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7

존재 일성론 wahdat al wujud - Google Search The unity of Being. , oneness with God

존재일성론 wahdat al wujud - Google Search

Sufi metaphysics is centered on the concept of وحدة waḥdah "unity" or توحيد tawhid. Two main Sufi philosophies prevail on this topic. Waḥdat al-wujū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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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video focuses on the Sufi doctrine called "Wahdat al-Wujud" (sometimes The Oneness of Being), strongly associated with Ibn 'Arabi (d.
YouTube · Let's Talk Religion · 11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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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dat al-wujud, which means "oneness of being" or "unity of existence," is a controversial expression closely associated with the name of Ibn al-˓Arabi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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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ness of being (wahdat al-wujud) accroding to Ibn Arabi. An article by Bakri Aladdin on the website of the Muhyiddin Ibn Arabi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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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ty of Being. Doctrine formulated by the school of Ibn al-Arabi, which postulates that God and His creation are one, since all that is crea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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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 about this topic in these articles: role in Chishtīyah practice. In Chishtīyah …of the unity of being (waḥdat al-wujūd), oneness with God; t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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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dat Al-Wujud | Encyclopedia.com
WAHDAT AL-WUJUD

Wahdat al-wujud,
which means "oneness of being" or "unity of existence," is a controversial expression closely associated with the name of Ibn al-˓Arabi (d. 1240), even though he did not employ it in his writings. It seems to have been ascribed to him for the first time in the polemics of Ibn Taymiyya (d. 1328). Through modern times, critics, defenders, and Western scholars have offered widely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its meaning; in "Rûmî and Wahdat al-wujûd" (1994), William Chittick has analyzed seven of th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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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n individually, the two words are among the most discussed in Sufism, philosophy, and kalam (theology). 

Wahda or "oneness" is asserted in tawhid, the first principle of Islamic faith. 
Wujud—being or existence—is taken by many authors as the preferred designation for God's very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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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Muslims agree that God's very reality is one. Controversy arises because the word wujud is also employed for the "existence" of things and the world. 
According to critics, wahdat al-wujud allows for no distinction between the existence of God and that of the world. Defenders point out that Ibn al-˓Arabi and his followers offer a subtle metaphysics following the line of the Ash˓arite formula: "The attributes are neither God nor other than God." God's "signs" (ayat) and "traces" (athar)—the creatures—are neither the same as God nor different from him, because God must be understood as both absent and present, both transcendent and immanent. Understood correctly, wahdat al-wujud elucidates the delicate balance that needs to be maintained between these two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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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alsoFalsafa ; Ibn al-˓Arabi ; Sirhindi, Shaykh Ahmad ; Tasawwu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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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Chittick, William C. "Rûmî and Wahdat al-wujûd." In Poetry and Mysticism in Islam: The Heritage of Rumi. Edited by Amin Banani, Richard Hovannisian, and Georges Sabagh.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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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dat al-Wujud
https://www.oxfordreference.com/view/10.1093/oi/authority.20110803120333715

The unity of Being. Doctrine formulated by the school of Ibn al-Arabi, which postulates that God and His creation are one, since all that is created preexisted in God's knowledge and will return to it, making mystical union with God possible. This was a problematic doctrine for legalist interpreters of Islam such as the Wahhabis, who held to a strict interpretation of tawhid that did not permit anyone or anything to be associated or in union with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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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i metaphysic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ufi metaphysics is centered on the concept of وحدة waḥdah "unity" or توحيد tawhid. Two main Sufi philosophies prevail on this topic. Waḥdat al-wujūd literally means "the Unity of Existence" or "the Unity of Being."[1] Wujūd "existence, presence" here refers to God. On the other hand, waḥdat ash-shuhūd, meaning "Apparentism" or "Monotheism of Witness", holds that God and his creation are entirely separate.

Some scholars have claimed that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philosophies differ only in semantics and that the entire debate is merely a collection of "verbal controversies" which have come about because of ambiguous language. However, the concep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universe is still actively debated both among Sufis and between Sufis and non-Sufi Muslims.




















샹까라에서 덧놓음(가탁)의 의미와 의의 박효엽, 인도철학 제30집(2010), 157~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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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까라에서 덧놓음(가탁)의 의미와 의의
박효엽*1)
인도철학 제30집(2010), 157~189쪽


Ⅰ 우빠니샤드의 명상과 덧놓음. 
Ⅱ 명상 수행으로서 덧놓음.
Ⅲ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놓음. 
Ⅳ 방법론 략으로서 덧놓음. 
Ⅴ 샹까라에서 덧놓음의 의의.


요약문 [주요어: 샹까라, 베단따, 덧놓음, 명상, 오류, 방법]

우빠니샤드에서 명상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 덧놓음(가탁)은, 이를 수용하고 변용하면서 ‘베단따’라는 체계를 정립하는 샹까라에게 세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세 가지 의미란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 인식론  결함(오류)으로서의 덧놓음,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이다. 
첫째,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은, 유속성 라흐만에 표 인 명상으로 기능하면서 무속성 라흐만에 한 지속 인 상기를 낳
기 때문에, 명상과 지식 사이에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 

둘째, 명상 덧놓음의 변형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인식론 결함으
로서의 덧놓음은, 인간의 모든 인식활동을 규정하는 근본 이고 보편 인 조건으로서, 주 과 상을 덧놓음의 상으로 삼고 순수주 을 덧 놓음의 토 로 삼는 이 구조를 보여 다. 

셋째, 인식론 덧놓음의 방법 확장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은, 통 인 방법인 ‘덧놓기와 걷어내기’(가탁과 탈가탁)를 가리키는데,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을 분별로 이끄는 가장 포 이고 심 인 략이다. 

샹까라에게서 세 가지 의미를 가지는 이 덧놓음은, 
이원성이 비이원성으로 환되는 과정에 해 신비에의 호소가 아니라 합리 인 설명이 가능하게끔 한다. 
한 ‘베단따’라는 체계를 다른 체계들과 분명하게 차 별되게끔 하며, 
베단따가 인도의 심 통이 되는 데 암묵 으로 일조 하기도 한다.
 
* 박효엽 : 경북 동서사상연구소 연구 빙교수. mayadotcom@hotmail.com


Ⅰ. 우빠니샤드의 명상과 덧놓음

고 인도에서 명상(up san )의 여러 유형 가운데 하나로 알려 져 있는 ‘adhy sa’(흔히 ‘假託’으로 번역하지만 이 에서는 ‘덧놓 음’으로 번역함)1)라는 말은, 어근 ‘√s’(앉다, 살다)에 두사 ‘adh i’(~ 에)가 붙은 동사 ‘adhy s’의 명사형으로서 ‘~ 에 앉음, 
 
1) ‘가탁’ 신에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에 해 다음 3가지 을 언 하고자 한다. 첫째, 학계에서 ‘가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된 이상, 왜 굳이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새롭게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하지만 학문의 수용사가 번역어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이 문제제기는 무의미하다. 비 의 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번역어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새롭게 제시되는 번역어 그 자체’여야만 한다. 둘째, ‘덧놓음’을 번역어로 제시하는 이유는 이 용어가 일상어라는 데 있다. 일상어란 일상인들이 그 말의 내포를 바로 짐작할 수 있는 말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아 그 내포를 거의 짐작할 수 없는 ‘가탁’ 는 ‘부탁’(付託)의 경우와 달리, ‘덧놓음’이란, 구나가 ‘겹침’이라고 알고 있는 ‘덧’(덧신, 덧 고리, 덧나다, 덧입다 등)이라는 두사와 ‘놓다’라는 가장 기본 인 동사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덧놓다’의 명사형이기 때문에, ‘겹쳐 놓음’이라는 그 내포를 바로 짐작할 수 있다. 결과 으로 ‘무지에 의해 가탁된’과 같은 표 보다는 ‘무지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이 의미를 달하는 데 훨씬 효과 이다. 더 나아가 ‘adhy sa’라는 말이 토 와 상의 계를 바탕으로 하는 한, ‘가탁의 토 , 가탁의 상’과 같은 표 보다는 ‘덧놓음의(덧놓이는) 토 , 덧놓음의(덧놓이는) 상’이라는 표 이 더 선명하게 그 계를 드러낼 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부분이 수용하는 어 번역어인 ‘superimposition’은 ‘얹음, 덧붙임, 포개 놓음, 첨가함’ 등을 의미하기에 ‘덧놓음’이라는 번역어와 거의 다르지 않다. 셋째, 이 의 목 가운데 하나는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하고 이 번역어로써 ‘adhy sa’를 심으로 개되는 샹까라의 체계를 ‘다시-쓰기’ 하는 것이다. 즉 ‘덧놓음’이라는 번역어가 얼마나 매끄럽게 샹까라의 사유를 ‘보다 잘’ 설명해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이 의 부수 목 이기도 하다. 

놓임, 들어감’이라는 뜻이다. 명상 가운데 ‘태양을 비슈 로 명상 하다’라는 형태처럼 어느 하나(태양)의 ‘에’ 다른 하나(비슈 )가 ‘앉거나 놓이는’ 것이 ‘adhy sa’인 셈이다. 따라서 ‘adhy sa’란 주 체의 의도성을 고려한다면 ‘태양 에 비슈 를 덧얹음’ 즉 ‘어떤 것 에 다른 것을 덧놓음’을 가리키기에, 최종 으로 ‘덧얹음, 덧 놓음’ )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에서, 덧놓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경우, 우선 으로 
그것을 베다 시 에 꽃핀 명상의 일종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우 빠니샤드의 명상이란 라흐마나(Br hmaṇa)에서 발아하고 아란 야까( raṇyaka)에서 만개한 명상이 자아에 한 지식으로 변환되 는 지 을 보여 다. 다른 식으로 말해, 베다 시 에 차 으로 진행된 지식의 내재화·내면화 과정에서, 제의(행 )에 한 지식 을 이어받은 명상의 지식이 ‘지식 그 자체인 순수주 ’에 한 지 식으로 변환되는 지 을 보여 다. ) 이 경우에, 거칠게 표 하자 면, 제의의 지식이란 ‘A(상 인 것)로써 B(월 인 것)를 기원 하다’(A라는 제의로써 B라는 결과를 얻다)라는 형태이고, 명상의 지식이란 ‘A를 B로 명상하다’(A를 B로 명상함으로써 B라는 결과 를 얻다)라는 형태이고, 주 의 지식이란 ‘A를 가진 자아가 곧 B 이다’(A를 가진 자아가 곧 B와 동일하다고 앎으로써 B라는 결과 를 얻다)라는 형태이다. ) 제의의 지식은 A와 B의 물리 인과 계에, 명상의 지식은 A와 B의 심리 인과 계에, 주 의 지식은 A′(A를 가진 자아)와 B의 심리 동일성에 기 를 두고 있다. 결국 ‘가까이 앉음’(up san ) 혹은 ‘지식’(vidy )으로 표 되는 우 빠니샤드의 명상은 ) ‘심리 인과 계에 이른 명상’이 ‘심리 동 일성을 지시하는 지식’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가운데 서 덧놓음이라는 것은 그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흔 일 수 있 다. 

