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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 진리로 가는 양식 | 증산도대학생연합회, 증산도랑郞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 진리로 가는 양식 | 증산도대학생연합회, 증산도랑郞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2018-05-10 00:54:08 조회: 1,300회 댓글: 0건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김지하 시인 2008.10.29 07:56:00



전라북도 모악산 밑 구릿골에서 주로 활동한 강증산(姜甑山) 선생의 공생활(公生活) 기간은 서기 1901년에서 1909년까지의 8년 또는 9년간이다.



1871년 전북 고부 출신이다.



젊어 동학에 입도했으나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혁명실패 후 산같이 쌓인 시체와 살아있어도 이미 넋이 나간 사람들의 불행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통곡했다고 한다.



하늘과 땅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평화적 후천개벽 즉 '정세개벽(靖世開闢)'의 서원을 세우고 1897년부터 3년간 주유천하하던 중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는 태을주(太乙呪)를 얻고 연산(連山)에서는 김일부(金一夫)로부터 정역(正易)의 지식을 얻었다고 전한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그해 7월 한 밤 오룡(五龍)이 포효하는 폭풍과 비바람 속에 수운 최제우 선생의 깨달음인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의 계시를 보다 신비주의적으로 '내가 한울님이다'로 확대 자각한 뒤 천지 대변동의 후천진리를 또한 깨닫고 하산하여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모악산 밑 구릿골을 중심으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한다.



구릿골 이외에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전북 각지를 순력하며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선포하고 1909년 갑자기 죽은 뒤 그 추종자들은 아내 고판례(高判禮)의 용화교(龍華敎) 이외에 차경석(車京石) 보천교(普天敎)의 육백만 명으로 계승되었고 후천세계에 관한 그의 예언집인 '현무경(玄武經)'이 뒤에 남았다.



그의 사상은 1901년 구릿골에서 첫 제자 김형렬(金亨烈)에게 한 첫 가르침 속에 압축되어 있다.



'수많은 아낙들이 구천을 향해 밤낮으로 끊임없이 염주 굴리는 저 소리를 들어봐라. 수천년을 부엌데기, 천덕꾸러기로 내내 구박만 받던 아낙들의 쌓이고 쌓인 한(限)이 구천에 받아들여졌다. 이제 후천개벽이 일어날 터인데 그것은 분명 아낙을 앞세운 음개벽이다. 그러나 어디 아낙만의 세상이겠느냐, 남녀동등의 세상이겠지.'



음개벽!



이것이 강증산 사상의 핵심내용이다. 여성, 여성성과 혼돈성이 핵심가치가 되는 우주 대변동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는 분명 사랑, 혼돈, 모성의 시대다. 서양사의 경우 희랍신화에서 일찍이 이성(理性)과 질서와 가부장의 주신(主神) 제우스(Zeus)에 의해 집단 살해당한 성가족(聖家族) 에로스(Eros), 카오스(Chaos), 가이아(Gaia)가 되살아나고 있고 시몬느 보브아르로부터 헬렌 피셔, 크리스테바, 이리가라이의 이름을 앞세운 페미니즘과 젠더 투쟁이 한창이다. 바야흐로 생명과 평화, 혼돈적 질서, 색정과 친화력의 시대다.



다름아닌 음개벽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여성을 후천개벽의 주체로 드높인 이후 음개벽·상생시대(相生時代)는 강증산 선생의 중심 명제가 되었다.



강증산 사상에서 연대기는 별로 의미가 없다. 선형(線形)적 발전구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시점이든 중요하다.



여러 연구자들이 강증산 선생을 가리켜 '촌놈'이라고 부른다. 혹세무민(惑世誣民)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점을 중요하게 본다.



다만 오늘날 그분을 고태종교(古態宗敎)적 양식으로 '계승(繼承)'하는 것은 어떤 한계가 있고 새 시대·새 세대의 문화, 즉 우주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새롭고 광활하게 해석(解釋)해야 된다는 것이 조건이다.



강증산 선생은 일관되게 자기 자신을 '옥황상제(玉皇上帝)' 즉 '한울님'이라 칭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촌놈'이라고 비하(卑下)하는 것인데, 나는 도리어 이런 점이 그분의 위대성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사귀었고 주장했던 바가 다름 아닌 '촌놈'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울님인 그가 촌놈이고 촌놈의 친구고 촌놈으로 살았음은 그야말로 촌놈과 촌놈의 친구와 촌놈의 삶이 한울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강증산 선생은 분명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계승자이니 '사람이 한울님(人乃天)'이라는 동학의 근본 명제를 가장 솔직하고 대담하고 촌놈답게 실천한 셈이다.



그 한울님인 남성 강증산이 후천개벽의 주체를 여성 한울님에게 넘긴 것이 바로 음개벽이다.



훗날 보천교를 창설하는 제자 차경석의 정읍(井邑) 대흥리(大興里) 집에서다. 선생은 여러 제자들이 둘러앉은 한가운데에서 누운 채로 자기 아내 고판례로 하여금 식칼을 들고 자기 배 위에 타고 앉아 자기에게 칼을 겨누고 '하늘, 땅, 사람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당장 나에게 넘기시오'라고 호령하라고 이른다.



고판례가 그대로 하자 선생은 밑에 깔린 채 즉각 두 손을 싹싹 비벼 크게 잘못을 빌면서 '네. 당장 넘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하길 '이대로 하라!'



그 밤에 선생은 마당에다 성경, 사서삼경, 불경과 공명첩(空名帖), 빚문서, 계산서를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서 널어놓은 뒤 수부(首婦, 으뜸여성) 고판례를 앞장으로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밟으며 밤새 춤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 아닌 후천이요 음개벽이라고 하였다.



생활의 구체적 실천에서의 음개벽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이 전주 가장자리 김주보(金柱甫)의 주막에 들렀을 때다. 주보의 아내가 말한다.



'지금 전주시내에서는 큰 술도가 주인들이 모여 자그마한 주막의 작은 술장사들이 제 쪼대로 제 째대로 장사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저희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야단 야단이랍니다. 어찌하지요?'



선생이 즉시 대답한다.



'작은 술장사 아줌마들이 모두 모여 손을 잡고 전주시내에서 매일 매일 시위(示威)를 하쇼.'



아까 정읍 대흥리 마당에서 온갖 경(經)들을 찢어놓고 밟으며 밤새 춤추었다고 했다. 그때 어떤 음악에 따라 춤추었을까?



춤이 실천이라면 음악, 즉 소리는 그 원리다. 이 세상 동·서의 온갖 진리를 내동댕이치는 무시무시한 그 대혼돈의 질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 양반들 소리나 중국 소리는 아니었을테고 농민들의 풍물가락이었을까?



어림없다.



'걸뱅이·각설이 타령'이었다. 이른바 '품바품바 들어간다'이다.



농민 근처에도 못 가는 밑바닥 천민들의 참으로 누추한 혼돈의 소리다.



그런데 선생은 이것을 무엇이라 자리매김했을까?



선생은 평소 수운 동학의 첫 번째 강령주문(降靈呪文)인 '지기금지(至氣今至)'를 가장 높이 모시며 '으뜸가는 율려주문(律呂呪文)'이라 평하고 '후천사상은 율려가 통치한다'고 가르쳤다.



율려는 선천(先天, 지나간 역사 시대) 5만 년 동안 우주와 삶을 지배해왔던 이성, 질서, 남성성, 제왕, 율법의 통섭(統攝)적 음악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극한 기운(至氣)'이란 반대로 태초의 혼혼탁탁(昏昏濁濁)한 혼돈적 에너지(混元之一氣)를 뜻한다. 그러니 '혼돈이 곧 통섭한다'는 의미가 된다. 가히 개벽적 반어법(反語法)일 수 있겠다.



선생은 한 발 더 나간다.



바로 그날밤의 그 '걸뱅이 각설이 타령' 자체를 다른 것 아닌 율려라고 부른 것이다. 선생은 여기서 다시 한 걸음 크게 더 나가고야 만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웃는 놈은 그 자리에서 직사하리라.'



이래서 점잖은 학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촌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촌놈'일까? 표현이 촌스럽다는 까닭이라면 상관없지만 그 내용이 그야말로 틀렸거나 빈약하다면 참말로 '촌놈'이란 말에 하자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자다. 앞으로 '강증산 촌놈론'은 즉시, 당연히 취소되어야 한다. 왜?



'걸뱅이 각설이 타령'이 음악으로서의 단순 혼돈, 즉 무질서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黃帝) 이후 4천5백 년 역사를 가진 질서정연한 중국 우주율로서의 율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동아시아라 해서 중국 고대의 율려만이 음악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 존중하는 중국이라 해도, 또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도 4천5백 년 전보다 더 오래된 1만4천 년 전 한민족의 신화적 모태(母胎)인 파미르 고원의 마고성(麻姑城) 나름의 우주율, 즉 우주 음악질서가 황제류의 율려가 아니라 놀랍게도 그 정반대인 여율(呂律), 그것도 팔려사율(八呂四律)이란 점을 착안해야 한다.



어떤 중국 미학자 가라사대 '1만4천 년 전이면 신화시대인데 그것을 오늘에 와서 어떻게 미학적 기준으로까지….'



허허허허허.



내 대답은 이것이다.



'4천5백 년 전 역시 신화시대다. 황제가 신화적 제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신농(神農)과 함께 삼조당(三祖堂)에 앉아있는가? 역사에서의 신화와 문화에서의 신화는 실증차원에서는 서로 거리가 멀다.'



팔려사율이 무엇인가?



여(呂)는 여성성, 혼돈성, 신화성, 우발성, 창발성, 개체성, 영성, 감성 등이고 율(律)은 남성성, 질서성, 역사성, 필연성, 규격성, 전체성, 이성, 과학성 등이다. 그것이 하나는 여덟이고 다른 하나는 넷이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른바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다. 유식한 서양말로하면 저 유식하고 또 유명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모스(chaosmos)' 또는 '카오스모시스(chaosmosis)'다.



그래도 시비 건다면, 시간의 아득함을 들어 계속 시비 건다면 또 말하자. 1879년에서 1885년 사이라면 명백히 신화시대가 아니다. 그래도 신화시대던가?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시기에 충청도 연산사람 김일부(金一夫, 강증산 선생은 그에게 후천개벽론을 배웠다고 한다) 선생이 그의 '정역(正易)'에서 후천 시대의 정악(正樂, 바른 음악)을 분명히 율려가 아닌 '여율'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것은 미친 소리에 불과한가?



그보다 20년 전 동학 최수운의 '지기(至氣)'의 뜻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 또한 미친 소리에 불과한가?



대개 그것을 '미친 소리'라고 매도하는 진짜 미친 소리의 주인공은 엉터리 마르크시스트거나 서구 중독자거나 중국 깡통들이겠는데, 그러면 대개 그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중국의 개화주의자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이나 모택동의 스승인 마르크시스트 이대교(李大釗)의 '폭류론(暴流論)' 역시 미친 소리인가? 반론(反論)에 자신 있는가?



중국 깡통들과 동양 마르크시스트들에게 하는 말이다.



서구 중독자에게 또 한마디 하자.



현대 독일의 우주음악 '스톡하우젠'은 피타고라스 이후 서양 고전음악의 우주 율격 그 자체인 바하와 현대 서양 대중음악의 혼돈률인 비틀스를 결합한 것이다. 스톡하우젠도 역시 미친 소리인가?



현대 신세대 한국의 퓨전이나 크로스오버 전문가들에게도 한마디 하자.



금년 초 중국에서 오래도록 음악 공부하고 돌아온 서태지가 귀국 콘서트 계획을 말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 위에 나의 소리를 살짝 얹어보겠다'고 했다.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라면 서태지가 중국에서 여러 해 공부했을 것이 분명한 율려요 그 위에 살짝 얹겠다는 제 자신의 소리는 신세대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카오스 소리 '록'일게다. 그럼에 그것은 다름 아닌 '여율'이 틀림없다.



아직도 감(感)이 오지 않는가?



이야기를 좀 엉뚱하게 바꿔보자.



율려는 요즘 대유행인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의 두목인 미국 사회생물학(다윈주의)의 에드워드 윌슨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망상적 우주전체주의 통섭(統攝)이론과 똑같은 것이거나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의 엉터리 생명학인 온생명론의 전 지구적 종속신경계 이론과 별로 다른 게 없다.



개체 생명의 중요성, 창조성, 혼돈성, 우주성을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으로 경멸하고 전 유전자 체계나 중추신경계 같은 전체주의적 통제력만을, 그것도 남성중심적, 수학적 이성주의만을 숭배하는 이들의 반생명성, 반영성, 반혼돈성, 그 낡아빠진 에코 파시즘을 아가 리를 떠억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존경하고만 자빠졌을 것인가?



똑같은 이야기가 너무 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마도 음개벽과 함께 강증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니 조금만 더 나가자.



이야기의 코드가 거꾸로가 된다.



요즘의 촛불세대, 요즘의 디지털 세대는 매우 훌륭한, 탁월한 새 문화의 창의력을 지닌 새 문명사 창조의 전위임에 틀림없으나 첨단 전위 나름의 한계가 또한 분명하다.



왜?



앞으로 디지털 네트워크와 웹문화 이외에 아날로그 문화, 종이, 책 같은 것은 다 싸그리 망해서 자취도 없을 것이라는 혁신적 신념에 불타오르고 있는 바로 그 점이 오류라는 것이다.



문화의 역사는 그렇게 단선적, 단절적인 것이 아니다. '디지로그'라는 말이 이미 유행하고 있듯이



물론 디지털이 중심이요 초점이 되면서도 바로 그 중심성에 기준을 두고 해체, 재구성되는 조건 속에서 아날로그가 다시 각양각색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곧 문화의 역사다.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혁명 이후 신문이 나타나고 곧 이후 극히 대중적, 통속적인 신문 연재소설이 대유행했다. 예부터 내려오던, 그리고 중세에도 르네상스기에도 왕성하던 시는 마침내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멀지 않아 신문 연재소설의 통속성이나 가벼움 때문에 미학적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지식대중(고등교육의 보편화와 문화산업의 일반화와 연결된) 사이에 고급 시예술이 부활한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이 그들이다. 소설은 이 상징주의 시예술의 미학적 영향력을 제 나름으로 받아들여 질적인 변혁을 꾀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어떠했는가? 처음의 활동사진 '기차의 도착'은 그 유치증에도 불구하고 파천황의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금방 지루해지고 빠리짱들은 사이렌트를 토키로, 흑백을 컬러로, 무음(無音) 영화에 음악과 드라마와 회회와 문학을 끌어들여 다 죽었다고 사형선고 받았던 전통적 기초예술이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관계는 과연 여기에서 예외일까?



해월 최시형 선생은 왈,



'진정한 후천개벽은 후천을 세우고 선천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을 중심에 두되 그 후천원리에 의해 새롭게 의미가 인정된 선천을 거기 배합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오만 년 후천개벽의 첫 멘토인 최제우 선생의 옥중시(獄中侍)가 있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은 물 위에 밝아 의심할 틈이 없고

기둥은 다 낡은 것 같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다.)



수운 선생의 동학에서 후천 생명의 '수심정기(守心正氣, 고대 풍류선도)'와 선천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함께 있다. 가장 중요한 부적도 후천 혼돈인 '궁궁(弓弓)'과 선천 질서인 '태극(太極)'이 함께 있다.



혼돈은 질서와, 생명은 평화와, 여성은 남성과, 부드러운 사랑의 어머니는 똑똑하고 일 잘하는 아버지와, 그리하여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팔려사율'의 비율로 결합하는 것이 후천개벽이요 음개벽의 새 시대다.



그러나 이때 두 가지 패턴이 나타난다. 하나는 전형적 선천인 남성적 이성 중심의 전체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후천의 여성적 혼돈 중심의 해체주의의 결합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남성성과 여성성, 중심성과 해체성 사이의, 이성과 영성 및 감성 사이의 이러저러한 상생(相生) 상극(相克) 사이의 생극(生克)이라는 드러난 질서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밑에 숨어서 그 드러난 질서를 추동(推動), 조정(調整), 비판(批判), 수정(修正)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 스스로 드러난 질서로 열고 나오는 숨은 질서의 생성 즉 '복승(複勝)'이라는 또 하나의 존재다.



