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1

希修 영적(?) 성찰/수행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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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성찰/수행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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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가 자주 충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첫째로, 종교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고 또 당장 세상을 바꾸는 일보다는 나 자신 어떻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그 최우선 관심사이기 때문. 남을 바꾸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종교도 있고. 그리고 둘째로, 대부분의 영적 전통들에서는 이승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표면 아래에 어떤 섭리 (그것이 신의 계획이든 업이든 뭐든)가 부분적으로나마 작용하고 있다고 믿기에, 운명 결정론까지는 아닐지언정 일단은 그 섭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불평불만하지 않는 것을 현실 개선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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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불평불만이나 남 탓 하지 마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넌 왜 그리 부정적이냐?" 류의 얘기가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혹은 오히려 피해자의 '회개'/'참회'를 권하는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성도 다분. 이런 행동은 성직자조차 극도로 조심해야 할 일이건만, (1) 성직자도 아닌 사람이, (2) 사회적 이슈 관련하여, (3) 영성 관련 입장이 자신과 동일하지도 않은, (4) 그리고 그 이슈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운동가/실천가 혹은 제3자에게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탄압처럼 작용할 수도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 그런데 류시화 시인의 12월 3일자 게시물에서 그런 의도치 않은 부작용의 가능성이 보여 불편했던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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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전쟁을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평화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그녀를 나는 더 좋아할 것이다. ... ... '거위털 패딩이 싫다'라고 말하는 대신 '손으로 뜨개질한 네팔산 스웨터가 좋다'라고 말하는 그녀를 나는 만나고 싶다. ... ...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나는 불행한 것이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행복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싫어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예민함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자기 주위에 벽을 쌓는 쪽으로 그 재능이 쓰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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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싫어한다 말하지 말고 평화를 좋아한다 말하라고 테레사 수념이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은, "환경보호가 좋아요"라는 시위보다 "탄소배출을 줄이자"라는 시위가 좀더 효과적이지 않겠는지. 암튼, 종교적 성찰/수행과 지구라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병행하는 일 혹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 마치 서커스 외줄타기처럼 어려울 수밖에. 그러니 이 문제는 오롯이 각자의 사적인 문제로 남겨두는 게 좋지 않겠나 싶다. 특정 종교 단체 내부에서 그 종교의 신자들끼리 상호작용하는 상황이 아니라 종교 밖 맥락에서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할 때는, 가급적 법과 상식에만 근거하여 비판을 하든 논쟁을 하든 요청을 하든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고. 전혀 다른 두 층위를 뒤섞어 남에게 강요하거나 남 억압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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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최소한 초기불교에선 긍정을 위한 긍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초기불교 관점으로는 긍정을 위한 긍정은 오히려, '망상'이나 '긍정 에너지가 가져다 주는 감각적 즐거움에의 집착'이라고까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27911976579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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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希修 긍정 에너지가 가져다주는 감각적 즐거움에의 집착 이 말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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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당장 기분 좋고 마음 편한 것이 중요하기에 모래 속에 머리 파묻고 현실 부정하는 타조같은 어리석음 + 뭔가 좀 심오해 보이고 싶은 허영, 이 둘의 결합이 바로 '긍정을 위한 긍정' 아닌가 싶어요 - 전부는 아니지만 적잖은 경우. 아, 나 왜 이리 '부정적'이고 '예민'하며 '삐딱'까지 한지 말이예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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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希修 심오해 보이고 싶은 허영 이거 보니 생각나는 사람 있네요... 제 눈엔 뭐그렇게 심오한거 같지 않은데 주변 반응은 엄청 깊이가 있고 철학적이고 내면이 꽉 차있고 등등등 이랬거든요. 이걸 보고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그 사람이 듣고싶어하는 말을 놀랍도록 잘 캐치한다 싶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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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Jihye Tak 소비자의 필요와 기호/취향에 민감해야 팔리니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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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여자라 만만하니 공개적으로 고나리질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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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불교에 대한 오해 #5. 나보다 남을 우선하는 것이 무아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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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대한 오해 #5. 나보다 남을 우선하는 것이 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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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앞에서 무조건 자신을 낮추고, 자신보다 남을 더 위하며, 매사 남의 생각을 따르고 남의 비위를 모두 맞춰 주어야 '무아'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에고가 너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 역시 초기불교의 관점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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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인간이 이 세상 전체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그 누구도 타인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고, Rājan Sutta는 인정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예외적인 면이 있지만,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사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상대를 소비하는 행위'라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a). 이런 상호 간의 소비가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며 그 합의대로 이행되고 그 과정에서 쌍방이 보람을 느낄 때를 '건강한 관계'라 부르며, 그렇지 않고 일방적 소비/학대가 될 때 '불건강한 관계'가 되는 것. 이걸 인정하고 기억해야 서로 조심하며 존중할 수 있고, 그러지 못 하면 죽고 못 산다며 결혼해 놓고는 원수되어 이혼하는 것. 그러나 부처님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고 인간의 현실을 미화하시지도 않는다. Charlotte Joko Beck 선사 역시, 무아는 self-centered도 아니고 타인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other-centered도 아니며 그냥 centered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centered'는 자기호흡에 대한 관조를 단 1초도 놓지 않는, constant mindfulness를 의미.) 그러니, 자신보다 남을 우선하라는 가르침이 불교의 무아라는 생각은 오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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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어른대접 않는다고 야단치자, 우리 승단에서도 당연히 어른을 공경하는데 어른은 나이만 많다고 어른이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 어른이건만 내 눈에 지금 여기서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라고, 부처님 제자가 그 노인에게 대놓고 말하는 일화가 잡아함 20권 547경에 나온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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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생토록 수행한 노인들도 세상에 수두룩하건만 새파랗게 젊은 수행자인 그대가 어떻게 감히 해탈했다고 주장하는가?라고 Pasenadi라는 왕이 부처님을 힐난하자, 나이와 지혜는 무관하다,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유일하게 본인뿐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도 Kosala Saṃyutta에 나온다 (c). (이 일화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나 혼자 fully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에도 방증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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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수행하는 이는 남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겸손 강박'은 2번에 이어 3번에서도 무참히 깨진다. (그렇다고 3번 일화를 "부처님의 잘난 척"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세상 모두가 자신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으면 불안/불편해 못 견디는 열등감과 오만이 결합된 꼬인 마음일 뿐.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셨을 뿐.) 암튼 우리가 생각하는 종류의 겸손이 불교에서도 중요하다면, 2번이나 3번 같은 사례들, '오만방자'와 '에고'라는 것의 전형으로 보이는 이런 사례들은 아예 경전에 나올 수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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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위 세 가지 경우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남보다 낮추거나 무조건 남을 편하게/기분좋게 해 주려는 노력이 불교의 가르침과는 퍽 다르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으라고 불교는 가르치는 것인가?하면 물론 그것도 당연히 아니다. 마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을 때 portrait 모드로 찍으면 주인공 얼굴만 또렷이 나오고 그 외에는 흐릿하게 나오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나'라는 대상/주어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그러지 말고 촛점을 과정/술어에 두고서 매사를 impersonal 하게, '나의 이익/즐거움/소망'의 관점이 아닌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라는 것이 바로 불교의 무아라고 나는 이해한다 (d). 'not selfish/arrogant'는 이런 전환의 결과일 뿐 무아의 목적은 아닌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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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오해들을 갖게 된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한 쪽 극단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반대쪽 극단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의 맹목성 때문 아닐까 싶다. 불교의 업이론은 "과거 업도 미래 업도 니 컨트롤 밖이고 니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니 행동뿐이니 매순간의 현재에서 탐진치 없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 요지. 다시 말해, 매순간 짓는 선업을 그동안 축적되어 온 과거의 업에 추가함으로써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라는 얘기. 업이론 자체 내에 이미 '가능성'과 '희망'이 내재되어 있건만,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이미 충분히 긍정적!이건만, 우린 비관적/부정적인 내용도 무조건 비틀고 왜곡하여 억지로 낙관적/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무아도 마찬가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은 남을 우선시하고 나를 낮추는 데에 있지 않다. 나의 이기심이나 남의 이기심이나 '수준 낮'기는 매한가지이건만, 나의 이기심에 복종하여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남의 이기심에 맞춰 내 삶을 사는 일이 대체 어떻게 '현명한' 일이 될 수 있겠는지? '나는 겸손한,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집착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자기중심주의의 뒷면일 뿐, 여전히 '과정/술어 아닌 대상/주어에 대한 집착'이라는 one and the same 동전인 것. '내가 남보다 위'라는 생각뿐 아니라 '내가 남보다 아래'라는 생각 역시 conceit (자만)이라고 아비담마 (e)가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며, 우리가 생각하던 식의 겸손이나 사랑 대신 사무량심으로 충분한 것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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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Our bodies need physical food for their well-being. Our minds need the food of pleasant sensory contacts, intentions, and consciousness itself in order to function. If you ever want proof that interconnectedness isn't always something to celebrate, just contemplate how the beings of the world feed on one another, physically and emotionally. Interbeing is inter-eating. As Ajaan Suwat, my second teacher once said, "If there were a god who could arrange that by my eating I could make everyone in the world full, I'd bow down to that god." But that's not how eating works."
https://www.accesstoinsight.org/…/thani…/purityofhear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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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존경은 지혜에 비례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23643054006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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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ttp://www.suttas.com/8203chapter-3-kosala-samyutta-with-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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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무아와 윤회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15007984869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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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자만 => #20.

