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6

박중빈 - 나무위키



박중빈 - 나무위키:






박중빈

최근 수정 시각: 2020-04-24 14:54:44


분류
1891년 출생
1943년 사망
영광군 출신 인물
밀양 박씨
일제강점기의 인물
종교 창시자
종법사
대각여래위




역대 종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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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대각여래위

소태산 박중빈
정산 송규
대산 김대거
주산 송도성
상산 박장식
용타원 서대인






성명
박중빈(朴重彬)


1891년 5월 5일

대각[1]
1916년 4월 28일


1943년 6월 1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

법호
소태산(少太山)

본관
밀양 박씨

아명
진섭


처화(處化)





1. 개요2. 일생
2.1. 어린 시절2.2. 구도 과정2.3. 석가모니 연원2.4. 원불교 창시2.5. 열반3. 가르침
3.1. 핵심 교리
3.1.1.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3.1.2. 교리도3.1.3. 삼학 팔조 사은 사요3.2. 표어3.3. 법문4. 제자5. 여담

1. 개요[편집]
원불교의 창시자. 교과서에서는 '박중빈'이란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원불교 자체적으로는 '소태산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대종사님' 등 호칭을 사용한다.

2. 일생[편집]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오. 솥에서 산 사람이란 말이오. [2]
- 소태산 평전

공자님도 태어나실 때 가 나 있었다고 하여 다시 공자님 같은 분 못 태어나시게 하였고, 부처님도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여 길을 막았다. 위대한 분들이 모두 기적으로 옆구리로 낳고 동정녀가 낳았다 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어린이)이 어머니께 "나 낳을 때 꿈 어떻던가요?" 물을 때 '아니, 너는 별 꿈 없이 낳았다'고 하면 '나는 공자님과 같이도 못 되고, 부처님과 같이도 못 되겠네'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과거 성자들이 한 것은 말할 것이 없고, 내 역사를 쓸 때에는 평범하게 쓰라.

오랜 수도를 해온 만큼 대종사 살아 생전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구전되나 [3] 신통을 바람은 새 시대의 종교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 기록을 후대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없는 신통력도 만들어내어 홍보하는 일부 신흥종교단체들과 크게 다른 점. 과거 종교의 성인들과 비교할 때, 대종사의 일생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근대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원불교에서는 대종사의 일생을 열 가지 장면(십상)으로 나누어 정리하는데, 그 내용 대략은 아래와 같다.
2.1. 어린 시절[편집]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바닷가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특별한 탄생설화는 전하지 않는다. 가난한 마을의 흔한 흙수저.

어린 시절에 조금 특이한 쪽으로 비범하기는 했다. 10살 때 서당 훈장이 "나는 담력이 강해서 하늘이 무너져도 안 놀란다."라고 허세를 부리자 "내가 놀라게 해드리겠다."라고 장담하더니 훈장 아들에게 불장난을 가르쳐서 마당 솔잎더미에 불을 붙였다. 훈장이 옷을 오줌통에 적셔가며 투혼을 발휘한 끝에 별 피해 없이 불길을 잡았지만, 그 때문에 대종사의 최종학력은 10살 서당 중퇴퇴학로 마무리. 실제로 한문을 공부한 기간이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어른이 되어 경전을 집필할 때에도 제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4살 때 "동학군이 쳐들어온다."하고 거짓으로 소리 질러서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2.2. 구도 과정[편집]
7살 때 '하늘은 얼마나 높을까', '바람과 구름은 어디서 왔을까' 등 자연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를 대종사 구도생활의 시초로 본다. 9살, 10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의문들이 이어지고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고 한다.[4] 인터넷이 되는 시대였다면 원불교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그 시절 그 시골에서 꼬마아이가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11살부터 15살까지 산신령을 만나서 물어보겠다며 매일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렸다.

산신령을 못 만나자 타겟을 도사로 바꿨다. 도사를 만나겠다며 동네 거지나 각종 이상한 떠돌이들을 찾아가서 혹시 도사가 아닌지 물어보고 다녔다. 6년간.

22살부터는 도사도 포기하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25세부터는 그조차 잊어버리고 말해도 말하는 줄 모르고 먹어도 먹는 줄 몰랐다. 폐인 같은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컸다고 한다.

결국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큰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구도생활을 마무리한다. 원불교에서 '원불교 열린날'이자 '우리 모두의 공동생일'로 경축하는 대각개교절이 바로 이 날이다.

2.3. 석가모니 연원[편집]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나, 교문을 별립하여 오랫동안 제도와 방편을 달리하여 온 만큼 교파들 사이에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한 일이 없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다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라 이 어찌 제불제성의 본의시리요.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 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 원불교 정전 교법의 총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기가 얻은 깨달음과 과거 성인들의 말씀을 대조해보겠다며 유교, 불교, 동학,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경전을 구해다 읽었다. 결론은 "내가 안 것은 옛 성인들이 먼저 알았다"는 것과 "성인들의 가르침은 모두 하나"라는 것이었다.

여러 경전들이 대체로 잘 쓰여졌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경이 근본진리를 가장 잘 드러냈고, 대종사 스스로의 구도과정이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가 많다 하며 스스로 연원을 부처님에게 대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법을 바탕으로 새 종교를 건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원불교는 그래서 불교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5]

원불교의 '원'은 진리를, '불'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불교와 같은 '불'자를 쓰지만, 진리를 깨닫는 종교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연원을 대고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불법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법을 공부하려면 세상 일을 모두 그만 두고 산에 들어가야만 했고, 승려가 아닌 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을 시주하고 불상 앞에 기도함이 거의 전부였다. 기존에 어렵고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이는 불법을 생활 속에서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원불교라고 보면 된다.

