔 저울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양쪽에 매다는 그것에 의해서 균형이 잡히는 것이지 저울 중심인 자기는 가만히 있어요. 그러니까 무위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왜 거울과 저울이 나오느냐하면요. 이것은 이제 양신과도 관련된 내용인데요. 여기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고 하는 표현, 그것이 본문에서는 미오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고대 일반적인 용어로 따지자면 好惡(호오)입니다.

好惡(호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보통 감정이라고 번역하지만 고대 용어로 해석하자면 情(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철학 연구할 때 가장 핵심적인 화두가 무엇이냐면 성도 아니고 리도 아니고 정이에요. 정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인 틀 속에서 자꾸 이것을 감정이라고 해석하다보니까 오해하게 되는데요. 저 문장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을 한 번 곱씹어 보세요.

이것은 인체와도 관련되어있고 천지하고도 관련되어 있고 인간의 삶, 인간관계, 정치, 예술, 모든 것하고 직결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본성의 문제를 따질 때 성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목은 인성론이지만 고대어에서는 정이 그 핵심 내용이에요.

‘통치자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으니 거울은 무위하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것은 好惡로 바꾸어서 해석해도 똑같습니다. 이 문장의 맥락을 이해할 때 아주 쉬운 상황은 군주가 신하에게 보고를 받는 상황에서 생각하시면 되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용례, 용법들을 소개해드릴게요. 첫 번째로 是非(시비)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보통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고 해석을 하죠. 그렇죠? 특히 유가에서 말하는 시비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이라고 해석을 해요. 그런데 이것은 틀린 해석이에요.

그렇게만 해석할 수가 없고요. 특히 맹자가 말하는 사단(四端)에서도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드러나 있죠. 이 시비지심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이렇게 해석을 하죠. 그런데 이것은 틀린 해석이에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시비지심은 사양지심 수오지심과 더불어 내 몸 속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즉 나의 감정기제가 발화하는, 드러나는, 표현되는 프로그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하는 시비지심의 뜻은 무엇이냐면 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저 행동은 옳아 저 행동은 잘못됐어 라고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마음이 아니라 감정이에요, 감정.

예를 들어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노무현 정부 때 한미FTA를 실시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와아 하고 박수치며 ‘옳소!’하죠. 그게 是에요. 농민들, 축산업하는 분들, 요즘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하면 축산업하는 분들 어떻겠어요. 조류독감 때문에 난리 나있는데 하면서 벌써부터 이것이 非에요. 기분이 어때요. ‘이 더러운 세상, 아니다!’ 하는 마음이에요.

시비지심이라고 하는 것이 옳고 그름의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맹자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수천만인이 나에게 옳다하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 돌아봐서 내가 옳다면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하는 방식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따져보니까 ‘아, 이것은 진리야, 이런 것이 아니라 신념, 감정, 합리적 판단 이런 것들이 드러선 감정 전체를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법가로 가면 그런 심리적 근거에 관한 것들은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아까 형명을 얘기했지만 그 수행한 행동의 결과形가 그 사람이 본래 맡았던 직무名 와 일치한다 그러면 是에요. 非 는 불일치한다에요. 따라서 是非는 굉장히 건조하고 행정적인 용어에요.
법가에서 말하는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국가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 군주의 자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 수행한, 제안된 내용이 일치하느냐 아니냐 불일치의 여부만 판정하는 것, 그것이 옳고 그름이에요. 사실 대부분의 행정 관료라든가 정치인들은 그와 같은 기준에 의해서 사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대 텍스트를 읽을 때 글자가 같다고 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어야 되고 그런 부분에서 읽어야 되요.

그런데 이 是非(시비)라고 하는 것, 이것도 정입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모든 힘과 관련된 형태들은 전부 다 정으로 귀결되는데 그 정의 가장 근원적인 두 가지 방식, 양태는 호와 오에요. 긍정적인 방식의 감정과(好), 부정적인 방식의 감정(惡).

내가 어떤 사태에 대해서 싫다 그르다 옳다 맞다 이런 식으로 할 때 내 몸속에서 움직이는 가장 쉬운 것은 뭡니까. 싫은 것이에요. 미운 것이에요. (惡) 그리고 좋은 것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好)

나중에 노자를 해석할 때 왕필이 이 용어 (好惡)를 쓰면서 그와 같이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칠정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감정의 다양한 기제들과 연결되어있지만 그 모든 감정기제를 딱 두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면 좋은 것과 싫은 것이에요. 단순하잖아요.

인간의 행동의 동인이 바로 이 호에 있다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유가는 저 호의 감정을 조절해야 된다, 금욕해야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야 될 때 화를 내는 것이죠. 화 내야 할 때 화 안 내면 바보되죠.

쉽게 생각해보세요. 제가 지나가는 데 누가 제 머리를 딱 때려요. ‘야 반갑다’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데 딱 봤더니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러면 맞은 것이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지만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반가운 감정이 되죠.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뒤에서 딱 때렸을 때 가만히 있으면 ‘병신’ 하면서 또 때려요. 딱 때렸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 인상을 팍 쓰면서 마치 싸울 기세로 호르몬이 분비가 되겠죠. 화를 내야지만 ‘아 쟤도 때리면 꿈틀거리는구나 아니면 잘못하면 맞겠구나’ 하면서 조심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진화론에서 흔히 하는 단순한 얘기지 않습니까. 이것이 더 원초적으로는 공포의 감정이 가장 근원적이다 라고 얘기를 할 때, 惡(오)와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것처럼 문화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호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에요. 그래서 민심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정치를 할 때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 하면 당연히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추진력을 얻을 수 없죠.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되잖습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좋은 것인데 사흘 후에 나쁜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군주는 돌파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특히 호오가 공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 호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가 사실은 유가가 가장 골몰했던 부분이에요. 그리고 이 호호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되느냐 리의 기준이 아니라 인의 기준에서. 이것이 바로 맹자철학의 핵심이죠.

처음에 양양을 만났을 때 왜 하필이면 利를 얘기하십니까 국가가 부강하고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나쁠 게 무엇이 있어요. 그런데 그 배후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 호호의 기제가 지금 대한민국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고 싫음의 기제가 바로 뭐에 의해서 움직입니까? 돈에 의해서죠.

그것이 내 생명에 해가 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利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곤란한 것이죠. 인의 원리에서 호오를 따질 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사회에 대한 비전이 유가에는 있었던 것이에요. 그런데 도가에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군주의 통치를 안정시킨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요. 물론 일부 다른 편들에서 세부적인 다른 내용이 들어있긴 하지만 근원적인 목적이 거기 있기 때문에 저는 노자철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 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통치자는 균형을 잡는 저울과 같으니, 저울은 무위하지만 무거움과 가벼움이 저절로 얻어진다.’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 특히 신하들 가운데서 이 사람은 내가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했던 비록 내가 황제지만 친구에요. 그런데 능력이 떨어져요.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능력은 출중해요. 그런데 이 사람을 중용하고 다른 사람을 가볍게 대해요.

또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저쪽 지방에서 엄청난 홍수가 나서 국고를 이용해서 당장 백성들에게 식량을 내줘야 하는데 무언가 다른 일 때문에 다른 걸 해야 되요. 경중을 따질 줄 아는 것. 이런 부분들에 대한 판단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에요. 굉장히 복잡한 사회세력들,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사회는 굉장히 다원화 되어있기 때문에 어떠한 정책을 결정할 때 이것을 몰고 나가려면, 달리 말해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는 찬성하는 쪽이 있으면 반대하는 쪽이 있어요. 그러면 통치자는 양쪽 가운데를 저울질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저울질해야 하는데 신불해 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는 거울이나 저울의 비유는 군주의 안정이고 통치권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기준이에요. 즉 리라고 하는 것,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내 몸 지키기, 내 나라 지키기 내 정권 지키기의 기준이 되죠.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주술입니다.


▲ 無名(무명)의 의미

그런데 이 기제가 훨씬 복잡해지면서 어떻게 발달하냐면요. 우리가 흔히 형명지술과 관련해서 이것이 발전해 나간 것이 무엇이냐면 治 인데 法治. 法治가 是非로 가는 길이에요. 인치가 아니라 법치를 한다고 하는 것은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한비자의 법가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해서 합리주의의 원료처럼 해석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사회도 조선조에 당쟁논쟁이라고 해서 그런 것들과 많이 연결시켜서 인치가 아닌 법치를 해야한다고 하는 방식의 논조의 근거로 한비자를 한동안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부분적으로 우리는 法治를 지향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노자나 한비자와 같은 계열에서 주장하는 법치라고 하면 철저하게 군주의 신하에 대한 조절이에요. 컨트롤(control)하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내가 하면 안되고 다른 사람을 대리로 하거나 법에 의해서 해야 해요. 그래서 법을 명문화 시켜 놓으면 아까 형명을 비교 했을 때 이것이 불일치하는 경우에 어떤 경우에는 사형 어떤 경우에는 곤장 몇 대.

그러니까 내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거해서 다스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면피에요. ‘네 이놈 너는 죽여야 되겠다.’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읊어봐라’ 그러면 법관이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벌을 해야됩니다.

이것은 <영웅>에서도 나오죠. 이연걸이 암살을 하러 갔지만 결국에는 진시황에게 천하를 주잖아요. 그 때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끔찍했는데요. 자기가 죽이지 않았던 까닭이 맨마지막에 사막에서 양조위에게 바닥에 쓰인 글자를 펴 보면서 이것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참 재미난 기제에요.

이 사람이 조나라 출신이에요. 원래는 사기에 나오는 현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번안해서 만든 것인데요. 그 구도를 보면 헤겔 변증법적인 구도를 갖고 있어요. 이연걸은 <영웅>에서 이름이 無名(무명)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어요. 도는 무명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도를 잡고 흔드는 황제는 무명이에요. 그렇죠? 그래서 황제는 시호만 가져요. 어릴 때 이름은 요즘은 정조에 대해서 이산 이름 부르지 조선시대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성은 없고 이름만 있는 사람이 있죠, 동아시아에. 일본 천황이 그렇잖아요. 그것도 다른 전통 때문에 그런데요. 원래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도 이거나 황제인 경우에요. 그런데 이 무명이라고 하는 사람은 조나라 출신이고 자기 부모가 진나라에 의해서 죽었던 말이에요. 자기 가족 전체가.

그런데 이 사람이 결국에는 칼을 찌르는데 배에 안 찌르고 옆구리로 들어갔잖아요. 피한 것인지 아니면 옆으로 새게 찌른 것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이 사람이 천하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나요.

무명을 달리 말하면 구조로 본다면 이연걸이라는 사람이 천하를 준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네가 이제 천하의 패자다. 그것을 21세기 초반에 영화로 만든 장예모의 천하는 그 때 동아시아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중화주의의 대표적인 영화가 되는 것인데요.

무명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알거든요. 무명은 기본적으로 이름 없는, 규정할 수 없는 황제 한 사람에게만 해당돼요. 또 도나 천에 대해서만요. 그러니까 그 영화는 끔찍한 영화고 노자에 나오는 무명이라는 용어를 기가 막히게 푼 것이죠. 무명이 무슨 뜻이냐면 모든 이름을 다 가질 수 있으면서 모든 이름을 줄 수 있는 것이에요.

무명은 천지지시오 유명은 만물지모라(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황제는 무명이면서 유명이에요. 하지만 어떤 이름은 아니죠. 황제에게 잘 보이면 너는 재상, 너는 이조판서, 너는 병조판서, 너는 천민, 너는 무엇이라고 황제는 이름을 부여하는 자에요. 그 이름을 부여하는 자가 이름을 가지면 어떻게 되요. 동격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이 없어야 되죠.

그러니까 유무라고 하는 것을 존재의 의미 복잡하게 얘기하지 말고, 실제 쉬운 일상 상황 속에서 생각해본다면 노자의 무위라는 것은 무위지술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듯이 군주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한 총체적인 모든 것, 그 것을 한 대에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고 하는 것이죠.

군주의 건강, 신체적인 건강까지 그래서 천하의 화합은 물론이고 황제라고 하는 신체 속의 화합까지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황제내경의 기본 정신이에요.

왜 황제와 고대 유명한 신하들이 대화를 하는가 양생을 이야기하는 가 그것은 몸을 다스리는 원리와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가 동일한 원리에 근거했다라고 하는 전제에 있어요. 그래서 황제내경은 의학서이면서 동시에 정치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황로학의 정신이고요.

주술이라고 하는 말은 쉽게 말하면 주인 노릇하는 기술이에요. 그 주인도 내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 정권, 황실 이런 데 있어요. 노자에 나온 것처럼 무위이 무불위(無爲易 無不爲) 위무이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어야 되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되요.

무위가 그렇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행위적 차원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술수와 전략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정권이 안정되죠. 당연히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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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2강 『노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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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노자』에 관하여

◆ 도가에 관하여


▲ 도가

두 번째 얘기로 가죠. 그러면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 이렇게 텍스트를 읽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가. 도가를 말할 때 유가를 반대했고, 인의를 부정하고. 도가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나오는 말이에요.

노자라는 텍스트는 한대의 불법 속에서 도가계열에 속하는 문헌이고, 허무(虛無), 인순(因循), 무위(無爲)를 주창하고 이걸 통해서 “여러 신하가 한꺼번에 몰려와도 각각의 능력이 저절로 드러나게 한다.”

혹시 <영웅>이라는 영화 보셨나요. 진시황이 저 안에 있고 신하들이 떼거지로 와서 “폐하, 아니되옵니다.”라고 다 같이 외치죠. 그런 모습들이 바로 이런 거예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통령이 있고 재무부 장관이 있고. 물론 그때도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오늘날 생각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라서 힘이 세긴 하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해야지만 볼 수 있어요.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는 건 물론이고 내 가족까지도 죽어요. 말 한마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죠.

노자를 읽는 사람의 심경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 영화를 보면서 섭섭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 영화를 통해 노자를 읽는데 도움이 돼요.

제가 사실 노자를 이렇게 해석을 안 하다가 언제 이런 해석을 하게 됐냐면 2000년도에 중국엘 처음 갔어요. 중국 가면 전부 다 자금성 같은 걸 보지 않습니까? 자금성을 봐도 별 느낌은 없었는데, 천당공원이라는델 가면 커다란 재단이 있고 가운데에 돌이 있어요. 거기서 말을 하면 벽이 있는데도 다 들리는 특수한 양식이거든요.

사방이 뻥 뚫려서, 원나라 수도를 가면 호구산이라고 해서 해발 39m를 올라가면 온 사방이 다 보이거든요. 제가 기차를 타고, 오후 네 시쯤 탔나, 해질 때까지 산을 한 번도 못 봤어요. 밤새도록 달리다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열한 시쯤 도착했는데, 산을 한 번도 못 봤어요.

대여섯 시간동안 산을 한 번도 못 본 나라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깃발 들고 있는데 황제라는 종류의 인간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고 어땠을까 하는 느낌이 백분의 일 정도 느낀 거예요. 노자라는 책을 제왕들이 주로 읽었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러니까 텍스트가 전혀 달리 느껴져요.

똑같은 단어지만 마음속에 와닿는 느낌이 다르다는 거죠. 그런 느낌을 <영웅>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고. <황후화>라는 영화를 보면, 자식과 아버지가 온 가족이 다 적 아닙니까? 적과의 동침이에요. 이 사람들에게 장생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죠.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비정한 책입니까? 비정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책이라고 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는 가까울 겁니다. 도가라는 문헌군이 전부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에 들어있는 상당수가 그에 가까워요.

그리고 황제가 신하들을 만나서 무슨 얘길 하겠어요? 술 마시면 다른 얘길 할 수도 있겠지만, 신하들과 만나서 나라를 다스리는 시국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겠습니까? 뻔하잖습니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말처럼 당연히 그렇게 그 책을 쓴 사람들이 그렇게 했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일단 그것이 일차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하는 걸 인정하고 읽어야 된다는 거죠.

『한서·예문지』 에서도 도가는, 人君南面之術(인군남면지술) 즉, 남면이라고 하는 것은, 군주는 남쪽을 향합니다. 신하들은 북쪽을 향해요. 원래는 군주는 서면하고 신하는 동면하는 거예요. 이게 고대 신정적 질서가 깨지면서 등장한 건데, 이 얘기하면 길어지는데 잠깐 할까요?

