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10강 『노자』와 자연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1.htm

제10강 『노자』와 자연


◆ 자연(自然)에 대한 이해


▲ 자연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과 부딪치게 되는데, 자연은 지난 번에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소개드렸죠.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자연이라는 말은 거의 99% nature라는 서양 번역어로서 자연이에요. 자연이라는 말이 한자로 쓰면,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혹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은 말을 80년대부터 계속 얘기해왔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을 원래 맥락대로 제대로 쓰지 못 해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서술적 용법으로만 쓰인다는 말은 100%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진시대 중반부를 겪으면서 자연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게 돼요.

하지만 주로 많이 쓰는 용례는 서술적 용법이 더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럼 지금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가까운 말은 뭐냐. 5페이지를 보시면. 저는 이 번역을 자연이라는 말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번역하면 이상하니까 ‘스스로 그러한 세계’라고 표현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본래 맥락의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으니까.

자연계라는 말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개입을 하더라도 건드릴 수 없이 늘 그러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 자연이에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자연이라는 말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산천초목, 혹은 천지 혹은 만물.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쓰는 자연이라는 표현은, 요즘은 생물학 위상이 높아져서 생물학적 의미의 자연을 생태계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은 물질이 운동하고 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도 반드시 그러한 의미로 쓰는 건 아닌데.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다보니까, 굉장히 일의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까 굉장히 단순한 의미로 축소시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말이 노자에서 분명 나옵니다. 특히 두 번. 중요한 구절에서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5페이지 하단을 보시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또 한 번은 아자연이라고 해서 백성들이 나 스스로 그러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뜻의 의미로 자연이란 말이 한 번 더 나온다고 했죠. 그 의미는 제가 저번에 얘기했었습니다.

그럼 오늘 봐야할 것은 바로 이 맥락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하면서 도와 자연이 나오니까 도와 자연이 제일 중요한 용어처럼 생각되시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네 개의 문장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법이라는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꾸 실체 중심으로 생각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니까 거기에 무게가 가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말은 여기서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질서의 모습들은 땅에 있다. 그 땅이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그 무언가가 하늘에 있다. 하늘은 도에 있고 도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그 무엇에 관한 별명일 뿐이다‘하는 정도의 함축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땅 없이 살 수 있나요? 없죠. 하늘이 없이 대지의 생명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뒤의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얘기예요.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에요. 자연이라는 표현자체가 나오는 맥락이 바로 그 맥락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법해야 할 그 무엇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구절을 통해서 동아시아에서도 자연법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서구적인 의미의 자연법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속에 법이라고 하는 관념도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연과 조장

그렇다면 이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사실은 뭐냐.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틀린 질문방식이라는 겁니다. 왜냐. 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물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 자연스럽다, 자연하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펌프를 만들어서 그런 짓을 하다보니까 자신들이 개입하면 다 되는 줄 착각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힘의 원리로 설명되잖아요. 자연이란 건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제가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텍스트들을 검색해 봤어요. 시경이나 서경, 맹자, 주역, 춘추좌전에는 자연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장자에 나오고 여씨춘추에 나오고 노자, 관자, 순자에서 나옵니다.

즉 천지에 관심이 많은 문헌들에 자연이란 표현이 나와요. 특히 여씨춘추에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현상을 자연이라고 서술하기도 하고.

더 중요한 사실이 뭐냐. 이 자연이 자연물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란 말이 서술하는 대상이 인간이더라. 인간과 관련된 문맥에서 자연이란 말이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더라.

이 말은 자연이라는 말이 표현하려고 하는 무엇인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그 무엇과 관련되더라.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동아시아에는 문명과 자연의 구분 자체가 없었어요. 근대가 만들어낸 도식입니다. 그리고 구분할 수 없다는 게 요즘 많이 얘기하는 담론이잖아요.
그런데, 6페이지 맨 아래에 새로 시작되는 부분을 보세요. 자연이 사람과 관련되어 나올 때 같이 등장하는 용어들이 무엇이냐. 마음 심(心), 본성 성(性), 참 진(眞), 재주 재라고 하지만 바탕 재(才), 정 정(情)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과 관련되는 중요한 용어와 관련해서 자연이라는 말이 등장하더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특히 장자에서는 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다른 글자와 연동돼서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7페이지를 보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함축하는 건 뭐냐. ‘늘 변함이 없는 것’ 상(常 )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계절의 순환이에요.

요즘은 우리가 그걸 깨고 있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여름과 겨울만 있고 봄과 가을이 줄어들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봄, 가을 용 옷을 샀는데 삼 년 째 지금 일주일도 못 입어요. 이 얼마나 커다란 경험이에요. 그런데 이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 한 또 다른 중요한 함축이 들어 있어요.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다는 건 몬순기후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열대지역에서는 없죠. 남극, 북부에는 없다는 거죠. 그냥 여름과 겨울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굉장히 특이해요. 그럼 사계절의 기온 온도차를 촉발시키는 건 뭡니까. 계절풍이잖아요. 우린 바람의 아들이에요. 아 바람의 자녀라고 해야죠.

그래서 나를 길러준 건 99%가 바람이라는 건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동아시아 자연철학을 만들어 준 99%가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람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기(氣)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 자연이라는 말의 함축은 ‘늘 변함이 없는 것’ 즉 인간이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내가 따라해야 하는, 그래서 인순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나오는데 인순이라는 용어는 장자에도 나오지만, ‘신도’라고 하는 철학자의 텍스트 속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도라는 사람은 철학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연구가 좀 되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인 『신자』라는 책이 있는데 편 이름에 ‘자연’ 편이 있기도 해요.

그 ‘자연’ 편의 중요한 골자 중 하나가 오늘날로 따지면 사회과학적인 이야기예요. 사회적 현상의 합법체적인 그 무엇에 대해서 자연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 자연의 인순, 맞추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신도라는 철학자의 기본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럼 자연이라고 하는 말의 반댓말이 뭔가를 알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자연의 반댓말은 문명이 아니라 ‘조장(助長)’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꼭 정신없는 사람들로 나오죠. 송나라 사람이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출신들이, 상인이라는 상 자가 상나라 상(상) 자 잖아요.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에요.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얘기하는데.

어느 날 씨를 뿌려놨는데 안전하니까 아버지가 피곤하다고 해서, 딸이 어떻게 했어요? 쑥, 쑥.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나무야 피곤하니까 누워서 자라” 이 정도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빨리 자라라고 쑥쑥 뽑았더니 다 말라 죽었죠.

자연의 반댓말, 손댈 수 없는 것을 손댄다는 말이 ‘조장’이고. 그래서 잘 자도록 도와준다는 얘긴데, 잘 자라도록 도와주지 말고 내버려둬라. 이게 생태주의자들의 말이잖습니까. 자연의 반대는 조장이라는 거죠.

우리가 조장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잖아요? 조장한다는 게 어떤 거냐. 지금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해서 오존이 자꾸 줄어들잖아요. 그리고 광우병 많이 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거고.

사실 더 중요한 건, 질병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오히려 빈곤이 더 큰 문제고, 못 먹으면 질병에 걸릴 소지가 많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인구의 밀집도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인간이 풀어야 할 난제 중 첫 번째가 빈곤이었고, 두 번째가 질병 가운데서도 전염성이 아니라 만성질병.

예를 들면, 남자들 요즘 흔히 죽는 질병이 ‘심근경색’, 여성은 ‘우울증’ 이런 게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난제라고 얘기가 되는 만큼.

전염성 질병 가운데 더 끔찍한 게, 사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게 AI 같은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 수 없는 물질이 공기 중을 통해서 퍼진다. 근데 인간들은 공기 중에 퍼지는 것들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생물학 무기를 만들죠.

누가 만듭니까. 커다란 나라들이 만들죠. 핵무기 죽을 줄 알면서 만든다는 거죠. 왜 못 합니까. 참 단순한 거예요 사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데, 단순한 걸 해결못 하는 건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핵무기 폐기하면 되는 거고, 생화학 무기 안 만들면 되는 건데, 왜 만듭니까. 돈 때문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벌 수 있는 돈의 방식과 벌지 말아야 할 돈의 방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경제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위험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분명히 효율성이 있고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촉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용되고 있지 않잖습니까. 거기에 대해 입막음 한다는 건 곤란하죠.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걸 하지 말아야 해요.


▲ 장자의 기심(機心)

이 논리는 무엇과 연결되는가. 지난 시간에 제가 장자의 기심(機心)에 관련된 문제를 기회가 되면 얘기한다고 했죠. 기계적인 마음. 혹은 편리를 추구하면서 이게 문명 비판의 그 무엇처럼 얘기되는데.

그 자료와 그 노인네가 이야기하는 맥락을 잘 보면, 특히 장자 속에 든 논리는 몸의 논리예요.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자연 자체.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보세요. 논어나 맹자 속에는 기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아요. 장자 텍스트를 보면 달인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잖아요. 강호의 달인들이 수없이 많아요.

무명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노자에. 무명은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하지만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특히 주성치 영화가 그걸 구현하고 있어요. 만두 만드는 사람도 달인이에요, 공 차는 사람도 그렇고. 대단하잖아요. 버스가 가는데 늦어서 출발을 못 하니까 날아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걸 연출하는 것, 이런 사람들 다 달인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냥 넥타이 메고 가는 일반 사람이고 심지어 거지, 노숙자가 갑자기. 이런 세계를 장자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장자 철학 체계 속에서는 기술, 뭔가에 달한다고 하는 것이 유가에서는 단 한마디밖에 없습니다. 문(文을 통해서 달하는 거예요. 문을 통해서 인간의 문명세계를 밝히고 인간의 도덕세계, 윤리세계를 밝히고 인간다움을 구현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요.

하지만 장자의 세계에서는 온갖 다양한 機에 대한 達의 경지가 있다는 거죠. 그걸 道라고 표현하고.

그럼 장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들을 훨씬 더 많이 주장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보느냐는 거죠. 그 속에는 우리가 문명과 자연을 대립하는 구도로 우리가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장자의 실제 세계는 자연과 조장이라고 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유했던 사람이라고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이 기심이 편리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자를 보면, 어떤 노인네가 수영을 기막히게 해요. 물어요. 도대체 어떻게 수영을 하길래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노인네가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마라’ 니가 몰려고 하지말고 물살에 몸을 맡겨라. 참, 말은 쉽죠. 그게 보통의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훈련을 해야 하잖아요.

그 속에는, 내 몸 자체에 들어있는 자연성 자체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논리라는 거죠. 기심은,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키우는 방식은 좋다는 거예요.

그럼 자동차가 나쁜 것이냐? 움직일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는 거예요. 자동차 타고 어딜가서 부모님도 만나고. 요즘 KTX 선전할 때 그렇잖아요. ‘당신을 보내세요’ 물론 매연을 뿜는다는 나쁜 점이 있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 본다면 자식이 부모간의 정은 무한히 가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굉장히 바람직할 수 있어요.

걸어서 부모님 한번 뵈러 간다? 사실 못 가잖아요. 그래서 어느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의 시대에는 공해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생산력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력의 전부인 세계에서, 다른 기물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장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에 석회를 바르잖아요. 그걸 왜 합니까.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거예요. 이성보다 위대한 것이 인간의 감각이에요. 감각의 세계를 우린 다시 한번 구현해야 하는데.

특히 여기서 요구하는 감각은 나아간다면 어떤 부분까지 가느냐, 저 사람을 딱 봤을 때, 지금처럼 대신에 우리를 보장주는 건 법체계,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계약서대로 하면 돼요. 이게 근대세계예요. 사회계약론에서는 다 필요 없고, 계약대로 하면 돼요. 계약 당사자가 우리인데,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계약을 잘 해야 돼요, 우리는. 계약은 함부로 할 게 아니에요. 과거는 법적인 장치를 통해서 인간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계약이 아닌 면대면의 관계였고, 사람 대 사람 친분의 관계였을 땐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람을 잘 알아봐야 해요.

견물을 이야기하면서 알아본다는 것이, 저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있어 라고 전달했단 말이에요. 그럼 들었다. 이게 아니에요. 저 놈이 지금 제대로 말하는지 거짓말하는지에서부터.

그러니까 신(信)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는 신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신용은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에서 오는 거예요. 그럼 과거에는 신용이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가 없으면? 말 뿐이잖아요.

말만 믿고 해야 하는 세계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렇게 살던 세계의 사람들. 지금 우리가 갖는 생각과는 굉장히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씨춘추』에서는 자연이라는 용어와 하여금, 시킬 使(사)가 대립되는 용어로 나와요. 우리는, 이미 본래 텍스트 맥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근대의 눈을 갖고서 좋아하는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해왔던 거예요. 지금에 와서 그럴 필요 없잖습니까?

텍스트는 이미 자기 스스로를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못 본 것뿐이죠. 그래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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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氣)의 세계


▲ 자연과 인간

그럼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연이 인간의 몸과 직결돼 있더라. 특히 인간의 본성과 중요하게 연결돼 있더라. 이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철학적 사유, 동아시아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대전제예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그런데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만약 유학자들이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복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연구하게 해 달라고 신청했을 때, 과연 허락을 했을까, 안 했을까.

어떻게 답변을 했을까. 이런 부분이 우리가 텍스트 훈련을 통해서 공부하고 말 해야 하는 부분인데, 공자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자가 그 당시 맥락에서 했던 말을 우리는 지금 현재 당면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지식인들이 요구받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같이 고민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거고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몸과 자연의 관계를 얘기할 때 아주 단순한 사실부터 얘기하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텔레비전을 보면 6시부터 7시 까지 어린이를 위한 시간이잖아요. 그 당시에 봤던 만화영화 주제가들을 다 외워요. 지금도.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게, 아톰도 기억나고 황금박쥐가 끝날 때 그걸 봐서. 이겨라 승리호, 당려라 봉개호 라고 해서 노래가 좋지 않습니까?

한 번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세 시간동안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쫙 불렀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노래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했던 게 영화에 삽입된 곡인데, 전자인간 아람이 아라치에게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그게 제 기억에 남는 좋은 노래예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숙제를 안 하고 계속 티비를 보니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숙제 다 했냐?”죠. 그랬다가 여덟시 오십오 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 말이 나오죠.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고 쫙 나온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잡니까? 어머니, 아버지 안 계시면 계속 오고, 어머니, 아버지가 주무시면 다시 켜서 이어폰 끼고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 속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하다. 그래서 저녁 10시가 되면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라. 군대가 그렇잖습니까. 아홉 시 반에 점호하고 열시되면 잔다는 거죠.

그런데 한의학적으로 얘기하면, 이건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왜 그러냐. 저는 맞다고 생각되는데,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이 생체실험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이 생활한 거예요. 바깥 사람들과 통화를 하면서 체크는 한 거예요.

이 사람이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며 행위를 반복하다보니까 하루의 패턴 주기가 24시간을 전후로 해서, 길어야 20분 30분에서 큰 경우에 1시간의 오차밖에 없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몸 자체가 24시간 움직인다는 거예요. 자고 일어나는 생활 자체가. 그 생체 시계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이건 인간 이전에 생명체가 발생할 때부터 우리 몸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처음에 인류학자, 생물학자에 의하면 아프리카 중부 어느 지역에서 현생 인류가 탄생해서 퍼져 나가서 다양해졌다고 하는 건 일반적으로 하는 얘기지 않습니까.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죠.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루어졌는데. 특히 우리같은 경우는 사계절의 순환이라고 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가, 봄이 되는 저는 별로 안 좋아요. 여자들은 봄이 되면 살랑살랑거리죠. 남자는 가을이 되면 허전해지고. 보통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봄 하면 더 중요한 게 뭐냐. 바로 노인네들이에요. 실제로 가보면, 사고사로 죽는다거나 질병으로 죽는다는 경우는 사시사철이 없지만. 노인네가 돌아가시는 때가 특히 2월 말에서 4월 달이 많다는 사실을 많이 겪는 것 같아요.

제가 부조금을 내러 가는 게 그때가 가장 많으니까. 그게 바로 음양의 교차를 통해서 한의학을 설명하잖아요. 이 얘기를 적용하면, 한의사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름은 낮이 길고 밤이 짧아요. 그래서 여름엔 잠을 덜 자도 괜찮대요. 겨울은 밤이 길고 낮이 짧잖습니까. 그래서 겨울에 몸 잘못 움직이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잠을 많이 자고 여름엔 잠을 적게 자도 괜찮다는 것이 한의학에서, 음양오행론에서 하는 말이에요.

생체고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에 내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연 세계가 움직이는 입법에 내 삶을 맞춰 나간다면, 여름엔 좀 적게 자도 됩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똑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출근한다. 저는 그래서 아침 강의를 잘 맡으려고 하고, 저는 늦게 자니까, 그럼 늦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머님과도 대학 다닐 때 되게 혼란했던 게, 새벽 2시, 3시, 4시에 자서 10시에 일어나면 6시간 밖에 못 자는 거잖아요. 어머니 눈 속에 저는 잠꾸러기예요. 저한테 맨날 “10시되면 불 끄고 자” 그러신단 말이에요.

집사람은 저랑 체질이 달라요. 집사람은 10시에서 11시가 되면 천근만근으로 눈을 누른대요. 아침에 딱 깨요. 그렇게 일어나래요. “너와 내가 생활패턴이 다른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요즘엔 애기가 잠들어야지만 제가 책을 볼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또 그렇게 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강사였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직장인이었다면 아침마다 아주 힘들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일찍 자게 돼요, 피곤하니까.

완전히 못 고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제 몸의 패턴이 어느 시간에 책을 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걸 아는데 억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잖습니까. 동일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공부를 할 때 제가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력이 달라지는데. 이렇게 몸이 개인적으로 다 다르단 말이죠. 이런 걸 보통 한의학에서는 체질이라고 하죠. 그것이 근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내 몸 속에도 시계가 있고 자연이 우리에게 준 시계. 그건 그냥 생기는 게 아니잖습니까. 태양과 지구의 자전이 있으니까 생체 시계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계절이라는 몬순기후가 일이년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을 거쳐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나의 적응 기제에 영향을 줬을 테고 나는 거기에 적응돼 있을 거예요.

그런데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동일한 시간에 자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죠. 몸이 안 좋다면 몸이 좋아질 때까지 더 자는 게 당연한 거예요. 저 사람 대단하다, ”아픈 걸 무릅쓰고 일 하러 나간다.“ 이게 사십 대에 갑자기 푹푹 쓰러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본주의를 운용하는 시스템은 건강과 정말 안 맞아요. 의학발달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의 생활시스템을 구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야 합니다.


▲ 士氣(사기)와 血氣(혈기)

이런 텍스트들로 배울 수 있는 건 그런 내용입니다. 시간도 달리 생각해야 하고. 자, 9 페이지를 보세요. 보통 우리 군대를 다녀온 남자나 여자분들, 군대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제식훈련이죠. 제식훈련이 군대 제도에 도입이 돼서 운영된 것은 18세기 정도. 얼마 안 된 일입니다.

괜히 안 되는 일을 하는 이유가 실제 그렇게 해서 훈련을 시킨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요. 총 배운다고 더 잘 싸우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기와 관련해서 士氣(사기)와 血氣(혈기)라는 글자는 요즘 우리도 쓰는 말이죠. 기와 관련해서는 가장 빠른 용례를 보이는 게 혈기예요. 혈기는 논어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혈기가 방자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혈기가 방자한 중고등학생들을 건드린 적이 이승만 정권에 있었는데 이번도 또 건드렸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으면 혈기가 죽잖아요. 할 말을 못 해요.

그런데 혈기가 방자한 사람은 상대방이 강자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 커지잖아요. 그게 혈기예요. 기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원초적인 힘이에요.

그 다음에 기와 관련해서 이것이 조직적으로 이용되는 걸 가장 쉽게 보여주는 말이 ‘사기’라는 표현이에요. 선비의 기운입니까? 아니에요. 사기예요. 특히 제식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사기죠.

예를 들면, 일반 훈련소에서 하는 건 아니지만 간부를 훈련시킬 땐 권투를 많이 시켜요. 서로 싸우는 거잖습니까. 해 봐야지만, 맞아 봐야지만 맞아도 견딜 수 있다. 때려보지 않은 사람은 못 때려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사기라는 말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 했는데. 한 영화를 보다가 그 느낌을 받았어요. 탐 크루즈가 출연했던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신식 훈련을 받은 일본 군대가 총을 갖고 있고 숲 속에 있는데, 사무라이들이 말을 타고 건너 오는데 대형 브라운관에서 보니까 이게 실제 장면이지 않을까.

사무라이가 쓴 갑옷을 보면 악마의 얼굴처럼 짐승 얼굴처럼 무섭게 해놨잖아요. 저렇게 하면 두렵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브라운관에서 실제 장면처럼 보니까 총알가진 사람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가고, 무너지고, 제가 사기가 뭔가를 그걸 보면서 그대로 느꼈어요.

저런 인간들 속에서 공자가 튀어 나온 거예요. 당시 사(士)라는 개념이 어떻게 바꼈느냐.

그렇게 사무라이들이 좍 몰려오는데, 한 사람이 하늘 천, 따 지하는 걸 연상시키면 공자가 얼마나 혁명적인 사상의 궤변자인지가 설명됩니다.

이건 제가 설명한 게 아니라, 학자 이름을 까먹었는데, 루이스라는 사람이 한 얘기예요. 공자가 당시 사상계 지형도에서 볼 때 얼마나 특이하고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의 변천을 낳았는지.

인(仁)개념 자체가 사실은, 남자답다는 말이 요즘 바뀐 것과 똑같아요. 옛날에 남자답다고 할 때는 어깨가 딱 있고 키도 이만해야 하고 얼굴도 남자답게 부리부리하게 생겨야만 멋있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어때요? 예쁘장하게 생겼잖아요. 마치 공자의 시대에 인이라는 글자의 내용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뀐 것과 동일한 방식의 변화를 공자가 열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라고 하면 씩씩하고 사나운 걸 느끼는 게 아니라, 되게 부드럽게 생각하잖습니까. 우리는 공자의 후예인 거죠. 자꾸 얘기가 딴 데로 새는데.


▲ 기(氣) 용어의 기원

기(氣)라는 말은, 동아시아가 계절풍 기후였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용어예요. 기라는 말의 기원이 뭐냐. 여러 가지 방식의 설명이 있단 말이에요.

그 중 첫 번째는, 운(雲)기라는 표현이 나와요. 구름 운자입니다. 기 가제가 구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운기가 구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라고 하는 말의 원형이 구름으로부터 온 게 아니냐. 기상적인 무언가로부터 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또 하나는 곡식,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지 않습니까. 그 기운, 생명의 기운. 머리가 아플 때 그거 쐬면 좋은 거 아시죠. 아침에 일어나서 눈이 피곤할 때 커피를 한 잔 타서, 호호 불면 따뜻한 증기가 올라오잖아요. 거기에 눈을 대면 피로가 조금 풀려요.

과거에 기를 설명할 때는, 근대 과학 특히 물리학이 유행했기 때문에 물리학을 염두에 두고 천문학, 기상뿐만 아니라 물리학적 우주 패러다임과 관련해서 기를 설명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기는 질료, 실체, 원질,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을 갖다 붙였어요. 요즘에는 그와 같은 설명은 곤란하다고 한다. 왜냐.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기론이 성립해가는 중요한 과정 중에 관자라는 중요한 문헌이 나오는데, 거기서 인간 생명의 중요한 기원을 얘기하면서 정기신을 얘기해요.

이게 회남자로 가면 정신, 형체라고 해서 이원화합니다. 이때 형체는 실제 우리들의 물리적 몸을 지칭하는 거예요.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에서 말하는 정신과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에요.

물론 분명한 의미로 서양적인 이분법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구분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적인 거냐?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다 물질적인 겁니다.

우리는 지금쓸 때, 정신(精神)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건 같은 거예요. 온갖 사물에는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있는데 이 생명의 기운을 인간이 흡수하면 기가 되는 거고 이 기가 내 몸속에서 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신(神)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

마음적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精子(정자). 이건 생명의 씨앗이잖아요. 물질적인 거예요. 달리 말하면, 이런 표현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가지고 들이대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 방식이라는 거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없었고, 이건 본래 하늘로부터 오는 거고 몸뚱이라를 구성하는 형은 땅으로부터 온다는 게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예요.

