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10] 【지구정치학】지구정치학을 향하여 -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

 10] 【지구정치학】지구정치학을 향하여 -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

요약문   새로운 사유 흐름/운동으로서의 지구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구상해보게 되는 ‘지구정치학’은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한 부문으로서의 정치학(Political 

Science), 그 중에서도 특히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s), 세계정치(World 

Politics)와는 그 지향점과 뉘앙스를 달리한다.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치가 ‘개인’(Individual) 과 ‘국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세계’(Wo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면,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 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들 모두를 감싸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 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지 읽어가자는 것이다. 이미 정치학 분야와 인접 관련 분야에서 기후변화(온 난화), 환경, 대기오염, 생태계 등에 주목하면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환경정치(학), 생태정치(학) 등 으로 범주화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선구적인 작업들에 당연히(!) 경의를 표하면서도, 대체로 

그 논의는 ‘the Politics of *******’(예컨대 Climate Change, Environment, Ecology, etc.)라는 형태로 진행 되고 있다. 이 발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굳이 표현해본다면 ‘the Politics of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

다. 비유하자면 예술(의) 철학, 음악(의) 철학 등에 대응해서 마치 ‘철학(의) 철학’을 제기하려는 것과도 같다. 요컨대 정치의 본질적인 핵심과 관련된 것이다. 역시 ‘지구’(地球)[Earth, Globe, Planet]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방법으로는 ‘안과 밖, 그리고 경계’에 주목하면서, 마치 우주인(宇宙人)처럼, 자유롭게 떠 다니면서 스케치해보고자 한다. 안으로는 익숙한 것들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마치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무심하게 물음을 던져보고 싶기도 하다[예를 들자면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과 수많은 국제기구의 ‘지구성’(地球性) 정도 여하, 코로나19 바이러스와 WHO(World Health Organization)의 실제 역 할 같은 것들]. 이런 비행(飛行)을 통해서 지구인(地球人), 지구시민(地球市民)의 환기(喚起)와 더불어 가능하 다면 지구‘중생’(地球衆生) 나아가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뭇삶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하나라 는 인식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 보고자 한다. 

차 례

Ⅰ. 지구인문학과 새로운 사유 

Ⅱ. 지구와 인간 그리고 Anthropocene[人類世]

Ⅲ. 지구정치, 지구정치학, 지구공동체  

Ⅳ. AD TERRA POLITIKA: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가까운 미래, 희망과 갈등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인류는 지적 생명체와 진보의 꿈을 찾아 태양계로 진출했다.”1) 

“우리가 지구를 잘 돌보지 못했소”2)

“정말 전쟁을 일으켰군. 이 미친놈들, 결국 지구를 날렸어! 저주한다! 모두 지옥

으로 꺼져!”3) 

Ⅰ. 지구인문학과 새로운 사유 

바야흐로 ‘지구인문학’(地球人文學)이 떠오르고 있다. 관심과 더불어 유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

겠다. ‘지구인문학 연구회’의 결성과 활발한 연구, 그리고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이라는 부제를 가지고서 개최되는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학술대회가 일단의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영 어로는 ‘Globalogy, The Humaniti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구인문학과 더불어 새로운 용어/ 개념들 역시 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말들(용어)

을 필요로 하므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역시 

(‘지구’와) ‘Globe’라 해야 할 것이다.4) 형태상으로 보자면 globe에서 global, globality, globalis m, globalization, globalogy 등이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단어의 생성 과정을 넘어서 있다. 논자에 따라서 같은 용어를 쓰고 있더라도 거기에 담기는 내용과 함의가 다르기는 

 

* 역사정치학자

1) 영화 「애드 애스트라(AD ASTRA)」[‘To The Star’(2019)].

2) “들리는가?” 북극에 혼자 남은 천문학자 어거스틴. 그는 지구로 귀환 중인 우주 비행사들과 교신하려 애쓴다.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이제 지구에 없다고. 영화「미드나이트 스카이」[‘The 

Midnight Sky’(2020)]

3)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행성을 탈출하려던 테일러가 무너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는 분노하 면서 내뱉은 말[자유의 여신상 장면. 영화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1968)]. 

   http://image.cine21.com/resize/cine21/still/2011/0623/M0020011_special__1[W680-].jpg]

4) 그런데 Globe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①)세계, ②지구, ③글로브, ④구(球), ⑤세상 등이다. https://en.dict.naver.com/#/search?range=all&query=globe

하지만 점차로 일종의 ‘개념’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 지구인문학 얘기를 했더니 불쑥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거 ‘지구과학’의 반 대말이냐?” 아무래도 익숙한 지구과학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지구과학’(Earth Science, 地球科

學)이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며, 1955년부터 정규 고등학교의 교과목이기도 하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지구과학은 “지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종합적인 자연과학의 체계를 다루는 것으로서 이에는 지질학·기상학·천문학이 포함되며, 해양 학·지구물리학도 함께 취급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학’(地學)으로 불리다가 1976년 지구과 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 지구인문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발 들여놓고 있는 필자는 웃으면서 말 했다. 딱히 반대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좋은 대비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공통분모로서 의 지구를 잠시 소거(消去)한다면 ‘과학’과 ‘인문학’의 대비 정도가 되는 셈이다.6)

지구과학이 다루는 범위가 아주 넓듯이[지구과학에는 지질학·기상학·천문학이 포함되며, 해양 학·지구물리학도 함께 취급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지구인문학의 범위 역시 다양하다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실로 다양한 분야를 만날 수가 있다. ) 기존의 학문분과 이름 앞 에 ‘지구’를 붙인 경우도 있지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분야도 있다. 

각 분야별로 지구**학이 안겨주는 신선함과 충격이 한결같을 수는 없겠다. 그 분야 사정에 따라 서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면 정치학(Political Science) 분야에서 ‘지구정치학’은 어떨까. 아마 도 많은 정치학자들은 그게 뭐 그리 새로운 것이냐 하는 다소 시큰등한 반응을 보일는지도 모르겠 다. 왜냐하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정치학은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회 과학(Social Science)의 주요한 한 부문으로 존재해왔으며, 더욱이 현재 정치학 분야에는 국제정치

(國際政治, International Politics), 국제관계(國際關係, International Relations), 세계정치(世界政治, W orld Politics), 외교(外交, diplomacy) 분야, 그리고 관련된 과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UN, 국제 기구,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감안한다면야 … 이들 분야는 세계화 내지 지구화 시대의 도래 와 더불어 가장 활기를 띠고 있는 분야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 그와 더불어 다루는 소재에서도 새로운 요소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기후, 오염, 환경, 생태, 핵, 에너지, 정보, 과학기 술 등. 

따라서 관건은, 지구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구정치학이 이들 국제정치 등의 제 

분야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차별성의 문제라 해도 좋겠다. 나아가서 는 새로운 사유로서의 지구정치학이 기존의 정치학에 비해서 갖는 새로움과 그 존재 의의는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서 미리 조금 말해두자면 이러하다.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 치가 ‘개인’(Individual)과 ‘국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세계’(Wo

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면,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 모 두를 감싸 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 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 지 읽어가자는 것이다. 

Ⅱ. 지구와 인간 그리고 Anthropocene[人類世]

한자어로서의 지구(地球), 그 지구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무엇보다 지구라는 말에는 

무엇보다 ‘땅은 둥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인식 내지 세계관, ‘천 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되어 다”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 다. ) 그 점이 중요하다. 지구라는 말 자체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적인 천지관(天地觀: 천지코스 몰로지)과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래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세례 없이는 불가 능한 인식이라 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와서 서양의 과학

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전해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었다. 그러니까 16세기 이후에나 사용하게 된 말이다. 그가 편찬한건곤체의(乾坤體儀)(1605)에 “日球大於地球, 地球大於月球”[해(일구)는 지구보다 크고, 지구는 달(월구)보다 크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분명하게 ‘地球, 日球, 月球’라는 용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미 공처럼 둥근 존재로서의 지구, 그리고 그 지구는 해(일구)와 달(월구) 과 병칭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체(天體) 내지 우주(宇宙) 안에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의 안과 밖 그리고 경계가 동시적으로 상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전통적인 세 계관, 우주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좋겠다.

‘지구가 둥글다’[地圓]는 인식은 ) 자연스레 지구가 움직이며 그것도 스스로 돈다[地轉]는 주 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전설(地轉說)은 김석문(金錫文, 1658~1735)과 홍대용(洪大容, 173

1~1783)에 이르러 명제가 되기에 이르렀다.11) 이에 대해서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지구전요(地球典要)(1857년)라 하겠다.12) 책 제목에 지구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지구를 태양의 둘레를 공전 하는 하나의 ‘행성’(行星, planet)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과 관련해서 1)오랜 전통을 가진 천원지방(天圓地方)적인 인식에 대한 단절이 있었다는 것, 그 연장선 위에서 2)1857년에 간행된 최한기의 지구전 요(地球典要)를 하나의 의미 있는 시대적인 포인트(지표)로 삼고자 한다. 이 말은 동아시아의 전통 적인 사유 혹은 그 전환기에 등장했던 복합적인 사유에로의 단순한 회귀 혹은 무비판적인 미화(美化)를 경계하고자하기 때문이다.     

‘지구’ 자체를 하나의 단위로 바라보게 되면, 그와 더불어 그 경계와 바깥 역시 설정되지 않 을 수 없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하나의 푸른색 대리석’(A Blue Marble)처럼 보인다고 한

다. 언제 우리는 지구를 느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웹툰, 영화, SF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 예컨대 우주 바깥세계(外界)에서 날렵한 우주선을 타고 무자비하게 지구를 침략해 오는 행위에 대해서 맞서는 ‘지구방어사령부’,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낯선 외계의 생명체를 

만나게 될 때[예컨대 오래 전에 제작된 영화 ‘E.T. - The Extra Terrestrial’ (1982) 같은 것]가 아

닐까 싶다.13) 개인적으로 SF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AD ASTRA’(2019)14), 죠지 클루니가 감독으로 주연까지 맡았던 영화 ‘The Midnig ht Sky’(2020)15) 등을 흥미롭게 보았다. 

영화 ‘The Midnight Sky’에서는 지구는 이미 재앙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으며 더 이상 지구에 서는 미래가 없다는 설정이다. 지구위험시대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해도 좋겠다. 북극에 마지막

 

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井蛙夏蟲之見’(우물안의 개구리나 여름 벌레와 같은 소견)이라 했다.

11) 김석문은 역학도해(易學圖解)(1697년)에서 지구가 구형이며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의산문답(毉山問答)(1766년)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2) 중국에서 전해진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寰志略 등을 기초로 편집했다. 우주계의 천체와 기 상, 지구상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다루었다. 1719년(숙종 45)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신유한(申維翰)의 해 유록 海遊錄도 참조했다. 13권 7책. 필사본. 본문 12권과 지도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목차에 이 어 천문·지구·조석, 대륙별 총설 및 국가별 지지, 해론(海論), 중서동이(中西同異), 전후기년(前後紀年), 양회교문변(洋回敎文辨), 역상도(曆象圖)와 제국도(諸國圖)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13)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강원도 4개 지역에서 미확인물체(UFO)가 나타났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 다.

14) 라틴어 ‘AD ASTRA’는 ‘To the Star’(별을 향하여)라는 뜻이다. 로이 맥브라이드 소령(브래드 피트)는 20년 전에 해왕성으로 생명체를 찾아 떠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우주로, 해왕성 으로 떠난다. 아버지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성, 토성을 지나 해왕성으로 가면서 그는 많은 생각 을 한다. 특히 아내 이브에 대해서. 아버지는 살아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자는 권유에도 아버지는 생명줄을 끊고 우주 속 심연으로 사라진다. 영화가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는 별들은 아름답고 섬 세하지만 아직은 인류 이외의 지적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로 돌아온 로이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해 살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던 아내 이브를 다시 만난다.

15) 영화의 토대가 된 원본의 제목은 Good Morning, Midnight. 브룩스돌턴(Lily Brooks-Dalton)/이수영 역, 굿모 닝 미드나이트, 시공사, 2019년.

으로 남은 천문학자 오거스틴은 우주로 갔던 사람들의 지구 귀환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 주선에 탄 사람들은, 그럼에도 굳이 지구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지구의 식민지별[K-23, 목성] 로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지구과학에 천문학이 포함되었던 것처럼, 지구인문학에도 천체와 우주 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인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인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우주 혹은 천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지구라는 행성을 실제로 하나의 단위 혹은 전 체로 볼 수 있는가,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지구의식’

(地球意識, global consciousness), ‘지구성’(globality) 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뒤에서 말하

겠지만) UN이나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그 같은 지구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 지구성을 구현해내고 있는가 식의 물음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 다시 말해서 ‘지구의 울부짖음’ )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구위험시대’  )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혹은 상상력)을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또 필요한 작업이 기도 하다. 

그런 작업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①지구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 즉 ‘Living Eart h’(살아있는 지구)로 보려는 시도 ), ②지구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지구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 ), ③지구를 ‘성스러운 공동체’  ), 나아가서는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까지 말하게 되었다. 

필자로서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려는 시각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즉각적으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과 그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나아가 성스러운 공동체 내지 공경하는 신앙이라면 과 연 누가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제일 먼저 ‘인간’(Human Beings)을 떠올리면서 ‘지구인’(地球人), ‘지구시민’(地球市民), ‘행성시민’(行星市民)을 말할 수 있겠다. ) 그러면 같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 Beings)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 인간과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 그들은 평등한가. 그렇다, 모든 만물을 평등 한가, 萬物平等? 그들 두 범주 사이에,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들만의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지구 민주주의’(Global Democracy)가 가능할 것인가.  

이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자리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와 관련해서 나름대로 참고

가 될 만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첫째는 the Anthropocene(the Age of Humanity), 즉 인류세(人類世) 또는 인신세(人新世)에 대한 논의라 하겠다.24) 인류세(人類世)는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 이후를 별개로 분리 한 비공식적인 지질 시대를 가리킨다. 2만 년 전부터 흔히 ‘홀로세’(Holocene)라 하지만, 그 시대 를 비공식적으로 다시 구분한 것이다.25) 최근 들어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인 만큼 아직 정설(定說) 은 없는 듯하지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하다고 하겠다.26) 요컨대 인간이라는 한 종이 지구 상의 다른 종들을 압도해서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미 있는 논의라 하겠다.27) 

덧붙여둔다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했음을 자각하고 지구 환경을 오래토록 지속시키기 위해서, 데이비드 그린스푼(David Grinspoon)은 ‘Terra Sapience’라는 용어/ 개념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말의 구조로 본다면 ‘Homo Sapience’에 대비되는 듯하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한다면 ‘현명한 지구’(Wise Earth)28) 정도가 되겠다. 거기에 걸맞는 인간으로의 변신(?)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29) 

둘째로, ‘인간’(Human Beings)과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 Beings) 사이의 관계 여하 와 관련해서, 필자가 떠올렸던 영화는 다름 아닌 ‘혹성탈출(惑星脫出)’[Planet of the Apes, 1968] 이었다.30)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Pierre Boulle, 1912~1994)의 SF 소설 La Planète des Singes(1963)

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른바 혹성탈출 시리즈 영화가 만들어졌으며31), TV에서 

 

생’(一切衆生)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4) 인류세의 개념은 노벨 화학상 수상사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대중화시켰다. 그 기원을 산업혁명에서 찾기도 하고, 핵실험이 처음 실시된 1945년을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방사능 물질, 대기 중의 이산화탄 소, 플라스틱, 콘크리트 등이 대표적인 물질로 꼽힌다. 한 해 600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고기, 그 닭뼈를 인류세의 최대 지질학적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25) The Anthropocene is a proposed geological epoch dating from the commencement of significant human impact on Earth's geology and ecosystem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anthropogenic climate change.[https://en.wikipedia.org/wiki/Anthropocene] 

26) Steve Bradshaw, Anthropocene: The Human Epoch(2015) [다큐멘타리]  www.anthropocenethemovie.com;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인류세」(2019);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Anthropocene):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정서진 옮김, 서울: 이상북스, 2018.

27) '인류세 ANTHROPOCENE_Save Our Planet', 이는 (재)대구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2021 년 첫 기획 전시로 내세운 타이틀 이기도 하다. 2월 16일부터 4월 11일까지 개최. 내외뉴스통신

(http://www.nbnnews.co.kr) 

28) Terra는 흙, 땅, 대지 등의 뜻을 갖는다. 어원은 라틴어 terra(지구, 땅, 육지). SF에서 지구인을 뜻하는 Terra는 거기서 파생되었다. 

29) David Grinspoon, “Welcome to Terra Sapiens,” [Excerpted from the book Earth in Human Hands by David Grinspoon. Copyright © 2016 by David Grinspoon.] 그는 ‘mature Anthropocene’라는 표현도 쓰 고 있다. https://aeon.co/essays/enter-the-sapiezoic-a-new-aeon-of-self-aware-global-change 30) ‘행성탈출’이 바른 번역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猿の惑星(원숭이의 혹성)’으로 번역되었다.

방영되기도 했다(1974년 등). 그러다 2001년 리메이크되었으며[Planet of the Apes(2001)], 2011년부 터 리부트(reboot)되어 인기를 끌었다.32)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1968년 첫 작품이었다. 인간의 퇴화와 유인 원(원숭이)의 진화, 그리고 말을 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유인원의 위상 등은 아주 낯설고 흥미로 웠다. 1960년대 처음 등장한 ‘핵 공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게다가 마지막 장 면, 그 정체불명의 혹성(행성)이 알고 보니 다름아닌 지구였다는 설정은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테일 러는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는 거침없이 분노를 내뱉는다. 디스토피아적인 극한 상 황을 통해서 지구를, 지구의 미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Ⅲ. 지구정치, 지구정치학, 지구공동체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서 우선 지구정치, 지구정치학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나온 사항들을 간략하

게 검토하고, 이어 그들을 토대로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1) 지난 2002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가 편찬한 21세기 정치학대사전(Encyclopedia of politica l science)(서울: 아카데미아리서치, 2002)에는 ‘지구정치[global politics, 地球政治]’라는 항목이 나온다. 이 글의 관심사와 관련된 주요 부분만 살펴보기로 한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정치라고 하면 주권 국가 단위의 정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전쟁 은 국가 간의 전쟁이며, 경제발전은 저개발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라는 국가 단위의 발전이며, 민 주주의는 국가 내의 민주주의였다. 정치학은 따라서 국내정치를 축으로 구성되었다. … 지방정치는 국내정치의 하부 단위이며,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의 파생물로서의 상부 단위였다. 모두 국내정치를 기본으로 정치학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21세기가 됨에 따라 지구정치가 보다 중요한 단위로서 정치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몇 가지 의 요인이 그것에 공헌하였다. 군사기술 수준의 진보로 국가 안전보장에 이어 국제 안전보장, 지구 적 안전 보장, 공통 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졌다. … 경제가 1국 단위의 국민경제에서 국가 간의 국제경제 더 나아가 세계시장을 단위로 한 세계경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내정치를 축으로 한 견해에 이어 지구정치를 축으로 한 견해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 정치의 조직 원리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완만한 넓은 정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도 과반수의 국가에 있어서 공통가치, 공통규범이 일정의 현실이 된 것이다. 여기에 지구정치의 중요성이 증가하게 되었다. 지 구적 민주주의가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여 비정부기구나 비정부 개입을 구성 원 소로 함으로써 지구정치로의 계기는 더욱 강화된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마찬가지)

 

31) Planet of the Apes(1968),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1970), Escape from the Planet of the Apes(1971),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1972),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1973). 

32)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2011)], 「혹성탈출: 반격의 시작」[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2014)], 「혹성탈출: 종의 전쟁」[War for the Planet of the Apes(2017)]

종래 정치는 ‘주권 국가’ 단위의 정치가 핵심에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그 하위 단계에 

있는 지방정치,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국제정치가 포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에 접어들면서 ‘지구정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요한 요인으로는 군사기술의 진보 로 인해 “국제 안전보장, 지구적 안전 보장, 공통 안전보장”이 부각되었다. ) 그런데 그것은 경 제적인 측면, 즉 국가경제를 넘어서는 세계경제가 두드러진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국 경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혹은 넘어서는 ‘자본’의 실체와 움직임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 하다. 