명상이라는 것이 ‘A를 B로 명상하다’라는 형태인 이상, 명상의 
종류는 자연스럽게 A와 B의 계에 의해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 다. 어떤 분류에 따르면 명상은 크게 결합(sampad), 덧얹음( ropa), ) 덧놓음(adhy sa), 흡수(saṃvarga)라는 네 가지로 나뉘는데, ) 이 모두는 명상의 토 인 A와 명상의 상인 B의 계에 따른다. 이 네 가지는 부 외 인(b hya) 명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달 리 내 인(antar) 명상은 자기 자신과 계하며 자신을 특정한 신 격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외 인 명상은 이미지(pratim , prat ka) 명상으로, ) 내 인 명상은 자기 악(ahaṃgraha) 명상으로 각각 불리기도 한다. 자기 악 명상이란 ‘나는 그 아뜨만이다’, ‘나는 그 것이다’ 등과 같이 ‘나’의 정체성을 악하는 명상으로서, ‘나’를 속 성을 가진 상으로 명상하면 유속성(saguṇa) 명상이 되고 속성 을 가지지 않은 상으로 명상하면 무속성(nirguṇa) 명상이 된
다. ) 그런데 단지 외 인 명상에 불과한 덧놓음은 두 가지 종류의 내 인 명상에까지 그 독특한 형식을 확장함으로써, 명상의 특징 인 ‘선후의 인과 계’가 지식의 특징인 ‘무 계의  동일성’ 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덧놓음은 비록 우빠니샤드에서 단지 명상의 한 종류에 불과할 지라도 ‘개별 자아와 라흐만의 동일성’에 한 가르침과 련 해서 매우 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빠니샤드에서 ‘A를 B 로 명상하다’라는 지식이 ‘A를 가진 자아가 곧 B이다’(A′가 곧 B이다)라는 지식으로 이되는 경우에, 후자의 지식은 ‘A에 A와 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라는 덧놓음의 계를 비 인 형식으로 삼아서  동일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덧놓음에서는 반드시 그 토 인 A가 열등한 것이고, 그 상인 B가 A와는 분 명히 다른 우등한 것이어야 한다. 열등한 A에 A와는 다른 우등한 B를 덧놓음으로써 이 명상은 B라는 심리 효과·결과를 얻는다. 그런데 명상의 상보다 명상의 주체에 한 심이 더 강해지는 내재화·내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 외 인 형태인 덧놓음은 자 기 혹은 ‘나’에 한 내 인 명상에도 자연스럽게 연장된 채로 용된다. 애당 덧놓음에서 명상의 주된 상은 우등한 ‘덧놓음의 상’이 아니라 열등한 ‘덧놓음의 토 ’이므로, 덧놓음은 명상의 주체인 ‘자기’를 악하려는 내 인 명상과 매우 친화 일 수 있 는 셈이다. 더욱이 내 인 명상은 사실 ‘A′가 곧 B이다’와 같이 내 인 지식에 다름 아니지만, A′가 곧 ‘나’ 자신이므로 열등한 ‘나’에 우등한 신격이나 라흐만을 덧놓아 명상하는 방식을 기본 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신격은 유속성이고 라흐만은 무 속성이기에, ) 이 명상을 통해서는 마치 열등한 자기가 유속성의 신격이거나 무속성의 라흐만인 듯이 자기에 집 하고 몰입할 수 있다. 바로 이처럼 덧놓음의 명상은 열등한 것을 우등한 것인 양 격상하고 고양하는 방식을 띰으로써, 개별 자아와 라흐만 의  동일성에 한 지식을 해 그 길을 열어 놓는다. 

사실 개별 자아와 라흐만의 동일성이라는 것은 차이에 기
반을 둔 동일성이어야 한다. 덧놓음은 어떤 것에 그것과는 상이한 것이 덧얹히는 형태이므로 확실히 차이에 기반을 두는 명상이다. 그리고 개별 자아와 라흐만이 이처럼 차이를 가짐에도 동일 성의 범주에 묶이기 해서는, 반드시 하나는 허상이고 다른 하나 는 실상이어야 한다. 즉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나타나는 ‘다름이나 차이성’이 ‘같음이나 동일성’으로 바 기 해서는, 본질 으로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 둘로 나타난다는 방식으로 설명해 야만 한다. ) 그리하여 덧놓음은 열등한 허상에 우등한 실상을 덧 얹는 ‘임의 인’ 명상이기에, 집 하고 몰입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명상의 주체가 ‘불변 으로’ 유일무이한 실재인 순수주 임을 아 는 데 결정 인 기여를 한다. 따라서 덧놓음의 명상은 우빠니샤드 의 내 인 자기 악 명상에로 확 용되어 개별 자아(명상의 주체)와 라흐만(순수주 )이 상 으로 차이 있어 보이지만 본 질 으로 동일한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양자에 한  동일 성의 지식을 얻는 데 형식 인 토 를 제공하고 그에 따라 방법 인 기여도 한다. 
그 다면 이와 같은 덧놓음은 우빠니샤드 이후에 그 상과 역 할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특히 우빠니샤드의 사상을 직 계 승하고 체계화한 샹까라(Śaṅkara, 기원후 8세기경)는 이것을 어떻 게 활용하고 있을까? 우빠니샤드에서 명상의 일종인 덧놓음이 최 고의 지식을 획득하기 한 형식 ·방법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 인다면, 이것은 샹까라에게서도 분명 의미의 변화를 겪게 되고  다른 의의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결국 덧놓음에 한 이와 같은 질문들은, 이 개념이 샹까라의 베단따 철학에서 가장 핵심 이면 서 풍부한 함의를 가지는 이상, 그 철학 체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통합 으로 이해하는 데 여러 시사 을 던져 것이다. 


Ⅱ. 명상 수행으로서 덧놓음 

샹까라의 작이 부분 통 문헌에 한 주석서라는 과 
별도로, 그의 사상을 구체 으로 들여다보아도 그가 통주의자라 는 사실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그가 미맘사의 제의 
심 이고 행 심 인 세계 을 거부한다고 해도 일상 차원 의 행 에 해서 그다지 부정 이지 않듯이, 그가 아무리 지식을 해탈의 수단으로 강조한다고 해도 오랜 통을 가진 명상의 힘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샹까라가 지속 으로 견지하는 태도는 명상이 지식의 수단이요12) 지식이 해탈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처럼 그는 명상과 지식을 차등화 함으로써 명상의 통을 정 으로 계승하고 지식의 통을 확고하게 정립한다. 
그럼에도 행 와 지식의 구분이 선명한 것과 달리 명상과 지식 은 그 구분이 모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컨, 라흐마 수 뜨라 의 많은 부분에서 자는 라흐만이 명상의 상임을 밝히 고, 샹까라 역시 그 주석에서 이 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흐만은 하나일지라도, ‘한정자와의 연계를 필요로 하는 명상 상인 것’과 ‘한정자와의 연계를 배제하는 지식 상인 것’으로서 [ 라흐만이] 베단따들에서 가르쳐진다고 밝히기 해, 작의 남은 
[부분이] 시작된다.13)
비록 명상 즉 사유가 마음에 속할지라도, 여 히 인간이 행할 수도 행하지 않을 수도 혹은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도 있다 — 사람에 의존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식은 지식수단으로부터 산출된다. 그리고 지 식수단은 존재하는 바 로의 사물과 계한다 — 그 이유로부터 지식 은 행할 수도 행하지 않을 수도 혹은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도 없다 
— 으로 그것은 오직 사물에 의존한다.14) 
 
여기서 앞의 인용문은 라흐마 수뜨라 주석  1.1.12의 앞주석
 
인데, 주석가는 라흐마 수뜨라 라는 작의 나머지 부분이 즉 1.1.12 이후의 모든 부분이 ‘명상 상으로서의 라흐만’과 ‘지식 상으로서의 라흐만’이라는 두 측면을 이해시키기 한 해명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곧 유속성 라흐만과 무속성 라흐만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베단따에서 가장 요한 과제임을 시인하는 셈이다.15) 그런데 명상 상인 유속성 라흐만은 사람에 의존하
 
12) 명상은 진정한 실재를 나타나게끔 하기 때문에 비이원 지식의 보조자(upak raka)라고 알려진다. ChUBh, 서문 참조.
13) BSBh, 1.1.12 앞주석. 참고로, ‘앞주석’이라는 말은 특정 수뜨라의 ‘뒤에’ 놓인 주석이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주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쓴다. 
앞주석에서는 주로 수뜨라와 련된 배경지식이나 질문을 제시한다. 
14) BSBh, 1.1.4.


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하는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여 지가 있다. 반면에 지식 상인 무속성 라흐만은 사물에 의존하 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하는 사람과 무 하게 존재하는 바 로 드 러날 뿐이다. 결국 동일한 상인 라흐만의 두 측면에 따라 명 상과 지식이 구분됨으로 말미암아,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유속성 라흐만은 사람에 의존하고 무속성 라흐만은 사물에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선명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샹까라의 체계는 명상과 지식의 경계 를 곡 사가 을 타듯이 긴장감 있게 넘나드는 방식으로 작동한
다고 말할 수 있다.16)
샹까라가 이처럼 명상과 지식을 구분하는 것은 종국 으로 해 탈이라는 결과를 낳는 데 어느 수단이 더 유용한가 하는 을 따 지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맘사 학 와 차별하기 해 행 와 지식 을 구분하고 기존의 요가 학 등과 차별하기 해 명상과 지식 을 구분한 채, 오직 지식만이 해탈에 합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다. 행 는 물리 주체와 상을 갖는 반면에 명상은 심리 주 체와 상을 갖는다. 그러나 행 도 명상도 둘 다 주객의 이항 립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결코 해탈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 다. 특히 명상의 상과 확연하게 상이한 명상의 주체를 상정함으 로써 해탈로부터 멀어지는 명상과 달리, 지식은 상과 주 의 이 원성을 기해 버림으로써 해탈을 가능하게 만든다.17) 이와 같이 명상은 그 작동방식이 주객 이원성에 기 해 있기에 해탈이라는 
 
15) 유속성과 무속성 라흐만으로 차이(bheda)를 두는 것은 오직 명상을 해서일 뿐이고, 문헌의 본래 취지는 양자의 무차이(abheda)이다. BSBh, 3.2.12 참조. 이 외에도 유속성 라흐만을 구분하는 것이 오직 명상을 해서일 뿐이라는 언 은 그의 작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16) 샹까라의 문헌 해석학도 명상과 지식의 경계를 빈다. 를 들어, 확고한 권 를 가진 특정 문헌에서 발견되는 비일 인 부분을 명상의 상인 유속성 라흐만과 련된다고 해석함으로써, 지식의 상인 
무속성 라흐만을 그 문헌의 유일한 취지로 인정한다. 
17) ChUBh, 서문 참조. 

결과를 산출할 수 없지만 , 지식은 비이원성의 작동방식을 통해 해 탈이라는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다면 덧놓음이라는 형태의 명상은 샹까라가 말하는 명상 가운데서 어떤 표성을 가지는 것일까? 샹까라가 “라흐만에 한 명상들의 어떤 것들은 번 을 의도하고, 어떤 것들은 진 해탈을 의도하고, 어떤 것들은 의례(행 )의 극 화를 의도한다 — 그것들의 차이는 ‘특수한 속성’과 ‘한정자’의 차이에 따른다.”18) 라고 밝히듯이, 명상의 목 은 다양하고 그에 따른 명상의 결과도 다양할 뿐이다. ) 그 지만 샹까라에게서 가장 요하고  가장 많이 언 되는 것은, 주 할 필요도 없이 유속성 라흐만 혹은 신에 한 명상이다. ) 이 명상은 필연 으로 우빠니샤드처럼 ‘A 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와 같은 형태이다. 왜냐하 면, 명상이 지식의 수단이라는 을 염두에 둔다면, ‘A라는 명상 의 주체’에 ‘A와는 다른 B로서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이는 명 상이어야만,  하나의 다른 B로서 무속성 라흐만이 곧 A의 본 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식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 다. 결국 단지 명상의 상에 불과하던 무속성 라흐만이 우빠니 샤드에서 지식의 상이 되는 과정은 샹까라에 의해 더욱 체계 으로 재 되는 셈이다. 요컨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 명상 이란 주로 덧놓음을 형식으로 하는 유속성 라흐만에 한 명상 이고, 이 덧놓음의 명상은 무속성 라흐만에 한 지식을 가능 하는 수단이 된다. 
 
