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9

Namgok Lee 박석 ‘유교는 종교인가?’ 2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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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유교는 종교인가?’

어제에 이어서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라는 장(章)을 읽었다.

전통적으로 볼 때 초월적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보류적인 태도는 유교의 큰 단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 신을 모시든 유일신을 모시든 신 중심의 세계관은 아직 고대의 신화적 사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유교는 그러한 신화적 사유체계를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대부분 종교들이 제시하는 사후 세계관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 
오히려 불가지론이나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공자의 입장이 훨씬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아도 초월적 존재인 귀신보다는 인간을, 사후세계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을 중시했던 공자의 태도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和光同塵(화광동진) 노자 말씀 중에 '和光同塵'이 있다. 
和光 : 빛(빛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부드럽게 하는 능력과 
재능을 나타내지 않고 감추고 세속을 따른다는 뜻이고, 
同塵 :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수양(修養)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인간세계를 지향한다.
공자 수양론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도 현실을 초월한 궁극의 세계를 향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이다.

공자 명상의 하나의 특징은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을 중시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명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느낌이 없다. 내가 60이 넘어 논어를 처음 접하면서 공자에게 경탄했던 것은 그의 과학적인 탐구 태도였다.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진리를 밝히려는 정신과 태도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내가 연찬(硏鑽)이라고 부르는 소통과 탐구에 놀라울 정도로 근접한 성현(聖賢)을 공자에게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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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지배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성약범(大聖若凡)을 추구했기 때문인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의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고유의 전통종교(인도의 힌두교,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등)가 있는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기독교가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 사상들은 모두 현실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영역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 

그러나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 종교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다. 때문에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 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오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하게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大聖若凡) 때문에 공자는 새롭게 평가받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치사상이나 윤리는 낡은 면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깨달음과 수양론 등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점진적인 성스러움
하늘보다 땅신보다 인간을 더욱 중시한 태도, 
그리고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통합하려는 거시적 관점 등은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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