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4

어느 목사가 깨달은 알기쉬운 반야심경 - 오카노 모리야 - Google 도서

어느 목사가 깨달은 알기쉬운 반야심경 - 오카노 모리야 - Google 도서

어느 목사가 깨달은 알기쉬운 반야심경






종이책 페이지수 : 약 119쪽

책소개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 일찍이 우리 선조가 받아들인 불교는 어둡고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 아니라 현대와 미래에 힘을 발휘할, 무한한 가능성의 영지(靈智)다.
저자는 불교 밖에서 자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배우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 것도 몰랐지만 조금씩 알아갈수록 불교는 과거의 특정한 종교나 종파라기보다는 현대를 사는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는-속된 표현으로 모르면 손해를 보는-사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고승대덕에서부터 학자, 여러 의미에서 초심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진 경전이다. 따라서 ‘뭘 새삼스럽게 반야심경을 이야기하려는가?’ 하고 물을지 모른다.
새삼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반야심경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라,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제1장 반야심경의 짜임새
제2장 관음보살의 지혜의 말씀
제3장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은 없다
제4장 그 자신이란 것은 없다
제5장 우주가 있어 꽃이 핀다
제6장 ‘텅 비었다’와 ‘덧없다’는 이렇게 다르다
제7장 ‘공’이란 실체가 없는 것
제8장 나와 우주의 관계
제9장 정말 아무 것도 없음의 시작
제10장 아무 것도 없음은 조건부
제11장 눈도 없고 귀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제12장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없다 1-십이연기
제13장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없다 2 - 사제①
제14장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없다 3 -사제2
제15장 마음은 어떤 순서로 상쾌해질까?
제16장 깨닫고 있는 사람
제17장 깨달은 사람
제18장 정리해서 말하면
제19장 반야심경은 소리내어 읽는 것
제20장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제21장 반야심경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제22장 알고 읽자
맺으며 반야심경은 미래를 연다


접기









오카노 모리야
북아띠, 2020. 1. 9.
0 서평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 일찍이 우리 선조가 받아들인 불교는 어둡고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 아니라 현대와 미래에 힘을 발휘할, 무한한 가능성의 영지(靈智)다. 저자는 불교 밖에서 자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배우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 것도 몰랐지만 조금씩 알아갈수록 불교는 과거의 특정한 종교나 종파라기보다는 현대를 사는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는-속된 표현으로 모르면 손해를 보는-사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고승대덕에서부터 학자, 여러 의미에서 초심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진 경전이다. 따라서 ‘뭘 새삼스럽게 반야심경을 이야기하려는가?’ 하고 물을지 모른다. 새삼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반야심경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라,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자세히 »

자주 나오는 단어 및 구문
가르침 가장 가지 같은 거나 것도 것을 것이다 경전 고통 과학 관계 관음 보살 그것은 그것을 그대로 그러므로 그런데 기분 깊은 깊이 깨달음 내용 느낌 다른 다음 대상 대승 불교 된다 든지 들어 때문 때문에 마음 만트라 말이 말하면 매우 먼저 모든 모습 무명 무분별 무상 문제 물론 물질 반야 바라밀다 반야 심경 방법 보면 보통 부분 부처 분별지 불교 사람 사실 상태 생각 석가모니 설명 세계 소리 수행 실감 실천 실체 아니다 아니라 않고 않는다 어쨌든 없고 없는 없다 없이 에게 에서는 연기 우주 원인 유식 의미 의식 이것은 이고 이나 이라고 이며 이야기 이해 인간 인생 있고 있기 있다고 있다는 자신 자체 작용 적인 전체 조금 존재 좋다 주문 지금 지혜 집착 체험 하게 하나 하다 하면 하지 한다 해서 해석 했다 확실히

저자 정보 (2020)


오카노 모리야 1947년에 태어났다. 칸토대학에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고 직접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의 저서를 통해 타키자와 카츠미(瀧澤克己), 히사마츠 마코토(久松眞),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11년 동안 목사 생활을 하면서 아키즈키 류민(秋月龍珉)에게 선을 배우고,
혼자서 유식,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기독교 유일주의는 졸업했고, 우선 종교는 神佛基習合, 전문은 종교철학, 심리학이다.
작가, 편집자, 유식심리학 워크숍의 인스트렉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산그라하 심리학 연구소’와 기관지(機關誌) 「산그라하」 주간을 역임했다.

도서 문헌정보

제목 어느 목사가 깨달은 알기쉬운 반야심경
저자 오카노 모리야
발행인 북아띠, 2020

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1,2,3) 에큐메니안

왜 교토학파인가 - 에큐메니안


왜 교토학파인가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1)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07 


앞으로 이어질 이찬수 교수님의 “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는 지난 2월16일 한국문화신학회ㆍ기독교통합연구소ㆍ난잔종교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동계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한 주신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김승철 소장님과 이찬수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교토학파(京都學派, Kyoto School)는 불교적 입각점 위에서 서양철학을 창조적으로 소화해냄으로써 지금까지는 없거나 미미했던 새로운 논리를 창안해냈다. 그로 인해 서양 철학자의 눈에는 가장 대표적인 동양철학 학파로 자리매김했고, 일본의 철학 수준을 세계적 차원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히 철학자들의 순수한 연구 모임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본의든 본의 아니든, 교토학파 사상가들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군국주의 혹은 침략전쟁의 정당화에 기여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받고 있을 만큼, 이들의 사상은 일본 및 동아시아 근대의 정치 지형의 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정치적 영향에 대한 분석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흐름

하지만 교토학파는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이끈 철학적 ‘학파’이다. 따라서 그 학문적 넓이와 깊이에 대한 분석과 사상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더 중요한 작업이라는 뜻이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특징부터 요약해보자.

교토학파는 서양의 존재(Being) 혹은 실체(essence/substance) 중심 논리의 한계 내지 불철저성을 비판하면서, 불교적 공(空, Emptiness) 혹은 절대무(絶對無, Absolute Nothingness)의 입장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Heart Sutra)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에 담긴 “즉(卽)의 논리”(Logic of Soku)를 서양철학의 언어로 규명해낸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교토학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Nishida Kitaro, 1870-1945)는 “공(空)의 장(場)”(Field of Emptiness) 안에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이른바 “장소적 논리(場所的 論理, Logic of Place)”를 창안했다. 이러한 니시다(西田)의 언어와 사상이 제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일단의 학문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 교토학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Nishida Kitaro, 1870-1945) ⓒGetty Image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Nishitani Keiji),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Tanabe Hajime),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 Hisamatsu Shinichi) 등 후학들은 스승인 니시다(Nishida)의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저마다 독특한 입장을 펼쳤다. 이들의 입장을 한 마디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각자의 사상적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니시타니(西谷, Nishitani)는 니시다의 철학적 틀을 이용해, 니체(F. Nietzsche)의 허무주의가 도달하지 못한 그 극단의 지점을 “공의 장”(Field of Emptiness)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계가 허무주의적 방랑에 머물지 않고 도리어 허무를 관통해 철저하게 긍정될 수 있는 논리를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선사(禪師, Zen Master)이자 학자인 히사마츠(久松眞一, Hisamatsu)는 일체의 유신론적 형태를 거부하고 자신의 깨달음 체험에 근거해 철저한 무신론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세상만사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최후의 의지처를 타파함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선사상-“萬法歸一歸何處”(『碧巖錄』 第45則)-의 현대적 표현이 철저한 무신론이라고 해석했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금강경』(金剛經, Diamond Sutra)에서 따온 표현인 “즉비”(卽非, Sokuhi)의 개념을 활용해 “즉비의 논리”(Logic of Sokuhi; Logic of self-identity in self-negation)를 창안했다. 이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과 차별[非]을 넘어선 절대긍정의 세계, 다시 말해 ‘즉(卽, 긍정, identity)’이 그대로 ‘비(非, 부정, negation)’인 세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이들이 대체로 선(禪의, Zen)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포섭하고자 했다면, 타나베(田邊元)는 정토진종(淨土眞宗, Jodo Shinshu)의 시각을 중시했다. 그는 공(空)과 역사를 직접 동일시하기보다는, 공이라는 보편적 진리와 역사적 구체화 사이의 ‘매개’(媒介, mediation)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부각시켰다. 공이 그대로 색(空卽是色)일 수 있는 근거, 절대 진리의 세계와 구체적 현실 세계 사이의 상즉성(相卽性, inter-identity)은 인간의 자기부정적(自己否定的, self-negational)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매개’의 철학(philosophy of mediation)을 전개했다. 그의 입장은 제자 타케우치 요시노리(武內義範, Takeuchi Yoshinori)를 통해 계승되었다.