“지구정치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하다. 안전보장에 대해서는 국가 안전보장이 계 속 기본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지구 규모의 공통 안전보장을 구상하는 시점 그리고 지구상, 특히 많 은 제3세계 제국의 파탄국가라고 불리는 현상 등 무정부 또는 지속적인 혼란이 예상되는 시점이 있

다. 첫째는 웨스트팔리아적 시점에서 국가주권이 축이 되고 있다. 둘째는 필라델피아적 시점에서 국민주권이 축이 되고 있다.  국가는 없고 오히려 국민 개개인에게 주권이 있다는 생각으로 민주주 의국가는 그 원초적인 형태가 된다. 궁극적으로는 지구 민주주의로서 지구 단위의 개개인을 축으로 한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시점이다. 셋째는 글로벌리제이션에 억제된 형태로 파탄국가, 파탄사회가 생성된다는 시점에서 주권이 국가에 대해서도 국민에 대해서도 상실된 것이라고 한다. 때로 반유토 피아적 시점이라고 한다. 그 귀결로서 지구상에 항상 무정부, 무조직 상태가 나타난다는 견해이다. … 통치에 대해서는 국가 단위의 민주주의, 권위주의, 기타의 통치형태가 공존하고 민족주의가 계 속 중요하다는 시점, 지구 시민을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시점 그리고 혼란과 분쟁이 항상 존재하는 속에서 종교, 인종, 언어 등의 대립이 극대화한다고 생각하는 시점이 있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

)

사전에서는 국제정치와 지구정치라는 용어를 같이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정치 논의를 보면 ‘국가주권’, ‘국민주권’, 그리고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인해 주권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것 등을 보면 역시 ‘국민국가’가 근간에 강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지구민 주주의’와 ‘지구시민’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지구정치는 국제정치와는 구별될는지 모르지만, 이 항목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세계정치’(World Politics)와 거의 겹쳐지는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인용문에서 ‘지구정치’를 ‘세계정치’로 바꾸어 놓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겠다.          

(2) 지구정치와 지구정치학에 대해서 정치학 분야에서, 그리고 한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도 주목 하고 해왔다고 하겠다. 그 흐름을 다 다룰 수는 없는 만큼, 구체적인 사례를 두엇 살펴보고자 한 다. 

①한국의 대표적인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교수  )는 이미 ‘지구정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21세기를 앞둔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등을 면밀하게 논의한 글들을 모아 탈근대 지 구정치학(나남, 1993)이라는 단독저서를 내놓았다. 그는 기존의 국제질서, 세계질서에 대응해서 ‘신국제질서’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나아가 그의 관심은 지구적 민족주의, 지구 민주주의, 탈근 대 지구문화, 지구환경, 페미니즘적 국제관계론 등에 미치고 있다. 1993년이란 시점에서 이미 ‘지 구정치학’이란 용어와 함께 경제, 과학, 기술, 환경, 페미니즘 등에 주목한 선구적인 업적이라 해 야 할 것이다.35)

국제정치학자로서 인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국제정세 관련 칼럼 등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그는 그 후에도 많은 책들을 내놓았지만, 거기에 ‘지구정치학’이란 용어를 다시 쓰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세계정치’는 계속해서 쓰고 있다. 그가 공편(共編)한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한울아카데미, 2012), 그의 세계정치 강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는사랑의 세계정치: 전쟁과 평화(한울아카데미, 2019) 등이 나름 물증이 된다고 하겠다. 세계정치 강의에서 그는 ‘복합세계정치학’ ‘꿈의 세계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② 독일의 학자 바이체크(Ernst Ulrich von Weizsäcker), 그는 1989년 내놓은 저서에 Erdpolitik[Wi 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정치학자는 아니지만, 정치학자 보다 더 정치적, 정치학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Earth Politics’가 되며,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었다(1994). 그런데 그 책에서 그는 앞 으로 다가올 세기는 ‘환경의 세기’(Jahrhundert der Umwelt)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경제활동을 떠받쳐주고 있는 자연자원의 수탈이 머지 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환경독 재와 같은 강제적인 수단이 아니라 시장 메카니즘을 통한 ‘효율혁명’(Effizienzrevolution)을 제시 하고 있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환경 문제 제기와 해결책에 대한 사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 제목을 ‘지구환경정치학’이라 붙였다. ) 우리말 번역자는 ‘환경’이란 단어를 넣어서, 그 초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정치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acker, 1920~2015)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독일 의 범국민적 환경보호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구자원에 대한 광범위한 생태학적인 조 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다. 21세기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환경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과 지구의 정치학이라 해도 좋겠다. 그에 힘입어 독일에서는 ‘지구정치학’이 환경보호와 보존 운동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라 하겠다. ) ③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부하고 가르친 정치학자 드라이제크(John S. Dryz ek)는 1997년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The Politics Of The Earth: Environmental Discourses(Oxfor d Univ. Press, 1997)를 간행했다[2012년 제3판]. 직역하자면 ‘지구(의)정치학: 환경담론’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책 역시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번역자는 ‘지구환경정치학 담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38)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주요한 환경 담론들의 기본 구조와 그 담론들의 역사, 논쟁점, 그리고 변화하는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지구의 한계상황을 지적하면서 환경 문제 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전개해간다. 그리고는 지속가능성과 생태 근대화, 그리고 녹 색주의와 생태민주주의까지 언급하고 있다. 잘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드라이체크의 책과 바이체크의 책 번역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모두 ‘지구정치학’으로 직역하기 보다는 ‘환경정치학’이라는 측면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지구정치학은 아직은 낯설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면 깊은 곳에는 정치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환경에 대한 담론 분석과 비판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④ 최근에 소개된 프랑스 사회학자,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저작 역시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39) 이 책의 프랑스 원제는 Où atterrir?  직역하자면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이다[그가 쓴 다른 책 제목은  Où suis-je?(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짧지만 함축적이다. 그런데 영어 번역판의 경우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라는 제목을 붙였다.40) ‘the New Climatic Regime’이라는 구절이 시선을 끈다.41) 우리말 번역에서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라는 제목을 붙였다.42) 역시 기후, 환경에 일차적인 초점 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이렇듯이 이미 정치학 분야와 인접 관련 분야에서 기후변화(온난화), 환경, 대기오염, 생태계 

 

맡아오면서 실용적인 생태학적 정책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그 연구소를 막강한 시민단체로 키워냈다. 

38) 존 S. 드라이제크, 지구환경정치학 담론, 정승진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05. 

3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서울: 이음, 

2021. 

40) Bruno Latour,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 Polity Press, 2018. 

41)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역시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 바 있다.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홍욱 희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09. 원서 제목은 Politics of Climate Change. 

42) 그가 말하는 ‘신기후체제’(New Climatic Regime)는 기후 위기뿐만 아니라 점점 더 심화되는 불평등, 대 규모의 규제 완화, 악몽이 되어가는 세계화로 인해 지구에 각종 위기가 엄습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따라 서 그에 걸맞는 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세계나 국가를 향한 정치가 아니라 지구를 향하는 정치 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활동을 위해 무한한 자원을 공급하는 자원의 보고가 아니 다. 오히려 그 행성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행위자 중 하나라고 한다. “세계나 국가를 향한 정치 가 아니라 지구를 향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동의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개인’까지 포함해서 논의하고자 했다.

등에 주목하면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환경정치(학), 생태정치(학) 등으로 범주화하려는 지 적인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 그같은 선구적인 작업들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 구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비판적인 논평을 가해본다면 대부분의 논의들은 ‘the Politics of 

*******’(예컨대 Climate Change, Environment, Ecology, etc.)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굳이 표현해본다면 ‘the Politics of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 다. 비유하자면 예술(의) 철학, 음악(의) 철학, 정치(의) 철학 등에 대응해서 마치 ‘철학(의) 철학’ 을 제기하려는 것과도 같다. 요컨대 정치의 본질적인 핵심과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정 치학’이라는 용어는 같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담기는 내용까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 이후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치가 ①‘개인’(Individual)과 ②‘국 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③‘세계’(Wo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 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 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들 모두를 감싸 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 까지 충분히 읽어가자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국제화 → 세계화 → 지구화’ 순으로 등장했

지만, 그리고 지구인문학을 말하는 이 시점에서도 강력 강력한 단위는 역시 ②‘국가’라 해야 할 것이다. 그 국가는 기원을 따져보자면 서구 유럽정치사에서 일정한 단계에서 등장한 ‘국민국가’ (Nation State, 國民國家)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 그것은 ‘주권, 영토, 국민’을 요소로 하는 근 대국가이기도 했다. 서구 세계의 팽창과 더불어, 넓어진 근대세계시스템(the Modern World System) 안에서 국민국가는 ‘표준’이 되었으며 ), 그것은 비슷한 국민국가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 즉 

‘국제관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 그러니까 inter-states, inter-nations(i nternatrional)을 가르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성립에는 ‘폭력’(violence)이 수반되 는 것이 보통이었다. ) 또한 그와 관련된 국가들 사이의 행위는 Diplomacy로 불리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서 국가 멤버십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아무리 훌륭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할지라도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구의 식민지, 반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출발점에서 이미 ‘서구 중 심주의’가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사회에서 그런 국가, 국제사회 관념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세계관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말 등장한 말들이 國家間交際 → 國際, 外國交際 → 外交 등이었다.49) 시기적으로 ‘국제’ 보다 늦게 등장한 ③‘세계’(世界, 

World)는 그런 국가들 전체(혹은 그 일부)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50) 단적으로 제2차 대전 이후에 등장한 ‘제3세계’라는 말도 그렇다. 흔히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1, 2차 세계대전(World War), 국제연맹(國際聯盟), 국제연합(國際聯合), 을 들 수 있겠다. 지금도 국제법, 세계기구 운운 하 지만 결국은 개별 국가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이 단적으로 그렇다. 이는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도 확인되고 있다. 단적으로 지구 전체를 커버하는 ‘지구의식’(Global Consciousness)이나 ‘지구 성’(Globality)이란 측면에서는 역시 미흡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지구’(地球, globe)는 그런 세계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특히 방편으로 지구 바깥에서, 우주에서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행성’(planet)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정치에서 지구 정치에로의 이행’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면 ① ‘개인’(Individual)은 어떠한가.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개인’은 근대국가, 국민국 가의 출발점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의 기원설화라 할 수 있는 ‘사회계약설’(Social Contract Theo ry)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현실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대국가의 정치질서 를 창출해낸 작위(作爲)의 주체라는 것, 요컨대 국가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은 그로부터 창 출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선언한 나는 이미 한 사람(一人), 자 신(己)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 때의 개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이 른바 ‘절대 개인’을 상정한다. 그들끼리 계약을 맺어 사회를,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식으로 이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51)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따라붙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한 ‘개인 중심주의’,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로 이어졌다. 인간의 ‘오만’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 교회, 공동체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상정된 것이다. 욕망의 긍정과 이기적인 인간, 유대를 모르는 인간, 전통과 

 

‘Ainu Mosir’(2020)도 재미있게 보았다. 

49) 그 후에 등장한 비슷한 구조를 갖는 말로는 interdisciplinary의 번역어로 자리 잡은 學際間을 들 수 있겠

다. 19세기말 식으로 말하자면 學問間交際를 줄인 말 정도가 될 것이다.

50) 물론 ‘世界’라는 한자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三千大千世界’가 좋은 사례라 하겠 다.

51) 이에 대해서는 김석근, 「근대 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하영선외,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9; 김석근,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그 주변: 독립신문을 통해서 본 ‘주 체’와 ‘작위’의 문제」, 한국정치학회․한국정치평론학회 연례학술대회 발표논문, 2004년 12월 3일 참조. 

신성함을 잃어버린 인간,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비쳐지기 시 작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은 종래의 근대 정치학, 국제정치학의 요소들[개인, 국가, 세

계]의 의미를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엮어온 그물망에서 벗어난 측면들에 주목하면서, 미시적으로는 ‘정치’ (따라서 인간) 개념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지향하고자 한다. 동시에 거시적 으로는 ‘지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지평을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근대 이 후 지금까지 군림해온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 대안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 현단계에서는 챠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가 말하는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인 사고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 인간중심주의를 상대화시키는 Non-anthropocentr ism! 그리고 ‘전체로서의 지구’라는 차원에서는 역시 ‘지구의식’과 ‘지구성’을 갖춘 ‘지구 공동체’라는 인식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성스러운 공동체로서의 지구, 신앙 대상으로서의 지구 는 더 멀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과 어떤 ‘비인간 존재’가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 지구중생(地球衆生), 과연 그들은 서로 평등한가, 그리고 그들 사이의 민주 주의는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앞으로 더 생각해가야 할 과제라 하겠다.   

      

Ⅳ. AD TERRA POLITIKA: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지금까지 논의해오는 과정에서 필자가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지향하는가 하는 점은 대략 드러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가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은, 적어도 한국에서의 지구정치학은 우선 ‘지구’라는 관 념, 다시 말해서 천원지방(天圓地方) 세계관을 넘어선 지구, 그리고 스스로 구르는[自轉] 지구라는 생각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그리고 하나의 방편으로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준거 지점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둘째 서구 유럽에 의해 주도된 근대세계, 그 리고 주요한 정치단위로서의 개인, 국가,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근대적인 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국제정치학의 의미와 성과를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국제정치학 분야의 경우 국가와 세계(국 가간 체계)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셋째 글로벌라이 제이션과 더불어 지구 전체를 감싸 안으려는 지적인 시도, 그리고 우주 내지 태양계라는 시야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행성’(Planet)이라는 시각과 움직임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 Terra Sapiens[Wise Earth]를 지향하고자 하며, 그런 거시적인 틀 안에서의 Terra Politika[Earth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다. 그와 더불어 지구인, 지구시민, 행성시민, 지구중생, 나아가서는 일체중 생 등의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가 지구(地球)라고 할 경우, 크게 세 가지 차원을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Plane t, Globe, Earth. 논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 말하는 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은 지구라는 용어는 그들 세 차원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논의를 위한 방편으로 갈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1) Planet 차원, 이는 지구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라 해도 좋겠다. 우주 내지 태양계에 속 하는 하나의 행성으로 바라본다는 것. 해와 달, 수많은 별들과 대비되는 차원이다. 당연히 전지구 적 규모와 관점이 하나로 응집되어야 하겠지만, 아직은 미흡하기만 하다. 어느 별에선가 알 수 없 는 에일리언(Alien: 가공의 외계생명체)들이 지구를 쳐들어온다거나 하는 사태는, 아직까지는 닥쳐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럴 경우, 태양계에서 지구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 혹은 존재가 있는

가. 과연 현재의 UN(United Nations)이나 국제기구, 국제법 등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 ‘지구의식’(地球意識, Global Consciousness) ‘지구성’(地球性, Globality) 문제라 해도 좋겠다. 미지의 세계인 만큼 지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 요컨대 지구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Global Governance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2) Globe 차원, 이는 전지구적 규모, 다시 말해서 지구 전체를 감싸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Globalization을 하자는 것, 안으로 진정한 의미의 ‘지구성’(地球性, globality)을 확보해가는 것이 다. 그동안 소외/배제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음미와 포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

로 주목받지 못한 지식(Knowledge), 정보(Information), 지혜(Wisdom)를 모으고 응집시켜갈 수 있을 때 비로소 Wise Earth[Terra Sapiens]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다.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말해본다면 개인, 국가, 세계라는 근대 정치학의 주요 단위들의 ‘사이와 너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구 중심주의’ ― 오 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그 뒷면이라 할 수 있겠다 ― 에서 벗어나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전해지 고 있는 지적인 유산과 자원에 대해서 열려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대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되 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논의를 듣다보면 문득 전통시대 동아시아 사유체계를 환기(喚起)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구 유럽이 자신을 확장해서 세계의 ‘표 준’이 되면서 밀려나고 잊혀져온 동아시아, 이슬람권, 아프리카 등지의 오랫동안 축적된 지적인 사유와 세계관을 지구의 미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열어가는 지적인 자원, 내지 참고자료로 삼아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한 걸음 물러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 즉 천지만물(天地萬物)을 한 번쯤은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욕망을 새삼 되돌아보아야 한 다는 것이다. 인간(Human Beings)은 생각하는 존재,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근대 사회의 믿음은 그 이외의 나머지 생명체들(non-Human Beings)에 대해서 오로지 도구적인 존재, 다시 말해 인간을 위 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그로 인해 동물, 식물, 사물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 그리고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내지 공감대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큰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하지만 바야흐로 지구라는 같은 행 성 안에서 구성원의 일부로 살아가는 생명체[‘지구중생’(地球衆生)]라는 사실, 때로는 놀라운 것 으로 밝혀지는 그들의 지혜[예컨대 개미, 벌 등]도 우리 인간이 적절하게 참조한다면 Wise Earth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더 밀고 나가면 ‘일체중생’(一切衆生)[뭇삶들, 살아있는 모 든 생명체들]이란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한다. ) 

(3) Earth 차원은 그야말로 종래 지구과학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기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상 기후, 지구 온난화,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 해일 등,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른바 지구 위험시대가 온 것이다.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인류세」(2019) 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닭들의 행성’ ‘플라스틱 화석’ 등은 실로 끔찍하기만 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것은 Heaven(하늘)에 대비되는 Earth(땅)이라는 측면이다. 풀어서 말한다면 하늘[천국]과 땅 혹은 이 세상[세속], 그리고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는 하늘 [천국]의 존재를 되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자유, 그리고 계약이라는 사유가, 인간이 지구 에 존재한 이후 꾸준히 이어져온 Spirituality(靈性), Holyness(神聖), Dignity(莊嚴) 같은 숭고한 정신 적인 가치를 밀어내버렸다. ) 그 빈자리를 민주주의(democracy)가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20세기 의 신화(神話)가 되었다.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일 종의 레토릭으로 지나치게 남발,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 

바야흐로 ‘정치’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인 전환을 담아내는 새로운 정치학, 지구정치학이 필요

한 시점이라 하겠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치학에서는 인간을 ‘Zoon Politikon’(정치적 동물, Political Animal)로 간주해왔다. 인간은 폴리스(Polis)를, 정치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 이기도 했다. 그 말 자체가 인간을 가리켰으며, 또한 인간이 아닌 존재와 구별해 주는 특징으로 여 겨졌다. 그렇다,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정치적 동물이다. 변함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또 ‘Te rra Zoon’[Terrestrial Animal]이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여야 할 듯 하다. ‘지구[땅] 위에서 살아가 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것, 조금 더 부연하면 ‘지구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아가야 하 는 동물’이기도 한 것이다. ) 진정한 의미의 지구정치학은, 그리고 지구정치학자는 종래의 국제정 치, 세계정치 연구 성과를 기꺼이 참조해가면서도 전지구적인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지 섬세하게 읽어가야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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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29)

요약문   이 발표문에서는 21세기 이후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인 ‘존재론

적 전회(Ontological Turn)’의 연구사적 계보를 개략하고,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 논제 중 하나인 애니미즘의 탈근대적 회복을 재주술화(reenchantment)의 관점에서 논한다. 이 관점은 생명을 유기체의 물질적 활동으로 환원하고 정신을 그것과 대립하는 인간사고로 규정해온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작용은 정신과 물질을 횡단하며 ‘살아있음’의 경계를 생물학적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차 례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Ⅳ. 제언 및 과제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21세기 들어 인류는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더욱 노골적으로 목도하고 있다. ‘국익’을 명분으로 한 국지전쟁의 영속화,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대량실업 사태, 북극의 이상기온 현상과 북극곰의 멸종위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경파괴와 지구의 자정 능력 상실,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여성 등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의 일상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모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제는 지엽적인 자구책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으며, 근 대의 사고방식 자체에까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류학에서 서구중심의 근대사상에 대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 이래로 핵심적인 논제로 자리 잡

