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9

국민통일방송 - 주체농법



  1. 국민통일방송 - 주체농법


주체농법

등록일 2014.02.16
00:00
16:55


남: 이번 시간에는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북한 인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속 시원히 풀어드리는 시간입니다.

여: 매주 목요일 보내드리겠는데요, 오늘은 북한의 주체농법에 대해 리태성동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해드립니다.

음악: UP/DOWN

타이틀: 리태성의 한바탕 속풀이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답답한 가슴, 리태성이 풀어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체농법과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농촌의 곳곳에 가면 ‘모든 농사일을 주체농법의 요구대로!’ 라는 구호가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습니다. 주체 농법은 1970년대부터 김일성이 저택에서 시험포전을 통해 창시했다는 농법으로서 적지적작, 적기적작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포기농사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영양단지라는 것이 나와서 군인과 대학생,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마저 총동원 하여 농촌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지원과 물질적 지원이 안받침 되지 못하다나니 영양단지는 흙 단지로 변하고 농사는 흉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고도 천오백만 톤 알곡고지 점령이요 뭐요 하면서 가요까지 지어 부르며 떠들썩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이나 물질보다는 인민들의 관심이였습니다. 자기에게 공급이 되지 않는 농장 포전이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에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 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새로운 주인다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결국 수확물은 군대와 간부님들이 책임집니다. 인민들은 생산물을 밭에서 직접, 그것도 몰래 가져 올 때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는 구호를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토지를 비롯한 농촌의 모든 생산 수단이 ‘장군님의 것’이고, 이 몸도 ‘장군님의 것’이여서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고 생산물도 ‘그 분’의 의도대로 처리해야하니 주민들은 살기 위해 할 수없이 나의 포전에서 훔쳐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은 황폐해지고 토지는 주인을 잃었으며, 한해 식량도 생산하지 못하는 한심한 수준에 떨어졌습니다.

북조선이 농업 생산을 추켜세우기 위해 주체농법운동을 벌렸다면 남조선은 1970년대부터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70년 4월22일 한해 대책을 론의하는 장관급 회의에서 농촌새마을 꾸리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촌새마을 운동의 삼대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입니다. 
또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과 우수한 농촌 지도자들의 헌신, 지방정권기관의 협력과 방조 등 3대협력이 잘 이루어 졌습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마을을 꾸는데 필요한 시멘트와 철근을 무상으로 지원했으며 성과가 있는 마을에는 더 많은 물자를 추가로 지원했습니다.

이 운동은 락후한 농촌의 근대화는 물론 전 사회적인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남조선의 모든 근대화 의식 영역에서 혁신과 급속한 발전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에서도 농법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농민들은 당연히 자신의 농법을 현시대에 맞게 개선하여 높은 수확을 추구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소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체 농법은 ‘장군님의 나라’에서 공동토지에 실행되고 새마을 운동은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진행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조선의 농촌도 수령님과 당과 정부에서 지원하고 남조선의 농촌도 대통령과 정부가 지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유와 결정권의 차이로 인해 하늘과 땅차이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참 자기의 얼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최근 하룻밤 자고나니 ‘김정은 동지’께서 갑자기 ‘원수님’이 되셨습니다. 
‘김정은 원수님’이 경제 개혁을 하면서 농촌의 분조 규모를 4~5명 기준으로 낮추어 농촌경제 관리 운영 원칙을 개선한다고 합니다. 그 무슨 변화 있는 조치도 조금 있는 가 봅니다.

그런데 인젠 왠지 귀에 잘 들려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주체농법의 요구대로 하라는 구호를 우리 손으로 철수 하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라는 구호를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이 적힌 패말을 박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인젠 그 무슨 운동이요, 방침이요 하지말구 가만 놔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마음껏, 능력껏, 농사를 잘 지어 ‘김정은 원수님’도 좀 잡수시라고 드리고  우리아들이 있는 군대에도 좀 보내고 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드는데도 좀 쓰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인민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워 주고 모든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되돌려 주면 남조선보다 더 앞선 강성대국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참 좋은 인민을 두고도 항상 구걸 해먹고 안주면 협박하는 식의 강도 배처럼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정은 원수님! 김일성 할아버지 대원수님 때부터 구축하여 김정일 아버지 원수님 때에 숱한 형제를 죽이고 억지로 밀어붙이며 가져간 우리의 소유권을 되돌려 주고 인젠 더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건집시다. 
정말 안하면 인젠 우리가 합니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그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탈북자 리태성이였습니다.
댓글 (총 0 개)
     
0 / 1200 bytes

주체농법 - 북한지식사전 - 위키독

주체농법 - 북한지식사전 - 위키독

북한지식사전

위키 정보
이 위키사전은 북한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용어의 뜻과 어원을 설명합니다. (출처: 통일부)

 [미분류]주체농법( 1 판 )

01 [북한알기 키워드]주체농법(主體農法)



NK조선



[북한알기 키워드]주체농법(主體農法)

닉네임 : nkchosun 2001-10-16 14:38:00 조회: 2713

김일성이 창안했다는 북한식 영농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70년대 초 농업분야 학자·농민들과 농사경험을 폭넓게 교환하고, 시험농장을 조성해 직접 작물을 재배하는가 하면 외국의 농업기술과 성과를 연구·분석해 북한 실정에 맞는 새로운 농사방법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주체농법을 만들어낸 것은 북한 농업위원회(현 농업성) 산하 농업과학원 학자들과 관련 종사자들이며 특히 김만금 전 농업위원장과 서관히 전 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일성은 다만 여기에 본인의 의견과 외국의 경험 등을 보태 자신의 이름으로 제시한 것뿐이라고 한다.

주체농법은 당초 "과학적 영농법"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주체사상을 농업분야에 구현해 창시했다 하여 김정일의 지시로 주체농법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북한은 주체농법을 선전하면서 ▲포기농사 ▲적기적작(適期適作)·적지적작(適地適作) ▲과학적 영농방법의 세 가지 원칙을 내세운다.

포기농사는 작물의 간격을 최대한 조밀하게 배치함으로써 소출을 늘린다는 것으로 밀식재배(密植栽培)의 북한식 표현이다.

