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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8

[영성신학] - (1)`본질 및 학문적 영역`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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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2008. 1. 23. 18:56

http://blog.daum.net/eden-in/5910521







*영성신학의 본질 및 학문적 영역*




1. 영성이란 ?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구약성서에서 ‘靈’은 히브리어로 ‘ruach'로 나타난다(희랍어로는 ονευμα, 라틴어로는 anima). 이는 숨, 바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생명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히브 1,7; 요한 3,8). 창세기에서 ‘ruach’는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신 후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데서 나오며, 이는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드러내 준다. 또 이 입김은 인간의 감정, 의식, 정신,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입김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마음을 영혼의 기능들의 집합이라 할 때 마음은 자연 생명이 갖는 자연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엇에 의해 지배받느냐야 따라 그 표출 방식이 달라진다. 즉 마음이 欲情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靈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함은 자연적 인간 안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7에서는 ‘입김’을 하느님의 현존, 창조의 기원으로 제시하고 있다(창세 6,17; 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안 땅에 정착하여 이민족과 많은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때 백성의 지도자로 나타나 민족을 구한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야훼의 靈을 받아 초인적인 지혜와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볼 때 靈이란 인간 안에 들어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해주는 야훼의 靈이다.

또 야훼의 靈을 받은 사람은 도유의식을 통해 신성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름을 바르는 순간 그는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삶을 산다는 정신을 갖게 된다. 즉 야훼의 靈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 잡고 온 존재를 감싸주는 것이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이 靈은 충격적인 예언활동을 가능케하는 힘으로 등장한다. 또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윤리적으로 형성시킨다. 야훼의 靈은 참회와 겸손과 덕성과 평화를 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지혜 9,17).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淨化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에제 36,26-27), 백성 전체에게 야훼의 靈이 주어진다. 또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靈은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靈에 따라 사는 삶을 靈性生活이라 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靈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계하고(루가 1,5-25), 마리아의 예수 잉태 사건에도 관계된다(루가 1,35). 또 세례자 요한은 靈의 도우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지하게 된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聖靈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며(마태 3,11), 예수의 세례 때에도 靈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마태 3,13-17). 즉 예수의 세례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루가 4,14). 또 예수는 靈의 힘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마귀를 쫓으셨다(마태 4,11).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외적 표징으로 이해된다. 즉 惡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靈이 작용하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은 야훼의 靈에서 나온다.

이러한 靈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現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협조자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靈이 제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16). 부활한 예수는 인간성의 나약함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사는 靈이 되셨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時空의 제한에서 초월함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겁에 질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요한 20,19-23). 이는 곧 육체적 제한을 벗어남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적 제약을 초월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힘에 의해 부활하신 후 이제는 당신 자신이 그 靈을 주는 자로 변신하신다. 승천과 함께 빠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신다. 이는 지상적 現存樣式을 바꾸심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그 인간 안에 그리스도께서 居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는 생명을 주는 자로서 성령의 부여자가 되신다(1고린 15,45).

우리가 하느님의 靈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연적 생명안에 靈의 부여로 말미암아 자연적 조건들이 완성되기 시작됨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은총이 인간을 완성한다고 표현하였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靈을 받아 사는 사람을 신앙인이라 한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靈(그리스도의 뜻)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3)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

요한 복음 3장 6절에 보면 “肉으로부터 난 것은 肉이고 靈으로부터 난 것은 靈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肉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肉의 원천은 원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肉의 열매(행실)로는 “음행, 부정,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새움,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술주정, 폭음 폭식”(갈라 5,19-21) 등이 있고, 靈의 열매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 등이 있다. 肉을 따라 사는 데는 충만성과 여유가 없는 반면, 靈을 따라 사는 사람은 충만함과 여유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성, 즉 靈을 따라 사는 삶은 신앙인의 본질적 요소이다. 일반적 영성이란 인간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을 뜻하지만, 가톨릭적 영성 개념은 인간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는 정신, 즉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신비 전체(하느님의 靈)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聖三位에 이르는 것이다. 聖三位의 삶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완성된 생명의 원리인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 靈은 씨앗의 형태로 우리 안에 풍성하게 존재하게 되며 그럴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이 靈의 씨앗은 구체적으로 信望愛를 통해 배양된다. 이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며, 그분만을 사랑하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참고로 聖化恩寵에는 주부덕과 성령의 은사가 포함되고, 주부덕에는 向主三德과 윤리덕이 포함된다.




2. 영성신학이란 ?


1) 영성신학의 발전과 용어적 의미

영성신학이란 신앙인들의 초자연적 생명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도록 그 원리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처음에는 客觀的 靈性과 主觀的 靈性으로 구분되었다. 객관적 영성이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믿음과 인식의 측면에서 다룸을 말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계시,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서학, 성사론 등의 학문이 포함되며 모두 하느님께 대한 이해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에 비해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이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다룬다. 즉 삶을 통해 신앙 안에서 키워나가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다룬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한다. 또 한 영혼이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의신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습득했다고 해서 조화로운 영혼이라 볼 수 없고, 반대로 이것을 모르고 봉사만 한다면 이는 인간적 봉사의 차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삶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12,3세기까지는 객관적인 영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교의신학으로 발전하였다.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응답할 수 있는 인간?? 내면적 정신에 의해 처음에는 심리학적 영역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트렌트 공의회 이후 이단설에 대항하여 진리의 깊은 연구 필요성에 따라 전문영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와서 주관적 영성은 修德神學과 神秘神學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수덕신학이란 개인적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完德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신비신학은 은총의 작용하에 영혼이 수동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前後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이는 끊임없이 교차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수덕 차원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함께 할 때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수덕적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askeein’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기술, 특히 운동 기술을 숙달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철학연구나 덕행실천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크리스찬 생활의 덕행을 위한 노력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덕행실천과 운동연습을 자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1고린 9,24-27; 필립 3,13-14; 2디모 4,7).

신비적이란 용어 역시 그리스어의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직 신입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혹은 감추어진 전례를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 - 어떤 이야기 속의 숨겨진 상징적 의미, 혹은 그 작용이나 능력이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 - 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비신학이란 용어는 6세기 초 「신비신학에 관하여」의 저자인 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 의해 서방신학에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그 개념이 神에 관한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후 이 단어는 점차로 관상이라는 뜻과 동일시되었다. 현대에 와서 도미니꼬회 회원인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즈(Garigou Lagrange)는 크리스찬 完德이 수덕과 신비의 단계를 포함하지만, 完德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신비적 생활은 비상한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세례 때 모든 크리스찬이 받게 되는 은총의 정상적인 발전과 완성이라고 정리하였다.

결국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모두를 영성신학이라고 말한다. 구분을 하자면, 수덕은 입문에서 관상 전까지, 신비는 주입적 관상에서 수동적 정화, 일치까지를 취급한다. 이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영성생활이 어느 순간에든 수덕적인 면이나 또는 신비적인 면이 우세하기 때문에 둘의 구분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성신학에서는 이 수덕과 신비 둘을 구별없이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비현상은 수덕현상 없이 이해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수덕현상은 그 자체 안에 신비 체험의 씨앗을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영성과 신학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은 자연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으로 구분된다. 자연신학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깨닫고 탐구하는 신학을 의미하고, 초자연적 신학이란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서 그 내용을 고찰하고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결과를 연역하는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은 흔히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으로 구분된다. 교의신학은 계시된 신비들, 특히 삼위일체, 말씀의 강생, 구속, 성체성사와 다른 여러가지 성사들, 그리고 미래의 삶 등을 취급한다. 윤리신학은 인간의 행위, 계시된 교훈과 권고들, 은총, 신학적 및 윤리적인 크리스찬의 덕행들, 계시로써 알려진 초자연적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원리인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한다.

이와같이 이해된 윤리신학은 분명히 인간을 최상의 성덕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을 포함한다. 영성신학은 이렇게 광범위한 윤리신학을,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밀접하게 일치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해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수덕신비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크리스찬 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본질과 특성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전제하고, 完德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적 덕행의 발전법칙과 조건을 연구한다.