중국 고대 신화를 얘기하면서 특히 대만 “중국 신화는 서양과 달리 태음 신화다.” lunar mythology. 즉 달 중심의 신화, 음 중심의 신화. 저는 사실 동조하지 않는데.

이런 논의를 하게 된 까닭은, 중국에서 태양신 숭배 흔적이 많아요. 특히 요 임금, 순 임금 전부 다 태양신의 이름이란 연구가 많이 나와 있거든요. 그 흔적이, 조금 나이 드신 분은 알겠지만. 조(朝). 이게 무슨 뜻이죠? 아침 조라고 하죠. 이거 언제 하죠? 80년대까지 초중고 생활하신 분들은 다 아실 텐데 월요일 가면 조례하지 않습니까. 그 조례에 조 자잖아요. 원래 조례는 해가 뜨는 시간에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해맞이 조 자예요.

원래 황제 밑에서 일하는 신하들은 언제 출근하는 거냐? 아홉 시까지 출근하는 게 아니라 해뜨기 전에 출근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의 다 아침을 먹어요.

왜 군주가 서면하고 신하가 동면하느냐.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해 뜨는 시간에 제가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가요. 거울 들고. 고대 백제나 신라를 봐도 그렇지만 동경이 있잖아요. 왜 있는지를 생각해보셔야죠. 자기 얼굴 보려고? 뭐 볼 게 있다고.

해가 동쪽에서 뜨고 있을 때, 제가 해를 등지고 올라가면 눈 부셔서 못 봅니다. 신이예요, 신.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장치가 대단해요. 진짜 그런 건지 속설인지는 모르겠는데, 심리학 하는 사람한테 배운 게 있어요.

악수를 한번 해볼까요. 이렇게 해서 여자 손도 한번 만져보고. 관찰력이 예리하신 분들은 보시는데. 정치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악수를 할 때는, 반드시? 두 손으로 할 때도 있죠, 다시. 손바닥을 절대로 위로 향하게 하지 않는답니다. 손이 인간의 심리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하는데, 특히 뽕티(메를로 뽕티)는 악수에 엄청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손바닥이 아래로 가는 것, 즉 너는 내 안에 있다. 너는 내 아래라는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제스츄어랍니다. 실제로 제가 관찰을 해봤어요. 평소에 권위가 있다는 분들을 봤는데 텔레비전에서도 관찰해보고. 잘 안 보이는데 제가 확인했던 것들은 대부분 정말 그렇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다가 잡는 순간 돌려요. 이게 진짜 심리학이 밝혀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간들. 고대인은 지금처럼 다양한 장치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게 예식이잖습니까. 특히 몸을 통해서. 황제는 말을 안 해요. 저처럼 목소리가 되면 얘기하겠지만. 찢어지는 목소리, 애기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권위가 서겠습니까? 아, 얘기가 자꾸 새면 안 되는데.

그래서 해맞이 조자가 원래 그런 뜻이에요. 요임금, 순임금 전부 태양신인데 나중에 이와 같은 신정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과정을, 시(市)와 연결시켜요. 시가 원래 사통발달의 거리를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복종하는 부족이 물건을 바치고 하사하는 일이 벌어진 곳이 시예요. 동문에는 무기창고가 있었고 예를 들면 은나라 주왕이 도망간 데가 동문이고, 거기에 무기창고가 있고 바깥에 정원이 있고 엄청나게 높은 망루가 있고 거기에 시녀가 살고 있고. 그 앞이 세예요. 여긴 굉장히 신성한 장소예요.

이와 같은 신정적 질서에 의해서 정치적 정통성을 가지지 못 했던 사람들이 이 시를 공격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죄인들을 참수하는 거예요. 더러운 피를 뿌리는 거죠. 조직적으로 거기를 죽이는 거죠. 나중에 조정이 오고. 고대 정치사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태양신화를 강하게 얘기하다보니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태양신화를 연구했던 사람들이 중근동에서 태양신화가 만들어져서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따라서 중국문명도 중근동문명이 전파돼서 문명이 이룩됐다는 식의 문명전파설의 강력한 근거가 태양신화설.

두의미같은 사람이 반박하는 이유는 중국 문화의 독자성을 얘기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황하 얘기나 여러 가지를 얘기하면서. 학문이라는 게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 특히 중국 학자는 굉장히 정치적이에요. 학문의 생명입니다.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토론을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그 가운데서도 내부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치고 들어가는 얘기가 많으니까요.

하지만 일단 인문학은 정치적인 거예요. 인간의 삶 자체가 정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한. 다만 어느 쪽 정치를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죠. 이렇게 표현하니까 이상한데, 억압받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느냐 아니면 가지고 있는데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 편에 서느냐로 표현하는 게 더 정당하겠죠.


▲ 노자에 관하여

이렇게 본다면, 노자라고 하는 문헌이 분류됐던 도가에 대한 공통된 목소리도 기본적으로 정치담론이란 게 드러납니다. 노자는 어떠냐? 한참 후에 조선조에서도 노자에 대한 주석서가 나와 있어요. 노자가 이단서라고 주희가 엄청나게 공격한 다음에도 다들 주석서에다, 읽지 말아야 할 책이지만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내가 주석을 한다면서 몇 번 주석을 하는 게 있어요.

이분들이 뭐라고 하느냐. 특히 박세당이라는 분은 『신주도덕경』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도서관장을 하다가 정치에 중용되지 못 했던 사람인데 오히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성인의 법에 합치하지는 않지만, 즉 공자가 말하는 공맹지도와는 다르지만 그 의도가 역시 수기치인에 있다.

이건 도덕수행론이 아닙니다. 수기치인을 대만계열의 현대학자들이 단순히 도덕수행이라고 하는데, 치인이라는 즉 나를 닦는다는 것은 나가서 올바르게 하기 위해 자기를 닦는 거예요. 도덕수행이 내가 윤리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게 아니라,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일반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크게 나쁜 짓 할 일도 없고 기회도 없어요.

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은 순식간에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높아졌죠. 예를 들면 은행창구 직원도 10억 빼돌릴 수 있잖아요. 과거에는 그런 시스템이 발달돼 있지 않으니까 지위가 높아져야지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정도는 엄청난 거죠.

내가 잘못 생각하고 한 마디 잘못 말하고 잘못 정치를 하는 한 엄청납니다. 중국의 인구가 몇 명입니까? 그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존망이 나의 판단에 따라 이렇게 휘둘리고 저렇게 휘둘릴 수 있는 사람에게 강력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유가가 요구했던 게 바로 그런 것이거든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격이 떨어지는 해석이에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이 돼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았을 때 끼치는 해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공손하고 말 없는 교화’를 행할 수 있었고, 밑으로 신하된 자는 ‘청정한 정치’를 행할 수 있었다.” 이 속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수양에 관한 얘기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목적인 수기치인에 있고 결국은 군주가 다스리고 신하가 올바로 정치를 행하기 위해서. 동일한 계보에 있는 얘기라고 할 수 있겠죠.

홍석주라는 분을 조금 더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욕심을 줄임으로써 신명을 기르고 다투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순응하며 다툼을 줄이고 살육을 없앰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말했으니” 앞의 얘기랑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똑같은 말이에요. 즉, 이건 치서라는 얘기입니다. 통치에 관한 책이라는 거죠.


▲ 노자와 기독교

자, 그랬던 노자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적 방식의 학문을 배우면서 위치 이탈을 하게 돼요. 사실 곡절이 많습니다. 노자와 장자라는 책은 환영받지 않았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왜 환영받게 됐느냐? 기독교 종교사랑 관련이 있어요.

노자와 관련된 해석서나 주석서를 내는 분들이 세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대학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고, 또 하나는 기독교 계통 사상가에서 꽤 많이 나오죠. 함석헌 선생님도 그렇고 류연모 선생님도 그렇고 이은주 목사님의 책도 있죠. 신학자 가운데서 노자와 관련한 책을 쓰거나 번역서를 내는 뿐이 꽤 있어요. 왜 그럴까.

그냥 개인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 역사가 있는 거예요. 처음 마틴 호리치를 통해서 이 사람들은 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즉, 최고 상류층 지배층을 대동시키면 전체를 대동시킬 수 있다는 포부를 갖고 쥬이스트들이 노력을 하죠.

나중에 로마 교황청과 싸우고 나서 이 세력이 약화됩니다. 19세기 중반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요. 이 사람들은 전도 방식이 달라요. 노방전도예요. 예수 선도사들은 굉장히 정치적이에요. 큰 걸 노려요.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서 멘투맨으로. 사람대사람으로 만나서 직접 전도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유학을 통해서 했던 것이 실패했다, 그런데 민간을 지배했던 건 불교와 도교였거든요.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던 민간신앙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차원에서 노자나 장자 텍스트가 원류니까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읽다보니까 왕필이 보이고. 굉장히 철학적으로 보이잖습니까, 다른 사상가에 비해서.

하상공과 왕필을 비교해보면, 하상공이 크게 해석되지 않았던 이유가 도교와 연결되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도교에서만 연구했거든요. 왕필은 철학 쪽에서. 최근에는 그런 벽이 허물어졌지만.

그래서 기독교사상가들이 도가에 대한 호감이 높아요. 유가를 상당히 비판하지만 도가나 노자에 대해선 상당히 호의적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쪽을 연구했던 서구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필드워크를 했어요. 중국 남부 쪽에서 실제 도교의 생산을 한 장 연구를 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신비주의의 틀로 노자를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많고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훨씬 더 이해가 쉬운. 유교는 굉장히 합리적이죠, 그에 비하면. 그런 부분이 상당히 결합하기 쉬었고 더구나 큰 기폭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조셉 미담이라고 하는 중국 과학사상사를 연구했던 사람이 특히 두 가지 역할을 했는데, 하나는 도가 계열의 사상가로부터 이른바 객관적 자연을 관찰하는 눈이 생겼고 거기서 중국의 과학이 태동했다는 주장. 그 다음에 페미니즘적인 사고를 연결시켜서. 두 가지가 한국 사회에 퍼지게 된 계기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지형도를 갖게 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는 박이문 선생님의 『노장사상』.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나 독자들이 노장사상에 관심을 갖게 환기시키는 데 촉발제가 된 책이에요. 동양사상을 전공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닙니다.

이런 마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이 구축한 또 다른 마당이 있었기 때문에 김용옥 선생님이 와서 강의를 했을 때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와서 개인적인 요인만으로 그렇게 파급력이 큰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런 전사가 있었기 때문에 김용옥 선생과 같은 방식이 굉장히. 80년대가 목소리를 높일 만한 때였잖습니까? 목소리가 독특하고 높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김용옥 선생 본인이 탁월한 부분도 있었지만 시대적으로 잘 맞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특히 우리 식의 동양 사상이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 70년대에 움트기 시작해서 80년대에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그걸 우리가 보통 386문화라고 하잖아요. 386이라는 것이 특정한 나이대라기 보다는, 그런 현상을 지칭하는 문화표현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을 보면, 거의 서양책과 차이가 없어요. 노자와 장자 텍스트로 사상을 얘기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때깔만 동양이지 서양서적과 비교해 봐도 차이가 없다는 거죠.

저는 그런 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다만 그것이 노자의 본래 목소리라고 까지 강하게 주장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하다보면 누군가 종합해서 새로운 사상가가 나올 수도 있겠죠. 제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라는 모습은 길어야 100년 밖에 안 됐어요. 좀 더 가면 조선조에 걸치고.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강의 경우는, 송대부터 태동해서 조선시대를 거쳤던 방식의 여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담론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하게 생각을 해볼까요? 기독교 사상가가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을 대단한 의미가 있는 진리가 있는 것처럼 대한다. 기독교 계통에 있는 분들 중에 그런 분 보셨나요? 지금도 별로 없죠. 그런데 왜 그 시기에 가능했느냐? 이건, 조선시대의 지식인들, 노자나 장자의 주석을 달았던 분들이 노자나 장자의 텍스트를 대했던 태도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함석헌 선생님이 노자 강의를 하면서 쓴 글들을 보면, 이 분은 기독교인이지만 상당히 선비 정서를 갖고 있고 그래서 오히려 이단에 대해서도 자유분방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성리학 논쟁에 지치다보니까 거기에 미비한 부분들을 노자나 장자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처럼, 노자나 장자를 통해서 유가에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기독교에 없는 부분이 없으니까 혹은 대중에게 소통이 잘 되는 언어니까, 하는 방식으로 이용된다는 거죠.

진정한 뜻, 의도가 중요한 거고 텍스트는 그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모습을 저는 상당히 많이 느꼈거든요. 경전의 권위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그걸 통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얼마나 어려운 개념이 나오는가를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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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2_02.htm

◆ 최초의 하이퍼텍스트인 『노자』


▲ 새로 발굴된 노자

마지막으로 조금 더 이야기한다면, 새로 발굴된 노자들이 있어요. 1973년도에 비단으로 된, 두루마기라고 합니다, 비단은 두루마기이기 때문에 둘둘 말렸다가 쫙 펼쳐져요. 그래서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편장구조가 없고 을본에 약간의 편장구조를 구분하기 위한 약간의 표시가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도덕경의 81장이다, 그래서 요즘도 한동안 그런 논문 쓰는 분들이 있어요. 노자가 왜 81장인가. 송나라가 별의별 얘기들. 그건 노자가 문헌화될 때, 초창기 지나서 전한 말 후한 초기의 상수왕, 참이 사상이 엄청나게 유행했어요. 그래서 황제내경 텍스트도 81편으로 이뤄졌고, 노자도 81편으로 이뤄졌어요. 완전수라는 거죠.

또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는데, 93년도에 오늘날 노자의 5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죽간.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책 하면 이런 걸 생각하잖아요. 이게 책이에요. 이게 발견될 때 가죽은 이미 헤어져서 뭉치로 발견됐어요. 순서가 어떤지 몰라요.

물질성의 제한 때문에, 책이야 페이지를 넘기면서 글을 쓸 수 있죠 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얼마나 많이 쓸 수 있겠어요. 제한돼 있죠. 그래서 표현이 간략한 게 좋습니다.

사실 이런 기록들이 생긴 건, 원래는 다 구전입니다. 말로 하는 거예요. 말로하는 것이었다가 흐릿해지면서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고 해서 문헌으로 만든 건데. 따라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편장의 구조가 생긴 겁니다.

논어의 경우는, 짧막 짧막한 대화니까 어디서 맺고 끝어지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절과 어떤 구절을 연결시키냐 아니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자는? 더하죠. 고유명사가 하나도 안 나오고 전부 다 일반명사로 나오는데 예를 들면, 이런 대나무 쪽편들이 막 섞였다가 하나씩 뽑아서 책을 1장부터 다시 배치한단 말이에요. 그럼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변화가 커요. 가장 커다란 변화 중 하나가, 비단 책에 발견된 건데, 우리는 도덕경이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덕도경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책을 딱 펼쳤을 때, 도가도비상도가 아니라 상덕부덕시유덕. 이런 구절부터 먼저 읽는다고 하면 굉장히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와 닿죠. 노자라는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거예요.

그런 변화가 한나라 때 일어났어요. 덕도경에서 도덕경으로. 달리 말하면,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의 텍스트 접근법이 어느 순간에 상당히 형이상학적이고 우주발생적인 체계를 갖춰가면서 노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의 생산물이 나중에 왕필에게도 흘러가고 하상공에도 흘러가고. 우리는 한 대에 다시 태동하게 된 노자를 바라보는 그 이전의 시각을 몇 군데서 확인해볼 수 있죠.

한비자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다음에 여기 제시했던 것. 이건 노학사에서 별로 다루지 않는 부분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와 같은 역사적 일화들과 더불어서 노자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가 나중에 바뀐다. 특히 한 무제 때 도가 계열의 텍스트들이 이른바 정치와의 매개관계, 유착관계가 덜어져 나가면서 훨씬 더 추상화됐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이 왜 중요하냐.