교토학파의 사상적 기반, 선불교

이들 간에 강조점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토학파는 불교적 입각점, 특히 공(空)의 입장에서 서양 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면서 세상과 역사의 존재 원리를 긍정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서양철학의 언어를 사용해 불교적 세계관을 살리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을 시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서양철학 안에서 불교적 정신을 찾기도 했다.

니시타니(西谷, Nishitani)와 우에다(上田, Ueda) 등 많은 이들이 에크하르트(M. Eckhart)의 신비주의와 같은, 선(Zen)과 통할 수 있는 부정신학적(否定神學, negative theological) 흐름을 중시하고, 성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서양 사상의 근간에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배후’(背後)를 드러내면서, 그곳에서 동양 전통과의 유사성을 보되, 동양 사상의 우월성, 그리고 일본 철학의 보편성을 강조하려는 내심도 들어 있다. 서양적 정신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논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컸다.

그런 까닭에 이들이 종횡무진 사용하는 서양의 언어 속에서도 빛나는 것은 언제나 동양적, 불교적, 특히 선적(禪的) 정신이다. 그것도 좁혀 말하면, 일본 안에 흐르고 있는 대승불교적 정신이다. 공(空, Emptiness)의 철학을 통해 현실세계, 즉 색(色, Form)의 세계를 긍정하는 논리를 현대화시켰다는 데에 이 학파의 사상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chansuy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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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 입체적이지 못하다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2)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22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교토학파는 존재 중심의 서양적 논리가 전제하고 있는 그 최종적인 지점을 서양철학의 언어로 타파했다. 그리고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동양적 논리를 정립했다. 서양의 종교 및 철학자들은 교토학파 사상가들이 서양철학의 언어로 구체화시킨 동양적 논리를 통해 특히 불교철학의 심원함을 다시 보게 되었다.

교토학파의 철학은 불교의 사상적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오던 한국의 일부 종교학자들에게도 한국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양적 세계관까지 통합할 수 있는 한국적 논리를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가진 한국의 연구자는 아직 소수에 그칠 뿐만 아니라, 교토학파 수준의 논리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한 상태이다. 존재 중심의 서양적 사유와 존재에 매이지 않는 동양(특히 불교철학적)의 사유가 별도의 장에서 공존하고는 있지만, 공존의 ‘논리’가 충분히 성립되었거나 온전한 ‘융합’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토학파의 연구 분야, 종교계가 압도적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교토학파가 한국 종교 및 종교철학 관련 학계에 어느 정도 소화되고 있는지, 연구의 전망은 어떤지, 그리고 교토학파 연구와 관련하여 어떤 과제에 직면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해보고자 한다. 정치학 및 문학자 등에 의한 교토학파 관련 논문들도 일부 출판되어 있지만,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사상에 대한 연구는 종교 관련 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다. 실제로 관련 단행본들은 대부분 종교 및 종교철학적 저술이나 번역서들이다. 이것은 교토학파가 기본적으로 종교 혹은 종교철학의 언어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내 교토학파 연구는 신학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의 작업이 불교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에 의한 것보다 더 많다. 한국에서 교토학파 연구는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두던 신학자들이 먼저 시도했고, 신학적 지평을 불교적 세계관에 어울리도록 확장하면서 ‘한국적 신학’을 확립하려는 의도의 표현이기도 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형식과 언어를 넘어서는 더 보편적인 언어를 추구하는 이들에 의한 모험적 시도들도 있었다.

교토학파의 난해한 언어 이해가 관건

그렇기는 하지만 교토학파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교토학파 연구는 질과 양 모두에서 여전히 초보 단계이다. 무엇보다 교토학파를 입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한국인 전문 연구자는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다. 아직 한국인에 의한 교토학파 전반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여타의 일본 사상 연구에 비해, 교토학파에 대한 한국인의 연구 성과나 연구자들은 소수에 머물고 있다.

▲ Nishida Kitaro with staffs and students around 1913(K. Nishida, Nishida Kitaro Zensyu, Vol.14 [Tokyo: Iwanami Syoten, 1951]) ⓒhttp://www.kyoto-u.ac.jp/cutting-edge/cutting_edge/page32.html


이것은 순수한 종교철학 연구가 학계의 주류에서 더 주변으로 밀려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토학파 사상가들의 심층적이고 종합적이며 난해한 언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의 철학적, 불교적, 신학적 이해가 종합되지 않고서는 교토학파의 논리의 심층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불교적, 신학적, 순수 철학적 연구들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류에 편승한 실용주의적 연구가 주류를 형성해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교토학파 전문 연구자들이 더 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교토학파의 사상사적 의미가 종교나 철학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교토학파의 일본 및 동아시아의 정치사적 의미가 적지 않고, 전술했듯이, 한국에서도 일부 정치학 혹은 문학자들이 이 부분에 관한 연구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시대적 의미와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고찰하는 연구도 그 자체로 중요한 작업들이다.

하지만 교토학파는 기본적으로 종교 및 철학적 연구 체계로서, 이 학파의 철학 및 논리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런 영향력의 근원을 간과하는 표층적 연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교토학파의 종교철학적 논리와 학문적 종합성 및 정치사회적 영향력까지 두루 소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에 부족한 점

그런 척도로 본다면,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는 여전히 그 심층까지 들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일부의 영역에 머물고 있거나 각종 연구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종교 관련 연구자조차 교토학파의 내밀하고 심오한 철학적 언어를 충분히 소화하기는 간단하지 않은 마당에, 종교 관련 연구자들이 교토학파의 일본 및 동아시아의 정치사적 의미까지 입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현실적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다.

