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Masao Abe : a Zen life of di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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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최성수 | 통전적 신학에서 ‘통전’ 개념의 의미와 그 기제(mechanism)에 관한 연구

  장신논단 Vol. 53 No.1

〈한글 초록〉

본 논문은 신학함의 한 방법을 규정하는 “통전(統全 holistic)” 개념의 다양한 용례에 따른 의미를 파악하여 통전의 기제(機制 mechanism)를 밝힘으로써 통전적 신학의 외연 확장에 공헌하고자 한다. 

신학과 교회에서 ‘통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위일 체’처럼 특정 의미를 전달할 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의미 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통합, 종합 등의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관건은 무 엇을 말하려고 ‘통전’을 만들어 사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종합 혹 은 통합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먼저 통전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

제한다. 신학 방법론으로서 구속력 있는 의미를 얻기 위해 ‘통전’의 성경적 용례를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여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과 또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종성의 용례에서 통전의 전형적인 의미를 확정하고 상술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로 통전 개념의 의미가 어느 정도 조명되는 건 사실이나 전형적인 의미 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이미 이종성 이전에도 사용된 적 이 있고 또 오늘날까지도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다. 개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확정하기 전에 다양한 용례들에 대한 비판적인 고 찰이 선행해야 한다.

본 논문을 통해 필자는 먼저 철학과 신학에서 사용된 ‘통합’과 ‘종합’의 의미

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학적 방법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통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밝히고자 한다. 통전의 기제를 밝히지 않으면서 통전을 신학적 방법론으로 삼는 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전의 구체적 작용 방식을 밝히기 위해 한의학자로서 동서양 융합의학 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또 의학적 신학(medical theology)의 구성에 전념하면서 통전 이해에서 주목할 만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 는 최서형의 견해를 소개할 것이다. 


주제어*

통전, 통전적 신학, 통전의 기제(기전), 페리코레시스, 유기적 관계

최성수 | 통전적 신학에서 ‘통전’ 개념의 의미와 그 기제(mechanism)에 관한 연구 DOI: 10.15757/kpjt.2021.53.1.005

Ⅰ.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신학함의 한 방법을 규정하는 “통전(統全)” 개념의 신학적 지형도 를 밝히고 이것의 다양한 용례에 따른 의미를 파악하여 통전의 기제(機制 mechanism)를 밝힘으로써 통전적 신학의 외연 확장에 공헌하고자 한다. 

‘통전’이 신학과 교회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 영어 (w)holistic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 역시 다른 용례인 integrity의 번역어 로 ‘통전’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 정확하다 볼 수 없다. 처음부터 특정 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한 조어인지도 확실치 않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개념이라면, ) “통전”은 ‘삼위일체’처럼 특정 의미를 전달할 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전문용어이기에 불투명한 단어 자체의 뜻을 밝히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맥락의 용례를 살펴서 종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권장한다. 이것은 먼저 통전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제 

한다. 곧 신학 방법론으로서 구속력 있는 의미를 얻기 위해 ‘통전’의 성경적 용례를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여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나 ) 또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 로 주장한 이종성의 용례에서 통전의 전형적인 의미를 확정하고 상술하려는 것이

다. 이런 시도로 통전의 의미가 어느 정도 조명되는 건 사실이나 전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앞서 각주 1)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이종성 이전에 이신(본명 李萬修, 1927~1981)이 사용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통전’ 이해의 철학적 맥락을 기술하고, 신학에서 사용된 ‘통전’ 

개념의 다양한 의미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끝으로 신학함의 방법론으로 적합하 다고 여겨지는 통전 개념의 실천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특히 통전 개념이 신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그 기제를 밝히기 위해 필자는 융합의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의학과 신학의 관계를 정립하려 노력하는 최서형 )의 ‘통전’ 개념을 통전적 신학의 한 방법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그동안 통전적 신학 연구에서 특별히 주목하 지 않았던 통전의 기제, 곧 통전이 하나의 원리로 현실 문제 해결에 구체적으로 어 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일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전 개념의 외연을 넓 힐 뿐만 아니라 또한 통전을 실제적인 신학 방법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목할 가치 가 있다고 생각한다. 

 

Ⅱ. 본론 

1. 통전 개념의 철학적 맥락

진리를 직관하는 일과 통합적 사고에 익숙한 동양과 달리 분석적 사고를 선호 하는 서양은 세계의 단절과 지식의 파편화를 막기 위해 종합을 철학의 과제로 삼 았다. 여기서 거대 담론 혹은 대서사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표방하며 ) 절대적 의 미의 진리를 부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큰 장애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진술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 사용에 관심을 두는 사조로 본다면, 이는 무엇보 다 불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의 전통과 철저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 학이 겪어야 할 혼란은 컸다. 따라서 그 적절성에 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각 분야 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 강조되는 통합 연구, 융합 연구, 학 제 간 연구 등의 경향을 생각하면, 현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거대 담론의 필요성이 다시금 제기되는 건 아닌지 싶다. 따라서 통전의 신학적 이해를 위한 철 학적 배경을 살펴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철학은 경험 세계에서 현상과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 다. 현실에서 관찰한 것을 분석하고, 또 분석한 것을 종합하여 실재를 인식 혹은 포 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는 ‘보편’, ‘원리’, ‘존재’, ‘본질’ 등의 의미에 가깝다. 부분이 아니고, 나뉘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전체’ 이미지에 가깝다. 철학을 세계를 보는 관점 곧 세 계관(worldview)과 같은 의미로 보는 까닭이다. 플라톤에서부터 현대철학에 이르 기까지 숱한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지금까지 실재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는 변증법적 (dialectic)이었다. 변증법은 이분법적 현실에 직면해서 정과 반의 갈등 구조를 거 쳐 제3의 길을 지양하는(aufheben) 방법이다. 틸리히는 실재(God)에 대한 이해 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실재의 현실 관련성(relevance)을 설득할 의도에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시작하는 사유 방식을 계발했고, 여기에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변증법과 차별화했으 나, ) 철학적(실존론적) 질문과 신학적(존재론적) 대답은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서 거듭 또 다른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져 실재에 대한 이해에 근접한다는 점에서 변 증법의 한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과학사가 쿤(Thomas Kuhn) 역시 과학사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의 구조를 설명

하면서 변증법 대신에 “패러다임 전이”(paradigm shift)를 말했다.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정한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기를 거친 후에 급격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과학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것 역시 겉보기에는 변증법과 다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에서 유의 창조는 가능하지 않으며, 사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전 패러다임은 새것의 형 성 과정에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정과 반의 상호작용을 거쳐 종합을 지향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역사란 절대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이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만일 절대정신이 더는 갈등이 없는 자기 자신에 이르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맞는다. 이것이 화해이며, 이것의 온 전한 형태를 그는 기독교 성육신에서 본다. 

절대정신이 이성을 통해 자기를 조금씩 드러내면서 이념을 현실화할 때, 헤겔

은 기독교에서 그 절정을 보았으나 그 역시 자기 논리의 일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곧 정신에 우위를 두는 그의 관념론은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 다. 특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와 마르크스(Karl Marx)로 이어지는 유 물론적인 전복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마르크스에게도 해당한다. 곧 변증법적 유물 론의 역사를 정치 경제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 아 독재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자기를 변증법적 궤도 밖에 두고 전체를 인식하 려는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실재나 관념보다 생의 의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둔 니체는 헤겔 이후 철학의 물 길을 바꾸었다. 그는 도덕적 실재인 신을 초인으로 대체하고, 진리를 이념을 현실 화하는 힘으로 정의하였다. 그의 독창적 생각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큰 흐름을 일 으켰는데,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전체주의를 등장케 하는 근거를 제공했 다. 전체주의는 이념을 실현할 전권을 국가에 귀속함에 따라 나타난 결과였다. 다 른 한편으로는 절대 진리는 없고 다만 힘의 각축장으로서 관점에 따라 다른 진리 주장만 있을 뿐이라고 보는 소위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다원주의를 출현시 켰다. 이것은 오늘날 상대성, 대중성,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각인한다.

이는 과거에 비해 실재를 인식하는 관점에서 나타난 큰 변화다. 실재가 무엇

인지 알 수 없으며, 실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실재에 적합한지 결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인간은 다만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그리고 서로 다른 진리 주장 사이의 논쟁에 참여할 뿐이다. 실 재는 인간학적인 한계로 언제나 파편의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이런 까닭에 철학은 실재를 인식하거나 현실화하는 노력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런 배경 에서 철학의 과제는 다만 실재 이념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주장

하는 비판 이론(kritische Theorie)이 등장하였다. ) 

실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소망은 무엇을 근거

로 가능한가? 몰트만은 이 질문을 신마르크스주의자인 블로흐(Ernst Bloch)의 책 “희망의 원리(Prinzip der Hoffnung)”에서 취해 신학적 종말론의 틀에 놓고 또 그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으로 “희망의 신학”을 집필하였다. 그가 종말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의 전통에서 벗어나 유독 소망의 이유를 밝히는 데에 집중한 까닭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헤겔의 전통을 이어받아 다시금 역사 안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의미를 밝혀내는 보편해석학을 주장했는데, 신학의 언어로 말하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서 하나님 관념(Gottesgedanke) 이 세상과 역사를 어떻게 각인했는지를 밝히고 또 종말론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에 근거하여 미래의 힘으로서 실재를 이해하는 일에서 선취의 가능성을 보 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실재에 관한 철학적 관심에서 관건은 형이상학적 실재의 본질 을 밝히려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이성, 경험, 언어, 세계 관에서의 한계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혀 인간은 현실에서 실재를 일종의 실 존 경험 혹은 현실 경험을 통해 부분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며, 관건은 한계 안에서 어떻게 실재를 인식할 것인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에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이 훗설 (Edmund Husserl)의 현상학이다. 그렇다고 본질 인식이 포기된 건 아니다. 왜냐하 면 현상학은 현상을 판단중지(epoche)의 태도로 기술하고 분석함으로써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곧 그는 현존재(Dasein) 분석을 통해 존재(Sein)를 인 식하는 가능성을 성찰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실재를 인식하는 일에서 시적 통찰력 혹은 예술적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존재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셈 이다.