노자가 아니라 한나라 때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따라서 우리가 보는 노자는 지금 20세기의 시각 그리고 왕필이라는 시각이 엮여서 노자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노자를 보는 수많은 방식 중에서 하나의 방식이 지금 보편화된 거예요. 왜? 철학이라고 하는 이름 때문에. 역사를 하는 분만 하더라도 노자를 그렇게 읽지 않아요.

그 다음에 곽점에서 발굴이 될 때, 같이 발굴된 문헌이 몇 개 있는데 대부분의 문헌들이 이른바 자사와 맹자 계열의 문헌군이 발견됐어요. 『태일생수』(太一生水)라는 문헌과 노자계열의 문헌이라고 추정되는 노자 외에는 다 유가 문헌이었어요.

그럼 이건 뭐냐는 거죠? 그 때가 대략 BC4세기 말, 3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이 당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가와 유가라는 학파도 없었고 개념도 용어도 없었어요. 모종의 텍스트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 학문적 실천들을 이루려고 했던 어떤 집단들이 있었던 것 뿐이에요.

나중에 텍스트를 중심으로 해서, 이 사람은 유가다 이 사람은 도가라고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대나무 죽간 속의 노자를 읽었던 사람들은 도가사상가라고 하는 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 곽점본과 백서본의 차이

그리고 곽점본에서 백서본으로 넘어갈 때 굉장한 차이가 있어요. 첫 번째 우리가 도가하면 가장 유가를 반대했다고 하는 구절로 알고 있는

絶聖棄知, 絶仁棄義.(절성기지 절인기의) 즉,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어 버리고 유가가 말하는 인의를 끊어버려라. 이 구절이 곽점본에서는, (절지기변 절위기려) 즉, 번역하면 지혜를 끊어라 그리고 버려라. 그리고 생각하지 말라. 기의하죠? 도가는 생각하는 걸 철저하게 거부하는 학파예요. 내가 생각하면 내 꾀에 당하거든요.

특히 제왕통치술에 나오는 얘긴데 나중에 무의지술을 얘기할 때 다시 한번 말씀 드릴게요. 慮(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려가 아니라, 걱정입니다. 생각이 많다는 건 걱정이 많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대통령이 됐다. 아무 생각도 안 한다. 곤란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대통령이 아무 생각이 없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에요. 왜. 할 일이 없단 얘기거든요.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거꾸로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면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또 한 가지, ‘내가 생각하지 말고 니가 생각해라. 그리고 니가 책임져라.’ 이게 바로 혁명기술이라고 해서 한비자가 강조하는 중요한 통치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사태가 있을 때, 지금도 써먹는 방식이에요. “저기 누가 쳐들어온다, 어이할꼬” A라는 장순이 와서 “제가 가서, 군사 오천을 주면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가요. 오천의 무슨 장군이 졌어. 그럼, 사형. 격퇴하고 오면 상을 주는 거예요.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건 외교로 나가야 합니다. 제가 옆에 진나라로 가서 적의 후방 쪽으로 출전시키겠습니다. 그럼 왔다가 퇴각할 겁니다.” “갔다와” 잘 했어요, 그럼 상 줘요. 못 하면 벌 줘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그게 바로 무위예요. 무위를 얘기하면서 많은 분이 굉장한 중요한 사실을 얘기하는데. 하나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황제 용상 뒤에 금박으로 무위라고 써 있어요. 저랑 같이 동양철학 하시는 분이 있는데, 유학을 하신 분이에요, 한국학 하신 분이고. 그런데 내 말 안 믿어요. 가보시라고 했더니, 있더라고 해서 제 말 믿어요.

무위라는 말은 황제의 행동방식 얘기하는 고유한 용어예요.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는 거죠. 물론 그 뒤에 다양한 방식의 의미 변화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에, 곽점본에 비해서 덕도경에서 도덕경으로 가면서, 42장의 경우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이 구절 때문에 서양의 철학자들이 박수를 쳤어요.

달리 말하면 서양에는 없는, 파르마네스 존재론에 의하면, 비존재로부터 존재가 나올 수 없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속에는 모든 존재들이 다 모든 사물들이 존재로부터 생겨나는데, 그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겨난다고 해석을 많이 했었거든요. being을 해석할 때.

그런데 서양에서도 being을 존재로만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이 being 속에도 생물체가 있대요. 여기서 말하는 유무보다는 약간 더 추상적인 내용이지만 유와 무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특히 이런 맥락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상태’, ‘특별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상태’ 비유하자면 흙탕물과 같은 거예요.

물의 형체가 어떻습니까? 물이 도에 비유되는 것처럼 없는 게 아니에요. 분명히 있는 거예요. 있다, 없다고 하는 말의 가장 일차적인 의미는, 지금 탁자에 컵이 있죠. 이게 유입니다. 없죠. 여기에 관한 표현이 유무예요. 그래서 유와 무는 being이나 not being으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아니라, there is there is no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문법적인 해석자들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굉장히 강하게 서구 존재론화되어 있는데, 문제는 곽점노자본에는 이 부분이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과 따로 따로 놀아요. 그런데 백서노자본에서는 이 부분이 장 구분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연결이 돼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우주발생론적인 얘기가 들어가니까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은 분명히 추상적인 얘기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얘기고. 그리고 우주생성론적인 얘기죠. 이것이 바로 딱 붙어 있으니까 해석을 할 때 훨씬 더 형이상학화하고 우주론화된 해석을 하기가 쉬워지죠. 이것이 곽점본에서 노자로 바뀔 때를 말해주는 거고.

당시에 이처럼 우주론에 대한 재해석이 엄청나게 일어났던 건 사실이니까요. 그런 것에 대한 반영의 흔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최초의 하이퍼텍스트, 노자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한다면, 원나라 때 주석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노자에 관한 주석서가 삼천 개나 되는데 다 다르더라. 이게 이미 원나라 때 주석사가 아니란 얘기예요. 따라서 노자를 말할 때는 그것이 어떤 텍스트이냐, 어느 시대거냐를 별 개로 두고 다르게 얘기해야 한다는 거죠.

모든 노자 텍스트는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백서, 죽간노자 다 마찬가지고 왕필본, 하상공본 다 마찬가지라는 거죠.

두 번째, 아까 사진에서 보셨던 것처럼, 한스켈러라는 독일학자가 말하는데 곽점본은 현행본의 5분의 1밖에 안 됩니다. 물질의 제한성이 있어요. 비단으로 가니까 훨씬 여유로워지죠. 나중에 종이가 발견되니까 훨씬 더 여유로워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노자를 보고, “노자는 인류 최초의 하이퍼텍스트다.” 실제로 쓴 표현이에요. 묄러라는 사람이다. 왜냐, 인터넷의 문서가 그렇죠. 마구마구 복사할 수 있어요. 실제로 노자와 관련된 어구가 선진 제자백가 여러 텍스트 속에 굉장히 산재돼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노자는 완성된 체계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이 쓴 저자라는 말은 틀린 겁니다. 달리 말하면, 책의 형태가 이래요. 이렇게 체계적으로 쓰인 게 아니라. 저는 노자를 읽을 때 어떤 독서법을 권하느냐면, 이 책을 책장에 두지 마시고 화장실 옆에다 두세요. 읽을 때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 거예요. 어떤 분은 1분, 어떤 분은 5분, 길게 가는 분은 길게 공부하시겠죠.

실제로 당시 텍스트의 물질 형태가 이러니까, 노자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꼬부라지면 온전해지고’ 보면서 내가 어떻게 실제 현장에 써 먹을까로 읽었단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면 곤란하겠죠. 여기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 비민주적일 테니까 다만 읽더라도 고전에서 재미삼아 읽을 때, 특히 한비자나 장자의 책은 우화별로 돼 있어서 그런 방식으로 읽기가 되게 좋아요. 따라서 노자도 특정 방식으로 읽기 보다는 오히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읽으려고 노력함으로써 노자를 읽었던 사람들의 독해방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다음에, 하이퍼텍스트처럼 증식해요, 복사되고. 작은 게 늘어나지 않습니까? 차라리 텍스트의 증식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탁월한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노자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유덩어리예요. 번역이 나와 있는데 사라 알란이 쓴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이 채에 물, 식물의 비유체계를 뿌리은유라고 말하면서 유가나 도가 학파와 상관없이 그들이 공유했던 공통된 은유관념이라고 하면서 텍스트들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부분이 나오거든요.

따라서 노자를 읽을 때도, 엄격한 논리적 명제들로 추론적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연상적인 방식으로, 전부 이미지잖아요. 계곡을 설명할 때 그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매지네이션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근거 없는 상상 허구가 아니라 이미지의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이매지네이션. 즉 상상력을 발휘해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텍스트. 그런 방식의 독해가 상당히 유의미한 게 노자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 속에 깔린 가장 중요한 것. 누가, 누구를 위해서,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부분을 제왕학으로 출발했지만 사실은 士계급이 주체였고, 곽점본부터 사 계급이 나옵니다. 적어도 통치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이른바 통치 행위에 참여하는 지도자 모두에게 정치적 행위와 이러한 행위의 원리를 터득케 하는 처세 교훈서로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증식되고 커지고 여러 가지 사상적으로 유가가 되면서 커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큰 노자 그리고 엄청나게 다양한 주석서들로 분기되는 모습을 보인 게 노자가 아닌가.

따라서 노자는 이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굉장히 좁은 얘기로 가기 쉬워요. 어떤 특정한 텍스트에 대해서 이러하다고 말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내가 말하는 노자야말로 가장 오리지널한 노자라고 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는 거죠. 그 노자가 뭘 얘기하느냐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첫 번째 얘기는, 그 동안 노자와 관련해 상식적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의 독해를 여러분이 보셨죠. 그걸 제가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제 얘기만 맞는 게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 하는 말도 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요.

다만, 제가 이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와같은 방식의 해석이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같이 저울질해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강조한 것뿐인데.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노자를 그냥 책으로 읽자. 철학이니 사상이라고 하는 수식어를 붙이고 색깔 낀 눈으로 보지 말고 그냥 읽고 내가 책으로부터 뭔가 의미를 얻는다면, 그때 의미가 있는 거지.

위대한 철학자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훌륭한 짓을 했다? 그건 무의미한 독서라는 거죠. 왜? 하나도 이해 못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는 까닭은 단순하죠. 저는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노자는 놀자로 생각되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유학자들이 노자를 읽었던 정신이고.
저는 어차피 지금 시대와 동떨어진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의 저술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도움은 힘들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우리의 상상력을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고 건전한 노자 독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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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노자 강의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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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노자 강의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 『노자』를 대하는 잘못된 독법


▲ 노자에 대한 해석의 변화

반갑습니다. 앞으로 8주에 걸쳐서 제목이? 안 적혀 있어요. 혼돈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노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될텐데, 먼저 노자하면 저는 사실 시중에서는 철학자로 떠오르기 쉽지만 저는 노자하면 놀자로 떠올라요. 노자를 자꾸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ㄹ을 붙여서 ‘놀자’ 대신에 몸으로 노는 게 아니라 머리로 노는 거지요. 단어를 가지고, 개념을 가지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지금부터 대력 2300년 이전에 태어난 책이죠.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까 또 우리말로 돼 있지 않고 한자로 돼 있죠. 그러다보니까 번역의 곡절도 있고 시대마다 노자를 읽던 방식도 다르고 눈이 달랐고.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유교담론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거기에 대한 대안적 담론으로써 19세기 말부터 노자가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도올 선생님이 워낙 독특한 강의와 어법과 그리고 상당히 세련된 해석을 통해서 노자를 많이 소개했고. 그리고 도올 선생님 강의 속에서는 서양 철학적인 문제의식과 동양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같이 만나는 지점에서 많이 이루어지다보니까 굉장히 철학적으로 읽혀 왔어요.

그런데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그 방향이 역전됩니다. 달리 말하면,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노자를 읽었던 시각은 이른바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 학문 분야 혹은 그 방식에 맞춘 노자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어요.

그랬다가 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담론계에서는 이른바 진보주의 담론이 방향을 잡지 못 하고 상당히 수그러들고 미국을 거쳐서 들어온, 이른바 프랑스 철학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여과를 거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사상이 거의 전 담론 분야를 장악했다고 표현했던 건 애매하고 유행하다시피 상당히 많은 호응을 받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노자의 경우는 그 해석이, 역사적인 시각을 통해서 노자의 본 텍스트의 의미 그리고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었던 주석서를 통해서 어떻게 읽혀졌나를 보는 관점으로 이동했습니다.

특히, 90년대 중반에 우리가 흔히 노자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라고 하는 왕필의 현학, 그 당시에 노자를 해석했던 철학 사조를 현학이라고 하는데, 현학적인 사조마저도 상대화시켜서 봐야 한다는 담론이 뜨면서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에 있어 학위 논문을 「노자」와 「하상공」이라고 하는, 가장 이른 두 주석서죠, 두 주석서를 비교하는 주제로 학위를 땄습니다. 저 때에 그와 같은 방식의 연구가 상당히 유행할 때였고요.

주석사가 다시 부흥하게 된 계기는 90년대 초반까지, 특히 70,80년대를 거치면서 노자를 만든 시각은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서 보편적인 논리나 가치와 담론을 철학적인 언어로 잘 발견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90년대 들어서면서 많이 달라졌죠. 사실 IMF가 터지면서 많이 어렵긴 했지만, 그 이전 과거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워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그리고 구태여 서양적인 방식이라는 것과는 다른 우리 동아시아 문화의 고유한 무엇. 혹은 역사적인 그 무엇을 단순히 서양의 보편과 대립시키거나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목소리가 처음 일어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 노자에 대한 한국의 시각

7,80년대에 일으킴 담론이 사실 국가 주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강했다면 90년대 일어난 고전의 재해석은 상당히 다원적인 경향이 많았고 반드시 보편적인 논리에만 매몰돼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까 훨씬 더 본래 텍스트의 목소리를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텍스트들에 비해서 노자나 장자의 텍스트는 연구자 숫자가 굉장히 적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경우는 조선조에 유학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보니까 유학이 주류담론이었다 할지라도 지역별 특색이 많았다면 조선반도는 상대적으로 작죠. 정치적으로도 통합돼 있었고.

그래서 주류사상과 다른 방식의 논의를 한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어려운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오히려 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하지 못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을 해석하는 방식이 서구와는 또 다른 중국과는 또 다른 방식이 많이 나왔고요.

노장을 해석하는 해석이 실제 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논의를 따져 보면 굉장히 다양해요. 하지만 조금 나아가서 보면 한국사회처럼 노자를 해석하는 시각이 상당히 균질적인 데도 드뭅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 노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서 훨씬 균일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조금 차이가 있다면, 서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것과 동양철학을 하신 분들이 노자를 보는 시각과 상당히 선을 긋기 시작한 때도 9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민족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객관적인 동양 담론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시작했는데, 다행인 것은 최근에 그와 같은 시각이 세계적으로 상당히 붐을 이루고 있고.

그 전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영미권과 프랑스 쪽 연구 성과도 많이 번역이 되어서 소개되고 그래서 최근에 학자 충원은 적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 논의 속에서 노자가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아쉬운 건, 동양철학이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고리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동양철학 담론이 많은 부분에서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아주 좋게 표현하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요. 왜냐하면 노자로 학위하는 사람마다 말하는 노자가 달라요. 다양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어떤 모양새를 갖고 있냐면, 노자가 만병통치약입니다. 이게 가장 적당한 표현이에요.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노자를 읽으면서, 인류최초의 페미니즘 사상가라고 선언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환경 문제가 뜨면, 노자가 최초의 환경 철학자래요.

그 다음에 어떤 문명, 제도, 규범의 문제가 서두화되면 노자는 애초부터 유가의 도덕적 전제주의, 엄격주의를 비판하면서 나온 사상이기 때문에 ‘굉장히 다원적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 혹은 동아시아 사회의 어떤 문제가 되는 현실이 있다고 하면 노자는 거기에 대한 反. 그래서 나름의 대안이 있는 것처럼 얘기되는 게 한국에서 노자 담론의 모습니다.