아 왔다. 일찍이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를 개척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근대유럽의 지식 및 제도가 과학기술의 보편성을 선취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만 독점적 으로 자연에의 접근법을 부여하고” 자기 이외의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혹은 서구적이 되어야만” ) 대상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생태 인 류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는 서구가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 체, 문화와 자연, 주체와 객체 등으로 사고의 영역을 이원화하고 자연을 객체화함으로써 인식론적 인 특권을 누려왔음을 논증한다. 그는 “서양 문화에 보증된 인식론적인 특권, 즉 자신이 규정한 자연으로부터 다른 모든 문화를 측정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제시되는 유일한 문화라는 특권”이 다 양한 곳에서 “환경의 특징과 그 환경에 대한 실천적인 관여의 특정 형식” )을 단지 인식의 문제 로 제한해왔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 지식이 서구중심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구 자신이 자연이라는 관념을 만들었으면서도 ‘절대적인 소여’로 간주하고 자연에 대한 접근방법론 으로서 과학에 우위를 두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분절하고 그사이의 관계와 실 천을 주체에 의한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 곧 서구에 지식의 패권적 지위를 보 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지구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과제가 인식 의 문제에서 관계와 실천의 문제로 되돌아가야 하며, 바로 인류학에서는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전회란 서구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을 지양하고 미래 인류의 대안적인 철학을 모색하는 학문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 운동이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학이 지난 20세기 서구중

심의 사고방식에 끊임없이 저항해왔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 출신의 학자가 비서구를 서구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인류학은 그 어느 학문분과보다도 서 구중심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인류학계에 유입되어 크게 유행한 포스 트모더니즘─대표적으로 조지 마커스의 ‘문화비평으로서의 인류학’을 들 수 있다.─과 포스트콜 로니얼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피식민자의 양가성으로 발전시킨 분과학문도 인류학이었다.─에 대해서도 서 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2014년 메릴린 스트 래선(Marilyn Strathern) 연례강연에 헌정한 논문(「누가 존재론적 늑대를 두려워하는가?(Who is Afra id of the Ontological Wolf?)」)에서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기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정리한

다. 첫 번째가 표상의 위기이다. 카스트루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민족지학에서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물(혹은 인간과 비인 간)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실재(혹은 개념과 대상) 사이에 전제된 인식론적 틀이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인류학계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서 빠져나와 사고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 스트래선의 증여의 젠더 The Gender of the Gift(1988)라고 말한다. 카스트 루에 따르면, 스트래선은 이 책에서 사회과학의 개념용어들(생산, 젠더, 권력, 부 등)을 사용하지 않 고서도 멜라네시아의 증여론을 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즉 멜라네시아에서 교환은 ‘객체적 인’ 경제적 상호작용이 아닌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의 전환이며, 외부자인 인류학자의 민족지 적 연구란 그러한 퍼스펙티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 ‘퍼스펙티브의 상호전환’이라는 주 제는 그로부터 3년 후에 출간된 부분적인 연결 Partial Connection(1991)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 며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계기는 과학기술학의 발흥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실험실 민족지’는 1977년 부터 2년간 ‘실험실’이라는 근대과학의 현장을 ‘오지’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연구자 들의 행위를 ‘원주민’의 낯선 문화를 대하듯이 관찰했다. ) 그 결과 그는 과학의 탈정치적 중립 성이 근대의 정치적 기획임을 밝혀내었다. 다시 말해 근대가 조장한 과학과 비과학의 대립은 과학 이라는 근대성에 포섭되지 않는 비서구의 타자들을 근대 바깥으로 밀어내는 ‘모델’에 다름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연)과 정치(사회) 간의 구획은 또 다른 더 큰 구획, 즉 ‘우리’와 ‘그들’,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 간의 구획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라투르는 과학과 비과 학의 구획을 폐기하기보다 그러한 구획에 의한 무수한 실천들을 다중화하고 대칭화한다. 이로써 비서구의 타자들은 자연을 잘못 표상하는 비과학적인 문화의 운반자가 아닐뿐더러 그 대안이기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계기는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지구적 위기상황이 만든 ‘시대정신(Zeitgeist)’과 공명한 다. 그것은 생태적 위기와 그와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는 경제적 위기를 넘어서려는 실천에 호응한

다. 인간중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세계를 종말로 이끄는지 모른다는 우려가 학문적인 가 능성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가 지구 행성에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지질학적 변형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지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질시대에 접어들 날 도 머지않았다는 의미에서 현세를 충적세 등과 같은 개념 수준의 ‘인류세(anthropocene)’로 칭해 야 한다는 논의가 지리학계를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또 프랑스의 사변적 실재론자인 퀑탱 메이야 수(Quentin Meillassoux)는 ‘선조이전성(l’ancestralit)’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반칸트주의의 가능성 을 탐색했다. ) 

이 의미에서 존재론적 전회는 일종의 ‘인류 재난의 경보장치’이다. 카스트루가 아메리카 원주 민의 존재론을 이론화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와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는 생 태적 파국에 대응하는 사고장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The Inconstan

cy of the Indian Soul(1992년)에서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론이 유럽의 사고방식에 내재한 세계종말의 위험성을 간파했음을 당시 유럽 선교사와 아마존 원주민의 만남의 순간을 통해 밝혀내었다. 요컨대 존재론적 전회는 “현상을 사물 그 자체와 분리하는 중대한 노모스의 소진, 자 연과학들과 문화과학들 간의 노동의 위계적인 구분의 파열, 나아가 (이론적인) 순수이성과 (도덕적

인) 실천이성 간의 균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근대적인 존재론―17세기의 과학 혁명이 만든 존재론―이 20세기 초의 과학 혁명에 의해 쓸모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 비 참한 결과로 끝날 것임” )을 자각하게 하는 인류학적 기획이다. 

이 기획은 마틴 홀브라드(Martin Holbraad)를 위시한 영국 사회인류학의 케임브리지 소장학파에 

의해 명시화된다. 홀브라드와 그의 동료들은 카스트루와의 협업의 성과물로서 2006년 사물을 통 해 생각하기 Thinking Through Things를 출간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존재론적 전회를 21세기 인 류학의 핵심적인 아젠다로 선언한다. 인류학계에서 ‘존재론(ontology)’이라는 용어는 어빙 할로웰

(Irving Hallowell)의 1960년 논문 「오지브와 존재론, 행위, 그리고 세계관(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에서 중요하게 언급했고, 그 외 과학기술학 관련 논문에서 종종 사용되어왔다. 그 러나 홀브라드 등이 말했듯이, 1980대와 90년대에 존재론을 둘러싼 연구작업들이 당시 포스트모던 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영미 인류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회인류학 분과에서 진행한 카스트루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코스몰로지(Amerindian Cosmo logy)>라는 특별연속강연에 참여한 학생들이 후에 괄목할만한 연구자로 성장하여 연구그룹을 형성 하면서 존재론적 전회의 진지를 구축하고 비로소 인류학의 지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지

금까지도 ‘조용한 혁명(A quiet revolution)’의 중심에서 그 흐름을 이끌고 있다. ) 

이제 서구와 비서구를 분절하고 비서구를 통해 서구 자신을 기술해온 20세기 인류학은 21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21세기 인류학에서는 ‘서구와 비서구’라는 관계항 이 더 이상 이론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 식이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인 징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모든 지역을 두루 섭 렵한 인류학의 학문적 역량이 ‘탈-비서구’라는 새로운 지식의 장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카스 트루에 따르면, 이러한 ‘탈-비서구’는 ‘안티나르시시즘’과 ‘사고의 탈식민화’를 경유한다. ) (비서구의) ‘타자’는 (서구의) ‘자아’의 표상―인식론적인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생성되 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되는 존재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들, 죽은 자들, 영들, 사물들까지도 저마다의 보편적인 세계―자연―속에서 누군가의 ‘타자’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타자의 학문’이란 단 하나의 갇힌 세계에 그러한 존재들을 표상으로 얽어매는 것이 아 니라 무한히 열려 있는 세계들―자연들―에 제각기 살아가는 존재들의 퍼스펙티브를 횡단하는 길 을 모색하는 것이다.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타자의 지위에서 본격적으로 탐색한 민족지적 연구로는 에두아르도 콘(Ed

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를 들 수 있다. 콘은 2013년 이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인류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2002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 책이 나오기까 지 10여 년간 단 네 편의 논문만을 제출했는데, 그중 2007년 논문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How Dog s Dream?: Amazonian Natures and the Politics of Transspecies Engagement)」외에는 주목받지 못했 다. 그런데 그의 첫 단독저서인 숲은 생각한다로 그는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으로 급부상 하게 된다. 

실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남다른 이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아마존 숲에서 1,100개 이상의 

식물표본과 그 외에 400개 이상의 무척추동물표본, 90개 이상의 파충류 표본, 60여 개의 포유류 표 본을 수집해서 에콰도르의 국립식물원과 동물학박물관에 기증할 정도로 다종다양한 생물종의 생태 에 누구보다도 박식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마존에 대한 그의 민족지적 관심은 인간에만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생태학적 전문지식과 연구 활동이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할 만큼의 

힘을 발휘하게 한 이론적 토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아마존의 생태계를 살아있는 기호들 의 장으로 구축하게 한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찰스 퍼스는 반데카르트주의자로서 데카르트에 기초한 근대철학의 사상적 전제와 문 제설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사고란 ‘내적인 관념의 지각’이 아니라 ‘기호 혹은 언어를 연쇄 적으로 창출하는 끝없는 추론 과정에의 참여’로 규정함으로써 실천―‘프라그마(pragma)’―에 의한 진리추구의 방법론으로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수립했다. 퍼스는 인간의 사고란 무한 히 이어지는 기호의 연쇄 과정이며 이 과정은 감각에 매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코기토로서의 ‘나’에 이르는 보편적 회의주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불과하다고 말한 다. ) 콘은 이러한 퍼스의 비이원론적 기호학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의 ‘사고’에까지 확대 적 용한다. 퍼스의 기호학이 ‘해석체(interpretant)’를 인간에 한정한 것은 아니지만 숲은 생각한다 에서만큼 비인간의 풍부한 사례들로 논증하지는 않았다.

콘은 에콰도르 동부에 위치한 아마존의 아빌라 숲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부류의 생명체들의 기호

과정을 ‘자기들의 생태계(ecology of selves)’로 엮어놓는다. 여기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까지 끊임없이 기호를 주고받는 ‘자기들(selves)’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은 정말 로 그렇다는 것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콘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 선 기호를 인간적인 것 너머로 확장한다. 퍼스가 기호를 아이콘(icon), 인덱스(index), 상징(symbol) 의 세 부류로 나누고 규약 혹은 관습에 의한 인간의 언어를 상징으로 정의했듯이 언어는 기호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만이 기호가 아니고, 기호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한다. 가령 닮 음의 기호인 아이콘은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이기도 하다. 아마존의 대벌레가 주변 식물과 구별되 지 않을 정도로 보호색을 띠는 것은 아이콘의 일종이다. 또 진드기에게 사슴이든 인간이든 낙산(bu tyric acid)을 풍기는 것이라면 다 같은 항온동물로 표상되는 것은 아이콘의 기호작용에 의해서다. 지시기호인 인덱스의 경우, 아마존의 흰털원숭이가 자신이 올라앉은 나무의 흔들림을 그다음에 일 어날 어떤 위험의 신호로 해석한다면 나무의 흔들림은 원숭이에게 위험을 가리키는 인덱스가 된 다. 이렇듯 대벌레, 진드기, 흰털원숭이 또한 기호의 해석체가 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 모든 부류의 기호가 ‘부재(absence)’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아이콘은 직관적으

로는 닮음의 기호이지만, 그것의 기호작용은 닮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닮지 않음의 부재에 의한 것이다. 진드기에게 사슴이 인간의 아이콘인 것은 사슴과 인간의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인덱 스가 현재 부재하는 미래의 사태 혹은 사건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인덱스의 기호작용 또한 부재를 포함한다. 흰털원숭이에게 나무의 흔들림은 그 후에 일어날 포식자의 공격이 현재 부재하기에 위 험의 인덱스일 수 있다. 자의적인 상징 표상인 언어 또한 부재로부터 그 의미가 만들어진다. 수많 은 음운의 부재 덕분에 발화되는 음운들에 의해, 대상의 물리적인 부재에 의해, 현재 부재한 미래 까지도 표상한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언어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부재는 생명 활동에 필 수적이다. 가령 대벌레가 아마존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변 식물과 덜 구별되어 잡아먹힌 자 신의 조상들 덕분이다. 즉 주변 식물과 구별되지 않는 대벌레의 보호색이라는 기호가 조상들의 부 재를 표상하기에 대벌레는 살아남았고, 흰털원숭이는 나무의 흔들림을 위험의 인덱스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이에 따라 ‘자기들’의 생명 활동은 생리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 든 단수의 개체이든 복수의 집합체이든 “무언가를 어떤 측면이나 능력에서 대신해 누군가에게 무 언가를 나타내는”(CP 2.228) 기호의 네트워크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가 위개미들은 일 년에 한 번 교미를 위해 각자 개미집을 떠나 일제히 이합집산한다. 이때 개미를 잡 아먹으려는 박쥐와 새는 개미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개미는 박쥐와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밤과 낮의 틈새에서 날아오를 적당한 타이밍을 노린다. 아마존의 원주민 또한 개미를 잡아먹 기 위해 날아오르는 개미들을 향해 ‘엄마의 부름’으로 들리도록 휘파람을 불어 개미들이 자기 쪽으로 모여들게 한다. 개미, 박쥐, 새, 인간 모두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서로의 기호를 알아듣고자 애쓰고 또 서로에게 기호를 전달하고자 애쓴다. 이처럼 자기들의 생태계란 농밀하게 직조되는 기 호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며, 이 속에서 생명은 기호적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자기가 또 다른 자기 의 기호를 알아듣지 못하면 곧 죽음에 이른다. 자기는 또 다른 자기의 기호를 알아듣기 위해 또 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아마존에서 인간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재규어 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봐야 하는 것처럼, 기호적인 생명 활동은 때로 종의 경계를 넘어 기호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반전시킨다. 이것이 아마존 숲에서 인간-재규어와 같은 변신(transmutation)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는 기호적으로 전향한다. 다자연주의 를 맨 먼저 제기한 카스트루는 모든 존재가 각각의 보편적인 자연─“육체에 각인된 기질의 산 물”─속에서 ‘나’의 퍼스펙티브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들은 “자기 음식을 인 간의 음식처럼 지각하고(재규어는 피를 마니옥 술로 보고,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 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본다), 신체적인 특성들(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신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으로 조직된다.” ) 여기서 ‘나’의 퍼스펙티브는 또 다른 ‘나’에게 부분적으로만 ‘타자’로 생성될 뿐이며, ‘타자’는 ‘나’의 퍼스펙티브로 파악되지 못한 나머지다. 

그런데 콘은 ‘나’의 퍼스펙티브가 신체로 환원되지 않을뿐더러 기호작용을 통해 또 다른 ‘나’의 퍼스펙티브와 교차 가능하다고 말한다. 허수아비가 옥수수밭을 해치는 흰눈잉꼬를 내쫓 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흰눈잉꼬에게 맹수로 보여야 한다. 실 제로 인간은 그렇게 허수아비를 제작해왔다. 흰눈잉꼬와 다른 신체를 가진 인간이 흰눈잉꼬의 퍼 스펙티브를 알 수 있는 것은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생명 활동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아마존 숲에서 펼쳐지는 종들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세밀하게 묘사하

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자기들의 생명 활동을 기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비인간도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었다. 이를 통해 근대를 떠받쳐온 인간 개념의 독점성 및 특권 성을 해체하고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한 인류학적 지위로 격상했다. 콘은 ‘타자’로서 충분한 자 격이 있는 비인간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 횡단하는지를 논파했다. 그런데 생명체의 기호작용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인류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근대에 의해 초자연의 영역으로 밀려난 주술화 의 세계를 복원한다는 것이다.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19세기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의 효과로서 전개된 “세계의 탈주술화”(Max Weber 1917)는 근대

의 지식 및 믿음체계에서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을 제거하 였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에 의하면, 이것은 20세기 근대학문의 어떤 난 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곧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모순을 불러일으킨 것인데, 이 모순 은 오귀스트 콩트에서 에밀 뒤르켐, 그리고 마르크 블로크의 아날학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프랑 스 사회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논제로 표출되었다. 즉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심성’이 어 떻게 사회적 실천에서 유효하면서도 그것과 모순적인 긴장 관계에 놓이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켁은 이 논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이데올로기로서 주제화되었고 미셸 푸코에 이르러서는 감 시 장치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켁에 의하면, 푸코조차도 감시 장치의 내부로 이동하는 ‘심성’의 방식과 그 구조적 효과로서 주체의 형태를 해명하지는 못했다. 

켁은 여기서 레비-브륄의 논의를 끌어와 감시 장치와 ‘심성’의 관계방식을 규명하고자 한다. ‘감시’는 전쟁이나 재해와 같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서 ‘관리사회’라고 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감시’를 둘러싸고 표출되는 심적 상 태는 레비-브뢸이 논한 ‘원시심성’의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에 상응한다. ‘감시’라는 훈육 장치는 매우 근대적인 시스템의 일부이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은 천재지변처럼 뜻하지 않은 위협에 대한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위협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 를 지배한다는 본래적인 두려움을 유발시키며 그에 대처하는 ‘원시심성’을 발동시킨다. )  

레비-브뢸은 보이지 않는 초자연의 영역을 자연적인 인과성으로 포섭하는 과정으로서 ‘원시

인’의 신화와 제의를 논했다. 여기서 신화와 제의는 신비적이고 직접적이면서도 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그러한 심적 일관성은 신화와 제의의 논리를 발휘시키는 ‘참여’에 의해 보증된다. )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가시화하는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 n)’는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토테미즘의 ‘야생의 사고’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다. ) 레비스트 로스는 ‘야생의 사고’가 “레비브뢸의 견해와는 반대로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적 판단에 의해서 움직이며 혼동과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별과 대립의 도움으로 기능하는 것”이라며 “양화된 사고(pensée quantifie)”임을 주장한다.13) 레비브뢸이 신화와 제의에의 ‘참 여’를 통해 가시화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역을 ‘원시심성’으로서 제기했다면, 레비스트로 스는 그것을 ‘차가운’ 이성의 논리로 개념화했다. 

콘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영역과 교차됨을 보이고 그 교차의 논 리를 ‘형식’(form)으로 개념 규정한다. 앞서 논한 퍼스의 기호학을 다시금 상기해보면, 아이콘으 로부터 인덱스가 창발하고 인덱스로부터 상징이 창발하며 그와 더불어 기호의 일반성 또한 창발한 다. 콘은 이 창발되는 기호의 일반성에서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 기호적으로 교차한다 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몽상이나 망상 속에서 숲의 영적인 주재자와 살아있 는 인간이 교차하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교차하며,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호의 일반성에 의해서다. 그리고 기호가 실재한다면, 기호를 배치하는 가능성의 제약(보이는 영역과 보 이지 않는 영역의 기호적인 교차)으로서의 형식 또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 자체 는 숨을 쉬지 않지만, 환경 세계의 자기-조직화의 계층적인 논리를 발생시키며 일정한 자기-조직 화의 패턴화를 창출한다. 

이 형식의 자기-조직화는 인간의 세계와 비인간의 세계를 총괄적으로 관통한다. 형식은 생명을 

넘어 창발하며 계층적으로 무한히 증폭된다. 물론 이 형식의 계층적 확산은 인간세계의 도덕적 가 치와 무관하다. 형식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역사의 우연한 산물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그 너머에 서는 신체들과 역사들의 우연성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죽은 자 와 숲의 영까지도 모든 부류의 기호적인 존재들은 도덕적으로 위계화되지 않으며 무도덕적인 형식 으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아마존의 샤먼이 상류에서 하류로 아마존의 강 길을 따라 수련 여행을 떠나는 것은 “다양하게 중첩된 형식들을 통합하는” ) 계층적 논리를 밟아감으로써 더 높은 수준 의 창발적인 영역─숲의 영적인 주재자들이 속하는 영역─에 이르기 위한 것이지 인간적인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숲의 영적인 주재자의 영역에서 역사의 시간은 형식에 의해 동결된다. ‘언제나 이 미’라는 무시간적인 영역의 내부에서는 인간적인 역사의 선형적 인과관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 다. 이 영역의 내부에서 신체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투과한 죽은 자들 또한 숲의 영들과 함께 영원 히 살아갈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영들은 선형적인 역사의 ‘지금 이 순간’ 부재하기에 ‘우리’ 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기호적인 실재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어우러져 살아 가는 자기들의 생태계, 죽은 자들과 영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숲의 보이지 않는 세계, 강과 땅, 경 제와 정치 등의 다양한 영역들은 기호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Ⅳ. 제언 및 과제

지금까지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배경과 주요 문제의식 그리고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 한다를 중심으로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생명-기호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

다. 그것은 21세기 인류학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출현과 보이지 않는 주술화의 영역의 도래로 특징지을 수 있다. 20세기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밀려난 주술의 세계 는 근대 너머로 확장되는 우주론(cosmology) 속에서 재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탈인간주의는 최근 1 0년간 세계적으로 여러 분과학문을 횡단하며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 인류학계 또한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다. 20세기 인류학의 지난 개념과 용어, 이를테면 문화 개념이나 타자 개념의 재고, 자문화와 타문 화라는 인식론적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민족지적 방법론의 개발, ‘우리’의 퍼스펙티브에 대한 안티나르시시즘적 접근의 고안, 20세기 한국 인류학의 사상사적 재평가 등등 이제까지 서구이론에 기대어 안주했던 한국 인류학을 통렬하게 자기비판하고 지금이라도 ‘우리’의 인류학을 모색해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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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라투르, 스티브 울거,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이상원 옮김, 파주: 한울아카데미, 2018.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서울: 갈무리, 2009.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박이대승, 박수경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8.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옮김, 고양: 사월의책, 2018.