https://www.facebook.com/photo?fbid=924118681293549&set=a.906304756408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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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용서와 자비희사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95805154124900




4崔明淑 and 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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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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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soo Hong 나의 즐거움을 위해 상대를 소비하는 행위.. 뼈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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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Sungsoo Hong 부처님은 사랑/pema에 대해 부정적이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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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Beecher 첫 1년은 무조건 아이가 원하는 대로 100% 다 해 주고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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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상상황에서도, 내 몸이 아파도 도움받을 곳 없이, 배달이라는 건 소금처럼 짠 도미노피자밖에 없던 시절 외국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때로는 왠지 운명에 속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지만.. 살면서 우울한 기분이 들 때, 특히 코로나 시기 기분이 다운될 때마다 '아이들 둘 다 건강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엄청난 복인가?'를 생각하면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쑥 들어간다. 이런 저런 복들 중에 자신이 받고 싶은 복을 선택하고 저 어려움이 이 복에 반드시 딸려오고, 삶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둘째가 기저귀 떼고 나자 수 년동안 축적된 심신의 육아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면서 우울증 초기증상이 보이던 시기도 있었고 몸건강 회복에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내 경우엔 해 본 일들 중 가장 힘들었던 것도 가장 보람있다 생각되었던 일도 육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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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친 Beecher의 얘기에 공감이 가서. 첫 1년은 무조건 아이가 원하는 대로 100% 다 해 주고 그 후론 부모의 말을 take seriously 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more than worth all the effort 하다고 나도 생각. 수달의 저 모습은, 낮이건 밤이건 내가 아이들 재울 때 실제로 딱 저 모습으로 매일 저렇게 인간침대가 되어 주곤 했음. 아이가 낮잠을 자야 나도 '아이에 종속된 노예' 아닌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자유시간을 좀 가질 수가 있는데, 큰 아이는 낮잠을 거의 안 자는 편이었기 때문에 어떤 날은 오후 내내 저러고 있다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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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걱정 없이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내가 받은 많고 많은 복들 중 하나. 코로나 시기가 되고 보니 특히, 내 정신건강을 지탱해 주는 것도 결국은 남편과 아이들과, 아기 때는 역시 수달처럼 안아서 낮잠을 재운 애견, 애묘.. 아, 페북도 있네, ㅎㅎ..




