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2

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 네이버 블로그 -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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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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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 대화에 관하여 : 네이버 블로그

소고 : 대화에 관하여 : 네이버 블로그

소고 : 대화에 관하여
향유자
2022. 5. 24.

젊은 시절의 나는 이성과 언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현재의 혼란과 오해는 충분하지 못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대의와 선의에 기반한 대화로 최적의 해를 함께 찾아 갈 수 있다는 믿음.
내가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것처럼 타인도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
점점 살아오면서 이게 꽤 많이 바뀌었다.
이 것은 진리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이나 언어의 기표와 기의가 별개의 것이므로 언어를 통해서는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언어 철학과 같은 근원적이고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
이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목적과 태도에 대한 '불만'에서 연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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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대화를 통해서는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진실이나 진심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이들은 주로 의미없는 상투적인 말로 대화를 채우거나, 별 내용이 없어서 하나마
나 하고 어떤 의미있는 정보도 담겨있지 않은 안전한 말로 시간을 때운다.
반면 내가 무언가를 말 할 때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이용해 올바른 맥락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듣는 쪽에서는 대충 듣고 적당히 이해한 후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너
무 많다보니, 이제는 별로 이를 위해 애 쓰고 싶지가 않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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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을 잘 읽어내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 안에서 나름의 맥락을 읽어내고 상대의 진의 - 진짜 욕망 - 를 헤아려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눈
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마 그래서 뭔가 이해하려고 할 때는 더욱 책을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 것 같다. 물론 책도 진실되고 타당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과 기만적이고 의미없이 단어만 나열해 놓은 책을 구분해야
하지만, 이 부분은 사람을 읽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은 편 같다.
게다16가 중년을 넘7어갈수록 대화는 더더욱 무의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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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면서 대화는 사실과 내용과 맥락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상대의 말에서 아는 단어가 나오면 거기에서 연상되는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본인의 고민에서 비롯되어 충분히 발효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티비에서 본 것이나 한줄 뉴스에서 스친 것 등의 피상적인 이미지들인 경우가 많다. 그저 우연히 머리
에 먼저 들어와 있는 것의 재생 - 대부분의 경우 불완전한 이해에 의해 다시 왜곡되어 있는 - 인 것이다.
결국 이런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상대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주로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또 그 상대가 가지고 있는 세계와 사회에 대한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정도일 것이
다. 그런데 그런 세계관 역시 독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의 경우는 돈, 집, 차, 음식, 골프 등에 대한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이러한 관점은 비슷한 형태로 무한히 반복되며 이야기되기에, 고착되고 발전이 없다. 그러다보니 원래도 의미없는 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더 이런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생
각이 든다.
아마 이것은 사람들이 점점 나이들이 들어가면서 청취 listening 를 잘하지 못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 청각 hearing 능력이 떨어져 가면서, 더욱 대충 듣고 하고 싶다고 느끼는 말
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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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해는 그 사람이 하는 말과는 전혀 무관하게 - 때로는 정반대로 - 실제 하는 행동과 자신이 진심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 주로 돈과 시간 - 을 어디에
집중하는지 정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인간의 다면성 때문에 누구라도 변명과 갱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공평하다고 믿어서 가능하면 타인에게 기회를 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점 실망스
러운 경험이 쌓이면서, 사람은 잘 바뀌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잘 모르거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
어, 나 역시도 예전처럼 타인들에게 계속 기회를 주지는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에야 어쩔 수 었겠지만, 가능하면 의미 없는 얘기를 해야 하는 자리는 피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의미 없는 관계
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진의를 드러내는 언급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고착적이지 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자리를 더욱 늘리고 싶다. 새로운 것을 계속 접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사람,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근본적
인 것에 대해 지속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의문을 품고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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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한 인연과 만났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귀담아 듣고 의미있는 피드백을 통해서 변증법적인 상승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능하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한 글과 함께 대화를 병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말과 설명할 맥락이 많아지는데, 그런 것들을 글로 정리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다. 이게 정말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이 맞는지, 그 이전에 스스로 말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이런 인연과 만나서 좋은 자리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매우 운이 좋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리라.
그런 인연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일테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잘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자세를 갖추기위해 스스로 갈고 닦는 것이리

