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9

허물이 있음에도 우리는 본래 부처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허물이 있음에도 우리는 본래 부처다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허물이 있음에도 우리는 본래 부처다

등록 :2021-05-19 

부처님 오신 날, 부처가 부처에게 말한다.



사진 실상사 제공

1. 허물이 있는 부처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좌복에 앉는 순간 문득 번개처럼 이 말이 떠올랐다. 아니 가슴을 뚫고 솟구친다. ‘허물이 있는 부처’라니, 형용 모순인가? 아니면 진실을 드러내는 역설인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해석하든가, 그냥 음미해보시라. 유영모 선생이 말씀하신 “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허물의 정체는 도둑이고 손님이다”



다시 이렇게 사족을 달아본다. 도둑과 손님의 같은 점은 외부 방문자이다. 내가 문을 열어 주면 들어오고 초대하지 않으면 도둑과 손님은 내집에 들어올 수 없다. 도둑과 손님은 본래부터 내 집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방심할 때 찾아든다. 내가 “이제 그만 나가 주시지요”라고 하면 나갈 수 밖에 없는 약자이다. 물론 좀 질기고 교묘한 도둑과 손님은 이래저래 버티고 밀당하며 나가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결국 그들은 추방당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도둑과 손님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탐욕, 분노, 증오, 교만, 의심, 질투, 게으름, 기만, 뽐냄, 비굴, 우울, 무기력, 비겁 등이다. 이들 도둑과 손님은 적게는 108개의 이름을 가졌고, 많게는 8만4천 개라고도 한다.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자면 ‘번뇌’라고 한다. 번뇌는 내 삶을 짓누른다.



“허물이 있는 부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허물이 있는 부처’는 모든 생명들이다. 번뇌가 있는 부처는 바로 너와 나다. 동시에 너와 나는 허물이 본래 없는 부처이기도 하다. 여기서 허물, 혹은 번뇌가 ‘있음’은 실로 유전 인자와도 같은 ‘있음’이 아니다. 당사자의 선택과 의지의 과정으로서의 ‘있음’이다. 그러니 번뇌는 ‘있음’과 ‘없음’에 구속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본래 부처이기도 하다”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이므로 허물이 없는 부처이다. 부디 잘 생각해 보라. 그리 어렵지 않다.



사진 실상사 제공



2. 허물이 없는 부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본다.



“나는 허물이 있는 부처다. 그러니 애써 닦으려 하지 말고 다만 물들이지 말라”



고요하고 맑은 호수는 평온하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오염 물질이 들어가면, 호수는 사납고 혼탁하다. 그대 고요하고 맑은 호수의 평온을 누리고자 하는가? 애써 바람을 불러오지 않으면 된다.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말했다. 평상심(平常心) 그대로가 깨달음의 일상이라고.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침몰하지 않고 기울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패망의 길이 뻔히 보이는 헛된 가치를 붙들고 휘둘리는 길을 버리는 일이 평상심이다.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어느 쪽에 서지 않는 일이 평상심이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재화를 많이 충족하여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 행복하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정신과 마음이라는 말에 묶여 노동을 무시하고 감각과 감정을 죄악시하고 혐오하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 평상심이다. 또 있다. 나의 이익과 취향에 맞는 일은 즐거이 수용하고, 힘들고 싫고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거부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좋고 싫은 느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슬기롭게 대처하는 삶이 평상심이다. 그러니 애써 닦으려 하지 말고, 오직 오염되기 이전의 마음을 순정하게 지키는 일이 바로 평상심이고 수행이다. 그래서 청허당 휴정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의 그 마음 자리를 지키는 일이 제일가는 정진이다” 이게 바로 ‘본래 붓다’의 삶이다.



사진 실상사 제공



3. 다시 허물이 있는 부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지금 당장 그대의 모습부터 보시게”



내가 나를 ‘허물이 있는 부처’라고 발언하고, 그러고 내가 나를 ‘본래 부처’라고 확언한다면,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 나의 무수한 허물을 정직하고 바라보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허물 있는 부처’의 진면목이겠다. 이 출발점에서 ‘본래 부처’를 회복하는 길이 열린다.



