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4

동양 인문학 특강 8-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 동양포럼 < 동양일보 2017

동양 인문학 특강 8-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 인문학 특강 8-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7.05.21 

동학을 ‘시천기화侍天氣化’의 인문학으로 새밝힘 한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 19일 동학농민혁명 123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했다. <사진·최지현>

동학농민혁명 123주년 기념 학술대회(주최 청주시, 주관 동학학회·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지난 19일 오전 10시 충북대 개신문화회관 1층에서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충청도 청주’를 주제로 열렸다. 이날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이 기조강연을 했다. 강연은 동학농민혁명의 새밝힘인 동시에 동양포럼이 지향하는 바와도 상통하고 있어 그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여러분, 충청북도 청주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명분과 실천이 아우러지는 형태로 발동되었던 민중이 주도하는 영혼의 탈영토화·탈식민지화 운동을 겨레와 나라와 누리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뜻과 얼로 새밝힘 하는 학술대회를 충북 청주에 있는 충북대학교에서 개최하게 된 것을 아주 뜻 깊고 귀한 계기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모임에서 기조강연 하게 된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영혼의 탈영토화·탈식민지화는 제 스스로가 지난 30년 동안 나라 밖에서 줄곧 전개해 왔던 공공하는 철학대화 운동의 핵심주제였으며 그것의 사상적·철학적 연원을 동학의 철학·사상·운동에 연결시켜 왔던 저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주에서 살았고 여러 훌륭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기본적인 인간형성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 약 30년 동안 충북대에 몸을 담고 젊은 세대들과 함께·더불어·서로 미래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 저의 너무도 소중한 이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충북대의 건학정신은 ‘개신(開新)’입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새로운 차원, 지평, 세계를 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라틴어로 ‘Nova Aperio’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연다’는 뜻입니다. 이미 열려 있는 길을 잘 살펴보고 막힌데가 있으면 새로 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은 아직 길이 없는 곳에 새로 길을 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의 젊은 학생들과 함께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읊으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저는 1989년 12월 31일 일본 도쿄로 갔습니다. 1990년 1월 1일부터 일본인 학자들과 사상과 철학과 문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주로 서양에 가서 배우고 깨달은 것을 한국에 돌아와서 충북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그들과 함께 인식과 실천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고장과 우리나라와 우리겨레의 오늘과 내일의 보다 나은 삶을 이뤄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바가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대로 뜻있는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무언가 미흡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움이 더해가기만 했습니다. 나이 오십이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들을 들었지만 왠지 견딜 수 없는 좌불안석의 상태가 매일 계속되어 급기야 과거와 현재를 일단 접고 오직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별로 인연이 없는 곳에 가서 안면도, 학연도, 지연도 없는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길을 열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충북대의 건학정신이 어느새 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바탕까지 스며들어서 이제 남들이, 그리고 스스로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서 그냥 걸어가기만 하는 것에 권태와 피로를 느끼고, 신도 안나고, 흥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지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꿈에 젖어 있었고 시류에 역행하는 철부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자리가 아무리 소중하고 안락하더라도 그곳에 머무르고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저의 떠돌이=노마드 기질이라면 그것 또한 저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선 철학에 새로운 길을 열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일본의 지성과, 지식과 학문을 대표한다는 도쿄대학에서,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엘리트를 제일 많이 배출했다는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그들로부터배우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함께 더불어 서로 진지하고 활발한 대화를 하고 공동(共?=힘을 합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함)하고 개신(開新=새로운 길을 열고 깊은 뜻을 새밝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특히 ‘개신한다’는 쪽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함께 더불어 서로 마을을 열고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일본인 쪽에서 보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배우러 오는 사람=유학생 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르친다는 의식이 습관화된 형편이었고 어쩌다 특별한 경우에 일본인 학생들에게 특수분야에 관해서 한국인 전문가가 가르침을 주는 일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함께 더불어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는 체험, 경험, 증험이 없었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런대로 성과도 있어서 애초에는 2~3년정도 해볼 계획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러 차례 명칭 변경이 있었지만 결국 공공(하는)철학 교토포럼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낙착됐고 누군가가 자기 혼자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는 철학 -자가철학· 사제철학·사(私) 철학-도 아니고 어떤 제도권에서 공인된 철학- 제도철학, 관변철학, 공(公)철학-도 아닌 새로운 철학 -개개인의 일상생활이 구체적으로 영위되는 생활세계에서 사(私)와 공(公)의 사이를 잇고 맺고 살리는 철학 -공공(公共)하는 철학을 낳고, 기르고, 키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영어권에서 유학·수련·연구·교수했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소위, 선진공공사상을 번역·수입·적용하는 단계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중국에 가서 수학·연구·교수했던 분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적 공사관을 소개·소화·음미하는 단계를 거쳐서 일본사상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서 일본사상사를 재조명하는 가운데서 일본적 공사인식을 재정립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점을 새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언론계나 사회전반에 그 영향이 적지않았습니다. 명문대학에 공공철학 강좌가 설치되었고 공공철학을 필수로 하는 인문사회계 대학원이 신설되었으며 새로 개발된 어휘나 사고방식이 정치 지도자들의 발언에도 자주 나오게 되었고 제 자신이 개인자격으로 국가공무원 교육과정에 특별강사로 초청받아 각급 공무원들과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그 결과가 행정기관의 공적 매체를 통해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가 바로 배용준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겨울연가’ - 일본에서는 ‘겨울의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음-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일본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저의 일본인 친구 학자들도 부인들의 강요에 할 수 없이, 또는 자진해서, 정기적으로 방송되는 겨울연가를 보면서 그야말로 일본사회가 한류에 휩싸였던 시기이기도 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개선을 위한 인식조정과 실천과제가 전에 없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한일간의 학자중심의 공공찰학 대화가 추진·유지·발전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한국적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의 문제도 재인식·재정립·개선발전의 모색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를 돌면서 그쪽에서의 공공논의를 섭렵·선별·정리하고 일본과 중국 그리고 그 이외의 이른바 제 삼세계의 나라들을 돌면서 그 쪽의 형편을 살펴보고 나서 얻은 인식지도에서 한국적 공사인식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그 발전 가능성과 장애요인을 가려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 중 대단히 중요한 일환으로써 우리의 철학, 우리의 사상, 우리의 역사적 체험 등을 다시 한번 근본에서부터 살펴보고 거기서 세계와 더불어 공감할 수 있는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의 기본과제를 도출할 필요와 그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고독한 고뇌 가운데서 암중모색하였습니다. 때로는 함께하는 귀중한 동료들의 충언과 제안에 격려와 위로와 활력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잠정적으로 깨달은 바를 요약해서 제시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나름의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의 기본과제는 중앙(=서울)에서 누군가가 또는 어떤 집단이 규정해서 지방에 하향 전달하는 식으로 정립, 보급, 확인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지방간 상생의 인문학적 상상력의 상극·상화·상생의 역동적 발전·향상·성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개선·성숙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나름의 공사인식과 실천과제는 현재 세대위주로 현재 세대의, 현재 세대를 위한, 현재 세대에 의한,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의 일방적 중시경향을 탈피해서 세대간 상생의 인문학적 상상력의 상극·상화·상생의 역동적 발전·향상·성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개선·성숙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나름의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은 제도권이 주도하는 제도지, 관이 주도하는 관지(官知), 전문가 집단이 주도하는 전문지에 편향 의존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생활세계에서 자생하는 생활지, 시민이 주도하는 민지(民知),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지를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나름의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을 서양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중국에서도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데 지나치게 편중돼 있는데 비해서 역사적 체험으로써나 현재의 과제의식으로써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일상생활이나 업무수행을 통해서 실지·실행·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문제의식이 있어서 공공(인식의) 철학에서 공공(하는)철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깨달음에 더해서 우리의 지성사, 사상사, 생활사를 심층성찰 해본 결과의 하나로 동학이 가진 뜻 깊은 현실개신성(現實開新性)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동학의 내재적 심층이해는 그 동안 정말 각고의 노력으로 그 정수를 밝혀내고 그것을 다른 많은 관심 공유자들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시했던 선배학인들의 업적을 존중하고 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오늘 모임의 주제인 동학농민 혁명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의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실증 연구의 성과에 기대를 걸기로 하면서 저는 농민혁명에까지 이를 수 밖에 없었던 동학의 사상적·철학적인 뜻과 얼을 새밝힘 해보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청주에서 이 모임을 갖게된 취지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제 자신이 개인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개신의 도시 청주에서 있음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을 전제로 하고 그 터전 위에서 제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마는 오늘의 우리 젊은 세대가 ‘이게 나라냐?’라고 소리 높이 외치고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자기의식, 자국인식, 세상인식으로 스스로와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현실상황에 대해서 그것의 형성과정과 거기서 빚어진 결과에 대한 책임의 일단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써 간절한 심정으로 함께 ‘이게 나라라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고 당장 ‘파라다이스 조선’까지는 가지 못한다고 해도 거기로 가는 새 길을 함께·더불어·서로 열어나가자고 호소하고 지방과 세대가 함께하는 희망을 키워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 철학을 세워나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입장과 견해와 취지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동학을 개신하는데 필요한 인식과 실천의 토대구축과 방향전황의 사안(私案)을 말씀드리고 여러분과의 화쟁회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더 없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씁드립니다마는 이것은 어디까지 제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동안 일본을 거점으로 세계를 상대로 함께 전개해온 공공하는 철학 교토포럼을 통해서 통산 26년간 2000명 이상의 일본 국내외의 전문가, 사회지도자, 민간인, 경영인, 관료, 학생들과 대화, 공동, 개신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때로는 제 자신이, 때로는 동학의 전문가를 모시고 함께 공구공론(公究共論)했던 문제 관심을 다시한번 제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구태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만 모든 것은 여러분의 기탄없는 반론·이론·신론·반박·비판·변경에 활짝 열려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동학을 ‘시천기화’의 인문학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오늘과 내일의 시대적, 상황적 요청에 능동적으로 적정대응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기본적인 발상전환의 핵심만을 추려서 제시하려고 합니다.