샹까라는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에 해 몇 차례 언 하고 있다. 그는 1.1.4에서 라흐만과 아뜨만의 동일성에 한 지식이 결합도 아니고 덧놓음도 아니라고 말한 다. ) 이 언 은 사실 그러한 동일성의 지식이 자칫 명상에 의해 서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음을 간 으로 고백 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주객 이원성으로 작동하는 명상이 지식과 혼동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샹까라는 3.3.9에서 덧놓 음을 직 정의하고 있는데, 덧놓음이란 토 와 상이라는 양자 를 필요로 하고  덧놓음의 상에 의해 덧놓음의 토 가 지양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를 들어, ‘옴’(Om)이라는 이름에 라흐 만의 념이 덧놓이는 경우 라흐만의 념에 의해 그 이름이 지양되지는 않는 경우가 덧놓음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정의는 매우 기본 이고 일반 인 것으로서, “어떤 상에 다른 상에 한 념이 놓인다” )라는 자 그 로의 정의처럼, 덧놓음에 
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와 같은 단편 언 으로는 샹까라가 덧놓음을 명상으 로도 이해하고 있다는 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뿐, 그가 명상 으로서의 덧놓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모를 제 로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언 과 별도로, 그의 체계에서 명상이라는 것 이 유속성 라흐만을 상으로 하는 이상,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이 그의 체계에 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 도 지나치지 않다. 명상이 문헌에 의해 제시된 특정한 상에 해 외부 념·생각의 방해 없이 마음의 유사한 변형들을 지속 으로 확립시키는 것이라면, ) 명상을 통해 라흐만을 계속 으 로 생각해야만 라흐만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 그러므 로 우빠니샤드에서처럼 ‘차이성을 동일성으로 바꾸는 구조를 가진 덧놓음’은, 이처럼 명상과 지식 사이에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요컨 , 샹까라에서 ‘덧놓음’이라는 개념은 명상 수행의 
에서 유속성 라흐만에 한 표 인 명상으로 기능한다. 그가 명상과 지식을 그토록 구별하는 이유는, 행 로부터 차별화된 라흐만이 다시 사이비·유사 라흐만과 순수 라흐만으로 혼동 될 여지를 막고자 하는 데 있다.  ) 우빠니샤드의 통을 계승하면 서도, 속성을 가진 사이비·유사 라흐만으로부터 속성을 가지지 않은 순수 라흐만을 차별화하기 해서는, 자에 한 근인 명상과 후자에 한 근인 지식을 ‘수단과 목 의 계’로 설정 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유속성 라흐만의 명상을 무속성 라흐만의 지식으로 이어주고  이끄는 데 결정 기여를 하는 것이 바로 덧놓음의 명상이다. ) 자기 자신의 본질이 라흐만임 을 알기 해서는 우선 자기에다 라흐만을 덧놓는 명상이 수행 인 측면에서 유효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Ⅲ.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놓음

흔히 샹까라와 덧놓음을 연 시키는 경우, 덧놓음이란 부분 
 
인식론 결함 즉 무지(avidy )와 유의 인 것을 가리킨다. 라 흐마 수뜨라 주석 의 서문을 ‘덧놓음에 한 주석’(adhy sa-bh ṣya) 이라고 특별하게 부르는 바와 같이, 샹까라는 이 개념을 가장 요한 작의 첫머리에 제시한 채로 주석 작업을 시작한다. 자신의  주석마 도 허구 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개념은, 인도철 학사에 베단따를 강력하게 각인시키고 샹까라가 최고의 철학자· 신학자로 불리는 데 결정 인 역할을 한다. 베단따는 샹까라가 이 덧놓음을 인식론 으로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상키야·요가나 불교 로부터 차별화되는 형이상학과 수행론마 확보하게 될 정도이 다.28) 
그런데 한 가지 궁 한 은, 샹까라 이 부터 존재하던 이 덧
놓음이라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유에서 갑작스럽게 그에 의해 인식론 오류로 등장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일단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을 인식론 결함으로서의 덧놓음으 로 확 용하는 것이 샹까라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덧놓음에 한 주석’에서 그는 여러 학 들이 인식론 덧놓음을 어떻게 간주하는지 소개한 뒤에 그것들을 일반화시켜 정의를 내 리기 때문이다. 샹까라는 오류지식(khy ti)에 한 여러 학 의 이
 
이어지는 데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덧놓음의 명상이다. 
28) Hirst(2005), p. 35 참조.
론들을 덧놓음에 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론들은 단순하게 말해서, ‘A를 A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안다(지각한다)’와 같은 경우 에 왜 그러한 오류지식이 발생하는지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 면서 그는 모든 오류지식 혹은 덧놓음을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속 성으로 함”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보다 인식론 으로 변환시 켜 “그것이 아닌 것에 하여 그것으로 인식함”이라고 정의한 다.29) 바로 여기서 명상에서의 덧놓음과 오류지식에서의 덧놓음 이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을 알 수 있다. 명상으로서 덧 놓음은 ‘A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라는 형태이고, 오류지식으로서 덧놓음은 ‘A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인식하 다’라는 형태인 것이다. 후자는 ‘A를 A와는 다른 B로 인식하다’와 같이 그 일반 으로 잘못된 지식을 가리키지만, 이것이 덧놓음 을 구조로 하는 이상, 샹까라는 이 오류지식과 덧놓음을 동일시하 고 있는 셈이다. 결론 으로 샹까라에게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 놓음이란 명상 덧놓음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30) 
그럼에도 샹까라의 이 과업에 해, 덧놓음이라는 개념의 기원
을 두고 볼 때는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덧놓음의 토 와 상을 두고 볼 때는 새로운 차원도 함께 제시되는 변형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얼핏 보기에도 열등한 것에 우등한 것을 덧놓는 
 
29) 이 두 가지 정의 모두 ‘덧놓음에 한 주석’에 등장한다. US 산문편 2.51에서는 무지를 “어떤 것에 하여 다른 것의 속성을 덧놓음”으로 정의한다. 무지에 한 이 정의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속성으로 함”이라는 덧놓음에 한 정의와 거의 일치한다. 
30) 샹까라의 인식론 덧놓음은 ‘자기상정’(abhim na) 혹은 ‘허 자기상정’(mithy bhim na)이라는 개념과도 유의 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 잘못 상정(想定)하는 것’을 가리키므로, 자기와 다른 존재를 자기로 명상하는 모든 내 인 명상 즉 자기 악 명상도 자기상정의 범 에 들어올 수 있다. 결국 ‘자기상정’이라는 개념은 명상 덧놓음과 인식론 덧놓음의 연결고리가 됨으로써 후자가 자의 변형이라는 을 방증해  수 있다. 이 개념은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1.1.4, 1.1.21, 1.2.18, 1.2.22, 1.2.24 등에서 지속 으로 등장하는 편이다. 
명상과 주로 우등한 것(실재)에 열등한 것(비실재)을 덧놓는 오류 사이에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지 않는가. 비록 두 종류의 덧놓음이 모두 어떤 것에 그것과는 다른 것을 덧놓는 형식일지라도, 명상으 로서의 덧놓음에서 토 와 상으로 구분되는 것들은 오류로서의 덧놓음에서 둘 다 상으로 환되어 버린다. 바꿔 말하자면, 명 상에서는 경험 자아가 덧놓음의 토 이고 신격이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음의 상인데 비해, 오류에서는 라흐만·아뜨만으 로서 실재 자아가 덧놓음의 토 이고 ‘경험 자아, 신격이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음의 상이다. 베단따에서 말하는 ‘아뜨 만이 아닌 것’이 경험 자아와 상세계를 가리키는 이상, 인식 론 결함으로서 덧놓음이란 주로 아뜨만에 아뜨만이 아닌 경험  자아와 상세계가 덧놓이는 오류를 가리키는 셈이다. 결국 샹 까라는 명상에서 덧놓음의 토 와 덧놓음의 상 부를 인식론 에서는 아뜨만에 덧놓이는 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덧놓음의 이 구조를 도입하고 있다. 
아뜨만이 덧놓음의 유일한 토 라는 과 덧놓음이 이 구조를 가진다는 은 샹까라가 덧놓음을 상호 인 것으로 악하면서도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데서 암시된다. 
본질 으로 ‘어둠’과 ‘빛’처럼 상충하는 ‘ ’와 ‘나’라는 념들의 
역인 ‘ 상’과 ‘주 ’에서 상호 화(相互轉化)가 부당하다고 확립되어 있는 경우에 그것들 [각각의] 속성들에서도 더더욱 상호 화가 부당 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라는 념의 역이고 순수의식을 본질로 하는 주 에 ‘ ’라는 념의 역인 상과 그 속성들을 덧놓음과, 그 와 반 로 상에 주 과 그 속성들을 덧놓음은 [모두] 허 라고 하는 것이 합리 이다 — 그럼에도 완 하게 분별되는 [각각의] 속성과 [각 각의] 기체(基體)에 한 상호 무분별로 말미암아 각각에 [그것과 다 른] 각각의 본체들과 각각의 속성들을 덧놓은 채로, 실재와 비실재를 결합시키면서 “나는 이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허 지 식을 기인으로 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일상의 경험작용’이 있다.31)
 
31)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주 에 상 인 것이 덧놓이는 시가 
여기서 샹까라는 덧놓음이 결코 혼성될 수 없는 주 과 상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즉 주 과 상이 분별되어야 함에도 경험의 역에서는 분별되지 않 기 때문에, 이 덧놓음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인식론 조건이 된 다. 더 구체 으로 덧놓음의 구조란, ‘주 ’에 ‘ 상이나 상의 속 성’이, 혹은 ‘상’에 ‘주 이나 주 의 속성’이 덧놓이는 형태이다. 주 은 순수의식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실재이고, 상은 비실재 이다. 그런데  다시 샹까라는 덧놓음에 한 논의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이와 같이 ‘나’라는 념을 가진 [내 기 을] 그 자체 (내 기 )의 모든 활동에 한 조자인 내 아뜨만에 덧놓고, 한 그와 반 로 모든 것에 한 조자인 그 내 아뜨만을 내 기 등에 덧놓는다.”32)라고 말한다. 이로부터는 그가 ‘내 기
’(antaḥkaraṇa)33)과 ‘내 아뜨만’(pratyag tman)이라는 두 가지 의 주 을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 이 두 가지의 주 을 분별해서 아는 것이 베단따에서는 가장 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인식론 덧놓음이란 순수주 (내 아뜨만, 순수의식), 주 (내 기 ), 상이라는 3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가운데 순수주 은 주 과 상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 덧놓음 의 최종 토 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이고, 상에 주 인 것이 덧놓이는 시가 ‘이것은 나의 것이다.’이다. 본체의 덧놓음에 한 시로는 ‘이것(밧 )은 뱀이다.’를, 속성의 덧놓음에 한 시로는 ‘이 (회색) 밧 은 검은색이다.’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덧놓음의 상호성은 이미 샹까라가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에 한 시로서 열등한 것에 우등한 것이 덧놓이는 형태뿐만 아니라 우등한 것에 열등한 것이 덧놓이는 형태를 언 한 으로부터 그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그가 상호 덧놓음의 시로 드는 것은 ‘옴’(Om)이라는 음 과 ‘우드기타’(Udg tha)이다. 
BSBh, 3.3.9 참조. 
32)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33) 내 기 이란 외 감 (기 )이 아닌 내 ·심리 기 으로서, 
일반 으로 마음(manas), 자아 념(ahaṅk ra), 지성(buddhi)이라는 세 가지가 포함된다. 지능(citta)이 포함되기도 한다. 
만약 덧놓음이 오류지식으로서 인식론 결함이라면 ‘잘못된 지 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지’로 간주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 럼에도 샹까라에게 덧놓음과 무지가 완 하게 유의 이지 않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은 두 개념의 다양한 내포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34) 그가 분명히 “이와 같이 특징지어지는 이 덧놓음을 식자들은 ‘무지’라고 간주하고, 한 그것(덧놓음)의 분 별을 통한 사물의 본질 확정을 ‘지식’이라고 이른다.”35)라고 말하 는 것으로부터는 의심의 여지없이 두 개념이 인식론 결함이라 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덧놓음은 명상 수행이기도 하고 인식론  결함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방법론 략이기도 하다.36) 반 면에 무지는 주 측면에서 인식론 결함이기도 하고, 상 측면에서 존재론 근본물질이기도 하다.37) 이 경우에 인식론 결함으로서의 무지란 실재를 실재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아는 ‘허
 