13Sungsoo Hong and 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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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Han 다 커서 나가면 더 좋습니다. 다시 들어올까봐 걱정되기도 하구요. ㅋ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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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동시에.. 이것도 사실..

https://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753341374915018&id=100007175478579&ref=content_fi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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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성공하거나 경제적 여력이 있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여성의 70% 가량은 비혼을, 남성의 80% 가량은 결혼을 택할 거라는 통계를 보았다. 이 기사를 보고, 잠깐 멈칫한 것이, 그렇게 많은 여성이 비혼을 원한다는 게 놀라워서였다. 반면, 남자들은 경제적 여력만 있으면 대부분 결혼을 원한다는 것인데, 이런 차이가 다소 의아하기도 하면서, 머지않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먼저 떠오른 건, 내가 청년 시절을 거치며 보았던 여성 친구들이었다.

학교에서, 스터디를 하면서, 그밖의 공간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모두는 저마다 삶에 대한 열망이나 꿈, 직업적인 희망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는 PD가 되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기자가, 누군가는 음악인이나 변호사, 건축 디자이너나 금융회사 직원이, 교수나 교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 중에서 빨리 결혼해서 평생 엄마로만 살고 싶다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었다. 이는 남여가 전혀 다르지 않았고, 실제로 함께 협력하거나 경쟁하면서 그런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는 게 내가 아는 청년 시절이었다.

그런데 삼십대 중반쯤 되어 주변을 둘러보니, 결혼으로 자기 사회생활이나 경력이 타격을 입은 남성은 거의 단 한 명도 없는 반면, 여성들 중 거의 절반 이상은 직장을 그만두었고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자발적으로 그만두고 오히려 가정생활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비자발적인 포기가 훨씬 많을 뿐더러,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전업주부를 택한 여성들도 대략 아이가 학교 갈 때쯤부터는, 그 단절된 경력을 복구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결혼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놓고 봤을 때, 이게 현실적으로 남성에게 주는 영향 보다는 여성에게 주는 영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실제로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결혼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인식 차이는 그런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남자는 일단 자기가 성공하고 돈만 많이 벌면, 자기 취향에 맞는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기 자신의 사회생활에는 어떠한 타격도 없이 인생을 이어가리라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여자는 아무리 자기가 성공하더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엄청난 갈등과 고민 속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말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적인 벽 앞에 선다는 걸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아직 사랑하는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그 무언가에 마음을 주고 딜레마에 빠지기 전부터, 자기가 꿈꿔왔고 사랑해왔던 직업이나 진로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남여가 이성을 더 필요로 한다든지, 더 사랑하고 함께 살고 하고 싶어한다든지 하는 문제와는 다소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한, 사랑과 연애, 이성을 만나는 일에 대한 관심은 결코 여성이 남성보다 덜하지 않다. 오히려 남성 못지 않게 여성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고, 행복한 삶을 함께 꾸려나가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사랑이나 연애 같은 문제를 넘어서 '결혼'의 문제가 되면, 무엇을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고, 그 지점에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남성에게 결혼은 무척 자연스러운 연애와 사랑의 연장이라면, 여성에게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포기와 단절을 먼저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동네 문화센터에 가보면, 열에 여덟은 아이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열에 둘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데리고 온다. 그것만으로도 결혼과 출산 이후, 삶의 지형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거의 즉각적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지역마다 맘카페는 있어도, 

아빠들 모임은 찾기가 어렵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길 꿈꿀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런 새로운 삶은, 플러스에 가깝기만 한 반면, 누군가에게는 마이너스를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여가 다르지 않았던, 같은 인생 레이스를 달린다고 믿었던 이십대 이후에, 삶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각자에게 가혹해지는지를 점점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적어도 결혼이라는 것은, 그 시작 전부터 여성에게 훨씬 가혹할 수 있는 무엇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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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인영 어제 면접관으로 신입 엔지니어를 뽑고 온 남편이,
    여성 엔지니어 두명을 적극 추천해서
    결국에 최종 선발을 시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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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1차 방정식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우주선 만들어 달나라에 갈 수 있을까?