1. 동학의 ‘동(東)’은 서학의 ‘서(西)’와 대비되는 것으로부터 개념전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를 중심으로 잡고 그것과 비교, 대조, 평가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동이(東夷)를 동쪽 오랑캐로 해석하고 그것을 한국 또는 한국인으로 폄하하는 것으로 중국인은 물론 한국인까지 자조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의미 이해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의 경향이 그렇게 흘러온 것도 그와 같은 의미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의 철학대화를 통해서 체득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東)’이란 중심부(세계적으로나 일국 내로나)에 의한 주변부의 영토화·식민지화(정복, 동화, 평정)에서 벗어난 외각지대를 중심부적 발상으로 규정, 차별, 폄하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東)’의 독자적 자리매김과 뜻매김을 새밝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 글자 모양이 나무사이에 떠오르는 햇빛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새로운 빛=차원=지평=세계=미래가 열리는 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東)’이란 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태동, 태생, 성장, 성숙 할 수 있는 역동성이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서세동점 하던 시대상황에서도 서(중국이나 서양)의 식민지화에 맞서서 끝까지 저항했고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말미암아 정복, 동화, 평정된 와중에서도 민족의식의 최심층에 잠류하고 있다가 때를 만나면 집단적으로 폭발하곤 했던 탈식민지화의 운동에너지가 저장된 현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겨레와 우리나라의 지철학(地哲學)적 위상을 냉엄하게 새겨볼 필요가 있음을 여러번 직감했습니다. 중국의 철학적 동력은 ‘문화(文化=文德感化=문화의 힘으로 주변 세계와 거기서 사는 인간들을 감화시킨다)력에 의한 ’중화화‘로 나타나고 일본의 철학적 세력은 ’습합(習合=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일체의 것을 취사선택해서 철저하게 자기것으로 바꿈)‘에 의한 ’일본화‘로 표출되는데 그 사이에 놓여져서 중국 쪽의 외향적 동화력과 일본 쪽의 내향적 흡수력을 동시에 중화 조절하면서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국이나 강국의 논리와는 다른 중간국의 생존전략을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체인, 체득, 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문화’와 일본의 ‘습합’과는 다른 우리 나름의 내외조정의 철학적 원동력은 무엇이겠습니까? 한참 동안 고심한 끝에 깨달은 것은 신라말기의 최치원이 비슷한 지철학적 위기상황에서 생각해낸 우리 고유 사상으로써의 풍류도의 핵심지향으로써의 ‘포함삼교’와 ‘접화군생’을 오늘과 내일의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새밝힘 하는데서 도출될 수 있다는 자각, 각성, 인식입니다. 제 나름의 재해석은 ‘포함삼교’를 ‘삼차원상관연동적 상상력’으로, 그리고 ‘접화군생’을 ‘활명연대(活命連帶)적 상상력’으로 새밝힘 한다는 것입니다. 삼차원 상관연동적 상상력이란 모든 이원대립적 분쟁상태를 그 사이로부터 양쪽을 함께 살리는 길을 찾아 거기서 스스로도 살 수 있는 새차원, 새지평, 새세계를 열어간다는 것이 기본인 전략적 구상력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종래의 ‘공(公)’=전체주도의 사상, 철학 문화와 ‘사(私)’=개인중심의 사상·철학·문화와의 극단적 이분대립상황에서 오는 폐단, 병리, 모순을 그 사이로부터 공사공진화(公私共進化)를 제대로 이루도록 한다는 뜻에서 개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접화군생’에 관해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체험, 경험, 준험, 효험의 과정을 거쳐서 터득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문화’와 일본의 ‘습합’에 직접 대비되는 한사상, 한철학, 한문화의 근본적 지향은 ‘접화’라는 것이며 거기서 빚어지는 결과가 ‘군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자와 자기가 만나게 될 때 자기에 의한 타자의 동화, 회수, 통합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자에 의한 자기의 동화·회수·통합도 아닌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엶으로써 타자와 자기가 함께, 더불어, 서로 살리고 사는 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생존사고를 자타상생적사고로 바꾼다는 사고전환으로 새밝힘 한다는 것입니다.

만남이 타자말살의 계기나 자기소멸의 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타상존(自他相存)을 통해서 자타상화, 상생, 공복(共福)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는 뜻에서 개신한다는 것입니다.

2. ‘시천(侍天)’은 일단 ‘시(侍)’와 ‘천(天)’으로 따로따로 떼어서 각각의 뜻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다시 합쳐서 그 깊은 뜻을 새밝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는 ‘모시다’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모시다’라는 것은 신분이 높은 분이나 내게 귀하고 소중한 분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 뜻을 이루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은 하늘인데 인격적으로 이해할 때는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이 되며 비인격적으로 파악할 때는 지기(至氣) 즉 가장 순수하고 가장 생명력이 충만한 기-원기(元氣), 영기(靈氣), 생기(生氣)를 뜻합니다. 저는 이때까지의 종교적 의미 해석에서 생명론적 재해석으로 해석전환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 드리면 근원적, 내재초월적 생명력, 생명에너지의 눈뜸이며, 깨달음이고 그것의 기질화, 체질화, 습관화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의 개체생명-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똑같은 생명현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개개물의 개체생명-을 바쳐주고 지켜주고 어느 기간이 지나면 나중에는 거기로 돌아가도록 마련돼 있는 보다 큰, 보다 근원적인 생명- 우주생명이라고 부르도록 함-의 역동적 임재를 체감, 각성, 인식하고 그것을 타인, 타자, 타물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모두가 하늘=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를 속 깊이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뜻에서 상호존중이 필수불가결이며 우주적, 근원적 생명에너지를 분유(分有)·공유(共有)·공육(公育)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등=무차등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타가 함께 더불어 서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해야 할 근거가 도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경(敬)’이란 다름 아닌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껏 모신다는 뜻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학과 만남이전의 공공하는 철학은 한마디로 ‘공사공공(公私公共)’의 철학이었다면 동학과의 만남으로 새밝힘된 공공하는 철학은 한마디로 ‘천인공공(天人公共)’의 공공하는 철학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천’이란 다름 아닌 ‘천인공공’으로 새밝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기화(氣化)’를 새밝힘 할 차례입니다. 기화도 ‘기(氣)’와 ‘화(化)’를 따로 고찰한 다음에 다시 합쳐서 그 뜻을 새롭게 심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기(氣)’인데 그것은 앞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근원적 생명력, 생명에너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체 생명의 근원적 생명에너지와 우주생명의 근원적 생명에너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보태서 개체적·근원적·생명에너지와 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를 그 사이에서 때로는 상극하고, 때로는 상화하고, 때로는 상생하는 매개적·관계 형성적 생명에너지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양의 여러 언어의 어원학적 고찰의 결과를 상고해보면 기=공기=영 또는 혼 또는 영혼=호흡=생명에너지라는 의미연관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어느 때 어느 분야의 인식패러다임이 주도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해석이 다른 해석보다 인식적 우위에 서는가가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줄곧 변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감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화라고 하면 영화(靈化=이성 또는 지성·감성·의지를 함께, 더불어, 서로 아우르는 근원적 생명에너지로서의 영성을 활성화·생활화함)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간변혁, 사회변혁, 세계변혁의 원동력을 인간주체의 이성이나 감성, 의지에 관련지어서 이해, 파악, 주장했던 종래의 변혁이론에서 인간과 만물이 공유하는 근원적 생명에너지로서의 ‘영성(靈性)’ 동원의 적정화·적합화·시중화(時中化)를 가장 중요시하는 변혁이론으로의 근본전환을 뜻하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제 자신의 문제관심과 결부시켜서 말씀드리면 동학은 민중의 근원적 생명력=영성을 최적동원(最適動員)함으로써 개인적·민족적·국가적 영혼의 탈영토화·탈식민지화를 겨냥하는 데서 새로운 공공인식과 공공실천의 개념정립과 실천방향의 재조정을 시도하는 민중철학 대화운동이라고 뜻매김하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종래의 반침략·반봉건의 민중궐기에서 한발짝 전진한 의미부여라고 생각합니다.