34) 를 들어 Comans는 무지가 세계의 물질 원인이라는 을 강조하기 해, 샹까라가 자주 사용하는 표 들인 ‘무지에 의해 
야기된’(avidy -kṛta), ‘무지에 의해 제공된’(-pratyupasth pita)’, ‘무지에 
의해 상상된’(-kalpita), ‘무지에 의해 덧놓인’(-adhyasta,-adhy ropita) 
등에서 무지란 인식론 인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이런 표 들에서 무지가 인식론 결함이라면 무지는 곧 
덧놓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무지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은 
‘덧놓음에 의해 덧놓인’(superimposed by superimposition)이라는 뜻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덧놓음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은 거의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Comans는 덧놓음과 무지가 완 하게 동일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Comans(2000), p. 247 참조. 
‘무지에 의해 야기된’ 등의 표 들이 등장하는 용례는 Hacker(1995), p. 
74를 참조하시오. 
35)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36)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에 해서는 4장에서 다룰 것이다.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은 역설 이게도 덧놓음 그 자체를 기하기 한 방법이다. 
37) Comans는 Hacker가 샹까라의 무지를 두 가지 의미로 악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덧놓음과 동의 인 것이고, 둘째는 세계의 물질 원인인 ‘미 된 명칭과 형태’(avy kṛtan marūpa)와 동일한 것이다. 
Comans(2000), p. 248 참조.

 지식’(mithy jñ na) 혹은 ‘허 념’(mithy pratyaya)이다. 결과 으로 덧놓음과 무지는 각각 여러 쓰임새를 가지지만 공통 으로 인식론 결함을 의미하며, 특히 샹까라에게는 부분 이 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인식론 개념으로서의 덧놓음은 무지와 유의 인 것이자 ‘실재에 비실재를 덧놓는 오류’를 지시할 뿐이다.
이와 같이 무지와 유의 인 것으로서 덧놓음은 샹까라의 체계 에서 해탈을 해 반드시 기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일상 경험 을 가능 하는 덧놓음은 만인이 공통 으로 지각할 수 있음에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자연스러운(naisargika) 상이다.38) 그래 서 주객의 상호 덧놓음은 인간의 인식활동을 규정하는 근본 이 고 보편 인 조건으로서 그 근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미 주어 져 있는 사실로 알려진다.39) 만약 이 덧놓음을 주어져 있는 사실 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덧놓음을 기하고자 하는 베단따의 기 획도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덧놓음을 통해 샹까라는 이 근본 이고 보편 인 인간의 굴 로부터 탈출하기 해 덧놓음의 구조 를 앎으로써 덧놓음의 토 에 해 모든 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의도하기 때문이다.40) 쉽게 말해서 덧놓음을 보편 상으로 삼 아야만 실재에 비실재를 덧놓는 속박의 근본 구조를 인정하게 됨 으로써 실재에 한 지식을 얻는 데 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 국 덧놓음의 토 인 실재, 덧놓음의 상인 비실재, 기되어야 
 
38)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참조. 
39) Alston은 시간과 인과율 자체가 덧놓인 것들이기 때문에, 덧놓음 자체는 시간과 원인 안에서 시작과 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Malkovsky(2000), p. 91 참조. 
40) 덧놓음의 략은 기체(덧놓음의 토 ) 없이는 환 (덧놓음의 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 즉 라흐만 없이는 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 Narain(2003), p. 150 참조. 다른 한편, 덧놓음은 
일종의 태생 인 ‘잘못된 자기상정’이므로 실에서 덧놓음의 토 (the 
Ground)를 알자는 것이 베단따의 기본방식이다. Malkovsky(2000), p. 76 참조.

 
하는 덧놓음, 이 세 가지가 베단따의 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 이 단순한 구도 속에서 덧놓음은 이미 그 태생부터 그 토 에 한 지식을 이끌기 한 방법 략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
다.


Ⅳ. 방법론 략으로서 덧놓음

샹까라의 베단따 철학이 ‘덧놓음, 덧놓음의 토 , 덧놓음의 
상’이라는 세 가지를 요체로 하는 경우, 해탈이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 해서 방법 으로 덧놓음 혹은 덧놓기(adhy ropa)를 고 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덧놓음을 알지 못하면 덧놓음 의 기가 불가능하고, 덧놓음을 기하지 못하면 해탈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덧놓음이 방법론 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어김없 이 걷어내기(apav da) )와 한 으로 등장하므로, 이를 통 으 로 ‘덧놓기와 걷어내기’(adhy ropa-apav da)의 방법 )이라고 부 른다. 인식론 덧놓음을 방법론 덧놓음으로써 기하고자 하는 이 방법은 해탈을 한 베단따의 요한 략이다. 즉 덧놓음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그것을 제 로 없앨 수 없는 이상,44) 덧놓음 자체를 덧놓음의 구조를 이용하여 기하고자 하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자기해체’ 략이다. 토 와 상으로 이루어진 덧놓음 의 구조에서 상을 통해 차 으로 토 에 근하고자 하는 이 략은, 본디 토 인 실재에 한 지식을 승하고  획득하고자 하는 목 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식론 덧놓음을 방법론 덧놓음으로 환시키는 이 략은 어도 베단따의 통 내에서는 샹까라가 최 로 구사했을 가능
성이 크다. 사실 언설 불가능하고 지각 불가능한 실재를 경험하기 해서 언설 가능하고 지각 가능한 상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차 으로 그 실재에 다가가야 한다는 략은 인도철학에서 매우 일반 이다. 한 속박이라는 것과 해탈이라는 것도 모조리 상 계에서 발생할 뿐이기에, 무지의 기나 지식의 획득은 상계에 서 일어나는 사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베단따에서 해탈의 수 단이 지식이고 이 지식이 분별 지식이며 이 분별 지식이 비 실재로부터 실재를 분별해서 아는 것이라면, 무문별의 무지에서 분별의 지식으로 나아가기 해서는 덧놓음의 상을 실 출 발 으로 삼아 그 상과 토 의 차이를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실재에 비실재가 덧놓인 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비실재를 길잡 이로 하여 비실재와는 다른 실재를 분별해내야 한다면, 임의 으 로나마 덧놓음을 실행하여 허상인 덧놓음의 상을 해체하고 실 상인 덧놓음의 토 를 확정해야 한다. 이처럼 임의 으로 덧놓음 을 실행하는 것이 덧놓기요, 덧놓음의 상을 걷어내고 토 만을 
 
편이다. 삿 다난덴드라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귀속과 철회’(attribution and retraction)로 번역한다. 이 방법을 상세히 다룬 서로는 The 
Method of the Vedanta(1997) 등이 있다. 

44) 이 말은 ‘잘못된 지식으로서의 무지에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 무지를 올바른 지식으로 이끌 수 없는 이상’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남기는 것이 걷어내기다. ) 그리고 이 덧놓음의 임의성은 우빠니 샤드에서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이 가진 임의성과도 일맥상통하기 에, 비록 방법론 덧놓음을 크게는 인식론 덧놓음의 방법 인 확장으로 간주할지라도, 어떤 측면에서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명 상 덧놓음과 인식론 덧놓음의 종합 인 확장으로 볼 수도 있 다. 
샹까라는 방법론 덧놓음의 상과 요성에 해 거의 언
하지 않지만, 이 방법 자체를 직간 으로 언 하기도 하고 용 하기도 한다. 그의 여러 작들 가운데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 을 직 언 하는 곳은 바가와드 기따 주석 (Bhagavad-g t bh ṣyam)이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서 표 되거나 설명될 수 없 는 것이 표 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 이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통해서 복잡 상계를 넘어서 있는 실재가 알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는 걷어내기를 직 언 하는데, “걷어내기라는 것은 어떤 상에 해 이 에 덧얹힌 잘못된 념이 확정되어 있는 경우에 나 에 만들어지는 참된 념이 이 에 덧얹힌 잘못된 념을 기하는 것이다.” )라 는 정의는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샹까라는 이 방법을 간 으로 언 하는데,  유명한 시인 ‘아룬다띠’(Arundhat ) ) 별을 통해서이다. 컨 , 아룬다띠를 보여주고자 하는 자가 우선 그것의 근처에 있
고 일차 이지 않은 큰 별을 아룬다띠라고 지각하게 한 다음, 나 에 그것(큰 별)을 부정하고서 아룬다띠 자체를 지각하게 하듯이, 그와 마 찬가지로 그것(쁘라다나)은 아뜨만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49)
컨 , 아룬다띠를 지시하는 경우에 비록 일차 아룬다띠가 아닌 수많은 별들이 제시될지라도 최종 으로 밝 진 것이 바로 일차 아 룬다띠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환희로 이루어진 것’은 모든 것의 내부이기 때문에 일차 아뜨만이다.50) 
지극히 작고 희미한 아룬다띠를 알기 해서는 그 주 의 여러 별들을 이용해야 하는데, 가장 크고 밝은 별로부터 작고 희미한 별의 순서 로, 아룬다띠라고 거짓으로 덧놓은 다음에 아룬다띠가 아니라고 걷어내면서 마지막에 진정한 아룬다띠를 알게끔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미시 인(미세한) 실재를 알기 해서는 그 실재 에 덧놓인 여러 비실재를 이용해야 하는데, 가장 시 인(크고 거친) 비실재로부터 미시 인 비실재의 순서 로, 실재라고 거짓 으로 덧놓은 다음에 실재가 아니라고 걷어내면서 마지막에 진정 한 실재를 알게끔 한다. 다른 한편, 샹까라가 덧놓기와 걷어내기 의 방법을 실제로 용하는 사례로는 라흐마 수뜨라 주석  1.
1.12-19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우빠니샤드에 등장하는 음식(ann
a)·숨(pr ṇa)·마음(manas)·인식(vijñ na)·환희( nanda)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 아뜨만들51) 가운데 마지막 것이 최종 아뜨만으로 간 주되고, 더 나아가 ‘환희로 이루어진 아뜨만’이 아닌 ‘환희 자체’가  다시 최종 아뜨만이라고 확정된다. 샹까라는 이 사례를 통 해, 아뜨만에 아뜨만이 아닌 것을 덧놓고 걷어내는 덧놓기와 걷어 내기의 방법이 우빠니샤드부터 로 승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52) 이처럼 샹까라에게서 인식론 덧놓음은 걷어내
 
49) BSBh, 1.1.8. 
50) BSBh, 1.1.12.
51) 다섯 가지 아뜨만들은 Taittir ya-upaniṣad, 2.1-5에 등장한다. 
52) BSBh, 1.1.12-19에서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이 구체 으로 용된 
기와 결합된 방법론 덧놓음으로 환되면서 무지의 기 혹은 지식의 획득을 가능 한다. 

