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Sejin Pak - [마음공부][용서] 나치 의사 조셉 멩겔레를 용서하다 - Forgiving Dr. Mengele...

Sejin Pak - [마음공부][용서] 나치 의사 조셉 멩겔레를 용서하다 - Forgiving Dr. Mengele...

[마음공부][용서] 나치 의사 조셉 멩겔레를 용서하다 -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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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글을 읽고 한일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 혼자 읽기가 아까와 구글번역의 도움을 받고 수정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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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10 살 때 Eva Mozes Kor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Miriam은 Auschwitz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Josef Mengele 박사는 두 명의 소녀를 다른 쌍둥이와 함께 의료 실험에 사용했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Mozes Kor는 인디애나 주 테레 호트에 CANDLES 홀로 코스트 박물관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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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 Mozes Kor의 글
열한 번째 생일 4 일 전인 194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는 소련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나는 가족을 찾기위해 루마니아의 마을로 돌아 왔는데, Miriam 이외는 내 가족 중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 음을 발견했다.
Miriam과 Auschwitz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까지 40 년이 지나야 했다. 그녀는 1993 년 Mengele의 실험의 장기적인 영향으로 사망했다. 그 해에 나는 보스턴의 일부 의사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초대되었고, 나치 의사를 데려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한때 다큐멘터리에서 Mengele을 알고있는 아우슈비츠 (Auschwitz)의 한스 뮌헨 박사 (Dr. Hans Münch)가 출연 한 것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 요청이 미친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비디오 녹화 인터뷰를 위해 나와 만나기에 동의했다. 이 나치 의사를 만나러가는 길에 나는 무서웠지만,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를 최대한의 존중을 가지고 대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스실을 보았는지 물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다루는 악몽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치도 악몽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고, 가스실의 폐허에서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나와 함께아우슈비츠에 와줄 것인지 물었다. 그는 동의했다.
나는 Münch 박사에게 의미있는 감사의 선물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몇 달 동안 상점과 마음을 조사했다. 그런 다음 <용서 편지>에 대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뮌헨 박사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선물이되었다. 나는 내가 희망이 없고 힘없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에게 내 철자를 확인하도록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Mengele도 용서 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 나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권리였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199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 해방 50 주년에, 나는 뮌헨과 Dr. Münch와 그의 아이들과 손자 옆에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 폐허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용서 문서를 읽고 서명하는 동안 Münch 박사는 가스실 작동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렇게하면서 나는 고통의 짐을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증오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
내가 나치를 용서 한 날, 나는 또한 부모님을 개인적으로 용서했다. 나는 아이들을 아슈비츠에서 구하지 못한 부모님을 평생 미워 했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보호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미워한 것을 용서했다.
나는 모든 인간이 과거의 고통없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회는 복수를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에 큰 장애물이 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해야하지만,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과 분노로 살기를 원하는지 항상 궁금하다다. 일부 생존자들은 고통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용서는 화학 요법만큼이나 개인적이다 – 나는 나를 위해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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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8

Nobuya Fukuda - 週に一回以上は講座もしくは勉強会に足を運んでいて、どれもすごく勉強になるんですが、バタバタしているせい...

Nobuya Fukuda - 週に一回以上は講座もしくは勉強会に足を運んでいて、どれもすごく勉強になるんですが、バタバタしているせい...



週に一回以上は講座もしくは勉強会に足を運んでいて、どれもすごく勉強になるんですが、バタバタしているせいで、なかなかシェアできなくて、でも、つい最近参加した、浦添市主催(受託団体:NPO法人 おきなわCAP)の「ひとり親家庭の現状と必要な支援」は、自分とも関わりが深い社会的課題だったこともあって、ぜひ、多くの人にシングマザー/シングルファーザーが置かれている状況について知っていただきたいなあと、話を聞きながら取った走り書きをシェアさせていただきます。
プライバシーを守るため講演された方の名前は伏せさせていただきますが、お母さんも、娘さんもとってもとても最高に素敵な方でした。
印象的だったのは、「たとえ性産業で働いているとしても、母親の労働条件労働環境が良くなるような施策が必要」という趣旨の発言。困り感、行きづらさが少しでも改善するために支援はある。そういうことですよね。
それにしても、基本形から外れた存在に対して、冷たすぎる社会ってほんとになんとかしたいですね。普通と違うもの、マイノリティ、風変わりな人、個性的すぎる人。すべての人がその人らしく生きられるようになれば、いろんな問題が解決するのにね。