내 몸은 천지의 구현입니다. 김용옥 선생님이 표현하는 걸 보면 통찰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떤 책에서 지나가는 말로, 이 분이 호주에 가서 디자인에 관해 강의를 했다면서, 디자인이란 하늘의 원리를 땅에 구현하는 것이다, 즉 천의 질서를 지상의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하늘의 원리가 땅을 통해 나를 디자인 한 거예요. 이같은 사유를 회남자 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죠. 이 두 눈은 하늘의 해와 달이고 내 몸속을 흐르는 혈관은 강이고, 내 몸속을 흘러 다니는 것은 기운이에요. 여기 바람이 흘러 다니듯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내 몸 속에 기운이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전부 다 이 속에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은유적으로 투영돼 있습니다. 상당히 어떤 부분은 은유적인 장치를 통해 인간의 자연 영역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라 보면 돼요.

그래서 기를 얘기할 때는, 물이나 바람을 염두하는 게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물이 고여있으면 어떻게 되죠? 썩어요. 기와 혈은 계속 내 몸을 흘러야 해요. 막혀요. 그럼, 뚫는 게 침이라는 거죠.

그럼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 이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가 없잖아요. 기는 안 보이는 거니까. 특히 체포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원래 진맥이라는 것도 굉장히 여러 방식으로 했잖습니까.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진맥을 했었는데 점점 이론화되고 발달하다 보니까 그냥 손목에 하는 걸로 결판났고. 그건 나름대로 임상과 이론화로 병행되면서 축출된 결과물이겠죠.

자, 9페이지에 있는 명대(明代) 장개빈이라고 하는 의학자이고 의학이론가의 그림을 보면, 큰 몸의 틀 속에서 보는 것도 그렇고 이 속에 나와 있는 것도 실제로 해부를 통해서는 하나도 검증이 안 돼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이런 것들이 나와 있느냐. 그건 결국, 침을 놓기 위한 혈자리가 사실은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고 이런 건 다 촉각적인 것들이고, 촉각적인 것을 통해 알아낸 것을 가지고 실제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침을 놓기 위해서는 눈으로 봐야 되고, 그렇잖습니까? 손가락으로 재야하고.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연철학적으로 인간의 몸 속을 돌고 있는 기가 어디가 막히냐 정체돼 있느냐는 식의 표현으로 언어가 구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와 같은 세계가 있다면 그걸 자연철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자연’이에요. 자연은 자연인데,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애매모호한 커다란 이야기 덩어리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것의 주인공을 기라고 하는 순간, 굉장한 파급력 즉 응용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어지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 감응

그런데 제가 기를 강조하면서 자꾸 인간과 관련한 쪽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이 기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개념으로 볼 수 없고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과만 연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하냐.

단순한 예를 들어 볼게요. 우리는 기를 감지하죠. 한겨울에 이 책상이 있을 때, 한겨울에 이 책상을 만지면 굉장히 차갑게 느껴져요. 그런데 여름에 만지만 굉장히 시원하게 느낀단 말이죠.

이때 '감지‘하는 이건 사실 서구적인 표현으로는 감각한다지만 우리는 감응한다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했죠. 감응은 내 몸속의 기와 내가 감응하는 사물의 기운이 소통되는 과정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에요. 기의 변화예요.

이런 용어는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것과 똑같아요. 양자역학에서 대상이라고 하는 걸 확정할 수 없다고 하고, 왜냐하면 개입하는 순간, 아주 극미한 세계이기 때문에 측정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순간 이미 그 운동성이 다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측정자체가 굉장히 객관적일 수 없다고 얘기하잖습니까.

객관적 관찰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기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 사물과 내가 만나는 순간, 서로 기를 주고받을 때 나는 저 사물에 영향을 미쳐요. 저 사물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순간 내 몸의 기의 분포가 변합니다. 이런 걸 감응론이라고 합니다. 객관적 수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이 하는 말까지도 포함되는 거예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오랜만이다”라고 하는 거랑 옛날에 듣기 싫어했던 “야, 속살”이라고 하면서. 들어오는 기운이 다르잖습니까.

그 말이 내 귓청에 울리는 순간, 내 몸속의 기가 쫙 퍼지면서 옛날에 내가 저 친구한테 괴롭힘 당했던 기억이 갑자기 쫙 올라오면서 반응이 생기는 거예요. 감응하는 거죠. 그 사람도 마찬가지죠.

기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객관화 혹은 수량화보다도 대면하는 순간 변화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속에는 반드시 뭐가 매개되어야 하느냐. 물론 이 컵과 이 컵이 만나는 순간에도 뭔가 있죠. 이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이건 인간이 알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까지 기를 적용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 기와 관련된 용어가 출현한 맥락을 잘 보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즉 인간과 물과의 관계 속에서 기 개념이 적용된다는 거예요.

즉,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 안의 신호들만 우리는 체크할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는 자외선을 보지 못 하잖아요. 귀로 들을 수 있는 파장의 영역도 제한돼 있고. 파장 밖에 있는 소리들은 못 알아듣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미지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거죠.

마찬가지로, 다른 사물들은 다른 사물과 감응하는 방식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관과 다른 종류로 감응하겠지만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응의 수단과는 다른 방식의 언어 틀이기 때문에 결국 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

기를 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된 해석 방식이고, 인간이 반드시 개입된 관점에서 기 의미를 해석할 때만. 한의학이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 매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맥진이라고 할 때, 그 정보를 어떻게 도무지 얘기해주기가 어려워요. 그렇잖아요.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을 때의 중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증거를 사기의 편작찬공열전이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 편은 사마천 당시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표현 체계, 개념 체계를 반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창공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임상보고서가 들어가지만, 편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상당히 신화적으로 되어 있어요.

편작이 원래는 여관에서 심부름꾼하는 관리인으로 지내고 있었죠. 그때 장상공이라는 어떤 사람이 의사였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거기를 자주 출입하다가 편작의 됨됨이가 괜찮은 것 같아서 약을 주면서 이 약을 상지수에다 개서 먹으면 특별한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걸 다 먹었다니, 담장 밖에 너머 사람들까지 보이더라.

눈으로 딱 보면, 이 사람 내부가 어떻게 돼 있더라는 것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편작은 그것 때문에 오해 받을까봐 진맥을 통해 알게 됐다고 해요.

저는 “상상된 신체”라고 하는 표현을 착상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어요. 일본학자는 편작이 투시술을 갖고 있어서 시각적인 지식의 중요성이 상당히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맥진과 관련된 이론은 편작 이전의 이야기 속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아요.

창공은 한나라 문제 때 실존인물이라고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편작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 차이는 뭐냐. 창공은 진맥을 하면서 환자의 증상을 의경 속에 들어 있는 증상들과 대조해봄으로써 이 사람 병이 뭐다라는 방식으로 진맥을 해요.

그런데 편작은 그런 것 없이 딱 꿰뚫어 봤다고 나와요. 이 때 꿰뚫어 봤다고 할 때, 진맥을 통해서 알아봤다고 하는 표현은, 달리 말하면 맥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직 개념화를 갖지 못 했을 때 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본다’ 자기를 신비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니까.

따라서 촉각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그 용어의 실체는 진맥이었고 그것은 촉각으로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속에 들어있는 자체가 확립돼 있지 않을 때의 현상이 신화화된 것이고 그것이 용어를 갖고 구체화됨에 따라 비신화화되었을 때 상황 자체가 이상한 방식으로 조율돼 있는 게 아닌가.

거기까지 설명한다면 이 신체의 그림 자체가 왜 그렇게 그려져 있는가는 물론이고 한의학의 발전과도 맞는 설명방식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것이 기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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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3.htm

◆ 음양오행의 신화와 역사


▲ 음양오행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기화하는 세계는 조금 전에 얘기 드렸어요. 음양오행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음양오행은 기와 별도로 탄생된 론이에요. 음양오행을 앞으로 끌어가면 어떤 사람은 주역과도 연관시켜서 음양사상이 무지하게 오래됐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때 체계화되었는가. 어느 때쯤에 결합되어 의미 있는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한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음양오행론이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갖고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관자라는 책을 보면 음양오행론이 나와 있고, 여씨춘추에서도 음양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죠.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기와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 있나요? 왜 하필이면 인간의 혀는, 몇 가지 맛을 구분하죠?

매운 맛은 미각 세포가 하는 게 아니라 통증으로 느끼는 거죠. 네 가지입니다. 왜 인간이 네 가지 맛을 구분할까. 이건 좀 어렵죠. 더 쉬운 예를 들어 볼게요.

밥을 먹기 전에 여름에는 어떻게 하고 먹어야 하죠? 냄새를 맡아보잖아요. 이게 쉰 건지 안 쉰 건지. 코가 왜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뭘 구분합니까.

내 몸속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 감각의 기본이에요. 눈이 하는 역할이 뭡니까. 내 몸이 가도 되는 곳과 안 될 곳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기 나타나는 것이 사잔지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거죠.

감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눈이 여기 왜 달렸는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잖아요. 코가 왜 달려 있어요. 이게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달리 말하면 이 코가 그것을 분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코가 진화했다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음양오행론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축이 뭐냐. 원소주기율표가 물질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적인 방식을 통해 사물을 분류한 책이라면 거기엔 내공이 빠져 있어요.

한의학이 추구했던 사물의 분류체계는 내 몸과의 감응 관계 속에서 사물을 분류한 거예요. 독이 뭡니까. 먹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다른 동물한테는 상관없을 수 있어요.


▲ 감응

감응이란 것이 왜 중요하냐. 철저하게 인간적인 용어이기 때문이에요. 감각한다?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도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지(知)라는 용어가 독초와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분하면서 나와요. 즉, 인간이 알아야할 지식은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걸 이해하기 위해서 지 능력이 발달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적응을 위해서 뭔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 구분의 기준이 뭐냐. 내 몸과의 감응관계 속에서 나에게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각기관이 있다는 거죠.

무슨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꾸 그런 쪽으로 가다보니까 몸에 해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서 먹어야 해요. 그렇잖습니까. 특히 책이 그렇잖아요. 그 어려운 걸 갖다가.

문명이 엄청난 지식체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책을 봐야 하지만. 특히 철학책 꼭 읽을 필요 있습니까? 있죠.

당연히 있죠. 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해도 되는 것인지 중국적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어떤 행동은 해도 되고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에요.

행위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에 관한 언설들이 전혀 격차 없이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뭘 통해서요? 특히 입을 통해서. 이 입이라고 하는 것이 먹으면 죽는 게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선 나가면 안 되는 게 있어요. xx야. 이건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구멍의 인간학이라고도 하는데, 혼돈을 얘기하면서 칠규라는 하는 게 거기 왜 등장하느냐. 칠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가 소통하는 곳이에요. 여기는 다 위기로 막혀 있기 때문에 기가 분명히 감응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안과 밖에 통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아홉 개의 구멍만이 안과 밖이 드나들면서 소통해요. 그런데 드나들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라고 하는 거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지는 같은 거예요. 과학과 인문학이 별개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이 접목돼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론이 가진 중요한 함축이에요. 기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면서 자연학이에요. 인간과 자연자체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과거에는 그런 걸 정당화하는 논리가 오늘날에는 신화적인 논리고 비과학적인 언어라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거죠.

문제는, 우리가 경험 세계 속에서는 그때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과 똑같아요. 그들이 느끼는 기나 우리들이 느끼는 기나. 조금 차이가 있죠. 우리가 조금 더 더러운 기운 속에 살아요. 공기도 더럽고 말도 훨씬 더러워졌고.

하지만 인간 대 인간 속의 환경은 엄청나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여기서 저한테 말도 못 붙일 사람이 많고 제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강사랍시고”하면서 속으로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실 분이 여기 계시진 않겠지만.

저 사람이 사람이다 라고는 생각하는 관계로 우리가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는 거죠. 그 부분은 인간이 성취한 진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몸의 논리 차원에서는 아직 미비합니다. 그렇게 얘길하죠. 현대 의학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게 됐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하는 분들은, 빈곤의 퇴치가 인간의 수명을 늘게 하는데 가장 도움을. 아프리카는 평균 수명이 삼십 대 초반 심지어는 이십 대에 죽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루에 죽어나가는 인구가 만 명인가 십만 명인가.

어느 한 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건 그런 것이죠. 결국 어떤 텍스트를 읽든 간에 그것이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는 중요하지 않고 기의 논의를 감응을 이룬다는 것은 내 몸의 논리를 통해서 체험하고 검증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딱지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적어도 전통과학사회에서의 기가 말하는 바대로 살고 있고 그리고 맞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신화적인 논리로 윤색되어 있고 유비적인 차원으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해요.

따라서 그 기준을 근대 과학에서 가져온다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내 몸의 경험, 내 몸의 판단으로부터 검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본초라는 책 속에서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린네가 분류표 만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분류학적인 뭔가가 있어요. 오히려 실험실에서 인삼의 성분인 사포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런 식의 연구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맥을 잘못 짚은 거라는 거죠. 그것도 필요해요. 그것이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질에 대해 대화하는 공통 용어들이니까. 공통 용어체계에 내가 동참해야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고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우리는 과학적 표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한의학이 해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동의학의 처방이 무슨 성분이 발견됨으로써 약효가 입증되었다가 아니라 그 약효라는 것은 먹으니까 병이 나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가져가야지 왜 실험실에서 그걸 찾습니까.

달리 말하면, 한의학 세계에는 실험실 의학이라는 것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각 개개인 한의사들이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환자를 다루면서 했던 임상적인 축적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야하죠.

왜 전통적으로 맥진을 해 왔는가. 그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 속에 든 게 기(氣)라는 것이고 표현한다면, 기의 운동이고 기의 흐름이고. 그리고 그건 우리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방구를 꼈다. 방구를 뀌면, 소리 없는 방구가 독하죠.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냄새가 있을 때 내가 왜 거기에 얼굴이 찡그려지고 기분이 나빠질까를 생각해보세요.

그게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이 감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순간 좋은 향수를 뿌린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향긋한 향내가, 특히 요즘은 아카시아향이 좋잖아요. 창문을 열어 놓으면 향이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도대체 감각한다는 것이 사물의 객관적인 정보나 성질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류하지 않으면, 방구냄새 나면 나가야죠. 창문을 열거나.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던 게, 인간의 감응체계를 감각이든 뭐든 정이라는 것도 가장 단순화시켜서 두 가지로 나누면 뭐냐. 好惡(호오)라고 얘기했죠.

이건 감정 즉 심리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자연학적인 용어고 자연철학적인 용어이기도 한 거예요. 호오는 도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인간관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물질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도 감응관계가. 좋은 것, 나쁜 것. 그래서 동아시아의 용어 속에는 자연과 문명, 인의에 대한 구별 자체가 기본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 엉뚱한 데다 힘 쏟는 경우가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오행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왜 하필 음양이냐 왜 하필 오냐. 여기에 목숨을 거는데, 사실 그 속에 비밀이 어떤 게 들어 있느냐는 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오행이 성립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 두 분이 있는데, 방박(龐朴)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어요. 17쪽, 18쪽 부분입니다. 17쪽을 보면, 방박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갑골문을 보니까 음양이나 오행이 없더라면서 오히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을 보니까 상 앞에다 중 자를 붙여서 중상‘중상’(中商)이라고 하고, 나머지 부분을 사방사방(四方). 자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거죠.

우리는 사방하면, 동서남북이라고 해서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앞, 뒤를 사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방향은 기본적으로 모 방자입니다. 네모꼴, 사각형이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방박이라는 사람은, 중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방을 통해서 다른 지역을 지칭한다는 표현은 결국 모방의 개념이다.

즉, 모는 우주의 수예요. 그리고 이 모습은 뭐와 닮아 있느냐. 왜 하필이면 거북이의 껍질을 가지고 점을 쳤느냐. 이렇게 생겼잖습니까. 닌자 거북이도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하늘에 구멍이 뚫렸을 때, 기울었을 때 여와가 복천을 오색선으로 하고 커다란 거북이 다리를 싹둑 잘라가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서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거북이 다리로 했느냐. 다 상징이 있는 거죠. 우주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데.

그래서 이 오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우주의 숫자고 우주의 숫자에다 갖가지 내용물을 섞은 거죠. 오만 있느냐? 사방도 있고. 오가 가장 근원적인 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숫자를 다 해서 모든 수에 의미가 부여돼 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오냐. 효율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를 가리키는 게 오장육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장은 다섯 개고 부는 여섯 개라고 부르느냐. 애매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유하는 방식이 중요한 거고 내용물이 중요한 거죠.

그걸 지칭하는 자연철학적인 배경을 기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응이고 인간의 몸 자체가 내부와 외부가 감응하는 관계에 어떤 방식의 감각을 범주화한 것이 있는가. 그런 게 분류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런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전통적인 맥락에 가깝고 우리들에게도 실효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상상력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하는 거고. 그걸 요즘에 섹시한 표현으로 바꾸면 옐로우 사이언스로 표현하는 거죠. 황색 과학도 가능하다. 백색 과학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서양 과학은 화이트 사이언스라 부르고 동아시아의 과학은 옐로우 사이언스라고 부르자고 농담 삼아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제가 곧 출간할 책의 제목이 옐로우 사이언스예요.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조금 나와 있는 표현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별로 얘기할 건덕지는 없어요.

하지만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둘러싼 사상도의 지형도 속에서 이런 내용이 당시에 튀어 나왔다. 그 속에는 문헌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지만 상당한 경험들이 응축돼 있었고 그런 것들이 노자나 황제내경 텍스트를 통해서 분출되었다고는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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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9강 상상력과 과학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9_01.htm

제9강 상상력과 과학

◆ 노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


▲ 노자의 기(氣) 철학

이번 주에는 원래 제목과는 한 글자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기와 덕이라고 돼 있었는데, 그러다보니까 전부 사회적인 얘기만 나오고 기(氣)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얘기가 좁아질 것 같아서 제목을 기와 자연으로 바꿨습니다.

사실상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면 노자라는 책의 본래 이름은 도덕경이죠. 즉 도경이고 덕경이 있단 말이에요. 노자는 도와 덕에 관한 책이에요. 기에 관한 책이 아니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고 기라는 글자도 굉장히 적게 나오고. 기에 관한 얘기가 표면적으로 나오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하지만 노자라는 텍스트에 녹아 있는 사유방식은 상당부분에서 당시에 성장하는 이른바 기론적 세계관의 논리적 맥락을 그 안에 응축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사실 텍스트 자체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기는 자연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 가지는 노자 원문에 나온 기만 가지고 기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나 제한된 맥락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후대에 나온 다른 주석서를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시대적 굴곡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자 텍스트에 관한 얘기라고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태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와 관련된 사상이 실제로 중국 과학 사상 속에서 연계돼 확인할 수 있는 분야는 두 개예요.

하나는 천문학, 그리고 하나는 한의학입니다. 그런데 천문학은 이미 석권돼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게 사실이죠. 더 적절할텐데.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과학적 성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상대적인 건데. 하지만 한의학의 경우에는 지금도 우리가, 나가면 한의원이 그대로 있고 실제로 임상을 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과학이라는 거죠. 인정을 받고 있고.

따라서 그와 같은 소재를 연결시켜 보는 것이 훨씬 논의가 재밌을 것 같아요. 너무 제한된 내용을 사회적이고 정치 사상적인 함의로만 봤다면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 자연철학적인 맥락을 확장해서 얘기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되지 않은 부분도 꽤 있고 저의 개인적인 시각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이 오늘의 주제예요.

노자와 기라는 것이 굉장히 친숙한 것처럼 얘기되는 까닭은 노자 텍스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20세기 중국에서 철학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확장된 서술의 결과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로 많이 자본주의화돼 있지만 스스로는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말하죠. 사회주의 사상의 출발은 마르크시즘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은 보통 역사적 유물론고 변증법적 유물론 두 가지로 이야기하죠. 그리고 인간의 역사 과정 자체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반한 법칙대로 운영됐다는 게 그 틀입니다.

그에 의하면 중국 역사도 원시공산제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로 가야 하죠. 그런데 문제는 마오가 등장하면서, 이 마오이즘은 중국에 토착적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단 말이죠. 그에 맞춰야 해요.


▲ 노자의 기 철학에 대한 오해

그래서 한 때는 공자가 고대 노예제를 대변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해서 30년대에 사회사 논쟁이 붙기도 했고요. 중국 사회 성격 자체를 마르크스주의 발전 과정 도식의 어디에서 어디까지에 배치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상당히 커다란 논쟁을 했단 말이죠.

노자는, 처음에 우리가 시작했던 것처럼 출생년도가 뭔지 왔다갔다 한다고 했죠. 하지만 중국 철학사 서술이 재미난 건, 50년 이전의 중국 철학사 서술과 50년 이후의 철학사 서술이 바뀌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 이전에 서술된 것은 공자로부터 중국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그랬던 것이 이른바 밁시스트 역사가에 의해서는 노자로부터 출발해요.

노자와 공자의 관계 문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지난 번 우리가 살펴봤던 소국과민은 원시적 공산사회의 흔적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고 했었죠.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결합되었길래 그럴만한 소지가 있었는지를 확인했다면.

또 한 가지는, 역사적 유물론은 그렇게 증명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그래서 기를 물질로 해석해왔어요. 물질로 해석했다는 것이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해석 방식의 영향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무지하게 많이 받고 기를 물질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에 관한 이야기도 오늘 토론될텐데.

그러다보니까 노자는 공자의 앞선 사람이 돼야 해요. 그래서 보통 사기에 서술된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원시공산제 사회만 있는 게 아니란 유물론 사상의 맹아가 있어야 해요. 그게 바로 노자에 나오는 기입니다. 그게 강조되다보니까 노자가 어떤 기철학적인 배경을 갖는 것처럼 서술해 왔어요.

하지만 사실 텍스트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서 훨씬 더 과장되게 해석돼 왔다는 점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넘어가면, 그런 식의 역사이야기는 막연하게 다가오잖아요 막연함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서, 기, 자연, 도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구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인식구조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기를 이해하더라도 어떻게 돼서는 곤란한지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얘기를 한 번 보도록 하죠. 자,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면 3쪽에 그림이 나옵니다. 이 그림의 대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어요.

철학이라는 학문이 하늘의 허공에서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속되게 표현하면,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충분히 문화적 증거와 호흡할 수 있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어야 해요. 3페이지를 보시면, 제가 일부러 사진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친숙한 텍스트에서 끌어 왔어요.

허준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왼쪽의 사진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예요. 오른쪽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이 사람은 실제 르네상스기에 활동한 사람이고 실제로 서양에서도 해부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나온 거예요.

이 사람이 베사리우스라고 하는 유명한 해부학자보다 다빈치가 앞서요. 앞서는데,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크게 다루지 않는데, 이 그림 말고도 굉장히 많은 그림을 그렸죠.

그림을 보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죠. 왼쪽의 그림을 보면서 이게 사람 내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건 상당히 비상식적이거나 가공, 허구적인 그림처럼 보이죠. 실제로 한의계통 의서들이 서구에 수입됐을 때, 이게 무슨 인간을 그림 그림이냐면서 별의별 악평이 나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오른 쪽 다빈치의 그림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내 몸은 이렇게 생기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약 내 몸 속의 모습이 이렇게 생기지 않다는 말은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똑같은 거죠?

우리가 적어도 상식적으로 볼 때는 오른 쪽 그림이, 사실은 모르죠. 저는 그렇게 안 생겼을지도 몰라요. 열어보면 혹시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폐가 왼쪽에 있고. 열어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해부학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도 그렇고 서구 의학계에서도, 죽은 사체를 해부한 흔적으로 살아 있는 생체에 관해, 사실 유비적이라는 거죠. 생리학패러다임이 깔고 있는 것이. 그런 방식의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약도 그렇잖아요. 사람에게 직접 바로 주는 게 아니라 쥐에게 실험하잖아요. 무슨 죄가 있다고. 대략 1년에 3억 마리가 실험용으로 소비되는 쥐가, 훨씬 더 되나. 엄청나게 많은 생쥐가 인간을 대신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인간에게 실험하죠.

또 이것과 비슷한 예가 인삼. 엊그저께 어떤 선생님을 만나서 재미난 얘기를 들었어요. 강원도의 분이 사업을 하다가 옷장사를 했대요. 이 분이 이 사업을 접고 산 속에 들어가서 조용한 집에, 넓고 집 두 세채 밖에 없는데 들어가서 사시는데 이 분이 집 앞에서 우연찮게 산삼 세뿌리를 발견했대요. 침이 꼴딱 넘어가죠.

그 얘기를 하다가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는데. 제가 여쭤봤어요. 산삼이 실제 효과가 있느냐. 플라시보아니냐. 그건 모른다. 실제로 복용한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 특히 한의학자들은 효과가 있다고 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삼과 산삼을 실제 성분 분석을 했을 때, 사포린의 양 차이가, 제가 알기로는, 2.5배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해요. 조금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인삼을 어린애들에게는 안 먹이는 게 좋죠. 그리고 홍삼은 가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먹는데, 저 같은 경우는 인삼을 먹으면 아주 좋은 체질이래요. 소음인이라서. 한 번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보약을 먹으려고 한의원을 갔어요. 제 친구인 한의사가 보약을 먹지 말고 차라리 보신탕을 먹어라. 훨씬 싸고 니 몸에 잘 맞는다.