그런데 만병통치약은 어디서 파는지 아시죠? 약국에서 안 팔죠. 시장통에서 이른바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물질이 들어있어서 쇼를 보여준 다음에 잘 팔리는 것처럼, 달리 말하면 실제로 현실의 문제와 토론하고 대화하는 위치에서 사상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만병통치약이 시장에서 팔리는 것처럼 유가도 마찬가지지만, 노장 철학이 실제 현실의 담론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오로지 그냥 안티, 반. 따라서 “뭔가가 있을 거다”에서 끝나냐. 왜 그러하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물론 우리나라 학자의 수준이 낮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근 번역서 나온 걸 보시겠지만, 과거에 고전번역이다, 혹은 최근에 번역이 나오더라도 20년, 30년 전에 텍스트들이 번역돼서 나오지만, 요즘에는 6개월 전에 나온 책들 2,3개월 후에 바로 나오기도 하고.

지금쯤 출간되는 책들이 올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번역돼서 출간된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서구사상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학문하는 분야가 있다 하더라도 동시적인 사유를 우리가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단순한 수입이 아니라 뭔가 필요성에 의해서. 저들이 부딪치는 현실과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이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수위는 똑같다는 거죠.

그런데 바로 이러한 배경이 오늘 첫 번째 강의 제목, 제목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죠? 소설 제목이에요.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이죠. 단편 소설 제목인데, 소문의 벽.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대한 이야기, 특히 예전에 강의를 나가면 두 가지 질문을 많이 들어요.

첫 번째는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담론들을 노자 텍스트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느냐라고 하는 진지한 얘기가 있다면, 어떤 구절을 읽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맞느냐고 질문을 해요. 이상한 방식의 질문이죠.

맞느냐 틀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를 올바로 봤느냐 안 봤느냐의 물음으로 바뀐단 말이에요, 왜? 한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진 교재는 한문이 되도록 없고 나와 있는 번역문들을 그대로 실었어요. 제가 구태여 번역을 안 하고.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특별히 오역이다 싶지 않은 부분들은 번역서를 활용하는 게 좋죠. 그래야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한문을 놓고서 서로 틀리니 맞니 하는 것은 전문적 학자가 하면 되는 거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다고 한다면 번역서를 놓고서, 어떤 번역어가 더 좋다, 아니다 하는 방식으로 토론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라고 돼 있죠. 많이 들어본 방식의 어법이죠? 제가 센스가 많다 보니까 그런 방식의 언어에 강해요. 그 내용이 뭐냐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다 소문으로 들은 거예요.

왜,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적다. 그리고 한문 원전을 볼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노자는 역사적으로도 합의된 바가 없고, 현재적으로도 합의된 해석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노자는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런 책 중에서 가장 좋게 볼 수 있는 것이 다양한 주석서들을 동반하고 있는 좋은 번역서들이 많이 나왔어요, 지금은. 왕필본만 하더라도 여러 개가 있고 관점본도 최근에 두 세 가지 나왔고. 그 다음에 가장 빠른 노자라고 하는 박정본 노자도 아주 꼼꼼한 번역이 얼마 전에 출간됐습니다. 번역이 상당히 좋아요.

그러다보니까 여러 가지 텍스트들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노자라고 하는 말을 곱씹으면서 스스로 생각을 할 때 아주 좋은 번역본이 이 김영옥 선생님이 번역했던 노자와 21세기 보다는 이 책이 훨씬 더 일대일과 책과 대응하기엔 좋습니다.

어디를 펴든 거의 순 우리말로 돼 있기 때문에, 물론 한자로 돼 있는 부분은 넘어가고 한글로 돼 있는 부분만 딱 봐도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한 분들이라면 다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번역문은 굉장히 쉬운데 “노자가 철학자래, 그러니까 뭔가 센 게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거꾸로 잘못 생각한다는 거죠.

저는 책을 읽을 때 나쁜 습성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제가 철학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머리로 잘 안 읽히는 책은 나쁜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자가 표현을 못 했거나 그걸 안 봐요.

제가 서양현대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다 이해된다는 건 쉽지 않죠. 나름대로 연구를 해 가지면서 읽어야죠. 그런데 동양철학을 읽을 때 제 머리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제가 알지 못하는 굉장히 독창적인 사고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분의 표현이 상당히 아직 나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얘기일 수도 있죠. 어느 쪽이냐는 건 좀 더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해 봐야 하는 문제니까 그건 판단을 못 하겠어요.

그런데 일단 같은 한글로 쓰는데,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학자로서 토론해야 하지만 여러분은 “아 내 머리가 나빠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나를 이해시켜줘”라고 요구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문하는 방법이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올 선생님이 번역한 「길과 어둠」. 제목까지도 풀었잖아요. 이 책이 아주 좋아요. 저도 이 책을 세 권 째 사는 거예요. 첫 번 째 것은 하도 많이 낙서를 해서 안 보다가, 이사 가는 와중에 잃어버렸고. 얼마 전에 책을 사서 옆에다 필기도 안 하고 그냥 내용만 읽으면서 우리말식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라는 소재로 가끔씩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부제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누구의 노자인가” 라고 한 이유는, 노자 시대에는 환경문제라는 게 없었어요. 당연히 환경 철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처방으로써 혹은 철학적 사유로서 재해석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건 맞죠.

하지만 노자가 환경 철학자나 혹은 페미니스트다 혹은 반문명론자다 라고 표현하는 방식은 일단 부적절합니다. 왜? 다 현대어거든요. 그렇게 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시각의 혹은 우리 현실 문제를 가지고 텍스트를 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 당시의 노자가 그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돌아가야죠. 25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하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학계에 계신 분들이 많이 연구를 해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곤란하다는 걸 우린 대충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일단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거의 문맹률 제로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아주 나이가 많으신 90에 가까운 분들도 60,70,80살이 되어서 한글 공부하셔서 글 읽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인터넷 때문에. 여러분들 많이 보셨죠? 이건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에요.

한 언어공동체에 있는 사람들 태반이 책을 읽고 대화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엄청난 겁니다. 고대 중국으로 가면 몇 사람이나 책을 볼 수 있었을까? 확인이 안 되죠. 문자를 읽고 쓰는 인간은 무지무지하게 적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노자」라고 하는 책이 지금처럼 기계로 찍어 나와서 서점만 가면 살 수 있고, 서점도 갈 필요가 없죠. 인터넷 들어가서 신청하면 책이 온단 말이에요. 그것도 나갈 때보다 더 싼 값으로. 우린 굉장히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기본적인 사실만도 다른데 우리는 우리가 독서하는 행태, 공부하는 행태, 생각하고 토론하는 방식을 거기다 나도 모르게 대입시켜서 마치 동시대처럼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우리는 장점이라고 20세기 내내 칭찬받아 왔죠.

하지만 결론은 뭐냐? 별 얘기 없더라. 공허하더라. 왜? 워낙 문제가 다르니까. 그래서 오늘 강의의 제목이 “소문의 벽”인 까닭은 일단 노자와 관련된 기존의 상식을 걷어내고 내 눈 속에 혹은 내가 낀 색안경을 벗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까를 조율하는 것이 오늘 강의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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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의 기본적인 사상


▲ 哭則全, 枉則直(곡칙전, 왕칙직)

처음부터 원문을 읽어나가면 어려우니까 에피소드 세 가지를 가지고 얘기해보죠. 이 세 가지가 2500년 동안 논란이 많았던 문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오늘 듣게 될 내용은 상당히 독특한 해석입니다. 제 해석이 아니라 2000년 전의 해석입니다.

노자 22장을 보면 哭則全, 枉則直 곡즉전, 왕즉직이라는 짧은 구절이 나와요. 번역이 도올 선생을 번역을 따 왔어요.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무슨 얘기에요? 알 수가 없죠. 그럼 가장 똑똑한 천재 주석가라고 했던 왕필 주석서를 읽어보죠. 이 책은 노자가 기원전 4,3세기쯤에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이 사람이 249년에 죽었으니까 기원후 3세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럼 600년 차이가 나죠.

지금부터 60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400년, 임진왜란 즈음이 되겠네요. 그 때랑 지금과 엄청 다르죠. 천재 왕필이라고 해서 노자의 뜻을 정확히 읽었을까? 지금 여러분들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선생의 책을 보면서 한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양반들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동시대인이 사유하는 것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마찬가지의 생각 정도를 갖고 보셔야 해요.

자, 한번 읽어 볼까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 밝음이 완전해진다.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면 그 옳음이 드러난다.”

원문보다 더 어려워요. 어려우면 일단 다시 그 보다 조금 더 앞에 나온 하상공이라는 책에서 주석한 내용을 보죠.

“자신을 굽히고 대중을 따르며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온전해진다. ‘왕(枉)’이라고 하는 글자는 구부린다, 굽힌다는 뜻이다. 자신을 구부리고 남을 펴주면 서서히 자기 자신이 저절로 곧아지게 된다.”

조금 더 이해가 쉽죠? 쉽게 말하면, 아주 쉬운 표현으로 하면 자기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고 낮출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늘 그런 문장을 생각할 때는 거꾸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방식의 표현을 듣는 사람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올라갈 때까지 내내 꼴등만 했어요. 간신히 중학교 졸업할 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턱걸이로 미달로 입학했단 말이에요. 대학도 미달로 합격해서 간신히 졸업한 사람.

만약에 그런 사람인 경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잘났다, 잘난 체 하는 사람 아마 드물 겁니다. 그런데 전통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평등한 개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신분적 굴레가 막혀 있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엠티를 갔었어요. 강원도 어딘가에 굉장히 오래된 고택이 있었는데 어떤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종갓집인 것 같아요. 아 제가 본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본 거네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현실이 왔다갔다 해요.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 본 것 같네요. 웃기려고 한 거, 더 웃으실 줄 알았는데 안 웃으시네.

그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어떤 사람이 저처럼 엠티를 가서 잘못 들어가서, 정원이 너무 고풍스러우니까 신기한데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니까 6,7살 갓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나이의 조그만 애가 한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동시에 눈이 마주쳤더니, 이 사람이 쭈뼛하잖아요. 일단 남의 집인 것 같은데 들어갔으니까. 그 순간 꼬마는 당당하게, “웬 놈이냐!” 종갓집 양반의 모습인 거죠.

우리가 볼 때는 그게 코믹하고 우스운 장면처럼, 옛날에는 저랬나봐 정도이겠지만 만약 당시 조선사회에 그랬다고 하면, 상민이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양반인 대갓집 도령한테 한 소리를 들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바로 땅에 엎드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몸감이 다르다는 거죠.

이 시대에 낮춰야 한다, 그 꼬맹이가 낮추는 법을 배우겠습니까? 그런 미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에요.

그런데 그런 걸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는 해석이 있습니다. 보통 노자 해석서에서는 이 텍스트를 제외시켜요. 너무 리얼하니까. 저는 당연히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회남자」라고 하는 책인데, 한 무제의 삼촌뻘 되죠. 유안이라고 하는 사람. 나중에 반역으로 몰려서 죽게 되는데 그 사람이 회남지역의 왕을 했었어요. 그래서 회남자 혹은 회남왕이라고 불리는데 이 사람이 남긴 책이라고 해서 회남자라고 불립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혹은 황로학계열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중에 ?도응훈? 편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세 개 에피소드만 빼놓고 나머지 전체가 하나의 역사적 일화를 제시하고 그 제시를 통해서 노자가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끝나요.

달리 말하면, 이야기 보전의 노자 주석서라고 볼 수 있죠. 왕필이나 하상공보다 훨씬 더 실제 대화에서 예를 들면서 적은 주석서라고 볼 수 있어요. 하나를 읽어보죠.

【진(晉)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조(曹) 나라에 들렀는데 조 나라 군주가 무례하게 행동했다. 조군의 대부였던 이부기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주군께서 진의 공자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중이를 옹립하여 진 나라에 복귀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조 나라를 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전에 덕을 베푸는 게 좋을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라는 거죠.

【그래서 이부기는 중이에게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보내고 또 벽옥을 바쳤다. 중이는 그 음식은 받았으나 벽은 돌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이가 진 나라로 돌아가자 군사를 일으켜 조 나라를 쳐서 승리하였다. 중이는 삼군(三軍)에게 명하여 이부기가 사는 동네에는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曲則全, 枉則直.”】

이러면 훨씬 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사람이라고 하는 게 우리 일상인의 삶은 다르죠. 일상인의 삶 중에 가장 힘든 건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는 것. 지겹잖아요. 일도 똑같이 해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돈도 안 벌리고. 뭔가 미동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거죠. 그리고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자신이 향유하는 게 적고. 지금도 그럴진대, 과거에는 신분의 굴레에 갇혀서 아버지가 노비면 나도 노비고. 끔찍하죠.

그런데 정치인들은 우리와는 사는 방식이 다르죠. 물론 이때 정치인이라는 게 지금처럼 나름대로 정치판에 들어가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고나면서부터 신분이 그러하니까 정치를 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렇게 번역을 안 하지만, 이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좋게 번역해서 선비(士)라고 하죠. 사(士)라고 하는 말은 2500년 동안 시대마다 의미가 굉장히 다릅니다. 그런데 공자도 사(士)출신이고,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람들도 사대부, 선비들이었죠.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仕 이게 무슨 뜻이죠? 벼슬살이하다. 관직에 나아가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신분이자 직업이에요.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士계급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일반인들의 얘기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거죠.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이 말은 나중에 주희가 권모술수의 대명사라고 엄청나게 비판했던 부분이에요.

왕필이 해석했던 부분은 조금은 누그러뜨린 해석이에요. 처세술적인 얘기로 다가가는 중간쯤에서 멈추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상공의 주석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니 스스로를 굽힐 줄 알아야 니가 대접받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얘길 하는데. 회남자 ?도응훈?에 나오는 얘기는 철저하게 그런 사례를 들고 있죠.

달리 말하면, 니 자신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굽힐 때는 굽혀야 하고, 나갈 때는 나가야 하고. 하지만 노자는 기본적으로 굽히고 겸손하고 자기를 아래에 두면서 더 나아가고 더 뻗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정치이론을 갖고 있는 것이 노자라는 책입니다.

이런 논리는 음울한 얘기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일어나요. 현대 사회에서도. 요란한 사람치고 실수가 잦아요. 누가 잘나간다고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면 실수한단 말이죠. 그때 달라들어서 개떼같이. 바로 이런 논리라고 하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얘기하면서, 정말로 아름다운 책. 고도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면서 사변적이면서 아름다운 책이라고 많이 얘기해요.

그런데 주희는 유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언설을 보면서 이런 방식의 언설을 하는 책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권모술수라고 단칼에. 장자는 그나마 괜찮은데 노자는 위험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피곤하겠죠.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또 한 가지 예를 보죠. 에피소드 두 번째입니다. 28장. 이것도 엄청나게 최근 특히 4,5년 동안 유명한 구절입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그 숫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여기서 계곡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큰 강물로 변하고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그 물들이 이루어낸 커다란 물을 뜻합니다. 밑에 많은 걸 거느리고 있는 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최근의 해석은 여성주의 담론이 뜨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 담론과 많이 시켜서 노자는 양을 중시하는 유가와 달리 음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여성적 가치 즉 낮출 줄 알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포용적이어서 노자철학은 페미니즘적이거나 혹은 여성적 가치를 선향한다고 막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냥 읽어 보세요. 그냥 읽으면 모르는 게 정답 아닙니까? 어떻게 압니까? 주석서를 보죠. 왕필은 어떻게 주석하느냐.

“수컷은 앞서는 부류이고 암컷은 뒤처지는 붙이이다. 천하에서 가장 앞서는 것들은 반드시 뒤처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구하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스스로 그러한 지혜에 합치한다.”

일단 왕필의 주석을 보면, 여기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성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자(雌)가 나오지만 남성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옹(雄)도 나오고.

그런데 두 가치에 대해서 태도를 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성인과 어린아이예요. 계곡이고. 따라서 이건 여성적이냐, 페미니즘적이냐 하는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난 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자기를 낮추고 절제하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웅과 자에 대비시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쭉쭉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망하기 쉽고 오히려 자기를 뒤에 둠으로써 앞에 나가는 전략을 말하고 있죠.

