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 고려대학교 죽음교육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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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_조성택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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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죽음교육연구센터

제1회 죽음교육연구센터 트라우마 포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2부

동영상 둘러보기_https://www.youtube.com/watch?v=-BIAfhRzuMw



조성택 교수_고려대학교 철학과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하다』가 있다.

조성택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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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편집]

고려대 철학과 교수이다.

1.1. 상세[편집]

1957년생이며 부산광역시 출신이다. 고려대 철학과 불교관련 교수이며 고려대학교 77학번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부처 붓다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불광연구원 편집위원 한국철학회 편집이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2. 강의들[편집]


2. 사건/논란[편집]

2.1. 돈암동 살인사건[편집]
한 때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신분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피해자인 고 이해령씨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으며 사건직전에서도 마지막 피해자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해령 시신이 발견된 미분양 아파트의 부동산 거래에 관련된걸로 보이는 인물이며 피해자 유서가 갖는 의문점들 그리고 진술의 불일치성으로 인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결국 DNA가 일치하지않았기 때문에 용의자 선상에 제외되었다. 그것이알고싶다에선 범인사실이나 사건 몇 부분에 부인했다.

 현재까지 유명 강연 및 언론을 통해 노출되고 있으며 교수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연찬문화연구소 |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Daum 카페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남곡추천 0조회 1420.06.18 05:00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군자(君子)의 현대적 의미는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다.

-- 진보와 자유에 대한 근본적 통찰

 

나는 과거의 진보가 사회적‧ 물적‧ 제도적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바탕이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물질적 부가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절차나 제도로서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의 진보’ 즉 ‘의식‧문화의 진보’가 사회적 진보를 견인하는 시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슨 ‘의식(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류(流)의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대적 비중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중심민주주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 대세(大勢)다.
그 모순에 대항해서 사회주의가 출현했지만, 실패했다.
개인의 해방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자기 이익추구의 자유가 핵심으로 된다.
이른바 자기중심적인 소인(小人)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력의 근원이다.
관념적이고 이중적이며 전근대사회의 지배논리로 작동한 허위의식인 이른바 군자(君子)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인(小人)의 질서다.
자기중심성과 이익추구를 보통 사람의 속성으로 인정하고, 침범을 막는 규범과 계약 등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신의 고도한 행위능력 때문에 자신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것이 요청된다.

핵전쟁의 위험과 기후 환경의 격변 등이 그 절박함을 나타낸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질이 다른 자유를 추구하는 이른바 군자(君子)의 보편적 출현을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다.

 

이제는 개개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아마도 ‘자기 혁명’을 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시대인지 모르겠다.

목숨을 거는 비장한 결단이 아니라,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이 이 혁명의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거룩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한 즐거운 과정으로 되는 것이 이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어떤 성인(聖人)보다도 공자의 사상은 자유로운 인간 즉 진보적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상력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과학적으로 인간의 현실, 특히 의식(意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간이 진화할 목표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人間像)으로 표현하였다.

군자(君子)라는 용어는 원래는 특정한 지배적 신분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공자는 이 말을 일정한 인격과 정신적 성숙을 기준으로 신분계층과 관계없이 사용하였다.

이 자체가 엄격한 신분계급사회에서는 조용하면서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그러나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라는 단어는 그 동안의 여러 왜곡과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현대 감각에 맞는 용어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자주적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1)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주체적’ ‘자주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립(自立)의 의미가 중요하게 포함된다.

남에게 굴종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집이 강하거나 자기주장을 여간해서 꺾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는 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착각이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怒)가 나는 경우가 많다.

노(怒)는 노예(奴隸)의 마음(心)이 합성된 단어다.

다른 사람의 생각 때문에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심하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자주성을 뺏기는 상태다.


2) 단정(斷定)하지 않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4편)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인문운동이 최전선(最前線)이 되는 것도 이것이 최대의 테마로 되기 때문이다.

단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사람으로 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단정은 도덕적으로 하자(瑕疵)가 있는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전혀 근거 없는 반(反)과학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연재 첫 장에서 상세히 이야기한바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며, 배워도 완고하지 않다.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거든 거리낌 없이 고칠 일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1편)

 

무겁다는 것은 중심(重心)이 잡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래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忠)과 신(信)을 바탕으로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나 권력을 앞세운 권위주의(權威主義)와는 질이 다른 것이다.

학즉불고(學則不固)야말로 진정한 권위의 바로미터다.

‘배워도 완고하지 않는 상태’ 더 나아가 ‘탐구할수록 더 유연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언제든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고칠 수 있는 자유인이며,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풍요로운 인간이며, 흔들리지 않음과 유연함이 조화된 진취적인 인간인 것이다.


3) 기쁨이 동력인 인간

 

<공자(孔子)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1편)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6편)

 

배우는 것과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쁨(說)이며, 진실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즐거움(樂)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 이 모두가 기쁨이 바탕인 것이다.

군자(君子)를 움직이게 하는 바탕은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작가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케 한다.

“소명(召命)이란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허기(虛飢)가 만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 특히 현대의 사회운동의 동력(動力)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감이나 변치 않는 강고한 신념체계’가 아니라 내면의 기쁨이라야 지속적이고 진실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많은 NGO 단체나 시민운동 등에서 활동가는 보이지 않고 실무자만 보인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운동의 동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 안회를 평한 다음 구절은 이 시대의 진취적 운동가나 참다운 행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핵심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공자 말하기를, “어질구나, 회(回)여! 한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산다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回)는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구나!

어질구나, 회여!“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4) 보편적 인간-편을 가르지 않는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子曰 君子 不器 (2편)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보편적이되 편벽하지 않고, 소인은 편벽하여 보편적이지 않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2편)

 

그릇(器)은 고정되어 있어서 용도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한가지로 고정되어 기물적(器物的) 인간으로 되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오히려 어떤 그릇도 채울 수 있는 무고정(無固定)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위정(爲政)과 관련해서 보면 만일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가 기물적 인간으로 된다면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실무적 능력을 무시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완고함이나 배타성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불기(不器)는 주이불비(周而不比)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려는 보통의 경향을 넘어설 때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고, 개인의 이익이 높은 가치로 보호되는 현대에서 이러한 인간상을 지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명력이 여러 가지로 억압되던 시대에는 그 개인의 생명력을 해방하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된다. 따라서 오늘 날의 개인주의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필수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과 같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되면 오히려 생명력을 훼손하는 결과로 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반(反)하게 된다.

개인주의를 경과하고 있는 현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공자의 시대보다도 훨씬 이 주이불비(周而不比)라는 테마와 직면하고 있다고 본다.