다원주의적 혹은 포스트모던 사회는 실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지식의 적합 성과 유용성에 관심을 둔다. 이성적 신뢰를 위해 진리를, 감성적 신뢰를 위해 사랑 을, 그리고 영적 신뢰를 위해 생명을 추구한다. 무엇을 근거로 혹은 누구를 신뢰하 며 살 것인지를 알기 위해 인간은 다만 적합하고 유용한 인식을 얻으려 노력할 뿐 이다.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관심에 따라 현상을 연구 한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확실성에 관한 관심을 신에서 인식하는 주체

인 인간에게로 돌렸다. 그 후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됐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양자에 대한 인식방식의 구조적 차이를 받아들였다. 뇌 과학이 밝혀내기까지 철학 은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상호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서로 구분하여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기독교 믿음을 통한 실재의 인식을 부정하였고, 오직 감각기관을 통한 관찰과 이 성적 추리를 통한 인식의 가능성만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후에는 이성의 작용 역 시 기계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또 합리적으로 추 리 가능한 주장 곧 자연과학적 인식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겼다. 어떤 인식이든 방 법에서 과학적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로 인해 인문학 역시 과학의 모양새를 갖추어야 했다. 딜타이(Wilhelm Dilthey)의 해석학으로서 정신과학과 분석적 탐구로서 자연과학으로의 구분은 그 결과이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m)는 경험 과학의 토대에서 철학을 재구 성하려 했다. ) 비록 논리와 언어의 기초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해 결과적으로 실 패했으나 ) 유사한 시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사회생물학자 윌슨은 통섭(統攝) )이라는 방법론으로 생물학적 연구 기반의 학문을 재구성할 것 을 주장했는데, 이것의 연장으로 최근에는 “창의성의 기원”을 통해 자연과학 특히 신경생물학 등의 생물학에 기초한 인문학의 융합이 인류에게 새로운 계몽운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뇌 과학 혹은 인공 지능 기반의 인문학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등장은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는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사고를 논리에 기초하려고 했던 논리실증주의처럼, 인간의 사고를 뇌의 기계적 모 듈 기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을 기계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은 강 인공 지능(strong A.I.) 개발을 위한 노력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포스트휴머니 즘의 출현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철학은 이처럼 서로 구분된 세계에서 원리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현실을 통합 하여 본질 혹은 전체를 인식하려 한다. 이는 분화된 학문이 세계의 분할로 이어지 는 부조리함을 자각한 결과이다. 파편화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를 포괄적으 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얻는 것, 혹은 최소한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 상호작용 을 가능케 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중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철학은 학제 간 연 구, 통합 연구, 융합 연구 등을 위한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비록 학문 영역이 나뉘 어 있으나 원리에서 상호작용을 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및 인식의 방식 이다. 포괄적 인식을 위한 노력은 실재와 현상, 인간과 신, 물질과 정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여자와 남자, 삶과 죽음, 진보와 보수 등 모든 영역과 주제에 걸쳐서 나타 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및 인식의 방식은 특히 인간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 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혹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관습 을 지양하고, 오히려 인격으로 혹은 몸으로 혹은 전체로 곧 심신합일체로 보는 관 점이 지배적이다.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철학에서는 통합이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이지만, 서구 철학에서는 다른 연구 영역에서보다 특히 인간을 영·혼·육으로 분리하지 않고 전체로 이해하면서부터 통전적 방법의 의미가 크게 부각하였다. 물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세계 안으로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도 통전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세계를 좀 더 포괄적으로, 적합하 게, 또 유용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학제 간 연구와 통합 및 융합 연구가 빠르게 확산 하고 있다.

2. 신학에서 통전 개념 이해

1) 이종성의 통전 이해

(1) 통전의 기제

통전적 신학의 효시로 알려진 이종성이 언급한 통전적 신학으로 시작해보자.

“통전적 신학이란 다음과 같은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첫째, 신학의 각 분야를 단독으로 이해하지 않고 각 분야에 공통되는 점을 모색한다. 둘째, 삼위 일체론으로 신학의 각 분야를 관통시킨다. 셋째, 우주계를 태양계로 국한할 것 이 아니나 성운계까지 확대해서 이해한다. … 넷째, 모든 종교나 학문을 복음에

로의 준비과정(praeparatio evangelica)으로 수용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범종교계를 인정한다.”  ) 그는 wholistic )를 ‘통전’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인용한 글에서 통전의 

기제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을 공통분모로 삼는 일관성15), 공동의 근 거로서의 상호연결성, 보편성,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포괄성이다. 실제로 통전의 관점에 따른 그의 연구 방법을 분석하면, 통전이란 첫째, 상이하고 심지어 갈등하 는 이론과 방법론의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살핀 후 얻은 것을 둘째, 교회가 인정하 는 범위에서 또 현실에 맞는 해석을 통해 종합하여 셋째,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작 업이다. 통전을 해석학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다른 글에서는 인 식론적인 측면을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종합적이고,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지식을 가 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과 일반계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즉 통전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16) 

그가 통전의 방법을 신학적 해석을 위해 사용한 의도는 신학 이론 간 상호 연

결 관계를 밝히고, 또 일반 지식과의 관계에서도 복음 및 기독교 신학의 보편성과 포괄성을 드러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창조주로서 세계를 다스 리시는 하나님과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해가 전제해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그는 통전적 관점이라 했다.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그리 스도 중심주의이다.

(2) 통전전 신학의 정체성 

그러나 본래 의도와 달리 이종성은 외국에서 유입한 신학 이론들로 가득한 한 국 신학계의 현실에서 통전적 신학을 ‘교회가 인정한 신학’의 범위에 제한함으로 써 결국 ‘교단 신학’의 한계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신학을 지 향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현실로 옮기지 못했다. 특히 철학이나 과학 등 타 학문과 신학의 관계에서 타 학문을 신학을 위한 ‘예비학문’으로 보고 ‘기독교 신학 중심적 

 

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발음대로 표기할 것을 제안했는데, 소기천은 Tong Chun, 김명용은 TongJun으로 제안하였다. 소기천, “생명 선교를 향한 예수의 시험이야기 새로 읽기: 통전 신 학을 제안하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0 (2003), 183-209. 

15) 백충현은 이종성의 삼위일체 신학이 한국 신학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백충현, “춘계 이종성의 삼위일체론이 한국신학 안에서 갖는 위치와 의의,” 『장신논단』 49-1 (2017), 

283-306.

16) 그의 『신학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68. 

통합’을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말하는 통전이 윌슨의 “통섭”에 근접한 의미로 사 용되었음을 보여준 한 사례이다. 양자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심지어 여러 신학 이론의 공과를 따져가며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면서 건강한 신앙을 위해 꼭 알아야 할 기독교 교양을 얻고 또 전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김명용이 그의 신학을 “신학과 사상의 백과사전”  )이라고 평한 이유가 없지 않다. 이는 한편으로는 장로교 분열의 현실 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척박한 한국 신학의 현실 에서 무차별적으로 수입되는 외국 신학이 범람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외국 신학 을 한국교회와 신학 현실에 적합하게 해석하여 사용할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그가 인정하지 않은 복음의 토착화를 대신하여 주장한 신 학의 토착화의 한 방법에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곧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은 다양하고 풍성한 신학 지식이 필요한 현실에서 주로 한국교회 상황에 맞는 지 식을 집대성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3) 통전적 신학의 한계?

문제는 그의 연구가 원래의 취지대로 한국 신학을 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 지 않은 것이며, 또한 신학의 주요 경향에 대해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해석을 하지 않 고 ) 다만 외국 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종합하는데 머문 것이다. 게다가 이론 을 평가하는 기준이 교회가 인정하는 교리의 범위에 제한함으로써 내용이 아무리 포괄적이라 해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논의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는 혹시 ‘통전적 신학’이 신학적 교양의 차원을 넘어 신학 이론을 생산하고 구성하며 또 검 증하는 방법론으로 삼기에는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었던 까닭은 아닐까? 

2) 통전 개념에 관한 연구의 다양한 스펙트럼

한동안 장로회 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해석학 전통에서 통전적 신학을 규정하는 노력이 있었다.20) 통전적 신학의 정체성 을 규정하고 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장신대 소속 교수들은 세 차례의 신학 성명 )과 일련의 연구에서 ) 통전을 주 로 통합과 종합의 의미로 파악하고 ) 드물게 통전의 기제로서 상호연결성을 지적 했고, 일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종성 신학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밝혔다. ) 처음에는 이종성의 신학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통전적 신학함의 전통을 찾는 연구가 있었고, ) 이 과정에서 한국 장로교 초기부터 분열의 

20)  김이태의 ‘중심에 서는 신학’으로부터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그리고 김명용의 ‘온 신학’ 에 이르는 과정을 탐구하였다. 특히 통전적 신학에 관한 연구는 “춘계신학 강좌”로 2002년에 시작하여 2019년(2008년과 2011년에는 개최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총15회 진행되었다. 여 기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 1, 2회가 다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종성 외 3인, 『통전적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다음을 참고: 이혜정,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교 단정체성에 관한 시론,” 『종교문화연구』 25 (2015), 183-215.