하상공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수컷’은 존귀함을, 암컷은 비천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비록 자신의 ‘존귀함’과 ‘드러남’을 안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즉 수컷의 ‘강함’을 버리고 암컷의 ‘부드러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마치 물이 깊은 계곡으로 흘러들 듯이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자, 훨씬 더 구체적이죠. 여기에 나온 얘기는 여성적 가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처신하고 행동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통치집단에 속한 것이고 오히려 잘난 척하는 것보다 겸양할 줄 알고 상당히 탄력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효과를 본다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도응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조간자(趙簡子)라고 해서 원래는 진나라인데 나중에 진나라가 조위, 한이라고 하는 세 나라로 분리되죠. 그걸 삼진이라고 하는데 이게 403년에 일어났고 이때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죠.

이때는 당시의 진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여섯 개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 집안의 간자라고 하는 사람이 양자라고 하는 사람을 자신의 계승자로 지목하는 일화가 나옵니다.

【조간자(趙簡子)가 양자(襄子)를 후계자로 정했을 때 동알우(董閼于)가 “무휼(無?)은 출신이 미천한데 후계자로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간자가 대답했다. “양자는 나라를 위해 부끄러움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이네.”
그후 지백(知伯)-당시 조 씨와 세력을 다루었던 지 씨 일족의 대표자-이 양자와 함께 술을 마실 때 양자의 머리를 때렸다. 무례함을 보고 분노한 대부들이 지백을 죽이자고 청하자 양자는 말했다. “선군께서 나를 후계자로 세우실 때 나라를 위해 부끄러움을 참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소. 사람을 찌를 수 있다고 말했을 것 같소?”
10개월 정도 지나서 지백은 양자를 진양에서 포위하였다. 그러자 양자는 군대를 나누어 이를 쳐서 지백을 크게 깨뜨리고 그 머리를 베어다가 술잔으로 사용했다.
그렇기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知其雄, 守其雌, 其爲天下谿.”】


▲ 노자의 기본적인 사상

끔찍하죠?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 한나라 때 이 텍스트를 읽었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집단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적 가치라고 했던 그 부분이 그런 게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노자가 멋있게 보이나요? 멋있는 해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자라고 하는 책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도덕이죠.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노자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많이 썼어요. 長生久視之道(장생구시지도) 장생구시,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평균연령이 높아지니까 90까지 100까지가 아니라 정치인들은 우리와 사는 방식과 달라요. 웬만큼 담배 안 피고, 술 적게 마시고, 운동 잘 하고, 하더라도 오래 못 살 가능성이 높아요. 왜, 과로사. 교통사고, 일반인들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거예요. 안 그러면 웬만하면 갑니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은 드물잖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정치인은,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칼 맞아 죽는 거죠. 장생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웰빙이 아니라 칼 맞아 죽을 수 있는 사람의 상황을 염두해 둬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 황제의 평균 수명이 12,13살이에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시겠죠? 두 세 살일 때 황제로 등극해서 채 걸어 다니지도 못 하는 나이 대에 황제가 바뀌는 바람에 죽은 황제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겁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을 합쳐서 120년 인가?

청나라가 지배했던 전체 기간 가운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세 사람이 지배했던 기간이 반이라고 하더라고요. 옹정제는 십 몇 년 한 것 같은데, 강희제, 건륭제는 둘 다 육십 년이죠? 둘 백 이십년. 엄청나죠? 그런 사람들을 다 합쳐서 계산하더라도 12,3살 밖에 나온다고 하는 건 나머지 황제들이 얼만큼씩 재위했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스무 살 넘어서 황제가 돼도 온갖 세력 때문에 제대로 못 하는데 열 살도 안 된 황제가 황제이겠습니까? 그냥 이름이지. 장난감일 뿐이죠.

그런 상황에서 장생, 평균 수명이 12,3인 나라에서 장생을 얘기한다는 건 절박한 얘기죠. 같은 얘깁니다. 오랫동안 눈 부릅뜨고 세상을 봐야한다는 뜻이니까 살아있다는 얘기예요. 이게 오늘처럼 웰빙시대를 맞아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노자라고 하는 책은 아름다운 책이기 보다는 끔찍한 책, 참혹한 책,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들어있는 책이라고 먼저 읽으셔야 해요.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죠. 우주론이나 다양한 얘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면적으로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사상의 출발은 바로 이 논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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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1_03.htm

◆ 『노자』를 제대로 읽는 법


▲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다음에 읽을 부분이 가장 유명한 구절이죠. 에피소드 세 번째입니다. 이 구절은 노자를 읽어보지 않았던 분들도 한번 쯤 지나가는 말로 들어봤을. 여기쯤 오신 분들은 한번 쯤 들어보셨을 구절이죠. 알 수 없는 기호처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무슨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도, 명과 같은 용어들이 당시에 문화적 지층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또 철학사적으로. 그런 게 있으니까 수정하는 거고 후대에 주석서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기이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왕필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왕필의 해석은 본래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이 구절 속에는 왕필 당시 철학적 논쟁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맥락이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 볼까요.

‘왕필’ :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는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보통 이렇게 해석하고 20세기 해석은 이렇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누구 말이죠?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에 와서 발견된 진리가 2500년 전에 관문을 타고 넘어간 한 노인네가 발설하고 갔다는 것 자체를 부각시키면서 대단한 철학자로. 노자가 서구 사회에서 대접받게 된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철학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언어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언어 철학적인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얘기냐? 먼저 이 해석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후안 때 나온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를 들어보셨죠? 『설문해자』는 한자사전입니다.

『설문해자』가 나오게 된 배경은 잘 아시죠? 진시황이 무너지고 유방과 항우가 투쟁하던 때에 유방이 먼저 하명성에 입성할까 하다가 후환이 두려워서 근처에 진을 치고 남아요.

항우가 온 다음에 폼을 잡으면서 들어갔어요. 그리고나서 거기에 불을 질렀죠. 영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때 엄청나게 많은 문헌이 사라졌다고 해요. 오히려 진시황 분서갱유 때문에 문헌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보다도 항우가 지른 불 때문에 더 많이 사라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는 걸 금지하고 없애버렸다. 하지만 중앙에 모읍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죠. 그때 모아둔 상당히 많은 문헌들이 불타버린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걸 분서갱유라고 하는 네 글자로만 딱 표현하진 않는데.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그 이후의 한대, 문자 없이 행정과 통치가 불가능하죠.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그 당시 머릿속에 외우고 있던 것을 다시 만든 텍스트가 금문 텍스트예요.

그런데 그 이후에 일군의 학자들, 예를 들면 공자가 살던 집에 공사를 하다가 벽에서 무너져서 보니까 고문서가 발견됐다고 해서 예서체가 아닌 그 이전의 글자체로 돼 있는 고대 문헌들이 발굴이 돼요. 상서도 고문 상서가 발견되고.

당시에 이걸 가지고 이념적 정치적 기반이 달랐던 두 학자 집단의 논쟁을 금고문 논쟁이라고 하는데, 선문해자라고 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고문파에 속하는 작품인데 왜 사전으로 만들었느냐?

옛날 한자잖아요.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라고 사전적인 방식으로 추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만든 한자 사전이 설문해자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한자를 분류하는 육서라는 원칙이 나오죠. 왕필이 말하고 있는 주석 문장 속에는 바로 육서를 구성하고 있는 용어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중요한 거예요.

지사, 조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事나 형形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니 항상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상형, 조형이라고 돼 있지만, 지사가 들어와 있어요.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문자학적인 언어학적인 고민이 들어 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틀의 원맥락에 닿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당시의 논쟁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걸 언의(言意)지병이라고 하는데

보통 언어철학하면 언어와 실재를 다룬다고 해서 특히 박이문 선생님이 『노장사상』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비중 있게 다뤘죠. 노자가 철학적인 사유가 굉장히 풍부하다고 칭찬까지 했었는데.

이때 말하는 언의라고 하는 것이, 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뜻. 이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이걸(意) 영어로 쓰면 meaning, 단어의 뜻이 아닙니다. 의도, 의향이라는 intent의 뜻이에요. 이건 공인된 언어가 아니지만 지금 많은 학자들이 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이 노자의 주석서를 썼으니까 도가적인 철학자다? 전혀 아닙니다.

왕필은 본래 역학을 과학전통으로 이어받았던 집안 학문의 계승자고, 삼국시대 당시에 조조 정권과 굉장히 가까운 인척관계였다. 왕천이 왕필의 할아버지뻘이 되는데, 그 가문의 후학을 이룬 사람이에요. 역학 중심이었고.

그리고 240년부터 249년에, 조 씨의 위나라에서 일군의 유학자들이 나름대로 뭔가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려고 모종의 운동을 하는데, 이 시기를 정시(正始)라고 합니다.

정시는 주역 용어입니다. 이 글자를 그대로 보세요. 이게 연호인데, 처음을 바로잡는다. 즉, 한나라가 망했죠. 한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공자의 가르침, 오경을 통해서 문명을 실현하려고 했던 유학자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당연히 고민을 하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진리가 잘못 된 거냐? 아니다. 우리가 공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공자라고 하는 말은 오경의 저자로서, 이 문명의 토대를 만든 사람으로서 인식됐어요. 오경 속에 담긴 말이 있고 그 말을 통해서 성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이 있었던 거예요.

한대문명이 망한 것은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못 이뤘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빙자해서 논쟁이 붙어요. 여러 가지 파가 있죠. 언부진이론이라고 해서 ‘말은 뜻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라는 방식의 해석을 고수하는 사람. 이건 새로운 방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말이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유가문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의 유교문명을 건설하자고 하는 이른바 정치적 표어가 되는 거예요.

이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뭐냐? 거꾸로 있는 것 같죠. 왕필의 전체 저작 순서에 의하면 처음에 노자를 하고 그 다음 주역을 하고 그 다음 논어를 합니다. 그걸 삼현경(三玄經)이라고 해요. 사실 나중의 삼경에서는 노자, 장자, 주역이라고 하지만 왕필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삼현경은 노자, 주역, 논어가 삼현경이에요.

그래서 왕필시대를 현학이라고 하는 거고. 이런 식의 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왕필이 이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실 여기서는 미완이에요. 나중에 주역에 들어가서, 왜냐하면 왕필은 주역이 가학인 사람이고 따라서 노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텍스트예요.

왜 유행했냐.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누르기 위해서 조조의 아들이었던 조비가 도덕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선전을 했어요. 이른바 이교주의자를 누르기 위해서 노자를 많이 읽을 것을 권장했고. 말하자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자체의 철학적 의미가 뭐냐가 아니라 노자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수단이에요.

예를 들면, 도올 선생이 노자를 강의하면서 ‘인간과 지식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는 얘기를 하잖습니까? 목적은 노자에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거죠. 노자를 빙자해서 현실의 문제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잖습니까.

도올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거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노자의 주석을 했으니까 노자의 사상적인 실체가 있고, 그걸 통해서 왕필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자가 당시에 지식인들 사이에 토론하고 대화하는 매개가 되는 텍스트였다는 거죠.

그런데 정작 마음에 안 드는 구절에는 주석을 안 해요. 하상공과 비교해보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주석을 안 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죠. 어떤 짧은 구절에는 길게 주석을 해요.

무슨 말이냐? 원래 텍스트에 없던 이야기들, 왕필의 이야기가 엄청 들어간다는 거죠. 주석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보관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노자를 빙자해서 말하는 거예요.

더구나 이런 방식의 전통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노자는 한 무제 이후에는 특정 시대 도교 집단 이외에는 이단입니다. 이단.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혹시 교회 다니시는 분이 있고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불교를 자기 신앙으로 가진 분들에게 불교 경전은 진리의 말씀이죠. 이런 분들에게 성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하면 대충대충 읽죠. 그냥 재미삼아 본다거나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보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한 무제 이후에 도가라고 하는 쪽은 도가라고 하는 학술적 연구조직이 있어본 적이 없어요. 전부 유가 지식인들이 심심풀이 삼아 주석을 했거나 혹은 개인적 취향으로 했거나 혹은 도교적인 뭔가에 의해서 주석을 하는 부류이지, 논어나 맹자 부류의 책들 즉 공자의 진정한 뜻을 우리가 체득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주석서를 다룬 바가 없어요. 마치 논리학 연습 교재와 같습니다.

특히 청대에 노자 주석서가 나온 걸 보면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주석서를 한꺼번에 짬뽕해서 노자집회라는 책을 만들어요. 논어집주라는 책을 굉장히 체계적인 작품입니다. 당시까지 있어왔던 주석서를 다 갈라서 나름대로 분명한 체계와 의도 속에서 편찬한 책이 사서집주라면, 노자집회라는 책은 그냥 여러 가지 주석서를 모아둔 거예요. 그리고 ‘도가도 비상도’를 이렇게도 해석해보고 저렇게도 해석해보고. 굉장히 다양한.

유교경전이라는 틀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비교하자면 내년, 후년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는 사람들은 만날 밤새서 책을 보니까 머리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소설 책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여기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얘기 들어보니까 삶의 변화를 위해서, 일 년 열두 달 계속 이 강의 들으라고 하면 들으시겠어요? 여기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아마 석달 만 지나면 지겨워서. 쉽지가 않습니다. 떠드는 저도 지겨워요. 해마다 이 강의를 계속한다? 지겨워서 못할 거예요. 저도 몇 년 동안 쉬었다 하니까 조금. 얘기가 바깥으로 샜는데.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내용은, 본래의 구절에 맞는 방식으로 가지만 사실 말로 할 수 있는 것, 언표될 수 있는 것은 지사조형과 같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태에 관해서만 해당되니까, 이건 무형의 보이지 않는 것이란 말이죠.

意는 뭘로 얻어야 해요? 마음으로 얻는 거예요. 따라서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죠. 말은 수단적인 의미예요. 그래서 나중에 왕필의 자신의 언어이론을 설명하면서 得意忘象(득의망상), 뜻을 얻었으면 주역의 상을 잊어라. 이 표현을 그대로 가면, 앞에 주석한 거랑 다른 얘기가 나옵니다.

즉,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진정한 의도를 간취하는데 있는 거지 문자 그 자체에 매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해석학적 모험에 대한 천명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표어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를 그대로 보관하고 밝히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왕필의 언어관이 드러날 뿐이에요.

공자의 말씀을 담은 텍스트를 새롭게 즉 과거에 어떻게 해석했다고 해서 그게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공자의 진정한 뜻을 얻어야 해요. 하지만 공자의 말이라는 것이 오경 속에 논어 속에 들어있으니까. 논어는 공자의 뜻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거죠.

뜻을 얻기 위해서 주석의 상을 입히고, 말을 입히는 것처럼. 결국 득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문명질서의 비전이 되는 공자의 비전을 잡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왕필은 언어와 의미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하상공은 굉장히 다르게 해석합니다.

“경술經術과 정교政敎의 도를 말한다.” 즉,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경전을 연구하고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그 속의 내용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과정. 이건 당연히 문서나 언어로 하죠. 그리고 정교, 정교는 정치와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얘기한다면 정치와 행정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교령이고.

즉, 황제는 말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문서를 통해서 옥쇄를 꽝 찍잖아요. 그럼, 온 지방에 문서가 파급돼서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지는 거죠.

이건 뭐에 의존합니까? 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 나와 있는 것처럼, “무위無爲로 정신을 기르고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키며,” 이게 하상공 텍스트의 기본 의도인데.

무위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건 제왕학의 경전입니다. 하상공의 책은 제왕을 위한 책이에요. 수많은 신하를 다스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감정에 휩쓸리거나 쉽게 흥분하면 안 되니까.

신을 기른다고 하는 것은 아주 투명한, 냉철한 판단력. 현대어로 말하면 이성을 언제든 잃지 않아야 하는 상태예요. 나중에 한의학과 연결되면 오늘날 기공의 원리가 되는 내용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무사無事로 백성을 안정시킨다” 사(事)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보통 일이 없다고 번역하죠. 특히 맹자에서는 사(事)라는 글자가 유사(有司), 일이 있으면 담당 관리가 있다고 번역되거든요. 사가 그냥 일로 번역하면 안 돼요. 이건 국가에서 벌이는 사업이에요. 반드시 백성이 동원됩니다. 그냥 일 하는 게 없다는 게 아니라, 무사하면 백성들이 안정돼요.

백성들이 안정된다는 건 뭡니까? 단순해요. 당시의 백성의 삶은 겨울에 군사훈련받고 여름엔 농자 짓는 거예요. 농자 지을 때 부역 나가면 안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유사한 겁니다. 이 의미를 우리처럼, 이라, 사태 보편적으로 넓게 해석하면 안 되면, 일을 벌인다는 건 백성들에게 짜증난다는 거예요.