적기적작은 계절적 변화와 농작물의 생육에 따른 시기선택의 중요성을, 적지적작은 토양과 기후조건에 맞는 작물을 골라 심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둘 다 농사에서 마땅히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을 환기시킨 것으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과학적 영농방법북한의 기후와 풍토, 토양과 토질, 농작물의 생물학적 특성 등을 고려해 그에 맞게 생산기술과 공정, 생산방법 등을 과학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한랭전선의 영향을 막기 위해 올 종자를 심고, 벼 냉상모판(보온못자리)과 강냉이 영양단지(부식토)를 100% 활용한다는 것이다. 또 토양의 산성화를 방지하고 지력을 높이기 위해 화학비료와 유기질 거름을 적절히 배합하고, 흙깔이(客土)와 깊이갈이(深耕)를 병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밀식재배의 경우 50년대 말 중국에서 실패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강냉이 영양단지도 일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적지 않은 폐해를 낳고 있다고 한다.

주체농법에 대해 학자들은 일단 이론적으로 큰 결함이 없고 최대한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흔적이 엿보이고 있으나 실제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과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한 농사 현장에서 비능률이 드러나도 주체농법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제시됐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임의로 수정할 수 없는 체제의 경직성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주성하의 서울살이] 노동당의 주체농법과 농민의 주체농법



[주성하의 서울살이] 노동당의 주체농법과 농민의 주체농법





홈페이지 | 주간프로 | 주성하의 서울살이
[주성하의 서울살이] 노동당의 주체농법과 농민의 주체농법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2-05-04

북중 접경지역인 압록강변 북한땅에서 주민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k050412CO-SH.mp3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번 시간에 농사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 시간에도 계속할까 합니다. 아마 다음 주부터 농촌동원에 본격적으로 나가겠죠. 제가 북에 있을 때는 봄에 논밭머리마다 방송차가 서서 열심히 불어댔는데, 기름이 금값인 지금도 그거 하나요? 방송차에 기름 넣을 바에는 모내는 기계라도 하나 더 돌리지 하는 생각입니다. 봄에 방송차가 섰다 하면 “주체농법의 요구대로 영양단지를 알알이 정성들여 만들고, 한랭전선에도 끄떡없이 냉상모판의 벼를 튼실하게 키우고, 적지적작, 적기적작의 원칙을 지킴으로서...”하고 그냥 귀가 빠지게 불어댑니다.
사실 여기 와서 들으면 주체농법도 별거 아닙니다. 적지적작, 적기적작이란 거야 원래 농사꾼들에겐 상식 중의 상식 아닙니까. 당연히 작물을 제때에 적당한 밭에 심어야 하는 것이고, 이건 수천 년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겁니다. 이런 것까지 마치 당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농부들이 모르는 것처럼 생각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제발 당에서 가르쳐 주지 말고 농부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장담컨대 생산량이 더 나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주 초보적인 이런 상식을 북한 노동당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주체농법의 상징 같은 것이 바로 강냉이 영양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오니 강냉이는 다 직파합니다. 제 생각에는 영양단지가 강냉이가 자라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문제는 효율이죠. 영양단지 만들겠다고 밭을 평평하게 만들어 그래, 각종 부식토와 비료를 가져다 영양단지를 찍어내 그래, 그걸 또 사람이 하나하나 가져다 밭에 심어서 그래, 아무튼 이거 하려면 사람 손이 엄청 필요합니다. 멀리 강에 가서 바케쯔로 물을 길어다 영양단지 심을 때 물까지 부어주던 것을 생각하면 고생도 이런 생고생이 없죠. 거기다 냉상모판 만든다고 비닐박막 비싼 외화 들여 구입해 씌우는 것까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영양단지를 만들었으면 정보당 생산량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두 배나 나오던가. 이건 아니잖습니까.

여러분이 소토지를 하면 다 직파를 하죠. 농장 밭에는 영양단지를 안하면 당정책을 어긴 반동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자기 개인 텃밭에는 그냥 직파를 해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거 그렇게 난리 법석 부리면서 영양단지 만들어봐야 별로 효과 없다는 것을 농민들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비료만 잘 주면 직파면 어떻고 영양단지면 어떻습니까. 농민들도 영양단지 만들고 옮기기 싫으니 영양단지 이식은 농촌지원노력들, 특히 학생들에게 다 맡겨 버립니다. 그래서 영양단지는 학생단지란 말도 나왔고요. 이제는 과거에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던 교시니 말씀이니 이런 것도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은 좀 버리면서 살면 오죽 좋습니까.

주체농법 하면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문제가 뭐냐 하니 다락밭 농사입니다. 예전에 다락밭을 만든다면서 산에 층층이 밭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에 와서 보니 여기 과학자들은 그걸 엄청 비판하더라고요. 왜냐하면 다락밭을 만들면 산이 자기 역할을 못해서 홍수로부터 산 아래 논밭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산은 산의 역할을 하고, 밭은 밭의 역할을 하고, 논은 논의 역할을 해야지 산을 밭으로 만들면 어떻게 하냐 이겁니다. 물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사실 북엔 다락밭이 사실 그리 많지는 않죠. 한때 만든다고 난리 부렸지만 그 산에 등짐으로 돌을 날라 층층이 쌓는 품이 어디 보통 품입니까. 지금이 원시시대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다락밭을 만들었지만 그 다음이 또 문제입니다. 기계도 들어가기 힘들고, 물도 끌어올리기 힘들어 가뭄을 탑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락밭 영농법이 다 망한 것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내놓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거죠. 다락밭이 효율성이 없다든지, 만들 필요가 없다든지 하면 당 정책을 거역한 반동이 되니 문제입니다.

농촌에 다락밭과 같은 사례가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명백한 상식과 진실도 당정책과 어긋난단 이유로 감히 말을 못하고, 그러니 잘못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수없이 따라해야 하는 그런 일들이 말입니다. 북한은 바로 그런 굴레에서 하루 빨리 해방돼야 발전합니다.