4. 원래 우리의 고유사상, 철학, 문화의 근저에는 ‘화(化)’가 핵심적 지향(志向), 정향(定向), 향향(響向)으로 끈질긴 저류를 이루고 있어왔습니다. 우리의 건국신화에도 ‘원화위인(願化爲人=간절히 바라건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라든가 ‘재세이화(在世理化=이 세상이 하늘, 땅, 사람의 이치에 따라 제대로 좋게 바뀌어지도록 함)’가 중심가치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젊은 세대가 ‘이게 나라냐?’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제 나라를 두고 ‘생지옥’이라고 말하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제목의 책이 널리 읽히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의 모습이 바뀌어야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라는 우리세대만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어야할 세대간 공공물=공공재=공공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세대의 인식, 의식, 지식으로는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해도 다음세대의 입장, 처지, 관점으로는 못살겠다면 그 차이, 격차, 모순을 세대간 공평성, 공정성, 공명성의 균형있는 판단으로 세대간 상생쪽으로 변경, 변혁, 개혁해나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실행에 옮겨야 할 책임이 제일차적으로 기성세대 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특히 동학에서는 이점에 착안해서 ‘개벽(開闢)’이라는 말을 썼고 그것도 ‘다시 개벽’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학자들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서는 ‘개벽’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벽’이란 일본이라는 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 아마테라스여신(天照大御神)에 의해서 성취된 위업으로 기억할 뿐 그 이후에는 그 어느 누구도 개벽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인들의 사상, 철학, 문화의 기조음으로 계속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 나라의 모습이며 기본틀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소위 만세일계의 천황제에 의해서 변함없이 보존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어쩌면 조선의 초석을 다진 정도전(鄭道傳·1337~1398=이씨 조선의 개국공신 ‘조선경국전’의 저자)이 생각하고 제시했던 ‘공천하국가(公天下國家)’의 구상을 일종의 개벽적 사건으로 정당화하고 나서 그 이후에는 필요에 따라 개혁까지는 허용하되 ‘개벽’은 금기시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숱한 정쟁(政爭)이 있었고 그때마다 개혁이 거론, 실지되었지만 개벽이라는 어휘로 최재우가 그리고 동학운동이 명시적으로 제창할 때까지는 역사의 무대에 뚜렷한 모습을 갖추고 등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바꾸고 땅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어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어우러지는 총체적 개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사리 입에 올리거나 쉽게 시작할 수 잇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세대간, 지방간, 계층간, 분야간 공통인식이 널리 펴져있는 것 같습니다. 세대간, 지방간, 계층간, 분야간 행복격차, 희망격차, 기회격차가 너무 심하다는 현실인식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지방은 중앙의 식민지와 같은 위치에 놓여있고 장래세대는 기성세대의 과도한 이기주의에 의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지도자와 대중은 극심한 동상이몽에 집착할 뿐이며 태어날 때 금수저를 가질 수 있었던 인간들은 세계적 수준의 호사를 만끽하는데도 불만으로 가득 차있는데 흙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에게는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절망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안보인다는 것이 현실상황입니다. 적어도 대다수의 젊은 세대의 현실인식입니다. 그래서 다시 개벽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질개벽이 필요하다는 것은 몇십년전에 제창되었던 시대선언이었습니다. 정신개벽이 필요하다는 시대선언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제 자신의 개인적인 감각으로는 앞선 두가지 개벽에 보태서 생명개벽, 생활개벽, 생업개벽이 필요합니다. 특히 겉으로 보이는 체격이나 용모나 성격은 지난날에 비해서 월등하게 개선, 개량, 개진된 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인 생명력, 생활력, 생업력은 약화, 퇴화, 열화(劣化)된 것 같이 느껴지는데 저만의 착각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 개인적, 정치, 사회, 문화적 원인이 기성세대의 무책임, 무감각, 인식부족에서 연유한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저만의 과잉자책입니까?

세계를 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세대간, 지방간, 계층간, 분야간 공공하는 철학 대화운동을 전개해 오는 가운데서 절실하게 체감하게 되었던 것은 장래세대에 대한 현재세대의 책임의식과 배려가 상대적으로 희박한 우리의 현실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의 무식의 소산입니까? 물론 자기자신의 아들 딸에 대한 책임과 배려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의식화의 수준에서 아직도 후진국형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합리적인 반론을 펴기가 어려웠던 것이 숨김없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기화가 필요한 시대상황입니다. 인간과 사회와 국가가 생명개벽, 생활개벽, 생업개벽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촉발한 민중의 원기력, 영기력, 생기력이 집합적으로 적정화·적합화·적시화 될 때 생명개벽, 생활개벽, 생업개벽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동학연구와 동학실천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바로 나라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으며 헬코리아가 파라다이스 코리아로 근본변혁 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드는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6. 한가지 더 잘살펴보아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정도전이 구상하고 조선왕조 500년동안 계속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이후 역대 정권을 거쳐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바깥모습은 여러모로 크게 변화되어 왔으나 속은 공천하국가=공적질서 최우선 국가사회=국민(의 삶과 행복)보다는 국가(의 체제와 이익)가 앞서고 위에 있는 짜임새였습니다.

이제는 시대적 요청이나 국민적 요망이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의 자유로운 추구와 그 구체적인 실현이 우선하는 나라 모양을 제대로 갖추는 쪽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국가 중심적 공의 가치보다 국민중심적 공공의 가치가 더 중요시 되는 근본적 가치전환이 이루어지기를 국민의 절대다수가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동학은 공(전체)이 사(개인)를 필요하면 배제시키고 희생키시는 제도를 거쳐서 마침내 사와 사, 공과사, 공과 공을 그 사이로부터 함께, 더불어, 서로 매개하고 활성화시키고 상조·상보·상생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구조적 개혁을 도모하기 위해서 민주도로 시발된 사상·철학·세계관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은 새로 싹트기 시작했던 민주도의 공공 하는 가치지향을 대한제국과 일제의 공권력=체제권력=국가권력이 통제·진압·말소하려는데 대항해서 궐기했던 생명·생존·생업의 권리투쟁이었습니다.

그때는 창시자 최재우와 조직자 최시형의 처형 그리고 종교이념으로 정착시킨 손병희의 병사와 함께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역사적으로 망각될 처지로까지 내몰렸지만 끈질긴 민중운동의 마그마로 지하에서 용트림치다가 때때로 여러 다른 형태로 폭발되곤 했으며 그 결정적인 분출은 3.1운동이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이었고 최근에 일어난 촛불집회의 평화적 시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유념해야 될 것은 동학의 뜻과 얼이 그 이념과 운동이 일부 정치가들의 정권획득의 정당화 또는 부당성 논리에 편승하거나 악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타국은 물론 자국의 공천하국가적 이데올로기 조작이나 공권력의 자행을 통해서 영혼의 영토화, 식민지화를 획책하는 일체의 폭력지배에 대항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과감하고 치열하게 궐기할 수 있는 민주도의 탈영토화, 탈식민지화 운동의 참모습이라고 해석하는데 개신의 도시 청주에서 새밝힘하는 미래공창적 뜻매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동학은 지속적인 민주도의 영혼의 탈영토화·탈식민지화를 통해서 자타상생·상화·공복(共福)의 미래공창을 실현시키려는 자생적 사상·철학·문화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상과 철학의 경계를 벗어나서 예술과 종교와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인문학 운동이라고 뜻매김·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가늠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사진·최지현

 

오구라 기조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1) 코지마 츠요시 <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1)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1.28 
한국 사상 통사通史 그려낸 가치있는 저술
코지마 츠요시 일본 도쿄대 교수

동양일보가 연중 펼치고 있는 ‘동양포럼’으로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온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최근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 책 두 권을 펴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현대 한국 사회를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리’와 ‘기’로 해부한 독창적인 한국론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출간됐지만 ‘조선사상전사’는 아직까지 일본에서만 만날 수 있다.

‘조선사상전사’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교·불교·도교 등의 사상과 철학을 넘어 신화·역사·종교·정치까지 모두 담고 있다.

오구라 기조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2) 조성환 <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2)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2)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1.28 

한국학의 새로운 지평 연 오구라 교수의 철학서
조성환 원불교사상 책임연구원


내가 생각하기에 이 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대략 1940년생 세대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형효나 김경재 세대). 그 이후의 세대들은 이른바 ‘전문화’의 길로 들어서거나 ‘근대화’의 세례를 받아서 ‘한국’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전통은 사라지고 말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중국’이나 ‘서양’의 시각에서 한국을 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라진 이 전통이 일본 땅에서 일본학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단순히 이어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한국학의 지평을 열고 있다면 더더욱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 단절된 한국학의 계보를 잇다

1998년에 초판이 나온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조성환 역, 모시는사람들, 2017)는 ‘한국’ 전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세대의 한국학 연구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전통(조선)과 현대(한국)를 별개로 연구해 왔던 종래의 방식을 뒤집고, 현대 한국 안에 작동하고 있는 유교적 사유방식의 흔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한국학의 지평을 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을 타자화 할 수 있는 ‘경계’에 서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한국은 ‘경계’나 ‘사이’에서 조망되기보다는 ‘외부’나 ‘내부’의 시선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중국철학이나 서양철학을 기준으로 한국철학이 서술되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한국철학 안에서만 이해되어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에 늘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누군가에 의해 지적을 받아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무의식의 한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영역이 바로 유학이다. 종래의 한국유학 연구는 ‘조선’이라는 공간과 ‘학파’라는 영역에 제한되거나, ‘철학’이라는 분야와 ‘근대’라는 시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주리(主理)나 주기(主氣) 또는 퇴계학이나 율곡학과 같은 학파를 중심으로 연구되거나, 사단칠정논쟁의 철학적 함축이나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찾는 연구(‘실학’)가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그 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동양포럼’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과 만난 오구라 교수가 최근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전사’ 두 권의 책을 발간했다.