음악과 소고 : 존 레넌의 'God', 그리고 종교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음악과 소고 : 존 레넌의 'God', 그리고 종교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음악과 소고 : 존 레넌의 'God', 그리고 종교이야기
향유자
2020. 2. 2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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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를 말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다! - 존 레넌 -
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I'll say it again
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신은 개념이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을 측정해서 만든.
다시 말하겠어.
신은 개념이야.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측정해서 만든.
I don't believe in magic
I don't believe in I-Ching
I don't believe in Bible
I don't believe in tarot
I don't believe in Hitler
I don't believe in Jesus
I don't believe in Kennedy
I don't believe in Buddha
I don't believe in mantra
I don't believe in Gita
I don't believe in yoga
I don't believe in 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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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I don't believe in Elvis
I don't believe in Zimmerman
I don't believe in Beatles
I just believe in me
Yoko and me
나는 마법을 믿지 않아.
나는 주역을 믿지 않아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
나는 타롯을 믿지 않아
나는 히틀러를 믿지 않아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
나는 케네디를 믿지 않아
나는 부처를 믿지 않아
나는 만트라를 믿지 않아
나는 바가바드 기타를 믿지 않아
나는 요가를 믿지 않아
나는 왕들을 믿지 않아
나는 엘비스를 믿지 않아
나는 밥 딜런을 믿지 않아
나는 비틀즈를 믿지 않아
나는 나만 믿어.
요코와 나만.
And that's reality
The dream is over
What can I say?
The dream is over
Yesterday
I was the dream weaver
But now I'm reborn
I was the Walrus
But now I'm John
And so dear friends
You just have to carry on
The dream is over
그리고 그게 현실이야.
꿈은 끝났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꿈은 끝났다고.
예전에
나는 꿈을 자아냈지.
그러나 나는 다시 태어났어.
나는 월러스였지만,
이제는 존이야.
그리고 친애하는 친구들,
당신들은 계속 해나가야 해.
꿈은 끝났다고.
https://youtu.be/aCNkPpq1g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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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God (Remastered 2010)
[이 노래는]
이 노래는 존 레넌이 1970년 비틀즈 해체 이후, 자신을 직시하고 홀로 꾿꾿이 서려는 성찰을 담을 곡이다. 70년대 초기의 존 레넌은 참으로 빛났다. 그 빛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거침없이 자신의 바
닥까지 들어가서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기에, 세대를 넘어서 듣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든다.
[이 시국에]
요사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초기부터 질병관리본부를 위시한 정부가 절적하게 대응하여 모범적으로 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신천지에서 관리지침을 따
르지 않고 무분별하게 병을 옮기고 다닌 소위 ‘31번 환자’가 드러나면서 급격하게 대구, 경북 지방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는 민주정부의 일이라면 사실관계와 맥락을 무시하고 일단 부정적으로 헐뜯고 보는 자격미달 언론인들과 다가오는 총선에 어떻게든 이것을 이용하려는 무책임한 함량
미달 정치인들에 의해 실제 사태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호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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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이명박 당시 76만명이 감염되고 263명이 사망한 신종플루 시기에 나온 중앙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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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의도적으로 감염검사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일본을 극찬하며, 이를 이용해 정부에 흠집을 내려 하는 코로나19 초기 중앙일보 기사
사이비 종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는 이 시점에서 그간 종교에 대해 내가 겪어 온 바와 느끼는 바를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의 종교이야기]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다. 항상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고, 그래서 일요일 오전에 티비에서 하는 만화를 마음 편하게 본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찬송가도 제법 알고 성경 구절도 꽤 외곤 했다. 때가 되면 여름 성경학교 같은 행사에도 제법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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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항상 일요일 아침에 조금 보다가 교회에 가야 해서 아쉬운 기억이 남아 있는 만화와 실사 합성 드라마인 '아이젠보그 특공대'
그러다가 교회에 나가기를 그만 둔 것이 대략 중2때 정도인 것 같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위선이 너무도 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뭔가 드러
내놓고 얘기하기에는 애매한데, 분명 그 관계들 속에 내재해 있는 음습함. 그런 것을 보다 보니 오히려 교회 밖에서 자기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의 자칭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 보다 더
나아 보였고, 그렇게 교회에 발을 끊었다.
물론 교회의 집요함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아서, 기독교 재단이던 중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졸업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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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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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얼마전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코로나 사태 와중에 예배를 본다고 원생들을 불렀다는 기사를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국공립인데 강제로 종교행사에 동원한다고... 미친 것 아닌가?
군대에 가서는 훈련소에서 일요일에 작업을 하지 않으려면 종교활동에 참가하라고 했다. 종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있었는데 그나마 다녀 본 적이 있는 교회로 갔다. 그 유명한 교회 초코파이를 얻
어먹으며 재미를 붙여보려 했지만, 두어번 참가해 본 교회에서 듣는 설교는 귀가 썩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존 체제에 대한 옹호,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 등은 굳이 그들에게 듣지 않아도 이미 조교에게 충
분히 듣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나마의 논리를 펼치는 방식도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에 가까워 정말 듣고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초코파이와 작업 열외를 포기하고 일요일마다, 겨울이어서 대부
분 석탄을 뒤집어 쓰게되는 작업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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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물질, 물질, 물질... 한국 교회와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다.
훈련소를 마친 뒤, 자대에 배치를 받고는 당연히 종교활동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그 전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는 불교 예불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듣는 설법은, 교회의 우
격다짐에 가까운 설교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인본주의적이면서 자연주의적인 이야기는 그야말로 감로수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굳이 종교활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는 말년병장 때까지
법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 또한 기성 종교인지라 정해진 노래를 부르고 예식에 맞추어 진행하는 행사는 별로 마음에 맞지 않아, 제대하고 법회에 참가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절도 결국 사람들 모아놓고 찬불가 부르고 돈받고 하는 형식은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런 형식이 숨 막히고 싫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가끔 종교적인 스터디를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성향 자체가 뭔가 진지한 이야기거리가 있으면 일단 들어보는 편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왜 그런
지 궁금해 하는 편이어서, 학교에서 아는 사람들 - 주로 함께 얘기할 만 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 - 이 기독교 관련 세미나를 하자고 하면 흔쾌히 함께 그들이 권해주는 책 (복음주의자인 프란시스 쉐퍼의
책 같은 것) 을 읽어가며 토론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거의 항상 같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 되게 논리를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논리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등장하고, 그
지점에 이르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를 못하는 것을 믿느냐라고 되묻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단 믿어야 그 뒤를 알 수 있다는 식이다. 이렇게 당최 말이 안되는 것을 두
어 번 겪고 나니 더 이상 이들과의 스터디는 하고 싶지 않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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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사진 출처 : Repeat 도를 아십니까? 따라가 봤니? by Monde MonZak - You2Repeat
한번은 길에서 ‘기’나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을 만났다. 도대체 이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 궁금해서 따라가 보았다.
나를 데려 간 사람은, 여러 사람이 있는 큰 방에 들어가서 작은 책상 앞에서 서로 마주 앉아서는 스크랩해 놓은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자료는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올 것 같은 우주인과
UFO 등에 대한 자료였다. 이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여서 흥미롭게 듣고 있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슬슬 조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잘 못 주무셨나봐요’하니까, 내게 잠귀신 (수마) 이 씌여서 그렇
다고… (뭐, 내가 원래 어디서든 잘 자긴 하는 편이다 ㅎㅎ)
그러고 나서는 조상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서 가진 것을 다 내보라고 한다. 항상 돈이 없던 대학 시절이라 주머니에 있던 전재산 천 원을 내놓고 조상님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나오는
데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안녕히 다녀오세요’ 한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니, ‘아니,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왜 대답을 안해요’란다. 그래서 '네네~' 대답하고는 나왔다. 물론 그 이후에
그들과 연락한 적은 없다.
이후 사회에 나와서도 뭔가 삶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접근을 통해 우회하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요가 수련을 통해서 도를 닦는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요가 스승님들. 그분들을 만난 지도 이미 십오 년이 훌쩍 넘어갔는데, 초기에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줄 것 같던
기세와 희망은 그들의 지리멸렬한 삶 속의 크고 작은 욕심과 때로는 비상식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요가는 그냥 요가일 뿐이구나'하는 생각 정도만 남았다.
호흡은 호흡이고, 명상은 명상일 뿐. 몸을 위해서는 운동을 하고, 마음은 스스로 치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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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우리의 종교이야기]
아내와 신천지 얘기를 하다가, 연달아 개신 기독교 일반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아내가 말했다. '어떻게 다른 존재를 믿고 모든 것을 맏길 수 있지?' 듣고 보니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내게 물었다,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이냐고.
마침 요새 2억5천1백만년 전인 페름기-트라이아스기 전환기(더 크게 고생대와 중생대의 전환기이기도 하다)의 대멸종에 대한 책을 보고 있던 참이라, 나는 과학을 믿는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자연
을 이루는 원칙, 세상이 돌아가는데 내재된 원칙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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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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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지금 읽고 있는 대중 과학서. 잘 쓰여진 과학책은 웬만한 종교책보다 더 큰 깨달음을 준다.
사실 기성화된 종교의 형식과 현실 속에서 탐욕의 바벨탑을 쌓아 가는 그들의 행태가 나와 맞지 않아서 그렇지, 나 스스로는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종교에 내재되어
있는 반짝이는 보석 같은 가르침이 있다면 기꺼이 배울 용의가 있고, 누군가 올바른 말을 한다면 기꺼이 들을 마음이 있다. 그 이전에 세상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고, 그저 먹고 사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고 인간이 마지막까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고 현실 속에서 이루어내기 위한 노력
속에서 인간의 수준은 점점 나아지는 것이라고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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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나름 종교 자체에 가지고 있는 관심을 채우기 위해 지금까지 봐 온 것들의 잔재. 앞으로도 기회 되는대로 계속 폭 넓게 알아가고 싶다.
제도화되고 도그마화 된 종교의 폐해인지, 아니면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한국사람들의 기질 탓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주위에서 접하는 종교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기복적이며, 패거리 지어 사회의 부
정과 비리를 양산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폐해는 대형 부정사건으로 드러나는 행태 이외에도 개개인의 미시적 삶 속에서 논리와 합리성, 정말 옳은 것을 뒤집어 엎는 가치
전복적이고 비합리적인 이권 집단의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비단 악의적이고 이기적인 입장 뿐만 아니라, 이타적 행동을 표방하는 경우에도 깊이 내재되어 있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와
태도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앞에서 말한 저런 경험들을 통해서 나는 인간성이란 그 사람이 한 행동의 총합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꾸준하게 누적되어서 드러나는 바가 '인간성'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을 많이 하고 타인을 이용해 먹으며 사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종교 활동을 하고 헌금을 많이 해도 거짓말쟁이에 교활한 사람일 뿐이고, 보이는 데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인 척 하는 제스쳐를 취해
봤자 그 사람이 중요한 시점에 주로 하게 되는 행동이 그 평소의 제스쳐와 다른 방향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 보이고 싶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 독후감 : 김태영 - 선도체험기 : 네이버 블로그

