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8

이병철 -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이병철 -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세상에 김지하시인으로 알려진 노겸형님의 1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움과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어제 새벽차로 서울을 거쳐 행사장인 이곳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왔다. 연구원이 숲속에 자리잡은 것처럼 주변이 온통 진초록으로 뒤덮혀 있다. 깊고 조용하다. 학문의 전당답다.
이번 생의 큰 인연 중의 한 분을 보낸지 어느새 한 해가 훌쩍 지났다. 이 오월에 떠난 두 사람, 무위당선생과 노겸형님이 새삼 떠오른다.

'김지하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이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심포지움은 1박2일로 어제부터 시작되었는데, '김지하'의 시와 사상' 에 대한 발표자와 토론자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번 심포지움이 노겸 김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발이 될 것이라 싶다.

어제까지 1부, '김지하의 문학 • 예술과 미학'을 마치고 오늘은 2부로 '김지하의 정치적 고난과 생명사상의 태동'을 중심으로 심포지엄을 이어간다.

2부, 몇 사람의 발제 중에 외우 사발 주요섭님의 발제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전개'가 있다.
이 주제의 발표자로서는 적임자라 싶다. 나는 마지막 지정토론 '생명운동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 종합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다. 마지막 지정토론은 발제자 없이 몇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표하는 자리다. 이 자리를 통해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제 저녁에는 1주기 추모공연으로 '노래가 된 긴지하의 시 -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모든 꽃들'이 임진택 명창의 창작 판소리 '소리 내역' 등과 '빈산', '타는 목마름' 등의 노래가 공연 되었다. 30, 40여 년전에 목이 터져라 불렸던 그 노래들이 아픔처럼 가슴을 적셔온다.

1주기 추모행사로 김시인을 따르던 문화운동패들과 김시인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그리고 생전의 인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이 모였다. 나도 그 덕분에 옛 문화패들을 오랫만에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때 이 문화패들과 현장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어 나도 절반의 문화패로 어울리고 있다. 모두 늙어가고 있지만 그런대로 나름의 신명을 이어가며 이제는 김시인을 뒤이어 문화운동 1세대로써 자기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심포지엄에 실무를 맡고 있는 임진택명창, 마당극, 굿판의 교주 채희완교수, 지난해 추모제를 이어 이번에도 대형 걸게 그림으로 문화운동의 역사와 인물을 담아낸 김봉준 화백과 정희섭 등 이 땅의 마당극 1세대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번 추모심포지엄과 김시인 서예전을 준비하고 김시인의 미술가, 문인화의경지와 의미를 새롭게 알려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인 유홍준 동지, 그밖에 원주와 광주, 전주, 제주 등에서도 반가운 얼굴들의 함께 했다.

저녁에는 행사를 마치고 가까운 거리에 나가 오랫만에 한 잔 나누며 모처럼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금새 70, 80년 대로 돌아간 것 느낌이었다.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으리라 싶은 얼굴들이 떠 올랐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 된 것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노겸형님도 좋아하셨으리라 싶다.
곧 이어 오늘 2부 심포지움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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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박정미
    오늘 함께 하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하늘의 별처럼 바라보았던 민족문학예술계의 인사들이 많이 보이시네요. 사진만으로도 김시인의 생애 어느 시점에 포커스를 맞춘 추모행사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너무나 멀리 앞서간 김시인은 이제 돌아가신 그 자리에 계시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숭모의 대상으로 새롭게 달리 해석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근데 선생님. 글 첫머리에 오타가 있습니다. '노경형님' 이라 쓰셨어요^^)
    • 이병철
      박정미 밤에 술 한잔 먹고와서 썼더니 평소 실력이 드러나네. 담엔 자윤이 고처주게.

Yoo Jung Gil -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

(1) Yoo Jung Gil -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 5월 어제 (6일) 7일(오늘)2일에 걸쳐 김지하... | Facebook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
5월 어제 (6일) 7일(오늘)2일에 걸쳐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 학술심포지엄을 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90년 사회주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생산력주의 고도화를 진보로 생각했던 사상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편으로 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의 <지속가능한 발전 ESSD>은 우리가 그동안 성장, 진보, 발전이라고 생각해온 일체의 근본가치 (자원무한주의, 인간중심주의, 이분법 분리의 가치)등은 허구이며 인류의 무지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근 기휘위기를 앞두고 라투슈, 라투르, 고헤이등 탈성장, 탈자본을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과 운동은 2030년 1.5도 기후상승을 막기위해 생태사회주의나 생태맑시즘의 복원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할뿐입니다. 그러나 82년 원주보고서와 한살림선언,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82년부터 이러한 위기시대를 예고해왔고 다시 개벽, 문명의 전환을 말하며 차원변화의 미래 희망을 말하고있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노겸 김지하선생님 함께 생명민회(생명가치를 찾는 민초들의 모임)의 사무국을 맡아 한 1년 넘게 활동을 하며 풀뿌리자치, 지방분권의 순환사회를 만드는 활동에 여러 사회인사들이 함께 활동을 해온 인연이 있습니다.
어제 오늘 정말 오랜만에
임진택, 이부영, 이병철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지하 구명운동을 하신 일본의 미야타 마리에, 히라이 히사시님,
그리고 채희완, 김영동. 염무웅, 홍성담, 문국주, 최열, 김봉준. 박맹수, 이기상, 주요섭. 김소남, 김용휘, 현경, 김영래선생님등
많은 150여분이 오셔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날 중요한 결정, 김지하 선생이름을 생전에 당신이 요청한 대로, <노겸 김지하, 노겸 김영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 네이버 블로그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 네이버 블로그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몽촌