과정을 거쳐 김이태의 ‘중심에 서는 신학’과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그리고 김명 용의 ‘온 신학’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이종성의 한계를 넘어 신학함에서 통전 의 성격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전개되었음을 밝히는 연구였다. 그간의 연구를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이태는 1981년 개교 80주년 기념행사를 기해 발표한 논문에서 “포괄적”이고 “긴장 속에 있고” “선풍적이 아닌 점진적” 성격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소위 “중심에 서는 신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통합의 이름에 맞는 신학을 과제로 삼았다.26) 

맹용길은 장신대 정체성을 공거성(共居性)과 타자성 그리고 포괄성을 특징으

로 하는 “통합신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개요를 제시했다.27) 

김도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역사 자체가 통전적 신학 전통에 있 다고 보고 뿌리를 찾기 위해 한경직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의 특성을 역사적으로 탐 구하였다.28) 그는 통전을 통합하는 해석의 원리로 전제하고 사용하였다. 

윤철호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통전적 신학 방법론을 설명하면 서 온전성에 관심을 두었는데, 특히 그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에 대 한 대답을 역사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통전의 기제라 볼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성을 언급한 것은29) 통전의 역학을 규명하는 일에서 있어서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전의 기제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으로 이어지 지 못한 건 아쉽다.

현요한은 한국적 신학의 한 형태로 통전적 신학을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어 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한 하나님 신학에 근거한 생명 및 평화의 신학으로서 통전 적 신학을 제안하였다.30) 그의 ‘하나님 신학’은 통전적 신학의 신학적 토착화를 시

 

심에 서는 신학에서 변두리에 머무는 신학까지,” 『장신논단』 50-3 (2018. 9), 201-33.

26) 김이태, 『중심에 서는 신학: 김이태의 신학세계』, 故 김이태 교수 저작 출판위원회 편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209-40. 그리고 다음의 논문을 참고: 김명용, “이종성의 통 전적 신학,” 112-14; 신옥수, “중심에 서는 신학, 오늘과 내일 - 장신신학의 정체성 형성에 관 한 소고,” 앞의 같은 글.

27) 맹용길, “통합신학 - 개요,” 『교회와 신학』 18 (1986), 30-76.

28) 김도훈,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통전적 신학>적 정체성과 <온신학>의 과제,” 『장신논 단』 48-1 (2016), 115-44.

29) 윤철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통전적 예수 그리스도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54-56.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적하고 더는 발전시키지 못한 까닭은 통전이 해석학적 원리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0) 현요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생명,” 『통전적 신학』, 269-311.

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성이 언급만 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일을 과제로 삼은 것이다. 후속 연구가 기대된다. 

김명용의 “온 신학” )은 통전적 신학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는

다. ) ‘통전’의 연장선에서 혹은 발전 과정에서 ‘온’ 개념이 등장했고, 비록 한글의 영문 표기로 TongJun을 사용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영문 표기(holistic) 역시 같으 며, 또 그 내용을 살펴보면 통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연을 넓히면서 발전시키려 는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종합한다는 의미의 ‘통’보다는 오히려 전체로 본다는 의미에서 ‘통’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부분들로 나뉜 것들 을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온’에 방점을 둔 신학이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 역에 대한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을 지향하는 신학의 과제로 이해한다. ) 

이종성이 사용한 개념이 하나님과 복음의 온전성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표 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미 잠재해 있는 통합 교단의 신 학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스펙트럼을 넓힌 온 신학은 무엇보다 신학적 구속력을 얻기 위해 성경적/신학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의미를 규정하는 노력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건 통전적 신학의 스펙트럼이 무한정 확 산해 아무 신학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예방책이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적 어원 연구를 통해 통전을 이해한 다렐 구더(Darrell Guder)와 기존의 통전적 방법론을 비판하고 삼위일체 신학으로 ‘통전성’을 설명 한 전철민의 논문 )이 눈에 띈다. 여기에 더해 융합의학자로서 의학적 신학을 시도 하면서 통전을 말한 최서형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3) 통전 개념의 다의성

(1) 통합적(integral)과 통전적(holistic)

통전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 무엇보다 ‘통전’과 ‘통합’의 구분이 필요 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용례를 보면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 기 때문이다. 언어의 혼용은 아직 의미에 관한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단적 인 예이다. 

구더(Darrell Guder)는 ‘통전’이 오해가 많은 단어임을 인정하면서도 holos (wholeness)에 대한 성경적 어원 연구를 바탕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행위의 영역이 우주적이고 모든 것으로 포용하고 포괄적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 니다.”35)라고 말하였다. 김명용의 “온 신학”은 비록 다렐 구더를 인용하고 있지는 않아도 그의 통전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통전적 신학을 정의하는 김명용의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방법적인 면에 서 통전적 신학은 “편협함을 극복하고, 중요한 정신과 관점들을 소홀히 하거나 간 과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 는 신학이다.” 이를 통해 통전적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바 탕으로 “완전한 복음”과 “교회와 사회와 역사와 피조 세계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전체를 온전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이다.”36) 주장으로만 남아 있을 뿐 온 전한 의미에서 통전적 방법으로 신학함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이종성의 한계를 넘 어서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명용이 지경을 넓히면서 온전한 의미의 통전적 방법으로 신학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단 통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성찰이 부족하다. 곧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통전이 구체적으로 어 떻게 작용하는지 등 이에 관해 밝힐 내용이 없는 것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다. 

 

75.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헬라어 ‘holos(전체)’에서 유래한 형용사다. 성경에서는 이 말이 110차례 사용되었다고 한다(145).

35) D arrell Guder, “Towards a Holistic Theology of Mission: World, Community, Neighbor,” 『선 교와 신학』 15 (2005), 153-77, 155. 

36) 김명용, “통전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통전적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53-81, 54.

예컨대 최근에 출판된 글 )에서 그는 창조론을 온 신학의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는데, 창조 신앙과 관련해서 과학과 신학의 갈등 관계를 염두에 둔 서술이긴 해 도 그것이 하나님에 관해서 얼마나 포괄적 인식인지, 또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온전한 표현인지를 보여주는 논증인지는 의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교리 에 매이지 않은 점은 높이 살 만한 해도,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을 인지할 만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은 흩어져 있는 개별자들을 일정한 원칙과 원리에 따라 전체 안으로 모아 

일관된 의미에 이르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흩어져 있으나 서로 의미가 통하는 것 을 한 그릇에 모은다, 혹은 서로 의미가 통하도록 하는 원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이 해할 수 있다. 혹은 코와 눈과 입과 귀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얼굴이라는 틀 안에서 함께 보는 것을 통합이라고 한다. ) 이런 의미의 통합은 장신대가 교단 신학의 정 체성을 규정할 때 사용하였다. 에큐메니즘과 복음주의의 대립 상황을 극복하지 못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분열할 때 보수의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움직임(예 장 합동)에 반하여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전략적 의미에서 ‘통합’을 표방한 것이 정체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종성은 통전적 신학을 말하면서 통전을 주로 통합의 의미로 사용했 지만, 전철민은 양자를 구별하여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통전적 시각이 오직 하나 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열린다고 보는 ) 전철민은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 holos의 용례를 밝힌 후 이 말이 “어느 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와 어느 공간 전체와 어느 영역 전반, 그리고 짜깁기하지 않은 통일된 하나를 나타내고 있다.” )라고 보고 이 것을 통전의 의미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통전은 부분을 전체와 관련해서 보면 서 동시에 부분을 전체를 위한 필연적 계기로 볼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전철민은 혼 합주의의 위험이 있는 통합 )과 구분하여 말하면서 통전을 “전체적인 안목에서 출 발하여 어떤 부분이나 개체가 본래 그 전체의 어느 부분에 속하여 위치하고 관계 하느냐를 밝혀서 부분과 개체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규명하는 방법” )으로 이해 한다. 이것은 해석학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결국 그는 양자를 구분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통전을 종합적 해석의 의미로 이해했다고 여겨진다. 

(2) 통전적 방법의 실제

통전적 신학을 말하기는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통전의 

기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은 찾기 어렵다. 그래도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 과 같다. 

이종성에 따르면, 통전적 방법이란 서로 다른 이론들,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도, 현실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기에 상황에 맞는 해석을 통해 장단점을 잘 살펴서 오늘의 교회 현실에 맞도록 종합하여 새롭게 구성해내는 해석과 종합의 작업이다. ) 이 점은 통전적 방법론을 포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한 윤철호에게서 잘 드러난다.