다시 확인한다. 번뇌라는 이름의 무수한 허물은 비롯함이 없는 시초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내게로 온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어둠이 실로 처음부터 있었던/있는 어둠이 아니라 빛의 차단으로 ‘만들어진 어둠’이라는 것을 통찰하자. 그래서 이 어둠은, 어둠을 만든 조건이 사라지면 즉시 사라진다. 사라지는 시간은 조금도 그 양과 길이를 측정할 수 없다. 아니 측정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이걸 ‘돈오’(頓悟)라고 한다. 어둠의 조건을 만들지 않고 밝음에 있는 자가 ‘본래 부처’이다. 그래서 허물이 있는 정직한 부처는 늘 이 어둠의 조건을 주시한다.



그러므로 게으름, 애매모호함. 초심이 흐려지는 태도, 인정을 갈구하는 욕구, 무엇과 비교하여 열등과 결핍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망상적 삶, 이 세계는 모두가 중심일 수 있는데 나만이 중심이고자 하는 어리석은 교만, 진리대로 살면 복되고 평안하다는 이치에 의심을 갖는 마음, 이 모든 허물과 번뇌들을 살피고 인정할 때, 나는 비로소 ‘부처인 중생’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새로운 길, 본래의 길이 열린다.



이 새로운 길, 본래의 길을 어렵지 않게 가는 방법이 있다. 본래 부처를 속이는 허물들의 정체가 도둑이고 손님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아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내게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이 업보중생이라고 생각 없이 굴레를 쓰는 사람, 그는 자신을 ‘허물 많은 중생’으로 규정한다. ‘허물 있는 부처’가 자신을 ‘허물 많은 중생’으로 착각한다. 그런 그에게는 후회와 한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의 참회는 새로운 거듭남을 향하지 않는다. 후회와 참회는 잠시의 평온에 이어 불안을 불러 온다. 그리하여 그는 시지포스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자학이 도덕이고 신앙인줄 착각한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 자리가 ‘각’(覺)이다.



4. 마침내 나는 본래 부처



역설적으로 말한다. ‘본래 부처’는 ‘허물이 있는 부처’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허물이 있는 부처’는 ‘본래 부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허물이 있는 부처’가 ‘허물이 있는 부처’의 ‘허물’을 사랑하는 날이다. 그래서 여기 있는 부처님들은 훗날의 부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는 이치!



글 법인 스님
/실상사 한주 &실상사작은학교철학선생님 &전 조계종 교육부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연재[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2021/05/18

Namgok Lee 깨달음ㆍ영성 등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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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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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ㆍ영성 등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문명의 전환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진정한 동력도 깨달음(인간의 관념계에 존재하는 근원적 부자유로부터 해방)의 보편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나 영성도 결국 각각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집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진정한 방향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내용도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이라는 자각(이것을 나는 무지의 자각이라고 부른다)이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이나 감각이 우수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탁월하게 보이는 아집일수록 더 큰 해악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의 자각'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영성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통과해야하는 또 다른 리트머스 시험지는
 과학과 현실의 정치적 판단 그리고 생활과의 일치다.

허구와 편가름에 휘말리거나 생활과 유리되는 깨달음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클 수록 해악이 크다.
과학 너머에 광대한 신비가 있다.
과학(이성)에 반하는 신비가 아니다.

나는 무당을 잘 모른다.
그러나 큰 신비의 커튼이나 문고리에 접근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큰 무당은 허구와 아집을 넘어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자기 감정이나 판단에 도취되는 가짜  무당을 구별하는 안목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과도기적 혼돈이 심한 시기일수록 그러하다.
인류의 보편지성의 진화에 대한 신뢰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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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이병철
큰 만신, 하늘의 뜻을 알아 땅위에 그 뜻을 필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 그를 제사장이자 임금이라 하였지요.
사드비프라, 영성적인 지도자 또한 이와 같은 거라 싶습니다.
 · Reply · 1 d
유상용
그래서 깨달음 등의 정신적 성취에 대한 연찬(집단지성에 의한 과학적 탐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각자의 체험 경지를 가볍게 내어놓고 정말은 어떤지 검토해가는 것.
어떤 이는 물질과학이 지구적으로 검증하는 학계가 이루어지는 데 200년 정도 걸린 것처럼 정신적 방면에서도 최소한 진위를 검증하는 장치가 마련되는데 비슷한 시간이 걸리지않을까 하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 Reply ·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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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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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일보] 또 한 번 대전체육고등학교 학생들 몇 명을 만났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답하기 더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 ‘운동선수들인 저희들은 늘 경쟁하는데, 그러다가 서로 미워할 수도 있고, 상처받고 힘들기도 합니다. 경쟁을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경쟁의 끝은 곧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경쟁은 삶을 매우 피폐시키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을 다 안다. 경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 즐겨서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다 안다.