2015.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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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려출처(烝黎出妻)

[요약] (烝: 김 오를 증. 黎: 검을 려(여). 出: 날 출 妻: 아내 처)

나물을 잘 삶지 않았다고 아내를 내쫓았다는 뜻으로, 옛날에 증자(曾子)가 자기(自己)의 처가 어머니에 대(對)한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하다 하여 이혼(離婚)한 일.

[출처]《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내용] 이 성어는 공자가어(孔子家語) 9권에 공자의 제자 72명을 기술한 가운데 증삼(曾參= 曾子) 단락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輿),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가상현)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 아래였다. 그는 효도에 대해 철저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그러므로 공자가 그의 진술로 효경(孝經) 지었고 한다.

제(齊)나라에서 그를 불러 경(卿)으로 삼고자 했으나 거절하면서 말 했다.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해야 할 터인즉 그렇게 되면 나의 늙은 부모는 멀리 해야 할 터이니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계모에게 은혜를 받지 못했으나 변치 않고 잘 봉양했으며, 그의 처가 덜 삶 어진 나물을 부모에게 올리자 이로 인해 처를 내 쫓기로 했다. 어느 사람이 이를 알고 말했다.

“칠거지악이 아닌데 그렇게 하면 되겠소.”

증삼이 말했다.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 내가 나물을 노인이 자시기 좋게 푹 삶으라고 말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 더 큰 효를 어떻게 하겠소.”

그리고 처를 쫓아내고 죽을 때까지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아내를 얻을 것을 원하자 그는 이렇게 아들에게 말했다.

“고종(高宗= 殷= 商나라)은 후처로 인하여 효기(孝已)를 죽였고, 윤길보(尹吉甫)도 후처로 인하여 백기(伯奇)를 내쫓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미치고 못하고, 중간의 윤길보에 비교할 수 없으니 어찌 그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겠느냐?”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志存孝道,故孔子因之以作孝經.齊嘗聘欲與為卿而不就,曰:「吾父母老,食人之祿,則憂人之事,故吾不忍遠親而為人役.」參後母遇之無恩,而供養不衰,及其妻以藜烝不熟,因出之.人曰:「非七出也.」參曰:「藜烝小物耳,吾欲使熟而不用吾命,況大事乎.」遂出之,終身不取妻.其子元請焉,告其子曰:「高宗以後妻殺孝已,尹吉甫以後妻放伯奇,吾上不及高宗,中不比吉甫,庸知其得免於非乎.」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 72제자해(七十二弟子解)...




**주(周) 나라의 어진 재상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에 ‘윤길보의 아들 백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모를 잘 섬겼으나 계모가 백기를 모함하여 죽이기 위해 벌을 잡아 독침을 뽑고 치마에 매어달았는데 백기가 다가가서 떨어버리려 하매, 계모가 백기가 내 옷을 벗기려 한다 하니, 길보가 드디어 의심하였다. 이로써 백기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li>상 나라 고종과 주 나라 윤길보는 모두 어진 임금과 현명한 정승이었지만, 효기•백기가 모두 제대로 죽지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商之高宗 周之尹吉甫 皆令主賢相也 孝己伯奇 皆不得其死 聖明之世 安有如此事耶 [중종실록 권제27, 57장 뒤쪽, 중종 12년 4월 5일(경술)]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li>




이하 「전경」속 역사인물 : 증자(曾子)|작성자 지산겸에서



『논어(論語)』 안에서 그는 열다섯 번 등장하는데 흔히 증자(曾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정이(程頤, 1033∼1107년)는 『논어』가 유약(有若)과 증삼(曾參)의 문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자(子)의 칭호가 붙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魯鈍: 어리석고 순박함)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뜻이 성실했기 때문에 공자 도(道)의 진수(眞髓)를 얻었다고 한다.



