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Philo Kalia - <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 Facebook

(2) Philo Kalia - <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 Facebook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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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되었다. 4쪽이나 되는 선생의 수필인데, 가난과 일제 치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적 긍지와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태운 사람들을 「아 - 派」라는 흥미로운 말로 서술한다. <예술목회연구원>은 「아 - 派」의 정신(혼)에 심히 공감하여 감히 그 계보를 이을 엉뚱한 꿈을 꾸며 폭소를 세차게 터뜨리다.
「아 - 派」 / 尹伊桑(윤이상) 음악가
나의 고향 통영에(지금은 충무시) 일제 때에는 민족 사회에 두 파(派)가 있었다. 하나는 「현실파」요, 하나는 「아~ 파」였다. 인구가 4만여, 항구도시로 시가의 중심지는 모두 일본사람이 차지하고, 우리 민족들은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三一운동 때 격렬한 만세운동이 터졌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예수교가 일찍 들어왔고(호주선교 구역) 그를 따라서 서양문화가 들어와, 민족정신도 일찍 깨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민족의 피에 줄기차게 깨끗한 정렬이 생동하고 있었다.
三一만세 때의 참패를 겪고, 젊은 층에는 차츰 두 갈래의 생활철학이 대두되었다. 하나는, 민족의 역량을 실력으로 길러야 하며,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입을 악물고 일본사람 밑에 들어가서 종이 되더라도 우선 경제와 기술의 실력을 기르자 -, 그래서 기초교육을 받고, 고장에서 실력 있다고 간주되던 사람들 중에도, 주유선(注油船)을 타고, 짐차 바퀴를 끌고, 화물차를 몰거나 일본인의 점원이 되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더러는 점포를 내던지 논마지기를 사는 사람들이 불었다. 이들은 독서를 하지 않고, 철학하는 것을 경멸하고, 사상경찰에 걸려서 유치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이런 사람들을 「현실파」로 불렀다.
이와 정 반대로, 민족의 설움을 제 설움처럼, 민족의 운명이 제 혼자의 양심에 달려있는 것처럼, 민족의 원수는 일인(日人)이기에, 모든 일인과의 타협을 절단하고, 오로지 청렴한 양심에서 살자-. 이런 사람들은 더러는 양복을 입지 않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바닷가에 나가 항상 한탄한다. 겨드랑이에 대개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닌다. 일본 강담사에서 발행한 세계문학전집-, 워즈워즈나 브라우닝의 시의 구절을 암송하고, 슈니츨러의 희곡을 탐독한다. 집에는 끼니를 굶고, 동생들을 학교 보낼 형편이 못되어도 그들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하고, 봄날 아지랑이 이는 전원에서도 「아~」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도 「아~」한다고 해서 소위 「현실파」들은 이들을 비꼬아서 「아~ 파」라고 불렀다.
이 「아~ 파」의 선배들은 일찍 동경으로 건너가 우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 없이 갔으니 납일(納日) 장사(신문배달)를 하며, 학교에 적은 두었으나 대부분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고생의 과정에서 권력자에 대한 반항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그때 유행하던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속에서 일부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이 집을 한 채 빌린다. 그다음 줄을 이어 고향 사람이 따라 들어온다. 집세는 반년이고 일 년 분이 밀린다. 그중에 부잣집 아들이 있어 다 달 송금이 오면 7-8인이 그것으로 산다. 때마다 수제비를 쑤어 먹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없어, 울타리를 뜯어 땐다. 그다음에 집을 이은 판자를, 심지어 천정의 널빤지 까지도--.
일본사람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오면, 피한다. 집세는 2년, 3년이 밀렸다. 어쩌다가 주인이 대표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빨가벗고 긴 일본도(日本刀)를 옆에 놓고, 정좌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번번이 집주인은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한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죄없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란 도덕이 통용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조선의 식민착취로 얻은 재산의 일부가 아니냐. 조선 총독부가 우리 민족으로부터 착취한 금액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이치다. 이때를 전후하여 동경에서 공부하던 통영 출신의 명사들 중에 유치진(柳致眞), 유치환(柳致環) 형제와 김용식(金容植) 전 외무부 장관이 있다. 유씨 형제는 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신적으로, 또는 적어도 분위기적으로는 친분관계를 가지고, 또 그 영역에서 살았다. 이때 여기 속하는 사람 중에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아~ 파」를 형성하였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 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비단 비생산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없어도 모여서 어두운 불빛 아래 시를 낭독하고 철학을 논의하였다. 때로는 스스로 각본(脚本)을 써서 엷은 반일적 연극(反日的 演劇)을 공연하였다. 이러다가 좌익운동으로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사설도서실을 꾸몄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여기서 동화집을 얻어다가 탐독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이 소양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 「아~ 파」의 후배들이 일제 전쟁 말기에 고등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八一五해방 직후에는 이 두 파가 어떻게 되었는가? 소위 「현실파」에 속하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사람들이 던지고 간 상점을 점령하고 경제권을 잡는 데 급급하였다. 이른바 敵産적산) 처리의 소용돌이 속에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아~ 파」의 후예들은 먼저 잃었던 민족의식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을 대개 더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계에 들어갔다. 여기 병행하여 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음악회를 열고 야학을 열어 무산 아동을 교육하고, 연극을 하고 한글 강습회를 하고 ---, 이를테면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 한국에는 “통영에서 많은 예술가가 낳다~~”고 하는 말이 정평이 되어 있다. 이 말은, 통영에서 「아~ 파」가 닦아 놓은 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리라. 그리고 전 한반도를 돌아봐도 통영처럼 “민족의 양심”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많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하였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꿈에도 잊지 않는 나의 고향에 아직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환상(幻想) 같아서는 옛날 희랍의 철인(哲人)처럼, 눈에 돋보기를 쓰고 통영의 거리거리를 찾아다니며 소리를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여기 어디에 아직은 양심이 살고 있는가 ?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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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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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 김태창 선생님께서 본인의 성경 해석에 코멘트해 주셨다.