결국 경쟁이란 이기는 자나 지는 자 모두를 만족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다 안다. 그렇게 경쟁하는 동안 인간의 아주 훌륭한 덕목을 무수히 많이 잃고 메마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도 다 안다. 어느 항목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여 늘 그런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안다. 그런데 경쟁할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하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강제상황에 처하여 있음을 인식할 때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질문은 운동선수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외침이다.

나는 그렇게 질문한 그 학생이 얼마나 많이 경쟁에서 만족하였고, 또 쓰라린 아픔을 경험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일단 경기장에 투입되는 순간 물리치고 눌러야 할 적으로 돌변하는 현상을 항상 가슴 아파하였다는 것을 그 질문을 통하여 금방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핵심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일생동안 우리가, 전체 인류가 생각하고 고민하여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 질문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나는 물론 경쟁사회를 무척 싫어한다. 이제까지 나는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럴 맘이 없어서 경쟁을 피했는지, 경쟁에서 이길 수 없으니 경쟁체계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모른다. 운동회 할 때 100m 달리기에서 3등까지 주는 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도 그만큼 똑같이 달렸는데, 그 등수 안에 들지 못한다고 아무 상도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불만이 많았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사람에게 우등상이나 어떤 상을 주는 것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잘하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은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인데 왜 또 상을 주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또 진학할 때 이득을 보는 수도 있는데, 그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하면 잘한 것이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칭찬받는 상을 받아 좋아하고, 박수를 받아야 할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경쟁체제를 싫어한다. 물론 학교에 간다거나 어떤 시험을 볼 때는 어느 정도의 경쟁에서 약간 우위에 있어서 합격한 적도 있지만 이른바 치열한 경쟁을 하여 이겨서 만족스러워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 경쟁을 피해도 되는 삶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삶의 여정이나 상황에서는 막연히 경쟁은 좋지 않고 사람들을 깊은 부담과 상처 속에서 살게 한다고 느껴 그런 경쟁체제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삶을 위하여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쟁체제 속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경쟁스트레스와 경쟁트라우마의 깊음을 나는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하나밖에 없는 메달이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그것을 획득하느냐 못하느냐는 것이 그의 삶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배우고 느끼고 알고 있는 제도 속에서 아름다운 경쟁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경쟁 속에서는 아름다움은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놀라운 기술이 개발되고 능력이 발휘되어 그것을 성취한 당사자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경쟁하여 이기고 진다는 그 과정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단 말이다.

사실 나는 올림픽의 구호라고 하는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0.01초 더 빨리 달렸다고 하여, 1㎝ 더 높이 솟고, 더 멀리 뛰었다고 하여, 그나 그것을 심판하고 보는 사람들에게나 또는 인류에 더 질높은 삶을 보장하여 주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을 알지만, 그런 질문을 한 학생도 다 알겠지만, 그 앞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을 할 수도 없고, 좀 다른 위치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무수히 많은 장자의 이야기로 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쟁체제가 있는 한, 그 속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경쟁하지 않을 수 없고, 경쟁하되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아픔을 주지 않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하고 고뇌를 말하는 그에게 만족스런 답을 우리 사회는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경쟁체제 자체를 없애는 길이다.