누구하고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이익 또는 진리가 어디 있는가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태연하지 못하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13-26)

 

비교감, 우열감, 상하감으로부터 자유로우면 태이불교(泰而不驕)가 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이것들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교만(驕慢)은 비굴(卑屈)의 쌍둥이 형제인 것이다.

특히 경쟁과 비교, 우열을 수직화하는 사회가 넘어서어야할 인간화의 가장 큰 테마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15-21)

 

군자의 사회성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군자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소인의 자만심은 아집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집과 아집이 만나면 다투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집이 없는 사람을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가장 당당한 사람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라는 고정된 견해가 없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구명하려 는 태도는 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편을 가르지 않는다.

소인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파당을 만든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상대편이 사라지면 같은 편 안에서 다시 편이 갈라진다.

작게는 개별적 삶에서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이 반복되어 왔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끊임없이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그 길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조건이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어 왔지만 그런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공자의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바탕에는 공자의 “자신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긍이부쟁矜而不爭은 태이불교泰而不驕와 통하고, 군이부당群而不黨은 주이불비周而不比와 통한다.

 

 

5)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4편)

< 군자는 위로 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달한다 君子 上達 小人 下達>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하여 만물의 영장으로 된 것은 그 지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거대한 문명을 일으키고 반면에 인류존속 그 자체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 그 바탕에는 이 인간의 지능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인간의 지능의 사용 방향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자연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가장 좋게 수행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지능을 통해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스스로의 제도를 개혁하여 자유나 평등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자연과의 모순이나 사회적, 국가적 갈등이 그 가공할 능력 때문에 엄청난 위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인간의 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능력 즉 인간의 지능을 더욱 고도화(高度化)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외부 즉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한 그 능력과 조화되도록 스스로의 내부를 변혁하는데 그 지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출현 자체가 하나의 비약이었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비약, 즉 의식혁명을 예상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과거 성현이라 알려진 분들은 모두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그 근본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하신 분들이다.

공자도 그 한 분이시다.

공자가 제시한 군자(君子)라는 인간상은 바로 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인간의 전형이다.

인간이 그 지능의 사용을 어떤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군자(君子)는 상달(上達)하고 소인(小人)은 하달(下達)한다는 이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지향을 뚜렷이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중심성 속에 머무르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의 자기중심성과는 다르게 인간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피해를 주게 된다. 이것이 소인의 하달(下達)이다.

이 피해의 정도는 그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도 지금의 폐해는 더 심각한 것이다. 이제는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군자의 상달(上達)은 인류 진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이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인류가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진화하지 않으면 그 자신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되는 시대로 된 것이다.

(佛家에서는 중생에서 보살로의 진화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공자를 비롯한 성인이 제시한 길이 인류보편의 과제로 되고 있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6) 사이좋음의 바탕

 

<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편)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실상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 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사이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집이 없으면 사람과 사이가 좋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좋아함을 받는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쪽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인 화합의 길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불선자(不善者)는 미워하게 된다.


공자도 이것을 지적한다. 즉 그 화(和)가 불선(不善)을 받아들이거나 타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子貢 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7)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겸허한 인간

 

<공자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아니한 사람을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4-17)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쉬운 말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된다. 어진 사람을 보면 흠이 없나 찾으려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배울 스승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공자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배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이나 오만이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얕보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인간으로서 진보는 어렵다.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았을 때 비난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만 잘 보면 그 싫어하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內自省)고 한 것이다.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없다면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심정과는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서 용인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남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내 안에도 그런 요소가 없나 살펴보는 삶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인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그 직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무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증자 말하기를, “군자는 생각함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曾子曰 君子 思不出其位>

 

이 말들도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에서 정상적인 비판이나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사람들에게 오용될 소지는 있지만, 그 본 뜻은 먼저 자신의 일에 충심(忠心)을 다하라는 의미로 읽히면 좋을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이 옳은 것처럼 착각하는 얍삭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8) 꾸준히 진화하는 인간

 

<공자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뜻이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함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 분수를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그대로 들리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2-4)

 

자율적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데 이렇게도 성숙의 단계를 밝히고 있는 성현이 있었을까 하는 감동을 맛본다.

열 다섯이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 시작할 나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이 때부터 본인들이 선택하기 시작한다.

서른이면 자립하는 나이다.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함이 있다.

그리고 50이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나이다.

졸저(拙著)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에서는 지천명을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말하였는데, 그 후 논어를 더 자주 접하고, 인문운동의 도구로 많이 활용하다보니까, 이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자 사상의 바탕을 볼 때, ‘진리를 알았다’라는 해석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분수(또는 소명)를 깨달았다라고 보는 것이 공자의 뜻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순(耳順)은 아집을 넘어서는 것이다.

누구의 어떤 말도 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말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단계가 되면 자유인으로서 인격의 완성을 이처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극대화하는 풍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멋대로의 세계'로 되는 경우가 많아 결국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만나게 되면 심한 부자유를 느끼게 되어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욕구의 질이 바뀌는 것이다.

 

대체로 40대까지는 자신이 자립하고 자신을 확립하는 시기라면, 즉 튼실해지는 시기라면 50부터는 부드러워지는 시기로 보인다.

‘자립’ ‘일관성’과 ‘유연함’이 한 인격 속에서 어떤 단계를 거쳐 성숙하게 조화되는가에 대한 모범을 보이는 것 같다.

결코 옛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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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하여

남곡추천 0조회 46818.11.19 10:37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보에 대하여(1)

 

진보는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수 없이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인류는 ‘자유 확대’의 길을 걸어 왔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자연계의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유’ ‘억압과 착취, 불평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회적 자유’ ‘의식을 가진 고등생명체인 인간만이 갖는 관념의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관념계의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인류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진보의 위기’나 ‘보수의 위기’ 등은 정체성이 애매한 현실 정치권력의 향배에 관한 것일 뿐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것이 위기라면 사실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되는 ‘낡은 것’의 위기일 뿐이다.

 

지금은 좋든 싫든 세계화의 시대다.

자국 안의 모순이 세계의 모순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간다.

전쟁, 양극화,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 현상들 배경의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의 고도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인 의식 사이의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확대를 향한 진화의 길에서 인간의 지적능력은 눈부시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자유를 획득하는데서, 또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고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제도를 진척시키는데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그러한 능력들이 자기중심적 의식과 결합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함으로서 지금의 위기를 낳고 있거나 오래된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종(種)적 위기를 배수진으로 하면서 이제 ‘관념계의 자유(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를 인간 진보의 최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지점까지 역사가 나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능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의식체계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부자유의 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유 욕구를 신장하는 길이어야 진정한 것이다.