(2) Philo Kalia - #김태창(#Taechang Kim) 선생님께서 본인의 성경 해석에 코멘트해 주셨다. 그 방향을... | Facebook

#김태창(#Taechang Kim) 선생님께서 본인의 성경 해석에 코멘트해 주셨다. 그 방향을 정말 정확하고도 시의적절하게 적시해주셨다. 아직 턱없이 모자라긴 하지만 본인이 지속적으로 공부하며 가고 싶은 방향인지라, 남녘에서 올라오는 봄꽃 소식처럼 기쁨이 몰려오고 가슴이 벅찬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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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심사숙려(深思熟慮)가 담긴 말씀글을 읽고 심전영향(心伝霊響)하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종래의 성서 독해가 전적으로 교리 해설이나 호교론의 입장과 관점에서 진과 선의 이성적 합리적 이해와 실천의 길을 제시 공유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인식-실천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생명(력)의 발현으로서의 공감각(synaesthesis)에 향급(響及)하는 깊고 진한 美(感化力)의 체감 체험 체득을 상호 격려 보강 공유하는 쪽으로 성서 독해의 기본 방향을 조정할 수 있으면 현대인의 非-脱-反宗教的 性向-傾向-心理까지도 끌어 앉을 수 있는 공감-공명-공환[共感-共鳴-共歓(conviviality)]를 呼訴가 되지 않을까?
이 물음이 韓日間 生命開新美学 対話活動의 기본 취지입니다. 불교나 유교 쪽에서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인식 차원에서는 변화가 감지될 수 있습니다. 진과 선으로 갈라지고 찢어졌던 인간-사회-국가-세계가 아름다움의 새 눈뜨기를 통해서 어우러지고 용서와 화해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 열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ー그것도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가까워지기 어려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선생님의 말씀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동은 저보다 훨씬 더 잘 다듬어진 동시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입니다. 고맙습니다. 나이 든 삶살이에 가슴 설레이는 기쁨을 주셔서.
여기서 성서 독해의 성서는 기독교의 신구약 만이 아니라 불교 경전 이나 유교 경전은 물론 이스람의 코란, 그리고 희랍-로마 고전들도 내폐적 독해(内閉的 読解)가 아니라 상호 해방적 – 공관적 독개(相互解放的-共観的 読開)ー읽고 앎으로 끝나지 않고, 읽어 서로 닫힌 문을 열어감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일이 쌓여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겁니다.
+(1)Rembrandt, The Prophetess Anna, 1631.; (2)Gerrit Dou, Old Woman Reading a Bible, c.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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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

Philo Kalia -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와 임영선의... | Facebook