수덕신비신학은 최고의 덕행실천과 성령께 대한 완벽한 순종을 가르치고 하느님과의 일치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다. 이리하여 전자는 후자를 최대한으로 응용하고 후자의 왕관이 된다.

영성신학이 포함하고 있는 요소로는 첫째 영성체험의 심리학적 자료, 둘째 신학원리의 적용, 셋째 크리스찬 完德의 관점에서 본 영성생활의 진보에 관한 실천적 지침 등이다. 이러한 자료가 신학원리와 통합될 때 영성생활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完德의 실천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이 그것이다. 종말론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보고 여기서 구원될 방법으로 언제 도래할지 누구도 모르는 종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늘 갖추도록 강조한다. 다분히 현세 이탈적이기에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고 자기성화와 完德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와 죽음에 동참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으로 수도회의 경우 관상수도회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육화적 영성이란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신 것은 죄와 고통, 죽음의 세계에 오셔서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로 바로 잡아 구원시킬 대상으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성화시키고 구원시키도록 촉구한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활동, 노동의 가치, 사회생활 등을 강조하고,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실천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강조된다.

이 두 측면은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 영성만을 강조한다면 현세를 부정하게 되고, 육화적 영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둘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3) 영성신학의 정의

용어적인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내적 생활, 초자연적 생활, 수덕신비신학, 完德 신학 등 다양한 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점은 동일하다. 내용적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영성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순수 이론신학과는 다른 실천 혹은 응용신학을 택하고, 주제에 있어서는 크리스찬의 完德과 기본 원리들을 대상으로 한다.

신학은 초자연적 신앙의 눈을 통해 계시진리를 이성적인 추리과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탐구한 신학의 내용은 심리학적 자료들이 계시진리의 영역을 언급할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때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다.

영성신학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이 실천적 응용신학이기에 영성신학의 법칙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이용하게 된다. 따라서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자는 특히 심리학을 비롯해서 자연과학의 많은 자료들을 직접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본질과 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신학의 교도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성신학을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는 신학이라 정의하는데, 여기서 신학자는 계시진리와 교회의 가르침 및 조직신학의 결론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따라서 크리스찬 完德의 본질과 은총생활, 주입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작용 등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두고 탐구해야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법칙과 지침을 규정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경험적 자료보다는 계시진리 및 신학적 결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만큼 그 연구방법이 경험적이고 서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이고 사변적이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법칙들이 밝혀지고 설명될 때 비로소 평신도의 영성과 사제의 영성, 수도생활의 영성, 혹은 전례적 영성 같은 특수형태의 영성을 논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분야(지침)는 죄악과 유혹, 능동적 및 수동적 정화, 성사, 선행 및 기도의 단계 등의 내용을 취급한다.

또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시초부터 그 完德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렇게 영성생활의 진보 과정을 설명해 줄 때 구도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별력을 터득하게 된다.




최민순 신부님에 의하면,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성세 때 받은 하느님의 생명, 즉 사랑을 가꾸어 완전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끝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이 초자연적 덕인 생명의 덕은 영혼의 능력인 지성과 의지, 기억에 가해져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빛을 준다. 이 하느님의 생명은 만약에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상실하게 되며 그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본성뿐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미칠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범죄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덕은 행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 덕행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창조를,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구원은 인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구원이 나의 구원, 즉 주관적인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세례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초자연적 삶에로의 성장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 하?윱纛? 생명을 가꾸고 완전케할 능력을 받았다. 여기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이다.

자연인은 영혼의 능력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지만, 초자연인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은총에 의해 성장하고 영혼의 능력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성장하는 信望愛를 따라, 은총도 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덕에는 자연덕과 초자연적인 덕이 있다. 자연덕이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덕은 영혼의 여러 기능에 편이함을 줄 뿐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덕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습성이요 주입된 덕이다. 이러한 초자연적덕(信望愛)이 주입되어 영혼의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영혼의 기능을 보완하고 완성시켜 준다.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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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시래기(Hodie Mihi Cras Tibi)
글쓴이 : FireBall 원글보기

영성신학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 네이버 블로그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 네이버 블로그

수도,절제,영성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이인철

2006. 7. 3.

영성 또는 영성신학이라는 용어의 유래는 캐톨릭의 수덕신학,신비신학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카톨릭 전통에서 수덕적 또는 신비적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개념들

수덕적; 숙달을 위한 연습과 훈련의 의미, 덕행의 실천

신비적; 신자들에게만 알려진 전례. 위 디오니시우스 이후 초자연적인 체험적 지식, 관상의 의미. 신비신학은 비상한 은총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받는 은총의 정상적 발전과 완성.




2. 수덕적과 신비적의 의미와 사용례

- 용어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 수덕신학은 입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입적 관상의 문턱에 이르기까지의 영성생활을 말하고, 신비신학은 주입적 관상과 수동적 정화 및 변형일치의 단계를 취급한다.

- 수덕신학은 정화,조명,일치의 길을 다룬다. 신비신학은 초자연적 은총의 결과인 주입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에 따르는 수반현상을 다룬다.

- 수덕신학은 정화기,조명기를 다룬다. 신비신학은 일치기를 다룬다.

- 수덕신학은 습득덕행과 주입덕행이 우세하나, 신비신학은 성령의 은사가 우세하다.

- 개신교신학에서 수덕주의는 금욕의 의미. 신비주의는 초감각적 체험적 지식을 의미





결론; 영성신학은 수덕적 면과 신비적 면 양자를 다룬다.




출처; 조던 오먼, 영성신학, 제1장에서 발췌 정리

수덕신비신학 - 나무위키

수덕신비신학 - 나무위키

수덕신비신학
최근 수정 시각: 2021-01-01 01:37:51


분류 기독교신학
라틴어 : Theologia Mystica, Theologia Ascetica
영어 : Mystical Theology, Ascetical Theology
한자 : 神秘神學, 修德神學
한국어 : 신비신학, 수덕신학

1. 개요[편집]
2. 사상적 발전[편집]
* 이 항목은 서강대학교 교수 김산춘의 <감각과 초월>, 논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에펙타시스와 에클레시아-" 을 토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학자로 오리게네스와 닛사의 성 그레고리우스가 있다.

오리게네스는 에페소서 4장 17-24절[2]을 토대로 사막교부들에 의해 처음 논의되어 전해져오던 "영적 감각"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새 피조물이라 부름받은 새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보고(시각), 듣고(청각), 냄새를 맡고(후각), 맛을 보며(미각), 피부로 느끼는( 촉각) 오감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존재, 즉 신화(新化)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구약의 「아가」해석을 통해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과의 만남을 신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신부의 모습, 사랑의 화살로 중상을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탈자적 사랑의 지향을 의미하는 ‘에펙타시스’의 개념인데, 이는 신 인식이 정적인 그리스적 본질인식이 아니라, 역동적인 히브리 그리스도교적 청종(聽從) 즉 타자 관계적 인식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에펙타시스는 신비가들의 하느님과의 순간적 합일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으로서 끊임없는 전진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므로 전진 또한 무한한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에펙타시스의 모범은 다름 아닌 모세의 생애였다. 마지막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에펙타시스라고 하는 초월에로 열린 역동성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다(多)이면서도 전체로서는 일(一)인 영적인 공동체의 형태로 이 유한한 세계에 구체화하며 생기한다. 즉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사상에서, 초월ㆍ개인ㆍ자기의 에펙타시스는 그 날줄이, 내재ㆍ보편ㆍ타자의 에클레시아는 그 씨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산의 정상에 그대로 머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세상으로 내려가길 권하는 것이다. 이 ‘세계와 타자에로의 귀환’이야말로 구체적 역사적 인간 안에서의 ‘존재의 현성(現成)’인바, 이로써 인간의 참다운 자기 성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만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이전의 사막교부들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사막교부들은 육체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삶을 당장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성 안토니오의 생애>만 읽더라도 당시 사막교부들이 악과 정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도운동의 정신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신학으로 형성되었고 비잔틴 신학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는 이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서방 가톨릭에서 영성신학으로 불릴 만한 것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의 수도원이 그나마 켈트 신앙과 결합된 영성신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라틴지역은 동방교회에서 수입된 영성신학이 주이며, 성 베네딕토 또한 동방교회의 영성을 연구한 교부 존 카시안의 제자였기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신비신학 (Theologia Mystica)[편집]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숨은 교류 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부문.