찰스 샌더스 퍼스, 퍼스의 기호학, 김동식⋅이유선 옮김, 서울: 나남출판, 2008.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정지은 옮김, 서울: 도서출판b,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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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Descola, “Constructing natures: symbolic ecology and social practice”, In Nature and Society: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Philippe Descola and Gísli Pálsson (edits.), New York: Routledge, 1996.

 


 


8]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 -이원진*

 8]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홍대용의 자전설과 자법어물(資法於物), 라투르의 가이아설과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이원진*

26)

요약문   역사적으로 보면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

다. 갈릴레오 사건에서 보듯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 때 사회 전체 구조가 공격받았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변화를 맞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를 예상치 못한 방식 으로 바꿔놨고 또 한 차례 사회 구조가 전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구에 대한 관계 재설정을 통해 만물의 사 회정치적 질서를 혁신시킨 두 명의 사상가를 검토한다. 바로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 1783)과 지구 용어 대신 가이아 2.0 이론을 내놓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치생태학자인 브루노 라투르(Bru no Latour, 1947~)다. 홍대용은 김석문에게 받아들인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 바탕으로, 당시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 논쟁인 인물성동론(사람과 동물은 본성이 같다)과 성범심동론(성인과 범인은 마음이 같다)을 접합해 천시(天視)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 시로서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홍대용은 체용의 원리가 아닌 분합의 원리로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계열의 존재 구도를 수평적 구도로 전환코자 했다. 체용의 원리는 전체성의 사고를 촉발하지만 분합의 원리는 수평적이며 부분적인 작은 연결을 가능케 한다. 그는「의산문답」에서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는 관윤 자의 말을 인용해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고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의 관점을 제시한다. 사물이나 동물 등의 비인간이 인간의 배경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성을 갖고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는 인간을 천시한다는 서술은 오늘날의 신유물론적 입장에서 본 존재론적 평등론을 선취하고 있다. 이는 향후 동학의 경물(敬物) 사상의 원천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에 영향을 미쳐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 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중국과 이민족이 모두 하나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 화는 당시 시대의 사람과 자연의 연결망을 변혁하는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예측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는 지구의 움직임을 관찰해 얻은 시선과 관점의 ‘차이’의 발견으로 인한 전체성의 해체와 ‘부분’적 연결의 발견 이다. 한편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는 온전한 전체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부분 으로서도 충족적인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요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 로,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향하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인류세를 맞아 방향을 상실한 인류가 새 로운 공간 개념으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

 

*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CZ)’ 공간에서 새로운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의 지구를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생물 수프와 같은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간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 작품화 하는 민감성 높은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공간이다. 그는 이런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 등을 통해 우리 가 새로운 생명을 정의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정치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사상가의 지 구적 관점 전환은 동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 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 (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 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 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 계를 생략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 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 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 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를 보여준다. 이 두 사건의 비교는 인류가 과연 어떤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준다. 

차 례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Ⅲ. 맺음말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인물성동론, 성범심동론, 인물균으로의 이동 -

2021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낯선 흑백 영상이 관객을 맞는다. 을씨 년스런 제주 바람과 파도, 쉬지 않고 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솔숲이 병렬 스크린에 각각 투사된 다. 거기서 우리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며 남긴 ‘세한도’(국 보 제180호)를 만나기 전 그가 느꼈을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 교감을 7분 간 경험한다. ‘세한의 시 간(Winter Time)’이라는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의 작품은 당시 세한도 를 그린 김정희가 느낀 나무와의 연결망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한편 국악그룹 ‘이날치 밴드’는 최근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의뢰로 자신의 수궁가 앨범의 ‘의사줌치’를 개사해 후쿠시마 오염수 137만톤이 바다에 방류된 사실을 알리는 2분짜리 동영상 ‘후쿠시마 의사줌치 feat. 그린피스’를 만들었다. 이날치밴드는 <범내려온다>라는 한국 17세기 판소리 수궁가를 힙하게 개작한 한국관광 공사 홍보영상으로 2020년 전세계 2억뷰를 넘기는 쾌거를 달성한 밴드다. 이 그룹과 합작하는 앰 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무용수들은 후쿠시마 뒷산의 토끼가 돼서 바다와 함께 신음하는 지구 행위 자들의 막춤을 흥과 한의 몸짓에 담아낸다.

현대 문화현상은 이미 인간과 접하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의 재구축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손잡고 공동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다시 소환하는 문화적 원형은 한국의 전통문화다. 세한도가 그렇고, 판소리 수궁가가 그렇다. 한국의 전통에서 어 떤 요소가 특별하길래 21세기 인류세의 시대가 참조하고 있는 걸까. 오늘날 인류학이나 신유물론 전통에서 논해지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에 대한 동등한 연결은 어쩌면 조선에서 논해진 인물성동이 론에서 이미 배태했던 생각이 아닐까. 이렇게 연원을 이어가다 보면 인물성동론을 발전시킨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을 비롯한 북학파가 결국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없앤 인물균, 인물무분의 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판 존재론적 평등론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균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던 홍대용은 어떤 전환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1.  김석문의 지구적 전환과 중국중심주의의 해체 홍대용이 전개한 사상의 핵심은 인물중심주의의 극복인 ‘인물균(人物均) 사상’ 그리고 중화중 심주의의 극복인 ‘화이일야(華夷一也)론’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지전설’과 ‘무 한우주론’이라는 독특한 과학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각각 북학파의 심성론과 정치외교론, 과학론으로 발전된다. 홍대용의 과학, 철학, 사회 사상이 하나의 세계관 내에서 기존의 편협한 중 심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동등성을 일관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홍대용이 낙론계 속에서도 자 유분방하게 학술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의 충격에서 회복되긴 했어도 내적으로는 더욱 심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청 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자리 잡으며 북벌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청나라의 눈부신 문화 발전은 조 선의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또 대내적으로는 상업 발전을 통해 중인층이 크게 성장하 고 있었다. 조선 사회를 주름잡던 화이관(夷狄觀)이나 신분제 등의 기존 틀이 차츰 균열되어간 것 이다. 홍대용의 사상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발전된 천문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 다음 절에서는 홍대용 사상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지구적 전환을 통해 과학의 사회화, 가치도 덕의 자연화가 일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의미가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즉 홍대용을 통해 자연과 사회의 양분법이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그 이전까지 유지하던 성리학적 가치 개념인 性, 理, 本然, 純善 등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만물을 기의 자발적 이합취산을 통해 생겨나는 존재로 말하게 된다. 또 기의 응취로 생겨난 땅을 살아있는 활물로 말 하며 만물을 낳고 천리를 부여하던 천의 역할을 땅으로 옮긴다.2)

이 중에서 먼저 과학지식의 변화를 살펴보자. 홍대용 이전에 지전설을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김 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의 우주론은 김석문이 40세에 작성한 역학도해(易學圖解)에 그 림과 글로 상세히 정리돼 있다. 조선의 역학사에는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역학도설(易學圖

說), 선우협(鮮于浹, 1588∼1653)의 역학도설, 김석문의 역학도해 등 ‘도설(圖說)’ 의 전통이 있다. 그 중 김석문의 역학도해는 역학이 인간사만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포괄 하는 원리임을 도상으로 표상함으로써 역학의 범위와 내용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장 재와 소옹 등을 통해 얻은 전통 우주관에 더해 중국을 통해 수입된 서양 과학, 특히 티코 브라헤T ycho Brahe의 천문학적 지식을 결합하며 독자적인 점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홍대용의 스승이었던 김원행의 또다른 제자인 이재 황윤석(黃胤錫)은 김석문이 ‘지전론(地轉論)’을 전개했 다고 요약한다.3) 또 연암 박지원은 김석문의 우주관이 ‘삼대환부공설(三大丸浮空說)’이 핵심이라 고 강조하는데, 이는 “해·달·지구, 커다란 세 둥근 것이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이다.4)

장재(張載)는 “지구가 틀을 탄다”고 했고, 역지(曆指)에서는 “기(氣)와 화(火)가 하나 의 구(球) 를 이룬다”고 했다. 기화(氣火) 안에 있는 지구가 그것을 타고 있는데, 그것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와 함께 하나의 체(體)를 이룬다. 그러므로 지구 위의 하늘은 밖은 움직이고 안은 고요 하니, 지구가 비록 돈다고 하더라도 구름이 가고 새가 날며 물건을 던지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땅에서 조금만 위일지라도 모두 기가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왼쪽으로 도는 하늘만이 구름이 가고 새가 날고 물건을 던지는 것을 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이것은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는 것 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5)

그가 인식했던 하늘과 땅은 달랐다. 전통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정지해 있다는 ‘천동지정(天動地靜)’, 땅을 중심으로 우주의 외곽으 로 갈수록 점점 더 운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외질중지(外疾中遲)’였으나 그는 전통적 사유를 전 복했다. 대신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로 교체한 이후, 모든 천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한다 는 ‘우선설’, 지구가 1년에 366회 회전한다는 ‘지전설’, 우주는 동정이 없는 가장 외곽의 태극 천으로부터 중심부의 지구로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진다는 ‘외지중질(外遲中疾)’의 우주론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김석문은 서양의 지구설을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재해석해 조선 후기 우주 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홍대용은 분명 천문론과 우주론에서 김석문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전설’

 

2) 곽혜성, 「담헌 홍대용의 탈성리학적 사상의 형성-이기심성론에 따른 물의 담론 변화를 중심으로」, 철학 사상문화29호, 2019, 18쪽.

3) 頤齋集권6, 「書金大谷錫文易學圖解後」 참조. 

4)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1780년(정조 4) 중국 학인들과 대화 중에 김석문의 ‘삼대환부공설’을 소개한 다. 그는 “둥근 땅덩어리가 해‧달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떠 있다는 설은 김석문이 처음이고, 지구가 자전

한다는 설은 홍대용이 처음”이라고 했다.(열하일기, 「太學留館錄」 8월 13일) 5) 역학도해, 「總解」

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다,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논쟁인 인물성동론 을 접합해 천시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시로서 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김석문에게서 이뤄졌던 지구적 전환이 홍대용에게서 와서 정치생태적 전환에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던 역사를 예외없이 예증한 것이다. 인물균 사상의 파급 력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 에 영향을 미치며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화이일야’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 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화는 당시 시대의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함께 추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세종 때부터 추구됐던 조선만의 독자적 시간 에 대한 추구로 인해 중국과 차이나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던 차에, 지구자전설이 입증되 면서 이들 북학파에게 더 이상 전체성이나 통일성, 불변의 중심성 등이 의미없어졌다. 바야흐로 차 이의 존재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위계서열화된 가치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홍대용의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 지구는 스스로 돈다는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 우주 의 끝은 알 수 없다는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 중 앞의 2개 이론은 앞서 김석문도 제시한 것을 응 용한 것이나, 우주무한론은 홍대용만의 독창적인 주장이다. 기존의 이론틀에 매몰되기보다 새로운 관점주의를 펼침으로써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무한 우주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대수학·기하학 등 수학 전반을 정리한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고, 자신의 집에 ‘농수각 (籠水閣)’이라는 실험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해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홍대용의 자신감은 이런 실험실로부터 나온 실제적인 데이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2. 홍대용의 심성론, 정치외교론, 그리고 과학담론 그 중에서도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이 모든 지식들이 소개된 단편 소설로, 하늘의 입장에서 보

면 사람과 사물이 동등하다는 인물균 사상이 특징적으로 잘 소개, 제시돼 있는 대표적 저작이다.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그와 관련된 지구 존재자들의 관계를 뒤바꿔놓는다. 그것은 곧 사회 질 서의 혁명이다. 의산문답에서는 물(物)이 모두 57번 나오는데, 이 중에 인과 물이 합해서가 아니 라 별도로 논해지는 단락이 42번이다. 그만큼 사람으로부터 물이 별도의 존재자로 각광받아 등장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물의 존재론’을 본격화한 사상서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전환은 심성론에서부터 이어진다. 이는 인간과 사물은 구별 없이 모두 같은 성을 갖고 있다는 낙론계열의 ‘인물성동론’의 학풍 변화로부터 시작됐다.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의 호락논쟁(湖洛論爭) 중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관한 담론이었

다. 이 이론은 낙론계의 학자인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박윤원에서 홍대용, 박지원을 거쳐 박제가, 이덕무, 서형수 등으로 계승되는 학풍이다. 그 중에서도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수학했던 홍대 용은 물성에 주목하고, 물성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제시했다. 그는 인물성 담론에서 추 론된 인성과 물성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에 머물지 않고, 중화와 이적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의 준거로도 확장한다. 이 이행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홍대용의 심성론이 드러난 그의 초 기 저작 「심성문(心性問)」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홍대용은 리를 통해 인과 물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낙론의 인물성동론의 입장과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사람은 사람의 이(理)가 있고 물(物)은 물의 이(理)가 있다. 이른바 이(理)란 것은 인(仁)일 따름이다. 천(天)에 있어서는 이(理)라 하고, 물(物)에 있어서는 성(性)이라 한다. 천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고, 물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한다. 그 실은 하나이다. 초목(草木)도 전혀 지 각(知覺)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비와 이슬이 내리고 싹이 틈은 측은(惻隱)의 마음이고, 서리와 눈이 내리고 지엽(枝葉)이 떨어짐은 수오(羞惡)의 마음이다. 인(仁)은 곧 의(義)이고 의(義)는 곧 인(仁)이 다. 이(理)라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호리(毫釐)의 미(微)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요, 천지(天地)의 대 (大)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다. 보탤 수 없이 크고 덜 수 없이 작으니, 그 지극함인저. 초목(草木)의 이(理)는 곧 금수(禽獸)의 이(理)이고, 금수의 이(理)는 곧 사람의 이(理)이고, 사람의 이(理)는 곧 하 늘의 이(理)이니, 이(理)라는 것은 인(仁)과 의(義)일 따름이다. 호랑(虎狼)의 인(仁)과 봉의(蜂蟻)의 의(義)는 그 나타나는 곳에 따라 말함이다. 그 성(性)으로 말하면 호랑(虎狼)이 어찌 인에만 그치며, 봉의(蜂蟻)가 어찌 의에만 그치랴? 호랑(虎狼)의 부자(父子)는 인이고 이 인(仁)을 행하는 소이(所以) 는 의(義)이며, 봉의(蜂蟻)의 군신(君臣)은 의이고 이의를 발(發)하는 소이는 인이다.7)

하지만 바로 이후 저작인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 가면 홍대용의 물에 대한 논의는 「심성문(心性問)」과 사뭇 달라진다. 성에 대한 논의를 심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성인이나 범인의 마 음이 모두가 똑같다는 ‘성범심동설(聖凡心同說)’을 물에까지 연장시키고 있다. 특히 심의 영함에 있어서 물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범심론(汎心論)적 특성까지 보이고 있다. 

사람과 물의 마음이 그 과연 같지 않은가? 또 심(心)이란 것은 신명(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는 물로

 

7) “人有人之理 物有物之理 所謂理者 仁而已矣 在天曰理 在物曰性 在天曰元亨利貞 在物曰仁義禮智 其實一也 草木不可謂全無知覺 雨露旣零 萌芽發生者 惻隱之心也 霜雪旣降 枝葉搖落者 羞惡之心也 仁卽義義卽仁理也者 一而已矣 毫釐之微 只此仁義也 天地之大 只此仁義也 大而不加 小而不减 至矣乎 草木之理 卽禽獸之理 禽獸之理 卽人之理 人之理 卽天之理 理也者 仁與義而已矣 虎狼之仁 蜂蟻之義 從其發見處言也 言其性 則虎狼豈止於仁 蜂蟻豈止於義乎 虎狼之父子仁也 而所以行此仁者義也 蜂蟻之君臣義也 而所以發此義者仁也.”, 湛軒書 內集 1卷, 「心性問」

서 형상(形狀)도 없고 성취(聲臭)도 없다. 같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떨어지고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완전하고 어떻게 이즈러지는 것인가? 한 번 같지 않음이 있으면 이 마음이 기를 따라 체를 변(變)하니 영(靈)함이 일정한 근거가 없다. 일정한 근거가 없으면 지자(智者)는 우자(愚者)에 대해 서, 현자(賢者)는 불초자(不肖者)에 대해서 모두 같지 않을지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러므로 이르되 우(愚)는 기(氣)에 국한되고 물(物)은 질(質)에 국한되나 심(心)의 영함은 한가지라 한다. 기(氣)는 변 할 수 있어도 질(質)은 변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람과 물(物)의 다름이다.8)

홍대용은 여기서 물의 영함이 사람과 같은 것을 넘어 더 뛰어날 때가 있음을 오히려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홍대용의 사상은 물(物)에 대해 기존의 낙론과는 다른 접근으로 나아가기 시 작한다. 

이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일이 있되, 범[虎]은 반드시 자식을 사랑하고, 사람은 충성치 않는 일이 있지만 벌[蜂]은 반드시 임금을 공경하고, 사람은 음란함이 있되, 비둘기는 반드시 남녀간 분별이 있으며, 사람은 무턱대고 하는 일이 있되, 기러기는 반드시 때를 기다린다. 기린의 인(仁)함과 거북 의 영(靈)함과 나무의 연리(連理)와 풀의 야합(夜合)함이 비 오면 기뻐하고 서리 오면 시드니, 이 모 두 그 마음이 영(靈)한 것인가, 영하지 않은 것인가? 영하지 않다면 모르겠으나, 영하다 하면 사람에 비하여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혹 더 뛰어나다.9)

사물의 가치에 대한 존중은 향후 홍대용이 북경의 연행 경험 이후 집필한 의산문답에서 인간 이 자신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물로부터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이라는 관점으로 확장된 다. 인물성동론을 넘어, 물(物)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상호부조적이며 오히려 인간보다 낫기에 인 간이 차마 두려워하게 되는(경외하는) 측면을 보다 과감하게 말하게 된 것이다. 홍대용의 이런 관 점은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聖人師萬物)’는 관윤자에서 인용한 것10)이지만 그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신유물론자인 로지 브라이도티가 하고 있는 기존의 동물과 인간간의 경계인 조에(zoe)와 비오스(bios)의 경계를 타파하 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홍대용이 허자(虛者)라는 화자를 통해 검토했던 인물간의 경계는 비 오스를 넘어 조에의 생명력을 논하려는 브라이도티의 의견을 먼저 선취한 것이다. 