2.4. 원불교 창시[편집]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 위주로 40명 정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6] 그 중에서 신심이 독실한 사람 8명을 선발하여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라는 이름은 대종사 사후에 정한 것으로, 처음에는 불법연구회라고 불렀다.

불법의 생활화를 표방하는 종교답게, 대종사와 제자들이 맨 처음 모여서 한 일은 경제의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었다. 처음에 대종사의 집을 담보로 숯을 사서 팔아 큰 이문을 남겼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큰 공사를 벌이는데, 바닷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퍼내고 논을 만들었다. 지금 하려고 생각해도 보통 스케일이 아닌 일인데, 시골 촌사람 9명이서 일을 벌렸으니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사의 결과는 정관평

공사가 끝날 때쯤 경북 성주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송도군(정산 송규 종사)이 9번째 제자로 합류한다. 이렇게 9명을 원불교에서는 구인제자라 부르며, 기독교로 치면 12사도에 해당한다.

구인제자는 각자 하나씩 산봉우리를 맡아 10일 간격으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날 대종사가 이들을 불러 "너희가 정성이 부족하다. 너희가 죽어야 쓰겠다."라고 말하며 자결하라고 지시했다. 제자들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종이에 손도장을 찍고 산봉우리로 올라가 자결할 준비를 했는데 대종사가 다시 이들을 불렀다. "그대들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쳤으니[7] 오늘부터 죽은 셈 치고 세상을 위해 일하라". 이 때 제자들에게 새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원불교에서 쓰는 법명의 시작이다.

이후 대종사는 변산으로 거처를 옮겨 새 종교의 교리를 짜기 시작한다.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 일원상을 처음으로 그림도 이 때.[8]

1924년에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고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불교 총부는 지금도 익산에 있다. 다만 2016년 현재, 원불교 행정부인 교정원은 서울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 도산 안창호[9], 대종사를 만나서.

이후 194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총부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금강산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제자들을 만나고 포교활동에 힘썼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의 민중계몽 활동은 일제가 보기에는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견제와 탄압을 많이 받았다. 안창호의 방문 이후로 더 심해졌다고 한다.

2.5. 열반[편집]

박중빈은 식사 후 복통을 호소하며 투병하였고 이윽고 1943년 6월 1일에 5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067

죽음을 미리 직감하고 말년에 원불교 정전 편수를 서두르며 제자들에게 "먼 길 떠날 것이다." 하며 떡밥을 여러 번 언질을 주었지만 다들 진짜 멀리 수양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지 이 세상을 떠난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중빈의 열반은 스스로 선택한 신의 한 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일제강점기 끝으로 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심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종교단체 대부분이 '황국신민을 계몽하는 친일종교'가 되든지[10] 아니면 걍 탄압당하고 없어지든지[11]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원불교라고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12] 소태산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순식간에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고, [13] 일제 강점기에 친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명맥을 지켜낸 몇 안되는 사례로 남을 수 있었다. 살기 위해 친일을 택할 수 밖에 없던 대부분의 현존 종교들이 이 시기의 행적을 쉬쉬하는 것과는 대조적.

박중빈 사후,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가 법통을 계승하고 해방 이후 교명을 '원불교'로 정하여 지금에 이른다.

3. 가르침[편집]

3.1. 핵심 교리[편집]

3.1.1.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편집]

원불교를 상징하는 동그라미는 법신불 일원상이라 부른다. 절에 있는 불상이 부처님의 형상을 모신 것이라면 원불교 교당에 모셔진 법신불 일원상은 부처님뿐 아니라 예수님 공자님 등 모든 성인들이 밝혀주신 공통된 진리를 상징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에게 신심을 북돋우기 위해 각 종교 창시자들의 형상을 모시곤 했지만 그러다보니 (분명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끼리 네가 옳니 내가 옳니 다투게 되었다는 것. 이 역시 대종사의 미래형 종교 설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원불교의 '원'이 바로 이 '원'이다.

3.1.2. 교리도[편집]

원불교 정전에 수록된 원불교 교리도. 원불교의 교리를 축약한 것으로 대종사 생전에 그렸다. 창시자가 생전에 교리를 직접 정리하여 후대에 남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교리해석에 논란이 없음이 특징이다.

3.1.3. 삼학 팔조 사은 사요[편집]
교리도의 핵심은 삼학 팔조 사은 사요로 축약할 수 있다.

삼학(三學): 원불교의 수행방법. 정신수양(精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 작업취사(作業取捨)로 구성되어있다. 여러 종교들이나 불교 내 종단들끼리도 각자 선수행이나 경전공부 등 어느 한쪽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원만한 인격을 이루려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팔조(八條): 삼학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진행사조(進行四條)인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방해가 되는 사연사조(捨捐四條)인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

사은(四恩):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네 가지 은혜.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 천지은(天地恩), 부모은(父母恩), 동포은(同胞恩), 법률은(法律恩)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요(四要): 인류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실천해가야 할 네 가지 덕목. 자력양성(自力養成), 지자본위(智者本位),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로 구성되며 대체로 평등의 윤리를 담았다.