● 유학에 대한 통념을 뒤집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학은 전근대적인 것”이고 “한국은 근대화된 국가”라는 등식이 암암리에 깔려 있어서, 이미 근대화된 한국에서 조선시대 유학이 작동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유학의 역할”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든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철학의 대상을 철학자의 텍스트로 한정시키고 있는 한국학계의 학풍도 한몫했을 것이다.

철학이란 항상 철학사에 나와 있는 철학자들의 개념이나 체계를 이해하는 작업으로 여겨져 왔지, 그것을 가지고 현실을, 그것도 ‘한국’이라는 사회 전체를 분석하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철학과 정치와 사회가 일체화된 사회였다. 지금처럼 철학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치가나 행정가 또는 법률가나 과학자 할 것 없이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철학(주자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였다.

그런 조선에서 한국으로 전환된 지는 아직 10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이 해체되어 버린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새로운 방법론의 도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이러한 허점을 찌르고 있다. 한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무시되고 잊혀져왔던 ‘주자학’의 영향력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종래의 분석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래에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론은 거의 대부분 서양의 학문이론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학, 사회학, 여성학, 문학이론 등이다. 이것을 저자는 “외과수술적인 언설”(252쪽)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저자는 조선왕조가 실제로 채택한 통치이념인 리기론으로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즉 ‘내재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이 책이 종래의 주자학 연구서나 한국사회 연구서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이와 같은 ‘내재적 방법론’과 더불어 이 책이 사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방법론은 ‘한일비교사상’이다.

이 책은 일본사상의 눈으로 본 한국사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이 작업은 최근에 나온 ‘조선사상전사’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종래에 비교철학이라고 하면 주로 중국과 서양의 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간혹 가다 동아시아 삼국의 유학 등을 비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비교의 대상이 대부분 철학자들의 언설에 나타난 사상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 그것으로 한중일의 사회까지 비교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에 반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한일 두 나라에서 중국의 주자학이 수용되고 토착화되는 양상의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한일 양국의 사회적 모습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비교가 효과적인 것은 한일 양국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나라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거기에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써 감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사상으로서의 한국 연구

한편 최근에 나온 ‘조선사상전사’는 다루는 시간적 범위나 학문적 영역에 있어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에서 ‘조선’은 남북한을 아우른 ‘한국’을 가리킨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을 모두 대상으로 삼고 있고,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도교 등도 다루고 있으며, 학문 분야에 있어서도 철학을 넘어서 신화, 역사, 종교, 정치까지 포괄하고 있는, 말 그대로 “(문고판) 한국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현대 북한의 사상과 인물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이 책의 제목이 ‘조선’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나온 두 작품은 저자의 한국학 연구의 발전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가 ‘리’ 중심의, 그런 의미에서 ‘이성’ 중심의 한국론이었다고 한다면, ‘조선사상전사’는 거기에 ‘영성’의 요소까지 가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원효의 불교와 신라의 화랑과 퇴계의 유학과 수운의 동학을 ‘신라적 영성’으로 묶어내고 있는 관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종래의 한국철학사나 한국종교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종래의 철학사는 철저하게 ‘이성’ 중심의 서양철학사를 기준으로 하거나, ‘학파’ 중심의 중국철학사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랑의 풍류나 수운의 동학은 철학사에서 배제되기 마련이고, 설령 한국종교사에서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퇴계의 유학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과 종교라는 서구적 학문 분류를 넘어선 ‘사상’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틀을 적용하여, 일견 무관하게 보이는 사상가들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 서구중심적 사관에 대한 경계

또한 저자는 방법론상에 있어서도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사용한 내재적인 방법론과 한일비교사적인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다.

먼저 한국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사상의 순수성 확보”(제1장 ‘조선사상사총론’)에서 찾고 있는 점은, 저자 나름대로 한국사상사 전체를 조망한 결과 내려진 내재적 방법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결론이 일본사상사의 전반적인 특징과의 비교를 통해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교사상사적 방법론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상사’에 대한 평가를 신중히 하고 있는 점 역시 서구 중심적 사관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한국사상사 자체의 맥락에서 한국사상을 조망하고자 하는 저자의 신중한 사상사 서술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분은 동학에 대한 서술이다. 흔히 한국근대사상사를 논할 때에는 ‘개화’ 부분이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반대로 동학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는데(개화와 척사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다), 이 점은 저자의 사상사 서술 관점이 한국사상의 독창성에 기준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저자는 “19세기는 ‘암흑시대’라는 인식은 오류일 수도 있다,” “이 시기는 극히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철학자나 문학자가 배출되고 있다”(240쪽)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사용되었던 한일비교사의 영역도 한일비교사상사에서 한일비교문화사 내지는 한일문화교류사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고사기’나 ‘일본서기’, 또는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활용하여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일교류사에 관한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가령 백제와 일본의 왕실 간의 인적 교류사나 한일 양국가의 불교교류사 등).

이 외로도 원효를 장자나 도겐(道元) 등과 같은 ‘메타 메타피지스트’(메타 형이상학자)로 위치지우는 독특한 해석이나, 조선과 일본을 왕조교체와 계급교체로 보는 문일평의 조선론이나 만해 한용운의 진보주의적 세계관 소개, 일본의 양명학과는 달리 한국의 양명학은 분석적이라는 비교 등등은, 한국인들이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발상이나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 다음 세대를 위한 한국학 지침서


이상의 여러 가지 점에서 나는 이 두 권의 책이야말로 장차 한국학을 하려는 소장학자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한국을 ‘철학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알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 이 두 권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비교사적 시각은 물론이고, ‘한국’이라는 연구대상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와 깊은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오늘날 한국학계에서 이러한 식견과 열정을 가진 한국학자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앞 세대의 한국학의 정취와 한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미래의 한국학을 열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한다.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기자명 박장미 기자
입력 2017.10.23 

김태창 주간 삿포로 특별강연
민중 속으로 뛰어든 이들의 공통점
탈식민지화, 탈영토화 위해 온몸바쳐
일본제국주의 '천황 따르라'주입교육
폭력 아닌 '정답'논리로 인민들 지배


지난 16일 오후 일본 로이톤에서 열린 주 삿포로 대한민국 초영사관 초청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특별강연에는 훗카이도 지방정부인사, 학계, 기업관계자, 재일동포 등 30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동양일보) 주 삿포로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지난 16일 오후 일본 로이톤 삿포로 3층 로이톤홀에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을 초청, 일본의 나츠메 소세키와 한국의 포석 조명희를 소재로 한 특별강연을 개최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야규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가 정리해 보내왔다. <편집자>