바로 이 새로운 복승의 존재는 선천 후천 사이 생극의 모습이 아니라 애당초부터 새로운 근원적 생명인 법이다. 한민족의 신화망에서는 바로 이것을 '한'이라고 부른다.



'걸뱅이 각설이 타령'은 그럼 어디에 속하는가?



애당초 그저 '촌놈'의 싸구려 단순 혼돈물 자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생극 쪽인가? 복승 쪽인가?



생극 쪽에 익숙한 것이 한국학의 전문지식인들이다. 그들이 아니라도 불교나 동북방 샤머니즘 등을 공부하는 서양 지식인들 역시 이 방면엔 체계적 이론들을 갖고 있는 시절이다.



'걸뱅이 각설이 타령'이 과연 복승이라면 이제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바로 이래서 강증산 사상에 있어서의 '율려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여율'을 길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다름 아닌 오늘 우리 문화, 오늘 세계 문화의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른바 '한'이다.



그것이 팔려사율(八呂四律)임은 이미 말했고 그밖에 또한 하늘ㆍ땅ㆍ사람의 삼재(三才)와 음양의 양지(兩之)의 결합이 곧 한이다.



아주 복잡해졌다.



인류 생명사상사, 생명과학사의 새로운 대전환점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통섭'이라는 이름의 유전자 전체주의나 온 '생명'이라는 이름의 중추신경계적 에코 파시즘 따위와의 날카로운 대각(對角)에 연결되기 때문이고 동서양 문화와 문명의 후천 대개벽의 핵심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을 맞았다. 1960년이다. 1961년 5월에는 군부 쿠데타가 터졌다. 그해 5월 16일 직전 판문점에서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학생회담이 계획되고 있었는데 그 회담 중 남북학생 민족미학회의에 남쪽 대표 두 사람(다른 한 사람은 조동일 교수) 중 한 사람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쿠데타가 터지자 나는 열세 살에 떠나온 내 고향 목포로 피신했다. 목포에서 가난한 친척집에 얹혀 도로 공사장의 스테바(삽질)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무렵이다. 내 곁엔 먼 친척의 괴짜 한 사람이 늘 붙어있어 한번은 '소리'로 이야기가 몰리자 그의 인도로 가까운 임성(林城)-일노(一老) 사이 한 벌판에 쭈그리고 앉은 걸뱅이 마을을 술김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늙은 걸뱅이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각설이타령 얘기를 내 평생 내내 결코 잊을수가 없다. 그때의 문답이다.



'품바타령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소리가 아니라 춤이다.'

'무슨 춤인가?'

'들어가는 춤이다.'

'들어간다가 그 뜻인가?'

'그렇다.'

'어디로 들어가는가?'

'그 집 살림 속으로 들어간다.'

'살림 망해먹으러 들어가는가?'

'반대다.'

'반대?'

'그 집 살림 살려주려고 들어간다.'

'어떻게?'

'그래서 소리가 아니라 춤이라고 한다.'

'춤이 살림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렇다.'

'춤 속에 돈이 들었나?'

'비슷하다.'

'돈 비슷하다면?'

'목숨 같은 것. 재수 같은 것. 좋은 아들딸 같은 것. 산신령 같은 것. 한울님 같은 것.'

'더 쉽게 설명해달라.'

'품바품바는 장단인데, 두 다리와 아랫도리를 흔들며 들었다내렸다 앞으로 뒤로 오금질하는 장단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살림춤이다.'

'그 춤이 어디서 나오는가?'

'꽁무니에서 나온다. 그래서 걸뱅이 각설이타령, 품바춤을 꽁무니타령이니 똥구멍춤이라고 하지.'

'왜?'

'춤이 거기서 나오니까!'

'정확히 말해다오.'

'사타구니가 춤의 첫 샘물이다.'

'사타구니라면?'

'똥구멍하고 불알 사이 조금 안쪽에 있는 것. 씨ㅂ하는데, 애 갖는데, 애 모시는데, 애 낳는데. 거기가 목숨의 첫 샘물이고 산신령, 한울님의 자리라고 하더라.'

'누가?'

'어른들이 그랬어. 다 그랬어.'

'거기서 춤이 나와?'

'타령도 거기서 나와!'

'거기가 살림의 자리라?'

'그렇지. 그것을 집 안에 깊숙이 디밀고 잘살라고. 애 많이 낳고, 돈 많이 벌고, 재수 좋으라고 소리와 춤으로 축수하고는 밥 한술 얻어먹는 거지 뭘!'

'아항!'



이른바 회음(會陰) 이야기다.



나는 이미 나의 <프레시안> 기고문 '유모차부대 엄마'에서 회음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길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글이 여기에 이르니 내 아랫배로부터 나지막한 흐느낌과 함께 그때의 한 날카로운 기억이 뒤를 치고 올라온다.



'당신 이야기 듣고 있자니 여자들 이야기 같다. 왜 그런가?'

'본래 이 품바타령 춤이 옛날에 여자들이 시작한거다.'

'사당패?'

'비슷해.'

'아항!'

'한마디 더 해줄게. 옛날엔 그 사당패하고 손을 잡거나 그 사당패하고 잠을 자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데! 힘도 좋아지고 재수 있고 돈도 잘 벌고 얼굴도 좋아지고 농사도 아주 잘된대!'

'아항!'



회음혈(會陰穴)은 전통동의학(東醫學)이나 단전학(丹田學)에서 공식 인정되는 단전 자리가 아니라 18세기, 19세기 이래 몸 안에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천응혈(天應穴), 아시혈(阿是穴) 같은 혼돈혈(混沌穴) 등과 함께 갑자기 그 기능이 활발해지고 강렬해지고 다양해져서 상중하 삼단전 중심의 전통 단전수련자들도 예외적으로 크게 중요시하게 된 기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쯤에서 이 부분, '촌놈'과 '율려주문'과 '품바타령'과 '웃으면 직사한다'에 대한 결론 비슷한 것을 내리겠다.



현대 율려는 결코 대뇌 중심의 유전자 통섭력이나 온 생명의 중추신경계 집중력이 아니라 그 기능의 원동력까지를 모두 함축한 회음, 특히 여성의 회음, 노동, 생식, 포태, 태교, 출산, 육아, 춤, 예감, 신경, 유전자 기능과 우주 대변동의 원형적 움직임이 모두 함축된 회음이며 이 회음을 각 개체 생명의 중심으로 하는 개체-융합의 화엄개벽적 여율(呂律)이 율려 기능을 배합하면서 후천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 바로 나의 결론이다.



사회생물학이니 온 생명이니 하는 에코 파시즘에 그 문을 크게 벌리고 앉아 있는 낡아빠진, 더럽고 데데한 이성과 남성 중심의 전체주의 생명학을 근본에서 무너뜨릴 '회음의 새 생명학'이 탄생할 때가 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생명 평화와 혼돈질서와 개체-융합의 화엄적 자기조직화에 의한 후천개벽을 기초로 각각 일체의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모두 다 거룩한 우주공동주체로 드높이는 <모심>의 원리 위에 전 인류의 각 종교와 사상 사이의 통일신단(統一神壇)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세계조화정부(世界造化政府)를 창건하자는 것이 바로 대혼돈에 빠진 현실 지구와 인류를 위한 참다운 새 UN구상에 연결되는 강증산 선생의 놀라운 우주 정치적 상상력이다.



이미 여러 가지 기고문에서 상세히 밝혔듯이 촛불(촛불을 위장하는 숯불이나 횃불과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 전혀 다르다.), '쓰나미' 이후의 지구 자전축 북극이동, 지리극(地理極)과 자기극(磁氣極) 상호이탈과 재결합에 의한 기존 북극해체, 동토대 메탄층 폭발, 대빙산 본격해빙, 난류한류 복합의 대규모 남반구 해수면 상승, 북극 해빙과 적도 결빙, 온난화와 간빙기의 교차생성에 따른 더위ㆍ추위의 겹침, 대전염병 창궐, 생명계 괴변, 재진화(re-evolution), 지진, 해일, 화산, 토네이도, 산불, 침강, 융기, 생태계 오염, 멸종, 유전자 변질사태, 새로운 생물종 출현 등 우주와 지구 변동.



미국,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전세계 금융위기, 국유화 등에 의한 중도적 시장문명의 파급, 거대 자본의 아시아 이동, 호혜(互惠)-교환(交換)-재분배(再分配)의 새로운 고대 신시(神市)의 네오 르네상스.



이 모든 것이 후천개벽이요, 여성, 어린이, 쓸쓸한 대중 등 짓밟히고 소외된 <꼬래비> 등 어둠(음, 陰)이 빛으로 뒤집히고 상극(相克) 중심이 상생(相生)으로 중심 전환하는 후천 대개벽을 예언한 강증산 선생의 예언은 매우 신비적 형태의 개벽 로드맵으로 <현무경(玄武經)> 안에 전개되어 있고 또한 이 대개벽기의 우주적 소통 매체로서, 새로운 크립토그램, 픽토그램의 암호문자의 상형적 방향성, 그 디자인 원리가 역시 현무경 안에 제시되어 있다. 이 안에 함축된 신비한 비밀은 참으로 창조적 발상에 의한 근본적 새 해석이 아니면 밝혀낼 수가 없다.



나는 이 해석과 발상 과정에 '콘셉터(Concepter)', 즉 '창조적 발상 지원 시스템'을 걸도록 제안하는 바이다.



콘셉터는 일본 문명의 첨병인 노무라 종합연구소(野村綜合硏究所)의 '창조전략' 안에 나타난 아이디어로 컴퓨터와 정보화가 아니라 그것의 내권(內捲) 운동으로서의 창조화(創造化)를 위한 발상과 논의, 회의구조다.



한 문제의 전문가를 가운데 앉히고, 즉 '모시고' 그를 둘러싼 각 방면 관련 전문가들의 각양각색의 질문이 집중되는 중에 중심 콘셉터인 화자(話者)의 전문적이면서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하는 중에 그것을 다방면 다방향에서 현실적 어젠다로 즉각 즉각(컴퓨팅, 네트워킹 과정에서) '살리고', 그에 연속하여 학술적으로 심층논의와 보도와 대중적 코멘트의 확산 속에서 전 대중적 창의적 문화의 현실화로 크게 '깨치는' 과정이다.



이것을 <현무경>을 비롯한 증산 개벽사상과 진행 중에 있는 기위친정(己位親政)의 후천개벽(김일부 정역이론)을 함께 연계하여 그 '창조적 발상'을 '개체-융합'과 '내부공생(endosymtiosis)' 원리에 따라 자기조직화하는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야 한다.



속류 민주주의적 세미나나 패널 구조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수운 선생의 '각지불이(各知不移, 해체적 중심원리인 화엄경의 실천)'에 의해서만 창조적 내용에 도달한다. 콘셉터는 <현무경>만 아니라 통일신단과 조화정부의 회의와 논의, 합의과정, 즉 고대 화백(和白)의 세계사적 전개에서도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름 아닌 '모심'이다.



수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주문은 '모심'을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으며 현생 인류가 우주 화엄을 각자각자 제 나름나름으로 선적(線的)으로 인식, 실천한다(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수운 선생 자신이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모심'이 바로 수수억천 년 우주의 지속적인 창조적 진화와 그 완성으로서의 화엄적 개벽의 기본동력임을 말하고 있다.



강증산 선생은 바로 자신의 평화적 후천개벽(後天開闢) 노선 천명과 그 실천으로 '촛불'에서 나타난 생명ㆍ평화의 새로운 후천개벽의 강렬한 예감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선생은 평화적 개벽의 실천방안과 동력을 생명의 명제로 강조했으니 '의통(醫統)'이 곧 수운 동학의 '모심과 살림(侍天主 造化定)'에 해당한다.



수운 동학의 '살림' 즉 '造化定'이 '무위이화(無爲而化)에 일치하고 마음을 비운다(合其德 定其心)'인 까닭이다. 치료와 정신수양, 안심 등 이외에 일상생활과 농사에서의 여러 가지 기적은 결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함이 없이 아니함이 없는(無爲無不爲)' 한울정치 즉 창조적 진화에 일치하면서 거기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얼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림'인 것이다.



나는 이 원리가 지난 4월 29일에서 6월 9일까지의 '첫 촛불'과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의 '새 촛불' 사이의 '모심-살림 관계' 즉 '十一一言'과 '十五一言' 사이의 역동적 신비로 본다. 그리고 그 신비는 보다 높은 차원, 압축된 형태로 지난 9월 4일부터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오는 이달 10월 26일에 계룡산에서 마치는, 그리하여 내년 봄 다시금 묘향산까지 진행되는 신부-스님의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사랑-생명-평화 기원의 촛불 행사로 승화되어 계승되는 새 시대의 정세개벽(靖世開闢)으로 본다.



여전히 이 모든 개벽 실천에서 핵심은 애틋한, 열심한, 그러나 자제되고 조용한 '가운데도 아니고 양 가장자리도 아닌(非中離邊)' '모심선(侍禪)'이다.



모심선, 선(禪)으로서의 애틋하면서도 단정한 참선법으로서만 화엄개벽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강증산 선생은 초기 '나, 즉 한울님은 후천개벽을 위해 먼저 최수운을 이 땅에 보냈으나 수운이 너무 유교에 매달려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스스로 왔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유교, 선교와 기독교를 불교의 큰 틀 안에서 결합하고자 애썼다.



비폭력, 평화에 의한 후천개벽, 즉 정세개벽은 분명 불교적 배경을 가진 개벽사상이요, 실천이다.



후천개벽의 남조선 사상사, 즉 동학, 정역, 증산과 남학, 오방불교 및 소태산의 원불교까지의 모든 사상이 예외 없이 유불선과 기독교를 선도 즉 한민족 전통의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창조적 통합을 이루었으되 그 우주적 크기, 넓이, 깊이 그리고 개체 중심의 해체적 융합의 현대적 접근성에서는 거의 모두 다 불교, 그것도 화엄경적인 배경을 잊지 않고 있다.



강증산 선생이 수운 동학의 유교적 제한성을 선각적 한계로 지적한 것은 수운 동학의 당대 현실적인 시국관이나 혼돈적 질서라는 기본 철학의 구조 안에서 바로 그 선천적 질서의 문제에 한해서는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운 동학의 핵심인 강령주문, 본주문, 후문(後文) 38자(字) 안에 의미심장하고 무궁무궁한 창조적 진화론과 대화엄 사상의 오묘하고 절묘한 압축까지 간파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문수련이 태부족했던 것이다.



그 대신 강증산 선생은 자기 나름의 독특한 광활한 상상력과 우주적 신비주의 차원에서 화엄사상이나 고대 회귀의 진리관을 여기저기서 펼치고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증산 사상에 대한 상세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갈래와 차원, 수많은 주체와 그 기본사상의 다양성 및 확산관계, 현실 역사적 의미연관 등의 초점에서 여러 가지 천지공사(天地公事) 즉 우주 재판을 분석 검토하는 것은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개벽은 전 세계적 차원, 다양한 복층적 구조 안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전(道典)> 안에 수집된 수많은 어록 가운데 전문 과학자, 신비가나 미학자 이외에 서민 대중이 후천개벽의 대혼돈과 과도기를 통과하는 데에 참으로 절실한 나침반 노릇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조선 뱃노래'는 어떠한가?



강증산 선생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지식인들처럼 망국(亡國)이나 개화(開化)로도, 화물숭배(貨物崇拜)나 동도서기(東道西器) 따위 짧은 안목으로 보지 않고 서방의 거대하고 장구한 물질문명의 중심이 동방으로 이동하는 장엄한 대 문명사 전환의 중심이동과정으로 보았다. 그 문명이 배를 타고 남조선으로 남조선으로 몰려들어와 드디어 동방에 온 세계와 인류와 전 중생계와 온 우주를 후천개벽하고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대전환, 즉 음개벽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강증산 선생이 목숨을 거두며 자신은 이제 서천(西天) 서방(西方)으로 건너가 그곳의 거대한 물질문명의 정수(精髓)를 모두 몰고 다시금 동방 한반도에 와 5만 년 후천개벽을 완성하고 미륵불의 용화세계(龍化世界)를 현실적으로 완성하겠다는 인식의 초과 달성이었다.



바로 그 이동이 지금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방 시장의 대위기와 동방의 새로운 가능성 사이의 자본과 마음의 장엄한 중심이동이 바로 선생의 남조선 뱃노래 안에 절절히 예감의 우담바라 꽃을 만개 시키고 있다.



