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8

이병철 -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이병철 -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세상에 김지하시인으로 알려진 노겸형님의 1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움과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어제 새벽차로 서울을 거쳐 행사장인 이곳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왔다. 연구원이 숲속에 자리잡은 것처럼 주변이 온통 진초록으로 뒤덮혀 있다. 깊고 조용하다. 학문의 전당답다.
이번 생의 큰 인연 중의 한 분을 보낸지 어느새 한 해가 훌쩍 지났다. 이 오월에 떠난 두 사람, 무위당선생과 노겸형님이 새삼 떠오른다.

'김지하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이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심포지움은 1박2일로 어제부터 시작되었는데, '김지하'의 시와 사상' 에 대한 발표자와 토론자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번 심포지움이 노겸 김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발이 될 것이라 싶다.

어제까지 1부, '김지하의 문학 • 예술과 미학'을 마치고 오늘은 2부로 '김지하의 정치적 고난과 생명사상의 태동'을 중심으로 심포지엄을 이어간다.

2부, 몇 사람의 발제 중에 외우 사발 주요섭님의 발제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전개'가 있다.
이 주제의 발표자로서는 적임자라 싶다. 나는 마지막 지정토론 '생명운동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 종합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다. 마지막 지정토론은 발제자 없이 몇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표하는 자리다. 이 자리를 통해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제 저녁에는 1주기 추모공연으로 '노래가 된 긴지하의 시 -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모든 꽃들'이 임진택 명창의 창작 판소리 '소리 내역' 등과 '빈산', '타는 목마름' 등의 노래가 공연 되었다. 30, 40여 년전에 목이 터져라 불렸던 그 노래들이 아픔처럼 가슴을 적셔온다.

1주기 추모행사로 김시인을 따르던 문화운동패들과 김시인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그리고 생전의 인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이 모였다. 나도 그 덕분에 옛 문화패들을 오랫만에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때 이 문화패들과 현장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어 나도 절반의 문화패로 어울리고 있다. 모두 늙어가고 있지만 그런대로 나름의 신명을 이어가며 이제는 김시인을 뒤이어 문화운동 1세대로써 자기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심포지엄에 실무를 맡고 있는 임진택명창, 마당극, 굿판의 교주 채희완교수, 지난해 추모제를 이어 이번에도 대형 걸게 그림으로 문화운동의 역사와 인물을 담아낸 김봉준 화백과 정희섭 등 이 땅의 마당극 1세대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번 추모심포지엄과 김시인 서예전을 준비하고 김시인의 미술가, 문인화의경지와 의미를 새롭게 알려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인 유홍준 동지, 그밖에 원주와 광주, 전주, 제주 등에서도 반가운 얼굴들의 함께 했다.

저녁에는 행사를 마치고 가까운 거리에 나가 오랫만에 한 잔 나누며 모처럼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금새 70, 80년 대로 돌아간 것 느낌이었다.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으리라 싶은 얼굴들이 떠 올랐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 된 것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노겸형님도 좋아하셨으리라 싶다.
곧 이어 오늘 2부 심포지움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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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박정미
    오늘 함께 하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하늘의 별처럼 바라보았던 민족문학예술계의 인사들이 많이 보이시네요. 사진만으로도 김시인의 생애 어느 시점에 포커스를 맞춘 추모행사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너무나 멀리 앞서간 김시인은 이제 돌아가신 그 자리에 계시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숭모의 대상으로 새롭게 달리 해석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근데 선생님. 글 첫머리에 오타가 있습니다. '노경형님' 이라 쓰셨어요^^)
    • 이병철
      박정미 밤에 술 한잔 먹고와서 썼더니 평소 실력이 드러나네. 담엔 자윤이 고처주게.

Yoo Jung Gil -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

(1) Yoo Jung Gil -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 5월 어제 (6일) 7일(오늘)2일에 걸쳐 김지하... | Facebook