일본의 정치사적 언어에 익숙한 정치학자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일치시키는 교토학파의 논리와 섬세한 언어를 충분히 따라가기는 더욱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 한국 내 종교 관련 연구자들에 의한 연구를 중심으로 보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종교철학자 중에서도 대체로 신학적 배경을 지닌 이들에 의한 연구가 좀 더 많다. 일부 불교학자들이 교토학파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불교학자는 교토학파의 서양철학적 혹은 신학적 언어를 충분히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신학자는 대승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토학파의 엄밀한 언어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는, 연구자의 관심에 따라 단편적으로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종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정리한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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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교토학파 연구의 시작과 토대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3)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 승인 2019.03.29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 기독교권에서(아마 전 영역에 걸쳐서도) 교토학파를 다루었던 최초의 인물은 최태용(崔泰瑢, 1897-1950)으로 보인다. 그는 1920년부터 일본에 유학하면서 기독교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監三)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1924년 귀국 후 한국의 기성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했다.(1)

▲ 최태용 목사는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일본 교토학파의 사상을 수용하고 이론화 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다. ⓒGetty Image


최태용의 교토학파 수용

1928년에 다시 도일해 메이지 가쿠인 대학(明治學院大學)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토학파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32년 귀국 후에 썼던 그의 글에는 니시다 기타로(Nishida Kitaro)가 말하는 장소론을 차용해 “아담의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장소에로의 옮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가 전개하는 논리의 구조가 니시다의 장소론 혹은 행위론과 거의 같다. 1936년도에는 니시다의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논리에 기대서 “다수와 한 개체는 부정적 관계”에 있으며 “한 개체 즉 다수”라는 논리를 통해 여러 ‘교파들’과 전체로서의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1946년 해방 정국에서 한국적 국민운동론을 만들고 실제로 국민운동을 펼치는 과정에 교토학파 사상가들의 제국이론을 차용하기도 했다. 최태용이 자신의 논리가 교토학파 철학자들에게서 왔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고, 그가 교토학파 자체를 연구했거나 체계적으로 소개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운동에 뛰어든 1940년대 후반의 강의록 『新國家觀』에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미키 기요시(三木淸) 등을 인용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 안에는 분명히 교토학파의 세계관이 들어있다.

이미 1930년대에 교토학파의 논리를 일부 소화해 ‘국민’과 ‘국가’, ‘교파’와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국민 통합을 통한 국가 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구체적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던 그의 전력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홍정완, “해방 이후 남한 ‘국민운동’의 국가·국민론과 교토학파의 철학”(2010)에 잘 소개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 교수의 본격적인 교토학파 연구

한국 전쟁기를 지나 이른바 근대적 학문이 본격 시작될 때까지 한국에서 교토학파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교토학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선구자는 변선환(邊鮮煥, 1927~1995)이다. 토착화 신학 및 아시아 신학의 확립을 위해 종교간 대화를 시도했던 변선환은 스위스 바젤대학(University of Basel)에 늦은 나이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1976)에서 자신보다 젊은 일본의 신학자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 1932~)의 신학을 다루었다.

▲ 일본 교토학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작고하신 고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Getty Image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학에 재직하면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아베 마사오(阿部正雄) 등의 사상 전반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했다. 그 영향력 하에서 최범철(崔範澈)이 석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절대무와 한스 발덴펠스의 겸허신학”(1986)를 발표했다. 또한 김광원(金光源)은 “발덴펠스의 생애와 사상”(1988)이라는 제목으로 불교와 소통할 수 있는 신학적 입장을 소개한 소논문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변선환의 직·간접 제자인 김승철( 金承哲), 이찬수(李贊洙) 등이 교토학파 사유체계를 중심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간 대화를 시도하면서, 점차 한국어로 된 본격적 연구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토학파 관련 서적들의 번역과 출판

▲ 변선환 교수의 제자로 교토학파의 서적을 번역·출판하는데 가장 공을 쏟은 일본 난잔대학의 김승철 교수 ⓒ에큐메니안


한국에서의 교토학파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획기적인 일은 1990년대 초·중반 불교계 출판사 ‘대원정사’(大圓精舍)가 후원하고 변선환(邊鮮煥), 김승철(金承哲) 등 기독교 신학자가 번역에 참여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총서’가 발행되었던 일이다.

이 때 교토학파 관련 주요 저술들, 특히 
  •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종교란 무엇인가』(1994), 
  •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의 『불교의 空과 하나님』(1993)이 번역되었다. 
또한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의 『無神論』(1981)을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 타키자와 카츠미(瀧澤克己), 오다가키 마사야(小田垣雅也) 등의 신학적 응답과 엮어서 번역한
  •  『無神論과 有神論』(1994)이 번역된다. 

그리고 아베 마사오(阿部正雄)가 20여 년에 걸쳐 쓴 주요 논문들을 묶어 번역한
  •  『禪과 現代哲學』(1996), 
  • 『禪과 現代神學』(1996), 
  • 『禪과 宗敎哲學』(1996)이 출판된다.

마지막으로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의 『바울과 정토불교, 예수와 선』(1998)이 번역되어 모두 8권의 주요 책들이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교토학파가 본격 연구될 수 있는 기초가 놓이기 시작했다. 필자도 이 가운데 아베 마사오(Abe Masao, 阿部正雄) 저술의 한국어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고, 그의 글들에서 사상적 도전을 제법 받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위 8 권의 책의 절반 가량을 한국어로 소개한 이는 김승철(金承哲)이다. 김승철의 노력으로 교토학파(京都學派)가 한국의 일반 종교 관련 연구자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김승철은 교토학파의 논리를 매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간 대화의 이론적 심층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출판사 사정으로 이 시리즈가 폐간되면서(2) 교토학파가 더 많은 이들에게 좀 더 깊게 소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이 출판물들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교토학파의 사상적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소규모지만 후속 연구로 이어졌다.

▲ 변선환 교수와 김승철 교수 등에 의해 번역된 출판된 교토학파 관련 서적들. 하지만 출판을 맡았던 대원정사의 폐간되면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에큐메니안


미주
(미주 1) 이것은 1935년 ‘기독교조선복음교회’(Korea Evangelical Church)라는 교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미주 2) 불교전문 출판사에서 기독교 및 신학과 연관된 책을 내는데 대한 교단 내부의 오해 및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chansuy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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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기독교를 잇는 가교 '도마 복음' - 오마이뉴스

불교와 기독교를 잇는 가교 '도마 복음' - 오마이뉴스



불교와 기독교를 잇는 가교 '도마 복음'[책] 오강남 교수의 <종교, 심층을 보다>
11.07.10 
권성권(littlechri)


공감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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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한다. 표층이란 내가 복을 많이 받아 이 땅에 보란 듯 잘 살고 영생 복락을 누리는 데 집중한다면, 심층이란 내 욕심을 줄일 뿐만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남을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더욱이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에 갇힌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지만, 심층종교는 문자주의를 넘어 그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물론 모든 종교인들은 대부분 표층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종교를 병이나 고치고, 돈이나 벌게 하는 미숙한 수준을 넘지 못한다.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심층 차원의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영적인 눈이 열리는 세계관으로 한 단계 넘어서는 것이다.