독후감 : 김태영 - 선도체험기 신선이 되는 길이 보인다 : 네이버 블로그

향유자 글 2007

김태영 저 | 유림 | 1990년 01월 ~ 진행중

나는 2006년 2월부터 요가라이프에서 아사나 위주의 요가를 시작했다. 이후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이유로 이 수련원이 없어졌다. 근처 요가타운이라는 곳에 문의해보니
남자는 안받는다고 해서, 이리저리 찾다가 남대문 근처의 한국요가연수원으로 옮겼다. 이게 작년 11월 얘기다.
  새로 옮긴 한국요가연수원에서는 아사나보다 호흡과 명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미 이 곳의 설립자인 이태영 원장의 책 '하타요가'를 읽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이전에 체조 비슷한 요가만 할 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호흡법을 실제 배우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수련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던 차, 동생과 얘기하다 알게 된 이 책이 생각났다. 어찌보면 지금 하고 있는 수련과 연관이 있겠다싶어 1권을 사서 읽어보았다.
알고보니 저자인 김태영씨는, 내가 중고등학교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상고사와 관련된 책들을 쓴 사람이었다. 그중 다물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책을 읽어 본 후 첫 느낌은, '당혹스럽다'였다.
저자는 이 책의 장르를 소설이라 말하는데, 일단 이 것부터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경험이라고 얘기하고 심지어 이전에 썼던 책들에 대한 광고도 중간중간 넣으면서 꼬박꼬박 일기형식으로 정리해 놓고는 소설이라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책 표지에 대략 '선도체험소설' 정도로 적혀있는데, 이건 '데빌 메이 크라이'가 '스타일리쉬 액션'이라고 말하며 등장한 것 만큼이나 우습게 보였다 (그런데, 데.메.크.는 스타일리쉬 액션이 맞다 ㅎㅎ).

또 그 문체는 저자의 사고의 깊이와 폭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솔직함을 넘어서, 마치 조숙한 초등학생에게 느끼는 바를 적어보라고 한다면 쓸 것 같은 솔직담백하고
지리한 서술은, 스스로 작가라 주장하는 저자를 과연 작가라 칭할 수 있는지 곤혹스러웠다.

게다가 겨우 한 권 읽었지만, 그 안에서도 중언부언 구조화되지 않고 반복되는 얘기들이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더 이상은 읽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헌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편협하고 비구조적인 사고와 유치한 문체 뒤에 숨어있는 수행 자체의 진정성은 눈여겨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지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짜잔!!! 다음의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 사이트는 2000년경에 선도체험기에 빠져 실제로 기체험까지 하게 된 운영자가 선도체험기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의 평론도 넣어서 정리한 곳이다. 여기에
서는 운영자가 개인적으로 만난 김태영씨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도 많았다.

이후 시간날때마다 여기에서 선도체험기 요약을 읽곤 했다 (요약이라고는 하나 원체 양이 많아 시간이 꽤 걸렸다).