※写真はイメージです。
以下、「走り書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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ひとり親家庭の現状と必要な支援
〜シングルマザーと子供の声から考える〜
●しんぐるまざあず沖縄の取り組み
1 議会陳情
1–1)未婚シングルの困難さの解消
1-2)寡婦控除が認められていない
  保育料寡婦控除適用
  所得税公営住宅家賃2)公営団地の保証人
1-3)児童扶養手当の毎月支給 
2 頑張らないでいいよキャンペーン
2-1)おしゃべり会開催
2-2)メンタルケア講座、エンパワーメント講座
ーーーーーーー
●達成したこと
みなし寡婦控除ーーーR2から子供のいるシングルは未婚も同じ扱いになる
ーーーーーーー
●課題
1)「しんどい、助けてほしい」と言えない状況
シングルに冷たい日本社会
 シングルマザー:低賃金+母親だから当たり前というプレッシャー
 シングルファーザー:社会的に孤立しやすい(男が子育てすることへの理解を職場等で得られない)
2)子育て支援が脆弱
 土曜日は自分のために使える日なのに、土曜保育少ない
  母親がリラックスできない、リフレッシュできないーー美容院に行く時間、ショッピングなどをする時間がない(子育てと仕事に忙殺されている日々)
3)行政との距離 
・現況届(8月)の際に窓口ハラスメント(毎年のこと)
  事実婚チェック、不正受給チェックなど、窓口でのヒアリングが原因の傷つき〜妊娠のことも根掘り葉掘り聞かれることがある
・ワンストップ相談窓口が少ない
  〜役所に相談に行きたくなくなる
・面会交流の問題
 共同親権の誤った議論がなされている
 面会交流を支援する事業がない(相談のみ)
 葛藤がある中で中で安全・安心に面会を許せるような支援、苦しまないで済む支援がない
・養育費の問題
 ・債権執行が変わった。裁判所が動き回収が容易になる
 ・立替払いの動きが自治体によってはある。国も動いている。
・児童扶養手当の所得制限緩和
  満額を受給するには年収160万未満という制限がある
4)子育て支援
・若年出産した母子が安心かつ肯定感を持って過ごせる場所(スタッフのいるシェアハウスなどでゆるく支援)が必要
・夜の仕事の時に安心して預けられる場所、支援
・安全して働ける場所(たとえ風俗であったとしても・・・性産業での労働であっても支援必要)
ーーーーーーー
●今後10年の目標
1)学校
・学校が居場所になる(放課後、夏休みーーー食堂機能、遊び場)
・給食無償化、副教材・制服の無償化(所得制限なしで)
2)行政
・生活保護世帯の車使用許可(保険加入も)
・申請主義をやめる(希望したら基本適用、攻めtオンライン申請認める
・生活支援の充実(家事一般、子どもの送迎を廉価で)
3)犠牲
・従業員の子育て支援を義務化
行事の参加、病気への対応(子どもの病気休暇)
 
ーーーーーーーー
●母子家庭で育った子の話
現在海外の大学に留学中
母はしっかり者で人に頼らないタイプ
0歳から保育園、お迎えは最後から一二番目
友達とどっちが早いか「競争」
小学校は学童ーー何もない狭い場所で辞めたかった
派が出張でいないときはヘルパーか友人の家に宿泊ーー誕生日もひいとりで過ごしたことがある。
会うヘルパーと合わないヘルパーがいたーー合わないときは駄々こねてた。今思えなわがまま・自己中だと思う。
合わないヘルパーについては良い思い出ではない
気が合うヘルパーは母以外に気を許せる関係、いろいろ話しちゃう。口止めするけど母に話される
小学校高学年から塾。お迎え比べ
中学時代はみんなに合わせる時期
 親友もいたけど、広く浅くの付き合いをしていた。
 ヤンキーの友達もいたけど、そっちにはいかなかった。
年長から卵焼きを作れた、適応力がついた。
どこでも楽しく過ごせた。
その一方で何かを「嫌!」と思う気持ちも強かった
那覇高校、「あすのば」という団体の夏合宿東京〜いろんな家庭でそだあった人がいた(普通の家庭から虐待親の家庭まで)話したいことを話せた。(なんでも話せるという状況設定だったから話せた)
https://www.usnova.org/about/
その時に初めて子ども時代からの話をした。虐待体験など他人の苦しい話を聞いて衝撃だった。
みんなに出会ったことでいつでもなんでも話せる相手が見つかった。
その関係は今でも続いてる。
この体験があったおかげで自分は人前で話せるようになった。 
海外の大学に行ったのは。広い世界を知りたかったから。母と子の世界、沖縄の世界しか知らなかった。親元から離れたい。一時は言い争いがすごかった。今はいい時間を過ごせるように努力をし合っている。
母は関西出身で怒ると怖い。正論を言う。言いくるめられる。途中からもういいやと諦める。考えて、趣味レーションしても言い負かされる。思いををちゃんと伝えられない。嫌だな。離れたい。消えた今では思わないけど。他の家庭の母は許してくれることをうちの母は許しいてくれないのはなぜ?
反抗期で、二人っきりは大変。
仕事は辞めれるけど、母業は辞められない。しんどいんだあろうなあ。休みの日に自分のことおをできないって大変だあろうな。自分だったら、好きなことができるから頑張れてるのに、鬱になるんだろうな。
母は長女、自分はひとりっこ。お互いに甘える相手、相談する相手がいなかった。二人を知らない支援者がいたらよかった。
片方にしか繋がっていない支援者がいたらよかった。学校の先生に相談すると母に話が行ってしまう。
「ここが辛かった、きつかった」という思いはない。
自分んがきついことはあっても、家自体がきついと言うことはなかった。
それは母のおかげ。
母は仕事があったから団地を待機する必要もなかった。
自分には結婚願望がない。母子の友達もそう言う子がいる。生まれた時から父がいない。
いないのがデフォルト。両親の家庭の周りからは夫「夫婦喧嘩すごいし、いつ別れるかわからない」と聞いてる。結婚に良い印象がない。子育てはしたい、。そう思うのは育ちのせいだと思う。
母はお父さんの役割もやっていたお母さんとお父さんが合体した人だった。
DSを買ってもらえなかったのは残念だったけど、父の日に羨ましいと思ったことはなかった。
ーーーー
●会場からの質問
Q(シングル家庭の預かりをやってる方)
 月水金、火木土で20人ずつ預かってる。
 印象は自分たち(預かりのスタッフ)の前だとわがまま。
 自分たち(預かりのスタッフ)の前だとわがままで、 お母さんの前では「ごめんね」とすぐ謝る。なぜだろうか?
娘)
好きな人だから、自分をさらけ出せるからでは? 
母) 
頼れる親(他人)がいない母は子に厳しい。人前ほど厳しいのは、自分への評価(あそこは母子家庭だからという評価)を気にしているから。
 子供が声を泣き叫ぶと虐待だと思われるんじゃないかと言う不安に苛まれている
→お母さんを緩めてあげる支援が必要
どんな仕事につきたいかはわからないが、仮に支援する仕事についたら、子どもと接する時に何を大切にするか?
娘)
好き嫌いはある、合う合わないもある、
子供の気持ちを尊重する、追いかけない、選ばせる
湯後施設の小一生とバディを組んだ。
嫌われた、でも何度かどかきてくれた。
男子学生を慕っていた。
ーーーーーーー
●まとめ
シングルだけでなくそうでない母も生きづらさをある。女性の問題。
そして母だけではなく、父も生きづらさを抱えている。まだまだ支援の形は出来上がっていない。
参考:しんぐるまざあず・ふぉーらむ沖縄
https://www.facebook.com/smf.okinawa/