왜,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경쟁은 어느 누구에게도 질높은 삶을 보장하여 주지 않는다. 경쟁체제는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을 놀리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와 학교, 지역과 지역,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경쟁시키는 자체도 옳지 않다. 스포츠라는 이름의 정치행위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경쟁놀이도 옳지 않다. 그래서 너무 일찍 경쟁체제에 몰입하게 하는, 경쟁을 통하여 진학하는 입시제도를 없애야 한다. 자유롭게 입학하되, 여러 가지를 경험하여 자기에게 맞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쟁을 통한 선발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선발방법이라고 본다. 좀 더 즐길 수 있는 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길로 방향이 바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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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핵심경전 동경대전 진본, 140여년 만에 나타나 - 오마이뉴스

동학 핵심경전 동경대전 진본, 140여년 만에 나타나 - 오마이뉴스
동학 핵심경전 동경대전 진본, 140여년 만에 나타나충남역사문화연구원 감정 절차 진행…‘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 창립
21.05.17 
노준희(dooaium)



▲ 동경대전 목천판 계미중춘판 소장자가 제공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과 그에 따른 자료. 아랫줄 맨 오른쪽이 동경대전.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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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동경대전 진본이 충남 천안에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동경대전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이 쓴 동학 경전으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이 강원도 인제군에서 비밀리에 처음으로 간행한, 동학의 핵심경전이다. 천안시 동남구 동면(당시는 목천)에 있는 김은경 접주의 집에 간행소를 마련하고 동경대전 1천 부를 인쇄해 배포했다. 이후 동학이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에 들불처럼 확산했다.

이번에 발견한 동경대전은 천안 목천(현재 동면)에서 간행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으로 '포덕문(布德文)·논학문(論學文)·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 등 초판본을 보완한 내용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계미중춘판 복사본을 영인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이번 진본 발견은 동학의 뜻과 동학농민혁명의 꿈으로 인내천안(人乃天安)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 창립에 매우 유의미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근 140년 만에 나타난 계미중춘판 진본


동경대전은 한국 근대 신종교인 천도교의 근간이 된 동학의 최초 경전으로 유·불·선과 민간신앙의 요소가 통일적으로 결합한 경전이며 그동안 여러 신종교 사상의 본보기가 되어왔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후 120년이 넘도록 진본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진본은 당시 동학의 주요 인사였던 김찬암 선생이 후손에게 전해주어 간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20여 년 전 이 사실을 접한 항토사학자 김종식씨가 여러 번 소장자인 후손을 찾아가 동경대전임을 확인하고 공개를 부탁했으며 복사본을 확보해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전해줌으로써 진본 존재가 확인됐다.

최근 이용길 회장은 진본 소장자를 만나 감정을 받아볼 것을 권유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병희 원장과 전문가들은 소장자의 자료를 확인한 후 동경대전 유일 진본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소장자는 이러한 평가를 들은 후 여러 과정을 거쳐 지난 4월 말 동경대전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했으며 진본 확인을 위해 연구원 전문 감정을 요청했다.

이용길 회장은 "계미중춘판에서 계미중춘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1년 전인 1883년 음력 2월을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일어났으므로 이 동경대전은 무려 140년 가까이 지난 후 세상에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을 들고 있는 이용길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추진위원장. 이용길 추진위원장은 이번에 동경대전 목천판이 세상에 나오게 하도록 소장자를 설득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번 벌견을 매우 진지하고 유의미하게 평가하고 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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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 창립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에 기반을 둔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이다. 1894년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 대항한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어, 반봉건·반침략·항일투쟁으로 발전했던 역사적 사건이며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봉건 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깨우치는 데 이바지했다. 이후 항일 의병활동과 삼일만세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혁명 127주년이 되는 날인 지난 11일 오후 6시 천안역사문화연구회(이하 연구회)는 천안민주단체연대회의,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식과 천안기념사업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사전행사로 전날인 10일 오후 3시경 연구회와 동학역사문화선양회가 공동으로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450번지 김은경 접주 집터에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간행터' 표지판을 세웠다.


