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김시천 제12강 『노자』와 성인 2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2_01.htm

김시천

제12강 『노자』와 성인 2

◆ 왕필이 말하는 성인


▲ 왕필의 성인

계속해서 왕필의 성인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가요. 그동안 우리가 주로 다뤘던 것이 전국시대 맥락을 다루면서 제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정치적인 맥락을 얘기하는 것은 재미없잖아요.

도대체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주, 노자주석에서 말하고 있는 정치적 담론 즉 왕필에 의해서 재해석 되었다기 보다는 해석의 틀 자체를 아주 바꾸어 놓은 정치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출발을 노자 17장에 보면 태상하지유지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죠. 최고의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안다고 해석이 되죠.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왕이 있는가 보다 얘기하는 거죠. 정치적인 무관심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죠. 왕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은 원망할 때뿐이에요. 원망할 일이 없으면 누가 되든 있거나 말거나만 상관이 없고, 있다는 것만 안다는 거예요.

있긴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가 누군지도 알 필요가 없고. 이때가 하상공주에서는 태평이라는 말로 표시하는데 왕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5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에 대해서 왕필은 뭐라고 하는지 봅시다.

‘태상’(太上)이란 『주역』에서 말하는 ‘대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상이란 대인이고, 이 대인은 주역의 대인입니다. 노자 원문 왕필 번역서를 갖고 계신 분들 책 속에는 대인이라는 용어만 나와 있는데, 이 용어는 맹자와 주역에 특히 많이 나오는 용어이고 도가에서는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대인이 구오의 자리인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태상’이라 한 것이다.

이 맥락을 볼 때 반드시 주역의 대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틀린 해석이에요.

대인이 윗자리에 있을 때에는 무위의 일에 거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그에 의해 지어지면서도 처음이 되려 하지 않기에 아래에서는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알뿐이다. 이는 곧 위를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 있다는 것만 알아요. 그가 내리는 명령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리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뿐이에요. 왕필에 따르면 자상치일이라고 얘기도 합니다. 만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질서를 이뤄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왕필의 체계 속에서는 자연이라는 말은 상당히 고원한 자발적인 질서체계가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전제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의 마음, 자연, 아까 말했던 리서의 감정, 서의 감정이 인간 누구에게나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존중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윗사람을 모시고.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유가의 정치 시스템의 기본적인 요체인데 왕필은 거기에 낙관적으로 얘기하는 거죠.


▲ 왕필에게 있어서 주역의 괘의 의미

여기서 중요한 것, 이게 얼마나 재미난 일이냐면. 거기서 대인이라고 얘기했지 않습니까. 대인이라는 것이 주역이 건괘 아시죠. 첫 번째 괘입니다. 여기에 여기를 구이라고 하고 여기를 구오라고 합니다.

아래에서부터 차례 쌓아 올라가는 거거든요. 유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괘가 뭐냐 하면, 왕필도 괘를 내서 주석을 굉장히 길게 붙이기도 했는데요. 복괘(復卦), 암울한 기운이에요. 즉 이 때 말하는 음이라는 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란 뜻입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를 계절에 비유하면 이제 막 새싹이 막 돋아나는 상태가 복이에요. 복이 우주의 가장 원초적인 차원의 모습이에요. 시간적인 차원의 모습이 아니라, 논리적인 차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양의 기운이 다시 돋아나는 모습을 상징해요. 그래서 이 복괘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이 복괘를 쓰면서 이 앞의 괘는 박괘라고 해서 꼭대기에 양효가 있고 이거는 소인들을 상징하는 거거든요. 소인들의 기세가 무성해서 군자나 대인이 끝에 몰린 거예요. 그래서 이때는 조심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다시 돌아서 왔다라고 해서 복괘라는 거예요. 동아시아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존재론적으로 ‘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인 ‘절대’와 같은 개념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바로 이런 용어들에 익숙한 왕필에게 있어서 괘는 시(始)를 상징하는 거고 그래서 당시의 지식인들 왕필이 활동했던 시대에 연호가 정시(正始)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왕필에게는 복이라는 하는 것, 당시의 시대를 앞서가는 최고의 문화적 코드라고 할까요.

대한민국 현재에서는 딱 한 마디로 얘기되지 않습니까. ‘경제’ 경제 얘기가 나와서 한 말씀 드리는데, 맹자에 나오는 얘기잖아요. 누구나 다 아는 얘기요. 왕이 맹자를 만났어요. 노인이 먼 길을 마다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필이면 왜 리를 말하십니까 하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면서 왕께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할꼬 그러면 제우들이 앉아서 제 가족과 제 목으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규모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돼요.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노자에 나오는 이 말을 읽어보세요. 정치적인 맥락에서 말한다면 자기의 이름이 백성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지 않는 만큼 좋은 거예요. 많이 오르내리는 만큼 나쁜 사람이 된다는 거죠.

왕필을 보세요. 태상이라고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무위에 일에 거예요. 진중권씨가 대통령에게 가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해라. “잠 좀 주무십시오.” 무위하란 얘기 아닙니까. 함석헌 선생이 당시의 독재, 군사정권에게 무위하라. 당신들이 바쁘면 바쁠수록 피곤하다.

바로 무위의 개념을 알린 사람이 바로 함석헌의 목소리고, 이 맥락에서 온 겁니다. 제발 잠 좀 주무십시오. 이게 바로 함석헌 선생님 강의의 힘이었어요. 지금 제가 얘기하는 방식이 함석헌 선생님은 몸으로 실천하기까지 했던 분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더 크죠.

제가 유머러스하게 하는 데도 공감이 오잖아요. 자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좋다는 거예요. 대통령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록 좋습니다. 그럼 누가 오르내려야 되느냐. 실무자가 오르내려야 옳은 거죠.

왜, 그것은 바로 유위하는 자가 있어야만 무위하는 자가 무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위의 일에 있어야 할 사람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는 얘기는 그가 무위하지 않고 유위하고 있다는 얘기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큰 것을 놓치기 가장 쉽죠.

심지어 보수언론에서도 ‘큰 것을 놓치고 있다.’고 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대인이라는 것은 왕필의 무게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태상이라고 했잖습니까. 윗자리에 있다. 두 사람이 나와요.

그래서 대인이 있는데, 용의 덕을 갖춘 이가 인간 세상에 몸을 드러냈어요. 하지만 그는 아직 무엇을 확 펼칠만한 입장이 못 되죠. 하지만 그는 발탁이 되야 해요. 그래서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

여기서도 이견대인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 사람은 황제의 자리에 있고 이 사람은 신하의 자리인데 이 사람은 왜 대인을 만나야 합니까. 뜻만 있으면 뭐해요. 발탁이 되야죠. 공자는 끝까지 발탁이 못되고 마을로 돌아갔지 않습니까.

그럼 황제는 자기 혼자 다 하느냐. 천하를 다시 리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백성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머리가 꽉 차 있으면 들어갈 데가 없으니까 이상한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러면 머리를 비우고 백성의 말을 잘 알아듣는 용의 덕을 타고난 이를 발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대인입니다. 그래서 구이와 구오가 서로 만날 때, ‘물이 고기가 만났다.’라고 하는 거죠. 물과 고기의 만남이 낚시의 얘기가 아니라 황제와 재상, 성군현신의 만남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강태공도 낚시하다 만났잖아요. 그 얘기를 한 번 해볼까요.

강태공이 주나라 문왕을 만나가지고 주나라가 뜨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는데, 강태공의 강자가 강족의 수장이란 뜻이에요. 사람의 성이기도 하지만, 강족이라고 해서 반역의 기질이 농후하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해야한다고 해서 특히 은나라의 박해를 처참하게 받았던 부족이다라고 했던 강족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왕이 갇혀 있을 때 밑의 사람들이 가서 접촉을 했겠죠. 괜히 왜 낚시를 합니까. 바늘도 일자를 가지고. 다 아는 얘기지 않습니까. 장자에 나오는 얘깁니다. 내 어저께 아버님을 만났는데 어디에 가면 어떤 분이 있을 것이다. 딱 가보니까 정말 그런 모습의 사람이 있어요.

이러저러한 모습을 만났는데 아 신하들이 그것은 선왕 폐하이십니다. 그렇지 맞지.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어디를 가다보면 현인이 있을 것이니 그를 만나서 써라. 가 봤더니 그가 있어요. 그게 다 뭡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인거죠. 주족 가운데 유력한 사람이 유리에 갇혀 있을 때 구해 준 거에요.

은나라를 압박하고 해가지고. 그러면 거기에 대한 정치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협의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설득을 해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약속을 한 거죠. 어느 날 어디쯤을 지날 터이니 낚시를 하고 있어라. 낚시 바늘도 구부러진 게 아니라 일자를 사용하고 있으면, 저 노인이 기운이 이상하다. 가서 물어봐라.

이 바늘로 낚시가 됩니까. 되죠. 사람 잡는 낚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거죠. 어젯밤에 꿈에 선왕을 뵈었는데 라고 하면 주변에서 좍 누르는 거죠.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요식행위하는 거죠. 그러나 그게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뭐냐.

그러한 만남, 그런 방식의 협약에 대해서 뜻이 모여졌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 말하는 정무수석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정치라는 것이 사실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군주 자리의 어려움

내가 아무리 뛰어난 용이라도, 군주의 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발탁이 돼서 그 자리에 가지 못하면 있으나 마나죠. 내가 왕이라도 할지라도 제대로 된 민심을 읽고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내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왜 황제가 외척세력의 발호를 금지하려고 했느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같이 살 맞대고 자는 사람이잖아요. 그 사랑스러운 부인의 말이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때문에 공정한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적다라고 볼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황제의 자리에 들어가면 바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습니까. 현대사회국가에서, 과거에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면 모든 사안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앞에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판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인, 대인은 어떤 존재냐. 거기 보면 문헌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함께 한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주는 즉 태상이라는 존재는 백성을 위에서 보듬어 감싸주고 아래에서 민생을 오롯이 해결해주는 그런 문제.

맹자식으로 얘기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항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때에만 성인이 된다는 거죠. 맹자의 논리에서 그렇지 못할 때는 일개의 필부가 된다고 바로 가잖습니까. 왕필의 논리에서는 바로 그와 같은 논리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

◆ 부상현(不尙賢)에 관한 하상공과 왕필의 해석


▲ 부상현에 관한 하상공과 왕필의 해석

여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무슨 얘기냐면 과거 봉건사회에서 인재등용이랑 연관되는 거예요. 그런데 왕필은 이제 이 군주의 덕을 가진 사람이 왕의 자리에 있으면 태상이 되는 거고 신하의 자리에 있으면 재상이 될 수 있다의 논리를 펴요.

그런데 도대체 신하, 혹은 현신이라는 이 ‘현(賢)’ 이 문제에 대해서 노자에서 강력한 발언이 나옵니다. 부상현이란 표현이 나오죠. 노자 3장을 보면, 6쪽입니다.

보면 성인의 다스림이 어떻게 다른가. 조금 전에 했던 얘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不尙賢, 使民不爭 : 不貴難得之貨
부상현, 사민부쟁 ; 불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 ;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사민불위도 ;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어질다하는 사람을 상상하지 말라.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게 하지 말라. 어찌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여 백성들이 도둑이 되게끔 하지 말라. 욕심날만한 물건들을 보이게 하지 말라.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혼란스럽게 하지 말지어다.

다 조언입니다. 군주에게 제안하는. 여기에 대해서 하상공이란 분은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제안하는. 여기에 대해서 하상공이란 분은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합니다.


『河上公章句』 ‘어진 사람’이란 세속에서 말하는 어진 사람으로 언변이 좋고 문장에 능하며 도에서 떠나 권세를 부리고 참된 바탕에서 벗어나 잘 꾸미는 사람이다.

이거는 언제의 상황이냐. 한나라 초기의 상황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당시의 유가는 대접받지 못했어요. 왜냐면 유학은 의리와 형식을 굉장히 많이 따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야 잘 하죠. 하지만 법가에서는 정책중심으로 몰고, 노자에서는 말을 많이 하면 막히기 십상이니 말하지 말라고 하죠.

“숭상하지 말라”는 것은 후한 녹봉과 높은 관작으로 존귀하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 당시 한초의 얘기는 유가 특히 예학가들을 상대로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한고조 때 한 때 딱 발탁되어서 특혜를 받았어요. 원회라고 하는 천 황제가 정월 초하룻날에 자기가 처음으로 황제가 된 것이라고 하는 뿌듯함에 의례를 했어요. 이 얘기를 전에 했었죠? 안 했다면 시간이 나면 하죠.

그래서 한고조 같은 경우는 요즘 티비에서 초한지 무협 드라마를 인천에서 하는데, 초한지를 한 번 보세요. 유방이 되게 방정맞아요. 그렇게 무게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거든요. 항우는 무게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전략과 전술에 능한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이 유방이라는 사람이 원래 소금장수를 보호하던 호위무사출신으로써 협출신에요. 그래서 글을 못 읽어요. 무식한 사람이죠. 그래서 말 잘하고 문장 짓는 사람을 보면 어떻겠어요. 거시기 한 거라고 얘기해야겠죠. 거시기 하니까 유학자들이 또 잔소리만 해요.

‘그것은 형식과 예의에 어긋납니다.’ 귀찮죠. 그래서 유학자들이 대접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원해율이라고 하는 황제다운 풍모와 의식을 크게 함으로써 내가 비로소 황제가 된 것 같구나. 하고 나서 유학자들이 대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은 높게 대우하지 말라. 높은 벼슬과 녹봉을 주지 말라는 얘기죠. 즉 원문에서, ‘부상현’이라는 말을 하상공주는 그대로 번역했죠. 그런데 본래 이 상현이라는 말은 묵자의 한 편명입니다. 거기에는 상현을 왜 주장하느냐. 7페이지에 있는 글을 읽어보죠.

옛 성왕들이 정치를 할 때에는 덕행에 따라 그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하고 지혜로운 이를 숭상하였으니, 비록 농사일이나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라해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여 높은 작위를 주어 높이고 후한 녹을 주어 중히 여기며 적절한 일에 임용하면서 영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러면서 ‘작위가 높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고, 녹봉이 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고, 정령을 내릴 권한이 주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삼성’에 취직하려고 하는 이유는 가장 연봉이 높기 때문이죠. 즉 관리가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높은 녹봉,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다.’라는 소리가 나야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삼대까지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부가 해결 되야 되는 거죠.

즉 ‘상현론’이라는 것은 그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먹힐 수 있는 시대. 이것은 변법운동의 핵심이기도 해요. 단 다른 것은 귀족들은 자신의 봉지가 이미 있기 때문에 왕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왕하고 겨룰 수도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들은 왕이 하사하는 녹봉에 의존하기 때문에 말 안들으면 자를 수 있다. 즉 노동 유연성이 개입된 방식의 신하예요. 따라서 충성도가 훨씬 강합니다. 한나라때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요. 그래서 그 다음 번 보면,

하물며 지혜롭고 선량한 사(士)는 덕행이 독실하고 언변에 능하며 도술에 두루 밝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진실로 국가의 보배요 사직의 보필자이다. 반드시 또한 이들을 부귀하게 해 주고 공경하며 영예롭게 해 준 후에야 나라에 선량한 사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때의 ‘상현론’이라는 것은 능력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 특히 묵자의 편자 속에 들어있는 표현처럼 농사직이나 기술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할 지라도, 이 사람들은 묵가적인 관점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거죠. 이런 현량들을 발탁해서 벼슬에 봉직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군현 제도 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하상공 주석에서는 이 상현이 말잘하고 잘 꾸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달라져 있죠. 당시 어떤 세력을 염두 해 두고 비하하는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아니면 실제로 보면 법가나 도가나 유가 이런 학문의 배우 경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쟁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쉽겠죠.

그런데 왕필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현이랑 재능 있는 사람이다. 왕필이 말하는 재능(才能)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탁월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중에 38장인가 39장에서 보면 ‘힘 있는 사람은 무업에 종사하게 하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게 하고…’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재능들을 포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덕적 탁월성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지난번에 그런 얘기를 했었죠. 조조가 했던 칙서에 보면, 唯才是擧(유재시거), 오로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라. 그러면 내가 쓰겠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능에 따라서 인물들을 발탁했죠. 심지어 뒤가 구렸던 자기 친구라든가 그런 사람들도 재능이 있다면, 저 쪽 정권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재능이 있다면 썼다는 거죠. 그래서 왕필이 말하는 방식의 현에 대한 방식은 조위정권의 정책과 방향이 맞는 발언입니다.

받든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귀히 여긴다는 것은 칭호를 높이는 것이다. 즉 높은 벼슬과 그에 맞는 작위를 주는 것을 얘기하는 거죠.

오로지 재능이 있는 사람을 [그에 합당한 직책에] 임용한다면 숭상은 해서 무얼 하겠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관작이] 주어진다면 어찌 세상에서 말하는 현(賢)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즉 여기서 말하는 현(賢)은 평판을 얘기하는 거죠. 자기가 말하는 재능과 현, 평판을 통해서 과거에 올라가는 것이 구품중정제라고 얘기했죠. 지역 사회에서의 세력이 평판의 정도가 되었다는 거죠.

이른바 ‘현’을 받들고 이름을 떨치게 하는 것은 영예가 그 맡겨진 직책에 비해 지나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면 늘 학교에서 서로 헐뜯을 뿐이다.

이런 표현들은 바로 한나라 후한시대에 태양, 앞으로 향후 관리로써 될 사람들을 태학에 모아놓고 오경박사들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열하게 할 학교 교육기관이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현이라는 것은 ‘나 잘난 놈이오.’라는 뜻이잖습니까.

그럼 저 사람을 내가 잘났다고 칭찬하면 내가 못난 사람이 되니까 서로 헐뜯을수록 자기의 위치가 올라가니까 헐뜯는 방법에도 참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말 모자란 사람들은 남을 헐뜯어요. 그런데 남을 다 칭찬하고 그 방식이 절대 맞다 그럼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을 다 알아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칭찬을 잘 해야 되요. 단점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적거든요. 그런 사람이 사실은 군자, 대인이 돼야 하는 건데.

보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 쓰임새(用)보다 지나치면 탐욕스러운 자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어, 벽을 뚫고 비밀금고를 찾아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도둑질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 낼만 한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 얘기는 지금 제도를 보건데 능력이 있는 그 분야에 합당한 사람이 그 자리에 발탁이 그때 그때 되면 다 알잖아요. 쟤가 나보다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보면 압니다. 그런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고 하면,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시대가 아무리 바뀐다고 하더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래서 왕필은 그 분야와 직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가면 서로 경쟁할 일들이 없어진다는 얘깁니다. 그럼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란 얘깁니까?

사실은 묵자가 주장했던 내용은 그냥 가는 거예요. 다만 어떤 사람을 앉히느냐, 그 차원의 것만 왕필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거죠. 따라서 왕필의 논리는 ‘부상현’이라는 논리를 반박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자의 원문에 유배된 방식으로 해석 하고 있어요. 동조할 수 없단 얘기죠.

왕필이 말하는 인재등용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는, 지난번에 무위라고 얘기했었죠.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고 그에 맞는 적재적소에 그를 배치하는 것. 이것은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황제의 자리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선양론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 왕은 피리고,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다

그럼 대체 대인론과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 10쪽을 보면 해결이 됩니다. 10쪽 박스의 5장을 보면 ‘성인은 백성을 추구((芻狗: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짚으로 만든 개 인형)처럼 여긴다.’ 풀무귀유를 하면서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거기에 왕필은 뭐라고 해석 하냐면,

[군주가]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 맡긴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결코 없을 것이다.

기기인물, 이때 기라는 것은 내 몸을 얘기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 나의 고집을 버리고 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 이고, 이때 ‘리’자는 다스릴 리(理자)입니다.

[그러나] 만약 피리가 소리를 내고자 하는 뜻을 가진다면 ‘피리 부는 자’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가 없을 것이다.(棄己任物, 則莫不理.  則不足以共吹者之求也.)

이 구절의 노자의 맥락이나 하상공주의 맥락이나 같은 초점을 맞추죠. 허위불굴이죠. 풀무는 뭔지 아시죠.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걸로 주름이 접혀 있어서 접었다 폈다 하면 공기가 밀려 나가는 게 풀무잖습니까. 석탄 있을 때, 옛날에 집에서 쌀겨를 많이 뗄 때 바람에 빙빙 돌리게 하는 게 있었죠. 그런 것도 풀무의 일종인데.

이 풀무의 작용이, 안이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오는 모습을 비유하면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것이 ‘기’죠. 이를 은유를 드는데, 왕필은 이 속에 있는 탁약을 피리로 바꾸면서 탁약유의어위성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피리 그 자체가 만약 어떤 소리를 내야 되겠다.’ 라는 것에 관해서 뜻을 가지게 된다면 부족이공취자지구(不足以共吹者之求). 달리 말하면, 그 피리를 부는 자의 요구에 부응(공) 할 수가 없다. 함께 할 수가 없다. 이 뜻이에요.

자 이 얘기는 재미나게 읽어 봐야 돼요. 유학자들 글이 갖고 있는 매력인데. 풀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지의 비유라고 했죠. 아까 제왕적 사유에서 본다면 천지에 대한 표현은 제왕 자체에 대한 은유고, 제왕에 대한 이야기는 천지의 질서와 동격이라고 했었죠.

우주의 모습이 바로 제왕의 신체와 동격이니까. 그러니까 풀무도 제왕도 똑같은 거예요. 그 피리를 부는 사람이 있고, 피리가 있어요. 달리 말하면 피리가 제왕이에요. 갑자기 송창식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이 속에 숨어있는 논리는 ‘제왕은 피리요. 나는 피리를 부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상이죠. 그러니까 맹자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군주와 신하 사이라도 의가 맞지 않으면 떠난다.

그리고 신하는 군주를 위해서 일하지만, 군주가 신하에 대한 대접이 적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군주가 신하를 모시는 것이지, 신하가 군주를 모신다는 것은 맹자의 논리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천하’, ‘천지’라는 것을 하나의 피리, 그 피리가 곧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달리 말하면 거꾸로 가는 거예요. 한비자가 제시하는 것은 만물, 만백성이죠. 만물은 자체적인 신료들이 있어요.