즉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그 변혁을 이루어가는 것이 미래 혁명의 핵심이다.

물론 국가간 모순이나 계급모순 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모순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진보적 노력과 인간의 의식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결합하고 상호 침투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운동을 할 때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 없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실사구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운동가들에게는 ‘생활 없이는 발언권 없다’라는 말을 더 보태고 싶다.

새로운 세상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100명에 한 명 만 있어도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그들은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고, 주위를 사랑하며 주위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전략도 넘어서는 최고의 혁명 전략이다. 아니 혁명 그 자체다.

요즘은 연습장이 넓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협동 생산이나 단순소박한 생태적 삶의 실천, 마을공동체 운동, 기부와 자원봉사 등은 대단히 좋은 연습장으로 되고 있다.

나는 기부와 자원봉사를 자발적인 ‘풀어놓음’으로 부르고 싶다. 풀어놓음으로서 자타가 함께 풍성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단결과 투쟁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연습의 장이 되어야 진실한 것이다.

노동조합 특히 대규모 노동조합이나 공공 노조가 기득권에 머무르거나 조합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 ‧ 노동시간 단축 · 임금이나 연금의 격차해소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연대와 도덕성을 발현함으로서 자본과 정부로 하여금 비정규직 문제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도록 강하게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

투쟁 따로, 새로운 사회 만들기 따로가 아니라, 이것을 큰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부자도 즐겁게 당원이 되고 싶어하는 진보정당이 출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계속)

 

 

 

 

 완고한 진보는 형용모순이다 2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선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화란 물신(物神)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의미와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화의 내용이 인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화의 정치’와 ‘시장의 인간화’ 그리고 ‘의식문화혁명’이 서로 삼투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요즘 대선 국면에서 나오는 통합, 연정, 경제민주화, 복지, 정의 등의 잇슈들은 사실 이러한 과정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런 테마들을 앞에서 견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의 세계와도 맞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 과거의 틀들로부터

한 쪽 발만 벗어나고, 다른 발은 과거의 틀에 묶여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무슨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심정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정파의 입장을 진보라고 혼동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보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고정된 틀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한 때 어떤 이데올로기나 실천이 유효했다면 그 시대는 그것이 진보다. 그러나 시대와 사회가 바뀌었는데도 낡은 생각이나 정서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닌 것이다.

요즘 ‘완고한 진보’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말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완고는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公義)는 완고하지 않다. 사의(私意)나 사욕(私慾)이 끼어들 때 완고하게 된다.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성숙도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능력이나 덕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새로운 시대의 진보를 위하여 몇가지 말씀을 드려볼까 한다.

 

첫째는 폭력혁명에 대한 미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요즘 공개적으로 폭력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미련이 이념 뿐만 아니라 정서 속에 남아 있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도 또 다른 단정(斷定)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세계는 ‘지적 혁명’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급격하고, 폭력적인 혁명은 아니지만, 인간의 질적 진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혁명의 주체는 ‘지식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과거 시대에 회색분자로 비아냥받던 계급으로서의 인텔리겐챠가 아닌 공인(公人)을 말한다.

‘세계가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 그리하여 독점이나 자기의 폭을 넓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지는 인간’ ‘자신의 생각은 사실과는 별개라는 것, 따라서 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인입니다.

나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나 계급 · 민족 속에서 이런 지식인 즉 새로운 시대의 혁명 주체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이런 주체들이 그 생산과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있는 현상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둘째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의 위선과 기만에 반대해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을 위해서 민주집중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었던 때도 있었고, 아직도 이념이나 정서 속에 또는 습관이나 관행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민주집중제는 ‘민주’보다는 ‘집중’에 방점이 찍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다. 즉 독재를 낳게 되어 있다.

부르죠아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달성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단히 높은 성과다. 이것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진보적 입장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이런 말은 대단히 반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계속)

 

새로운 진보정당 3.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누가 옳은가’하고 토론해서 결국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진보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연찬해서 가급적 전체가 일치한 견해에 도달하는 방식의 ‘연찬민주주의’(적절한 명칭이 없어서 제 임의로 사용합니다. 화백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내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우선 진보적인 정당 안에서 이런 시도를 하고 이것이 문화로 자리잡으면,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로 될 것이다.

이것은 우성(優性) 인자이기 때문에 이런 정당이라면 처음에는 비록 소수당일지 몰라도 정치를 ‘권력쟁탈의 장으로부터 사람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화의 예술로’바꾸게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 아무리 ‘통합’과 ‘상생’을 이야기해도 이런 내용이 없으면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비록 소수당이라도 ‘조화의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당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무슨 ‘조화’나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지만, 미래 사회의 주체라는 주인의식으로 약자의식이나 피해자의식을 넘어서는 것이 진보정당의 도덕적 힘이 되어야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억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그러다보면 어느덧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될 것이다.

 

셋째 계급투쟁론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야 한다.

계급 발생을 비롯한 계급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면서 계급제 사회로 되고,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그 투쟁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되어서 역사가 진보해 온 것도 사실의 한 면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초기에 역사발전의 일반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 마르크스다.

그 이후 유물사관과 그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론이 사회진보의 이론적 실천적 지침으로 되어 왔다. 물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론이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이론은 오랫동안 사회변혁의 이론적 실천적 기둥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계급이 있고, 투쟁이 있다. 또 그 사회의 계급구조나 제도가 사람들의 의식(意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거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단정(斷定)하는 것으로 과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회의 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기 특히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나 그것이 사회변혁의 주된 요인으로 되는 시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다수 민중이 포섭되어 진정한 자주성과 자유로운 정신이 사회구조에 의해 막혀 있을 때는 그것을 투쟁에 의해서 전복하는 것이 진보의 목표가 되고, 실제로 그런 시기도 거쳤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투쟁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상이론들이 검증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일면적인 사실을 전면적으로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않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면, 낡은 사상이론의 주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주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정서나 욕망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나 자본가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세계 인류의 지금의 보편적 의식이나 보편적 욕구에 부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에 맞지 않을까?

따라서 지금의 세계 변혁을 위해서는 의식(意識)의 선도성(先導性)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표를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계급의 해방’에서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

물론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은 ‘물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목표에 부분으로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 균형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지만, 물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해도 자영업자의 수가 600만에 가깝다고 듣고 있다.