이 개념은 중세 가톨릭에 자리잡은 것으로, 4세기에 마르첼루스 안치라누스에 의해서 사용되어, 5~6세기의 위 디오니시오 문서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가리켰다.

후에 실천적 신비신학과 사변적 신비신학으로 나뉘어 지고, 15세기의 제르송의 저작에서는 이 구별이 확실히 나타났다.

실천적 신비신학의 근거는 신약성경 중 예수의 삶의 방식에 이미 나타나며, 바오로의 서간 중에 전개되고 있다. 3번 항목 참고.

중세를 통해서 실천적 신비신학이 항상 교의신학에 생명을 주었던 것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의 깊은 기도와 신비체험이 수반된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에서 신비가가 배출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신비신학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예수회 개혁의 시대를 통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여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의신학과 실천적 신비신학은 분리되는데 후자의 근대의 본격적인 창설자로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요한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신비신학은 의화된 영혼 중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과 현현의 최고도의 단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생각되며, 관상기도, 성령의 끊임없는 은총, 그에 따른 초자연적인 신비적 현상 등이 연구된다. 그러나 신비적 상태와 그 작용에 관해서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신학처럼 안 보이는 주제에 대놓고 완벽히 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데, 대개는 수덕의 3단계인 정화·조명·일치를 거쳐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고 본다.

20세기의 사제이자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그의 책 <주님의 영광> 에서 신비신학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역사적 접근로로서 12가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리옹의 이레네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스, 켄터베리의 안셀모, 보나벤투라, 단테, 십자가의 요한, 블레즈 파스칼, 하만, 솔로비에프, 홉킨스, 페귀이다.


4. 수덕신학 (Theologia Ascetica)[편집]

수덕의 이론과 그 실천방안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영성신학이라고도 한다. 17∼18세기에 신학의 각 분과가 독립될 때 분류되었다. 이 학문의 주 목표는 완덕, 즉 자유의지에 의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서의 개개인의 구체적·능동적인 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실천적이기는 하나 원리적인 고찰에만 그치는 윤리신학과, 구체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작용에 완전히 수동적으로 응하는 신비적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신학과의 중간에 위치한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행위의 선악 가치를 판단하는 신학이며, 신비신학은 위에 나와있듯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신학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자기 극복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기도, 성사생활 등으로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여 자기 구원으로 전진하는 중간 단계가 수덕학이며, 성인학, 영성학, 완덕학이라고도 한다.

수덕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수덕의 실행을 최초의 단계에서 능동적인 관상생활의 문턱까지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덕을 쌓아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는 수덕을 연구하는 영성신학의 학문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덕신학은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성서와 성전(Sancta Traditio)을 학문 원칙으로 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D.알바레스와 A.로드리게스가 대표적인 수덕신학자이다.

5. 성서적 근거[편집]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서 1장 14절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제 1장 1-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제 1장 3-4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 12절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코린토 2서 3장 18절
[1] 사실 필로칼리아만 읽어도 충분하긴 하다
[2]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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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끝에서  | 한티재 교양문고 2 epub 
박경미 (지은이)한티재2020-08-03 


시대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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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76쪽, 약 13.8만자, 약 3.4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9119017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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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신약성서학자인 박경미 교수가 ‘시대의 끝’에 대한 성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제국의 침략과 거기 결탁한 가신통치자들의 수탈, 그로 인해 하느님의 통치가 끊어지는 데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와 심판의 선언. 이러한 것들이 성서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처럼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맞서 환상가들은 옛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선언했다. 신구약 중간시대와 초기 기독교시대에 융성했던 묵시문학의 근저에 깔린 생각은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의 끝’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 책 『시대의 끝에서』는 성서와 역사, 그리고 현재의 깊은 대화이며, 시대의 운명을 염려해 온 실천적인 학자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다시 만나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 인물과 사건들은 박경미 교수의 탁월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들로 되살아난다. 그 과제들은 비단 당면한 정치적·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 인류 생존의 위기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직시와 성찰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저자가 성서와 역사의 대화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 용기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세계의 파멸을 선포했던 환상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종말에 대한 어두운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생각했던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악마적인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서 종말론적 사고의 핵심은 하느님 없는 세상에 하느님이 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하느님의 현존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예수 자신은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오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주제의 장중함과 어우러지는 문학적인 문체가 이 책의 매력을 드높인다.
목차
들어가며 | 나와 성서

하느님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
농부/장인 그리스도
헤롯의 나라, 민중의 꿈
요한의 성령 이야기,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
로마제국과 바울의 평등사상
전승, 살아 있는 삶의 역사
네로의 세상, 지식인의 초상
시대의 끝에서
책속에서
어릴 적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어린아이다운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글을 깨치기 전 어른들이 방바닥에 신문을 펼쳐 놓고 읽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읽는 것’을 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낀 이래, 성서는 내 문자생활의 가장 이른 시기에 자리잡은 책이다. 주일학교에서는 성서 구절을 암송했고,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는 복음서를 소리내어 읽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나 욥기, 시편의 소박하면서도 시적 은유가 풍부한 언어들은 문득문득 그 표현들이 혀끝에서 맴돌곤 했다. 자라면서 문학의 세계에 눈뜨고 그쪽에 빠진 시절도 있지만, 결국 성서를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었으니, 싫으나 좋으나 평생 성서를 끼고 살아온 셈이다. 생각해 보면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보다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에 마음이 끌렸고, 수학이나 철학보다는 역사와 문학에 끌렸던 것도 성서의 언어와 닮은 쪽에 은연중 끌렸던 탓이 아니었나 싶다.


오래전 문학비평가 머레이 크리거는 비평가가 마주한 세 가지 본문의 세계를 구분했다. 그 세 가지 세계란 ‘본문 배후의 세계’, ‘본문 안의 세계’, ‘본문 앞의 세계’이다. (중략) 실제로 성서 해석을 할 때에는 이 세 가지 세계에 모두 관여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세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든 반성적인 독서행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본문이 독자에게 제기하는 해석학적인 물음들은 이 세계들 사이의 충돌로부터 생긴다. 해석자는 이 세계들, 즉 본문 배후의 세계, 본문 안의 세계, 본문 앞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것들이 수렴하는 지평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이 세 가지 세계들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도 존재하므로 종종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석은 이들 사이의 수렴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처음부터 어떤 체계를 가지고 쓴 글들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와 절박함에서 쓴 글들이다. 성서 본문을 탄생시킨 삶의 세계와 내가 속한 이 시대의 삶의 세계가 그때그때 조응하는 방식들을 따라갔다. 그 글들을 나중에 성서 순서대로, 그러니까 구약과 성서 전반에 대한 글에서부터 복음서, 바울, 요한묵시록 순으로 실었다. 모아 놓고 보니 그 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끝’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종말론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의식의 흐름이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끝’에 대한 성서의 생각과 나의 경험이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세계는 본질적으로 인간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전제하고 다른 어떤 중심을 상정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중심으로부터 밀려났다고 느낀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사실들과 반복해서 마주한다. 반면 종교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까지도 포괄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라고 본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그러한 중심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보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중요성도 그 관계 속에서 보기 때문에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적 존재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흔히 자연과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친다. 내 경우 어린 시절 식구들과 함께 평상에 앉아 여름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그 많던 별들, 언젠가 풀밭에 앉아 풀대를 엮어 조리를 만들 때 땀에 젖은 얼굴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던 바람, 봄나물을 캘 때 맡았던 향긋한 봄내음과 흐르는 냇물, 어느 하나 고맙고 감격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경험들은 내가 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고, 그 무언가는 일차적으로는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힘이었다. 그리고 성서는 이 모든 것들 뒤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신다. 나는 이런 경험 속에서 실제의 나보다 더 깊이 있고 더 크게 만들어주는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다고 느꼈고, 그것은 결국 영혼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늘날 자연의 파괴는 결국 근원적 존재와의 단절로 이어지고, 인간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의 끝, 이 끝에서 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 중심과 만난다. 개체의 경계를 넘어서서 보다 큰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은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자연과 인간, 온 우주의 일치 경험. 아마도 이런 것들이 종교적 사유의 본질적 내용일 것이고, 분리된 개체적 생명의 차원이나 물질의 수준에서 생명현상과 인간현상을 파악하려는 현대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일차적 근원이자 창조의 근원이며,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연과 인간 삶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분이라고 알려준다. 아마도 이 하느님은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끝’만이 아니라, 다른 ‘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끝’, 즉 근원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파괴될 위협 속에서 경험되는 ‘끝’이다. 이 두 번째 의미의 ‘끝’이 성서 세계의 특징과 더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의 침략과 거기 결탁한 가신통치자들의 수탈, 그로 인해 하느님의 통치가 끊어지는 데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와 심판의 선언. 이러한 것들이 성서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처럼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맞서 환상가들은 옛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선언했다. 신구약 중간시대와 초기 기독교시대에 융성했던 묵시문학의 근저에 깔린 생각은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의 끝’에 대한 의식이었다. 세계의 파멸을 선포했던 환상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종말에 대한 어두운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생각했던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악마적인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서 종말론적 사고의 핵심은 하느님 없는 세상에 하느님이 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성서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임마누엘,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하느님의 현존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예수 자신은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오심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결국 이 두 번째 ‘끝’에 대한 이야기는 ‘희망’에 관한 것이다.