한비자의 논리에 따르면 ‘딱 한 놈만 조져라.’ 라고 얘기를 해요. 예전에 주유소 습격사건 보셨죠. 거기서 보면, 무대포. “나는 여럿이 싸울 때, 무조건 한 놈만 조져.” 그럼 ‘그 놈’이 내가 안 되기 위해서라도 절게 만들잖아요. 그 논리가 참 무서운 건데 무서운 건 그 ‘한놈’이 누구냐.

딱 한 사람이 있다면, 얘도 세 명, 얘도 세 명. 열 사람을 관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딱 세 명만 관리하기는 편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려가면 행정 조직의 원형이잖습니까.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모델이라고 할 때. 그러면 제일 위에 있는 군주는 한 사람만 집중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내려가서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것이 바로 한비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모델로 이른바 관료제 모델이라는 것이 득세하게 되는데요. 유학자들은 이 논리를 한 술 더 떠서, 자신은 제왕 위에 있어요. 이런 방식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자신은 벗어나 있는 거예요.

왜 의가 맞으면 있고, 안 맞으면 떠나는 거니까. 그러면 이 꼭대기에 있는 제왕을 하나의 피리처럼 여기고 연주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장자의 함지지락어 이래가지고 천지 대자연의 온갖 구멍에서 철뢰 지뢰에서 소리들이 나와 연주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통하는 정신입니다.

거기서는 ‘그러한 소리를 내는 존재가 누구일까?’로 끝나면서 제왕의 존재에 무게를 둬요. 왜냐면 당시에는 여러 세력이 활보하는 난세였기 때문에 제왕의 출현이라는 것은 천하통일이라는 대업,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국의 소리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왕필과 같은, 이미 한나라라고 하는 커다란 천하를 통일 해 본 경험을 갖고 있는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달라요. 더군다나 황제 한 사람을 개변(改變)시킴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유가의 의식이고, 그래서 주공을 꿈꾸는 겁니다.

공자가 주공을 꿈꾸는 이유는 바로 그겁니다. 제가 처음 인터넷에 에세이로 썼던 글 가운데 하난데, 이 구절을 상대로 해서 유가 정치론에 성군현신론을 한 마디로 하면, 송창식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다.

그리고 왕필의 이 속에 있는 이야기는 그와 같은 정치적 이념을 제안하고 있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지론, 풀무 얘기하다가 갑자기 이런 식의 얘기가 나오느냐는 거죠. 그래서 지식인들의 모델이 참 재밌어요.

그러면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뭐냐. 제왕의 통치에서는 제왕이 마음을 비운다. 홀연한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받고 있는 신하들의 보고 속에 있는 12곡직, 옳고 그름, 잘못된 것, 허위 보고를 가려낼 줄 아는 냉철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비우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수양의 내용은 그냥 비워내는 겁니다. 대신에 그냥 듣는 거예요. 백성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백성의 마음이 나에게 채워지는 거죠. 그래서 뜻(意)이라는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요.

민의를 듣는 것, 이게 바로 심이지 않습니까. 그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소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전에 한번 언어이론 얘기하면서 했었죠. 백성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소고기 30개월 이상 월령된 것 수입하지 말라.’고 하면 백성들이, 범문정이라고 하는 송대 개혁정치가, 제가 멋있다고 했던, 유학자들이 그런 멋있는 말을 많이 해요. 더군다나 저처럼 강의실에서 하는 게 아니라.

만약에 지금 실제 국무총리에 있는 사람이, ‘온 천하 백성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온 천하 백성들이 다 즐거워한 연후에야 내가 즐거워하겠다.’ 하면서 개혁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멋있다고 박수가 나올 만하죠.

그런 건 통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당나라 때 시를 통해서 관리를 선발 할 때,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의 뜻, 그런 방식의 문장은 아무나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천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되죠.

뭐 조금 글 잘 쓰는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평소 행동거지가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하겠죠. 그럴만한 문장을 지을 사람이 그런 문장을 지으니까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거죠.

그런 것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문’의 힘입니다. 문위제도를 표방하면서 송대 유학자들이 행동했잖습니까. 문장이라는 것은 ‘도’를 실어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는 나의 , 공자의 ‘도’다.

물론 그런 제도적인 차원의 것, 다른 차원의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런 비슷한 부분은 똑같이 얘기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래서 이와 같은 시각이 가장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11쪽에 보시면 두 번째 점 부분 노자 62장 부분에,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둔다”
(故立天子, 置三公)

이라고 하는 노자의 원문에 대해 왕필은
“이것이야 말로 도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라고 해석한 반면에, 하상공장구에서는
“선하지 못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欲使 敎化不善之人)”

라고 얼버무려요. 즉 달리 말하면, 왕필은 삼경을 두어서, 이 때 삼경 체제라고 하는 것은 황제는 무위하고 삼공이 다하는 거예요. 이른바 재상정치죠. 그런데 하상공장구에서는 공정, 공평무사라는 뜻으로 바꿔버려요. 그래서 삼공이라는 제도 시스템을 구성해 버립니다.

즉 제왕이 아닌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왕은 초월적이라면 유가, 왕필이 말하는 왕은 인간계에 자리하고 있는 으뜸, 그가 존귀하고 큰 까닭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왕이란 자리가 존귀하기 때문에 크고 중요한 것이다 라는 논리, 즉 훨씬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한대(漢代)의 유가하고 송대의 유가하고 청대의 유가가 또 다릅니다. 이 사람들의 방식이. 예를 들면 여기까지만 해도 유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군자를 올바르게 보필해서 그가 성군이 되도록 하고 사실은 현신인 내가 다하는 거지만 보좌하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송대, 송명이학으로 들어가면 내가 곧 성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율곡이나 퇴계가 썼던 『성학집요』, 『성학십도』 이런 것은 사대부들이 직접 성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 정조 이산을 그리면서, 정조를 좋게 그리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릴 때, ‘조선은 사대부의 국가’라는 표현이 되게 권모술수로 누그러진 이상한 방식으로 노론의 영수를 그렇게 봤는데요.

(물론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전 그냥 유가적인 논리에 의해서 말한다면, 조선을 사대부의 국가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진보라고 봐야 됩니다.

왕 한 사람의 정치라고 본다면 굉장히 위험 한 거죠. 하지만 그 왕이 실제로 위민을 하려고 할 때, 썩은 벼슬아치들에 의해서 전행당하는 상황이라면 달리 봐야겠지만 적어도 공동 통치체제로 나아간다고 하는 발언으로 볼 때는 좋게 봐야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없었습니다. 불가능하죠.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의 발언이 나왔다. 조선 유학 정신의 위대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현실의 정치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대응 과정을 보면 우리가 비판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액면 100% 다 할 수 없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와 같은 제도의 발전이라고 볼 때는 의미 있는 방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학도 실질적으로 많이 변했고, 그리고 더 커다란 변화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향약 같은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벌이는 것은 ‘자기가 곧 성인이다.’ 라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지역은 내가 다스린다.’는 자치의 이념을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중국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성인이 된다는 의미가, 고대에서는 왕을 성인으로 만들겠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명사대부로 들어가면 ‘내가 곧 성인이다.’라고 바뀌어요. 그랬다가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이미 있었고, 그러면 황제가 무얼 합니까.

내가 살고 있는 내 지역, 그래서 예를 들면 의사로서도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거고. 그리고 이 사람들의 변호의 논리이기도 해요. 워낙 고시의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떨어지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의사가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훈장이 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지역사회로 내려갑니다.

지역 사회 자체를 자기가 부활시킨다는 것이 기본적인 향약의 정신이기도 하죠. 이런 것들이 그 이후의 다양한 해석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유학적 저변의 확대라는 차원으로 관심이 바뀌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인론이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완벽한 인격의 체현의 방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적어도 이 제왕, 1인 체제, 혹은 제왕의 신체 자체가 우주의 질서를 가리키는 제왕학적인 체계의 노자를, 성인론 혹은 왕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것으로 해석사를 뚫어놓은 것이 바로 왕필이었고, 그래서 부분 부분에 관한 해석에서 상당히 재밌는 표현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왕필이 말하는 대인은 궁극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따라서 이것은 공치의 이념이라는 거죠. 어떤 면에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 왜 노자라는 텍스트가 나중에 도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텍스트로 받아 들여 지는 지 설명이 안 됩니다.

특히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어요. 사대부는 황제의 수족이 아니라 황제라는 피리를 연주하는 연주가다. 그래서 공자도 유어에 ‘예의 경지에 노닌다.’ 라는 표현을 쓴 거 아닙니까.

그 때 예를 것은 유괘고, 그 예는 천하의 예를 다스리는 그러한 예입니다.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란 얘깁니다. 자, 질문 있으세요. 그러면 오늘은 이걸로 얘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김시천 제11강 『노자』와 성인 1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1_01.htm

제11강 『노자』와 성인 1

◆ 『노자』가 말하는 성인


▲ 성인의 의미

자, 오늘은 제왕과 대인입니다. 『노자』에 나오는 용어로 하면 당연히 성인을 가리키는 거죠. 성인하면 동아시아에서는 당연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란 뜻입니다. 그리고 성인이라는 말은 성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 시대의 군주가 아니라 실제로 완벽한 인격을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전통 사회에서 성인이란 말은 그대로 군주를 지칭하는 은유로써 쓰입니다.

그러니까 유학자들이 텍스트 속에서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공자는 성인이고 당시 황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성인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당시의 황제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거나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얘기하면 맞아요.

그래서 성인이란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조선 시대에 율곡이라든가 퇴계 이런 분들의 저술의 제목이 『성학집요』,『성학십도』이런 책이죠. 그럼 그 책이 과거 이전에 나와 있던 책들과 뭐가 다르냐.

완벽하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송·명성리학이 갖고 있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유학에서 추종했던, 따르고자 했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왕을 보좌하는 거예요. 오늘 바로 그런 얘기가 나올 텐데. 유학은 기본적으로 올라가 봤자 어디까지입니까. 재상의 자리에요.

공자가 꿈을 꿀 때, 주공을 꿈꿨다라고 하는 것. 주공을 꿈에서 못 뵌 지 오래 되었다고 한탄했던 이유는 뭐냐면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주공이고 실제로 유학적 가치의 체현자는 왕이 아니라 신하에요.

제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에 있는. 공자가 괜히 주공을 꿈꾼 게 아니에요. 이유가 있으니까 꿈 꾼 거죠. 그런데 그것이 당대를 거쳐 가면서 새로운 힘을 받는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 사대부들, 조선조로 따지면 신흥사대부라고 하는 사람들 있죠.

훈구파가 아니라 사림파라고 불리는, 이런 방식과 유사한 방식의 지식인들이 당대에 출현하게 되는데, 언제 출현하게 될까요. 바로 즉천무 휘하에서 대거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중에 우리가 성명 성리학이라고 알고 있는 도학파를 이루게 만드는 성명 유학파들이고 그 무대에서 출현하게 되요.

측천무후가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독재자처럼 회자되지만, 중국의 사학자들은 이런 평가를 해요. 측천무후가 굉장히 가혹한 정치적 탄압을 했지만, 황실의 담벼락을 넘지는 않았다. 즉 황실의 담벼락 안에서는 엄청난 숙청과 정치적 탄압이 있었지만 황실 바깥은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던 시대라고 평가를 하거든요.

측천무후 시대에 지식인들이 대거 성장을 했고, 이들이 나중에 송대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유학 사조를 이루게 되는 지식인들이 거기서 출현합니다. 그 사람들은 실력을 중시했던 사람들이고, 귀족적 배경 보다는 문학적,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대거 득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먼저 하는 까닭은 유학이라고 하는 것은 도학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는 윤리의 틀에서 주로 많이 논의합니다. 하지만 윤리라는 큰 틀, 넓은 의미로 볼 때는 말이 되지만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하나하나의 과목 명칭으로써의 윤리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거죠. 정치 위에 윤리가 있었기 때문에.

자, 개념적인 차이. 개념이라는 것이 아무리 명확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만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지, 외연의 확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해요. 예전에 제가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대학에 처음 올라와서 공부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경찰과 군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법적으로 보면 그렇잖습니까. 군대는 국방부 소속이죠, 경찰은 내무부 소속이란 말이에요. 즉 경찰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법을 훼손하는 자들에게 공권력을 집행하는 대리인일 뿐이죠.

이와 달리 군대라는 조직은 외적, 국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군대가 바깥의 적을 향해서 가는 게 아니라 내부의 시민을 향해서 휘둘러졌다는 것은 경찰이란 얘기죠.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적어도 5·18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경찰과 군대가 구분이 안 되는 국가였다는 거죠. 제가 5·18에 대한 것을 그 두 개를 가지고 생각을 해 봤는데 최근의 경찰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5·18때와) 행동이 참 구분이 되는 게, 시민들하고 몸싸움 하고 부딪치고 하다가 전경 가운데서도 다치는 사람이 생기잖아요. 끌어내가지고, 치료해 주고 보내주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 때 같이 나갔던 분들 머릿속에는 내 친구, 내 형제, 나와 같은 시민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공권력을 집행했던 몸으로 실제로 막았던 졸병들, 그 사람들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바로 성인하고 제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른데, 성인(聖人) 제왕(帝王). 제왕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뭐 다양한 얘기가 많이 있어요. 그 가운데서 제(帝)자와 왕(王)이라는 자는 거의 동류에 속하는데, 점점 두께가 사방이 같다가 점점 위와 아래 두께가 넓어지면서 가운데가 좁아지는 방식으로 제의 상형문자가 갈라진다고 합니다.


▲ 제(帝)라는 상형 문자에 관한 해석

고대의 은·주 시대 즉 상주시대만 하더라도 왕의 지위가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때 이들은 주술적 왕이에요. 즉 왕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보면 하늘이라고 하는 상재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주된 사람들이 정인(貞人)이라고 해서 점치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이 갑골문. 근데 이 정인 집단이라는 것은 이른바 부족장, 씨족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거죠. 그래서 달리 말하면 이게 점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합의 기구에요.

왜냐하면 갑골에다가 금이 가는 것을 보고 해석을 하는데, 이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거든요. 나중에는 이 정인 집단이 해석의 권리를 갖고 있다가 왕이 해석권 자체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형문자의 변천하고도 일치된다고 사학자들은 해석을 해요. 물론 이것은 합의된 해석이라기보다 몇 가지 해석 중에 한 가지를 내가 소개하는 건데, 적어도 역사적 맥락과 상당히 부합하는 거죠. 그래서 제왕이라는 존재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본다면 우주의 주제자란 뜻이에요.

그리고 주나라에 있어서 주대의 세계에 있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의 세계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존재라는 뜻에서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술적 왕, 심지어는 우주적 왕이라고 표현해도 맞습니다. 특히 재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데 제왕이라는 의미가 주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서 한나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맞습니다. 진시황이 제왕이라는 말의 대격이 되는 새로운 용어로써 황제라는 말을 쓰게 되는 까닭하고도 동일한 패턴을 보입니다.

즉 봉건제사회에서 군현제사회로의 변화, 변법이라고 하죠. 이것이 갖고 있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봉건시대만 하더라도 집단 지배체제에요. 그래서 신분제사회였고. 하지만 군현제 사회로 가면 왕의 권력이 개개의 인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체제로 바뀝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을 개별인신지배라고 표현합니다. 즉 개개인의 신체자체까지 국가의 권력이 미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중앙집권화라고 부르고 군현제라고 부릅니다. 군현제를 상징하는 말이 바로 제왕이에요.


▲ 하상공 주석에서 보는 성인의 다스림의 의미

그런데 제왕이라는 말 속에는 또 다른 함축이 들어가 있어요. 하상공주석에서 성인 지치라고 하는 성인의 다스림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치신(治身)과 치국(治國)을 아우르는 거다. 그러면서 황로학적 배경에 있는 수많은 사상가들은 치신에 관련된 논의, 즉 몸속의 기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얘기해요.

예를 들면,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고 전국 시대에 수많은 지식인들을 모아서 포섭했던 직하학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몰려 있는데, 그 중에 순자도 대표적으로 직하학궁의 좨주를 세 번이나 지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죠.

그 가운데 전병, 뭐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전병이라는 사람이 치신과 관련된 논의만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왕이 치국의 도리에 대해서 알려 달라 하니까, 치신의 도리를 잘 이해하면 그 것에 치국의 도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즉 치신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자체가 번역하면 치국이 되고, 치국에 관한 논의는 곧 치신의 논리가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번에 그런 얘기를 했죠. 『황제내경』이라고 하는 책은 실제로는 치신에 대한 책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면 정치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치국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러한 것들을 전부 포괄하는 논의가 이른바 황로학이라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이 말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해석해보세요. 즉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 모든 시도는 제왕 한 사람의 신체에 집중된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노자의 치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재입니다. 독재의 논리를 아름답다고 미화하는 방식의 해석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죠. 적어도 고대인들에게 황권을 수호한다는 것의 의미는 나름대로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자체의 해석이 유학자가 바라보는 해석과 도가에서 바라보는 해석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인이라는 말은 고대에 등장하는 맥락, 특히 예를 들면 김희옥선생이 논어를 강의하면서 성인이라는 말이 문자를 해득하고 있는 특별한 존재, 이른바 샤먼에 가까운 존재로 풀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성(聖)이라는 글자를 명확하게 정의한다라기 보다는 좀 더 멋있는 해석, 이미 김희옥 선생이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꼭 맞는다고 보기 보다는 파자해서 하는 방식이 좋을 때도 있지만, 사실은 의미의 다양한 맥락을 제한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파자를 해보면 밑에 있는 것이 단입니다. 제단이죠. 혹은 치소, 성소. 과거에 치소와 성소는 동일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귀가 있습니다. 누구의 귀겠습니까? 제 귀는 상형문자에 안 나와요.

위대한 인간들의 귀만 나옵니다. 그의 귀가 다른 사람의 입 옆에 있습니다. 귀는 뭐하기 위해 있는 것이죠? 들으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인이라는 존재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불온지교라고 하죠.

처무위지사행불언지교(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물론 그로부터 명령이 나오지만 그로부터 명령이 나오는 까닭은 자신이 하고 무언 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제왕이 되는 겁니다. 즉 들은 얘기를 해소하는 말이 명령으로 나가는 거예요.

어떤 문제 사안이 있다. 현명한 수많은 신하로부터 듣는 거예요. 그러면 회의를 통해서 또 명령해. 나가는 거죠. 이게 바로 성인의 위치입니다. 이러한 성인의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 풍우란이라고 하는 철학사상가가 장자 철학편에 나오는 용어를 받아들여서 내성외왕지도라고 표현한 겁니다.

기본적으로 귀가 막혀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사대문에 들어가면 귀가 막힐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캐비넷이란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외국의 경우, 대기 차기정권주자라고 할 때는 일 년 전 혹은 몇 년 전부터 자기 캐비넷들을 이 차에 걸쳐서 이미 조각을 한 상태에서 뜨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하면서 떠요. 그것도 듣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것도 코드인사니 뭐니 말이 많은데, 적어도 동아시아 성인론에 의하면 이 사람들의 역할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왕 주위에 열 사람의 중요한 신하들이 있다. 그러면 이 열 사람의 열 개의 입은 왕이 들어야 하는 열 개의 방향으로부터의 말을 들어야 하는 자일뿐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뭘 들어야 되느냐.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바로 백성의 소리가 되는 거고. 그래서 맹자에게는 ‘민심’이고 ‘천심’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위민이라는 말의 논리도 그 맥락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실 공자의 텍스트 속에는 위민적 의식이라는 것 보다는 제도적으로 볼 때는 귀족제, 그 다음에 재상 정치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구현 돼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위민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던 것이 맹자 철학인데, 왕필과 같은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한 위민의 의식이 굉장히 깊게 개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왕필이 공자의 철학을 어떤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지, 왜 그에게 제왕이 아니라 성인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나오면서 포개어지고 노자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다루는 이 주제들 때문에 노자의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그나마 유학자들의 귀에 부드러운 이야기로 바뀔 수 있었던 배경을 이룹니다. 왜냐, 바로 재상 정치에 관한 논의가 여기에 나오고, 위진 시대에 특수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1_02.htm

◆ 『노자』의 ‘왕’에 대한 해석


▲ 왕필과 하상공 주석의 차이

그러면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서, 그럼 도대체 이 때 현실의 치자(治者), 지배자로서의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제왕론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이거는 사실 노자 원텍스트의 맥락하고 거의 맞는 텍스트 독해법이라고 했죠.

따라서 노자 자체의 목소리를 훨씬 가깝게 드러내고 있는 목소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와 달리 왕필은 이를 재해석 합니다. 자 거기 노자 24장에 보면,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자.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역 가운데서 커다란 것 네 가지가 있는데, 왕 또한 그 가운데 해당한다. 여기서 나오는 사례에 대한 해석은 하상공과 왕필이 미묘하지 않고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하상공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도가 크다’고 한 것은 하늘과 땅을 두루 감싸서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늘이 크다’고 한 것은 그것이 덮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땅이 크다’고 한 것은 그것이 싣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왕이 크다’고 한 것은 그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팔극(八極)의 영역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 또한 그 가운데 하나에 해당함을 말한다.

자, 여기서 세상에 가장 커다란 것, 가장 위대한 것, 도무지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절대 영역에 속하는 것 네 가지는 도(道), 천(天), 지(地) 그리고 왕(王)까지 해당됩니다. 자 여기서 볼 때 왕은 곧 제왕이고, 제왕은 하늘이나 땅과 동격이지 인간과 같은 격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제왕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늘과 땅을 두루 감싸서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도회된 수사는 전국 말기에서 한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황로학적인 표현이에요. 이런 은유적 표현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맥락을 함축합니다.

왜냐면 그냥 ‘도’하면 애매모호할 수 있잖아요. 그럼 이때 말하는 도가 뭐냐. 지난번에 그런 얘기를 들었죠. 새가 날 수 있는 것은 도로 말미암아서 날 수 있고, 들짐승이 잘 달릴 수 있는 것은 도를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이 때 말미암음이 있다, 어떤 매개자가 있다.