(2) 希修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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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방정식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우주선 만들어 달나라에 갈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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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우주선 하나를 만들려고 하면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등 습득해야 할 지식도 기술도 얼마나 많겠으며 얼마나 어렵겠나. 단계별로 필요한 모~든 매뉴얼과 재료들이 내 수중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한들, 아마 천 년, 만 년이 걸려도 난 우주선 못 만들 것. 그러니 그런 과학적 원리들 다 필요 없다면서 무시, 그냥 플라스틱 갖다가 대충 모양만 만들고서 '우주선'이라 부르고 싶은 마음도 들기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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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주석서, 2차 주석서, 3차 주석서 끝도 없이 가지치기를 해 나가면서 이론을 너무 복잡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비판도 할 수 있으나 (사실 그 당시로서는 그게 철학이고 과학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서, 주석서는 물론이요 초기경전도 이해하겠다고 골치 썩일 필요 없다. 명상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볼 때 내게 드는 생각은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등 전혀 모르는, 1차 방정식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만든 플라스틱 우주선이 과연 달나라에 실제로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 그리고 '부처님은 그럼 단지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필요치도 않은 얘기들을 쓸데 없이 늘어 놓은 새디스트였다'는 뜻이 되고 마는데, 불자라는 분들이 그런 주장을 그렇게 당당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엄청나게 충격적. 남들 앞에서 아무리 '겸손'한 척을 한들 이보다 오만한 생각이 과연 가능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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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선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생멸의 과정을 겪는다 하는데, 현생 우주가 91번째라던가. 암튼 10의 68승 단위라는 無量大數로도 그 총 길이를 측량할 수 없는 91번의 싸이클동안 부처님은 겨우 여섯 분 (우리가 아는 고타마 부처님 포함)에 불과하고, 그 중 세 분은 깨달음 후 가르침을 남기지 않고 그냥 혼자 조용히 계시다 돌아가셨다는데, 그 이유는, 그 복잡한 내용을 가르칠 능력도 없고, 가르친다 한들 듣고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존재들이 이 윤회계에 몇 안 되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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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쉬운 담마'라는 건, 공부하는 사람의 비현실적 탐욕이거나 가르치는 사람의 사기일 수밖에 없는 것. 이런 현실에서 "10의 68승 아니라 10의 68,000승이라는 단위의 세월이 수천억 번 반복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난 매 생에서 내가 내디딜 수 있는 단 한 발자국씩이라도 내딛겠다. 한 번에 오직 그 한 발자국만! 염두에 두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담마의 이해와 명상이라는 두 가지에 부처님은 동등한 비중을 두셨지만 우린 골치 아픈 거 빼고 명상만 하자"는 입장도 있을 것이며 (이건 실은 1차 방정식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미적분 풀겠다는 격. Thanissaro 스님, Bodhi 스님, Dhammavuddho 스님 세 분 모두 8정도의 8요소는 그 순서대로 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심), 또는 "공부도 명상도 둘 다 안 해도 그냥 손바닥이 닳도록 빌기만 하면 부처님/보살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허구를 만들어 퍼뜨리자!"라는 기획도.. 실제로 일어났고 번창해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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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각자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기에, '~교 신자'라는 꼬리표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고 자주 느껴진다. 모든 종류의 꼬리표가 다 그렇듯이. 등산을 하다 보면 길을 잃었다가 등산로로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듯, 서로 마주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삶의 여정과 비슷한 것도 같고. 하긴 결혼해서 수십 년을 지지고 볶으며 살아도 치약을 튜브 위에서 짜느냐 아래에서부터 짜느냐 이런 사소한 습관도 완전히 맞춰지지 않으니 당연한 얘기.
그런데도 우린 늘 뭔가를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그러나 정작 내 편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덜 열성인, 이 소망과 모순 사이에서 평생, 매번, 방황..




6崔明淑, Sungsoo Hong and 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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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치약으로 진짜 싸워요???

希修 ㅎㅎ. 저희 부부의 경우엔 치약은 문제가 아니지만, 저런 사소한 것들이 끝내 맞춰지지 않는 게 간혹 있어요. 예를 들면, 저는 커피 탄 후 그 티스푼을 접시나 냅킨 위에 놓는데, 저희 남편은 꼭 테이블이나 부엌 카운터탑 위에 놓아서 표면을 끈끈하게 만들거든요. 결혼한지 18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차이 하나 좁혀지질 않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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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Jihye Tak 希修 서로가 보는 효율이나 청결의 기준이 다르면 거슬린다 이 말씀이시죠?

希修
希修 Jihye Tak 네. 그냥 넘어가는 법을 배울 뿐, 그 기준 자체가 달라지진 않는 것 같아요. 진짜 사소한 건데.. 신기하죠..

Jihye Tak
Jihye Tak 希修 흠 저는 아무상관 없을거 같은데 결혼적합형 인간일까요? 치약은 걍 두개 사면 되는거 아니에요? 제가 결혼이 꺼려지는 건 그런거보다 뭔가 좀 제 자아가 침범당할거 같고.. 그런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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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希修 맞아요. 그러니 이런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는 법을 배우는 거죠. 치약 두 개 산다든가 하는 방편을 찾거나..
정말 중요한 건 제 생각엔, (1) 가치관의 compatibility, 그리고 (2) 의사소통의 기술!!

'마음'만 갖고 절대 되지 않습니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건 사실 무수한 고리들로 연결된 도미노 효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 고리들 사이의 연결을 하나 하나 이해하고, 그 고리들 중 어느 부분이 비합리적인지 우선 이해해야만 갈등 해결의 '가능성'이라도 생겨요. 이렇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엄청나게 허접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자체는 또 엄청나게 중요하죠. 그리고 이걸 인정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과 상대에게 바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표현/전달할 수 있는 기술도 중요하구요. 그런데 대개는 '마음'만 강조하죠. 너무 추상적이고, 마음만 갖고는 너무 부족한데 말이예요..