_ 「들어가며 : 나와 성서」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경미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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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성서학 교수이다.

저서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한울)
『신약성서, 새로운 삶이 희망을 전하다』(사계절)
『시대의 끝에서』(한티재)
『마몬의 시대, 생명이 논리』(녹색평론사)

역서
『요한복음 요한서신』(대한기독교서회)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서 1-4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서기관들의 반란』(한국기독교연구소)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생태학적 치유』(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접기
최근작 :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시대의 끝에서> … 총 2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성서와 역사, 현재의 대화
시대의 끝,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

2016년 10월 19일, 이화여대 본관 앞에서는 이 학교 교수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학생과 교수들이 요구해 왔던 대로 최경희 전 총장이 마침내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80일 넘게 농성을 이어 온 학생들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학생들의 안위 보장과 비리 규명 등 후속 과제 해결을 촉구하고 다짐하는 자리였다. ‘이대 개교 이래 최초의 교수 시위’라고 언론에서 보도했지만, 여러모로 이날 기자회견은 뜻깊은 장면이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박경미 기독교학과 교수는 “박근혜 정권의 가장 추악한 부분과 추잡하게 결탁한 최경희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여전히 비리 의혹들이 남아 있다”고 규탄했다. 박 교수는 “교수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박근혜 정권과 최경희 총장,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해왔는지 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발언 내용처럼, 그 후로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밝히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역사의 물결에 합류하게 되었다. 천만 명이 넘게 참여한 ‘촛불 시민혁명’과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국정농단 헌정유린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 거대한 물결, 그리고 대통령 선거와 정권교체를 거치며 그 물결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열망으로 우리 사회를 출렁이게 하고 있다.

그 격랑 앞에서, 신약성서학자인 박경미 교수는 오랫동안 자신이 연구해 온 성서를 역사의 물결에 비추어 다시 읽고, ‘시대의 끝’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책 『시대의 끝에서』는 성서와 역사, 그리고 현재의 깊은 대화이며, 시대의 운명을 염려해 온 실천적인 학자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다시 만나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 인물과 사건들은 박경미 교수의 탁월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들로 되살아난다. 그 과제들은 비단 당면한 정치적·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 인류 생존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극복으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직시와 성찰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저자가 성서와 역사의 대화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 용기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의 음성이 아니라,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주제의 장중함과 어우러지는 문학적인 문체가 이 책의 매력을 드높인다. 접기

복음주의와 영성

복음주의와 영성

복음주의와 영성




목창균



서론

영성은 성장 산업(growth industry)의 하나로 취급될 만큼,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성 훈련 및 세미나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기독교 출판사들은 영성에 관련된 원고가 아니면,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심지어 영성이란 이름 아래 점술, 요가, 신비주의, 심리학, 과학적 픽션 등에 관한 책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제 영성에 대한 관심은 교단과 지역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들어 영성의 의미가 재발견되고,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게 된 것은 현대 사회, 즉 "대중적이며 도시 중심이요 기술 중심적인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양적이며 물질적 기준 혹은 기능에 의해 삶을 평가하는 것에 회의적인 반면, 질적이며 정신적 가치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무미 건조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적 경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의 갈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성은 기독교 고유의 용어도, 기독교가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용어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사용하고 있는 초종교적 용어다. 불교의 영성, 힌두교의 영성, 이슬람교의 영성, 동양의 영성이 있다. 일반적 의미의 영성은 자기 훈련이나 수양을 통해 어떤 정신이나 삶을 본받으려는 인간적 노력,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의미를 규정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제 각기 편리한대로 영성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 개념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영성을 어떤 종교적 제한을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종교나 학문간의 대화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영성이다. 기독교 관점에서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영성이란 말은 항상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육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대비되는 내적, 정신적 본질을 뜻하지만, 시대와 정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경건, 기도, 금욕주의, 신비주의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어떤 종교 정신 혹은 어떤 인물의 사상이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신학의 한 분야, 즉 영성신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의 본질을 밝히며, 그 다양한 형태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며 영적 성장의 원리와 방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이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은 본래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18-19세기에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또는 수덕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수덕과 신비라는 두 별개의 초점을 가진 영성신학이 형성되었다. 수덕신학은 일상적인 기독교인의 영성 훈련에 대한 것이라면, 신비신학은 신비가들의 가르침을 다룬 것이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구분은 영성에 이르는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금욕주의라는 저차원의 길과 신비경험이라는 고차원의 길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문이 통합되어 영성신학 혹은 영성이 되었다.

한편, 현대 복음주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요, 복음주의의 밝은 미래를 위협하는 위험스런 요소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독특한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현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비주의, 금욕주의, 세속주의와 같은 다른 전통으로부터 영성 추구 방법을 빌려오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영성에 대해 논하고는 있으나, 그들 자신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가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와 중세교회, 특히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에 관한 본격적 관심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기독교에서 영성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수덕신학이나 신비신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중심으로 영성의 전통적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복음주의적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I. 수도원적 영성

신약성서에는 세상과의 분리와 세상 속에의 참여를 교훈하는 두 다른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기 부정, 금욕적 삶, 이 세상보다 저 세상,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며, 바울서신이 이를 대변한다. 후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태도, 창조 질서 내의 하나님의 활동, 행동하는 영성을 강조하며, 이를 대변하는 것이 마태복음, 특히 산상수훈이다. 이 중에서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하는 부정적 영성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통해 고대 및 중세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영적 훈련 가운데 하나는 덕을 닦고 악을 피하는 것, 육체의 욕망을 제압하여 정결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훈련들을 금욕 또는 수덕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그 반대되는 것과 투쟁하는 것이다. 수덕신학은 기독교인의 훈련, 즉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격하고자 사용하는 수단과 관련되어 있다. 금식, 규칙적 기도, 묵주 사용, 성경 읽기, 자선 행위 등이 그것이다.