봄에 전국을 농촌지원 전투에 내모는 일도 그렇습니다. 도시에 있어봐야 할 일이 없으니 어른들이 나가는 것은 정말 크게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쳐도 공부하는 학생들과 대학생들까지 1년에 두 달씩 농촌에 내보내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아이들 때는 공부를 해야죠. 머리에 공부가 쏙쏙 들어가는 그 시기를 놓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시간을 농장에 나가 흙 담가나 쥐고 나르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학생들이 모자라 농사를 못 짓는다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데, 그러면 영양단지를 하지 말고 직파를 하면 되잖습니까. 직파해서 떨어지는 소출하고 나라를 끌고 갈 미래들이 공부 못해 생기는 공백하고 저울질해보면 전 세계적으로 답은 공통일 겁니다. 그런데 북에서만 다른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말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도 다 안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하고 반박하실 겁니다. 여러분도 잘못된 것들 저보다 수없이 더 많이 아실 겁니다. 하지만 말을 못하죠. 그래서 오늘 시간엔 여러분을 대신해 제가 서울에서 여러분이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다 알고 있어도 누군가는 말을 해야 공감을 만드는 거니까 말입니다.

당에서 시키는 게 주체농법이 아니라, 농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그게 바로 주체농법입니다. 당의 주체농법이 농민의 주체농법으로 바뀌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주체농법 - 나무위키



주체농법 - 나무위키



주체농법

최근 수정 시각: 2018-10-22 08:21:53


분류
북한의 경제









단지 분야가 농업인지 공업인지 차이만 있을 뿐, 가히 북한토법고로라 할 만하다.




1. 내용2. 결과


1. 내용[편집]


주체사상에 근거해서 북한식량 자급을 목표로 하는 농법이다. 한반도 북부는 중·남부에 비해 척박하여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농업보다는 광공업 지역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해방과 분단 후, 북한에서는 식량의 자급이 중요 과제가 되었다. 이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지도에 의해서 진행되었는데 사실상 실패하고 오히려 북한의 농지와 자연 환경이 파괴되어 식량난을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내용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적기적작, 적지적작: 알맞은 장소와 시간에 농사짓자는 내용으로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런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것도 수령이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당과 수령 따위보다는 짧으면 수년 길면 수십년동안 농사일해온 농민들이 이런거는 더 잘 안다. 모르면 농사 지어봤자 망한다. 망해도 진즉에 망해 아는 사람만 농사짓고 있을 것이다.


강냉이 영양단지 만들기: 한마디로 처럼 모판을 마련해서 옥수수이앙법으로 심겠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딱히 해롭거나 한 건 아닌데, 문제는 노력에 비해 수확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전부 수작업으로 진행한다고. 즉 효율성이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한 옥수수는 지력 소모가 무시무시한 수준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황폐한 땅이 더 황폐해진다. 더군다나 북한은 비료 사정도 좋지 않다.


다락밭 만들기: 을 깎아 계단식 경작지를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산악 지대의 비율이 남한보다 높은 북한의 환경을 감안하면 의외로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노력 대비 효율성도 떨어질 뿐더러 여름에 강수가 집중되는 북한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는다.


그나마 스위스에서 유학한 전력이 있어 녹음이 우거진 스위스의 자연 환경을 잘 알기에 북한의 민둥산을 불편하게 여기는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산림의 녹화를 추구하고 이러한 농법을 서서히 금지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별다른 효과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는 아직도 북한의 자원사정이 좋지 않아 화목을 사용하기에 필연적으로 나무 소비가 많을수밖에 없는데다가 녹화사업을 보면 알겠지만 남한에서도 화목의 비중을 줄이고 석탄의 비중을 높였는데도 성공에는 30년이나 걸렸다. 김정은이 집권한 지 10년도 안 된데다가 북한 사정이 1960~1990년대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더 절망적이니 그야말로 아직도 효과가 안 나타나는 건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2. 결과[편집]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 생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Quaker Peace & Creativity Summer School 2019 incl. film evenings Tickets, Multiple Dates | Eventbrite

Quaker Peace & Creativity Summer School 2019 incl. film evenings Tickets, Multiple Dates | Eventbrite





DESCRIPTION

A fun, friendly, informal gathering… an enriching time to learn and be creative together
We hope you can join Western Australia's first ever
Quaker Peace & Creativity Summer School
held over two consecutive Friday evenings and Saturdays in early January.
Speakers include 

Jo Vallentine (peace activist), 

Ann Zubrick (educator on spirituality and aging), 

Jane Hammond (independent film maker), 

Dr Nigel Pegram (exegesis academic), 

Dr Elizabeth Cheong (housing cooperatives), 

Elizabeth PO' (Mayors for Peace & nuclear weapons), 

Samya Jabbour (Palestinian Christian issues), 

Sara Martins (African cultural policies in Portugal), 

Lillian Robb (refugee law), 

Malcolm Robb (landmark land agreement with the Noongar), 

Mark Newhouse (Alternatives to Violence), 

Quaker Earthcare Committee, and 

Adrian Glamorgan (peace witness just back from North Korea).
There are four creativity workshops being run by Rosemary Longhurst, Adrian Glamorgan, Brenda Roy and Beth Harcourt


A FULL PROGRAM FOR THE FIVE SESSION WORKSHOPS IS FOUND HERE:


