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칼럼]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김기석·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입력 Jun 25, 2019 10:02 AM KST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퇴락한 예배당 수리하는 일에 마음을 보태달라는 청을 듣고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다녀왔다. 하천변에 있는 예배당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몇 년 전 교인이 한 명 밖에 없던 이 교회에 부임하자 마을 사람들은 '언제 떠날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당신들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목사 부부는 속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 마을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반기거나 말거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자 지싯지싯 다가오는 그들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지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해발 1,300미터 되는 곳에서 거의 30년 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며 사는 할아버지는 그들이 인사를 드리자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할아버지를 꾸준히 찾아갔고, 마침내 그분의 절통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목사 내외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그 할아버지를 마을에 방을 얻어 모셨다. 사람들을 꺼리던 분인지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서툴렀고 집 주인과 다툼이 잦았다. 그래서 지금 목사 부부는 그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콘테이너형 주택을 마련하는 중이다.
지금 그 교회는 주일이면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고,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도 바친다. 그 교회에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어느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목사 부부의 진심을 알아차린 지역 주민들은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자'고 떼 아닌 떼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 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더딜망정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자기 정화 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는 작동되지 않고 있다.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는 종교적 특권 뒤에 숨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높이 쌓아올린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차별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셨지만, 그들은 장벽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신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믿는 이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묻곤 했다. 원론적인 대답은 희망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일렁이는 절망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에서, 해체되고 있는 농촌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 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애쓰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교회라는 나무의 실뿌리가 아니겠는가? 희망은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