10월 16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호텔 로이톤삿포로(ロイトン札幌)에서 주 삿포로 대한민국총영사관 주최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특별강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조명희(趙明熙)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가를 통해 한·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가 개최되었다. 바깥에서는 한반도나 일본의 혼슈(本州)보다 먼저 첫겨울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강연 장소인 300명을 수용하는 대형 홀이 곽 찼고, 청중들의 뜨거운 열기가 충만하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 홀에는 5살 때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10여 년 동안 혼자서 살다가 세계적 가수가 된 최성봉 소년이 부른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 그리고 존 레논의 ‘이메이진(Imagine)’, 고바야시 사치코(小林幸子)의 ‘꿈의 끝(夢の涯て)’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모두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고 계속 꿈을 가지는 것의 중요함을 부른 노래들이다.
또 2시간의 강연을 마친 후에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하려고 하는 참가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김 주간은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주최자 쪽에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김 주간, 영사관 관계자와 미래공창신문 야마모토(山本恭司) 교시 편집인과 필자만이 경식을 취하면서 야심한 시각까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아탑을 떠나서 ‘민중 속으로’
이 강연에 즈음하여 김 주간은 지금 왜 오늘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라는 한일의 대표적인 작가를 이야기하느냐에 대해 밝혔다. 포석 조명희(抱石趙明熙)는 잘 알다시피 1894년 마침 동학혁명,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난 한반도 역사가 대전환된 해 충북 진천(鎭川)에서 태어났다.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3.1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석방 후 그는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로 유학하면서 재학 중에 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1920년에는 희곡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로 창작극작가로 데뷔했다. 다음해 고국에 돌아온 그는 1920년대에 대표작인 ‘낙동강(洛東江)’을 비롯하여 많은 시, 희곡, 소설 등을 발표하면서, 독립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식민지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러시아의 한인촌에 가서 고려인 문학과 교육에 힘을 기울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하에서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고 말았다.
소세키도 역시 어린 시절은 불우하고 여러 번 입양되다가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젊은 소세키는 한시문(漢詩文)을 즐겼으나 문명개화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제국대학(帝國大學·뒤의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에히메(愛媛)와 구마모토(熊本)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문부성(文部省)의 명을 받아서 영국 런던에 국비유학생으로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신경쇠약을 앓고 귀국명령을 받게 되고, 귀국 후에는 도쿄대학 교수와 제일고등학교 강사를 했지만 결국 교직을 그만두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의 신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김 주간은 그들의 삶이 30대에 한국을 떠나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하고 또 50대에서 대학총장의 지위도 다 놓아두고 단신 일본에 가서 도쿄대학에서 공공철학 운동을 시작한 자기 인생과 겹친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보다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소세키와 조명희가 조금 스스로를 굽히기만 하면 상아탑 안에서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과 신분 보장, 그리고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문학자로써 민중 속으로 뛰어들고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위해 활명연대(活命連帶)하려 했다는 점이다.
젊은 소세키는 영어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일본인으로서 무엇 때문에 영문학을 공부하는가? 문명개화(文明開化)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니 하기 위해 영문학자의 설을 일본에 수입하고 짝퉁 영국인이나 되자는 것인가?”라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게다가 실제로 대영제국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살아보니까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대제국을 건설해본들 거기에 사는 영국인들은 별로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당시의 제국 일본의 밝지 않는 미래를 미리 들여다보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산시로’에서 주인공 산시로(三四?)가 도쿄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콧수염을 기른 (소세키의 분신과 같은) 남자와 같은 자리에 앉으면서 러일전쟁 후 “앞으로는 일본도 점차 발전하겠지요?” 라고 말하자 그 남자가 “망할 거야”라고 딱 잘라버리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말로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 교원의 자리를 내던지고 소설가가 되었으며, 근대주의·자본주의·제국주의에 분주하면서 내면이 ‘식민지화’된 지식층의 모습을 비판적 또는 풍자적으로 많이 그렸다.
한편 조명희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구체적으로 한반도 땅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있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비참한 모습을 소설에 많이 묘사하고 ‘낙동강’에서는 제국주의 권력에 의한 고문으로 빈사상태로 석방되는 독립운동·사회운동 지도자를 등장시켰다. 그 작품에는 경찰 측 인물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비록 놓인 상황은 다르지만 조명희도 소세키도 식민지화·영토화된 영혼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뛰어든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정답 없는 물음’을 계속 물어야
강연 중 김태창 주간은 김선우 화가가 소세키 작품을 읽고 그림으로 표현한 ‘행인’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리고 조명희의 작품세계를 그려낸 ‘아무르 강의 생명수’, ‘낙동강’을 소개하고, 김영미 시인의 시 ‘낙동강이 흐른다’(일본어 번역: 오구라 기조 교수)를 낭독했다. 또 나츠메 소세키, 조명희, 그리고 중국을 대표하는 루쉰(魯迅)의 세 사람에 대해 김태창 주간이 직접 지은 시 ‘정답 없는 물음’도 소개했다.
그런데 이 ‘정답 없는 물음’과 관련해서 김 주간은 일찍이 어느 고등학교 교장 연수회에서 강연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떤 교장선생이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와 대학은 어디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다. 김 주간은 “고등학교까지는 정답이 있는 교육을 합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것은 정답이 없는 것을 가르치는 곳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삿포로의 청중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강연 후의 만찬회 때 한 여자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나는 정답을 찾기 위해 대학교로 들어갔는데 정답이 없는 곳이 대학이라면 그 정답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뒤에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을 때에도 어느 직원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답’이야말로, 달리 말하면 재빨리 정답을 얻고자 하는 심리야말로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로 이어지는 무서운 함정이다. 서구제국주의는 막강한 군사력만 가지고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서양화가 정답이다’라는 논리로 세계를 농락했고, 일본제국주의는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들고, 천황의 정부의 법을 따르고, 천황의 백성인 일본인과 같이 돼라.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논리로 식민지(본국도)를 지배했다. 히틀러의 나치스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답이었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정답이었고, 중국에서는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정답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정답이다.
이처럼 모든 제국주의·전체주의는 폭력·통제·감시보다 오히려 ‘정답’을 가지고 인민들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시민이 자유로움을 잃지 않으려면 먼저 계속 생각하는 백성(思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에의 뜻을 굳게 지키는 백성(志民)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계속 생각하고 뜻을 지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배 권력이 내놓는 가짜 정답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뜻과 생각으로 옳고 그름, 밝음과 어두음을 가리고 항상 밝음(哲)을 선호하는 백성(哲民)이 되어야 한다고 김태창 주간은 강조했다.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는 모두 뛰어난 지성을 가지면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안정된 지위와 생활을 내던지고, 여러 가지 병이나 관헌의 탄압과 싸우고, 시민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통해 사민(思民)·지민(志民)·철민(哲民)이 되고자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 주간은 영혼의 식민지화, 영토화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기계에 의한 식민지화라고 경계한다. 사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대치되고 장래 없어지는 직업이 거론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회사 골드만삭스(The Goldman Sachs Group)는 이미 서기 2000년 당시 600명 있었던 금융투자가를 현재 2명까지 줄었다고 한다. 또 2016년 3월에는 이세돌 기사(棋士)와 AI의 알파고(AlphaGO)가 대전하고 4패 1승한 일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인공지능의 승리라는 문맥에서 거론될 경우가 많지만 김 주간은 오히려 이세돌이 거둔 1승에 주목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정보처리·분석능력이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이라도 감히 생각해낼 수 없는 묘수(妙手)를 인간은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유를 잃지 않으려면 생각하고 뜻을 세우고 철학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힘들더라도 정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 물을 줄 알아야 된다. 하지만 혼자서 그 험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벗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의 인생과 작품을 통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보여줬다. <야규마코토(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8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 일본의 카이바라 에키켄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05.13 
동양포럼(68)-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카이바라 에키켄 초상
야규 마코토(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카이바라 에키켄은 누구인가?

카이바라 에키켄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유학자·박물학자이다(전문의 의사가 아니었다). 이름은 아츠노부(篤信), 자는 시세이(子誠), 호는 쥬사이(柔齋)·손켄(損軒) 등이 있으나, 만년에 쓴 에키켄(益軒)이 가장 유명하다.

에키켄은 큐슈(九州) 후쿠오카번(福岡藩, 일명 쿠로다번黑田藩)의 서기였던 카이바라 칸사이(貝原寬齋)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의학에도 밝았던 아버지로부터 의학을 배우고 둘째 형부터 글을 배웠다. 18세 때부터 후쿠오카번에 출사했으나, 어느 날 번주(藩主)인 쿠로다 타다유키(黑田忠之)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고, 7년 동안 낭인 생활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에 나가사키(長崎)·에도(江戶) 등지에 가서 의학과 주자학을 공부했다. 1656년에 새로운 번주 미츠유키(黑田光之)에게 사면을 받고, 다시 출사하게 됐다. 그는 의사·주자학자로 교토(京都)에서 35세 때까지 7년 동안 유학하면서,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한 후에 후쿠오카로 돌아와 주자학 강의, 조선통신사의 응접, 이웃 번과의 분쟁 해결, 쿠로다 가문의 계보인 ‘쿠로다 가보(黑田家譜)’ 편찬 등 교육, 외교, 역사편찬 등 다방면으로 확약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오카에서 오랫동안 문교전책에 관여한 관계도 있어서, 그의 장서에는 퇴계·율곡 등 조선유학의 책도 많이 들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700년, 70세가 된 에키켄은 공직을 물러가고, 에도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박물학서인 ‘대화본초(大和本草)’, 교육론인 ‘화속동자훈(和俗童子訓)’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1713년에 아내 도켄(東軒)이 돌아가자 대표작인 ‘양훈생(養生訓)’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1714년 8월 27일에 8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보시다시피 에키켄은 전문 의사가 아니라,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사실만을 인정하는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대도와 백성들의 삶에 이바지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저작의 대부분을 한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알기 쉬운 카나(かな)문자로 쓴 만큼,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대도를 견지한 실학자였다.



●왜, 지금 양생인가?

일흔 살을 가리켜 고희(古稀)라고 한다.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항상 있지마는 사람이 70 살기가 옛날부터 드물구나.”(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한 구절에 유래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술빚 걱정은 몰라도 일흔 넘게 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됐다. 하지만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느냐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의료복지 제도의 확충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생(養生)’이라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양생’은 ‘장자(莊子)’에도 양생주(養生主)편이 있는 만큼, 도가와 인연이 깊은 개념이었다. 그 양생주편에는 포정(庖丁; 요리사)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아주었는데, 포정이 칼질하는 솜씨에 감탄한 문혜군이 그 비결을 묻는 대목이 있다.