반기련 -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반기련 -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



오늘 나이지리아 개독녀가 나에게 한 행동을 보고 이상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

글쓴이 : 노라줘 (211.♡.95.188) 날짜 : 2007-10-24 (수) 00:02 조회 : 1825 추천 : 0 비추천 : 0

나이지리아 개독녀란 무슨뜻인지요? 나이지리아에서 일하는 한국사람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일하는 나이지리아 사람인지?

그리고 불교에서 보는 궁합???? 이거 정말 잘못알고 계시는군요. 궁합은 동양학 중 음양오행으로 쾌를 맞춰 보는 학문 으로서 불교와는 아무런 아무런 상관도 관련도 없는 것으로서 유교에서 많이 행해지던 것들이며 유학사상에서 나온 것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易 이라는 것인데 역하면 공자를 떠올리면 되죠.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일부 사찰에서 하는것은 옛부터 민간에

내려온 것을 방편삼아 하는 것이며 혹여 불교간판 걸어놓고 혹은 사찰에서 사주를 전문으로 한다면 이곳은 불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곳으로서 장사행위하는 곳입니다. 설령 머리깍고 승복입고 있다 할지라도 전문적으로 사주궁합 봐주고 돈 받는 곳은

실제로는 사찰이 아니고 철학관인데 영업적 이익을 위해 가짜 사찰형태를 띄고 있거나 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 보면 되겠습

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님한테만 그 나이지리아 개독녀가 시비걸고 딴지걸고 테클건더고 하셨는데 혹시 님을 관심있어하는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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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목사, 무장괴한 손에 순교해

글쓴이 : 위니스… 날짜 : 2013-08-08 (목) 03:48 조회 : 746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나이지리아 목사, 무장괴한 손에 순교해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독교 교회와 교인에 대한 테러 공격이 급증






죽음의 위협 속에도 결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나이지리아 목회자가 순교했다.

그의 '숭고한 신앙'이 알려지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지금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들의 희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있다.

미국 오픈도어즈는 지난 31일 미국 오순절파 계열의 교계 전문지 카리스마 뉴스(Charisma News)를 통해 파예 파마 무사(Faye Pama Musa) 목사의 순교를 알리고, 그의 불굴의 믿음을 기렸다.

나이지리아기독교협회(CAN) 사무총장으로 섬기고 있던 무사 목사는 올해 5월 중순, 자택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오픈도어즈는 무사 목사의 가족을 방문해 위로를 전하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들었다.

공격이 일어난 날 무사 목사는 아내인 머씨(Mercy)와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무장한 괴한들이 울타리를 넘어 집으로 침범한 것은 그 때였다.

위험을 느낀 무사 목사는 가족들과 함께 뒷문으로 도망을 쳤지만, 곧 괴한들에게 잡혀 현관까지 끌려나왔다. 그들은 무사 목사에게 "오늘 너는 우리 손에 죽을 것이다. 너의 신(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구해 보라"고 위협하며,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무사 목사는 이 같은 생명의 위협에도 “나는 결코 내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며 굴하지 않았고, 침입자의 계속되는 강요에도 그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이들은 주저 없이 그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렇게 무사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무사 목사의 가족들은 그가 살해되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고, 그들에게 그 모습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무사 목사는 지역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무슬림들에게도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한 저명한 무슬림 정부 관리는 "무사 목사는 평화의 사절이었으며, 이 사회의 축복이자 훌륭한 자산과도 같은 사람이었다"고 애도하기도 했다.

오픈도어즈는 향후 무사 목사의 가족들을 지원하고 특히 그의 네 자녀인 위너(Winner), 자이온(Zion), 프레이즈(Praise), 미라클(Miracle)이 학업을 지속해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할 예정이다.

어머니인 머씨는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했던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베풀어준 것에 감사한다”고 오픈도어즈에 전했고, 오픈도어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무사 목사의 가족들을 위로하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오픈도어즈에 따르면, 무사 목사를 살해한 자들은 현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보코하람(Boko Haram) 소속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코하람은 2010년부터 1,6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 왔으며, 이들 희생자 가운데 대부분은 기독교인으로 밝혀졌다.