해서 몸이 안 좋아지거나 여름 되면, 제가 더위를 잘 못 참아요. 그래서 보신탕을 한 번씩 먹어요, 혼자 가서. 다행히 멤버가 있어서. 즐겨 먹진 않거든요. 보신탕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한 번 먹다가 그 개다 우리집에서 기르던 개라는 걸 먹는 와중에 들었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올라와서 토하고 난 뒤에는 못 먹었거든요. 못 먹다가 나중에 약이라고 생각해서 먹으라고 해서 한 두 번씩 먹는데. 요즘에는 2,3년 동안 못 먹었어요. 올 여름에는 한 번 먹어볼까 생각 중인데.

인삼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사포린이라고 하는 성분 때문에 인체에 엄청난 치료효과가 있고 몸의 기력을 활성시켜주는 뭔가가 있다는 게 근대과학적인 설명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인삼이 인간의 몸과 죽어가는 기의 관계를 다 설명하는 것인가 라고 자문해보는 것과도 똑같은 질문일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제목이 우리가 오늘 얘기하려는 것이 기와 자연인데, 이 그림이 어떻게 관련있느냐. 이 얘기가 저도 순간적으로 착상한 건데, 가만히 따져보니까 이와 같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 “상상력의 과학은 가능한가” 저는 한의학에 대해 붙인 명칭이 근대과학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과학만 과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은 다양한 방식의 과학일 수 있고 특히 우리가 생각할 때, 상상력이 과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특히 한의학 책은 상상력 개념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상력으로 정당화되는 과학일 수 있다는 게 오늘 이야기의 주어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죠? 말 조어 자체가. 제가 원래 황당한 조어를 좋아합니다.


▲ 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읽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노자의 구절을 볼까요. 이것도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먼저 노자 14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어슴푸레하다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어렴풋하다고 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두루뭉실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질 수 없는 것이니 그 때문에 서로 섞여 하나가 된다.
(『노자』 14장: 視之而弗見, 名之曰夷. 聽之而弗聞, 名之曰希. (搏)之而弗得, 名之曰微. 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자, 여기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고 하고 들어도 듣지 못 하는 것을 희(希)라고 하고 손으로 만져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을 미(微)하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미하다, 미세하다’고 하는 표현이 여기서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의 표현을 보면 마치 서양철학적인 방식의 맥락과 쉽게 연결되기 위해서 ‘추상적’이라고 표현해요.

‘도’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도라는 건, ‘추상적인 거다’고 건너뛰어 버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유는 고대 중국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하학이나 특히 물리학, 수학, 동아시아에도 수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수나 산술적이었지 기하학과 같은 학문은 없었어요.

나중에 중국이 근대 수학을 받아들일 때도 기하학에 대해서, 도무지 이 놈의 학문체계는 내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정도로 기하학은 동아시아인들에게 독특한 학문이에요.

그럼, 또 이와 같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무엇과 연결시키느냐면, 주역대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자위지도’ 라고 해서 형이상(形而上)학이랑 연결시켜요.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형이상’ 이라는 말은 주역 대사전에 나오는 그 말의 맥락 자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사실 metaphysica 라고 하는 것. 이 본래 말의 출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배열할 때 자연학 다음에 오는 저작 텍스트를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자연학 관련 논문 다음에 나오는 논문이라는 뜻이에요. 거기서 다루는 것이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이걸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그럼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실체를 다루는 학문이잖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입니다. 그 실체가 플라톤과 같은 사람에게는 이데아가 되잖아요. 형상이죠.

동아시아에서도 형이상이 나올 때, 형이상학이 도라고 표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를 실체 혹은 형상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건 잘못된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죠.

형(形)은 감각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그 윗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추상이라는 말보다는, 상(象)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지는 따져봐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냥 이걸 물질적 현상세계로 그냥 넘어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근대와 교통시켜버리는 거죠. 이건 근대에 의한 독해의 전형적 사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유형, 무형 이런 용어를 얘기할 때 형체가 있다, 없다는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즉 숫자 하나, 둘, 셋, 넷, 오렌지가 하나 있고 방울토마토가 하나 있고와 숫자 1은 다른 거죠. 숫자 1이라는 추상개념은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거죠. 이런 건 형이하학세계에 속하는 거죠, 구체적인 사물은.

그런데 이렇게 연결시키면 안 되고, 물을 생각하시면 돼요. 이만한 둥그런 냉장고 뚜껑을 열어서 판에다 네모난 얼음을 얼리잖아요. 그걸 뜯어서 물 속에 집어 넣어보세요. 그럼 물과 얼음이 구별 되나요? 잘 보면 보여요.

그런데 똑같이 무색인 물은 잘 안 보여요. 그때 형체가 있는 것은 얼음이고 형체가 없는 것은 물이죠. 유형과 무형의 관계는 그렇게 이해해야 해요. 실제로 굉장히 경험적인 사유를 했던 것이 고대인들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 德(덕) 용어의 기원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여기서 견,문이 불 자에 구성당하고 있죠. 시청과 견문은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어요. 본다는 것은 실제로 보는 행위를 가리켜요. 하지만 견은 보아서 안다는 뜻입니다. 인식을 전제하는 용어예요.

견문은 그냥 본다, 듣는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알았다는 뜻입니다. 견 자가 나오는 것은 분명히 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그냥 본다는 건, 못 볼 수도 있어요. 한자의 용례가 기본적으로 그렇게 쓰인다는 걸 생각하시면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어떤 사물을 응시한다고 해서 그 사물을 반드시 안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건, 고대 중국에서는 감각 자체가 인간의 객관적인 인식을 제대로 성립시키지 못 하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전제는 없습니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특히 기론적 세계에서는, 이 세계 모든 본질은 이미 현상 자체를 통해 드러나 있는 거예요. 즉, 보이는 것 속에 이미 보이지 않는 게 드러나 있어요.

보이는 것 속에 본질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示(시) 보기만 할 뿐이지만 見(견) 보고서 아는 사람은 다른 거죠.

이 본다를 “알아본다”고 하면 됩니다.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감각도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 신체가 반복적으로 했던 경험의 제약을 상당히 많이 받죠.

우리 시각이 굉장히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런 실험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면, 저도 글을 보고서 실제로 해봤거든요. 인종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백인들에게 흑인들 열 명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 얼굴을 보여주고, 그 다음 한 사람씩 지나가게 하고 “당신이 아까 본 사람이 열 명 가운데 누구냐?” 라고 하면 잘 못 맞춘답니다. 열 명에 아홉은 못 맞춘대요.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서양 사람은 못 맞춘대요. 그런데 한국사람은 백인은 잘 맞춰요. 왜냐. 브라운관을 통해서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흑인은 잘 못 맞춰요.

지난번에 어떤 신문기사에선가. 누가 장치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집어 넣어서 실험을 했다는데. 인간의 감각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나의 능력의 문제. 그래서 ‘눈이 밝다’(明) 이건 지혜롭다는 뜻이기도 하잖습니까. 특히 노자 텍스트에서 명은 신적인 지혜의 소유와 같은 거예요.

하나는 해고 하나는 달이잖아요. 해와 달은 온 천지를 다 비추는 거예요. 다 아는 존재예요. 해와 달이 천지를 다 비추면서 다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지혜를 갖는 게 명이에요.

엄청난 단어죠. 인간이 이걸 갖고 있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 표현하는 말이, 신명(神明)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보통 무속인이 신명났다고 말하지만 사실 신명은 본래부터 아주 친밀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가 어디에 들어가 있느냐. 덕(德)에 들어가 있어요. 덕이라는 글자가 고대에서는 뭐와 연결되느냐면. 제가 약간 조야하게 그렸는데, 도철무늬라고 하죠. 특히 상형, 청동기에 이런 게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덕 자의 원형이고 이건 해와 달의 눈에서 왔다. 신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해요.

왜 청동기 속에 이게 그려져 있는가도 설명되고, 덕이 신명의 힘을 가진 사람이 발휘하는 거라는 거죠. 이 주체는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사람이고 태양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도덕경 속에 들어가 있는 덕이라는 용어의 출시는 그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런데 도덕경이 가진 성격은 그 앞의 것과 달리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힘이 어디서 오느냐. 도덕경은 내가 도를 따름으로써 덕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 덕을 얻는 방식이 天. 즉 나의 혈연적 조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을 다스리고 자연을 움직이는 입법을 따름으로써 힘을 갖는다는, 즉 정치적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다른 곳으로 바꼈다는 거죠.

이런 역할을 공조했던 사상이 음양오행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추연의 음양오행설은 왕조의 교체 정당성을 자연철학적으로 천명한 거예요. 원래부터 자연철학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실 혁명이론이죠. 정치 교체이론을 얘기한 건데, 당시에 기론, 도론이 한꺼번에 개화하면서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노자의 이 구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는 뭐냐. 이 속에는 인간이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그 무엇까지 보려는 욕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움직임의 배후에, 이 때 배후를 meta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지 않으면 돼요. 그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면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은 보이지만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은 보이지 않죠. 하지만 그것이 꼭 추상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사과를 놓으면 떨어진다는 것은 도에 의해서라고 표현한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에는, 길짐승이 뛰어다닐 수 있고 날짐승이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다 도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 것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자꾸 meta라는 방식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때 관계가 실제 현상과 어떤 방식의 용어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거죠.

지난 20세기에는 서구 근대과학을 흡수하고 배워야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친한 척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텍스트 자체를 오해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내부 맥락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이해시킬 수 있는 용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과정에서 이 얘기를 다시 해보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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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과 과학


▲ 신형장부도와 인체해부도

그 다음 문장을 보시죠.

[어떤 물건이 있어 혼돈스럽게 이루어졌으니 천지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홀로 서서 변하지 않으니, 천지의 어미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자(字)를 붙여 도라고 하고, 나는 억지로 이름하여 ‘크다’고 한다.
(『노자』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蕭呵寥呵, 獨立而不改, 可以爲天地母. 吾未知其名, 字之曰道. 吾强爲之名曰大.)]

앞에서 이야기한 세계와 뒤에서 얘기한 것이 이름을 얻어가기 시작합니다. 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도 혹은 대화 같은 글자가 출현하는 과정 이전에 그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던 용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 맥락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훨씬 더 본래의 맥락에 부합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런 용어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친숙하지 않고 표현이 낯설기 때문에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예를 드는 게 좋겠죠. 그래서 제가 한의학을 끌고 들어온 거예요.

허준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왼쪽의 그림은 상당히 특이해요. 실제로 인간의 몸을 해부해보면 이와 같기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게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인지했어요.

오른쪽 그림은, 적어도 내 몸을 열어보더라도 이렇게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상식에 기초한 우리 몸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왼쪽의 그림은 허구냐, 망상이냐.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하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의사들조차도 이와 같은 그림이 실제와는 다르지만 의학적으로, 한의학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정당화해야 하느냐. 분명 우리 몸의 생김새 자체가 다르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왼쪽 그림과 같은 인간의 모습에 대해 인지가 있었고 그게 그림으로 표현되었냐.

의외로 단순하더라고요. 해부와 관련된 중국 역사 기록을 보면 몇몇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특히 <영추경>을 보면 장부의 내용을 측정한 것까지 나오거든요. 길이가 얼마나 그 속에 뭘 담으면 얼마나 들어간다고 해서 일본학자의 경우는 계량해부학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왕망시절에 반역자를 처단하고 그를 해부하게끔 했어요. 해부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로 형벌입니다. 중세 대학에서 해부를 허용한 것도 죄수들에 대해서 해부를 하게 한 거예요. 가장 극악한 형벌을 받은 사람이 해부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것도 마취 없이. 끔찍하죠.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해부하는 거예요. 그림에도 나오는 역사 자료라서.

그래서 죄수나 사형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형벌을 했다는 거죠. 끔찍한 거죠. 이와 비슷한 끔찍한 일들이 꽤 많아요. 1950,60년대인가 어린이들은, 어린이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아직 미숙하잖아요. 아주 어린 애들을 수술할 때 쓰던 마취약이 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마취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근육이 움직여서 고통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근육이 경화돼서 근육이 안 움직여서 아프다고 표현을 못 하는 거예요.

엄청나게 많은 어린이들이 그 약이 투여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거예요. 끔찍한 거죠. 의학에서 일어나는 수술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쇠고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들은 정치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의학적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일본이 특히 20개월 월령 아래의 소들만 수입할 수 있도록 조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정부가 직접 협상을 안 했고, 보건과 관련된 단체에서 협상을 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언론적으로 할 수 있었고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한의학에서 인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실제 중국의 의사들도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반드시 째고 열어서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거니다. 우리는 서구 의학 자체가 오랜 과학발전을 통해서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이 결합된 상태에서 이른바 해부병리학이 있었고 인간의 병을 진단한다고 생각하시죠. 상식적으로.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서구에서마저도 해부학적 지식이 실제 병리학과 연결되어서, 예를 들면 장기 명칭이 나오고 질병 명칭이 나오는 걸 해부병리학적 명칭이라고 해요.

그와 같은 방식의 일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에요. 달리 말하면 서구 의학에서도 해부학은 실제 의학 사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게 별로 없다는 겁니다.

다빈치 시대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해부를 하고 해부도를 그렸는데, 이 사람들은 의사가아니라 예술가들이에요. 화가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죠.

이 당시에도 의사들이라고 하면 주로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느냐. 내과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럼 수술은 누가 했느냐? 이발사가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제가 배우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실제 뇌수술을 하는 게 나오는데, 이발사예요.

이발사라는 직업은 상당히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직업이라고 해서 단순히 높은 직업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효자동 이발사>에 송강호 씨가 나오잖습니까. 이발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대단한 직업이냐면, 맨 마지막 장면에 이발할 머리가 없으신 분들이 들어왔다가 잘렸잖아요. 전에 박정희 대통령을 하다가.

그런데 이발을 하든 면도를 하든, 특히 면도를 생각해보세요. 칼을 목에다 대고 하는데 그 사람이 믿지 못 할 놈이라면 그 권력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 자기가 하면 되죠. 안 하죠. 이게 권력이 갖는 속성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만약 내가 이발산데, 정치지도자가 나쁜 놈이다, 아니면 반대파 쪽에서 뭘 받았다고 하면 손쉽지 않습니까. 이발사라고 하는 직업에 대해서도 그걸 보면서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됐단 말이죠.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신체 내부를 들여다본다 혹은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 방식을 사진이라고 하죠. 환자에게 묻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맥진입니다. 중국 의학하면 맥진과 동일어로 보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맥을 잡는 것이 한의학의 가장 큰 특징이고 치료를 할 때는 침을 쓴다. 이게 바로 한의학이 가진 이론과 임상의 가장 큰 힘입니다. 둘 다 기와 관련돼 있죠. 그래서 기를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에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왼 쪽의 그림은 시각적인 거죠. 그런데 한의사들은 실제 인체를 칼로 열고 해부해본다는 방식이 어떤 모양,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느냐와는 무관했어요.

아까 제가 소개할 때, 황제내경 영추경에 든 서술을 보면, 크기를 재긴 하지만 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 그 다음에 심장이나 폐가 어디쯤에 위치해있는지 길이는 얼마나인지 측정하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침을 꽂을 때와 긴밀히 연관되는 방식으로 내부를 들여다봤단 말이죠.

실제로는 장기의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위치가 중요한 거죠. 위치라는 말은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 상상된 신체

또 한 가지, 이렇게 엉성한 그림을 놓고 보면서도 더 이상 해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해요. 그 배후의 메커니즘은 뭐냐. 칼로 째고 본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는 거죠.

그럼 뭘 통해서 본 거냐. 손가락으로 본 몸이라는 거죠. 손가락으로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본 것인데, 이 촉각적인 것을 어떻게 들여다봅니까. 촉각이라는 것은 인간이 전달하기 어려운 언어감각체계예요.

가만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특히 눈은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외부로 노출된 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전달받는 것의 90%가 눈을 통해 들어간다고 해요. 그래서 인간 자체가 눈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상당히 쉬워요.

그런데 촉진한다는 것. 이건 분명히 촉각을 통한 거예요. 그런데 그 안을 도대체 어떻게 자기가 들여다본 내용, 경험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림이나 글자 혹은 언어화시켜서 전달해야 하는데, 참 전달하기기 어렵잖습니까. 그러다보니까 해부도와 같은 그림이 이렇게 된 까닭은, 실제 형태상의 문제가 아니라 촉진을 통해서 받아들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시각이 굉장히 중요한 매개가 되기 때문에 그 촉각의 정보를 전달하기 용이한 방법으로 시각화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따라서 이게 실제 형태의 모습과 같냐 안 같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몸속을 흐르고 있는 기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고 어떠한 지점에 어떤 자극, 침을 가했을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와 연결되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상상된 신체’라는 표현을 썼는데 상상은 그냥 imagination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의미의 상상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한된 의미로 쓴 건데, 기본적으로 이것이 시각의 상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상을 이미지라고 표현한다면, 촉각적으로 지각된 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그러다보니까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의 전환을 한 노력의 결과로 보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때의 그림은 상상된 신체의 모습이다. 해서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시각적인 내용 자체가 아니라 기라고 하는 무형한 것을 유형한 것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죠.

한의사 분들이 많은 자리에서 이 얘기를 발표하니까 ‘그럴듯하다’ 동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분들은 실제 임상하는 것들이고 이 그림을 그렇게 그린 것이든 상관없죠, 이 분들에겐. 효과가 중요한 거니까.

그런데 저 같이 문헌을 통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한다는 게 왜 중요하냐. 바로 과학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을 새로운 기준을 통해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이게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야기 내용은 이게 다 예요. 그런데 이 속에 들어있는 논리가 뭐냐가 중요한 것이죠. 이와 같은 방식의 정당화 논리를 꺼냈는데, 그럼 도대체 이런 정당화 논리가 우리에게 뭘 줄 수 있느냐. 그 배면의 논리는 무엇과 관련되고 실제로 이것이 다른 것과 관련돼서 어떤 함축을 지니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념들로 건너가게 될 텐데. 첫 번째는 자연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자연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고 또 한 가지는 자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에 관한 얘기를 할 거고. 그리고 그 기를 인간이 인지하는 중요한 카테고리인 음양오행을 얘기하면서 노자 속에 들어 있는, 노자엔 음양표현이 나오죠.

그 다음 충,기,이,비,화라고 하는 표현 속에 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의 배면에이 도와도 연결돼 있고. 따라서 노자라는 책 속에 명시적으로 들어있지는 않지만 여러 표현들 속에 함축돼 있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이해한다면, 이 세 가지 용어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난 건, 황제내경 속에 노자의 일부 문장이 인용돼 있는데, 그 일부 문장들이 하상공 판본에 있는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판명돼요.

그래서 노자 원문 일부가 황제내경 속에 들어가 있어요. 따라서 노자와 황제내경은 상당히 친연성 있는 문헌이라는 증거가 있거든요. 그것이 바로 황로학이라는 학문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것은 노자 텍스트만 가지고 노자를 이야기하는 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된 맥락들, 역사적 상황,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용어들에 보다 분명한 맥락을 부여하면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우리가 처음 봤던 것처럼 몸의 관, <신형장부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왜 이렇게 그려질 수밖에 나름의 이야기 세 가지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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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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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 하상공의 노자 해석 : 치자의 덕목


▲ 치자의 청정무위淸靜無爲

여기까지는 백성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 하는 방식의 이야기인데 번역을 하신 분이 그러면이라고 말을 붙였던 것처럼. 여기에서 목소리와 톤이 즉 화자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雖有舟輿, 無所乘之;)

보통 우리가 이 부분을 해석할 때는 문명의 이기들이 있더라도 밖에 나다닐 일이 없으니까 할 일이 없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뭐라고 해석이 나왔냐면.

맑고 고요히 무위하고, 번잡하고 화려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들고나며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淸靜無爲, 不作煩華, 不好出入遊娛也.)

누가. 노는 것 싫어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데 놀지 않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치자. 왜그러냐하냐를 따져보죠.

원문을 보세요. 淸靜無爲 청정무위라고 하는 말이 나오죠. 청정무위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초기의 이념. 황로학의 이념을 표현한 네글자입니다. 이 말은 현재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는 용어에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있느냐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치자가 간섭하지 않음이라고 되어있어요. 대한화사전이라든가 보면 일반적으로 나오고 지금도 쓰이고 있는 용어입니다.

왜 이 얘기가 나왔느냐. 저는 이런 것들 때문에 바로 하상공 주석이 한 초의 이념을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저는 이제 보는 입장에 있는데. 대다수분들이 대개 후한쪽으로 많이 봐요. 특히 최근에 국내에서 연구하신 분들은 후한시대의 문헌이다라고 보는데. 저는 이제 이것이 구전 전통이 나중에 문자로 정착된 것은 후한이지만 일부 상당 부분은 한초의 맥락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특히 이런 것들이 증거라고 보는데.

어느 쪽이 옳다 라고 확실하게 결판 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용어가 황로학의 이념을 대표하는 용어라는 건 분명해요.

즉 백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즉 농사철을 어기지 않고 제대로 해야지만 자식을 낳고, 먹일 수 있고 하는 방식의 그런 기본적인 생계조건을 마련해주는 그런 정치적 행위방식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不作煩華부작번화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앞쪽에도 나와있죠. 법명이 많으면 간섭이 많은 거예요 기본적으로. 지금은 워낙 다양한 방식의 범죄들이 일어나니까 그런 것들을 잡아내기 위해서 법을 입법하거나 아니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복지차원에서 입법하는 것. 크게 두 가지이지 않습니까.

하나는 무엇이냐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법이라면 하나는 안좋은 것을 제어하는 방식, 규제가. 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죠.

그런데 여기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이 많으면 안좋다. 이 얘기는 무엇이냐면. 한나라가 실제로 법대로 없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죠. 한나라는 반진. 요즘에 말하는 ABC 그다음에 ABR 하고 비슷한. 흔히 요즘 언론에서 표현되는 용어죠. ABC는 anything but Clinton은 ABR은 anything but Rho. 참여정부의 그것하고는 다른 기조의 이런 방식으로 한 것처럼. 당시의 한나라는 무조건 진나라가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고 선포하면서 했어요.

특히 함양성에 입궁하기 전에. 유방이 먼저 도착했죠. 나중에 항우에 필적할만한 나름대로의 세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 진 치고서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랬다가 항우가 들어간 다음에 갑니다. 이 때 유방이 가만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에 있던 장로들을 만나요. 진나라의 가혹한 학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세 개조만 법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싹 없애겠다는 약속을, 기록에 따르면 거기에서 했다라고 해요. 그래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냈다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나 진나라의 법률전문가들을 그대로 살려냈고. 간다는 말이에요. 특히 이 때 한고조 그 다음에 효해제. 그 다음에 들어서는게 문제. 그래서 文景之治문경지치 라고 하는 표현. 한나라때면 나오죠. 가장 성세라고 표현하는 시대 중에 하나가 이 때에요. 그 다음에 정관지치니 이런 몇 군데가 있지 않습니까.

문경지치라고 하는 것은 문제와 경제 시대에 황제의 다스림. 그러니까 지치의 시대라고도 하고 아주 안정된 상태라고 얘기를 하죠. 이 때 문제가 있을 때 아주 유명한 고사에요. 문제가 왜 문제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느냐. 무일 경우에는 무를 앞세워서 정복한 그래서 주나라에도 무왕이 있고 다 있잖아요. 한 대에도 무제가 있고. 군사활동을 많이 했으니까. 다 무가 있단 말이에요.

보통 태종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다 그와 비슷한 방식의 일들을 했죠. 왜냐하면 안정시키기 위해서.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나라 때 법명이 정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전이가 됐어요. 초창기에만 잠깐. 왜냐하면 할 수 있을 만한 능력도 안됐고. 그렇잖아요.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공권력이 필요한데. 공권력을 준다라고 하는 것은 치세가 안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조세제도 등등의 갖가지 것들이 완비되어야지만 가능한 건데. 할 수 없으니까 못한 거에요. 사실은 청정무위는. 기본적으로.

군현제가 아니라 군국제로 회귀했다는 거거든요. 귀족들의 특권을 다시 인정해주고. 결국은 하나하나씩 죽였지 않습니까. 이성 異性. 류씨가 아닌 사람들부터 하나하나. 한신의 몰락이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고.