내 고향 땅을 떠나 먼 데까지 가서 고생하면서 돌 나르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하죠. 이런 일을 왜 합니까? 엄청난 인센티브가 주어질 때가 아니면 안 하죠. 바로 거기로 넘어가는 것이 법가의 해석방식입니다.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인센티브다. 현대어죠, 당근과 채찍. 이게 바로 상벌론이고, 노자는 거기까지는 표현하지 않아요. 굉장히 에센스라고 할까요? 그런 말들만 표현합니다.

여기 나온 내용은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정치의 비법은 말로 전달해줄 수 없다는 거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법이 말로 전달됩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치적으로 처세하는 것들은 말로 가르쳐줄 수 없다는 거죠.

『회남자』(淮南子) 「도응훈」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장자에 나오는 얘기가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이 순서가 여러분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전국시대의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라는 말과 장자에 나오는 윤편과 환공의 고사.

이런 얘기입니다. 왜 환공이 등장하느냐? 환공은 춘추업대가운데 천 번째 패자입니다. 성공한 정치인이란 말이죠. 왕은 아니지만 왕을 대리해서 천하를 다스렸던 사람이 패자죠. 그 사람이 어쨌길래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 그 배경에 대한 얘기로 권위가 있는 거예요.

중국 문장을 읽을 때 제일 눈여겨 봐야하는 게, 문장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나와 있는 인물이 대단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요. 왜. 센 놈이 나올수록 그 이야기가 센 얘기가 되는 거고, 저 같은 사람이 출현해봤자 아무도 안 봐요.

예를 들어, 제가 성공시대를 써봤자 누가 사보기나 하겠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제가 IT벤처해서 일본에 1억 달러를 수출한다, 책 쓰면 쫙 팔리죠. 제가 아무리 노자에 대해 번역본 잘해봤자 천 권 팔리면 많이 팔릴 거예요. 값어치를 그렇게 비교하면 곤란하지만, 사회적 관심사로서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죠. 마찬가지 잣대를 써야 해요.

환공이 한번은 처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상황 자체가 기이한 설정이에요. 만날 수가 없죠, 왜 거기 가서 책을 읽습니까. 화가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거죠. 장자 속에서 그런 기이한 만남이 많이 연출돼요. 그게 장자의 탁월성이죠.

책을 읽고 있으니까, “전하 무엇을 읽고 있습니까?”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다.” 그랬더니, “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 “그럼 성인의 찌꺼기를 읽고 계시군요.” “니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하니까 수레바퀴 깎는 얘기를 하면서, 이때 수레바퀴라고 하는 건 여기가 꽂는 부분을 얘기하는 거예요. 가운데 축을 꽂아야지만 잘 굴러가지 않습니까?

수레받기에 관한 비유는 ‘하나가 서른 몇 개를 통솔한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상징하는 당시의 기본적인 비유입니다. 이걸로 복잡하게 해석하는 건 곤란해요. 『사기』를 보면 학자가 이걸로 대화를 하면서 새롭게 오게 된 재상이 자기 아래쪽의 부하를 얼마나 잘 관리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니까 이 사람이 바로 캐치를 하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건 군과 신하를 관계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은유예요. 그게 여기 나오는 거예요. 윤편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레바퀴 깎는 장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군주의 치술수에 관한 묘리를 뭔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시키는 거고 수레바퀴라는 은유를 통해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치술의 묘리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는 수레바퀴를 깎았으니까 그걸 통해서 얘기하겠다. 오래도록 정교하게 깎으려고 하면 너무 많이 깎아서 달리다가 빠지고, 빨리 깎으려고 하면 뻑뻑해서 끼어지지 않아. 이걸 어떻게 깎아야 하는지 자식 놈한테 말로 전달이 됩니까? 안 되죠. 그건 자기가 자득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 나이까지 제가 깎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인이 남긴 말도 찌꺼기에 지나지 않고 성인이 전달하려고 하는 진정한 뜻은 거기에 없을 거다.

살았잖습니까? 말이 되잖아요. 요즘말로 하면, know-how죠. 포정의 고사에서도, 포정이 하는 말을 듣고 위의 문후가 “내 너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 양생의 도가 나오니까 웰빙?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장생.

당시 위나라가 진나라가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립돼 있었어요. 영토가 자꾸 줄어들고. 그래서 수도를 옮기고 부흥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공한 군주가 바로 문후인데, 맹자가 만나는 왕이잖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괜히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부흥에 성공했던 독특한 군주죠.

그 성공의 비법을, 그 책에서는 포정에게 배웠다고 외치는 거예요, 나중에. 그러니까 말이 되는 거죠. 양생이 장생이라는 말과 똑같은 거고, 당시 양생은 웰빙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는 건 곧 국가를 지키는 거고 부국강병하는 요체를 말하는 거죠.


▲ 노자를 제대로 읽는 법

가장 유명했던 노자의 구절이, 이건 저의 해석이 아니라 다 있는 해석이죠. 읽고 나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반전, 평화, 형이상학, 신비주의 용어 하나 없이 그냥 읽으니까 쉽죠? 쉬운 게 맞는 거예요. 고전을 읽을 땐.

20세기 우리가 해석한 건 의미가 없느냐?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죠. 당시의 문제가 이런 문제였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읽어야 해요. 문제는, 그와 같은 해석의 역사적 반성의 과정을 거치진 않고선 노자가 페미니스트다, 환경주의자라고 하면 공허한 담론이 돼요.

그런 게 뭘로 가느냐? 우리는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도 책에서 그런 얘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적어도 서구과학의 끝까지, 꼭 상 받는 걸로 기준을 삼을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열댓 명 나왔다, 그 다음에 신과학을 얘기한다는 건 말이 되는데 아직까지 우리가 수입한 서구과학이라는 것이 많은 부분 미흡하잖습니까?

그런데 저쪽에서 ‘서구과학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동양으로’ 하니까 가보지도 않고서 ‘동양 뭐?’하면 공허한 얘기가 되는 거예요.

노는 마당이 같은 차원에서 얘기돼야지만, 즉 문제 자체,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에서 내 현실이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봤자 영양가가 없다는 거죠.

따라서 지금 여기서 하는 얘기는 그동안 해석한 노자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잘못됐다가 아니라, 제대로 그런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서 연구를 할 때, 예를 들면 칸트를 통해 개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강점이라고 하면 칸트를 파야죠, 그런데 칸트가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를 백 년이고 이백 년 파봐야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까?

철학자마다 시대마다 자기가 실험했던 대상과 문제가 다른데, 노자가 만병통치약으로 회자되는 한 노자에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노자가 주로 고민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커다란 부분을 제대로 확인하고 끌어와야죠.

노자를 하기로 했지만, 노자라는 텍스트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공부한 과정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노자는 얼마나 노자가 안 좋은 책이었길래 수많은 유학자들이 좋은 책으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의 역사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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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용옥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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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생물과, 철학과, 한국신학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하고 대만대학, 동경대학에서 철학석사학위를 받고, 하바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다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6년의 학부수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대학, 중앙대학, 한예종, 국립순천대학교, 연변대학, 북경대학, 사천사범대학 등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제자를 길렀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등 90여 권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베스트셀러들을 통해 끊임없이 민중과 소통하여 왔으며 한국역사의 진보적 흐름을 추동하여왔다. 그는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와 <효경>의 역주를 완성하였으며, 그의 방대한 중국고전 역주는 한국학계의 기준이 되는 정본으로 평가된다. 그의 <중용>역주는 중국에서 번역되어(海南出版社) 중판을 거듭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자로서도 권위 있는 성서주석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영화, 연극, 국악 방면으로도 많은 작품을 내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국학國學의 정립을 위하여 한국의 역사문헌과 유적의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또 계속 진행되는 유튜브 도올TV의 고전 강의를 통하여 그는 한국의 뜻있는 독서인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금강경 강해(개정신판)>,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노자가 옳았다>는 모두 그의 새로운 국학의 여정을 예고하는 역작들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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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2014-07-27 공감 (0) 댓글 (0)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글에서 '공부와 학습'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이미지-버전으로 올린다. 이 또한 오프라인용 글쓰기를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당시 글을 쓴 계기는 북매거진 <텍스트>에 실린 한 서평이었지만, 몇 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2004)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란 ‘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교(敎)’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즉,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孔)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이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는 ‘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의 ‘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물론 '가르치다-배우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도록 하겠다),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德)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덕(德)’을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즉,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이 ‘대기만성’은 ‘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그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즉,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란 ‘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는 “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진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초월론적 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6.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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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2 공감 (5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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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도올 김용옥 13경 번역작업.




지금 박상익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고 있다.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쉽지 않은 역사서지만, 매끄러운 번역에 감사하며 읽고 있다.

박상익 교수가 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책이 있어 쭉 살펴보았다.

국내외 번역의 현주소와 나름대로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선 중국은 서역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대 서양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서 번역하면서
그 나라 학문연구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서유럽도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하면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번역경시 풍조에 대해서도 말한다.

1. 번역은 학문성과로 인정받지 못함
2. '매춘교수' 또는 '기지촌교수'들의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주어 취합한 날림 번역의 문제
3. 번역료의 문제 : 원고지 1장당 1,300원 정도의 헐값

위 문제들은 1985년도에 출간된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으로, 박상익 교수도 도올 김용옥을 계속해서 인용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서유럽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문명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부분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이슬람 문명에 의해 번역되어 흡수, 발전되었고,
나중 서유럽이 이슬람 점령지를 재탈환할 때 발견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철학 문서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그 결과 르네상스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상익 교수의 말대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잃어버린 100 년'이
'잃어버린 200 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번역가들의 노고를 날로 받아먹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의 원전을 번역하고 있는 천병희, 강대진 교수와
이 책을 쓴 서양사 부문의 박상익 교수,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이 분들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상한 시절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해답은
인문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인문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번역가들이 인정받는 시대도 곧 올 것이다.



- 도올 김용옥 번역 작업 리스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5) - 번역의 문제제기
화이트헤드 : 이성의 기능(1998)
금강경강해(1999)
노자 도덕경 : 길과 얻음 (2000)
요한복음강해(2007)
큐복음서(2008)
논어한글역주(2009)
효경한글역주(2009)

도올 김용옥 비판서들 중에 학문적 성과를 예로 들면서,
아직까지 제대로 이룬 것이 않느냐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럿인데,
이 사람들은 위에 말한 대로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
자기 소원이 13경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업에 돌입하신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끝까지 완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13경
<주역><서경><시경><주례><예기><의례><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논어><효경><이아><맹자>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민족문화추진위에서 고전 국역사업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중이다.
역사 좋아하는 분들은 위에서 모든 국역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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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튼 2009-11-04 공감 (2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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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배

노자, 길과 얻음/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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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5. 24. 15:48

 이웃추가

1.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뭇 묘함이 모두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

 

2.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못생김이다.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좋음의 좋음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좋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친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은 지어지면서도 잔소리 아니하고 낳으면서도 가지려 아니하고 하면서도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한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 생각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3.
현명한 이를 숭상치 말라! 백성들로 다투게 하지 말지어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말라! 백성들로 도둑이 되게 하지 말지어다. 욕심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로 그 마음이 어지럽게 하지 말지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늘 백성으로 앎이 없게 하고 바램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알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4.
길은 빔으로 가득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그윽하도다! 온갖 것의 으뜸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도다. 맑고 맑도다! 있는 것 같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네. 상제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5.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온갖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어질지 않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같고 대피리같도다. 속은 비었는데 구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오는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다.

 

6.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어 있는 것 같도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곡신(谷神)이란 골짜기 가운데의 빈 곳이다. 형태나 그림자가 없고, 거스르거나 어기지 않으며, 낮은 곳에 처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함을 지켜 시들지 않으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되 그 형상을 보이지 않으니 지극한 존재다. 낮은 곳에 처하면서 고요함을 지키고 있어 이름을 지을 수가 없으므로 현빈(玄牝)이라고 부른다. 문이란 현빈이 말미암는 곳이다. 그 말미암는 바의 근본은 태극과 더불어 한 몸이므로 천지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있다고 말하려고 하니 그 형상을 볼 수 없고,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므로 '겨우겨우 이어진다'고 했다 모든 사물을 이루어 주면서도 힘들지 않으므로 '쓰는 데 힘들이지 않는다'고 한다.(왕필주석)

 

7.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 아닌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8.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길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짐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다스림을 좋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함을 좋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9.
지니고서 그것을 채우는 것은 때에 그침만 같지 못하다. 갈아 그것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을 가득 채우면 그를 지킬 길이 없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10.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 능히 떠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를 오로지 하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가믈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능히 흠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또 밝아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길은 생겨나고 덕은 쌓아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지배치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네.

 

※움직이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모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흠 하나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이 변화하는 대로 저절로 따를 수 있겠는가? 사방을 환히 알면서도 작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며,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을 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임채우)

 

11.
서른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머리에 모인다. 그 바퀴머리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가 됨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12.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 달리며 들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감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상(爽)은 어긋나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입의 기능을 잃게 하므로 '상'이라고 했다. 저 귀 눈 입 마음은 모두 그 타고난 본성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성명(性命)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그러함을 해치기 때문에 눈 멀고 귀 먹고 입맛 버리고 미친다고 했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바른 길을 막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요상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했다. 배를 위한다는 것은 사물로 자신을 기르는 것이고, 눈을 위한다는 것은 사물에 의지해 자기가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는다.(왕필주석)

 

13.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사람은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그것을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그것을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사랑을 받으나 욕되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큰 걱정을 귀히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나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14.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荑)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것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없는 모습이요 것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하다 하도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길을 잡어 오늘의 있음을 몬다. 능히 옛 시작을 아니 이를 일컬어 길의 벼리라 한다.

 

※(도는)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소리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므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알 수도 없다. 더 이상 나의 귀 눈 몸으로는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캐물을 수 없고, 섞여서 하나이다. 없다고 말하려고 하니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려 하니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이른다.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 만물의 근본이다. 비록 지금과 옛날이 같지 않고 때가 바뀌고 풍속이 변했지만, 참으로 모두 이(무형무명의 도)에 말미암아 치세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일들을 다스릴 수 있다. 아득한 옛날이 비록 멀지만 그 도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지금에 있어도 옛날의 시원을 알 수 있다.(왕필주석)

 

15.
옛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세미하고 묘하며 가물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이 없다. 대저 오로지 헤아릴 길이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내를 건너는 것 같고.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고.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흩어지도다.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다.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 텅 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혼돈스런 모습이여.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을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채우려 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새로이 이루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도를 얻은 이는 미묘하고 그윽히 통달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지만 억지로 말해보자면 마치 살언 겨울강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듯 신중하며, 찾아온 손님처럼 엄숙하다가도, 얼음이 녹듯이 푸근하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질박하며, 계곡같이 비고, 혼탁한 듯 세속에 섞여 있다. 누가 능히 혼탁하게 섞여있음으로써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으며, 누가 능히 가만히 놓아둠으로써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득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무릇 채우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임채우)

 

16.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온갖 것은 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각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또 일컬어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갖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 맞으면 길에 들어 맞는다. 길에 들어 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위태롭지 아니하다.

 

※완전히 비우고 아주 조용함을 지키라. 만물이 다 함께 자라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되돌아감을 보나니, 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기 그 뿌리로 다시 되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니 이를 일러 명(命)을 회복한다고 하고, 명을 회복하면 영원하게 되며 영원함을 알면 밝다고 하나니, 영원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영원함을 알면 통하게 되니, 통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같게 되고, 하늘과 같으면 도를 얻게 되며, 도를 얻으면 오래갈 수 있으니, 평생 위태롭지 않게 된다.(임채우)

 

17.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친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곳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윽하도다! 다스리는 자는 그 말을 귀히 여기는 도다. 공이 이루어지고 백가지 성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도다!