즉 그 존재가 그와 같은 행태를 보일 수 있게 하는 가능한 원리, 뭐 이런 표현은 근대적인 표현으로 애매할 수가 있지만 그게 쉽게 이해되니까요. 즉 ‘도’없이는 그게 보일 수 없다는 가능의 조건으로 늘 언급이 됩니다.

▲ 회남자 편에 등장하는 도의 모습

특히 회남자 첫 번째 편에는 도가 그런 모습으로 묘사가 되는데 그와 똑같이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이 때 도는 어떤 특징을 갖는지 봅시다. 본래 개천설과 혼천설이 이 당시에 우주론으로서 정립이 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팔극’같은 것이 개천설에도 나오고 혼천설에도 나오는데 팔극이라는 표현은 뭐냐면, 천원지방설이 있죠. 개천설에 의하면 이런 방식이에요. 회람자의 어떤 부분을 읽어보면 우주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요.

여기에 끈으로 묶여있어요. 묶여있어서 동서남북 북서, 북동, 남동, 남서 이쪽까지 합쳐서 팔극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묶여 있는 끈을 팔류라고 하고. 그런데 이 설에서는 본래 한대에 설 자체가 이런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것이 좀 발전되면 혼천설로 가면은 이렇게 바뀐다고 해요.

여기는 물입니다. 네 부분이 사해, 그 다음에 여기가 팔십일추, 그리고 여기가 물. 그리고 이 물이 모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아래쪽의 심연이 바로 황천이에요. 그래서 모든 물들이 지하수도 그렇고 모이는 곳이 여기고. 그리고 그 쪽에 부상목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어서 열 개의 태양이 달려 있어서 하루에 하나씩 여기로 왔다가 황천을 통해서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열 개의 태양, 십일신화같은 것도 이 배경에서 나오는 거고. 근데 재미난 거는 이렇게 맞닿아있어요. 그래서 전체의 모습이 꼭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혼천설의 모습은 야마다 게이지라고 하는 일본학자가 재구성한 모습이에요.

이것을 천구라고 하고 이것이 땅이에요. 그리고 여기가 기로 꽉 찬 상황이죠. 자 그럴 때 이 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도’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하늘의 역할을 덮어주는 거고 땅의 역할은 모든 것들을 실어주는 거고 만물은 이 안에서 나오는 거죠.

그리고 이 전체를 감싸서 이것 자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도’에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둘 감싸서 포용하는 것이 없다고 할 때 도가 가장 큰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도가 우주론적인 도로 확장된 모습이 한초에야 성립되는 내용인데 여기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정립된 내용들이 이른바 계속해서 가는 거죠. 중국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인 우주론적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건데 물론 다양한 방식의 변화 모습이 있지만 이런 모습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 우주론적 존재로서의 왕, ‘우주왕(cosmic king)’

여기서 왕이라는 존재는 도, 천, 지와 동일한 우주론적인 존재로 격상되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런 모습은 초월적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왕을 cosmic king, 즉 우주왕이라고 하면 적당한 논제에요.

따라서 회람자라든가 황제내경 같은 텍스트에서, 예를 들어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처럼 두 눈이 있고. 그 신체는 모든 인간의 몸이 아니에요. 바로 제왕의 신체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에게 바람이 불듯이 숨을 쉬고, 피가 흐르고 산과 강이 있듯이 뼈가 있고.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표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있는 동일한 인간의 인체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왕의 신체를 가지고 얘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제왕의 건강을 지키는 것과 천하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동일한 맥락이 성립되는 거죠.

그래서 국가 신체가 유비적으로, 이때 신체는 제왕. 이런 식의 논리는 푸코도 같이 전근대 봉건사회의 공통 보편적인 담론의 특징이라고 얘기한 바도 있죠. 그런데 왕필의 논의로 넘어가보죠.

그런데 왕필은 이에 관해서 이해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요. 2페이지 밑에 있는 박스를 보겠습니다.

천지의 성품을 구현한 인간은 가장 고귀한 존재이다.

자, 도부터 안 나옵니다. 천부터 안 나와요. 누구부터 나옵니까. 인간에 관한 얘기로 나와요. 왕필은, 특히 유가는 철저하게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주를 읽는 방식마저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알게 된 그 무언가를 가지고 우주에 대해서 확장적으로 조정을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방식의 생각이 은·주시대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적인 생각이라고 벤자민 슈왈츠 같은 사람은 얘기하는데요.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우주 전체가 하나의 가족적인 모델로 확장된 의식이 상주시대부터 이미 있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이 유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구현되었다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문헌검색을 해 보면, 도가계열, 황로학계열의 문헌에서는 천지(天地)라는 표현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유가 계열의 문헌 속에서는 천지라는 표현이 극히 드물어요. 거의 안 나와요. 많이 나와 봤자, 천하라는 말부터 출현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천자는 많이 나와요. 그런데 장자에도 그런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지, 천하, 천 이라는 글자가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사실은 장자마저도 당시의 사상계에서 속에서 도가적 담론을 많이 이용했을 뿐이지 유가적인 정신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공자의 계승자가 아니냐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아요.

저도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죠. 하지만 이것이 전국 시대에 반드시 그랬다고 주장할 수 있는 완벽한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존 메이크햄이라고 하는 미국 학자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 장자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 사기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하고 맹자와 순자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장자에서 그려지는 공자의 모습이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모습과 훨씬 더 부합됩니다.

오히려 순자나 맹자, 사기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은 훨씬 더 정치화되고 사회화되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공자의 개인적인 인격, 품격을 드러내는 것은 장자가 아니냐는 재미난 논문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읽어보면서 그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됐는데. 그래서 제가 쓴 논문 제목이, 「장자, 진유가 된 한 사이비의 역사」

장자는 본래는 사이비에요. 후대의 유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인 유가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장자를 빗대가지고 유가를 비판하거든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진정한 유가라고 하는 이상한 은유적 방식으로 이용이 돼요.

그래서 그와 같은 방식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사실은 노장 전통이라고 하는 체계는 그런 방식으로 장자를 해석하고, 뭐라고 해야 하나요. 친근한 방식으로. 적어도 수용적인 방식으로 장자를 읽어내려고 했던 전통이 노장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이 한국에 가장 강하게 살아남아있습니다.

그러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한석범 선생이나 유영범 선생의 해석이 나올 수 있었던 거거든요. 중국이나 일본하고 비교해 보더라도 상당히 다릅니다. 자 계속 읽어보죠.

그리고 여기 ‘왕’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으뜸이란 뜻이다.

왕도 사람이란 뜻이에요 거꾸로 읽으면. 그렇죠? 즉 왕은 결코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는 위격을 갖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더 재밌는 얘기가 맨 마지막에 나와요.

왕은 크게 되고자 하지 않더라도 역시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 가지 큰 것, 즉 도·천·지와 필적할 만하다. 그래서 ‘왕 또한 크다’라고 한 것이다.

사대라고 했는데도 이 사람은 세 가지 큰 것이라고 얘기했죠. 그러면 일차적으로 사대가 아닌 거죠. 달리 말하면 당신은 이제 하늘과 땅과 동격이 아니야. 하지만 일반 우리 사람들하고 똑같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러니까 크다고 해 줄게 이정도의 논의입니다.

‘사대’란 도·천·지·왕을 가리킨다. 대저 어떤 것에 명칭이 있으면,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에 말미암음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말미암음이 있고 난 연후에 그것을 ‘도’라 일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도’는 명칭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큰 것’이다. 이것은 언어 문자로 지칭할 수 없는 무칭의 큼이 아니다. 일컬을 수 없으며, 이름할 수 없는 것을 말하여 노자는 ‘역’(域)이라 한다. 도·천·지·왕 이 네 개가 모두 실제로는 일컬을 수 없는 영역 속에 있는 것이기에 『노자』에서는 ‘역 속에 사대가 있다’라고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군주의 자리에 처하는 것의 큼을 말한 것이다.

자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유가 정신이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제왕론과 유가의 성인론의 차이는 뭐냐. 제왕은 그가 곧 도이고, 존엄한 자예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인은 그가 성인다운 인격을 구현하지 못했을 때 그는 성인이 아닐 수 있어요.

대통령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나 올라가는 자리가 아닐 수가 있다.’ 라는 의식이 들어있는 겁니다. 이런 의식이 개화해 나가면 왕필시대 이후에 왕이 꼼짝하지 못하는 시대로 전개가 되요. 하지만 왕필 당시에는 황제 자리에 대한 상당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왕필에 대해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렸었죠. 조씨, 조위 정권 출현에 상당히 공헌을 했던 집안 출신이고, 왕필 당시만 가도 이미 반역자의 자손이라는 좋지 않은 과오가 있기 때문에, 명문 귀족이지만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권, 기득권을 상실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에요.

나중에 이 사람이 벼슬자리에 나가려고 작업을 꽤 많이 했었는데, 결국 저 쪽 파에서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 바람에 거기에 끼지 못하고 훨씬 말단 관직으로 가요. 그리고 249년에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면서 25살에 요절을 하게 됩니다.

사마씨가 정권을 찬탈 하게 될 때 죽는데, 이 사람이 정치적인 박해에 의해 죽었는지 기록처럼 병사에 의해 죽었는지. 아마도 커다란 좌절로 인한 스트레스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 이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여기에는 몇 가지 미묘한 장치들이 있습니다. 즉 왕이라는 위격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라는 고민이 여기에는 보입니다. 자, 한 대까지만 해도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예를 들면 동중서라는 사람이 왕권을 크게 격상시켜 놓은 것 같지만, 사실 동중서라는 사람에 비해서 당시 이른바 참위에서 얘기하는 황제권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왕권의 부활을 얘기해요. 한 가지 부연하면 전국 시대에 갑자기 신화적인 문헌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초인적, 신과 관련된 용어 들이 마구 쏟아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시에 다양한 곳곳에 할거 하고 있던 제후들이 자기를 천하의 패자, 혹은 천하의 치자로서의 왕의 위치까지 격상시키기 위한 이른바 이데올로기 조작의 운동과 관련이 아니냐.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가장 성공한 신화가 바로 황제 신화라고 합니다.

이런 해석은 중국 신화를 해석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얘기되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춘추시대의 문헌들에 비해서 시경, 서경, 춘추좌전 이런 텍스트들에 비해서 그 후대에 출현하는 텍스트들에 훨씬 고대의 신들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와요. 그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로써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한대도 마찬가지도 황제권의 초월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이 바로 참위사상 같은 것들이 나오죠. 그러한 자리가 이제 이른바 한나라가 망하고 후한시대에 등장하고, 특히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 바로 그것이 금문과 공은서의 논쟁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했죠.

금문에서는 그런 요소가 상당히 강했지만 공은파는 상당히 합리적인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공은파의 후예가 바로 왕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1장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할 때, 지사조용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은 설문에서의 한자에서 분류용어라고 했죠.

그래서 그것이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적인 차원의 논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언어적인 즉 의리적인 차원의 논의로 도에 관한 논의를 바꾸게 된 배경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거기서 말하는 ‘도’는 오경 속에 들어있는 공자의 도를 얼마나 제대로 체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논의의 차원을 바꿨다.

따라서 그 세계 속, 왕필의 세계 속에서 논의 되는 ‘왕’은 의리가 지배되는 세계 속의 왕이에요. 달리 말하면. 도가에서 말하는, 하상공이 말하는 제왕은 천지라고 하는 우주론적인 차원 속에 존재하는 왕입니다. 그러니까 논의 하는 차원 자체가 상당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죠.

그럼 우리들의 시각에서 볼 때 어떤 논의가 훨씬 건전한 것인가. 또 오늘 날 우리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더 큰 것은 어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인 듯싶어요.

이런 얘기를 한 번 더 나아가서 보면, 노자에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 법 지, 지 법 천, 천 법 도, 도 법 자 연.

25장에 나오는 구절을 왕필은 이렇게 해석 합니다.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은 땅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기에 온전하게 편안함을 얻는다. 이것이 곧 ‘땅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땅은 하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기에 온전하게 만물을 다 실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늘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하늘은 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기에 온전하게 만물을 덮을 수 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도를 본받는다’는 것이다. 도는 본래 그러함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래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것은 모난 데에 있으면 모남을 본받고, 둥근에 있으면 둥근 것을 본받는 것이며, 본래 그러함에 어긋남이 없음을 말한다. ‘본래 그러하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데에서, 그 극을 다했을 때 나온 말이다. 지혜를 쓴다는 것은 지혜가 없음에 미칠 수 없고, 구체적 형체는 추상적 이미지에 미칠 수 없고, 추상적 이미지는 ‘무형’에 미칠 수 없다. 격식이 있는 것은 격식이 없는 것에 미칠 수 없다. 『노자』의 이 구절은 차원을 바꾸어가면서 본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는 본래 그러함을 따르기에 하늘은 그로 인하여 도에 말미암고, 땅은 하늘을 본받기에 사람은 그로 인하여 땅을 본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차원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체는 사람이요, 사람의 으뜸인 왕이다.


즉,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하는 전체가 바로 인간의 세계 속에 의리라는 자원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세계 대한 자연철학적인 천명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질서의 세계에요. 의리의 세계이고.

의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여기서 왕은 바로 그러한 의리를 천지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천지 안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의리의 상징으로써 왕이 있다는 뜻이고 그 왕은 자연의 도리를 적극적으로 본받고 참여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왕필은 이와 같은 방식의 포섭을 바로 주역의 논리, 대인의 논리로 바꿔가면서 왕필이 말하는 성인은 왕이지만 주역에 나오는 대인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역에 나오는 대인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왕필이라는 사람이 꿈꿨던 정치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갑자기 이 부분을 읽었으니까 도대체 제가 말하는 이유가 바로 처리가 안 될 거예요. 왕필이 제일 처음에 『노자』의 주석을 하고, 그 다음에 『주역』에 주석을 하고 마지막 주석을 했던 텍스트가 『논어』입니다.

『논어』에 대해서 『논어석의』, 즉 논어 중에서 가장 어렵고 의심되는, 회의적인 부분들을 풀이해 본다는 뜻의 책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공자가 이런 말을 해요. “나의 도는 일지관지했다.” 라는 표현을 쓰죠. 그리고 공자가 나가니까 증자가 “충서(忠恕)일 뿐입니다.” 라고 하면서 충서로 해석을 하죠.

여기서 한 가지 미묘한 게 있어요. 왕필 시대에는 충(忠)자를 쓸 수가 없다고 했죠. 왜그랬냐. 조위정권이 강제로 헌하게 했기 때문에, 선양. 헌재가 왜 헌재라고 그랬죠. 자신의 황제의 자리를 조비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것이 시호가 헌재인 까닭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조비 입장에서 보면 물론 한나라에서 벼슬 안하고 위에서 벼슬을 했죠. 조조에 뜻에 따라. 조조는 한나라의 신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받으면 반역자가 되기 때문에 정치적 정통성을 유지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자신의 자식에게 승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한 겁니다. 가동하는 가운데 프로그램도 바꾸고.

그런데 조비는 억지로 협박해서 선양을 받았죠. 그리고나서,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그의 치세가 한나라랑 연속됐지 않습니까. 위나라, 그 뒤를 이은 진나라에서는 충을 쓸 수 없어요. 황제가 불충한 자인데 누구에게 충을 요구합니까.

그래서 만적이나 해강 같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때 죄명이 ‘불효(不孝)’죄에요. 그리고 이 당시에 효경 같은 텍스트가 엄청나게 권장 된 거죠. 우리는 효경하면 ‘부모님 모시기 위한...’ 이런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텍스트라는 거죠.

물론 그 내용 자체에 의미 있는 당시의 문화적인 부분들이 나타나 있고, 계승할만한 것들이 많긴 하지만, 그런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읽고 권장하느냐의 논리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맥락과 직결된다는 거죠.

자 그런데 왕필은 일이관지를 해석할 때, (증자의) 충서라는 부분을 빼요. 그래서 서(恕)가지고만 얘기해요. 이거는 지난번에 정해인간학이라는 부분을 말씀드리면서 얘기했죠. 이 서라고 하는 것이 공자가 말한 가장 원리적인 우주의 마음이라고 왕필은 해석합니다.


▲ 리서(理恕)에 관한 해석

우주가 돌아가는 마음이 바로 서(恕)에요. 이 서는 달리 말하면 자연(自然)입니다. 그리고 이 서가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자효(慈孝)’예요. 왕필이 해석한 부분에서 드러는 용어에요. 이 자효를 자연이라고 해석합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길러주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발로이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보답하고 부모를 모시게 되는 효는 자연스러운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왕필에게는 효제, 자효는 자연의 영역에 포함된 거고 자연의 기재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건데 이 마음이 우주의 정신이고, 인간의 이(理)에 해당하는 겁니다. 인간의 궁극적 리라기 보다는 ‘자연 지리’라고 했죠. 왕필 속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라는 자연지리라는 말이 왕필에게는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느냐, 리서(理恕)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서의 감정이 하나의 궁극적인 원리.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리서라는 표현을 보고 왕필이야 말로 송대 신유학의 개조 혹은 선구자라고까지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고, 저도 거기에 동조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면 이야기가 판이하게 달라져요.

‘본래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것은 모난 데에 있으면 모남을 본받고, 둥근 데에 있으면 둥근 것을 본받는 것이며, 본래 그러함에 어긋남이 없음을 말한다.

이 얘기는 뭐냐면, 순자에게 있어서. 순자는 한 대의 유학을 지배했던 패러다임입니다. 순자라는 사람에게 있어 예(禮)는 모성이에요.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출되는 감정을 어떤 방식의 모양새를 줄 것인가. 그 모양새를 가장 바람직하게 준 것이 바로 예라고 얘기하거든요.

따라서 예라는 것은 인간의 몸속에, 우주의 순리이기도 하고 우주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 몸을 통해서 발현되는 자체를 얼마나 적절하게 당시 상황에 맞춰서 하는가를 좋은 것을 뽑아 형식화한 것, 코드화한 것이 바로 예에요.

그런데 이 예학 자체가 엄격한 규범체제, 심지어는 법적인 체계로 가서 강제성을 띄게 되면 곤란하다. 즉 자연성을 위배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거죠. 이 논의가 왕필의 논리와 비교해 보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아름답다고 보는 제도나 바람직한 사회의 모델이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자효의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그 당시 상황에 적절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할 것인가”가 예의 정신이 되는 거지 예가 있으면 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어진사람, 선량한 사람, 재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리서라는 것, 예가 아니라, 예를 통해서 인간을 평가하고 움직일 것이 아니라 이 리서 그리고 그 실질 내용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자연스러운 감정 자체가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예 자체를 변화케 해야 한다. 이런 방식의 논리는 중국 유학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얘기에요.

리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은 누구 밖에 없겠습니까. 공자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여기에 공자 속에는 없었던 새로운 해석, 즉 자연이 들어가고 자효가 들어가는 것은 심성론의 출현입니다. 즉 맹자적인 심성론의 부안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왕필의 논어에서 유가 해석 속에는 맹학의 대두라고 하는 독특한, 당시에 맹자의 주석서가 처음 출현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전한 시대 후한 시대가 이른바 순자 계열의 유학의 시대였다면 이것이 후한시대를 거치고 고문학이 흥리함에 따라서 맹학의 심성론 적인 접근이 드러나고 왕필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와 같이 드러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갖다가 왕필이 굉장히 노자를 잘 해석했다라고 읽게 되면 왕필의 텍스트가 읽힐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이, 이렇게 보면 왕필이 꿈꿨던 세계는 제가 말씀드렸던 세계랑 비슷해집니다.

이번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맹자에 관련된 책이 나왔는데, 제가 맹자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방식의 것들을 아주 적절한 예와 관계들을 통해서 잘 서술하고 있어서 아주 저도 재밌게 읽고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제왕이라는 것은 아무리 좋은 비유를 쓰다고 해도 어디까지 가능하냐면 태양이에요.

비유하자면. 그러면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은 잡초 뽑아주고 물주는 농부예요. 너무 제가 딱 정의내린 것 같지만. 일단 유학에서 말하는 것은 숫자가 많잖아요. 재상 한 사람이 아니라 재상 한사람을 상주면 신하 전체를 얘기하는 거니까 하지만 제왕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없어요. 나머지 모든 세력은 제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일 뿐이에요.


---



---

김시천 제10강 『노자』와 자연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1.htm

제10강 『노자』와 자연


◆ 자연(自然)에 대한 이해


▲ 자연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말과 부딪치게 되는데, 자연은 지난 번에 무위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소개드렸죠.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자연이라는 말은 거의 99% nature라는 서양 번역어로서 자연이에요. 자연이라는 말이 한자로 쓰면, 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혹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와 같은 말을 80년대부터 계속 얘기해왔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을 원래 맥락대로 제대로 쓰지 못 해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서술적 용법으로만 쓰인다는 말은 100%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진시대 중반부를 겪으면서 자연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게 돼요.

하지만 주로 많이 쓰는 용례는 서술적 용법이 더 강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럼 지금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가까운 말은 뭐냐. 5페이지를 보시면. 저는 이 번역을 자연이라는 말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번역하면 이상하니까 ‘스스로 그러한 세계’라고 표현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본래 맥락의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으니까.

자연계라는 말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인간적 개입을 하더라도 건드릴 수 없이 늘 그러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 자연이에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자연이라는 말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같은 것은 산천초목, 혹은 천지 혹은 만물. 이러한 표현들이 우리가 쓰는 자연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쓰는 자연이라는 표현은, 요즘은 생물학 위상이 높아져서 생물학적 의미의 자연을 생태계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이라는 말은 물질이 운동하고 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서양 사람들도 반드시 그러한 의미로 쓰는 건 아닌데.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다보니까, 굉장히 일의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까 굉장히 단순한 의미로 축소시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말이 노자에서 분명 나옵니다. 특히 두 번. 중요한 구절에서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5페이지 하단을 보시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또 한 번은 아자연이라고 해서 백성들이 나 스스로 그러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뜻의 의미로 자연이란 말이 한 번 더 나온다고 했죠. 그 의미는 제가 저번에 얘기했었습니다.