<노겸 김지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
5월 어제 (6일) 7일(오늘)2일에 걸쳐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 학술심포지엄을 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90년 사회주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생산력주의 고도화를 진보로 생각했던 사상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편으로 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의 <지속가능한 발전 ESSD>은 우리가 그동안 성장, 진보, 발전이라고 생각해온 일체의 근본가치 (자원무한주의, 인간중심주의, 이분법 분리의 가치)등은 허구이며 인류의 무지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근 기휘위기를 앞두고 라투슈, 라투르, 고헤이등 탈성장, 탈자본을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과 운동은 2030년 1.5도 기후상승을 막기위해 생태사회주의나 생태맑시즘의 복원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할뿐입니다. 그러나 82년 원주보고서와 한살림선언,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82년부터 이러한 위기시대를 예고해왔고 다시 개벽, 문명의 전환을 말하며 차원변화의 미래 희망을 말하고있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노겸 김지하선생님 함께 생명민회(생명가치를 찾는 민초들의 모임)의 사무국을 맡아 한 1년 넘게 활동을 하며 풀뿌리자치, 지방분권의 순환사회를 만드는 활동에 여러 사회인사들이 함께 활동을 해온 인연이 있습니다.
어제 오늘 정말 오랜만에
임진택, 이부영, 이병철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지하 구명운동을 하신 일본의 미야타 마리에, 히라이 히사시님,
그리고 채희완, 김영동. 염무웅, 홍성담, 문국주, 최열, 김봉준. 박맹수, 이기상, 주요섭. 김소남, 김용휘, 현경, 김영래선생님등
많은 150여분이 오셔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날 중요한 결정, 김지하 선생이름을 생전에 당신이 요청한 대로, <노겸 김지하, 노겸 김영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 네이버 블로그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 네이버 블로그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몽촌

2015.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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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려출처(烝黎出妻)

[요약] (烝: 김 오를 증. 黎: 검을 려(여). 出: 날 출 妻: 아내 처)

나물을 잘 삶지 않았다고 아내를 내쫓았다는 뜻으로, 옛날에 증자(曾子)가 자기(自己)의 처가 어머니에 대(對)한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하다 하여 이혼(離婚)한 일.

[출처]《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내용] 이 성어는 공자가어(孔子家語) 9권에 공자의 제자 72명을 기술한 가운데 증삼(曾參= 曾子) 단락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輿),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가상현)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 아래였다. 그는 효도에 대해 철저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그러므로 공자가 그의 진술로 효경(孝經) 지었고 한다.

제(齊)나라에서 그를 불러 경(卿)으로 삼고자 했으나 거절하면서 말 했다.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해야 할 터인즉 그렇게 되면 나의 늙은 부모는 멀리 해야 할 터이니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계모에게 은혜를 받지 못했으나 변치 않고 잘 봉양했으며, 그의 처가 덜 삶 어진 나물을 부모에게 올리자 이로 인해 처를 내 쫓기로 했다. 어느 사람이 이를 알고 말했다.

“칠거지악이 아닌데 그렇게 하면 되겠소.”

증삼이 말했다.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 내가 나물을 노인이 자시기 좋게 푹 삶으라고 말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 더 큰 효를 어떻게 하겠소.”

그리고 처를 쫓아내고 죽을 때까지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아내를 얻을 것을 원하자 그는 이렇게 아들에게 말했다.

“고종(高宗= 殷= 商나라)은 후처로 인하여 효기(孝已)를 죽였고, 윤길보(尹吉甫)도 후처로 인하여 백기(伯奇)를 내쫓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미치고 못하고, 중간의 윤길보에 비교할 수 없으니 어찌 그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겠느냐?”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志存孝道,故孔子因之以作孝經.齊嘗聘欲與為卿而不就,曰:「吾父母老,食人之祿,則憂人之事,故吾不忍遠親而為人役.」參後母遇之無恩,而供養不衰,及其妻以藜烝不熟,因出之.人曰:「非七出也.」參曰:「藜烝小物耳,吾欲使熟而不用吾命,況大事乎.」遂出之,終身不取妻.其子元請焉,告其子曰:「高宗以後妻殺孝已,尹吉甫以後妻放伯奇,吾上不及高宗,中不比吉甫,庸知其得免於非乎.」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 72제자해(七十二弟子解)...




**주(周) 나라의 어진 재상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에 ‘윤길보의 아들 백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모를 잘 섬겼으나 계모가 백기를 모함하여 죽이기 위해 벌을 잡아 독침을 뽑고 치마에 매어달았는데 백기가 다가가서 떨어버리려 하매, 계모가 백기가 내 옷을 벗기려 한다 하니, 길보가 드디어 의심하였다. 이로써 백기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li>상 나라 고종과 주 나라 윤길보는 모두 어진 임금과 현명한 정승이었지만, 효기•백기가 모두 제대로 죽지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商之高宗 周之尹吉甫 皆令主賢相也 孝己伯奇 皆不得其死 聖明之世 安有如此事耶 [중종실록 권제27, 57장 뒤쪽, 중종 12년 4월 5일(경술)]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li>




이하 「전경」속 역사인물 : 증자(曾子)|작성자 지산겸에서



『논어(論語)』 안에서 그는 열다섯 번 등장하는데 흔히 증자(曾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정이(程頤, 1033∼1107년)는 『논어』가 유약(有若)과 증삼(曾參)의 문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자(子)의 칭호가 붙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魯鈍: 어리석고 순박함)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뜻이 성실했기 때문에 공자 도(道)의 진수(眞髓)를 얻었다고 한다.