홍대용의 물론의 특징 중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과 물의 상호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성은 홍대용이 사람과 사물의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대한 검토를 거쳐 ‘인물균’에 이르

 

8)“人物之心 其果不同乎 且心者 神明不測之物也 無形狀無聲臭 雖欲不同 何離何合何完何缺 一有不同 是心逐氣變體 靈無定本 旣無定本 則智之於愚 賢之於不肖 皆不同也 此豈理也歟 故曰 愚局於氣 物局於質 心之靈則一也 氣可變而質不可變 此人物之殊也.”, 湛軒書 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9)“今夫人有不慈而虎必愛子 人有不忠而蜂必敬君 人有淫奔而鳩必有別 人有冥行而鴈必候時 麟之仁也 龜之靈也 樹之連理 草之夜合 雨而喜 霜而憔悴 此其心靈乎不靈乎 謂之不靈則已 謂之靈則方之於人 非惟不異而或過之.”, 湛軒書 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10)“關尹子曰, ”聖人師蜂立君臣, 師蜘蛛立網罟, 師拱鼠制禮, 師戰蟻置兵, 衆人師賢人, 賢人師聖人, 聖人師萬

物. 惟聖人同物, 所以無我.”,  關尹子, 「三極」

는 과정에서 인물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인물무분(人物無分)의 상태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발상이 었다. 상호성은 연결망을 뜻한다. 인과 물이 연결된 관계요, 서로 배워서 (침투하여) 생래적 결여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의산문답은 ‘인물무분’이라는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후 에 박지원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구별할 수 없다는 인물막변(人物莫辯)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물성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실옹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을 ‘하늘의 시점’이라고 했다. 하늘의 시점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을 주장할 때 각기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이 인물무분의 중요한 두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점이라 함은 기 존의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관점을 총괄하고 새로운 관점 차이를 도입하는 브라이도티식 조 에중심주의다.  

실옹이 고개를 들어 웃고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이구나 . 오륜과 오사는 사람의 예의고, 무리 지어 다니면서 나누어 먹는 것은 짐승의 예의고 , 덤불로 피어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다. 사람의 시점에서 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물은 천하지만 물의 시점에서 사람을 보면 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고 , 하늘의 시점에서 보면 인과 물이 균등하다.11)

지혜가 없으므로 오히려 속이지 않고, 깨달음이 없으니 오히려 꾸미지 않는다. 그러니 물이 사람보 다 귀한 것이다.…봉황은 천 길을 날고 용은 하늘에 있으며, 시초와 기장은 귀신과 통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재목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무리와 비교하면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한가? …대도를 해치는 것으로 자랑하는 마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 하게 여기는 이유는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 때문이다.12)

그래서 옛사람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지[資法於物] 않은 적이 없었다. 군신 간의 의식은 벌에서 취하고 , 전쟁할 때의 진법 은 개미에게서 취하 고 예절의 제도는 들다람쥐에게서 취하고 그물의 설치는 거미에게서 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고 한다 . 지금 당신은 어찌 하늘의 시점으로 물을 보지 않고 사 람의 시점으로 물을 보는가?”13)

홍대용의‘자법어물(資法於物)’과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聖人師萬物)’란 논의는 만물의 우 위성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특히 지구 생명의 입장을 서로 돕는 공생의 입장으로 봤다 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수직적, 위계적으로 변질됐던 성리학적 체용의 구조를 분합의 구조로 바 꿔 수평적 인식전환을 시도했다는 의미도 있다. 인현정은 여기서 홍대용이 적용하고 있는 ‘분합 (分合)’의 원리를 주목한다. “홍대용은 체용 구도가 아니라 분합의 구도로 전환했다”고 말하면 서다.14) 그는 홍대용의 분합구조는 리기에 대한 새로운 재편을 낳는다고 보고 있다. 애초 송대 신

 

11) “實翁仰首而笑曰, ‘爾誠人也.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 義也. 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12) “夫無慧故無詐, 無覺故無爲. 然則物貴於人, 亦遠矣.”, “且鳳翔千仞, 龍飛在天, 蓍鬯通神, 松栢需材. 比之人類, 何貴何賤?”“夫大道之害, 莫甚於矜心. 人之所以貴人而賤物, 矜心之本也.”

13)“是以古人之澤民御世, 未嘗不資法於物. 君臣之儀, 盖取諸蜂. 兵陣之法, 盖取諸蟻. 禮節之制, 盖取諸 拱鼠. 網罟之設, 盖取諸蜘蛛. 故曰, ‘聖人師萬物.’ 今爾曷不以天視物, 而猶以人視物也.”

유학자들이 요청한 체용구도는 사실상 리와 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였으나, 언어적 한계에 부딪 힌다. 예컨대 기존의 체용(體用)구조 속에서는 인의예지 중 ‘체’ 해당하는 인의 기준이 선재(先在)되어 ‘인’은 용(用)의 세계에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도체(道體)가 된다. 하지만 분합 구조 엔 그런 선후와 위계성이 없다. 체용이 수직구도에 결부됐다면 분합구조는 훨씬 더 수평구조 속에 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인현정은 홍대용이 四書問辯가운데 「中庸問議」에서 중용12·1 3장에 대한 설명한 대목을 제시한다.

생각건대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은’하다”라는 말에서 ‘은’은 ‘좁은 것[微]’와 ‘작은 것[小]’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의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천지에 대한 유감스러운 바’는 費다”라는 말에서 ‘비’는 ‘넓은 것[廣]’과 ‘큰 것[大]’을 의미한다 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큰 것을 말한다’와 ‘작은 것을 말한다’는 비·은의 뜻을 다시금 해석 하는 까닭이 됩니다. 대개 합해서 말하는 것은 넓고 또 크게 되어 ‘비’라고 말합니다. 나눠서 말 하는 것은 좁고 또 작게 되어 ‘은’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차이는 나누고 합하는 ‘분합(分合)’에 있지 ‘체용(體用)’에 있지 않습니다. 15)

인현정은 이 분합의 구도가 홍대용의 인물성동론과 논리적으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는 분석한 다. 18세기는 기존의 체용관으로 담아내기엔 용(用)의 세계, 상(象)의 세계 너무 확장됐기에 홍대용 은 새로운 분합의 수평적 틀로 물(物)을 통한 치지 영역을 넓히려고 했다. 의복과 음식, 혼천의와 악기 등 인간의 개별 사물들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기존 질서의 해체는 과학적 세계관의 발전 을 견인한다. 실제 홍대용은 향후 북학파와 백과전서의 학파에도 영향을 미치며 향후 미술 화풍에 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16) 또 과학지식의 발달은 전체적으로 중인층의 성장을 가져온다. 이는 후기 조선사회에서 문학, 미술 등의 예술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창협이 금강산 봉우리를 보고 쓴 시는 하나하나 춤추며 날아갈 듯하다던지, 구름에서 나와 치달린다고 하는 등, 사물을 인간의 위치 와 대등하게 바라보고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물리(物理) 파악의 관물론적(觀物論的) 시도 다. 그 절정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인데, 이 그림의 금강산은 정선 개인의 한정된 체험적 시각 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새가 날아 보듯 다시점으로 형성된 회화적 진경의 공간을 구성해낸 것이

다. 또 박지원의 호질 등에 동물 우화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여러 가지 기담에서 나오는 핍박받던 기이한 존재의 향연을 부활시킨다. 홍대용의 인물균 사상 또한 지구에 대한 지식의 결과물로 생긴 결과다. 즉 지구가 돌고 돌며, 관점이 바뀌어 천시(하늘)의 관점에 이르면, 그것은 지구는 만물에 동등한 위치와 연결망을 부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람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에 이르려는 노력, 사물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현식은 이런 홍대용의 화법을 

 

14) 인현정, 「홍대용의 정치철학과 물학(物學)의 관계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17.

15) “妄意可知可能者隱也, 隱者, 微也小也. 聖人之不知不能與天地之所憾者費也, 費者廣也大也. 所謂語大語小者, 所以重釋費隱之義, 其曰造端乎夫婦者, 隱也, 其曰察乎天地者, 費也. 所以申言君子之道而結章首費隱二字之義也. 盖合而言, 其廣且大則曰費也. 分而言, 其微且小則曰隱也. 其言之異, 在於分合而不在於體用也.”,  湛軒書 四書問辯, 中庸問疑. 

16) 이현경, 「정선 <금강전도>의 구도와 시점에 대한 역사ㆍ사회적 고찰」, 예술학, 2:2, 2006.

“허자는 위계적 관계 인식을 표상하고 실옹은 영향 관계적 인식을 표상한다.”고 설명한다. )   당시 18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인물성동이론’과 ‘성범인심동이(聖凡人心同異)’ 논쟁이 함께 

진행됐다. 이 중 홍대용은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설을 주장했기에, 성인론이 만들어내는 수직적 질 서를 동론과 공존시키려 했다면 왕으로부터 하층민까지, 청나라나 명나라나 모두 동일한 ‘사람’ 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체용일원’이란 개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체용개념만을 위계적이고 도식적으로 적용했다는 모순에 물들어있어 이를 쇄신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홍대 용은 체용이 아닌 ‘분합’ 구도를 적용해 관습적 체용 구도의 부조리한 적용을 비판하고, 확장되 고 변화된 현실을 드러내려 했다. 

인물무분은 인과 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의산 문답에서 허자는 끊임없이 인과 물의 관계를 분리된 관계요, 배타적 관계라고 믿지만, 실옹은 인 과 물의 관계를 연결된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요, 보완적 관계라고 믿는다. 이 관점은 인과 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차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허자는 물의 결여만 이야기했지만 실옹은 물 의 결여만이 아니라 인간의 결여도 이야기했다. 허자는 인간우월성을 말했지만 실옹은 인과 물 모 두 우월하다고 말했다. 실옹은 인과 물이 서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공생 관계라고 지적 한다. 서로 다툰며 경쟁하고 배운다는 뜻이다. 인과 물의 대등성은 하늘에서 보는 구조적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런 구조적 관점은 인물론을 넘어 자연론, 역사 담론, 현실 담론까지 이어진다. 각 담론은 병렬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물성 담론이 청나라 담론을 위한 복선이기도 하

다. 실옹이 인물성 담론을 전개하면서 이런 개념을 추론하고 그것을 각 담론에 적용시키려고 한 의도가 있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자가 화들짝 크게 깨닫고, 또 절하고 나와 말했다. “인과 물은 구분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 었으니, 인과 물의 탄생의 뿌리에 대해서 묻고 싶다.” 실옹이 말했다. “좋구나, 질문이여! 그렇지 만 인과 물의 탄생은 자연에 근원한 것이니, 내가 먼저 자연의 실정을 말하겠다.”… 허자가 말했

다. “자연의 형상과 정황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으니, 마지막으로 인과 물의 근원, 고금의 변화, 중화와 이적의 구분에 대해서 듣고 싶다.”

이 부분은 인물론 단락과 자연론 단락의 연결 부분이다. 허자는 인과 물의 구분이 없는 관계라

는 것을 깨우치고 난 후 인과 물의 생명 기원에 관해 배우기를 요청하고 실옹이 이에 동의한다. 이것은 두 담론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하려는 실옹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론 단락 과 역사 현실 단락의 연결 부분에서도 역사담론과 현실 담론 역시 동일한 대도로 설명하려는 의도 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홍대용은 구조적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천을 리나 태극이 아닌 ‘자연천(自然天)’의 의

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게 천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가치가 아닌 사실의 관점에서 인과 물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이 천은 그가 농수각이라는 실험실에서 직접 관찰하며 얻어낸 과학적 천이다. 의산문답은 이렇게 기존의 도덕, 가치 중심으로 인과 물을 통합해서 보던 전체론적 사고를 벗어나 인과 물의 사실적 차이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홍대용은 여기서 인과 물을 무조건 합일적 관점에서 보던 보편원리를 약화시킨다. 인간중심적 가치를 물에 투사하는 시선 자 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성문(心性問)」에서나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서 여 전히 동물의 영함이나 동물의 인간보다 뛰어남을 논하면서 성리학에서 규정하는 예의 즉 인간중심 적 가치의 틀 안에서 머물렀던 것에 비해 의산문답이 일진보한 측면이다.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그림1> 지구(우라노스)를 짊어진 

아틀라스  

<그림2> 어린 예수를 업은 St.Christopher  

<그림3> Master of Messkirke in

 Basel의 St.Christopher

1.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 라투르의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 합성과 재구축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

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인류세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온전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Science)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해보자고 권한다. 2010년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지구에 대한 대안적 어휘 설 정은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기존의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로 전환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지구의 접두어를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바꾸는 전환이다. 그는 지구를 geo-라는 객관적 땅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간지러워하고 인간 세계에 침입해 복수 하는 gaia-로 형상화하는 게 인류세를 맞은 인류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설명한다. 또 globe는 멀 리서 태연하고 초월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어감이 느껴지는 반면, terrestrial는 천상계의 초 월로부터 단절된 떠나올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삶의 조건이자 터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단일한 전체성을 지닌 ‘유니버스(universe)’에서 여러 코스모스 들의 정치적 경쟁, 즉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렇게 브루노 라투르는 끊임없이 지구를 다른 관점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그가 지구 대신 제시

하는 가이아 이론은 특히 엄마와 같이 보살펴주는 여신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침입하고, 매우 거친 자연이다. 또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이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 다. 

라투르는 2011년 런던의 프랑스 인스티튜트 강연 ‘가이아를 기다리며. 예술과 정치를 통해서 공동 세계를 합성하기’ )에서 이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의 대표적인 도구를 예술과 정치의 도구와 연결함으로써 생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시도한다. 19세기까지 인간 은 숭고한 ‘자연’의 장관에 무력하고, 압도당하며, 전적으로 지배당하는 느낌을 가져왔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자연(나이아가라 폭포, 남극의 얼음)이 동일하게 영속하지 못함을 느낀

다. 칸트가 말한 우리 안의 도덕 법칙에 대한 숙고와 우리 밖의 자연의 무고한 힘들에 대한 숙고 사이의 오랜 균형은 이제 뒤집어지고 있다. 라투르의 과학사회학(STS) )와 행위자 연결망 이론(AN T)는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이론화 작업이다. 지구 분과학문들, 장비, 매개자, 과학적 연결망들이 확대되면서 이제 지구는 구체(globe) 즉 공 모양이 아니라, 데이터 점들이 수집되고 모형수립자들 에게 다시 전송되는 기지들과 믿음직하게 안전한 연결망들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척도 모형(scal e model) 즉 여태까지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며, 복잡한 조립체들 가운데 하나인 태피스트리가 된 다. 이 태피스트리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서 이 안으로 매듭과 노드를 엮어내며 조정, 모형화, 재해 석할 수 있고, 그래서 이 태피스트리는 놀랍도록 강하다. 인류세의 역사에서 이런 느린 태피스트리 엮기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기후과학자도 이제 지구를 직접 측정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가 능한 대안은 아주 작은 실험실 현장의 국소적 모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작업을 표준화하고 조정 하는 것뿐이다. 이제 한쪽편에서 지구에 대한 전지구적으로 완전하고 전체적인 시야로부터 득을 보는 과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제한된 국소적인" 시야를 가진 가련한 보통시민들이 있는 시대 는 지났다. 오로지 부분적인 시야들이 있을 뿐이다. 생태적으로 고무된 활동가가 충분히 전지구적 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명목 아래 시민에게 창피를 주려는 노력은 쓸모없다. 이제 아무도 지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고 아무도 초월적인 견지에서 생태계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자, 시민, 농 부, 생태학자, 지렁이가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 즉 지구는 관찰자가 사물들 "전체"를 보기 위해 이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관점에서 포괄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함께 합성 되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자들의 조립체이다. 

현재 인류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에게 이런 조립 작업이 특히 필수적이다. 모든 조립 체에는 중간 매개자들이 필요한데 위성, 센서, 수학 공식, 그리고 기후 모형은 물론 국민국가, 비정 부 기구, 의식, 도덕, 책임감도 포함돼야 한다. 이런 조립체는 "과학적 논쟁들의 지도 그리기"라 부 르는 여러 행위자의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라투르는 합성(composition)이란 개념을 쓴다. 과 학 논쟁은 회피할 게 아니라 매 행위자마다 합성돼야 하며 예를 들어, 대기 난류의 역할, 그 다음 구름 역할, 다음 농업 역할, 다음 플랑크톤 역할 등이 연쇄하며 기후를 모형화하면서 매번 참된 지 구 극장을 만들어간다. 여기서 사실과 의견은 이미 뒤섞여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뒤섞일 것이 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정치 세계를 분리시키는 게 아니라 뒤얽힌 우주론들의 상 대적인 무게를 새로운 도량형 코스모그램(cosmogram)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이제 논쟁적이고 과학 적인 여러 우주들을 서로 비교하고 겨루게 하자. 그게 정치다. 

라투르는 이런 식의 용어와 인식 전환을 통해 인류세를 맞이한 지구가 서서히 기존의 역사적 지 구에서 공간 중심의 지구로 이동해야 함을 말한다. 이런 전환의 일환으로 라투르는 인류가 코로나 를 맞은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CZ)’이라는 국소 공간을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의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작품화하는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를 하는 공간이다. 사고 전시는 ‘사고 실험(thoug ht experiment)’에 대비되는 말이다. 사고 실험이 사물의 실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시 나리오가 어떻게 동작할지 생각하는 선험적 방법이라면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는 관찰이 나 실험이라는 경험적 방법을 통한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으로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생명 을 기술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담는다. 이 공간에서는 예술가들과 과 학자들 사회학자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또 학제 간 협동을 통해 임계영역에 대한 합동 탐구를 진행한다. 생태적 다양성이 깨진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임계영역에서 빨리 발 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기민함을 통해 인류세의 대처능력을 높일 수 있다. 어차피 지구 전체 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전부 파악하는 과학자는 이제 불가능함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브루노 라투르는 여러 강연과 저작에서 자신의 지구 철학을 설파하는 데 있어서 종종 독일 철학 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구체 이론을 극찬한다. 특히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디자인 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에 매료됐다고 강조한다. 라투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피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이론은 지구에 대한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 그가 구체 (Globe)의 시대로 말한 17~20세기 말까지 ‘유니버스(universe)’라 불리는 모든 요소 사이에는 연 속성과 통일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이 시점을 기해 ‘한정된 코스모스’(restricted cosmos)에서 ‘무한한 유니버스’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인간 밖 모든 것 즉 땅, 공기, 달, 행성들, 은하수, 그리 고 빅뱅에까지 모든 것이 동일한 물질적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또는 "갈릴레 오적" 혁명은 그렇게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슬로터 다이크는 유니버스가 아니라 멀티-코스모스, 코스모폴리틱스, 즉 버블 또는 거품으로서의 지구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단 하나의 천상의 지구라는 유니버스는 이제 없으며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으 로 자기의 조그만 거품으로서의 지구에 머물고 있다. ) 슬로터다이크는 세계가 이런 관점에서 세 가지 세계화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묘사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 우주론에 의해 촉발된 형이상학적 인 변화로 이 세계는 미시구체(microsphere)다. 두 번째는 16세기의 세계적인 항해 탐사로 시작된 국제적인 것으로 이 세계는 거시구체(macrosphere)다.  이 시기가 유니버스의 시대다. 세 번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지방적인 ‘거품’인데, 이 세계는 다구체(plural spheres)이다. 거품처럼 여 러 개의 구체가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협력한다. 

여기서 거품은 브루노 라투르의 ‘임계영역’과도 비슷한 이미지로 상상된다. 거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구의 국소적인 매우 얇은 막 또는 스킨인데 그 위에서 공생이 이뤄지고 있는 지대다. 생물권은 바로 여기서 형성되고 그래서 인간은 단지 이 지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깊숙이 함께 얽혀들어 있다. 라투르는 이곳의 과학실험이 사고실험이 아니라 사고전시(실험이 과학자들만 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면 전시는 예술과 정치, 과학과의 융합을 떠올리게 한다)라며 모든 학제간 연 구자들이 함께 모여 결과를 전시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이아 안에서의 행위자 네트워크의 현장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라투르는 그래서 자신의 역사성은 공간성으로 흡수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철학은 공간철학 (가이아정치학, Gaiapolitics)이라는 더 이상한 형태가 동반된 지리정치학)의 특이한 형태로 흡수되고 있다” )는 게 라투르의 진단이다.  