선생은 '나는 한없이 악하고 한없이 선하다'는 한울님의 양가성(兩價性)을 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목하 한국사회와 세계 현실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선악(善惡) 불가 융합성에 대해 본디 예수의 원수사랑에 입각한 선악의 상대성이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도성(中道性), 그리고 불교의 근본 중도와 동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역(易)의 생극(生克)의 상보성(相補性)이나 복승(複勝)의 은현교차성(隱顯交叉性) 모두를 압축하여 오늘 '한울님이 곧 부처님'이라는 근본적 화해에 목마른 민족 앞에 일찌감치 큰 빛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옥황상제 즉 한울님임에도 동시에 미륵을 자처함으로서이다.



선생은 분명 예언자였다.



19세기 이후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그 참혹한 고통과 침략과 분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와 한울의 가르침을 여러 비유로 제시해주었다.



그 중에도 가장 기억에 뚜렷한 것이 오선위기(五仙圍碁)와 대병겁(大病劫)이다. 민족의 분열과 동북아시아 사강(四强)의 포위에 관한 것이다.



네 신선 즉 사강이 내기바둑을 두는 데에서 주인 신선은 내내 바둑판만 공부하며 자리를 지키다가 네 신선이 드디어 자리를 뜰 때 그 네 신선의 바둑지혜를 모두 다 총괄하여 분열된(정지된 바둑) 자기를 통합하여 가장 뛰어난 세계 바둑꾼으로 몸과 지혜를 솟구치리라는 예언은, 참으로 가슴 후련한 우리의 미래관이다. 이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바로 그 바둑판으로 가고 있고 우리가 그 바둑 수를 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신령한 수를 내어놓을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 13년 내지 17년 안에 대규모 전염병 창궐로 세계 인구의 삼분지 이가 죽으리라는 대병겁의 예언이다.



현실의 진행과정이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수운 선생의 예언처럼 그 악질(惡疾)의 대공격 대상이 맨 먼저 우리나라라는 것이고 그때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 과정에 살아남은 민족이 세계를 구하고 우주를 바꾸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때 민족을, 그리고 인류와 전 중생계를 공격할 괴이한 병들을 미리 자신의 몸으로 다 앓으며 긴긴 시일을 독한 소주만 마시면서 미래에 고통 받을 민중의 아픔을 스스로 감당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의 고통이었고 그것은 바로 모두를 놓아버린 석가모니의 해탈이었다.



우리는 지금 선생의 희생과 저 무수한 질병 앞에 자신을 드러낸 선생의 용기 위에서 후천혼돈을 맞이하는 진리의 촛불, 그 통과의례를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그 뒤로 다가올 용화세계, 유리세계, 미륵세상과 만물해방의 하늘나라, 만사가 만사를 자력과 타력의 합반으로 깨닫는 화엄개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현대 서양의 최고의 지혜자였던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말한다.



'인류 역사의 대전환기에는 반드시 다가오는 새 시대의 삶의 원형(原型)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심오한 영성과 눈부신 지혜를 지닌 민족으로서 세계를 구원할 이상을 애초부터 제 안에 갖고 있는데 거듭되는 외침(外侵

2008 [운동론] 김지하 '촛불'은 후천개벽의 시작이다

[민주법연] FTA - [운동론] 김지하 칼럼(7/3 프레시안)




문병효 교수와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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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론] 김지하 칼럼(7/3 프레시안)
고영남
조회 수 : 10279
2008.07.04 (22:42:47)


줄탁(啐啄)을 생각한다
[김지하 칼럼] '촛불'은 후천개벽의 시작이다

등록일자 : 2008년 07 월 03 일 (목) 19 : 27


줄탁(啐啄). 정확하게는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무엇일까? 생명의 세계에서는 달걀 속의 병아리가 때가 되어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 달걀 속에서 어떤 한 부위를 부리로 쪼기 시작하면 어미가 밖에서 그 쪼는 부위를 아주 정확히 쪼아줌으로써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안팎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생명탄생의 신비로운 비밀이다.

불교에서는 해탈(解脫)의 선기(禪機)가 무르익은 수좌(首座)의 기미를 조실 스님이 눈치채고 결정적인 때에 봉갈(棒喝)로 충격을 가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고, 후천개벽론에서는 젊은 후천(後天)의 기운이 우주의 접근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방면에 노력을 집중할 때에 늙은 선천(先天)의 지혜나 그 문제 영역을 타격해줌으로써 안팎의 개벽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후천개벽의 기운이 다방면으로 무르익은 때다. 즉 문명권 전체의 대전환의 때다. 인류와 지구 또는 우주의 지화점(至化点) 즉 '오메가 포인트'다. 이 대전환의 주체가 나타날 때다. 인류사와 자연사, 생명사가 이 전환의 주체를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기후혼돈 등을 비롯한 세계사, 지구사는 종말적 대혼돈을 맞아 그 혼돈을 활용하여 그 혼돈을 빠져나갈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관과 불교의 미륵회상이 그러한 사상이다. 19세기 한반도의 남조선 사상사, 남쪽조선에서 세계와 인류를 구할 새 민중사상사가 창조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출현한 동학, 정역, 남학, 증산, 원불교 등이 바로 그 대전환과 새 세상의 도래를 예언한 후천개벽의 변혁사상이다. 이 변혁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와 불교 등의 비폭력과 평화의 상상에도 이미 있다.

그리고 후천개벽의 남조선 사상사에는 그것이 거의 핵심내용을 이룬다. 그 한복판의 '혼돈적 질서'의 세상이 동학에서는 '지극한 기운-혼원지일기'로, 정역에서는 '여율(율려의 전복된 개념)'로, 증산에서는 '천지공사와 천지굿'으로 원불교의 소태산 사상에서는 '일원상법신불과 정신개벽운동'으로 제시되었다.


▲ 우리나라는 일반 청소년, 여성, 서민 일반이 개방적인 쌍방향 소통과 논쟁으로 가득찬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프레시안

서양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른 소통양식의 대변혁과 문화의 혁신과정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사이버소통방식이 하나의 새로운 후천적 문화양식으로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중국과는 또 다르게 우리나라, 그것도 일반 청소년, 여성, 서민 일반에게서 개방적인 쌍방향 소통과 논쟁으로 가득찬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최근 '촛불'의 등장배경이다. 촛불은 2002년 월드컵 응원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축제 형식으로 등장해서 올해 쇠고기 문제와 대운하 문제의 정치 아젠다에 대한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그 차원을 높였다. 축제와 정치의 결합, 숭고한 새 '문화혁명'의 한 형태는 '정치적 상상력'의 한 양식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후천개벽운동으로서의 거대한 네오 르네상스의 역동이 뜀뛰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 축제 때에 사흘밤 사흘낮을 춤추고 노래 부른 민족으로 이름나 있다. (중국 기록) 영고, 무천, 동맹의 축제 때와 고려 시에도 팔관이나 국중대회에서 계승된다.

이 천의무봉의 신기, 신명, 신바람이 이후 976회의 외국침략에 억압되어 <한(恨)>이라는 이름의 그늘진 내상으로 침전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02년에 바로 이 억압된 신기가 한의 일방적 지배를 뚫고 폭발한 것이다. 이 역사적 굴곡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촛불은 해명되지 않으며 제대로 접수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기, 신바람이 <풍류>라는 이름의 문화적 축적의 기본이요 <신시>라는 이름의 시장과 경제, 호혜와 교환의 자연생명존중과 인간친교통합의 성스러운 시장의 추동력이요, <화백>이란 이름의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적 단상 단하의 합좌기구를 통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거쳐 전원일치에 도달하는 "직접-대의"의 결합구조의 기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살아난 것이다.

우선 촛불의 진원지인 인터넷 디지털 네트워크 문화의 특징을 일별해 보자.

1. 다층성과 다양성
2. 쿨함, 즐거움, 감동
3. 함축성, 직접성, 속도
4. 개체적 융합
5. 내부공생과 자기조직화
6. 종합정보학적 집합지성
7. 상고신화와 미래 멀티미디어 세계에로의 쌍방향 통행성
8. 뇌과학적 이진법에 토대한 '아니다, 그렇다(no-yes)'의 생명논리학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1. 다층성, 다양성은 혼돈과 개체성, 자유, 우연성, 창발성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자연스런 융합으로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2. 쿨함, 즐거움, 감동 : 재미없고 멋없고 갈등 없고 즐길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3. 함축성, 직접성, 속도 : 키워드나 키포인트, 촌철살인적 포괄성과 함께 자기자신의 현실과 연결된 직접성, 그리고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쉽게 그리고 빨리 돌아와야 하는 속도가 중요하다.

4. 개체적 융합 : 현대 자유의 진화론의 특징이다. 개체가 먼저고 개체가 중심이 되어 개체개체들이 융합한다. 개체가 전제되지 않는 공동체와 협동의 강제는 거부된다.
- 몬드라곤 공동체와 기브츠 공동체의 쇠퇴. "계와 품앗이"와 개체성을 토대로 한 저축조합, 민중은행, 사회적 기업 등의 등장. 붉은 악마 때나 이번 춧불에서 그 주체세대와 시민들은 거의 다 개체 중심의 융합을 상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2002년에 '밀실의 네트워크'니 '방콩의 연대'니 하는 유머는 모두 이것이다. 동학의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원리다.

5. 내부공생과 자기조직화 : 내부공생은 개체 내부의 우주적 생명공생체(린 마글리스) 작동에 의해 개체 개체가 자기 나름으로 소규모의 생활형식(life-form)을 자기 조직화하는 원리로서의 진화개념. 동학 등 남조선사상사 공유의 사상이요 디지털 시대의 생활상식이다.

6. 종합정보학적 집합지성 : 우주시대에 새로운 다양한 학문 모두를 하나로 종합하는 지성의 네트워크. 개별성을 하나하나 그대로 살리면서 종합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의 획일화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선 '스페이스 비글'이 그 선례다. 개체적 창의를 전제한 집합이므로 그 지성은 에드워드 윌슨 따위의 '통섭', 쏘셜 다위니즘, 전일적 우주생명론 강조의 에코 파시즘 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7. 쌍방향성에 의한 문예부흥 : 문화혁명 가능성(入古出新)

8. 변증법을 대체할 '아니다, 그렇다(不然基然)' 류의 생명논리학의 출현

촛불세대는 분명히 한 가지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존중한다. (그 점에서 이것은 수운은 개체적 실천(各各明)이나 그것은 세계사의 밝은 기운(明明其道)과 연결되어야 운명이다)

그들은 미국을 위협만으로도 도움만으로도 일면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반미도 친미도 없다. 위협이 될 때도 있고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특징인 여러 가지 다른 상황과 여러 가지 선택조건을 우선 전제하고 인정한다. 한 사람도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이고 시민이면서 정치가이다. 개별적이면서 포괄적이고 우선 인간은 다양하다는 것을 기존 인식으로 전제한다.

이 전체 특징은 우선 뚜렷이 후천적이며 개벽적이다. 그런데 왜 인정되지 않는가. 왜 양극단의 폭력 악순환에 의해 훼손되고 괴로워지는가. 시위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요구 사항 속의 사상들.

<생명>
1. 광우병 쇠고기 반대 - 음식, 생활의 제일가치
2. 대운하 반대 - 생태, 환경의 중요성
3. 물문제 - 생명
4. 의료민영화 반대 - 생명
5. 공기업민영화 반대 - 생명의 중요성
6. 교육개혁 - 영성, 유년, 세계와의 일치

핵심은 생명과 생활.

<평화>
1. 채식 대안의 등장 - 생명, 평화
2. 미국, 유럽가축 동물사료 사육, 도축 비판 - 평화(생명관)
3. 미국과의 진정한 우정의 조건 형성의 요구 - 평화

아기 유모차 등장. 초중학교, 중학교 여학생, 여성, 주부, 광범의 청소년 주체

<풍류>
1. 비폭력 일반화 - 생명
2. 유머의 일반화 - 평화
3. 유희, 축제, 제의 - 프리드리히 실러의 문화혁명론
풍류의 새 가능성. 정치, 경제, 도덕, 자연 중심의 프랑스혁명 시월혁명의 비판
4. 밤새운 토론
- 화백의 가능성. 단상, 단허의 합좌시도
- 가르치는 자도 학생도 없고 모두가 토론자다
- 장시간 토론에 의한 전원 일치에의 지향
5. 음식나눔 - 신시장터의 등장가능성
6. <경향신문>이 전하는 바대로라면 디지로그(디지털아나로그문화) 출현 가능성과 함께 현실 삶에서의 동학이나 불교의 중도나 채식 가능성도 논의됐다.

- 방향을 청와대 쪽으로 한 것은 아직도 낣은 정치관의 반영
- 컨테이너 등장 결과
- 촛불의 방향 : 사방, 팔방, 시방으로 전우주 전세계로 열려 있어야 하고
- 토론 등 연관. 한 연관으로 일방 집중돼선 안 된다.
- 일방집중(연사, 대책회의 멤버, 사회)은 세뇌의 시작이다.
- 우주 전 방향으로 소리 주장, 유희, 촛불, 노래, 농담, 잡담까지도 <사방치기> <사방뿌리기>(탈춤과 같다)가 되어야 한다.
- 마당이 원형이면 일방적 폭력선동은 안된다.
(누가 '어디로 가자' 소리지르면 한 귀퉁이에서 '너나 가거라' 대답하면서도 반대로 기이하게 '비판적 갈등'이 있다. 이것이 '생명 평화' 촛불비폭력의 힘이다)

6월 10일 이후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한다. 한쪽은 낡아빠진 보수 꼴통들이요 다른 한 쪽은 좌파 시위꾼들이다. 이것은 순수한 촛불을 훼손했다. 바로 이 폭력선동자, 폭력조장자 양쪽을 나는 <까쇠>라고 이름지어 부르기로 한다.


▲ 촛불세대는 분명히 한 가지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존중한다ⓒ프레시안

프랑스에는 데모 때마다 복면을 쓰고 나타나 폭력선동으로 그 결과를 난장판으로 귀결시키는 파괴자들을 가리켜 <Casseur. 까쇠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키워드>로 떠올리기로 한다. 이 <키워드>(촛불세대의 문화)를 통해 사태전모와 위험을 제거하고 비판해야 할 문제점을 순식간에 이 혁명과 인식해야 하는 것이 신세대 문화이다.

<까쇠>는 '까는(파괴하는)' '까부는(난동부리는)' ' 까발리는'선동만 하는)'것을 직업으로 하는 놈(마당쇠 따위의 쇠)을 뜻한다. <까쇠르>를 이제부터 <까쇠>로 부른다. <까쇠>는 정부에도 반정부좌파에도 있다.(종북전술단위) 이들 목적은 아무 이익도 없는 (시민에게) 파괴뿐이다. 또 인터넷에도 있고 활자 신문에도 있다. 인터넷에는 <댓글알바>가 그것이고 신문에서도 <극우선동꾼>이다. 이것을 대중화시키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나는 최초에 '줄탁동시'에 관해 말했다. 촛불의 후천적 개벽 요구가 달걀을 깨고 현실적으로 <개벽>하고 나오려면 바로 이같은 <까쇠>들이 설치는 폭력적인 어둠 속에서 <선천>과 연결된 <후천>이라 하더라도 종교, 교육, 문화와 연결된 기존세력, 즉 달걀 밖의 어미닭이 달걀의 바로 그 부위(정치문제)를 동시에 쪼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개벽은 <까쇠>들이 주장하듯이 선천을 완전히 섬멸하는 후천만의 단독행동이 아니요, 수구권력자들이 맹신하듯이 후천의 난동을 철저히 <까부수는> 낡아빠진 선천만의 보수주의적 군림이나 일부 부유층의 독점과는 인연이 없다.

해월은 개벽이 후천을 중심으로 하되 (달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병아리가 주인공이다) 선천의 어미(기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가 새롭게 권리를 정립함으로써 선후천이 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대한 고대회복. 새로운 땟길(문예부흥)로서의 혁명(문화혁명)이요 우주와 역사변동이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은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고 기둥은 낡았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다' 또는 "인의예지는 공자 성인의 가르침이니 버리지 말고 수심정기(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한국 고대 이래의 선도사상)는 내가 다시 정하는 바이니 따르라"고 했다.