그런데 문제는 사기, 편작창공열전이라는. 유명한 의사 두 명이죠. 이 창공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의사였는데 굉장히 치료를 잘했어요. 치료를 잘안해줘서 원성을 샀어요. 많은 사람들한테. 그래서 이 사람이 뭐에 연루가 돼서 올라가요. 압송을 당해서 사형을 받으러.

그 집 셋째딸. 딸을 잘 둬야 되요 그래서. 아들은 소용이 없어요. 맨날 자기가 아들이 없어서 이럴 때 제대로 도움을 못받는다라고 하니까. 막내딸, 셋째딸이 가서 내가 아버지 대신 죄를 받겠다 하고 탄원을 해서 왕이 그것을 윤허해서 사면을 해줘요. 그리고 나서 창공한테 네가 여태까지 했던 어떻게 의술을 닦았는지 그 다음에 너의 임상기록들을 보고를 해라라고 해서 편작창공열전 뒷 후반부가 임상에 관한. 이른 바 공식문서화된 의서로써는 최초로 나옵니다.

그 이전의 것들은 다 출토된 문헌이거나 하는 방식인데 비해서. 그것은 실제로 창공이라는 사람한테 요구를 해서 정부에서. 그래서 이 사람이 조정에 바치는 보고서가 거의 그대로 삽입되어서 나와 있는 기록이에요. 그래서 황제내경보다도 의료사적으로 앞서있는 문헌이거든요.

그것이 그렇게 나오는데. 이 사람이 더 유명한 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더 유명해요. 치도곤을 당해서 죽을 뻔했는데 딸 때문에 살았어요. 문제가 그것을 사면해준. 그래서 문제. 가혹한 형벌을 낮추었다는거죠.

특히 나중에 무제 시대에 들어가면 중국법률사에서 특히 표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원심정죄原心定罪라고 해서 동중서가 여기에 동의를 했다고 해서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부분인데. 원심정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본래 중국 진나라 형법 제도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증거주의 이미 채택되어 있었고. 그리고 법률체계, 형벌체계가 상당히 합리적으로 되어 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나라의 법제가 그렇게 끔찍하지 않습니다.

한나라 때, 진나라에 대한 엄청난 비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안그렇다고 그래요. 실제로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거의. 오히려 그것을 더 관철시키고 싶었지 할 수 없으니까 못한 것 뿐이에요. 모든 치자들의 욕심이 그랬던 것처럼.

이 원심정죄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바로 반란 세력을 초토화시키는데 잘 동원했던 것인데 원래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입각한, 증거에 입각해서 처벌하게 되어있는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뭐냐하면 그 마음을 따져봐서도 죄를 정할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실제로 물증에 의해서 처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 역심을 품었지?해서 죽일 수 있는 방식의 법원리에 당시에 제출된 거에요. 무제 때 실질적으로 말 안듣는 사람들 재산 몰수하고 전쟁동원하기 위해서 그 물자들 조달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 많이 했을 때. 가장 쉬운 것이 너 반역하려고 했지? 하면서 구족을 멸하고 환수하고.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회체제가 있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그러면 귀족 지배층들이 그렇게 당했으면 그 밑에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더 가혹하게 당할 수도 있는거죠.

그래서 사실은 전한시대의 절정기는 무제때이지만 그 절정기가 바로 몰락의. 그래서 늘 클라이막스는 몰락의 시작이라고 하는 표현이. 똑같습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내용은 ‘번잡하고 화려함을 일으키지 않으며’는 초창기의 맥락들을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호출입유오不好出入遊娛 라고 하는 것은 娛오 자는 오락할 때 오자에요. 즉 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지금처럼 집안에서 TV보고 영화관 딱 홈세트 설치해서 보고 이게 아니에요. 뭐하고 놀았겠어요. 사냥 한 번 가죠. 그 다음에 연회 한 번 베풀죠. 그럼 동원되는 사람이. 황제가 한 번 사냥을 할 때는 수만명이 동원이 되는 것 아시죠. 동산전체를 병사들로 쫙 둘러가지고 못 도망가게.

그리고 그 안에서 사슴들이 풀어놓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 잡는거에요. 가봐야 못가요. 그것이 황제가 사냥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무협TV같은 데 보면 삼국지에서도 그렇고 보면 사냥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금촉이 달린 화살 해서 빵 쏘고 조조가. 현제랑 막 하면서. 그런 것도 나오고.

그러니까 한 번 논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물자가 동원이 되는 것이죠. 인력이 동원되고. 백성들에게는 무지무지하게 피곤한거에요. 앞뒤 맥락이 딱딱 맞죠. 그러니까 하지 말고 청정무위해라. 황제가 자주 나다니는 것은. 보통 황제가 나다닌다고 할 때 밤에 월담하는 경우는 있죠. 성종이 참 많이 했고. 그래서 자식이 몇 명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른 바 민정을 살피기 위해서 다녔던 것. 강희제, 용정제 그 황제들(청나라)이 그랬죠. 이 당시에는 못나가요. 나갔다가는 칼 맞아 죽기 십상이죠. 안정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나갑니까.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동원이 있는 것이고 지난번에도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홍루몽이라고 하는 소설의 첫 배경이 그 집안의 딸이 황후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이 됐어요. 그 후궁이 친정나들이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와서 잔치하고 가면 되잖아요. 대관헌이라고 하는 엄청난 공사를 지어서. 한 번의 친정 나들이를 위해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후궁이 그러할진대.

황제가 자주 들락날락 거린다. 아주 아주 곤란하죠. 이화원을 한 번 가보시면 그런 걸 쉽게 느낄 거예요. 이화원이라고 하는 데가 맨땅을 파서 호수를 만들고 판 땅 흙을 가져다가 산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 세운 것이지 않습니까. 올라가보면 사방이 다 뚫려 있기 때문에 다 보여요.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꽤 있어서 안 그렇지만. 대단한 일이라는 거죠.

도대체 내가 한 번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 백만명 단위의 규모가 가서 삽질한다. 불도저가 아니라. 그런 걸 한 번 생각해보시라는거죠.

불호출입유오不好出入遊娛 이것은 백성들이 박수치는 일이에요.


▲ 우민화 정치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雖有甲兵, 無所陳之.)
㈜ 천하에 원한이나 미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無怨惡於天下.)

이것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천하 백성들에게 원한 사거나 미움 당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은.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체가 치자, 황제, 제왕에게 몰려 있어요. 백성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레타고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것은. 왜. 내가 한 번 행차하면 피곤하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노끈을 묶어 사용하게 하라.(使民復結繩而用之)

이 주석이 굉장히 어떤 소박주의 뭐 그런 것들로 해석되는데.

㈜ 겉꾸밈을 버리고 질박함으로 돌아가니, 신뢰가 있어 속임이 없다.(去文反質, 信無欺也.)

여기서 문자의 사용을 폐기하라 이렇게 해석을 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안되는거에요. 왜. 행정은 문자 없이는 안되요. 기록 없는 국가, 정부는 있을 수가 없죠. 기록의 누적은 기본적으로 국가로부터 파생되니까.

여기에서 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백성들에 대해서. 즉 기본적으로 우민정치에 대한 얘기죠.

대한민국이 시민의식이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현실하고 분명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라고 하는 것은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교과서를 가지고 서로 개정하겠다고 서로 다투고 하는 일들이 왜 일어나겠어요.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 그 문자를 통해서 얻는 지식의 취득뿐만 아니라 거기에 온갖 문화적인 행동양식들이 집약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 인문학 서적이 안팔린다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문학이 미래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맞물린 커다란 사건이에요. 저도 이제. 책 얼마 쓰지도 않았고. 주로 남들이 잘 안 읽는 논문들만 써서 그렇긴 하지만.

저는 우리 사회에서 제일 빨리 없어져야할 병폐 중에 하나가 대중서하고 학술서를 구분하는 관행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리고 학술서를 교재로 쓰고 일반 비전공자들에게 읽히도록 강요하는 문화. 과거에 그렇게 수업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은 권위주의 방식이 아닌가.

물론 학술 세미나나 강연, 강의 자체가 서비스업이라고.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분류가 되요. 그것은 동아시아 정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거죠. 하지만 그렇다라고 하더라도 학자가 학자인 까닭은 자신이 고생해서 얻은 걸 너도 똑같이 한 번 고생해서 읽어봐 !하면 곤란하잖아요. 학자가 있는 까닭은 소화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학자인데. 그렇잖아요.

학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쓴다. 물론 철학이든 문학이든 단계가 높아져서 자신이 생각한 창조적인 사고를 정치학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표현들을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책들이라든지 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온 것들이죠.

우리 스스로가 독자들이 〈순수이성비판〉왜 옛날에 철학과 다니는 선배들이 꼭 그런 장난을 쳤다라고 하더라고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탈 때는 꼭 독일어판 원전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딱 들고 다니고. 그 다음에 미대나 이런 데 예술대 다니는 여학생들 특히. 한글책 안갖고 다녀요. 꼭 외국그림책도 반드시 원서로 갖고 다니더라고요. 큰 책.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되나. 한국 사람이 쓴 책. 조금 아쉬운 것은 한국의 독자들이 아직도 외국 책들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 더 권위를 부여하고 선호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학문을 망치는 것일뿐더러 우리 학문자체가 학자들 이전에 우리 사회의 교양이라는 것 상식 자체가 식민화된다라고 하는 현실하고 그대로.

소고기 수입하고 뭐 수입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죠. 외국책을 번역해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계속 현실을 진단하는 방식으로 읽는다라고 하는 것은 학자든 누구나 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그네들의 눈으로. 물론 우호적인 사람있고 좋은 사람있어요. 하지만 진보니 보수니를 떠나서 외국책에 대한 선호는 기본적으로 근본적인 식민주의, 식민주의학문의 뿌리가 만연되어 있다라고 보는 징조라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 학자가 쓴 글이 모자라잖아요. 하 우리나라 학자는 이래서 안되. 이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은 인정해주고 모자란 부분은 비판해야죠. 하다보면 비판을 먹으면 다음번에는 쪽 안당하려고 잘 쓰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쪽팔리다. 그것만큼 학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없거든요.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는거에요. 사실. 저도 강의 준비해오는 것이 뭐냐면은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혹시나 어려운 질문 나오면 어떻게 피해갈까 작전까지 짜서 오죠.

대표적인 장난 중에 하나가 예전에 한자를 쓰다보면 예전에는 다 손으로 원고를 쓰니까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다 워드로 해서 고르잖아요. 안쓰니까 손에서 기억이 빠져나가고 눈으로만 구별이 되요. 되게 쉬운 글자도 안되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여러 선생님들이 모여서 경합을 벌인거에요. 자기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그래서 막 쓰다가 하나가 생각이 안나니까 갑자기. 아주 유명한 선생님이에요. 딱 이렇게 하더니 F9. 키보드에서 F9누르면 한자가 뜨잖아요.

이런 일들이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어떤 어학을 갖고 승부하는 그런 시대 아니고.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차원이 학자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모든 차원에서 마찬가지로 조금 통용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하상공 주석은 철저하게 그 당시의 현실문제와 씨름하는 방식으로 주석이 이루어졌다. 왕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것은 훨씬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는 것뿐이죠.

왕필도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상적 맥락 속에서는 당시의 용어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백성은’하고 주어를 밝혀줬습니다. 번역이 참 좋아요. 이석명 선생님이 번역한 책인데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동양편)〉이것이 두 세가지가 나와있는데 이것이 번역이 상당히 좋으니까 이것을 참조하시면 크게 사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거에요, 거의.

(그러면 백성은) 자신의 밥을 달게 여기고(甘其食)

저는 여기는 다른 방식의 뉘앙스를 달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큰 문제가 없으니까 그대로 나갑니다.

㈜ 자신의 나물밥을 달게 여기고, 다른 백성의 음식을 빼앗아 먹지 않는다.(甘其蔬食, 不漁食百姓也.)

자신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美其服)
㈜ 자신의 나쁜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남의) 화려한 옷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美其惡衣, 不貴五色.)

자신의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安其居)
㈜ 초라한 오두막을 편안히 여기고 화려하게 꾸민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安其茅茨, 不好文飾之屋.)

자기네 풍속을 즐기게 된다.(樂其俗)
㈜ (자기 동네의) 질박한 풍속을 즐기고, (딴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다.(樂其質朴之俗, 不轉移也.)

이 구절들은 사실은 별 얘기가 아니에요. 뭐냐하면 안보여주면 몰라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 꽃을 광고라고 하죠. 그러면서 광고가 20세기 자본의 꽃이라고 다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비판적인 소비자연대 이런 데 가면 광고를 믿지마라 광고는 뭐 안하고.

그래서 요즘 나오는 얘기가 스타들의 신체를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다. 연예인의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관한 많은 비판 담론들을 성숙시켜놓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못사요. 그렇죠.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우민화정치가 들어있는건데 사실은 우민화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볼 때는 아주 안좋은 말처럼 생각되지만 이 당시에는 사실은 정치적 필요이기도 하고 중립적인 면도 있습니다. 분명히.

물론 오늘날 우민정치 옹호한다. 그것은 곤란하죠. 그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얘기라면 이 당시에 이런 방식의 표현들은 실질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가. 백성의 범주 속에 4계급까지 포함시킬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런 방식의 것들을 고민하며 생각한다는 것은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 소국과민의 낭만적 해석의 한계

(그 결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소리 개소리 서로 들려도
㈜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는 말이다.(相去近也)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가지 않는다.(民至老死不相往來.)
㈜ 백성에게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其無情欲)

라고 하면서 나온 얘기가 정욕입니다. 이 정욕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무슨 맥락이냐면 하상공 주에서는 정욕이라고 하는 표현이 기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맑고 좋은 기를 받은 사람들은 현인이나 성인이 되고 혼탁한 기를 받은 사람들은 일반 서민, 백성들이 돼서 자기들의 정욕을 다스릴 줄 몰라요.

그래서 성현이 백성들을 다스려야 된다는 근거방식도 여기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기氣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방식이 아니고 그런 방식에 있어서는 이것은 정치적인 용어가 되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신분체계를 자연학적으로 근거지어 준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것은 이정호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가치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고 자연철학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철학은 상당수가 이것이 왔다갔다 합니다. 특히 기가 이기론과 붙어서 이야기할 때는 기질변화론 같은 것 얘기할 때 안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도덕적인 담론이 과학화로 성공한 특이한 아주 특이한 사례가 바로 사상의학같은. 전세계에 없습니다. 그와 비슷한 건 있다라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고. 사상의학은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과학이에요. 철학이기도 하고. 실효적인 효과를 보니까요 실제로.

그래서 최근에 보건복지부에서 입안한 정책 중에 하나가 사상에 의한 기질. 팔상으로 나누는 분들도 있죠. 팔체질. 그것을 유전적으로 DNA 연구. 유전자 연구를 통해서 기질적인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하겠다 라는 게 나와서 상당히 2,000억 규모까지도 얘기가 됐다가 지금 실효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10년 단위로 해서. 실제로 의학하시는 분들이 말도 안되는 얘기다. 기하고 유전자를 연결시키겠다.

어쨌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뭔가가 이루어질 정도로 사상의학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아직 설을 풀 수 있는, 현대적으로 용어를 표현하거나 체득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못하겠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는데도 안간다 못간다 늙어죽을 때까지. 그러면 아주 쉽게 생각하세요. 갈 필요가 있는데도 못가거나, 아니면 아예 못가게 해서 못가거나. 두 가지예요.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거든요. 그러면 뒤엣것은 이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고. 그런데 적어도 표현이 인국인데 이 때 국이 얼마나 작길래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요. 이것은 마을 단위를 얘기하는 것이겠죠. 기본적으로.

그럼 앞에 것이랑 뒤엣것이랑 잘 안 맞는 말인데 사실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접경지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행정적인 분계선, 한계선. 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한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면 이 구절은 아주 쉽게 이해가 되죠.

이렇게 보건대 하상공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소국과민의 세계는 좋은 나라에요 나쁜 나라에요? 행정적인 발전의 단계로 본다면 좋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시각은 당시의 역사적 필요 특히 치자의 복무하는 담론이고 철저하게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분석되고 있다라고 하는 점.

이런 점을 본다면 낭만적인 해석, 이른 바 특히 니담 등으로 이해서 하는 원시적 농경 공동체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어요. 그리고 왕필의 주석에서도 구체적인 마을의 모습에 대해서는 사실 알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왜 이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됐느냐. 바로 그것은 노자가 유행했던 방식하고 사실은 이것과 매칭된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있냐면 노자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행했던 시기하고 현학이 정치적 담론에서 그와 같은 문화적 담론으로 바뀌는 시기하고.

또 하나는 남쪽지역 강남이 개발하던 쪽하고 급하게 매칭이 되고. 또 한가지는 지식인 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은일자들이 대거 출연합니다. 위신시대에. 그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시인 도연명이에요. 그래서 지금 여러 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소국과민의 이미지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갖다가 중첩시킨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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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화원기와 노자 해석의 가능성


▲ 도연명과 도화원기

도연명이라고하는 사람은 376년에서 396년 4세기를 살았던 사람이에요. 왕필로부터도 이미 100년이 훨씬 멀어져 있습니다. 249년에 왕필이 죽었으니까. 그 때는 언제냐 동진시대에서 넘어가는 때이고.

이 동진이라고 하는 시대는 특히 신화학을 하는 분들한테는 굉장히 기억에 남는. 왜냐면 신화에 관한 자세한 기록들이 담긴 문헌들이 대거 출현하는 시대가 이때예요. 東晋 이 시대가.

그런데 문제는.〈도화원기〉에서 진나라도 나오고 하는데. 秦 진시황의 진자죠. 이 진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동진시대라고 하는 것은 남북조시대라고 하죠. 또 한 편으로는 5호16국시대니 뭐니 해서 북쪽은 그 이민족들이 왕조를 수도 없이 번갈아가며 세웠던 데고 남쪽은. 중원지역에 있던 지식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남쪽을 장악해요.

그 첫 발판을 만든 게 누구냐면 삼국시대 오나라에요. 오나라가 건강에 자리를 잡죠. 건강이 어디입니까 지금의 남경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오나라가 북쪽의 위나라나 서쪽의 촉나라보다도 약했었는데 약할 수밖에 없는 게 이민정권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통치기반을 거의 마련을 못했어요. 이것은 계속 이어집니다.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가 섰다가 진나라가 이민족에 의해서 밀려나면서 강남쪽으로 내려온 것이 동진이죠. 이 시대에는 동진을 이민정권이라고도 하고. 강북의 권문세족, 사대부 이런 사람들이 내려와서 그 쪽에 있었던 남쪽 본래 있었던 토착 지식인 세력, 사대부 세력들과 공조를 해요. 그래서 세운 정권들이 이런 정권들인데.

차츰차츰 토착 세력들을 몰아내고 본래 북방 출신의 권문세족들이 다 요직을 장악하고 구품관인법 같은 것 얘기했죠. 이 당시에 관리 등용법이 그것이니까. 자신들의 귀족 서열들을 매겨놓고. 이 때 귀족들의 세력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황제가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기 나름대로의 세력도 있었고.

이 당시 경제적인 방식은 장원제도에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장원들을 소유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엄청난 사치를 했고 축첩을 하고. 어떤 사람은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만전을 들였다고 해요. 만전. 그리고 가장 많은 축첩을 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첩이 몇 명이냐면 3,000명. 이 당시 첩 개념은 그 집에서 잡역을 하는 일꾼들 노비들 다 포함해서 첩의 개념에 소속되요.

그래서 이 사람이 밤에 지나가던 어여쁜 자기네 집안 여인과 자식을 낳잖아요. 그래서 재상이 된 사람이 꽤 있거든요. 재상집 방문했다가 어미가 음식 수발을 들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가. 그러면 내 어머니인데, 네가 내 어머니를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느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당시에 아주 독특한 기풍이 있어요.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죽림칠현인데. 죽림칠현은 이상하게 실제내용하고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최근에 나온 책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죽림칠현들이 왜 서럽게 울다 죽고 했는지가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밝혀낸 책들이 있는데.

도연명도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집안이 강남의 토착 귀족 가운데 하나에요. 건국공신 가운데 하나에요. 북벌 세력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남쪽 출신 사람들을 억누르면서 몰락해가는 귀족이 되는거죠. 그러다보니까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데.

이 사람은 귀거래사 등등 귀원전거 이런 식의 한 150수 정도를 남겼다고 하는데. 시인으로 굉장히 유명하죠. 아주 유명한 시인인데. 이 사람이 쓴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시들 몇 개가. 시를 제외하고 산문 쪽에 가까운 것이 〈도화원기〉하고 〈오류선생전〉. 자기네 집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 심어놓고 살던. 그 다음에 현대 중국 철학자 가운데 풍우란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 집 앞에 북경대학교 내부에 숙소 앞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양반의 전집 제목이 삼송당전집이에요. 그런 것들이 다 옛날 문인들의 전통이거든요.

이 사람이 도화원기라고 하는 내용을 썼는데. 이것은 조금 길더라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맥락들을 잘 염두에 두면서 보세요.

진(晉) 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376-396) 연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무릉이 도화원 혹은 세외도원, 무릉도원 있었던 곳이냐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무릉 사람이죠. 이 사람 출신이 본래 무릉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무릉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무릉도원이 있는 곳이 어디냐를 놓고 서로서로 싸운다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요즘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 있죠. 張家界. 그 다음에 여산계곡에 있는 康王谷강왕곡. 이것이 대표적으로.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박한재 선생님이 이 시대를 전공한 분이에요. 역사기행이라고 해서 실제로 가서 1,2,3권으로 나와 있는데. 2권이 강남의 낭만과 비극이고 네 번째 챕터가 도연명을 다루고 있어요. 제가 장가계의 풍광을 보여드리려고 갖고 왔는데. 비경이죠.

중국 사람들이 치는 산 중에 천하명산이라고 하는 것이 경치를 치면 황산을 쳐요. 그래서 황산을 가봤거든요. 조선족 안내인이 자랑을 하길래 이런 산이 한국에도 있느냐. 그랬더니 설악산보다 못한데. 그랬더니 기분 상해하더라고요.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실제로 가보니까 좋지만 설악산도 좋고 금강산은 제가 못가봤어요. 하여튼 경치가 이 장가게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강왕곡은 강왕곡 사진은 안나와있고 다른 것이 나오는데. 이 책을 보시면 그런 얘기들이 잘 나와요. 제갈공명도 태어났던 곳하고 어디하고 해서 서로 유적지를 뺏어가려고 싸우고 도연명도 태어난 곳하고 생활했던 곳하고 무덤 있는 곳이 달라요. 구강현 하고 시상현이 기념관을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결국 구강현이 경제력이 좀 앞선데요. 그래서 이겨서 기념관이 그 옆에 있답니다. 가보면 실제로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많은데.

도화원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눈 앞에 나타났다.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고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날려 펄펄 떨어지고 있었다.

복숭아나무 꽃이 즐비한 풍광 보신 분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벚꽃보다 아름다워요. 제가 군생활 할 때 사택같은 데서 한동안 근무를 했었는데 그 앞에 복숭아 과수원이었거든요. 진짜 풍광이 끝내줬어요.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는데, 그 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이 얘기가 왜 가능하냐. 여기가 어디냐면 양자강 하류에서 조금 올라가면. 삼국지 보시면 자주 나오는 파양호 라고 힜죠. 특히 오나라 군대가 수중훈련을 했던 곳이 파양호거든요. 파양호가 있으면 바로 옆쪽에 지역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도현명이 주로 생활했던 시상현이 있고 구강현은 이 위쪽에 있고. 북경쪽으로 가는 열차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 지역이에요. 달리 말하면 이곳은 습지라는 얘기에요. 곳곳이 습지가 많고.

그래서 우임금이라든가 순임금과 관련된 이른 바 치수사업 설화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에요.

이곳은 정치적으로도 격변기였었고 아직까지 실제 백성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나 이런 것들이 거의 없던 시대였고 그리고 산이 많고 물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숨기 좋다는 뜻입니다.

양산박같은 경우에도 숨을 수 있었던 것이 물로 막혀져있고 요지에서 방어하니까 천의요새니까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와 같은 방식의 지리적 조건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들어가니까, 동굴을 지나니까. 우리나라 고전 소설에서도 꽤 나오는 이야기죠. 특히 무협만화 보면 특별한 수련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숨는 데가 폭포수 뚫고 들어가니까 거기 천해의 비경이 있고 그런 것 많이 나오잖아요. 청학동에도 그와 비슷한 것들이 있고요.

