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등록 :2019-06-03 23:05수정 :2019-06-03 23:11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1981년 냉전 절정기 북한 첫 방문 나서
“북의 시각에서 주체사상 이해 필요”
애틀랜타공항 출발하기 직전 ‘공포’
세자녀 이름으로 생명보험 즉석 가입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에게 ‘부탁’
“북에 있는 동안 내 신변 확인해달라”
‘미친짓’ 알면서도 북행한 이유 ‘평화병’
“유년기 만주에서 겪은 두 가지 체험”
국공내전 학살·아편중독 주검에 ‘충격’
“만주 조선인들 중독자 없어 놀라워”
마오쩌둥 ‘100년 중국병’ 사형으로 근절
“한반도 평화 보장할 안보문화 혁신을”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나는 미국에서 50년 이상 사는 동안 지난 20년 사이 북한을 50회 넘게 다녀왔다. 미국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는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거리다. 따라서 나는 지구를 50회 이상 돌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광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대학교수 박봉을 쪼개서 다녀왔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1년 여름방학 때였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먼저 북한의 시각에서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미국에서 카터를 누르고 보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냉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또 한국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대립도 극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북한을 처음 방문하기 위해 애틀랜타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극심한 공포의 시간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자녀 몫으로 300만달러의 생명보험을 들었다. 또한 딘 러스크에게 내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나의 신변 안전을 계속 확인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러스크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역임한 뒤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의 국제법 교수로 와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조부모가 1910년대 일제 수탈을 피해 경상도 청도에서 만주로 이주해 정착한 하얼빈에서 1939년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0년대 만주국 시절 일본의 엽서에 실린 하얼빈의 차이나타운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왜 그랬을까? 제정신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진단해보면 ‘평화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평화병에 걸렸을까?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더듬어 보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만주의 참혹한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상도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나의 할아버지 3형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비옥한 땅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더 북쪽으로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뒤 나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합류했고, 1931년쯤 역시 경상도에서 떠나온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나는 1939년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두 살 아래 여동생보다 늦게 걸을 정도로 몸은 허약했지만, 두상은 상대적으로 커서 ‘가분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조선인 초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고, 일본 법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도 했다. 내가 다닌 조선인 초등학교는 교실이 딱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맨 앞줄에 1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2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3학년 학생이 앉는 방식이었다. 나는 입학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셋째 줄에 앉았다. 두 차례 월반했기 때문이다.
1980년 박한식 교수는 북한 첫 방문 때 조지아대 동교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에게 ‘신변 안전’을 부탁했다. 딘 러스크는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한 정보장교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다. <한국방송> 갈무리나는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던 만주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두 가지를 반복해서 목격했다. 하나는 ‘국공내전’에서 자행된 원시적 학살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편중독으로 죽은 중국인 주검이 곳곳에 야적된 장면이었다.
국공내전 시기 무기는 변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칼, 낫, 죽창 등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사람을 난도질해서 죽였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그 참혹한 광경은 어린 나의 눈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광경이 내 삶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비쳤다.
그 당시 만주 일대 조선인은 대부분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했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소작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 중국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70%였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1932~45년)을 세우면서 등장한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85%에 이르렀다. 그처럼 가혹한 수탈을 당한 조선인이 지주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제스(장개석)는 기본적으로 중국인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선택한 마오쩌둥은 ‘사유재산 철폐’를 역설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중국의 ‘인민’으로 대체시켰다. 즉 마오쩌둥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가난한 농민의 현실에 부응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로 수정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의 농민은 물론 만주의 조선인도 마오쩌둥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우리 친척 중에서도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가담할 정도였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수행한 임무는 ‘북·중의 특수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만주의 조선인을 우대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약 10만명의 ‘항미원조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 지원군에는 만주의 조선인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들이 참전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냄으로써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장남인 마오안잉도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국 전투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혔다. 요컨대 현재 중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를 정확하게 예증한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맞서 싸운 ‘국공내전’ 시기 만주 일대에서 정부군이 공산군을 체포해서 끌고 가고 있다. 박한식 교수가 어릴 적 하얼빈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장면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트럼프는 2017년 4월7일 시진핑과 미·중 정상회담을 한 뒤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말을 꺼낸 것은 북한 문제였다. 미국은 북한(핵·미사일)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 그러자 시 주석은 수천년간 맺어온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월21일 자신의 트위터에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중국은 북한의 엄청난 경제적 생명줄(economic lifeline)이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4월22일 성명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한·미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지상에서 침략해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면 즉시 군사적 개입에 나서겠다. 중국은 무력 수단을 통한 북한 정권의 전복과 한반도 통일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마지노선은 중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견지하겠다.”