“통전적인 신학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신학의 주제와 내용 자체의 통전적 전체성에 근거한다. 기독교 신학의 통전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실 재성에 근거한다. 즉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편적 하나님으로서 모든 실재 와 진리와 의미와 관점을 자신 안에 포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서가 증언하 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자체가 통전적인 인간의 구원 과 창조세계의 완성을 지향한다. 즉 기독교의 복음은 영혼과 육체, 개인과 공동 체와 역사, 인간과 자연과 우주 전체의 통전적인 구원과 화해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통전’은 전체를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한다는 뜻이다. ‘통전’은 좌와 우, 아래와 위, 긍정과 부정, 개별자와 보편자, 특수성과 일반성, 그리고 믿음과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하고자 한다. 통전적 신학은 이것들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함으로써 단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한다.” )

이 인용에서 통전은 종합적 해석의 원리로 이해되고 있다. 전체를 온전성으로 

이해한 점에서는 통합과 구분한 것 같으나, 통전과 통합의 의미가 엄밀하게 구별 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윤철호는 ‘보편자’라는 철학적 개념을 동원하 여 통전을 해석학적인 통합 원리로 보았다. 이것은 판넨베르크의 보편해석학적인 관점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이해는 ‘통전적’이란 형용사를 붙여 신학적 주제를 상술한 다른 논문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대개 상반된 주장이나 이 론들을 일정한 관점에 따라 종합할 목적을 추구한다. 심지어 칼뱅의 신학 방법론 을 통전적이라 규정한 글은 통전적이란 말을 ‘중도의 길’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했

다. ) 김명용의 통전적 신학으로서 온 신학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신학을 생산하는 방법론적 원리로서 통전을 이해한다. 곧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 관점 에 매이기보다 “가능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한다. 달 리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구원 사역의 폭넓음을 인식하면서, 완전한 복 음과 인간과 교회와 사회와 역사와 피조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사역의 전체 를 온전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 

전철민은 통전 이해를 삼위일체 신앙에서 출발하고 또 통전의 근거로 삼위일 체의 상호교류(perichoresis)를 말했다. ) 통전의 기제는 “삼위일체적 삶”으로 표 현했다. 삼위일체적 삶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격적 으로 만나서 그 아름다운 관계를 말씀과 성령으로 깨닫”고 살아가는 삶인데, 이것 은 현실에서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권위와 질서를 사랑과 자유 가운데 지키며 각자의 개성과 전체적인 공동체가 동시에 역동적으로 아름답 고 영광스럽게 [사는 삶]”으로 나타난다. ) 그는 삼위일체적 통전성의 세 가지 원 리 )에 근거하여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곧 통전의 기제를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의 원리”로 표현한다. )

“모든 학문은 삼위일체의 통전적 관점에서 항상 전체(holos) 안에 개체

(pas)가 부품이 아니라 전체의 필연적 개별자로서 인식하여 그 학문 자체 안의 개별자들을 대하고, 타 학문 영역과 자기 영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또 하 나의 개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학문해야 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각 학문 분야 는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에서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가 타자 안에서 빛을 발하 는 원리를 삼위일체 안에서 터득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상으로 통전적 방법의 실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서로 구분되어 있고 심 지어 상반된 것을 오늘의 현실이라는 틀에서 해석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또 구 성하려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런 의미라면 굳이 없는 말을 새롭게 도입하여 ‘통전’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온 전히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역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한 목적을 지향하 지 않는 신학은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견해의 차이는 다만 이를 위한 노력에서 인 간학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이들의 노력은 ‘의미를 얻 으려 해석을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상반된 것들을 통합하다’ 혹은 ‘포 괄적인 인식을 통해 온전하게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얻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통 합은 서로 이질적인 것, 상반되는 것, 서로 대립하는 것을 전체로 보면서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또 어떻게 해서든 오늘날에 유용한 의미를 얻기 위해 종합하는 데에 집중한다. 통전의 기제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3. 생명의 통전성과 통전의 기전(機轉 mechanism) )

1) 최서형의 통전 이해

최서형은 융합의학자로서 생명의 통전 원리를 바탕으로 신앙의 원리를 탐구

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의학적 신학 )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랜 임상 경험을 통해 발견한 “담적증”55)의 신학적인 함의를 한국교회의 위선적 현실을 진 단하는 데 응용해서 각종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56) 이런 노력에서 출발 점에 해당하는 그의 통전 이해는 종합적 해석으로 포괄적 의미에 이르려는 노력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치료를 통해 영·혼·육의 온전한 생명을 구현하고 또 이웃 사랑을 통해 실천적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57) 대체로 해석 이론에만 머

 

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 포함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의학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계에 아직은 낯선 ‘의학적 신학’은 의료 윤리에 관해 신학적으 로 성찰하는 관습을 넘어 — 물론 이것도 포함한다 — 의학적인 원리의 신학적인 의미를 탐구 한다. 이와 관련해서 최서형이 말하는 핵심 진술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나 사회도 사람처럼 유기적 생명체여서 그 내부에서 진행되는 질병 패턴이 인간에게 진행되는 병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때,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질병의 패턴을 분석하는 의학의 치료방식을 활용하면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게 될 것으로 사료된다.”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을 먹이다』, 6.  

  유 럽과 구미에서는 이미 고통, 질병, 죽음, 치료 등 다양한 주제들이 “The Theology of Medicine” 혹은 “Theologie und Medizin”이란 맥락에서 다뤄졌다. 참고: Thomas S. Szasz, The 

Theology of Medicine (New York: Harper Colophon Books, 1977); Peter Stulz (ed.), Theologie und Medizin-Ein Interdisziplinärer Dialog über Schmerz und Leiden, Heil und Heilung 

(Zürich: Chronos Verlag, 2004). 한국에서 이정배는 민족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인 간 이해를 추구하였는데, 이런 시도 역시 의학적 신학의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다음을 참고: 이정배, “기독교 인간이해에 대한 한국적 성찰 - 민족의학과의 만남의 시각에서,” 『신학과 세 계』 29 (1994), 103-39.

55)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을 먹이다』, 13. 이곳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담적증은 뱃 속에 딱딱한 덩어리가 생기는 적취(積聚)와 달리 위장에 특별한 증상은 없는데도 몸에서는 큰 병이 진행하도록 유발하는 위장 장애 상태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담적증은 담적증후군의 약자로 위장 외벽에 담(음식 찌꺼기가 부패한 물질로 플라크와 비슷하다)이 라는 독소가 다량으로 축적되어 위장 외벽이 굳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명치 끝 통증, 경련, 팽 만감, 속쓰림, 트림, 구토와 오심, 역류, 체중 등 다양한 증상을 일으킨다. 동의보감과 청나라 때의 의편과 명나라 때의 증인맥치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동안 적취로만 알려져 있었고, 또 담적이란 말은 나오지만, 담적증후군은 현대에 재발견된 질병이다. 이 담적증후군이 최서형 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져 현대에 재발견되기 전까지, 이것은 증상만 있고 원인은 없는 신경 성 위장병 취급을 받아왔다. 담적증 발견 과정과 치료에 관한 글은 다음을 참고: 『담적』, 『밥 통 대반란』, 『치료혁명』. 

56) 최서형은 『한국교회에 한방(韓方)을 먹이다』를 한국교회의 위선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치료 를 위한 대안을 제시할 목적으로 집필하였다.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가 위선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선 통전적 사고를 갖추어 생명의 통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위선의 본질을 밝히면서 교회론, 신앙론, 신앙감정론, 기독교 교육, 기독교 인간학, 그리고 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57)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韓方)을 먹이다』, 76.

물러 있는 통전적 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병을 치료하는 의료 인의 실존적 관심이 반영된 관점이다.

최서형 역시 통전과 통합을 구분한다. 통합은, 그가 평생 과제로 삼고 있는 “통 합의학” )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높 이는 일이다. 이에 비해 통전은 생명의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에서 구분되 어 있고 심지어 상극의 것이라도 전체로 볼 수 있는 이유이며, 또한 그들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성과 일치를 발견하는 노력이며 관점이고, 그리고 유기적 관계 가 건강하게 작용하도록 노력하는 일 역시 포함한다. ) 부분들을 종합하는 노력 에만 머물지 않고 융합의학적 원리에 힘입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부분들 사 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기전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에서 간과한 상호 연결성을 구체적으로 상술한다. 곧 상호호근, 상생상극, 상호융합(相互互根, 相生相剋, 相互融合) )을 말한다. 교회 구성원들의 일치를 유기적 관계로 설명하고(고전 12:4~27, 롬12:3~21) “서로 같이 돌봄”의 원리(고전12:25)로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 수도 사랑할 것(고전13장, 롬12:9~21)을 말한 사도 바울처럼 최서형은 그 유기적 관계와 돌봄의 원리 그리고 사랑을 생명의 통전을 매개로 상술한 셈이다. 생명의 통전성, 곧 유기적 관계의 통전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생명은 육적 측면, 영적 측면, 정신적 측면의 3요소로 구성된 셈이 다. 이 영역들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면서 상호융합 작용을 통해 온전한 생명현 상을 발현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인체를 이루는 3요소의 관계성은 육(물질)은 영과 정신에, 영은 육과 정신에, 정신은 영과 육에, 서로 뿌리를 두고(상호호근 관계) 절묘한 조화와 균형과 합력(合力)의 기전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3요소가 조립 형태가 아닌 각각은 전체 표현되고, 또 전체는 하나로 발현되는 상호융합 의 합력 형태이다. 마치 삼위일체적 형상과 상통하는 통전적 인간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조주의 사람 창조 섭리 덕분에 인간의 모든 생, 병리, 행동 양태, 언어, 체질, 생각, 품성 등의 모든 생명현상은 이들 3요소가 상호 연계되는 통전 기전에 의해 발현한다.” )