토지는 평평하고 넓었으며 집들이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어디서 따온 표현이에요.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는 노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만든거라는거죠.

이 마을에서 왔다갔다하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똑같았으며,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어부를 보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서 대접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와서 저마다 물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이것이 하염없는 산문인 것처럼 보이죠. 박한재 선생님의 글 속에도 나와있지만. 얼마전에 진인각 선생에 대한 평전이 나왔어요. 이 분이 이것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에 다양한 논쟁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이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이 들어있는데.


▲ 도화원기의 유래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라는 주장하고 하나는 당시에 돌고 있던 설화를 채록한것이다라는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이런 식의 마을들이 당시 실제로 있었다는 거예요. 즉 전쟁의 풍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집안 식구들을 다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니면 조세를 피해서. 세금을 더 이상 낼 게 없으니까. 당시 장원조세제도는 엄청나게 참혹했거든요. 이중삼중으로 내고 했으니까.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병역을 피해서 들어갔다. 그런데 두 양반의 해석에서 병역이냐 아니면 부역을 피한 것이냐 어떻게 분석을 하냐면.

여기에 보면 남녀의 옷차림이 같았고.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이런 구절을 갖고 분석에 들어가요. 왜냐. 만약에 병역을 피해서 들어간 거라면 이것은 당시의 신분제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들어갔기 때문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고스란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분에 대한 차별제도가 여기에도 온전되어있을텐데.

그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역을 피해서 간 동일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요.

상당히 설득력이 있죠. 이런 사람들을 보통 월이라고 얘기를 하고 월족에 해당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숨어들어가서 아마도 도연명이 진짜 떠돌다가 지나가다가 봤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것이 장가계냐 강왕곡이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박한재 선생님은 강왕곡이 최근에 가장 실효성이 높은,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얘기가된다고 소개해주고 계시십니다. 여산 쪽에 있는 명산이죠.

집주인이 말했다.
“우리 선조가 진(秦) 나라 때의 난을 피해 처자와 사람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이 400몇 년대이니까 5세기에요. 그럼 진나라는 기원전 3세기죠. 800년동안. 그게 아니라 그 앞에 있었던 전진 前秦 이다. 여기에 들어섰던 나라들이 송나라 있고 진나라 있고 제나라 있고 여러 가지 많았던 나라 중에서 秦 나라가 있었는데 秦나라가 가리키는 곳이 여기다라고. 몇백년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은.

그래서 진인각 선생이 이것이 역사적인, 문학자체가 역사적인 자료로 해석을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들이 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위(魏) 나라, 진(晉)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 얘기는 이제 이 부분이 강하게 바뀌어서 각색을 한 거라는 얘기죠.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 하나 이야기해 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어부는 며칠을 묶은 후 작별하고 떠났다. 그 마을 사람이 말했다.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말 하라는 얘기죠. 꼭 얘기가 나와요. 말하지 마십시오 하면 말을 한다는 말이죠.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 배를 얻어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군데 표식을 했다. 읍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 그대로 보고했다.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표식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도화원으로 토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의 유자기는 고결한 은사였다. 그 소리를 듣고 기꺼이 몸소 나섰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다시 뱃길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 유자기라는 사람이 나오 냐면. 이것은 중국만의 수사죠.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같은 것과 동일한 방식인데 된 사람만 찾아요. 아무나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사람이 못 찾았다라고 하는 얘기는 아무도 못 찾았다는 얘기가 포인트에요, 사실은.

여기 보시면 이 속에는 상당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소국과민에 대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랑 거의 일치할겁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방식의 논의가. 다른 제가 그 학자 이름을 까먹었는데, 그 학자가 진인각 선생의 설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도원명이 지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돌고 있던 민간 설화를 각색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태평광기나 태평어람같은 다른 몇몇 책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전설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훨씬 더 각색이 덜 된 상태로 나오는 것을 보면. 도연명판 기록, 구전설화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 이와같은 방식의 비판도 있었다 라고 하는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는 무엇이냐면 이 속에는 위신시대 지식인의 꿈이라고 하는 제목을 박한재 선생이 붙였던 것처럼. 이것은 이른바 은일적인 정서고.

여기에서 말하는 소국과민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한나라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동진시대 이후, 삼국시대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는 전란의 시대에 이른 바 충분하게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혹은 은인의 길을 선택한 어떤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르카디아적 이상향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죠. 아르카디어적인 것은 전원적인 것을 뜻합니다.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은 합리적인 제도와 기획,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 그리고 현실을 점차 개선함으로써 미래에 도달하게 될 이상향을 보통 유토피아라고 불러요. 이것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라고 하는 것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과거로의 복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아까 노자할 때. 동아시아 이상향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고를 이야기하지만 그 고가 어떤 경우에는 유토피아적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르카디아 적일수도 있어요. 이와같은 모습이 노자에 보태어짐으로써. 즉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라고 하는 책이 단순히 한나라때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하상공 주석과는 다른 방식의 전유가 왕필이란 사람에 의해서 발생이 되고 또 거기에 도연명의 이야기들이 보태어지는 이런 중첩된 이미지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생각하는 노자에 관한 상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상공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갖고 도화원기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거의 불가능하죠. 오히려 조지오웰의 〈1984〉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현대적으로 맞는 모습일거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이죠.

달리 말해서 2000년의 무게를 걷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죠. 더군다나 특히 과학이라든가 페미니즘같은 것에 관해서 지난번에 살펴봤던 것처럼. 최근의 중첩, 보태어짐까지 있단 말이죠.


▲ 노자 텍스트의 다양한 context화 가능성

그렇다고 해서 제가 노자 사상은 이것이다. 그런 방식의 애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될까 하는 것에 대해서만큼만은 달리 봐야될 부분들이 있다라고 하는것이죠. 현실의 문제를 과거의 텍스트에 적용해서 읽으려 할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마음.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 이러이러하니까 하면서 때때로 어떤 글들을 보면.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하면서 찬양하는 방식이 반시민적이고 반민주적인 가치까지도 옹호하는 방식의 담론인 경우가 많아요. 특히 동양학 담론이 그 부분에 있어서는 권위주의적인 담론을 탈피하지 못해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는 측면도 상당히 있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도가의 논의는 오히려 굉장히 폭력적이고 바람직한 방식으로 생각되지 않는 언급마저도 다른 것들과 같이 뭉뚱그려져서 좋은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노자를 이렇게 저렇게 혹은 나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마구잡이는 아니었을지언정 자기들의 시각에 따라서 텍스트를 편집했다.

특히 조선조에 율곡선생이 순언이라고 하는 노자주석서를 낼 때 편집했단 말이에요. 마음에 안드는 권모술수적인 내용들은 빼고 형이상학적이고, 유가 성리학적인 것과 맞는 부분들을 엮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노자를 원본을 추구하는 방식에 목 매달 필요 없이 우리 나름대로 노자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왜 못합니까. edition을, version을 가질 수 있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전통들에 대해서 너무 함부로 해요. 중국 사람들은 중국 텍스트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찢어서 책 막 내요. 한국에서 그런 텍스트 작업을 하면 니가 뭔데. 한문을 참 잘 아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단 말이죠.

그런 것들이 바로 권위주의라고 하는 것이죠. 텍스트는 context. 텍스트를 묶어놓으면 콘텍스트 아닙니까. 그럼 그 때 context하고 내 context하고 같을 이유가 없죠. 안좋은 것 빼. 좋은 것을 끼워 넣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요체는 왕필의 정신을 이어받는거에요. 노자가 하상공의 방식으로 읽을 때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나름대로의 처세술적인 요소도 있지만 왕필이 남겨놓은 유산은 그 이후에 다른 전통과도 연결되는 부분들도 많고. 문화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사실은 유가적 권위주의를 살짝 빼면서 덧보탠다면 조금 더 나은 방식의 노자 텍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저는 그래서 환치라고 하는 말을 쓰고 싶은데. 하상공 단구에서 말하는 제왕 대신에 저는 개인을 집어넣고 싶은 겁니다. 제가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책을 쓸 때 군자, 소인을 약간 과하게 해석을 해서 바꾸기도 했지만 상당히 일상적인 거거든요. 그리고 저의 생각을 쓴거에요.

어떤 분이 어느 사이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서점 서평에다가 그래, 너나 소인처럼 살아라 라고 썼더라고요. 너나 소인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이미 소인이고, 소인처럼 살고 있어요. 소인이 된다라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는데 한 번 우리가 의심해볼 것은 그런 것이란 거죠.

우리가 누구나 다같이 논어를 읽을 때는 전부다 자기를 군자랑 동일시하잖아요. 그럼 노자를 읽을 때 나를 제왕과 동일시해서 읽자는 것이죠. 제왕이 움직이는 정치의 장이 청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시민이라면 시민적 정체성으로 그와 같은 정치적 술수를 이용할 수도 있어야 되고. 속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른 바 바꿔치기 독해도. 그리고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텍스트를 읽는 전술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학자들에게 정말 과도한 개념적 해설, 논리적 정합성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어려운 얘기가 아닌가 싶어요. 이 사람이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는 듣지 않고 앞에서 한 얘기랑 뒤에서 한 얘기랑 논리적으로 안 되네, 그 사람이 주장하고 크게 상관이 없는 논리적 모순관계를 지적하면서 그 사람의 학문자체를 누르는 방식의 것들이 너무나 많이 팽배해있어요.

정작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도대체 저 학자가 우리들에게 나에게 심금이 닿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하상공의 이야기는 별로 저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왕필의 것은 상대적으로 많이 울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울리는 것을 갖고 와야지.

따라서 기존처럼 왕필이 천하명주이기 때문에 최고의 노자주석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노자적으로, 그런 것과는 다른 방식의 것이죠. 그것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우리의 삶의 결과 만날 수 있는 삶의 결이 그들에게 있었는가를 맞추는 작업. 저는 그런 표현을 중첩이라고 표현을하고 싶은데.

나의 삶이 만나는 것. 저기의 삶이 만나는 것. 그런데 이 삶이 섞이지 않습니다. 지층이 왜곡되지만 산다는 것이 종이를 쌓아두면 어그러져도 뒤틀리거나 하는 일은 있지만 섞이지는 않거든요. 제가 다른 사람의 인생과 섞이는 것은 힘듭니다. 제가 아무리 제 집사람하고 30년 50년 해로한다고 해도 종이 두 장의 관계에요. 그것을 다시 물에 풀어서 펄프로 한 장으로 만들 수 있느냐 몸이 두 개인데 됩니까. 불가능하잖아요.

근대가 만들어낸 담론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펄프처럼 풀어서 만들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거에요. 아마도 그런 점들이 이른 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반대하는 건데 차이의 철학이지 않습니까.

그런 차이의 철학에 대한 자세가 사실은 유가전통에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른 바 이와같은 도연명 같은 이런 방식의 담론들이 융성되면서 이것은 도교전통과 가깝죠. 도교전통하고 만났던 지점의 장에서의 담론들이 상당히 다채로운 방식의 해석들을 내어놓았거든요.

저는 그러한 방식의 전통들하고 연결시키는 새로운 개인 개념. 원자론적 개념도 아니고. 따라서 근대적인 인권. 특히 동아시아 담론을 얘기하면서 관계적 자아라고 하는 표현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 수 있냐면. 서구에서 인권을 보장하라 하고 중국에 대해서 북한에 대해서 강요하지 않습니까. 북한이나 중국이나 이 쪽 학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현실적 이유들을 얘기를 해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자체를 보장하라는 논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 자체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와같은 것들을 해소할 일들은 바로 학자들에게 어떠한 개인을 이야기할 것인가.

적어도 제가 보기에 프랑스 철학에서 개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담론은 너무 어려워요. 철학공부를 하는 제 입장에서도 말을 들어보면 비슷한 것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동아시아의 담론이 훨씬 더 쉽고 우리 전통과의 화해를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저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작업도.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 얘기하지만 노자, 혼돈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하는 말 속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과거에 노자가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좋은 얘기 나쁜 얘기를 고르겠다. 그리고 학문적 근거가 있는 것하고, 그것은 어디에 있고 하는 것들을 밝혀보겠다라는 뜻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시간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할 시간이 안 되네요. 시간 얘기는 차후에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걸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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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7_01.htm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 『노자』에 소국과민에 대한 다른 해석①


▲ 소국과민에 대한 다른 해석

철학공부 하다보면 이상한 짓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술 안 먹고도 취한 척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오늘 주제가 그런 얘기랑 비슷한 거예요. 소국과민. 우리가 듣기에 굉장히 아름답고 멋있고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노래라고 들어왔지만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비교해봤지만 김용옥 선생님의 번역이 가장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맥락이 아주 쉽게 잘 드러나요. 보통 이 부분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고 하는 식으로 우리말로도 잘 알려져 있는 부분이죠. 평화주의다, 노자의 유토피아다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내용을 한 번 보죠.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것을 중하게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베풀 일이 없게 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끈을 매듭지어 쓰게 하라!
그 먹는 것들 달게 해 주며, 그 입는 것을 아름답게 해 주며.
그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해 주며, 그 풍속을 즐겁게 해 주어라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꼬끼오 소리와 멍멍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갔다하지 아니한다.】

그야말로 그냥 읽으면 아주 전원적인 풍경. 요즘에는 이런 방식의 느낌을 갖기 힘들거에요. 옛날에 그런 얘기하잖아요. 밤에 원두막 같은 데라든가, 보통 집 대문 있으면 밖에 커다란 마당이 있고 거기 큰 나무로 된 평상같은게 있고 거기서 밤에 앉아서 참외 깨먹고, 수박 깨먹고 그렇게 저도 초등학교 때는 지냈던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아주 멀리서 버스 소리라든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십리 밖에서도 누가 오나보다 노인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그게 천이통, 그런 식으로도 얘기하죠. 실제로 보면 예전 분들이 귀가 훨씬 밝았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빨리 노쇠해지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저도 군대에 있을 때 하늘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철원에서 보초를 설 때마다. 처음에는 군대에 끌려갔다는 느낌 때문에 가기 싫은거 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혼자 보초 올라가면 계속 노래를 불렀어요. 볼 수 있는 책도 없고. 이등병 때 책을 볼 수가 없잖아요. 편지를 쓰는 일도 쉽지 않고.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던 문자를 영유할 수 있는 것은 노래하는거에요. 그 다음에 나중에 일병 달고 상병 달고나니까 편지를 쓰게 되고. 그래서 친구들한테 하루에 두 통 세 통씩 쓰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냈는데 한 6개월이 지나가니까 그렇게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가사가 생각이 안나서 끊어지고 그런 희한한 일이 생겨요. 그러다보니까 저도 그걸 안하고 밤이 되면 하늘을 보고 별을 세기도 하고. 그런데 어찌나 가깝게 보이던지. 쏟아질 것 같은.

몽고 사막 벌판에서 밤에 하늘을 보면 그렇게 멋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겪었던 자연하고 과거의 사람들이 겪었던 자연하고는 근본적으로 몸에 대한 감각과 느낌이 다르다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으로 이걸 보니까 이것이 그럴듯해 보이는거에요.

그런데 처음에 책을,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전제로 했던 것이 일단은 역사적인 접근을 취하자. 주석서를 이용하자고 했죠.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게 될 주석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왕필본이고 하나는 하상공본이에요.

왕필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책의 근본적인 취지를 그대로 밝히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가적으로 전용하는 데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죠. 하지만 원텍스트의 원의를 마구 왜곡할 수는 없어요. 본래의 텍스트로부터 제한을 당하니까.

하상공은 상당히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고 했죠. 그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 식으로 바꾸면 왕필은 상당부분 텍스트로써 읽으려고 해요. 하지만 하상공은 현실의 지침을 얻으려고 읽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속에 있는 구절들을 인간의 아름다운 이상향, 전원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묘사문으로 보지 말고. 여기 문장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라. 이렇게 번역을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김용옥 선생의 번역이 한국말로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영문판 번역에서는 이미 60년대부터 이와 같은 번역들이 무수히 나와 있어요. 왜냐하면 하여금 (사) 자가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동형이거든요.

따라서 어떻게 어떻게 하라. 맨 마지막에는 그에 관한 정치적 혹은 효과가 서술되어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죠. 그래서 그 효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자르는 방식이 다르고. 왕필본과 하상공본이 다릅니다.


▲ 왕필의 해석

그러면 이 텍스트를 우리가 그동안 지켜봐왔던 방식으로 굉장히 현실적인 눈으로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냐. 여러분들이 정치가가 되었다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이러한 사회를 만든다는 관점에서 한 번 보시라는 겁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인구수를 줄여라.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 식의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정권은 굉장히 적어요. 폭력적이고 군사적인 정권에 의해서 있을 때만 이런 것들이 가능하죠. 특히 코소보같은 데서 인종말살정책 같은 것을 한 걸 보면. 그것이 이른 바 민족이 다른, 상대 적측에 대한 행위일지라도.

당시에도 이미 적국의 백성은 내가 침략해서 얻으면 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부쟁의 철학을 얘기 한다고 했죠. 노자에서는.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그 수많은 땅을 농사지을 노동력이 사라지게 되니까. 그럼 결국 손해에요. 다툼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인구를 적게 하라’
그 다음에 ‘온갖 생활의 그릇이 있어도 쓸모가 없게 하라’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런 얘기가 나오면 굉장히 낭만적으로 해석을 해요.

요즘에는 자동차 안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일부러. 타던 사람도 놓고 다녀요. 주말에만 타죠. 평소에는 막히니까. 아니면 자동차를 몰다가도 지구 온난화 때문에 내가 이 지구를 망치는 일에 일조할 수 없다고 해서 안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에너지 문제 때문에도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당시에 어떻게 살았길래. 자동차, 자동차 아니면 뭐 타요. 전철이나 버스타고 다니는 거 아녜요. 그렇잖아요. 서울까지 출퇴근하면서 걸어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는 차원이지 낭만적인 방식의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지나친 거예요. 그 뒤의 얘기들이 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낭만적이고 그럴듯한 것처럼 생각을 해왔지만 사실 한꺼풀 접어놓고 보면 이것은 굉장히 낯선 표현입니다. 당시로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것들이에요.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에 관하여 이렇게 번역을 붙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제목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사회 어떤 문제로 전용하기 위한 방식이니까 문제가 있다라고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얘기했던 이런 증거들을 본다면 어떤 방식으로 봐야 되느냐.
오른쪽에 먼저 왕필의 노자해석부터 보죠.

왕필은 이 전체를 네 개의 단으로 끊으면서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죠.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으니(小國寡民)
㈜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데도 오히려 옛날로 돌이킬 수 있거늘, 하물며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작은 나라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國旣小, 民又寡, 尙可使反古, 況國大民衆乎! 故擧小國而言也.)

이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기본적으로 취지가 역방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부분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우리는 국하고 민을 합치면 국민이라고 하죠. 이 당시에 국민이 있었습니까. 국민이라고 하는 표현은 근대국가의 출연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에요. 그렇죠.

이 당시에 통치자와 관계, 민하고의 관계라는 것은 성립이 됩니다. 하지만 그 양자 관계로 다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귀족 계급들이 있고. 당시로 따진다면. 그리고 이 <노자>가 어느 특정시대에 지어졌느냐 하는 차원은 國국자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어요.

예를 들면 보통 은조시대를 성읍국가라고 말을 합니다. 성읍국가라고 하는 것은 교두학파에 의해서는 도시국가형 체제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것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군현제가 도입되면서. 군현제라고 하는 것은 왕이 파견한 관리가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즉 왕권의 실질적인 강화와 관련이 있고, 실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군현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한초에는 다시 귀족세력들의 반발, 정권의 미약함 때문에 군국제라고 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서죠. 그래서 한신이라든가 수많은 왕들이 제후왕, 거의 독자적인 왕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국가적인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상위에 황실이 존재하는 방식이고. 이것이 한나라 초기부터 계속 진압하다가 나중에 무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하를 통치하는 방식의 체제가 나름대로 달성이 되죠.

그렇다면 그런 역사적 변화 과정 속에서 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일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으니’ 이 말을 이렇게 묘사적인 방식으로 볼 때는 ‘과거에 옛날에는 나라가 아주 작았다.’ 이렇게 해석할수도 있어요.

하지만 앞에 번역처럼 ‘될수있는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이런 방식으로 한다는 건 뭘까요. 이것은 분명히 상당히 정치적 개입이 주어지는 상태에서의 표현이에요.

이것은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의 질서를 강압하는 방식의 의미가 동반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필은 여기에 약간 상이한 방식의 해석을 하고 있어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데도 오히려 옛날로 돌이킬 수 있거늘,

여기에서 옛날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거죠. 보통 복고 혹은 반고라고도 하는데 복고가 더 일반적인 표현이에요. 고古는 그 자체로 이상입니다. 고를 다스렸던 시대가 언제죠. 말을 안해도 나와야지요. 요순지치의 시대를 의미하는거죠. 反古 거기로 돌아간다.

이것은 왕필이 유가냐 아니면 도가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요. 왜냐 장자와 같은 텍스트에서 요순시대를 비판하죠. 비판하면서 그 앞에 있던 황제 때부터 오히려 인의니 뭐니 하는 등등의 것들을 강조하게 되면서 자연스러운 질서. 이른바 혼돈과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래서 대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는 방식의 이야기를 하죠.

이것은 바로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에 대한 시간관적인 계기하고 맞물려 있는 내용인데 어쨌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장자에서 주장하는, 도가에서 흔히 말하는 걸 보더라도 이 古고는 황제 이전 시대를 얘기해요. 뭐 복희, 신농, 누구누구 해서 씨자로 대변되는 다양한. 군웅할거라고 하기 보다는 뭐라고 그럴까 원시적 지배체제. 혹은 원시적 이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세계를 이야기하는데요.

상당히 농경적이고 전원적인 시대. 이 점은 똑같아요. 하지만 왕필이라는 사람의 입장을 유가적이라고 본다면 반고 反古는 선왕시대고. 요임금과 순임금이 사셨던 그 시대에요. 그리고 요임금과 순임금은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바로 공자의 입을 빌어서. 이 고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할 때 온고이지신의 고하고 통하는 거고. 그런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이 의미는 달라져요. 본래의 맥락하고는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처음에 원문은 현재형이에요. 여기에서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더라도 과거의 선왕시대를 회복할 수 있는데 나라가 크고 백성이 더 많은 상태라면 훨씬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큰 나라를 말하지 않고 작은 나라를 들어서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지금 왕필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럼 이 말은 소국과민의 본래 취지와 상관없이 지금 왕필은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하라는 것은 하나의 예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취지는 뭡니까. 反古. 고대 이상적 시대의 부활. 부흥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필의 정치적인 지향, 사상적인 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어쨌거나 우리는 이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맥락과는 무관한 방식의 전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단락은 더 재미있어요. 번역 자체가 약간 과하긴 해요.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使有什佰之器而不用)

그런데 이 부분이 왕필본하고 하상공본이 본래 원문 자체가 달라요. 십백지什伯之라고 하는 것은 열 가지, 백 가지의 이로운 기물, 문명의 이기. 이렇게 해석을 하죠.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쓰지 않게 하라.

여러분들이 정치가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과연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실효성이 있는 과거에. 문명의 이기를 쓰지 말게 하라. 여러분들이 치자라면 과연 그런 식의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문명 비판에, 유가가 제안하는 프로그램이 오히려 인간 본성을 억압하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져나가게 하는 그런 반인성적인, 반본성적인 삶으로 치닫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한 역설적인 저항의 담론이다. 그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죠. 그걸 왜 저항을 해야 됩니까. 그것도 2500년 전에. 그런 방식의 해석의 상식성을 생각해보라는거죠.

이 부분을 왜 그렇게 해석을 해왔느냐. 이 속에는 뭐가 들어있느냐면. 장자에서 노인네가 물풀 때 쓰는 돌리면 도르레처럼 생겼는데 물을 퍼올리는. 기심설화라고 보통 얘기를 하죠. 기계의 마음機心해서,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 그런 기계들을 자꾸 쓰다보면 기심이 생겨서 본성이 훼손된다. 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장자에 나오죠.

따라서 그러한 이기들, 이로운 기물들이라고 하는 것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여기에 분명히 나와요. 그런데 저는 이 부분도 비슷하지만 약간은 구분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속에 들어 있는 해석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해석입니다. 즉 장자 속에 나오는 그 표현 자체를 염두에 두고 편리한 것을 쓰면 쓸수록 자꾸 거기에 기대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방식의 것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오히려 인간에게 본성을 훼손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하는 전제로 해석 한거에요.

그러니까 이 번역을 하신 분은 그와 같은 요즘의 해석의 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라고 붙여놓은 거예요.