어제 드디어 18권의 빙의에 관련된 내용까지 읽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계속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이야기를 더 이상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여기까지만 읽고 그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다시 소감을 말하자면, 나 또한 사이트 운영자의 말처럼 선도체험기의 보물같은 요소들은 분명 인정해줄만 하다고 생각한다.

완전 초보에서 운기하고, 명상의 높은 경지에 이를 때까지 김태영씨의 과정이 산만하고 반복적이지만 손에 만져지듯이 표현되어있고, 그와 관련하여 수행자의 삶의 태도
라던가 금기사항 등이 뇌리에 박힐만큼 반복적으로 나와,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에서 학습을 이끌어주는 교재로서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

도서
독후감 : 김태영 - 선도체험기

향유자
2007. 8. 8. 18:18
 이웃추가
1 12
조화로운 삶을 향하여

이외에도, 생활과 연관된 영적인 부분에 대한 서술은 이전에 읽은 '다스칼로스'만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지는 못하지만, 인식의 장을 넓힌다는 면에서 분명히 참고할
만 하다.

하지만, 결국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적인 욕심 (굳이 욕심이라 부르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매우 높은 민감성과,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다는 공명심)이 그대로 드러나있고, 수행을 했다고 하지만, 공명정대함과 옳음에 대해서는 원론을 논하는 것에 그치고, 다른 수행자나 수행단체에 대한 배타적인 모습과, 타인을 대하는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이고 옹졸한 마음으로 소심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역시 내가 찾아야 할 길은 다른 사람의 모습에 의존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했다.

17년째 중언부언 쓴 얘기 또 쓰고, 자기가 한 얘기 뒤집고 하면서 아직까지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올 5월에 나온게 86권이다) 김태영씨. 몇명이라도 아직도 이 책을
기다리는 독자가 있어서 할아버지의 장광설같은 이야기를 돈내고 읽는 사람들이 있을거라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자는 행복한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어체적인 언어 속에 원칙만을 되뇌이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저자.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진솔하게 자기 수준에서 녹여내어 때때로 기발하고 일리있는 표현
을 사용해서 정리해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부분은 분명 높이 사 줄만하겠다.
결론적으로, 내 자신을 찾는 여행에서 한 번 쯤은 타고 건너갈 만 한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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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된 사나이 - 람타 - [람타] 2장. 나는 람타이다

바람이 된 사나이 - 람타 - [람타] 2장. 나는 람타이다

[람타] 2장. 나는 람타이다
by 치우 posted May 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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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람타이다



나는 정복자 ‘람’이었다. 나는 이제 ‘람’이자 신이다.
나는 야만인이었으되 삼라만상의 가장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면을 깨달아
신이 되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



나는 람타(역주 : 사람의 이름에 ‘타’를 붙이는 것은 인도의 전통이다.)이다. ‘람’이라는 말은 내가 살았던 시대의 고대어로 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힌두인의 위대한 람(역주 : 인도의 고대 서사시 문학으로 『라마야나』가 있으며 이 중에서 『발미키 라마야나』가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람은 왕자로 태어나 영웅적인 삶을 살고 나중에 신이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보서의 람과는 다른 인물이다. 다만, 라마야나 중에서 과거에 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웅적인 인물이 실존했다는 기록이 있다.)이었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 나는 맨 처음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에 이른 인간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초탈하는 법을 터득했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하나님은 만물에 살아 있다는 그 심오한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나도 한 인간으로서 증오하고 멸시하고 죽이고 정복했으며 지배했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렀다.



 나는 이 세상에 알려진 최초의 정복자였다. 처음 징벌을 시작한 이후 63년 동안 계속하였고 알려진 전세계의 4분의 3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승리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것을 배우고 난 뒤에, 나는 바람처럼 영원으로 초탈하였다.



 나는 인더스라 부르는 산의 동북쪽에서 내 백성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초탈하였다. 내 백성은 그때 200만 명을 넘었으며, 레무리아(역주 : 호주의 북쪽 동경 150°부근에서 서경 100°근처까지 걸쳐 태평양상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고대 대륙)인과 이오니아인, 아틀라시아에서 망명해온 종족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아틀라시아는 아틀란티스(역주 : 대서양상에 있었다는 고대의 대륙. 남쪽과 북쪽의 큰 두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자연의 힘을 잘못 사용하여 대양 속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진다. 매우 발달된 문명이 있었으며, 멸망할 당시에 남아있던 문명의 일부가 이집트와 중남미에 전해져서 인류 고대문명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남미 브라질은 그때에 바다였으며 이곳을 통하여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 사이에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를 말한다. 지금의 인도와 네팔, 티베트, 그리고 몽고 남부 사람들이 내 백성의 자손들이다.



이 지구상에서 나는 단 한 번의 생을 살았다. 지금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35,000년 전의 일이다. 내가 태어났던 곳은 남반 아틀라시아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오나이의 빈민가였다. 레무리아에서 그곳으로 망명해 온 불행한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대홍수가 아틀라시아 대륙을 삼켜 버리기 전인 '최후의 일백년'이라는 기간중에 나는 아틀라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때에 아틀라시아는 지극히 발달된 문명국이었으며, 과학적인 이해력을 지닌 그들의 이지(理智)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과학은 당신들이 지금껏 축적해 놓은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었다. 아틀라시아인은 빛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빛을 순수한 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고, 빛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있었다. 다른 항성계에 있는 실체와 상호통신을 하고 그들로부터 발전된 과학을 받아들였다. 아틀라시아인은 기술에 너무 몰입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지를 숭배하였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아틀라시아인의 종교가 되었다.



레무리아인들은 아틀라시아인과 많이 달랐다. 그들의 사회체계는 생각으로 통하는 교신에 근거를 두고 세워져 있었다. 기술이 많이 발전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영적으로는 대단히 진보해 있었다. 내 선조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의 저편에 있는, 별들의 저편에 있는 것을 숭배했다. 그들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는 근본, 즉 미지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힘을 사랑하였다. 레무리아인들이 이러한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아틀라시아인들은 그들을 멸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하찮게 여겼으므로.