오강남 교수의 <종교, 심층을 보다>도 그런 눈을 트여준다. 이 책은 표층과 심층의 차이를 알려주고, 각 종교가 지닌 심층 차원을 깊이 들여다볼 수 돕는다. 이는 각 종교가 치중하고 있는 외형과 기복에서 벗어나 진정어린 종교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도 담겨 있다. 아울러 폴 틸리히가 이야기한 바 있듯이, 각 종교의 전도 차원보다도 대화의 장을 넓히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그가 종교의 심층을 들여다보게 하는 차원은 남다르다. 여러 종교들을 에둘러 보는 게 아니라 철학자들과 많은 사상가들을 통해 그 속내를 알게 해 준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에서부터 모세와 에리히 프롬과 같은 유대교의 지도자들, 바울과 도마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 무함마드와 루미와 같은 이슬람교의 성인들, 노자 장자와 같은 동아시아의 선각자들, 마하트마 간디와 마하비라 같은 인도의 영성가들, 그리고 류영모와 함석헌 등 한국의 스승들을 통해 그 깊이를 일깨워주는 게 그것이다.

물론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나름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특정 종교에 심취한 상태에서, 다른 종교를 파악하는 게 그것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책을 통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얻는 간접 경험에 해당된다. 자신의 종교를 벗어난 타종교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개론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열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성인이나, 인도의 영성가들, 그리고 불교의 선지자들에 관한 내용도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그가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신선한 내용도 없지는 않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가 아닌 이상 모세를 실제 역사적 인물로 보는 이가 거의 없다는 지적, 유대인 사상가 에리히 프롬과 아브라함 헤셸이 현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밝혀냈다는 것, 기독교인들이 표층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천국은 하늘 어디에 붕 떠 있는 '장소'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 아울러 <도마복음>도 '참나'를 아는 '깨달음'을 강조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그것이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는 종교의 특수성을 관통한 영적 자유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 실존의 궁극 의미를 표현한 다른 표현들 속에 나타난 영적 현존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신학자 폴 틸리히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오강남 교수가 종교의 심층을 강조한 것도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지 싶다. 물론 그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도마복음>의 영향력도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마는<도마복음>에서 제자들 중 가장 위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마를 특별히 '인류의 스승' 반열에까지 올리는 것은 그가 전해주는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는 주로 현교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심층적 기별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도마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잃어버리거나 등한시되던 심층적 가르침을 되살리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준 그가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이 책을 대하는 나는 사실 기독교인에 속한다. 오강남 교수에게는 어느 종교에 속한다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 그에게 모든 종교의 심층은 하나의 통섭을 이루고, 같은 근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붓다와 예수와 공자를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하는 종교인들에게는 모두가 오십보 백보다. 그런 통섭도 실은 각 종교의 경전 속에 들어 있는 문자주의의 유사성에 매달릴 때 갖게 되는 시각일 수 있다. 각 종교의 경전을 '통'으로 깨우치는 이들은, 문자주의의 유사성을 넘어 더 깊은 심층의 이면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이 내가 오강남 교수에게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현암사(2011)


이 책의 다른 기사'문맹자' 예수가 존경받는 이유...'깨달았기에'

종교간 대화 방법 제시「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41566

종교간 대화 방법 제시「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발행일 | 1996-09-08 [제2019호, 10면]

종교간의 진지한 대화는 과연 불가능한가?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어떤 관점을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개신교 성서학자 야기 세이이치와 미국 종교학자 레너드 스위들러
 일종의 종교간 대화의 방법론으로 펴낸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분도 간)는 특별히 불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대화를 위해 「프론트 구조(Front-Structur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다종교 사회로서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종교간 대화가 시도되어 왔다. 때로는 그 심도가 신학적 논의까지 이루어질 정도로 깊이를 쌓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종교간 교류는 주로 사회현상과 공공선을 위한 공조로서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본격적인 의미의 대화는 부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는 한국의 종교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시아 신학 총서 제8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야기 세이이치가 제시하고 있는 프론트 구조의 이해를 위해 레너드 스위들러가 해설을 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세이이치의 논문인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다리: 프론트 구조」이다.

레너드 스위들러는 자신과 야기의 예수 이해가 『그리스도교, 또는 불교가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거나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식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게 한다』며 양 종교가 서로에게서 배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화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세이이치는 그러한 다리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분도/269면/6천5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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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하나 | 중앙일보

불교·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하나 | 중앙일보

불교·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하나
중앙일보
입력 1989.12.02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 검토하면서 궁극적 진리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밝혀보는 
「불교와 기독교」국제학술회의가 사단법인 한국불교진흥원(이사장 이기영) 주최로 1, 2일 이틀간 서울타워호텔 본관1층 젤코바홀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첫날 
  • 「불교와 기독교에 있어서의 궁극적 실재」(이기영), 
  • 「불교의 삼신사상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R 털먼·미 콜럼비아대 교수), 
  • 「다르마와 하느님」(야기 세이치·동경공업대 교수)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2일에는 
  • 「열반과 구원」(더 스트랭·미 남감리교신학대 교수), 
  • 「기독교 영성훈련과 불교적 고행」(변선환·감리 신학대 학장), 
  • 「종교적 가치와 대중문화의 도전」(L랭커스터·미 버클리대 교수) 등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기영 원장은 『신인 예수야말로 궁극적 실재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기독교와 모든 것을 일심의 상이라고 말하는 불교사이에서 궁극적 진리를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하고 
『그러나 심성의 가장 높은 지혜의 차원에서 볼 때 참된 불교의 진리성과기독교의 진리성은 결코 다른 두개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스트랭 교수는 『열반과 구원에 이르려는 수련과 체험에는 변화·전환·성취의 느낌이 있다.
 한계 지워지고 조건 지워진 개아의 관점에서 
이러한 전환은 개아의 자아중심적 특질과는 전혀 다른 자기 초월적 근원에 의해 자기 기만과 자기중심적 존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고 말하면서 
『열반이나 구원은 다같이 자아의 확장을 통해 
보시와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진정한 자유의 획득에서 얻어지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알라딘: 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2011

알라딘: 종교, 심층을 보다:


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은이)현암사201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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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쪽
152*223mm (A5신)
728g
ISBN : 97889323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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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가 곪아 터진 한국 종교에 던지는 시원한 화두. ‘신의 죽음’이라는 언명처럼 20세기에 종말을 선고받은 듯했던 종교는 9·11사태로 21세기의 문을 열었고, 이제 세계는 삶의 안녕을 확신할 수 없는 신들의 전장터가 되었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 또한 근래에 들어 종교에 이해와 소통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종교는 더 이상 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와 등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문제 자체로 변하여 갈등과 반목의 주역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오랫동안 비교종교학의 균형 잡힌 지성으로 한국 종교의 오늘을 탐문해온 오강남 교수는 그 까닭이 우리 종교와 종교인들이 ‘표층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종교, 심층을 보다>는 ‘혼자만 잘살려는’ 자기중심적이고 미성숙한 표층 종교를 뛰어넘어 종교의 심층, 즉 깨달음(영성)을 찾은 세계 여러 종교의 선지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소개한다.