3.2. 표어[편집]
개교 표어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교리 표어
- 처처불상 사사불공 (곳곳이 부처 일마다 불공)
- 무시선 무처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나 선수행)
- 동정일여 영육쌍전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마음으로. 정신과 육신을 조화있게 발전시키자)
-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불법으로 현실 생활을 발전시키고, 현실 생활에서 진리를 깨쳐가자)

3.3. 법문[편집]
대종사가 직접 작성한 교리는 95쪽 분량이며 원불교 정전이란 이름으로 편찬되어 있다. 대종사의 평상시 법문들은 대종사 사후에 제자들이 엮어 대종경으로 출간했으며, 총 15품 547장이다. 정전과 대종경을 모두 엮어 원불교 교전이라고 출판하였는데, 이후 이 교전은 불조요경과 정산종사 법어 등이 추가로 수록되면서 현재는 <원불교 전서>로 확장되어 출판되고 있다.

교전은 원불교 교당에서 구할 수도 있고 앱스토어에서 누구나 무료어플로 다운받을 수도 있다.

아래는 대종경 법문들 중 일부. 선택기준은 개인 취향. 추가바람.

그대들은 하늘 사람을 보았는가. 하늘 사람이 하늘 나라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저 어린이들이 바로 하늘 사람이니 저들은 마음 가운데 일호의 사심이 없으므로 어머니를 통하여 천록(天祿)이 나오나니라. 그러나, 차차 사심이 생기면 천록도 따라서 그치게 되나니, 수도인들도 사심만 없고 보면 한량 없는 천록이 따르지마는 사심이 일어나면 천록 길이 따라서 막히게 되나니라.
- 대종경 수행품 35장

부모 자녀와 같이 무간한 사이라도 자기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지도하면 그 지도를 잘 받지 아니하고, 부부와 같이 친절한 사이라도 내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권면하면 그 권면을 잘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내가 실행하는 데 있나니라.
- 대종경 인도품 22장

한 제자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 그러하면, 그 업이 쉬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
- 대종경 인과품 10장

작은 재주로 작은 권리를 남용하는 자들이여! 대중을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지 말라.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 마음이 되며, 대중의 눈을 모으면 하늘 눈이 되며,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 귀가 되며,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 입이 되나니, 대중을 어찌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리요.
- 대종경 인과품 23장

(부처님을 어디에 봉안해두었냐는 질문에)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그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
- 대종경 성리품 29장

4. 제자[편집]

대종사를 초기에 모셨던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 정산 송규, 이렇게 9명을 구인제자라 부른다. 정산 송규를 제외하면 모두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대체로 대종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14]


모두 남자인 구인제자와 별도로 여성 구인제자가 있다. 남성 구인제자처럼 극초창기 제자들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원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데 있어서 남성들을 능가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15], 이타원 장적조[16], 삼타원 최도화[17], 사타원 이원화[18], 오타원 이청춘[19], 육타원 이동진화[20], 칠타원 정세월[21], 팔타원 황정신행[22], 구타원 이공주[23]가 이에 해당한다.[24][25] 시골 촌부들이었던 남성 구인제자들과 달리 여성 구인제자들은 당시 부잣집 부인이거나 잘나가는 신여성들이 많았다.

대종사 사후 법통은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로 이어졌으며, 이후 3대 대산 김대거 종사, 4대 좌산 이광정 종사, 5대 경산 장응철 종사 등으로 이어졌다.

5. 여담[편집]

대종사는 당시 조선인으로써는 이대호급 피지컬이었다. 키는 175-180 cm, 몸무게는 90-110 kg 정도라고 전하는데 조선 말기 남성 평균 키가 161 cm 였다.
대종사가 이끌던 불법연구회(원불교)는 회계처리나 사생활 등이 깔끔하기로 유명했다. 일제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여러 번 불시에 털었는데 금전출납이나 남녀관계 등 문제 삼을 구석을 하나도 찾지 못해 혀를 내둘렀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원불교는 종교계에서 나름 가장 깨끗하고 신뢰가는 교단으로 인정받는 편이다.
일제에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라고 투입한 조선인 악질순사 황가봉이 대종사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고 경찰 내부정보를 알려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슬하에 2남1녀가 있었는데, 장남이 원광대학교 박길진(광전) 초대총장이다. 차남 박광령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장녀 박길선은 송규의 동생인 송도성과 혼인하였다.

내가 진묵이라면 어쩌겠소?
박중빈 자신은 진묵대사의 환생이라고 여긴 듯하다. 봉서사의 진묵대사 부도가 희어지면 진묵대사가 세상에 다시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부도가 희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씀이다.