초대 교회는 금욕 훈련을 중요시했으며, 교인 중에는 수덕사 또는 금욕주의자들이 많았다.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고, 육과 영, 현실과 내세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세상을 부인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일반적 전통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세속적, 육적 상태와 행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고대 교부들 역시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상과 영의 분리에 근거하여, 영성을 세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서방신학의 기초를 세운 터툴리안은 그 자신 세상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세상과 분리해서 살라고 권했다. 특히 [순교자들에게], [스펙타클즈](Spectacles), [여인들의 복장] 등의 저서에서 이교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고, "세상에 있는 것보다 감옥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한편, 터툴리안은 영성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영성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헬라철학 사상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양자 모두 영과 육을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일하다. 헬라 철인들은 육적이며 세속적 욕구에 따라 사는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헬라 철인들이 인간의 영으로 이해한 것을 세상의 육체성과 동일시하였으며, 성령의 은사로서의 영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영성은 세상 물론 자연적 인간의 영과도 다른 것이다.

동방 교회 최대의 신학자 오리겐은 후대 신학뿐만 아니라 동, 서방의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헌신적 학문연구, 엄격한 생활방식, 성적 쾌락의 회피 등은 기독교 금욕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눈다. 도덕적, 본성적, 관조적 단계다. 도덕적 단계는 행위, 본성적 단계는 지적이며 관찰 가능한 행위, 그리고 관조적 단계는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에 관련된 것이다. 그는 영성 생활을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사상은 영적 성장을 정화, 조명, 합일의 단계로 구분하는 후대 신학에 반영되었다. 그가 금욕적 생활방식과 육체적 순결을 권장한 것, 성경의 문자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를 강조한 것, 영적인 것을 계발한 것 등은 초기 기독교 영성으로부터 수도원적 영성으로의 전환을 예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방교회의 영성의 특징은 묵상과 침묵이다. 특히 해치키아(hesychia), 즉 침묵은 홀로 거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는 것을 영성 훈련과 연관시키는 사상이다. 3세기 후반, 일부 금욕주의자들은 엄격한 금단을 통해 기독교적 완전을 이루려 했으며, 금욕과 고해의 표시로 은둔생활을 했다. 특히 그들은 세상을 완전히 피하여 마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여겼던 사막으로 들어가 영적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의 훈련에는 침묵, 기도, 금식 및 복종 등이 포함되며, 훈련과정은 은둔, 정화, 변화로 이어진다. 한편, 사람들이 사막으로 그들을 찾아가 교훈을 받게 됨에 따라, 이들 사막교부들의 영성 이해가 고대 교회에 널리 수용되었다. 그들의 금욕생활 형태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으며, 4세기에 출현한 수도원 제도와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금욕생활을 위해 최초로 사막에 들어간 자 중 한 사람이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250-353)였다. 그는 마을 근처에서 고립하여 살면서 자신을 연단하는 생활을 하다, 모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사막에 들어가 철저한 금욕훈련을 시작했다. 그의 훈련은 마귀 세력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버려진 성채에 들어가 20년 동안 홀로 살면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려 했다.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한편, 암송한 성경말씀을 묵상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연단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었다. 이런 그의 개별적이며 은둔적 수도로부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공동체로서의 수도원운동 역시 이집트에서 파코미우스(Pachomiu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최초로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다. 4세기에 수도원 운동은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공동체적 수도원을 만든 가장 유력한 인물로는 가이사랴의 바실과 루니시아의 베네딕트 등이 있다. 바실은 두 개의 수도원 규율집을 저술했으며, 감사의 생활, 영적 은사, 순종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그는 영적 성장 혹은 성화의 전 과정을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서방의 수도원 운동은 동방과 같은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서방은 은둔적 형태보다 공동체적 수도원이 발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서방의 기후 조건이 홀로 은둔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동방의 수도원은 마을주민들이 사막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한데서 시작되었으나, 서방의 수도원은 감독들이나 유식한 엘리트 계층 기독교인들이 자신들과 성직자들을 위한 고상한 형태의 삶을 장려한 데서 시작되었다.

베네딕트는 이탈리아에서 베네딕트 수도회를 세웠으며, 그것은 지금도 가장 큰 가톨릭 종교 공동체이다. 그는 홀로 독거 생활을 한 후에, 상호토론과 충고를 주장하면서도 수도원장에게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수도원 조직법, [규율]을 만들었다. 그 기본적 영성 원리 중 하나는 기도와 육체적 노동을 결합한 것이다. 그 표어는 "노동은 기도다"이다. 수도사들은 매일 4시간씩 성경과 초대 기독교 작가들의 저서를 읽고 조용히 그리고 일을 하면서 그것을 묵상해야 했다. 육체 노동, 절도 있는 식사와 수면, 하루 일곱 차례의 기도는 오늘날까지 서방 수도사들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수도사와 수녀들의 수도 서원에도 그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전역에 수도원을 세우고 대단히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했다. 날마다 150편의 시편을 낭송하며, 개인적 죄 고백을 실천하며 특정의 죄에 대한 보속 행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 등이다.

13세기에 탁발교단의 출현은 수도원 운동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탁발교단은 교회와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교단이다. 그것은 한 수도원 안에 머물면서 공동 기도와 개인 기도를 하는 제한된 생활 대신, 우선적으로 세상에서의 봉사를 요구했다.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갈멜회 등이 여기에 속하며, 토마스 아퀴나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등이 탁발교단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한편, 이그나티우스 료욜라(1491-1556)가 세운 제수잇 교단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운동이이다. 그것은 탁발교단들보다 더 사회봉사를 강조했다. 제수잇 회원들은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이그나티우스는 묵상을 지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범으로 [영적 훈련]을 저술했다. 그것은 대단히 합리적이면서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감정에 호소한다. 예를 들어, 묵상자가 성경에 등장하는 광경을 재구성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요약하면, 세상과 영을 분리시켰던 초대 교회 전통이 고대 교부들을 거쳐 사막교부들과 수도원운동을 통해 세상을 부인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영성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수도원적 영성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영성이 되었다. 그것은 수도자가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는 수덕 또는 완덕의 생활을 의미한다. 수도원적 영성은 기독교적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성적 금욕 및 금욕주의와 더불어, 명상, 묵상, 기도, 성경 읽기, 노동 등 영적 실천의 종교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도원 운동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참회와 기도, 성경연구,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데 그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서방교회의 신비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초기 기독교의 수덕적이고 신비적 경향을 신비주의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생활방식과 교리 전통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금욕주의가 기독교 영성의 일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율법적 금욕주의는 개인의 공로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기 쉽다.

 

II. 신비주의적 영성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영성의 형태다. 신비신학은 기독교 신비가들의 교훈, 그들의 하나님 임재 경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영성은 직접적 하나님 임재의 경험을 목표로 하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세계로부터 격리되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준비 과정으로는 금욕적 관습, 성례전 예식, 여러 형태의 기도 등이 있다.

고대 기독교는 신학을 항상 지성적 훈련 이상으로, 그리고 신학자는 성육신의 신비를 묵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경험의 소유자로 간주했다. 기독교인은 신비의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를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의 일부가 신비주의였다. 또한 교부들은 지식과 영성 혹은 신비신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런 통찰이 6세기에 디오니시우스의 저술과 신플라톤적 요소와 융합하여 신비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플라톤 전통이 기독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플라톤주의(neo- platonism)의 창시자,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는 서양 신비주의에 근원을 간주되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이원론을 배격하고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로 대립된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존재물로 계급 구조를 이룬 하나의 거대한 존재 계열만이 실재한다. 이 존재 계열이 의존하는 것, 즉 존재의 근원이 일자(一者)다. 일자 아래 단계에 정신, 그 다음에 영혼이 위치한다. 모든 존재자는 더 높은 단계의 존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자 자체와 연합하기를 열망한다. 인간 영혼의 임무는 육체의 속박을 견디며, 높은 단계로 상승하여 일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영혼은 정화의 과정을 통해 정신의 단계로, 그리고 황홀경에 의해 일자와 연합하는 단계로 상승한다. 이 상승운동의 수단이 신비주의적 도취와 금욕주의적 윤리다.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고대 동, 서방의 기독교 신비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세속적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자기와 세상에 대한 포기, 죄로부터의 정화, 초월적 경험을 강조하는 부정적 영성의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어거스틴과 아레오파고 사람 디오니시우스와 더불어 시작된다.