증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가 많았다. 공자가 죽은 뒤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도를 전하기도 하고 경(卿)·대부(大夫)의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고향 수사(洙泗)에서 종신토록 강학(講學) 활동을 하여 7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언언(言偃), 전손사(顓孫師) 등이 그를 공자처럼 섬기려고 하였으나, 증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이것이 자사의 제자를 통해 맹자(孟子)에게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宋代) 주자가 『대학』의 전(傳)을 증자가 쓴 것이라고 진술한 이후로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거쳐 자사, 맹자에게로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증자를 흔히 종성(宗聖)이라 칭하기도 한다.[儒敎大事典].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1740∼1816년)은 “성도(聖道)의 밝힘은 대부분 단목사(端木賜: 子貢)에 의해서였고, 성도의 전함은 대부분 증삼에 의해서였다. 단목사의 공은 당시에 있었고 증삼의 공은 후세에 있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청대의 완원(阮元, 1764∼1849년)은 “공자의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마땅히 증삼에서 비롯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학자들은 그를 종성(宗聖)으로 받들고 안회(顔回), 자사, 맹자 등과 같이 사성(四聖)으로 일컬었으며,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에 안회 다음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낸다.[儒敎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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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교육·학문

옥구슬 구르는 듯 흐르는 물결처럼​유연하게 뻗어가는 청아한 그 가락은​오천 년 이 땅 지켜온 천상의 소리어라

공자도 이기지 못했던 유혹, 이혼

 

유혹 두 번째, 이혼

공자도 이기지 못했던 유혹, 이혼
by김씨네가족Nov 30. 2019
https://brunch.co.kr/@kimsfamily/84

공자는 유교사상의 근본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뿌리 깊은 곳에는 유교사상을 근거로 하기에, 우리의 가치관은 유교사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공자는 40을 불혹의 나이라고 하였으나 아내 문제에 있어서만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사상 깊은 곳에는 남존여비의 개념을 확립했다.

공자는 여자에 대해서 
"가까이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라는 말을 남겼다.

19세 때 공자는 송나라의 올관(兀官)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결혼한 지 불과 4년 만에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버리고 혼자 지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의 개념에서는 이혼과 동일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그의 아내가 매우 성질이 사납고 음식 솜씨가 형편없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현대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좋은 남편으로는 0점이었던 것이다.

한 달 뒤면 공자가 이야기한 불혹의 나이 40이 된다. 그리고 나의 결혼생활은 10년 차가 된다.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혼의 위기가 우리 가정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그 이혼의 위기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이혼을 하는 가장 많은 이유인 성격차이였다.

사실 나의 아내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나와 다른 성격 때문이었다. 나에게 없는 그녀의 성격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러한 성격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결정이 오히려 이혼의 이유와 근거가 될 줄 결혼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성격차이로 인한 매력으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선택하고 결혼한다.
결혼 후에는 성격차이로 인한 서로의 불편함으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선택을 후회하고 이혼한다.

한 사람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는 단점으로 변하기도 하며, 단점이 장점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난다. 어떠한 관점과 상황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어떠함은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나에게 불편함을 초래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문제의 원인을 잘 살펴보면 그 남자나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남자나 그 여자는 변한 것이 없다. 상황과 시기와 관점이 변화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100% 자신에게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조금만 누르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살펴보면 희미한 답안지를 찾을 수 있다.

인생길에 정답은 없지만,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수많은 답안지들은 널려 있다. 두 눈 중에 한눈만 지긋이 떠도 볼 수 있는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 때문에 그 수많은 답안지들을 놓치고 더욱 어려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언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히 드는가?

아내와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그 순간에 해결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시간이 흘러 우리의 좋지 못한 감정은 축척된다. 그리고 일상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우리 둘은 사소한 문제로 부딪히고 그 부딪힘은 싸움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싸움에서 우리는 사소한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해결하지 못하고 눈감았던 문제들을 부풀려서 서로에게 원인을 돌린다. 결국 싸움의 원인은 찾지 못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서 우리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감정은 그것을 더욱더 우리의 행동의 결정에 합리적인 이유로 삼기 위해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패턴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결혼 10년 차에 이 정도의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다면 우리의 감정은 이미 지쳐있고 상처의 골은 깊다. 더 이상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한 명이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만 있어도 분명 해결의 키는 존재하는데, 둘 모두 상대에게 원인을 돌리므로 그 해결의 키는 누구도 쥘 수 없다.

