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4
1904 박한식[2]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등록 :2019-04-01 16:06수정 :2019-05-21 14:38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
1994년 6월16일 카터 백악관에 ‘통보’
“김일성 ‘북핵동결 합의’ 공개하겠다”
곧바로 CNN 평양 특파원과 인터뷰
‘폭격 대기중’ 클린턴과 한동안 ‘냉랭’
‘북핵 폭격 해결’ 주장은 순진·위험
“북은 반드시 보복 공격 할 것이다”
6·25때 초토화된 북은 ‘전국 땅굴화’
남은 초고밀도·인구집중 ‘살상 막대’
합의 21일뒤 ‘김일성 급서’ 들은 카터
정성어린 조문 편지에 북 관리 ‘눈물’
‘김일성 유훈’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지원’ 불이행
“3개월 못버틴다” 전략적 인내 ‘고수’
“북한붕괴론의 5가지 허상 깨달아야”
주체사상·선군정치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1994년 6월16일 평양에서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합의한 ‘북핵 동결’은 먼저 클린턴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워싱턴시각 15일) 카터는 평양에서 백악관의 로버트 갈루치에게 전화를 해서 합의 내용을 전달한 다음, <시엔엔>(CNN)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미리 공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해버렸다. 카터는 합의 내용이 세상에 빨리 공개되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준비된 미국의 ‘북한 영변 폭격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카터의 조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냉랭하게 지냈다.
1994년 6월16일 ‘글린턴의 특사’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 개발 동결’에 합의한 사실을 <시엔엔>과 현지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엔엔 화면 갈무리실제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북핵 동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린턴 정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했을 때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요즘도 미국이 그때 영변을 폭격했다면 북핵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에 기초해서 내뱉는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생각의 소산일 뿐이다. 나는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 것으로 보느냐고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한 미군기지, 주일 미군기지, 괌 주둔 미군기지 등을 폭격할 것이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많은 민간인도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북한이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폭격하면 수십만명의 인명이 살상될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국제사회에서 그 피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1994년 6월16일 미국 워싱턴(현지시각 15일)의 백악관에서 회의중이던 고어 부통령, 윌리엄 페리(맨오른쪽) 국무장관 등 클린턴의 참모들이 <시엔엔>을 통해 카터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돈 오버도퍼 <투 코리아> 중에서.한편, 1950년 무렵 평양의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은 평양에 약 1만개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 100명당 1발꼴로 폭탄비를 쏟아부은 셈이다. 그 시절엔 한 집에 보통 10명 정도의 대가족이 살았다. 따라서 평양에는 약 10만 가구가 있었던 셈인데 미군의 폭격으로 그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의 미국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이 끊임없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 공군 폭격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땅굴을 파서 방공호를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마도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땅굴을 가장 잘 팔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의 지하철도 지하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 강바닥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것이다. 또한 그 지하철 내부에는 방대한 영역의 대피소가 있다. 지하철이 곧 거대한 방공호인 셈이다. 따라서 유사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평양 시민들은 마치 ‘개미새끼처럼’ 지하의 방공호로 모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미국은 폭격할 목표 지점을 확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우방인 남한의 사정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모든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서울의 자동차만 하더라도 수백만대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차에는 연료(가솔린, 디젤, 액화천연가스 등) 탱크가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한국을 폭격하면 자동차들이 곧 폭탄이 되어 버린다. 또한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집들도 폭격을 당하면 이내 폭발해버릴 것이다. 자, 미국 당신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라. 당신들이 영변을 폭격하면 우방국인 남한 사람들은 수백만명이 죽어 나갈 것이지만, 정작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죽지 않는다. 이처럼 빤하게 보이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전쟁이 나면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하다. 심지어 미국보다 북한이 우세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얘기를 카터에게도 전하고, <시엔엔> 등 여러 유력 언론에 나가서도 되풀이 경고했다. 그러자 좀 진보적 시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더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다행히 그들은 대부분 쉽게 내 얘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전쟁 방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의 파국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오히려 카터의 방북을 반대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집중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 시내 전경. 박한식 교수는 ‘미제에 대한 북한의 원초적 적대감’의 뿌리이자 트라우마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창비 제공카터는 그해 16월15~18일 3박4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은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했다. 카터는 평양에 다시 들어가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평양에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보냈다. 북한에서 영어 잘하기로 손꼽히는 한 참사관이 카터의 그 편지를 읽고서 엉엉 울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방송을 통해 김일성의 장례식에 ‘외국인 조문 사절 원칙’을 발표했다. 그래서 카터의 조문 방북을 거절했다. 나는 훗날 카터의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북한 참사관을 카터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 북한 참사관은 카터에게 정중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1994년 6월15~18일 3박4일간 1차 방북을 통해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한 카터는 세계적인 평화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앞서 16일 ‘북핵 동결 합의’를 전격 발표하면서 클린턴과 사이가 불편해진 때문인지 18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하는 카터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나는 김일성 서거 당일 로마에 있었다. <시엔엔>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그때 북한 쪽에 “내가 당장 북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시엔엔>은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답변은 “북한에 오셔서 통곡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평양에 가지 않았다.
1994년 6월15~18일 첫 방북한 ‘북핵 특사’ 카터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전격적인 ‘북핵 동결’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한반도 전쟁 시계를 극적으로 멈추게 했다. 그 3주 뒤인 7월8일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과 12일간의 국장 소식은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 자료사진.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에 따라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해 10월21일 로버트 갈루치(왼쪽) 미 대북 특사와 강석주(오른쪽) 북 외무성 제1부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담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인이나 연구 학자의 사유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북한붕괴론’이 현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해서 유지된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자각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 붕괴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그런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정치체제가 붕괴되려면 국민의 지지가 철회되는 이른바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한체제의 정통성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경제가 어려워도 체제의 정통성 위기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셋째, 정치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쿠데타가 발생하려면 쿠데타 세력끼리 공유할 수 있는 비밀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나라이고, 또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밀정보를 매개로 쿠데타 활동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북한은 남한과 정통성 경쟁을 전개하면서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만일 남한이 없다면 북한은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남한을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주지하듯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동독과 북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서독과 남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며,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독과 동독은 모두 독일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위에서 예시한 요건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붕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1994년 6월18일 귀환한 카터(왼쪽)는 청와대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을 예방해 ‘김일성의 7월중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했다. 김 대통령은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으나 김일성이 사망하자 ‘3개월 이내 북한붕괴론’을 장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군정치를 군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선군정치가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회주의 우방국의 경제적 지원이 거의 끊어진 시절에,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강력하게 옥죄던 시절에, 요컨대 북한이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더 이상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이래 지금껏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은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무시한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북한 노동당에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연합뉴스북한에서는 인민 생활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군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농경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90%가 군인이었다. 동네마다 군인이 인민을 돕는 사무소도 있다. 인민의 집에서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군인 사무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고쳐준다. 군인들은 인민이 봉착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이 인민을 도와주면 인민은 자연히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모든 인민의 아들과 딸은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이 인민을 돕는 선군정치가 시행될수록 군인과 인민은 자연스럽게 일심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휴가 나온 군인은 곧바로 군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인은 자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은 전투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향 동네를 지키고, 그곳에 사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싸운다면 누구나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장에서 나오는 충성심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의 훈시였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8235.html#csidx269a40fae941b08b7d5a1f48925953d
Labels:
트라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