 

내가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삶은 매우 힘들고 궁핍했다. 한 순간에 아틀라시아인들은 그들의 기술을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북 아틀라시아에 있던 과학센터가 오래 전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빛으로 이동하는 실험을 하던 중에, 지금 금성의 대기처럼 지구를 두껍게 감싸고 있는 구름막을 뚫어 버리게 되었다. 구름막을 뚫었을 때 많은 물이 쏟아졌고, 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레무리아의 대부분과 아틀라시아의 북쪽 지역이 깊은 대양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무리아인과 북쪽 아틀라시아인이 아틀라시아의 남쪽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북쪽에서 기술을 잃어버리게 되자 남쪽의 삶은 점점 원시상태로 되어갔다. 아틀라시아 전체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 일백 년 동안에 아틀라시아 최남단은 폭군들의 지배하에 황폐해졌고, 그들은 무지막지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폭군들의 지긋지긋한 법에 의하면, 레무리아인들은 지구의 오물로 간주되었고 길가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상상을 해보라. 그자들이 침을 뱉고 오줌을 누고 해도, 그것이 눈물로 씻기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그 처지를, 길거리에 다니는 개보다도 더 굶주린 뱃속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무엇이든지 저지를 수 있는 그러한 삶이었다. 오나이 대로에서 아이들이 폭행을 당하고 여자들이 구타와 강간을 당하는 일은 예사였다. 아트라시아인이 길에서 굶주린 레무리아인을 지나칠 때면 자스민과 장미향이 묻은 수건으로 코를 잡고 지나갔다. 우리를 냄새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무가치하고 영혼도 없는 이지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간주되었다. 가스나 빛과 같은 것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지적인 소양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한 삶을 안고 내가 이 지상에 태어났다. 그것이 나의 시대였다. 나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는가? 인간의 이지가 오만하고 어리석은 때에 태어나서.내가 내 생부를 모른다고 해서 모친을 욕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부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내 형제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내 모친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모친이 길거리로 끌려나가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약탈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모친이 끌려갔다 오고 나서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친이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이 '약소의 땅'에서 우리처럼 고통을 받은 아이가 또 있었겠는가?



 모친은 혼자서 그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누이를 낳는 것을 내가 도왔다. 나는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개를 죽이거나 야생 조수를 잡았으며, 늦은 저녁이면 지주의 집에서 쌀을 훔쳤다. 내 발이 매우 빨랐던 덕분이다. 모친의 배를 채워서 어리디 어린 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게 했다. 사랑하는 모친이 죽었어도 내 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내 누이가 모친의 모든 힘을 빨아가 버렸고, 누이마저도 설사를 하면서, 몸에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 생명을 잃었다.



 나무를 모아 놓고 모친과 누이의 시체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불을 지피기 위해 밤까지 기다렸다. 나는 사랑하는 모친과 누이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장작에 재빠르게 불을 붙였다. 시체타는 냄새가 아틀라시아인들을 방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아틀라시아인들은 시체를 하이에나가 뜯어먹게 사막에 내다버리곤 했다.

 

모친과 누이가 타는 것을 보면서 아틀라시아인에 대한 증오가 내 존재 안에서 끓어올랐다. 그것은 독사의 맹독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화염에서 나는 냄새와 그을음이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을 때에 우리 민족이 믿는 미지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부당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그 괴물들을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모친과 누이는 그토록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미지의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모친과 누이의 죽음 때문에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를 증오했다!

 

나는 홀로 남았다. 내 다른 동생은 태수에 의해 끌려가 나중에 페르시아라 부르는 땅으로 보내어지고 그곳에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동생은 태수의 즐거움과 아랫도리의 만족을 위해 학대받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열네 살짜리 어린 소년으로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 조상들이 섬겨온 미지의 하나님과 싸우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이 나에게는 죽을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명예롭게 죽기로 했다. 사람 손에 죽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먼 지평선까지 뻗쳐 있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산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땅을 지배하는 자들이 우리 위에서 군림하는 것처럼 모든 것의 위인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내가 그곳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미지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을 부당하게 대우해 온 데 대해 내가 얼마나 그를 증오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두막집을 떠나 그 높은 산으로 향하였다. 수많은 날이 걸렸다. 그 동안에 메뚜기와 개미로 배를 채웠다. 그 산에 도착한 뒤에, 구름 위에까지 올라갔다. 미지의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려고 하얀 산정에 올랐다. 그를 부르며 소리쳤다.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무시했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가슴 깊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하얗게 얼어붙을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내가 위를 쳐다보았을 때, 한 경이로운 여성이 보검을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 람, 영성에 상처입은 이여, 네 기도를 들었다. 이 검을 가지고 너 자신을 정복하거라."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나 자신을 정복하라고? 칼날을 돌려서 내 목을 벨 수는 없었다 - 내 팔은 손잡이까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보검이 영예로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심한 추위에도 떨리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눈물이 흘러내린 곳을 다시 쳐다보았을 때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그것이 희망의 꽃임을 깨달았다.



그 보검을 들고 산을 내려왔다. 힌두인들에게 그 날은 람의 기적의 날로 기록되었다. 한 소년이 산에 올라가서, 성인이 되어 내려왔다. 몸이 더 이상 연약하지도 않으며, 모든 면에서 틀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환한 빛이 주위에 빛나고 몸보다도 더 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좀 둔감한 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왜 그 경이로운 보검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 칼은 너무나 커서 아홉 손으로 잡아야 칼자루를 다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산에서 내려와 오나이 시로 돌아왔다. 시 외곽의 들판에 한 할머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기 위하여 눈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곧 모든 이가 하던 일을 멈추었고, 지나가던 마차도 섰다. 원숭이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모두들 감명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농기구를 들고 나를 따라서 도시에 함께 들어왔다.