최근 들어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독교 교회와 교인에 대한 테러 공격이 급증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보코하람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오픈도어즈가 매년 선정하는 종교박해 위험 국가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려 왔다. (출처:기독일보)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42:10-11)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5:4)

사랑하는 주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대적의 위협 앞에 믿음으로 승리한 소식을 듣습니다. 또한 사모님과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선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비하듯 나이지리아 땅에 뿌려지는 순교의 피는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때에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합니다. 생명 다한 순종은 반드시 세상을 이기고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와 온 열방을 덮기에도 충분함을 선포합니다.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보코하람도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 전진케 하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고난 중에 주를 기뻐하고 슬픔 중에 주를 더욱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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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 가스펠투데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 가스펠투데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 나이지리아 기독교 협회 회장 납치 후 살해

정성경 기자
승인 2020.01.2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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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코 하람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 출처 보코 하람이 공개한 동영상 갈무리

한국 VOM(Voice of the Martyrs Korea)은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이 지난 20일 나이지리아 기독교협회 회장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장단체 보코하람은 지난 3일과 6일 두 차례기독교인들을 급습, 아다마와(Adamawa)주 나이지리아 기독교협회 회장라완 안디미(Lawan Andimi)목사와 다른 목사 한 명, 교인 40명을 납치했다. 보코 하람은 이어 몸값을 받아낼 목적으로 동영상을 공개, 포로로 잡힌 라완 안디미 목사의 모습을 공개했다. 하지만 원하는 몸값을 받아내지 못하자 보코 하람은 지난 20일, 이 사건을 추적 조사한 나이지리아 기자 한 명에게 자신들이 안디미 목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 VOM 현숙 폴리 대표는 "“보코 하람은 테러 활동의일환으로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동영상 속 안디미 목사의 큰믿음을 증언하는 증거 역할을했다"고 말했다. 폴리 대표는 “동영상에서 안디미 목사는 매우 평온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울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보코 하람이 공개한 안디미 목사 영상 링크 (한국어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sIo8A5I6CP4

보코 하람은 지난 3일, 아다마와주 미치카(Michika) 지역을 급습해 안디미 목사를 납치했다. 보도에 따르면,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여러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마을에 들어와 약탈한 뒤에 안디미 목사를 트럭에 태워 데려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보코하람은 6일 이른아침에 카두나(Kaduna)주 카사야(Kasaya) 마을을 급습해 조슈아 사마일라(Joshua Samaila) 목사와 교인 40명을 납치했다.

현숙 폴리대표는 "최근 보코 하람이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사례들이 나이지리아에서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 해 성탄절, 보코 하람은 기독교인 10명을 참수하고 무슬림 1명을 총살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성탄절 다음 날에는 결혼식을 하러가는 신부 일행을 공격해 신부와 하객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에 현숙폴리 대표는 “보코 하람이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있지만,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린다. 기독교인에 대한 테러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우리는 핍박받는 기독교인을 지지하고 지원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고 말했다.

한국 VOM은 2월에 나갈 소식지에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보도할 예정이다.
Tag#나이지리아#보코하람#기독교인납치살해#테러#폭력#핍박받는기독교인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 - 크리스찬저널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 - 크리스찬저널

인질 영상을 간증으로 바꾼 목사 참수돼보코 하람, 간증으로 신자들을 격려한 나이지리아 목사를 참수해
크리스찬저널 | webmaster@kcjlogos.org

승인 2020.01.23 05:23:52






간증으로 많은 이들을 격려했던 나이지리아 목사의 인질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공유했던 기자에 따르면, 이슬람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은 그 목사를 참수했다.


“이런 소식을 알리는 건 충격적일 수 있다. 나는 20일 보코 하람에 의해 처형된 라완 안디미 목사와 함께 싸우는 중이다.”라는 글을 아흐마드 살키다가 21일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안디미 목사는 교회 지도자이자 자녀들과 그가 섬긴 신자들의 아버지였다.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라완 안디미 목사는 어제 오후 참수되었다.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오후에 입수했다.”면서, 살키다는 “가족과 경찰, 교회 신자들은 오늘 아침 이 소식이 보도되기 전에 이미 알았을 것이라 확신한다.”는 글을 올렸다.


안디미가 소속된 교단인 나이지리아형제교회(EYN) 역시 목사의 죽음을 공식 인정했다.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안디미 목사의 죽음에 관해 EYN 사무총장 다니엘 응바야와 대화를 나눈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의 기드온 파라-말람 아프리카 대사는 “나이지리아에서 종교적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에 상처를 입혔지만 우리는 죄절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이지리아기독교협회(CAN)은 사흘간의 기도와 금식을 선포하고, 안디미에 대한 “잔인한 살해”를 비난하고 나이지리아 정부에게는 수치라고 말했다. CAN의 법무를 담당하고 있는 쿠암쿠르 새뮤얼 본딥은 “교회는 안디미 목사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가능한 일을 다 했지만, 군사력이 없기에 구출할 수 없었다.”며, ”납치와 강탈, 크리스천 및 나이지리아 양민 살해가 멈추지 않는 것은 정부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CAN은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에게 “침착할 것”과 무하마두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무장 단체를 없애는 노력으로 생명과 재산의 파괴 종식을 촉구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나이지리아에서 테러리즘의 배후를 밝혀내고, 범죄로부터 나이지리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의 보호와 우리 주 그리스도의 힘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다”면서, 본딥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테러리스트와 배후의 위험한 행동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곧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생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가장 고귀한 선물로 여긴다.”면서, 세계기독연대(CSW)의 머빈 토마스 회장은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평온을 유지했던 용감한 남자를 애도한다. 그의 깊은 신앙은 후세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CSW는 최근 풀려난 인질이 인내심으로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의 영감을 준 십대 소녀 리아 샤리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오픈도어선교회가 발표한 ‘2020 세계 기독교 박해 보고서’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파키스탄에 이어 두 번째로 폭력적인 국가이며 50개 박해국가 리스트에서 12위를 차지했다. 보고서의 조사 기간인 2018년 11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1,350명의 나이지리아 크리스천들이 목숨을 잃었고, 224명이 납치되었다.