둘 중 누군가가 키를 다시 잡는다면, 그가 승리 한자고 위대한 자다.

누가 시켜서 한 결혼도 아니고 둘이 좋아서 한 결혼인데 서로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결국 이혼을 선택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리고 사회 역시 그 이혼에 대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분위기에서 결혼을 지켜내는 건 성인군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키를 잡고 이 결혼을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 어렵고 힘들고 고난의 길이 될 수 있다.
  • 원래 결혼생활이 그런 것이고 삶이란 그렇다.
  • 편한 결혼생활과 나만의 행복을 위한 결혼생활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알려준 책들과 영상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마땅하지 나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들 역시 잘못된 가르침과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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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찾아오는 이혼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지금까지도 찾아왔던 유혹이 앞으로도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찾아왔을 때는 '아 올 것이 왔구나! 조금 나의 상황을 벗어나서 정신을 가다듬으면 금방 또 지나가 버릴 거야!'라는 생각과 행동의 전환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문제의 원인을 나한테서 찾는 것이다. 10년간 살아오니 상대방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지 않았는가? 그렇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능한 일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나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는 것이다. 상대방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나를 바꾸는 것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라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자신만의 비결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상황은 다르다. 누구도 누구에게 이혼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결국 문제의 해결은 본인의 몫이다. 누구의 의견을 참고할 순 있겠지만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그가 대신 살아주지 않기에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비결과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길만이 이혼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맹자, 부인을 쫓아내고 성인이 되다

맹자, 부인을 쫓아내고 성인이 되다

맹자, 부인을 쫓아내고 성인이 되다
정부권 2012. 6. 21. 01:25


“맹자가 성인이 되고자 고심하다 마침내 부인을 내쫓았다!”

맹자





예사롭지 않은 이 고대의 스캔들을 들춰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곽말약이다. 다분히 과장되었을 이 이야기는 그러나 순자로부터 차용한 것이었다. 순자는 ‘해폐편(解蔽篇)’에서 ‘맹자는 패덕을 싫어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이는 가히 스스로 수신에 힘쓴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맹자는 금욕주의자’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곽말약의 해학이야말로 흥미롭다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순자의 악패를 부인의 패덕이 아니라 ‘맹자가 자신이 몸을 상할 것을 염려하여 부인을 내쫓았다’는 주장을 펴는 신비한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곽말약. 그는 중국 문화사에서 천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깊고 넓은 학식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대문호 노신과 쌍벽을 이루는 뛰어난 문학가요 탁월한 역사학자이자 고문학자였으며, 혁명가였다.

족발, 제목에 깃든 오묘한 철학
그가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제재를 취하여 집필한 글들을 묶은 책의 제목으로 <豕蹄>, 우리 말로 하면 <족발>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책의 한국어판 역자(신진호)는 제목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썼다.



“이 시제(豕蹄)라는 말이 우리나라 말로는 돼지족발을 의미하는데 곽말약은 족발이라는 제목이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성질을 잘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값싸고 천한 돼지족발도 불을 세게 때서 푹 삶고, 알맞게 간하고 향신료를 뿌리면 평민들이 즐겨 먹는 요리가 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라성 같은 성인‧영웅호걸들의 공식적 역사 속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작은 이야기들도 보는 관점과 다루는 방식에 따라서는 평범한 현대인들이 세상을 달리 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목에 얽힌 이 이야기 속에는 곽말약의 번뜩이는 기지와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투철한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에 곽말약은 ‘역사제재 꽁트’(史題空託)라는 이름을 쓰려했지만, 네 글자가 너무 거추장스럽다고 여겨 ‘사제(史題)’로 줄이려고 했다가 다시 ‘사체(史體 )’로 바꾸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살찐 자기 친구에게 이 책을 바치면서 발음이 같은 시제(豕蹄)로 결정했다고 한다.



오늘 나는 우연히 책장에서 걸어 내려와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족발>을 발견했다. 이 책을 산 것이 어언 십년하고도 4년이 더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이 책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니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셈인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오래전, 이 책 속에서 맹자의 아내를 보았었다. 그녀는 매우 고결했으며 현명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곽말약의 비유에 따르면 그녀는 현숙했을 뿐 아니라 매우 요염하고 색기가 넘치는 젊은 여자였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곽말약의 뛰어난 문재는 맹자가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쩔쩔 매는 모양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적나라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었다.