그 포정과 문혜군의 대화 속에 양생사상의 기본이념이 들어 있다. 즉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는 점,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도를 닦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면 생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생사상의 이론과 실천방법은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때에 걸쳐 크게 발달하고 체계화됐다. 그것은 동양의학과 도가적 수양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일찍이 몸이 허약했던 퇴계 이황(退溪李滉)이 ‘활인신방(活人神方)’의 수련법을 써서 건강을 유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생의 사상과 실천은 한중일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양생사상은 동양의학과 도가사상 속에 매몰되고, 의료 전문가나 상당한 지식인 혹은 도인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17~18세기 초 일본의 유학자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그 외에 ‘난경(難經)’(周나라의 의사 편작扁鵲의 저술로 전해짐), ‘금궤요략(金櫃要略)’(후한 장중경張仲景 저), ‘갑을경(甲乙經)’(晉나라 황보밀皇甫謐 저), ‘천금방(千金方)’(唐나라 손사막孫思邈 저) 등 수많은 의학서·의술을 섭렵하고 스스로 시험·증험해보면서 유학과 어울려서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것이다.

양생·장생은 전문 의사 이외에 도가에 의해 많이 연구돼 왔다. 그래서 전문적인 의사도 아닌 유학자인 에키켄이 양생을 문제로 삼은 배경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사회적 요인으로는 그가 살았을 때가 바로 에도시대의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아주 번성한 시기였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자꾸 폭음폭식하고 미인을 쫓아다니면서 재미있게 살다가, 만년에 건강을 해치고 고생하거나 병들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꽤 비슷하다.

그래서 에키켄은 스스로 쌓아놓은 연구와 실천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양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만사에 한때 마음에 즐거운 것은 반드시 뒤에 탈이 된다. 술과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면 즐겁겠지만, 언젠가 병이 나는 것과 같은 부류이다. 앞에 참으면 반드시 뒤의 즐겁게 된다. 뜸뜨고 뜨거움을 참으면 나중에 병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왜 양생하는가?

에키켄은 ‘양생훈(養生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몸은 부모가 근본이 되고, 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지부모의 은혜를 입고 태어나 또 길러주신 내 몸이니, 자기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천지가 하사(下賜)하시고 부모가 남겨주신 몸이라면, 삼가고 잘 키워서 해치고 상하지 않도록 해, 천수를 오래 보전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바로 천지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근본이다. 몸을 잃어서는 섬길 수 없다. 자기 몸 가운데 조그마한 피부, 머리털조차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 함부로 해치는 것은 불효인데, 하물며 큰 신명(身命)을 자기의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 삼가지 않고 음식·색욕을 제멋대로 하며 원기(元氣)를 해치고 병을 얻어서, 타고난 수명을 짧게 하고 일찍 신명을 잃게 되는 것은, 천주부모에 대한 엄청난 불효이며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앞에서 보았듯이 자기 생명을 오래 보전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양생’은 유가보다 오히려 도가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런데 에키켄은 양생이 천지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근본’이라고 규정하고,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그가 효도의 근본으로서의 양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있었던 것 같다. 에키켄은 39세 나이로 상당히 늦게 결혼했다. 아내는 나이 17세인 아키즈키번(秋月藩)의 무사 에자키 히로미치(江崎廣道)의 딸 하츠였다. 하츠는 토켄(東軒)이라는 호도 가지는 정도로 서예에 능한 여성문인이었고, 남편의 학문·저술을 많이 도왔다. 에키켄은 딸과 같이 나이 차이가 있는 아내와 함께 자주 여행에 다녔고, 집에서는 함께 악기를 타고 시를 읊으며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둘 다 원래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의학과 건강법을 많이 연구하고 시험해 보기도 했다. 에키켄이 84세 때 토켄이 자기보다 먼저 죽자, 학문적인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아내를 잃은 그는, 오랫동안 둘이서 연구하고 시험해 온 성과를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세상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양생론’이라는 책이다. 이것은 에키켄 양생론의 집대성이자, 에키켄과 토켄 부부가 상부상조한 성과인 것이다.



●양생의 방법

(1) 하늘이 나에게 준 원기를 잘 보전하라

‘양생훈’에서 에키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생의 방법[術]은 우선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을 해치는 것이란, 내욕(內慾)과 외사(外邪)이다.” 내욕이란 음식, 호색, 수면, 말을 함부로 하는 욕심과, 기뻐함·화냄·근심·생각·슬픔·두려움·놀람의 일곱 감정(七情)을 말한다. 외사(外邪)는 하늘의 네 가지 기운(四氣)이니, 바람(風)·추위(寒)·더위(暑)·습기(濕)를 말한다.

“내욕을 참고 줄여서 외사를 경계하고 막음으로써 원기를 해치지 않으면 병이 나지 않고, 천수를 오래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듯이, 욕심과 감정을 절제하고, 순하지 않는 기운을 피하는 것으로, 원기 즉 사람이 타고난 생명의 기운을 지키는 것이 양생의 요체인 것이다. “뭇사람이 타고난 수명은 대부분 길다. 수명이 짧게 타고난 사람은 드물다” “사람의 목숨은 자기에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다고 노자(老子)는 말했다. 사람의 목숨은 본디 하늘에서 받은 것이지만, 양생을 잘하면 길어지고 양생하지 않으면 짧아진다. 그렇다면 수명을 길게 하는 것도 짧게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몸이 씩씩하고 장수로 타고난 사람도, 양생의 술(術)이 없으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허약해서 수명이 짧다고 보인 사람도 잘 보호하고 기르면 목숨이 길어진다.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는 짓이니 하늘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2) 약·침·뜸은 어쩔 수 없이 쓰는 하책이다

하지만 에키켄은 “무릇 약(藥)·침(鍼)·뜸(灸)은 어쩔 수 없이 쓰는 하책(下策)이다.” “사람의 몸을 보전하려면 양생의 도를 믿어야 하고, 침·뜸과 약의 힘을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절대로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도 잘못 쓰거나 체질에 안 맞으면 도리어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차라리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양생의 도에 맞는다는 것이다. 그가 권장하는 방법은 적당한 운동이다. “신체는 날마다 조금씩 힘써 움직여야 한다. 오래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매일 식사 후 반드시 마당을 수백 걸음 조용히 걸어라. 비가 내리면 실내를 빈번하게 천천히 걸어라. 이와 같이 아침저녁에 운동하면 침·뜸을 쓰지 않아도 음식·기혈(氣血)이 막기지 않고 병도 없다. 침·뜸이 없으면 심한 열병이 나서 몸이 아픈 것을 참아야 될 지경이 이르기보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병들지 않고 안락할 것이다.”

(3) ‘내적’과 ‘외적’에는 방비책을 달리하라

에키켄은 “대개 사람의 몸은 약하고 여려서 덧없는 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이 꺼지기 쉬운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공격하는 적은 크게 두 가자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과식·호색·졸림 등의 욕구, 혹은 화냄, 슬픔, 근심 등의 감정으로 모두 안에서 공격해오는 ‘내적(內敵)’이다. 하나는 바람, 추위, 더워 등 바깥에서 몸을 상하는 외적(外敵)이다. 에키켄은 ‘내적’에 대해서는 마치 적과 접전하듯 단단히 이겨내야 하지만, ‘외적’에 대해서는 방위(防衛)하는 것과 같이 대책을 단단히 세워서 적이 다가오지 않도록 막되, 적과 오래 붙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내적에 대해서는 다기지고 씩씩하게 이겨내라. 외적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빨리 퇴각가라. 다기진 것은 안 좋다.”

에키켄은 ‘내적’과 ‘외적’의 구별을 세워서 서로 대해 다른 대응책을 써야 된다고 지적함으로써, 주로 유가적인 도덕수양의 개념으로 생각되던 지나친 욕심·감정을 극복하는 것과, 의학적인 관점에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강조된 바람·추위·더위 등을 막고 피하는 것을 ‘양생’의 개념으로 결부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사무라이사회의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쉬웠을 것이다.

(4) 줄(縮小)인 즐거움을 즐거워하라

에키켄은 “성인(聖人)께서 자주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 즐거움은 사람이 타고난 천지의 생리(生理)이다. 즐거워하지 않고 천지의 도리에 어겨서는 안 된다. 항상 도로써 욕심을 억제하고, 즐거움을 잃지 말라. 즐거움을 잃지 않음은 양생의 근본이다.” 라고 강조했다. ‘즐거움’과 욕심을 억제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뜻은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안 좋다는 것이고 억제하다고 해도 완전한 금욕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양생의 요결(要訣)이 하나 있다. 요결이란 간요한 구전이다. 양생에 뜻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알아서 지켜야 된다. 그 요결은 ‘소(少)’의 한 글자이다. ‘소’란 만사에 모두 적게 하고 많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통틀어서 단적으로 말하면 욕(慾)을 줄이는 것이다. 욕이란 이목구체(耳目口體)을 만족시키는 탐욕하는 것을 말한다. 주식(酒食)을 좋아하고 호색을 좋아하는 등의 부류이다. 대개 많은 탐욕이 쌓이게 되면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 탐욕을 줄이면 몸을 키우고 목숨을 길게 할 수 있다. (……) 한때에 기를 너무 많이 쓰고 마음을 너무 많이 쓰면 원기가 줄고 병이 나서 목숨이 짧아진다. 사물마다 (신경을) 많이 쓰고 널리 쓰지 말아야 한다. 덜 쓰고 좁게 쓰는 것이 좋다.” “양생의 술은 먼저 심법(心法)을 잘 삼가 지키지 않으면 행하기 어렵다. 마음을 고요하고 요란스럽지 않게 하고 분노를 참고 욕심을 줄이며 늘 즐거워해서 근심하지 말아야 된다. 이것이 양생의 술이자 마음을 지키는 도이다. 심법을 지키지 않으면 양생의 술이 행해지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키우고 몸을 키우는 공부는 둘이 아니다. 한 술이다.” 요컨대 평정한 마음을 지키고 욕심을 줄여서 항상 즐길 줄 아는 마음공부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생의 술인 것이다.