Please register for each and every "Select A Date" Session you wish to attend.
Select A Date from five sessions over two Fridays & Saturdays in January:
  • Friday evening 4th January (6pm-8:15pm) "A Crude Injustice" with director Jane Hammond WA and West Timor
  • Saturday morning 5th January (9:30am*-1pm) Peace Sampler Nonviolence | North Korea | Nuclear Weapons | Still, Small Voice | Native Title in SW WA | Refugees
  • Saturday afternoon 5th January (2pm-4:30pm) Creativity Hearing the Call Jump In & Haiku| Air Clay | Indigo Dyeing | Walking with Strangers (living with memory changes) | What does love require of us
  • Friday evening 11th January (6pm-8:15pm) "The Stones Cry Out" with Samya Jabbour Palestinian Christians
  • Saturday morning 12th January (9:30am*-1pm) "Here I Am" Orienting the Self (Your directions for 2019) | Self-activating and the Street | Am I, Are You, Are We...Australian? | Another Look at the Uluru Statement | Travelling our River & Reflecting on our Journey
*Each Saturday morning 8:50am-9:10am the organisers will host a short Quaker meeting for worship (ie before the Summer School starts). You are welcome to join us. We will mainly be in silent worship. At the end, there'll be a chance for a short sharing and Q&A.
Please bring a plate to share (but come in any case!). Meal and break times are a great occasion to share conversation. We look forward to your company!
Venue: Friends’ Meeting House, 35 Clifton Crescent, Mt Lawley. All welcome!
Inclusivity: Kindly contact Elizabeth at yarnwaves@gmail.com about any particular needs.
Questions about the program: ring Adrian at 045 0732 100.
Parking/Transport: Parking is limited. There are spaces at the Day Care Centre at 30 Clifton Crescent. Try Buses 60, 67 and 950 from Wellington Street: it’s a 20 minute ride, and about 6 minute walk. It’s a (hot) 20 minute walk from Mt Lawley Railway Station.
What are Quakers? Try this: https://www.quakersaustralia.org.au/ . This event is organised by WA Quakers Outreach Committee. We seek ways to connect with the wider community as we grow in spirit together, particularly focusing on ways we can develop Simplicity, Peace, Integrity, Community, Equality and Earthcare.
A fun, friendly, informal gathering… an enriching time to learn and be creative together

BTW, If you want to know more about future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workshops, like the one coming up on 16, 23 February, please register http://avpwa.org/workshops/workshop-registration .

2018/12/18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자유게시판

2018.12.16. 17:59

 soft103a(soft****)
나눔회원
https://cafe.naver.com/yooyoonjn/1597

==============

함석헌

-생명, 평화, 민주, 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한국의 간디’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들어가며

다석 류영모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함석헌 선생이었고, 함석헌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류영모 선생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1주기에 다석 선생의 제자들이 다석 선생의 집에 모였을 때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두 분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었다. 우선 11살의 차이였지만 생몰 일자가 거의 같다. 똑같이 3월 13일에 출생하고 돌아가신 날도 류영모 선생님은 2월 3일 저녁, 함석헌 선생님은 2월 4일 새벽으로 몇 시간 차이일 뿐이다. 그야말로 ‘의미 있는 우연’이라고 할까? 두 분 모두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고, 수염을 기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의 근본 사상이 여러 면에서 같았다는 사실이다. 두 분 모두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었다. 필자로서는 류영모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면, 함석헌 선생은 여러 번 뵙고, 1979년 캐나다 에드먼튼에 살 때 필자의 집에 유하시면서 필자가 근무하던 알버타 대학교에서 교민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시고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담도 하실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은 더 없는 영광이라 생각된다.

대조적인 점은 류영모 선생에 비해 함석헌 선생은 키도 크시고 외모도 출중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류영모 선생이 생의 후반에서 비교적 은둔적이고 금욕적인 면이 강했던 데 비해 함석헌 선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한국 민주화에 직접 참여하시는 등 사회 개혁에도 힘을 많이 쓰셨던 점이라고 볼 수 있다.신비주의 전통에서 즐겨 쓰는 용어를 빌리면 함석헌 선생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침 함석헌 선생이 “나는 왜 퀘이커교도가 되었는가”하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글을 쓰셨는데, 그것을 토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그의 삶

신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은 (여기서부터 존칭 생략) 평안북도 황해 바닷가 용천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3남2녀 중 누님 아래 둘째로 태어났다. 5세경 누님이 배우는 천자문을 옆에서 듣고 모두 외었다. 여섯 살에 기독교 계통의 사립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고 긴 댕기머리를 잘랐다. 함석헌에 의하면 전통 종교가 창조적인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 전통에 불과할 때 ‘바닷가 상놈’의 고장으로 알려진 자기 마을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 계통 사립 초등학교에서‘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일 함석헌은 자기가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14세에 양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6세에 졸업한 다음,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은 나중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순진성이 많이 없어지고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고보 2학년 17세에 한 살 아래의 황득순과 결혼했다.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장남 국용이 출생하고 2년 후 장녀 은수가 태어났다. 그는 모두 2남 3녀를 두었다. 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집에서 2년 동안을 있노라니 운동 이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유의 물결과 교육열 속에서 젊은 놈의 가슴이 타올라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썩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21년 21세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4월이라 입학 시기가 지나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집안 형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 그가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정주 오산학교에 가서 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류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9월 개학식 때 함석헌은 처음으로 류영모를 만나게 되었다. 함석헌에 의하면 그는 류영모의 영향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처음으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찾기 시작하고, 또 류영모로부터 노자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 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교회가 ‘점점 현실에서 먼 신조주의信條主義’, 교리중심주의로 굳어지게 되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다. 오산학교와 류영모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함석헌은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그해 9월에 난 대지진으로 도쿄시의 3분 2가 타버렸다. 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한국인들이 폭동을 계획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 약 6천명이 학살되었다.이를 본 함석헌은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을까?” 번민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다.오래 동안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 형편으로는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 그 본래의 의도대로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다가 동갑내기1년 선배인 김교신金敎臣을 만나고,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치무라가 생존인물인지도 몰랐는데, 김교신을 통해 그가 도쿄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존경하는 스승 류영모가 언급한 인물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에서는 별도의 예배형식이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며 해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함석헌은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 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 선생으로 일했다. 그러나 역사 선생이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처럼 과장하고 꾸미려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민에 고민, 결국 자기에게는 세 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했다. 첫째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전통을 버릴 수 없고, 둘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버릴 수 없고, 셋째 영국 역사가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를 읽고, 그 영향으로 받아들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릴 수 없었다. 이 셋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 셋을 다 살리면서 역사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용기가 나 역사 교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 역사의 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는 역사관이 확립되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 여섯 명이 귀국하여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 되어 나왔다. 이 책은 나중��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 류영모의 맏아들이 번역하여 영문판으로도 나왔다.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스스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다고 했다. 그러나 본래 교파를 싫어하여 무교회라는 것이 생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것 같고, 또 우치무라에 대한 개인숭배 태도가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반감을 느끼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을 깊이하면서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심정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지만, 그것을 크게 공표하여 부산을 떨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런대로 몇 년을 지났다.