 

18.
큰 길이 없어지니깐 어짐과 옳음이 있게 되었다. 슬기로움이 생겨나니깐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육친이 불화하니깐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국가가 어지럽게 되니깐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19.
성스러움을 끊어라. 슬기로움을 버려라. 뭇사람의 이로움이 백배할 것이다. 어짐을 끊어라. 옳음을 버려라. 뭇사람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교사스러움을 끊어라. 이로움을 버려라.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셋은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족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아감이 있게 하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지니 사사로움을 적게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20.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네와 아니요가 다른 것이 얼마뇨? 좋음과 싫음이 서로 다른 것이 얼마뇨? 사람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으리. 황량하도다! 텅 빈 곳에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네. 뭇사람들은 희희낙낙하여 큰 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벌리는 것 같고, 화사한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 같네. 나 홀로 담담하도다. 그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웃음 아직 터지지 않은 갓난 아기 같네. 지치고 또 지쳤네.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왜 나홀로 이다지도 부족한 것 같은가? 내 마음 왜 이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혼돈스럽도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흐리멍텅할 뿐일세. 세간의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 홀로 담담할 뿐일세. 담담하여 바다같이 너르고, 거센 바람 일 때는 그칠 줄을 모르네. 뭇사람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완고하고 비천하여 쓸모가 없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온갖 것을 먹이는 엄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21.
빔의 덕의 포용만을 오로지 길은 따를 뿐이다. 길의 것됨이 오로지 황하고 오로지 홀하다. 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모습이 있네. 황하도다 홀하도다! 그 가운데 것이 있네. 그윽하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 처음을 살필 수 있지. 뭇 처음의 모습을 어찌 알랴! 이 길로 알 뿐이지.

 

22.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 구부리면 펴진다. 파이면 고이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고, 많으면 미혹하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를 껴안고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니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니 빛난다. 스스로 뽐내지 않으니 공이 있고, 스스로 자만치 아니하니 으뜸이 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하늘 아래 그와 다툴 자가 없다. 옛말에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진다 한 말이 어찌 헛말일 수 있으랴! 진실로 온전할지니 길로 돌아갈지어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다즉혹)

 

23.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갈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서랴! 그러므로 길을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길을 구하는 자는 길과 같아지고 얻음을 구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길과 같아지는 자는 길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얻음과 같아지는 자는 얻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잃음 또한 그를 즐겨이 얻으리.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말은 적은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퍼붓는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이는 도와 동화되고, 덕을 추구하는 이는 덕과 동화되며, 잃을 일을 좇는 자는 잃어 버리게 된다. 도와 하나가 되면 도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덕과 같아지면 덕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를 잃는 일에 같이 하면 바로 잃어 버리게 되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므로, 불신이 있다.(임채우)

 

24.
발꿈치를 올리고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길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살이라 한다. 세상은 그것을 혐오할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처하지 아니하리니.


25.
혼돈되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겼다. 적막하고 모습이 없네. 쓸쓸하도다. 짝없이 외로이 서서 함부로 변하지 않는다. 가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면서도 위태롭지 아니하니 가히 하늘 아래 어미로 삼을만 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 그것을 글자로 나타내어 길이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지어 크다고 하네. 큰 것은 가게 마련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게 마련이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게 마련이네. 그러므로 길은 크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의 주인 또한 크다. 너른 우주 가운데 이 넷의 큼이 있으니 사람이 주인이 그 중의 하나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을 뿐이다.

 

※서(逝)는 가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돌아다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서'라고 했다. 원(遠)은 끝닿는 것이다. 두루 다니면서 끝까지 가지 않은 바 없어서, 한쪽으로만 치우쳐 가지 않으므로 멀어진다고 했다. 가는 바대로 따르지 않고, 그 몸은 우뚝 서 있으므로(즉 도는 독립해 있으므로) '반(反)'이라고 했다.(왕필주석)

 

26.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안정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종일 걸어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 놓지 않고, 비록 영화로운 모습이 보이더라도 한가로이 처하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어찌 일만수레의 주인으로서 하늘 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요?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조급히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

 

27.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맺는 자는 끈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늘 사물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잇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

 

28.
그 수컷됨을 알면서도 그 암컷됨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 계곡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떠나질 아니하니 다시 갓난아기로 되돌아 간다. 그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어긋나질 아니하니 다시 가없는데로 되돌아 간다. 그 영예를 알면서도 그 굴욕을 지키면 하늘 아래 골이 된다. 하늘 아래 골이 되면, 항상스런 덕이 이에 족하니 다시 질박함으로 되돌아 간다.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그릇이 생겨난다. 성스러운 사람이 이 그릇을 써서 세상의 제도를 만들고 따라서 그 우두머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큰 다스림은 자르지 않는 것이다.

 

※수컷은 앞서는 성질을 가진 분류이고, 암컷은 뒤쳐지는 붙이다. 세상에서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뒤쳐지게 됨을 알기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두지만 앞서고, 계곡은 사물을 부르지 않지만 사물이 스스로 돌아가고, 어린아이는 꾀를 쓰지 않지만 저절로 자연의 지혜에 합치한다... 크게 짓는다는 것은 천하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 것이므로 자르지 않는다.(왕필주석)

 

29.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 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러운 기물이다. 도무지 거기다 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는 자는 놓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물의 이치는 앞서 가는 것이 있으면 뒤 따라가는 것이 있고, 들여 마시는 것이 있으면 내 뿜는 것이 있고, 강한 것이 있으면 여린 것이 있고, 작게 꺽이는 것이 있으면 크게 무너지는 것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과분한 것을 버린다.

 

※만물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따를 수는 있어도 작위할 수는 없고, 통할 수는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물에는 일정한 본성이 있는데 (억지로) 작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사물은 오고 가는데(즉 자기 나름대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붙잡으려하기 때문에 필히 놓치게 된다.(왕필주석)

 

 30.
길을 가지고 사람의 주인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무력의 댓가는 반드시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 마련이다. 군대가 처한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대군이 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흉해가 따른다. 부득이 해서 어려움을 잘 구해줄 뿐이지 무력으로 남을 취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가 있어도 자고치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아니하며 좋은 성과가 있어도 교만치 아니한다.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부득이해서 그러했을 뿐이니, 성과를 올렸다고 해서 강함을 나타낼려 하지마라. 모든 사물은 강장하면 할수록 일찍 늙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길답지 아니하다고 한다. 길답지 아니하면 일찍 끝나버릴 뿐이다.

※장(壯)은 무력으로 사납게 일어나는 것이니, 군사로 천하에 강포함을 비유한 것이다. 사나운 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다하지 못하므로, 사납게 일어난 것은 반드시 도에 맞지 않으므로 일찍 그친다.(왕필주석)

 

31.
대저 아무리 정교한 병기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것을 혐오할 뿐이니 그러므로 길이 있는 자는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덕을 갖춘 사람은 평상시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전쟁시에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무기란 것은 도무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며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해서 그것을 쓸 뿐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선 항상 담담초연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개가를 올려도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일 뿐이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하늘 아래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고례에 길사때에는 왼쪽을 높은 자리로 하고 흉사 때에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하는 법이다. 부관장군은 왼쪽에 자리잡고 상장군은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이것은 곧 상례로써 전쟁에 처하란 말이다. 사람을 그다지도 죽였으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읍할 것이다. 전쟁엔 승리를 거두어도 반드시 상례로써 처할 것이다.

 

32.
길은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제후 제왕이 능히 이 길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면 단 이슬이 내리듯이, 백성들은 법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제 질서를 찾는다. 스스로 그러함에 제동을 걸어 비로소 이름이 생겨난 것이니,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또한 그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침을 알아야 위태롭지 아니할 수 있다. 길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들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3.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 말로 밝은 것이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 말로 강한 것이다.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꾀를 쓰는 것은 그 꾀를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쓰는 것은 그 힘을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니, 스스로에 밝으면 사람들이 그를 피하지 않고(혹은 다른 사람들도 밝게 알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을 쓰면 다른 사물을 고칠 필요가 없다.(왕필주석)

 

34.
큰 길은 범람하는 물과도 같다.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이 이 길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데도 그 길은 잔소리 하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만물을 입히고 먹이면서도 주인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다. 늘 바램이 없으니 작다고 이름할 수도 있다. 만물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는데 주인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5.
큰 모습을 잡고 있으면 천하가 움직인다. 움직여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안락하다.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손을 멈추게 하지만, 길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도무지 담담하여 맛이 없다. 그것을 보아도 보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들어도 듣기에 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써도 쓰기에 궁함이 없다.

 

36.
장차 접을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거라. 장차 약하게 할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 주거라. 장차 폐할려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거라. 장차 뺏을려면 반드시 먼저 주거라. 이것을 일컬어 어둠과 밝음의 이치라 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이니라. 물에 사는 고기는 연못을 튀쳐나와서는 아니 되나니,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將欲廢之, 必固興之(장욕폐지 필고흥지)

 

※강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마땅히 이 네가지로써 해야 한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해치게 하는 것이니, 형벌을 빌리는 것을 능사로 삼아 사물을 해치지 않으므로 '미명(微明)'이라고 한다. 충분히 펴고 흡족하게 해주었는데도 다시 펴려고 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빼앗김을 당하게 되지만, 이와는 달리 상대에게 부족하게 펴주어서 다시 더 펼침을 구하게 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보탬이 되고 자신은 위태로워진다.(왕필주석)

 

37.
길은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제후와 제왕이 만약 이를 잘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장차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누가 교화한다고 무엇을 하려 한다면 나는 그 놈을 이름도 없는 통나무로 때려 눕힐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망이 없을지니, 바램이 없어 고요하면 하늘 아래 인간세가 스스로 질서를 찾아갈 것인지.

 

※道常無爲, 而無不爲(도상무위 이무불위)

 

38.
윗덕은 덕스럽지 아니하다. 그러하므로 덕이 있다. 아랫덕은 덕스러우려 애쓴다. 그러하므로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서 함이 없다. 아랫덕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좋은 어짐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가지고서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좋은 옳음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좋은 예법은 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꿈치를 잡아 내동갱이 친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린 후에나 덕을 얻는 것이요, 덕을 잃어버린 후에나 어짐을 얻는 것이요, 어짐을 잃어버린 후에나 옳음을 얻는 것이요, 옳음을 잃어버린 후에나 예법을 얻는 것이다. 대저 예법이란 것은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믿음의 엷음이요 모든 어지러움의 머리다. 시대를 앞서 간다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길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단이다. 그러하므로 어른스러운 큰사람은 그 도타움에 처하지 그 잃음에 살지 아니한다. 그 열매에 처하며 그 꽃에 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부실덕 시이무덕)

 

※상덕은 덕스럽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있고, 하등의 덕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없다. 상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무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작위하지 않고, 하등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작위하되 일부러 한다. 상등의 인은 작위하지만 일부러 하지는 않고, 상등의 의는 작위하면서 일부러 하며, 상등의 예는 자기의 행위에 응답이 없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시킨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 버린 후에야 덕이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인이 있으며, 인을 잃어 버린 후에야 의가 있고, 의를 잃어 버린 후에야 예가 있으니, 저 예라는 것은 충직스러움이 사라지고 혼란으로 가는 시초이다. 남보다 앞서서 안다는 것은 도의 꽃, 즉 화려함이면서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장부는 후덕하게 행동하고 각박하지 않으며, 그 열매에 처하고 꽃에 머물지 않으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이다.(왕필주석)

 

39.
옛날에 하나를 얻은 사람들은 그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이치에 도달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말갛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코, 하늘의 기운은 하나를 얻어 신령하고, 땅의 골은 하나를 얻어 빔으로 차고, 만가지 것은 하나를 얻어 생겨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 하늘 아래를 평안히 다스린다. 이는 모두 하나로써 이룰 뿐이다. 하늘은 하나로써 맑지 못하면 갈라질 것이요, 땅은 하나로써 편안치 못하면 짜개질 것이요, 하늘의 기운은 하나로써 신령치 못하면 가물 것이요, 땅의 골은 하나로써 비어차지 못하면 마를 것이요, 만가지 것은 하나로써 생겨나지 못하면 멸할 것이요, 제후와 제왕은 하나로써 고귀하지 못하면 실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으로 뿌리를 삼고, 높음은 낮음으로 바탕을 삼는다. 그러므로 제후와 제왕은 늘 스스로를 일컬어 고독한 사람이라 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하고 불곡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함으로 뿌리를 삼는다 함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아니타니만 못하다. 녹녹하여 옥석같이 빛나기를 삼가고 낙낙하여 보석같이 빛나기를 삼가라.

 

※일은 숫자의 시초이자 사물의 궁극점이다. 각각의 사물들은 일이 낳은 것이니 일이 만물의 주가 된다. 사물은 모두 각각 이 하나를 얻어서 만들어지니, 만들어진 뒤에는 하나를 버리고 만들어진 데에 거한다. 만들어진 데 거하면 그 근원, 즉 하나를 잃게 되므로, 갈라지고 흔들리고 없어지고 말라버리고 소멸되고 쓰러진다.(왕필주석)

 

40.
그 반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길의 늘 그러한 움직임이다. 약한 것은 길의 늘 그러한 쓰임이다. 하늘 아래 만가지 것들이 있음에서 생겨났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도다.

 

41.
훌륭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열심히 그를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중간치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긴가민가 할 것이다. 그런데 하치리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치리들이 웃지 않으면 내 길은 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전해 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밝은 길은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윗덕은 아랫 골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너른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서 있는 덕은 기대 있는 것 같고, 질박한 덕은 엉성한 것 같다.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 진 것 같지 않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길이란 늘 숨어 있다. 길이란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대저 길처럼 자기를 잘 빌려 주면서 또한 남을 잘 이루게 해 주는 것이 있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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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像無形(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큰 도는 평평하지 않은 것 같고 : 뇌는 깊은 웅덩이이다. 크게 평평한 도는 사물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에 사물을 잘라서까지 평평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평평함이 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깊은 웅덩이 같다. 최상의 덕은 아무 것도 없는 골짜기 같고 : 그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아 마음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흰 것은 때 묻은 듯 하고 : 흰 것을 알되 어두운 것을 지키는 것은 아주 희어야 가능하다. 솔직한 진실은 틀린 것 같고 : 질박한 참모습은 그 참됨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마치 사실과 위배되는 듯하다.(왕필주석)

 

42.
길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데 셋은 만가지 것을 낳는다. 만가지 것은 어둠을 등에 지고 밝음을 가슴에 안고 있다. 텅빈 가운데 기름 휘젖어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독과 부족과 불곡인데 제왕과 제공들은 이것들로 자기를 부른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보태지고 보태면 덜어지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칠 뿐이다. 모든 강폭한 것은 제명을 살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이것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는다.

 

43.
하늘 아래 가장 여린 것이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것을 앞달린다. 사이가 없는 곳에 까지라도 아니 들어감이 없다. 나는 이로써 함이 없음의 위대함을 안다. 말하지 아니하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을 하늘 아래 미치는 자가 없다.

 

44.
이름과 내 몸, 어는 것이 나에게 가까운 것이냐? 내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귀중한 것이냐? 얻음과 잃음, 결국 어느 것이 병이냐? 이 까닭으로 심히 아끼다간 크게 쓰게 되고, 많이 간직하다간 반드시 크게 망하게 되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으리. 그리하면 머리가 되고 또 오래 가리.

 

45.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크게 정교로운 것은 졸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사람은 더듬는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쉼으로 더위를 이기는데, 그래도 쉬어 깨끗함이 하늘 아래 바른 것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대성약결 기용불폐), 大盈若沖 其用不窮(대영약충 기용불궁), 大直若屈(대직약굴), 大巧若拙(대교약졸), 大辯若訥 (대변약눌)

 

46.
하늘 아래 길이 있으면 전장에서 달리는 말도 되돌려 똥구루마를 끌게 하는데, 하늘 아래 길이 없으면 아기밴 암말조차 전장에서 해산을 한다. 족함을 모르는 것처럼 인간에게 큰 화는 없다. 바램을 계속하는 것처럼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족이야말로 늘 족한 것이다.

 

47.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알고 창밖을 내다 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나갈수록 멀어지고, 알수록 적어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니지 아니하여도 알고, 드러내지 아니하여도 드러나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엿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不出戶 知天下) : 사물마다 종주(본질과 근원) 되는 것이 있으니, 길은 다르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은 갖가지이나 이르는 곳은 하나다.(왕필주석)

 

48.
세상이 말하는 배움을 하면 매일 불어난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길을 하면 매일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들어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함이 없는데까지 이르면 되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하늘 아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일이 없음으로 하라. 일이 있는데 이르게 되면 하늘 아래를 다스리기엔 부족하리로다.