어거스틴은 신학자요, 교회 지도자요, 설교가였으나, 기독교의 신비적 요소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신비사상은 고백록], [시편 설교집], [삼위일체론] 등의 저서에서 발견된다. 특히 [고백록]은 그의 내면 생활이 고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육욕을 버리고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플로티누스가 제시한 상승 모델을 사용하여 영혼의 상승 단계를 설명한다. 육체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 영혼 내부에서의 진행, 그리고 신적 단계를 향한 상승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의 단순한 추종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에 공헌한 것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보는 경험에 대한 설명이다. 둘째, 이 경험의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 경험을 위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디오니시우스는 500년경 시리아의 수도사로 사도행전 17:34에 언급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으로 글 쓴 익명의 작가였다. 그는 흔히 슈도 디오니시우스(the pseudo-Dionysius) 또는 위 디오니시우스로 불리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천상의 계층구조](The 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계층 구조](The Eccliasstical Hierarchy), [신의 명칭들](The Divine Names), [신비신학](The Mystical Theology)등 4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것은 사도적 권위에 준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자신은 사변적 신비주의의 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디오니시우스의 주요한 공적 중 하나는 영혼의 상승을 정화, 조명, 합일, 세 단계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 형식은 그 후 서방 신비주의의 표준이 되었다. 정화의 단계는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을, 조명의 단계는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어주는 것을, 그리고 합일의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말한다. 정화의 단계는 유한한 본성과 관련된 것으로부터 영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조명의 단계에 속하는 것이 관상이다. 그것은 창조의 계층 구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합일은 신화와 동일한 것이다. 영혼은 에로스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되고 신화(神化)된다.

디오니시우스의 신적 합일의 개념은 모든 관념과 지식을 초월하여 몰아적 상태에 이르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무정념(apatheia), 즉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로 형용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 추론으로 도달할 수도 없는 신비한 분이다. 인간의 관념들은 하나님에게 적합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한하고 멀리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려면 그것들을 마음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방식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정념은 우리의 상상력과 감정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그려보려고 시도하는 긍정적 방법이며, 영성의 길을 처음 시작한 사람에게 유익하다. 무정념은 하나님에게 합당치 못한 모든 관념들을 제거하는 부정적 방법이다. 무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며, 무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합일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은 무정념의 방법이 필요하며, 지적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수동적 상태가 요구된다. 이 수동성은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과 융합되는 사랑의 엑스타시(ecstasy)로 이어진다. 디오니시우스의 신학방법은 하나님과 합일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논의와 부정적 논의를 결합하고, 마지막에는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 특징이다.

중세에는 기도와 묵상생활에 전념한 사람들을 흔히 신비가라 불렀으며, 신비주의는 두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감정적 신비주의와 지적 신비주의다. 전자에 속한 대표적 인물이 버나드(St. Bernard)라면, 후자에 속한 대표적 인물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였다. 한편, 이 두 흐름을 통합한 인물이 루이스브렉이다. 특히 루이스브렉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신비적 성장 단계를 활동적 생활, 내면생활, 관상생활로 수정했다. 그리고 각 단계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에 다음 단계가 추가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신비적 경험은 단지 한 두 사람이나 운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신과의 교제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여러 성장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세상을 피하여 순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가능하다. 신비주의 운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한 반면, 세상에서의 교회의 의미와 사명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혼과 육체, 명상 혹은 내면적 삶과 일상생활을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영성을 인간 내면적인 것, 완전히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편, 세상을 부인하거나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훈련과 규칙들을 통해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영성은 수도사나 독신자, 종교적 엘리트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수도원 운동은 육체와 세상을 피하거나 부정하는 영성을 산출했다고 할 수 있다.

금욕주의와 신비주의는 완전히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도 서로 배타적도 아니다. 금욕적 훈련의 위대한 실천자들이 또한 위대한 신비가들이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그러하다. 자아 부정과 극기를 목표로 하는 수덕생활은 신비주의자들에게 신적 합일을 위한 예비 단계다. 신비주의자들이 흔히 영혼 상승의 첫 단계로 간주하는 정화의 단계는 세상의 염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금욕적 훈련을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영성은 전통적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는 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것은 중세의 수도원적 경건, 금욕생활이나 개인의 내면적 신비체험 등을 포괄하는 인간의 영적 활동을 총칭하는 용어였다. 즉 그것은 일상생활과 구별되는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를 의미했다. 수덕신학은 자아 부정이나 극기가, 그리고 신비신학은 신과의 합일, 혹은 교제를 통한 궁극적 자아실현이 목표였다. 따라서 그것은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같은 특정인 또는 소수의 집단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III. 복음주의적 영성

기독교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통해 풍부한 영적 자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 성자 및 유물숭배, 성체(聖體)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의 영성 대부분을 상실하고 영적 생활이나 영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거나 논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영성을 가톨릭 교회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가톨릭적 영성추구 방법은 복음주의에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성과 복음주의적 신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영성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의학도들에게 생리학의 연구가 필요한 것처럼, 복음적 목회를 바라는 우리에게 영성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필요하다. 우리는 영성에 대한 연구 없이 참으로 목회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렌츠(Stanley Grenz)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주의 신학은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자의 지적 신념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격과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인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복음주의적 영성을 개발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하였다.

복음주의는 성서 메시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신앙운동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부훙 운동을 그 역사적 유산으로 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영성은 성경과 복음주의 유산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자원에 근거하여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적 영성이란 무엇이며, 영성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은 무엇인가? 수도원적 영성과 신비주의적 영성과 비교하여, 복음주의적 영성을 정리해 보자.

1. 전인적 삶

영성은 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그리고 영을 육체와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영성은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게 된다. 영성을 신비적인 것과 금욕적인 것으로 이해한 가톨릭 전통적 견해가 이를 대변한다.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는 영성을 인간 삶의 내면적 혹은 개인적 부분에 관련된 것으로 취급한다. 반면,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 간주한다면, 영성은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하게 된다.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 일부가 아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구성의 한 요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 그리고 인간의 활동 영역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적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는 견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장애물이 아니다. 따라서 영성을 인간 존재나 삶의 일부가 아닌, 육체를 포함한 인간 전체에 관련된 것으로 취급한다. 영성은 완전히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도 물질 세계와 전적으로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신령한 사람은 마음이나 영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초월적인 것, 거룩한 것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뱅크스(Robert Banks)는 영성을 "하나님과 함께, 동료 기독교인 중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성격과 성질"로 설명한다. 영성은 우리의 영이 분명히 "성령의 사역 속에 빠져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영만 아니라 지성, 의지, 상상력, 감정, 몸과 관련된 것이다. 블로쉬(Donald Bloesch)는 영성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삶의 스타일 또는 양태로 정의한다. 영성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라이스(Howard L. Rice)는 [개혁주의 영성]에서 영성을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따라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으로 정의한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모든 일에 중심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웨인라이트(Geofrrey Wainwright)는 영성을 기도와 삶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그것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 심령이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고 유지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윌리암즈(Rowan Williams)는 영성을 인간 내부적인 것, 즉 영적이며 개인적 경험에 제한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에 관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성이 기독교인의 전인적 삶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 변화에 의해서도 반증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계기로 가톨릭 신앙을 재정립했으며, 영성을 기독교인들의 모든 삶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 폭을 확대했다. 영성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느끼며 깨닫고 결단을 내리는 완전한 삶"을 의미하며 영성신학은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온갖 노력과 더불어 신앙적인 체험과 이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하면, 복음주의의 영성 이해는 전인적이며 통전적인 것이 특징이다. 영성은 인간 존재의 일부, 즉 영적 혹은 내면적 영역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2. 인격적 관계성

영성은 흔히 지성, 도덕성 등과 나란히 하는 인간의 경건한 성품이나 품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영성은 인간의 성품에 대한 추상적 개념보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심원한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가리킨다. 신령한 사람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영적 훈련과 실천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기도한다는 표현보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표현을, 고해한다는 말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선호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간의 활동에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특징은 영성을 관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물론 인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영성 이해에서 증거된다.