오산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오산에 온 것도 이를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점점 가혹해지자 함석헌은 죽을 지언정 이에 맞서야 한다고 하였지만 오산학교 행정자 측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는 평생을 바칠 마음으로 왔던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봄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

교문은 나왔지만 차마 학생들을 떠날 수는 없었다. 오산에 머물면서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만났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 후배 김두혁이 평양 시외에서 경영하던 덴마크식 송산농사학교를 넘겨주겠다고 하여 1940년 그리로 갔다. 가자마자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함석헌도 덩달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억울하게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1942년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실린 「조와弔蛙」라는 우화 때문에 잡지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가는 사건이 터져, 다시 감옥에 들어가 1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이 때문에 나중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옥 후 다시 농사를 짓고 있는데, 2년 후 해방이 되었다.

함석헌은 이때까지 감옥을 네 번, 그 후로도 세 번 더 들어갔는데, 감옥에 있을 때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부르고, 감옥 속에서 불교 경전도 보고, 노자, 장자도 더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 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 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 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2000년 전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을 읽는 기분이다.

해방 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밀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소련군정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1947년의 일이다.

월남하여서는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말로나 글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필자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 그 당시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었다. 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 기도하지 않고,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 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하고, 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으로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알고 오래 동안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형세는 돌변했다.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 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되어 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이때를 예견한 것인가? 함석헌은 1947년 월남 이후 지은 그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심정이 토로하고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不義의 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 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 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 이별인가” 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 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그럴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가 나타났다. 퀘이커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를 접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 이렇게 되어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 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 세계 대회에 퀘이커 친우들이 그를 대해 주는 데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서 결국 퀘이커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씨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 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1974년 윤보선,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 췌장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2월 4일 새벽 5시 28분, 87년 11개월 가까이, 날짜로 33,105일을 사시고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을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박재순 박사에 의하면, 돌아가시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애쓰셨다는데, 그것이 스승 류영모가 돌아가신 날에 맞추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한다. 장례식은 조문객 2 명이 오산학교 강당에 모여 오산학교장으로 치르고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가,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이에 따라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영원한 ‘들사람’에게는 약간 의외의 조치가 아닌가 여겨지는 면도 있다.
=====




그의 가르침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 평화, 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세간에서 말하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누가복음6:40) 했다. ��도마복음��이나 ��장자��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류영모 선생님의 제자이지만, 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함석헌의 사상이 어떻게 세계 종교의 심층, 곧 신비주의 전통과 통하는가,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가 살펴본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의 사상을 통섭하고 있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경전을 ‘끊임없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한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자라나는 신앙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옛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낡아 빠진 종교다. 우리들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는 종교는 낡아 빠진 종교이다. 신학적인 설명을 강요하기 휘해 과학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종교도 역시 낡아 빠진 종교다.”

자라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 생명이 없는 신앙이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바람(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결국에는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도마복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변화를 받아 점점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가장 ‘본질적인 나’라는 뜻에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참 나라 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깨침’이라 한다. 심층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넷째,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놀라운 통찰이다. 


예수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임을 발견한 분이다.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예수와 같은 그리스도 의식에 동참하여 그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심층 종교의 기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이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 거의 모든 종교 신비주의 심층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 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이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 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 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 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라고.”


여섯째는 ‘너와 나는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함석헌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만물이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가히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다.

일곱째는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 다 하느님의 예언자다.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결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자연히 다원적 사고를 인정하게 된다.거의 모든 심층 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런 몇 가지 예만으로도 함석헌의 사상이 류영모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세계 신비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아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오늘 한국의 종교들이 거의 표층 종교 일색으로 변해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된다.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나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가 미래의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심층적인 종교, 신비주의적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류영모·함석헌의 사상에서 미래 종교의 광맥을 보는 듯하다 하면 과장일까?*


#함석헌 #오강남 #경계너머아하 #류영모


How organic agriculture in Cuba saved its population from hunger | Nieuwsbericht | Agroberichten Buitenland



How organic agriculture in Cuba saved its population from hunger | Nieuwsbericht | Agroberichten Buitenland



How organic agriculture in Cuba saved its population from hunger

Nieuwsbericht | 10-10-2018 | 21:49


Cuba's example shows that sustainable development isn't only possible, it's necessary. This country was forced to abandon its sugar monoculture and has survived thanks to organic agriculture.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left Cuba in a dire economic situation. Cuban citizens started to grow crops on their balconies whilst farmers, left with no petrol or pesticides, were forced to resort to traditional methods to feed themselves. This started a true revolution: that of organic agriculture in Cuba.
Cuba’s “special period”

Cuba is often associated with sugar. In fact, right until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in 1991, this country had been its greatest exporter; cane sugar was the principal crop being cultivated, which entailed a large use of pesticides. From that year onwards the situation changed: with the disappearance of its main recipient, the Soviet market – also necessary for the importation of petrol – the Cuban economy suffered a great blow and entered what is euphemistically called the “special period”, made even worse by the tightening of the America embargo.
Were all those pesticides really necessary?

Without petrol (or money) there was no way to import food for the Cuban people. Therefore, its citizens were on the verge of famine. More and more people started growing crops on their balconies and gardens, and farmers were forced to alter their cultivation methods: they returned to ploughing fields with oxen, got closer to their customers through direct sales and used natural alternatives to pesticides. “Boats had arrived from the Soviet Union full of chemicals and fertilisers and suddenly there were no more boats from the Soviet Union, and people asked, do we need all those chemicals?,” Miguel Angel Salcines, the owner of one of Cuba’s organic farms told British daily The Guardian.
The growth of organic agriculture in Cuba

This is how organic agriculture took a hold in Cuba. Today, small plots of land – no larger than 40 hectares – are being farmed without using pesticides and all products are sold locally. The government has supported citizens’ initiatives through land concessions and the creation of a body that coordinates and promotes the development of sustainable urban agriculture. This is how people have been able to feed themselves and the country managed to cut some of its dependence from imported goods. The transition hasn’t yet become definitive and the process has slowed down as the economy has improved, and we must also take into account that massive amounts of pesticides were used on many of the lands where crops are now grown organically. Nevertheless, a study that was published in Monthly Review magazine shows that from 1988 to 2007 the country increased the production of vegetables by 145 per cent, decreasing the use of pesticides by 72 per cent.