아내의 미모에 홀린 맹자, 공부가 안 돼
<족발> 속에 등장하는 이 글의 제목은 <맹부자출처(孟夫子出妻)>다. 우리말로 번역한 제목은 <맹자, 부인을 내쫓다>이다. 맹자가 부인을 내쫓았다고? 참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제목이 아닌가?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끓어오르는 흥미를 참을 수 없었다.



공자의 아내는 그 추하게 생긴 몰골과 괴팍하고 못된 성격으로 그의 남편 못지않은 명성을 누렸다. 혹자는 공자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아내의 추하고 못된 성격이 한몫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자는 집을 떠나 천하를 주유했던 것일까?



맹자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맹자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조숙했으며 지혜롭기까지 했다. 그녀는 맹자가 설파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알았으며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맹자가 아침밥을 먹을 동안 옆에 다소곳이 앉아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예를 알아 행했다. 밥을 퍼서 건넬 때도 나무쟁반을 중간매체로 삼아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받쳐서 건넸다. 식사는 맹자가 좋아하는 담백한 생선죽과 생강 한 조각, 콩나물 무침으로 매우 정갈했다. 그러나 맹자는 밥을 먹는 내내 아내의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곽말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젯밤의 상황과 오늘 아침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맹자는 어젯밤에 부인을, 한 방울의 즙까지도 아까워하면서 참외를 먹듯이 그렇게 애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로 어젯밤 그 애무 때문에 맹자는 이렇듯 점잔을 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란 이처럼 모순된 것이었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발닥도 내가 원하는 바라
맹자는 공자를 따라 성현이 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그 요체로 ‘부동심’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인만 보면, 특히 밤에는 마음이 흔들리고 다음날이 되면 여지없이 나른한 기운으로 온몸이 가득 차니 공자가 질책하는 듯해 괴롭기 이를 데 없었다.

곽말약은 계속해서 맹자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직시하지 않는 것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인의 온몸, 그 적나라한 몸이 사실 그의 모든 감각기관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저고리 아래 튀어나온 봉긋한 유두, 그의 비밀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듯한 흑요석 같은 눈, 그 온화함, 그 유연함, 그 숨결, 그 유선(流線)……. 그는 천근의 무게에 짓눌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악마야! 나는 공자의 제자이지, 너의 제자가 아니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외쳐대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주방으로 가 있으시오. 밥은 내가 직접 퍼서 먹겠소.” 부인을 내보낸 맹자는 벽에 걸린 공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탄식했다.

공자





그러자 부엌에 있던 부인이 놀라 다시 돌아와 맹자에게 말한다. 그녀는 이미 맹자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저를 당신의 아내로도 여자로도 여기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하실 수 없나요? …… 당신 곁에 제가 없으면 전 당신이 불편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 여보, 진정 저를 제자나 하인으로 여겨 주세요.”



여기에 대해 맹자는 “생선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곰 발바닥 요리 역시 내가 원하는 바이다. …….”란 애매한 경구로 답을 대신한다. 역시 맹자는 유식한 지식인이다. 생선은 아내요, 곰 발바닥 요리는 공자다. 극진한 모성애를 느낀 맹자의 아내는 즉시 물러나 짐을 싼다.

천하의 성인도 다른 이의 노동 없이 이루지 못한다
순간, 맹자의 자세는 허물어진다. 그는 심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곽말약은 계속해서 적고 있다. “아내가 가 버린다면 기름이니, 소금이니, 땔감이니, 쌀 같은 것들은 누가 맡아 살림을 해준단 말인가? 그는 이때 한 가지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성현이 되려면, 아니 심호흡을 하는 것조차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작은 노동 덕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가엾은 맹자는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빌며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부인은 그를 안아 일으키며 말한다.

“아니에요. 저는 당신에게 감사해요. 여보, 당신은 천하의 스승이에요. 저 한 사람이 독차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제가 여기 남아있는 것은 당신에게 도움이 못 되요. 제가 떠나는 것이 당신에게 이로운 거죠. 당신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거예요.”



맹자는 문득 아내가 공자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내는 이미 만공선생에게 맹자를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고 온 참이었다. 그녀는 입으로만 인의를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맹자는 생각했다. 공자도 그의 아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찌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스승은 멀리 공자가 아니라 가까운 아내였다
마지막으로 맹자의 결심을 곽말약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렇다. 말하지 않고 행하는 것, 실천, 실천! 나는 멀리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느니 차라리 가까이서 아내를 본받아야겠다.”