이제 로봇과 소수 사이보그 우주인들은 공상과학영화처럼 저 너머로 갈 수 있지만, 나머지 인류 는 "부패와 타락의 소굴", 또는 위험과 원치 않는 결과들로 가득 찬 곳이 된 옛날 코스모스에 여 전히 묶여있다. 이제 우리는 지상계에서 넘어갈 수도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우리가 초월 적 관점(View from Nowhere)을 취하지 않고서는 지상계에 숭고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유니버스에서 코스모스로 이동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연속성과 통일성이 없어진 더 이상 자연의 숭고가 불가능해진 지상계로서의 우주다. 여기서의 우주론은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말한대로 더 이 상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거품들의 정치다. 이사벨 스텐저스는 이를 코스모폴리틱스이라고 말한다. 이런 코스모스로의 이동을 라투르는 “우리는 탈근대적(postmodern)한 게 아니라 탈자연적(postnat ural)이다”고 말한다. 라투르는 그간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기에 탈근대적이 라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새로운 코스모폴리텍 시대에 가이아는 더 이상 자연과 비슷하지 않다. 가이아는 인간의 곤경에 무심하다. 가이아는 어머니 자연이나 여신처럼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가이아는 인간의 행위에 민감하지만 우리의 복지를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가이아는 우리를 제거해 박살내 고 소멸시키며 ‘복수’한다. 가이아는 자연의 수호자 역할을 하기엔 너무 연약하며, 어머니라기엔 우리의 운명에 너무 무관심하고, 여신이라기엔 거래와 희생으로 달랠 수 없는 너무 까다로운 캐릭 터다. 가이아는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모성의 대지가 아니다. 

 

<그림4>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홈트리나무(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의 등장나무) 

위의 사진은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2009)에서 나비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홈트리 나무는 '영혼의 나무'이며, 판도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연결하는 여신,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나무다. 에이와는 나비족 언어로 '모든 이를 안는다'라는 뜻이다. 나비족의 정신적 계보는 모계신화 를 바탕으로 어머니 자연(nature mother)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여신 에이와는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일체(통일성)를 유지하며 주인공 네이티리의 어머니 차히크는 나비족을 위해 에이와 여신의 신명을 받는 무당이자 여제사장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가이아 2.0은 이와는 반대다. 라투르에 의하면 가이아는 우연적인 양과 음의 사이 버네틱한 고리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런 고리들이 항상 훨씬 더 얽혀 있는 복잡한 양과 음의 새로 운 고리들을 위한 조건들을 조장하는,  전적으로 돌발적인 결과를 차례로 낳는 일은 그냥 일어난

다. 어떤 목적도, 어떤 섭리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관해서 걱정할 필요는 말은 아니다. 곤경에 빠진 자는 실은 가이아가 아니라 우리다. 인류세라는 수수께끼는 희한한 뫼비우스 의 띠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그녀를 위협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녀를 포괄하고 있는 듯 보이 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녀 밖으로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에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를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가이아가 흥미로운 건 여기에 통일성이 전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유니버스(최소한 지상계 부분)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이제 인류가 하나의 통일된 행위주체가 아닌 것처럼 가이아도 하나의 연속적 행위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가이 아도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서로간의 대칭은 완벽하다. 라투르는 “우리 속의 가이아 또는 가이아 속의 우리, 즉 이런 기묘한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씩 합성되는 일만 남았다.” 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는 것(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등)들을 구분하려고 노 력하는 대신, 이런 핵심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자. 당신이 조립하고 있는 것은 어떤 세계인가? 여러 분은 어떤 존재자들과 함께 살기를 제안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거대 석유회사, 담배 제조업체, 반 낙태주의자들, 창조론자들, 공화당원들, 그리고 소수의 인간과 소수의 자연물로 이뤄진 노드 사이 의 연결은 부엽토(humus), 인도적인(humane), 인간성 또는 인문학(humanities) 사이를 연결하는 것 만큼 흥미롭다. 지구인들은 죽어서 되돌아갈 흙과 먼지(부엽토)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인문학’도 이제는 지구과학이 돼야 한다. 라투르는 이런 기조에서 2010년부터 과학적, 정치적, 예술적 표상이 라는 삼중의 작업으로 전문적인 예술가, 과학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시앙스포 주관으로 "정치 예술 (political arts)"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해왔고 2020년부터는 그 훈련을 임계영역에서 국소적 지구로서 ‘사고 전시’하는 중이다. 

현재 우리가 가이아의 어깨—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어깨—에 매우 무거운 짐을 서로 올려 놓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거래를 할 만하다. 가이아와 우리의 운명은 매우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코 스모스에 파묻어 들어가 있는 아기 그리스도를 짊어지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의 아이콘<그림3>이 딱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라투르는 성 크리스토퍼의 그림은 과도한 짐을 짊어진 아틀라스<그림 1>보다 인류에게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서 크로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를 메고 가다"는 뜻이다. 크로스토퍼

는 여행자의 수호성인이다. <그림2>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리던 크리스토퍼는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고 선언한 이교도 거인이었다. 어느날 조그만 어린이를 메고 강을 건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며 건널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고 중얼거리자, 그 어린이가 말했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 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술 그리스도다". 

 가이아는 전 세계인 아기 예수며, 우리는 그 가이아를 어깨에 멘 크로스토퍼다. 그림에서 보면 

크리스토퍼와 예수는 지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뫼비우스처럼 얽혀있다. 크리스토퍼는 예수의 어깨 에 예수는 크리스토퍼의 어깨에 서로 기대고 있듯, 우리는 가이아의 어깨에, 가이아는 우리의 어깨 에 지운 짐을 통해 서로의 운명이 연결돼 있다. 

2. 브루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2.0’ 세계는 코로나로 모든 것이 무너진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기후변화와 바이러스의 출현 모두 인 간 활동에 따른 결과지만 폐쇄 앞에서 ‘글로벌’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팬데믹 속에 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미터법 도량형을 따르는 공간, 즉 실체 가 위치하는 곳이 아니라 갈등과 법, 기술 등의 총체적 요소가 벡터화된 곳이다.

라투르는 2017년 강연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Why Gaia is not a God of Totalit y)’에서 “만일 당신이 무관심한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지오’라면, 경계에서 일어 나는 굉음의 부딪힘을 목격하며 그 안에 있는 상황을 ‘가이아’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3) 이는다운 투 어스(2017)에서 또 다른 표현으로 중복돼서 설명하기도 한다. ‘지구(the Glob e)’는 외부자의 시선 즉 인간 문제에 무관심할 정도로 멀리서 사물을 파악하지만, ‘대지(The Ter restrial)’는 같은 사물을 가까이서, 인간의 매사에 매우 내밀하고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면서 관 찰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영향을 회복하고, 재방향설정하는 데 필수적인 메타포이자 민감성인 

‘알고자 하는 욕망(libido sciendi)’이다.”(14장) 여기서도 전체가 아닌 ‘부분’이 강조된다. ‘부 분’에 대한 논의는 메릴린 스트래선의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는 부분하면 바로 ‘전체’를 떠올리는 ‘메레오그래피mereography’란 개념 대신 생물학 용어인 ‘부분할部分割’ 즉  ‘메로 그래피merography’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서, 그것으로서 전체로 회수되지 않는 부분을 논한 다. 스트래선 역시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문제시하고, 세계에 대한 앎을 완 결적으로 닫는 게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행위를 중시한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 다.24)

 라투르의 ‘대지(The Terrestrial)’는 단지 인간이 거주하는 환경이나 배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 지구가 안정적일 때 사람들은 영토를 소유가능하다고 생각 하고 땅 위에서 자신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영토 자체가 인간과 맞서고, 인간 생활에 관여한다. 라투르는 생태학이 ‘대지’를 엄밀히 정의내리지 못한 결과, 19세기 이후의 사 회 투쟁에서 발생한 변화의 정치적 동력을 생태로까지 끌어내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이런 라투르 의 대지 이론은 신유물론자 로지 브라이도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 휴먼에서 대지로서의 정치적 행위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주체(subject)를 인간과 우 리의 유전자적 이웃인 동물과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횡단체(a transversal entity)로 시각화(형상화) 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차크라바르티와 나는 지구중심적 관점(g

 

23)“오늘날 러브룩이 말한대로, 가이아는 복수를 한다. 그의 ‘복수하는-가이아(Gaia-The-Vengeful)’란 구절 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마굴리스가 말한다. “생명은 행성 수준의 현상이며, 지구는 적어도 30억년동 안 살아왔다. 내가 볼 때 인간이 살아있는 지구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능 력은 없으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우리를 돌보는 것이 다. 혼란에 빠진 지구를 올바로 이끌라거나 병든 지구를 치유하라는 우리의 주제넘은 도덕적 명령일 뿐이

다. 우리는 오히려 자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202-203쪽) 그리니 처음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를 스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가이아를 전체성의 신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신 또는 다른 전체성, 다른 구성물, 차라리 다른 ‘가이아-‘퇴비(compost)’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복합적인 비선형적 커플링은 부분적으로만 일관된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론적이지 않은 연결만을 추구하고 있 다. (라투르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

24) 차은정,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메릴린 스트래선”, 《경향신 문》, 2019년 9월 24일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2401031612000001.

eo-centred perspectives), 생물학적 행위자에서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s)로의 인간의 위치 변화가 주체성과 공동체 개념 모두에서 재구성을 요청한다고 결론짓는다.”25)

그녀는 이를 통해 ‘지구-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결국 포스트휴먼-되기는 공유된, 세계 영토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연계 의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그 공간은 도시적 공간, 사회적, 정신적, 생태적, 지구행성적 공간일수도 있다. 포스트휴 먼 이론에서 주체는 비인간(동물, 식물, 바이러스) 관계들의 관계망에 완전히 잠겨있고, 내재돼 있 는 횡단적 존재다. 자아는 사실 공통의 생활공간 안에 있는 이동 가능한 배치이며, 주체가 결코 장 악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하고(never masters nor possesses) 단지 늘 하나의 공동체, 묶음, 집단, 무리 로 거주하고 횡단만 하는(merely inhabits, crosses) 것이다. 

생기론의 이 비본질적 유형은 합리적 의식의 오만한 기세를 꺾는다. 합리적 의식은 수직적 초월 행 위기는커녕 급진적 내재성에 접지하는 운동으로 재설정되고 하강한다. 의식은 자아를 세상으로 펼 치는 행위면서 세상을 안으로 접어들이는 행위다. 의식이 사실은 자신의 환경과 관계맺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인지 양태라면 어쩔 것인가?

의식이 이 생명, 이 조에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우리를 움직이는 비인격적 힘에 대한 처 방전을 끝까지 찾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포스트휴먼 사유는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세계도 아니고 의인화된(anthropomorphic) 세계도 아니며 지정학적(geo-political)이고 생태지혜적 (ecosophical)이며 조에중심적(zoe-centred) 세계 안에서 우리가 몸담는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줄 방법이다. 

브라이도티나 라투르의 이론은 기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행위가 

아니라 급진적 내재성으로 접지하고 안으로 접어드는 행동이다. 그래서 라투르의 지구 안 임계영 역의 실험은 의미있다. 브라이도티는 심층생태학을 주창하는 아르네 네스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 아 가설에 대해 그것이 총체성을 되살리고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신성한 유기체로 보는 개념으로 복 귀하는 이론이라며 거부한다. 그녀 생각에 네스와 러브록의 전체론적 접근과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구성주의적 이원론은 문제적인데, 이들은 지구를 산업화에, 자연을 문화에, 환경을 사회 에 대립시킨 후 자연 질서의 편을 들기 때문에 소비주의와 기술관료적 이성과 기술문화를 과도하 게 고발한다. 그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이분법, 즉 자연과 인공(기성품) 사이의 범주적 분리를 재기입하기 때문이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디자인이 없었던 초기 시절에 제임스 러브룩과 린 마굴리스이 처음으로 

제시한 가이아 가설(1979)은 그간 지구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촉발시켜왔지만 브라이도티가 본 이 들의 이론은 한계를 갖는다. 대신 그녀는 “지구와 지구 타자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브라이도 티, 변신, 491쪽)시키며 포스트휴먼 즉 ‘지구-되기'에 대한 들뢰즈적 요청을 재확인한다. 인간중 심주의적 습관의 결과가 지구를 전지구적 환경 위기로 몰고 가버린 현재 인류세의 시대에, 브라이 도티는 주체성이라는 관념을 인간, 비인간 그리고 지구 전체를 포함하는 횡단적 존재자로서 다시 

 

25)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108쪽.

표현하기를 제안한다. 지구를 횡단하는 모든 존재는 모든 종에 공통적인 비인간적 생성력과 활력 으로 간주되는 ‘조에(zoe)’의 생명체다.26) 브라이도티는 지구행성적 관점으로의 탈-인간중심주의적 선회는 ‘인간’의 동물-되기와는 전혀 

다른 규모의 개념적 지진이라며 지구를 중심에 두는 주체는 어떤 모습일까를 묻는다. 

문제는 브라이도티의 말대로 심층생태적 가이아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라면 라투르는 왜 하필 지 금, 지구 라는 용어 대신 심층생태적 가이아를 다시 왜 소환하는 것일까. 그가 진화생물학자 린 마 굴리스(Lynn Margulis)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기 때문이다. 마굴리스의 공생설은 인간만이 지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함께 서로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그녀는공생자 행성 에서 공생자로서의 지구에 대해서 말한다. 공생자로서 가이아에서 만물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점차 더 현대적으로 변해 사물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와서는 ‘세속 가이아(secular Gaia)’(Facing Gaia, 2013) 이론으로 프랑스 철학자 이자벨 스텐저스 (Isabelle Stengers)의 ‘침입자 가이아(Gaia the Intruder)’ 이론으로 인류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

이아 형상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라투르와 스텐저스는 기후 변화가 더 이상 진행되기 전 인류가 벌 수 있는 시간을 위한 거울로서 가이아의 모습을 활용한다. 클락(2017)은 러브룩과의 오래된 공 조 속에서도 마굴리스만의 독특한 상호침투적인 ‘자기 생성적 가이아(autopoietic Gaia)’ 이론은 비전체론적이고, 이질적이지만 일관된 가이아 개념에 대한 스텐저스와 라투르가 추구하는 인류세 시대의 정치적 의사소통방식에 효과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27) 아마도 알려져 있 는 가장 간단한 자기생성적 개체가 박테리아 세포라면, 가장 큰 자기생성적 개체는 가이아일 것이 다. 세포와 가이아는 생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가이아 안 시스템은 생물과 비생물의 협력에서 비롯 되며 그래서 전통적 사회과학적 구분을 무너뜨린다. 

라투르의 가이아는 지구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보살펴주는 자애

로운 어머니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광포하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의 항상성을 회복불가능한 정도까지 몰고 가는 순간, 과거 공룡 등 다른 생명체들을 멸종시켰던 무자비한 가이아가 깨어난다. 세속적 가이아는 새로운 형태 의 지구중심주의를 갖고 온다. (Latour, 2013 :64)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명기에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 서구 세계의 우주 개념의 중심에서 지구를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쫒아냈음을 기억한

다. 이제 가이아 이론은 지구의 우주 중심성을 다시 인정하는 신지구중심주의를 세속적 방식으로 

 

26)“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2017)는 지구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차크

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global thinking)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조성환⋅허남진, [공공학-공공철학] 학 문의 지구적 전환, <더퍼블릭뉴스>, 2021년 1월 15일,http://www.thepub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 no=16788. 여기서 조성환⋅허남진은 조에중심주의적 생명체에 대한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을 소개한다. 조 에중심주의는 라투르, 차크라바르티, 브라이도티, 등의 신유물론 학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이론이 되어가 고 있다. 

27) Bruce Clarke, Rethinking Gaia: Stengers, Latour, Marguli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4(4) 3–26, 2017.

불러온다. “위에서 보았을 때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큰 수프와 같다.” 가이아 안에서 일어나 고 있는 미생물의 이동성은 ‘애니매이션’이다. 보이지 않는 캐릭터는 가이아의 행성 외피를 통 해 퍼지는 무수하고 무한한 미생물의 복합 기관이다. 파스퇴르의 경우 효모없이는 발효하지 못하 며 이 과정이 맥주, 포도주, 식초를 만들어내듯, 가이아 안에서도 공기, 물, 불, 흙을 휘젓는 유기체 안에서 미생물이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가이아의 생물 정치 속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또는 인 지적 지구 생물권 내에서 수평적 관계로 돌아왔다. 

이자벨 스텐저스는 재난적 시대에서: 다가오는 야만주의에 대항하기(In Catastrophic Times : R

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2015)에서 인류를 초월한 가이아의 행성적 자율성에 주목한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의 추출적 활동이 가이아를 자극하고 현재의 예측할 수 없고 빠르게 진화하는 '침입' 모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폭주하는 인간의 자원 추출에 대항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비인간은 참지 못하고 있다. 스텐저스가 말하는 가이아는 현대 인간 활동을 협박하고 저항한다. ‘가이아는 간질간질(Gaia is ticklish)하다’고 정체 불명의 목소리가 선언한다. “우리는 가이아의 참을성에 의 존하고 있다. 참지 못함을 조심하라”(2011:164) 이 가이아는 코스모폴리티컬한 비유며, 생태적 폭 력에 대한 저항의 개념 자원이다. 스텐저스는 “가이아의 이름을 지정하고 다가오는 재난을 침입 으로 특성화시키는 것은 실용적인 이유에서다”며 “이름을 짓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가이아는 콘 크리트 속의 지구가 아니며, 생활하고, 고군분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원이다. “가이아는 우리 의 목적에 무신한 힘들의 간지러워하는 집합체다.”

 여기서 라투르의 ‘애니메이션 가이아’와 스텐저스의 ‘간지러워하는 힘의 집합체인 가이아’ 는 순전한 물질적 역동성과 민감성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수사학이다. 간지러워하는 가이아는 발 작을 일으키기 쉬우며 고통스러워한다. 인류세 시대의 가이아는 우리의 행동에 민감해하며, 우리도 그에 대응해 ‘조심스럽고 민감해져야 한다.’ 

3. 임계영역에서의 사고 전시를 통한 주체의 지구-되기 라투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 상황을 ‘신기후 체제’로 명명하면서 생태 적 위기 뿐 아니라 정치문화사, 관점의 윤리적, 인식론적 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학자들 은 예전에 지구정치에 대해 논할 때는 물질이나 영토에 대한 점유를 위한 국가간의 싸움이었다. 오늘날 지구정치는 거주할 수 있는 땅 자체에 대한 정의에 대한 전쟁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전 체성이 아닌 부분적 연결, 국소적인 영역인 임계영역(크리티컬 존)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만 으로도 새로운 비평의 근거가 생긴다. "임계 영역(Critical Zone)"이라는 용어는 지구 과학에서 따온 것으로 생명이 생성되는 표면인 지구의 생화학적이고 깨지기 쉬운 층을 설명한다. 라투르에 의해 이 용어는 지구 역사상 전례 없는, 살아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관계로 확장됐다. 

그 점에서 브루노 라투르는 임계영역에서의 지도그리기를 시도한다. 그는 “인류세의 싸움은 국 제지질학회 같은 관료주의 내에서 복잡한 결정을 통한 해결도 필요로 하지만, 각 임계 영역이 인 간의 이미지를 강력한 지구형태변형적 힘으로 제공하여 우리에게 지형학의 새로운 이미지 즉 지형 학적 인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나 칭의 “폐허 속에 살다(living in the ruins)”라는 표현을 빌려와, 세한도처럼 늘 영속하기에 숭고한 자연이 아닌 포스트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류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지구이미지를 강조한다.28)

그가 보기에 첫 번째 지구(Globe)는 우주에서 바라본 유명한 푸른 행성의 이미지다. 그러나 임계 

영역에서 본 두 번째 지구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작고 연약하며 평형과는 거리가 멀다. (‘임계 (critical)’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기도 하다). 지구는 외부적이며 영속적이고 단일하게 전체적인 ‘지구로만’ 간주되는 게 아니라 내부적이며, 논란 많고 다층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얽혀있

는 존재태(intermingling entities)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간지러운 피부다. 라투르는 이런 이미지의 대조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탈착 가능한 장신구처럼 지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지구인 형제자매(the Earthlings), 지구에 뿌리내린 존재들(the Earthbound), 인류세의 부모자식들은 자연(nature)에서 태어나 상징과 사회의 세계에서 졸업하는 게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 지 우리의 모든 삶을 퓌시스(physis), 즉 우리가 꿈에서도 절대로 빠져나오거나 탈출할 수 없는 그 런 퓌시스 한가운데서 보낸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구 ‘위’가 아니라 지구 ‘안’에 있다는 의미다. 