그런데 왕필은

㈜ 백성들로 하여금 비록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사용할 곳을 없게 할 것이니, 어찌 (기계가) 부족하다고 걱정하겠느냐는 말이다.
(言使民雖有什伯之器, 而無所用, 何患不足也.)

機心 왕필의 노자 해석의 방법 중에 하나가 장자 속에 들어 있는 부분들을 동원해서 하는 것이 이 위신시대의 유행입니다. 이 부분까지는 그래도 적어도 용인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노자 본문의 맥락 자체가 그러한가는 하상공을 보면서 따져봐야 되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은 순수하게 그렇게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고 하는 즉, 노자를 장자라고 해석하는 전통인 노장전통적인 해석 방식이 깔려 있는 해석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이라고 하는 점을 회의적으로 봐야 된다는 점은 기억하고 넘어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使民重死而不遠徙)
이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해석이에요 전체에서.
㈜ 백성들로 하여금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기 몸만을 소중히 여기며 뇌물을 탐하지 않게 하여 각기 그 사는 데를 편안히 여기고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게 한다.
(使民不用, 惟身是寶, 不貪貨賂. 故各安其居, 重死而不遠徙也.)


다음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키포인트는 죽음입니다. 죽음. 重死. 죽음을 중히 여긴다. 한 번 우리 스스로가 생각을 해보죠. 혹시 이 가운데서 늘 죽음을 생각 하며 살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가끔씩 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 얼마 전에는 의료사라든가 그런 것들을 했던 분들하고 토론할 자리에 제가 참관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이 19세기하고 20세기 즉 근대로 넘어서면서 한국 사회에서 건강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냐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멀고 낯설고 이질적인 경험이라고 해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은 아주 가까이 있는 것, 언제라도 내 친구처럼 나와 만날 수 있는 것이었대요. 이게 무슨 말이냐. 자식을 열을 낳으면 그 중에 한, 둘만 살아남고 다 떠나잖아요. 그리고 평균수명이 얼마나 됐습니까. 보통 한 40, 50. 그리고 처참한 19세기 노동자같은 경우에는 30대 초반이 영국 노동인구의 평균 수명이었다고 해요. 평균이 그랬다면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 20년동안 노동을 하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다가 그냥 가는거죠.

그에 비하면. 요즘 건강, 웰빙담론이 엄청나게 큰데. 그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오신 선생님이 저도 생각도 못했던 얘기를 반론해서 던지는데 현대인만큼 건강하고 오랫동안 사는 인간의 시대가 없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인들이 건강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거의 목숨 받쳐서 산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들의 입장에 따라서 죽음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 표현이에요. 죽음을 중시 여긴다. 쉽게 생각해보세요. 죽음을 무릅쓴다라고 생각해보세요. 죽음을 무릅쓴다. 언제 죽음을 무릅씁니까.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할 때 죽음을 무릅쓰는 거죠.

하필이면 그것이 ‘멀리 이사 다니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이사 다니는 일이 굉장히 흔하죠. 그렇잖아요. 더군다나 갈수록 노동이 유연화 되고 하면서 직장이 수시로 바뀌는 때가 되면어떻게 합니까. 이사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과거에 농경 토착 사회에서는 내가 태어난 땅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실향민이에요. 그것은 엄청난 사회적 고통,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떠납니까. 동일한 표현이라는 거죠. 그런 표현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까닭은 굉장히 무언가 당시에 현실에 대한 리얼한 고발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연히 치자들에게도 엄청난 문제가 있는 거죠.

여기 표현을 요즘 유행하는 쇠고기문제랑 연결시켜서 보시면 아주 똑같은 문제의 생산이라고 보시면 되요.

그 다음 번엔 좀 깁니다. 읽은 거니까 다 읽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배와 수레가 있지만’ 앞에 김용옥 선생님의 해석이 왕필본을 저본으로 한 해석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왕필이 여기에 대해서 딱 한마디로 끊어 버려요.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 간단하죠. 좋은 세상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누가. 그 주체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백성들이겠죠.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봐야 되는 겁니다.

유가라고 하는 지식인들이 지금처럼 계몽적인 지식인으로 돌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유가는 적어도 송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귀족과 같은 개념이라고 보시면 되요. 신분개념에 가깝습니다. 어떤 특정한 난세시대에만 그것이 세습으로써 되지 않을 뿐이지 실제로 이 사람들은 세습이라고 하는 제도를, 자신들이 한 번 획득한 지위나 신분을 계속 세습하는 것에 노력을 많이 했었죠.

하지만 이것이 송대 신유학이라고 하는 학문사조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아요. 더군다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계몽이라고 하는 의식을 펴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 때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차이냐.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가 조선시대 어떤 유교적 풍습 가운데 높게 평가하는 것 중에 하나가 향약운동같은 것을 치죠. 당시 사림사회가 조선시대에서 득세를 하고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600년이라고 하는 장고한 조선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던 까닭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요.

나중에 맑시스트적 사관에서 중소지주라고 표현되는 이 사람들이 사실은 일반 서민 사회에 들어가서 이들과 상당히 안정적인 공조관계를 성공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어떤 그런 것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농담처럼 제가 생각했던. 혹시 잔치라는 것 아시죠 잔치. 이 잔치라고 하는 문화가 마빈 해리스 책에서 보면 포트레치(potlatch)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재미있게 설명이 되죠. 그것이 말하자면 부의 재분배 과정의 일환이다. 그래서 포트레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을 하죠. 잔치라고 하는 문화도 비슷해요.

이것이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데. 예를 들면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고 하는 이은하씨의 노래있죠. 왜 하필이면 최진사댁 셋째 딸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책 중에서 경상도 쪽에 유명한 최부자집 이야기에서 나오는. 몇 대에 걸친, 부의 세습과정이라든가 이 사람들의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들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서 얼마만큼의 지역적인 노력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명문가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재벌이라든가 이런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본래의 의미들을 얘기 하는데. 그 때 최씨 집안이 굉장히 유명했었나봐요. 그래서 나중에 「토지」에서는. 상당히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저기까지 가서 용정을 개척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경상도 출신 지식인들이 거기에서 있는 것이 불편하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부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개척한 쪽이 간도라고 하는 얘기는 역사학계에서 많이 하는 얘기니까요. 거기에서도 최씨 아닙니까. 그렇죠. 토지의 집안도 최씨 집안 이야기고.

최진사댁 셋째 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데. 잔치를 하면, 지금 우리가 할 때는 청첩장 받아서 가서 밥 먹고 피로연 가서 뒤풀이하고 끝이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몇 마리, 몇 십마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소도 잡고 돼지도 엄청나게 잡고, 닭 엄청 잡고. 그 근처 사방 백 여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와서 먹고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잔치를 준비할 때 첫 날부터 둘째 날인가 며칠까지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와서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거잖아요. 그 집에 음식이 하나도 안 남는답니다. 왜냐하면 잔치 음식을 만드는 분들이 만들어서 다 갖고 가는 거래요. 그리고 며칠 있다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오시기 시작해서 보통 보름, 한 달 동안 잔치를 하는데.

그것이 뭐랑 관련이 있냐면. 마빈 해리스는 그것을 육류, 고기에 대한. 인간은 잡식성이기 때문에 고기를 섭취하고싶은 욕구가 강한데 잔치 때는 꼭 고기 음식이 올라가고 그래서 주변 사방 백 여리 사람들이 와서 고기를 먹고 가는 거랍니다. 거기서 제가 읽어봤을 때 나온 얘기 중에 하나가 지구는 고기로 넘쳐나고 있잖아요.

그래서 비만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과거에는 고기를 안 먹으면 무언가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줘야 되는, 즉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되는데. 잔치 때 가서 배터져라 먹으면. 지금 우리는 영양학적으로 보면 먹어봤자 일정한 양만 흡수가 되고 나머지는 배설되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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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빈 해리스의 책에서 제가 본 것 같은데. 과거에는 육류를 섭취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배터지게 먹으면 엄청나게 잡아 둔대요. 그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적인 위화감.

그래서 야노마노족같은 경우에는 고기 때문에 전쟁을 한다 그런 식의 어떤 설명이 나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실제로 의사선생님한테 여쭤봤어요. 실질적으로, 임상적으로,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이냐 물어봤더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고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했겠죠. 어디에서 하다가 그 얘기로 샜죠.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눈으로 봐야 되느냐면. 오늘날 정치에서는 시민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욕구, 그것이 가장 낮은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인권이라고 얘기를 하고. 나머지부터는 사회적 요구라고 보통 표현을 하죠. 거기에 대해서 충족시켜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자 기능이라고 보통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는 말하는 표현이 ‘욕구가 없는 상태이다’ 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요. 도대체 이와같은 사람들이 지향했던 것이 과연 이상적으로 볼 때는 보기 좋을지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피지배층에게 상당한 정도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의 것들을 이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던 이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죠.

이와 같은 생산력이 부족한 그래서 움집같은데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작은 나라 적은 백성, 왔다갔다 안하고, 그런 사회들을 이상적으로 본다고 하는 우리네 시각은 과연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정당한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 왕필의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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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7_02.htm

◆ 『노자』에 소국과민에 대한 다른 해석②


▲ 하상공의 해석

그런데 읽고 나서도, 사실은 왕필이 지향하는 세계가 분명히 무엇인가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면 하상공은 어땠는가. 하상공은 훨씬 더 실천적인 방식으로 해석을 하고 단구별로 끊어져있습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죠.

‘나라를 작게 여기고 백성을 적게 여기며’ 번역의 때깔이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줄이고 이런 의미가 아니라 ‘나라를 작게 여기고 백성을 적게 여기며.’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가 아니죠. 더군다나 남북한이라든가 경제규모,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 혹은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까지 따진다면 굉장히 넓어요. 지금 미국이 또 그러하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가 작은데. 미국은 얼마나 크겠어요. 예전에 영국을 보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명칭을 쓰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작게 여긴다고 하는 것. 나라를 작다라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건 있죠. 20평 집에 살다가 식구가 늘어나면 좁죠. 30평집으로 이사했어요. 40평 집에 갔더니 우리 집이 좁아보여. 우리가 생각한 느낌은 이런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 우리의 문명의 감각이에요.

거대한 땅덩이, 나라가 작다. 백성이 적다. 사실 같이 살고 있는 마누라 한 사람도 감당이 안되고 나를 닮은 내 아들래미가 하는 짓도 이해하기 힘든데 그 수많은 인간들을 적다고 여겨라.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해요. 하상공의 주석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인은 이상적인 치자를 의미하는 거죠. 비로 큰 나라를 다스린다 할지라도 오히려 작게 여겨, 검소함을 보이고 사치하지 않는다. 이 말은 아주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노자의 원문에 보면 큰 나라를 작은 생선 다루듯이 하라. 예를 들면 고등어, 동태, 명태를 넣고 찌개를 끓이면 잘 안부서지요. 그런데 붕어 같은 걸 넣으면 더 잘 부서지고. 특히 동태같은 경우 찌개 할 때보면 크게 썰어서 하니까 국자로 휘저어도 고기가 바스러지고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데 조그만 붕어 같은 경우 끓이면 국자 때문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형체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따라서 나라를 다스릴 때는 아주 조심조심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 그 뜻을 여기서 지금 전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검소함을 보이고 사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뒷부분과 바로 연결 됩니다.
‘(또한 성인은) 백성이 비록 많다 할지라도 오히려 적게 여겨. 감히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많으니까 일벌여도 되겠지가 아니라 아무리 많더라도 몇 사람 있듯이 여겨야지.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에만 제대로 치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얘기랑 같은 것이거든요.

소국과민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인 크기가 아니라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라 이 메시지에 지나지 않아요. 굉장히 실천적인 방식이죠. 맨 마지막에 표현은 나중에 또 나오지만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요즘 수고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광화문에도 가야되고 시청 앞 광장에도 가야되고. 이런 일들이 수고로운 거예요. 평소에 내 행동반경을 벗어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수고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죠. 수고로운 것이 뭡니까. 두 가지입니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것하고 부역에 동원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내 몸 자체가 막 이렇게 해서 노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떨어지면 불 꺼졌기 때문에 못해요. 지금처럼 야간작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과거에 기름 등잔불 켜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초값이 싸졌지만. 혹시 초 안 꺼트리고 불 켜는 방법 아세요. 밖에 나가서 뭐 하실 때. 요즘은 종이컵 쓰잖아요.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맨 끝에 촛농을 한 두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걸로 붙이세요.

그 다음에 그걸, 양초의 끝 심지보다 약간 위로 올라가게 해서 거기에 불을 붙이면 그 밑에 약간 공간이 생겨서 촛농이 젖어요. 바락이 샤악 불어도 이 쪽이 안 꺼지고, 이 쪽이 안 꺼지고 그래서 다시. 실제로 해보니까 바람이 굉장히 강풍이 불어도 안 꺼져요. 이런 걸 생활의 지혜라고 하죠.

지금 왜 제가 초를 예로 들었나면.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촛볼이 한 번 촤악.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 보면 코로 촛불 쫙 세워놓고 끄는 그런 것도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쉽게 꺼진다는 얘기에요.

정치인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노심초사라고 할 때. 마음이 타들어간다 초가 타들어간다. 비유가 많이 쓰이잖아요.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이 속에는 노심초사하는 치자의 마인드가 굉장히 들어가있는 겁니다.


▲ 국가 체제의 확립

그 다음 구절이 압권입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10명이나 100명 단위의 조직을 만들게 하고’ (使有什伯 人之器而不用) 원문이 달라요. 특히 주겸지라고 하는 분이 노자교석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내면서 여러 가지 주석, 노자본들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이런부분은 왕필본보다 하상공본이 원 맥락에 가깝다라고 하면서 왕필본보다 하상공본이 더 한 대의 노자 정본에 가깝다고 보통 평을 많이 하는데.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가 특히 그런 것들과 유관이 되어있습니다.

보시면 십백什伯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고 기器가 나와요. 십백지라고 되어있으니까 더군다나 인지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역사적 고증적으로 뚫고 들어가야돼요. 주석을 보죠.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10명이나 100명 단위의 조직을 만들어, 귀한 자와 천한 자가 서로 침범하지 않게 한다. 기器는 농사꾼을 가리킨다.’ 기는 번역이 잘못됐네요. 농사꾼이 아니라 ‘농사꾼이 쓰는 그릇, 기물을 가리킨다. ‘이불용’而不用란 농사꾼을 징발함으로써 농사 때를 빼앗지 않는다는 뜻이다.‘ 使民各有部曲什伯, 貴賤不相犯也. 器, 謂農人之器. 而不用, 不徵召奪民良時也

굉장히 쉽죠. 당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는 말이에요. 쉬운 것이 대체적으로 맞는다가 원칙이라고 했죠. 특히 고어로 올라갈수록.

그런데 그 주석의 본 문장을 보면 놀랄 일이 무엇이냐면 부곡部曲이라는 표현이 나오죠. 부곡. 이 부곡은 책세상문고에 機心을 다룬 책 한 권이 나와 있을 정도로 독특한 주제입니다. 물론 그 후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이 부곡이라는 것은 일반서민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조직화 되어있는 특수한 단체. 그래서 용병으로 불려 쓰이기도 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 특정 세력과 제휴해서 도와주는 막후세력이 되기도 하고. 독특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부곡이라는 집단인데.

이 부곡의 원래 표현은 한나라 때 만들어진 용어고 그리고 사전을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한나라의 군사편제단위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럼 什伯십백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죠. 뭐겠습니까. 部曲什伯부곡십백이라고 했어요. 십백은 성서에 많이 나오는 얘기죠. 십부장 백부장. 십부장, 백부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백명의 장정을 거느린 지휘관이라는 뜻이고 십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분대장, 소대장 정도에 해당되는 그런 개념이라고 보면 되요.

그럼 부곡십백이라고 하는 표현은 뭡니까. 전 나라를 행정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파악이 되어 있고 즉, 등재되어있다는 뜻입니다. 등재되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조세의 의무를 지는 사람이 파악되어 있다는 뜻이고 또 이 사람들이 전시에 징발될 군, 군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속에 들어있는 얘기는 사유십백使有什伯이라고 하는 말 한 마디가 무엇을 함축하느냐. 문명에 이로운 기물이 있어서 쓰지 않는다 이것이 아니라 군현제의 달성을 얘기한다는거죠.
즉 황제 지배 체제가 완성되는 상태에, 국가의 시스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소국과민이라는 표현을 연결시켜 해석할 때 과연 낭만적인 해석이 가능할까요. 여기에서 보면 전체가 귀천이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분명하게, 이것은 16등작 등등, 전국시대 때부터 발달되어온 이른 바 등급제, 품수제같은 것들을 포괄하는 얘기에요. 등급에 따라서 행동 등의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이고 당연히 국가에 대해서 지는 의무가 달라지고. 또한 전체가 열 명 단위 백 명 단위.

보통 진나라에서 병법을 시작할 때 오가작통제 혹은 오호작통제라고 얘기를 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연좌제라고 하는 말인데 거기에서 나왔잖아요. 다섯가구 단위로 묶어서 상호감시하게 하고 한 집이 도망가면 그 집이 못 물어낸 세금을 나머지 네 집이. 네 집 도망가면 한 집이 다 독박을 쓰는 거죠. 이것이 바로 연좌제, 상호 감시 제도이면서 개별적인 인간, 하나의 가 단위로 집안을 통제했던 군현제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이 속에는 바로 그와 같은 방식의 즉 국가적 권력이 마을 단위 부락 단위로 가능했던 시대를 넘어서서 개개 인간을 향한 국가의 권력이 작동하는 국가 체제에 대한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치자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국가 시스템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있으면 결국은 전체를 통일하려고 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전쟁을 줄이는 방식이기도 해요. 그래서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하지 않게 한다.(使民重死而不遠徙)

이 얘기는 아까 우리가 불투명하게 하고 넘어갔지만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겨라, 여기게 만들어라, 이사 다니지 않게 하라.

당나라 때 여행을 했던 엔닌이라고 하는 일본승려가 <엔닌구법순례행기> 라는 책. 번역도 나와있고 라이즈너라고 하는 사람이 그 책을 소재로 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되어있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 사람이 신라 사람들의 배를 타고 가요. 중국에 도착해요. 중국에 도착을 해서 거기서부터 장안까지 가는데. 마을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행정서를 끊고 허가를 받아서 통과를 한단 말이죠. 당나라의 제도가 문물 정비되어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걸 얘기합니다. 옛날하면 막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무런 시스템이 없고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인데. 마을에서 마을을 통과할 때 그 사신. 분명한 나름대로의 비자가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이. 지금 비자 발급받으면 다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특히 유럽같은 경우는 유럽연합이 되어 있어서 하나 받으면 통과 아닙니까.

그런데 이 당시에 이 승려가 했던 절차가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통행증을 교부받아서 넘어갔다라고 하는 구절이 나와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만큼의 행정력이 완비되어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는 거죠.

바로 이런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그와 같은 국가 체제 시스템을 완성하려는 노력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표현하는 말이 황제전제, 혹은 황제지배체제 라고 하는 표현.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과거에 제민지배체제라고 표현을 했고 이것이 바로 천하일통의 세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황제권의 관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개인이 느끼는 현실의 힘으로 느낀다면 이와같은 걸 얘기하는 거예요.

군주가 백성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여 백성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게 할 수 있으면, 백성은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삶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정치와 법령이 번잡하지 않으면 백성이 자신의 직업에 편안히 종사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자신이 늘 거처하던 곳을 떠나 멀리 옮겨가지 않는다.
(君能爲民興利除害, 各得其所, 則民重死而貪生也. 政令不煩, 則民安其業, 故不遠遷其常處也.)

이와 같은 상태의 사회가 있기 위해서 해야 될 일들. 첫 번째 전쟁이 없어야 됩니다. 전쟁이 없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적국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죠. 적국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황제 한 명이어야지만 가능한 얘기가 되는 거죠. 그렇죠.

그 다음에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삶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하게 된다면. 죽음을 무겁게 여긴다고 하는 것은 아까 제가 우회적인 표현으로 했다시피 죽음을 무릅쓴다고 하는 것은 불만이 없는 거예요. 황제에 대해서. 최소한 먹고살만하고. 역심을 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죠.

특히 백성이 자기가 살던 근거지를 떠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까처럼 국가의 부름, 즉 국가에 의한 동원. 전쟁에 나가거나 부역에 나가거나. 또 한 가지는 자발적으로. 제도적 용인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어요. 하나는 시집, 장가가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죠.

그런데 안 좋은 것이 있어요. 온가족이 몰래 야반도주하는 것. 야반도주하는 것. 지주의 착취로부터 몰래 도망가거나 아니면 국가의 세금, 부역으로부터 도망가거나. 그래서 마을이 텅텅 비죠.

그런 상황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무릅쓴다거나 삶을 탐한다,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것은 지금 우리처럼 웰빙일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먹고 살만하다 근근이 버틸 수 있는.

그래서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역사학자가 유목민족들이 농경민족들을 착취했고 그 다음에 지배자들이 시스템을 만들면서 농민들을 착취하는데. 착취의 수준은 피착취자들이 견뎌낼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착취를 다 해왔다고 해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죠.

그나마 노동운동, 여러 가지 시민운동들에 의해서 많은 부분들이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사실은 요즘 세계화 얘기하면서 이른 바 선진산업국에서 이루어졌을 착취가 상대적으로 좋아진 반면에 그 착취의 구조가 저개발국으로 오히려 전이되는 방식으로 세계화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요즘 책 많이 보면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 심각한 문제라고 고발하는 책 많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거처하던 곳을 멀리 떠난다’는 표현은. 지금 우리는 평수 늘려가면서 이사 가는 것은 무척 좋은 것이고. 직장 때문에 이사 간다, 승진해서 가는 것이니까 좋은 거고. 하지만 이사 가는 것은 사실 기본적으로 피곤한 것이지 않습니까. 짐 옮겨야 되고.

특히 저처럼 책이 많은 사람들은 이사갈 때 꼭 아저씨들한테 좀 더 주거나, 따로 고깃값을 줘야 되요. 몇 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수하고 목사하고. 이런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데요. 귀찮은 일이죠.

그 다음부터 단이 바뀌면서 맥락이 상당히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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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6_01.htm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 노자와 페미니즘 ③


▲ 페미니즘, 다른 전략의 필요성

자료 13쪽 보시면, 이 글이 발표된 맥락을 조금 얘기한다면 실질적으로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세대가 있죠. 그 가운데서도 케어 에틱이라고 해서 돌봄의 윤리학(an ethics of care) 이라고도 하죠. 여성의 여성성 혹은 여성다움을 윤리적 가치와 연결시켜서 남성 지향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치유 하는 역할, 특히 케어 에틱은 간호 윤리학에서 수용되는 논의거든요. 지금은 거기서 벗어나서,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이라고 해서 희한한 담론을 펼치는.

그 양반은 논의 자체도 희한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굉장히 독특한 분이더라고요. 결혼을 여러 번 했던 것 같고 전남편과 현남편과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삶 자체가 굉장히 독특해요. 제가 반페미니즘적인 얘기도 하지만 저는 사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고 입장이 모호해요.

왜 모호할 수밖에 없느냐면,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울 만한 어떤 이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저한테 가장 큰 숙제가 와이프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이길 수 없는 가장 큰 적. 하지만 헤어질 수 없는.

사적인 얘기를 좀 한다면, 와이프와 3월 2일에 만났어요. 제가 군대갔다 온 예비역 4학년 때 집사람이 입학 했죠.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한 학번 후배가 형, 잠깐만 기다리래요. 파릇파릇한 새내기 학생들을 데려오겠다면. 나가서 데려왔는데 여학생 두 명이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로 들어왔던 어떤 여자가 광채가 나면서.

실제로 제가 뭔가를 느꼈어요. 그 다음부터는 도서관에 안 가고 학생회실에 가서 죽돌이를 했죠. 어떻게 하면 얼굴을 한번 볼까. 공교롭게 3월 말에 MT를 가는데 같은 조에 편성됐고. 끝나고 돌아와서 제가 그 조에 조장을 했거든요. 뒷풀이 하면서 얘길하다가 도자기가 되기로, 도서관 자리 잡아주기로 했어요. 도서관 자리잡아주면서부터 4월인가 5월에 사귀자고 했죠. 대신에 나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귐은 원치 않는다고.

집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해서 결혼했는데, 정확한 날짜가 요맘때예요.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는데, 한번은 제가 그 전날 술을 엄청나게 먹고 아침에 도서관 잡아주는 걸 못 했어요. 미리 얘기했죠. 오늘 내가 술을 많이 마시니까 과에 행사가 있어서 내가 내일은 도서관엘 안 간다. 전화가 왔네요. 집사람이 나중에 하는 얘기가 학교를 갔는데, 자기 자리로 없고 내가 없는 걸 보는 순간 마음이 텅 비는 것 같다는.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죠.