“안디미 목사의 죽음은 순교이다. 그는 기독교 영웅이다.”라며, 파라-말람은 “순교의 피는 망가진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복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인질 동영상은 1월 13일 보코 하람에 의해 공개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와 자녀, 동료들과 함께 있다.”면서, 아다마와 주 나이지리아형제교회의 라완 안디미 목사는 “만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내하고 울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아디미 목사가 사는 동네는 1월 2일 밤 무장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주민들은 숲과 언덕으로 달아났지만, 아디미 목사 가족은 납치되었다.


보코 하람의 무장 대원 숫자를 5천 명이라는 추산도 있지만,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납치돼 군사 훈련을 받은 남자아동 1만여 명이 포함된 숫자는 아니다. 보코 하람은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무장 단체 중 하나이다. 2009년 이래 이들은 아니지리아 주민 3만 명을 살해하고, 2백만 명을 집에서 쫓아냈다.(크리스채니티 투데이 1월 22일 기사 요약 번역)


[일본의 정치사회] 전쟁 반대를 외첬던 그 많은 일본의 리버럴들은 지금 뭘하고 있나?


Sejin Pak
8 February 2018 at 23:01 · Adelaide ·



[일본의 정치사회] 전쟁 반대를 외첬던 그 많은 일본의 리버럴들은 지금 뭘하고 있나?
- 어느 일본인 변호사의 한탄
-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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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전쟁 반대는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눈앞에 있는 전쟁에는 반대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 "(일본의 2차대전) 전같은 파시즘"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이었을까. 나는 한국 전쟁에 일본 자위대가 관련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한미 군사 훈련이라는 이름의 도발 행위에도 반대한다. 배타주의적 내셔널리즘 캠페인과 북한 위협 캠페인은 알지만, 그래도 전쟁 반대는 전쟁 반대 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침묵,신경 꺼,컨디션이 안좋와, 라는 느낌으로, 우선 태도를 결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란 역시 사기인 것일까.

라디칼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전쟁하려 하는 자기 나라 정부는 타도하자는 것, 그것이 반전한다는 입장이다.

"리버럴"이라는 사람들의 내셔널리즘과의 지긋 지긋한 관계에는 질렸다. 그 애매한 느낌이 천황제를 긍정하고, 자위대를 긍정하고, 그리고 결국은 전쟁을 긍정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외롭다. 유보없이 전쟁을 반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뭐, 그만큼 시험하는 시대 인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날마다 시험 당하고 있다. 권력에 저항하지 말라는 압력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싫다"라며 과호흡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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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人は今?=「リベラルな人」は今?|御苑のベンゴシ 森川文人のブログ

 曖昧な戦争反対は、言えても、具体的な、目の前にある戦争反対は言えないものかも・・・。
 ・・・「戦前」化というのはそう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私は、朝鮮戦争に日本の自衛隊が絡むことには反対ですし、米韓の軍事演習という名の挑発行為にも反対です。
 排外主義的ナショナリズム・キャンペーンや北朝鮮脅威キャンペーンはわかりますが、それでも、戦争反対は戦争反対なのでは?と思います。
 沈黙・スルー・「調子わりい」なんて感じで、とりあえず態度決定しない「リベラル」ってインチキなんだろうなあ、やっぱり。
 ラディカルを自負する私は、戦争に進むもうとする自国政府を打倒しよう、それが反戦という立場です。
 「リベラル」な人のナショナリズムとの腐れ縁にはあきれます。その曖昧にな感じが、天皇制を肯定し、自衛隊を肯定し、そして、結局は、戦争を肯定してしまうのでしょう。
 寂しいな、と感じます。留保なしに戦争反対をいえない人たちを。まあ、それだけ、試される時代なのでしょう。もちろん、私も日々試されています。長い物には巻かれろ、という同調圧力がどんどん増してきていますから。「僕はいやだ」っと過呼吸にならずに言えるかしら・・・。]
https://ameblo.jp/mfb1991/entry-12350702182.html




4Park Yuha, 李昇燁 and 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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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박선생님,
일본에서 리버럴이란 진보를 말합니다. 자신을 래디컬이라 허는 이사람은 급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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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그리고 리버럴도 전쟁 반대 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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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네, 그건 아는데 이 분은 일본의 리버럴은 추상적인 전쟁 반대는 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전쟁, 아마도 일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대가 아닌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다른 글 들을 더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만, 일본의 리버럴의 북한관 (스펙트럼이 일 것 이라 하나로 말하기는 힘들지만)에 관해서는 저도 불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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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Sejin Pak
자유주의라고 번역 하셨기에 드린 말씀이었어요.
그 부분은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아베를 비판하지않는 리버럴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전쟁이 났을경우 어떻게 할지를 너무 강조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도 어려운 문제죠.…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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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저역시 전쟁 반대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묶는 이사람의 사고는 아주 안이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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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시간이 있으면 더 읽어보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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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Sejin Pak 진보/보수/래디컬의 구분자체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도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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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이 분의 페북을 드려다 보니, 박노자 교수 정도의 시각을 가지고 있군요. 일본의 리버랄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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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이남곡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