샹까라가 이용하는 가르침의 여러 방법들, 를 들어 시를 사 용하거나 이야기 식으로 달하는 방법들53) 한 부분 덧놓기 와 걷어내기의 방법과 다소간의 상 계를 가진다. 실제 텍스트 에서 베단따의 사상을 유효하게 가르치기 해 직간 으로 제 시되는 이 방법들은, 덧놓기와 걷어내기, 함축(lakṣaṇ ) 등과 같은 베단따의 주요 수행 방법이나 실천 방법과 그 목표가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방법들은 두 가지 측면 에서 넓은 의미의 덧놓기와 걷어내기 방법에 포 될 수 있을 것 이다. 첫째, 베단따에서 사용되는 가르침의 여러 방법들은 감각 인 실재를 경험의 역으로 가져와서 지시해야 하기 때문에, 어 떤 식으로든 경험 인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덧놓음·덧놓 기와 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둘째, 그 여러 방법들은 실재와 비 실재의 계를 해명하는 데 내용 으로 을 맞춰야 하기 때문 에, 토 와 상으로써 그 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덧놓기와 걷 어내기의 방법으로부터 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인식론 덧놓음이 베단따의 결정 인 가르침인 이상, 그 덧놓음을 기하 기 한 모든 가르침의 방법들은 넓은 의미에서 덧놓기를 앞세운 걷어내기를 통해 개될 수밖에 없다. 덧놓기와 걷어내기는 가장 심 이자 가장 포 인 베단따의 수행 방법 혹은 실천 방법인 것이다. 
샹까라에게서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이러한 방법론 의의는 베
단따의 근본 원리와 계해서도 여 히 변하지 않는다. 베단따의 근본 원리란 망각된 실재를 재인식하는 것이고 ‘자기가 아닌 것 들’과 ‘참다운 자기’를 혼동한 상태로부터 분별한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단따의 심 방법이란 이러한 원리를 실 할 수 
 
것에 한 논의는 박효엽(2006)을 참조하시오.

53) Hirst는 샹까라가 가르치는 기술을 ‘시 사용, 이야기 달, 진 방법’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Hirst(1990), pp, 113-150 참조. 

있는 데 결정 인 역할을 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덧놓기와 걷어내 기는 무엇보다도 덧놓음의 사실이54) 망각되었음을 동일한 덧놓음 으로써 일깨우는 방법이므로 망각과 재인식을 본질로 하고 있다. 더욱이 덧놓기와 걷어내기는 이미 논의했다시피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을 분별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다. 즉 베단따의 해탈을 개별 자아와 라흐만·아뜨만 사이에서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인식론 덧놓음은 그 상인 개별 자아를 참다운 자아로 간주하므로 덧놓기의 방법을 통해 그 토 인 라흐만·아뜨만을 분별해 내야만 해탈이 가능하 다.55) 이처럼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은 베단따에서 그 근본 원 리를 실에서 구 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기에, 샹까라에게서 이 방법이 심 이고 포 으로 사용된다는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Ⅴ. 샹까라에서 덧놓음의 의의

샹까라의 베단따를 덧놓음이라는 개념을 심으로 살펴보는 것 은 그의 사유를 덧놓음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인식론 덧놓음에 견주어 다른 두 가지 덧놓음 즉 명상 
 
54) ‘덧놓음의 사실’이란 ‘덧놓음의 토 와 상의 본질에 한 사실’을 가리킨다. 
55) 베단따에서 개별 자아와 아뜨만 사이 혹은 세계와 라흐만 사이의 동일성(identity)은 양자의 같음(equation)이 아니라 
불가분리성(inseparability)이다. 즉 무지 혹은 덧놓음의 상태에서는 양자에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것처럼 오직 믿을 뿐이고, 지식의 상태에서는 실질 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다. 무지는 양자의 동일화를 주장하지만, 지식은 개별 자아로부터 아뜨만의 차별화 혹은 세계로부터 라흐만의 차별화를 주장한다. Roy(1982), pp. 91-92 참조. 

덧놓음과 방법론 덧놓음이 샹까라에게 상 으로 덜 요할지 라도, 이 후자들을 복원하여 자와 연 시켜야만 그의 사유가 가 진 진면목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즉 라흐마 수뜨라 주석 과 ‘덧놓음에 한 주석’의 요성을 고려한 채, 인식론 덧놓음을 심으로 하여 그 배경을 이루는 명상 덧놓음과 그 실행을 이 루는 방법론 덧놓음을 밝 냄으로써, 샹까라 베단따의 체계가 체연 성(samanvaya) 아래 일목요연하게 재구성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샹까라에게서 덧놓음이라는 것은, 인식론 결 함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명상 수행과 방법론 략이라는 의미도 가지면서, 그의 작 속에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기능하고  몇 가지 요한 의의를 암시하고 있다.56) 무엇보다도 샹까라는 명상 인 덧놓음을 인식론 인 덧놓음으 로 확장하는 와 에, 이원성(차이)이 비이원성(무차이)으로 환 되는 과정에 해 신비에의 호소가 아니라 합리 인 설명이 가능 하게끔 한다. 베단따에서 계승하는 우빠니샤드의 핵심 가르침은 두말할 나 없이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이원성을 없앰으로써 비 이원 인 아뜨만에 한 지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빠니샤드 에는 그 이원성이 사라지기 이 과 이후 혹은 비이원성을 얻기 이 과 이후의 상태에 해 묘사하기만 할 뿐, 어떤 방식으로 이 원성이 비이원성으로 환되는지 명료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57) 이와 달리 샹까라는, 명상에서의 주객 이원성이 어떻게 인식론 인 무지의 주객 이원성으로 확장되고, 이 후자가  어떻게 지식 의 주객 비이원성에 의해 기되는지, 덧놓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56) 덧놓음의 세 가지 의미를 밝히는 와 에 그 각각의 의의 역시 어느 정도는 밝 진 셈이다. 여기서는 추가 으로  종합 으로 덧놓음의 의의를 밝 보고자 한다. 
57) Bṛhad raṇyaka-upaniṣad, 4.5.15를 로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소 
이원성이 있을 경우에, 그러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고, … 하지만 모든 것이 오직 ‘그의 아뜨만’이 될 경우에, 그러면 무엇에 의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 그러면 무엇에 의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무엇에 의해 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체계 으로 설명해 다. ‘베단따’라는 체계는 바로 그가 명상의 주체(주 )와 상이라는 이원성을 비이원 인 아뜨만(순수주 ) 에 덧놓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만큼 명상 인 것에 서 인식론 인 것으로 확장되는 덧놓음은, 단순히 샹까라의 베단 따가 우빠니샤드를 계승하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재해 석하고 있다는 차원을 보여주는 셈이다. 신비 인 방식을 거의 벗 어나지 못한 우빠니샤드의 비이원 가르침은 샹까라의 덧놓음에 의해 한편으로 승되고  한편으로 확 되는 까닭에, 결과 으 로 덧놓음은 체계로서의 베단따를 단숨에 가능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샹까라에게서 인식론 덧놓음은 베단따라는 체계
를 가능 하는 동시에 방법론 덧놓음58)과 조합을 이루면서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과 분명하게 차별되게끔 한다. 즉 인식론 이 고  방법론 인 덧놓음은 베단따의 형이상학과 수행론을 베단 따만의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데 결정 으로 기여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단따를 비롯한 인도의 해탈 심 학 들은 외 없 이 본래의 자기를 잘못 아는 것을 교정함으로써 자기를 있는 그 로 올바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데 을 둔다. 물론 ‘있는 그
로’의 자기를 어떻게 간주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 을 보이기 는 하지만, 근본 으로 그 학 들은 차이 보다 유사 을 더 많이 가진다. 그런데 샹까라의 인식론 이고 방법론 인 덧놓음은 그 미약한 차이 을 더 크게 만듦으로써 베단따를 확실하게 다른 학 들로부터 차별화되는 체계로 완성한다.
샹까라의 베단따 체계를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실재인 아뜨만
에 해 ‘①잘못 알다, ②잘못 알고 있음을 일깨우다, ③올바르게 알다’라는 3단계로도 충분히 표 할 수 있다.59) ①에 해당하는 것
 
58) 여기서 비록 ‘방법론 덧놓음’이라고만 언 할지라도, 덧놓기만을 가리키지 않고 걷어내기도 포함한다는 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59) Bina Gupta는 샹까라의 체계를 정교한 인식론 인 분석의 결과라고 말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인식론 3단계를 약간 변형시켜서 표 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허상을 인식하다, ②그 인식이 사라지다, ③교정이 발생하다. Gupta(1998), p. 8 참조. 
이 바로 인식론 덧놓음이고, ②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방법론 덧놓음이다.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이라는 조건을 출발 으로 삼는 것은 해탈 심 인 다른 학 와 동일하지만, 그 조건이 인식론 덧놓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과 그 조건을 벗어나기 해 덧놓 음을 방법 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은 베단따의 고유한 사유가 된다. 이 사유를 더 확 해서 표 하자면, ‘주객의 상호작용인 잘 못된 앎’과 ‘순수주 그 자체인 올바른 앎’ 사이에 덧놓음의 계 가 있으므로 덧놓음의 상인 잘못된 앎에서 출발하여 덧놓음의 토 인 올바른 앎에 도달해야 하며, ) 이는 인식론 덧놓음에서 방법론 덧놓음에로 이행하는 양자의 조합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식론 덧놓음과 방법론 덧놓음의 내용이 결 코 다르지 않다는 에서 샹까라의 고유한 사유는 더 잘 드러난
다. 덧놓음의 상과 토 는 동일한 것임에도, 인식론 덧놓음이 그 잘못 알고 있다는 ‘그러한 사실’과 계하는 반면 방법론 덧놓음은 그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 인 략’이라는 데 양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후자를 통해 잘못 알고 있다는 그러 한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곧 올바른 앎이라는 목 을 달 성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샹까라의 형이상학과 수행론은 바로 이 처럼 ‘인식론 덧놓음의 이 구조’와 ‘덧놓음의 인식론 이고 방 법론 인 이 역할’을 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다른 학 의 그 것과 변별되는 지 을 보다 확실하게 가질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샹까라는 인식론, 형이상학, 수행론을 일 되게 꿰
뚫는 덧놓음의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베단따 철학이 인도의 심 통이 되는 데 암묵 으로 일조하기도 한다. 완성된 덧놓음의 체 계에 의해 다른 학 들의 교리가 덧놓음에 속하는 무지의 산물로 간주되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베단따 사유의 우 가 확보되는 것 이다. 사실 학 경쟁 성격이 강한 인도에서는 자기 학 의 교 리를 최정 에 두기 해 다른 학 들의 교리를 종종 무지의 산 물로 규정해 버린다. 실재에 한 다른 학 들의 견해가 올바르지 않다는 에서 당연하게도 그 교리 체가 잘못된 지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샹까라의 덧놓음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경험 활동이 덧놓음의 역에서 작동한다고 규정해 버림으로써, 역설 으로 덧놓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의 사유만을 최종 인 지식으로 치시켜 버린다. 컨 샹까라는 “[한편] ‘무지’라고 불리는 그 ‘아뜨만과 비아뜨만 사이의 상호 덧놓음’을 제로 하 여 지식수단·지식 상에 한 일상 이고 베다 인 모든 경험작 용들이 나아가고, 한 명령·지·해탈을 목 으로 하는 모든 성 들과 [련된 경험작용들이] 나아간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 실행하는 모든 활동은 덧놓음의 사실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기에, 이 덧놓음의 역 안에 있는 모든 학 들의 교리는 외 없이 결코 최종 인 것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베단따의 교리조차 도 덧놓음에 속할 뿐이지만, 어도 이 덧놓음이라는 잣 만은 세 계 인식에서 유일무이하고 최종 인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덧놓 음의 잣 는 다시 그 자체를 바탕으로 하는 베단따의 교리에마 인간 지성의 마지막 보루인 것과 같은 권 와 상을 부여하고 만다. 따라서 샹까라의 덧놓음은 인도에서 베단따 학 가 그 권력 을 형성하고 존속하는 데 음성 으로 기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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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Adhy sa in Śaṅkara