첫 키스도 참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이맘 때 했어요. 제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제가 당했어요. 술을 같이 먹고 학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취해서 덥쳐가지고. 그런 걸 보면서, 강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역시 다른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물이 물을 이긴다는 표현방식과 비슷한 얘긴데. 그런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 케어 에틱 쪽인데, 분명히 노자에서 부드러움,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주의적 전략과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은 분명히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아까 얘기했던 것은, 곽점본에 의하면 그런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반론입니다. 따라서 그 후에 이와 같은 도교적인 것과 연결시킬 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래서 페미니즘적 담론을 노자와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다른 요소에서 찾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 『홍루몽』.

여기 여성들이 많이 계신데, 『홍루몽』을 읽으면, 동아시아의 커다란 장편소설이지 않습니까? 번역된 걸로 읽어도 정말 섬세한 심리묘사, 서구에서 심리주의 소설이 많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었는데 느낌은 이 사람들 정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상당히 불안하고 어딘가에 푹 빠져 있는 듯한.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는데. 읽으면서 마치, 특히 무신론자들이 자기의 입론을, 그건 종교예요, 어떤 의미에서도 본다면. 심리를 파고드는 걸 본다면 무신론이 마치 종교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지금 도킨스(리처드 도킨스) 가 무신론 논쟁을 다시 점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서구 유럽이라든가 특히 미국 사회에서 반향이 센데. 유럽에서는 그다지. 그런 얘기를 해봤자, 이미 합리적인 문화가 정착돼 있기 때문에. 그런데 미국은 반향이 격하지 않습니까? 그게 미국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지금도 책을 보면 그런 소개를 하잖아요.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지지여론이 60%이상이라는 걸. 참 희한한 얘기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 담론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논적은 오히려 ‘진화론’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보이는 사람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도나 해러웨이의 주장이 독특하긴 하지만, 과연 그러한 방식의 학문적 혹은 사상적 전략이나 실천적 전략이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데 얼마나 커다란 힘을 줄 수 있을까.

물론 소수자를 통해서 그러한 화두를 던지고 논쟁을 점화시키는 건 바람직하지만, 실제로 여성들을 어렵게 하는 건 가정 내에서, 일상성 속에서 다가오는 억압이지 않습니까? 그건 고스란히 다른 한편으로 남자들한테 넘어가고. 보이지 않지만.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서구식의 전략보다는 다른 방식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홍루몽』처럼, 삶의 파노라마가 그대로 이어지면서 굉장히 재미난. 그런데 그 시선자체가 굉장히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톤과 시각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노자 텍스트보다는 그런 텍스트를 통해서 뭔가 끌어낼 때 훨씬 더 생산적인 담론을 내지 않을까. 그리고 글자수가 많지 않습니까. 글자수 많은 게 이기는 거예요. 왜 논어가 대단한 큰 책이 되느냐. 논어 자체는 짧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주석서가 엄청나잖아요.

그런데 논어는 생산력 있는 게, 그 주석서가 축적돼요. 그런데 노자는 축적되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어떤 하나의 해석 전통이 힘을 가지려면 축적의 전통이 있어야 하는데, 노자와 관련된 담론의 세계에서는 축적의 전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즉 양질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 사람이 왕필을 하고 내가 하상공을 하기로 했다. 그럼 둘이 싸울 이유가 없어요. 다른 책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원조라고 싸우는 거죠. 많이 보셨잖아요. 떡볶이집도 여기가 원조다, 여기가 원조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가 세상을 판치는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원조라고 하는 논쟁의 가장 내부는 지적재산권이고,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자본주의 전략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내 얘기면 어떻고 네 얘기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에 건전한 방식으로 오르내리느냐가 중요하지. 물론 표절은 안 됩니다. 농담이고요. 그래야 책을 사 보지, 판본을 하면 공부하는 사람은 굶어죽으니까.


▲ 노자를 확대하는 해석방식

마왕태에서 발견된 백서본 노자와 같이 발견돼서 크게 주목받았던 논문, 『황제사경』(黃帝四經) 또는 『황로백서』(黃老帛書) 라고 불리는 텍스트를 보면 「雌雄節」(자웅절)이라고 하는 소제목이 붙은 중요한 텍스트가 있어요.

여기를 보시면, 우리가 첫 시간에 회남자를 통해서 지기웅, 수기자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봤죠.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논문 형태로 나온 글이 나옵니다. 14쪽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수컷의 절도와 암컷의 절도: 황제는 부단히 길흉의 일정함을 헤아려서 이를 통해 암컷과 수컷의 절도를 가려낸다. 그리고 나서 화복의 향방을 구분한다. 뻔뻔스러울 정도의 오만함과 교만한 태도를 일컬어 수컷의 절도라 하고, □□하고 공손히 낮출 줄 아는 자세를 일컬어 암컷의 절도라 한다. 무릇 수컷의 절도는 거침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암컷의 절도는 겸허하게 낮추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무릇 사람이 수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생명을 함부로 한다고 말한다. 대인은 무너질 것이고 소인은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무릇 암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봉록을 잇는다고 말한다. 부자는 더욱 창성할 것이고, 가난한 자는 먹는 것이 충족될 것이다]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이게 단순히 겸손이 아니라 전략적 행동이라는 걸 앞에서 살펴봤죠. 이건 지기웅, 수기자라는 태도가 어떤 배면의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여기는 여성적 태도 혹은 여성적 가치를 쓸 수 있지만 이걸 행하는 주체는 성인 남자 통치자라는 거죠. 아까 하던 얘기를 한다면,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역사 사례, 연구에 의하면 남존여비 시각은 일반화돼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통 가운데 하나가, 첫 째 자식은 다 죽였어요. 엄마의 배에 잉태된 상태에서 10개 월 있다가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는 의학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었고 어느 정도 배에 있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결혼했을 때, 이 아기에 내 아기인지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인다는 사례가 나오거든요. 이건 달리 말하면, 여성과 남성의 만남이 우리가 생각하는 육아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고, 유교가 지배하던 시기에도 반드시 그렇진 않았다는 겁니다.

특히 장자 세속권 등등의 세속특권과 관련된 문제에서 결혼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요구되었지 일반 시민에게까지 그게 요구되지는 않았고. 많은 성 풍습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둔탁하지 않았다고 얘기되지 않습니까.

달리 말하면, 성 문화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패턴이 달랐다는 거죠. 도덕적 엄격주의를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가. 많은 부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오히려 최근에는, 저도 대학 다닐 때만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길거리를 다닐 때 손잡고 다닌다고 하는 게 드물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군대갔다와서 90년대 초중반에 놀랐던 사실이, 지하철을 탔는데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 위에 여자가 포개져 앉아서. 막차였으니까 사람들이 많진 않았어요. 거기서 키스를 한다. 봤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영화에서나 볼 장면인데, 영화가 현실이 되었다는 게.

그게 계속 세월이 지나고 지나다보니까 자연스러워졌단 말이죠. 그리고 여성이 담배피는 것. 지금은 자유롭게 피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어디서 폈나요? 화장실에서. 참 안 좋잖아요. 냄새도 나는데서 담배연기까지 포함되면 안 좋은데. 오히려 저는 밖에서 당당하게 피지 왜 그렇게 피냐.

한 번은 제가 선배 두 분을 꼬셔서 담배가 얼마나 좋은 건지 여자 두 분을 흡연자로 동참시켰어요.

그래서 여성적인 어떤 의미라고 하는 것을 살릴 수 있는 방식이 케어 에틱을 어떤 부분에서 긍정해요.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여성주의 전략으로만 치환시킬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특히 대한민국 남자들 상당히 딱딱하지 않습니까.

남학생들은 웃어야 할 때와 진지하게 할 때는 구분 못 해요. 내내 무덤덤, 진지모드로만 들어요. 달리 말하면, 남성들의 감성지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거고 구태여 싸워야 되지 않을 부분에도 주먹이 나간다는 것이거든요.

수다를 떨 줄 아는 남자들은 잘 안 싸워요. 수다에도 법칙이 여러 가지 있잖아요. 수다에도 법칙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여성성이라고 했을 때 그런 걸 강조하는데, 수다떨 때 앞에 있는 여자 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많은가? 보니까 안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굉장히 공감하는 척하며, 맞아맞아 어머어머 하는 맞장구라는 문화가 수다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마치 하나도 공감 안 하면서 공감하는 척. 그런 부분이 여기서 자기를 낮추는 게 일상화된 방식의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남자들은 무게 잡고 충고만 하려고 해요. 되게 심리전하면 이런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남자들은 상대방이 이야기하면 마치 자기가 위에서 굽어보듯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는 방식으로만 한다는 거죠. 동감자나 공감자가 되지 않고.

달리 말하면, 남성들의 문화 속에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게 체화돼 있다는 거죠. 그게 되게 피곤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도 스트레스가 많고.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단순히 여성주의 전략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일반화시킨다면.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비자에서는 훨씬 더 끔찍한 방식으로 서술을 해요. 14페이지를 보면,

[만약 군주가 둘이 된다면[主兩] 군주는 자신의 밝음을 잃어 남자와 여자가 권력을 다투고 나라에는 반역을 꾀하는 군대가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망한 나라라고 말한다. (...) 만약 군주가 둘이 된다면 남자와 여자가 위세를 나누게 되니 이를 일컬어 크게 미혹되었다고 한다. 나라 가운데 무장한 군대가 있게 되니, 강한 나라는 분열되고 중간 규모의 나라는 망하고 작은 나라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정부인은 음란하고 태후도 추행을 쌓아 조정과 궁중이 뒤섞여 통하며 남녀의 구분이 없게 되는 상태를 가리켜 군주의 실세가 둘 있다[兩主]고 한다. 군주의 실세가 둘 있을 경우 그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심리연구를 할 때 가장 독특한 연구 대상으로 파헤쳐볼 만한 인물이, 첫 번째로 ‘내시’ 궁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성 자체가 차단된 내시와 여자 궁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떨까.

무협 영화에서 많이 소재로 나오는 위충현 같은 사람. 모르세요? 위충현. 영화 <신용문객잔>을 보시면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 있잖아요. 동창의 대부인. 동창이라는 것이 황관들이 운영했던 정찰조직 같은 거죠. 말하자면 적절한 비유는 아닌데, 내시들이 소유하고 있던 군대이자 경찰이고, 그 세력들은 후대에 걸쳐 여기저기에,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스파이를 미국에 보내서 몇 세대 이후까지. 동창에서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관리했는가하는 게 최근 무협사극에서 많이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 정신세계 아주 독특할 것 같거든요. 또 여자 궁녀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전국시대 문헌 가운데서 ‘자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자식이 반역을 꾀할 경우에 주의해야 한다는 표현. 특히 자기 부인 및 그쪽 세력을 경계하는 표현들은 무지무지하게 많이 나오고. 나라를 망치는 가장 첫 번째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면, 여성주의 얘기가 나오는 맥락이 사실 그런데서 나오거든요.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여성적인 것에 대한, 특히 백호통 같은 한 대의, 백호관에서 논쟁한 것들을 모아둔 게 백호통이라고 하는 저술이죠.

거기에서 음은 악이고 양은 선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요. 그 이전에는 없던 방식의 표현이거든요. 그런 게 왜 나오느냐. 그런 건 외척에 대한 규정이에요. 그런 게 일반화된, 마치 유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확대하는 해석방식은 곤란한 거고. 텍스트마다 가지고 있는 배경들을 충분히 읽어낼 때 훨씬 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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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와 페미니즘 ④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6_02.htm

▲ 주체로서 갓난 아이

그 다음 15쪽을 보면, 이건 55장인데.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는 음양 혹은 암컷의 절도, 수컷의 절도를 실천하는 주체는 누구냐. 당연히 제왕이지만 사실상 거기에 걸 맞는 사람은 성인이거나 갓난아이라는 주체입니다.

[덕이 두텁게 머금은 사람은 갓난아이에 비길 수 있다.
벌이나 독충이나 독사도 물지 않고
발톱이 억센 새나 사나운 짐승도 후려치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힘줄은 부드러운데도 쥐는 것은 억세고]

이런 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게 뭔가. 이런 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메시지들은 상당히 비슷한 편이죠. 이것이 바로 노자가 서양권에 소개될 때 굉장히 주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영문판 노자는 성서의 구절을 상당히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번역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노자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중요하단 겁니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현빈이라는 표현을 할 때, 사실 빈은 소입니다. 소라는 할 때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건 현자가 붙었다는 것까지 얘기한다면 뭔가 신비한 거죠.

뭐와 연결해야 하느냐면, 제사와 연결시켜야 해요. 자연스럽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번역하기 애매한. 특히 현 자가 붙어있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번역하느냐.

mysterious feminity. 아까 김종미 선생님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현빈을, 암컷을 mysterious feminity라고 변역하면 신비로운 여성성. 이렇게 연상적으로 가기가 되게 쉽죠. 이건 기교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나름대로 선택일 수가 있는데. 60년대에 여성주의 운동이 상당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것도 에너지원으로 쓰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이것 자체는 해석의 산물이고. 그것이 계속 축적되는 전통으로 이어져야 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 했을 때.

[암수의 교접을 알지 못하면서도 고추는 성나 일어서니 정기의 지극함이다.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메이지 않으니 조화로움의 지극함이다
조화로움을 적당함이라고 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하고
마음이 기를 억지로 하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억세지면 곧 늙어 버리니
그를 일러 도가 아니라 한다
도 아닌 일을 행하면 일찍 죽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도’예요. 그리고 이건 도술에 관한 이야기고 이 도술을 행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이 맥락 속에 들어있는 실제 배면의 논리는 죽음과의 투쟁이에요.

죽음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될 것은 갓난아이와 같이 하는 것. 갓난아이와 같은 완전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 벌이나 독충이나 독사도 안 문대요.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런 것 있는 것 같아요. 개 종류도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개를 되게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개도 저를 싫어하더라고요. 제가 경계심을 있어서 그런지 가면 으르렁 거려요.

그런데 애들은 무턱대고 쫓아가잖아요. 사나운 개가 아니면 그렇게 해도 별로 거부감 없이 어울리더라고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게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관자 책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표현되느냐면, 내가 다른 사람을 접대할 때 선한 의도, 선한 기운을 갖고 대하면 상대방이 그걸 감지해서 선하게 온다는 거예요.

육감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기라는 것이, 이건 분명히 기론에 바탕한 것이고 기본적인 배면의 논리는 그걸 전제하고 있어요. 나중에 기와 덕을 이야기할 때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일단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갓난아이라는 것. 갓난아이는 여성도 남성도 아닙니다. 갓난아이는 온전한 덕을 갖고 있어요. 온전한 덕은 부쟁과 연결됩니다. 다투지 않음. 노자의 철학을 평화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고 부쟁의 철학이에요. 전쟁이 있어요. 그런데 가급적 안 싸우는 거죠.

왜. 싸우면 다치니까. 서로 다치지 않습니까. 서로 다칠 일을 왜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불가피할 상황이 아니면 안 싸워요. 대신 불가피하게 싸워야 할 땐 어떻게 싸워라? 기습. 그게 노자에 나오는 전략입니다. 정규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 세계의 전쟁이 그렇게 참혹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초창기에 어떻게 전쟁하느냐면, 성을 둘러싸요. 그 앞에서 막 이렇게.

왜 그러냐면, 가만히 보세요. 전국시대에 들어서야 철기가 보급됩니다. 춘추시대는 청동기 시대예요. 청동기 시대라는 건 모든 사람들이 청동기를 갖고 칼싸움하는 시대가 아니라 전부 죽창 들고 싸우는 시대예요.

청동기라는 건 실질적으로 상징물에 가깝죠. 귀족들 몇몇 빼놓고는 다 청동기로 무장한 게 아니에요. 일부만 그렇게 무장한 거고.

그리고 전쟁 자체가 士을 중심으로 하는 거잖습니까. 士라는 건 기본적으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뜻이에요. 그들만의 귀족이니까. 일반 서민들은 못 차요.


▲ 用(용)의 문제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일반국민개병제가 도입되면서,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의 요체입니다. 지난 시간에 장자 얘길 하면서 용(用) 얘기를 했죠. 군주 입장이라는 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

특히 법가적인 시각에서, 노자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특히 남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여자는 재생산 두 번째는 길쌈이에요. 남자는 첫 번째는 농사, 두 번째는 군사력.

그래서 인간의 가치인 휴머니티는 전혀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가치는 노동물을 통해서 생산물을 낼 수 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전쟁에 나가서 나를 위해 싸워줄 수 있는 것.

그래서 이 당시에 내가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나의 백성으로 변화시킬까 하는 7개년 계획이 황제사경 책에 나와요. 맨 마지막 7개년 계획의 결론이 뭐냐. 나를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 그게 내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용의 의미고요. 그걸 노자는 아자연(我自然)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노자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다면, 아자연이라는 말은 끔찍한 거예요. 한 때 노자 철학이 우민정치의 효시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건 맞습니다.

노자 책에는 우민화라고 하는 전략이 깊이 숨어 있어요. 왜. 아는 놈들만 반항을 합니다. 모르면 반항을 하지만 어떤 방식의 반항이 효과적인지 몰라요.

그리고 문자의 힘은 대단한데, 면대면의 관계는 직접 만나서 설득해야 해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대자보나 견문을 써서 돌리면 한꺼번에 일어나잖습니다. 문자의 힘이 놀라워서 지식의 소유에 대한 과거 전통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따라서 보는 시각이 다른 거죠.

위험한 책은 유통시키지 않는다. 당연한 전략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책도 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가진 힘은, 여기서 제왕의 철학을 얘기한다고 할 때 그 제왕 대신에 사회적인 한 사람을 투영시키는 게 아니라 개인을 두어야 한다는 거죠. 나.

따라서 노자라는 텍스트는 과거에는 특정 신분집단에게만 효용있는 전술서라면 노자라는 철학이 지금은 누구나 써먹을 수 있는 처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다만 저는 그 방향을, 우리끼리가 아니라 저들한테라고 생각하는 거죠. 즉, 우리가 비판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그와 같은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특히, 18쪽에 있는 부분만 보고.

이건 지난 시간에 회남자를 보면서 많이 얘기했던 거죠. 저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걸 소개하기는 했지만.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벌리게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하며
장차 없애려면 반드시 먼저 높이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줄 것이다.
이것을 미묘한 데서 밝다고 하니]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고기는 못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나라의 좋은 물건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미명이라는 표현이 음흉한 전술이라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이 음흉한 전술이라는 것이, 이건 그냥 무덤덤한 객관적 표현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만 그 칼날을 누구에게 향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은 우리가 속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짓 다 드러나 있고. 따라서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 이와 같은 방식의 전략, 전술을 펴는 거죠.

다만 이런 게 개개인에게 침투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하는 방식이라면 곤란하죠. 그리고 대개 이런 논의가 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상적인 삶의 논리는 아니에요.

이런 게 삶의 에토스로 번지는 것에 대해서 유가는 그렇게도 배척했던 거죠. 더구나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개개인이 힘을 크게 갖고 있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한 개인이 펼칠 수 있는 힘의 파장이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 노자와 페미니즘의 새로운 관계

이렇게 해서 보면,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페미니즘과의 만남은 니담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이루어졌던 논의, 그 다음에는 중국에서 인류학이나 역사학에서 고대사나 원시시대에 대한 연구와 연결되고 그곳이 도교 연구와 접목하면서 자료가 풍성해졌는데.

문제는, 다 노자 이후의 자료들이고 거꾸로 결론이 난다는 거죠. 그럼 노자와 페미니즘은 관계가 없느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서, 왕필인지 기억은 못 하겠는데, 현학의 시대에, 현학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유학의 시대이지만 기본적으로 도가 텍스트와 유학적 텍스트가 만나던 시대였죠.

이 당시에 이런 질문을 한 지식인이 받아요. 유가와 도가가 만날 수 있느냐? 라고 하니까 그 대답은 ‘장차 같아지지 않겠습니까’ 라는 표현이 나와요.

달리 말하면, 노자가 페미니즘적이다 친하다 혹은 안 친하다는 결론보다는, 장차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뉘앙스의 표현이 오히려 생산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왜 이런 전략이 좋다고 생각하느냐면, 『철학에서 이야기로』로 작업을 하면서 얻게 된 생각인데 그럼 20세기 내내 노자든 혹은 동양학이든 이른바 근대화라고 하는 쪽으로 계속 동아시아 전통을 해석하려고 했던 노력의 흔적은 서구인 닮기에 지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는. 역사를 왜곡하고 전통적인 사회를 왜곡하는 음해의 기능만 했던 것이냐?

오히려 그게 아니라, 그 나름대로 그 속에는 의미와 가치가 들어 있는데 그 의미와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 낼까 하는 콘텍스트를 우리가 만나지 못 했다 하는 차원의 논의로 바꿔야 한다는 거죠.

따라서 콘텍스트를 주기 위해서 제가 노자와 관련해 만들었던 것이 바로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라는 표현이에요. 원조 노자 하지 말고 하나하나가 어떤 얼굴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예를 들어 페미니즘과 만나고 싶다고 싶다면 그 가운데서 어떤 얼굴을 선택하고 이야기 속에 회자되도록 만드는가 하는 전략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그걸 자꾸 원조나, 무의미한 방식으로 접목시키려고 할 때 한 번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소지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실은 시간 얘기를 하려고 정리해서 왔는데, 시간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한 시간 정도 따로 잡아서 얘기해 드릴게요.

추상적인 단위의 관념들에 대해서 굉장히 서구적인 적용을 마구잡이로 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 난해한 부분이 있어요. 다음 주에는 주제 논의는 그대로 가지만 시간에 관한 것 특히 다음 주가 유토피아 논의를 하다보면 당연히 시간에 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동양은 어떤 시간관이고 서양은 어떤 시간관이라고 하는 이중 잣대는 다 버려야 해요. 어느 세계나 시간관은 다양한데 마찬가지로 동아시아도 굉장히 다양한데, 동아시아 시간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정권의 시간관이라는 우주의 시간을 규정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또 한 가지 방식은 삶의 시간관이라고 하는, 몸의 시간관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곱씹어 볼 때 굉장히 재미있을 수 있다. 유토피아 논의와도 굉장히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노자 80장 소국과민 해석을 검토하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철학에서 이야기로』 3장 부분을 보시면 그와 같은 내용이 나와 있어요. 특히 장자를 가지고 했는데, 큰 틀에서 도가적인 이상향에 대한 몇 가지를 분석해 둔 게 있으니까 혹시 갖고 계신 분들은 혹은 서점가서 읽어 보세요. 안 사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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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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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 노자와 페미니즘 ①


▲ 노자는 과연 페미니스트인가?

오늘은 조금 쉬운 걸로. 지난 주와는 달리 현대적인 논의의 대표적인 사례죠. 제목이 나와있는 것처럼 곡신불사(谷神不死). 이 한마디 말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자는 과연 페미니스트인가?

이런 해석을 보다보면, 한편으론 아이러니하면서도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희한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가. 사실 노자가 페미니즘적인 사회경향을 가졌다고 우리 나라에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이 처음이라고 기억해요.

그것도 우리나라 자체에서 나온 목소리라기보다는 외국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죠. 그와 같은 논의의 반영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힌 논문이 김종미라는 분이 쓴 내용인데. 글 자체는 굉장히 재밌고 문학을 하신 분이라 그런지 흡입력 있었죠. 번역도 탁월합니다. 우리들에게 알려진 소문의 대표적인 진원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까.

큰 나라는 강의 하류
천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곳은 여성의 공간
여성은 항상 고요함으로 남성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낮은 곳으로 흐른다.(『노자』 61장)

61장에 나온 내용을 이렇게 번역했어요. 이렇게 보면 페미니즘적이 아니라고 대꾸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을 보죠. 더 유명한 구절이죠.

계곡의 신(谷神)은 죽지 않으리.
그것은 신비의 여성(玄牝)
여성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 듯 이어질 듯 존재하는 듯 않는 듯
써도 써도 다함이 없으리라.(『노자』 6장)

굉장한 찬양이죠. 말하자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손오공이 놀았듯이 천하의 모든 움직임이 여성적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것이고 그 힘도 무한하다. 이와같은 찬사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곤혹스러운 건 동아시아에도 페미니즘 사상이 있었다고 말하기 좋은데 한자의 원문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거리가 있는 번역이죠. 이건 의역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시각 플러스 나름대로의 창조 주석까지 들어간 해석이에요. 문학을 하신 분이니 해석자의 시각이 상당히 반영된 건데. 그럼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느냐? 오역이라고 말하는 건 참 애매하죠.