라투르가 자꾸 차크라바르티와 함께 논의를 기존의 전통적 역사철학에서 공간적이고 지구(지리)

정치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계의 발견자들은 이제 공약가능하지 않은 여러 행성으로 흩어졌다. 라투르는 세계World도 글로브Globe도 지구Earth도, 글 로벌Global도 아닌, 가이아(Gaia), 또는 대지적(Terrestrial)라는 단어로 이를 대체하고자 한다.  

임계 영역에서는 비인간 및 인간 행위자의 네트워크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하수 슬러지 과정에 서 여러 노드는 인간의 미생물 군집과 다양한 종류의 해양 및 육상 서식지가 포함된다. 임계 영역 은 우리의 서식지일 뿐 아니라 더 나은 비인간 동거를 위한 접촉 구역(contact zones)이다. 

예술가들의 전시 공간은 헤게모니 지식 형성의 해체, 변형 및 이동을 위한 잠재적 공간으로 기 능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술가 크리스티나 그루버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거주 하고 일하는 예술가이자 담수 생태학자이다. 그녀는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일하면서 우리 세 계를 형성하는 사회 현상을 다룬다. 지난 몇 년간 물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사였는데, 지구상의 모든 존재자가 공통적으로 가진 요소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Water Bodies>에서 강은 물벼룩이나 철갑 상어와 같은 원시 물고기와 같이 그 안에 사는 모든 유기체와 생물 모두를 의미한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에 그루버는 과학적으로 무한한 관계와 그 주기를 돌보며 연구한다. 그 는 팟캐스트에서 예술가와 함께 미시시피의 무인 늪지대와 다뉴브 해역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나누며 인간이 풍경에 미치는 영향과 지구 표면의 모양을 조사한다. 

 

28) Bruno Latour, “Is Geo-logy the new umbrella for all the sciences? Hints for a neo-Humboldtian university”, the Cornell University, 25th October 2016.

라투르가 차크라바르티, 도나 헤러웨이, 이사벨 스텐저스, 피터 바이벨 등의 학자와 예술가와 작 가들과 함께 참여하고 칼스루에 대학이 주관하는 이 ZKM 예술 및 미디어 센터의 2020 전시는 기 후 변화에 직면한 세계의 방향 감각 상실을 묘사한다. 전시도록에 실린 텍스트와 500여개의 삽화 는 인간이 착륙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을 탐구한다. 임계 영역이든, 가이아든, 대지의(terrestrial)이 든 뭐라 부르던 간에, 지구 안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을 향한 재설계된 지정학적 갈등과 도구 를 찾는다. 이 “생각 전시”는 새로운 기후 체제를 탐구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을 열어준다. 

 

Ⅲ.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조선의 홍대용과 프랑스의 브루노 라투르란 두 사상가의 지구적 관점 전환은 동

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사회 질서의 혁명이 이어졌다.  갈릴레오 사건을 볼 때 과 학자들이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때 사회의 전체 구조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꼈 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신기후체제’라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격변 한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 스스로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밀어 붙였고 다시 한번, 사 회의 전체 조직이 전복됐다. 우주 질서를 흔들면 정치 질서도 흔들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 는 땅은 두 가지 다른 정의를 갖는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권리를 얻는 주권 국가라는 땅 이외에 거주하고, 숨쉬는 땅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땅은 지구 또는 초월적 관점에서 보는 “푸른 대리석” 이 아니라 일련의 부분적이고 국소적인 그래서 거칠고 불연속적인 임계 영역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주체의 지구-되기며, 다른 이질적 존재자를 만나는 민감성 그리고 공생성이다. 

홍대용은 리와 태극의 전체성의 하늘이 가진 위계적 관점을 벗어나 자연천의 관점에서(天視)  본 

시점으로, 인간보다 더 우월할 수 있는 비인간을 상정하며 그 상호관계망에 대해 논했다. 이는 브 루노라투르가 크리티컬 존에서 얇은 피부에서 생물권이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서로를 스승삼아 배우는 그런 생태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 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 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계를 생략했다 는 특징이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 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 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과학으로,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거품 즉 다중구체로

이것이 브루노의 목표다. 라투르의 가이아를 마주하며Facing Gaia(2013)는 책은 라투르가 페터 슬로터다이크(2013)에게 헌사한 책인데, 라투르는 그곳에서 페터가 제시한 인간 면역의 수정궁을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얽힌 루프에 대한 높은 민감도 없이는 면역학이 불가능하다. '미미한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거나 대 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파멸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 루프를 중단, 삭제, 배경, 감소, 약화, 거부, 모 호화, 연결 해제하는 사람들은 무감각한 정도를 넘어 범죄자다. 우리의 우주적 결합이 일어나는 가 이아 중심에서, 우리는 시스템의 얽힘(systemic entanglements)에 예민한 생물 정치적 동물이 되야 한다. 이 새로운 가이아 담론의 모습이야말로 가이아 존재의 직관에 적합한 행성의 상상력을 배양 한다. 

참고문헌

關尹子

湛軒書

역학도해 열하일기

곽혜성,「담헌 홍대용의 탈성리학적 사상의 형성-이기심성론에 따른 물의 담론 변화를 중심으로」, 철학사상문

화 29호, 2019, 18쪽

로지 브라이도티,포스트휴먼, 이경란 옮김, 아카넷, 2017 인현정, 「홍대용의 정치철학과 물학(物學)의 관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이현경, 「정선 <금강전도>의 구도와 시점에 대한 역사ㆍ사회적 고찰」, 예술학, 2:2, 2006 이현식, 「홍대용 醫山問答 人物論 단락의 구조와 의미」, 태동고전연구 35집, 2015 조성환⋅허남진, “[공공학-공공철학] 학문의 지구적 전환”, 더퍼블릭뉴스, 2021년 1월 15일, http://www.thep ub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88. 

차은정,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메릴린 스트래선”, 경향신문, 2019

년 9월 24일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2401031612000001

중앙일보 2020.11.30., 프랑스인이 재해석한 14m 세한도 “무인도 같은 고독에 공감”, 강혜란 기자, 

https://news.joins.com/article/23933555

브루노 라투르 영문 홈페이지 http://www.bruno-latour.fr

브뤼노 라투르:가이아를 기다리며”, 김효진 역, ‘사물의 풍경’ 블로그(https://blog.daum.net/nanomat/137)

Bruce Clarke, Rethinking Gaia: Stengers, Latour, Marguli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4(4) 3–26, 2017

Bruno Latour, Facing Gaia, 2013

Bruno Latour, ‘Waiting for Gaia. Composing the common world through arts and politics’, A lecture at the French Institute, London, November 2011 for the launching of SPEAP(the Sciences Po program in arts & politics). 

Bruno Latour, “Is Geo-logy the new umbrella for all the sciences? Hints for a neo-Humboldtian university”, the Cornell University, 25th October 2016

Bruno Latour, “Why Gaia is not a God of Totality”, 2017

Bruno Latour&Peter Sloterdijk, Cohabitating in the Globalised World: Peter Sloterdijk’s Global Foams and Bruno Latour’s Cosmopolitics,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2009, volume 27

Isabelle Stengers, In Catastrophic Times : R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2015

 


7]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7]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15)

요약문   중국을 찾아온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서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이 수용된 것 은 17세기의 일이었다. 이후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이익(李瀷, 1681-1763)・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 이 땅이 하루에 한 번씩 돈다는 자전설(自轉說)을 수용했다. 그리고 최한기(崔漢綺, 1803-1877)에 이르러 지 구설, 자전설과 더불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일괄적으로 소개했다. 최한기는 단지 새로운 서양 천 문학적 지식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그 학설들을 몸소 증험한 사실을 매우 중시하고 “카노가 비로소 지구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은 바로 천지의 개벽이다.”(嘉奴, 始圜地球. 是乃天地之開闢也. 神氣通 권1,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라고 말했다. 카노(엘카노라고도 함)는 탐험대장인 마젤란이 죽은 후 살아남은 선원들을 이끌고 스페인까지 돌아온 선장이다. 최한기는 카노들이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증험했을 뿐만 아 니라, 그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것으로 동서의 항로가 개척되고 진귀한 물건과 기계, 지식, 교법까 지 오고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카노의 지구일주로 지리학적 가설이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의해 지구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역사적 의미까지 꿰뚫어본 것이다. 최한기가 1857년에 엮은 지구전요(地球典要)는 천문학과 지리학과 해양학,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위치, 산물, 문화풍속 등을 소 개한 책이다. 이 책은 단순한 지리학 서적이 아니라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 세계가 있으며, 그 태양과 지구의 활동에 의해 인간사회도 국가도 문화도 종교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최한기의 기학적(氣學的) 세계관에서는 ‘기(氣)’가 우주 천지에 빈틈없이 가득 차 있고, 그 기 는 끊임없이 활동운화(活動運化)하고 있다. 해도 달도 지구도 모두 그 기 속의 하나의 사물이다. 그에 의하 면 “무릇 사람이 지구 표면에서 공생(共生)하면서, (해와 달과 지구가) 뱅뱅 도는 것에 의지하고, 기화(氣化) 를 타면서 평생을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夫人共生於地球之面. 資旋轉而乘氣化. 以度平生. 古今無異. 地球典要 序) 인간이란 항상 운화하는 기의 은혜를 받으면서 지구 표면에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지구운화 내 공존재(地球運化內共存在)’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환경에 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의 도래, 즉 ‘인류세(人類世)’가 거론되는 오늘날, 인간을 ‘지구운화 안’에서 ‘더불어 사는’ 존재로 본 최한기의 인간관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다 시 생각하게 만든다. 주제어 : 최한기, 기학, 지구전요, 운화, 지구운화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차 례

Ⅰ. 머리말

Ⅱ. 최한기의 지구개벽(地球開闢)

Ⅲ. 최한기의 신기(神氣)적 세계관

Ⅳ.‘기화(氣化)’‘운화(運化)’를 따르는 인간

Ⅴ. 서양근대과학의 자연관과 그것이 가져온 지구의 위기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조선에서‘지구(地球)’가, 다시 말하면 땅이 둥글다는 사실이 인식된 것은 중국에 입국한 예수 회 선교사들이 소개한 지구설이 전래된 17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이어서 김석문(金錫文, 1658-173 5),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이 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돈다는 자전설(自轉說)을 언급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1857(丁巳)년에 엮은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지구설, 지전설, 지동설을 총체적으로 소개했다.

최한기는 이 지구전요에서 프톨레마이오스[多祿畝], 티코 브라헤[的谷], 메르센[瑪爾象], 코페르 니쿠스[歌白尼]의 천체모델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앞의 세 모델은 지구가 움직이지(자전하지) 않았 으나 오직 코페르니쿠스만은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근본에 두고, 천체 운동의 계산이 잘 부합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최한기에게 그것은 단지 서구에서 중국을 경유해서 전래된 최신의 천문학설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구가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 사람 이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고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한 것이 아주 중대한 역사 적・사상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는 최한기의 지구 인식과 지구에 사는 인간에 대한 생 각,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최한기의 지구개벽(地球開闢)

최한기는 인류가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옴으로써“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증험한 것 은 인류의 인식 지평과 행동 범위를 넓히는 역사적 획을 긋는‘천지의 개벽’으로 보았다.

 

대개 천하가 두루 통하게 된 것은 대명(大明)의 홍치(弘治)년간에 유럽 서쪽 바닷가의 포르트갈인 카노[嘉奴](또는 엘카노; Juan Sebastián Elcano, 1476-1526)가 비로소 한 바퀴 돌았는데 이것은 바로 천지의 개벽(開闢)이다.1)

명나라 정덕(正德) 연간의 포르투갈 사람[葡萄牙人], 이름은 카노[嘉奴]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서 청 하고 5척의 배로 출발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서쪽 땅에 일러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돌아온 날 왕은 은으로 주조한 작은 지구 위에“비로소 땅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자가 바로 이 카노로다!”라는 글 자를 세긴 것을 하사해 주었다. 지금은 바닷길에 더욱 익숙해지면서 서양의 배가 동쪽에서 서쪽으 로 가거나, 혹은 서쪽을 지나서 동쪽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데 불과 8, 9개월간밖에 걸 리지 않는다. 즉 전 지구를 두루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앞사람이 길을 개척한 공로인 것이다.2)

여기서 엘카노가 돌아온 연대 등에 약간의 착오가 있지만3) 카노의 지구 일주를 최한기가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본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가? 최한기에 의하면 그 이후부터 배가 바다를 두루 오가게 되면서 사신들과 상인들이 번갈아 보내졌고, 진귀한 물산이나 편리한 기계, 문화와 사상, 종교 등이 널리 전파되면서 그것들이 모두‘성내(城內)의 젖’이 되었기 때문이다.4) 다시 말하면 최한기는 카노의 지구 일주를 지구화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그 이후 동서의 항로가 열리면서 통 상, 외교, 문화 등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세계가 풍요로워진 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Ⅲ. 최한기의 신기(神氣)적 세계관

최한기는 인류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지구’─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것 을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크나큰 의의가 있는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1837년

 

1)“盖天下之周通, 粤在大明弘治年間. 歐羅巴西海隅, 布路亞國人, 嘉奴, 始圜地球, 是乃天地之開闢也”,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2)“明正德年間, 葡萄牙人, 名嘉奴者, 稟請發船五隻. 東行旋續, 至西圜而返. 返之日, 王賜以銀鑄小地球上刻字云始圜地而旋者其嘉奴乎. 今則海道益習, 洋船自東往西, 或由西返東圜地而返. 計不過八九月之間, 卽可周行全地. 皆前人開創之功也.”, 地球典要 권1, 「海陸分界」 

3) 카노(엘카노)가 3년간의 항해 끝에 출발지로 돌아온 것은 1522년 9월이므로 명나라 嘉靖 원년이며, 弘治 (1488-1505)도 아니고 正德(1506-1521)도 아니다. 또 엘카노는 스페인의 바스크인이었는데 당초의 탐험대 총사령관이자 포르트갈인인 마젤란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지구전요에서 카노의 지구일주를 정 덕 년간으로 기술한 것도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죽은 연도(1521년 4월 21일, 正德16년)와 혼동해서 전해진 가능성도 있다.

4)“自玆以後, 商舶遍行, 使价遞傳, 物産珍異, 器械便利, 傳播遐邇, 禮俗敎文, 爲播越傳說者, 所附演, 無非城內之乳也.”,  神氣通 권1, 體通, 「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 

에 쓴 신기통(神氣通)에서 천지의 이치가 밝혀지면 인사(人事)가 이에 따라 밝혀진다고 주장했다.

역세(歷世)의 경험으로 저명해진 것에 이르러서는 역법의 이치와 지구보다 큰 것은 없다. 천지의 이 치가 점차 밝혀지면 인사(人事)가 이에 따라 밝혀지는 길이 있다. 즉 이것이 천인(天人)의 신기(神氣)이다. 만약 역법의 이치와 지구가 점차 해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인도(人道)가 더욱 밝아지는 것 과 상관없다면 이것은 하늘은 저절로 하늘이 되고, 땅은 저절로 땅이 되며 사람은 저절로 사람이 되어서 서로 상관이 없게 된다.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천・지・인・물은 곧 한 신기의 조화(造化)이

다. 천지의 이치가 점차 밝혀지면서부터 기설(氣說)이 점차 발전되고, 하늘・땅・사람・사물은 갈수록 증험하고 시험할 길이 있게 된다. 사람은 구규(九竅) )와 지체(肢體)를 갖춤으로써 하늘・땅・사람・사 물의 기를 통한다. (……) 만약 신기가 통하는 것에 말미암지 않고서 도(道)를 말함이 이와 같다면 이것은 근거 없는 말이고 사람을 속이는 짓이다. ) 

최한기에게 천지와 인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은 바로‘천인(天人)의 신기(神氣)’를 밝히는 것이 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을 단순한 전통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세계관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왜 냐하면 최한기는 천(자연)에는 사물의 천리가 있고, 인(인간)에는 인간의 천리가 있다고 보고 사물 과 인간의 이치를 다르게 보았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과 사물에 대해 그 천리(天理)를 가리켜 논한다면 모두 하늘[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천

(人天)이란 사람에 있는 천리이고, 물천(物天)이란 사물에 있는 천리이다.  ) 

이렇게 최한기는 사람의 천리(인천)과 사물의 천리(물천)를 구별했지만 둘을 갈라놓은 채 놓아두

지는 않았다. 물천과 인천, 즉 천지자연과 인간세상이 차등이 다르다고 보고, 그러면서도 그것은 신기(神氣)의‘운화(運化)’라는 축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회나 공동체를 가리키는‘통민운화(統民運化)’라는 영역을 일신운화(一身運化), 즉 인간 

개체와 대기운화(大氣運化), 즉 천지만물 사이를 매개하는 영역으로 설정했다. 

통민운화(統民運化)는 기학(氣學)의 추뉴(樞紐)가 된다. 통민운화를 준거해야 진퇴하는 바가 있게 되 고, 대기운화(大氣運化 또는 天地運化, 一氣運化)는 통민운화에 통달해야 그릇된 바가 없게 된다. 만약에 일신운화가 통민운화에 준거하지 않으면 인도(人道)를 제우고 정치와 교화[政敎]를 행할 수 없으며, 대기운화가 통민운화에 통달하지 않으면 표준을 세우고 범위를 정할 수 없다.8)

최한기는 대기운화・통민운화・일신운화를 통틀어서 삼등운화(三等運化)라고 불렀다. 그 규모로 보

면 대기운화가 가장 크고, 일신운화는 가장 작고, 통민운화는 그 중간이다. 그리고 이 셋을 기의 본성인‘활동운화(活動運化)’가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최한기는 지구전요를 편찬하면서 천문학, 자연학, 인문지리학의 지식을 기(氣)철학에 의

해 하나의 체계로 종합시키려 했다.

땅(지구)은 우주[宇內]에 있으면서 행성들이 뱅뱅 도는 것과 연계해서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온전해 지고, 기화(氣化)는 역법이 지구에서 제대로 일어나게 한다. 옛날부토 지구를 논한 책들은 각국의 영토[疆域]・풍토・물산・인민・정체[政]・풍속[俗]・역사[沿革] 같은 것들을 많이 말했으나 지구의 전체 운화(全體運化)는 오직 지구도설(地球圖說)만이 간략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지구전요) 첫 권으 로 채록(採錄)한다.10)

지구도설은 프랑스인 선교사 베누아(Michel Benoit, 중국명: 蔣友仁)가 지은 지구도설(地球圖說)(1799년)을 가리킨다. 이 책은 천주교회에서 금서가 막 해제된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을 재빨 리 중국에 소개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각국의 지리학에 관한 내용은 지구도설 범례(凡例)에서 주로 해국도지(海國圖志)(魏源 

엮음, 초판1843)와 영환지략(瀛環志略) 청 서계여(徐繼畬) 엮음(1849)에서 채록했으나, 다만 일본에 관한 기술이 둘 다 너무 소략한 것이 많기 때문에 해유록(海游錄)(조선 신유한申維翰 지음)에서 취하고 보태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지구전요 권11 「해론(海論)」에서는 서양의 선박과 해양생물의 소개와 조석, 바닷물이 짠 이

유에 대해 논하고, 「중서동이(中西同異)」에서는 서양과 중국의 별자리를 비교하고 중국에 전래된 서역(西域; 인도 및 이슬람)역법과 서양 역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양의 알 파벳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26자모는 흩어지면 무궁(無窮)하고 합치면 유한(有限)하며 그 용(用) 은 헤아릴 수 없으나 삼척동자(三尺童子)도 학습할 수 있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26자에 의지 해서 자세하게 논한다. )” 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어서 지구전요 12권에서는 「전후기년표(前後紀年表)」에서 서기[敎門紀年]와 중국 제왕의 재위기년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양회교문변(洋回敎文辨)」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그리고 그것을 중국에 소개한 주요 서적에 대해 비판적으로 소 개하고 있다. 또 각국의 역사와 문화도 모두 기화로 본 최한기는 지구전요 서문에서 기화(氣化)와 인간과의 관계를‘사문(四門)’으로 제시했다. 