‘계급투쟁이 곧 진보다’라고 하는 인식이나 정서에서 벗어날 때, 사실의 세계가 보여 오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보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계급조화론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맞다고 본다.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계급적 모순을 호도하여 투쟁을 약화시키고 지배계급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음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면 자본가까지도 견인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과 도덕적 힘을 가지고 계급조화론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보가 목표로 할 수 있는 사회가 현실적으로 무계급사회가 아니고 계급조화사회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는 조화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조화인 것이다. 조화라고 해서 투쟁을 배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 특히 대기업의 탐욕과 독점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억제하고 변화를 유도하는 입법과 제도적 장치를 위해서 투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계급조화론은 우리 시대의 경제정의(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바탕에 설 때 진보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수많은 소생산자들을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계급조화론을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또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길이 무계급사회, 무소유사회라고 하는 인류의 이상향을 향한 현실적 도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궤변이라고 또는 백일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나 자신의 부족한 경험과 사색이지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또 한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애정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드린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의 지평을 열어가시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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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마을공동체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

20.11.06

21세기 마을공동체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


이남곡(인문운동가)

 

1. 물질도 마음도 풍요롭게

 

행복의 첫째 조건은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질 때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을 위한 1차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2500여년 전에 이것을 말했습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교양을 길러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그러나 그 첫째 조건 즉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오랜 세원을 보내야 했습니다.

부족한 재화를 둘러 싼 계급 간의 대립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 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한 때 세상을 풍미한 것도 이것이 근본 배경으로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看過)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공급이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집니다.

사실 혁명적 변화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족한 시대를 살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바탕입니다.

물질은 풍부해졌는데, 정신이 진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신 진화의 방향에 대해서 공자는 두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이 말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빈이락 貧而樂’과 ‘부이호례 富而好禮’라는 두 방향의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구체적 삶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들이 깨달아가는 것이 새로운 문명으로 가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 '빈이락(貧而樂)'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영성, 생태적 가치, 자연과의 조화, 예술 등에 대해 눈을 뜨고 그러한 삶이 깊어질 때 ‘단순소박한 삶’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이호례(富而好禮)'입니다.

어떤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은 빈이락貧而樂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방법으로 부유해져서 부이호례富而好禮하는 사람들로 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됩니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됩니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을 때라야 진정한 진보 즉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2. 소통이 원활하고 사이가 좋은 마을

 

우리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인식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사이좋음의 출발입니다.
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따라서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다투는 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로 진화시키는 것이 최근의 우리나라 실태를 보면서 가장 절실한 과제로 생각됩니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립니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斷定)함이 없이 출발합니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추구하여 따릅니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이것이 정의’라고 자기 생각을 틀림없다고 단정(斷定)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정의파라고 싸우는 모습이 우리가 흔히 보는 현실입니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 진리나 정의(正義)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중학교에서 배우는 정도의 과학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지만, 실제의 삶의 태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 단정하는 습성이 몸에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입니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공자 말하기를, “자기와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나라와 사회의 정체(停滯)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자신이 틀림없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삶을 살게 되면 사이가 좋아집니다. 사이가 좋아지면 진정한 소통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인(里仁;어진 마을)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꿈이지요. 객관적 조건들은 공자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3. 의무나 규범이 아니라 기쁨으로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시도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들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요즘 빠른 속도로 확대 심화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제도’와 ‘의식’만 뒷받침되면 새로운 생산관계 즉 즐거운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토대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제가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에 인문운동가로서 큰 관심을 갖는 배경입니다.

 

개별적인 깨달음의 추구는 자칫하면 결국 ‘자기 본위’에 그치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얼마 전 협동운동가들의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출발이라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나에게는 15세기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한 ‘거룩함’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자발성• 전념(專念)• 기쁨’이 그 내용입니다.

아마 이것이 동기(動機)로 보편화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심이 될 때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자가 스스로 평생을 관통(一以貫之)했다고 하는 ‘서(恕)’와 ‘충(忠)’이라는 말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서(恕)’와 통하고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 ‘충(忠)’과 통한다는 느낌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는 충(忠)과 서(恕)는 단지 마음의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恕)는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충(忠)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恕)는 참는 것(忍)과 다르며, 충(忠)은 의무나 사명감과 다릅니다.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신장하는 것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생산력으로 전화(轉化)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상당히 갖추어진 조건과 경쟁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의 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등은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중견 기업들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꿈을 가끔 꿀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그 내부의 동력은 표현을 무어라 하더라도 서(恕)와 충(忠)의 현대적 살림이 될 것입니다.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와 경쟁을 넘어선 새로운 동기에 의한 생산력이 인간의 물질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제도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그것을 옛 사람들은 대동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길을 함께 가보실까요.

 

 

연찬문화연구소 | 불교는 자유의 종교다.(펌)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불교는 자유의 종교다.(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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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자유의 종교다.
조 성택 (고려대 철학과)

 서양의 고전 『오디세이아』의 대주제는 ‘귀환’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오디세우스가 겪는 ‘어드벤처’는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양념일 뿐이다. 영원한 삶과 재물을 보장해주겠다는 칼립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오디세우스의 집념 때문이었다. 인류의 문명사를 보면 ‘집’은 늘 돌아갈 곳이었다. 삶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지만 그 여행의 목적은 집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데 있다.


『오디세이아』는 인류가 정주문화를 시작한 이래 집을 ‘떠남’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더라도, 또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몇 해씩 떠나더라도 늘 인간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집’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그리고 치국治國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집’은 늘 세계의 중심이다. 군신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효와 충이 동일시 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집’이 세계의 출발점이자 완성태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등장은 ‘집’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청년 싯다르타에게 ‘집’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었다. 처자식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애’였다. 집을 떠나고자 하였던 것은 싯다르타만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났다. 그들을 사문沙門‘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싯다르타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었다. 이를 위해 ‘집’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집’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세기경』에는 ‘집’을 바라보는 불교적 입장의 문명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따르면 

‘집’이란 개인의 욕망을 은폐하는 곳이자 재화를 축적하는 장소다
요컨대 집은, 당시 사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 욕망의 ‘발전소’이자 욕망을 재생산하는 장소였다. 
집 그리고 가족이란 
  • 자신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 동시에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게 되는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 나아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참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적합하지 않으며…”라고 하는 예수의 언급 또한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의 경우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출가’를 
정신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으로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집’을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와 ‘떠나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는 인류의 문명사를 통해 늘 일정한 대립관계를 유지해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환의 문화’가 늘 주류였고, ‘출가의 문화’는 늘 소수에 속하는 비주류의 문화였다. 

‘집’이 신체적·정신적 쉼터의 역할을 지나쳐 욕망의 근거지이자 탐욕의 은신처가 될 때, 
출가의 문화는 우리에게 자아실현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하게 해주었다.