[1] 큰 깨달음. 원불교에서는 창시자의 생일 대신 이 날을 대각개교절로 경축한다.[2] 가끔씩 떡을 찌는 데 쓰는 시루가 아니라 민초들이 매일 밥을 하는 데 쓰는 솥이라는 의미. 2016년 소태산 평전의 출간과 더불어 회자된 이야기. '소태산'이란 호의 뜻에 대한 작가의 추론인지 실제 근거가 있는지는 아는 사람 추가 바람.[3] 대종사의 열반이 1943년으로 비교적 최근이었기 때문에, 2016년 현재에도 대종사를 직접 받들었던 제자들이 원불교의 원로로 상당수 남아있다.[4] 꼭 대종사가 아니더라도 어릴 때는 어른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에도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아몰랑 하고 집어치우느냐 끝까지 파고드느냐의 차이.[5] 원불교는 <새 불교>를 표방하므로, 교단으로서는 서로 다르나 내적인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공식 입장.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 정도로 생각해도 80%쯤은 맞다. 애당초 원불교는 불교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가 형식은 다르지만 근본진리는 다르지 않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다 같이 힘을 합치자." 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굳이 불교냐 아니냐 하는 구분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6] 이 중에는 증산 강일순 계열인 보천교를 신앙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보천교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종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면 보천교를 거쳐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 이를 빌미로 증산도 등에서는 원불교가 증산 계열 종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7] 하늘이 감응한 증거로, 손도장을 찍은 자리에 붉은 혈인 9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대종사 생존 당시 일어난 신령한 일들은 모두 기록을 남기지 못하도록 했는데, 유일하게 전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 날이 8월 21일인데 원불교에서는 이 날짜를 법인절(法認節)이라 하여 경축일로 기린다.[8] 대종사가 벽지에 처음으로 그린 일원상 원본은 6.25 전쟁 당시 유실되었다고 한다.[9] 안창호 본인은 기독교 교인이다.[10] 많은 흑역사를 낳았다.[11] 당시의 많은 민족종교가 이 길을 택하고 사라졌다[12] 일제에서 소태산을 조선의 간디로 지목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13] 창시자가 죽었으니 당연히 망할 줄 알았다고 한다.[14] 심지어 박동국은 친동생, 유건은 외삼촌이다. 과거의 성인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포교활동을 했음과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땅에 구세주처럼 짠 나타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에게 스승으로 인정받았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15] (1867~1946) 전북 남원에서 출생. 일찍이 부군을 사별한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1924년에 서울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동생 박공명선 (朴孔明善)과 함께 귀의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처로 돌아다니며 방물장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교단 창립에 헌신하였다.[16] (1878∼1960) 경남 통영에서 출생. 일찍이 강증산교의 신자가 되었다가 1921년에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하였다. 나중에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며 교단 초기에 박사시화, 최도화와 함께 교직없는 교역자로서 교화에 큰 활동을 하였다.[17] (1883~1954) 전북 진안에서 출생.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동학사·화엄사 등에서 화주 노릇을 하였다가 1922년에 진안 만덕산에서 송규를 만나 입교했다.[18] (1884~1964) 전남 영광에서 출생. 소태산 대종사가 22세경부터 26세에 대각을 이루기까지 정성을 다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영산에 주재하면서 영산교당 창설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나중에는 영광지방의 교세 발전과 교도 관리에도 힘썼다.[19] (1886~1955) 본명은 화춘(化春)이며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24년에 최도화의 인도로 입교하여 교단 창립에 전 재산을 바쳤으며 나중에 전주교당의 창립주로 수행하였다. 1934년부터 20여년간 봉직하였다[20] (1893~1968) 본명은 경수(慶洙)이며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24년 3월에 박사시화의 인도로 서울에서 입교한후에 같은 해 5월에는 만덕산 초선회에 참석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만났다. 신앙심이 투철하여 서울 창신동에 가옥을 매입하여 가옥·가산·대지를 모두 서울교당 창설에 희사하였다. 그후 1933년에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전라북도 익산 총부 금강원에서 거주하면서 교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21] (1896∼1977).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23년에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뵙고 귀의하였다. 1932년부터 출가하여 대종사에 대해서 지극한 심성을 가졌으며 익산 총부건설과 교단 창립 발전에 헌신하였다.[22] (1900~2004) 전쟁고아 907명을 피난시킨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한국보육원의 설립자로, 속명인 황온순으로 더 유명하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에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전문교육을 받은 신지식여성으로 사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한 때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도 전개한바 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대호법 제1호가 되었고 교육사업에 까지 투신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서 8·15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23] (1896~1991) 본명은 경자(慶子)이며 서울 출생. 1924년에 박공명선의 인도로 입교하고 1930년에 출가하였다. 교단 초창기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록하여 법낭(法囊)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림에도 정통하여 초창기 교단의 그의 손길이 미쳐 만화보살 (萬化菩薩)이라고도 불리었다. 초기 원불교의 교서의 대부분이 그의 물질적 후원으로 출판되었고 나중에는 원광대학교의 설립에 크기 기여하기도 하였다. 공부면에 있어서도 교단 최초의 특신급 6인 중의 한사람이며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을 잘 계승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24] 대종사의 아내인 양하운은 십타원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때문에 십타원 양하운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25] 십타원 양하운 (1890~1973)은 전남 영광에서 출생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대사모 (大師母)라 존칭하고 있으며 교단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내조하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여 정토원훈 (淨土元勳)으로 존경을 받고있다.

원불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52> 원불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정우 군법사ㆍ육군 대령
승인 2020.03.07 13:30


Q 원불교는 불교의 한 종파인 줄 알고 있었는데, 독립적인 신흥종교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원불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불교의 핵심교리를 따르지
않는 불교와는 다른 종교
불교의 한 종파도 아니며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종교