대개 천인(天人)의 도(道)에는 다 기괄(氣括)이 있으니 어찌 맥락이 없겠는가? 지구운화(地球運化)는 행성들[諸曜]이 서로 비치는 것[照應]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사는 도리가 이루어지고, 지구의 운화 (運化)로 말미암아 기화의 사문(四門)으로 나눠서 배정한 (항목이) 생기게 된다. 항목[門]에도 각각 조목이 짜여 있고 우내(宇內) 각국의 역사의 자취를 이룬다. 이것을 읽는 자는 기화를 보고 인도를 세우며 인도를 행하면 인도가 정해진다. (하지만) 지구 표면[球面]에만 치우쳐 통달하고 기화를 보 지 못하고 지도를 말하고 인도를 생각하면 인도가 정해지지 않으니 지구 표면에 치우쳐 통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2)

여기서 최한기는‘기화’와‘인도’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인도를 제대로 세우고 실행하자면 지

구 표면에 대해서만 편협하게 통달해서도 안 되고, 인도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사문(四門)’ 즉 네 가지 항목의 내용은‘기화생성문(氣化生成門)’,‘순기화지제구문 (順氣化之諸具門)’,‘도기화지통법문(導氣化之通法門)’,‘氣化經歷門(기화경력문)’의 네 가지이다. 먼저‘기화생성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이 이루어낸 국토・기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순기화지제구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

문화와 주된 산업을 가리킨다. 

이어서‘도시화지통법문’은 인간의 기화기 통하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기화경력문’은 천인의 기화가 겪어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

외식민지 등을 가리킨다. 地球典要의 四門(항목) 

범주 氣化生成門 順氣化之諸具門 導氣化之通法門 氣化經歷門

내용 천지의 기화=자연환 경이 이루어낸 국토・기 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 천지의 기화=자연환 경에 순응해서 살아가 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 문화와 주된 산업 인간의 기화기 통하 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

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 도들 천인의 기화가 겪어

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외식민지 등

항목 疆域, 山水, 風氣, 人民(戶口, 容貌), 物産. 衣食, 宮城(都), 文字, 

歷 農(業), 商(市埔, 旗

號), 工, 器用(錢, 礮, 船, 財, 田賦). 政(王, 官, 用人) 敎, 學, 禮(樂, 葬), 刑禁(法, 兵), 俗尙(外道, 鬼神), 使聘(程途). 各部(島), 沿革.

 

12)“盖天人之道, 儘有氣括, 豈無脈絡. 地球運化, 由諸曜之照應, 而成人生道理, 由地球之運化, 而生排定氣化之四門. 門各有條織, 成宇內各國之史蹟. 讀之者, 見氣化而立人道行人道ㅡ 則人道定. 而可偏達于球面, 不見氣化而淡人道思人道. 則人道未定, 不可偏達于球面.”, 地球典要 序. 

Ⅳ.‘기화(氣化)’‘운화(運化)’를 따르는 인간

이 네 가지 항목들에 모두‘기화(氣化)’의 두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도 자연의 기후풍토

와 인간사회가 모두‘기’의 작용임을 잘 나타나 있다. 

활동하는 운화의 기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차고 천지의 정액(精液)과 인물(人物)의 호흡이 되는 것이 니, 조화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신령(神靈)이 이로 인해서 생긴다. 온 세상의 생령(生靈)들은 모두 이 활동운화의 기를 얻어서 활동하는 운화의 형체를 이룬 것이니, 비록 이 기와 서로 떨어지려 한 들 떨어질 수 있겠는가? 기화인도교(氣化人道敎)는 바로 옛날의 이른바 천인교(天人敎)이다. 옛날에 는 기화를 잘 알지 못해서 그것을 천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기이다.13)

기화인도교란 말 그대로‘기화’와‘인도’의 둘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다. 그가 말하는‘인

도’의 주된 내용은 윤리도덕과 사회질서[倫綱政敎], 생업[士農商工], 상식[日用常行] 등이다. 이에 대해‘기화’는 우주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의 조화, 변화, 활동이며 천체의 운행부터 기후변 화, 풍토 등 온갖 자연현상, 심지어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생리에게까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래서 기화와 인간은 결코 대등한 관계일 수 없다. 

최한기는 또한“운화의 기가 항상 (우리 몸속에) 스며들어 적시고 있는 것은 마치 어머니 뱃속에

서 태아가 어머니에서 자양(滋養)을 받아가면서 날마다 몸을 키우고 있는 것과 같다14)”고 말했다. 사람은 (그리고 만물도) 대기운화에 의지하고 그 혜택을 받고 사는 존재로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술도 대기운화(大氣運化) 즉 우주천지의 신기에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다. 사람이 만드는 도구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그 물건은 대기운화에서 나온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지고 대기운화의 기세를 본뜬 것일 뿐이다. 

기괄(機括)을 작동시켜서 기의 힘을 유통시키는 것도, 사물의 모양과 소리와 빛을 모방하는 것도 장 인(匠人)의 숙련된 솜씨가 금속이나 목재나 물과 불을 가지고 제작하는 속에서 기를 체득한 것이 다.15) 

사람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은 그의 솜씨가 기의 흐름・성질을 잘  따랐을[承順] 따 름이라는 것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원래 사람은 자기가 몰라도 일신운화(一身運化)가 는 대기운화

 

13)“活動運化之氣, 充牣兩間, 爲天地之精液, 人物之呴游, 造化由此而生, 神靈緣此而發, 四海生靈, 得此活動, 運化之氣, 以成活動. 運化之身, 雖欲與此氣相離, 其可得乎, 氣化人道之敎. 卽古所謂天人敎也, 古者氣化未暢, 故惟謂之天, 而其實則氣也.”,  人政 권8, 敎人門, 「氣化人道敎」 

14)“運化之氣. 常漬洽焉. 便是胎中之兒. 藉母精液. 有日日之滋養.”,  人政 권12, 敎人門, 「身運化爲本」 

15)“人造之器. 雖極巧妙. 必因大氣運化之材. 又效大氣運化之勢. 機括運動. 氣力流通. 摹傚物象聲色自然. 是乃工匠之鍊熟. 得氣於金木水火制作之中也.”, 人政 권13, 敎人門, 「巧妙生於氣」 

(大氣運化)를 따라서 운화한다. 다만 그것을 모르면 망령될 수 있다. 또 그것을 알고 있어도 역시 일신운화는 대기운화를 따라서 운화하는데 그것을 알고 있으면 능히 그것을 받들어 따를(承順) 수 있고, 또 그 방법을 남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결국 최한기에 의하면 사람은 원래 대기운화에서 마치 태아가 어머니에서 영양을 공급받고 몸을 

키우듯 기를 공급받고 살고 있다. 물건을 만드는 장인도 기에서 재료를 받고, 그 솜씨도 대기운화 를 잘 본받아서 따르는 것으로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와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로 최한기가 강조한 것이‘효(孝)’였다.

그는 흔히‘효’라고 일컬어지는 것에는 크고 귀한 것과 작고 평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작고 흔한 효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고, 크고 귀한 효는 신기에 섬기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는 효와 하늘을 모시고 섬기는 효는 모두 “아래에게 나쁜 것으로 위를 섬기지 말고, 위에게 마땅한 것으 로 아래로 미쳐야” 한다는‘혈구지도(絜矩之道)’가 있다고 한다.  ) 여기서‘위’는 대기운화(大氣運化)를 의미하고,‘아래’는 인도(人道)의 효를 의미한다. 부모를 만족시키는 인도의 효를 소홀 히 해서 대기운화에 승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대기운화──자연의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평생토록 받들어 따르는[承順] 것은 하늘과 사람의 운화이고, 자손이 평생토록 승순하는 것 도 또한 하늘과 사람의 운화이다. 따라서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서 효를 찾으면 온갖 선(善), 수많은 덕행은 모두 그 속에 포함된다. 하늘과 사람의 운화를 버리고서 효를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시시 한 풍속이요 겉보기만의 말초적인 예절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 거역하여 효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과 말단이 서로 어긋난 짓이다. 만약 천지와 부모가 태어난 본체(즉 신기)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 정(情)이 가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의 비판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 은 불효(不孝)이다. 만약 하늘과 사람의 운화에 승순하는 것을 효와 무관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운화 도 효도도 모두 모른다는 말이 된다.18)

최한기는 하늘과 땅을 섬기는 효에 통달한다는 것은 (흔히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제사지내듯) 향 을 피우고 축문을 낭독하며 절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의 효를 확충시켜서 대기운화를 밝 히고 크고 절실한 덕을 베푸는 것이어야 하늘과 땅을 섬기는 효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지의 공덕을 아직 모르는 백성들을 깨우치고, 법도를 어긋난 자는 지도해서 감화시켜야 한다. 수많은 백 성들이 모두 위대한 천지의 자손임을 알리고, 만사를 잘 처리해서 백성 모두가 위대한 신기의 자 양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큰 효라는 것이다.19)

Ⅴ. 서양근대과학의 자연관과 그것이 가져온 지구의 위기

이와 같은 최한기의 인간관・자연관・기술관은 서양근대과학의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과학사상사 연구자인 이토 슌타로(伊東俊太郞)는 서양근대과학의 두 가지 특징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추진한 자연의 기계론적 비인간화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외친 자연의 조작적 지배라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주장이 아니라 서양의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준비된 것이라 고 설명한다.

고대(그리스)에서는 신・인간・자연을 일체의 것으로 감싸는‘자연(피시스physis)’를 생각했는데, 

중세 기독교 세계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그리스적인 피시스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범자연주의 (汎自然主義)가 무너지고 신과 인간과 자연의 분명한 계층적 구조로 변했다. 거기서는 자연도 인간 도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창조주로서 그것들과 완전히 초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즉 이 셋은 각각 그 상위의 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졌 다. 이제 인간과 자연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가 되었다. 이것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기 계론적(機械論的) 자연관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이토 슌타로는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과학혁명’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 특징을 들었 다. 첫째, 중세까지 전해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상(宇宙像)이 해체되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생기론적 자연관에서 근대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상(自然像)

으로 전환되었다. 셋째,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이 결합되었다.

넷째, 중세에서는 주로 신학자가 피조물로서의 세계 전체를 정합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문제도 다루었다. 이에 대해 과학혁명 이후에는 그런 문제를 세계 전체의 사변적 고찰 과 분리시켜서 하나의 특수한 영역의 특수한 현상에 문제를 한정시키고 실험실에서 실험적 조작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지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근대적‘과학자’가 등장했다.

이상과 같이‘세계상’‘자연관’‘방법’‘담지자’의 네 가지 국면에서‘과학혁명’은 중세에 서 스스로를 구분시키는 새로운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20)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면서 자연과 분 리된 인간은 점차 고대적인 자연관을 탈피하면서 자연을 인간 정신은 자연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19)“又推達於事天事地之孝, 不可以香祝禱祀. 伸萬一之孝, 當明大氣運化敷施之大切德, 民生之不知者, 曉喩而使之知. 違戾者, 指導而感化焉. 億兆生靈, 咸知爲大天地之子孫, 萬事裁御, 皆感乎大神氣滋養.”, 明南樓隨錄 20) 伊藤俊太郞, 近代科学の源流, 東京: 中央公論新社, 2007, pp.344-353 참조.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주 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베이컨과 데카르트이다.

이와 같은 철학에 입각한 서양근대과학은 과연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러한 근대인 의 활동이 마침내 지구환경에 심각한 흔적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산업혁명 초기 대량으로 석탄연 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한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그 이후 150년 동안 점진적으로 증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증했다. 현재 다양한 지표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급격하고 명백한 혼란을 야 기했다.21) 

전 세계적인 경제 성장, 자원 이용, 쓰레기 량과 관련한 장기적인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불 렸고, 이 같은 추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22) 이러한 지구의 상황을 가리켜 과학자들은“우 리는 새로운 지질학적‘세’가 아니라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지구 역사에 초래한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대’, 바로 인류세(Anthropozoic era)에 진입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23) 했다. 그런데 이 인류세는 과연 인류 이외의 종에 대해서 너무나 위협적인 일이기도 했다. 유네스코 

사무국장고문이자 비교문명학자 핫토리 에이지(服部英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실제로 이 혹성에서는 야생이 사라지고 이 지상에 사는 동물(곤충은 제외함)의 총수의 60%가 가축인 것이다. 그리고 36%가 인간이고 야생동물은 4%밖에 남아 있지 않다. 생물 다양성은 이 지구 에 인간이 없었던 경우와 비교하면 천 배의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매일 120종의 종이 사라 져 간다. 과제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근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그러한 인 류의 눈을 뜨게 하듯 거대 대풍, 용오름, 쓰나미, 가뭄, 산불, 대홍수 심지어 신형 바이로스의 탄생 으로 인류에게 보복하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위협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2015년의 파리 협정은 18세기말 산업혁명 전에 비해 더 2도 기온이 상승하면 지구는 작열지옥(灼熱地獄)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기온은 계속 상승하고 있으며 사실은 이미 0.5도밖에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상황으로는 4도 상승마저 예상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조짐 은 이미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진보를 외치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인류는 오랫동안 망각했던 계시록적인 종말이 결코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24)

이와 같이 서양근대 과학문명과 손잡은 자본주의와 현대인의 소비생활이 지구와 생물들에게 엄

청난 환경파괴와 생물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의 변화가 지구온난화와 재해, 전염병 등을 가져옴으로써 인류 스스로도 위협받게 되고 있다. 이제 지구와 자연에 대한 근

 

21)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지음,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17쪽.

22) 위의 책, 17쪽.

23) 위의 책, 20쪽; Charles H. Langmuir and wally Broecker, How to Build a Habitable Planet, revised edi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p.645.

24) 服部英二, 地球倫理への旅路 : 力の文明から命の文明へ, 札幌: 北海道大學出版會, 2020, pp.252-253.

본적인 시각의 전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최한기의 자연관과 인간관이 이러한 현대문명의 위기 상황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Ⅵ. 맺음말

‘지구(地球)’ 즉 땅이 둥글다는 설은 중국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양에 소개하고 17세 기 무렵에 조선에도 알리게 되었다. 이후 김석문(金錫文)・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 등이 지구가 하 루에 한 바퀴 돈다는 자전설을 소개하고, 19세기 최한기(崔漢綺)의 지구전요(1835년)가 비로소 지 구설・지동설・지전설을 통틀어서 소개했다. 특히 최한기는 프톨레마이오스[多祿畝], 티코 브라헤[的谷], 메르센[瑪爾象], 코페르니쿠스[歌白尼]의 천체모델을 차례로 소계하면서 오직 코페르니쿠스의 설만이 태양이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그 주변을 돈다가 소개하면서 이로 인해 천체 운동의 계산이 잘 부합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최한기는 인류가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와서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역사

적인 큰 획을 그은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카노(엘카노)가 살아남은 마젤란 함대를 이끌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일을‘천지의 개벽’으로 칭찬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지구일주 항해로 인해 동서의 항로가 열리고 지구 전체가 뱃길로 하나로 통하게 되고, 각지 의 산물이나 기계, 문화, 사상 등이 서로 교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사물은 바로 하나의 신기(神氣)의 조화이기 때문에 지구(땅이 둥글다는 것)가 실제로 확인 되고 천지의 이치가 더욱 밝혀지면 이에 따라 인사(人事), 즉 인간세상의 일들도 밝혀지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초기의 저작인 신기통(神氣通)(1836년)에서는 사물의 천리[物天]과 사람의 천리[人天] 을 구별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는 각각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양자를 혼동시 킬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양자는 어떤 공감대──그것이 바로 신기임──가 존재한다고도 보 고 있었다. 그 이후 최한기는 그것을‘운화(運化)’로 밝혔다. 그는 신기의 성질을‘활동운화(活動運化)’로 보고, 우주자연을 대기운화(大氣運化), 인간사회를 통민운화(統民運化), 인간개체를 일신 운화(一身運化)로 구분했다. 그 규모에는 차이가 있고 대기운화가 가장 크고, 통민운화가 그 다음이 고, 일신운화가 가장 작다고 보았다. 

지구전요(1857년)에서는 천문학, 자연학, 인문지리학 등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다르고 있다. 먼 저 태양계의 운행과 태양과 달과 지구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설명했다. 이 어서 지구의 운화로 기화(氣化)의 네 가지 항목[四門]이 생긴다고 하면서 각국의 지리에 대해 소개 했다. 이것은‘기화생성문(氣化生成門)’,‘순기화지제구문(順氣化之諸具門)’,‘도기화지통법문(導氣化之通法門)’,‘氣化經歷門(기화경력문)’의 네 가지인데 먼저‘기화생성문’은 천지의 기화=자 연환경이 이루어낸 국토・기후풍토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구 및 생산되는 물산을 의미한다. 다음으 로‘순기화지제구문’은 천지의 기화=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생활문화와 주 된 산업을 가리킨다. 이어서‘도시화지통법문’은 인간의 기화기 통하도록 인도하는 여러 제도들, 정치, 학술, 군사, 법률, 예법, 종교, 외교 등의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기 화경력문’은 천인의 기화가 겪어온 역사와 국내의 각 지역 및 소속하는 섬, 해외식민지 등을 가 리킨다. 

최한기는 각국의 기후풍토, 문화, 경제, 산품, 정치체제, 종교, 외교 등등 다양한 조목들을 이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지구운화(地球運化)가 나라마다 나름대로의 기후풍토를 낳고, 그 기후풍토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각각 나름대로의 생활문화와 산업을 낳고, 그런 사람들 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라마다 고유의 역사를 엮어간다. 그러한 단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한기는 사람이 천지에 가득 차고 활동운화 하는 신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

다. 지구전요에서 각국에 대한 다양한 조목들을 분류하는 네 가지 항목도 역시 그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만물은 활동운화하는 신기 안에서 만물을 살리는 기의 혜택을 받아서 살고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사람의 기술마저 기괄(機括)을 작동시켜서 기의 힘을 유통시키는 것도, 사물의 모양과 소

리와 빛을 모방하는 것도 장인(匠人)의 숙련된 솜씨가 금속이나 목재나 물과 불을 가지고 제작하는 속에서 기를 체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최한기의 자연관, 인간관, 기술관은 서양과학의 사고방식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관은 신・인간・자연은 모두‘자연(피시스physis)’로 포괄되었다. 그러 나 중세에 와서는 신・인간・자연은 확연히 구별되었다. 자연도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창조 주로서 그것들과 완전히 초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신을 위하여 존 재한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과 자연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 이미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점차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적인 자연 관을 벗어나면서 자연에 대해 인간 정신은 자연을 이성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 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을 주도한 것이 바로 베이컨의 기계론과 데카르트의 물신 2원론이다.

그러한 철학에 지탱된 서양근대과학은 오늘날까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환경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산업혁명 초기에 석탄연료의 대량 사용이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이 기후 시스템을 교란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지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대개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급증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전 세계적인 경제 성 장, 자원 이용, 쓰레기의 양 등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이 생 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지구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 래서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현대를 가리켜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지구역사에 가져온 변화와 버 금가는‘인류세(Anthropozoic era)’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구적 자연관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채 인간 이성이 기계론적 자연을 인식하고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원자론적・기계론적 자연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지구전요 서문 에서“무릇 사람들이 지구의 표면 위에 함께 살면서 (행성들이) 도는 데에 의지하고 기화를 타서 평생을 돕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고 말했다. 이와 같은 그의 인간관에 굳이 이름 을 붙인다면“지구운화 내 공존재(地球運化內共存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와 생태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도 높아 지고 있는 오늘날, 최한기의 생각이 시사를 주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氣學

明南樓隨錄

神氣通

人政

地球典要 推測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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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정, 「地球典要」에 나타난 최한기의 지리관」, 지리학논총 제45호,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 소, 2005. 야규 마코토(柳生眞), 崔漢綺 氣學 硏究, 서울: 景仁出版社, 2008. 이면우, 「地球典要를 통해 본 崔漢綺의 世界 認識」, 인문사회교육연구 제3호, 춘천교육대학교 인문사회교육연구소, 1999.

崔漢綺 저, 李佑成 편, 明南樓全集, 서울: 驪江出版社, 1986.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지음, 인류세, 정서진 옮김, 서울: 이상북스, 2020.

伊藤俊太郞, 近代科学の源流, 東京: 中央公論新社, 2007. 服部英二, 地球倫理への旅路──力の文明から命の文明へ, 札幌: 北海道大學出版會, 2020.

 

【지구형이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