Namgok Lee
7 hrs ·



AI(인공지능)ㆍ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인간 정체성에 대한 미증유의 혼란과 도전을 가져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자신이 가진 감각과 판단(정보에 대한 선택)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혼란과 도전이 축의 시대 선구자들의 '인간 정체성'을 흔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특히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가진 두 분야의 괴리가 폭발적으로 커져서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 능력은 전인미답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데, 그것을 개발하는 인류의 관념체계(가치체계)는 아집과 소유 ㆍ자기중심적 개별관에 아직도 갇혀 있다.

그것은 물질 ㆍ과학 기술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ㆍ제도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특히 현대자본주의와 생태기후위기의 모순 속에서 물어지는 것이다.

결국 진보의 핵심과제는 인간 자체가 갖는 그 능력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은 소유와 아집에 갇혀 있으면서 사회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허위의식'은 더 이상 진보라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생태파괴문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소유와 아집 그리고 개별관에 갇혀 있는 인간의 관념을 정상화하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능력은 멈춰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가르는 것은 우리 인류가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이 밝히고 실천한 그 인간정체성을 보편화 ㆍ현실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혁명이라고 불리워왔던 것들과는 질이 다른 혁명(이것을 개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이 요구되고 있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진행 속도가 과학기술능력의 발달 속도에 못미치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인간 자체의 질적 진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최대의 낙관론이다. ㅎㅎ

변화가 도둑처럼 온다는 말도 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나타내는 말로도 들린다.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by Ted Lewis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by Ted Lewis




Restorative Justice
Returning Good for Evil
Ted Lewis
AUGUST 22, 2016

A simple question was put to the two young men who burned down the church: “Why did you do this to us?”

There was a long pause, and the question sat heavily in the room. The victims, a group of eight adults from the Scandia Lutheran Church in Barron County, Wisconsin, needed to make better sense of the situation. Some of them had belonged to this farmland church their entire lives, having been baptized there as infants. And now there was nothing left; the building had been reduced to ashes. The meeting was therefore happening in another rural church nearby.

The offenders began to go deeper into their own stories in hopes of giving a better answer to the victims’ question. The older one spoke of his recent tour of duty as a soldier in Iraq, how he struggled with what he saw there, and how on returning he blew his “award” money by living it up, only to regress into a drug habit that needed to be financially sustained. This led to desperate acts of stealing metal, such as copper, that could be traded for money. He, with his younger accomplice, had burglarized over ten locations. This story hit home for one of the victims, who shared the tragic story of his nephew who committed suicide after returning from Iraq.

The younger offender, recently out of high school, spoke of how he had been picked on at school for his minority ethnic status. He openly talked about the frustration and pent-up anger that brewed within him, often resulting from times when school staff treated him as the primary troublemaker. He eventually developed a habit of destroying property, as he did with the furniture in the sanctuary before a smoldering candle later set nearby items aflame. Wrecking things in the burglarized locations was his way of venting his feelings on a community that failed to show the care and support he sought.

On hearing these stories, one of the victims, speaking for the rest, replied with a genuine “thank you.” There was a palpable feeling of relief in the room. The offenders had previously expressed their remorse and apology, but when the victims received a fuller account of what motivated the misbehaviors, it helped them make better sense out of a seemingly senseless situation. And then one of the victims talked about her desire and choice to forgive the offenders since forgiveness was something they all recited every Sunday in the liturgy. When the offenders heard the victims say, “We want to forgive you,” it truly took them by surprise. It was the last thing they expected to hear.

As the main facilitator for this case, I noted how the entire dialogue process moved from an awkward tension at the beginning to a more relaxed state of conversation toward the end. This shifting of energies is nothing new for restorative justice practitioners to witness. In fact, the very model of bringing parties together for safe, constructive dialogue is designed to foster this sort of shift. Without such a shift that relaxes participants and even dispels mistrust and hard feelings, it is very difficult for people to move on well and experience greater peace. And it remains next to impossible for the group to focus on working out future reparations consensually. When the restorative justice process offers no genuine shift, people remain captive to the past.

Through my years working with victims and offenders, I have developed a passion for chronicling stories of deep resolution. There is something very powerful about people moving from a place of complete separation to a place where they shake hands or even hug each other at the end. I also enjoy finding connection points between this work and biblical narratives. In a concrete way, this work has allowed me to put my faith into practice. This is largely due to the many parallels between person-to-person reconciliation and divine-human reconciliation. One of the common features in restorative narratives is how true justice involves the overcoming of evil with good.

Religion and spirituality have always been integral to the restorative justice movement. This is evident in its North American genesis in 1974, when Mennonite probation officers in Ontario pushed their Bible study reflections into the realm of criminal casework. When the movement began to revitalize centuries-old indigenous traditions such as Native American talking circles and Maori family group conferences, it became evident that these non-Western models had sacred status on a par with other spiritual practices. And is not the mending of human hearts and broken relationships the core of the Christian gospel?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ological studies are increasingly being influenced by the restorative justice movement, as exemplified in the writings of Christopher Marshall.