●최한기와 에키켄—즐거운 늙음

그런데 필자에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나라도 시대도 다르고 어떤 영향관계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키켄이 최한기(崔漢綺)는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에키켄은 (당시 동아시아의 학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주자학자였지만, 만년에 쓴 ‘대의록(大疑錄)’이라는 논저에서 정주(程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을 밝혔다. 이기이원론과 결별한 그는 도덕의 근거를 더 이상 초월적인 리(理)에게 구할 수 없었다. 대신 천지의 기운이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은(恩)’에 보답한다는 ‘효(孝)’를 논리를 윤리적 기반으로 삼았다.

앞에서 보다시피 에키켄은 양생을 천지부모에 대한 효도의 근본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최한기도 마찬가지였다. “무릇 효는 어버이를 섬김을 근본으로 삼고, 오륜(五倫)에 미치고 만사에 달하며, 과불급(過不及)의 한계와 절제는 천인운화(天人運化)에게 기준이 있다. 이것을 받들어 따라서(承順) 효도(孝道)를 베풀면, 가히 천하에 통할 수 있고 유명(幽明)의 틈이 거의 없어진다.” “운화(運化)를 받들어 따름은 (……) 효를 백가지 덕행(百行)의 으뜸으로 삼는다.” (‘기학氣學’) “효의 작고 일반적인 것은 어버이를 봉양함이요, 크고 귀한 것은 신기(神氣)를 섬김이다.”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 그리고 그 천지부모에서 받은 몸과 마음을 중요시한 점, 기존의 권위 있는 텍스트를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실증을 중요시한 점에서도 둘은 서로 상통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젊어서부터 나이가 들면서 경험과 견식이 깊어진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에키켄은 “인생 50세에 이르지 않으면,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고 지혜도 열리지 않으며, 옛것과 지금 것을 잘 모르고 세상의 변화에 익숙하지 않고 행하는 데에도 뉘우치는 것이 많다. 인생의 도리도 즐거움도 아직 모른다. 50이 되지 않고 죽는 것을 요(夭; 젊어서 죽음)이라 한다. 역시 불행단명(不幸短命)이라고 해야 한다. 오래 살면 즐거움도 많고 얻는 것도 많다. 날마다 몰랐던 일을 알게 되고, 달마다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문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는 것과 지식에 밝게 통달하는 것도, 오래 살지 않으면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양생의 술을 행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수명을 유지하고, 50세를 넘어서 되도록 더욱 오래 살아서, 60세 이상의 수역(壽域)에 이르러야 될 것이다. (……) 하지만 기질이 거칠고 욕심을 제멋대로 하고 참치 않고 삼가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최한기도 역시 50~60세 이후에는 견문도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과 실무 경험도 쌓여서 승순(承順)의 도가 점차 넓고 원대해지고, 70세 이후에는 몸이 운화에 승순하면 바야흐로 강장지도(康莊之道)를 열게 된다고 말했다.

한일의 옛날 석학이 둘 다 나이가 많을수록 공부와 경험이 축적돼서 도가 밝아지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무언가 고령화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 희망의 빛으로 비추어주는 것 같다.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 동양포럼 < 동양일보 2018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고령화 시대에 되살아나는 기와 양생의 철학 한·일 비교-한국의 혜강 최한기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05.13 

동양포럼(68)-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최한기 초상
야규 마코토(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최한기는 누구인가?

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19세기 한국의 특이한 유학자·실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개성(開城)에서 태어났으나, 10대 중반 무렵부터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23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후 출사의 뜻을 버리고, 저술과 독서에 전념하면서 재야 지식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만년에 맏아들 최병대(崔柄大)가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기 때문에, 최한기가 이른 살이 됐을 때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및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받았다. 또,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을 받았다. 1877년에 향년 75세 나이로 서거했으나, 사후 15년이 지난 1892 년에 조정에서 학업이 평가받아 도헌 겸 좨주(都憲 兼 祭酒)로 추증됐다.

최한기는 평생 동안 천문·지리·수학·의학·농학·수리·정치·사회·경제·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기철학(氣哲學)으로 아우르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오늘날 그는 19세기 조선에서 ‘기학(氣學)’을 제창한 독창적인 사상가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가 사상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독립 이후의 일이었다.

생전에 그의 사상은 동시대 사람들한테 이해되지 않았다.

양명학자이자 저명한 문장가로 당쟁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그 폐해를 비판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술도 있는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조차 최한기의 약전(略傳)인 ‘혜강최공전(惠岡崔公傳)’를 쓰면서 “공(公; 최한기)의 책을 보니 오로지 기(氣)를 미루어 이(理)를 헤아리는 것만 말하고 있어서, 대개 선유(先儒)가 밝히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 최한기의 학문이 기존의 어느 학문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최한기는 사상가라기보다 애서가 혹은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최한기와 친했던 실학자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9 ‘중원신출기서변증설(中原新出奇書辨證說)’에서, 당시 중국에서 새롭게 간행되고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책들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완씨전서(阮氏全書)’, ‘수산각총서(壽山閣叢書)’ 등이 영의정 조인영(趙寅永)과 최한기 집에 있고, ‘영환지략(瀛圜志畧)’ 등의 책은 최한기 집에만 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최한기가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도정치를 주도한 권신이자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조인영의 그것을 능가하는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최한기가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지도 제작·간행을 도와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한기는 스스로 귀한 책을 모을 뿐만 아니라 남의 출판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건창에 의하면, 최한기 집안은 원래 부유해서 그가 좋은 책이 있다고 들으면 값이 비싸더라도 아낌없이 사들이고, 오래 읽은 책은 헐값으로 팔았다. 그 때문에 온 나라의 책상인이 앞을 다투어 책을 팔기 위해 찾아오고, 북경]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조선에 들어온 책으로 혜강이 읽지 않는 것이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돈이 너무 많지 들지 않소?”라고 어떤 사람이 쓴 소리를 하자, 최한기는 “만약 이 책 속의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천리(千里)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는 반드시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런 고생도 안하고 앉은 채 그것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책을 사는 돈이 든다고 해도 식량을 마련해서 먼 길을 떠나는 만큼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그 때문에 집안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마침내 저택을 남에게 넘겨주고 도성 밖으로 이사하게 됐다. 1866년 최한기 64세 때에 지은 ‘신기천험(身機踐驗)’ 이후, 그는 ‘명남루(明南樓)’의 호를 계속 쓰고 있다. 이 ‘명남루’가 바로 최한기가 가장 만년의 살던 집의 호로, ‘남쪽을 밝히다[明南]’에서 보아 도성 외각 남쪽의 어딘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건창에 의하면, “향리로 돌아가서 농사라도 지으면 어떤가?”라고 어떤 사람이 최한기에게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내 견문을 넓히고 내 앎과 생각을 활짝 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보다 편한 곳이 없다. 그런데 어찌 굶기가 두려워서 시골에 가서 살아야 되겠는가?”

만약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통신판매가 있었더라면 최한기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사람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어느 시골로 이사했을지도 모른다. 해튼 이와 같이 그를 둘러싸는 환경은 변화했지만, 서적에 대한 욕구와 왕성한 지식욕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몰랐다.



●신미양요 때 자문을 받다

‘혜강최공전’에 의하면, 영의정 조인영,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등이 최한기에게 출사를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동시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는 재야학자로서 조정의 고관대작들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아들 최병대의 잡기(雜記)를 모은 ‘최병대난필수록’ 중에 ‘오월십망일 강화진무사 정기원 여가대인서(五月十望日 江華鎭撫使 鄭岐源與大人家書)’가 실려 있다. 이것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존 로저스(John Rodgers)가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와 대치(對峙)하던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최한기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정기원은 조속히 적을 격퇴시키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름의 습한 날씨 속에서 노영(露營)이 장기화되면서 질병에 걸리는 사졸(士卒)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고초를 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최한기의 고명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이미 대원군께 아뢰어 허락도 받았으니, 부디 강화도의 군영까지 발걸음해 주어서, 평소 간직하고 있는 경륜지책(經綸之策)을 피력해주면 고맙다는 내용이다.