A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불교와 불교는 사실 이름만 비슷할 뿐이지 같은 게 거의 없는 별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논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비록 원불교가 불교를 연원으로 해서 탄생된 종교이고, 금강경을 비롯한 불경 중 일부를 공부하거나 그 교리를 차용하였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불교의 핵심교리를 따르지 않는 한 불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신이나 절대적인 힘 또는 지고의 깨달음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과 고민을 해결해 주고 삶의 목적을 찾는 문화체계’입니다. 종파는 한 종교에서 교리의 해석이나 의식의 차이로 나뉜 큰 갈래를 말합니다. 원불교가 불교의 한 종파라면 거슬러 올라가 불교의 큰 울타리체계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원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종교가 성립하려면 3가지 구성요소를 갖추어야한다고 합니다. 교조(敎祖, 창시자)와 교법(敎法, 교리), 교단(敎團, 신도) 조직이 그것입니다. 불교는 교조가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부처님이며 교리로 정리된 독자적인 다양한 불경을 가지고 있으며, 수행자인 스님을 비롯하여 사부대중의 신도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는 교조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소태산 대종사이고, 불경이 아닌 소태산의 어록을 정리한 정전(正典)과 대종경(大宗經)이라는 경을 가지고 있으며, 교단의 구성 또한 불교의 교단하고는 판이하여 독자적인 종교의 지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불교의 종파에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관음종 등의 많은 종파가 있지만 원불교는 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종교는 불교·크리스트교·유교 및 신흥종교라는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종교이며, 크리스트교는 개화기 이후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정착하게 된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흥종교는 불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세계에서 두루 인정받고 오래된 역사를 갖지는 못하지만 그 세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종교를 말합니다. 원불교가 이에 해당됩니다.

결론적으로 원불교는 불교의 한 종파도 아니며 완전히 독립된 종교이며 그 이유는 첫째, 불교의 교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반해 원불교의 창시자는 소태산 대종사이고 둘째,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으나 원불교는 한국에서 발생한 신흥종교이며 셋째, 불교는 불경을 쓰지만 원불교는 원불교 교전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불교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불교신문3563호/2020년3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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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원불교 100년의 역사

원불교 100년의 역사: 원불교100년 동안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HOME 종합[격정토론]'원불교, 불교다! 아니다!'



 이번 주 우리가 주목한 뉴스 두번째 소식은 원불교입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원불교가 내년 9월 서울에서 세계불교도우의회 총회를 개최하는데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더 나아가 원불교가 개최를 할 경우 조계종 등 다른 한국지부들은 참여하지 않는 방안도 검토중인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불교가 공식적으로 교조는 소태산 대종사, 소의경전은 소태산 대종사가 저술한 <대종경>으로 하고있다는 점과 불교종단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스스로 탈퇴했다는 점 등을 불교의 한 종파로 볼 수 없는 이유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왜 국제적인 불교행사를 개최하겠다는 밝혔을까요?
종단협에서 지적한 것 처럼 국내에서는 불교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불교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일까요?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을끼요?
비록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는 문제때문에 불거지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 주요 종교중 하나로 손꼽히는 '원불교'의 정체성 문제는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뉴스브리핑앤비평 2부 이번 주 우리가 주목한 뉴스에서 먼저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시청과 의견부탁드립니다.
원불교(圓佛敎, Won Buddhism)는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이 창시한 불교계 신흥 종교이다. 2016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1] 불법(佛法, 부처의 가르침)을 종교의 근원으로 표방하나 종단의 성립과 조직, 운영에서 기존의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신흥 종교이다.
2016년 창교 100주년을 기념해 원불교 대사전 발간, 문화예술단체 육성, 출판 영상물 제작 보급, 원불교 앱개발, 익산성지 장엄사업, 영산성지 장엄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은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 단체이다.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본부는 태국에 있으며, 역대 회장은 모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배출되는 등 상좌부불교(테라와다불교)가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가 WFB에서 활동중이다. 미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 등 35개국에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원불교의 탈불교화 과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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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의 탈불교화 과정에 대한 연구

신종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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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탈불교화 과정에 대한 연구



신종교연구



약어 : JNR



2016, vol.35, no.35, pp.83 - 110



DOI : 10.22245/jkanr.2016.35.35.83



발행기관 : 한국신종교학회



연구분야 : 종교학



Copyright © 한국신종교학회



원영상1

1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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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논문 수 : 2 서지 간략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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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원불교와 불교의 관계는 원불교 교단의 정체성은 물론 원불교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원불교교헌 개정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논쟁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이 과정 속에서 필자는 원불교의 역사를 통해 왜 원불교가 탈불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물론 소태산 박중빈의 깨달음에 의해 세워진 불법연구회가 전통적인 불법을 계승하고 있다는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관을 제시한 다음, 초기 교서인 『불교정전(佛敎正典)』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초기 교단, 즉 불법연구회는 불교 결사운동의 현대적인 활동임을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1948년 원불교의 교명 전환이 이루어진 후, 불교와의 거리두기가 나타나고 있음을 밝혔다. 특히 1962년 발포된「불교재산관리법」에 제한받지 않기 위해 교단 스스로 제출한, 불교와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정부 청원을 계기로 탈불교화가 가속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원불교교헌」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난 불교에 대한 관점을 통해 살펴보았다. 원불교 교단의 출발과 함께 제정된 초기 교헌으로부터 현재의 교헌까지는 불교의 진리관과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불교와의 관계를 강조한 연원불(淵源佛) 조항은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원불교 최고결의기관인 수위단회에서도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원불교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근의 원불교의 탈불교화에 대한 의식은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며, 불교와 원불교의 내적 일치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교조 및 교단의 입장으로부터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키워드

「원불교교헌(圓佛敎敎憲)」, 불교,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불교정전(佛敎正典)』, 『대종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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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박중빈의 발자취와 원불교의 세계 [광주MBC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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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최재천 (지은이)휴머니스트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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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640쪽, 약 41.2만자, 약 10.2만 단어

책소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세계의 깊이 있는 만남을 시도한 <대담> 10주년 기념판. 2001년 12월 10일,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이 만났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을 주선한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 <대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4년 동안 십여 차례의 대담, 네 차례의 인터뷰로 이어진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은 2005년 출간되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소통하며 융합과 통섭을 이야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독자들은 과학의 시대를 사는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 사회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는 어디까지 왔는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교육과 사회문화적 기반으로서의 융합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대담>의 내용에 더해, '<대담> 그 후 10년,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함께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된 특별 대담을 수록했다.