동학의 조직이 포(包)와 접(接)의 이중구조로 돼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다. 접은 후천 동학꾼의 기초 조직이고 포는 유불선 명망가들(유학자, 스님, 산에서 수련하는 도사)의 전선조직인 것이다.

경전도 한문과 한글 두 종류가 있고 주문도 두 종류다. 모두 다 식자층과 민중, 어른들과 아이들, 나성 가부장과 여성 주부들 대상으로 이중화되어 있고 둘 사이의 공동해석을 겨냥하는 해월 최서형 선생 등의 수많은 현실적 통합해석과 가르침들이 있다.

원불교에서도 소태산 선생의 진리(계시)와 실천적 삶의 직결된 관계(백지혈인의 기적 직후 며칠 만에 가장 현실적 문제인 저축조합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역사)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대혼돈 원리가 모은 운동을 통해서 또한 개간사업, 교육사업을 통해서 질서화하는 것.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수양원리에 입각해서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의 개별적, 다층적인 정신 개벽운동을 전개하는 복합관계 등이 그것이다.

강증산의 주장도 이와 비슷하니 동서양 모든 종교 신들의 원탁회의인 통일신단을 기초로 해서 최초의 세계 정치기구인 UN의 이상적 모델이 세계 조화 정부라는 '혼돈적 질서'를 추구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동학과 같은 동세개벽(폭력용인)이 아닌 정세개벽(비폭력 평화변혁)으로 나아가되 개벽은 개벽인 점 등이다.

나는 이제 결론 부분에 왔다. 유모차 타고 나온 아기, 젊은 어머니들, 초등학교 중학교 여학생들. 그 어여쁘고 아름다운 촛불의 춤과 노래. 이 문화와 유희를 통한 생활 정치ㆍ생명 정치의 현실 변혁에의 요구와 지식인, 종교인 등의 도움이 연결된 이 몇 달 간의 촛불 -촛불에 대한 폭력의 훼손 과정- 뒤를 이은 종교에의 비폭력 평화 촛불시위의 과정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남조선 사상사의 두 번째 큰 흐름인 '정역(正易)'은 1879년에서 1885년 사이에 충청도 연산땅 김일부(金日夫) 선생에 의해 공표된 후천개벽기 한국과 민중과 아이들과 백성들과 세계 인류 전체와 지구 우주 중생 모두의 신비과학, 즉 역(易) 철학이다.

정역에는 후천 개벽기인 '기위친정(己位親政)', '십일일언(十一一言)', '십오일언(十五一言)'이라는 세 마디가 나온다. 기위친정은 개벽이 시작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던 것들이 임금처럼 정치를 담당하게 되는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럼 십일일언은 무엇일까? 이는 이제껏 매만 맞고 구박만 받던 나이 스물 미만의 청소년 어린이들과 젊은 여성들이 정치를 담당한다는 뜻이다. 바로 고대정치다.

십오일언은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때에는 기존의 지식인과 종교인, 정치인은 뒤로 물러나 교육, 문화, 종교에 몰두하면서 청소년과 여성의 정치를 음으로 돕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십일일언과 십오일언 둘 다 뒷부분에 일언(一言), 즉 한 마디가 똑같이 붙어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십일'의 청소년ㆍ여성 정치와 '십오'의 중년ㆍ남성ㆍ전문 지식인의 지혜와 경험, 영성적 능력이 이심전심으로 언어, 즉 '진리'를 통해 소통한다는 것이다.


▲ 나는 촛불에서 비움으로, 그 비움을 근거로 동학의 그 '모심'으로 전개되는 한 마디(一言)를 배운다. 또 광장을 지키는 것은 그 광장이 화백과 선서와 풍류의 새 생명사상의 후천개벽적 참 민주주의의 성소(聖所)라는 뜻을 배운다. 그 핵심에 생명이 있다.ⓒ프레시안

바로 이 한 마디, 즉 '일언'이야말로 달걀 속 병아리의 쪼는 행위와 달걀 밖의 어미 닭이 그에 맞게 같은 부분을 쪼아주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탄생하는 개벽과 전환의 비밀스런 부분이다. 개벽이 임박했을 때는 바로 이 '한 마디(一言)'가 가장 중요한 노스님의 몽둥이요 호령 소리다.

촛불이 폭력에 빠져들어 선을 넘었을 때,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해서 옛 군사정권의 상투적 전술인 마타도어처럼 군대가 진주할 수 있는 계엄령 선포의 사유를 만들고자 너트며 몽둥이를 쓰고 물대포, 방패 등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정체불명의 '까쇠'들이 그것을 조장하는 폭력의 악순환 과정에서 촛불은 거의 꺼지려 했다.

이 절망의 순간에 종교계의 비폭력 촛불 시위가 개입한 것이다. 지난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3일 아침 원불교 교무들의 침묵의 기도집회가 동참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평화 애호 개신교 목사들과 오는 4일 불교 스님들이 연이어 비폭력 평화 촛불 시위에 들어선다. 바로 이것이 어미 닭이 병아리와 똑같은 달걀 부위를 쪼아줌이고 십오일언의 그 한 마디(一言)다.

사제단은 지난 30일 절망한 촛불들에게 "괴로웠지요. 위로하러 왔습니다"고 말했다. 비폭력, 평화, 고시철회 주장에 이어 청와대가 아닌 남대문 행진 뒤 밤늦게 해산을 종용했다. 정부와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폭력을 중지했다.

다른 종교단체들도 이미 똑같은 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그들이 왜 어미 닭이며 선천임에도 십오일언인지 보자. 2008년 7월 2일 수요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사제단 전종훈 대표신부의 말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생명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먹는 것에 무슨 이념이 있고 좌우가 있는가. 우리 국민은 누가 앞에서 선동한다고 쉽게 손뼉치고 따라가지 않는다. 사제들은 촛불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바른 국민인가 뼈저리게 느꼈다. 광장에 모인 촛불이 이를 증명한다. 색깔론은 이제 너무 상투적이다.

사제단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촛불 민심의 발원지인 광장을 지키며 기도하고 매일 밤 미사를 열 것이다. 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매일 촛불이 모이는 곳이다. 광장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이 자리가 무너지면 국민들의 마음도 무너진다.

'섬긴다'는 말은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 단식은 '비움'이다. 비워야 그 안에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비우지 못하면 다른 목소리와 주장을 담아낼 수 없다. 이 대통령도 그 점을 좀 알았으면 한다."

나는 촛불에서 비움으로, 그 비움을 근거로 동학의 그 '모심'으로 전개되는 한 마디(一言)를 배운다. 또 광장을 지키는 것은 그 광장이 화백과 선서와 풍류의 새 생명사상의 후천개벽적 참 민주주의의 성소(聖所)라는 뜻을 배운다. 그 핵심에 생명이 있다.

불교 스님들 역시 비폭력, 평화를 강조하고 염주, 촛불, 연등을 갖춰 광장에서 108배를 올린다고 한다. 불교의 촛불 참가는 아마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문화적 개벽을 가져올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본격적으로 다루겠다. 약속한다.) 원불교는 '비폭력으로 생명 평화를!'의 현수막을 펼쳤다. 이 모두가 '십오일언'이다.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이어 말한다.

"우리는 인격의 크기와 예의로 싸워야 합니다. 오늘 행진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미소로 서로를 품을 수 있도록 합시다. 어제 우리가 불타버린 숭례문으로 행진했는데, '숭례'는 예를 높인다는 뜻입니다. 예의 첫 번째는 무엇을 먹을 것이고 무엇이 못 먹는 것인지를 가리는 것입니다. 시궁창에 떨어진 쌀 한 톨도 주워 먹을 수 있는 것이 예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은 먹지 않는 것 또한 예입니다."

'십일일언'은 어떤가? <한겨레> 보도를 보자. 대답 없는 정부를 향해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목 놓아 외치던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시민들은 때로 침묵이 함성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시민들은 전날에 이어 이 날도 웃음과 박수 속에 촛불 집회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충북 청주에서 올라왔다는 한 대학생은 "사제단이 함께 해 시민들의 마음속에 다시 촛불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떠오른 것 같다"며 "불법과 폭력이라고 우리를 매도한 정부와 보수언론에 다시 맞설 자신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노정석(47) 씨는 지하철역에서 산 장미꽃을 사제단에 건넸다. 노 씨는 "사제단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평화로운 촛불의 큰 힘을 되찾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촛불 시위는 밤 9시 40분께 함성과 노랫소리 속에 끝났다. 시민들은 "너무 일찍 끝나는 것 아니냐"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집으로 향했다.


▲ 역사의 차원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으나 후천개벽의 대세,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의 중대성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프레시안

신민철(26) 씨는 "학교에서 공부 못 한다고 꾸지람 듣던 학생이 집에 와 엄마에게 '착하게만 자라다오'하는 위안을 받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신 씨는 "50일 남짓 시청을 벗어나며 세상은 적막했다. 그 때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힘들어 할 때 사제들이 지지해줌으로써 다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일 새벽 최창열(26) 씨는 "이명박 정부와 우리가 무슨 정치적 이념이 달라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잘못된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옳지 못한 정부를 규탄하는 것입니다"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이 개벽 시대, 다가오는 다민중의 시대에는 십오일언에 한 마디(一言)가 있다. 십오일언의 반응 뒤에야 비로소 침묵이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는 점이다. 불교의 4일 시위는 아주 장중하리라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더욱 아름답고 영적인 해방의 문화가 촛불 주위를 에워쌀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다시 공부해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한겨레> 칼럼에서 연세대 정치학과 박명림 교수는 이명박 퇴진을 반대하고 있다. 그대로 두고 이번에 나타난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나 역시 동감이다. 그리해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자.

그러나 어떤 보수들은 종교계의 촛불 참여를 마치 커다란 패륜 행위처럼 매도하고 있다. 한참 웃었다. 입장이란 무서운 조건이다. 이 신문 유신시절엔 아직 없었는가?

정부와 여당이 더 우습다. 평화와 화해의 실마리가 나타났는데 완연히 낙담 일변도다. 정치력이라고는 전무한 집단이다. 중상모략 수준이다. 공적으로는 의전적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사적 자리에서는 당황감 일변도라는 것이다.

'다 돼가는 판에 곤혹스럽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청와대가 술 먹고 춤추는 데 쯤인듯 착각하는 사람 말투다. 나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종교계의 가세가 저희들을 귀찮게 한다는 정도 뿐이다.

경찰은 어떤가? "'불법, 폭력 시위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한 검ㆍ경의 태도를 머쓱하게 했다"고 보도된다. 아마도 이 따위 '머쓱'해지는 태도의 근본 원인은 정권이나 경찰 지휘부의 그때그때 제못대로의 단속 지시였을 뿐, 근본적으로 법과 평화, 비폭력의 자세로 시민을 인도하는 경찰들의 지혜롭고 민주적인 '가이드 라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국회는 이 점부터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일이다.

역사의 차원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으나 후천개벽의 대세,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의 중대성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시절도 개벽기요, 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촛불과 시민들이 끝끝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석별하며 제거시켜야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터넷과 공중파, 활자신문과 길거리, 경찰과 정부요 시민단체와 정당, 그리고 시민들 도처에서 복면을 쓰고 폭력 경찰과 부딛쳐 싸우면서도 동시에 불만 지르고 내빼는 '까쇠'들을 경계하는 일일 것이다. 온라인까쇠, 오프라인 까쇠들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하기야 불난 집에 들어와 도둑질 하는 놈들도 있는 법이니!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과 동학, 불교, 역철학의 '이중 구속(double bind)', 그 해결책인 '이중 통합(double message)'과 양리성, 중도, 이중성, 철학으로 양극단의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중도 보수의 원리가 나올 차례다.

마지막 한 마디, 일언(一言)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정부에 있다.

정신을 차려라.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 2~3년 안에 남북을 포함한 동아시아 태평양에 거대한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 대변동이 올 것이다. 이어서 7~8년 안에 온난화와 바이러스 공격, 대전염병 창궐, 지진, 화산 등 생태적 대변동이 온다. 정신 차려라. 폭력을 유도해서 정치적 입지만 그때 그때 확보하려는 음흉하고 낡아빠진 꼼수정치를 빨리 포기하라. 이명박 정부가 제 잘못을 종교계까지 포함한 '10년 좌파 정권'에 떠넘기는 것 역시 까쇠다.

촛불을 물대포나 구속으로 막을 수 있는 시절은 이미 갔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징벌과 복수는 촛불이 아니라, 종교가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극우파시스트 군사집단이나 그들과 별 차이 없는 자칭 좌파의 엉터리 폭력주의자들에게 당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결국은 까쇠가 문제다. 절에서 사용하는 몽둥이는 쇳덩어리가 아니라 대나무, 죽비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승리'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승리가 아니라 시작이다.

미국 예일대 사회학자인 제프리 알렉산더 교수가 "종교적 상징인 촛불과 순수의 상징인 10대 소녀가 만나 이 운동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인 일이다"라고 극찬한다. 이것은 개벽의 시작이다. 시작이다.


* 이 글은 김지하 시인이 4일 오후 원불교 은덕문화원에서 행한 소태산 아카데미 강연의 전문입니다. 편집자


김지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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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알라딘: 스님은 사춘기 명진 (지은이)

알라딘: 스님은 사춘기

스님은 사춘기


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지은이)
이솔  2011-04-20
---
277쪽
152*223mm
---

책소개

명진 스님이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면서 일요 법회 때마다 신도들에게 법문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통해 부처님 법을 만났고, 그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40년 동안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걸어 온 명진 스님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마음에서 힘을 빼라’ 이다.



마음에서 힘을 빼라는 것은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정관념, 오랫동안 익혀온 지식과 정보, 길들여져 있던 습관,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마음에서 힘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

목차

제1장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어린 시절

왜 나만 불행한가

출구를 찾다

내가 갈 길

해인사로 출가하다

백련암 행자 시절

또 한 번의 죽음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제2장 나는 누구인가

스승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계를 받다

용맹정진

한 물건

나는 누구인가

도인 행세

살아있는 화두

나의 아버지

마조 원상 법문에 걸리다



제3장 중 사춘기

중 사춘기

친구의 여동생

장군죽비

도반과 소머리

다비식에서 부른 유행가

스님의 목을 쳐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세간에서 만난 선지식

도인 노파

도는 일상에 있다

스승의 한 마디



제4장 힘 빼!

운동권 스님

불자여, 눈을 떠라!

감옥에서 배우다

개운사 주지

봉암사 옥석대에서

허물을 지고 묻다

법거량

화두의 낙처

힘 빼!



제5장 모름 속으로

가사를 벗다

송담 스님

어미 닭이 알 품듯이 고양이가 쥐 잡듯이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다

천일기도와 재정 공개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단지불회

마음이 허공이다

불교는 우상숭배가 아니다

복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라



접기

책속에서

* 스님의 목을 쳐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성철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하시려고 할 때 내가 벌떡 일어섰다.

“성철의 목을 한 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예? 뭐라구요?”

“시끄럽다 앉아라! 저노무 자슥, 열아홉 살 행자 때부터 알았네 몰랐네 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나, 사기꾼 같은 놈!”

그 때 나는 하루 빨리 눈을 번쩍 떠서 성철스님의 멱살을 잡아야겠다는 욕심으로 꽉 차 있었다.

...깨닫는 것을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한다. 알고 보면 그냥 바로 그 자리인데 자꾸만 애써서 무엇을 구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에, 구하려는 욕심 때문에 본성을 못 보는 것이다.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접기

*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진해 통제소 강당으로 달려가 보니 바다에서 바로 건진 시신들이 줄줄이 눕혀져 있었다. 동생이 거기 있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게 내 동생이 맞았다. 환하게 웃던 동생이, ‘형’하고 부르며 쫓아다니던 동생이, 하나뿐인 내 동생이 거기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구부러진 채 좁은 관 속에 눕혀져 있던 동생, 그 모습을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49재 마지막 날 국립묘지를 나서며 원願을 세웠다.

‘생사에 대한 문제, 존재에 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영예가 될 것이며, 극락에 간들 무엇이 그리 즐겁겠는가? 내가 날 모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를 무등 태우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 옆에서 나를 부축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고 죽는 이 주인공의 본래 모습을 바로 알 수만 있다면 나는 하루에 천 번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들어가고, 천 번 쇠꼬챙이로 몸을 쑤시고 찌르고 토막 내는 그런 지옥에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겠다.’  접기

* 살아있는 화두

“지난 철에는 어디서 살다 왔느냐?”