Park, Hyo Yeop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Adhy sa or superimposition known widely as a kind of meditation in the Upaniṣads is a trace that shows properly a turning point from meditative knowledge to Self-knowledge. This meditation through which an inferior is to be elevated or uplifted to the state of a superior, presents the formal foundation and contributes methodologically in obtaining knowledge of the identity between an individual self and Brahman. In Śaṅkara who succeeds the Upaniṣadic tradition and puts Ved nta on a firm footing, by accepting and modifying this meditation it appears to be three meanings on the concept of 'adhy sa', i.e. meditative practice, epistemological error, and methodological strategy.
First, adhy sa as meditative practice takes the form of 'to meditate by superimposing B which is different from A on A'. As far as Śaṅkara looks on meditation as a means of knowledge and on knowledge as a means of liberation, this concept can be a means to enable knowledge on 
Brahman-without-attribute. Adhy sa that is representative of meditation on Brahman-with-attribute can act as mediators between meditation and knowledge, since it gives birth to a continuous recollection of Brahman-without-attribute. 
Second, adhy sa as epistemological error, on account of the form of 'to cognize by superimposing B which is different from A on A', is nothing but a transformation of meditative adhy sa. This most well-known adhy sa has double structure in the sense that the constituents of adhy sa i.e. the subject and object are altogether superimposed on the final ground of adhy sa i.e. the Pure-subject or tman. In this way this adhy sa as false knowledge or ignorance (avidy ) signifies 'false cognition on the Reality by superimposing the non-Reality on the Reality'. Moreover, this given adhy sa can be said to be a radical and universal condition prescribing all the cognitions of human being, and accordingly, there is no need to trace its origin. 
Third, adhy sa as methodological strategy, an approximate equivalent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adhy ropa-apav da', is a methodological expansion of epistemological adhy sa to accomplish the ultimate goal of liberation. It may be said that for Śaṅkara this adhy sa is the most central and inclusive method of practice in a way that it includes all the methods handed down from the Ved ntic tradition. Plus, as the basic tenet of Ved nta consists in re-cognition of the forgotten Reality, so this adhy sa or adhy ropa accompanied by apav da is the most reliable method to lead the state of discrimination from that of indiscrimination between the ground and object of adhy sa.
To look around the philosophical system of Śaṅkara through the concept of adhy sa aims at to reveal its true character better, by means of reconstructing his system with priority given to a few meanings of adhy sa. After all three kinds of adhy sa may have the following significances. First, throughout his substitution from meditative adhy sa to epistemological one, Śaṅkara throws open the door to a reasonable explanation unlike an appeal to mystery, about the process of shifting duality to non-duality. Second, epistemological adhy sa of Śaṅkara paves the way for Ved nta as a system and distinguishes it from all other systems. Third, Śaṅkara plays a part in making Ved nta philosophy as a central tradition in India by a tacit, since he perfects the system of adhy sa penetrating epistemology, metaphysics, and theory of practice consistently. 

Key Words: zaGkara, vedAnta, adhyAsa, meditation, error, method

투고 일자 : 2010년 11월 15일 
심사 기간 : 2010년 12월 15일~12월 22일 
게재 확정일 : 2010년 12월 23일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과 가상적 욕망의 해소: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과 가상적 욕망의 해소: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 :: 기초학문자료센터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과 가상적 욕망의 해소: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gram 기초연구지원인문사회(창의주제연구)
Project Number 2006-321-A00439
Year(selected) 2006 Year
Research period 1 Year (2006년 11월 01일 ~ 2007년 10월 31일)
chief of research 박효엽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11회 수행 / 공동연구 3회 수행 / 학술논문 41편 게재 / 총 피인용 39회 ] 
Executing Organization 경북대학교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Research Summary

Goal

본 연구는 인도철학에서 가장 정통적인 학파로 알려진 아드와이따 베단따(Advaita Vedānta) 즉 불이일원적(不二一元的) 베단따의 형이상학이 오늘날 활성화되고 있는 가상현실에 관한 담론에 하나의 모형을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기실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경험 세계를 철저하게 진실·실재(satya)와 허위·허구(mithyā) 즉 현실과 가상현실로 구분하고, 끊임없이 후자를 부정함으로써 전자에 대한 긍정을 유도한다. 그래서 흔히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이론 체계를 ‘환영설’(māyāvāda, 幻影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먼저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전적으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영설의 주장은, 사이버(cyber, 전자통신망과 가상현실의 결합어) 세계에서의 ‘가상성’과 쉽게 연관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환영의 세계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있기 이전까지만 그럴듯한 실재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환영설의 주장은, 사이버 세계에서의 그럴듯한 ‘현실성’과 쉽게 연관될 수 있다. 따라서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환영설은 사이버 세계의 ‘가상현실성’(가상성+현실성)에 대한 대비적 모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연관에서 본 연구의 목적은,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형이상학과 그에 수반되는 자유론(해탈론)을 중심으로 하여, 인터넷 중독으로 대변되는 ‘가상현실에서의 과잉과 왜곡’이라는 동시대의 문제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목적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사이버 세계의 가상성이 가지는 본질을, ‘진실과 허위’, ‘실재와 현상과 허구’ 등과 같은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이론적 구조(인식론적 오류와 존재론적 위계)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2) 사이버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참된 인식이야말로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는 점을, ‘환영의 원인에 대한 탐구’, ‘무지의 제거와 지식의 획득’ 등과 같은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방법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3) 사이버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참된 인식이 그 세계에서의 욕망을 가상적인 것으로 확정한다는 사실을, ‘무지-욕망-행위-고통(괴로움)’이라는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연쇄적 인과이론을 통해 대비시키고자 한다. 4) 사이버 세계의 가상적 욕망을 해소함으로써 사이버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자유(참된 인식)에의 긍정적 욕망’, ‘부정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와 같은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실천론과 자유론을 통해 제안하고자 한다. 5) 사이버 세계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자기와 가상현실의 자기를 분별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진정한 자기를 찾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질문과 그 해결책(해답)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다.

Expectation Effectiveness

본 연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 중의 하나는 인도철학에 관한 담론과 효용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인도철학은 다른 철학들에 비해 ‘좀 더 현실적이지 못하다’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도철학의 그 풍성한 유산들을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인도철학에 관한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한 데에도 있지만 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현실적 담론을 개발해내지 못한 데에도 있다. 이러한 연관에서 본 연구는 인도철학의 중심 전통인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사상을 가상현실과 관련된 담론의 중심에로 끌어내고자 하는 작은 시도이다. 다른 한편, 가상현실과 욕망에 관한 본 연구는 학문 자체적 담론을 넘어서 사회적·교육적으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 그 기대효과들은 다음과 같다. 1) 가상현실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확장할 수 있다. 곧 아드와이따 베단따 사상을 토대로 한 분석을 통해 ‘가상현실의 가상성과 현실성’에 대한 모형적 이해가 가능하다. 2)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비록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이 가상현실의 가상성을 더 강조하고 있지만, 가상현실의 현실성 역시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가상현실에서의 욕망이 왜 가상적(허구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은 가상세계에서 욕망이 허구적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4) 가상현실에서의 욕망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지 또 그 욕망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목적적·전략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가상세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이상적 삶 즉 인간의 목적으로 간주한다. 5) 가상현실에서의 ‘나’가 실제로는 현실적 자기가 아니라 허구적 자기(아바타, avatar)라는 점을 숙지시킴으로써, 참다운 자기를 알고자 하는 성향에로 유도하여 인터넷 중독을 해소하는 하나의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어떻게 자신의 참 모습 위에 허구적인 자신의 모습이 덧씌워져 있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Summary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형이상학은 철저하게 일원론적이며, 이는 브라흐만(Brahman)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브라흐만 이외의 ‘제2자가 없다는’(advitīya) 점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세계(jagat)는 실재가 아닌 비실재에 다름 아니다. 곧 복합현상계(prapañca)로서의 세계는 마치 마술사의 눈속임에 의해 만들어진 마술과 같은 환영(māyā)이다. 결국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실재와 세계’는 각각 사이버 세계의 ‘현실과 가상현실’과 대응한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하여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밝힐 예정이다. 1)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환영설은 그 근간이 우빠니샤드의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우빠니샤드에서는 이 세계가 단지 실재의 변형(vikāra) 즉 명칭(nāma) 등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우빠니샤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창시자이자 체계자인 샹까라는, 다양성을 본질로 하는 세계가 브라흐만(실재) 위에 ‘가탁’(adhyāsa, 假託)된 ‘명칭과 형태’(nāmarūpa)에 다름 아니라고 강조함으로써 ‘실재에 대비되는 비실재의 세계’ 즉 ‘현실에 대비되는 가상현실의 세계’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정립한다. 3) 샹까라 이후의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존재에 일반적으로 3단계의 위계를 적용한다. 그것들은 ‘실재적 실재’(paramārtha-sat), ‘경험적 실재’(vyāvahārika-sat), ‘허구적 실재’(prātibhāsika-sat)이다. 이를 사이버 공간에서의 경험과 비교한다면, 경험적 실재는 곧 가상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것들 가운데 그나마 현실성을 띠고 있는 경험을 가리키며, 허구적 실재는 그것들 가운데 현실성이 거의 없고 오로지 가상성만이 주도적인 경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실재와 세계 혹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에 대하여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의사설(ābhāsa-vāda, 擬似說), 반사설(pratibimba-vāda, 反射說), 제한설(avaccheda-vāda, 制限說)을 주창한다. 세계가 실재의 의사이든지 반사이든지 제한이든지 간에, 그것은 분명히 실재에 대비하여 허구에 지나지 않고, 그 까닭은 세계가 단지 무지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지를 제거하는 방법만이 실재를 회복하는 첩경이다. 5) 세계의 가상성 혹은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은 바로 실재 혹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 이해’(anubhava, avagama, avagati)로부터 가능하다. 세계에서나 가상현실에서의 즐거움(sukha, 행복)은 항상 괴로움(duhkha, 불행)을 수반하는 곧 최종적으로 괴로움으로 판명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허구성 혹은 가상현실의 가상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6) 세계(가상현실)에서의 욕망 즉 가상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실재(현실)과 세계(가상현실)에 대한 ‘분별지’(viveka-jñāna, 分別智)가 필요하다. 이 분별지를 얻기 위해서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가탁과 탈가탁’(adhyāropa-apavāda)과 같은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7)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도 세계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의 허위성으로부터 실재의 진실성을 분별해서 앎으로써, 세계의 실상을 전체적으로 알고 그곳에서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Korean Keyword
허위·허구,현실성,세계,무지,분별,아드와이따 베단따,환영설,인터넷,진실·실재,욕망,가상현실,현실,사이버,우빠니샤드,자유,욕망의 해소,참된 인식,가상성

English Keyword
Cyber,Internet,Reality,Mithyā,Actuality,True Understanding,Cancellation of Desire,Freedom,Māyāvāda,Upanisad,Advaita Vedānta,Discrimination,Ignorance,The World,Virtuality,Satya,Desire,Virtual Reality


Research Summary
Korean

(1) 인도철학의 정통학파 가운데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는 실재가 유일무이함을 강조하면서 세계의 환영설 또는 가현설을 주창한다. 이 경우에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실재/허구로서의 현상’이라는 쌍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서 ‘현실/허구로서의 가상현실’이라는 쌍과 정확히 대응한다. 따라서 전자의 실재관은 후자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 모형이 될 가능성이 있다. 즉 양자 사이에는 우연적 유사성을 넘어서는 구조적 유사성과 내용적 유사성이 있다. 