“Organic agriculture isn’t a mirage, and the closing of half of the country’s sugar refineries represented the first step towards our food independence,” according to Fernando Funes Monzote, who has a Phd in Agronomy and is the son of one of Cuba’s greatest supporters of organic agriculture. Even though it isn’t perfect, the country’s transition towards a new agricultural model is an example to others as it shows that sustainable development and food security are attainable and deeply connected.

Source: https://www.havanatimes.org/
Author: Andrea Cutolo

`"文정부 農政 역대최악...소득성장 외치며 농민은 외면해" [김성훈 前 농림부장관에게 고견을 듣는다] - 디지털타임스



`"文정부 農政 역대최악...소득성장 외치며 농민은 외면해" [김성훈 前 농림부장관에게 고견을 듣는다] - 디지털타임스



"文정부 農政 역대최악...소득성장 외치며 농민은 외면해" [김성훈 前 농림부장관에게 고견을 듣는다]
이규화 기자 david@dt.co.kr | 입력: 2018-11-09 12:54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인터뷰.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김성훈 前 농림부장관



"문재인 정부의 농업정책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더 망했다고 해도 심한 말은 아닐 겁니다. 올 들어 쌀값이 앙등했다고 말합니다. '앙등'이라니요? 제발 그런 말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떨어졌던 가격이 정상화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 정부는 생활물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부 비축미 5만 t을 시장에 푼다고 합니다. 그것도 추수기에요. 농민들이 버럭같이 화를 내며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당연하죠. 상처에 소금 뿌리는 행위입니다. 농민들은 밥 한 공기에 500원은 고사하고 300원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150원 하다 이제는 230원 정도까지 올랐어요. 빵 하나에 1500원 하는데 말이죠. 농정이 이러니 문 정부가 하는 다른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됩니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우리나라 농어민은 약 240만명, 농어업 종사자는 149만 명이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도 안 된다. '찌그러져 있던 농업'이 갑자기 올 들어 국민들의 관심 속으로 들어왔다. 쌀값 때문이다. 실제로 올 들어 쌀값은 최고 수준일 때 작년 대비 40%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현재 산지 쌀값은 19만3000원으로 최근 5년 평균가격 보다 21%나 높았다. 이를 기화로 농림축산식품부는 비축미 5만 톤을 시장에 풀겠다고 했다. 아무리 쌀 소비가 줄었다 해도 여전히 쌀은 주곡이다. 소비자들이 대체 '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북한 석탄 반입한 배에 정부가 쌀을 실어줬다는 황당한 루머가 돌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농업의 현안을 꿰뚫고 있는 농정계 원로이자 거목인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을 만났다. 김 장관은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에 취임해 2년 5개월 동안 농정을 책임지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농업정책을 입안한 장본인이다. 평생을 농업 농촌 농민 '3農'을 위해, 3농과 함께 살고 있는 농경제학자요 농업운동가다. 지금도 아파트 옥상에 채소를 가꾸고 있는 '농부'이기도 하다. 그는 3농 정책을 고리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 등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가 우리나라 국토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산은 홍엽으로 물들고 들녘은 황금 캔버스로 변하거든요. 그 들녘의 아티스트가 바로 농민들입니다. 공장에서 농사를 짓는 시대인데요 말이죠.



"인류가 태어나서 200만년 300만년 흘렀습니까? 1, 2, 3, 4차 산업혁명 심지어 5차 산업혁명이 와도 먹을거리 이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인공 소고기 개발에 성공하고 곧 나온다고 하지만 자연이 공급해주는 안전한 먹을거리는 기본이고 영구불변 합니다. 세종대왕께서 민유방본이요 식위민천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나라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은 식(食)을 하늘로 여긴다. 농업의 가치는 영원할 것이고 치세의 가장 근본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농업 정책은 그런 사고 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올 들어 쌀값이 많이 올랐는데요.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앙등이 아니에요. 현재 쌀값은 2013년 수준을 회복한 겁니다. 100g 한 공기 밥값이 300원 정도만 되도록 해달라는 게 농민들 바람입니다. 150원 하다가 이제 230원 정도 됐습니다. 빵 한 개 값에도 못 미치는 밥 값이 말이 됩니까. 제발 앙등했다는 말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최근 쌀값이 오른 것은 수급문제입니다. 쌀 생산량이 올해 감소할 것이라는 말이 돌고 공급이 주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격이에요. 저는 문재인 정부의 농정(農政)을 불신합니다. 이 정부 들어와 쌀값 억제정책을 펴왔어요. 쌀값이 좀 뛰자 기재부와 농림축산식품부가 정부 보유미 5만 t을 풀려고 하는데, 추수기에 시장에 푼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부의 비축미 방출은 보통 단경기 때인 4,5,6월에 하는 게 상식입니다. 농산물은 공급 탄력성이 떨어져 폭등폭락할 수 있어요.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서 농민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행위입니다. 식당하는 자영업자들의 고충을 경감하기 위해 그런다는데, 그것도 문제입니다. 최저임금 무책임하게 올려놓고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에게 뭇매를 맞으니까 엄한 쌀값에 화풀이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최저임금 급등이 농업계에도 그렇게 영향을 많이 줍니까.



"임금 수준이라는 게 연쇄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거에요. 이미 농촌은 일손이 없어서 품삯이 7만~8만원을 넘어 10만원에 육박하는 데가 많아요. 하루 다섯 끼, 네 끼 식사를 제공하고도요. 최저임금이 오르면 농촌의 품삯도 덩달아 오릅니다. 지금 농촌에는 외국인 농업근로자들도 상당수 있는데, 이들도 내국인과 똑같은 임금체계 적용을 받아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 최저임금을 다락같이 올려놓아 농가 생산비는 더 오르고 노동 공급은 더 줄었어요. 최저임금을 지역이나 산업에 따라 달리 적용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갈수록 문제는 심각해질 겁니다."



-장관님은 진보 쪽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현 진보좌파 정부의 당국자들이 들으면 서운해 하지 않겠습니까.



"진보도 진보 나름이지요. 어디 잘 하는 게 있어야 칭찬도 할 게 아닙니까."



-현 정부가 들어선 지 이제 1년 6개월 됐는데, 변화의 모습이 보이는지.