===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맹자는 역시 훌륭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글쎄, 이게 왜 홀연히 세월을 뛰어넘어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을까? 나는 우리 집에 이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다시금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아내들이란 사실을 말이다. 물론 십여 년 전에도 느꼈던 바이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맹자가 깨달았던 평범한 진리는 더욱 절실하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작은 노동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을 아내들은 말없이 실천으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래서 오늘 이 책이 무척 반가우면서도 한편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2009. 2. 2. 파비

ps; 뛰어난 희극작가요 시인이었던 곽말약의 문학세계는 노신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 그러나 그가 중국공산당에 이용당하는(또는 스스로) 작품을 많이 썼으며, 권력에 아부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는 역시 변함없이 중국 현대문학사에 빛나는 별이다. 이글에 등장하는 묘사들 중에는 현대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이글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30년대란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곽말약의 사진은 구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사진으로 만들어 올릴 생각이지만, 지금 카메라가 없으므로 서너시간 정도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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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지악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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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지악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원문 내용3. 사유4. 삼불거5. 현실6. 여담


七去之惡

1. 개요[편집]

아내를 내쫓는 7가지 상황.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공자의 어록을 보관해놓은 〈공자가어〉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종지도가 나오는 《본명해》편에 같이 나온다. 칠거지악은 유교적 질서가 강했던 조선에서 이혼제도에 바로 적용되었다. 사대부의 남편 혹은 시가(媤家)가 아내를 내칠 수 있었던 근거였으며, 출가외인과 함께 조선시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는 예시로 많이 거론된다. 만약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를 내치지 않은 경우에는 남편이 곤장 80대 형에 처해지게 되니 어느 정도 강제력이 있는 법률이었다. 다만 평민들에겐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2. 원문 내용[편집]

女有五不取
여자로서 다섯가지 취하지 말아야 할 남자가 있습니다.

逆家子者 亂家子者 世有刑人子者 世有惡疾子者 喪父長子者
반역자 집안의 아들, (인륜을) 어지럽힌 집안[1]의 아들, 대대로 형벌을 받은 집안의 아들, 대대로 악질을 앓은 집안의 아들, 아비의 상(喪)을 치르는 맏아들입니다.

婦有七出 三不去
부인으로서는 일곱가지 쫓겨남(칠출:七出)과 세가지 쫓겨날 수 없음(삼불거:三不去)이 있습니다.

七出者
일곱가지의 내쫓음인 칠출(七出)이란,

不順父母出者 無子者 淫僻者 嫉妬者 惡疾者 多口舌[2]者 竊盜者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쫓아내는 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 음란함에 빠진 자, 질투를 하는 자, 악질이 있는 자, 시비걸거나 비방하는 것이 많은 자, 도둑질하는 자입니다.

三不去者
그리고 내쫓지 못하는 삼불거(三不去)란 것은,

謂有所取無所歸 與共更三年之喪 先貧賤後富貴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이며, 자기와 함께 부모의 삼년 상을 치른 여자이며, 먼저는 가난하였으나 뒤에 부유함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 고난을) 같이한 여자입니다.

《공자가어》 <본명해> 중에서..

3. 사유[편집]