▲ 동경대전 간행터 표지판 동경대전을 간행한 김은경 접주 집터에 계미중춘판 간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표지판이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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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총회에서 이용길 회장은 "동학의 뜻을 담은 동경대전과 동학농민혁명의 최북단격전지 세성산 전투에서 민중이 원했던 동학농민혁명의 꿈을 담아 1883년 목천판 동경대전에서 집자한 인내천안(人乃天安 인내천이 구현되는 천안)을 실현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천안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을 제안했다.

이용길 회장은 "동학농민혁명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2019년 봄에 고 이이화 선생의 초청강연회를 천안에서 열었다. 그때 고 이이화 선생은 '해월 선생의 지도 아래 동학 도인들이 동경대전을 강행해 동학의 도가 전국으로 펼쳐나간 곳이 바로 천안이고 동학농민군들이 이 도를 펼치기 위해 한양으로 진격한 최북단격전지가 바로 천안'이라며 '평생 모으고 소장한 장서와 자료를 세성산기념관을 짓게 되면 기증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세성산기념관을 지으면 그 안에 이이화 도서관을 마련하겠다고 했더니 한 달 후에 내려오셔서 '동학농민혁명자료관'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청립한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 회장으로는 강대석 전 전교조천안중등지회장이 추대됐으며,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추진위원회에는 이용길 회장이 추진위원장으로 위촉됐다.


▲ 동경대전을 살펴보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원들. 연구원들은 이번에 발견한 동경대전 목천판인 계미중춘판이 진본임을 거의 확실시하고 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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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진본 확인하는 감정평가위원회 열려

소장자는 지난 4월 말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했으며 연구원은 수장고에 소장하고 있다. 연구원은 오는 24일 이 동경대전이 진본 여부를 확인하는 감정평가위원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정을경 연구원은 "이번에 발견한 동경대전 목천계미중춘판은 진본 여부를 다툴 필요가 없을 만큼 진본이 확실해 보인다. 그동안은 동경대전 간행을 강원도에서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천안 목천에서 찍은 사실이 확실하다면 당시 충청도에도 동학 세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꽤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식과 천안기념사업회 창립총회 현장 모습 당일 기념식에는 동학농민혁명 관계자들과 관심 있는 시민들이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참여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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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천안이 고향인 도올 김용옥 선생이 최근 1000여 페이지를 넘는 동경대전 1·2(통나무) 초판본의 주석본을 발간했는데 목천판 진본이 발견됨에 따라 동경대전 간행과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천안기념사업회는 간행터 표지판을 통해 "동경대전은 동학의 핵심사상인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과 인류 최초로 본원적 평등사상을 연 진리를 담은 경전이다. 시천주는 사람뿐 아니라 만물 모두 한울님을 모신다는 삼경사상(三敬思想)으로 확대되어 오늘날 인류가 심각하게 겪는 생태 생명의 문제를 풀어갈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다"고 평가했다.

이용길 추진위원장은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이 되는 데 125년이 걸렸다. 125년 만에 반란의 역사가 혁명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라며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은 동학의 뜻과 혁명의 꿈으로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다시 개벽'의 등대가 될 것이며 이 도서관은 '이이화 도서관'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 건립 제안 설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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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계미판년이면
인내천 사상은 없다.
시천주 사상으로 돌아가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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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人乃天)

천도교개념용어

 손병희가 주장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가리침을 뜻하는 천도교교리.   

분야
천도교
유형
개념용어
 정의
손병희가 주장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가리침을 뜻하는 천도교교리.
내용
1905년을 전후하여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설 大宗正義說』에서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상적 근원은 최제우(崔濟愚)에 두고 있는데, “대신사께서 일찍이 주문의 뜻을 풀어 가라사대,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함을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옮길 수 없는 것으로 깨달아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의를 말씀한 것이니라(大神師 嘗呪文之意 解釋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是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道破人乃天之定義也).”라 하였다.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이라는 구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인내천사상의 근거는 ‘시천주(侍天主)’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한갓 ‘시존(侍存)’일 뿐, 신앙의 본존으로서 지고무상의 하느님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만약 손병희의 주장하는 바가 인간이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천지조화의 밝은 덕에 합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함을 강조한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인간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시존주의(侍存主義) 동학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천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이돈화(李敦化)는 『신인철학 新人哲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내천의 신은…… 노력과 진화와 자기관조로부터 생긴 신인고로 인내천의 신은 만유평등(萬有平等)의 내재적 신이 되는 동시에 인간성에서 신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원천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심’이라는 것을 초월적 신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으로 생각한다면, 인내천의 교의와 시천주의 교의는 서로 양립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천도교경전』(천도교중앙총부,1981)