그럼 오늘 봐야할 것은 바로 이 맥락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하면서 도와 자연이 나오니까 도와 자연이 제일 중요한 용어처럼 생각되시겠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네 개의 문장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법이라는 글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꾸 실체 중심으로 생각하고 텍스트를 분석하다 보니까 거기에 무게가 가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말은 여기서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질서의 모습들은 땅에 있다. 그 땅이 자기 나름대로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그 무언가가 하늘에 있다. 하늘은 도에 있고 도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그 무엇에 관한 별명일 뿐이다‘하는 정도의 함축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땅 없이 살 수 있나요? 없죠. 하늘이 없이 대지의 생명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뒤의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얘기예요.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에요. 자연이라는 표현자체가 나오는 맥락이 바로 그 맥락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법해야 할 그 무엇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구절을 통해서 동아시아에서도 자연법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서구적인 의미의 자연법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속에 법이라고 하는 관념도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연과 조장

그렇다면 이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사실은 뭐냐.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틀린 질문방식이라는 겁니다. 왜냐. 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물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 자연스럽다, 자연하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펌프를 만들어서 그런 짓을 하다보니까 자신들이 개입하면 다 되는 줄 착각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힘의 원리로 설명되잖아요. 자연이란 건 인간이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제가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텍스트들을 검색해 봤어요. 시경이나 서경, 맹자, 주역, 춘추좌전에는 자연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장자에 나오고 여씨춘추에 나오고 노자, 관자, 순자에서 나옵니다.

즉 천지에 관심이 많은 문헌들에 자연이란 표현이 나와요. 특히 여씨춘추에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현상을 자연이라고 서술하기도 하고.

더 중요한 사실이 뭐냐. 이 자연이 자연물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란 말이 서술하는 대상이 인간이더라. 인간과 관련된 문맥에서 자연이란 말이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더라.

이 말은 자연이라는 말이 표현하려고 하는 무엇인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그 무엇과 관련되더라.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속에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실 동아시아에는 문명과 자연의 구분 자체가 없었어요. 근대가 만들어낸 도식입니다. 그리고 구분할 수 없다는 게 요즘 많이 얘기하는 담론이잖아요.
그런데, 6페이지 맨 아래에 새로 시작되는 부분을 보세요. 자연이 사람과 관련되어 나올 때 같이 등장하는 용어들이 무엇이냐. 마음 심(心), 본성 성(性), 참 진(眞), 재주 재라고 하지만 바탕 재(才), 정 정(情)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과 관련되는 중요한 용어와 관련해서 자연이라는 말이 등장하더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특히 장자에서는 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다른 글자와 연동돼서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7페이지를 보면, 자연이라고 하는 말이 함축하는 건 뭐냐. ‘늘 변함이 없는 것’ 상(常 )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계절의 순환이에요.

요즘은 우리가 그걸 깨고 있지 않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여름과 겨울만 있고 봄과 가을이 줄어들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봄, 가을 용 옷을 샀는데 삼 년 째 지금 일주일도 못 입어요. 이 얼마나 커다란 경험이에요. 그런데 이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 한 또 다른 중요한 함축이 들어 있어요.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다는 건 몬순기후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열대지역에서는 없죠. 남극, 북부에는 없다는 거죠. 그냥 여름과 겨울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굉장히 특이해요. 그럼 사계절의 기온 온도차를 촉발시키는 건 뭡니까. 계절풍이잖아요. 우린 바람의 아들이에요. 아 바람의 자녀라고 해야죠.

그래서 나를 길러준 건 99%가 바람이라는 건 굉장히 과학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동아시아 자연철학을 만들어 준 99%가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람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기(氣)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 자연이라는 말의 함축은 ‘늘 변함이 없는 것’ 즉 인간이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자연이라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내가 따라해야 하는, 그래서 인순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나오는데 인순이라는 용어는 장자에도 나오지만, ‘신도’라고 하는 철학자의 텍스트 속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도라는 사람은 철학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연구가 좀 되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인 『신자』라는 책이 있는데 편 이름에 ‘자연’ 편이 있기도 해요.

그 ‘자연’ 편의 중요한 골자 중 하나가 오늘날로 따지면 사회과학적인 이야기예요. 사회적 현상의 합법체적인 그 무엇에 대해서 자연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 자연의 인순, 맞추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신도라는 철학자의 기본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럼 자연이라고 하는 말의 반댓말이 뭔가를 알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자연의 반댓말은 문명이 아니라 ‘조장(助長)’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꼭 정신없는 사람들로 나오죠. 송나라 사람이 어리숙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출신들이, 상인이라는 상 자가 상나라 상(상) 자 잖아요.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에요.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얘기하는데.

어느 날 씨를 뿌려놨는데 안전하니까 아버지가 피곤하다고 해서, 딸이 어떻게 했어요? 쑥, 쑥.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나무야 피곤하니까 누워서 자라” 이 정도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빨리 자라라고 쑥쑥 뽑았더니 다 말라 죽었죠.

자연의 반댓말, 손댈 수 없는 것을 손댄다는 말이 ‘조장’이고. 그래서 잘 자도록 도와준다는 얘긴데, 잘 자라도록 도와주지 말고 내버려둬라. 이게 생태주의자들의 말이잖습니까. 자연의 반대는 조장이라는 거죠.

우리가 조장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잖아요? 조장한다는 게 어떤 거냐. 지금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해서 오존이 자꾸 줄어들잖아요. 그리고 광우병 많이 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거고.

사실 더 중요한 건, 질병과 관련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오히려 빈곤이 더 큰 문제고, 못 먹으면 질병에 걸릴 소지가 많죠.

그 다음 또 하나는, 인구의 밀집도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인간이 풀어야 할 난제 중 첫 번째가 빈곤이었고, 두 번째가 질병 가운데서도 전염성이 아니라 만성질병.

예를 들면, 남자들 요즘 흔히 죽는 질병이 ‘심근경색’, 여성은 ‘우울증’ 이런 게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난제라고 얘기가 되는 만큼.

전염성 질병 가운데 더 끔찍한 게, 사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게 AI 같은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 수 없는 물질이 공기 중을 통해서 퍼진다. 근데 인간들은 공기 중에 퍼지는 것들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생물학 무기를 만들죠.

누가 만듭니까. 커다란 나라들이 만들죠. 핵무기 죽을 줄 알면서 만든다는 거죠. 왜 못 합니까. 참 단순한 거예요 사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한데, 단순한 걸 해결못 하는 건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핵무기 폐기하면 되는 거고, 생화학 무기 안 만들면 되는 건데, 왜 만듭니까. 돈 때문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벌 수 있는 돈의 방식과 벌지 말아야 할 돈의 방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경제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위험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분명히 효율성이 있고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촉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용되고 있지 않잖습니까. 거기에 대해 입막음 한다는 건 곤란하죠.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걸 하지 말아야 해요.


▲ 장자의 기심(機心)

이 논리는 무엇과 연결되는가. 지난 시간에 제가 장자의 기심(機心)에 관련된 문제를 기회가 되면 얘기한다고 했죠. 기계적인 마음. 혹은 편리를 추구하면서 이게 문명 비판의 그 무엇처럼 얘기되는데.

그 자료와 그 노인네가 이야기하는 맥락을 잘 보면, 특히 장자 속에 든 논리는 몸의 논리예요.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자연 자체.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보세요. 논어나 맹자 속에는 기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아요. 장자 텍스트를 보면 달인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잖아요. 강호의 달인들이 수없이 많아요.

무명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노자에. 무명은 황제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하지만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이렇게 보시면 돼요. 특히 주성치 영화가 그걸 구현하고 있어요. 만두 만드는 사람도 달인이에요, 공 차는 사람도 그렇고. 대단하잖아요. 버스가 가는데 늦어서 출발을 못 하니까 날아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걸 연출하는 것, 이런 사람들 다 달인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냥 넥타이 메고 가는 일반 사람이고 심지어 거지, 노숙자가 갑자기. 이런 세계를 장자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강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장자 철학 체계 속에서는 기술, 뭔가에 달한다고 하는 것이 유가에서는 단 한마디밖에 없습니다. 문(文을 통해서 달하는 거예요. 문을 통해서 인간의 문명세계를 밝히고 인간의 도덕세계, 윤리세계를 밝히고 인간다움을 구현한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요.

하지만 장자의 세계에서는 온갖 다양한 機에 대한 達의 경지가 있다는 거죠. 그걸 道라고 표현하고.

그럼 장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들을 훨씬 더 많이 주장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장자가 문명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보느냐는 거죠. 그 속에는 우리가 문명과 자연을 대립하는 구도로 우리가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장자의 실제 세계는 자연과 조장이라고 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유했던 사람이라고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이 기심이 편리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자를 보면, 어떤 노인네가 수영을 기막히게 해요. 물어요. 도대체 어떻게 수영을 하길래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노인네가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마라’ 니가 몰려고 하지말고 물살에 몸을 맡겨라. 참, 말은 쉽죠. 그게 보통의 노력을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훈련을 해야 하잖아요.

그 속에는, 내 몸 자체에 들어있는 자연성 자체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논리라는 거죠. 기심은,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을 키우는 방식은 좋다는 거예요.

그럼 자동차가 나쁜 것이냐? 움직일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는 거예요. 자동차 타고 어딜가서 부모님도 만나고. 요즘 KTX 선전할 때 그렇잖아요. ‘당신을 보내세요’ 물론 매연을 뿜는다는 나쁜 점이 있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 본다면 자식이 부모간의 정은 무한히 가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굉장히 바람직할 수 있어요.

걸어서 부모님 한번 뵈러 간다? 사실 못 가잖아요. 그래서 어느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의 시대에는 공해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생산력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력의 전부인 세계에서, 다른 기물을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장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에 석회를 바르잖아요. 그걸 왜 합니까.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거예요. 이성보다 위대한 것이 인간의 감각이에요. 감각의 세계를 우린 다시 한번 구현해야 하는데.

특히 여기서 요구하는 감각은 나아간다면 어떤 부분까지 가느냐, 저 사람을 딱 봤을 때, 지금처럼 대신에 우리를 보장주는 건 법체계,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계약서대로 하면 돼요. 이게 근대세계예요. 사회계약론에서는 다 필요 없고, 계약대로 하면 돼요. 계약 당사자가 우리인데, 우리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계약을 잘 해야 돼요, 우리는. 계약은 함부로 할 게 아니에요. 과거는 법적인 장치를 통해서 인간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계약이 아닌 면대면의 관계였고, 사람 대 사람 친분의 관계였을 땐 어떻게 합니까? 내가 사람을 잘 알아봐야 해요.

견물을 이야기하면서 알아본다는 것이, 저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있어 라고 전달했단 말이에요. 그럼 들었다. 이게 아니에요. 저 놈이 지금 제대로 말하는지 거짓말하는지에서부터.

그러니까 신(信)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는 신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신용은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에서 오는 거예요. 그럼 과거에는 신용이 어디서 옵니까? 계약서가 없으면? 말 뿐이잖아요.

말만 믿고 해야 하는 세계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이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렇게 살던 세계의 사람들. 지금 우리가 갖는 생각과는 굉장히 다른 것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씨춘추』에서는 자연이라는 용어와 하여금, 시킬 使(사)가 대립되는 용어로 나와요. 우리는, 이미 본래 텍스트 맥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근대의 눈을 갖고서 좋아하는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해왔던 거예요. 지금에 와서 그럴 필요 없잖습니까?

텍스트는 이미 자기 스스로를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못 본 것뿐이죠. 그래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


◆ 기(氣)의 세계


▲ 자연과 인간

그럼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자연이 인간의 몸과 직결돼 있더라. 특히 인간의 본성과 중요하게 연결돼 있더라. 이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철학적 사유, 동아시아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대전제예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그런데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만약 유학자들이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복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연구하게 해 달라고 신청했을 때, 과연 허락을 했을까, 안 했을까.

어떻게 답변을 했을까. 이런 부분이 우리가 텍스트 훈련을 통해서 공부하고 말 해야 하는 부분인데, 공자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자가 그 당시 맥락에서 했던 말을 우리는 지금 현재 당면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지식인들이 요구받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같이 고민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거고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몸과 자연의 관계를 얘기할 때 아주 단순한 사실부터 얘기하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텔레비전을 보면 6시부터 7시 까지 어린이를 위한 시간이잖아요. 그 당시에 봤던 만화영화 주제가들을 다 외워요. 지금도.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게, 아톰도 기억나고 황금박쥐가 끝날 때 그걸 봐서. 이겨라 승리호, 당려라 봉개호 라고 해서 노래가 좋지 않습니까?

한 번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세 시간동안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쫙 불렀어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노래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했던 게 영화에 삽입된 곡인데, 전자인간 아람이 아라치에게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그게 제 기억에 남는 좋은 노래예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숙제를 안 하고 계속 티비를 보니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숙제 다 했냐?”죠. 그랬다가 여덟시 오십오 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 말이 나오죠.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고 쫙 나온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잡니까? 어머니, 아버지 안 계시면 계속 오고, 어머니, 아버지가 주무시면 다시 켜서 이어폰 끼고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 속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하다. 그래서 저녁 10시가 되면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라. 군대가 그렇잖습니까. 아홉 시 반에 점호하고 열시되면 잔다는 거죠.

그런데 한의학적으로 얘기하면, 이건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왜 그러냐. 저는 맞다고 생각되는데,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이 생체실험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이 생활한 거예요. 바깥 사람들과 통화를 하면서 체크는 한 거예요.

이 사람이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며 행위를 반복하다보니까 하루의 패턴 주기가 24시간을 전후로 해서, 길어야 20분 30분에서 큰 경우에 1시간의 오차밖에 없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몸 자체가 24시간 움직인다는 거예요. 자고 일어나는 생활 자체가. 그 생체 시계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이건 인간 이전에 생명체가 발생할 때부터 우리 몸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처음에 인류학자, 생물학자에 의하면 아프리카 중부 어느 지역에서 현생 인류가 탄생해서 퍼져 나가서 다양해졌다고 하는 건 일반적으로 하는 얘기지 않습니까.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죠.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루어졌는데. 특히 우리같은 경우는 사계절의 순환이라고 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가, 봄이 되는 저는 별로 안 좋아요. 여자들은 봄이 되면 살랑살랑거리죠. 남자는 가을이 되면 허전해지고. 보통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봄 하면 더 중요한 게 뭐냐. 바로 노인네들이에요. 실제로 가보면, 사고사로 죽는다거나 질병으로 죽는다는 경우는 사시사철이 없지만. 노인네가 돌아가시는 때가 특히 2월 말에서 4월 달이 많다는 사실을 많이 겪는 것 같아요.

제가 부조금을 내러 가는 게 그때가 가장 많으니까. 그게 바로 음양의 교차를 통해서 한의학을 설명하잖아요. 이 얘기를 적용하면, 한의사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름은 낮이 길고 밤이 짧아요. 그래서 여름엔 잠을 덜 자도 괜찮대요. 겨울은 밤이 길고 낮이 짧잖습니까. 그래서 겨울에 몸 잘못 움직이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잠을 많이 자고 여름엔 잠을 적게 자도 괜찮다는 것이 한의학에서, 음양오행론에서 하는 말이에요.

생체고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에 내 삶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연 세계가 움직이는 입법에 내 삶을 맞춰 나간다면, 여름엔 좀 적게 자도 됩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똑같이 일어나서 똑같이 출근한다. 저는 그래서 아침 강의를 잘 맡으려고 하고, 저는 늦게 자니까, 그럼 늦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머님과도 대학 다닐 때 되게 혼란했던 게, 새벽 2시, 3시, 4시에 자서 10시에 일어나면 6시간 밖에 못 자는 거잖아요. 어머니 눈 속에 저는 잠꾸러기예요. 저한테 맨날 “10시되면 불 끄고 자” 그러신단 말이에요.

집사람은 저랑 체질이 달라요. 집사람은 10시에서 11시가 되면 천근만근으로 눈을 누른대요. 아침에 딱 깨요. 그렇게 일어나래요. “너와 내가 생활패턴이 다른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요즘엔 애기가 잠들어야지만 제가 책을 볼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또 그렇게 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강사였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직장인이었다면 아침마다 아주 힘들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일찍 자게 돼요, 피곤하니까.

완전히 못 고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제 몸의 패턴이 어느 시간에 책을 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걸 아는데 억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잖습니까. 동일한 시간 동안 글을 쓰고 공부를 할 때 제가 훨씬 효율적으로 시간력이 달라지는데. 이렇게 몸이 개인적으로 다 다르단 말이죠. 이런 걸 보통 한의학에서는 체질이라고 하죠. 그것이 근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내 몸 속에도 시계가 있고 자연이 우리에게 준 시계. 그건 그냥 생기는 게 아니잖습니까. 태양과 지구의 자전이 있으니까 생체 시계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계절이라는 몬순기후가 일이년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을 거쳐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나의 적응 기제에 영향을 줬을 테고 나는 거기에 적응돼 있을 거예요.

그런데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동일한 시간에 자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죠. 몸이 안 좋다면 몸이 좋아질 때까지 더 자는 게 당연한 거예요. 저 사람 대단하다, ”아픈 걸 무릅쓰고 일 하러 나간다.“ 이게 사십 대에 갑자기 푹푹 쓰러지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본주의를 운용하는 시스템은 건강과 정말 안 맞아요. 의학발달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의 생활시스템을 구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야 합니다.


▲ 士氣(사기)와 血氣(혈기)

이런 텍스트들로 배울 수 있는 건 그런 내용입니다. 시간도 달리 생각해야 하고. 자, 9 페이지를 보세요. 보통 우리 군대를 다녀온 남자나 여자분들, 군대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제식훈련이죠. 제식훈련이 군대 제도에 도입이 돼서 운영된 것은 18세기 정도. 얼마 안 된 일입니다.

괜히 안 되는 일을 하는 이유가 실제 그렇게 해서 훈련을 시킨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요. 총 배운다고 더 잘 싸우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기와 관련해서 士氣(사기)와 血氣(혈기)라는 글자는 요즘 우리도 쓰는 말이죠. 기와 관련해서는 가장 빠른 용례를 보이는 게 혈기예요. 혈기는 논어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혈기가 방자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혈기가 방자한 중고등학생들을 건드린 적이 이승만 정권에 있었는데 이번도 또 건드렸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으면 혈기가 죽잖아요. 할 말을 못 해요.

그런데 혈기가 방자한 사람은 상대방이 강자로 나오면 나올수록 더 커지잖아요. 그게 혈기예요. 기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원초적인 힘이에요.

그 다음에 기와 관련해서 이것이 조직적으로 이용되는 걸 가장 쉽게 보여주는 말이 ‘사기’라는 표현이에요. 선비의 기운입니까? 아니에요. 사기예요. 특히 제식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사기죠.

예를 들면, 일반 훈련소에서 하는 건 아니지만 간부를 훈련시킬 땐 권투를 많이 시켜요. 서로 싸우는 거잖습니까. 해 봐야지만, 맞아 봐야지만 맞아도 견딜 수 있다. 때려보지 않은 사람은 못 때려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사기라는 말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 했는데. 한 영화를 보다가 그 느낌을 받았어요. 탐 크루즈가 출연했던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신식 훈련을 받은 일본 군대가 총을 갖고 있고 숲 속에 있는데, 사무라이들이 말을 타고 건너 오는데 대형 브라운관에서 보니까 이게 실제 장면이지 않을까.

사무라이가 쓴 갑옷을 보면 악마의 얼굴처럼 짐승 얼굴처럼 무섭게 해놨잖아요. 저렇게 하면 두렵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브라운관에서 실제 장면처럼 보니까 총알가진 사람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가고, 무너지고, 제가 사기가 뭔가를 그걸 보면서 그대로 느꼈어요.

저런 인간들 속에서 공자가 튀어 나온 거예요. 당시 사(士)라는 개념이 어떻게 바꼈느냐.

그렇게 사무라이들이 좍 몰려오는데, 한 사람이 하늘 천, 따 지하는 걸 연상시키면 공자가 얼마나 혁명적인 사상의 궤변자인지가 설명됩니다.

이건 제가 설명한 게 아니라, 학자 이름을 까먹었는데, 루이스라는 사람이 한 얘기예요. 공자가 당시 사상계 지형도에서 볼 때 얼마나 특이하고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의 변천을 낳았는지.

인(仁)개념 자체가 사실은, 남자답다는 말이 요즘 바뀐 것과 똑같아요. 옛날에 남자답다고 할 때는 어깨가 딱 있고 키도 이만해야 하고 얼굴도 남자답게 부리부리하게 생겨야만 멋있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어때요? 예쁘장하게 생겼잖아요. 마치 공자의 시대에 인이라는 글자의 내용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뀐 것과 동일한 방식의 변화를 공자가 열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사라고 하면 씩씩하고 사나운 걸 느끼는 게 아니라, 되게 부드럽게 생각하잖습니까. 우리는 공자의 후예인 거죠. 자꾸 얘기가 딴 데로 새는데.


▲ 기(氣) 용어의 기원

기(氣)라는 말은, 동아시아가 계절풍 기후였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용어예요. 기라는 말의 기원이 뭐냐. 여러 가지 방식의 설명이 있단 말이에요.

그 중 첫 번째는, 운(雲)기라는 표현이 나와요. 구름 운자입니다. 기 가제가 구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운기가 구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라고 하는 말의 원형이 구름으로부터 온 게 아니냐. 기상적인 무언가로부터 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또 하나는 곡식,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지 않습니까. 그 기운, 생명의 기운. 머리가 아플 때 그거 쐬면 좋은 거 아시죠. 아침에 일어나서 눈이 피곤할 때 커피를 한 잔 타서, 호호 불면 따뜻한 증기가 올라오잖아요. 거기에 눈을 대면 피로가 조금 풀려요.