(2)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존재론적 인과론은 가현설이라고 불린다. 가현설은 이 세계가 무지의 전변이요 실재인 브라흐만의 가현이라는 이론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브라흐만만이 실재이고, 존재론적 위계가 상이한 나머지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현설은 환영설과 유의적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현설이나 환영설은 의사설, 반사설, 제한설로 세분되는데, 이는 모두 실재인 브라흐만과 그것의 가현이거나 환영인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이론들이다. 그리고 이 이론들은 실재에 가현된 현상의 환영성이나 가상성을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가상에 불과한 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형이상학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과 구조적으로 큰 유사성을 가진다. 

(3) 실재와 현상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 중요한 개념은 ‘가탁’이다. 그리고 가탁의 근저인 브라흐만/아뜨만 혹은 실재와 가탁되는 것인 세계 혹은 비실재를 구분해서 아는 것이 분별적 지식이다. 물론 실재와 비실재라는 이분화된 구도가 후대에 삼분화 또는 오분화된 구도로 확장된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실재와 비실재를 설명하든지 간에 실재는 유일무이하고 비실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뿐이다. 달리 말해서 현상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함으로써 현상의 상대적 실재성과 지양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재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실재성이 낮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실재가 아닌 것들은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 지양되고 만다. 이러한 점은 가상현실이 현실에 비해 상대적 현실성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현실에 의해 지양된다는 사실과 내용적으로 유사하다. 

(4) 가상현실과 관련된 난제 중의 하나는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혼동과 그로 인한 자아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런데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는 자아정체성의 확립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철학 체계이다. 이 학파에서는 가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현상적 자아를 실재적 자아로 잘못 앎으로써 거짓된 욕망이 발생하고 속박이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욕망의 원인을 무지라고 규정한다. 즉 실재적 자아가 아닌 것을 실재적 자아로 잘못 앎으로써 거짓된 욕망 또는 가상적 욕망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러한 잘못된 앎을 교정하는 것 즉 분별적 지식이야말로 욕망을 해소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결국 가상현실의 가상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과 가상적(현상적) 자아나 가상적 욕망의 가상성을 인식하는 것이 병행됨으로써 가상현실에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5)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현상이 실재와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가상현실이 현실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가상현실의 존재론적 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표현이다.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것만 존재하지만 가상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의 반영임으로 말미암아 가상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과 가상현실의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점을 시사해준다. 첫째로, 전자의 존재성은 결코 부정될 수 없지만 후자의 존재성은 부정될 수 있으므로, 양자의 이러한 차이를 분별해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럼에도 전자에 의존적인 후자가 전자와 미묘하게 다르지 않는 것이라면, 그 다르지 않음은 가상성과 같은 후자의 부정적 속성을 긍정적으로 변환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nglish
The system of Advaita Vedānta which insists on Vivarta-vāda or Māyā-vāda can be a comparative model in relation to the discourse on virtual reality. For this argument three grounds are suggested as follows;
Firstly, the structure of 'Reality-appearance' in this Philosophical School is equivalent to that of 'reality-virtual reality', and the characteristic of relative reality and the possibility of sublation on the part of appearance would account for the status of virtual reality. According to Advaita Vedānta, Reality is one without a second and appearance is nothing but illusion (māyā) or fiction (mithyā). Those theories that show a detailed analysis on appearance such as ābhāsa-vāda, pratibimba-vāda, avaccheda-vāda present the fact that all appearance exist in dependence on Reality. As a result, appearance is relatively existent and is sublated when the knowledge of Reality is attained. Such a logic is equally applied to the discourse on virtual reality.
Secondly, the discriminative knowledge (viveka-jñāna) or right understanding between Reality and appearance in this School gives a room for overcoming the confusion between reality and virtual reality. Reality is what truly does exist, appearance is what truly does not exist. Although appearance is not what wholly does not exist but what truly does not exist, as it can be negated by what truly does exist, there is a necessity for knowing Reality and appearance discriminately. Such a logic is equally applied to the discourse on virtual reality.
Thirdly, the practical methodology for cancelling false desire on the side of phenomenal self in this School provides a possibility of which one can be freed from virtual desire in the virtual (cyber) space. In this School it is said that the phenomenal self is superimposed on the real Self. And that phenomenal self as a complex of virtual desire is placed on the state of false desire which is made of physical, psychological, linguistical conditions. As a matter of fact, this negative attitude on desire is a strategic device for the sake of actualizing freedom. Such a logic is equally applied to the discourse on virtual reality.


Research result report
Abstract
가현설 혹은 환영설을 주장하는 아드와이따 베단따라는 철학 체계는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 하나의 모형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로 두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이 현실과 가상현실이라는 이중구조를 중심으로 펼쳐지듯이,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철학적 담론도 실재와 현상이라는 이중구조를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둘째,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서 가상현실이 상대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현실에 의해 지양되듯이,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철학적 담론도 현상이 상대적으로 실재할 뿐이며 그것이 종국적으로 실재에 의해 파기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드와이따 베단따 철학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과 이론적으로 유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담론의 적용 방법이나 실행 방향과 관련해서도 유사성을 가진다.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혼동이 야기하는 문제점들이다. 그리고 이 혼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를 분명히 따지면서 양자를 분별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는 실재와 현상 사이의 무분별적 인식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발생한다고 하며 이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서 양자 사이의 분별적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즉 실재만이 존재하고 현상은 가상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별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상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은 아드와이따 베단따 모형의 현상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 그 정당성이 확인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의 가상적 욕망에 대한 해소 방안 역시 아드와이따 베단따 모형을 통해 정당성이 확보되고 현실적 적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상현실을 현실로 혼동하면서 본질적 자아가 아닌 현상적 자아가 야기하는 거짓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피상적인 느낌만을 줄 뿐 실제로는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아드와이따 베단따 모형은 현상적 자아가 거짓으로 구성된 자아임을 밝히고 현상적 자아가 가지는 욕망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가상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현상세계에 머물면서 실재와 현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듯이, 가상현실에 머물면서도 현실과 가상현실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가상적 욕망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1) ‘현실과 가상현실’에 관한 담론을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의 ‘실재와 현상’이라는 철학적 모형을 통해 재구성하고 분석한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과와 전망을 산출하였다. 첫째,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과 아드와이따 베단따 철학의 담론은 불가피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구조적 유사성과 내용적 유사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둘째, 이러한 유사성들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을 확장하고 아드와이따 베단따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셋째,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형이상학과 실천론은 다른 그 어떤 모형보다도 더 적합하다. 예컨대, 현상의 상대적 실재성과 파기 가능성은 가상현실의 상대적 현실성과 지양 가능성과 정확하게 대응한다. 넷째, 이 연구의 결과를 더욱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의 개별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모형을 추가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이 연구의 결과는 사회적·교육적·학문적으로 다음과 같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하는 구조와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가상현실에 대한 집착이 낳는 폐해를 사회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 아드와이따 베단따 학파의 ‘실재와 현상’, ‘실재적 자아와 현상적 자아’라는 구조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양자의 위계와 경계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또한 현실과 가상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가상적 욕망을 생산하고 재생산한다는 사실은 양자 사이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안한다. 결국 이 연구는 가상적 욕망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둘째, 가상현실에 대한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모형을 통해 가상현실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모형적 이해를 교육적으로 확산할 수 있다. 예컨대, 실재적 자아 위에 현상적 자아가 가탁해 있다고 하는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자아관은 산스크리트어인 ‘아바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다. 또한 환영설과 가현설을 기반으로 하는 이 학파의 체계는 가상현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자료일 것이다. 셋째, 가상현실에 관한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초석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까지 가상현실에 관한 연구는 주로 서구 철학이나 사회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인도철학의 고전적 체계를 통해 가상현실을 탐색함으로써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의 확대에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ndex terms
아드와이따 베단따, 샹까라, 환영설, 가현설, 실재, 브라흐만, 아뜨만, 현상, 비실재, 세계, 의사설, 반사설, 제한설, 마야 닷 컴, 허구, 현실, 가상현실, 분별적 인식, 무지, 가탁, 언설불가, 상대적 현실성, 파기 가능성, 자아, 실재적 자아, 현상적 자아, 현실의 자아, 가상현실의 자아, 고통, 집착, 욕망, 가상적 욕망, 해소, 속박, 자유

가탁 假託 뜻 adhyāsa

가탁 뜻:  [국어 사전]

가탁의 의미
1 가탁 假託 : 거짓 핑계를 댐.
2 가탁 假託 : 어떤 사물을 빌려 감정이나 사상 따위를 표현하는 일.
3 가탁 假託 : 어떤 일을 그 일과 무관한 다른 대상과 관련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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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탁(假託, adhyāsa, viparyāsa) 




인도사상의 정수, 베단타 철학

[펌] 인도사상의 정수, 베단타 철학 : 네이버 블로그
종합요가
[펌] 인도사상의 정수, 베단타 철학

- 정통사상의 두 갈래



육파철학 가운데 니야야, 바이셰쉬카와, 상키야, 요가는 단지 명목적인 의미에서 정통사상일 뿐이다. 다시 말하여, 이 네 학파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정통사상이 아니라, 단지 베다에 반(反)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정통사상의 범주에 들 뿐이다. 이들은 베다에 의거하여 세계관을 정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베다를 해석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베다를 자신들의 교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하여, 육파철학 가운데 베다에 직접 의거하는 정통사상은 오직 미망사와 베단타뿐이다. 이 두 학파는 처음부터 정통사상으로 출발했으며, 따라서 처음부터 지극히 종교적인 특성을 보인다. 이에 비하여 니야야, 바이셰쉬카와, 상키야, 요가는 하나의 철학체계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며, 종교와 관련을 지니게 되는 것도 상대적으로 나중의 일이다.



- 두 미망사



넒은 의미의 베다는 만트라(讚歌), 브라흐마나(祭儀書), 아란야카(森林書), 그리고 우파니샤드(奧義書)를 포함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은 제사편이라 불리며, 뒤의 둘은 지식편이라 불린다. 제사편과 지식편은 논리적인 순서에서 전/후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에, 제사편에 근간을 둔 철학을 푸르바 미망사라 하고 지식편에 의거한 철학 전통들을 웃타라 미망사라고 한다. 나중에 웃타라 미망사는 베단타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푸르바 미망사는 간단히 미망사라고 호칭되었다. 이와 같이 육파철학 가운데 베단타와 미망사는 짝을 이루는 두 학파로 인정되지만, 상키야와 요가 혹은 니야야와 바이셰쉬카와의 관계와는 달리 그 둘의 관계는 보완의 관계라기보다는 선후의 관계라고 해야 한다.



- 베단타의 철학사상



미망사는 주로 제사 행위를 다루며 근본적으로 브라흐마나 문헌에 의거하고 있음에 비하여, 베단타는 지식 혹은 통찰에 관심을 지니며, 그것의 교의들은 우파니샤드에 의거한다. 그러나 베단타 또한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미망사의 연구가 그 자체의 철학에 대한 예비 지식이 된다고 본다. 또한 베단타는 미망사에서 확립된 인식방법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체의 철학체계 내에 흡수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망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지닌다.