목차


■ 10주년 기념판 머리말

■ 초대의 글-도정일: 인간동물과 동물인간의 만남

■ 신화를 품은 인문학자 도정일, 상상력으로 자본의 벽을 넘다
■ 개미를 사랑한 생물학자 최재천, 생명으로 진화의 예술을 관찰하다

1.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유전자로 들썩이는 세상
두 먹물, 드디어 보따리를 풀다
인문학적 본성과 자연과학적 본성
과학과 인문학은 빗장을 열 수 있을까

2.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유전자 혁명, 그 후 60년
인간의 탄생을 어떻게 설명할까
가슴 설레는 프로젝트
인문학 DNA와 자연과학 DNA가 따로 있나

3.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것인가
누구를 위한 윤리인가
생명의 시작은 배아인가 세포인가
메멘토 모리, 인간의 한계를 긍정하라
기술은 있지만 과학적 사고가 없다

4.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신화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신, 노동하기 싫어서 인간을 만들다
다윈의 시나리오
DNA 사령부의 비밀 프로젝트

5.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복제인간과 유전자 클리닉
인문학의 영혼, 생물학의 영혼
영혼의 창조와 진화
“DNA가 영혼입니다” “그건 생물학적 결정론이죠”

6.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신화는 ‘구라’죠?” “그렇다면 과학도 ‘구라’입니다”
인문학과 생물학의 연결고리
생명은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

7.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예술은 인간의 본성인가
모든 예술은 구애의 몸짓이다
과학은 진화의 산물이다

8.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교미와 섹스는 어떻게 다른가
동물들도 피임을 할까
54초형 인간, 59초형 인간

9. 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생물학에 대한 기소장
다윈의 세계 질서―새끼, 여자, 남자
27세기형 가족 공동체의 출현

10.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누구나 동성애적 욕망이 있다
‘바람기 유전자’가 꿈꾸는 세상
암컷의 섹스는 교환가치인가

1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프로이트에 대한 판결문
유혹하는 무의식
인간의 자기 이해 방식을 전복하다

12.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열성유전자를 보호하라
사회 진화와 자연 진화의 문법
이기적 유전자를 넘어

13.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세계화, 숨을 곳 없는 세상
생태계의 윤리, 인간의 윤리
밀실의 고독에서 공생의 축제로

■ 감사의 글-최재천: 인문학의 바다에서 길어올린 생명의 희망

■ 특별 대담: 《대담》 그 후 10년,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함께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
인문학의 질문과 자연과학의 질문
통섭과 융합을 시도하다
지식 팽창 시대의 대학
통섭 시대의 교육

■ 쟁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서양근대사가 더럽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도 아름다운 부분이 있어요. 내가 보기엔 그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계획들을 사회의 집단적 목표로 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버둥거려왔다는 점일 겁니다. - 지하철 독서가
한국인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 - 지하철 독서가
어떤 신화가 다른 신화들을 압도하고 지배적 이야기로 올라서는 데는 정치적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 서사가 서양을 지배하게된 것도 그래요. 그 이야기 틀 안에는 인간을 유한성, 어둠, 타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구원의 희망을 갖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사론 강의를 할 때 저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더보기 - 지하철 독서가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인문학의 핵심 질문이죠. - 지하철 독서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앞뒤 문맥을 빼고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중심주의적 발언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간이 만사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걸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신화가 신인동형(神人同型)으로 신들을 만들어내는데 대한 조롱이죠. ˝인간은 자기... 더보기 - 지하철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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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도정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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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저술가, 문화운동가.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인문문화적 가치의 실천을 강조해온 인문학자. 문학비평은 인문학적 실천의 하나라고 그는 생각한다. 잡지 편집장, 통신사 외신부장, 미국 유학을 거쳐 1983년부터 경희대 영어학부에서 비평이론, 서사론, 소설론, 문학사상사, 문명론 등을 가르쳤고 2006년 퇴임했다. 130여 편의 평론과 300편이 넘는 에세이, 칼럼 등을 발표해왔고 2011년부터 4년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을 맡아 대학 교양교육을 개편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2001년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일으켜 독서 문화운동을 전개, 전국 12개 도시에 어린이 전용도서관 ‘기적의 도서관’ 세우는 일을 주도했고 80여 개 농산어촌 초등학교 도서관 조성 사업도 진행했다. 북스타트, 독서교사연수, 시민인문강좌, 청소년 인문학 읽기대회 등의 독서문화 확산 사업들을 지금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공저)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순교자』 『동물농장』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 비평상, 일맥문화대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접기


최근작 :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대담>,<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 총 36종 (모두보기)

최재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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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10여 년간 중남미의 열대를 누비며 동물들의 생태를 탐구한 뒤, 국내로 돌아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명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널리 나누고 실천해 왔지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 등을 지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와 생명다양성재단 대표를 맡고 있어요. 지은 책으로는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다윈 지능』, 『통섭의 식탁』, 『과학자의 식탁』 등이 있지요. 접기