When asked to summarize what restorative justice is, I often resort to a simple illustration. If your child throws a ball and breaks your neighbor’s window, what do you do? Invariably, adults will say: I would take the child with me to the neighbor to apologize, to listen to what the neighbor has to say, and to offer to make amends. This, of course, is what the neighbor would want too. If, on the other hand, the neighbor found out that the child was merely punished and no communication efforts were made, he or she would rightly feel that justice was not done, precisely because the victim was ignored. Restorative justice focuses on the harm done more than on the law broken. Attention to the harm draws greater attention to victims and thus to the repairing of harms.

At the high end of the harm spectrum, restorative justice allows for safe, well-prepared meetings between murder victims’ family members and the perpetrators in prison. The same building-blocks apply as with a simple shoplifting case: the expression of ownership, remorse, impacts, empathy, apology, amends, and so on. In cases of severe and violent crime, when parties share their deep emotional pain, they often end up experiencing the removal of a heavy internal weight. The goodness of honest, heart-to-heart conversation literally overcomes the evil of the crime and its consequences. While there is never a prescribed expectation that forgiveness will be expressed in the restorative process, time and time again participants experience genuine forgiveness whether or not the language of forgiveness is explicitly used.

I once interviewed a woman whose mother was murdered, asking her to sum up what it meant to her to meet with the man who had killed her mother. She talked about how helpful it was to hear him acknowledge the evil thing he had done and to take complete responsibility. She also talked about how good it was for him to hear her pain at not ever being able to get closer to her mother. “When I walked out of the prison, the core of my whole life changed. I felt I was in a state of grace. I felt like a completely new person. I felt like the whole burden of everything had lifted from me.” Through the facilitated dialogue process, she said, “I gave him his life back, and later I realized that he gave me my life back.”

Through this life-restoring lens, justice is defined in terms of positive responsibilities to render good for evil. Full justice is the reinstatement of the good to mitigate the evil that was done. If justice is only a negative response to match the degree of a prior negative – an eye for an eye at best – it may bring a type of equity into play, and it may deter future misdeeds, but such justice does nothing to set things right again between people. New research is now showing how punitive responses to crime that incorporate no remedial means of accountability are frequently counterproductive, driving up future crime rates and taxpayer dollars. Restorative justice, by contrast, seeks positive outcomes for both offenders and victims through attention to accountability and support, through the empowerment of direct communications, through the building of trust and understanding, and through the fulfillment of reparation and reintegration.

In all of the above examples, open communication is central. By speaking and listening from the heart, victims gain new trust and offenders gain new understanding. This internalized learning is an essential ingredient toward taking positive responsibility to make things right, not just for the one incident, but for sustaining right relationships in the future. For this kind of learning to be fruitful, it must involve responding to what one has learned. Unlike courtroom processes, where communication is highly restricted, restorative dialogue helps offenders to be “response-able” to what they have just learned. Meanwhile, the experience of being heard is vital in helping victims to transition toward trust and closure. Out of this comes a double peace: a peace within and a relational peace between persons.

In all of this we see how the restoration of human relationships is vital to the resolution of crimes. Communities are less served by retributive justice measures that fail to heal the brokenness both caused and revealed by crime. Restorative justice seeks to heal these wounds at every level: for victims, offenders, and entire communities. This fits well with the medieval English concept of atonement, literally “at-one-ment,” which is associated with the New Testament concept of reconciliation. Disconnections are overcome by connections.

One of the most pressing questions of our day is, “How can cycles of violence be stopped?” People are realizing that those who violently victimize others were almost always themselves once victims of unjust abuse and resulting trauma. The church-burning case certainly shows this cyclical pattern. Part of what helps victims to move forward out of their resentments or negative ruminations is to experience the humanization of the offender. At some level, every human being is a victim as well as an offender. We are all wounded and we can all wound others.

This is where the death of Jesus provides the ultimate answer. Because all people are victim/offender combinations, forgiveness has to cut both ways to be holistic. The cross in all of its significance is oriented to both offenders and victims. It addresses not only our sins but our sinned-uponness. This is very good news, considering how our own habits of sinning stem out of those deep, unhealed places of past pain. Once we begin to see this interplay within ourselves, we can better see how genuine justice between human beings must bring wholeness to both victims and offenders.

It was necessary for the two young men who had burned down the Lutheran church (and had already spent a year in jail for the crime) to make restitution and other reparations. These plans were worked out in detail so that they could demonstrate their intent to make things right. Even so, the highest restoration happened on a relational level. Forgiveness opened up the possibility for them to live well with others, and to live with themselves.

A while after the meeting with the church folk, I facilitated an encounter between the same offenders and a neighboring farmer and his wife. This elderly farmer had grown up in the same church and also knew the families of the young men. The offenders had stolen metal items from his farm and sold them as scrap to get cash. The farmer spoke very candidly about how hurt he was when he found out who had stolen his property and caused the church to burn down. There were plenty of tears in the room. Hearts were softened. And in the end there were handshakes, heads held high, and eye-to-eye contact before everyone parted ways. People came with their vulnerabilities, but they left with the strengthening gift of reconciliation. Evil was overcome by the good, and new life was rising again.

Photograph from www.restorativetrainer.com; used with permission.