불교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늘 불온시 되었던 것도 불교에 내재되어 있는 ‘출가’라고 하는 지향점 때문이었다. 
흔히 인류의 문명을 유목민의 이주문화와 농경민의 정착문화로 나누고 있는데, 여기에 숨어 있는 문명적 코드가 바로 ‘출가의 문화’와 ‘귀환의 문화’다.
이주와 정착은 단지 생산 수단과 방법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아실현의 장소로서 ‘집’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서로 다른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청년 싯다르타의 출가, 수행, 깨달음 그리고 전법의 여정은 그대로 전통으로 계승되어 지금까지 불교의 제도적 기반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출가제도’ 그 자체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동아시아 근대불교의 과정에서 출가제도를 폐기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세계불교 전체를 보면 출가제도는 흔들림 없는 불교 전통으로 유지되고 있다.

출가라는 제도가 현대불교에서도 유효하며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가는 바람직한 전통이냐 아니냐의 논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가톨릭의 예를 들어 종국에는 ‘독신주의’의 종교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출가제도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독신주의와 불교의 출가제도는 그 기원이나 성격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출가제도는 교조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수행의 일부이자 불교적 정체성 그 자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출가자의 역할 특히 재가와의 관계 등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혁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불교전통이 유지되는 한 출가제도 또한 함께 존속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출가의 의미에 대해서는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 이래 지금까지 ‘출가’는 세간을 벗어나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출가는 ‘집’을 중심으로 한 혈연적 관계는 물론 사회에서의 일상적 의무와 권리 또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야말로 출가란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세간사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모든 시간과 노력은 오로지 ‘해탈’을 위한 수행에 집중되었다.

실제로 모든 출가수행승이 그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나 세간의 일반적 기대는 그러하여 왔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 등장하면서 초기불교의 ‘출가중심주의’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출가에 대해 세간을 떠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전하였다. 이 점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더욱 더 강조되었다. 세간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담당하는 가운데 불교가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은 세간의 ‘바깥’으로 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청년 싯다르타의 ‘출가’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문명의 코드를 읽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유’라고 하는 코드다. ‘출가’를 단지 세간을 떠나는 것으로만 이해하였던 것은 사회를 세간과 초세간으로 이분하여 나누었던 고대인도의 종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싯다르타의 출가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는 ‘집’ 혹은 가족으로 표상되는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2. 다른 하나는 전통과 관습이라고 하는 사회적·제도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탄생게로 잘 알려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당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 제공하였던 신神중심적 세계관사제司祭중심의 사회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나’를 선언한 것이다.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거나 사제가 아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소위 ‘인본주의’의 선언이었다. 이는 곧 종교, 관습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자유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싯다르타에게 있어 출가는 ‘나’의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의 첫걸음이었다. 혈연적 관계는 본능과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당연시하는 근거이며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더구나 싯다르타는 ‘집’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탐욕이 은폐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집’을 벗어난다는 것은 욕망과 탐욕의 한 근거를 없애는 일이었다. 또한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은 가능하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뭇 생명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혈연’이라는 이름의 생물학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적 종교로서 불교를 생각할 때 ‘출가제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출가를 생각할 때 출가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의 정신과 실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불교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다. 출가는 자유의 첫 걸음이며, 깨달음 그리고 ‘뭇 생명의 안녕과 행복’은 바로 그 자유의 완성이자 실천이다.

최근 새로운 문명의 코드로 등장하고 있는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은 어쩌면 지금 21세기 인류의 문화가 ‘출가의 문화’로 바뀌고 있는 징표는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지난 2천여 년간 인류는 너무 오래 동안 ‘집’에만 안주해온 것 같다.

2020/11/05

알라딘: 은유와 마음 -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이야기 수업 명법

알라딘: 은유와 마음


은유와 마음 -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이야기 수업
명법 (지은이)불광출판사2016-11-30



































10.0 100자평(0)리뷰(1)


254쪽
책소개
‘은유와 마음’ 수업 교과서.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된 철학, 심리학, 불교, 인류학 이론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12편의 실제 사례 이야기를 함께 담았는데, 독자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밀턴 에릭슨의 말처럼 “어떤 경우든 대안은 무수히 많다.” 단지 그 대안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에서 나온다. 독자는 이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하고 경험하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1. 세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가 되는 기억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현재의 이야기가 과거의 사실을 구성한다

2. 삶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
이야기가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
만들어진 비정상, 발명된 정신병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새로운 이야기 쓰기

3. 마음을 여는 열쇠, 은유
은유가 마음을 치유한다
은유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은유로 세계를 짓는다는 것
아무도 죽어 나가지 않은 집의 겨자씨

4. 은유스토리텔링, 새로운 나를 만나다
은유스토리텔링의 힘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가 ― 은지의 이야기
“내 이름은 조미정이다” ― 승환과 미정의 이야기
홀로 자라는 대나무 ― 선우 스님 이야기
당신은 벚나무의 어디를 보고 있나요 ― 은정의 이야기
잔고가 0원인 저금통장 ― 정숙의 이야기
멈춰버린 시계 ― 한 워커홀릭의 이야기
바다로 돌아간 거북이 ― 영주의 이야기
“엄마처럼 살지 마” ― 세 전업주부의 이야기
느티나무와 구렁이 ― 선주의 이야기
벼랑 위의 소나무 ― 어느 소통불능의 사람 이야기
말하는 가위 ― 진주의 이야기
스테인리스 그릇과 돌이 되고픈 소나무 ― 두 할머니의 이야기

에필로그

주석
더 보면 좋은 책
접기


책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세 살 때의 나’와 ‘여든 살 때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세 살 때의 나’와 ‘여든 살 때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자기동일성”이라고 한다. 자기동일성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몸과 기억이다. 몸은 내가 공간적으로 외부세계로부터 독립된 개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동일하게 존재하는 ‘자기(self)’는 기억에 의해 보장된다.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세 살 때 나’와 ‘여든 살 때 나’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24-25쪽

과거의 내가 경험하고 행동한 결과로 현재의 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의해 나의 과거가 구성된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에 따라 언제든지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 31쪽

때로 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의 조연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에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 이야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 있다는 것은, 데이비드 로이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 39쪽
이야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의 이야기가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더 큰 이야기, 즉 담론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 큰 이야기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그것이 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물결은 저절로 방향을 바꾸듯이 거대서사가 달라지면 내 이야기도 저절로 달라진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바뀔 때 나의 이야기도 바뀌기 시작한다. 치유의 핵심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역할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47쪽

이야기치료도 해결중심치료의 하나로, “난 할 수 있어!”라고 순진하게 믿는 긍정심리학이나 모든 것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세 살 때 버릇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정적인 버릇이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버릇을 찾아내어 “세 살 버릇 여든 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또는 지금까지 문제라고 생각했던 버릇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 62쪽