 

49.
성스러운 사람은 항상스런 마음이 없다. 오로지 백가지 성의 사람들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 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 준다. 그러하므로 나의 좋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믿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나는 믿을 뿐이다. 그러하므로 나의 믿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하늘 아래에 임할 때에는 늘 화해롭다. 하늘 아래를 위하여 늘 그 마음을 혼돈되이 한다. 모두 귀와 눈을 곤두 세울 때, 성스러운 사람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

 

50.
삶을 떠나면 죽음으로 가게 마련이다.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다면, 죽음의 무리도 열에 셋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 움직여 죽음의 땅으로 가는 기회 또한 열에 셋이 있다. 대저 왠 까닭인가? 그 삶을 살려고 하는 발버둥이 너무 후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대,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아니하고, 군대를 들어가도 갑옷을 입거나 병기를 차지 아니한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드리댈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내리 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저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 죽음의 땅이 없기 때문이다.

 

51.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다. 덕이란 얻어 쌓는 것이다. 것이란 드러내는 것이다. 세란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가지 것들은 길을 높이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다. 길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대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이란 생긴 그대로의 것이요 덕이란 얻어 쌓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길은 온갖 것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가 하면 멈추게도 하고 또 독을 주기도 한다. 또 길러 주고 덮어 감싸주는 것이다.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아니하고, 되게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지 아니하며, 자라게 하면서도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하는 것이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도생지 덕축지 물형지 세성지)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부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사물이 생겨난 후에는 길러지고, 길러진 뒤에는 형체를 이루고, 형체를 이룬 후에는 완성된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가? 도다. 무엇을 얻어 길러지는가? 덕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모양을 이루는가? 물(物)이다. 즉 사물의 종류에 의해 각자의 형상이 정해진다. 타고난 종류대로 따르기만 하므로 사물은 형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처해진 형세대로 맡기므로 사물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무릇 사물이 생겨나는 소이와 공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말미암는 바가 있다는 것은 결국 도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므로, 끝까지 미루어보면 또한 도에 이른다. 그 인한 바를 따르므로 각자 알맞게 된다.(왕필주석)

 

52.
하늘 아래 시작이 있었다. 그러니 그 시작으로 하늘 아래의 어미를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을진대, 그 아들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아들을 알았을진대, 다시 그 어미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몸이 없어질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얼굴의 감정의 구멍을 막고 사타구니의 욕정의 문을 닫아라! 그 몸이 다할 때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구멍을 열고, 일로만 바삐 건너다니면, 그 몸이 끝날 때까지 구원이 없을 것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연약함을 지킬 줄 아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드러내어 다시 그 밝음으로 되돌려라! 네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곧 향상됨을 익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53.
나에게 조금만큼의 지혜가 있어서 하늘 아래 큰 길을 행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샛길로 빠질까봐 두려울 뿐이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하고 쉬운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나니, 조정의 뜨락이 심히 깨끗할 때 백성들의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어있다. 정교로운 무늬비단옷을 입고 시퍼런 칼을 띠에 두르고 마시고 먹는 것을 싫도록 하고 가진 재화에 남음이 있는 그자들은 누구인가? 도둑놈이라 하는 것이다! 길이 아닐진대!

 

54.
잘 심는 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는 자의 것은 뺏을 수 없다. 이 길의 사람들은 자손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그 길을 내 몸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참되며, 그 길을 내 집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남음이 있으며, 그 길을 내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자라며, 그 길을 내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요로우며, 그 길을 내 하늘 아래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두루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써 몸을 볼 것이요, 그 집으로써 집을 볼 것이요,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볼 것이요,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볼 것이요, 그 하늘 아래로써 하늘 아래를 볼 것이다. 내 어찌 감히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안다고 말하리요? 이 때문일진대!

 

55.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바알간 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늘 그러한 삶에 덧붙이는 것을 요상타 한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 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길답지 않다고 한다. 길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56.
아는 자는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감정의 구멍을 막고, 그 욕정의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그 빛이 튀지 않게 하며, 그 티끌이 고르게 되도록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고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도 없고,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천할 수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만 하늘 아래 귀하게 되는 것이다.

 

57.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정법으로 하고 무력을 쓸 때는 기법으로 하고 천하를 취할 때는 무사로 하라! 내 어찌 그러함을 알겠는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 아래 꺼리고 피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이 이로운 기물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나 가정은 점점 혼미해져가고, 사람이 기교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괴한 물건이 점점 생겨나고, 법령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적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질서를 찾고, 내가 고요하기를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게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하게 된다. 나는 바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백성들은 스스로 통나무가 될 뿐이다.

 

58.
그 정치가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그 백성은 순후해진다. 그 정치가 똘똘하면 똘똘할수록 그 백성은 얼얼해진다.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 있도다! 복이여! 화가 너에게 숨어 있도다! 누가 저어 가없는 근원을 알리! 세상에 절대적인 정상이라곤 없오. 정상은 늘 다시 비정상이 되게 마련이요. 그리고 또 좋음은 다시 나쁨이 되기 마련이요. 사람의 어리석음이 너무 오래 되었도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모나면서도 가르지 아니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자르지 아니하며, 곧으면서도 뻗대지 아니하며, 빛나면서도 튀쳐나지 아니한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기, 복혜화지소복) : 누가 잘 다스린다는 것의 표준을 알겠는가? 다만 바르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고, 형상으로 이름 지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둑어둑하게 천하가 크게 교화되는 이것이 그 표준이다.(왕필주석)

 

※光而不燿(광이불요) : 밝지만 비춰내지 않는다.

 

59.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 대저 오로지 모든 것을 아낄 줄 알면 모든 것이 일찍 회복되는 것이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못 이루는 것이 없고, 못 이루는 것이 없으면 그 다함을 알지 못한다. 그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얻는 그 어미는 너르고 오래 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뿌리깊고 단단한 길, 오래살고 오래 보는 길이라고 한다.

 

60.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조리기 같이 하라. 길로써 하늘 아래에 임하면 그 귀신들도 영력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실은 그 귀신이 영력을 아니 부린다함이 아니요,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함일러라. 그 귀신의 영력이 사람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스러운 사람 또한 사람을 해하지 아니한다. 대저 귀신도 사람도 서로를 해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귀신과 사람 서로에게 쌓여가는 것이다.

 

※신도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못한다. 사물이 타고난 천연을 지키고 있으면 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신이 신령스러운 줄 알지 못하게 된다.(왕필주석)

 

61.
큰 나라는 아랫물이다. 그래서 하늘 아래의 모든 윗물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며, 하늘 아래의 모든 숫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써 자기를 낮춘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게 자기를 낮추면 작은 나라에 믿음을 주고, 작은 나라는 자기를 낮추면 큰 나라에 믿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할 수 있고 하나는 자기를 낮춤으로 취하여 질 수 있다. 큰 나라는 사람들을 밑에 두고 거느리기를 좋아할 뿐이며 작은 나라는 사람 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대저 양편이 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진대, 큰 나라가 마땅히 자기를 낮추기를 잊어서는 아닐될 것이다.

 

62.
길이라는 것은 만가지 것의 속 깊은 보금자리요, 좋은 사람의 보배며, 좋지 못한 사람도 지닌 것이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서 사람을 홀리며 고매한 듯한 행위는 사람의 위선을 더할 뿐이다. 사람의 이러한 좋지 못함도 모두 길에서 나온 것일진대 내 어찌 외면할 수만 있으랴! 그러므로 천자를 옹립하고 삼공을 세우는데 비록 보석을 두손으로 바쳐들고 사두마차행렬을 앞세우며 융성한 헌례를 다해도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라도 이 길을 헌상하느니만 못하다. 옛부터 이 길을 귀하게 여긴 뜻은 무엇이었든가? 구하면 이 길로 얻고 죄가 있어도 이 길로 사함을 받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하늘 아래 귀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니.

 

63.
함이 없음을 함으로 삼고, 일이 없음을 일로 삼고, 맛이 없음을 맛으로 삼는다. 작은 것에 큰 것으로 갚고, 적은 것에 많은 것으로 갚으니, 원한을 덕으로 갚을 뿐이다. 어려운 것을 쉬울 때부터 도모하고, 큰 것을 미세할 때부터 도모하라! 하늘 아래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지어지며, 하늘 아래 아무리 큰 일이라도 반드시 미세한데서부터 지어지느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끝까지 큰 일을 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늘 큰 일을 이루어간다. 대저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믿음이 적고, 너무 쉬운 것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몰고 온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온갖 것을 늘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끝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 무위로 거하고, 말하지 않음으로 가르치며, 담백함으로 맛을 삼으니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다. 大小多少, 報怨以德(대소다소 보원이덕) : 작은 원망이라면 보복할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한이라면 곧 천하가 죽이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같이 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왕필주석)

 

64.
사물이 흔들리지 않을 때 가지고 있기 쉽고, 드러나지 않았을 때 도모하기 쉽다. 그 연약할 때는 바스라지기 쉽고, 눈에 띄지 않을 때는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하고 그것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라! 아람드리 나무도 털끝같은 싹에서 생겨나고, 아홉층의 높은 투각도 한 줌의 쌓인 흙에서 일어나고, 천리의 걸음도 발아래서 시작한다. 할려 하는 자는 반드시 패할 것이요, 잡으려 하는 자는 반드시 놓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기에 패함이 없고, 잡음이 없기에 놓침이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늘 다 이루어질 듯하다가 꼭 패한다. 끝을 삼가기를 늘 처음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패하는 일이 없을지니.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바라지 않음을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아니함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치는 본바탕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만가지 것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65.
예로부터 길을 잘 실천하는 자는 길로써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길로써 바보같이 만든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복이다. 이 둘을 아는 것이야말로 또한 늘 그러한 본받음의 틀이니, 가믈한 덕이라 일컫는다. 가믈한 덕이여! 깊도다! 멀도다! 이 세계와 반대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뒤에야 다시 큰 따름에 이를지니.

 

66.
강과 바다가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백성의 위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의 앞에 서려는 자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위에 처해 있어도 아랫백성이 무겁다 아니하고, 앞에 처해 있어도 뒷백성이 해롭다 아니한다. 그러므로 하늘아랫 사람들이 즐거이 그를 추대하면서도 싫어하지 아니한다. 항상 그는 다투지 않으니 하늘아랫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다툴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67.
하늘아랫 사람들이 모두 내 길이 너무 커서 같지않다고들 빈정댄다. 그런데 오로지 크기 때문에 같지 않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 말대로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보잘 것 없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나에겐 세 보배가 있는데 이를 늘 지니고 지킨다. 첫째는 부드러움이다. 둘째는 아낌이다. 셋재는 하늘 아래 앞서지 않음이다. 부드럽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아끼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하늘 아래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온갖 그릇 중에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부드러움을 버리고 용감하려고만 하고, 아낌을 버리고 널리 베풀기만 하려하고, 뒤를 버리고 앞서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것이다! 대저 부드러움으로써 싸우면 이길 것이요, 그것으로써 지키면 단단할 것이다. 하늘이 장차 사람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부드러움으로 그를 막아줄 뿐일 것이다.

 

68.
장수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잘 싸우는 자는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맞서지 않는다. 사람을 잘 쓰는 자는 자기를 잘 낮춘다. 이것을 일컬어 않음의 덕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쓰는 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한다 한다. 이것은 모두 예로부터 준칙이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69.
병가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주인이 될 생각을 아니하며 손님이 될 뿐이요, 나아갈 때는 촌으로 함도 삼가고, 물러날 때는 척으로 한다고. 이것을 일컬어 감이 없이 가고 팔뚝이 없이 내동댕이 치고 무기가 없이 무력을 쓴다고 한다. 이러하면 곧 무적인 것이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나의 세 보배를 거의 다 잃을지니. 그러므로 접전하는 군대가 서로 비등할 땐 애통해 하는 자가 이기느니.

 

70.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하늘아랫 사람들이 능히 아는 사람이 없고 능히 행하는 사람이 없다. 말에는 그 뼈대가 있고 일에는 그 사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대저 그것을 알지 못하니 나를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나를 아는 자도 거의 없고 나를 본받는 자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겉에는 남루한 갈포를 입고 속에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1.
알면서도 아는 것 같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 같은 것은 병이다.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알고 있으면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은 병이 없다. 병을 병으로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72.
백성이 다스리는 자의 권위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결국 가장 두려운 것이 오고야 만다. 백성이 사는 곳을 들들 볶지 마라! 백성이 사는 것을 지겹게 느끼지 않게 하라! 다스리는 자들이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말아야 백성들도 자기 삶을 지겹게 느끼지 않는 법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자기를 알면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높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73.
감히 무엇을 하는데 용감한 자는 죽임을 당한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데 용감한 자는 산다. 둘다 용기는 용기다! 그런데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롭다. 하늘이 미워하는 바 누가 그 까닭을 알 수 있으리요?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늘 매사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아니하면서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아니하는데도 저절로 온다. 천천히 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또 너르다.

 

※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74.
백성들이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데도 이상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나는 그 놈을 붙잡어서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죽임을 관장하는 자가 있으니 죽인다면 그마저도 죽여야 할 것이다. 대저 죽임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한다고 한다. 목수를 대신해서 자귀질을 하는 사람치고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75.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세금을 너무 받어 쳐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주리는 것이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꾀를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그 윗사람들이 너무 그 사는 것을 후하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대저 오로지 사는 것에 매달려 있지 아니하는 자가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보다 슬기로운 것이다.

 

76.
사람의 생명은 부드럽고 약하며, 사람의 죽음은 단단하고 강하다. 만가지 것, 풀과 나무는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한데, 죽으며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러하므로 군대로써 강하게 하려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나무도 강하기만 하면 꺽이는 것이다. 나무에서 딱딱하고 커다란 것은 밑으로 내려가기 마련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77.
하늘의 길은 그것이 활을 펴는 것 같도다! 높은 것은 아래로 누르고, 낮은 것은 위로 들어 올린다.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탠다. 하늘의 길은 남는 것을 덜고 부족한 것을 보태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의 길은 그러하지 못하다. 오히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 남는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 남음이 있으면서도 하늘 아래 모자람을 보태 받들 수 있으리오? 길이 있는 자만이 그러하리로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하면서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처하지 아니 하고, 그 슬기로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78.
하늘 아래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없다. 그런데 단단하고 강강한 것을 치는데 물을 이길 것은 없다. 물의 쓰임을 대신할 게 없는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기는 것은 하늘 아랫 사람들이 모르는 이 없건마는,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노라.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말한다. 나라의 온갖 더러움을 한 몸에 지녀야 그 땅과 곡식의 주인이라 할 것이요, 나라의 온갖 상서롭지 못함을 한 몸에 지녀야 하늘 아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바른 말은 반대로 들린다.

 

79.
커다란 원한은 아무리 잘 화해시켜도 반드시 그 여한이 남는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어찌 잘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채권자의 왼쪽 어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채무자를 독촉치 아니한다. 덕이 있는 자는 어음거래로 결제하고 덕이 없는 자는 현물거래로 닦아센다. 하늘의 길은 편애함이 없으면서도 늘 좋은 사람과 더불어 하느니.

 

80.
될 수 있는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중하게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끈을 매듭지어 쓰게 하라! 그 먹는 것을 달게 해 주며, 그 입는 것을 아름답게 해 주며, 그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해 주며, 그 풍속을 즐겁게 해 주어라!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꼬끼요 소리와 멍멍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갔다 하지 아니한다.

 

81.
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아니하다. 좋은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며, 따지는 사람은 좋지 아니하다.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아니하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아니한다. 성스러운 사람은 쌓아두지 아니하니, 힘써 남을 위하면 위할수록 자기가 더 있게 된다. 힘써 남에게 주면 줄수록 자기가 더 풍요롭게 된다. 하늘의 길은 잘 이롭게 하면서도 해치지 아니하고, 성스러운 사람의 길은 잘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한다.

 

※聖人之道 爲而不爭(성인지도 위이부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