希修
希修 자아침범의 문제는.. 그러니 자신에게 중요한 우선순위를 잘 알아야 하고,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기회비용과 그 관계가 청구하는 기회비용이 비슷한지도 정확히 판단해야 하고, 살면서 상황도 자신도 계속 변해 가기에 상대와 늘 재합의 재타협하는 소통이 또 역시 중요해지죠.
그래도 이 과정을 겪어 나가면서 서로의 평생 베프가 될 수 있다면, 이 조건 하에, 저는 결혼 강추하는 입장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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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Jihye Tak 希修 그죠... 저도 그게 중요하다 생각해요.. 내 의사랑 감정을 명확히 표현하기만 해도 뭐... 딱히 문제생길 일이 적겠죠.. 말이 쉽지 쉽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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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希修 그래서 연애경험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냥 친구관계에서는 저렇게 내밀한 부분까지 저렇게 세세하게 부딪힐 필요가 없거든요. 가족의 경우엔 '그러려니' 하며 이미 익숙해진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자아발견'에 맹점이 많이 존재하구요. 물론 동거를 해도 결혼은 또 다르다고도 하긴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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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Jihye Tak 希修 그렇더라구요... 근데 이제는 연애하면 너무 세세하게 다 말할거 같지 않아요..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었달까요... 사랑의 판타지적인 요소에 휘둘린거 같기도 하고 그 사이에 제가 약간 변한게 있어서요. 그런데 이렇게 되니 무덤덤해서 연애나 결혼이 막 땡기진 않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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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希修 Jihye Tak 나이들수록 환상은 줄어들고 피곤함에 대한 거부반응은 늘어나고 그렇죠 ㅎㅎ.





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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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Soo Hong
1d
은 댓글 논문 링크 참조) -> 쓰다보니 길어짐. 할 말이 너무 많아서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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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누누히 강조했지만 독일 등 유럽의 역사부정죄는 혐오표현금지, 차별금지의 연장선상에서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부정죄가 있는 유럽국가들은 예외 없이 혐오표현금지법, 증오범죄가중처벌법, 차별금지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역사부정죄만 달랑 가지고 있는 나라 있는지 한 번 찾아보시라. 본말이 전도되어도 이렇게 전도될 수는 없는 것이다. 5.18역사왜곡죄의 모델로 여겨지는 독일 형법의 해당조문을 보면, 130조 1항과 2항이 혐오표현금지, 3항과 4항이 홀로코스트부정금지 조항이다. 철저하게 혐오표현의 맥락에서 역사부정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혐오표현금지법, 증오범죄가중처벌법, 차별금지법도 없는데, 역사왜곡죄는 선도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 법이 왜 필요한지 그 취지와 목적이 온데 간데 없으니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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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검찰개혁 찬반이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을 양분하고 있는데, 난 그 어느 쪽에도 발을 담글 수 없다. 검찰개혁을 갈망하지만, 현재 추진되는 검찰개혁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의 힘을 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찰이 다룰 수 있는 영역 자체를 줄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아무리 공수처에 일부 수사기소권을 넘기고, 경찰에 수사권을 넘겨도 이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법의 통과와 함께 어떤 표현이 5.18역사부정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1차적인 판단 권한은 경찰과 검찰에게 넘어갔고 최종적인 판단권한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이제 검찰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 여부도 판단하게 된 것이다. 검찰과 법원이 "역사왜곡 아님" 판단을 내리면 역사왜곡이 아닌게 되어버리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물론 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옳은 말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일단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다 보면 그런 얘기는 힘을 잃고 유죄/무죄로 모든게 갈리는 현실은 이미 여러번 보셨을 것이다. 검찰개혁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런 류의 사건들이 검찰 손에 맡겨지는 현실을 두고 검찰의 힘을 뺄 수는 없다. 도대체 지금 추진되는 검찰개혁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입법'부가 진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참고로, 한국은 법률 중 60%가 넘는 법률에 벌칙조항을 두고 있는 나라다. 검찰이 관할하는 법은 형법만 있는게 아니라, 800개에 달한다. "걸면 걸린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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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통과된 법의 조문을 한 번 보자 (아래 첨부). 유포의 방식을 토론회, 간담회 등으로 특정한 법은 처음 봤다. 아마 토론회가 문제가 된 적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거 같은데, 이렇게 특정 사건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마 5.18왜곡론자들은 1.2.3호에 해당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서 대응할 것이다. 독일 형법을 참조하여 예술/학문/보도에서 예외를 둔 것인데 그래도 이건 그나마 다행이다. 원래 초기 몇차례 입법안에는 없었던 구절인데, 이철희 의원안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왜곡론자들에게 자신들의 왜곡된 주장을 '학문적 결과다'라는 식으로 주장할 여지를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다. 지만원도 스스로를 늘 '연구자'로 규정한다;; 또한 이 경우에도 5.18진상조사위의 발표로 사실로 확인된 것을 부정하면 안된다. 진상조사위 발표 내용이 절대적인 법의 보호를 받게된 셈인데, 이게 과연 적절한 처사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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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진정성이 있다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그게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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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수정가결된 조문. 그나마 다행인게, 원래 법안에 있던 (긴급조치나 국보법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비방, 왜곡, 날조 등의 구성요건은 삭제되어 통과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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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조(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금지)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방법으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신문, 잡지, 방송, 그 밖에 출판물 또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제1항제1호의 정보통신망의 이용
2. 전시물 또는 공연물의 전시·게시 또는 상영
3. 기타 공연히 진행한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집회, 가두연설 등에서의 발언
② 제1항의 행위가 예술·학문, 연구·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 기타 이와 유사한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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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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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오늘 하루 6만명 신규 확진. 한국에서 7만 5천명 나온 꼴. 소셜라이징을 하더라도 함께 산책을 하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같이 밥먹거나 노래하는 일만 피해도 좋으련만. 그런 행동이 내게는 음주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미국인들에겐 전혀 다른 모양. 매일 매일 신기록 갱신하니 이젠 놀랄 기운도 없음, ㅎㅎ. 그래도 올해 백신이 나온 것만 해도 글자 그대로 기적 - 상용화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약회사들이 큰 위험부담 감수하면서 개발과 생산을 동시 추진 중인 건데, 안전성이 100%는 못 되어도 이 자체로도 정말 기적인 건데, 감사는 못 할 망정 음모론 퍼뜨리는 사람들 보면 참.. 에구, 모르겠다. 올해는 가족 모두 건강히 넘어가는 것 자체로 로또 맞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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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Favourites · 2d ·