과거에 기를 설명할 때는, 근대 과학 특히 물리학이 유행했기 때문에 물리학을 염두에 두고 천문학, 기상뿐만 아니라 물리학적 우주 패러다임과 관련해서 기를 설명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기는 질료, 실체, 원질,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을 갖다 붙였어요. 요즘에는 그와 같은 설명은 곤란하다고 한다. 왜냐.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기론이 성립해가는 중요한 과정 중에 관자라는 중요한 문헌이 나오는데, 거기서 인간 생명의 중요한 기원을 얘기하면서 정기신을 얘기해요.

이게 회남자로 가면 정신, 형체라고 해서 이원화합니다. 이때 형체는 실제 우리들의 물리적 몸을 지칭하는 거예요.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에서 말하는 정신과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에요.

물론 분명한 의미로 서양적인 이분법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구분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적인 거냐?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다 물질적인 겁니다.

우리는 지금쓸 때, 정신(精神)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건 같은 거예요. 온갖 사물에는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있는데 이 생명의 기운을 인간이 흡수하면 기가 되는 거고 이 기가 내 몸속에서 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신(神)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

마음적인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精子(정자). 이건 생명의 씨앗이잖아요. 물질적인 거예요. 달리 말하면, 이런 표현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가지고 들이대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 방식이라는 거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없었고, 이건 본래 하늘로부터 오는 거고 몸뚱이라를 구성하는 형은 땅으로부터 온다는 게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예요.

내 몸은 천지의 구현입니다. 김용옥 선생님이 표현하는 걸 보면 통찰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떤 책에서 지나가는 말로, 이 분이 호주에 가서 디자인에 관해 강의를 했다면서, 디자인이란 하늘의 원리를 땅에 구현하는 것이다, 즉 천의 질서를 지상의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표현했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하늘의 원리가 땅을 통해 나를 디자인 한 거예요. 이같은 사유를 회남자 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죠. 이 두 눈은 하늘의 해와 달이고 내 몸속을 흐르는 혈관은 강이고, 내 몸속을 흘러 다니는 것은 기운이에요. 여기 바람이 흘러 다니듯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내 몸 속에 기운이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전부 다 이 속에는 물과 바람의 이미지가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은유적으로 투영돼 있습니다. 상당히 어떤 부분은 은유적인 장치를 통해 인간의 자연 영역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라 보면 돼요.

그래서 기를 얘기할 때는, 물이나 바람을 염두하는 게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물이 고여있으면 어떻게 되죠? 썩어요. 기와 혈은 계속 내 몸을 흘러야 해요. 막혀요. 그럼, 뚫는 게 침이라는 거죠.

그럼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 이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가 없잖아요. 기는 안 보이는 거니까. 특히 체포를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원래 진맥이라는 것도 굉장히 여러 방식으로 했잖습니까.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진맥을 했었는데 점점 이론화되고 발달하다 보니까 그냥 손목에 하는 걸로 결판났고. 그건 나름대로 임상과 이론화로 병행되면서 축출된 결과물이겠죠.

자, 9페이지에 있는 명대(明代) 장개빈이라고 하는 의학자이고 의학이론가의 그림을 보면, 큰 몸의 틀 속에서 보는 것도 그렇고 이 속에 나와 있는 것도 실제로 해부를 통해서는 하나도 검증이 안 돼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이런 것들이 나와 있느냐. 그건 결국, 침을 놓기 위한 혈자리가 사실은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고 이런 건 다 촉각적인 것들이고, 촉각적인 것을 통해 알아낸 것을 가지고 실제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침을 놓기 위해서는 눈으로 봐야 되고, 그렇잖습니까? 손가락으로 재야하고.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연철학적으로 인간의 몸 속을 돌고 있는 기가 어디가 막히냐 정체돼 있느냐는 식의 표현으로 언어가 구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와 같은 세계가 있다면 그걸 자연철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자연’이에요. 자연은 자연인데,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이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애매모호한 커다란 이야기 덩어리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것의 주인공을 기라고 하는 순간, 굉장한 파급력 즉 응용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어지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 감응

그런데 제가 기를 강조하면서 자꾸 인간과 관련한 쪽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이 기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개념으로 볼 수 없고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과만 연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하냐.

단순한 예를 들어 볼게요. 우리는 기를 감지하죠. 한겨울에 이 책상이 있을 때, 한겨울에 이 책상을 만지면 굉장히 차갑게 느껴져요. 그런데 여름에 만지만 굉장히 시원하게 느낀단 말이죠.

이때 '감지‘하는 이건 사실 서구적인 표현으로는 감각한다지만 우리는 감응한다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했죠. 감응은 내 몸속의 기와 내가 감응하는 사물의 기운이 소통되는 과정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에요. 기의 변화예요.

이런 용어는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것과 똑같아요. 양자역학에서 대상이라고 하는 걸 확정할 수 없다고 하고, 왜냐하면 개입하는 순간, 아주 극미한 세계이기 때문에 측정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순간 이미 그 운동성이 다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측정자체가 굉장히 객관적일 수 없다고 얘기하잖습니까.

객관적 관찰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식의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기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 사물과 내가 만나는 순간, 서로 기를 주고받을 때 나는 저 사물에 영향을 미쳐요. 저 사물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순간 내 몸의 기의 분포가 변합니다. 이런 걸 감응론이라고 합니다. 객관적 수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이 하는 말까지도 포함되는 거예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오랜만이다”라고 하는 거랑 옛날에 듣기 싫어했던 “야, 속살”이라고 하면서. 들어오는 기운이 다르잖습니까.

그 말이 내 귓청에 울리는 순간, 내 몸속의 기가 쫙 퍼지면서 옛날에 내가 저 친구한테 괴롭힘 당했던 기억이 갑자기 쫙 올라오면서 반응이 생기는 거예요. 감응하는 거죠. 그 사람도 마찬가지죠.

기의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객관화 혹은 수량화보다도 대면하는 순간 변화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속에는 반드시 뭐가 매개되어야 하느냐. 물론 이 컵과 이 컵이 만나는 순간에도 뭔가 있죠. 이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이건 인간이 알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까지 기를 적용시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 기와 관련된 용어가 출현한 맥락을 잘 보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즉 인간과 물과의 관계 속에서 기 개념이 적용된다는 거예요.

즉,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 안의 신호들만 우리는 체크할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는 자외선을 보지 못 하잖아요. 귀로 들을 수 있는 파장의 영역도 제한돼 있고. 파장 밖에 있는 소리들은 못 알아듣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미지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거죠.

마찬가지로, 다른 사물들은 다른 사물과 감응하는 방식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관과 다른 종류로 감응하겠지만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응의 수단과는 다른 방식의 언어 틀이기 때문에 결국 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

기를 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해석하는 건 잘못된 해석 방식이고, 인간이 반드시 개입된 관점에서 기 의미를 해석할 때만. 한의학이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 매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맥진이라고 할 때, 그 정보를 어떻게 도무지 얘기해주기가 어려워요. 그렇잖아요.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을 때의 중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증거를 사기의 편작찬공열전이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 편은 사마천 당시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표현 체계, 개념 체계를 반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창공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임상보고서가 들어가지만, 편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상당히 신화적으로 되어 있어요.

편작이 원래는 여관에서 심부름꾼하는 관리인으로 지내고 있었죠. 그때 장상공이라는 어떤 사람이 의사였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거기를 자주 출입하다가 편작의 됨됨이가 괜찮은 것 같아서 약을 주면서 이 약을 상지수에다 개서 먹으면 특별한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해서 그걸 다 먹었다니, 담장 밖에 너머 사람들까지 보이더라.

눈으로 딱 보면, 이 사람 내부가 어떻게 돼 있더라는 것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편작은 그것 때문에 오해 받을까봐 진맥을 통해 알게 됐다고 해요.

저는 “상상된 신체”라고 하는 표현을 착상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어요. 일본학자는 편작이 투시술을 갖고 있어서 시각적인 지식의 중요성이 상당히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맥진과 관련된 이론은 편작 이전의 이야기 속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아요.

창공은 한나라 문제 때 실존인물이라고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편작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 차이는 뭐냐. 창공은 진맥을 하면서 환자의 증상을 의경 속에 들어 있는 증상들과 대조해봄으로써 이 사람 병이 뭐다라는 방식으로 진맥을 해요.

그런데 편작은 그런 것 없이 딱 꿰뚫어 봤다고 나와요. 이 때 꿰뚫어 봤다고 할 때, 진맥을 통해서 알아봤다고 하는 표현은, 달리 말하면 맥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직 개념화를 갖지 못 했을 때 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본다’ 자기를 신비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니까.

따라서 촉각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그 용어의 실체는 진맥이었고 그것은 촉각으로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속에 들어있는 자체가 확립돼 있지 않을 때의 현상이 신화화된 것이고 그것이 용어를 갖고 구체화됨에 따라 비신화화되었을 때 상황 자체가 이상한 방식으로 조율돼 있는 게 아닌가.

거기까지 설명한다면 이 신체의 그림 자체가 왜 그렇게 그려져 있는가는 물론이고 한의학의 발전과도 맞는 설명방식이 아닌가.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것이 기가 되는 거죠.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0_03.htm

◆ 음양오행의 신화와 역사


▲ 음양오행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기화하는 세계는 조금 전에 얘기 드렸어요. 음양오행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음양오행은 기와 별도로 탄생된 론이에요. 음양오행을 앞으로 끌어가면 어떤 사람은 주역과도 연관시켜서 음양사상이 무지하게 오래됐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때 체계화되었는가. 어느 때쯤에 결합되어 의미 있는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한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음양오행론이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갖고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관자라는 책을 보면 음양오행론이 나와 있고, 여씨춘추에서도 음양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등장하죠.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기와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 있나요? 왜 하필이면 인간의 혀는, 몇 가지 맛을 구분하죠?

매운 맛은 미각 세포가 하는 게 아니라 통증으로 느끼는 거죠. 네 가지입니다. 왜 인간이 네 가지 맛을 구분할까. 이건 좀 어렵죠. 더 쉬운 예를 들어 볼게요.

밥을 먹기 전에 여름에는 어떻게 하고 먹어야 하죠? 냄새를 맡아보잖아요. 이게 쉰 건지 안 쉰 건지. 코가 왜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뭘 구분합니까.

내 몸속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인간 감각의 기본이에요. 눈이 하는 역할이 뭡니까. 내 몸이 가도 되는 곳과 안 될 곳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기 나타나는 것이 사잔지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거죠.

감각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눈이 여기 왜 달렸는가.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잖아요. 코가 왜 달려 있어요. 이게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달리 말하면 이 코가 그것을 분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코가 진화했다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음양오행론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축이 뭐냐. 원소주기율표가 물질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적인 방식을 통해 사물을 분류한 책이라면 거기엔 내공이 빠져 있어요.

한의학이 추구했던 사물의 분류체계는 내 몸과의 감응 관계 속에서 사물을 분류한 거예요. 독이 뭡니까. 먹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다른 동물한테는 상관없을 수 있어요.


▲ 감응

감응이란 것이 왜 중요하냐. 철저하게 인간적인 용어이기 때문이에요. 감각한다?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는 것이 도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이 지(知)라는 용어가 독초와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분하면서 나와요. 즉, 인간이 알아야할 지식은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걸 이해하기 위해서 지 능력이 발달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적응을 위해서 뭔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 구분의 기준이 뭐냐. 내 몸과의 감응관계 속에서 나에게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각기관이 있다는 거죠.

무슨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꾸 그런 쪽으로 가다보니까 몸에 해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위해서 먹어야 해요. 그렇잖습니까. 특히 책이 그렇잖아요. 그 어려운 걸 갖다가.

문명이 엄청난 지식체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책을 봐야 하지만. 특히 철학책 꼭 읽을 필요 있습니까? 있죠.

당연히 있죠. 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해도 되는 것인지 중국적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어떤 행동은 해도 되고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에요.

행위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에 관한 언설들이 전혀 격차 없이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뭘 통해서요? 특히 입을 통해서. 이 입이라고 하는 것이 먹으면 죽는 게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선 나가면 안 되는 게 있어요. xx야. 이건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구멍의 인간학이라고도 하는데, 혼돈을 얘기하면서 칠규라는 하는 게 거기 왜 등장하느냐. 칠규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가 소통하는 곳이에요. 여기는 다 위기로 막혀 있기 때문에 기가 분명히 감응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안과 밖에 통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아홉 개의 구멍만이 안과 밖이 드나들면서 소통해요. 그런데 드나들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라고 하는 거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지는 같은 거예요. 과학과 인문학이 별개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이 접목돼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론이 가진 중요한 함축이에요. 기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면서 자연학이에요. 인간과 자연자체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의 사고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과거에는 그런 걸 정당화하는 논리가 오늘날에는 신화적인 논리고 비과학적인 언어라 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거죠.

문제는, 우리가 경험 세계 속에서는 그때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과 똑같아요. 그들이 느끼는 기나 우리들이 느끼는 기나. 조금 차이가 있죠. 우리가 조금 더 더러운 기운 속에 살아요. 공기도 더럽고 말도 훨씬 더러워졌고.

하지만 인간 대 인간 속의 환경은 엄청나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여기서 저한테 말도 못 붙일 사람이 많고 제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강사랍시고”하면서 속으로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실 분이 여기 계시진 않겠지만.

저 사람이 사람이다 라고는 생각하는 관계로 우리가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는 거죠. 그 부분은 인간이 성취한 진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몸의 논리 차원에서는 아직 미비합니다. 그렇게 얘길하죠. 현대 의학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긴 수명을 누리게 됐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하는 분들은, 빈곤의 퇴치가 인간의 수명을 늘게 하는데 가장 도움을. 아프리카는 평균 수명이 삼십 대 초반 심지어는 이십 대에 죽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하루에 죽어나가는 인구가 만 명인가 십만 명인가.

어느 한 쪽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건 그런 것이죠. 결국 어떤 텍스트를 읽든 간에 그것이 과거에 이랬다 저랬다는 중요하지 않고 기의 논의를 감응을 이룬다는 것은 내 몸의 논리를 통해서 체험하고 검증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딱지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적어도 전통과학사회에서의 기가 말하는 바대로 살고 있고 그리고 맞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신화적인 논리로 윤색되어 있고 유비적인 차원으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해요.

따라서 그 기준을 근대 과학에서 가져온다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내 몸의 경험, 내 몸의 판단으로부터 검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본초라는 책 속에서 이런 것들을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린네가 분류표 만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분류학적인 뭔가가 있어요. 오히려 실험실에서 인삼의 성분인 사포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런 식의 연구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맥을 잘못 짚은 거라는 거죠. 그것도 필요해요. 그것이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질에 대해 대화하는 공통 용어들이니까. 공통 용어체계에 내가 동참해야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고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우리는 과학적 표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한의학이 해명되었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거죠. 동의학의 처방이 무슨 성분이 발견됨으로써 약효가 입증되었다가 아니라 그 약효라는 것은 먹으니까 병이 나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가져가야지 왜 실험실에서 그걸 찾습니까.

달리 말하면, 한의학 세계에는 실험실 의학이라는 것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각 개개인 한의사들이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환자를 다루면서 했던 임상적인 축적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야하죠.

왜 전통적으로 맥진을 해 왔는가. 그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 속에 든 게 기(氣)라는 것이고 표현한다면, 기의 운동이고 기의 흐름이고. 그리고 그건 우리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방구를 꼈다. 방구를 뀌면, 소리 없는 방구가 독하죠. 소리 없이 나를 괴롭히는 냄새가 있을 때 내가 왜 거기에 얼굴이 찡그려지고 기분이 나빠질까를 생각해보세요.

그게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이 감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순간 좋은 향수를 뿌린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향긋한 향내가, 특히 요즘은 아카시아향이 좋잖아요. 창문을 열어 놓으면 향이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도대체 감각한다는 것이 사물의 객관적인 정보나 성질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류하지 않으면, 방구냄새 나면 나가야죠. 창문을 열거나.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던 게, 인간의 감응체계를 감각이든 뭐든 정이라는 것도 가장 단순화시켜서 두 가지로 나누면 뭐냐. 好惡(호오)라고 얘기했죠.

이건 감정 즉 심리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자연학적인 용어고 자연철학적인 용어이기도 한 거예요. 호오는 도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인간관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라 물질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도 감응관계가. 좋은 것, 나쁜 것. 그래서 동아시아의 용어 속에는 자연과 문명, 인의에 대한 구별 자체가 기본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 엉뚱한 데다 힘 쏟는 경우가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오행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왜 하필 음양이냐 왜 하필 오냐. 여기에 목숨을 거는데, 사실 그 속에 비밀이 어떤 게 들어 있느냐는 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오행이 성립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 두 분이 있는데, 방박(龐朴)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어요. 17쪽, 18쪽 부분입니다. 17쪽을 보면, 방박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갑골문을 보니까 음양이나 오행이 없더라면서 오히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을 보니까 상 앞에다 중 자를 붙여서 중상‘중상’(中商)이라고 하고, 나머지 부분을 사방사방(四方). 자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거죠.

우리는 사방하면, 동서남북이라고 해서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앞, 뒤를 사방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방향은 기본적으로 모 방자입니다. 네모꼴, 사각형이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방박이라는 사람은, 중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방을 통해서 다른 지역을 지칭한다는 표현은 결국 모방의 개념이다.

즉, 모는 우주의 수예요. 그리고 이 모습은 뭐와 닮아 있느냐. 왜 하필이면 거북이의 껍질을 가지고 점을 쳤느냐. 이렇게 생겼잖습니까. 닌자 거북이도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하늘에 구멍이 뚫렸을 때, 기울었을 때 여와가 복천을 오색선으로 하고 커다란 거북이 다리를 싹둑 잘라가지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서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막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거북이 다리로 했느냐. 다 상징이 있는 거죠. 우주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건데.

그래서 이 오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우주의 숫자고 우주의 숫자에다 갖가지 내용물을 섞은 거죠. 오만 있느냐? 사방도 있고. 오가 가장 근원적인 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숫자를 다 해서 모든 수에 의미가 부여돼 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오냐. 효율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를 가리키는 게 오장육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장은 다섯 개고 부는 여섯 개라고 부르느냐. 애매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사유하는 방식이 중요한 거고 내용물이 중요한 거죠.

그걸 지칭하는 자연철학적인 배경을 기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응이고 인간의 몸 자체가 내부와 외부가 감응하는 관계에 어떤 방식의 감각을 범주화한 것이 있는가. 그런 게 분류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런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전통적인 맥락에 가깝고 우리들에게도 실효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상상력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하는 거고. 그걸 요즘에 섹시한 표현으로 바꾸면 옐로우 사이언스로 표현하는 거죠. 황색 과학도 가능하다. 백색 과학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서양 과학은 화이트 사이언스라 부르고 동아시아의 과학은 옐로우 사이언스라고 부르자고 농담 삼아 하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제가 곧 출간할 책의 제목이 옐로우 사이언스예요.

자, 이렇게 해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조금 나와 있는 표현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별로 얘기할 건덕지는 없어요.

하지만 노자라고 하는 텍스트를 둘러싼 사상도의 지형도 속에서 이런 내용이 당시에 튀어 나왔다. 그 속에는 문헌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지만 상당한 경험들이 응축돼 있었고 그런 것들이 노자나 황제내경 텍스트를 통해서 분출되었다고는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김시천 제9강 상상력과 과학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9_01.htm

제9강 상상력과 과학

◆ 노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


▲ 노자의 기(氣) 철학

이번 주에는 원래 제목과는 한 글자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기와 덕이라고 돼 있었는데, 그러다보니까 전부 사회적인 얘기만 나오고 기(氣)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얘기가 좁아질 것 같아서 제목을 기와 자연으로 바꿨습니다.

사실상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면 노자라는 책의 본래 이름은 도덕경이죠. 즉 도경이고 덕경이 있단 말이에요. 노자는 도와 덕에 관한 책이에요. 기에 관한 책이 아니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고 기라는 글자도 굉장히 적게 나오고. 기에 관한 얘기가 표면적으로 나오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하지만 노자라는 텍스트에 녹아 있는 사유방식은 상당부분에서 당시에 성장하는 이른바 기론적 세계관의 논리적 맥락을 그 안에 응축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사실 텍스트 자체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기는 자연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 가지는 노자 원문에 나온 기만 가지고 기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나 제한된 맥락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후대에 나온 다른 주석서를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시대적 굴곡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자 텍스트에 관한 얘기라고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태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와 관련된 사상이 실제로 중국 과학 사상 속에서 연계돼 확인할 수 있는 분야는 두 개예요.

하나는 천문학, 그리고 하나는 한의학입니다. 그런데 천문학은 이미 석권돼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게 사실이죠. 더 적절할텐데.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과학적 성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상대적인 건데. 하지만 한의학의 경우에는 지금도 우리가, 나가면 한의원이 그대로 있고 실제로 임상을 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과학이라는 거죠. 인정을 받고 있고.

따라서 그와 같은 소재를 연결시켜 보는 것이 훨씬 논의가 재밌을 것 같아요. 너무 제한된 내용을 사회적이고 정치 사상적인 함의로만 봤다면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 자연철학적인 맥락을 확장해서 얘기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되지 않은 부분도 꽤 있고 저의 개인적인 시각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이 오늘의 주제예요.

노자와 기라는 것이 굉장히 친숙한 것처럼 얘기되는 까닭은 노자 텍스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20세기 중국에서 철학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확장된 서술의 결과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로 많이 자본주의화돼 있지만 스스로는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말하죠. 사회주의 사상의 출발은 마르크시즘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은 보통 역사적 유물론고 변증법적 유물론 두 가지로 이야기하죠. 그리고 인간의 역사 과정 자체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반한 법칙대로 운영됐다는 게 그 틀입니다.

그에 의하면 중국 역사도 원시공산제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로 가야 하죠. 그런데 문제는 마오가 등장하면서, 이 마오이즘은 중국에 토착적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단 말이죠. 그에 맞춰야 해요.


▲ 노자의 기 철학에 대한 오해

그래서 한 때는 공자가 고대 노예제를 대변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해서 30년대에 사회사 논쟁이 붙기도 했고요. 중국 사회 성격 자체를 마르크스주의 발전 과정 도식의 어디에서 어디까지에 배치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상당히 커다란 논쟁을 했단 말이죠.