*역사적 예수 –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유대인 그리스도>(1648년)와 임영선의 <예수상>(1990년, 연세대학교교회) 이다. 화가들이 그리거나 조각한 예수상 중에 어떤 예수상이 실제 예수에 가까운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화가(예술가)들의 독창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일까?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갈릴리에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실제로 재현하고 싶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예수는 누구였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얻은 대답은 ‘영원’하고 ‘불변’하길 원한다.
종교개혁이 중세 교회의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 혁명 전후로 등장한 ‘역사’라는 범주는 교회와 신학에서 기독교 신앙이 교리의 권위는 물론 성경의 권위로부터도 해방되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만들었다. 역사 앞에는 ‘영원’과 ‘불변’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고 형성 중에 있다. 신관도 형성 중에 있다.
모든 역사는 근본적으로 시대의 역사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이중적 운동 속에서 있다. 하나의 운동은 지나간 모든 생활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며, 또 다른 운동은 역사를 서술하는 인간의 계속적인 변화로부터 생긴다. 인간 자신도 역사적 과정 속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항상 다시금 새롭게 써야 한다.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관에서는 인간이 역사를 계산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발전해 왔다. 역사란 곧 인간의 역사를 의미한다. 이런 전제 아래서 하느님의 역사 발언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며, 바로 그래서 ‘역사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 된다. 역사학적 진리의 전제 속에서 신학적 진리 주장은 사라진다. 신학적 진리도 다 인간이, 인간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에 불과한 것이라 여긴다.
나는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이 중심이고 신론과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늘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그리스도론은 고대 교회에서 완성(?)된 양성론의 해석에 집중하다가 ‘역사적 예수 연구’ 이후 그 틀이 무너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조차 그리스도론은 자라고 있다.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의 신약성서 그리스도론은 “형성 중에 있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 in the Making)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차정식 옮김, 상/하)으로 번역된 책의 영어 제목도 “기억된 예수. 형성 중에 있는 기독교”이다. ‘역사’의 범주가 그리스도론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적용된 것이다. 19세기에 서로 관점이 다른 포이어바흐와 하르낙이었으나 하나의 영구불변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했지만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에서 여섯 개의 패러다임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역사적 패러다임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던은 무려 150쪽에 걸쳐 르네상스 이후 최근까지 역사적 연구를 비평적으로 서술하고 공관복음의 예수는 “그 자체로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고 말했는가보다는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말한 것으로 기억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토대로 알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과거를 다시 현재화함으로써 정확하게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과정”이다. 예수 탐구를 위해 우리가 가진 자료는 “처음부터 우리가 직면해 있는 대상은 예수라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자체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을 기억 속에 보존하고 구어 전승 과정을 시작한 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서의 내용이다.” 불트만 이후 신해석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던에게 신앙이란 역사 해석학적 신앙이다(6장).
던은 마지막 장(19장)에서 책의 제목인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로 정리한다. 그는 예수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부활절 이전 예수와 부활절 이후 그리스도가 부활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끼친 강력한 영향이 부활절 이후에 심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절 이전 예수의 영향이 이미 신적인 권세와 권능의 견지에서 가늠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던의 저서가 10여 가지 이상 번역이 되었구나. 신학적 자료가 참 풍성해졌다. 조직신학에서 몰트만, 틸리히, 바르트, 본회퍼, 최근에는 판넨베르크의 저서까지 다 번역이 되었으니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을 읽으면서 성서학자들의 방대한 고대 문헌에 대한 섬세하고 분석적인 연구에 존경심이 저절로 솟아난다. 하나의 새로운 의미와 진리를 밝히기 위해 엄청난 자료들을 섬세하게 주석하고 정치하게 분석 비교하는 그 치밀한 과정도 어렵겠지만, 이걸 읽는 독자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 책에 비하면 몰트만이나 틸리히의 저서가 나에게는 훨씬 쉽더라. 이 방대한 분량(무려 1,400쪽)을 명쾌한 우리말로 옮긴 차정식 교수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인내력 시험을 얼마나 당했을까....
난 역사비평, 사회사적 비평이 기본으로 깔린 성서학 분야 글들에서 신학의 갈급함을 느낀다. 내 주관적 느낌이다. 문학, 역사, 정치 경제 사회학적 주석, 그쪽 분야에서 하는 지식 서술.... 신학적 목소리는 언제 나오지... 그런 갈급함과 기대감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다른 범주들에 의해서도 언제나 해명될 수 있는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요, 그것이 미래의 사건을 위해 길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미래를 열어놓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부활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는 ‘역사’의 범주로 부활을 변증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역사의 지각생이 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부활’을 말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취하는 보냄받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된 예수’(Jesus Remembered)를 토대로 ‘기대하는 예수’(anticipating Jesus)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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