“이번이 첫 철입니다.”

“응? 첫 철이야? 그럼 화두는 어디서 탔는가?”

선방에서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받는 것은 기본이다.

“6 ?25전쟁이 나서 쌀 배급을 타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어디 가서 탑니까?”

...나는 ‘화두를 탄다거나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 나서 쌀 배급 타는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타러 다니는가? 화두가 보따리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챙기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것만 알면 됐지 뭘 따로 타서 의심을 하는가?

참으로 진실하게 자기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 따로 화두를 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물음이 없거나 간절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큰스님들이 방편으로 화두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간절한 의심이 저절로 올라오지 않으니 억지로 의심을 짓는 것이다.  접기

* 다비식에서 부른 유행가

“어이 명진, 이춘성이가 말이여, 지옥이나 극락 가실 스님인가? 자기가 알아서 제 길을 가지 그거 못 갈까봐 앉아서 지장보살 염불을 해? 수좌가 말이여 평생 화두 들다가 죽었는데 극락 가라고 지장보살을 부르면 안 되지. 그거 때려치우게. 명진 수좌가 척 하니 알아서 분위기를 바꿔 봐.”

불길이 훨훨 치솟는 다비식장에 노스님들이 죽 앉아 있는데 내가 그 가운데로 나갔다.

“거 춘성 스님께서 극락 지옥 그거 못 찾아갈까 봐 지장보살을 염불합니까? 지금부터 전국 본사 수좌 대항 노래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법주사 대표로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이 우루루 나와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분위기가 곧 잔치판이 되어버렸다. 당시 오륙백 명의 신도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너무하다고 했고 일부는 춘성 스님 다비식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인터넷이 있었더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접기

* 나는 영원히 사춘기로 살고 싶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춘기를 겪게 된다. 반항하고 대들고, 못된 짓, 엉뚱한 짓을 도맡아 하는 시기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물음은 그 사춘기 때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그 시기에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름이 남으면 뭐하고 남들이 알아주면 뭐하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아득한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춘기 때 처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 나를 향한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영원히 사춘기로 살고 싶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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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명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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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해 불교탄압대책위원장, 대승불교승가회 회장, 조계종 개혁회의 상임위원 등을 거쳐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봉은사 주지를 역임했다. 봉은사 주지 시절 1천일 동안 1천 배를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꾸준히 조계종 개혁과 사회적 현안 참여에 적극적으로 힘써왔다. 현재는 사단법인 평화의 길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 등이 있다.

최근작 : <힘 좀 빼고 삽시다 (큰글자도서)>,<평화의 길, 통일의 꿈>,<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 (큰글자도서)> … 총 1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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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는 누구인가’ 그 지극한 물음 속에 진리가 있다.

이 책은 명진 스님이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면서 일요 법회 때마다 신도들에게 법문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통해 부처님 법을 만났고, 그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40년 동안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걸어 온 명진 스님. 스님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마음에서 힘을 빼라!’

마음에서 힘을 빼라는 것은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정관념, 오랫동안 익혀온 지식과 정보, 길들여져 있던 습관,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마음에서 힘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지 아는가? 모른다. 그러니 그 알 수 없는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 보라. 묻고 또 묻다 보면 내가 ‘안다’는 생각이 모두 비워지면서 내가 정말 ‘모른다’는 생각만 오롯이 남아 있게 된다. 그렇게 모든 앎이 끊어지고 완전히 힘이 빠진 자리, 그 완벽한 비어짐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한한 지혜와 자유를 얻게 된다.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참선은 신비스럽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요, 깊은 산중의 선방에 앉아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고 수행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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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주목한 책

[조선일보] 2011.04.22 좌충우돌 명진 스님 40년 수행기

“이노무 자슥 봐라. 니 와 그리 빤히 쳐다보노? 우째 왔노?”(성철)

“무명(無明)번뇌를 자를 보검을 구하러 왔습니다.”(명진)

1969년 합천 해인사. 출가 보름 된 열아홉살 행자(예비 승려)가 방장 성철(性徹) 스님에게 당돌하게 대답했다. “야 임마, 선방(禪房)에 십 년 다닌 수좌도 그런 건방진 소리 안 한데이.”(성철)

작년에 환갑을 지낸 스님이 40여 년간 법주사·통도사·송광사·백련사 등에서 좌충우돌하며 수행한 사연을 이야기하듯 쉽게 적었다. 악동 같은 기행(奇行)과 알쏭달쏭한 선문답(禪問答) 등 선승(禪僧)들의 내밀한 세계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중앙일보] 2011.04.21

어린 시절의 불우한 삶,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한 사연, 성철(性徹·1912~93) 스님을 만나 겁 없이 대들던 일화, 송담(松潭·1929~) 스님이 있던 선방 이야기 등을 맛깔나게 풀어간다. 거기에 법거량(法擧揚)을 주고받는 절집 안 풍경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은 담백하고, 표지에는 장난기가 깃들어 있다. 내용도 얼음장 아래 봄날의 시내처럼 졸졸 흘러간다.



[연합뉴스] 2011.04.11

6살 때 어머니를 여읜 이야기부터 출가 후 수행 이야기, 민주화 운동 등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봉은사 주지 재임시 추진했던 사찰 재정 공개와 1천일기도에 대한 뒷이야기와 소회도 들려준다.



[헤럴드경제] 2011.04.21 고통 벗 삼아…명진스님 구도의 길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되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마음에서 힘을 빼라는 것... 어렵고 무거운 철학적 물음들이지만 스님의 살아온 얘기들에 버무려 편안하게 접할 수 있다.



[BTN뉴스] 명진스님 <사춘기> 펴내자마자 2쇄

책은 주로 명진스님의 출가와 수행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 속에 절집의 일상이 담백하게 그려졌다. 절집 아니면 보고 느낄 수 없는 고유한 풍경과 정서가 담겨 있다. 숙연해야 할 다비장에서 전국노래자랑대회가 열릴 수 있는 곳은 절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한국일보] 2011.04.29 전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수행기 출간

명진스님은 봉은사 주지 시절 사찰 재정을 공개하고 1,000일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고 매일 1,000배를 올려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물러났다. 이번 책은 그를 둘러싼 논란은 언급하지 않고 유년기부터 환갑이 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선 수행과 결부해 썼다. 소박하면서도 천진한 면모와 치열한 구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문화일보] 2011.04.22

저자가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며 일요법회 때마다 신도들에게 법문한 내용을 엮었다.



[서울경제] 2011.04.22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 법을 만나고 그 고통을 친구 삼아 40년 동안 치열하게 걸어온 구도의 길이다. 어렵고 무거운 철학적 물음들이지만 스님의 살아온 얘기들에 버무려져 편안하게 접할 수 있다.



[세계일보] 2011.04.24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면서 일요 법회 때마다 불자들에게 법문한 내용을 엮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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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한번씩들 고민해봤음 좋겠다..  구매

칭찬고래 2011-04-27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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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막 주문했는데 스님의 촌철살인의 활구가 죽비가 되어 우리를 깨우칠 것입니다  구매

tongko 2011-04-2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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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주문했습니다. 명진스님 책은 처음인데, 조금 설렌다~ 그리고 기대된다  구매

램브란트 2011-04-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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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구매

데조로 2011-05-2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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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자신의 유년을거쳐 스스로 터득한 존재의 의미를 쉽게 풀어주셨네요.  구매

바람타는섬 2011-04-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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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계속 철들지 마세요.^^ 새창으로 보기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운 세상. 민주주의의 시계가 계속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시절에, 그나마 명진 스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가. 불의를 행하는 위정자에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하루아침에 공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과 핏줄을 잃고, 또, 감옥 보내고 우는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서는 스님도 그들과 함께 울었다.

눈물 닦는 사진과 동영상을 유독 많이 찍힌 스님을 보노라면 혹자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왜 저리 눈물이 많은가 오해 할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스님의 눈물은 다 지극한 사랑이자 위로임에랴. 이 눈물 많은 스님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덕분에 목적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스님이 던지는 삶의 의미, 존재에 대한 화두에 물음표하나 던지며 쉬어 갈수 있게 되었다. 스님은 어이하여 출가를 하였던가.

모든 스님, 신부, 수녀님들에겐 식상한 질문이겠으나 중생은 그것이 또 가장 궁금한 질문임에랴. 명진 스님은 6살 어린나이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만났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통해.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삶을 투철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렸다. 내가 처음 마주친 죽음의 대상은 불행하게도 어머니였다.>-본문 11쪽

뿐인가. 스님에게 죽음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했던 동생이 해군에 입대한지 불과 몇 달 만에 군함 전복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연이어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마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 언저리 푸른 청춘에 피붙이 모두 떠나고 세상엔 스님 혼자만 달랑 남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예기치 않은 시기라면 하나만 던져도 암흑이거늘 스님은 젊은 날에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 개 씩이나 받았다. 그러니까 익히 보이던 스님의 눈물은 수행의 미진함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중생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기에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흐르되 걸림은 없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허공이다? 스님의 변을 들어보자.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 한 물건을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실체가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 욕심이나 자비심 같은 모든 감정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다.......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서 내 마음이 허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이 허공같이 텅 비어 공적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이 하나의 작용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 자유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이 바로 허공인 그 자리는 능히 모든 것이 자유자재한 자리이다.>-본문 256쪽

노스님들은 명진 행자가 무서워~

스님의 걸음하면 법정스님의 빠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생각나는데 명진 스님은 의외였다. 지난해 봉은사에서 뵌 스님의 걸음걸이는 평소 말씀이 거침없는 것에 비해 사뿐사뿐 한발 한발 새색시같이 내 딛으셨다. 그것이 참 인상적이어서 봉은사 신도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절은 더 하다고 하였다.

“절은 또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시는 줄 아냐? 천천히 한배, 두 배... 시종여일하게 하신단다.”

“그렇게 해서 언제 하루에 천배를 다하신다니?”

“한 꺼 번이 아닌 아침 점심 저녁 중간 중간 나누어서 하시는 거지.”

아무튼 스님의 걸음걸이와 절하는 모습으로 유추해 볼 때는 스님의 행자생활도 지극히 새색시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웬걸. 스님은 행자세계의 문제아였다.(웃음) 스님의 파란만장한 수행담은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다른 스님들은 스스로 점잖아서도 못하고 무서워서도 못하는 질문을 명진 스님은 노스님들에게 거침없이 해댔다. 해인사 백련암 행자시절엔 일본어 배우라는 성철 스님의 말에 교학보다는 참선에 관심이 많던 스님은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를 납득 못하였기에, 그냥 말도 없이 내뺐다.

‘남쪽에는 성철, 북쪽에는 전강’하던 그 시절에 성철 스님 눈에 단번에 들어 행자자리 꿰찼으면 일본어 아니라 더 한 것도 배우려 노력했으련만 스님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 후로도 쭉 운수납자로 떠돌았다. 물론 가는 곳 마다 사건(?)도 일으켰다.

안동 봉정사에서의 일화 한 토막. 간염과 영양실조에 걸린 지인스님에게 소머리를 삶아 먹이려다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항의하자 스님 왈,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 까요?”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아연실색했음은 물론이고 말리지도 못하였다. 결과는, 지인스님이 기력을 회복했다고.

그런가 하면 용맹정진기간에 졸음을 깨우기 위해 당번이 될 경우 보통 노스님이 졸면 모른척하는 게 관례하면 스님은 반대로 하였다. 젊은 스님이 졸면 모른 척 눈감아 주고 대신 노스님이 졸면 죽비가 부러지게 내리 쳤단다.

행자시절하면 보통 행자의 설움이 말도 못하게 큰 것으로 전해지는데 명진 스님의 경우는 행자인 명진 스님 보다 은사스님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 한권의 책에는 어느새 환갑이 된 지난 60년 스님의 인생이 시시콜콜 다 있다. 군부독재에 맞서고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것에서부터 스님을 짝사랑한 어느 여인의 이야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인으로 당당히 돌아서는 스님의 당당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행자시절부터 쭈욱 견지하고 있던 초지일관의 한 단면이었다. 후후~ 우좌간 스님은 그 순수한 야성을 잃지 마시길.

<불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무한한 자유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본문 262쪽

정말 그런 것 같다. 불교는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라기보다 ‘사상’이다. ‘자유’에 이르게 하는 사상 말이다.

폭설 2011-05-17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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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스님은 사춘기 새창으로 보기

#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카페에서 책을 읽는데 엄청 울었다. (눈물이 많은 편이다)죽음을 통한 성장이니 만큼 영웅의 서사 프롤로그와 닮아 있다. 게다가 변모하기전 스님은 영략없는 양아치다.그러나 ‘나는 누군인가‘에 대한 치열한 물음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열망에는 숙연해진다.책 제목 잘지었다싶게 스님의 삶은 온통 사춘기를 앓고 있는 십대 소년같다. 스님의 말씀처럼 철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내 욕심일까?언제까지나 깔대기 들이대고 해맑게 웃는 스님이었으면...

지그재그 2017-06-04 공감(6)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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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춘기를 갖고 계시길... 새창으로 보기

내 자신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

글쎄 언뜻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어서 뭐를 우선 순위로 꼽아야할지 막막함을 느낀다.

이 책을 쓴 봉은사 주지스님인  명진스님은 "죽음" 이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노.병.사의 근본적인 탐구를 해 가며 끊임없이 물음에 물음에 꼬리를 물고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해답을 얻어가는 종교인 불교란 것에 비춰볼 때 당연시 되는 중요함을 차지한다.

스님의 자신 스스로가 겪어온 인생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낸다.

6살에 명을 버린 엄마의 장지에서 오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물음, 끊임없는 방황과 몸 싸움을 하던 학창시절, 대학을 보내준단 사촌형님의 말에 무주 구천동 관음사에 가서 대입공부를 하던 중 같은 방을 쓰게된 지나가던 스님으로부터 내가 나를 알아야된다는 말을 듣고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만이라도 졸업하고 출가하란 아버지의 말씀에 이를 따르게 되고 곧이어서 월남전 파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다.



단 하나의 혈육이던 동생의 군 입대를 해군 군악대로 추천하게 되고 면회를 가야겠단 생각으로 있던 차에 사고로 인해 동생이 먼저 생을 지게되는 일을 겪는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뒤로 한 채 출가를 하게되고 성철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기 닷새전에 여기에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해인사를 뒤로 하고 나오게 된다.



이후 탄성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각 도처에 있는 절에 선방을 다니면서 언뜻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던 시기를 사춘기처럼 겪었던 때와 같다고 생각하고 나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에 정진하게 된다.



 춘천에 있던 절에 몸담고 있던 때시절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사문제와 사회 불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감옥에 가면 독방이 생기고 공부하기에 좋을 것이란 어떤 수배자에 말에 전국규모의 규탄대회에 앞장섬으로써 구속이 된다. 



구속이 풀린뒤로는 개운사 주지를 시작으로 봉은사 주지스님이 됨으로써 그간 자신이 생각했던 불교와 신자간의 관계를 더욱 곤고히 하고 좀 더 발전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나간다.



1000일 기도 행진과 불전함의 돈을 신도들에게 공개하고 맡김으로써 투명성 있는 절의 혁신적인 개혁을 시도한 스님의 행로는 오늘도 여전히 사춘기적 방황의 길로 진행중이다.



모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복종을 한다.



세계의 주요종교는 그런면에서 우리의 연약한 맘에 강한 심성을 심어주고 이를 토대로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가는 데에 얼마간의 위안과 안정을 준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뭐랄까?



한마디로 가슴이 찡한 뭉클한 사연과 종교에 의지해 끊임없이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수행의 끈을 놓지않고 있는 종교인의 모습이 보인다.



삶의 회의를 느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어렸던 6살적의 충격은 동생의 죽음이란 것과 맞물리면서 더욱 곤고히해진 결과를 낳았지만 종교인이기에 전에 세상에 의지 할데라곤 서로의 한 몸뿐이었던 동생의 죽음을 다룬 글에선 주체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과 이별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49재를 홀로 행하고 돌아오는 그 당시의 감정, 한 때나마 자신을 좋아했던 친구의 여동생을 마다했던 젊은 날의 청춘의 시절은 누구나 겪었을 삶의 일부를 보는 것 같기에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해 준다.