우리 민족에게 먹일 수 있도록 곡물창고를 열라고 내가 요구했을 때 아틀라시아인들은 내 눈에 침을 뱉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나이 시를 멸망시켰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 아트라시아인들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전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백성들에게 곡물창고를 열어 준 다음 아틀라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오나이 시를 깡그리 태워 버렸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죽거나 사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육과 방화가 끝났지만 깊은 상처는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내 증오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떠나서 깊은 산 속에 은둔하려고 그들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따라왔다. 그들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고, 침을 뱉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람, 람, 람, 람."하며 그들은 소리쳤다. 농기구를 들고 곡식 보따리를 멘 채로 양과 염소를 앞세우고 나를 좇아왔다. 그 사람들에게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왔다. 그들에게는 이제 집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의 집이었다!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그들은 끝내 나를 따라왔으므로 종교가 다른 이 '영혼이 없는' 무리들을 한데 모았다. 그들은 내 군대가 되고 내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훌륭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는 어떠했는가? 군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람의 위대한 군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 숫자는 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부터 폭군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돌진하였고, 내 피부색은 더 존경받게 되었다. 공격하고 전투를 벌인 모든 곳에서, 우리가 지나간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찾았고, 내 군대는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리하여 람과 그 군대의 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나는 폭정을 일삼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야만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간을 증오했고, 그래서 죽기를 바라면서 싸웠다. 백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저 명예롭게 죽고 싶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증오만 있을 따름이었다.



 당신이 책임을 맡아 앞장을 섰는데 주위에 원군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처럼, 내가 바로 적에게 목이 잘려질 구경거리가 될 판이었다(그들이 나에게 이런 명예를 베풀어 준다면). 내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하여 가장 강한 적을 골랐다. 그러나 아는가, 두려움이 없으면 곧바로 정복을 눈앞에 두게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위대한 정복자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복자 따위는 없었다. 오직 폭군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나는 세상에 알려진 첫 번째 정복자였다. 그때까지 오만한 아틀라시아인들에 대항해서 전쟁을 일으킨 무리들은 없었다. 분노와 정의, 그리고 나 자신이 느끼기에 영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소위 사람들이 일컫는 위대한 실체가 되었다. 영웅이란 어떤 이인가? 내가 그 중 하나였다. 영웅이란 생명을 구하고 잘못을 없애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이다. 나는 폭군을 모조리 쓸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했다. 결국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바로 그것이 되었다.



 나는 무지한 실체였으며,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운 자였다. 징벌을 하고 다닌 수십 년 동안 죄 없는 이들과 전쟁을 하고, 목을 베고, 방화를 하면서 여러 대륙을 건너 다녔다. 그러던 중 긴 칼이 내 몸을 관통하였다. 그 칼이 내 몸에 박혀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끝났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내가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꽂힌 칼을 빼냈다.



나는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티없이 눈처럼 하얀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대리석은 매끈하여 아무런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붉은 핏물이 강물처럼 흐르다가 대리석 사이에 있는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차가운 대리석 위에 누운 채로 생명의 강물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때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일어나라!" 또 들렸다. "일어나라!"



머리를 끌어올리고 손을 바닥에 댔다. 무릎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다. 몸을 들어올리면서 머리를 곧바로 세우고 왼쪽 발을 끌어당겨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전신의 힘을 다해 손을 무릎에 얹고 주먹으로 상처를 막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상처에서 내뿜는 피가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채로 내가 일어서 있자, 그때 나를 찌른 자는 내가 불사신이라고 확신하고 도망가 버렸다. 내 군대는 그 도시를 공격하고 깡그리 태워 버렸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죽지 않게 해준 그 소리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나는 그 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정벌중이었지만 나는 치료받기 위하여 여성들만이 있는 안뜰에 머물게 되었다. 정말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 여자들이 나를 돌보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눈앞에서 내 옷이 모두 벗겨져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오줌도 똥도 눌 수가 없었고 그들의 보살펴 주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독수리 기름을 묻힌 찐득찐득한 습포를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로 견디어야 했다(지금도 그 독수리 기름이 나를 치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이 몹시 뒤틀려서, 목숨을 지탱해 주기는 했다). 치료받고 있는 동안 내 자존심과 증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상처가 너무 심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한 노파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엉성하게 짠 천을 움켜쥔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아들은 오래 전에 죽었다. 그 노파가 햇살 아래에서 오그라들면서 그녀의 입은 무엇인가에 놀란 것같이 벌여졌고, 그녀의 눈은 대낮인데도 빛났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풍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잠깐 움직였다.



 사라져 버린 그녀와 그 아들의 고귀한 지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노파가 오두막집에서 태어날 때도 있었으며 그녀가 마지막 떠날 때도 있었던 바로 그 태양이다.



 다시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죽은 것은 쉽게 잊혀질 것이다. 내 백성들이 노파를 강가의 미루나무 아래에 묻을 때에도 태양을 쳐다보았다.



 그날 저녁 해가 지자 나는 태양을 저주하였다. 다음날 태양이 빨갛게 빛나는 보석처럼 붉은 눈을 하고 산정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붉게 물든 산과 안개 속에 묻힌 계곡을 쳐다보고 태양의 빛줄기가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수놓으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해 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파랗게 창백했던 구름을 선홍색으로, 붉은 장밋빛으로, 핑크색으로 물들이면서 생생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이 산을 넘어가는 동안에도 쳐다보았다. 지평선을 이빨로 뜯어버린 것처럼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잔영을 내뿜다가 스며드는 어둠에 길을 내주고 있었다. 바로 위에서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하늘 귀퉁이에서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미풍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만지며 눈물을 말려 주었고, 나는 내면에서 커다란 아픔을 느꼈다.



 그때 나는 훌륭한 전사였다. 순식간에 칼로 사람의 몸을 두 동강 낼 수 있었다. 목을 자르고 몸뚱이를 베어 조각을 냈다. 피 냄새를 맡으며 사람을 불태웠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러한 짓들을 했던가? 태양은 황홀한 아름다움을 빛내며 진다. 여전히 새들은 하늘에서 지저귀고, 달은 또다시 떠오른다.



 이때부터 나는 미지의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은 예사롭지 않으면서, 신비롭고, 인간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근본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인간은 태양보다 위대하지 않은가? 왜 그 노파는 죽어야 했는가? 인간은 이 지상에 그렇게 많은 수가 있고, 창조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왜 피조물 중에 가장 약한 것일까? 우리 민족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그가 죽을 때 태양이 잠시 서서 슬퍼하지도 않는가? 달은 붉게 변하지 않는가? 왜 새들은 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가? 인간은 전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죽어가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나는 알고 싶었다.