"문재인 정부는 총론은 있는데 각론이 없어요. 출세주의자들만 득실거립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호는 왼쪽으로 넣고 핸들은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어요. '촛불 혁명'을 했다고 하는데, 촛불과 함께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꿰차고 있어요. 소득주도성장을 한다면서 농민들 소득은 안중에도 없어요. 심지어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도 못한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는 그래도 농업의 6차산업화(농업을 1차 생산, 2차 가공, 3차 서비스 및 유통하는 산업으로 키우자는 6차산업화는 김 전 장관이 농림부장관 재식 시 제안했다고 한다) 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요. 그런데 이 정부는 아예 농업 아젠다가 없어요."



-정책을 이끌고 갈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문재인 대통령은 사라져야 할 좀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어요. 제2의 '노무현 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쓰고 있어요. 앞에서 아부나 하는 사람들만 많고 소신을 갖고 정책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부총리가 바뀐다는데 이번에는 좀 물정을 아는 사람을 앉혀야 합니다. 농민들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중소 상공인들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시장과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문제를 해소할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출세주의자들은 안 됩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말처럼 좀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보면 나아지지 않을까요.



"저는 기대를 많이 안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싹수가 노래요.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쌀 목표가격 인상도 농민들 현실과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효과도 별로 없는 일자리 예산으로 54조원을 쓰면서 왜 우리사회의 가장 취약계층인 농업과 농민에 투자하는 것은 그렇게 인색한가요?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한다는 농어업특별위원회는 아직도 설치되지 않고 있어요. 지금 우리 농촌은 멸실돼가고 있습니다. 전남만 해도 한 마을에 20호가 안 되는 농촌 마을이 40%나 됩니다. 농촌이 고령화 단계를 지나 아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낙연 총리가 도지사를 했던 전남에서 지금 가장 심각하게 농촌마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섬은 거의 비다시피 돼가고 있어요. 저는 이 총리에게 좀 쓴 소리를 하고 싶어요. 농업 지역의 도지사를 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있을 텐데 왜 그런 것을 현 정부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나요. 총리는 그냥 장식물인가요. 대권 후보군으로 올라있던데, 이미지 관리만 하는 건 아닌가요?"



-총리는 사실 실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말 마세요. 공직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말직이라도 국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직이 일신의 출세를 위한 자리가 아니에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조대왕에게 올린 농책(農策)에서 농이란 천하의 근본으로서 때(天時)와 땅(地利), 사람(人)이 화합해야 천지에 힘이 가득해 심고 기르는 것이 왕성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이 근본을 버리고 끝(末 )만 도모하려고 하니 논밭이 묵히고 놀고먹는 사람들만 늘어난다고 했어요. 또 농업은 태생적으로 자연현상 등의 제약을 받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는 3농 정책을 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3농이란 첫째, 후농(厚農)으로 수지맞는 농사가 돼야 한다는 거고 둘째, 편농(便農)으로 정부가 경지 정리, 관개 수리, 기계화 등 농사를 편하게 지을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상농(上農)으로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농정을 맡는 공직자들을 보면 다산 선생의 철학을 찾을 수 없어요. 농정 뿐 아니라 경제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공직에 대한 소신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아요. 총리뿐만이 아닙니다. 전남 전북 자기 고향과 지역을 망쳐놓은 사람들이 이 정부 들어 장차관을 하고 있어요. 참 안타깝습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인터뷰. 박동욱기자 fufus@






"출세주의자만 득실… 세상물정 좀 아는 인물로 확 바꿔야"



농민은 급감하는데 지원 부처·기관은 급증… 비정상의 극치

'3農' 발목잡는 '5敵' 대오각성해야… 農協의 '귀족화'도 심각

디지털시대 농업이 살길은 친환경, 가족농 스마트팜도 필요

한국농민 부지런하고 영리… '茶山의 上農' 새겨 장점 살려야





-정부가 FTA로 피해보는 농어민을 돕기 위해 농어촌상생기금을 설치하고 기업들로부터 기금을 출연 받으려 하는데요.



"농어민을 돕는 취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업이 생돈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방법이 틀렸어요. 수입할 때 징수하는 등 시장에 녹여서 기금을 만들어야지 현금을 출연하는 방식으로는 저항을 부릅니다."



-농업을 살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식량안보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산업이지만, 전체 국민총생산(GDP)에서 농업 생산은 2%도 안 됩니다. 농어민은 약 240만명이고 농어업 종사자는 149만 명인데, 여기에 무한정 재원을 투입할 순 없지 않습니까.



"현재 농민은 전체 인구의 4% 정도인데 계속 줄고 있어요. 그런데 농림축산식품부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습니다. 산하 공공기관도 자꾸 생기고 있고 직원들도 증원되고 있어요. 농민이 주는데 왜 농민을 지원하는 부처와 기관들은 늘어나야 하나요. 반대로 줄어야 정상 아닌가요? 농업진흥청 공무원은 아마 7000명 쯤 될 겁니다. 이밖에 농어촌공사 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 솔직히 없어도 될 공사와 공직자가 너무 많아요. 이런데 들어가는 경상비를 농업 농촌 농민을 위한 데 쓰면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아쉽습니다."



-우리 농업에는 5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영부영 무책임한 농업 관련 공직자, 농업을 효율로만 보는 외꾸눈 경제학자,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은 얼치기 농업경제학자, 표만 계산하는 정치권, 무조건 투쟁만 일삼는 농민단체들을 말합니다. 우리 농업 농촌 농민이 잘 되려면 이들 5적이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현재 헌법이 정한 경자유전의 원칙이 무너졌어요. 농지를 투기장화한 결과이기도 하고 정책이 뒷받침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현재 위장된 소작농이 약 70% 가량 되는데, 물론 옛날처럼 소출의 절반을 빼앗기는 그런 소작농은 아니지만 자기 땅을 충분히 갖지 못한 농민들이 많아요. 가령 상속 받은 농지는 영농을 직접 하지 않으면 팔게 돼 있는데, 이게 높은 양도소득세 때문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이런 제도적 미비점을 정책 담당자들이 보완해야 하는데 방치하고 있어요."