마음의 문제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는 바깥에 있는 상담자가 아니라 내담자 자신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도 있다.
- 67쪽

심리치료는 치료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융합하면서 이야기의 의미가 변화하고 경험을 향하는 새로운 관점이나 구별 방법이 계발되어 새로운 자세로 전개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들은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해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맹목성을 깨닫게 될 때 나타나는 다른 의미의 질서 속에도 이미 부여되어 있다.
- 68쪽

무의식의 내용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적합한 은유로 연결되고, 그렇게 연결된 은유가 우리 의식에 자동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란 사실상 없다.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유에 선택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은유를 통해 무의식에 저장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 130쪽

은유에서 자동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후에 다시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가할 필요가 없다. 은유는 자동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은유를 따라가기만 해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 찾고 있던 것, 또는 몰랐지만 내 안에 있던 무엇이다.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은유는 갈등이 종결되는 지점에 이르면 끝을 맺는다.
- 168쪽

명상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버리고 역할을 떠나 순수하게 공(空)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의 또 다른 모습이며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곧 공, 무아(無我)를 입증하는 것이다.
- 247쪽

우리가 어떤 이야기든 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선한 이야기도 악한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이야기는 선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공성(空性)은 선악을 벗어나 있지만, 공은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공성은 선의지(善意志)로 나타난다.
- 247쪽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명법 (지은이)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미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논문을 쓴 후 해인사 국일암으로 출가했다. 산사에서 엄격한 수행의 시간을 보낸 후, 학교로 돌아가 박사논문을 마쳤다.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 대안연구공동체 같은 교육기관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2016년, 오랜 도반들과 함께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공동체인 미르문화원을 열고 그곳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한다. 은유와마음연구소에서 은유이야기를 통한 치유 프로그램인 ‘은유와 마음’을 진행하며 보통사람들이 각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서 ... 더보기


최근작 : <은유와 마음>,<미술관에 간 붓다>,<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생이란 끝이 없는 이야기
‘나’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은유이야기 속에서 밝혀지는 ‘내가 모르던 나’
드디어 만나게 될 나의 무한한 가능성

우리는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존재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바, 다시 말해 ‘나’라는 이야기에 따라 삶은 펼쳐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때로 우리를 억압하고 삶에 그늘을 드리운다.
은유이야기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절박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을 회복시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독려한다.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마음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다.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은유와 마음’ 첫 번째 수업 시간, 명법 스님이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참가자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것이나 이야기한다. “음… 앉아 있는 새요.” “가시가 돋은 선인장이 떠오릅니다.” “저는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입니다.” “내 인생은 잔고가 0원인 저금통장이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는 왜 앉아 있는지, 선인장에 돋은 가시가 싫은지 좋은지,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 마음은 어떤지, 잔고가 0원이어서 불행한지 홀가분한지… 스님이 묻고 참가자들이 답하면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확장되고 문제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진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야기가 자기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음을 참가자들이 뭉클하게 실감하는 사이 이야기는 계속된다. 참가자가 왜 그렇게 아픈지, 자기가 몰랐던 것들이 왜 지금 이야기로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되는지 밝혀질 때까지.
인생은 끝없는 이야기지만, 한 사건에는 시작과 결말이 있다.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끝이 난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문제는 해결된다. “놀랍게도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끝이 없지만 마음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난다. 이렇게 종결된 사건들은 심리적으로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지나간 과거가 된다.”


‘생의 감각’이 되살아나다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많은 생각들은 번뇌다. 생각과 일치하는 한 가지 관점에서만 삶을 경험하도록 우리 마음을 쪼개기 때문이다. 생각에 사로잡혀 살다 보면 1평짜리 독방에 갇힌 듯 세상과 단절된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각하지 못해 삶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그렇게 삶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우리에게선 생기가 메말라간다.
은유와 마음 수업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상을 경계하느라 잔뜩 움츠리고, 시야가 좁아져 있다. 때론 자신감과 긍정성이 과도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그들이, 6회에 걸친 수업에서 은유를 통해 자기를 말과 글로 표현하면서 생각의 감옥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감각의 주체로 거듭나는 여정”인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거의 모두가 ‘차분한 긍정’ 상태를 보인다. 확 넓어진 눈으로 말하고, 듣고, 글을 쓰고, 세상을 느낀다. 한마디로 ‘생의 감각’이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을 멈춰버린 시계에 비유한 어느 워커홀릭이었던 사람은, 탈진되어 일을 할 수 없는 현재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며 절망했다. 스님이 그에게 말했다. “시계는 멈춰 있어도 하루에 두 번 시간을 맞힙니다. 그러니까 두 번은 살아 있는 거지요.” 이 말에 번쩍 인식이 확장된 그는, 이후 수업에서 은유의 전환이 일어나 강물이 되었다.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걸 받아들였다. 수업이 끝나고 7개월 후, 다시 수업에 참가한 그는 이제 쉴 줄 아는 느티나무가 되어 있었다.

「나무는 행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그늘 아래에서 놀다가 돌아간다. 그들이 떠나도 이젠 섭섭하지 않다. 밤이 되면 홀로 남아 휴식을 즐긴다. 방해받지 않고 잠을 푹 자려고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세요.”」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삶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느 사건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 여기고 인생이 거기서 끝날 것처럼 미리 무릎을 꿇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장벽이 아니라 조금 조심만 하면 되는 낮은 문턱이기 쉽다. 당장엔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을지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연결 속에서 삶은 생각 너머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정의하고 그 정의대로 살아가곤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꿈이 있고,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고… 등등 ‘나’를 여러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고 산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정의된 ‘내’가 나의 ‘전부’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나’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 너머의 무수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요컨대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일상적 삶의 차원을 넘어서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나’는 어떤 특정한 ‘나’로 정의되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어떤 고정된 것, 다시 말해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관점을 바꾸어 본다면 ‘나’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 습관과 관계의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패턴은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 다시 말해 우리가 써나가고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달라지면 ‘내’가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삶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다.
은유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삶이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 은유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순간 우리는 자기가 곧 이야기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이는 먼저, 이야기를 쓰는 행위가 자기와의 거리를 두는 시도이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은유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두루 드러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은유를 통해 내 이야기를 쓰면 ‘나’는 은유 뒤로 숨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오는 안전감 덕분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더군다나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과 맞닿아 있어서 의식 수준의 것들뿐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 존재하는 것들까지 모조리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처 몰랐던 절반의 진실, 억눌려 있던 무의식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반쪽의 자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만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은유를 읽고 말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은유를 통해 개념과 사고가 재배열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바뀐다.” 접근할 수 없었던 것, 즉 무의식에 접근하여 그 이야기를 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은유의 힘. 바로 이 힘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삶을 확장하고 새롭게 쓰게 된다.
‘은유와 마음’ 수업은 은유의 바로 이런 기능에 주목해 고안된 이야기치료 프로그램이다.