2) 이분법적 사고와 하나님의 생명 섭리

통전의 기전으로 밝히고 있는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시종 비판하 고 또 통전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여기는 ‘이분법’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에게 ‘이분법적 사고’란 생명 요소에 있는 기능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알지 못하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관습적 태도를 의미한다. )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 려는 마음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나 있을 정도로 인간 의 본질적 속성이라 볼 수 있다. ) 이런 사고는 타락 후 인간에게 고질적인 성벽으 로 자리 잡고 있어서 사회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 또 교회가 “세상 변화 능력”을 상실한 “근본 이유”로도 작용한다. 근원적인 치료가 필요하며, 심지 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 이분법적 사고가 지닌 문제의 심 각성은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의 위선을 조장한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이분법적 사고는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는 거기서 배제하여 안 그런 척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통전은 “생명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보지 않고 전체로 인식하는 데 있다.” )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생명의 상태를 얻기 위한 온전한 치료를 지향한다. ) 그는 이것을 “통전 생명관” 혹은 “하나님의 생명 섭리” )라 말한다. 하 나님의 창조는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 도인의 생각과 삶은 온전한 생명을 위해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반드시 통전적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된 생명의 속성인 통전은 인간은 물론이고 교회와 사 회의 건강을 위한 당위적인 요구이다. 교회와 사회와 세상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상호작용의 원리로 작용하기에 성령을 따르는 순종을 통해 통전이 이루어진다. 이 런 결론은 그의 의료적 임상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을 하나님의 생명 섭리로 설명

하여 얻은 것이다. ) 

3) 통전의 실제로서 미디에이터

이것을 확장하여 신학함의 방법론으로 삼는다면, ‘통전적’이란 설령 현실이 나뉘고 분리되어 보인다 해도 이것을 당연시하지 않는 관점이다. 오히려 전체로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 섭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유기적 관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 안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도록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현실을 더욱더 풍성하게 또 유기적으로 작용하도록 구성하여 온전케 하는 방법론적 원리 이다. 곧 상극 관계에 있는 존재 사이에서 각자가 서로를 인지하고, 또 각자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여 타자에게서 도움과 비판을 받으면서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이 일 어나도록 하는 중재자 역할이 곧 통전이다.  ) 

최서형은 이 일이 하나님의 생명 섭리에 따른 것으로 신앙과 신학에서 당연하 게 따라야 할 일이지만, 그것의 온전한 실현은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 다. 그래서 통전의 궁극적 실현을 성령의 사역으로 본다. 이는 곧 통전의 현실이 인 간의 눈으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의 온전한 현실화는 인간의 한 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통전을 하나님의 섭리로 말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령의 온전케 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것은 생명의 영(롬8:2)이고 진리의 영(요14:17)이며 중재자(보혜사, 요16:7)로서 성령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맞닿아 있다. 

최서형은 통전의 기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곧 통전의 실제에 서 핵심은 통전의 의미를 강조하기보다 이질적인 것, 심지어 상극적인 것 사이에 서 실제로 유기적 상호관계가 일어나도록 매개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몸에서 생 명과 관련해서 작용하는 통전의 원리를 하나님의 생명섭리로 설명하였다면, 현실 에서 통전은 제자로 훈련된 사람의 순종에 의해 중재되어 성령에 의해 현실이 된 다고 본다. 최서형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핵심 방법이 “사랑”이며 )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통과 유기적 관계를 중개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디에이터”

(mediator)라 한다. 

일종의 ‘작은 예수’ 혹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미디에이터

는 “서로 다른 것을 이분화하지 않고, 상호 소통과 융합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통전생명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 “갈등과 분열된 사회(공동 체)를 온전케 하며 생명력 있게 만드는 인물”이다. ) 

미디에이터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인 인간이 치유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예수님의 도구”와 “성령의 그릇으로 거듭나서” 교회와 사회의 유기체 적 관계가 가능하도록 통전 기전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 

미디에이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이며, 제자로서 사역자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부름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는 중간 매개자다. 곧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도록 돕는 사역자이며 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은 사역자이다. 최서형의 관점에서 통전 생명관에 따라 사는 미디에이터의 자세를 바울의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 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 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고후63~8a)

Ⅲ. 나가면서

철학과 신학에서 통전은 종합적 해석 방법이며, 이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통합

을 지향한다. 통합은 전체의 맥락에서 부분을 보거나 각 부분이 공유하는 의미를 통해 전체를 이해하는 노력이며 관점이다. 이런 관점의 통전적 신학이 해석 이론 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이에 비해 최서형은 통합의 필요성을 넘어 융합의학적 임상 경험에서 얻은 치료 방법을 매개로 그것의 기전을 밝혀 통전의 실천적 의미를 부각했다. 또한 한국교회 문제를 생각하면서 통전의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 제시하였다. 

최서형의 통전은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상호관계하는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로 보게 하는 관점이다.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또 전체의 유기 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말하도록 하 는 관점이다. 통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하는 원리이면서 또 신앙의 순종을 통해 그 현실을 선취하여 경험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통전’은 세상을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을 넘어 기존의 인식과 인식 방식(이분법적 패러다임) 을 비판하는 원리이고, 비록 서로 다른 것이라도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결합하는 원 리이며(협업과 융합), 또한 그동안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유기적으로 이 해하고 또 건강한 유기적인 현실을 밝힌다(개혁). 그러므로 통합은 넓은 의미에서 통전에 포함할 수 있으며 통전의 전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최서형은 이런 관점을 제자 및 영성 훈련을 통해 체득하여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미디에이터라 명명한

다. 신학자들이 통전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통전의 기제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점을 생각한다면, 최서형의 통전 이해에서 통전 신학의 실천적 가능성을 볼 수 있 다. 이에 따른 통전 패러다임은 하나님과 인간과 교회에 관한 각종 신학 이론은 물 론이고 통전적 목회를 지향하는 현장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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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Abstract>

A Study on the Various Meanings of  

‘TongJun’ and Its Mechanism

CHOI, Sung-Soo (Dr. theol.)

Assistant Pastor

Systematic Theology

Eunhyun Church

South Korea

This thesis aims to identify various meaning of “TongJun” that prescribes a theological methodology and to reveal the mechanism of it to expand the extension of the holistic theology.

It is not clear since when “TongJun” was used in theology and churches, but it can be seen as a concept composed for the purpose of conveying a specific meaning, such as ‘trinity’. The problem is that the meaning of it is unclear and is used in the sense of ‘integral’ or ‘comprehensive’. The key is to understand what is meant to be spoken by ‘TongJu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take a glance at some philosophical tendencies that prefer the meaning of ‘integral’ or ‘comprehensive’.

This thesis lies on the critical reflection of two cases trying to understand the notion of wholism. One is compromising the biblical usage of ‘wholism’ to obtain senseful meaning as a theological methodology, and the other one is settling and describing the typical meaning of wholism based on the example of Rhee Jong Sung who claimed ‘holistic theology’ for the first time. It is true that they have brought the notion of wholism into light, but understanding it in the typical way is not convincing enough. This is because, most of all, it was already used even before Rhee Jong Sung and there are still ongoing attempts to figure out new ways to understand it. Before confirming the meaning of a notion arbitrarily, a critical consideration of various examples needs to be preceded.

In this thesis, the author reveals the limit of the meaning of ‘integral’ and ‘comprehensive’ used in philosophy and theology, and how TongJun takes place which is adequate to be a theological methodology. This is because the mechanism of TongIun needs to be clear in order to use it as a theological methodology or to examine whether it is theologically proper or not.

Especially, Choi Seo Hyeong will be introduced, who has been nominated as a New Korean Intellectual for his contribution to East-West Convergence Medicine and devoted to the construction of medical theology, presenting a unique perspective that is remarkable for holistic theology.

Keywords *

 

TongJun, holistic theology, mechanism of TongJun, perichoresis, organic interrelation

•투고(접수)일 : 2021. 1. 5  •심사(수정)일 : 2021. 2. 4  •게재확정일 : 2021. 2. 6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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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3 13:07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아래의 답변
최경식
조회 수 1019 추천 수 55 댓글 21