1949년 10월 중국 인민혁명을 완수한 마오쩌둥(왼쪽)은 불과 몇개월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남 마오안잉(오른쪽)을 ‘지원병 1호’로 파견했다. 1950년 11월 미군의 폭격으로 28살에 전사한 마오안잉은 지금껏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 열사능원에 묻혀 ‘북-중 혈맹’의 상징으로 남았다. 사진 ‘차이나 워치’박근혜는 2015년 9월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다. 중국을 통해서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북·중 특수관계를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시진핑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제안조차 거부한 중국이 박근혜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박근혜는 중국에 서운해하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또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미군의 사드 배치까지 받아들였다. 박근혜의 ‘오판’이 낳은 정치적·역사적 유산은 2019년 현재까지 한반도에 가혹한 질곡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만주에 산재된 아편중독자의 주검은 나를 더욱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그때는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한 이후 약 100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애초 만주에는 영국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아편은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성인 남성 약 27%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때 중국의 인구가 약 6천만명이었으니 약 2천만명이 아편중독자였던 셈이다. 나는 아편도 총칼처럼 살상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더구나 아편은 총칼과 달리 중국의 민족정신까지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야만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주의 조선인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았다. 아편을 먹지 말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단속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현재 북한에도 아편이 없다. 이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2017년 4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트럼프(왼쪽)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주석의 첫번째 미·중 정상회담 때 만찬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이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한반도의 오랜 역사’를 들어 북핵 문제 개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직후 인터뷰에서 “그리고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 이런 말을 10분간 듣고보니 북한 문제를 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해 ‘속국 논란’을 빚었다. 사진 연합뉴스그런 중국의 아편중독을 근절시킨 인물이 마오쩌둥이었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한 뒤 등장한 쑨원 정권과 장제스 정권에서도 아편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의 민족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대단히 심각한 무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편을 팔다가 잡힌 중국인은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마오쩌둥은 외세와 결탁해서 밥 벌어먹는 중국인을 가장 천한 계급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런 계급의 대안으로 ‘인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철저히 반외세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인민이 ‘혁명 중국’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약 100년에 걸쳐 아편에 중독된 2천여만명의 중국 인민을 구제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해낸 것이다.
1981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박한식 교수는 자신이 ‘평화주의자’된 이유로 유년기 겪었던 중국인들의 아편중독 참상 영향을 꼽는다. 청나라 말기 19세기 중반 영국과 두 차례 아편전쟁 이래 100년간 만연했던 ‘아편굴’에서 중국인들이 마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주지하듯, 미국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나라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이 무기를 팔아서 천문학적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영국이 아편을 팔아서 부를 쌓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의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이 그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편이 소비국의 민족정신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무기 또한 수입국의 자체 국방능력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세계 최대 미국 무기 수입국의 하나라는 데 있다. 2015년 현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분석을 보면, 한국은 최근 5년간 미국 무기 수입 1위 국가에 올랐다. 미국을 ‘맹종’하고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한국의 안보정책 내지 ‘안보병’이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방산업체는 절대로 핵심기술을 한국에 이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은 작금의 안보정책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영원히 미국의 방산업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의 방산업체가 주축이 된 ‘딥 스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꾸준히 파괴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미국산 무기로 안보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안보 그 자체까지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무지막지한 무기를 동원해서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북한만 죽고 남한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재 미국 무기에 중독된 남한은 영국 아편에 중독되었던 중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만주의 조선인은 스스로 아편에 중독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정신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미국 무기에 중독된 사실 그 자체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력이 타락했다.
한국은 중국의 ‘아편중독 100년사’를 혁파한 마오쩌둥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 안보정책을 버리고,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문화를 창조하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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