< 天上天下 唯我獨尊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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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해석하려면 불교의 우주관과 윤회관을 우선 알아야 한다. 불교에선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생멸의 과정을 겪는다 하는데, 현생 우주가 91번째라고 Dhammavuddho 스님은 말씀하신다. '부처'는 '스스로 길을 찾아 내어 해탈한 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며,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여 해탈한 이'는 '아라한 Arahant'이라 부름. 부처 중에도 가르침을 남기는 부처 Sammāsambuddha와 그러지 않는 부처 Paccekabuddha (벽지불, 연각, 독각)가 계시며, Sammāsambuddha는 91 싸이클의 우주 윤회를 통틀어 여태까지 오직 6분이 계셨는데, 그 6번째가 고타마 부처님. 가르침을 남긴다 해도 그 내용이 점점 오염되어 가다가 결국 소실되는 시점이 오며, 그 후 다음 부처가 태어나기까지는 셀 수 없이 긴긴 세월을 보내야 한다. 수행하고 싶어도 가르침이 available 하지 않으니 암흑의 세월인 것. 그리고 초기불교의 경우 30개 혹은 31개의 윤회처를 상정하는데, 아무리 최고 꼭대기 '하늘 나라'라 한들 여전히 윤회계 안. 그러나 부처는 이승을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완성하여 '해탈' (윤회계 탈출)할 것이 이미 확정된 채로 인간계에 오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인 부처가 오히려 최고 천상계의 神들보다도 더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 (불교에서의 신은 '완전무결 전지전능'이 아니며,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그런 신들처럼 '탐진치를 아직 완전히 제거 못 했기에 여전히 윤회계를 떠돌고 있는 존재들'일 뿐. 불교는 창조주도 인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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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서 볼 때 고타마 부처님이 출생 직후 하셨다는 저 말은, "위로는 천상계 아래로는 지옥 등의 악처들까지 전~부 통틀어 윤회계 전체 내에서 내가 최고, 나 혼자 fully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내가 죽고 나면 나에게는 세상도 존재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내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론적 해석도 가능은 하지만, 그런 해석이라면 저 문장에서 '尊'이라는 글자의 입지가 애매해진다. 실제로 불교에서 '尊' 혹은 'noble'이라는 단어는 깨달음에 대해서 사용되며, 깨달음에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부처의 4단계가 있는데, 만약 尊을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 국한하여 사용한다면, 부처가 신들보다도 우월하고 둘 이상의 부처가 동시대에 공존하는 일은 없으니, 그러므로 부처님 홀로 獨!尊!일 수밖에 없는 것. 윤회 시스템과 원리를 이해한다면, 저 문장은 너무나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의 건조한 기술. 이 우주에 깨달은 이가 있다면 유일하게 나 하나뿐!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Kosala Saṃyutta를 보더라도, 인식론적 해석보다는 "나 혼자 fully 깨달은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보다 타당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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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이 얘기는 전설에 불과하다.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나중에 끼워 넣은 내용이지 실제 일어난 일의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초기불교 공부하시는 분들 사이의 중론. (1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3개월 되었을 때 일어났지만 문자로 기록된 것은 수백 년 후의 일이니, 그 사이에 소실되거나 추가된 내용도 있을 수 있다. 다만, Pali어의 운율문제상 소실이나 추가는 가능해도 내용의 변형은 확률이 훨씬 떨어진다고. 암튼, 브라만교나 대승불교와 경쟁하기 위해 나중엔 초기불교에서도 불상 등을 세우고 부처님 우상화를 하면서 상좌불교가 되었는데, 7발자국 얘기나 부처님 신체상의 특징 등은 그런 우상화의 일환으로 추가된 설화라고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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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崔明淑 and 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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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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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생활은 제3자가 절대 알 수 없는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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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명인이 결혼과 이혼을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하면 흔히들 "이 사람은 남자/여자 없이 못 사는가?"라는 말을 하면서, 화제의 주인공이 된 그 사람은 아마도 성적 욕구가 큰 사람인가 보다 넘겨짚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그 사람으로서는 사주가 너무 추워 얼어죽을 것 같아서 불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덥고 목이 말라 살기 위해 물을 찾는 것일 수도 있으니. 그런 필요를 외도라는 형식으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합의를 통해 합법적인 방법으로 도모하는 것이라면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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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겉핥기나마 명리학을 공부해서 얻은 교훈 중 하나. 주위에 피해주는 게 아닌 한 남의 사생활은 함부로 판단하고 입댈 일이 아니더라는 것. 내 입장에선 어떤 사람이 아무리 '너무 ***해' 보인들, 막상 그 사람이 가진 사주를 보면 '아, 이 사람으로서는 그 ***한 측면을 누르고 누르고 깎고 또 다듬어 최대한 절제하고 있는 것이구나. 이 정도 노력도 정말 인간승리구나' 싶을 수도 있는 것.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직업을 갖는다는 건, 인터넷 시대에는 정말로 피곤하고 괴로운 일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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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상으로는 '양아치와 결혼해도 결혼하고 나면 그 양아치가 최소한 집안에서는 가정적인 남편/아버지가 되는' 사주도 있고 '멀쩡한 여성과 결혼해도 나와 결혼하고 나면 그 여성이 갑자기 골골해지는' 그런 사주도 있으니 참 얄궂다. 이런 건 '경향성(*)'을 말하는 것일 뿐, 모든 게 타고난 복이고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는 물론 절대 아니고. (* 저 '경향성'을 불교에선 '잠재의식이 스스로!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무시무시하게 설명함. 이런 논리는 자기성찰용으로만 활용해야지 타인에게 적용/권유하는 순간 '피해자 비난'이라는 폭력이 되어 버리므로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데, 암튼 수행이라는 것의 목적 중의 하나도 잠재의식에 휘둘리며 좀비처럼 사는 것을 막자는 것. 달리 표현하면 운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기 위해 하는 것. 개인의 수행은 수행대로 민주시민으로서의 노력은 노력대로 병행할 수 있다고 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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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Tak 그러게요 한번 결혼해놓고 바람을 계속 피는 사람들이 성적으로 더 문란할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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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Jihye Tak 네, 그들도 나름 자기 딴에는 여전히 너무 춥고 너무 더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죠. 일단 결혼이라는 약속을 했으면 지키거나, 아님 파트너와 합의하여 상호 비독점적 open relationship을 유지하거나 그래야 하는 것이죠. 그것도 싫다면 결혼 않고 그냥 자유연애만 평생 하며 살든지. 아무 기회비용도 치르지 않겠다는 건 너무 이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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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en Kim Namisa spirit이 필요합니다. 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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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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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ttā(慈) and Karuṇā(悲) Are Different from 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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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matter how kind or loving these care-givers are, it does not matter. They are 'ignorant' and 'unethical' in the Buddhist perspective. According to Buddhism, you are 'ignorant' if you cannot figure out causality/conditionality, and you are 'unethical' if you harm or burden others by not trying to figure out causality/conditionality. (Buddhism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causality and conditionality. Also, not 'lack of love' but 'ignorance' is the ultimate root of all problems and sufferings in the world, it tea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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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says that 仁 is not being able to see others suffer. So, you kill a cow for a ritual or party when and where you don't see, but you still have the cow be killed. It is the Confucianist 仁, which is quite sentimental. However, neither mettā (goodwill) nor karuṇā (compassion) of Buddhism has anything to do with sentiments; they are based on the intellectual understanding of the causality/conditionality of karma. Mettā is to wish someone to wise up and earn happiness. Karuṇā is to wish someone to wise up and end suffering or to help him in that process. The Buddha made the analogy of a doctor's attitude toward a patient. A doctor often has to deliver a disappointing news or perform a treatment or surgery which will bring some pain to the patient. How good a doctor is is not measured by how sentimental the doctor is with pati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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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a woman named Kisa Gotami crying over her child's death, the Buddha neither performed a feat of bringing the baby back to life nor joined her in the sorrow letting her dump her distress on him. Instead, he told her to go find a household in which no family member or relative never died and to borrow some mustard seeds from them, with the intention to lead her to the realization how she had to practice and be liberated from the rebirth cycle if she didn't want pains or sorrows. This 'cold' rational attitude was the Buddha's goodwill and compassion. Not emotional or personal, let alone pleasant or comfor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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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people believe, the Confucianist 仁 is same as the Buddhist 慈 or 悲. Not exactly. To be emotionally attached to some people while harming others through your ignorance cannot be 慈悲. Harmlessness all around is the first requirement in the Buddhist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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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ashingtonpost.com/…/washington-superspreader…/…