목차


여는 글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다-“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플라톤 이데아, 참된 앎을 찾아서-“동굴에서 나오라”
플로티노스 서양 신비주의 사상의 원조-“하나로 돌아가라”
에픽테토스 ‘받아들임’의 철학자-“일어나는 일이 그냥 순리대로 일어나길 바라라”

유대교의 지도자들
모세 유대교의 창시자-“그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아모스 정의를 가르친 예언자-“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불라피아?모세 드 레옹 카발라의 스승들-“영혼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풀어라”
이삭 루리아 명상과 사랑의 카발라 스승-“저를 위해, 혹은 저 때문에 벌 받는 사람이 없게 해주소서”
바알 셈 토브 근대 하시디즘의 창시자-“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신에게 오르지 못할 정도로 타락할 수는 없다”
마르틴 부버 20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나와 너’라고 하는 대화 관계에 들어가 보라”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과 사랑의 기술-“쉼이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
아브라함 헤셸 종교적 진리는 독점할 수 없다-“시간의 영역은 존재, 나눔, 조화를 목표로 한다”
빅터 프랭클 희망과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간의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가능해진다”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
예수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바울 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마 깨달음의 복음을 전하다-“여러분 자신을 깨달아 아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석을 세운 교부-“최선의 경배는 침묵을 통해서, 최고의 지식은 무지를 통해서”
위爲디오니시우스 침묵과 비움의 성자-“감각과 지성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뒤로 하라”
성 프란체스코 청빈과 무소유의 삶-“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가-“신은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저것이라 할 수도 없다”
노리치의 줄리안 신학의 여성성을 드높인 낙천주의 성녀-“지상에서 모성의 역할만큼 진실하고 강한 것은 없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유럽의 여성 수호성인-“당신은 우리가 없이는 사실 수 없었나이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하느님과 혼인한’ 성인-“나비는 이제 날개를 가졌다. 어찌 기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성 요한 위대한 경험주의적 신비가-“그대의 영에서 세상 모든 것들을 비워버리라”
마르틴 루터 절대 권위에 도전한 종교개혁 지도자-“선한 행동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한다”
조지 폭스 퀘이커교의 창시자-“왜 내 처지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
알베르트 슈바이처 신비적 사랑의 실천자-“나는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뭇 생명들 가운데 또 하나의 생명”
디트리히 본회퍼 나치에 대항한 실천 신학자-“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폴 틸리히 현대 지성인을 위한 사도-“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토머스 머튼 평화와 정의의 수도자-“종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다”
테레사 수녀 인도주의 종교인-“사랑의 열매는 섬김입니다. 섬김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한스 큉 범종교적 에큐메니즘 신학자-“종교 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
헨리 나우웬 상처 받은 자를 위한 치유자-“진정한 순교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해방신학의 아버지-“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조건일 뿐이다. 그것은 불운이 아니라 불의이다”

이슬람교의 성인들
무함마드 이슬람교의 창시자-“사람들은 자고 있다. 죽으면서 깨어난다”
알 가잘리 이슬람 신비주의의 집대성자-“실재하는 이 세계도 크게 깬 상태에서 보면 허구에 불과한 것 아닌가?”
루미 춤추는 수피 성자-“신과 영원히 연합된 영은 모든 장애로부터 자유케 되리”

동아시아의 사상가들
노자 무위자연의 도교 창시자-“‘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장자 절대 자유의 도가 스승-“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공자 동아시아의 위대한 유교 스승-“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맹자 호연지기의 철인-“모든 것이 우리 속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묵자 박애주의 사상가-“남의 집을 자기 집처럼 보며 남의 몸을 자기 몸처럼 보라”
정호·정이 신유학의 집성자-“인의 사람은 만물과 혼연동체이다”
주자 이학의 완성자-“오랫동안 노력하다 보면 결국 어느 날 아침 완전한 깨달음이 열릴 것이다”
육상산·왕양명 심학의 대가들-“우주가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우주이다”

인도의 영성가들
샹카라 힌두교 불이론 베단타의 창시자-“어두움이 태양의 광채 속에서 녹아 없어지듯 만물도 영원한 실재 속에서 녹아 없어진다”
라마누자 힌두교 한정불이론 베단타의 지도자-“아름다운 특성을 모두 갖춘 인격신을 모시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종교의 길이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심층 종교의 영성을 그린 인도의 시성-“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종교이다”
마하트마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의 실천-“눈에는 눈이라면 온 세상이 다 눈이 멀게 되고 말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세계의 스승이 된 신비주의 명상가-“나는 기쁨과 영원한 아름다움의 샘물을 마신 것이다. 나는 신에 취한 사람이 되었다”
마하비라 자이나교의 창시자-“나는 내 몸을 돌보지 않겠다. 나는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겠다”
구루 나나크 시크교의 창시자-“힌두교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교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선지자들
붓다 불교의 창시자-“모든 것은 덧없다.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나가르주나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연기 법칙에 따라 생겨나는 모든 것은 공함을 선언하노라”
달마 동아시아 선불교의 창시자-“진리는 넓고 텅 빈 것으로 거룩하다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국의 스승들
류영모 종교의 심층을 통섭한 참 스승-“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유교, 불교, 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 심층 종교를 실천한 ‘한국의 간디’-“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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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런 맥락에서 예수가 말하는 천국 복음 도 결국 세계 여러 종교,
의 신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여 내 속의 참나, 진아眞我, 얼나를 찾 으라는 말이라 보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skyli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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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강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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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종교학과 명예 교수. 우리 시대 대표적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 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으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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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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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내 안의 신’을 발견한 인류의 위대한 영적 스승 60인!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가 한국 종교에 던지는 지혜의 서書

종교, 이제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
불안과 혼돈의 시대, ‘심층 종교’에서 문명과 개인의 ‘삶 길’을 찾는다

‘신의 죽음’이라는 언명처럼 20세기에 종말을 선고받은 듯했던 종교는 9·11사태로 21세기의 문을 열었고, 이제 세계는 삶의 안녕을 확신할 수 없는 신들의 전장터가 되었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 또한 근래에 들어 종교에 이해와 소통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종교는 더 이상 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와 등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문제 자체로 변하여 갈등과 반목의 주역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오랫동안 비교종교학의 균형 잡힌 지성으로 한국 종교의 오늘을 탐문해온 오강남 교수는 그 까닭이 우리 종교와 종교인들이 ‘표층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새 책 『종교, 심층을 보다』는 ‘혼자만 잘살려는’ 자기중심적이고 미성숙한 표층 종교를 뛰어넘어 종교의 심층, 즉 깨달음(영성)을 찾은 세계 여러 종교의 선지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소개한다. 지성을 넘어 영성에서 ‘참나’를 찾은 그들의 이야기는 종교의 다양한 진면목을 소개하는 지식을 넘어 우리 종교 문화에 대한 경종과 통찰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 껍데기 종교를 벗고 종교의 심연을 찾아 나선 영성과 지성의 대가들