행자시절에 보인 입바른 소리와 거칠 것없이 높은 스승 앞에서 말하는 행동은 천상 종교인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정말이지 별종이란 생각이 들 만큼 무서운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행보를 보이신다. )



불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교리를 배우는 과정과 하안거, 동안거를 통한 스님들의 참선과 화두에 대한 공부에 대한 과정은 TV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는 즐거움과 경외심을 드러내 준다.



또한  주지로서 불교에 대한 신도들의 믿음을 더욱 다지기 위한 행보의 실천, 뭣보다 타종교가 현 시대에 맞는 행보을 보인단 점에 대해서 불교인으로서 그간 불교가 지닌 소극적인 태도에서 좀 더 대중들과 사회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순 없는지에 대한 생각을 내포한 점은 같은 종교인들이라면 깊이있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단 느낌이 든다. 



***** 세상에 대한 문제, 존재에 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들 그게  무슨 영예가 될 것이며 극락에 간들 무엇이 그리 즐겁겠는가 *****



***** 우리는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만큼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



***** 죽음을 스승으로 삼아 삶과 죽음의 문제를 물어야한다.



'삶은 무상함-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변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서 괴롭게 살아야하는가' 라고 물어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진실한 물음이 바로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



***** 종교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옳다고 생각한는 것이 과연 옳은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



***** 마음에서 힘을 빼라!



        이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정관념, 오랫동안 익혀온 지식과 정보, 깃들여져 있는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뜻)

주지로서 그간 신자들에게 쉬운 불법을 행하는 과정에서 수행이란 즐겁게 해야 힘도 덜 들것이란 생각에 당신 스스로 말하고 싶지않았던 개인적인 일을 말함으로써 더욱 가깝게 느낄수 있도록 한 법문을 묶어서 내 놓은 것이기에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친근감 있는 책이란 생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불교의 용어 자체가 생소한 것이 많은 까닭에 책 뒤편에 주석을 달았지만 차라리 책 본문 아래에 위치를 두었거나 한 단어의 뒤에 괄호를 치고 해설을 달았다면 읽어나가는데에 많은 수고가 덜해졌을 거라 생각이 든다.


***** 깨질 듯 차가운 겨울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먹이는 찾았는가?
         허공을 비행하느 날개짓이 걸림 없다.
         도터재를 넘어온 북풍 찬바람이 삼십 리를 쏟아져 내려온다.
         천 년세월의 이끼 낀 탑전에 멈추어
         부지런한 스님들 비짓을 피해 뒹굴던 겨울
         낙엽 몇 잎을 휘감는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찌른다.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북노마드 2011-06-08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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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의 지혜로운 말씀 감사드리며... 

솔직한 얘기여서 가슴을 울린다. 울컥 눈물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하고 싶은 말은 내뱉고야마는 대찬 성품은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이렇게 살아온 내력으로 진행된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불교와 수행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그 흐름에 젖어있다보면 나도 어느 새 수행자가 되어버린다.

깨달음의 근처도 못가는, 전혀 관계없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더운 여름 한 철을 어떻게 지내야하는 지를 이 명진 스님의 글을 통해 한가닥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방학이 다가오면 으례 떠나던 여행을 올 여름부터는 딱 끊기로 했다. 여행을 가야할 이유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 쉽지 않았다. 흠, 실연당한 기분이랄까.

명진 스님의 다음 글이 아프게 와닿는다.

(256)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서 내 마음이 허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이 허공 같이 텅 비어 공적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이 하나의 작용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자유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이 바로 허공인 그 자리는 능히 모든 것이 자유자재한 자리이다.

그러나 이 못나고 어리석은 존재가 그리 쉽게 달라지나. 여름 한 철을 수행한다는 생각에 지레 기가 꺾이고 만다. 스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꾹꾹 담아넣는다.

(270) 수행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물음이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를 간절하게 물어가는 것이 수행이다. 그 물음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우리가 익혀서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정보와 그 정보를 통해서 판단했던 모든 사유의 굴레, 그리고 우리가 길들여져 있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여름, 나의 수행의 끝자락은 어디쯤 닿아있으려나.

nama 2011-07-2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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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불회, 다만 모름을 알 뿐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의 운영도 당연히 수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천도재나 제사가 기본이 되는 ‘제사종’, 관람료를 받아서 운영하는 ‘관람료종’, 입시기도 위주의 ‘입시종’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거듭나야 한다.”

명진 스님은 언제나 거침이 없다. 해야 할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시는 분이다. 때문에 적도 많고 지지층도 두껍다. 정말 운이 좋게도 스님을 여러 차례 뵐 기회가 있었고, 봉은사의 주지로 계실 때 일요법회를 참석해 스님의 법문도 들을 기회가 종종 있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으면, 정말 종교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담은 책은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은 울림을 준다. 마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처박고 세상의 모든 불의를 외면하려 한 나의 어깨를 후려치는 죽비라고 할까.

젊은 수행 시절, 당대의 스승이신 성철 스님께 버릇없이 덤비기도 했던 명진 스님. 자신이 깨우쳤다고 느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신감에 넘쳤던 스님.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스님은 진정 깨우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욱 뼈저리게 느끼셨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느끼는 주체는 누구인지, 그 누구는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배설을 하는 그 놈은 과연 누구인지. 여기에 대한 명쾌한 답을 할 수 없다면 그 어떤 부귀영화도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 스님은 지금도 끝없이 묻고 또 묻고 있다.

“다만 모를 뿐이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오직 모를 뿐이다. 그렇게 모름의 세계 속으로 끝없이 몰입을 해 가다 보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의 물거품이 전부 가라앉아 잔잔해진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홀로 드러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알 수 없는 그놈이 밥을 먹고 알 수 없는 그놈이 잠이 들고 알 수 없는 그놈이 꿈을 꾼다. 허공같이 텅 비어져 알 수 없어진 그 자리, 오직 알 수 없는 그놈 하나만 남아서 알 수 없음과 내가 일체가 된 자리가 바로 진리의 바다에 직통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모든 앎이 끊어지고 오직 알 수 없는 그것만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완벽한 비어짐의 자리에서 부처님은 별을 보았고 어느 조사 스님은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어느 조사 스님은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스님의 어린 시절은 언뜻 너무나 불행해 보인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젊을 적엔 사랑하는 동생을 먼저 떠나보냈다. 하지만 스님은 바로 그 죽음이라는 스승을 통해 뜨겁게 삶을 성찰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곧은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온 스님.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을 당시 천일기도를 통해 수행 중심의 참 불교를 실천으로 보여주신 스님. 천일 중 단 하루,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절 밖을 나섰던 스님. 이명박 정권의 어처구니없는 실정에 매서운 죽비의 목소리로 호통 쳤던 단 한 명의 종교인. 천일기도 후 가장 먼저 용산참사 유가족을 찾아 위로해주셨던 스님.

나에게 명진 스님은 여전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다. 하지만 막상 스님 앞으로 달려가 인사를 드린다면 그 변함없는 미소로 반겨주실 것을 안다. 사바세계에서 오직 나 하나만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지금, 끊임없는 용맹정진으로 많은 이들에게 견성의 길을 보여주신 이 시대의 선지식.

이제 봉은사를 떠나 다시 자유인이 되신 스님이 더 맑고 더 시원한 법문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란다.

메틀키드 2011-08-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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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스님 회고록

알라딘: 영원에서 영원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 불필스님 회고록 

불필 (지은이)김영사2012-09-21


책소개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 딸이며 제자인 불필스님이 처음 밝히는 큰스님 이야기. 처음으로 밝히는 성철스님의 가족사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선지식들의 수행까지, 제자들을 뜨겁게 품은 은사 인홍스님부터 온 대중들을 감화시킨 큰스님들의 법거량까지, 책갈피마다 한국불교의 역사가 은은하게 묻어나고 스님들의 아름다운 향기가 깊은 무늬로 아로새겨진다.

그동안 불필스님이 개인적으로 소장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자료들이 실렸으며, 과거에 가필된 형태로 발표되었던 성철스님의 친필 법문 노트를 원문 그대로 담겼다. 불교 수행자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증도가', '신심명', '토굴가' 등 여러 자료들을 채록해 실어 초심자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지침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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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성철스님 출가시 : 나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책을 펴내며 : 어디로 가고 있는가



1장 인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나의 고향 묵곡리

아버지 성철스님을 처음 만나다

생명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 전쟁의 체험



2장 출가 :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출가 전야

할머니의 성스러운 모정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꿈



3장 친필 법문 노트 : 자기가 본래 부처이거늘 그것을 모르니

수행자는 가난부터 배워야

큰스님께서 써주신 수행자 교과서

수도팔계, 희생에서 고행까지



4장 행자 시절 : 단발머리 행자들의 초발심

내일은 없다

상기가 나다

“아만이 센 공양주야!”

토굴가와 순치황제 출가시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면

깨달음의 노래

이성을 경계하라



5장 석남사 : 가지산 호랑이를 은사로 모시다

하필과 불필

정진도량으로 찾아가다

온 대중이 놀란 큰스님들의 법거량

100명이 함께하는 발우공양

3천 배 수행으로 친구의 불치병을 치유하다

절구통 수좌가 졸지 않는 비결

삼칠일 기도로 살려낸 은사 스님

어머니, 일휴스님이 되시다



6장 수행 : 영원한 대자유인의 길을 찾아서

10년의 침묵을 깨고 사자후를 토하시다

사력을 다한 심검당 3년 결사

용맹정진, 의자에 기대서도 안 된다

화합을 위한 소임살이

어른 스님들의 천진한 동심

가지산 여름 꽃에 취하다



7장 해인사 : 지혜와 자비의 도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큰스님의 편지

출가 풍경

절하다 죽는 사람은 없다

가족이 함께하는 수행



8장 영원한 시간들

열반의 종소리

나의 원력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공을 떠난 곳 겁외사

1997년 음력 3월 꽃피는 봄날

영원에서 영원으로

여기에 큰스님의 시비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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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대자유인의 길을 이끌어주신 성철 큰스님.

나는 지중한 인연으로 큰스님의 딸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안정사 천제굴에서 뵌 순간부터 큰스님은 내게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나를 큰스님의 딸로서만 바라보는 듯하다.

나... 더보기

묘관음사 입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갔더니 우둘두둘 무섭게 생긴 스님이 보였다. 상상 속에 그려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도반인 향곡스님이었다. …… 아버지 큰스님은 아마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어디론가 피해 계셨던 것 같다. 조금 있다가 향곡스님과... 더보기

한번은 큰스님이 계신 범어사 원효암으로 찾아갔더니 동화사 금당선원에 있다가 은혜사, 운부암을 거쳐 금강산으로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큰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했던 해가 1940년이었으니 출가한 지 4년쯤 지났을 때였다. 할머니가 천리 길을 물어물어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금강산 마하연까지 찾아갔는데 큰스님은 “이렇게 먼 ... 더보기

당시 성전암에는 행자 세 명이 큰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던 동업행자(천제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인기척이 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웬 젊은 부인이 스님 뵙기를 청해요. ‘큰스님께선 지금 아무도 안 만나주시니 그냥 돌아가주십시오’라고 했는데도 스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요. 해질 무렵이 되자 그분이 어... 더보기

지금 읽어봐도 큰스님의 법문은 명철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 귀에 쏙쏙 들어온다. 1950년대, 그러니까 큰스님의 연세 40대 중반에 작성하신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문장 또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논리정연한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시고 처음으로 외치시되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常住不滅〕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매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가 있음을 선언한 첫 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제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억만 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항상 어두움에 가리어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前生)일은 아주 잊어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을 모른다.

-<큰스님께서 써주신 수행자 교과서>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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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알라딘: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2005

알라딘: 몸으로 하는 공부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은이)여름언덕2005-07-18




9,000원
판매가
8,100원 (10%, 900원 할인)

8.8100자평(5)리뷰(17)
194쪽
148*210mm (A5)
252g

책소개
철학박사이자 회사원인 저자가 그동안 냈던 서평집 <책>이나 엄격한 형식으로 짜여 있던 <서양 근대문명의 기반>, <책과 세계> 등과 달리 홈페이지 'armarius.net'에 연재했던, 책과 세상에 대한 잡문집을 엮었다.

자신의 노동과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을 구분해 체제 바깥에서 꿋꿋이 서 체제 안에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저자의 학문, 사회, 문화에 대한 짧지만 속 깊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텍스트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강유원'이라는 컨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목차


서언

1. 아는 것과 모르는 것
01 말하기와 글쓰기
02 머리로 알기, 몸으로 해보기
03 '안다'는 것

2. 책 따로, 세상 따로
04 책의 속살과 껍질
05 책 따로, 세상 따로
06 지식인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07 지식인과 매스미디어

3. '문화'라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08 '문화'라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09 리영희의 '객관성'
10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
11 패스트푸드 전체주의

4. 학문의 현실적 쓸모
12 노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3 학문의 세 가지 태도
14 철학의 현실적 쓸모
15 방법론적 시니컬
16 고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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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리가 '전체주의' 할 때 떠올리는 것은 대개 폭력과 억압으로 전국민을 내리누르는 독재자의 모습이며, 이런 것을 우리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숨쉴 틈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보면 상황이 좀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뭐가 독재고 뭐가 아닌지를 눈으로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종류의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첫 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디,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 본문 115~116쪽에서 접기
마야 인들이 마야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전통문화 수호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당장의 삶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생활 속의 필요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한 개인이라면 모를까 어떤 집단 전체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81-82쪽 - 곰빔비
사람들은 흔히 문화가 대단한 정신적 활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로지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는 있을 수 없다. 소위 몇몇 '문화인'들은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몸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내지 않고 이미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밥통과 관계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트'이지 문화가 아니다. 어떤 집단 구성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들의 몸에 배어서 문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아니면 문화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새삼스럽게 문화라고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닌 것이다. -82쪽 접기 - 곰빔비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뻔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115쪽 접기 - 곰빔비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첫 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디,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116쪽 - 곰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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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대성 (분당 수내고등학교 국어교사)




저자 및 역자소개
강유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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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등에 대한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써 왔다. 오랫동안 개인 플랫폼에서 ‘책읽기 20분’을 진행했으며, CBS ‘라디오 인문학’과 KBS 제1라디오 ‘책과 세계’ 등 방송에서도 전문 서평가로 활동했다. 《책》 《책과 세계》 《주제》 등의 서평집과 《인문 古典 강의》 《역사 古典 강의》 《철학 古典 강의》 《문학 古典 강의》 《숨은 신을 찾아서》 《에로스를 찾아서》 등을 썼으며, 《경제학 철학 수고》 《철학으로서의 철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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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지은이)의 말
2002년까지는 책읽기만이 내 인생의 알리바이였으나 2005년에는 글쓰기가 그것에 덧붙여졌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이라 여긴다.



북플 bookple


제목이 심상치 않다. “몸으로 하는 공부”.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다’ 쯤 되겠는데, 비슷한 버전으로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한다’, ‘공부는 돈으로 한다’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여긴다.”(5쪽, ‘서언’ 중)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지, 학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문화와 책,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단상들로 채워진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잡문’을 이것저것 끌어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주제가 모든 글을 하나로 꿴다. 서로 통한다. 그러니 핵심은 몸이고, 공부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몸으로”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직접, 스스로, 끈기 있게’ 공부한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190쪽)라는 저자의 말도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두 번째는 ‘머리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으로’이다. 머리 즉, 생각만 하는 건 반쪽짜리 공부다. 몸만 쓰는 것(경험만 하는 것)도 반쪽짜리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완전체다.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은 실천해야 한다.


몸(경험)과 머리(이론)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공부의 순서를 따지자면 몸이 먼저다. 일상적인 삶, 생활, 현실, 물리적인 습관과 시간 등을 토대로 문화, 멘탈리티, 이론 따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 사례, 예시를 공부하고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목적은 ‘위기지학’이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다음 백과사전)이라는데, 자기 수양을 위하거나 자아실현,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한 공부쯤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인간다움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저자도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125쪽)다고 표현하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 미디어, 지식인, 권위 등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 상태나 다름없다.(덧붙이자면, 저자는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말한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130쪽)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자. 몸으로 공부하자.