노자는, 처음에 우리가 시작했던 것처럼 출생년도가 뭔지 왔다갔다 한다고 했죠. 하지만 중국 철학사 서술이 재미난 건, 50년 이전의 중국 철학사 서술과 50년 이후의 철학사 서술이 바뀌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 이전에 서술된 것은 공자로부터 중국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그랬던 것이 이른바 밁시스트 역사가에 의해서는 노자로부터 출발해요.

노자와 공자의 관계 문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지난 번 우리가 살펴봤던 소국과민은 원시적 공산사회의 흔적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돼 왔다고 했었죠.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결합되었길래 그럴만한 소지가 있었는지를 확인했다면.

또 한 가지는, 역사적 유물론은 그렇게 증명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그래서 기를 물질로 해석해왔어요. 물질로 해석했다는 것이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해석 방식의 영향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무지하게 많이 받고 기를 물질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에 관한 이야기도 오늘 토론될텐데.

그러다보니까 노자는 공자의 앞선 사람이 돼야 해요. 그래서 보통 사기에 서술된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원시공산제 사회만 있는 게 아니란 유물론 사상의 맹아가 있어야 해요. 그게 바로 노자에 나오는 기입니다. 그게 강조되다보니까 노자가 어떤 기철학적인 배경을 갖는 것처럼 서술해 왔어요.

하지만 사실 텍스트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서 훨씬 더 과장되게 해석돼 왔다는 점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넘어가면, 그런 식의 역사이야기는 막연하게 다가오잖아요 막연함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서, 기, 자연, 도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구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인식구조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기를 이해하더라도 어떻게 돼서는 곤란한지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얘기를 한 번 보도록 하죠. 자,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시면 3쪽에 그림이 나옵니다. 이 그림의 대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어요.

철학이라는 학문이 하늘의 허공에서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속되게 표현하면,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충분히 문화적 증거와 호흡할 수 있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어야 해요. 3페이지를 보시면, 제가 일부러 사진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친숙한 텍스트에서 끌어 왔어요.

허준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왼쪽의 사진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예요. 오른쪽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죠. 이 사람은 실제 르네상스기에 활동한 사람이고 실제로 서양에서도 해부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나온 거예요.

이 사람이 베사리우스라고 하는 유명한 해부학자보다 다빈치가 앞서요. 앞서는데,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크게 다루지 않는데, 이 그림 말고도 굉장히 많은 그림을 그렸죠.

그림을 보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죠. 왼쪽의 그림을 보면서 이게 사람 내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건 상당히 비상식적이거나 가공, 허구적인 그림처럼 보이죠. 실제로 한의계통 의서들이 서구에 수입됐을 때, 이게 무슨 인간을 그림 그림이냐면서 별의별 악평이 나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오른 쪽 다빈치의 그림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내 몸은 이렇게 생기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약 내 몸 속의 모습이 이렇게 생기지 않다는 말은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똑같은 거죠?

우리가 적어도 상식적으로 볼 때는 오른 쪽 그림이, 사실은 모르죠. 저는 그렇게 안 생겼을지도 몰라요. 열어보면 혹시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폐가 왼쪽에 있고. 열어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해부학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도 그렇고 서구 의학계에서도, 죽은 사체를 해부한 흔적으로 살아 있는 생체에 관해, 사실 유비적이라는 거죠. 생리학패러다임이 깔고 있는 것이. 그런 방식의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약도 그렇잖아요. 사람에게 직접 바로 주는 게 아니라 쥐에게 실험하잖아요. 무슨 죄가 있다고. 대략 1년에 3억 마리가 실험용으로 소비되는 쥐가, 훨씬 더 되나. 엄청나게 많은 생쥐가 인간을 대신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인간에게 실험하죠.

또 이것과 비슷한 예가 인삼. 엊그저께 어떤 선생님을 만나서 재미난 얘기를 들었어요. 강원도의 분이 사업을 하다가 옷장사를 했대요. 이 분이 이 사업을 접고 산 속에 들어가서 조용한 집에, 넓고 집 두 세채 밖에 없는데 들어가서 사시는데 이 분이 집 앞에서 우연찮게 산삼 세뿌리를 발견했대요. 침이 꼴딱 넘어가죠.

그 얘기를 하다가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는데. 제가 여쭤봤어요. 산삼이 실제 효과가 있느냐. 플라시보아니냐. 그건 모른다. 실제로 복용한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 특히 한의학자들은 효과가 있다고 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삼과 산삼을 실제 성분 분석을 했을 때, 사포린의 양 차이가, 제가 알기로는, 2.5배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해요. 조금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인삼을 어린애들에게는 안 먹이는 게 좋죠. 그리고 홍삼은 가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먹는데, 저 같은 경우는 인삼을 먹으면 아주 좋은 체질이래요. 소음인이라서. 한 번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보약을 먹으려고 한의원을 갔어요. 제 친구인 한의사가 보약을 먹지 말고 차라리 보신탕을 먹어라. 훨씬 싸고 니 몸에 잘 맞는다.

해서 몸이 안 좋아지거나 여름 되면, 제가 더위를 잘 못 참아요. 그래서 보신탕을 한 번씩 먹어요, 혼자 가서. 다행히 멤버가 있어서. 즐겨 먹진 않거든요. 보신탕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이 한 번 먹다가 그 개다 우리집에서 기르던 개라는 걸 먹는 와중에 들었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올라와서 토하고 난 뒤에는 못 먹었거든요. 못 먹다가 나중에 약이라고 생각해서 먹으라고 해서 한 두 번씩 먹는데. 요즘에는 2,3년 동안 못 먹었어요. 올 여름에는 한 번 먹어볼까 생각 중인데.

인삼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사포린이라고 하는 성분 때문에 인체에 엄청난 치료효과가 있고 몸의 기력을 활성시켜주는 뭔가가 있다는 게 근대과학적인 설명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인삼이 인간의 몸과 죽어가는 기의 관계를 다 설명하는 것인가 라고 자문해보는 것과도 똑같은 질문일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제목이 우리가 오늘 얘기하려는 것이 기와 자연인데, 이 그림이 어떻게 관련있느냐. 이 얘기가 저도 순간적으로 착상한 건데, 가만히 따져보니까 이와 같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 “상상력의 과학은 가능한가” 저는 한의학에 대해 붙인 명칭이 근대과학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과학만 과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은 다양한 방식의 과학일 수 있고 특히 우리가 생각할 때, 상상력이 과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특히 한의학 책은 상상력 개념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상력으로 정당화되는 과학일 수 있다는 게 오늘 이야기의 주어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죠? 말 조어 자체가. 제가 원래 황당한 조어를 좋아합니다.


▲ 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읽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노자의 구절을 볼까요. 이것도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먼저 노자 14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어슴푸레하다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어렴풋하다고 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두루뭉실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질 수 없는 것이니 그 때문에 서로 섞여 하나가 된다.
(『노자』 14장: 視之而弗見, 名之曰夷. 聽之而弗聞, 名之曰希. (搏)之而弗得, 名之曰微. 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자, 여기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고 하고 들어도 듣지 못 하는 것을 희(希)라고 하고 손으로 만져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을 미(微)하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미하다, 미세하다’고 하는 표현이 여기서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의 표현을 보면 마치 서양철학적인 방식의 맥락과 쉽게 연결되기 위해서 ‘추상적’이라고 표현해요.

‘도’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도라는 건, ‘추상적인 거다’고 건너뛰어 버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유는 고대 중국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하학이나 특히 물리학, 수학, 동아시아에도 수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수나 산술적이었지 기하학과 같은 학문은 없었어요.

나중에 중국이 근대 수학을 받아들일 때도 기하학에 대해서, 도무지 이 놈의 학문체계는 내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정도로 기하학은 동아시아인들에게 독특한 학문이에요.

그럼, 또 이와 같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무엇과 연결시키느냐면, 주역대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자위지도’ 라고 해서 형이상(形而上)학이랑 연결시켜요.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형이상’ 이라는 말은 주역 대사전에 나오는 그 말의 맥락 자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사실 metaphysica 라고 하는 것. 이 본래 말의 출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배열할 때 자연학 다음에 오는 저작 텍스트를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자연학 관련 논문 다음에 나오는 논문이라는 뜻이에요. 거기서 다루는 것이 실체를 다루기 때문에, 이걸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그럼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실체를 다루는 학문이잖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입니다. 그 실체가 플라톤과 같은 사람에게는 이데아가 되잖아요. 형상이죠.

동아시아에서도 형이상이 나올 때, 형이상학이 도라고 표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를 실체 혹은 형상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건 잘못된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죠.

형(形)은 감각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지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그 윗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추상이라는 말보다는, 상(象)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지는 따져봐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냥 이걸 물질적 현상세계로 그냥 넘어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근대와 교통시켜버리는 거죠. 이건 근대에 의한 독해의 전형적 사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유형, 무형 이런 용어를 얘기할 때 형체가 있다, 없다는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즉 숫자 하나, 둘, 셋, 넷, 오렌지가 하나 있고 방울토마토가 하나 있고와 숫자 1은 다른 거죠. 숫자 1이라는 추상개념은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거죠. 이런 건 형이하학세계에 속하는 거죠, 구체적인 사물은.

그런데 이렇게 연결시키면 안 되고, 물을 생각하시면 돼요. 이만한 둥그런 냉장고 뚜껑을 열어서 판에다 네모난 얼음을 얼리잖아요. 그걸 뜯어서 물 속에 집어 넣어보세요. 그럼 물과 얼음이 구별 되나요? 잘 보면 보여요.

그런데 똑같이 무색인 물은 잘 안 보여요. 그때 형체가 있는 것은 얼음이고 형체가 없는 것은 물이죠. 유형과 무형의 관계는 그렇게 이해해야 해요. 실제로 굉장히 경험적인 사유를 했던 것이 고대인들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 德(덕) 용어의 기원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여기서 견,문이 불 자에 구성당하고 있죠. 시청과 견문은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어요. 본다는 것은 실제로 보는 행위를 가리켜요. 하지만 견은 보아서 안다는 뜻입니다. 인식을 전제하는 용어예요.

견문은 그냥 본다, 듣는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는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알았다는 뜻입니다. 견 자가 나오는 것은 분명히 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그냥 본다는 건, 못 볼 수도 있어요. 한자의 용례가 기본적으로 그렇게 쓰인다는 걸 생각하시면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어떤 사물을 응시한다고 해서 그 사물을 반드시 안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건, 고대 중국에서는 감각 자체가 인간의 객관적인 인식을 제대로 성립시키지 못 하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전제는 없습니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특히 기론적 세계에서는, 이 세계 모든 본질은 이미 현상 자체를 통해 드러나 있는 거예요. 즉, 보이는 것 속에 이미 보이지 않는 게 드러나 있어요.

보이는 것 속에 본질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示(시) 보기만 할 뿐이지만 見(견) 보고서 아는 사람은 다른 거죠.

이 본다를 “알아본다”고 하면 됩니다.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감각도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 신체가 반복적으로 했던 경험의 제약을 상당히 많이 받죠.

우리 시각이 굉장히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런 실험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면, 저도 글을 보고서 실제로 해봤거든요. 인종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백인들에게 흑인들 열 명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 얼굴을 보여주고, 그 다음 한 사람씩 지나가게 하고 “당신이 아까 본 사람이 열 명 가운데 누구냐?” 라고 하면 잘 못 맞춘답니다. 열 명에 아홉은 못 맞춘대요.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서양 사람은 못 맞춘대요. 그런데 한국사람은 백인은 잘 맞춰요. 왜냐. 브라운관을 통해서 상당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흑인은 잘 못 맞춰요.

지난번에 어떤 신문기사에선가. 누가 장치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집어 넣어서 실험을 했다는데. 인간의 감각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나의 능력의 문제. 그래서 ‘눈이 밝다’(明) 이건 지혜롭다는 뜻이기도 하잖습니까. 특히 노자 텍스트에서 명은 신적인 지혜의 소유와 같은 거예요.

하나는 해고 하나는 달이잖아요. 해와 달은 온 천지를 다 비추는 거예요. 다 아는 존재예요. 해와 달이 천지를 다 비추면서 다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지혜를 갖는 게 명이에요.

엄청난 단어죠. 인간이 이걸 갖고 있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 표현하는 말이, 신명(神明)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보통 무속인이 신명났다고 말하지만 사실 신명은 본래부터 아주 친밀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가 어디에 들어가 있느냐. 덕(德)에 들어가 있어요. 덕이라는 글자가 고대에서는 뭐와 연결되느냐면. 제가 약간 조야하게 그렸는데, 도철무늬라고 하죠. 특히 상형, 청동기에 이런 게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덕 자의 원형이고 이건 해와 달의 눈에서 왔다. 신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해요.

왜 청동기 속에 이게 그려져 있는가도 설명되고, 덕이 신명의 힘을 가진 사람이 발휘하는 거라는 거죠. 이 주체는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사람이고 태양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도덕경 속에 들어가 있는 덕이라는 용어의 출시는 그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런데 도덕경이 가진 성격은 그 앞의 것과 달리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힘이 어디서 오느냐. 도덕경은 내가 도를 따름으로써 덕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 덕을 얻는 방식이 天. 즉 나의 혈연적 조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을 다스리고 자연을 움직이는 입법을 따름으로써 힘을 갖는다는, 즉 정치적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다른 곳으로 바꼈다는 거죠.

이런 역할을 공조했던 사상이 음양오행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추연의 음양오행설은 왕조의 교체 정당성을 자연철학적으로 천명한 거예요. 원래부터 자연철학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사실 혁명이론이죠. 정치 교체이론을 얘기한 건데, 당시에 기론, 도론이 한꺼번에 개화하면서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노자의 이 구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는 뭐냐. 이 속에는 인간이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그 무엇까지 보려는 욕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움직임의 배후에, 이 때 배후를 meta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지 않으면 돼요. 그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면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은 보이지만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은 보이지 않죠. 하지만 그것이 꼭 추상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사과를 놓으면 떨어진다는 것은 도에 의해서라고 표현한다는 거죠. 특히 회남자에는, 길짐승이 뛰어다닐 수 있고 날짐승이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다 도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 것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자꾸 meta라는 방식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때 관계가 실제 현상과 어떤 방식의 용어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거죠.

지난 20세기에는 서구 근대과학을 흡수하고 배워야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친한 척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면 이제는 그 텍스트 자체를 오해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내부 맥락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이해시킬 수 있는 용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과정에서 이 얘기를 다시 해보자는 겁니다.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9_02.htm

◆ 상상력과 과학


▲ 신형장부도와 인체해부도

그 다음 문장을 보시죠.

[어떤 물건이 있어 혼돈스럽게 이루어졌으니 천지보다도 먼저 생겨났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홀로 서서 변하지 않으니, 천지의 어미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자(字)를 붙여 도라고 하고, 나는 억지로 이름하여 ‘크다’고 한다.
(『노자』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蕭呵寥呵, 獨立而不改, 可以爲天地母. 吾未知其名, 字之曰道. 吾强爲之名曰大.)]

앞에서 이야기한 세계와 뒤에서 얘기한 것이 이름을 얻어가기 시작합니다. 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도 혹은 대화 같은 글자가 출현하는 과정 이전에 그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던 용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 맥락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훨씬 더 본래의 맥락에 부합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런 용어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친숙하지 않고 표현이 낯설기 때문에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예를 드는 게 좋겠죠. 그래서 제가 한의학을 끌고 들어온 거예요.

허준 『동의보감』에 실린 「신형장부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왼쪽의 그림은 상당히 특이해요. 실제로 인간의 몸을 해부해보면 이와 같기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게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인지했어요.

오른쪽 그림은, 적어도 내 몸을 열어보더라도 이렇게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상식에 기초한 우리 몸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왼쪽의 그림은 허구냐, 망상이냐.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하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의사들조차도 이와 같은 그림이 실제와는 다르지만 의학적으로, 한의학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정당화해야 하느냐. 분명 우리 몸의 생김새 자체가 다르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왼쪽 그림과 같은 인간의 모습에 대해 인지가 있었고 그게 그림으로 표현되었냐.

의외로 단순하더라고요. 해부와 관련된 중국 역사 기록을 보면 몇몇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특히 <영추경>을 보면 장부의 내용을 측정한 것까지 나오거든요. 길이가 얼마나 그 속에 뭘 담으면 얼마나 들어간다고 해서 일본학자의 경우는 계량해부학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왕망시절에 반역자를 처단하고 그를 해부하게끔 했어요. 해부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로 형벌입니다. 중세 대학에서 해부를 허용한 것도 죄수들에 대해서 해부를 하게 한 거예요. 가장 극악한 형벌을 받은 사람이 해부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것도 마취 없이. 끔찍하죠.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해부하는 거예요. 그림에도 나오는 역사 자료라서.

그래서 죄수나 사형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형벌을 했다는 거죠. 끔찍한 거죠. 이와 비슷한 끔찍한 일들이 꽤 많아요. 1950,60년대인가 어린이들은, 어린이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아직 미숙하잖아요. 아주 어린 애들을 수술할 때 쓰던 마취약이 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마취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근육이 움직여서 고통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근육이 경화돼서 근육이 안 움직여서 아프다고 표현을 못 하는 거예요.

엄청나게 많은 어린이들이 그 약이 투여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거예요. 끔찍한 거죠. 의학에서 일어나는 수술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쇠고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들은 정치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의학적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일본이 특히 20개월 월령 아래의 소들만 수입할 수 있도록 조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정부가 직접 협상을 안 했고, 보건과 관련된 단체에서 협상을 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언론적으로 할 수 있었고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한의학에서 인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실제 중국의 의사들도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반드시 째고 열어서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거니다. 우리는 서구 의학 자체가 오랜 과학발전을 통해서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이 결합된 상태에서 이른바 해부병리학이 있었고 인간의 병을 진단한다고 생각하시죠. 상식적으로.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서구에서마저도 해부학적 지식이 실제 병리학과 연결되어서, 예를 들면 장기 명칭이 나오고 질병 명칭이 나오는 걸 해부병리학적 명칭이라고 해요.

그와 같은 방식의 일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에요. 달리 말하면 서구 의학에서도 해부학은 실제 의학 사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게 별로 없다는 겁니다.

다빈치 시대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해부를 하고 해부도를 그렸는데, 이 사람들은 의사가아니라 예술가들이에요. 화가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죠.

이 당시에도 의사들이라고 하면 주로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느냐. 내과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럼 수술은 누가 했느냐? 이발사가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제가 배우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실제 뇌수술을 하는 게 나오는데, 이발사예요.

이발사라는 직업은 상당히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직업이라고 해서 단순히 높은 직업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효자동 이발사>에 송강호 씨가 나오잖습니까. 이발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대단한 직업이냐면, 맨 마지막 장면에 이발할 머리가 없으신 분들이 들어왔다가 잘렸잖아요. 전에 박정희 대통령을 하다가.

그런데 이발을 하든 면도를 하든, 특히 면도를 생각해보세요. 칼을 목에다 대고 하는데 그 사람이 믿지 못 할 놈이라면 그 권력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 자기가 하면 되죠. 안 하죠. 이게 권력이 갖는 속성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만약 내가 이발산데, 정치지도자가 나쁜 놈이다, 아니면 반대파 쪽에서 뭘 받았다고 하면 손쉽지 않습니까. 이발사라고 하는 직업에 대해서도 그걸 보면서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됐단 말이죠.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신체 내부를 들여다본다 혹은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 방식을 사진이라고 하죠. 환자에게 묻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맥진입니다. 중국 의학하면 맥진과 동일어로 보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맥을 잡는 것이 한의학의 가장 큰 특징이고 치료를 할 때는 침을 쓴다. 이게 바로 한의학이 가진 이론과 임상의 가장 큰 힘입니다. 둘 다 기와 관련돼 있죠. 그래서 기를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에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왼 쪽의 그림은 시각적인 거죠. 그런데 한의사들은 실제 인체를 칼로 열고 해부해본다는 방식이 어떤 모양,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느냐와는 무관했어요.

아까 제가 소개할 때, 황제내경 영추경에 든 서술을 보면, 크기를 재긴 하지만 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 그 다음에 심장이나 폐가 어디쯤에 위치해있는지 길이는 얼마나인지 측정하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침을 꽂을 때와 긴밀히 연관되는 방식으로 내부를 들여다봤단 말이죠.

실제로는 장기의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위치가 중요한 거죠. 위치라는 말은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 상상된 신체

또 한 가지, 이렇게 엉성한 그림을 놓고 보면서도 더 이상 해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해요. 그 배후의 메커니즘은 뭐냐. 칼로 째고 본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는 거죠.

그럼 뭘 통해서 본 거냐. 손가락으로 본 몸이라는 거죠. 손가락으로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본 것인데, 이 촉각적인 것을 어떻게 들여다봅니까. 촉각이라는 것은 인간이 전달하기 어려운 언어감각체계예요.

가만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특히 눈은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외부로 노출된 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전달받는 것의 90%가 눈을 통해 들어간다고 해요. 그래서 인간 자체가 눈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상당히 쉬워요.

그런데 촉진한다는 것. 이건 분명히 촉각을 통한 거예요. 그런데 그 안을 도대체 어떻게 자기가 들여다본 내용, 경험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림이나 글자 혹은 언어화시켜서 전달해야 하는데, 참 전달하기기 어렵잖습니까. 그러다보니까 해부도와 같은 그림이 이렇게 된 까닭은, 실제 형태상의 문제가 아니라 촉진을 통해서 받아들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시각이 굉장히 중요한 매개가 되기 때문에 그 촉각의 정보를 전달하기 용이한 방법으로 시각화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따라서 이게 실제 형태의 모습과 같냐 안 같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몸속을 흐르고 있는 기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고 어떠한 지점에 어떤 자극, 침을 가했을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와 연결되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상상된 신체’라는 표현을 썼는데 상상은 그냥 imagination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의미의 상상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한된 의미로 쓴 건데, 기본적으로 이것이 시각의 상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상을 이미지라고 표현한다면, 촉각적으로 지각된 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그러다보니까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의 전환을 한 노력의 결과로 보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때의 그림은 상상된 신체의 모습이다. 해서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시각적인 내용 자체가 아니라 기라고 하는 무형한 것을 유형한 것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죠.