‘은유와 마음’ 수업 교과서
이 책 『은유와 마음』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된 철학, 심리학, 불교, 인류학 이론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12편의 실제 사례 이야기를 함께 담았는데, 독자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밀턴 에릭슨의 말처럼 “어떤 경우든 대안은 무수히 많다.” 단지 그 대안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에서 나온다. 독자는 이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하고 경험하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 접기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 불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책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하는 책이다. ‘은유와 마음‘ 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신과 닮은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라고 요구했더니 외롭고 힘든 나무, 오죽(烏竹), 벚나무, 크기도 적당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진 정원수(庭園樹), 벼랑 위의 소나무,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벼랑에 홀로 선 낙락장송 등으로 자신들을 비유한 것이다. 물론 돈이 들어오고 나가지만 잔고가 항상 0원인 저금통, 멈춰버린 시계 등으로 자신을 비유하는 내담자(來談者)들도 있다.


명법 스님은 이야기치료는 삶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며(60 페이지) 이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의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고 덧붙인다.(61 페이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자신의 의도대로 은유를 조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은유는 결국 그런 모든 저항을 뚫고 휘몰아쳐서 진의를 드러내게 한다고 말하는 책 ’은유와 마음‘...


은유와, 그에 대비되는 환유에 대해 참고하기 위해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오랜만에 다시 펴보았다.(‘은유와 마음’이 은유를 적극 활용하는 책이라면 ‘날 이미지와 시’는 은유를 부정적으로 보는 책이다.) 지난 2007년 고인이 된 시인은 자신의 시 ‘현상실험’과 ‘후박 나무 이래 1’을 예로 들어 은유와 환유를 설명한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 많은 말발굽쇠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 청사(廳舍)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란 시 ‘현상실험’에서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많은 말발굽쇠,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 등으로 대치된다.


이런 대치(‘은유와 마음’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전환)가 바로 은유의 특징이다. 오랜 세월 워커홀릭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찾은 한 내담자가 자신을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로 표현하다가 멈춤을 휴식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전환을 이룬 뒤 홀로 있지만 그윽한 미소를 짓는 느티나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은유) 전환의 예이다.


한편 “잎 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은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 날고”란 ‘후박 나무 아래 1’은 환유를 이해하기에 맞춤한 시이다. 이 시는 관념적이고 해석적인 ‘현상실험’과 달리 사실적이고 감각적이고 표상적이다.


오규원 시인은 조주(趙州)를 종교와 관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선사(禪師)로 말하며 그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법(法)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조주와 비교되는 선사로 임제(臨濟)가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을 한 선사이다. 오규원 시인은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법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서운 선언이라고 말한다.(‘날 이미지와 시’ 37 페이지)


오규원 시인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스승의 말에서 부처를 죽이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기에 무(無)가 부처요, 우상 파괴가 도(道)가 되는 바 결국 세계(삶)를 바로 이해하려면 무를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세계를 알려면 무를 알아야 하므로 무를 모르는 한 세계를 알 도리가 없어서 무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이 무(無)에 엄청난 양의 의미를 부과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크기의 관념의 우주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결과 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으로 바뀌기에 대선사들은 함부로 부처가 무엇인지, 법이 무엇인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날 이미지와 시‘ 38 페이지)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은유 이야기 수업’이란 부제를 가진 명법 스님의 ’은유와 마음‘은 은유 스토리텔링 심리 치유를 소개한 책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자기와 닮은 것을 말하거나 어떤 사물에 빗대어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11 페이지) 이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야기가 달라지면 또는 다르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거나 세상을 초월할 수 있다.(36 페이지) 오래전부터 정신분석을 비롯한 많은 심리치료에서 은유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75 페이지) 이는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도 불가능한 문학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야기치료는 해결중심 치료의 하나로 “난 할 수 있어!”라고 순진하게 믿는 긍정심리학이나 모든 것을 과거 탓으로 돌리는 정신분석학과 달리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치료법이다.(62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기존 심리치료와 달리 과거에서 문제 해결의 자원을 찾는다.(61 페이지) 이야기치료는 삶의 의미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세상은 우리가 참여하기 전까지 어떤 곳인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61 페이지)


저자는 완결된 사건을 기술하는 역사조차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데 하물며 자기 이야기이랴는 말을 한다. 같은 이야기이라도 새로운 맥락에 기입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64 페이지)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완결된 것은 아니다.(64, 65 페이지) 중요한 것은 심리 문제는 담론에 의해 결정되며 담론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대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67 페이지) 담론이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야기이다.(41 페이지) 심리치료에서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유가 어떻게 마음에 작용하여 치료적 효과를 갖는가, 이다.(76 페이지)

무의식이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문학적 표현 뿐 아니라 진리, 구조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인 용어도 은유라는 지적(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4 페이지)을 언급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은유의 유사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경험된 것이라는 점이다.(83 페이지) 가령 시간은 돈이란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고 시간은 화살 같다는 은유가 채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뇌에 은유를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84 페이지)


은유를 통해 사물의 어떤 속성은 부각되고 다른 속성은 은폐되거나 축소된다.(87 페이지) 은유는 현실을 창조적으로 다시 기술한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는 것이 바로 삶을 확장하는 은유의 힘이다.(92 페이지) 은유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의식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무의식 차원의 것이며 모든 창조의 원천이다.(95 페이지) 코끼리를 완전하게 기술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코끼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은유는 간접성과 다의성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해준다.(98 페이지)


심리 치료에서 문제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112 페이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선택도 훌륭한 은유가 될 수 있다.(112, 113 페이지) 은유는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주관의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의 작동 방식과 특징을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113 페이지) 물론 이야기는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다. 그 속에 자기도 몰랐던 진실이 있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115 페이지)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과 달리 은유 스토리텔링은 은유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은유의 전환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120 페이지) 라캉 정신분석학의 상상계와 상징계처럼 은유 스토리텔링을 통해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는 상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심리적 현실성을 갖는 변화를 가져다준다.(121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은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130 페이지) 은유의 본래 의미를 확장하고 다른 의미로 변용하는 단계를 재정의 과정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앞에서 ’은유와 마음‘에 나무 비유가 참 많이 등장한다는 말을 했는데 수험생들은 자신들을 하나 같이 외롭고 힘든 나무로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뭇잎이 다 떨어졌거나 폭우 속에서 떨고 있기에 절망하고 아파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발상을 바꾸면 그럼에도 견디는 건강하고 씩씩한 나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141 페이지) 내담자 중에서 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은유가 겉도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이는 그가 은유를 잘못 선택해서가 아니라 그의 은유가 모순된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151 페이지)