"Because staff in these facilities care for entire units, direct contact with associated patients is not known,” local health authorities said.

WASHINGTONPOST.COM

Nursing home staffers attended a 300-person superspreader wedding. Now six residents have died.
"Because staff in these facilities care for entire units, direct contact with associated patients is not known,” local health authorities said."Because staff in these facilities care for entire units, direct contact with associated patients is not known,” local health authorities said.




希修 용서와 자비희사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95805154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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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COVID-19 asks: Can we call it 'spirituality' if it lacks ethics or integrity? What do you mean by 'love' when you have no qualms about risking others' lives?

https://youtu.be/ECrPcyzSP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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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Jewish wedding with 7,000 unmasked guests in New YorkSecret Jewish wedding with 7,000 unmasked guests in New York




Namgok Lee - 한국의 중도파들은 자기 지탱력이 없어요 신복룡 교수 ..

(1) Namgok Lee - 어제 한국사회연찬회가 ‘한국 현대의 사회정치 이념과 세력’을 주제로 신복룡 교수를 모시고...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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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사회연찬회가 ‘한국 현대의 사회정치 이념과 세력’을 주제로 신복룡 교수를 모시고 진행한 연찬리포트를 받아보았다.
노(老) 교수의 진솔한 말씀이 많이 다가와서 오늘 새벽에 단숨에 읽었다.
그 가운데 일부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좌가 되었든 우가 되었든 섬멸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좌우 양측 날개로 새가 나는건데 한국의 좌우에 지각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주었으면 좀 더 좋지 않겠는가?
중도파는 권력을 잡을 능력이 안됩니다.
(중략)
끝까지 갔어야 할 것을 가지 않은 사람들이 중도파거든요.
한국의 중도파들은 자기 지탱력이 없어요.
자기 지탱력은 돈도 있어야 하고, 조직도 있어야 하고, 좀 독해야 하거든요”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지만,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표현하는 ‘중도(中道)’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서 소개한다.

현실을 보면 정확한 진단으로 보인다.
다만 중도의 존재방식과 진행방식에 대해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 면이 있다.
중도는 ‘중도 파(派)’나 ‘중도 당(黨)’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대체로 실패해 온 역사가 있다.
앞으로 중도를 표방한 당(黨)이 자기 지탱력을 가지고 좀 독하게 권력을 잡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아마도 당분 간 양 진영(정체성은 애매해졌지만)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권력이 왔다 갔다 하는 과정으로 진행될 것인데, 이 과정을 통해서 중도(中道)가 실현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여러 경로들이 예상되고 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양 진영 안에 실사구시하고 구동존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이 당의 주류가 되고, 상대 당에서도 그런 현상이 생긴다면, 연정도 가능해지고, 단독으로 정권을 운영해도 실질적으로 ‘중도’에 가까워진다.