보이어(Louis Bouyer)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영성을 "복음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과 신자의 개별적 인격 사이의 공존과 상호관계로부터 전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홈즈(U. T. Holmes)는 [목회와 영성]에서 영성을 총괄적이며 경험적인 면에서 정의한다. 영성은 인간의 관계성 형성능력, 즉 전인을 포함한 우주적 인간 능력을 말하며,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그 관계 대상이다. 그것은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간주체에 의해 인식되며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질을 받고,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홈즈는 영성을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그것은 단지 인간의 내면적이거나 신비적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역사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는 인간의 삶을 말한다.

홀트(Bradley P. Holt)는 [기독교 영성사]에서 성서적 영성의 특성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중요성, 세상에서 개인의 생활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통합하는 것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도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다라서 기독교 영성은 "심리학적 건강을 구하는 내성적(內省的) 추구 이상의 것"이며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연합하는 것"이다.

샤우척(Norman Schaawchuck)은 기독교 영성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 경험하는 삶의 변화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며,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프랭크 신(Frank C. Senn)은 [프로테스탄트 영적 전통]에서 영성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성, 즉 그 관계성이 고려되고 표현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쉘드레이크(Philip Sheldrake)는 [영성과 신학]에서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신자의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의 의식적 관계에서 본 인간 삶의 전체"로 정의한다.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한다. 휴스톤(James Houston)은 [복음주의 신학사전]에서 영성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의 상태"로 기술하고 있으며, 웨이크필드(Gordon Wakefield)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영성을 기독교인의 전인적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한다. 이는 최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영성 정의에서도 발견된다.

그렌츠는 영성을 "성령의 지도 아래, 그러나 신자의 협력과 더불어 거룩함을 탐구하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맥그라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에 대한 고백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기독교 영성의 시금석을 간주한다. 따라서 영성은 신령한 사람과 관련된다. 그것은 신령한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능력을 주며, 그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그는 신령한 사람을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영적인 것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정의하고 있다.

오든(Thomas Oden)에 따르면, 신약 성경적 의미에서 영성은 도덕적 프로그램도, 일련의 규칙들도, 윤리적 성취의 단계도, 철학이나 웅변도, 개념이나 전략도, 명상의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다.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성육하시고 부활하신 주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인격적 삶을 뜻한다.

복음주의적 영성의 기본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의 영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의 삶과 정신을 따르는 것이 영성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사귐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복음주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영성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는 접근방법으로 평가된다.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은 회심주의, 성서주의, 활동주의, 십자가 중심주의로 요약된다. 특히 회심은 기독교적 삶의 시작에 절대 필요한 개인적 체험이요, 세상으로 향하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근본적 변화다. 복음주의가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과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의 상황과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기독자의 삶 전반을 의미한다.

3. 말씀과 은총

복음주의의 표준 가운데 하나는 종교개혁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복음주의는 신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을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영성은 거의 전적으로 성경에 의존한다.

한편, 복음주의는 수도원적 영성을 영적 실천과 같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에게 도달하려는 시도로 취급하며, 수덕신학과 신비주의 신학은 인간의 업적을 통한 구원론으로 오염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성은 금욕적 훈련이나 신비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내려오는 신앙 전통이다.

루터는 금욕적 훈련과 신비주의 전통을 존중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난 뒤에도, 금욕 훈련을 생활화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신비적 상징을 중시하고,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했다. 루터는 슈도 디오니시우스로부터 시작하여 엑크하르트로 이어지는 지적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한 반면, 버나드, 보나벤추라(St. Bonaventura)로 이어지는 감성적 신비주의를 높게 평가했다. 쯔빙글리는 오직 말씀의 영성을 강조한 반면, 가톨릭 교회의 금욕적, 성례적, 신비적 관습들을 거부했다. 칼빈의 영성의 출발점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합일이었으나, 그 의미는 가톨릭 교회와 달랐다. 신비적 합일은 믿음에 의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여러 성장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영성 훈련의 일반적 체계를 개발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훈련이나 발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을 위한 일체의 수단이나 방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적 영성 추구방법이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해악, 즉 하나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을 중시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한다. 파커(David Parker)에 따르면, 복음주의적 영성 훈련은 큐티(QT), 친교, 봉사, 훈육으로 요약된다. 특히 큐티는 말씀 묵상과 개인 기도로 이루어진다. 복음주의는 신자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묵상을 강조한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은총에 이르는 통로와 같은 것이다. 한편, 기독교 삶의 성숙 조건 가운데 하나가 친교와 봉사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복음주의적 영성의 징표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육체적 힘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영적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 즉 주를 위해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힘을 유지할 수 없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사람이요, 봉사하는 기독교인이다.


결론

영성이란 말은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오해를 경계해야 하는 한편, 영성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기독교적 영성은 역사적으로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성을 기독교인의 내면 생활, 즉 신비적인 것이나, 금욕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했으며, 영적 훈련과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가톨릭 전통적 영성 이해는 영성을 기독교인의 삶의 일부분으로, 기독교인의 본질이나 경건한 성품으로, 그리고 수도사나 신비가와 같은 소수의 집단에게만 개방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이며,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현대 들어, 영성의 의미가 재발견되고 있다.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의 일 부분이 아닌,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본질이나 경건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과 하나님, 이웃, 사회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신자들의 경건한 성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교제를 개발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그의 삶을 닮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삶,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다.

복음주의자들 역시 영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 복음주의는 영성을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관계성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전인적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실천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분리와 세상 속의 참여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복음주의적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저 세상적인 것도, 단지 개인적, 내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이웃과 사회로 역동적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신념인 동시에, 영적 갱신과 부흥운동이다. 따라서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할 역사적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는 영적 활력을 상실하고, 영적 빈곤을 겪고 있다. 독특한 영성이 부족한 것이 복음주의의 위기라고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영적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주의가 당면한 긴급한 과제다. 복음주의는 성서는 물론,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 운동을 비롯한 그 역사적 근원들로부터 영성에 대한 풍부한 자원들을 발견하여 특유의 영성을 개발해야 될 것이다.

한편, 복음주의는 가톨릭적 영성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가톨릭적 영성 추구방법이 복음주의 신앙에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논의한 가톨릭적 영성의 문제점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적 영성에 대한 공정한 평가다.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 교회가 성서적 진리를 왜곡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의 전통적 유업들 가운데 지속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폐기했다. 종교적 질서, 퇴수, 묵상, 침묵 등에 대한 강조도 그에 속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주의적 영성 실천들을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고대 교회의 유산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2021/06/05

Sung Deuk Oak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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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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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

  • 불교는 거짓 소아를 버리고 마음으로 깨달아 참 나인 대아(大我)의 부처가 되라고 한다. 
  • 유교는 성의정심격물치지로 하늘이 준 성(性)을 수신(修身)하여 제가치국평천하하는 성인 군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하늘이 내린 명령이 天命이요, 그 명대로 따르는 제사의 삶이 生命이다.
  • 동학의 인간관은 1860년대에 내 안에 있는 천주를 섬기라는 시천주(侍天主)에서 시작하여, 1890년대에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다시 1900년대에는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하여,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근대 한국인을 형성했다. 못배운 자, 가난한 자, 과부, 어린이, 늙은이, 소외된 자, 한 사람 한 사람 목숨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이 국가주의, 전체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길이다.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기도는 하나님의 숨을 吸하고 呼하는 것이므로,
기도 드리는 대신, 하나님께 내 호흡을 드리는 기도.

내 몸의 맥박이 힘차게 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미.
호흡과 맥박을 위해서 먹는 일상의 음식이 제사요 성만찬.

기도 찬미 제사로 이어지는 일상의 놀이가 목숨이다.
많은 밤(多夕) 치성으로 하나님의 어둠, 현묘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신학이라고 가르쳤다.