제가 수련회이후 어디 피정 나와서 이제사 글을 봅니다. 한 목사님과 그리고 그때 더 많은 논의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발제상 구조문제도 지적하신대로 있었던 것 같구요. 첫 번 째 지적대로 통전적 선교를 말하며 에큐메니칼 진영의 문제가 있는것 처럼 말하는데 그 문제가 발제에 없었다는 지적은 정당하며 아마 제가 보안하여 답변을 넣어야 될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문제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질문자가 다르게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부분은 계속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어떤 한계나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고, 저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 것이죠.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최병천 목사님께서 사회하면서 어느정도 제가 할말을 하신것 같아 서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제 나름대로 이해한 것은 분명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갈등 내지 대립이 존재했던건 확실합니다.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자체가 복음주의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선 분명 복음주의와 대척점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요. 여기까진 서로 동의를 하는것 같은데---문제는 그럼 에큐메니칼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개인구원을 포기했느냐 그렇게 보는건 잘못이다--이런 주장을 하는것 같아요. 맞아요.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개인구원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진 않았지요.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만큼 개인구원에 대한 강조점을 많이 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원치않게 개인전도에 대한 열정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자 에큐메니칼 자체에서 반성이 일어나게 되고 여기서 복음주의 진영이 주장한 것에 대한 이해를 폭 넓게 하게되고,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옵니다. 바로 로잔대회에서죠. 여기서 복음주의자들도 자기들의 한계를 인정 하여 에큐메니칼 입장의 복음을 다시 정립하게 되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개인구원에 대한 부분도 다른 측면과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물론 개인구원을 포기한적은 없지만 약화될수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죠) 위의 질문에서 보면 발제자가가 에큐메니칼 입장에 대해 개인복음을 부정적으로 말을 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제가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측이 개인구원에 대해 약화된 부분을 다시 재정립했다고 보아집니다. 사실 이제껏 복음주의적 진영에서는 복음을 수직적 차원에서 이해하였고, 에큐메니칼은 원하든 원치않든 수평적 차원이 많이 강조된건 사실이지요.(그런다 해서 수직적 차원을 버린건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복음을 수평적차원에서 보는 것이 강조됨으로 수직적차원이 약화될 여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론을 들고 나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왜 통전적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그렇게 말한 이유와 배경을 잘 이해하면 그동안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에서도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선교를 보다 더 복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것을 다 포함하여 선교신학을 더 확립하려는 시도라 볼수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를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통전적 선교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선교의 개념을 보다 넓게 이해한 곳이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가 좀 되시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의 말을 우리가 같이 들었으면 합니다.
흔히 ‘통전적’이란 형용사는 선교를 수직적 차원이나 혹은 수평적 차원 중 한 방향만 이해하는 흐름을 수정하려 할 때 사용된다. 비셔트 후프트는 1968년 세계선교협의회(WCC) 웁살라 총회 개막연설에서 이러한 두 차원을 성서적으로 종합하여 함께 끌어 안으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삶과 연관된다는 복음의 수직적인 해석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갖는 복음의 수평적 해석 사이에 커다란 긴장이 여전히 상존함을 보면서, 이제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를 왕복하는 유치한 운동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쪽으로 치우친 모습은 본질적인 면에서 복음의 진리를 충만하게 포용하려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직적 차원을 상실한 기독교는 소금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여, 스스로 맛을 잃고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공동체를 향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수직적 차원에 우선순위를 두는 기독교는 성육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안에서 우리를 총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위의 말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하는 것으로 선교의 지엽적인 문제가 양자에 다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차원엥서 나온 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을 이전보다 더 통전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 선교관을 들고 나온 배경은 이제는 복음을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이렇게 나누어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큐메니칼이 수직적 차원을 거부한적은 없었죠, 그러나 복음주의와 달리하다 보니 그 부분이 그들이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약화를 불러올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통전적선교를 주창한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론을 주장한 곳은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진영임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은 확실히 건강하다고 저는 보는것이죠. 어떤 한계나 부족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것이야 말로 진정 에큐메니칼이죠, 에큐메니칼이라 해서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식으로 보는것이야말로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며 맹신입니다, 에큐메니칼이 건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주창한 것에 어떤 한계가 보일 때 그동안 대척점에 서 있었던 복음주의자들과도 대화하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더 나은 선교신학을 주창하는 것이야 말로 에큐메니즘에 합당한 것이죠.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통전적 선교론이었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진영이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혹 이 부분을 더 쉽게 더 깊게 알기 원하는 분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면 될것 같습니다. 아마 이 책을 보시면 에큐메니칼 진영이 왜 통전적 선교를 들고 나왔는지를 알게 될것입니다.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김동선, 대한기독교서회 출간


더 좋은 논의를 위해 계속된 질문과 응답을 기대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연화리 피정의 집에서 최경식드림

#답이 길어서 따로 올렸습니다.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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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1'
2012.02.23 15:09
좋은 답변입니다. 대화는 언제나 활기를 줍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토론을 통해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누구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글을 대화방으로 옮깁니다.
댓글

한상복 2012.02.23 17:47
이 논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다시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더 공부하며 토론에 임하겠습니다.
우선 몇가지 질문으로 다시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1. 1974년에 있었던 로잔 세계복음화 국제회의는 분명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1968년 제4차 에큐메니칼 총회가 웁살라에서 열렸고, 이 총회에서 WCC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더욱 강하게 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속 활동으로 1973년 '오늘날의 구원'이란 주제로 모인 방콕대회에서 구원을 다음과 같이 '통전적'으로 정의내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삶의 새로움으로,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전개로서, 또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죄인을 의롭게 하심과 사회적,정치적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120쪽)
이러한 구원에 대한 WCC의 정의는 복음주의 교회들을 우려케 하였고, 이듬해인 1974년 "땅이여 주의 음성을 듣자"라는 주제 하에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존 스토트가 중심이 된 로잔대회입니다. 물론 여기서 작성된 로잔언약에는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 한 교회의 과거 모습을 참회하고 사회참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움직임은 통전적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에큐메니칼에 대한 우려와 대응으로서 양진영을 갈라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참여를 말하고 있으나 전도의 우위성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전도와 사회참여를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원과 순간, 개인과 공동체, 종교와 문화, 복음화와 사회참여,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 구원과 해방, 세계와 교회 등,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원론을 없애는 것을 선교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교,김동선,41쪽)

로잔대회는 중립적인 대회가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의 대회임을 볼 때, 그 결과물로 통전적 선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 심방이 갑자기..... 다음에 계속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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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09:59
계속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이 조금씩 좁혀 지리라 여겼습니다
74년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대회가 맞습니다(이건 제가 잘못알았음) 그러나 이 대회는 복음주의가 회개하고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였지 분리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75년 나이로비 에큐메니칼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복음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통전적 선교방향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트게 한 대회였지요, 따라서 74년 로잔복음대회와 75년 에큐메니칼 총회는 자신의 입장만이 아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선교를 이해와 합일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선교대회였습니다.
지금 한목사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 초기에 나타난 것들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은 한목사님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선교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별 갈등없이 공동의 유산아래 선교를 하던 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에 갈등과 대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근거는 갈등과 대립할 시기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그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복음주의적 요소를 반영하여 통전적 선교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초기신학과 후기신학에 조금의 차이가 있듯이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도 많은 변천과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에큐메니칼의 장점이면서 특징입니다. 다음의 자료를 자료실에 올려 드릴테니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의 선교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시면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국신학계에도 복음주의 입장에 선 교수님도 계시고, 에큐메니칼 입장에 선 분들도 계시는데(호신에 김동선, 장신에 한국일), 한국일 교수님이 발제한 소논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논의한 것을 다루고 있으며, 앞전에 소개한 김동선 교수님의 책도 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 까지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가 단지 개인을 넘어 팩트에 근거한다면 더 발전적인 논의가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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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0:24
그리고 추가적으로 김동선 교수의 책 하나님의 선교(2000출간) 보다는 더 최근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007년 출간)을 참고하시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한목사님은 ‘하나님의 선교’ 라는 책을 통해 에큐메니칼진영의 선교신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 나오는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을 보시면 선교역사를 지금은 어떻게 보는지를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책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복음주의 진영과의 문제 그리고 화해와 일치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서술한 좋은 책입니다. 1장;선교와 전도, 2장;공동의 증언을 위한 소명, 3장;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4장;화해의 사역인 선교, 5장;교회의 치유선교---이 큰 목차의 흐름에서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떻게 변천되고 발전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로 좋은 공부의 기회입니다. 심방중 바쁠텐데 건강유의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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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수 2012.02.24 12:28
목사님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토론 내용을 읽으면서 다시 정리도 하지만, 다시 책을 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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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영 2012.02.24 12:55
이번토론을 보면서 느낀것은 '통전적 선교'라는 용어가 어느 진영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다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자신들의 제한된 구원론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한목사님이 지적한데로 개인영혼 구원(일차적)도 중요하고 사회구원(이차적)도 중요하다는 식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때는 주로 급진적인 구원의 확장으로 나아간 진영에 대한 경계로서 이 용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종교적 에큐메니칼' 진영을 포함한 인간 구원이해를 단지 '인간화'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서 '통전적인 선교'를 말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때 이 용어는 두 진영의 선교관의 한계를 바로 직시하면서 곧 구원이해를 '값싼 은혜'의 차원으로 보기 쉬운 복음주의의 문제점과 또 구원사가 세계사안에 흡수되어 버리는 급진적인 에큐메니칼 진영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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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3:12
강목사님 이번에 뵙지못해 아쉬웠습니다. 잘 계시죠 그리고 명목사님 먼데서 와서 깊은 얘기도 못나누고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그래요 통전적 선교는 복음주의진영과 에큐메니칼 양 진영에서 지금은 다 사용하고 있는 선교용어입니다. 이 말은 명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양진영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인식했다는 의미이며 선교의 이해를 넓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하여 선교에 대한 일치와 화해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볼수 있지요. 아뭏든 좋을 지적과 문제 제기들 감사하며, 자료실에 있는 한국일 교수의 소논문과 김동선 교수의 책을 보면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 훨씬 명쾌하게 선교신학에 지금 어디 까지 와 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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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4 13:54
답변 감사합니다.
이로써 에큐메니칼에 대한 보다 사실적 접근이 된듯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다시 질문드리자면,

1.로잔언약이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선언인가?
로잔대회는 보편적 교회회의도 아니며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저는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과 웁살라와 방콕대회의 선교에 대한 지평의 확장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고 바른 선교적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여 에큐메니칼에 대항하는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따라서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진영이 선교를 폭넓게 수용한 대회가 아닙니다. 로잔언약은 더욱 선교와 복음화의 이원화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대회였습니다. 그 언약 내용은 상당히 개방적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은 로잔언약에서 성서의 절대성(성서의 무오류성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복음전도의 긴급성, 국내교회의 자립을 위한 선교의 일시적 중단촉구 등이 표명되었습니다. 위의 표제들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어보입니다. 아니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장 기독교적인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에큐메니칼이 이런 중요한 것들을 흐트리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로잔대회 이후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간의 갈등이 첨예화 되었습니다. 이 로잔언약이 과연 과거 자신의 문제에 대한 회개에서 나왔으며,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수용한 것일까요?