-추곡수매 대행 등 정부 농업정책의 시장화를 담당하는 농협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나요.



"지금 농정이 잘못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농협의 귀족화' 문제입니다. 농민을 위한 조직이 농민을 대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변했어요. 중앙회장은 무보수 봉사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앙회장에 너무 권한이 집중돼있어요. 농협은 금융까지 하면서 이젠 재벌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농가소득이 우리나라 평균 가계소득의 60% 정도인 3800만원 밖에 안 되는데, 이들의 평균 연봉은 그 2배나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 생활적페를 청산하겠다고 나섰는데, 농협은 그 첫 번째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 농협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슬림화 했는데 그 이후 정권들에서는 이렇다 할 개혁이 없었어요. 농협을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시급합니다."



-내일 모레가 농업인의 날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행사를 크게 여는 것 같던데요.



"제가 농림부장관 재임 시 농업인의 날의 의미를 대대적으로 강조하고 행사를 키웠어요. 11월11일은 한자로 십(十)과 일(一)을 합쳐 토(土)자가 겹치는 날에 착안해 만든 날인데, 이 날 하루 만이라도 농업의 가치를 생각하고 농업을 지키자는 취지로 생기게 됐습니다. 1998년 농업인의 날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농업의 나아갈 길로 친환경 농업을 선포했어요. 우리 '땅심'을 회복하고 농업이 미래 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농업을 새롭게 보자고 했지요."



-요즘 농촌에는 농지와 산지를 파헤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는 붐이 일고 있습니다. 농외소득 보전이라는 달콤한 말로 농촌 경관을 망치고 있는데요.



"찬성하는 농민보다 반대하는 농민들이 더 많아요. 한번 설치하면 수십년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도 결국은 농민 보다는 태양광 업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독일 같은 경우는 중앙정부나 지자체는 가만히 있고 농민들이 필요하면 자발적으로 설치하고 있는데, 독일 방식에서 배워야 합니다. 지금처럼 중앙정부가 탈원전 무마용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디지털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 농업은 어떻게 변신하고 발전해야 하나요. 농민 단체들이 반대해 스마트팜은 한발짝도 못 나아가고 있는데요.



"농업은 식량 생산 그 이상의 가치와 기능을 갖습니다. 농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본령의 식량 생산 외에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것을 농업의 '다원적 공익 기능'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OECD 등 국제기구 등에서도 인정하고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농산물은 예외를 인정받고 있어요. 농업은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국가안보적 기능, 농촌사회를 형성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기능, 가을의 황금 들녘에서 보듯 아름다운 경관으로서 기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면적 가치와 기능을 갖습니다. 이런 농업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우리 농업이 나아갈 방향은 분명히 친환경 농업이에요. 그 중에서도 자연생태계와 공존할 수 있는 유기농의 확산이 필요합니다. 스마트팜이 농촌의 현실을 무시하고 농민을 배제하고 추진되니까 반대하는 겁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건전한 가족농(지역공동체)를 선호하는데, 가족농이 주체가 되어 스마트팜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봅니다. LGCNS가 새만금에 추진하다 도중하차 했는데, 이 문제는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 농촌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해결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인구가 늘고 있고 단위 면적당 농업생산량 증대는 한계가 있는데,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만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 정도인데 국내 농산물 생산량도 식용으로만 쓰면 충분해요. 가공과 사료용, 공업용을 쓸 수 있는 양이 모자라 수입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유기농 생산으로도 식량 생산 수급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습니다. 유기농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기농 전환 직후 3년 이내나 그런 것이지, 4년 이후 안정화되면 생산량은 늡니다. 유기농 농법이 갈수록 발달하고 있어 친환경 유기농 농업도 충분히 국가 식량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농산물의 30% 이상이 유통 조리 과정과 먹다 남는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IoT와 드론 기술 등을 이용해 유통혁명을 일으키고 AI로 수요공급을 빈틈 없이 잘 맞추면 낭비되는 식량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장관님은 GMO(유전자조작농산물) 반대 운동을 펼치고 계십니다. GMO 추방운동의 대부라도 할 수 있는데요. 아직 GMO의 유해성은 증명된 게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몬산토 장학생들의 주장입니다. GMO가 등장한 지 이제 20년 밖에 안 됐어요. 징후가 나타나기에는 시간이 더 지나야 합니다. 쥐에서는 이미 GMO가 해롭다는 실험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봐도 GMO 농산물은 피해야 합니다. EU는 적극적으로 GMO를 관리하고 있어요. 러시아 같은 경우는 GMO를 생산하지도 수입하지도 먹지도 않습니다. GMO는 유전자를 조작해 병충해에 강하게 만든 건데, GMO 콩과 옥수수는 아무리 제초제를 뿌려도 풀만 죽지 작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요. 유전자를 조작해 제초제 성분에 대한 내성을 키운 것인데, 그렇게 재배한 콩과 옥수수를 먹으면 그 내성이 사람에게 전이되지 않겠습니까."



-국내 GMO 농산물 유통과 사용 실태는 어떻습니까.



"국내에서는 가공식품에 GMO를 수입해 쓰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소비자가 마트에서 GMO가 들어있는 가공식품을 가려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GMO 첨가 표시를 못하게 하고 있어요. 심지어 농민이나 농식품회사가 '우리 식품에는 GMO가 들어있지 않다'고 표시하는 것도 막고 있습니다. 가공식품은 복지부 산하 식약처 소관인데 식약처의 농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GMO 관련 회사들의 로비가 먹힌 것이라고 의심 할 수밖에 없어요. 국민들은 어떤 식품에 GMO가 들어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식품에 GMO가 들어가 있는지 알아야 피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식탁이 궁금해요. 혹시 GMO가 들어가 있는 식품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한국 농업 농촌 농민 3농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농업은 앞으로 자손만대로 이어질 기간산업이자 안보산업이고 생태계를 지키는 수호산업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류가 진화한다 해도 안전한 먹을거리 확보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 과제입니다. 그것을 담당하는 농업과 농촌 농민을 단순히 산업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다원적으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한국 농민들은 세계 어떤 나라 농민들보다 부지런하고 영리합니다. 다산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농을 하게 되면 우리 3농은 미래가 밝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