베단타의 근본 경전은 바다라야나의 <베단타 수트라>(일명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그것은 우파니샤드의 견해들을 아주 간결한 경구 형태로 용의주도하게 종합하고 있다. 가끔 의미가 명쾌하지 못한 구절들도 있으며, 주석의 도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베단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하나의 체계로 통일된 적이 없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베단타 수트라> 자체의 다의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베단타 수트라>는 다른 학파들에서와 동일한 의미에서 근본 경전이 아니다. 베단타 철학은 <베단타 수트라>뿐만 아니라, 그것의 모체가 되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에 그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단타 수트라>의 제1장은 브라흐만과 어떤 경전들의 관계를 확립한다. 브라흐만은 탐구의 목표이며 우주의 원천으로 긍정된다. 제2장은 우파니샤드로부터 도출되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의 일관성을 다루면서, 다른 학파들의 교의들을 비판하고 있다. 제3장은 지식, 숭배, 실천 수행을 통한, 브라흐만의 실현을 위한 수단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제4장은 브라흐만과의 마지막 혼융이 일어날 때까지 영적인 상승의 연속적인 단계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부여한다. 이러한 해석을 확립하기 위하여 인용된 우파니샤드의 구절들 가운데서 <찬도기야 우파니샤드>가 가장 빈번하며, 그 다음으로는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와 <타잇티리야 우파니샤드>이다. 이 우파니샤드들은 비교적 고대에 속하는 우파니샤드들이지만, 바다라야나는 <카타 우파니샤드>와 <슈웨타슈와타라 우파니샤드>도 인용한다.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현존 최초의 주석은 샹카라(8세기)의 것이다. 그러나 베단타 철학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인물은 <만두키야카리카>의 저자인 가우다파다이다. 전통적으로 그는 샹카라의 스승의 스승으로 전해지지만, 샹카라보다 약 3세기 이전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우다파다의 중심교의는 불생설(不生說)이다. 이에 의하면 전체 세계는 단지 가현에 불과하며, 어떤 것도 결코 실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브라흐만 이외의 어떤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전체 세계는 꿈같은 환영이기 때문이다. 가우다파다가 여러 우파니샤드들 중에서 <만두키야 우파니샤드>를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우파니샤드에서 논의되는 아트만에 대한 네 가지 상태들을 주석하면서 본질적으로 각성상태와 몽면상태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자연스럽게 도출하고 있다(<만두키야카리카>ⅱ.4).



<만두키야카리카>의 마지막 장(章)은 가우다파다와 불교의 친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은 앞의 3개 장을 합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길이로 되어 있으며, 때로는 그것이 가우다파다 자신의 주석이 아니라 어떤 불교도의 기술이 가필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나중에 샹카라에 의하여 발전되는 여러 견해들의 단초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가우다파다는 인과의 개념에 대한 비판과 마야의 교의를 통하여 경험의 환영적 본질을 확립한다. 마야라는 말은 베다 시대에는 창조 행위를 의미했으며, 심지어 <베단타 수트라>에도 단지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으며, 여기서도 이 말의 의미는 가우다파다가 부여하는 의미, 즉 세계와 브라흐만의 관계의 설명불가능성 그리고 세계의 환영적 비실체성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남인도 케랄라출신의 브라흐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샹카라는 어떤 이원성도 부정하고 오직 브라흐만을 유일한 실재로 주장하는 불이론(不二論) 베단타의 창시자로 알려진다. 분명히 짧은 생애(전통적으로 788-820)를 통하여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철학적 저술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견해들을 직접 널리 펼치는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의 주저는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바가바드기타>와 다수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했으며, 독자적인 저술로 <우파데샤사하스리>를 썼다.



정통 브라흐민으로서 샹카라는 베다의 권위를 받아들이지만, 베다의 구절들 사이에 외견상 나타나는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해석상의 장치, 즉 진리의 두 차원에 대한 개념을 도입한다. 경험적 실재의 낮은 차원에서 세계는 존재하며, 인격신 이슈와라의 창조적인 주관 하에 상키야의 양식에 따라서 전개된다. 그러나 절대적 실재의 높은 차원에서 전체 세계는 비실재이며, 무지와 관련된 환영이며, 모직 브라흐만만이 실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상 세계의 다양하고 유한한 실체들은 본질적으로 브라흐만, 절대자와 동일하다. 그들의 다수성과 개별성은 무지가 절대자 브라흐만에 가탁(假託)된 결과이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어두컴컴한 헛간에서 새끼줄을 보고 그것을 뱀으로 착각하여 깜짝 놀랄 때, 우리가 새끼줄에 환영적인 뱀을 가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각과 경험은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며, 무(無)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할 때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변의 세계를 지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지각하지만, 우리의 잘못은 그것을 브라흐만과 다른 어떤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여기서 샹카라는 일체는 공(空)이라고 선언하는 중관불교의 부정주의를 피하고자 고심한다. 또한 샹카라는 그의 몇몇 추종자들과는 달리 아비디야의 본질이나 그것의 장소에 대한 정의내림을 피한다. 아마 여기에 내재된 논리적인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하여 그의 제자 수레슈와라는 아비디야가 아트만에 의존하며 아트만에 속한다고 선언하며, 이 문제는 결국 아드와이타가 두 갈래로 분지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샹카라 자신에게 아비디야의 본질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비실재라면 우리는 그것에 속박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실재라면 브라흐만은 유일한 실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샹카라는 또한 설명불가능성의 개념을 인과의 문제에 적용시킨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인들이 전환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결과들은 사실상 가탁된 것이며, 따라서 실재도 아니고 비실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상들은 브라흐만에 대하여 단지 환영적으로 독립적일 뿐이며, 따라서 브라흐만의 본질적인 동일은 개별적인 현상들의 다양함에 의하여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 스러진다 해도 바다의 자기동일성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비유 또한 샹카라의 사상이 단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샹카라는 브라흐만의 유일한 실재를 주장하기 위하여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개아는 실재와 현상의 결합이다. 그것이 아트만 혹은 브라흐만인 한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이지만, 한정되고 유한한 점에서 그것은 현상이다. 이 상황에서 샹카라는 "당신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우파니샤드의 언급을 사용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브라흐만으로서 아트만인 순수 의식을 드러내기 위하여 개별과 초월의 양립불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도달되는그 둘의 동일을 논증하고자 한다.



샹카라는 브라흐만에 대한 어떤 적극적인 언급을 주저한다. 이것은 브라흐만의 절대성에 대한 한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요 저술들에서 적어도 그는 후기 아드와이타의 유명한 공식, 즉 브라흐만은 삿트(有), 치트(意識), 아난다(歡喜)라는 도식적인 기술도 회피된다. 실로 그는 브라흐만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ⅱ.3.6)는 선언에 명백히 동조적이다. 아무런 규정성도 띠지 않는 무속성 브라흐만은 정확히 말하여 아무것도 긍정될 수 없는 존재의 초월 상태이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인 추구의 목표, 해탈이다. 해탈은 참된 지식, 자신과 브라흐만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직관에 도달할 때 성취된다. 이 구원의 지식은 지난 업을 소멸시키며, 생해탈의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샹카라의 절대적 불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베단타 내부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라마누자(12세기)의 제한적 불이론으로 구체화된다. 베단타를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그는 샹카라의 절대자가 우파니샤드나 <베단타 수트라>에서 가르치는 브라흐만과 다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열망에도 부합하지 않는 메마르고 차가운 추상관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주석과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주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베다르타상그라하>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라마누자 베단타의 중심 주제는 샹카라의 가현설(假現說)에 의하여 격하된 인격신 이슈와라의 절대성을 회복하고 세계의 실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정통 바라문철학과 대중적 차원의 박티(信愛)종교를 종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박티를 해탈의 궁극 수단으로 간주하는 라마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격신 이슈와라를 하범(下梵)이라 하고, 그것을 무속성 브라흐만(上梵)의 하위에 두는 샹카라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박티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슈와라를 궁극적 실재로 보지 않는 한, 박티가 해탈의 궁극적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라마누자에게 이슈와라는 곧 유속성 브라흐만이며, 무속성 브라흐만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브라흐만은 무한하며 완전한 속성을 갖추고 있으며, 세계의 동력인이면서 동시에 질료인이다.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점에 대하여 라마누자도 샹카라와 동일한 입장이다. 그러나 샹카라에게 브라흐만은 어떠한 규정성도 띠지 않는 순수한 동일이지만, 라마누자에게 브라흐만은 우리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들의 유기적인 통일이다. 이른바 브라흐만뿐만 아니라 세계와 개아 또한 궁극적으로 실재하며, 이 셋은 순수 무차별적 동일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기적인 통일이라는 의미에서 일원(一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마누자의 일원론은 한정불이론(限定不二論)이라고 불린다.



라마누자는 개아 및 세계와 브라흐만의 유기적인 관계를 몸과 영혼의 관계로 설명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과 세계는 브라흐만의 몸이다. 브라흐만과 세계의 관계는 또한 기체(基體)와 속성, 통제자와 통제받는 자, 주인과 종, 양태를 지니는 자와 양태, 전체와 부분 등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와 같이 여러 범주들의 짝으로 설명되는 브라흐만과 세계의 관계에서 라마누자의 강조는 무엇보다도 브라흐만과 세계의 존재론적 연속성이며, 이것은 결국 개아와 세계가 브라흐만과 마찬가지로 실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샹카라와 라마누자의 차이는 인식의 문제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샹카라는 인식을 고차적인 것과 저차적인 두 종류로 나누고, 고차적 인식에서는 인식자와 인식대상과 인식 작용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라마누자는 인식이란 항상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내포하므로 인식주체나 인식대상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가 없는 경우에는 인식대상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라마누자는 궁극적으로 해탈의 상태에서도 개아의 개별성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샹카라는 개별성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본다. 라마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해탈의 상태에서 개아는 브라흐만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브라흐만적인 존재가 될 뿐이다.



라마누자가 해탈의 수단으로 강조하는 박티는 우파사나(念想)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며, 지적인 색채가 상당히 농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베단타 수트라>에 대한 주석에서 박티 이외에 신에의 절대적인 귀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박티에 이르는 준비단계 혹은 박티와 동일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후대에 이르러 매우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며, 13세기에는 이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라마누자의 추종자들이 남북의 두 종파로 분열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북인도의 바다갈라이종파는 프라팟티를 단지 해탈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으로 보며, 따라서 그것을 선택의 문제로 취급한다. 또한 이들은 마치 새끼 원숭이가 어미 원숭이에 착 달라붙듯이 인간의 노력이 구원의 본질적인 요인이라 하여 `원숭이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방의 텡갈라이종파는 다분히 대중적인 특징을 보이며, 오직 프라팟티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새끼 고양이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입으로 물어 옮기듯이, 인간의 노력 없이도 신은 절대귀의하는 사람을 구원한다는 `고양이 이론'을 주장한다.



라마누자를 분기점으로 베단타는 실재론적인 경향으로 주도되며, 다분히 종파적인 색채를 띠면서 전개된다. 라마누자 이후의 베단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는 우선 마드와(1238-1317)를 들 수 있다. <전철학강요>(全哲學綱要)의 저자로 유명한 그는 라마누자의 베단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원론적(혹은 다원론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베단타 철학을 수립했다. 본질적 불일불이론(不一不異論)을 주장했던 님바르카(14세기)는 후기 베단타 학자들 가운데 라마누자의 사상과 가장 가까운 철학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발라바(1473-1531)의 순수불이일원론이나 차이탄야의 불가사의불이일원론 등을 통하여 라마누자의 유신론적 베단타 사상이 계승된다. 동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차이탄야는 크리슈나-라다숭배의 열광적인 종교운동을 주도하며 박티 종교의 부흥에 큰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