지금 우리 정치도 그런 격렬한 운동 속에 있다.
시기적으로 인류 존속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와 나라의 시대전환이라는 과제와 맞물려 있어서 더욱 복잡한 상황이다.
다당제나 의회중심의 정치제도가 출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정치현실이나 문화로 보아서 어렵다면 주류 정당 안에서 실사구시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것이 상대 당의 그와 같은 사람들과 만난다면 그런 방향의 진행이 어쩌면 현실적인 중도의 진행이 될 것이다.

‘중도파’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각 진영의 내부에 실사구시파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전망이다.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거칠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행되던 것으로부터 보다 유연하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자체가 큰 진보라고 볼 수 있다.
각 진영 안에서 일어나는 건강한 분화(分化)는 다당제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이것을 지리멸렬한 쇠퇴의 과정이 아니고, 건강한 체질을 만드는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리포트를 본 단상이다.

46이병철, 박정미 and 4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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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열
이무열 지금 정당 안에서 중도의 흐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밖에서 정당이든 비정당이든 구심이 될 힘이 일어서야 조정 능력이 있는 중도정치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의 제 생각으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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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Namgok Lee 이무열 지금 정당의 실태를 보면 막막해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마 여러 변수들,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을 포함하여, 여론의 향배 등에 영향을 받겠지만, 그 방향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구심력이 요청되는 것에 대해서 동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성숙할 수 있는지가 치열하게 물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선생을 비롯해서 젊은이(ㅎㅎ)들의 분발을 간절히 바라고 응원합니다.
저도 노구나마 분수껏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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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Young Joon Kim 이무열 오 저도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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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영
김학영 중도는 실사구시파.와닿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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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혁
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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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수
김석수 중도파 집권가능성에 대한 선생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다만 좀더 적극적으로 보자면 인류 문명이 계급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뉜 대립과 투쟁의 세기에서 융합과 통합의 세기로 넘어왔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헤게모니는 이미 실현되고 있습니다. 대표사례가 프랑스 마크롱 현상인데, 좌파 정당 경제장관출신의 마크롱이 금융자본에서 일한 경험으로 좌우 정책을 실사구시로 펴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데, 프랑스 국민이 기존 좌파 사회당과 우파 국민전선 등을 멀리하고 마크롱의 전진하는 공화국당을 지지한 것은 일회성 현상이 아니라 이미 계급투쟁의 소모성을 국민이 알아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유력한 정당후보가 아니라 단독으로 대통령당선되고 그후에 전진하는 공화국당을 만들어 의석 2/3를 휩쓸고, 그 당 국회의원 절반이 정치를 한번도 안해본 보통 시민이란점에서 이미 직접민주적 정치혁명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유럽 각 나라에 출몰한 해적당은 기존 좌파와 우파 가치를 포함하고 있고, 스페인 3당 포데모스 등은 이념화된 고정된 정강정책이 아니라 선거때마다 다른 정강정책을 들고 나오는 실사구시를 보여주는 데 마크롱현상의 전조라 할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경우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아닌 제3세력의 집권이 가능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저는 그 단초가 열리고 있는 게 지금 윤석열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정주영,문국현,안철수 현상과 또다른 면이 있어 실패보다 성공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지금은 1당이나 2당가지고 안된다는 국민공감대가 있는데 문제는 대안 인물과 세력인데, 윤석열현상을 윤석열과 국민이 만들면서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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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수
김석수 기존 지식인들이 기존 낡은 지식틀거리에 매어있다보니 중도는집권 불가능론에 빠지는데, 그건 그간 흘러온 역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주영, 문국현, 안철수를 지지했던 이들이 처음에는 산토끼(부동층, 스윙보터)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지금은 매우 단단한 고정층이 되어 있다는 점은 못보고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 지적처럼 제3세력 집권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기존 1,2당 염증론이 매우 넓게 퍼져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객관조건은 무르익었고, 그리고 그 에너지를 담아낼 주체역량이 점차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다만 좌우 연정은 현실에서 어려울 듯하고, 중도집권후 좌우극단세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가야 민주공화국이 가능할 듯합니다.

Namgok Lee - 아침 산책길. 마스크에 장갑까지. 라목을 사진에 담았다. 벗은 나무보다는 '라목'이라고 하니까...

Namgok Lee - 아침 산책길. 마스크에 장갑까지. 라목을 사진에 담았다. 벗은 나무보다는 '라목'이라고 하니까...

Namgok Lee
55m · 
아침 산책길.
마스크에 장갑까지.
라목을 사진에 담았다.
벗은 나무보다는 '라목'이라고 하니까 운치가 있다. ㅎㅎ

오늘 산책하면서 사색 테마는 '비동비이이설'
원효의 말인데 '전적으로 같다고 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한다(주장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말한다.
전적으로 같다고 하지 않으니까 '리'에 어긋나지 않고, 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 않으니까 '정'을 해치지 않는다.
양비설이나 양시설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말이 아니다.
그 시대 그 공간에서 가장 옳은 것을 치열하게 탐구하는 정신이 있는 것이다.
'무적 무막 의지여비'의 구체적 태도와 이어진다.

리에 어긋나면 바른 길로 갈 수 없지만, 정을 해치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을 놓치게 된다.

요즘 페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깊게 새겨봤으면 좋은 구절이어서 소개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