지난 오월에 발행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에서 비교종교학계의 대가 오강남과 젊은 종교학자 성해영은 우리나라의 종교 현실을 두고 솔직 대담한 대담을 나누었다. 오강남은 이 대담에서 종교라는 이름 아래에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가 존재하며 종교의 심층을 찾는 것이 종교적 폐단을 극복하고 새 장을 여는 길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심층 종교라는 문제 제기의 서론 역할을 했다면 새로 출간된 『종교, 심층을 보다』는 그 본론 격으로, 대체 심층 종교란 무엇이며 인류의 역사상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어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오강남은 2001년 『예수는 없다』를 통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심층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종교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책에서는 논의를 세계의 모든 종교로 확장하여 그리스?로마 철학,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아시아 사상(도교, 유교), 인도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불교, 그리고 한국의 지혜 등을 모두 조명한다. 세계 종교?철학의 창시자, 지도자, 실천자, 학자 등 세기의 스승들이 삶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준 종교의 심층을 빠짐없이 다룬 것이다. 이는 세계의 종교사인 동시에 현대 철학의 근간을 이룬 사상적 뿌리이며 고전 그 자체이다.
평생을 비교종교학에 바친 대가만이 다룰 수 있는 넓디넓은 지식이 가득한 이 ‘세계 종교 깊이 읽기’는 학술서가 아닌 친근하고 쉬운 대중적인 글쓰기로 명쾌하게 읽힌다. 동서 철학사와 종교사를 관통하면서 지식의 깊은 차원과 그 맥락을 전연 놓치지 않으면서도, 종교 대중의 교양과 관심에 적극 공명하는 ‘깨친 글쓰기’가 값진 독서의 기회를 선사한다. 더 이상 종교에 희망을 두지 못하고 고개 돌릴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종교인들에게 영성의 갈증을 채우고 타종교에 대한 벽을 허무는 샘터이자, 모든 종교가 심층에서 하나의 맥을 이룬다는 ‘소통의 장’을 자연스레 체험하는 학습 마당이 될 것이다.

■ 내 안의 신을 찾는 심층 종교, 이미 세계 종교계의 큰 흐름!

그렇다면 과연 종교의 심층이란 무엇인가? 오강남 교수는 종교의 본질적인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의 ‘표층’과 ‘심층’이라는 개념을 취한다. 변화되지 않은 지금의 나를 잘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표층 종교라면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죽여 더 큰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심층 종교이다. 교리와 율법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문자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표층 종교라면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의식의 변화,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 심층 종교이다.
표층 종교가 신은 하늘에 있다고 믿는다면 심층 종교는 신이 내 안에도 내재하며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 곧 신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각 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경전들의 표피적인 뜻에 매달리는 문자주의를 넘어 그 상징와 은유, 속내를 알아차리면 이웃의 종교가, 또한 다른 모든 종교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를 연장하면 신과 나와 내 이웃, 우주가 모두 하나로 통한다. 이것이 종교간 평화는 물론 인류의 공존을 위해서도 기본이 되는 철학 근간이다. 종교사에서는 이를 신비주의라 하는데 이는 육체이탈, 영매, 마술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유체험들을 일컫는 ‘Mystismus’가 아니라 신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고 절대자와 궁극 실재를 의식의 변화를 통해 내면적으로 깨닫는 ‘Mystik’을 의미한다.
저자는 실제 그리스도교의 발원지였던 서구 사회에서조차 표층적 종교 생활이 점점 줄어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70~80%가 표층 종교에 매달려 있음을 직시하며 심층적 종교관이 세계적인 추이임을 알린다. 저자는 그리스 로마의 철학 사상가, 유대교의 지도자, 그리스도교의 선각자, 이슬람교의 성인, 동아시아의 사상가, 인도의 영성가, 불교의 선지자, 한국의 스승 등 60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삶과 가르침의 고갱이를 추려 소개함으로써 독자는 물론 한국의 종교인들이 종교의 심층을 엿보고 이를 열린 마음으로 체현해 나가기를 기원한다.

■ 대답 없는 시대, ‘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 어른들을 위한 위인전

오강남이 뽑은 영성의 거인 60인은 모두 종교의 심층을 깨치고 삶으로 그것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이는 종교계의 ‘60인보人譜’이자 ‘종교란 무엇인가’의 해답을 찾는 어른들을 위한 위인전이다. 세상을 읽는 합리적 이성의 창에 금이 가고, 물신이 지배하는 욕망과 혼돈의 세상에서 평화와 궁극의 답을 찾는 이들에게 ‘영성’이라는 지도는 더욱더 긴요한 요청이 되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영적 지도자들의 헌신과 신념의 삶을 읽어나가다 보면 끝내는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상과 철학의 큰 물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세기 현대의 영성가들의 삶과 가르침은 더욱 생생하여 큰 울림을 전한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고 한 현대 지성인의 사도 폴 틸리히. 인도 사상, 특히 자이나교의 ‘불살생’에 영향을 받아 종국에는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깨쳐 ‘생명 경외’를 근간으로 자신의 삶을 밀고나간 알베르트 슈바이처. 20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로 도덕경과 장자를 접하며 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이 되는 ‘나와 너’의 ‘관계 철학’을 탄생시킨 마르틴 부버. 이밖에도 범종교적 에큐메니즘 신학자인 한스 큉, 해방신학의 아버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심층 종교의 영성을 문학으로 그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한국의 참스승 류영모, 함석헌 등 삶과 사회의 비전을 찾았던 지혜의 대가들의 목소리는 모든 종교의 심층에서는 서로 갈등이 없으며 활짝 열린 진리가 서로 넘나든다는 ‘깊고 기쁜’ 진리를 맛보게 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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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의 사랑 자비 나눔의 원리는 인간을 위함. 더불어 함께하는 종교를 서원합니
현정 2011-07-1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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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생님의 글은 어렵고 딱딱한 것을,부드럽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준다.언젠가 한 번 뵙고 싶다.팬으로.
청동거울 2013-03-1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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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 !@
우왕 2014-07-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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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생명을 구분하는 한 가지... 그것은 깨달음과 실천이겠죠. 추천
이렇게좋은날 2011-07-2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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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범신론이 해답이라고?



1. 요약 。。。。。。。



비교종교학자인 저자가 모든 종교와 철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각 종교에 담긴 공통적이면서 중요한 유산들을 짚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스, 로마의 주요 철학자들부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 등의 중요한 사상가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의 사상가들의 삶과 가르침을 되돌아본다.







2. 감상평 。。。。。。。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프레임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그래서 자신의 범신론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죄다 ‘미성숙한 표층종교’로 분류해버리는 저자의 방식은 대단히 독단적이고 전제적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각각의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작은 것’이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바람직한 종교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만 따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마치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분명한 개별적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사실상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람직한 종교’란 범신론과 뉴에이지적 명상법의 뒤섞임인 듯한데, 여기에 신비주의적 전통까지 가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여기는 이 범신론은, 겉으로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종교와 사상의 평화를 이루려는 대단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 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각 종교들로부터 특정한(혹은 특정하게 보이는) 교리들만을 취사선택해 만든, 어찌 보면 대단히 획일적이고 무색무취의 종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거대한 군중들을 위한 종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믿어오던 범신론은 이렇게 현대의 자유주의신학의 바람을 타고 다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상 일신론이 극단적인 분열이나 적대감을 초래해왔다고 주장하는 듯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인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로 위장된 이 ‘내재적 범신론’을 따르고 있다는 연구도 나와 있는 걸 보면, 문제는 일신론이냐 범신론이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대와 문화,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현대의 관점에 놓고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는 비역사적 연구방식은 딱히 학문적인 것 같지도 않고, 인류 역사상 유구히 주장되어 온 범신론적 종교에서 딱히 새로운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겠다. 물론 현대의 종교인들에게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문제가 범신론이나 유물론과 같은 다른 사상과 철학을 선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기대다.