☆자는 삼불거 상태라도 내칠 수 있는 조항.
  •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당시 시집살이라는 것은 양반에게도 꽤 고된 일이었다. 기본적인 가사는 하인들이 처리해 준다지만, 삶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성리학적 예법에서 어긋나는 행위를 하거나, 육아와 의류관리 등 남편을 재대로 보조하지 못하거나, 시부모의 수발을 드는데 심기를 거슬릴만한 짓을 했다면, 이 모든 책임은 그 며느리에게로 돌아갔다. 잠깐의 외출도 시부모에게 구박을 당했었으니. 이 항목은 기본적으로는 노인학대 방지나 노인의 복지후생 개념을 포함하고 있긴 하나, 다소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대적인 한계에 가까운 조목.
  • 2.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대를 잇는 게 중요한 사대부의 특성상 이는 당연시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질투와 같이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는 곳도 있었으나, 형법대전에선 그냥 빼버리고 오출사불거가 된다.[3][4][5] 당연하지만 임신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거기에 불임은 남성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책임만 추궁받았기에 부당할 수밖에 없는 조목이다. 당시엔 그런 걸 몰랐긴 했지만. 실제로 현대 한국은 여아 낙태 문제로 인한 후폭풍을 겪기도 했고, 임신 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자리잡은 후에는 아들 못 낳았다고 며느리 내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 3. 간통☆: 여성이 저지른 간통은 이혼사유였지만, 남성의 간통은 이혼사유가 아니었다. 혼인관계와는 별개로 간통행위 자체는 조선시대의 법률[6]에 의하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았지만, 중종 이후로는 아예 양반가문에서 여자가 간통을 벌인 경우 족보에 그 사실을 기록하여 친자의 출세에 영향이 가게 함으로써 여자의 간통을 가중처벌하였다. 강간 등 일방적인 성범죄는 더욱 강력하게 처벌해서, 상대가 비록 기녀라 하여도 동의가 없었다면 강간으로 보았으며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의 죽을 정도로 처벌했다.[7]
  • 4. 질투: 처첩제가 허용된 상황이라 서로 시기하여 생길 불상사를 막기위한 수단이었을 공산이 크다. 조선 말에는 허영이나 사치로 대체하는 곳도 있었고, 형법대전에선 그냥 빼버리고 오출사불거가 된다. 그리고 말이 좋아 "질투를 이유로 아내를 쫓아낼 수 있다"였지,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봐줬다. 당장 폐비 윤씨의 사례를 보면, 성종이 투기를 이유로 폐비 윤씨를 내치려고 하자[8] 임사홍이 "예로부터 투기하지 않은 부인은 드물었습니다." 라고 만류했을 정도. 실제로 첩에 빠져 처를 내버렸다가 패가망신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희빈 장씨의 오라비였던 장희재로 본처인 자근아기를 박대하고 첩인 숙정을 본처처럼 취급했는데 이후 자근아기는 남인이 몰락할 때 남인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하여[9] 장희재, 숙정 등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본인도 처형당했는데 추정상 본인은 어차피 장희재의 본처라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의 설움에 대한 보복을 했으리라고 볼 수도 있다.
  • 5. 유전병: 후세와 집안의 존속이 중요하던 상황에서 유전병은 자녀들에게 끝없이 대물림되어 평생을 위협하는 꽤 중요한 문제인지라 매우 신경썼다. 반대로 신부 측에서도 신랑을 고를 때 이를 따졌다. 위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현대 한국에서는 결혼 문화의 변화 및 의학의 발달로 많이 줄었다.
  • 6. 구설: 구설이란 시비를 걸거나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多口舌" 이란 시비나 비방이 많은 자를 뜻한다.
  • 7. 도벽☆: 절도죄. 위의 간통과 함께,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그나마 납득이 갈만한 경우다. 물론 여자 쪽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부당하긴 하지만.

4. 삼불거[편집]



아무리 칠거지악을 범했어도 내칠 수 없는 경우에 대한 규정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 1. 처가가 전멸하여 아내를 내칠 경우 그 아내가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일종의 인도적인 조치로 보인다. 과거에는 가정이 곧 사회복지적인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 2. 남편 또는 시부모의 3년상을 치렀을 때: 각각 정절 또는 효를 증명했으므로 이에 대해 인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번의 경우는 매우 중요시했는데, 1처럼 아예 잃을 게 없다고 막나갈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3처럼 유세 부릴 여지도 없기 때문에 2번의 사유가 있는데 칠거지악으로 내친다고 할 경우에는 간통이나 절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시부모와 남편이 형벌을 받았다. 당연하지만 간통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효 혹은 정절을 증명하는 것처럼 속여서 시댁을 우롱하고 기만했기 때문에 더 큰 처벌을 받았다. 같이 3년상을 치른 부인은 남편에게 '내가 3년상까지 치렀는데 당신은 염치없게 기생이랑 노냐? 제정신임?' 이라는 편지까지 보내며 바가지를 긁는다.
  • 3. 결혼 당시에는 가난했으나 결혼 이후 집안이 부귀해졌을 때: '조강지처'라고 불리며, 유교사회에서는 높은 평가를 해주고 있다. '어려웠을 때 함께한 아내를 성공 후에 버리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5. 현실[편집]


유명세와는 달리, 조선 초기에는 칠거지악이 그렇게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데, 양반이 결혼하는 상대는 거의 대부분 비슷한 격의 다른 양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다 한들 그렇다고 딸을 자식 취급도 안한 것은 아니며, 이혼당하면 재혼도 못하는 시대상 딸의 앞길이 그렇게 턱 막히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리는 없다. 설령 딸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더라도 '저 집은 뭘 했길래 이혼까지 당하냐?' 소리 들으며 가문의 위신에 흠집이 가는 게 싫어서라도 반발하였을 것이고, 그걸 알기 때문에 칠거지악 운운하며 이혼하자는 말은 절대로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10] 그러니까 칠거지악에 해당한다고 칼같이 이혼당하고 그런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 물론 그렇다곤 하더라도 이런 법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억압에 해당했으며 이를 근거로 여자를 구속하려 했다는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또 이렇게 써놓으니 처가쪽 집안 눈치만 없었으면 어떻게든 써먹으려 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시대 하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으나,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까지 낮은 건 아니었고 양반들은 갈등을 되도록 대화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지성인이 대다수였다. 주먹다짐이며 범죄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짓을 하면 망나니 취급을 받았다. 칠거지악 역시 '법에 있다'며 무작정 따르진 않았고 상황에 따라 되도록이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위에서도 설명하듯 아들을 못 낳는 경우는 버젓이 칠거지악 중 하나지만 보통 그러면 우선적으로 먼 친척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방법을 썼다.