본래의 맥락 자체가 뭐라 규정할 수 없는데, 물론 각 텍스트마다 주석적 시각은 분명히 있지만 이렇게 노자의 원문을 떼어놓고 이것이 백프로 맞다 틀리다로 토론하는 건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말씀드렸죠.

다만, 저는 이런 해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냐면. 비빌 곳이 노자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다른 한편으로 노자가 대단한 말을 했다, 2500년 전에 누군가가 있어서 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들이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주는 번역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말이죠.

다만 이런 얘길 함에 있어서, 이건 창조적 재해석이죠. 다만 노자가 2500년 전에 페미니즘이었다는 방식의 도발적인 주장으로 이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이건 전략적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따라서 해석 상 틀렸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고전을 통해서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꾸어야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의미 있는 토론이 될 수 있다.

내가 노자 원전을 다 뒤져봤는데 이게 틀렸다, 그럼 이 글 속에는 분명히 이와 같은 얘길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노자가 페미니즘이다, 아니라는 흑백논리식 토론은 무의미하고 도대체 우리가 노자를 통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서 그럼 노자가 정말 페미니즘적인 얘길 하기에 안성맞춤인 텍스트인가 까지 나아가야지만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토론인데, 아쉽게도 거끼가지는 안 나가는 것 같아요. 그게 아쉽다는 거죠.

그래서 생산성 있는 논의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자와 페미니즘을 같이 걸쳐놨을 때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선에서 우리의 논의를 정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 하나의 노자 텍스트에 대한 다른 해석

같은 부분에 대해서, 백서본 노자를 이석명이라는 분이 번역을 했는데 번역도 쉬워요. 다시 한번 읽어보죠.

큰 나라는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하네.
그래야 천하의 ‘암컷’이 되고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니
고요함을 행하기에 마땅히 자신을 낮추네.(『노자』 61장)

계곡의 작용은 그침이 없으니
이것을 ‘현묘한 암컷’이라 하네.
현묘한 암컷의 문,
이것은 천지 만물의 근원이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네.(『노자』 6장)

상당히 비교가 되죠. 오른쪽 것도 상당히 냄새를 피우지만 왼쪽의 것과는 상당히 뉘앙스가 다릅니다. 번역하신 분이 상당히 낭송하는 방식으로 노력을 많이 해서 왼쪽과 비슷하지만, 그냥 앞에 것을 읽고, 오른 쪽 해석을 봤을 때는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두 개를 별개로 두고 다른 시간에 읽으면, 이 두 개가 같은 부분에 대한 해석이라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맥락이 그리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방식이 상당히 다릅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텍스트를 두고서 번역이 달라지게된 까닭, 진원지는 어디에 있을까. 문제는 본래부터 2500년 전에 그 속에 무언가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상정하는 데 문제가 있죠.

그러고 보면 번역이 대단한 힘을 갖는 것 같아요. 자료 3페이지로 넘어가시면 국내 여성학 내지 여성 철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가 상당히 있었어요. 지금은 잠잠해 졌지만.

그 바탕 중 하나는, 초창기에는 외국에서 그와같은 방식의 관심이나 표현이 꽤 많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여성학이 90년에 붐을 일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요구들이 있었습니다. 도가 또는 노장을 전공하는 분들에게 초청을 해서 발표를 많이 의뢰를 했었어요. 저도 한 번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분들이 쓴 글을 보면 어떤 느김이 드느냐면. 여성 철학계에서 초청을 했어요. 노자가 상당히 페미니즘과 친하다는 방식의 얘기로 말을 거는 거네요. 오히려 그 쪽 분들은 과연 그럴까, 하며 회의적인 눈치고.

대표적인 두 번역 방식을 본다면, 위의 것은 아까 같이 번역했던 김종미 선생님의 평가고, 뒤의 것은 김세서리아 선생님이라고, 동양학 하신 분 중에서 여성 철학 작업을 하시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분입니다. 동일한 노자에 대한 해석의 기조를 보시죠. 김종미님 것을 먼저 읽겠습니다.

[새로움은 낡은 것으로부터 온다. 동방과 서방은 서로를 비춘다. 노자와 페미니즘의 만남은 두 개의 문명의 만남의 극적인 예후일지도 모른다. 인류가 문명이라는 것을 빚어오던 끝에 동방의 첫 주춧돌 이른바 기축시대(基軸時代)의 한 축을 구성했던 노자와, 서방의 탈근대로 나아가는 한 창문에 비추어진 페미니즘이라는 그림이 서로 이천 오백년을 격하여 두 손을 마주잡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논문이 거의 시 같아요. 글이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데. 여기에 대해서 김세서리아 분은 약간 회의의 눈초리로 평가합니다.

[“노자철학이 생명 생산의 측면에서 여성 역할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으며, 여성적 원리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가부장제에 비판적 의미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노자철학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할 때, 이러한 주장이 항상 적합하거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음, 자연, 고요함의 의미로 살아온 여성에게 이러한 찬사들이 힘을 지닌 어떤 전략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노자 철학 속에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동아시아 여성의 삶 속에서 실천적 힘을 준 적이 있는가 하는 부분은 반드시 반추할 부분이고, 있다 었다고 하는 부분보다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두 분이 갖는 전제가 상당히 재미난 게, 김세서리아 분은 원래 전공은 유가예요. 유학을 전공하신 분이고 김종미 선생님은 문학을 전공한 분이에요. 문학적 창조성과 철학적 냉철함이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구절이 동서문명의 만남이라고 하는 커다란 패러다임에서 이뤄진다고 하는 것 이전에 지금 이 속에 숨쉬고 있는 배면의 논리는,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와 서구를 만나게 하는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예요. 90년대부터.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동양학 분야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가운데 하나가 특히, 노자철학이 주도를 해왔는데, 그 중에 아주 특이한 건 아주 오랜 옛날에 그 무언가가 탈근대와 만나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20세기 전반기 내내 동양학은 근대인 척, 내가 근대가 되어야겠다는 작업을 계속 해왔어요. 그런데 80년대를 지나면서 역전됐죠. 우리 사회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온 물결이라고 그걸 얘기하는데.

포스트모던이 들어오면서 노장 철학 쪽이 탈근대, 서양이 근대를 비판하는 담론들이 봇물 터지듯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근대와의 만남을 주도했던 건 유학이 주류였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럼, 이게 다냐? 아니라는 겁니다. 왜 문제가 되느냐. 노장은 다 만났어요.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가니까 탈근대와 친한 척해요. 그리고 근대와 만날 때는 종교와 과학과 만나는 중요한 틀이었어요.

노장은 만병통치약이라는 거죠. 만날 수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오래 못 가요. 그게 문제라는 거죠. 지속성 있는 담론으로 이어지면서 생산성 있는 논쟁을 벌여본 적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 한계라는 거죠.

정말 그것이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우리 삶에 연속될 수 있는 혹은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야기로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고. 한 때 푸코가 유행할 때는 장자와 푸코가 비교되고, 데리다가 들어오니까 노자와 데리다가 만나요. 19세기에는 기독교랑 만났어요. 20세기 내내, 그리고 중국에서는 특히 민족주의, 중화주의의 부활과 긴밀히 연관 있습니다.

이런 점을 따져보았을 때, 제가 노장 담론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장이라는 담론이 뭔가 생산적인 의미를 찾는 데는 크게 효율적이지 못 했다는 반성적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 노자 철학은 아무것도 아니냐? 상당히 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적어도 탈권위주의적인 방식의 행보는 노자는 보여줘 왔고 지난 2500년 동안 예술 혹은 종교 혹은 서민적 삶의 공간에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특히 혁명적 에너지는 불교와 도교 쪽 관련해서 많이 나왔죠. 첫 번째 봇물 터진 게 황걸 운동. 한나라가 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죠. 도교의 가장 중요한 흐름 가운데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가 바로 태평도가 있고 또 하나가 오두미도예요.

그런데 한나라가, 삼형제가 혁명을 철저히 준비했었는데 혁명을 이루기 석 달 전엔가 미리 정보가 새어 나갔어요. 그래서 한나라 조정에 알려졌고, 아뿔싸 하면서 들고 있어났었고. 그래도 상당히 오래 갔었죠.

그런데 정권 차원에서, 니들은 역도들이고 향후 이 세력을 그대로 두었을 때 계속해서 반역의 세력으로 고착될 수 있다면서 철저하게 도려냈고 그 나무지 일부를 조조가 흡수했죠. 자기의 휘하 군사세력으로.

오두미도 같은 경우는 조조에게 항복했죠. 유비가 사천성 쪽을 장악해서 촉을 세울 때, 장로가 조조에 투항해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고스란히 보존했습니다. 따라서 체제순응적인 도교로 거듭났죠. 이쪽으로부터 그 후에 천사도나 도교의 기본적인 흐름이 갈라진다고 도교사학자들은 얘기하네요.

그런 것을 본다면, 분명히 노장철학이 지금 현대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처럼 내면의 숨결을 갖고 있었던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노장 철학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크게 흘러 들어갔던 도가 철학과 도교의 연속성을 한국 학계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연속성을 부정해요. 왜냐. 도가는 철학이고 도교는 종교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래서 앞전에 살펴봤던 하상공과 왕필의 노자 주는 같이 비교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 그건 오교 교단에서 많이 읽혔었고.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지금 그렇다는 겁니다.

상당히 종교적인 내용들이 가미돼 있기 때문에 도교 텍스트로 읽혀요. 그러니까 두 개가 전혀 다른 학자 집단에 의해 연구돼 왔다는 거죠.

전통 사회에서도 그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송나라 이전까지, 특히 노자를 사랑했던 제왕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양귀비와 염문을 뿌렸던 당 현종이에요.

당 현종은 자기가 직접 어줍은 노자를 만들기도 했고 그때 채택된 판본은 하상공 본이에요. 그때 대량으로 찍어서 집안마다 하나씩 비치하도록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뿌렸다는 거죠.

사실은 성대 이전 그 후에도 커다랗게 이어지는 전통에서 본다면, 하상공 식의 주석 전통 시각이 훨씬 주류였어요. 그랬다가 성대 학자들이 왕필 주가 훨씬 합리적이라고 해서 받아 들였고 그게 이어져서 특히 조선은 그와 같은 방식의 해석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는 쪽 계통의 논의들이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읽혔습니다.

이른바 도학파에서 편찬한 책들이 조선조로 들어갔고 그것이 노자나 장자를 읽는 틀이었다는 거죠. 따라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노자를 읽고 비판할 때, 상당히 역설적인 부분도 있는데, 지금 우리가 객관적인 철학사에서 얘기하는 노자 철학과 공자의 철학이 부비대고 싸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이 문헌학사를 말해야 하고, 해석사를 이야기해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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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5_02.htm

◆ 노자와 페미니즘 ②


▲ 서구 사회의 노자

이것이 오늘 할 얘기의 다예요. 허무하죠? 그럼 재미가 없으니까 이제 이야기를 하죠. 대체 이와 같은 이야기의 방식이 무익한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금 조사를 해보니까 이와 같은 방식의 논의가 어디로부터 비롯돼 나왔는가. 어떤 부분에서 상당히 추측적인 얘기도 나중에 나오게 될 겁니다.

노자와 페미니즘과의 관련성 논의가 대략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첫 번째는, 희한하게도. 이 책은 굉장히 유명한 책이라서 잘 알고 계시죠. 우리사회에서 페미니즘과 노장 넓게는 노장보다는 Taoism이 맞아요. 우리 식의 표현은 애매한데, 서구 사회에서 타오이즘이라는 용어는, 정확하게 제가 기억은 못 하는데, 19세기 중반 조금 넘어가면서 쓰였어요.

특히 사서, 시경, 서경, 역경 등 중국의 중요한 고전을 거의 다 번역해 낸 제임스 레게라고 하는 사람이 노자와 장자도 번역합니다. 그 서문에서 노자와 장자로 대변되는, 이 사람은 개신교 선교사예요, 따라서 종교적인 시각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타오이즘이라고 조어를 붙이는데 그 사람이 처음 쓴 건 아니라고 해요. 그런데 의미의 맥락을 붙인 건 제임스 레게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하고.

그가 번역한 이 책이,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종교학이 19세기 말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때 막스 밀러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부흥되기 시작한 종교학, 종교학은 우리가 보기에 종교 일반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서구에는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느님을 제외한 잡신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죠. 출발을 따진다면. 신학과 종교학이 분리돼 있으니까.

인류학과 비슷한 속성을 가진 게 종교학인 것 같아요. 굉장히 서구문명에 충실한 틀에서 생산한 담론이지만 오히려 서구식의 근대성 자체를 회의하는 역할을 한 게 종교학이나 인류학이었던 것 같아요.

바로 그러한 틀 속에서 노자와 장자가 번역되고, Taoism이라는 말이 서방세계에도 많이 알려지게 됐어요. 그런데 서구 사회에서의 노자, 장자에 대한 연구는 우리 동아시아에서의 연구와는 좀 다릅니다. 특히 뭐가 다르냐.

이 사람들은 특별히 두 가지를 가지고 접근했는데, 하나는 필드워크로 접근했어요. 특히 운난성 지역에 있는 소수 민족, 그 다음에 도교적인 유습, 그 다음에 대만 쪽에 있는 유물을 상당히 많이 갖고 갔단 말이에요.

대륙 쪽으로 갈 수 없으니까 나중에 마오정부수립이후에는 대만엘 가서 연구를 하고 온 사람들이 많아요. 개방된 다음부터는 중국 대륙에도 많이 가지만.

실제 도교적인 풍습이라든가 종교적인 습속과 텍스트가 같이 결합된 방식을 연구했어요. 특히 이런 방식을 주도했던 쪽이 프랑스죠. 사회학 계열에서 마스패로라든가, 오늘 몸이 멍해서 그런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쪽 계열에 있는 사람이 연구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이건 종교입니다.

특히 신비주의라고 타이틀이 붙어서 많이 얘기됐었고, 그래서 우리와는 많이 달라요. 노장은 철학이고 도교는 종교,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사실 덜했던 게 무엇이냐면 사실은 철학적 전통으로써의 도가는 한나라 때
생명을 거의 다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도가 철학이라는 사유의 흐름은 말할 수 있지만,철학적으로 정책석의 학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중국의 학문은 전부다 유학자들이 한 거예요. 유학자들이 주석을 쓰고, 물론 도사들이 하긴 했지만 그들이 생산한 텍스트는 도가철학으로 분류되지 않고 도교 쪽으로, 특히 종교 교단과 관련돼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바깥에 있었던 것이 역대 황제들이 노자를 주석하고 읽던 텍스트입니다. 그건 최근 들어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대한 택스트 역시 최근에야 출간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종교적으로 해석해요. 그래서 여기에 들어가기가 참 이상할 것 같죠 그런데 니담이라고 하는 사람 옆에는 왕링이라고 하는, 거의 작업을 같이 했어요. 그래서 니담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냈지만 저술의 상당부분은 왕링의 기여라고도 해석하는데. 7쪽을 보세요. 노자와 페미니즘을 같이 연결지었던 가장 빠른 언급, 물론 다른 텍스트들 속에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이후에 한국에서 생산된 노자와 페미니즘 관련된 논의의 대부분이 여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두 번째는 모계사회라고 하는, 특히 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역사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로 가죠.

그러면서 고대 사회의 틀을 이야기하면서, 모계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모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특히 노자와 페미니즘을 연결시키려는 모전을 꽤 많이 쓰는 듯해요.

그래서 양보다는 음을 강조한다. 이건 원시공산제 사회 때 엄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던 시절에, 그런 분들이 노자가 바로 그와 같은 원시적 사유 혹은 유습을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거예요.


▲ 노자를 페미니즘으로 보는 오해

노자 속에 왜 그런 얘기들이 들어갈 수 있었느냐. 그런데 다 여기까지 하고 그 다음에 도교 쪽을 보면, 여성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계보들이 풍부하게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다 연결시키면서 노자 계통이 페미니즘 요소가 상당히 있었고 역사적으로 증거할 만한 게 풍성하다고 하면서, 어떤 분들은 노자가 친페미니즘적이라고 한다면 어떤 분들은 아주 강하게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어요, 누군가는.

그런데 희한한 건, 이 책은 노자를 해석하면서 객관적 관찰이라는 말을 해요. 7쪽을 보죠. 약간 길지만 이 부분은 확인을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물과 여성성, 「물의 상징과 여성적 상징」이라고 하는 소제목 하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물과 여성적 상징은 철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가적 혹은 법가적 통솔 개념 대신에 우리는 안으로부터의 도가적 통솔(leadership) 원칙에 이르는 것이다. (...) 유가와 법가의 사회 윤리적 사상 복합은 남성적이고 관리적이며 견고하고 제압적이며 공격적이요 합리적이며 직수적이었다―도가는 여성적, 관용적, 유약적, 비강제적, 철수적, 신비적이며 더구나 수용적인 모든 것을 강조함으로써 근본적이고 완전하게 유가와 법가사상을 부수어 버렸다. 그들이 ‘계곡의 정령’을 찬양함은 유가에 대한 모욕이었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말하기를, “뛰어난 남자는 낮은 장소에서 사는 것을 싫어한다. 낮은 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악이 그에게로 흘러들기 때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도가들이 그들의 자연의 관찰로부터 보이려 했던 여성적 수용성은 인간의 사회적 여러 관계에서 현저히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던 여성적인 순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봉건 사회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순종은 봉건 사회와 양립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참다운 의미의 시적 표현에 있어서의 순종은 협동적 집산주의 사회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가 일찍이 한번 존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청동기 시대의 원시 봉건제에서 군주와 제사와 용사의 완전한 분화가 생기기 이전 촌락의 원시적 집산주의 속에 존재했었다. 그것은 아마도 도가 사상이 발생하기 직전의 수세기에 걸친 중국 문화의 외곽 지역에 오히려 존재했었을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을 쓴 게 니담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왕링이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특히 논어에 나온 구절을 의역적으로 설명하면서 거기에 대한 조소로 끌어들이는 것도 그렇고.

이걸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노자를 읽기 전에 이 구절을 읽고 노자란 텍스트를 읽게 되면 굉장히 친여성주의적으로 읽게 되기가 쉬워요. 그래서 노자를 읽을 때 문제가, 그냥 노자를 읽고 생각하면 좋은데 그 이전에 다른 책을 먼저 본다는 거죠. 그리고 그 시각으로 보게 되니까 굉장히 끌려가는 방식으로 독해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 담론이 계속 재생산 됩니다.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갖는 허점은, 특히 73년도와 93년도에 노자의 두 판본이 발견됐다고 했죠. 그럼, 만약에 여기서 주장하는 것처럼 혹은 이쪽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 이전의 사회적 유습이라고 한다면, 곽점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성립되잖아요.

그런데 많은 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노자를 해석하느냐면, 노자에 나오는 ‘곡신구사’라는 부분을 딱 전제해놓고 그 이후에 도교적 전통 자료를 가지고 해석하면서 앞에서부터 있었다고 거꾸로 결론을 내린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초간본 노자를 비교해 봤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다른 학자 논의를 검토해 보니까 희한한 결론이 나오더라. 그게 바로 9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9쪽을 보면, 곽점본 노자에서 이야기하는 골짜기가 나오는데 그 것을 한 번 읽어 보지요.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를 거느리는 왕이 되는 까닭은 그가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니, 따라서 능히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성인이 백성의 앞에 있는 것은 몸을 뒤로 물리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의 위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말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가 백성 위에 있지만 백성들은 그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자 이것은 똑같은 골짜기. 강과 바다. 이것이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물과 여성적인 이미지가 만나는 중요한 구절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적인 담론과는 완전히 딴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주인공은 왕과 성인입니다. 남자라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이것은 그동안 이야기해왔던 천하를 다스리는 지도자 혹은 통치자를 위한 조언. 처세적 조언에 가까운 방식이 분명히 들어나지요.

자 그 다음에 10쪽을 보시지요. 여기에는 모(母)라고 하는 굉장히 여성적인 표현(여성을지칭하는)이 나와요. 그런데 그 맥락이 이렇습니다.

[나라를 차지하고서 그 근본(母)을 가질 수 있다면, 장구할 수가 있다. 장구한 것을, ‘깊은 뿌리·굳은 토대’라고 말한다. 깊은 뿌리 굳은 토대야말로 오랫동안 존립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도이다]

여기서 번역은 그냥 근본이라고 했어요. 달리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모가 여성적인 이미지로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근본, 토대, 중요한 것, 원천과 같은 의미가 더 강하다고 이 분이 해석했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초간 노자에서 여성성, 혹은 여성적 이미지와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은 굉장히 희미해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적 이미지와 친한 맥락으로 나오는 부분들이 굉장히 정치적 맥락으로 본래의 맥락이 있다는 거죠. 그럼, 이건 분명히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상상해본다면, 사실 여기와 관련된 논의는 다른 텍스트에서도 많이 논의가 됐어요. 11쪽에, Rakita Goldin이라고 하는 사람이 시경을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우리에게 경고성 있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학계에서도 노자 번역서를 통해서 그와 같은 논의를 상당히 많이 한 상태였거든요. Rakita Goldin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만 하는 것은, 암컷(the Female)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는 언급이 마치 『노자』의 저자가 여자들(women)를 높이 평가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수컷과 암컷은 우주의 상보적인 두 측면을 조명하기 위해 고안된 예시적 모티프일 뿐이다. 그것들이 실제의 여성이나 남성을 가리키는 것일 필요는 없다. 『노자』 텍스트 자체는 아마도 오로지 남자들만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남성 통치자들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노자』에서 여성성이 강조되는 텍스트의) 주된 논점은, 성인이 남성성만큼이나 여성성의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얘기냐. 12쪽을 보시면, 가장 유명한 구절이죠.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이것이 마치 곡신무사와 연결되어서 어떤 여성주의적인 언급의 대표적인 노자의 구절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것만 볼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도 같이 봐야해요. 같은 장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천하의 계곡이 되면 언제나 덕이 떠나지 않는다
덕이 떠나지 않으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깨끗한 것을 알면서도 더러운 것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언제나 덕이 족하다
덕이 족하면 통나무로 돌아간다
흰 것을 알면서도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언제나 덕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덕이 어그러지지 않으면 무극으로 돌아간다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되고 성인이 쓰이면 군왕이 된다
무릇 큰 제도는 갈라짐이 없다(노자 28장)]

이렇게 다시 원래의 맥락 속에서 이 부분을 읽어 보면, 이 구절을 딱 떼어와서 이야기할 때와는 상이한 맥락에 놓이게 되죠. 특히 수컷과 암컷과 뒤에서는 흰 것과 검은 것. 흰 것과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에 모범이 된다는 말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상당히 흉물스런 표현같지 않습니까.

명명백백한 것을 알되, 검은 것, 어두운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두운 냄새가 저는 들어있다고 보거든요. 말하자면, 낮의 정치와 밤의 정치가 다르듯이. 이 당시가 암살 등등의 사건들이 무지 많이 일어날 때였으니까요.

희한한 건, 여성성에 대한 강조라는 것이 역사 속에서 증거를 확인해보면 적어도 춘추시대까지, 귀족사회만 해도 여성의 힘이 작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공자를 2500년 동안 상당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위나라 영공의 부인. 그 사건은 역사적인 클린턴의 염문과 비견되는 큰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유학자들에게 가장 말하기 거북한 사건이었는데.

사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그와같은 방식의 일들은 아주 흔했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족쇄, 남자와 여자를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연애가 1920,30년대에 개화하기 시작하잖습니까. 오히려 고대로 들어가면 그 부분에서 더 자유롭지 않나요. 사실 숙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숙종 이후 조선사회가 성적으로 둔탁하죠.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첨단으로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론 욕망 자체를 끝없이 억압하는 안 좋은 성 문화 시스템을 갖는 것이 자본주의인 것 같은데.

유학자들에게는 객관성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하지 말아야 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 아시겠지만, 하지 말아야 된다,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 다 보여줘요. 그리고나서 자막에 이 프로그램은 15세 이하 어린이가 보기엔 부적절하므로, 부모님께서. 그럼 왜 틉니까?

도대체 우리가 뭘 보여줘야 한다는 말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서 먹지마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죠. 도대체 학교에서는 도덕 교과서로 시험 보게 만들고, 이 모든 사회의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 프로그램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으로 미쳐 날뛰게 만드는 방식의.

이런 방식의 구절이 노자에게는 꽤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말 달리면 미친다고.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오늘따라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얘기가 딱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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