동서양의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두었다는 게 이 책의 유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너무 단편적으로 실려 있고 거의 대부분 주관적인 변형을 가하고 있기에 딱히 잘 된 요약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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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1-07-0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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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인간에 무엇인가?



들어가는 말

이책은, 저자의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들으면 우선 두 가지 정도로 놀라는데, 하나는 그 두께에 놀라고, 또 하나는 종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특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에히리 프롬이나,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로 보지 굳이 종교 사상가로 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해석을 거치고 나니 아,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빅터 프랭클은 말미에 다시 한 번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한 가지 추가적으로 놀랄 것이 있다면, 몇 페이지 안 되는데도 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저자가 어쩌면 그리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설해 놓았을까 놀라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왜 이책을 썼을까?

그런데 읽으면서 느꼈던 건,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사상가들을 다룬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세계엔 이렇게 많은 종교 사상가들이 있다고 소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저자가 소개한 사상가들을 꼼꼼하게 다 읽지는 못했다. 워낙에 책의 두께에도 압도됐지만, 내가 과연 이 많은 사람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관심도 없는 이슬람이나 인도의 영성가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충 읽고 뛰어 넘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편견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했지만, 그러기 이전에 편견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신 이외의 신에 관심을 두면 계율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종의 강박 내지는 순정주의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에 이용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요긴한 무기로 사용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러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류가 치뤘던,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허다한 많은 전쟁의 거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이라고 하지 않는가?(그런데 더 정확히는 종교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념과 정치를 위해 종교는 강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종교는 때로 강력한 편견의 산물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랬을 때 비난의 화살을 맞는 건 아무래도 기독교는 아닐까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통 인정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종교도 크게든 작게든 내가 믿는 신이 제일이라는 독선은 있다고 본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화합과 관용을 주장하는 오늘 날의 분위기에 편승하고 맞혀 가다보니 묻혀 있을 뿐이지. 그래서 어쩌면 저자는 (전작을 통해서나) 이번 저서를 통해 진정한 종교의 화합을 이뤄 보고자, 종교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종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므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줘야할 필요성에서 이책을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에게 촛점을 맞출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인 것을 완화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저자 자신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점은 저자가 '예수'라는 장을 가장 많이 할애한 것에서도 짐작이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스 큉'에 대한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그렇지 않아도 한스 큉을 다석 유영모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종교가라고 밝히고 있다.

한스 큉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한스 큉은 누구인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가톨릭 신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글로벌 윤리'로 채택하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자고 외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해 교파 간의 작은 차이들은 지엽적인 문제이며 이런 사소한 문제로 원수처럼 갈라져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원래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들어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전통적인 가톨릭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출두를 명령받지만 이를 거절하다 결국 가톨릭 신학자로서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스 큉은 범종교적이었으며, 진정한 에큐메니스트 였다. 그는 세계 모든 종교는 서로 협력할 뿐 결코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스 큉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곧잘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

사실 저자가 왜 그토록 종교의 화합을 강조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에큐메니즘은 진보 기독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보수 기독교에서는 다소 경계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이란 큰 장에 소개된 여러 많은 선각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상도 알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다른 타종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보수 교회에서도 연구되어지는 사상가들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그런 걸 생각하면 보수 교회가 너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 시키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도 된다. 그래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만드는. 하지만 그러기 전에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 빚장을 질러놓은 것에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자각내지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하다못해 저자는 '붓다'를 다루는 장에서, 성불 즉 '깨친 이'를 '초개인적 자아'로 설명하며, 예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말씀을 비교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성경절 때문에 예수 이외에는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참된 종교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예수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5장 58절)"고 한 것을 보면 이때 '나'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441p)며 비교종교학으로서 해석을 시도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보면 이것도 나름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학문에는 해석의 차이와 진보만 있을 뿐, 진실과 거짓을 가린다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오감남 교수가 '테라사 수녀' 대해서 쓴 부분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녀는 수녀로서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친, 지난 세월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최근 출판된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는 거의 50년 가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얼마 전, 최근 급부상한 어느 유명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다. 봐라. 그렇게 믿음 좋을 것 같은 인도주의자도 신을 의심하면서 살지 않았냐? 그럼으로 신은 없다. 뭐 대충 이런 논조로 신은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안다. 물론 꼭 이것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오강남 교수는 테레사 수녀가 겪은 의심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비적 사상가가 거쳐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테레사 수녀도 거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적 깊이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유신론적 인격신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없이 계신 이'쯤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어찌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는 표층 종교의 전통적 신관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겠는가?(271p)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찌보면 오강남 교수가 말하는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가는 통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종교에 입문할 때 표층 종교의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복을 열심히 비는 것이다. 소원도 아뢰고, 나름 은혜도 받는다. 하지만 깊게든 얄게든 그렇게 신앙 생활을 접한 사람은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밤을 통과해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싫어 뛰쳐 나오게도 된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 신앙생활 하면서 늘 언제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는 말했다. 의심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그것은 맹신일 뿐이라고.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은 성흔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정말 테레사 수녀가 경험한 "영혼의 밤"은, 믿음 안에서의 의심은 있을 수 있으며, 얄팍한 표층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심층 신앙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 사고를 환치시킬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무궁무진의 영역이며 이 세상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간의 좁은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깨며 인간과 삼라만상을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지도 모른다.

맺는 말; 다시 생각해 보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나는 오강남 교수가 빅터 프랭클은 종교 사상가 반열에 놓을 줄은 몰랐다. 이미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잘 아는 줄 안다. 그는 저 죽음 같고,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아 나왔던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나왔는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유명한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란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한 것을 이책에서 다시 한 번 대하면서 오늘 날과 같이 자살이 많은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삶이 조금만 힘들면 쉽게 자살을 생각한다. 사실 빅터 프랭클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린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말을 하게될 것 같다.

이 자살이 얼마나 쉽냐면, 어떤 초등학생이 우리 담임선생님은 너무 늙었다고 흉을 보았단다. 그래서 너는 안 늙을 줄 아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때까지 안 살 거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니까 늙기 전에 죽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냥 하는 소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도 살 이유가 없는 것인가? 생명 경시 사상이 너무나 팽배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살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삶으로 돌아선 사람에게는 살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바로 종교의 사명은 이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종교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란 질문에 조금은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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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19 공감(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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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사람들의 인물사전


왜 자꾸 종교 책을 읽을까

최근에 종교에 대한 책들을 꾸준히 읽으면서, 여러 차례 반복했던 말인데,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흔히 ‘무신론자’라고 하던데,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냥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굳이 편을 나누자면,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도 또 하나의 종교로 봐야 한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암튼 나는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최근에 한 친구가 물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종교에 관심도 없다면서, 왜 자꾸 종교에 대한 책을 읽느냐?’ 그에 대한 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나도 궁금했다. 표면적으로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유를 붙였지만, 실제로 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틈틈이 고민을 해봤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종교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람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요즘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는 창시자가 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종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창시자가 신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종교가 생긴 것이라고 본다. 신을 만들어낸 사람, 그리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궁금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들의 인물사전