칠거지악을 이용하려다가 역관광을 당한 사례도 기록에 남아있다. 조선 후기 "이미"라는 문신이 그 경우인데, 칠거지악 중 2번(아들을 못 낳음)을 가지고 늙은 처를 내치려다 오히려 자기가 곤장을 맞고 관직에서 파직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삼불거를 통해 집안에 헌신하는 사람은 부정을 할 여지도 적다고 판단하는 인식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삼불거에 해당하는 사람이 꽤 많아서 칠거지악이 있어도 내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양반들 사이에 꽤 있었다.[11]

6. 여담[편집]

  • 조선 고종 때 형법대전에서는 칠거지악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경우와 질투 규정을 삭제하고, 삼불거에 아들 딸 구별없이 자식이 있으면 처를 내치지 못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여 오출사불거로 바뀌었다.
  • 칠거지악은 삼종지도와 항상 같이 언급된다.
  • 가족오락관의 퀴즈 코너에서 문제로 출제된 적이 있다. 이 때 문제 내용의 힌트를 일러스트[12]로 표현했는데, 일러스트의 내용은 일곱명의 거지가 악! 소리 지르는 것(...).

[1] 예를 들어 남매간에 결혼한다든지..[2] 口舌(구설): 시비(是非)하고 비방(誹謗)하는 말을 뜻한다.[3] 다만 칠거지악 중 하나긴 해도 사실 이걸 이유로 본처를 내치고 후처를 맞이하는 것보다 가까운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안의 갈등을 줄이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에 수월하였기 때문이다.[4] 대체로 번듯한 집안에서는 딸을 으로 시집보낼 일도 없거니와 씨받이 등으로 인해 많이 왜곡된 개념이지만, 당시의 양반들의 첩은 대부분 눈이 맞아 데리고 사는 여자였지 대를 이으려고 들이는 경우가 아니었다. 서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생각해보자. 또한 일반 서민들의 가정에는 첩을 들이는 것보다 조카 등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덜 부담스러웠기도 했다.[5] 다만 아무리 장손 집에 대가 끊길 상황이라도 생으로 자식을 뺏거나 동생 집의 대를 끊으면서까지 양자를 데려올 순 없었다. 그럴 만한 나이 대의 아이가 친척 내에서 없는 경우나,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식이 여럿이라도 아들은 하나뿐이라 보낼 수 없는 경우 등이 있었기 때문에, 서민 가정에서는 대를 이을 목적으로 첩을 들이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아직도 노인 세대 중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게 남아있는데, 이를 그린 다큐 영화로 "춘희막이"가 있다.[6] 형벌의 기준인 대명률과 간통강간을 다스리는 법률인 범간률 기준.[7] 간통과 강간은 대체로 장형 80~100대가 기준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이라도 곤장 10대 이상이면 생명에 위협이 오는 것으로 본다. 다 맞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하루 10대씩 끊어서 때리는 식으로 할수도 있고,그냥 때려 죽일수도 있다.[8] 이 위기는 2번 있었는데, 첫 번째 때에는 무산되었지만 2번째 때에는 결국 폐비되었다.[9]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동평군이 '원자의 모후를 중전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장희빈에게 보낸 일, 근래에 남인들이 모여 모의한 일, 인현왕후 사후 오시복을 통해 궁 안의 동태를 살펴봐달라고 한 일, 장희재 아버지의 묘비 훼손 자작극 전말 등등을 다 얘기했으며 심지어 동평군과 장희재가 잡아떼자 그 때 있었던 일을 생생히 증언하여 반박못하게 만들었다...[10] 그래서 처가 쪽의 입김이 세다면 오히려 칠거지악을 범해도 어떻게든 은폐하고 무마하며 그냥 계속 살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정말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질러 소문이 다 나는 경우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11] 단, 위에 설명한 것처럼 간통과 도벽은 그 자체로 이미 중범죄이기 때문에 삼불거라 하여도 내쳤다. 그리고 시부모를 해하려한 경우도 마찬가지. 아마 살인 등 더 큰 범죄가 있는데 칠거지악이나 삼불거에서 논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죄는 (남녀불문하고) 다른 법으로 이미 엄중히 처벌하기 때문인 듯 하다.[12] 그린 사람은 배금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