16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by Eva Mozes Kor

Forgiving Dr. Mengele

Eva Mozes Kor
JANUARY 26, 2016

At the age of ten, Eva Mozes Kor and her twin sister Miriam were transported to Auschwitz. There Dr. Josef Mengele used the two girls along with other twins for medical experiments. Mozes Kor, who speaks internationally, went on to found the CANDLES Holocaust Museum in Terre Haute, In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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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January 27, 1945, four days before my eleventh birthday, Auschwitz was liberated by the Soviet army. I returned to my village in Romania to find that no one from my family other than Miriam had survived.

Forty years passed before I spoke to Miriam about our experiences in Auschwitz. She died in 1993 from the long-term effects of Mengele’s experiments. That year I was invited to lecture to some doctors in Boston and was asked if I could bring a Nazi doctor with me. I thought it was a mad request until I remembered that I’d once been in a documentary which had also featured a Dr. Hans Münch from Auschwitz, who had known Mengele. I contacted him in Germany and he agreed to meet with me for a videotaped interview. On my way to meet this Nazi doctor, I was so scared, but when I arrived at his home he treated me with the utmost respect. I asked him if he’d seen the gas chambers. He said this was a nightmare he dealt with every day of his life. I was surprised that Nazis had nightmares too and asked him if he would come with me to Auschwitz to sign a document at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He agreed.

In my desperate effort to find a meaningful thank-you gift for Dr. Münch, I searched the stores, and my heart, for many months. Then the idea of a forgiveness letter came to my mind. I knew it would be a meaningful gift for Dr. Münch, but even more important, it became a gift to myself. I realized I was not a hopeless, powerless victim. When I asked a friend to check my spelling, she challenged me to forgive Mengele too. At first I was adamant that I could never do that. But with time, I realized that now it was I who had the power: the power to forgive. It was my right to use it. No one could take it away.

On January 27, 1995, at the fiftieth anniversary of the liberation of Auschwitz, I stood by the ruins of the gas chambers with my children, next to Dr. Münch and his children and grandchild. Dr. Münch signed his document about the operation of the gas chambers while I read my document of forgiveness and signed it. As I did that, I felt a burden of pain lifted from me. I was no longer in the grip of hate; I was finally free.

The day I forgave the Nazis, I also privately forgave my parents, whom I had hated all my life for not having saved me from Auschwitz. Children expect their parents to protect them; mine couldn’t. And then I forgave myself for hating my parents.

I believe with every fiber of my being that every human being has the right to live without the pain of the past. For most people there is a big obstacle to forgiveness because society expects revenge. We need to honor and remember our victims, but I always wonder if my dead loved ones would want me to live with pain and anger until the end of my life. Some survivors do not want to let go of the pain. They call me a traitor and accuse me of speaking in their name. I have never done that. Forgiveness is as personal as chemotherapy – I do it for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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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 때 Eva Mozes Kor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Miriam은 Auschwitz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Josef Mengele 박사는 두 명의 소녀를 다른 쌍둥이와 함께 의료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Mozes Kor는 인디애나 주 테레 호트에 CANDLES 홀로 코스트 박물관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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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생일 4 일 전인 194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는 소련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나는 가족을 찾기위해 루마니아의 마을로 돌아 왔는데,  Miriam 이외는 내 가족 중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 음을 발견했다. 

 Miriam과 Auschwitz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까지 40 년이 지나야 했다. 그녀는 1993 년 Mengele의 실험의 장기적인 영향으로 사망했다. 그 해에 나는 보스턴의 일부 의사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초대되었고, 나치 의사를 데려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한때 다큐멘터리에서 Mengele을 알고있는 아우슈비츠 (Auschwitz)의 한스 뮌헨 박사 (Dr. Hans Münch)가 출연 한 것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 요청이 미친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비디오 녹화 인터뷰를 위해 나와 만나기에 동의했다. 이 나치 의사를 만나러가는 길에 나는 무서웠지만,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를 최대한의  존중을 가지고 대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스실을 보았는지 물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다루는 악몽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치도 악몽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고, 가스실의 폐허에서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 나와 함께아우슈비츠에 와줄 것인지 물었다. 그는 동의했다. 

나는 Münch 박사에게 의미있는 감사의 선물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몇 달 동안 상점과 마음을 조사했다. 그런 다음 <용서 편지>에 대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나는 그것이 뮌헨 박사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 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선물이되었다. 나는 내가 희망이 없고 힘없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에게 내 철자를 확인하도록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Mengele도 용서 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 나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권리였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1995 년 1 월 27 일, 아우슈비츠 해방 50 주년에, 나는 뮌헨과 Dr. Münch와 그의 아이들과 손자 옆에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 폐허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용서 문서를 읽고 서명하는 동안 Münch 박사는 가스실 작동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렇게하면서 나는 고통의 짐을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증오에 빠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 

내가 나치를 용서 한 날, 나는 또한 부모님을 개인적으로 용서했다. 나는 아이들을 아슈비츠에서 구하지 못한 부모님을 평생 미워 했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그들을 보호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미워한 것을 용서했다. 

나는 모든 인간이 과거의 고통없이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사회는 복수를 기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용서에 큰 장애물이 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해야하지만,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과 분노로 살기를 원하는지 항상 궁금하다다. 일부 생존자들은 고통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용서는 화학 요법만큼이나 개인적이다 – 나는 나를 위해서 했다.






































2020/02/07

Five years since the COI, what progress on North Korean human rights? | NK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