최근작 : <최재천 교수의 어린이 개미 이야기 세트 - 전15권>,<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 (큰글자도서)> … 총 29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한민국에 통섭 열풍을 불러일으킨 《대담》, 그 후 10년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함께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
2001년 12월 10일,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이 만났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을 주선한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 《대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4년 동안 십여 차례의 대담, 네 차례의 인터뷰로 이어진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은 2005년 출간되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소통하며 융합과 통섭을 이야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책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세계의 깊이 있는 만남을 시도한 《대담》의 10주년 기념판이다. 기존 《대담》의 내용에 더해, 출간 10주년을 맞아 진행한 특별 대담을 수록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의 시대를 사는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 사회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는 어디까지 왔는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교육과 사회문화적 기반으로서의 융합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을 이끌다
- 이 책의 특징 1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는 2005년 초판이 출간되어 지성계, 나아가 일반인 사이에 큰 화제를 낳았다.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는 말을 붙일 만큼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 소통이 전무했던 시기,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은 ‘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주제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눴다. 2001년 12월 10일 처음 만나 4년 동안 10여 차례의 대담, 4차례의 인터뷰로 이어진 이들의 대담은 출간되자마자 여러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으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소통하며 융합과 통섭을 이야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세계의 깊이 있는 만남은 국내는 물론 세계의 지성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문화적 사건이었다. 과학과 생명공학의 성과가 만들어놓은 장(場)에서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가 만나는 일, 인문학자의 삶과 자연과학자의 삶, 연구실 밖에서 사회문화적 실천이 부딪치는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낸 이야기를 담았다. 원숙한 학자로서 학문적 깊이를 갖춘 동시에 상대방의 학문 에도 조예가 깊은 두 사람의 대담은 학자 간 대화, 학제 간 소통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벌써 10년이 되었군요. 최재천 교수와 제가 《대담》을 내었을 때, 우리 두 사람에게는 깊게 공유하는 생각의 큰 줄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인문학-과학의 대화는 소소한 화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가 (최 교수님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이런 대화 작업을 해보기로 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인문학과 과학이 마치 서로 관계없는 분야들인 양 양자 사이에 분단의 벽 같은 것을 세워놓고 ‘나는 나, 너는 너’의 대화 부재 또는 소통 단절 상태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소통을 향한 이 갈망이 우리가 ‘대화’에 나서기로 했을 때의 출발점이자 공통 관심사였습니다.”
- 〈10주년 기념판 머리말-도정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또 다른 대화를 기다리며〉 중에서

2. 《대담》, 대한민국에 통섭 열풍을 불러일으키다
- 이 책의 특징 2
‘통섭’, ‘융합’은 이제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한 분야에 매몰된 좁은 시야로는 더 이상 현대 사회가 지닌 복합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소양을 두루 갖출 수 있도록 2018년부터 문·이과 통합 교육 과정을 시행할 예정이며, 기업에서는 융합형 인재를 선발하고 있다. 통섭은 일시적으로 주목받다가 마는 유행이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꾸준히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할 개념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사회의 통섭 열풍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책 《대담》의 출간이다. 학문적 영역에서 처음 시작된 통섭 담론은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말과 글을 통해서 대중에게까지 전해졌다. 두 대담자 모두 《대담》 출간 이후 연구와 사회 활동에서 통섭을 퍼뜨리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정일은 2011년부터 4년 동안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을 맡아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가르치도록 교양교육을 개편했고, 최재천은 이화여대에서 통섭원을 만들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사회문화적 기반으로서 ‘통섭형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두 사람의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제가 10여 년 전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진 통섭이 기대 이상으로 빠르고 광범하게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 덕에 기이한 별명(통섭학자)을 얻었습니다. 이 통섭 열풍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건이 바로 10년 전 《대담》 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거의 모든 문제는 어느덧 한 개인 또는 한 학문 분야가 풀어낼 수 있을 수준을 넘어선 복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전공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문제를 풀어내는 현장에 그 어느 때보다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와 소통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요즘 온갖 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불쑥불쑥 만납니다. 통섭은 이제 지하철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일반용어가 되었습니다.”
- 〈10주년 기념판 머리말-최재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중에서

3. 특별 대담을 더하고 새롭게 편집한 《대담》 10주년 기념판
- 이 책의 특징 3
《대담》이 출간된 지 10년, 그사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대담》이 촉발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는 어디까지 왔으며, 새로운 세대를 위한 융합적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이 책은 기존 내용에 더해 ‘《대담》 그 후 10년,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함께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라는 주제로 진행된 〈특별 대담〉을 수록했다. 2014년 10월 28일 대학로에서 진행된 〈인문학 콘서트: 대담〉의 내용을 정리한 〈특별 대담〉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통섭 담론을 정리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새로운 만남은 어떤 모습일지를 가늠한다. 면지에는 《대담》을 감명 깊게 읽은 철학자 고병권, 진화학자 장대익, 기생충학자 서민 등의 리뷰를 실었으며,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편집과 디자인를 새롭게 했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책은 앞으로도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오래 읽히는 책으로 남을 것이다.

