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4

1903 박한식 [1]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등록 :2019-03-18 16:05수정 :2019-05-21 14:35

1970년대 중반 조지대아대 교수 시절
제자인 예비역 해군장교 하워드 버넬
카터와 해군사관학교 같은 반 ‘절친’
대선 나선 카터의 ‘국제정치 고문’으로

1976년 카터에 ‘주한미군 철수’ 제안
대선 공약 내걸자 박정희정권 ‘민감’
애틀란타 총영사에 ‘서울대 선배’ 배치

1994년 ‘전쟁막자’ 카터에 ‘방북’ 강권
‘퇴임 대통령 개입’ 거부하던 빌 클린턴
돌연 갈루치 북핵특사 카터 자택 보내
“클린턴 ‘최후통첩’ 김일성에 전해달라”
북한도 24시간 이내 공식 초청장 ‘화답’

정종욱 수석 전화 “카터 방북 막아달라”
‘불가’ 답하자 “서울 먼저 방문” 재요청


1994년 봄부터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박한식 교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평화 협상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카터는 6월15~18일 ‘첫 방북 드라마’를 펼쳐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해 6월17일 카터(왼쪽)와 김일성(오른쪽)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1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상“클린턴 ‘카터 평양행’ 돌연 승락하자 김영삼도 급선회했다”



1994년 봄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 준비를 거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고조되던 위기는 지미 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카터는 그해 6월 김일성과 만나서 북한 핵개발 동결 약속을 받아냈고, 그 약속의 내용을 곧바로 <시엔엔>(CNN)을 통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면 그때 퇴임한 지 10년도 지난 전 대통령 카터가 갑자기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주역으로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카터는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뒤 1982년 ‘인류의 평화를 유지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희망을 북돋는다’(waging peace, fighting disease, building hope)는 목적을 내걸고 카터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센터의 설립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카터가 대통령 재임 때보다도 퇴임 이후 더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카터는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미국도 남한의 전술 핵무기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카터의 그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그의 북한 방문을 적극 권했다. 카터도 나의 제안에 적극 호응해서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다.

얘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내가 카터를 알게 된 배경을 되도록 상세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카터와 나의 독특한 인연이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의 조지아대 대학원 제자인 하워드 버넬은 카터와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 동기로, 76년 대선 출마한 카터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을 맡아 두 사람을 연결해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카터는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46년 장교로 임관했다. 사진은 해사 졸업식에서 예비아내 로잘린(왼쪽)과 함께 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한 동네 이웃 사이로 만나 46년 결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나와 카터를 이어진 친구는 하워드 버넬이었다. 버넬은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30여년동안 해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제대한 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지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지도 학생이 된 것이다. 버넬은 자신의 부친이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카터와 버넬이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같은 반 친구로서 대단히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버넬이 나의 지도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 카터는 조지아주 주지사를 마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터는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버넬을 자신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으로 채용했다. 그러니 내가 그 고문의 스승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카터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카터에게 많은 국제정치학적 조언을 해주었고, 카터 역시 지금까지 내 얘기를 경청해 주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해외주둔 미군철수 문제였다. 나는 논문을 작성해서 해외 미군의 철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해외에서 장기간 주둔할수록 반미감정이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카터에게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 미군 철수정책을 조언했고 카터는 공약으로 채택해 당선됐다. 1979년 6월29일 방한한 카터(오른쪽)는 박정희(왼쪽) 대통령에게 실제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카터의 미군철수 정책은 미국에서 막대한 돈줄을 쥐고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돈줄이 차단된 카터는 결국 1980년 대통령 재선에서 실패했다. 나 역시 카터의 재선 실패에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 그래서 카터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 카터는 나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서 자신이 받아들였으니 미군철수는 자신의 정책이라면서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1976년 첫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때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자 한국 정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보로 재직했던 함병춘은 카터와 “딱 붙어있는” 한국인 젊은 교수를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카터가 아직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76년 12월 애틀랜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최초로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서울대 ‘까마득한’ 선배(오명호?)를 총영사로 보냈다. 아마도 나를 감시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놀란 박정희는 1976년 12월 북미에서 가장 먼저 애틀란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열고 박한식 교수의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인 오명호를 초대 총영사로 보냈다. 사진 주애틀란타 총영사관 제공이제 내가 카터와 함께 1994년 북핵문제 해결에 관여한 얘기를 계속해 보기로 한다. 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북핵 위기를 지켜보면서 기존의 연구 주제를 미뤄둔 채 한반도 전쟁 저지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일찌기 유년기에 직접 체험했던 한국전쟁의 참상이 한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터에게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직접 만나달라고 강권했다. 카터의 방북을 통해서 북미간의 경색된 대화 채널이 재개되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카터 역시 나의 제안에 공감하고 방북을 희망했지만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의 방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볼 때 북핵문제는 현직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지 퇴임한 카터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을 방문했다. 플레인스는 공항이 없는 변두리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곳은 애틀란타에서 자동차 타고 5시간 정도 가야만 겨우 도달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런데도 갈루치가 집까지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은 카터에게 전달할 클린턴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94년 6월초 카터의 ‘방북특사’ 제안을 전격 수용한 클린턴 대통령은 로버트 갈루치 북핵특사를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사진)으로 보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그뒤 카터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클린턴이 방북을 허락했으니 수속을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터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클린턴의 ‘최후통첩’(ultimatum)을 김일성에게 전달하는 것이 방북 목적이라고 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또한 카터는 북한의 공식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나는 영문 초청장 초안을 작성해서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에서는 24시간 내에 내가 잡아준 초안에 따라 초청장을 완성해서 나에게 팩스로 보내주었다. 한밤중이었다. 나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교 연구실 팩스가 아니라 우리집 지하실에 있는 팩스로 받았다. 나는 곧바로 카터에게 전달했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카터에게 전화해서 초청장 수령을 확인했다.

카터는 방북 수속을 밟는 와중에서 나에게 북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북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니까 북한에 함께 가면서 자신이 꼭 알아야 할 사항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카터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또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럼 북한에 가서 카터 옆에 앉아야 할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완용’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김일성 옆에 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 그런 고민을 밤새도록 하다가 결국 방북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대신 약 40쪽 분량의 북한 브리핑 자료를 작성해서 카터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워낙 몸이 약해서 밤을 지새우면서 작업하는 일은 평생토록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터에게 제공할 브리핑 자료만은 밤을 지새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성했다. 카터의 치밀한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그 자료를 거의 암기하고서 북한에 들어갔을 것이다.



1994년 6월15일 ‘방북 특사’ 카터는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으로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남쪽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카터(맨왼쪽)를 동행할 보인 로잘린(오른쪽 둘째)과 제임스 레이니(맨오른쪽) 주한 미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카터가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즈음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종욱과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동창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카터의 방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카터와 가까이 지내는 내가 카터의 방북을 막아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카터를 태운 비행기가 이미 떠났다고 답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계획을 수정해서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카터가 평양에 앞서 서울을 먼저 방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면 청와대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해 달라고 그랬다. 나는 청와대의 제안을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카터는 타고간 비행기로 평양에 직행하는 대신, 서울에서 도보로 38선을 건너서 북한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카터는 한국·북한·미국의 양해를 얻어 자기의 뜻을 실현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집필/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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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42.html#csidx0cd37006dbd017da96f2a3c3a87c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