한의사 분들이 많은 자리에서 이 얘기를 발표하니까 ‘그럴듯하다’ 동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분들은 실제 임상하는 것들이고 이 그림을 그렇게 그린 것이든 상관없죠, 이 분들에겐. 효과가 중요한 거니까.

그런데 저 같이 문헌을 통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한다는 게 왜 중요하냐. 바로 과학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을 새로운 기준을 통해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이게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야기 내용은 이게 다 예요. 그런데 이 속에 들어있는 논리가 뭐냐가 중요한 것이죠. 이와 같은 방식의 정당화 논리를 꺼냈는데, 그럼 도대체 이런 정당화 논리가 우리에게 뭘 줄 수 있느냐. 그 배면의 논리는 무엇과 관련되고 실제로 이것이 다른 것과 관련돼서 어떤 함축을 지니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념들로 건너가게 될 텐데. 첫 번째는 자연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자연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고 또 한 가지는 자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에 관한 얘기를 할 거고. 그리고 그 기를 인간이 인지하는 중요한 카테고리인 음양오행을 얘기하면서 노자 속에 들어 있는, 노자엔 음양표현이 나오죠.

그 다음 충,기,이,비,화라고 하는 표현 속에 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의 배면에이 도와도 연결돼 있고. 따라서 노자라는 책 속에 명시적으로 들어있지는 않지만 여러 표현들 속에 함축돼 있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이해한다면, 이 세 가지 용어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난 건, 황제내경 속에 노자의 일부 문장이 인용돼 있는데, 그 일부 문장들이 하상공 판본에 있는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판명돼요.

그래서 노자 원문 일부가 황제내경 속에 들어가 있어요. 따라서 노자와 황제내경은 상당히 친연성 있는 문헌이라는 증거가 있거든요. 그것이 바로 황로학이라는 학문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것은 노자 텍스트만 가지고 노자를 이야기하는 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된 맥락들, 역사적 상황,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용어들에 보다 분명한 맥락을 부여하면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우리가 처음 봤던 것처럼 몸의 관, <신형장부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왜 이렇게 그려질 수밖에 나름의 이야기 세 가지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



---

김시천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08_01.htm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 하상공의 노자 해석 : 치자의 덕목


▲ 치자의 청정무위淸靜無爲

여기까지는 백성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 하는 방식의 이야기인데 번역을 하신 분이 그러면이라고 말을 붙였던 것처럼. 여기에서 목소리와 톤이 즉 화자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雖有舟輿, 無所乘之;)

보통 우리가 이 부분을 해석할 때는 문명의 이기들이 있더라도 밖에 나다닐 일이 없으니까 할 일이 없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뭐라고 해석이 나왔냐면.

맑고 고요히 무위하고, 번잡하고 화려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들고나며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淸靜無爲, 不作煩華, 不好出入遊娛也.)

누가. 노는 것 싫어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데 놀지 않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치자. 왜그러냐하냐를 따져보죠.

원문을 보세요. 淸靜無爲 청정무위라고 하는 말이 나오죠. 청정무위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초기의 이념. 황로학의 이념을 표현한 네글자입니다. 이 말은 현재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는 용어에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있느냐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치자가 간섭하지 않음이라고 되어있어요. 대한화사전이라든가 보면 일반적으로 나오고 지금도 쓰이고 있는 용어입니다.

왜 이 얘기가 나왔느냐. 저는 이런 것들 때문에 바로 하상공 주석이 한 초의 이념을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저는 이제 보는 입장에 있는데. 대다수분들이 대개 후한쪽으로 많이 봐요. 특히 최근에 국내에서 연구하신 분들은 후한시대의 문헌이다라고 보는데. 저는 이제 이것이 구전 전통이 나중에 문자로 정착된 것은 후한이지만 일부 상당 부분은 한초의 맥락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특히 이런 것들이 증거라고 보는데.

어느 쪽이 옳다 라고 확실하게 결판 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용어가 황로학의 이념을 대표하는 용어라는 건 분명해요.

즉 백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즉 농사철을 어기지 않고 제대로 해야지만 자식을 낳고, 먹일 수 있고 하는 방식의 그런 기본적인 생계조건을 마련해주는 그런 정치적 행위방식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不作煩華부작번화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앞쪽에도 나와있죠. 법명이 많으면 간섭이 많은 거예요 기본적으로. 지금은 워낙 다양한 방식의 범죄들이 일어나니까 그런 것들을 잡아내기 위해서 법을 입법하거나 아니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복지차원에서 입법하는 것. 크게 두 가지이지 않습니까.

하나는 무엇이냐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법이라면 하나는 안좋은 것을 제어하는 방식, 규제가. 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죠.

그런데 여기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이 많으면 안좋다. 이 얘기는 무엇이냐면. 한나라가 실제로 법대로 없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죠. 한나라는 반진. 요즘에 말하는 ABC 그다음에 ABR 하고 비슷한. 흔히 요즘 언론에서 표현되는 용어죠. ABC는 anything but Clinton은 ABR은 anything but Rho. 참여정부의 그것하고는 다른 기조의 이런 방식으로 한 것처럼. 당시의 한나라는 무조건 진나라가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고 선포하면서 했어요.

특히 함양성에 입궁하기 전에. 유방이 먼저 도착했죠. 나중에 항우에 필적할만한 나름대로의 세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 진 치고서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랬다가 항우가 들어간 다음에 갑니다. 이 때 유방이 가만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에 있던 장로들을 만나요. 진나라의 가혹한 학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세 개조만 법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싹 없애겠다는 약속을, 기록에 따르면 거기에서 했다라고 해요. 그래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냈다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나 진나라의 법률전문가들을 그대로 살려냈고. 간다는 말이에요. 특히 이 때 한고조 그 다음에 효해제. 그 다음에 들어서는게 문제. 그래서 文景之治문경지치 라고 하는 표현. 한나라때면 나오죠. 가장 성세라고 표현하는 시대 중에 하나가 이 때에요. 그 다음에 정관지치니 이런 몇 군데가 있지 않습니까.

문경지치라고 하는 것은 문제와 경제 시대에 황제의 다스림. 그러니까 지치의 시대라고도 하고 아주 안정된 상태라고 얘기를 하죠. 이 때 문제가 있을 때 아주 유명한 고사에요. 문제가 왜 문제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느냐. 무일 경우에는 무를 앞세워서 정복한 그래서 주나라에도 무왕이 있고 다 있잖아요. 한 대에도 무제가 있고. 군사활동을 많이 했으니까. 다 무가 있단 말이에요.

보통 태종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다 그와 비슷한 방식의 일들을 했죠. 왜냐하면 안정시키기 위해서.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나라 때 법명이 정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전이가 됐어요. 초창기에만 잠깐. 왜냐하면 할 수 있을 만한 능력도 안됐고. 그렇잖아요.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공권력이 필요한데. 공권력을 준다라고 하는 것은 치세가 안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조세제도 등등의 갖가지 것들이 완비되어야지만 가능한 건데. 할 수 없으니까 못한 거에요. 사실은 청정무위는. 기본적으로.

군현제가 아니라 군국제로 회귀했다는 거거든요. 귀족들의 특권을 다시 인정해주고. 결국은 하나하나씩 죽였지 않습니까. 이성 異性. 류씨가 아닌 사람들부터 하나하나. 한신의 몰락이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고.

그런데 문제는 사기, 편작창공열전이라는. 유명한 의사 두 명이죠. 이 창공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의사였는데 굉장히 치료를 잘했어요. 치료를 잘안해줘서 원성을 샀어요. 많은 사람들한테. 그래서 이 사람이 뭐에 연루가 돼서 올라가요. 압송을 당해서 사형을 받으러.

그 집 셋째딸. 딸을 잘 둬야 되요 그래서. 아들은 소용이 없어요. 맨날 자기가 아들이 없어서 이럴 때 제대로 도움을 못받는다라고 하니까. 막내딸, 셋째딸이 가서 내가 아버지 대신 죄를 받겠다 하고 탄원을 해서 왕이 그것을 윤허해서 사면을 해줘요. 그리고 나서 창공한테 네가 여태까지 했던 어떻게 의술을 닦았는지 그 다음에 너의 임상기록들을 보고를 해라라고 해서 편작창공열전 뒷 후반부가 임상에 관한. 이른 바 공식문서화된 의서로써는 최초로 나옵니다.

그 이전의 것들은 다 출토된 문헌이거나 하는 방식인데 비해서. 그것은 실제로 창공이라는 사람한테 요구를 해서 정부에서. 그래서 이 사람이 조정에 바치는 보고서가 거의 그대로 삽입되어서 나와 있는 기록이에요. 그래서 황제내경보다도 의료사적으로 앞서있는 문헌이거든요.

그것이 그렇게 나오는데. 이 사람이 더 유명한 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더 유명해요. 치도곤을 당해서 죽을 뻔했는데 딸 때문에 살았어요. 문제가 그것을 사면해준. 그래서 문제. 가혹한 형벌을 낮추었다는거죠.

특히 나중에 무제 시대에 들어가면 중국법률사에서 특히 표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원심정죄原心定罪라고 해서 동중서가 여기에 동의를 했다고 해서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부분인데. 원심정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본래 중국 진나라 형법 제도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증거주의 이미 채택되어 있었고. 그리고 법률체계, 형벌체계가 상당히 합리적으로 되어 있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나라의 법제가 그렇게 끔찍하지 않습니다.

한나라 때, 진나라에 대한 엄청난 비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안그렇다고 그래요. 실제로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거의. 오히려 그것을 더 관철시키고 싶었지 할 수 없으니까 못한 것 뿐이에요. 모든 치자들의 욕심이 그랬던 것처럼.

이 원심정죄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바로 반란 세력을 초토화시키는데 잘 동원했던 것인데 원래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입각한, 증거에 입각해서 처벌하게 되어있는거에요. 그런데 이것은 뭐냐하면 그 마음을 따져봐서도 죄를 정할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실제로 물증에 의해서 처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 역심을 품었지?해서 죽일 수 있는 방식의 법원리에 당시에 제출된 거에요. 무제 때 실질적으로 말 안듣는 사람들 재산 몰수하고 전쟁동원하기 위해서 그 물자들 조달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 많이 했을 때. 가장 쉬운 것이 너 반역하려고 했지? 하면서 구족을 멸하고 환수하고.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회체제가 있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그러면 귀족 지배층들이 그렇게 당했으면 그 밑에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더 가혹하게 당할 수도 있는거죠.

그래서 사실은 전한시대의 절정기는 무제때이지만 그 절정기가 바로 몰락의. 그래서 늘 클라이막스는 몰락의 시작이라고 하는 표현이. 똑같습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내용은 ‘번잡하고 화려함을 일으키지 않으며’는 초창기의 맥락들을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호출입유오不好出入遊娛 라고 하는 것은 娛오 자는 오락할 때 오자에요. 즉 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지금처럼 집안에서 TV보고 영화관 딱 홈세트 설치해서 보고 이게 아니에요. 뭐하고 놀았겠어요. 사냥 한 번 가죠. 그 다음에 연회 한 번 베풀죠. 그럼 동원되는 사람이. 황제가 한 번 사냥을 할 때는 수만명이 동원이 되는 것 아시죠. 동산전체를 병사들로 쫙 둘러가지고 못 도망가게.

그리고 그 안에서 사슴들이 풀어놓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 잡는거에요. 가봐야 못가요. 그것이 황제가 사냥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무협TV같은 데 보면 삼국지에서도 그렇고 보면 사냥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금촉이 달린 화살 해서 빵 쏘고 조조가. 현제랑 막 하면서. 그런 것도 나오고.

그러니까 한 번 논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물자가 동원이 되는 것이죠. 인력이 동원되고. 백성들에게는 무지무지하게 피곤한거에요. 앞뒤 맥락이 딱딱 맞죠. 그러니까 하지 말고 청정무위해라. 황제가 자주 나다니는 것은. 보통 황제가 나다닌다고 할 때 밤에 월담하는 경우는 있죠. 성종이 참 많이 했고. 그래서 자식이 몇 명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른 바 민정을 살피기 위해서 다녔던 것. 강희제, 용정제 그 황제들(청나라)이 그랬죠. 이 당시에는 못나가요. 나갔다가는 칼 맞아 죽기 십상이죠. 안정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나갑니까.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동원이 있는 것이고 지난번에도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홍루몽이라고 하는 소설의 첫 배경이 그 집안의 딸이 황후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이 됐어요. 그 후궁이 친정나들이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와서 잔치하고 가면 되잖아요. 대관헌이라고 하는 엄청난 공사를 지어서. 한 번의 친정 나들이를 위해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후궁이 그러할진대.

황제가 자주 들락날락 거린다. 아주 아주 곤란하죠. 이화원을 한 번 가보시면 그런 걸 쉽게 느낄 거예요. 이화원이라고 하는 데가 맨땅을 파서 호수를 만들고 판 땅 흙을 가져다가 산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 세운 것이지 않습니까. 올라가보면 사방이 다 뚫려 있기 때문에 다 보여요.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꽤 있어서 안 그렇지만. 대단한 일이라는 거죠.

도대체 내가 한 번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 백만명 단위의 규모가 가서 삽질한다. 불도저가 아니라. 그런 걸 한 번 생각해보시라는거죠.

불호출입유오不好出入遊娛 이것은 백성들이 박수치는 일이에요.


▲ 우민화 정치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雖有甲兵, 無所陳之.)
㈜ 천하에 원한이나 미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無怨惡於天下.)

이것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천하 백성들에게 원한 사거나 미움 당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은.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체가 치자, 황제, 제왕에게 몰려 있어요. 백성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레타고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것은. 왜. 내가 한 번 행차하면 피곤하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노끈을 묶어 사용하게 하라.(使民復結繩而用之)

이 주석이 굉장히 어떤 소박주의 뭐 그런 것들로 해석되는데.

㈜ 겉꾸밈을 버리고 질박함으로 돌아가니, 신뢰가 있어 속임이 없다.(去文反質, 信無欺也.)

여기서 문자의 사용을 폐기하라 이렇게 해석을 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안되는거에요. 왜. 행정은 문자 없이는 안되요. 기록 없는 국가, 정부는 있을 수가 없죠. 기록의 누적은 기본적으로 국가로부터 파생되니까.

여기에서 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백성들에 대해서. 즉 기본적으로 우민정치에 대한 얘기죠.

대한민국이 시민의식이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현실하고 분명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라고 하는 것은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교과서를 가지고 서로 개정하겠다고 서로 다투고 하는 일들이 왜 일어나겠어요.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 그 문자를 통해서 얻는 지식의 취득뿐만 아니라 거기에 온갖 문화적인 행동양식들이 집약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즘 인문학 서적이 안팔린다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문학이 미래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맞물린 커다란 사건이에요. 저도 이제. 책 얼마 쓰지도 않았고. 주로 남들이 잘 안 읽는 논문들만 써서 그렇긴 하지만.

저는 우리 사회에서 제일 빨리 없어져야할 병폐 중에 하나가 대중서하고 학술서를 구분하는 관행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리고 학술서를 교재로 쓰고 일반 비전공자들에게 읽히도록 강요하는 문화. 과거에 그렇게 수업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은 권위주의 방식이 아닌가.

물론 학술 세미나나 강연, 강의 자체가 서비스업이라고.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분류가 되요. 그것은 동아시아 정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거죠. 하지만 그렇다라고 하더라도 학자가 학자인 까닭은 자신이 고생해서 얻은 걸 너도 똑같이 한 번 고생해서 읽어봐 !하면 곤란하잖아요. 학자가 있는 까닭은 소화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학자인데. 그렇잖아요.

학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쓴다. 물론 철학이든 문학이든 단계가 높아져서 자신이 생각한 창조적인 사고를 정치학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표현들을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책들이라든지 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온 것들이죠.

우리 스스로가 독자들이 〈순수이성비판〉왜 옛날에 철학과 다니는 선배들이 꼭 그런 장난을 쳤다라고 하더라고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탈 때는 꼭 독일어판 원전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딱 들고 다니고. 그 다음에 미대나 이런 데 예술대 다니는 여학생들 특히. 한글책 안갖고 다녀요. 꼭 외국그림책도 반드시 원서로 갖고 다니더라고요. 큰 책.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되나. 한국 사람이 쓴 책. 조금 아쉬운 것은 한국의 독자들이 아직도 외국 책들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 더 권위를 부여하고 선호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학문을 망치는 것일뿐더러 우리 학문자체가 학자들 이전에 우리 사회의 교양이라는 것 상식 자체가 식민화된다라고 하는 현실하고 그대로.

소고기 수입하고 뭐 수입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죠. 외국책을 번역해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계속 현실을 진단하는 방식으로 읽는다라고 하는 것은 학자든 누구나 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그네들의 눈으로. 물론 우호적인 사람있고 좋은 사람있어요. 하지만 진보니 보수니를 떠나서 외국책에 대한 선호는 기본적으로 근본적인 식민주의, 식민주의학문의 뿌리가 만연되어 있다라고 보는 징조라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 학자가 쓴 글이 모자라잖아요. 하 우리나라 학자는 이래서 안되. 이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은 인정해주고 모자란 부분은 비판해야죠. 하다보면 비판을 먹으면 다음번에는 쪽 안당하려고 잘 쓰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쪽팔리다. 그것만큼 학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없거든요.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는거에요. 사실. 저도 강의 준비해오는 것이 뭐냐면은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혹시나 어려운 질문 나오면 어떻게 피해갈까 작전까지 짜서 오죠.

대표적인 장난 중에 하나가 예전에 한자를 쓰다보면 예전에는 다 손으로 원고를 쓰니까 상관없었는데 지금은 다 워드로 해서 고르잖아요. 안쓰니까 손에서 기억이 빠져나가고 눈으로만 구별이 되요. 되게 쉬운 글자도 안되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여러 선생님들이 모여서 경합을 벌인거에요. 자기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그래서 막 쓰다가 하나가 생각이 안나니까 갑자기. 아주 유명한 선생님이에요. 딱 이렇게 하더니 F9. 키보드에서 F9누르면 한자가 뜨잖아요.

이런 일들이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어떤 어학을 갖고 승부하는 그런 시대 아니고.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차원이 학자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모든 차원에서 마찬가지로 조금 통용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하상공 주석은 철저하게 그 당시의 현실문제와 씨름하는 방식으로 주석이 이루어졌다. 왕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것은 훨씬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는 것뿐이죠.

왕필도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상적 맥락 속에서는 당시의 용어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백성은’하고 주어를 밝혀줬습니다. 번역이 참 좋아요. 이석명 선생님이 번역한 책인데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동양편)〉이것이 두 세가지가 나와있는데 이것이 번역이 상당히 좋으니까 이것을 참조하시면 크게 사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거에요, 거의.

(그러면 백성은) 자신의 밥을 달게 여기고(甘其食)

저는 여기는 다른 방식의 뉘앙스를 달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큰 문제가 없으니까 그대로 나갑니다.

㈜ 자신의 나물밥을 달게 여기고, 다른 백성의 음식을 빼앗아 먹지 않는다.(甘其蔬食, 不漁食百姓也.)

자신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美其服)
㈜ 자신의 나쁜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남의) 화려한 옷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美其惡衣, 不貴五色.)

자신의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安其居)
㈜ 초라한 오두막을 편안히 여기고 화려하게 꾸민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安其茅茨, 不好文飾之屋.)

자기네 풍속을 즐기게 된다.(樂其俗)
㈜ (자기 동네의) 질박한 풍속을 즐기고, (딴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다.(樂其質朴之俗, 不轉移也.)

이 구절들은 사실은 별 얘기가 아니에요. 뭐냐하면 안보여주면 몰라요. 20세기 자본주의 사회 꽃을 광고라고 하죠. 그러면서 광고가 20세기 자본의 꽃이라고 다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비판적인 소비자연대 이런 데 가면 광고를 믿지마라 광고는 뭐 안하고.

그래서 요즘 나오는 얘기가 스타들의 신체를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다. 연예인의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관한 많은 비판 담론들을 성숙시켜놓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못사요. 그렇죠. 달리 말하면 이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우민화정치가 들어있는건데 사실은 우민화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볼 때는 아주 안좋은 말처럼 생각되지만 이 당시에는 사실은 정치적 필요이기도 하고 중립적인 면도 있습니다. 분명히.

물론 오늘날 우민정치 옹호한다. 그것은 곤란하죠. 그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얘기라면 이 당시에 이런 방식의 표현들은 실질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가. 백성의 범주 속에 4계급까지 포함시킬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런 방식의 것들을 고민하며 생각한다는 것은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 소국과민의 낭만적 해석의 한계

(그 결과)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소리 개소리 서로 들려도
㈜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는 말이다.(相去近也)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가지 않는다.(民至老死不相往來.)
㈜ 백성에게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其無情欲)

라고 하면서 나온 얘기가 정욕입니다. 이 정욕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무슨 맥락이냐면 하상공 주에서는 정욕이라고 하는 표현이 기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맑고 좋은 기를 받은 사람들은 현인이나 성인이 되고 혼탁한 기를 받은 사람들은 일반 서민, 백성들이 돼서 자기들의 정욕을 다스릴 줄 몰라요.

그래서 성현이 백성들을 다스려야 된다는 근거방식도 여기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기氣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방식이 아니고 그런 방식에 있어서는 이것은 정치적인 용어가 되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신분체계를 자연학적으로 근거지어 준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것은 이정호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가치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고 자연철학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철학은 상당수가 이것이 왔다갔다 합니다. 특히 기가 이기론과 붙어서 이야기할 때는 기질변화론 같은 것 얘기할 때 안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도덕적인 담론이 과학화로 성공한 특이한 아주 특이한 사례가 바로 사상의학같은. 전세계에 없습니다. 그와 비슷한 건 있다라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고. 사상의학은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과학이에요. 철학이기도 하고. 실효적인 효과를 보니까요 실제로.