앞서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느낌 글을 쓰면서,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인물사전을 즐겨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났다. 이 책은 각 종교의 성자라고 부를만한, 깨달은 사람들의 인물사전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창시자라고 할만한 ‘모세’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실려 있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고 할만한 ‘예수’도 실려 있다.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도 실려 있다. 그리고 그들 창시자 이후에 이 종교를 발전시켜나간 사람들이 뒤이어 실려 있다.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는 그리스 철학자들도 있고,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이나, 인도의 영성가들도 있다. 마지막에는 한국의 스승들이라고 해서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

인물사전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삶에 대해 공통적인 요소 몇 가지로 짧게 요약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더 자세하고 방대한 정보가 궁금해도 더 알려주지는 않는다. 대신 같은 주제로 엮인 사람들을 공통적인 요소로 나열해주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인물들을 비교하기 좋고, 다양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미처 몰랐던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분법

이분법적인 분류는 참 명쾌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확률적 요소들을 단 하나의 기준에 따라 단 두 가지 분류로 나눈다는 것. 알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해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한때 나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적’과 ‘동지’로 나눴다. 각 개인의 조금씩 다른 생각들은 모두 무시했다. 그저 나와 뜻을 같이하고, 기꺼이 빨갱이가 되겠다면 ‘동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두 ‘적’으로 간주했다. 이제는 그런 분류가 정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그런 실수를 하게 될 때가 가끔 있다. 이 책에서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두 개로 나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표층’이냐, ‘심층이냐’ 둘 중의 하나로 묶이게 된다. 하지만 둘을 나누는 기준은 솔직히 좀 모호하다.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머릿속에는 좀 더 분명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를 읽고 나서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른 책이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잘 몰랐던 인물들에 대해 알게 되고, 약간의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고, 각 인물들마다 계속 반복되는 구조는 뒤로 갈수록 좀 지겹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별로였다. 이 느낌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는데, 이 책 확실히 제목을 잘못 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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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7-18 공감(3)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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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관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종교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일을 하는 종교인들도 보지만 언론이나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쁜 면을 부각시켜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종교관이 결코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나 위대한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협한 종교인들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결코 그것이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이 책 저자에 대한 글을 읽고 목차를 보면서 나 자신의 종교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력부족으로 제목처럼 심층을 보지는 못했다.

“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 문장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성의 영역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알게 되었다. 특히 학창시절 종교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면 늘 서로의 주장이 겉돌고는 했다. 이것은 둘 다 다른 곳을 보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 등을 무기로 경전을 해석한 나와 이 모든 것을 역사이자 사실로 아니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상대와의 대화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종교와 정치는 이야기하면 답이 없다는 말처럼.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종교관 차이도 있지만 이해의 폭과 깊이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다. 이것에 대한 대담집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가 이미 나와 있는데 나중에 읽을 예정이다. 이 둘의 차이에서 시작하여 심층 종교의 신비주의로 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우면서 종교의 발전에 필요한 단계로 저자는 말한다. 이 용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도를 높인 후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서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두 철학자로 이어지는 긴 종교 여행을 떠난다. 많은 인물들이 낯익지만 낯선 이름도 적지 않다. 편협한 교육과 특정 종교인의 세계로 나아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 낯설음이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 것은 사실이다.

다루어지는 종교인의 숫자만 단순히 보아도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어떤 기준에서 이런 분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정말 낯선 종교의 선각자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선각자 중에서도 낯선 인물이 곳곳에 보인다. 비종교인이거나 그 종교에 관심이 없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이 적은 것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아쉬움을 넘어가면 나 자신이 잘 몰랐던 종교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가치는 이런 인물들에게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각 종교 선각자들의 주장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해설과 더불어 말이다.

한국 종교의 한탄과 걱정에서 시작한 이 책이 다른 영성가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깨달음은 우리의 나아갈 바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영성가, 선각자 모두가 한 시대나 종교 그 자체를 모두 바꿀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과 실천이 가슴과 머리에 많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신문 연재라는 특성 때문에 가끔 중복되는 내용이 나오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하나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나의 지식과 깨달음이 부족하여 그 진수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분발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아시아의 사상가들, 인도의 영성가들, 불교, 한국 등에 대한 핵심 정보다. 각 개별로 들어갔을 때 이 종교들이 어떤 내용인지 핵심을 집어주지만 결국 개인의 노력과 깨달음이 핵심이다. 늘 마찬가지지만 좋은 책들은 새로운 책들을 읽게 만든다. 비록 나 자신이 종교는 없지만 그들이 깨달은 세계의 한 조각이나마 얻기 위해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고 느끼고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식의 확대가 아닌 지혜의 깊이를 더 많이 얻고, 마음속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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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01 2011-07-1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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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보다] 종교, 믿음을 너머 깨달음이다.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과 선물을 나눈다는 뜻이구나' 라고 깨닫고 지금까지 받기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기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주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아주 성숙하게 될 경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하늘을 영접하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뜻이 있구나 하는 진리를 터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표층에서 시작하여 점점 깊이 들어간 경우입니다. - 9p

-본문 중에서-


# 종교의 참 뜻은, 함께 잘 살자는 것.


종교 갈등의 시대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타인의 죽음까지도 외면하는, 무서운 교리가, 잘못된 신념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시대이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함께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는데, 왜 종교를 믿는다면서,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고 자신만 옳다고 하는걸까.

최고의 인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엿보다 보면, 나만 잘 살기 위한 종교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 믿음을 넘어 깨달음의 과정으로 가는 종교를 만나게 된다. 저자는 앞의 종교를 표층종교, 뒤의 종교를 심층 종교라 이야기한다.

지도자의 신념과 철학에 따라, 그 종교의 결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종교의 창시자가 처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나만 옳다는 고집, 나만 사랑해줄거라는 오만, 나만 위대하다는 자만이 나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한다.


# 믿음을 넘어, 깨달음으로


종교생활을 하다 보면, 종교의 교리와 어긋나게 생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교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세력화 하거나, 태초부터 나오는 본성을 종교의 아우라로 응용해서, 지위를 이용하는 경우,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경우들이 많다. 마음의 안식과 함께 잘 살기 위해 들어왔지만,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종교의 울타리 밖으로 떠나는 사람도 많다.

종교의 초기 목적이 믿음을 넘어, 깨달음을 통한, 함께 공존하는 사회라는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종교를 바라보는 눈도,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자유로워질거라 생각한다.

마르틴 부버, 플라톤, 도마, 상카라, 무함마드, 루미 등 들어본 인물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사상가들도 많다.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묵자까지 묶어서, 깨달음을 통해, 더 깊은 세계로 세상을 인식하려는 많은 사상가들을 소개했다.

다양성의 눈으로 종교를 보면, 내가 옳다는 독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쉽다 생각한다. 내 종교가 뛰어나고 위대하니까 무조건 해야 하는게 아니라, 내가 바르게 행동해서, 자신의 종교를 빛나게 만든다. 모든 종교는 좋은 뜻에서 시작했기에,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끄는 사람들이 많아야 종교의 벽에 부딪치지 않고 공존의, 비빔밥처럼 새로운 맛을 내는 사회가 될거라 생각한다.

공룡의 멸망처럼, 하나의 사상만 강조하는 삶은 사회를 어둡게 만든다. 종교에 대한 시선과 좀 더 넓은 폭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이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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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앤피스 2011-07-1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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