  • 『야뢰(夜雷)에 있어서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의 전개―최수운연구(崔水雲硏究)―』(황문수,한국사상연구회 편,보성사,1974)

  • 『동학·천도교』(류병덕 편,시인사,197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내천(人乃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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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天主·人乃天… 무슨 뜻일까
주요 가르침


김한수 전문기자
입력 2016.10.06 03:00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모든 사람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뜻에서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시천주(侍天主)'를 가르침의 요체로 삼았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는 곧 평등사상의 표현이었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백성에겐 혁명적 선언이었다.

대신사에 의해 천명된 시천주 사상은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시천(人是天)' 사상으로 표명된다. 이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사회적 윤리 실천 덕목으로 발전했다.

'인시천'은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성사에 의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한다. '인내천' 사상은 인간을 포함해 우주 만유가 한울 아님이 없다는 가르침으로 확대된다. 해월은 "저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소리 역시 시천주"라고 가르친 바 있다. 이는 "한울님을 공경(경천·敬天)하듯이 사람도 공경(경인·敬人)하고, 만유도 공경(경물·敬物)해야 한다"는 해월 신사의 '3경(三敬) 사상'과도 이어지는 흐름이다. 곧 '시천주'에서 '인내천'까지 천도교의 주요 가르침은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五蘊 - Wikipedia

五蘊 - Wikipedia

五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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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用語
蘊, スカンダ
パーリ語खन्ध (khandha)
サンスクリット語स्कन्ध (skandha)
チベット語ཕུང་པོ་ལྔ་
(phung po lnga)
ベンガル語স্কন্ধ (skandha)
ビルマ語ခန္ဓာ (ငါးပါး)။
(IPA: [kʰàɴdà])
中国語(T) / (S)
(拼音yùn)
日本語
(ローマ字un)
韓国語
(RRon)
英語aggregate, mass, heap
クメール語បញ្ចក្ខន្ធ
シャン語ၶၼ်ႇထႃႇ
([khan2 thaa2])
タイ語ขันธ์
ベトナム語Ngũ uẩ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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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蘊(パンチャッカンダ)
パーリ仏典による
 
 
色(ルーパ)
物質的存在
 四大(マハーブータ)
元素
 
 
 
 
 
 
触 (パッサ)
接触
     
 
識(ヴィンニャーナ)
認識作用
 
 
 
 
 
 


 
 
 
 心所(チェータシカ)
精神的要素
 
 
受(ヴェーダナー)
感受作用
 
 
 
想(サンニャー)
概念
 
 
 
行(サンカーラ)
志向作用
 
 
 
 
 出典: MN 109 (Thanissaro, 2001)[信頼性要検証]

五蘊(ごうん、pañca-kkhandha[1](パンチャッカンダ)、पञ्च स्कन्धpañca-skandha[2](パンチャ・スカンダ))とは、仏教において、蘊・蘊・蘊・蘊・蘊の総称[3]。物質界と精神界との両面にわたる一切の有為法を示す[3]五陰(ごおん)とも書く[3][注釈 1]

蘊(skandha[4][スカンダ]、khandha[5] [カンダ])とは集まり[3]、同類のものの集積[6]を意味する。

煩悩(ぼんのう)に伴われた有漏である五蘊を五取蘊[2](ごしゅうん、pañcopādāna skandha[2])または五受陰(ごじゅおん)という[3]。釈迦は四諦において五取蘊は(ドゥッカ)であると説いた[7]

概説[編集]

人間の肉体と精神を5つの集まりに分けて示したもの。(しき・じゅ・そう・ぎょう・しき)の5種である[2]。なお、五蘊と、十二処十八界を並べて三科と称する[8]