은유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징만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과 해석도 반영한다.(159 페이지) 은유는 주관의 내면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사태에 따라 사물을 관찰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161 페이지) 은유는 그 자체로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참가자는 자기도 모르는 깊은 내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은유의 주관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된다.(165 페이지) 은유는 현재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167 페이지)


은유를 전환시킬 때 상상으로 하니까 아무 것으로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 상태와 맞지 않는 은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은유의 전환은 언어적 유사성이 아니라 마음의 유사성이 있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 산란한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통합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문제를 바라보고 다음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덧붙인다.(192, 193 페이지)


앎이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면 번뇌에 불과하지만 통합되면 깨달음이나 지혜가 된다.(193 페이지) 은유는 서로 다른 시각을 연결하여 통합적인 인식을 얻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197 페이지) 은유는 단지 심리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더 무의식적인 힘들과 관여하면서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209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 가운데 은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정의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에 도움이 된 것이다.(221 페이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 후 이제 자신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자신과 친해진 느낌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겁났지만 하고 나니까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229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전한다. 나를 초월한 높고 깊은 어느 곳엔가 존재하는 참나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서 너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나, 그것이 진정한 연기(緣起)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닐까란 말이다.(234 페이지) 이 말은 불교적으로, 그리고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핵심을 압축한 의미심장한 말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와 은유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심리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심리학을 철학적 전제 없이 심리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보는 주류 심리학계의 믿음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 취하는 비판적 관점에 공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것 외에 특별한 은유 스토리텔링 기법은 없다고 말한다.(244, 245 페이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내담자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한 기본자세이다.


저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리 판단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분석가는 내담자에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섣부른 공감도 단정적 판단도 금물이다.(245, 246 페이지) 은유스토리텔링에서는 참가자가 은유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상담자는 구체적 정황을 알지 못한다.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이나 상식적 판단 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은유 스토리텔링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자기 변화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상담자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과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내담자 내면의 힘을 일깨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246 페이지)


나는 어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고 온전히 비어 있는 존재 즉 공(空)한 존재이다. 자신이 공하기에 은유 이야기는 새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정해진 것은 없다.(247 페이지) ’은유와 마음‘은 공(空), 무아(無我) 등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의 공(空)성, 무아(無我)적 실상을 말해준다. 명상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버리고 역할을 떠나 순수하게 공(空)으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공의 다른 모습이다. 저자는 은유와 이야기는 무의식에 감춰진 무한한 원천들을 건져 올리는 방법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심리 상담을 배우지 않았고 세상 사는 법에도 밝지 못”하고 “타고난 아둔함 때문에 늘 실수투성이”라는 저자.


나는 임제의 살불살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졌고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를 통해 임제의 그런 인식이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임제의 인식은 비유적인데 부처나 조사를 비유적으로라도 죽여서가 아니라 무한 사유를 초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물론 나는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은유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은유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문학에서 은유를 살아 있게 쓰는 법이 궁구(窮究)되어야 할 것이다. 은유를 전이(轉移)의 잠재력이라 표현한 최문규 교수의 정의를 되새기게 된다. 세상은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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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6-12-2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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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 스님 “아파트 단지로 간 불교, 인문학 배우고 환경운동…이웃 삶에 빛이 됐으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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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 스님 “아파트 단지로 간 불교, 인문학 배우고 환경운동…이웃 삶에 빛이 됐으면”
글 박경은·사진 김영민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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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08 20:44 수정 : 2016.12.08 20:47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복합문화운동단체 ‘미르문화원’ 개원한 명법 스님

명법 스님 “아파트 단지로 간 불교, 인문학 배우고 환경운동…이웃 삶에 빛이 됐으면”
“(요즘 떠들썩한) 미르재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죠?”

명법 스님은 기자가 건넨 어리석은 질문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홍보효과가 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아무 상관도 없지만,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마음에 두었던 이름이라 잠시 망설이긴 했지요. 그렇지만 용이 갖는 의미나 그 기상이 얼마나 좋은가요.”

수행자이자 학자로서 균형을 잡아온 명법 스님은 지난 10월 초 복합문화운동단체 ‘미르문화원’을 개원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내온 벗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자며 의기투합한 공동체다. 불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삼고 있지만 불자가 아닌 지역사회의 이웃들에게도 열려 있다. “30년지기인 친구를 비롯해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몇 가지 키워드가 나오더라고요. 수행, 명상, 환경보호, 생태, 기부, 봉사. 이런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지향점이 모아졌습니다.”

미르문화원의 활동 영역은 불교와 인문학, 환경운동, 심신단련 등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이 중 불교와 인문학 분야는 문화원 개원 이전부터 수년간 ‘무빙템플’ ‘은유와 마음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스님이 꾸준히 이끌어 왔다. ‘무빙템플’은 불교적 가치를 생활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례나 형식은 줄이고 신도들의 역량과 에너지를 높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사부대중이 열린 공간에서 만나 탁마한다’는 것으로, 자연이나 유적지, 봉사활동 현장 등 뜻을 함께한 불자들이 모인 곳 어디서나 법회가 이뤄지고 수행의 공간이 된다. 최근 새로운 법회의 모델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서울 마포의 아파트 단지 사이 작은 공간에 미르문화원이 자리잡은 뒤 매주 이곳에서 정기법회가 열리긴 하지만 ‘무빙템플’의 기본 정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은유와 마음 연구소’는 은유(메타포)를 통해 심리적 문제를 통찰하고 공부하는 모임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한 뒤 오랫동안 대학에서 현대철학과 미학을 강의해 온 스님은 그동안 불교와 인문학을 접목하는 시도와 실험을 해 왔다. 연구소는 그 결과물이다. 최근 스님은 <은유와 마음>이라는 저서를 통해 은유를 통해 마음을 치료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방법론도 설파했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스님은 당시에도 꾸준히 수행을 했다. 명상을 할 때는 좋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평정심이 유지되지 않았고 현실적인 문제에 계속 부딪혔다. 지속된 고민은 ‘근본적으로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석사를 마친 뒤인 1993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출가했다.



“얼마 전 성철 스님의 책을 다시 봤는데 그 시절에도 스님은 ‘요즘 세상이 이런 것은 종교인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아프게 와 닿는 말씀이지요. 종교인들은 정신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런 작은 모임과 시도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웃과 사회에도 소박한 빛을 밝혀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