따로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내용도 더러 있었고(특히 ‘10장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이란 글에서 여성해방의 역사에 관련된 부분), 동의하기 힘든 의견도 있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책 전체의 주제에는 깊이 공감했다. 부록처럼 실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장도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누군가 뭘 열정적으로 하는 것도 비웃는 사람’(159쪽)이라면서도 저자 자신은 치열하게 공부한다. 구체적인 공부법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고,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말1) 이 책이 ‘품절’ 상태인데,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중고거래가가 지나치게 높다. 예전에 읽고 중고로 팔았는데, 다시 사려니 비싸다(팔 때는 좋았다지). 도서관도 멀지만, 너절한 책을 빌려 읽기가 싫다. 중고거래가가 높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제본 질을 좀 높여서 출간했으면 좋겠다. 읽다 보니 종이가 책 본체에서 낱낱이 떨어질 것만 같다.



덧붙이는 말2)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저자가 어릴 때 박목월이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박정희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고, (…) 독서의 기억과 겹쳐짐으로써 배신감, 증오심까지 생겨났다.’(51쪽)고 한다. 너무 증오한 나머지 연좌제가 불법이고 ‘애비와 자식은 무관하지만’(같은 쪽),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같은 쪽)라고. 2005년에 쓴 책인데, 지금 저자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 때려죽이고 싶은 정도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cobomi 2017-01-03 공감 (19) 댓글 (2)









강유원의 새책이 나왔다.
역사고전 강의.
이번 주말은 부처님도 오셔서 길다.
이제 퇴근하면 강유원을 끌어안고 뒹굴 거다.

외모는 철학하는 사람보다 철학관하는 사람에 가깝지만, ㅋ
그의 글은 정직하고, 세밀하다.
그의 글을 믿고, 주말을 맡기련다.

이참에 그의 책을 되새겨 보면, 제법 읽은 게 많다.
태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주말 애인으로...

글샘 2012-05-26 공감 (19) 댓글 (8)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반딧불이 2008-06-14 공감 (8) 댓글 (0)



8.8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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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등이 가려울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근데 강유원 선생님이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스스로 너털웃음을 터트릴 거 같다.
무진무진 2019-03-28 공감 (0) 댓글 (0)



몸으로 공부하기

제목이 심상치 않다. “몸으로 하는 공부”.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다’ 쯤 되겠는데, 비슷한 버전으로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한다’, ‘공부는 돈으로 한다’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여긴다.”(5쪽, ‘서언’ 중)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지, 학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문화와 책,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단상들로 채워진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잡문’을 이것저것 끌어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주제가 모든 글을 하나로 꿴다. 서로 통한다. 그러니 핵심은 몸이고, 공부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몸으로”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직접, 스스로, 끈기 있게’ 공부한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190쪽)라는 저자의 말도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두 번째는 ‘머리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으로’이다. 머리 즉, 생각만 하는 건 반쪽짜리 공부다. 몸만 쓰는 것(경험만 하는 것)도 반쪽짜리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완전체다.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은 실천해야 한다.

몸(경험)과 머리(이론)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공부의 순서를 따지자면 몸이 먼저다. 일상적인 삶, 생활, 현실, 물리적인 습관과 시간 등을 토대로 문화, 멘탈리티, 이론 따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 사례, 예시를 공부하고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목적은 ‘위기지학’이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다음 백과사전)이라는데, 자기 수양을 위하거나 자아실현,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한 공부쯤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인간다움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저자도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125쪽)다고 표현하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 미디어, 지식인, 권위 등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 상태나 다름없다.(덧붙이자면, 저자는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말한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130쪽)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자. 몸으로 공부하자.

따로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내용도 더러 있었고(특히 ‘10장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이란 글에서 여성해방의 역사에 관련된 부분), 동의하기 힘든 의견도 있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책 전체의 주제에는 깊이 공감했다. 부록처럼 실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장도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누군가 뭘 열정적으로 하는 것도 비웃는 사람’(159쪽)이라면서도 저자 자신은 치열하게 공부한다. 구체적인 공부법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고,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말1) 이 책이 ‘품절’ 상태인데,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중고거래가가 지나치게 높다. 예전에 읽고 중고로 팔았는데, 다시 사려니 비싸다(팔 때는 좋았다지). 도서관도 멀지만, 너절한 책을 빌려 읽기가 싫다. 중고거래가가 높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제본 질을 좀 높여서 출간했으면 좋겠다. 읽다 보니 종이가 책 본체에서 낱낱이 떨어질 것만 같다.

덧붙이는 말2)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저자가 어릴 때 박목월이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박정희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고, (…) 독서의 기억과 겹쳐짐으로써 배신감, 증오심까지 생겨났다.’(51쪽)고 한다. 너무 증오한 나머지 연좌제가 불법이고 ‘애비와 자식은 무관하지만’(같은 쪽),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같은 쪽)라고. 2005년에 쓴 책인데, 지금 저자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 때려죽이고 싶은 정도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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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7-01-03 공감(19) 댓글(2)



대중의 이성화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반딧불이 2008-06-14 공감(8) 댓글(0)


공부하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나는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을 무림의 고수로 여긴다. 그의 텍스트 지향 홈피를 들락거리고 그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은 의심 없이 읽고 있다. 호남의 강준만이나 영남의 박홍규처럼 의심 없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호惡好의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선호하는 저자가 생기고 혐오스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의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몇 년 전에 출간 된 책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미루다가 집어 든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표현대로 잡문집이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강유원식 겸양 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 그간의 이력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편안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나가 쉽게 읽혔으며 그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과정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강유원 개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골고루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부’를 통해 우리가 만났던 강유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생각의 끝자락을 내보이고 편안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렇게 강유원식 공부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긴요한 책이다. 소설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조중동의 기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독자들에겐 필요없는 책이니 선별해서 읽어야겠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강유원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공부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고 나니 눈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가 질리는 게 아니라 막말로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태도에는 공감했고 스스로의 절제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공부라는 사실을 이제 몸으로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공부가 뭔지 공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다 챙겨 들을 만 하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이렇게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공부 이야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책 따로, 세상따로, ‘문화’라 부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학문의 현실적 쓸모 등 네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져 있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공부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나름의 방식과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 도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이 생기고 그것이 몸에 익혀진다. 완전히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생길 때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행복한 공부가 된다. 입신 영달을 위해, 돈 벌이의 수단을 위한 공부를 공부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트이고 앎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기지는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공부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앎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희열, 끝없는 지적 호기심도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허영이 아니라 생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꿔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 나의 안목과 시선이 달라지고 관점의 변화만 가져오면 되는 것인지, 실용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익의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하지만 책을 읽고 정리하고 무엇인가 써나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제 어렴풋하게 체험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08052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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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힘 2008-05-25 공감(7) 댓글(0)



공부는 역시 팍팍해

강유원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보았을 때,

그리고 그의 철학적 메세지가 담긴 책들의 제목을 보았을 때,

막연히 한번 읽고싶다고 생각하게 된건,

그 이름과 함께 떠돌던 단어들이 주로 '거침 없이' '자유' '날카로움' 등의 매력적인 수사 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소개에 따르는 몇가지 수사들 정도만 보고 하는 얄팍한 책 고르기 , 정확히는 책이라는 상품 고르기에 젖어 있는 나로서는,

(강유원씨는 이 잡문집 속에서 책을 상품처럼 대하면 안된다고 한다)

강유원씨처럼 책 표지 하나 에도 세밀하고 강력한 자기 주장을 펼쳐야 마땅할만큼 호불호가 정확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학자인 사람이 굳이 '잡문집'을 낼 필요가 왜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을 여태껏 떨치지 못하겠다.

잡문집이란 말 그대로 여기저기 적어보았던 잡문들을 묶는 것이고,

그런 기획을 하는 출판사나 작가나 모두 이름만 보고도 살 수 있는 독자층이 있음을 의식하고 내는 것 아니던가.

강유원씨가 '온통 기업가의 상업적 이윤을 토대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체제' (이런 표현은 역시 그가 책 속에서 한것이다)를 무시하고 자유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오로지 수많은 무식한 대중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냈는지, 그것이 의심된다면, 내 의심이 지나친걸까.

논조는 정확하고 이지적이지만, 이 사람의 산만하게 모아둔 잡문들에서 독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 각 잡문들 간의 유기성 따위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그냥 자신이 가르치는 혹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만 읽을 수 있게 잡문을 배포해도 좋지 않았을까?

철학을 공부한 사람 답게 많은 사회적 문제나 논쟁이 될만한 이슈들을 골고루 더듬어서 자신만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를 어우러서 보자면 그야말로 '공부'가 될만하지는 않다는게 나의 소감인데, 이는 내 난독증 때문이라기보다는 - 사실 책은 쉽게 쓰여있어서 철학을 몰라도 아주 술술 잘 읽힌다 - '아유 그래 너 잘났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하기보다는 쓸데없이 싸우기 싫어서 안할란다' 라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그가 제시하는 문제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을 해볼 맘이 사라지게 되어서 그렇다.

왠지 공부 못하는 애들에게 이런 선생님이 걸리면 점점 더 공부하기 싫어지게 만들 것 같은 그런 강유원씨,(그래 나 공부 못해서 이렇게 삐딱한 리뷰 쓴다 -_-;)

차라리 잡문이 아닌 완전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쓴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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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6-07 공감(6) 댓글(7)



생각하며 살아가기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살아 가는 것.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 비주얼 문화에 보다 익숙해진 우리.

'강유원' 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알아갈수록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 남의 이목 때문에 주저하기 보다 강한 주관을 소유한 이며, 사회적 부조리나 부도덕에 대해 쓴소리, 비판도 서슴치 않는 듯 하다.
이책은 특정 주제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의 잡문집이다. 쉽게 부담없이 읽어질 수 있을 듯.

솔직히 제목에 솔깃해져 한번 더 손이 가는 거 같다. 책의 마무리 부분에 작가가 제시하는 그의 공부법이 소개되어 있어 한번 기회가 되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그가 철학자인 만큼 철학 공부법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여러 분야에도 두루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pp. 193-194)

1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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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2008-10-25 공감(2) 댓글(0)


강유원식 서평쓰기

강유원의 서평집이 오랜만에 출간되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라티오).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가 부제인데, 제목과 부제가 겨냥하는 것이 모두 서평이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 서평에 대한 정의이며 책읽기를 지식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게 또한 서평의 역할이다. '오랜만'이라고 적었는데, 서평집으로는 <책과 세계>(2004)와 <주제>(2005) 이후 15년간 강의와 방송활동을 하면서 쓴 책이라고 소개된다. 그 사이에는 강의책들이 있었다.


















































"서평집이지만 서평집 그 이상이기도 하다. 단지 서평들을 모아 놓은 서평집은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기가 어려워 읽고 나면 읽어야 할 책 목록만 남기 쉬운데, 이 책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주제를 일관하고 있어 부제처럼 ‘책읽기가 지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인용이 풍부한 서평, 수준(초급, 중급, 고급)에 따라 작성된 서평, 논고, 논문, 역자 후기 등 다양한 형식의 서평을 포괄하고 있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참조할 수 있는 일종의 ‘책에 관한 글 쓰기’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글쓰기' 안내서를 자임하는 일종의 전략적인 서평책이다. 더 간단히는 강유원식 서평쓰기 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강유원의 저작으로 검색되는 첫 책은 <근대실천철학연구>(1998)인데, 짐작에 학위논문과 연관돼 보이지만 나는 실물로 보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떠나는 철학여행1>(1998)도 시리즈로 기획됐던 것 같은데 역시 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 접한 건 <책>(2003)이라는 제목의 첫 서평집. 나대로의 분류에 따르면 <책>과 <주제>에 이어지는 것이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다. 아마도 <책>이 절판된 상태라 그보다 널리 알려진 <책과 세계>를 언급한 것이리라. 거기에 <몸으로 하는 공부>(2005)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들이 강유원의 서평관과 공부관을 미리 엿보게 해준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에게는 그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그의 공부관과 서평관은 <책읽기의 끝과 시작> 서문에 잘 정리돼 있다. 책읽기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한 입력이 아니라 자기화이다, 책읽기를 자기화하는 필수적인 방법이 서평쓰기다, 라는 것. 책은 자기화의 '단계'(레벨)를 실제 서평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비유컨대 '책읽기로 몸만들기' 같은 과정이다. 독서를 섭식에 비유하자면 지식의 자기화는 음식을 근육으로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근육운동이 서평쓰기이고, 이 일련의 프로세스가 공부다.

이번 서평집에서 특이하게 생각한 건 부록인데, '아주 긴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장미의 이름> 읽기'가 들어가 있다. 절판됐던 <장미의 이름 읽기>(2004)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는데, 원래 제목도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읽기'에 해당한다. '아주 긴 서평'이라는 작명은 강유원식 유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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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3-26 공감 (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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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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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16 공감 (24) 댓글 (5)


주말의 애인...


강유원의 새책이 나왔다. 역사고전 강의. 이번 주말은 부처님도 오셔서 길다. 이제 퇴근하면 강유원을 끌어안고 뒹굴 거다. 외모는 철학하는 사람보다 철학관하는 사람에 가깝지만, ㅋ 그의 글은 정직하고, 세밀하다. 그의 글을 믿고, 주말을 맡기련다. 이참에 그의 책을 되새겨 보면, 제법 읽은 게 많다. 태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주말 애인으로... ... + 더보기
글샘 2012-05-26 공감 (19) 댓글 (8)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

아침에 옮겨놓은 '공부론'을 저녁을 먹고 나서야 시간을 내 마무리짓도록 한다. 사실은 가짜 학위와 관련해서 역시나 예일대 박사학위를, '인크레더블'하게도 32살의 나이에 3개나 획득했다고 소개된 '석학' 조중걸/조송배 교수가 생각이 나서(http://blog.aladin.co.kr/mramor/1055226 참조) '강유원'을 다시 검색했다가 우연히 김영민 교수의 칼럼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에 대한 논평('신문읽기의 어려움')을 읽게 되었고 그 두 기사를 아침에 옮겨놓았었다. 먼저 어떤 내용인지는 비교해가며 한번 읽어보시길. 필자 소개상으론 '철학자 vs 회사원'이 아니라 '철학자 vs 철학자'이므로 맞장을 뜨는 게 문제되지는 않겠다. 동급이니까.



한겨레(07. 05. 20) '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

“이소룡이 유연성으로 이룬 스타일을 흉내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길 소망했다. 쿵푸처럼 공부도 그런 것이다. 칼이든 펜이든 진실을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들면 자신의 스타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술가 리샤오룽(이소룡, 1940~1973)은 어떤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태하거나 보수적인 치들은 종종 스타일에 반감을 지니지만, 스타일은 주류의 각질을 뚫는 아웃사이더의 징후로 일정한 혐오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에서 보듯이, 스타일이 없이는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



미완의 <사망유희>를 유작으로 남긴 채 이소룡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잡룡들을 내세워 모작들이 제작되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는 사실만 날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양식(Typus)은 스타일이 아니다. 요컨대 스타일은 흉내와 더불어 죽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식은 오히려 흉내내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고해질 뿐이다. 그래서, 스타일에는 매순간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는 아이러니의 빛이 있다. 키르케고르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식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문화적 법식이다. 가령,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이란 꼭 그런 것이다. 나아가,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 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소룡의 쿵푸(工夫) 스타일에는 형이상학적인 게 없다. 철학도이기도 했던 그는 더러 노자류의 잠언을 흘리면서 ‘물처럼 되라!’는 주문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테크닉은 간결하게 정곡을 찌를 뿐 실없이 용장스러운 데가 없다. 그는 스크린의 스타가 됨으로써 스펙터클화한 영자(英姿)를 탁이(卓異)하게 뽐내면서, 군부독재와 개발지상주의의 아버지 체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모든 불량스러운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책상을 마구 뛰어넘고 헛되게 쌍절곤을 돌리다가 형광등을 부수곤 했다. 그의 스타일은 응당 양식으로 굳어지면서 스타의 비용을 치르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양식 속에서 우리의 스타일이 부활하기를 소망했다.