나에게는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다. 나는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많이 보았고 또 그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다. 인간이 인간을 멸시하고 마치 그에게 영혼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도 보았다. 순진한 이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보았고 두려움 때문에 탈진하는 이들도 보았다. 변태적인 영혼을 가진 이들이 노예들의 거주지에서 어린애를 발가벗겨 훑어보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이 강간하던 순간의 어린애를 기념할 수 있도록 사춘기의 털을 뽑아서 모아 놓는 것도 보았다. 성직자와 예언자라는 이들이 인간에 대한 증오 때문에 지독한 고문도구와 추악한 창조물을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으로 종교를 빙자한 계율을 만들어 인간을 다스리고 노예화했다.



 내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살아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변형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순수하고 순진한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제한된 이해수준으로 그것을 변형시켜 버렸다. 나는 인간의 이해수준에서 창조한 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면 그 신도 또한 잘못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친 것은 생명의 여러 요소들이었다. 흘러가는 낮에게서 배우고 밤에게서 배웠다. 파괴와 전쟁에도 아랑곳없이 아직 건재해 있는 약하고 하찮은 생명에게서 배웠다.



 지평선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생각했다. 천상을 지나가면서 서쪽 하늘에 다다르고 그리고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비록 아무 말이 없으나 드러나지 않게 생명을 보살피고 있음을 알았다. 서로 싸우던 사람들도 해가 지면 멈추기 마련이었다.



 창백한 빛을 발하는 달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면서 춤을 추고 신비하고 경이롭게 밤을 밝히는 것을 보았다. 천막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떻게 밤하늘을 밝히는지 보았다. 물새가 물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새들이 밤에 자기네 둥지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밤새가 날아오르는 것과 잎사귀에 매달린 이슬도 보았다. 은빛 눈으로 덮여 또 다른 세상을 연출하는 호수도 보았다. 여자들이 강물에 서서 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을 보았으며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려 백설처럼 하얀 무릎을 드러내 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들이 재담거리르 가지고 소란스럽게 수다 떨며 장난치고 웃는 소리도 들었다. 먼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불에서 나는 연기, 남자들이 숨을 쉴 때 뿜어져 나오는 마늘과 술 냄새를 맡기도 했다.



 미지의 하나님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내가 알게 된 것은 생명을 관찰하고 그 지속성을 깊이 생각했을 때였다. 미지의 하나님은 변형된 사고를 가진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은 아닐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인간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은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가장 존경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자로 꾸며 냈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한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환영을 만들어 내고 실연해 볼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인간이 다시 돌아와도 그곳에 다시 봄이 오게 하고 생명이 솟아나게 하는 지속적인 근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지의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력과 지속성에 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지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밤에 둥지에 앉아 있는 새이고 잎사귀에 매달린 이슬이며, 새벽이며 저녁 노을이었다. 그것은 태양이고 달이며 아이들이고 그 웃음소리이며, 백설같이 하얀 무릎이고 흐르는 물이며 마늘과 가죽, 청동 냄새였다. 그것들이 모두 내 앞에 있어 왔던 것이지만 이렇게 이해하기까지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미지의 하나님은 달이나 태양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추론에 따라서 나는 생명을 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었다. 피보다 죽음보다 전쟁의 악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다른 위대한 것이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하여, 나중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인간이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 인간이 죽어가도 태양이 영속하는 유일한 이유는 태양은 죽음을 전혀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양이 아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미지의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며 깨달아 가고 있을 때, 그 노파의 죽음처럼 시들지도 말고 죽지 않기를 바랐다. 태양처럼 지속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 몸의 심한 상처가 거의 나을 즈음에도 할 일은 거의 없이 그저 평지에 앉아 내 군사들이 비대해지고 게을러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지평선을 쳐다보면서 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미지의 하나님 곧 생명력이 되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지속되는 이 본질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것은 어떤 내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길고 무거운 내 외투를 날리더니 내 머리 위에다 뒤집어 씌웠다. 정복자에게 명예롭지 못한 대우였다! 그 바람은 붉은 먼지를 일으켜 내 옆에서 기둥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저 하늘 높이까지 세웠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 바람은 잦아들고 그 먼지는 내 위로 수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바람은 소리를 내면서 계곡으로 내려가서 흐르는 강물을 지나 올리브 과수원을 거쳐 에메랄드 색의 나뭇잎을 은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운 여인네의 치맛자락을 허리위로 걷어 올리더니 킬킬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조그만 어린애의 모자를 벗겨서 날려 버리자 그 애는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좇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람에게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으나, 그 바람은 계곡에서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지르느라고 얼굴이 퍼렇게 되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바람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것은 자유였다!



 나의 이상으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바람을 관찰하면서 바람 이상의 놀라운 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바람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바람이 화를 내고 당신한테 오면 당신은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리 위대하고 힘이 있다 해도 바람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긴 칼로 둘로 나누겠는가?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그랬다면 당신 얼굴에 되돌려줄 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처럼 자유로운 움직임과 힘을 가질 수 없는가?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도 잡을 수도 없고, 한 순간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또 인간처럼 죽지도 않는 이러한 능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나에게 바람은 궁극적인 본질이었다. 왜냐하면 바람은 영속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어디든지 스며드니까. 경계도 없고 형태도 없으니까. 마술 같고, 탐구적이며 모험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실로, 생명의 하나님 본성에 가장 가깝다. 바람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바람은 결코 인간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부르기만 하면, 바람은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사랑으로. 내 이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바람을 수년 동안 숙고하였다. 그것이 내 이상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내 모든 생각이 그렇게 되는 것에만 모아졌다. 바람을 생각하였다. 그처럼 붙잡을 수 없고, 가벼우며, 분명하게 윤곽을 그릴 수도 없는 것에 나를 조율해 갔다. 바람이 되는 것을 숙고함에 따라 그 바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맨 처음 그 일이 일어난 것은 6년 동안이나 몰입하고 난 후였다. 그때 나는 매일 저녁 아무도 없는 장소에 앉아 창백한 달을 쳐다보면서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어느 날 나는 바람처럼 하늘 높이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다음 순간에 지상에 앉아 있는 내 몸이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을 내려다보았을 때, 내가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이 나를 다시 몸으로 데려갔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딴 곳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낙원에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칭송하였다. 하나님은 근원이자 힘이고, 원인이며, 바람이라고. 내가 바람이 갖는 우아함과 아름다움, 풍요로운 생명이 되었던 놀라운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전을 항상 분명하게 마음속에 간직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저녁에 그 바위에 앉아 황홀한 기쁨에 잠기면서 바람을 숙고하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또 시도해 보고 또 시도해 보았으나 허탕이었다. 예전의 그 경험이 내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조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둘기나 독수리처럼 공중에 있으면서 저 밑에 있는 내 신체를 내려다보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자유를 얻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리 많은 땀을 흘려도(그로 인해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첫 경험 후에 이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바람이 되었다. 이번엔 바람을 숙고하여 된 것이 아니라 편하게 잠자는 중에 일어났다. 잠자기 전에 나는 태양, 생명, 붉은 먼지, 달, 별, 자스민의 향기, 그 모든 근원을 칭송하였다!