2. 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복음전도 이 용어는 참으로 모호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한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이 결여되거나 소홀히 취급되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은 복음전도를 선교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이 둘은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 이므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러한 통전적인 선교에 대한 이해가 에큐메니칼 진영 안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에큐메니칼 신학자는 복음주의자들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다시 교회가 복음전도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를 최경식 목사님께서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용어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다시 반복해서 질문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에큐메니칼에서 말하는 선교개념이 통전적이지 못하고 치우친 것이었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복음주의자들의 논리대로 이 둘(복음전도와 사회참여, 혹은 복음화와 인간화) 사이를 갈라내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저 이원론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복음을 문화로 부터 분리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언제나 복음의 절대성을 부르짖게 될 것이고, 복음의 우월성을 주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회심 없는 사회참여의 중요성은 간과될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로잔언약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긴급성, 절대성, 유일성과 같은 표어들만 득실거리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화 사회참여 등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언제나 구원과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해봐야 그런 일들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니까요. 제가 과한 염려를 하는 것일까요?

애초에 에큐메니칼이 주장했던 구원의 개념과 선교의 개념들을 우리는 유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개인의 구원이 그가 속한 사회,정치,경제,문화,환경 등을 떠나서 논의될 수 있는것인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는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무관한 것이었는지. 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선포하고 선교를 하는 일을 주저하는 것일까요?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과 무종교인들과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런 통전적 개념들이 그 틀을 무너뜨리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지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처럼 할례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듯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성전을 짓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던 솔로몬처럼,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는 마치 유대교의 위치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신앙의 탄생을 두려워하는 자의 심정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제가 다시 반복되게 함을 용서하십시오.
여기서 접근되지 않으면 더이상의 토론의 진보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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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17:16
심방 잘 다녀 오셨습니까? 바쁜중에 긴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 답변을 드릴께요

1, 로잔대회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더욱 첨예한 갈등을 가져온 대회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로잔복음주의 대회는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개념에 있어 에큐메니칼 입장을 많이 수용한 대회였으며 향후에 복음주의 안에 선교의 틀을 확장시킨 대회였습니다. (참고서적,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김동선 옮김,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259쪽)

2.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하는 에큐메니칼의 선교개념이 통전적인 것이 아닌가? 반쪽짜리인가?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처음부터 얘기한 선교개념에 복음주의 요소를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통전적 선교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을 주장한데서 한발자국 더 진일보한 선교이론입니다.
“1972/1973년에 걸쳐 방콕에서 오늘날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선교대회는 선교에 대해 통전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된다. 방콕대회는 영적인 면과 사회 정치적인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둘 중 어느 하나에 우선 순위를 두지도 않았다 (참고서적 위의 책, 250쪽)
심지어 2005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을 연결하려는 접촉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세계교회 협의회 문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위의 책, 254쪽)
따라서 위에서 주장한 한 목사님의 말; 에큐메니칼 선교가 처음부터 통전적이 아니었나 라고 묻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고 세계교회협의회 문서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특징은 선교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점입니다. 이게 그들의 큰 장점입니다.

3.우리 모두는 어떤 신학적 관점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목사님의 신학적 관점도 존중합니다

4.그러나 우리의 신학적 토론이 어떤 사실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면 그건 역사적 팩트위에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위에서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말할수 있다고 보나 그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5.만약 한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이 에큐메니칼 입장이었다고 말씀하신다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말한 그 근거를 밝혀 주시면 보다 나은 대화가 계속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한 개인이 주장하는 개인적 견해일 뿐이며, 이런 논의는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6.제가 주장하는 것은 앞에서 여러번 주장했듯이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내어 놓은 자료위에서 한 이야기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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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4 19:22
여기서 의견차이가 더이상 좁혀지지는 않을듯 합니다.
1.역사적 팩트는 IMC와 WCC의 통합이 복음주의진영에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고 로잔대회로 모이게 했으며 LCWE(로잔세게복음화위원회)를 탄생케 했다는 것입니다.
이형기 교수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인식하고 번역한 WCC자료들이 있습니다. <기원과 형성>, <40년사>, <역대총회 종합보고서>, , <하나의 신앙고백>, <에큐메니칼 신학의 발전사1,2>, 등. 이들 책들에서 보면 로잔대회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조금씩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중 <40년사>를 인용하자면, 102쪽에 제가 위에서 인용한 방콕대회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인용한 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세계선교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희망의 한 징표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전적'(holistic) 접근은 다른 사람들을 우려케 하였다.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김동선 교수 역시 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 46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정치상황에 대한 개입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심한 반발을 받았다. 제네바대회가 열린 196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세계복음대회"가 열렸고, 1969년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빌리그레함이 주축이 되어 "미국전도대회"가 열렸다. 이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로 이어졌다"

이 로잔대회가 통전적이라는 것은 최경식 목사님에 따르면 김동선 교수님의 해석입니다.(사실인지 책이 없어 파악은 불가합니다.)
최경식 목사님 말씀대로 김동선 교수 역시 통전적 선교신학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의 인간화가 인간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회심을 과소평가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며 따라서 통전적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그의 책 하나님의 선교에서도 이렇게 주장합니다.)

로잔대회는 분명 에큐메니칼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지닌 복음주의진영의 대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는 WCC의 대척점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WCC를 교회대표기구로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음주의 진영의 새로운 교회협력기구가 생긴 것이죠(WCC와는 다른 느슨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저 이러한 역시 자료 위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로잔대회가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개와 에큐메니칼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그 결과로 파생된 로잔언약의 신학이 통전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분이며, 분열이고, 과거로의 회귀입니다.

2.로잔대회와 그 결과물인 로잔언약이 결코 통전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한 것이고, 그 결과물에 대한 해석은 저의 견해입니다.
이미 밝혔듯이 에큐메니칼 안에도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두가지가 병행될 때, 통전적 선교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말 그대로 병행(우선순위가 있는)이지 통전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옳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 다시 이원론으로 돌아가서 둘 다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 둘을 이분화함과 동시에 둘다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안에서 이러한 퇴보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큐메니칼이 더 철저하지 못하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3.우리가 만약 다시 이 둘을 구분하고 복음을 문화 위에 두며, 우월성과 절대성과 우선성 등을 피력하기 시작한다면 선교뿐만 아니라 다양성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의 정신이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선교를 외치는 에큐메니칼은 쇠퇴하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주의가 우리시대에 득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안위를 걱정하여 교회주의자가 된다면 에큐메니즘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통전적? 복음화와 인간화의 조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의 조화?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들이 표상하는 것은 비록 복음일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개교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를 삼킬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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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05
로잔대회의 성격에 대한 해석은 김동선 교수의 개인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발간한 선교역사 문서입니다.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펴낸 자료집 '세계선교대회의 역사(1910-2005)-참고 김동선교수 번역, 세계교회협의회 지음,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246-255//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목사님이 무얼 주장하고 싶어하는지는 제가 압니다.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그런 에큐메니칼 선교가 저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며, 또 한목사님이 주장하는 그것을 에큐메니칼 진영이 포기한적도 없고 그대로 지금도 이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발제나 지금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이 그것만 고집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이론도 상당히 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견해가 아니고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스스로 발간한 내용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왜 그걸 구지 부정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자료실에 한국일 교수님이 쓴 논문을 좀 읽어보면 오늘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금방 알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어디까지 선교신학을 발전시켰는가 하면 그들 스스로의 자료집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까지 선교신학이 나아갔어요, 그게 2005년문서에 나와 있어요. 다만 예를 들면 이럴수는 있어요. 저나 한목사님이 저는 이런 에큐메니칼의 선교신학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개인의 신학적 주장을 펼수는 있다고 봐요, 저는 그런 것에 한목사님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진 않아요. 다만 제가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주장하는 것이 뭔가를 정확히 알자는 거예요, 이건 개인 신학이나 개인이 이해하는 차원이 아닌 역사적 팩트가 있는데 이게 다르다고 하니---참 난감하네요. 저의 답변은 이제 이정도 해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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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4 21:17
한목사님이 위에서 역사적 팩트라며 이렇게 로잔대회에 대해서 인용을 했지요.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그들 나름의 세계 복음전도 회의를 계획하고 있었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우려케 하였다. 그들은 말씀선포가 그 같은 비전의 포괄성 속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잔대회가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적 책임을 선교정책으로 입안하려 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될 경우 복음이 사회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난다고 오히려 우려하는 목소리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오히려 로잔복음대회가 그만큼 에큐메니칼 진영의 많은 부분을 취하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세계교회협의회 자료와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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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4 21:37
위의 논의를 통해 이 글을 읽는 자들이 선교신학의 현 주소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최목사님과 한목사님, 두 분의 입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합니다. 어떤 부분은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 좁혀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시각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신학회의 장점이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1)다음에 책으로 낼 때, 여기서 행해진 논의도 요약해서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2)아마 선교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인해, 같은 자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위 논의는 이 정도로 하기를 권합니다. 수고했고, 좋은 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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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2012.02.25 16:23
이번 토론으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1974년 로잔대회에 대해 더 바르게 공부할 수 있어서 최경식 목사님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금 더 연구하고 생각해 보니 최경식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따라서그 부분에 대해서만 첨가하고자 합니다.