그는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는 중에 형(type)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디-자인(de-sign)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사인(sign)이고, 탈(脫)코드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코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중적 이미지, 그 시절인연(時節因緣)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15살의 과도기를 깜냥껏 지나면서 이소룡의 스타일을 향한 불가능한 욕망을 반복강박적으로 양식화했다. 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 즉,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을 금강산을 스쳐가는 계절처럼 무심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이른바 염화시중의 길은 그 깨침의 극점에서 비밀처럼 보여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비경인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이미지가 재현하는 한편 우스꽝스러운 양식은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의 세속적 운명이다. 그들은 스타일을 양식 속에 죽이면서 세속의 명성을 얻는다. <사망유희>에서 노란 체육복을 입은 채 예의 괴상한 새울음을 토하며 상대의 쌍단봉을 대적하여 회초리처럼 길게 깎은 대나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은 몹시 흥미로운 파격이다. 그 복색과 무기의 취지는 그가 늘 한결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유연성(pliability), 즉 주류의 엄숙주의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유연성의 이단과 다를 바 없다. 뛰어난 춤꾼이기도 했던 그는 그 이단적 유연성으로써 그만의 무술 스타일을 얻었으나, 그 스타일을 대중의 환호 속에서 양식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대중적 스타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연성은 오직 실전 무술의 실용성을 위한 것이었다. <징비록>(1647)에서 유성룡은 신립의 호령이 번거롭고 요란스러워 반드시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했고, 인재 등용의 귀재였던 세종대왕은 말수를 줄이고 듣기에 기민했다고 했지만, 쿵푸도 공부 곧 그런 것이다. 주먹이든 말이든, 칼이든 펜이든,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도 학문과 문장을 논하면서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요점은,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언거번거한 말은 외려 어눌한 것보다 못하고, 형(型)만 요란스러운 동작은 실없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추억! 그것은 그대로 어떤 공부의 환상이다.(김영민/철학자)





미디어오늘(07. 06. 16) 신문읽기의 어려움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의 일이다.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내 친구 하나가 ‘요새 한겨렌지, 한거랜지 때문에 골 때린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같이 장사하는 사촌 형이 한자를 몰라서 그동안 신문을 통 못 봤었는데, 한겨레 나오고 나서는 신문을 어찌나 열심히 읽는지 세상 물정을 다 가르치면서 야단을 치는 통에 그런다”는 것이었다.

한글 전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깨우쳤는지를 뚜렷하게 느낀 사례 중에 그만한 것이 없었다. 이는 달리 보면 신문이 어떤 사람을 독자로 여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신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그런대로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우리교육 교사아카데미(www.uriedu.co.kr/edu)라는 곳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여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몇 주 짜리 강의를 한다. 수강생 전부가 교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읽어 볼만한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읽기에 필요한 내용을 곁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함께 궁리해보는 것이 그 강의가 하는 일이다. 이 강의에서 가끔 사용하는 일종의 교재 중의 하나가 한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글인데, 더러는 신문기사가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사실 마땅한 기사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강의에 사용하기 위해 신문을 검색하다가‘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라는 글을 한겨레(5월19일자)에서 읽게 되었다. 철학자 김영민씨가 쓴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여 교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검토의견을 내게 하였다.

검토의 기준은 이러했다. 첫째, 주장하려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것이 글 첫머리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있는가. 둘째,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핵심적인 개념들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가. 셋째,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이 적절하게 준비되어 배치되었는가. 마지막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독자가 읽기에 어려움은 없는가.

몇 분 동안 검토를 마친 교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것들이었다. ‘논지가 분명하지 않아 읽기가 짜증스럽다’ ‘스타일과 양식이 진짜 공부와는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정의가 없다’ ‘공부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자기가 얼마나 유식한지를 자랑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어떤 이는 ‘한겨레 편집담당자는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이런 글을 신문에 싣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다. 나야 속사정을 모르니 ‘철학자의 난해한 글을 읽고 이해할만한 도사가 신문사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개로 넘겨버렸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신문을 읽는 사람 중에 이 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자 원고지 열 매 남짓한 이 글을 이해하여 공부법에 관한 뭔가를 터득하려면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은 무엇인지,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은 또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인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헤겔의 철학을 전공한 나도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은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건 다 제쳐두고라도 한글 전용에서 출발하였기에 어려운 한자말을 풀어서 쓰려는 방침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한겨레에서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가 들어가 있는가하면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런 글을 싣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철학자 김영민씨가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가 이소룡에게서 뭘 배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신문이라는 공공매체의 편집담당자에게, 그것도 한겨레의 담당자에게 꼭 묻고 싶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도 한번 쓰윽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싣는 이유는 뭔가. 그런 글을 실으면 김영민씨의 표현처럼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스타일이 생겨나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신문이 되는가.(강유원/ 철학자)

07. 07. 18.



P.S. 나는 이소룡 세대가 아니다. 그의 영화 <정무문>(1972)을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분류하자면 나는 성룡 세대이고, 성룡보다 먼저 나를 매혹했던 이는 <소림 36방>(1977) 같은 영화에서의 유가휘였다(왜 있잖은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요즘처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게 아니라 으레 쇼브라더스의 홍콩무협영화를 보던 시절 말이다).



유가휘? 황비홍의 직계제자라고도 하는 이 '무술인 배우'는 <킬빌2>에도 우마 서먼의 상대역 도인으로 나오기도 했다(소림 '무술인 배우'의 계보는 알다시피 이연걸이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지난달인가 <소림 36방>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잠깐 다시 보니 30년전에 느꼈던 '비장함'은 온데간데 없고 유치함만이 남아 있었다(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때쯤 학교의 단체관람으로 봤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대표작을 <소림 36방>에서 <소림 용문방>으로 바꾸었다.



잠시 여담이 새어나왔는데, 사실 소림사 무예로 잘 알려진 '쿵푸'가 '공부(工夫)'와 같은 어원을 갖는, 그러니까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 말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오래전 김용옥의 책에서 처음 그런 내용을 읽고 '그렇구나!' 했었지만 이젠 그런 내용을 접하면 식상하다). 예전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799694)에서 주장한 대로 나는 '자기단련'이나 '자기연마'로서의 '공부'보다는 '가르치고 배움' 혹은 '가르치면서 배움'으로서의 '학습'에 더 놓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이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는 ‘비변증법적’이다.















해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가 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김영민은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그것은 자기만의 문체(스타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나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유는 그런 문체를 만들어나가는 그의 (혼자만의) 보행/산책과 관련되며 구경꾼-독자들과는 무관하다.

'몸으로 하는 공부'를 주창하는 강유원은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타자를 끌어들이는데, 그건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신의 포지션을 항상 고려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인용한 칼럼에서 그는 '교사들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다른 '공부'를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기본적으로는 강유원 역시 '쿵푸로서의 공부'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공부는 각자가 하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근육을 단련한다고 해서 남들의 뱃살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자기 뱃살은 자기가 빼야 한다.



하지만 '이소령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면, '성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도 있을 법하다. 어떤 성룡인가? 바로 '재수없는 영화' <취권>(1978)의 성룡이다. 무술이라기보다는 코미디를 닮은 성룡식 쿵푸.

"평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중하게 행동하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옷 속에 감추어놓은 무골을 드러내고 한 방에 적들을 제압해버리는 이소룡! 그는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었고 도탄에 빠진 약자들의 구원자이다. 그러나 <취권>에서의 성룡은 이소룡과 정반대의 면모를 하고 있다. 그가 연기한 황비홍은 약자들의 구원자들이기 보다는 아녀자들에게 치근덕대는 무뢰배이고,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 아닌 무술 연습이 하기 싫어 잔꾀를 부리는 말썽꾸러기이다. 까불거리는 모습은 진중함과는 거리가 먼데다 무도인이라면 당연히 정정당당해야 할 승부에서 번번히 속임수를 쓰곤 한다.

결국엔 그의 필살기가 되는 ‘취권’도 각이 잡혀있는 절권도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술에 취한 여덟 명의 신선들의 비기’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것은 시전함에 있어 결코 ‘가오’를 기대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무술이다. 여기에 성룡은 (지금은 그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지형지물이용 무술’을 융합했으니, 그의 권법은 ‘무예’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예’였다. 이소룡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성룡은 ‘광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취권>, 또 한 마리의 용(龍)을 탄생시키다', Joycine, 04. 02. 17)



요는, 보행 공부나 몸으로 하는 공부 말고 '잔꾀'로 까불거리며 하는 공부도 있다는 것. 자신의 무공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임기응변으로 이용해서 어쩌다 상대를 제압하는 수도 있는 법이고. 비록 우스꽝스럽고 '가오'가 잘 안 나오기는 해도 이걸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삶의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다면 나름 그럴 듯하지 않을까?.. 아침에 우연히 마주친 기사(=지형지물)들 때문에 잠시 '기예'를 부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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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18 공감 (9) 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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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운 책'에 대한 부록


















(이 페이퍼는 리뷰 '아까운 책에 대한 오마주이자 입문서(http://blog.aladin.co.kr/755125167/5082937)'에 대한 부록임을 밝힙니다)



1. 아까운 책들

여기에 소개될 리스트는 『아까운 책』 396쪽부터 398쪽까지를 인용한 것이다.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나다 순으로 배열했음을 밝힌다. 참고로, 가격과 품절·절판 여부는 알라딘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 혁명』 강수돌 지음│산지니│2010년 5월│13500원

『개성의 탄생』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곽미경 옮김│동녘사이언스│2007년 6월│16200원

『경제학 3.0』 김광수 지음│더난출판│2009년 12월│9750원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증언팀 엮음│풀빛│2001년│16200원(개정판 기준)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전 3권)』 김봉렬 지음│이인미 사진│돌베개│2006년 3월│각권 21250원

『꽃의 제국』 강혜순 지음│다른세상│2002년 6월│12800원

『꿀벌의 우화』 버나드 맨더빌 지음│최윤재 옮김│문예출판사│2010년 11월│15300원

『남회근의 알기 쉬운 논어 강의(전 2권)』 남회근 지음│송찬문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2002년 9월│각권 32300원(절판)

『노동을 거부하라!』 크리시스 지음│김남시 옮김│이후│2007년 11월│12750원

『단절의 시대』 피터 드러커 지음│이재규 옮김│한국경제신문사│2003년 12월│12800원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2004년 11월│9800원

『데르수 우잘라』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베치 아르세니에프 지음│김욱 옮김│갈라파고스│2005년 11월│10880원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앤 해링턴 지음│조윤경 옮김│살림│2009년 2월│12800원

『모던 수필』 방민호 엮음│향연│2003년 7월│8500원(절판)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지음│여름언덕│2005년 7월│8550원(품절)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임형택 해제│창비│2005년 3월│7600원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지음│푸른숲│2009년 10월│10560원

『빅 스위치』 니콜라스 카 지음│임종기 옮김│동아시아│2008년 11월│12000원

『사르트르 평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변광배 옮김│을유문화사│2009년 4월│28000원

『삼엽충』 리처드 포티 지음│이한음 옮김│뿌리와이파리│2007년 12월│18700원

『서양문명의 기반』강유원 지음│미토│2003년 11월│8550원(절판)

『수술, 마지막 선택』 강구정 지음│공존│2007년 5월│12800원

『스마트 월드』 리처드 오글 지음│손정숙 옮김│윤영수 감수│리더스북│2008년 6월│16000원

『스코트 니어링 평전』 존 살트마쉬 지음│김종락 옮김│보리│2004년 11월│15300원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지음│다이앤 K. 오스본 엮음│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2009년 2월│15300원

『아날로그 맨1』 김수박 지음│새만화책│2006년 12월│8100원(품절)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행복한마음│2008년 1월│7200원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지음│방대수 옮김│이다미디어│2005년 9월│7200원

『엘랑 비탈』 윤철호 지음│북스넛│2010년 6월│12600원

『엠마 골드만』 켄데이스 포그 지음│이혜선 옮김│한얼미디어│2008년 10월│25200원

『역사적 예수』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김준우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2000년 12월│24700원

『염철론』 환관 지음│김한규 옮김│소명출판│2002년 12월│24700원(품절)

『원더풀 사이언스』 나탈리 앤지어 지음│김소정 옮김│지호│2010년 1월│18700원

『이미지와 환상』 다이엘 부어스틴 지음│정태철 옮김│사계절│2004년 2월│17100원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션 B. 캐럴 지음│김명남 옮김│지호│2007년 7월│14400원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 이중톈 지음│홍광훈 옮김│에버리치홀딩스│2008년 1월│12800원

『인체 시장』 로리 앤드루스·도로스 넬킨 지음│김명진·김병수 옮김│궁리│2006년 4월│11730원

『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지음│주형일 옮김│시울│2006년 10월│14020원

『작가』 박상우 지음│시작│2009년 7월│8000원

『진술』 하일지 지음│문학과지성사│2000년 10월│5950원(품절)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찰스 핸디 지음│강혜정 지음│에이지21│2008년 3월│10500원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우석균 옮김│열린책들│2010년 2월│7840원

『침묵의 언어』 에드워드 홀 지음│최효선 옮김│한길사│2000년 3월│13500원(품절)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 최윤재 지음│나무와숲│2002년 11월│8070원(품절)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사이토 다마키 지음│김영진 옮김│황금가지│2005년 5월│11050원(절판)

『한국의 전통문양』 임영주 지음│대원사│2004년 9월│19800원

『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박중서 옮김│뜨인돌│2005년 8월│8500원

『현대미술의 이해』 팸 미첨·줄리 셸던 지음│이민재·황보화 옮김│시공사│2004년 8월│14400원

이외에도 서평 속에서 언급하거나 서평 뒷부분에 쓰여진 '저자의 다른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에 언급된 책을 포함해, 이 책에선 총 580권의 책이 언급된다.



2. 서평꾼들

'아까운 책'들의 서평을 썼던 46명의 서평꾼들을 만나보자. 책날개를 참고하여 썼다. 마찬가지로 가나다 순이다. 반점 후에 쓴 책명은 그들이 서평을 썼던 책이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노동을 거부하라!』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강신주: 철학자, 『일상생활의 혁명』

강인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김기태: 출판 평론가, 『이미지와 환상』

김낙호: 만화 연구가, 『아날로그맨1』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삼엽충』

김민영: (주)행복한상상 이사, 『작가』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이사, 『꿀벌의 우화』

김보일: 배문고 국어 교사,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염철론』

김은섭: 경제경영 전문 서평가,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김이경: 작가·번역가,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연구실장, 『역사적 예수』

노태복: 번역가, 『데르수 우잘라』

이영수(듀나): 영화 평론가·소설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

류대성: 수내고 국어 교사, 『몸으로 하는 공부』

박상진: 경북대 명예 교수, 『꽃의 제국』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엠마 골드만』

반이정: 미술 평론가, 『현대미술의 이해』

변정수: 출판 평론가, 『원더풀 사이언스』

손철주: 미술 칼럼니스트, 『한국의 전통문양』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맛보기』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서양문명의 기반』

안상헌: MEANING독서경영연구소장, 『신화와 인생』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장, 『스마트 월드』

엄기호: 인문학자,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예병일: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 『수술, 마지막 선택』

오승주: (주)코이즘 대표 이사,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 강의』

우석훈: 2.1 연구소장, 『경제학 3.0』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엘랑 비탈』

이기중: 전남대 인류학자 교수, 『침묵의 언어』

이은희: 과학 칼럼니스트, 『인체 시장』

이정모: 과학 저술가,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이진숙: 미술 칼럼니스트, 『문장강화』 『모던 수필』

이택광: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사르트르 평전』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해바라기』

장석주: 문학 평론가, 『진술』

정혜윤: CBS 라디오 PD, 『칠레의 밤』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스코트 니어링 평전』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개성의 탄생』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빅 스위치』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단절의 시대』

이외에도 서평에서 언급한 사람이나 '함께 읽으면 좋은 책'에서 언급된 저자들을 비롯해, 총 212명의 인물이 언급된다.



3. 서평의 구성

'아까운 책'에 실린 46편의 서평(리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도입부: 제목과 부제,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출간연도가 윗 부분에 써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책의 표지를 비롯한 책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아랫 부분에는 곧 읽을 서평에서 일부분을 가져온 '인용구'가 실려 있다.

-첫 장: 윗 부분에 작은 글씨로 다시 제목이 써 있고, 그 아래에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사람의 리뷰 제목이 써져 있다. 본문을 읽기 전에 서평꾼의 이름이 나오고, 첫 장 맨 아래에는 서평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 서평의 본문에는 두 세개의 소제목이 글의 흐름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리뷰가 끝난 후, '아까운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소개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책의 도입부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