- 선정 내역
KBS 〈TV 책을 말하다〉 2005년 올해의 책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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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읽었다. 좋았다. 이사를 하면서도 책꽂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었다. 이제 새로 개정판이 나왔다. 아직 읽어보지 않고, 사지도 않고 기대평부터 남긴다. 곧 읽어보아야겠다. 설렌다.
caesar 2015-12-03 공감 (2)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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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기념판으로 다시 태어난 두 지성인의 지성체의 집합
맑고밝게 2015-12-2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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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다른 분야간 융합이나 통섭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추세로 자리잡았지만 초판 당시 도정일 최재천 교수님 두분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자신들의 전공의 시각에서 여러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을 자유롭게 개진한 기념비적 대담
dorinia 2016-06-1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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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잘 어울려져 있고 잘 조화될 수 없는 구성이 재미있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조화롭게 잘 저술되어 있어서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좋은 거 같습니다.
ikb0407 2015-12-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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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최재천 교수 부분만 잘라내고 싶을 정도...너무나 비교되는 얕은 통찰
제제 2018-08-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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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책의 서두에 나오는 인문학자 도정일 선생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갈등과 다툼을 넘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바로, 나의 울타리 열기, 그리고 상대방 울타리 열기,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이다.



'나의 울타리 열기'는 바로 질문에서 시작된다.



몇 주 전에 우연히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더니 자기는 질문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왜냐고 물어보니 질문하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고 그건 부끄러운 것이란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을거라고 했다.



이 짧은 대화는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가기 쉽다. 그러나, 단순히 여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만 더 연장해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만약에 이 아이가 질문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 중에 궁금한 점이 또 생기면 아이는 이어서 대화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나와 아이는 결국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갈등과 다툼을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대화'이다. <대담>은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만남이다. 만나서 이야기가 제대로 진행이 되려나 싶은데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대화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의문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으면 이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먼저 질문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라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은 사실상은 동의를 구하는 질문이 될 수 밖에 없다. "맞지 않나요?", "그렇지 않나요?" 등 겉으로는 의문형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의를 구하는 단답형들이다.



다음으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이는 악수를 건내는 제스쳐에 해당한다. 다투거나 싸웠을 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거절당하면 창피와 수모를 당하게 되는데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표현이 된다.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질문을 하면 상대방은 대립의 각을 가지고 있다가 누그러뜨리며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전달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물론, 질문을 던질 때 중요한 것이 나의 진심을 담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기 위한 질문이나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은 화해의 제스펴가 될 수가 없다. 상대방도 이를 바로 알아차린다. 이런 질문은 오히려 불신을 키우고 갈등이 고조시키는 마치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다음 단계인 '상대방 울타리 열기'는 바로 질문에 이은 상대방의 답변이다. 진실된 질문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한 진실한 답변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곧 상대방이 자신이 울타리를 여는 과정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나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개방하는 것이다. 이는 악수를 내밀었을 때 악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맞잡는 행위와 같다.



나의 울타리를 여는 것과 상대방의 울타리를 여는 것은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울타리를 다시 닫으려는 행위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화가 단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에서 두 학자가 4년에 걸쳐 대담을 하며 서로의 울타리를 열었더 것처럼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대화의 장을 마련해가면 점점 서로의 울타리를 열게 된다.



마침내, 마지막 단계인 '상대방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이다. 상대방의 울타리를 여는 것만으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진 상황이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언제라도 닫힐 수가 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나의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마음을 열게 되면 그 다음으로 향할 힘을 얻게 된다. 상대방이란 거울을 통해 나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상대방도 동일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의 울타리 안에 그리고 상대방이 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때 그 힘은 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만드는 에너지이다. 평화는 아무 것도 없는 조용한 상태, 진공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다음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만드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평화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마침내 함께 발전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질문이다. <대담>에서 두 학자의 대화는 특정 이슈와 학문과 관련된 내용 같지만 사실은 바로 이 평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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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2017-12-19 공감(2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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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완전히 별개로 평행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교차하는 지점도 있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출간당시로는 그 기획이나 내용면에서 획기적인 책이었다. 서로의 견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궁극적인 가치의 교착지점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을 읽어볼 수 있다.
rainy22 2015-12-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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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열풍을 불러일으킨 그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대담이 이루어진지 정확히 10년이 흘렀다. 당시 2005년에 인문학의 도정일 교수와 자연과학의 최재천 교수가 만나서 나눈 대담집이 발간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것이다. 10년동안의 변화와 성과를 반추해보고 되돌아보는 대담 그후 10년이라는 특별대담을 추가해서 새롭게 개정판이나와서 정말 반가운 마음이다. 이 대담이후 최재천 교수의 저서도 있지만 통섭이라는 담론이 유행하기도 하였다고 기억한다. 이렇게 두 대척점에 있는 학문분야의 크로스오버 대담은 재미있기도 하였고, 화학적인 작용으로 뭔가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인간기원, 생명복제, 유전자, 예술과 과학, 정신분석 등 당시 주요 논점에 대해서 펼쳐진 대담은 지금 읽어도 참 많은 도움이 된다고 본다. 두 거장의 분야를 가로지르며 넘나드는 대담집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여전하며, 추가로 수록된 10년후의 특별대담은 10년 동안의 성과와 어우러져 밝게 빛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지한 학문적 대담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펼쳐질 때 비로소 인문학적인 사유가 유행하게 된다는 생각에 이 책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10년 후에 다시 새롭게 발간된 대담을 축하하고 여러 사람들이 두루 읽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추천합니다.
- 접기
스위스 2015-12-2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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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주입식 공부로 길들여진 청소년들, 특히 고등학생들이 찬찬히 이 책을 음미하며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방식 정도만 배워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lilycoffee 2015-12-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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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통섭[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대표하여 두 학자가 양쪽에서 모두 접근가능한 주제를 가지고 말 그래도 대담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편협된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열려있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부담없이 읽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aperdo 2015-12-27 공감(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