1974년 로잔대회는 방콕CWME대회의 구원이해에 대해 도전하기 위해 복음주의 진영이 계획한 대회였습니다. 그들은 이 대회를 통해 구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성령을 통한 거듭남이며, 따라서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되며 사회정의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후에 자연적으로 따라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명예회장인 빌리 그레이엄도 로잔대회의 목적중의 하나가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대회가 진행되어갈수록 존 스토트의 영향력으로 방콕대회에서 강조된 복음의 사회적 성격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대폭 반영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의 진일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결과 로잔언약은 이 두가지(반에큐메니칼적 의도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새로운시각)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이 대회를 통해 사회적 책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점은 큰 발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의도에 집중하였기에 제가 오해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반에큐메니칼적 의도라는 관점으로 로잔언약을 읽어보면 한계성이 분명 보입니다.
사실 그동안 복음주의계열의 책들은 깊이있게 읽지는 못했습니다.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전도의 우선성에 대한 강박이 구원과 선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방콕대회의 구원개념의 정당성,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를 구분하기 보다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토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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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2012.02.25 19:11
두 분의 토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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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5 21:58
잘 차려 놓은 밥상에 밥 숱가락 하나 더 얹어서 잘 얻어 먹고 갑니다.
최경식목사님과 한상복목사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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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경 2012.02.26 20:51
잘 읽고 갑니다.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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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2.28 10:49
토요일 주일준비하고, 주일-종일 예배드리고 월요일 심방갔다오다보니,---- 오늘 화요일 정상 출근해서야 여기 들어옵니다. 정신이 없다보니 답글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위에 한목사님 좋은 대화와 토론 감사합니다. 저의 발제에 대한 한계를 잘 지적해 주어서 감사를 드리고요, 다양한 토론으로 제가 공부를 더하게 되어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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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생 2012.03.01 20:18
두분 목사님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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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출신 2012.04.02 13:10
글 잘 읽었습니다. 김동선 교수님한테 선교신학을 배운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은 17세기 칼빈주의의 문서에도 나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교리도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아래의 글에도 대글이 달려 있습니다. 참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복음주의 진영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할 수 있겠지만 보수 진영의 언어도 알고 보면 매우 사회참여적입니다.

김동선 교수님의 도식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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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2012.04.06 07:07
감사합니다. 참고 하겠습니다. 늦게 들어와서 이제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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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021 내가 꿈꾸는 교회 - 개벽교회론 서설

알라딘: 내가 꿈꾸는 교회


내가 꿈꾸는 교회 - 개벽교회론 서설 
손원영 (지은이)
모시는사람들2021-03-20











































정가
25,000원
448쪽

책소개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자성하고 개탄하는 한 신앙인이 꿈꾸는 미래의 한국 교회상을 100가지로 제시한 꿈의 교회로 나아가는 지도책이며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교회의 설계도이다. 교회희망 100개조, 희망교회 100개조의 꿈의 지도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예수님처럼 '가나안 교회'를 설립하고 오로지 하나님과 오로지 믿음과 오로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저자가 목회의 현장에서, 기도의 단하에서, 연구의 책상에서 길어 올린 말씀이 기록이며, 소망의 기록이며, 신념의 기록이다.

책의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쉬이 읽히지만, 진한 여운과 깊은 울림과 느꺼운 감동을 자아낸다. 100편의 글이 모두 신학-특히 예술신학적 바탕 위에서 쓰였고, 미-선-진-애의 교회론적 구조에 따라 내가 꿈꾸는 교회, 꿈꿔야 하는 교회, 꿈에 그리는 교회, 꿈꿀 수밖에 없는 교회의 핵심 개념을 따라 25편씩 구성되어 있으며, 교회-신앙공동체라는 기본 바탕 위에 전개된다. 500년 전 95개조의 글이 교회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듯이, 100개조의 이 글-책이 교회개벽, 개벽교회의 새 기원이 되기를 기원하는 책이다.



목차


추천사: 정희수 / 이신건 / 홍인식

제1부 꿈꿔도 좋은 교회: 아름다움[美]의 공동체

1. 가고 싶은 공동체 2. 경건의 공동체
3. 과학기술 시대의 시뮬라크르 공동체 4. 교회 밖 예수꽃 공동체
5. 기도 수행의 공동체 6. 길 위의 공동체
7. 낯선 타자를 환대하는 공동체
8. 노래하고 춤추고 자전거 타는 놀이 공동체 9. 다양성이 존중되는 공동체
10. 리마예전의 성례전 공동체 11. 빛깔 십자가의 공동체
12. 상상력이 풍부한 공동체 13. 상징목과 함께 하는 수도공동체
14. 상징의 공동체 15. 생활 영성의 공동체
16. 성속불이의 공동체
17. 숭고미를 추구하는 영적 체험의 공동체 18. 시인의 마을 공동체
19. 실천형 영성의 공동체 20. 예수살기 공동체
21. 예술가-되기의 공동체 22. 웃음 가득한 명랑 공동체
23. 유머니즘의 공동체 24. 죽음 교육의 공동체
25. 춘안거 재가 수도 공동체

제2부 꿈꿔야 하는 교회: 공의[善]의 공동체

1. 너머의 공동체 2. 바이오필리아의 생태 공동체
3. 부끄러움의 공동체 4. 살림의 공동체
5. 안전한 공동체 6. 양심의 공동체더보기



책속에서


P. 5~6 ● 한국교회 130여 년의 역사에서 또 이런 위기가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비판을 넘어서는 하나의 ‘대안적 교회’를 상상하며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한국교회를 꿈꾸면서 그 꿈을 보다 ... 더보기
P. 20~21 ●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란 예수를 믿는 자들만 모이는 곳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고백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자르고... 더보기
P. 42 ●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길 위의 신앙이다. 예수의 삶이 길 위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 선포도 그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지로 한 ‘순례’(pilgrimage)는 교회의 핵심가치이다. 교회가 이 순례 대신 ‘거주’(dwelling)를 목적으로 할 때 교회는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면... 더보기
P. 53 ●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의 경우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더욱더 분명하다. 주지하듯이, 네 복음서는 같은 예수를 종종 서로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시각을 존중하는 맥락에서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전자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서 유대적인 시각이 주로... 더보기
P. 132 ● 지난 2천 년간의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는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 못지않게 부끄러운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교회는 늘 초대 교회 때 로마의 박해에 저항하면서 뜨거운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을 저버린 경우도 많았다. 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라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증오와 미움의 공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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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손원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기독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던 중 개신교인에 의한 훼불사건이 김천 개운사에서 발생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불자들에게 대신 사과하고 불당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서 강제 해직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은 종교평화와 예술목회를 위한 전도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연꽃 십자가』(편저), 『예술신학 톺아보기』(편저), 『교회 밖 교회: 다섯 빛깔 가나안 교회』(편저... 더보기

최근작 : <내가 꿈꾸는 교회>,<개벽의 징후 2020>,<교회 밖 교회>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백 개의 상상과 실천, 그리고 하나의 믿음
“나는 이런 교회를 꿈꾼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에 꿈과 희망을 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손원영 교수의 『내가 꿈꾸는 교회: 개벽교회론 서설』이 그것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2017년, 저자가 부패한 한국교회에 저항하며 한국교회에 대한 꿈 100가지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로부터 꼭 500년 전인 1517년 루터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며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당 문에 붙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저자는 그 후 3년 동안 100가지 꿈을 하나하나 자세히 해설하였고,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저자 본인의 꿈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꿈이 담겨져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새 길을 찾고 있는 한국교회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기본 정신 위에 집필되었다.

첫째, 제2의 종교개혁을 꿈꾸는 창발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새로운 교회를 마음껏 꿈꾸고 있다. 저자는 그 새로운 교회를 일컬어 ‘개벽교회’라는 용어를 과감히 차용한다. 개벽이란 주지하듯이 동학에서 ‘새로움’(新)이란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저자는 이 용어를 차용하여 진정한 한국적인 교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창발적인 교회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 미래 한국교회의 방향으로 ‘예술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신학계에서조차 예술신학이란 용어는 아직도 낯설다. 그러나 저자는 예술신학과 예술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것이야말로 미래 한국교회의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술신학자 발타살(Hans Ur Balthasar)의 예술신학적 통찰에 의지하여, ‘진-선-미’의 전통적인 순서를 뒤집어 ‘미-선-진-애’의 교회를 강조한다. 따라서 필자는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1930)에 나오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 교리의 구조와 발타살의 예술신학을 조합시켜, 이 책의 교회론적 구조를 구성하였다. 

그래서 제1부는 아름다움(美)의 공동체로, 제2부는 공의(善)의 공동체, 제3부는 진리의 공동체, 그리고 제4부는 사랑(愛)의 공동체로 구조화하였다.

셋째, 이 책의 교회론적 구조로서 미-선-진-애의 구조를 기본구조로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공동체의 내용은 현대신학에서 논의되는 신학적 논의들을 교회론의 내용으로 적극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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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1부 ‘내가 꿈꿔도 되는 교회: 아름다움(美)의 공동체’는 예술신학적 논의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교회로서 ‘영성’(spirituality)의 측면을 강조한다.

 제2부 “내가 꿈꿔야만 하는 교회: 공의(善)의 공동체”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더욱 계승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예언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변혁과 회복적 정의 그리고 평화구축을 위한 역할 등을 상상한다. 

제3부 “꿈에 그리는 교회: 진리(眞)의 공동체”는 진구를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인문학과 현대과학을 비롯하여, 특히 이웃종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공동체로 새롭게 자리매김될 필요성을 강조한다. 

제4부 “꿈꿀 수 밖에 없는 교회: 사랑(愛)의 공동체”는 교회가 진정한 ‘한국적 교회’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적 교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발문은 예술신학자 심광섭 박사와 한국학 연구자 조성환 박사가 썼고, 미국 UMC의 정희수 감독, 성결교 조직신학자 이신건 교수, 그리고 해방신학자 홍인식 박사가 추천사를 썼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미래교회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꿈꾸는 이가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