그래서 최근에 보건복지부에서 입안한 정책 중에 하나가 사상에 의한 기질. 팔상으로 나누는 분들도 있죠. 팔체질. 그것을 유전적으로 DNA 연구. 유전자 연구를 통해서 기질적인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하겠다 라는 게 나와서 상당히 2,000억 규모까지도 얘기가 됐다가 지금 실효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10년 단위로 해서. 실제로 의학하시는 분들이 말도 안되는 얘기다. 기하고 유전자를 연결시키겠다.

어쨌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뭔가가 이루어질 정도로 사상의학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아직 설을 풀 수 있는, 현대적으로 용어를 표현하거나 체득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못하겠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는데도 안간다 못간다 늙어죽을 때까지. 그러면 아주 쉽게 생각하세요. 갈 필요가 있는데도 못가거나, 아니면 아예 못가게 해서 못가거나. 두 가지예요.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거든요. 그러면 뒤엣것은 이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고. 그런데 적어도 표현이 인국인데 이 때 국이 얼마나 작길래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요. 이것은 마을 단위를 얘기하는 것이겠죠. 기본적으로.

그럼 앞에 것이랑 뒤엣것이랑 잘 안 맞는 말인데 사실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접경지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행정적인 분계선, 한계선. 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한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면 이 구절은 아주 쉽게 이해가 되죠.

이렇게 보건대 하상공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소국과민의 세계는 좋은 나라에요 나쁜 나라에요? 행정적인 발전의 단계로 본다면 좋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시각은 당시의 역사적 필요 특히 치자의 복무하는 담론이고 철저하게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분석되고 있다라고 하는 점.

이런 점을 본다면 낭만적인 해석, 이른 바 특히 니담 등으로 이해서 하는 원시적 농경 공동체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어요. 그리고 왕필의 주석에서도 구체적인 마을의 모습에 대해서는 사실 알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왜 이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됐느냐. 바로 그것은 노자가 유행했던 방식하고 사실은 이것과 매칭된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있냐면 노자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행했던 시기하고 현학이 정치적 담론에서 그와 같은 문화적 담론으로 바뀌는 시기하고.

또 하나는 남쪽지역 강남이 개발하던 쪽하고 급하게 매칭이 되고. 또 한가지는 지식인 사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은일자들이 대거 출연합니다. 위신시대에. 그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시인 도연명이에요. 그래서 지금 여러 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소국과민의 이미지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갖다가 중첩시킨거에요.

---

◆ 도화원기와 노자 해석의 가능성


▲ 도연명과 도화원기

도연명이라고하는 사람은 376년에서 396년 4세기를 살았던 사람이에요. 왕필로부터도 이미 100년이 훨씬 멀어져 있습니다. 249년에 왕필이 죽었으니까. 그 때는 언제냐 동진시대에서 넘어가는 때이고.

이 동진이라고 하는 시대는 특히 신화학을 하는 분들한테는 굉장히 기억에 남는. 왜냐면 신화에 관한 자세한 기록들이 담긴 문헌들이 대거 출현하는 시대가 이때예요. 東晋 이 시대가.

그런데 문제는.〈도화원기〉에서 진나라도 나오고 하는데. 秦 진시황의 진자죠. 이 진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동진시대라고 하는 것은 남북조시대라고 하죠. 또 한 편으로는 5호16국시대니 뭐니 해서 북쪽은 그 이민족들이 왕조를 수도 없이 번갈아가며 세웠던 데고 남쪽은. 중원지역에 있던 지식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남쪽을 장악해요.

그 첫 발판을 만든 게 누구냐면 삼국시대 오나라에요. 오나라가 건강에 자리를 잡죠. 건강이 어디입니까 지금의 남경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오나라가 북쪽의 위나라나 서쪽의 촉나라보다도 약했었는데 약할 수밖에 없는 게 이민정권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통치기반을 거의 마련을 못했어요. 이것은 계속 이어집니다.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가 섰다가 진나라가 이민족에 의해서 밀려나면서 강남쪽으로 내려온 것이 동진이죠. 이 시대에는 동진을 이민정권이라고도 하고. 강북의 권문세족, 사대부 이런 사람들이 내려와서 그 쪽에 있었던 남쪽 본래 있었던 토착 지식인 세력, 사대부 세력들과 공조를 해요. 그래서 세운 정권들이 이런 정권들인데.

차츰차츰 토착 세력들을 몰아내고 본래 북방 출신의 권문세족들이 다 요직을 장악하고 구품관인법 같은 것 얘기했죠. 이 당시에 관리 등용법이 그것이니까. 자신들의 귀족 서열들을 매겨놓고. 이 때 귀족들의 세력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황제가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기 나름대로의 세력도 있었고.

이 당시 경제적인 방식은 장원제도에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장원들을 소유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엄청난 사치를 했고 축첩을 하고. 어떤 사람은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만전을 들였다고 해요. 만전. 그리고 가장 많은 축첩을 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첩이 몇 명이냐면 3,000명. 이 당시 첩 개념은 그 집에서 잡역을 하는 일꾼들 노비들 다 포함해서 첩의 개념에 소속되요.

그래서 이 사람이 밤에 지나가던 어여쁜 자기네 집안 여인과 자식을 낳잖아요. 그래서 재상이 된 사람이 꽤 있거든요. 재상집 방문했다가 어미가 음식 수발을 들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가. 그러면 내 어머니인데, 네가 내 어머니를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느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당시에 아주 독특한 기풍이 있어요.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죽림칠현인데. 죽림칠현은 이상하게 실제내용하고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최근에 나온 책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죽림칠현들이 왜 서럽게 울다 죽고 했는지가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밝혀낸 책들이 있는데.

도연명도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집안이 강남의 토착 귀족 가운데 하나에요. 건국공신 가운데 하나에요. 북벌 세력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남쪽 출신 사람들을 억누르면서 몰락해가는 귀족이 되는거죠. 그러다보니까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데.

이 사람은 귀거래사 등등 귀원전거 이런 식의 한 150수 정도를 남겼다고 하는데. 시인으로 굉장히 유명하죠. 아주 유명한 시인인데. 이 사람이 쓴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시들 몇 개가. 시를 제외하고 산문 쪽에 가까운 것이 〈도화원기〉하고 〈오류선생전〉. 자기네 집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 심어놓고 살던. 그 다음에 현대 중국 철학자 가운데 풍우란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 집 앞에 북경대학교 내부에 숙소 앞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양반의 전집 제목이 삼송당전집이에요. 그런 것들이 다 옛날 문인들의 전통이거든요.

이 사람이 도화원기라고 하는 내용을 썼는데. 이것은 조금 길더라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맥락들을 잘 염두에 두면서 보세요.

진(晉) 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376-396) 연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무릉이 도화원 혹은 세외도원, 무릉도원 있었던 곳이냐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무릉 사람이죠. 이 사람 출신이 본래 무릉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무릉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무릉도원이 있는 곳이 어디냐를 놓고 서로서로 싸운다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요즘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 있죠. 張家界. 그 다음에 여산계곡에 있는 康王谷강왕곡. 이것이 대표적으로.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박한재 선생님이 이 시대를 전공한 분이에요. 역사기행이라고 해서 실제로 가서 1,2,3권으로 나와 있는데. 2권이 강남의 낭만과 비극이고 네 번째 챕터가 도연명을 다루고 있어요. 제가 장가계의 풍광을 보여드리려고 갖고 왔는데. 비경이죠.

중국 사람들이 치는 산 중에 천하명산이라고 하는 것이 경치를 치면 황산을 쳐요. 그래서 황산을 가봤거든요. 조선족 안내인이 자랑을 하길래 이런 산이 한국에도 있느냐. 그랬더니 설악산보다 못한데. 그랬더니 기분 상해하더라고요.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실제로 가보니까 좋지만 설악산도 좋고 금강산은 제가 못가봤어요. 하여튼 경치가 이 장가게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강왕곡은 강왕곡 사진은 안나와있고 다른 것이 나오는데. 이 책을 보시면 그런 얘기들이 잘 나와요. 제갈공명도 태어났던 곳하고 어디하고 해서 서로 유적지를 뺏어가려고 싸우고 도연명도 태어난 곳하고 생활했던 곳하고 무덤 있는 곳이 달라요. 구강현 하고 시상현이 기념관을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결국 구강현이 경제력이 좀 앞선데요. 그래서 이겨서 기념관이 그 옆에 있답니다. 가보면 실제로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많은데.

도화원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눈 앞에 나타났다.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고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날려 펄펄 떨어지고 있었다.

복숭아나무 꽃이 즐비한 풍광 보신 분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벚꽃보다 아름다워요. 제가 군생활 할 때 사택같은 데서 한동안 근무를 했었는데 그 앞에 복숭아 과수원이었거든요. 진짜 풍광이 끝내줬어요.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는데, 그 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이 얘기가 왜 가능하냐. 여기가 어디냐면 양자강 하류에서 조금 올라가면. 삼국지 보시면 자주 나오는 파양호 라고 힜죠. 특히 오나라 군대가 수중훈련을 했던 곳이 파양호거든요. 파양호가 있으면 바로 옆쪽에 지역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도현명이 주로 생활했던 시상현이 있고 구강현은 이 위쪽에 있고. 북경쪽으로 가는 열차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 지역이에요. 달리 말하면 이곳은 습지라는 얘기에요. 곳곳이 습지가 많고.

그래서 우임금이라든가 순임금과 관련된 이른 바 치수사업 설화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에요.

이곳은 정치적으로도 격변기였었고 아직까지 실제 백성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나 이런 것들이 거의 없던 시대였고 그리고 산이 많고 물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숨기 좋다는 뜻입니다.

양산박같은 경우에도 숨을 수 있었던 것이 물로 막혀져있고 요지에서 방어하니까 천의요새니까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와 같은 방식의 지리적 조건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들어가니까, 동굴을 지나니까. 우리나라 고전 소설에서도 꽤 나오는 이야기죠. 특히 무협만화 보면 특별한 수련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숨는 데가 폭포수 뚫고 들어가니까 거기 천해의 비경이 있고 그런 것 많이 나오잖아요. 청학동에도 그와 비슷한 것들이 있고요.

토지는 평평하고 넓었으며 집들이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어디서 따온 표현이에요.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는 노자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만든거라는거죠.

이 마을에서 왔다갔다하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똑같았으며,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어부를 보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서 대접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와서 저마다 물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이것이 하염없는 산문인 것처럼 보이죠. 박한재 선생님의 글 속에도 나와있지만. 얼마전에 진인각 선생에 대한 평전이 나왔어요. 이 분이 이것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후에 다양한 논쟁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이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이 들어있는데.


▲ 도화원기의 유래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라는 주장하고 하나는 당시에 돌고 있던 설화를 채록한것이다라는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이런 식의 마을들이 당시 실제로 있었다는 거예요. 즉 전쟁의 풍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집안 식구들을 다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니면 조세를 피해서. 세금을 더 이상 낼 게 없으니까. 당시 장원조세제도는 엄청나게 참혹했거든요. 이중삼중으로 내고 했으니까.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병역을 피해서 들어갔다. 그런데 두 양반의 해석에서 병역이냐 아니면 부역을 피한 것이냐 어떻게 분석을 하냐면.

여기에 보면 남녀의 옷차림이 같았고.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이런 구절을 갖고 분석에 들어가요. 왜냐. 만약에 병역을 피해서 들어간 거라면 이것은 당시의 신분제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들어갔기 때문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고스란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분에 대한 차별제도가 여기에도 온전되어있을텐데.

그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역을 피해서 간 동일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요.

상당히 설득력이 있죠. 이런 사람들을 보통 월이라고 얘기를 하고 월족에 해당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숨어들어가서 아마도 도연명이 진짜 떠돌다가 지나가다가 봤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것이 장가계냐 강왕곡이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박한재 선생님은 강왕곡이 최근에 가장 실효성이 높은,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얘기가된다고 소개해주고 계시십니다. 여산 쪽에 있는 명산이죠.

집주인이 말했다.
“우리 선조가 진(秦) 나라 때의 난을 피해 처자와 사람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이 400몇 년대이니까 5세기에요. 그럼 진나라는 기원전 3세기죠. 800년동안. 그게 아니라 그 앞에 있었던 전진 前秦 이다. 여기에 들어섰던 나라들이 송나라 있고 진나라 있고 제나라 있고 여러 가지 많았던 나라 중에서 秦 나라가 있었는데 秦나라가 가리키는 곳이 여기다라고. 몇백년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은.

그래서 진인각 선생이 이것이 역사적인, 문학자체가 역사적인 자료로 해석을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들이 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위(魏) 나라, 진(晉)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 얘기는 이제 이 부분이 강하게 바뀌어서 각색을 한 거라는 얘기죠.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 하나 이야기해 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어부는 며칠을 묶은 후 작별하고 떠났다. 그 마을 사람이 말했다.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말 하라는 얘기죠. 꼭 얘기가 나와요. 말하지 마십시오 하면 말을 한다는 말이죠.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 배를 얻어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군데 표식을 했다. 읍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 그대로 보고했다.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표식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도화원으로 토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의 유자기는 고결한 은사였다. 그 소리를 듣고 기꺼이 몸소 나섰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다시 뱃길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 유자기라는 사람이 나오 냐면. 이것은 중국만의 수사죠.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같은 것과 동일한 방식인데 된 사람만 찾아요. 아무나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사람이 못 찾았다라고 하는 얘기는 아무도 못 찾았다는 얘기가 포인트에요, 사실은.

여기 보시면 이 속에는 상당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소국과민에 대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랑 거의 일치할겁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방식의 논의가. 다른 제가 그 학자 이름을 까먹었는데, 그 학자가 진인각 선생의 설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도원명이 지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돌고 있던 민간 설화를 각색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태평광기나 태평어람같은 다른 몇몇 책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전설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훨씬 더 각색이 덜 된 상태로 나오는 것을 보면. 도연명판 기록, 구전설화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 이와같은 방식의 비판도 있었다 라고 하는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는 무엇이냐면 이 속에는 위신시대 지식인의 꿈이라고 하는 제목을 박한재 선생이 붙였던 것처럼. 이것은 이른바 은일적인 정서고.

여기에서 말하는 소국과민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한나라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동진시대 이후, 삼국시대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는 전란의 시대에 이른 바 충분하게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혹은 은인의 길을 선택한 어떤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르카디아적 이상향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죠. 아르카디어적인 것은 전원적인 것을 뜻합니다.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은 합리적인 제도와 기획,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 그리고 현실을 점차 개선함으로써 미래에 도달하게 될 이상향을 보통 유토피아라고 불러요. 이것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카디아라고 하는 것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서사시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과거로의 복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아까 노자할 때. 동아시아 이상향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고를 이야기하지만 그 고가 어떤 경우에는 유토피아적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르카디아 적일수도 있어요. 이와같은 모습이 노자에 보태어짐으로써. 즉 우리가 읽고 있는 노자라고 하는 책이 단순히 한나라때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하상공 주석과는 다른 방식의 전유가 왕필이란 사람에 의해서 발생이 되고 또 거기에 도연명의 이야기들이 보태어지는 이런 중첩된 이미지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생각하는 노자에 관한 상 이런 것들이 만들어진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상공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갖고 도화원기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거의 불가능하죠. 오히려 조지오웰의 〈1984〉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현대적으로 맞는 모습일거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이죠.

달리 말해서 2000년의 무게를 걷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죠. 더군다나 특히 과학이라든가 페미니즘같은 것에 관해서 지난번에 살펴봤던 것처럼. 최근의 중첩, 보태어짐까지 있단 말이죠.


▲ 노자 텍스트의 다양한 context화 가능성

그렇다고 해서 제가 노자 사상은 이것이다. 그런 방식의 애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될까 하는 것에 대해서만큼만은 달리 봐야될 부분들이 있다라고 하는것이죠. 현실의 문제를 과거의 텍스트에 적용해서 읽으려 할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마음.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 이러이러하니까 하면서 때때로 어떤 글들을 보면.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하면서 찬양하는 방식이 반시민적이고 반민주적인 가치까지도 옹호하는 방식의 담론인 경우가 많아요. 특히 동양학 담론이 그 부분에 있어서는 권위주의적인 담론을 탈피하지 못해서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는 측면도 상당히 있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도가의 논의는 오히려 굉장히 폭력적이고 바람직한 방식으로 생각되지 않는 언급마저도 다른 것들과 같이 뭉뚱그려져서 좋은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노자를 이렇게 저렇게 혹은 나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마구잡이는 아니었을지언정 자기들의 시각에 따라서 텍스트를 편집했다.

특히 조선조에 율곡선생이 순언이라고 하는 노자주석서를 낼 때 편집했단 말이에요. 마음에 안드는 권모술수적인 내용들은 빼고 형이상학적이고, 유가 성리학적인 것과 맞는 부분들을 엮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노자를 원본을 추구하는 방식에 목 매달 필요 없이 우리 나름대로 노자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왜 못합니까. edition을, version을 가질 수 있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전통들에 대해서 너무 함부로 해요. 중국 사람들은 중국 텍스트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찢어서 책 막 내요. 한국에서 그런 텍스트 작업을 하면 니가 뭔데. 한문을 참 잘 아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단 말이죠.

그런 것들이 바로 권위주의라고 하는 것이죠. 텍스트는 context. 텍스트를 묶어놓으면 콘텍스트 아닙니까. 그럼 그 때 context하고 내 context하고 같을 이유가 없죠. 안좋은 것 빼. 좋은 것을 끼워 넣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요체는 왕필의 정신을 이어받는거에요. 노자가 하상공의 방식으로 읽을 때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나름대로의 처세술적인 요소도 있지만 왕필이 남겨놓은 유산은 그 이후에 다른 전통과도 연결되는 부분들도 많고. 문화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사실은 유가적 권위주의를 살짝 빼면서 덧보탠다면 조금 더 나은 방식의 노자 텍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저는 그래서 환치라고 하는 말을 쓰고 싶은데. 하상공 단구에서 말하는 제왕 대신에 저는 개인을 집어넣고 싶은 겁니다. 제가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고 하는 책을 쓸 때 군자, 소인을 약간 과하게 해석을 해서 바꾸기도 했지만 상당히 일상적인 거거든요. 그리고 저의 생각을 쓴거에요.

어떤 분이 어느 사이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서점 서평에다가 그래, 너나 소인처럼 살아라 라고 썼더라고요. 너나 소인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이미 소인이고, 소인처럼 살고 있어요. 소인이 된다라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는데 한 번 우리가 의심해볼 것은 그런 것이란 거죠.

우리가 누구나 다같이 논어를 읽을 때는 전부다 자기를 군자랑 동일시하잖아요. 그럼 노자를 읽을 때 나를 제왕과 동일시해서 읽자는 것이죠. 제왕이 움직이는 정치의 장이 청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시민이라면 시민적 정체성으로 그와 같은 정치적 술수를 이용할 수도 있어야 되고. 속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른 바 바꿔치기 독해도. 그리고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텍스트를 읽는 전술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학자들에게 정말 과도한 개념적 해설, 논리적 정합성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어려운 얘기가 아닌가 싶어요. 이 사람이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는 듣지 않고 앞에서 한 얘기랑 뒤에서 한 얘기랑 논리적으로 안 되네, 그 사람이 주장하고 크게 상관이 없는 논리적 모순관계를 지적하면서 그 사람의 학문자체를 누르는 방식의 것들이 너무나 많이 팽배해있어요.

정작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도대체 저 학자가 우리들에게 나에게 심금이 닿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하상공의 이야기는 별로 저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왕필의 것은 상대적으로 많이 울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울리는 것을 갖고 와야지.

따라서 기존처럼 왕필이 천하명주이기 때문에 최고의 노자주석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노자적으로, 그런 것과는 다른 방식의 것이죠. 그것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우리의 삶의 결과 만날 수 있는 삶의 결이 그들에게 있었는가를 맞추는 작업. 저는 그런 표현을 중첩이라고 표현을하고 싶은데.

나의 삶이 만나는 것. 저기의 삶이 만나는 것. 그런데 이 삶이 섞이지 않습니다. 지층이 왜곡되지만 산다는 것이 종이를 쌓아두면 어그러져도 뒤틀리거나 하는 일은 있지만 섞이지는 않거든요. 제가 다른 사람의 인생과 섞이는 것은 힘듭니다. 제가 아무리 제 집사람하고 30년 50년 해로한다고 해도 종이 두 장의 관계에요. 그것을 다시 물에 풀어서 펄프로 한 장으로 만들 수 있느냐 몸이 두 개인데 됩니까. 불가능하잖아요.

근대가 만들어낸 담론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펄프처럼 풀어서 만들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거에요. 아마도 그런 점들이 이른 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반대하는 건데 차이의 철학이지 않습니까.

그런 차이의 철학에 대한 자세가 사실은 유가전통에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른 바 이와같은 도연명 같은 이런 방식의 담론들이 융성되면서 이것은 도교전통과 가깝죠. 도교전통하고 만났던 지점의 장에서의 담론들이 상당히 다채로운 방식의 해석들을 내어놓았거든요.

저는 그러한 방식의 전통들하고 연결시키는 새로운 개인 개념. 원자론적 개념도 아니고. 따라서 근대적인 인권. 특히 동아시아 담론을 얘기하면서 관계적 자아라고 하는 표현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 수 있냐면. 서구에서 인권을 보장하라 하고 중국에 대해서 북한에 대해서 강요하지 않습니까. 북한이나 중국이나 이 쪽 학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현실적 이유들을 얘기를 해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자체를 보장하라는 논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 자체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와같은 것들을 해소할 일들은 바로 학자들에게 어떠한 개인을 이야기할 것인가.

적어도 제가 보기에 프랑스 철학에서 개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담론은 너무 어려워요. 철학공부를 하는 제 입장에서도 말을 들어보면 비슷한 것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동아시아의 담론이 훨씬 더 쉽고 우리 전통과의 화해를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저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작업도.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 얘기하지만 노자, 혼돈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하는 말 속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과거에 노자가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좋은 얘기 나쁜 얘기를 고르겠다. 그리고 학문적 근거가 있는 것하고, 그것은 어디에 있고 하는 것들을 밝혀보겠다라는 뜻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시간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할 시간이 안 되네요. 시간 얘기는 차후에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걸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