몸 성히 = 調身, 몸 고르기, 산 제사로 참 몸을 찾고
마음 비워 = 調心, 마음 고르기, 케노시스로 참 마음을 회복하고
바탕 태워 = 調息, 숨 고르기, 목숨 다 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참 나.

이것이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거룩한 산제사로서의 영적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聖山 하늘 보좌에 올라가 성령을 받고, 
땅에서 목숨을 키워, 꽃을 피우는 삶, 
거룩한 산 오르내리는 산보(散步)가 생명이요 예배다.

---
여러 해 전에 줄을 치며 읽었던 유영모 선생의 글과 기도문을 종강 후 첫날 아침에 다시 읽는다. 

한국 개신교는 참 나를 찾는 인간되는 공부, 수양론이 약하다. 
성화, 수신, 마음 공부, 수양, 명상, 묵상, 침묵의 언어가 교회 안에 더 많아 지면 좋겠다. 
팬데믹이 끝나면 거룩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침묵하는 훈련을 하면 어떨까? 
믿음과 교리를 강조하는 설교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을 변혁하여 새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망찬 정치를 하기 전에, 기도와 사랑으로 사람되는 개신교가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 나의 호흡을 드립니다. 나의 마음을 드립니다. 내 목숨을 드립니다. 나의 맥박이 주를 향한 찬미가 되게 하소서. 나의 공부가 한국교회를 향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126민속원, Paul Dongwon Goh and 12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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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a Shin

얼 나! 靈. 道. 法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제나(自我)가 죽고서 얼 나로 사는 성령충만한 삶, 깨어남의 신앙을 추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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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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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병

글을 읽을수록 기독교의 깊은 진리와 수양의 가르침을 잊고 너무 가볍게 떠들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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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h



이양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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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h



한민희

옥교수님
좋은 글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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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몇 가지 질문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병마)는 물러가라”

Facebook: Kang-nam Oh

Kang-nam Oh
1itSptonshorored  · 
몇 가지 질문

얼마 전 어느 사려 깊은 분이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며 저와 다른 한 분 목사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자신은 현재의 기독교를 떠났지만 “참종교인, 참기독교인으로 깨우침의 길을 가고 싶”은데,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한 질문입니다.  많은 질문 중에서 제가 답할 수 있는 몇 개를 골라 답을 했습니다.  물론 제 답이 그분이 가진 문제에 대한 완벽한 대답일 수 없다는 것 이해합니다.  그런데 일반 패친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으실지 궁금하여 여기 옮겨 봅니다.  본래의 질문은 제가 짧게 요약했습니다. 
=======
--영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병마)는 물러가라”하여 병이 사라졌음을 제가 직접 체험했습니다. 알라나 무함마드의 이름으로도, 부처나 기타 다른 이름으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나요.

오강남 생각: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체험은 여러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을 일단 설명하려 하면 그 즉시 그것은 자기가 속한 종교적 사회적 배경에서 나온 해석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배경을 가지신 분은 물론 하느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이 고쳐주신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스스로가 상제라 주장하는 증산교 교주 강증산은 하느님이나 성령이라는 용어를 빌리지 않고도 병을 낫게 했습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싯디’라고 하여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불교도 일반 신도의 경우는 하느님이나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나 보살들의 도움에 의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경우 하느님이나 성령 악령의 개입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유신론적 설명은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정통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인 신을 상정한 해석도 가능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해석이라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아시겠지만, 종교가 없는 분들은 암으로부터의 기적적인 치유를 spontaneous remission라고 하면서 신이나 초자연적 힘의 개입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고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마치 옛날에는 간질병이 악귀가 들어서 생기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뇌세포의 변이에서 생긴 결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면에서 신을 개입시키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 비가 오느냐, 왜 경제가 엉망이냐, 왜 병이 들기도 하고 낫기도 하느냐 하는 등의 문제에 신을 가정하면서 신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기상학, 경제학, 의학, 과학 같은 것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인류가 지금 같은 지식을 축적하게 된 것은 이런 알지 못했던 현상에 대한 설명 체계에서 신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예수의 부활승천 사건의 목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부활이 없다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는 우리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바울의 생각이기도 한데, 부활승천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요?

오강남의 생각: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고 우리가 불쌍한 자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전체 문맥을 보아서 저는 육체적 부활보다 옛 사람에서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더욱 강조한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그 장 끝부분에 바울 스스로도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한 것을 보면 무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 매일 영적 죽음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산 것을 자랑으로 겨긴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영적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없는 삶은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안믿는 것보다 무한대로 더 낫다는 파스칼의 다소 드라이한 논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믿는 것이 삶 속에서도 낫다고 봅니다. 심층종교인이 누리는 평안 때문이지요.

오강남 생각: 신이 있다고 하는데 베팅했다가 없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이 별로 없는데, 신이 없다고 했다가 신이 있으면 완전히 망하게 되기 때문에 신이 있다고 믿는 쪽에 베팅하는 것이 좋고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 좋다는 파스칼의 “도박 논증(wager argument)”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해드리는 것과 안 해드리는 것에 대해 하느님이 그렇게 신경 쓰실까 하는 문제가 있지요.  저는 하느님이니 천국 지옥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으면 어느 정도 초기에는 믿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커지면서 믿기지 않는데 억지로 믿으려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억지로 믿으려 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존 레논의 <이매진>의 노랫말처럼 천국도 지옥도 종교도 없으면 싸울 일도 목숨 바칠 일도 없고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신이 존재하고 내세 심판이 있어야 현재의 도덕적 생활이 가능한 것 아닌가요?

오강남 생각: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에 의한 신 존재 증명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UBC 대학의 아라 노렌자얀 지음, 오강남 (해제) 김영사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를 읽어보시면 옛날에는 이런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수렵채집 사회에서 공동사회로 발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지켜보는 신’이 있어야 도덕적 생활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공동체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그런 신은 필요 없다고 합니다. 덴마크의 경우 그런 신이 없어도 훌륭한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지요.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런 것을 믿는 것이 오히려 독자적인 결단에 의한 윤리 생활에 방해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 치부하므로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해보려는 복지 사회가 되는 데도 장애 요소가 된다고 합니다.  

필 주커먼이 쓴 <종교 없는 삶> (판미동, 오강남 해제) 나 기타 <신이 없이도 선할 수 있는가>류의 책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들입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 등 제일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건전한 나라들은 실질적으로 “신 없는 사회”(이것도 필 주커만 책의 제목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성립하는데 미국이 신을 믿는 사람들의 제일 많은데, 유럽 국가들에 비해 범죄율, 도덕성, 문맹율 등 여러 면에서 뒤진다고 합ㄴ다.  미국 국내에서만 보아도 루이지애나 등 교회출석율이 제일 많은 남부 바이불 벨트 주들의 범죄율이 가장 높고, 반대로 교회 출석율이 가장 낮은 북동부 버몬트 주나 서북부 오레곤 주가 범죄율이 가장 낮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감옥에 있는 죄수들 중 무신론자는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통계수치를 보면 기독교인들의 범죄율이 다른 종교의 범죄율보다 높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팩트체크 부탁합니다.

3 comments
Seongdoo Cho
두번째 문제는 불교도들에게 윤회의 인정과 비슷한 문제인것 같습니다.
붓다재세시 단멸론이 도덕적 방종의 근거로 사용되었기에 배척 되었던것과 비슷하네요.
윤회와 업이 없이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굳이 윤회론도 필요가 없어지겠네요..
감사합니다.
 · Reply · 1 h
Guho Jo
불교의 성립 근거인 윤회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2021/06/04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특집 : 왜 유영모와 함석헌인가 유영모와 함석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용수352 한종호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통권 제596호) - 대한기독교서회 논문 : 전문잡지 - DBpia, 연구자를 돕는 똑똑한 학술콘텐츠 플랫폼

기독교사상 2008년 8월호(통권 제596호)

발행기관명
 
대한기독교서회
저널명
 
기독교사상
주제분류
 
인문학 > 종교학/신학
발행연도
 
2008
권호 내 총 논문수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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