 점점 신체를 떠나는 능력을 완전하게 다듬어 갔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공간이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내 부하 한 사람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말안장에 발이 끼인 채 말에서 떨어졌다. 내 생각이 그에게 미치자 나는 이미 그와 함께 있었다. 그의 발을 빼내 주고, 그를 내려다보며 그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순간이동으로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생각이 있는 곳이면 그 생각하는 주체도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정복하는 법이 달라졌다. 나는 두려운 적이 되었다. 내 적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고 그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제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생각으로 여러 왕국을 여행하고 여러 실체들을 만났다. 미래에 태어날 문명을 둘러보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을 만났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이상으로 삼은 생각은 천천히 내 몸에서 생명력이 되었다. 내 영혼은 점점 모든 세포 내부의 진동률을 증가시켰다. 내 욕구가 그만큼 강했다! 점점 더 나를 바람에 일치시켜 가자, 그 느낌은 내 전체 육체 배열에 더욱더 분명히 실려졌다. 나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마스터의 주위에 광채가 빛난다." 사실이 그러하였다! 내 몸은 더 빠르게 진동하였기 떄문이다. 물질의 속도에서 빛의 속도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육체는 달빛처럼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달빛이 되었다! 더 이상 생각만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체의 진동을 빛의 수준까지 올려놓았으므로 내 신체 전체를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기쁘고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성취하였다. 나는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시 또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했다. 최종 초탈에 이르기까지 63회나 반복해 보았다.



  바람이 되고 나서, 내가 얼마나 한계 안에 있었는지 또 원소들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깨닫게 되었다.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게도 없고, 수단도 필요하지 않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그러한 자유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근원이 되었다. 형태도 갖지 않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맥동(脈動)하는 빛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크고 작은 골짜기, 산맥과 바다, 강물을 건너다니면서 여행하였지만 아무도 나를 보지는 못했다. 또 바람처럼 나뭇잎을 에메랄드색에서 은색으로 바꾸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를 흔들 수 있었고 어린이의 허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구름위로 올라가 구름을 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바람이 되자 무게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바람이 되자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무기력한지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지식을 확장한다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자기가 비천하고 힘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비천하고 힘이 없게 된다. 나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바람의 주인이 된 것처럼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라 여긴다면 그들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터득하고 나서 오랫동안 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미지의 하나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노인이 되고, 나라는 존재가 성취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성취한 날이 왔다. 인더스 산 근처에 있는 인더스 강을 건너서 여행을 했으며, 내 백성들과 일백이십 년간을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 내 가르침은 진실이고 신성한 안내를 담당하는 이는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라 우리 모두를 창조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것을 강조했다.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약간 멋을 부리면서 나 자신의 몸을 그들 위로 띄워 올렸다. 그들은 놀랐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기겁을 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가지고 있던 넓은 칼을 떨어뜨렸다. 그들 모두에게 하직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을 배우고, 내가 이룬 것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 이루라고 격려했다… 각자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생명 요소들이 인간보다 더 힘이 있고, 인간보다 더 지성이 있으며, 인간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간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숙고하면서 나는 미지의 하나님을 발견했다.



 만약에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다른 이에게 묻는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가서 바람에게 요구하라. "지식을 내어놓아라, 바람이여. 나를 열어서 알게 하라." 그러면 바람은 올리브 나무를 은색으로 바꾸면서, 당신을 계곡 밑으로 데려가, 호탕하게 자유를 즐기며, 당신과 함께 껄껄 웃을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생명의 요소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태양은 나를 저주하지 않았고, 달은 나에게 정해진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훌륭한 점은 단순성과 항상성으로 나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양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람타,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섬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달이 또 아래를 내려다보며,  "람타, 일어나라! 내 아름다움을 올려다 볼 때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쳐다 볼 때마다 그들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게서 있는 그대로를 판단하지 않고 배웠다.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뒤틀린 생각을 가진 이들의 위선과 도그마, 미신에 놀아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을 이 지상에 한 번 살았으면서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교회의 계율에서,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르는 서적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여러 생을 거치면서 실패라고 증명된 것을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 이해 - 자기 삶의 토대 - 로 삼고 있다. 아직도 인간은 자신의 뒤틀린 생각으로 자기 오만의 덫에 걸려 있고, 오직 죽음에 이르는 위선을 계속하고 있다.



 초탈을 하고 난 뒤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모두 알았다. 나는 육신의 밀도 밖으로 나와 생각의 유연함 속에 있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의 근본은 진정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초탈하기 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알지 못했고, 육신을 초탈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나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것을 배웠다. 나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였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생명과 천상에서 본 경이로움을 포용하였다. 내 삶은 그러하였다.



 나를 바람의 힘이나 그 위용에 일치시켜 나가면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되고 나 자신에게만 초점을 모았을 때, 내 삶은 충족되었다. 이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이 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바람이 된 것은 아니다. 바람이 나한테 의미하는 이상(理想)이 된 것이다. 나는 그 바람의 주인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원리로서 자유롭고,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생명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원리가 되고 나서 미지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확장하여 더 많이 이해하게 해주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나는 내 안에서 찾았다.



 나는 정복자 람이었다. 나는 이제 람이자 신이다. 나는 야만인이었으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면을 깨달아 하나님이 되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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