個々の事物は因縁によって五蘊が仮に集まってでき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五蘊仮和合(ごうんけわごう)という[3]。五蘊仮和合は、特に有情の個体については、として執着するような実体がないことを表す[3][注釈 2]

五分法身中国語版無漏の五蘊という[3]

内容[編集]

五蘊は次の5種である。「色」は物質的存在を示し[10]、「受」「想」「行」「識」は精神作用を示す[10][3]。人間の心身の機構を羅列的に挙げ、それによって人間の生存およびその環境の全てを表そうとしたものである[11] 。他の心作用(心所)はみな蘊の中におさめられているのに、だけが別個な一蘊として立てられているのは、が争論のもとを生む主因であることや、輪廻に堕す主因であることによる[6]

  • 蘊(しきうん、rūpa) - いろ、形あるもの[12]。認識の対象となる物質的存在の総称[12]。一定の空間を占めて他の存在と相容れないが、絶えず変化し、やがて消滅するもの[12]
  • 蘊(じゅうん、vedanā) - 感受作用[13]。肉体的、生理的な感覚[13]。根(六根)と境(六境)と識(六識)の接触和合から生じる苦・楽・不苦不楽などの印象、感覚[14]阿毘達磨倶舎論においては、内なる心が外界と接触してそこに楽、苦、不苦不楽を受け入れること[15]
  • 蘊(そううん、saññāsaṃjñā) - 表象作用[13]。概念的な事柄の認識[13]。事物の形象を心の中に思い浮かべること[16]阿毘達磨倶舎論においては、対象のあり方を心の中に把握すること、表象すること[15]
  • 蘊(ぎょううん、saṅkhārasaṃskāra) - 意識を生じる意志作用[17]。意志形成力[13]。心がある方向に働くこと[13]阿毘達磨倶舎論においては、色、受、想、識の四蘊以外[15]
  • 蘊(しきうん、viññāṇavijñāna) - 認識作用[13]。対象を得て、区別して知るもの[12]。知り分けること[15]

五蘊の最初が蘊で最後が蘊となるのは、粗雑なものから精細なものへの順序、悪に染められた心を起因として諸が生じる次第を逆にさかのぼる順序などに従うのであるとされる [6]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旧訳では五陰(ごおん)五衆(ごしゅ)という[要出典]
  2. ^ 古くは阿含経の中に言及されている[9]

出典[編集]

  1. ^ "pañcakkhandha : [m.] the five aggregates, viz: material qualities, feeling, perception, coefficients of tconsciousness, and consciousness. "(Concise Pali-English Dictionary by A.P. Buddhadatta Mahathera)
  2. a b c d 岩波仏教辞典 1989, p. 261.
  3. a b c d e f g h i 総合仏教大辞典 1988, p. 392.
  4. ^ 櫻部・上山 2006, p. 仏教基本語彙(2).
  5. ^ 水野弘元「増補改訂 パーリ語辞典」、春秋社、pp112-113、2013年3月(増補改訂版第4刷)。
  6. a b c 櫻部 1981, p. 69.
  7. ^ Sri Lanka Tripitaka Project 38 Mahakkhandhakaṃ (大犍度
  8. ^ 岩波仏教辞典 1989, p. 396.
  9. ^ 山田巌雄 文・箕田源二郎 画「阿含の詩 詩画でふれる仏の教え」鈴木出版 1988年 P.105 ISBN 978-4790210221
  10. a b 頼富本宏他「図解雑学 般若心経」ナツメ社 2003年 P.76 ISBN 978-4816335440
  11. ^ 櫻部建上山春平「存在の分析<アビダルマ>―仏教の思想〈2〉」 角川書店角川ソフィア文庫〉、2006年 P.60 ISBN 978-4041985021(初出:塚本善隆編『仏教の思想』第2巻  角川書店、1969年)
  12. a b c d 岩波仏教辞典 1989, p. 342.
  13. a b c d e f g 頼富・今井・那須 2003, p. 77.
  14. ^ 岩波仏教辞典 1989, p. 388.
  15. a b c d 櫻部 1981, p. 63.
  16. ^ 岩波仏教辞典 1989, p. 508.
  17. ^ 岩波仏教辞典 1989, p. 169.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