증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가 많았다. 공자가 죽은 뒤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도를 전하기도 하고 경(卿)·대부(大夫)의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고향 수사(洙泗)에서 종신토록 강학(講學) 활동을 하여 7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언언(言偃), 전손사(顓孫師) 등이 그를 공자처럼 섬기려고 하였으나, 증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이것이 자사의 제자를 통해 맹자(孟子)에게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宋代) 주자가 『대학』의 전(傳)을 증자가 쓴 것이라고 진술한 이후로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거쳐 자사, 맹자에게로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증자를 흔히 종성(宗聖)이라 칭하기도 한다.[儒敎大事典].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1740∼1816년)은 “성도(聖道)의 밝힘은 대부분 단목사(端木賜: 子貢)에 의해서였고, 성도의 전함은 대부분 증삼에 의해서였다. 단목사의 공은 당시에 있었고 증삼의 공은 후세에 있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청대의 완원(阮元, 1764∼1849년)은 “공자의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마땅히 증삼에서 비롯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학자들은 그를 종성(宗聖)으로 받들고 안회(顔回), 자사, 맹자 등과 같이 사성(四聖)으로 일컬었으며,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에 안회 다음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낸다.[儒敎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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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교육·학문

옥구슬 구르는 듯 흐르는 물결처럼​유연하게 뻗어가는 청아한 그 가락은​오천 년 이 땅 지켜온 천상의 소리어라

공자도 이기지 못했던 유혹, 이혼

 

유혹 두 번째, 이혼

공자도 이기지 못했던 유혹, 이혼
by김씨네가족Nov 30. 2019
https://brunch.co.kr/@kimsfamily/84

공자는 유교사상의 근본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뿌리 깊은 곳에는 유교사상을 근거로 하기에, 우리의 가치관은 유교사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공자는 40을 불혹의 나이라고 하였으나 아내 문제에 있어서만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사상 깊은 곳에는 남존여비의 개념을 확립했다.

공자는 여자에 대해서 
"가까이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라는 말을 남겼다.

19세 때 공자는 송나라의 올관(兀官)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결혼한 지 불과 4년 만에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버리고 혼자 지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의 개념에서는 이혼과 동일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그의 아내가 매우 성질이 사납고 음식 솜씨가 형편없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현대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좋은 남편으로는 0점이었던 것이다.

한 달 뒤면 공자가 이야기한 불혹의 나이 40이 된다. 그리고 나의 결혼생활은 10년 차가 된다.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혼의 위기가 우리 가정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그 이혼의 위기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이혼을 하는 가장 많은 이유인 성격차이였다.

사실 나의 아내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나와 다른 성격 때문이었다. 나에게 없는 그녀의 성격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러한 성격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결정이 오히려 이혼의 이유와 근거가 될 줄 결혼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성격차이로 인한 매력으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선택하고 결혼한다.
결혼 후에는 성격차이로 인한 서로의 불편함으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선택을 후회하고 이혼한다.

한 사람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는 단점으로 변하기도 하며, 단점이 장점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난다. 어떠한 관점과 상황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어떠함은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나에게 불편함을 초래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문제의 원인을 잘 살펴보면 그 남자나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남자나 그 여자는 변한 것이 없다. 상황과 시기와 관점이 변화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100% 자신에게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조금만 누르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살펴보면 희미한 답안지를 찾을 수 있다.

인생길에 정답은 없지만,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수많은 답안지들은 널려 있다. 두 눈 중에 한눈만 지긋이 떠도 볼 수 있는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 때문에 그 수많은 답안지들을 놓치고 더욱 어려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언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히 드는가?

아내와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그 순간에 해결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좋지 못한 감정은 축척된다. 그리고 일상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우리 둘은 사소한 문제로 부딪히고 그 부딪힘은 싸움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싸움에서 우리는 사소한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해결하지 못하고 눈감았던 문제들을 부풀려서 서로에게 원인을 돌린다. 결국 싸움의 원인은 찾지 못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서 우리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감정은 그것을 더욱더 우리의 행동의 결정에 합리적인 이유로 삼기 위해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패턴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결혼 10년 차에 이 정도의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다면 우리의 감정은 이미 지쳐있고 상처의 골은 깊다. 더 이상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한 명이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만 있어도 분명 해결의 키는 존재하는데, 둘 모두 상대에게 원인을 돌리므로 그 해결의 키는 누구도 쥘 수 없다.

둘 중 누군가가 키를 다시 잡는다면, 그가 승리 한자고 위대한 자다.

누가 시켜서 한 결혼도 아니고 둘이 좋아서 한 결혼인데 서로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결국 이혼을 선택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리고 사회 역시 그 이혼에 대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분위기에서 결혼을 지켜내는 건 성인군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키를 잡고 이 결혼을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 어렵고 힘들고 고난의 길이 될 수 있다.
  • 원래 결혼생활이 그런 것이고 삶이란 그렇다.
  • 편한 결혼생활과 나만의 행복을 위한 결혼생활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알려준 책들과 영상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지 나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들 역시 잘못된 가르침과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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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찾아오는 이혼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지금까지도 찾아왔던 유혹이 앞으로도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찾아왔을 때는 '아 올 것이 왔구나! 조금 나의 상황을 벗어나서 정신을 가다듬으면 금방 또 지나가 버릴 거야!'라는 생각과 행동의 전환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문제의 원인을 나한테서 찾는 것이다. 10년간 살아오니 상대방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지 않았는가? 그렇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능한 일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나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는 것이다. 상대방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나를 바꾸는 것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라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자신만의 비결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상황은 다르다. 누구도 누구에게 이혼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결국 문제의 해결은 본인의 몫이다. 누구의 의견을 참고할 순 있겠지만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그가 대신 살아주지 않기에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비결과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길만이 이혼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