사실 그 당시 최한기의 나이 69세였고 아무리 나라의 위기라 하더라도, 또 흥선대원군의 허락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군영까지 나와서 참모 노릇을 해 달라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최한기의 답장인 ‘가대인답정기원서(家大人答鄭岐源書)’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10여 년 동안 바깥에도 안 나가고 집안의 잡다한 일들은 자손들에게 듣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나이도 벌써 69세가 됐다. 그러니까 결코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의리가 싫어서 평소와 같이 집에 앉아 있으려는 것은 아니다. 여쭙고 싶은 기밀이나 의문이 있으면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할 것이고, 쓸 만한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성력(誠力)을 다해 상세히 알릴 것이다. 이 뜻을 대원군[雲峴宮]께 잘 전해드리기 바란다. 내가 서울에 있어야 정신 차리고 꾀와 생각을 얻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진영 사이를 분주해 봤자 기력과 정신을 쇠진하고 꾀도 안 나오고 공사(公私) 모두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최한기는 집에 있으면서 수시로 정기원의 자문에 응하게 됐다.

‘혜강최공전’은 두 사람 사이에서 논의된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정기원이 최한기에게 급히 사자를 보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을 논의했다.

“어느 날 오랑캐들이 갑자기 모래를 배에 싣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무슨 작정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최한기가 말했다.

“틀림없어, 그들은 식수가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옹기에 모래를 담고 바닷물을 붓고 짠물을 걸러서 맑은 물을 얻으려 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갔으니 맑은 물을 구할 방도가 없어서 장차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과연 며칠 후 오랑캐는 도망쳐 버렸다.

요컨대 최한기는 미군이 모래를 배에 싣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들이 물 부족에 빠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 때문에 장차 퇴각할 것이라고까지 예측한 것이다.

사실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출항하고 강화도에 이른 미국해군 아시아함대는 일본에서의 선례에 따라 조선의 개국도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장기전의 준비가 부족했던 데다가 조선군의 결사적인 공격 때문에 육지에서 충분한 땔감과 물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미군은 강화해협에서 고립하다가 조선에 대해 아무런 외교적 성과도 얻지 못한 물러가게 된 것이다.

혹은 그들을 바다 위에서 고립시키고 스스로 퇴각하게 하는 것까지 최한기가 세운 전략일 수도 있다.

원래 실학자로서의 최한기는 열렬한 개국통상논자(開國通商論者)였고,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에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서양 천주교의 형이상학 및 신앙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거듭 반대했지만, 서양학의 유용성은 인정하고 좋은 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나 병인양요, 그리고 이번의 신미양요 때에도 서양 열강들은 하나같이 군함과 우세한 무기를 과시하면서 무례하게 다가오고, 개국과 신교 자유를 요구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협하고, 적지 않는 군민(軍民)을 살상했다. 그 때문에 배외(排外) 감정이 조야에 확산됐다.

세계의 바다를 두루 노니는 상려(商旅)가 최근에 밝혀진 바의 끝머리[支流餘緖]를 빌려와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화포(火砲)를 바다 위에서 마구 쏘기도 하고, 교술(敎術)을 어리석은 백성을 전하기도 한다. 이래서는 교통이 비로소 열렸어도 머지않아 그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민심의 동요가 원근(遠近)에 퍼지고 있는 것이 다섯 번째 불행이다.(「明南樓隨錄」)

최한기가 보기에 서양의 군함이나 화포 같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도 광대한 우주만물의 ‘천지운화(天地運化)’에서 보면, 그 끝머리를 군사에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가지고 백성을 위협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서양 각국과의 접속과 교섭이 평화롭고 대등하고 호혜적인 방식이 아니라, 열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언제나 문달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맏아들 최병대는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의 시종지신(侍從之臣)이 됐다. 최한기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수시로 조언하고 선도(善導)하는 강관(講官)·언관(言官)은 가장 중요시되는 직책이었다. 아들이 바로 그러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병대가 시종이 됐기 때문에, 시종의 아버지에 대한 관례에 따라 최한기가 70세가 된 187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가 내려졌다. 최병대가 아버지의 묘소를 위해 지은 「여현산소묘지명(礪峴山所墓誌銘)」에 따르면 이때 실직(實職)도 함께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최한기 본인은 “조정의 은전(恩典)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관례로는 시종 아버지에 대한 추은(推恩)이 으뜸가는 것이다. 이미 최고의 명예를 받았는데, 어찌 벼슬의 유무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그런 것은 굳이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래도 결국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이듬해 봄에 다시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또한 숙사(肅謝)하지 않았다(又不肅謝)”고 한다. ‘묘지명’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언제나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숙사란 새로운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출근할 때, 먼저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숙배(肅拜)하고 사은(謝恩)의 뜻을 표하는 인사이다. 하지만 최한기는 결국 그것을 안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4년 최한기 72세 때에는 다시 수직(壽職)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이 주어졌다. 수직은 관원이 80세, 평민은 90세가 되면 주어지는 원칙이었으나, 72세의 최한기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을 보면 조정의 최한기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때 그가 정기원의 자문에 응한 일에 대한 포상의 뜻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최한기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든 포상을 주든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큰 운화(運化)에 승순(承順)하라’

말년의 최한기는 인생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가 1868년 무렵에 쓴 ‘승순사무(承順事務)’라는 초고가 남아 있다.

그는 이 우주 전체가 필경 한 덩어리의 신기(神氣)이며, 그것은 항상 쉬지 않고 운동하고 변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운화(運化)’라고 말한다. ‘승순(承順)’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윗사람의 명을 잘 좇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최한기는 거기에 기의 운화(運化)─우주자연과 인간사의 조리· 법칙을 잘 헤아리고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인생에 10세마다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10세 이전에는 한 몸에 지닌 맑은 기운을 승순한다. 하지만 이때는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변화를 잘 모르고 있다. 20세 이전에는 되면 바야흐로 혈기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30세쯤 되면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고 천지만물의 현상과 부회시켜 귀신(鬼神)·방술(方術)·화복(禍福)·길흉(吉凶) 등에 물들게 된다. 40세쯤 되면 인생 경험의 절반을 넘게 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평상시의 승순하기에 따라서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50세 이후에는 견문도 쌓이고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과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일의 경험도 많아진다. 사람이 나를 따르면 기뻐하고, 남이 다른 사람을 잘 따라도 기뻐하고, 나아가서는 사람이 마땅히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일에 안 따라도 기뻐한다.

60세 이후, 승순의 도가 점차 넓고 원대해지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정치와 가르침[政敎]은 모두 절의(節義)에 따라 베풀고, 나라의 전쟁을 화해시킨다면 천지와 사람과 사물의 운화와 경험이 어긋나지 않게 되고, 운화의 가르침이 넓어지고 해를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70세 이후는 몸이 운화에 승순하면 바야흐로 후세에 강장지도(康莊之道)─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

대체적으로 최한기의 ‘승순’사상에서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만큼 그것이 많아지는 고령 세대의 역할과 행실이 중요하게 된다. 유년기에는 아직 세상만사 만물의 이치를 모르고, 소년기에는 혈기가 넘치고, 중년기에는 자칫하면 미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

하지만 50세 이후에는 옛것을 계승하고 장래세대를 깨우쳐 주는 학문과 사회적 경험도 나름대로 쌓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승순의 도를 넓힌 고령자는 스스로 절의를 지키고 전쟁을 화해시켜 평화를 실현시키고, 나아가서는 후세에 편안하고 왕성한 도를 열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기준과 양생

최한기는 고희(古稀)를 넘어서 75세까지 살게 됐는데, 특별히 ‘양생’에 대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몸 관리를 잘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 있다.

‘인정(人政)’ 권25 용인문(用人門) 6 ‘유준무준(有準無準)’이 바로 그것이다.

“기준(準)도 없이 사람을 쓰는 자는 혹 쓰지 말아야 될 사람을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고, 혹 쓸 만한 사람을 쓰지 말아야 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며, 오직 마음과 뜻[心志]이 내키는 대로 일정한 근거가 없으니, 누가 그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 특히 사람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일에 기준이 없는 자는 호생(好生)을 알면서도 양생(養生)의 도(道)를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죽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음식이 정도를 지나치면 속히 질병이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 입에 넣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정(情)을 다해 욕(欲)을 제멋대로 부리다가 죽고, 손해를 보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나는 바를 삼가고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것, 이것은 이른바 안다는 것이 준적(準的)이 없는 앎이고, 이른바 모른다는 것이 준직이 없는 모름인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사람의 준적이 있고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준적에는 크고 작음, 허와 실이 있다. 크고 내실이 있는 것은 천인운화(天人運化)이고, 작고 허망한 것은 헛된 마음의 추측(推測)이다.”

그는 사람을 쓰는 일은 물론, 모든 일에 타당한 기준(준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생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좋아할 줄 알면서도, 생명을 키우는 도를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몸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달고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정욕을 제멋대로 하다가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정욕을 가슴속에 담아둘 줄 모르는 사람―예컨대 요즘 세계를 흔들리고 있는 #Me Too 운동에서 고발당한 아무개 같은 사람이라든가―은 모두 기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앎(知)와 행함(行)이 분리된 사람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최한기는 왕양명(王陽明)과 달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천인운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어떤 권위자가 정해 놓은 외부적·고정적인 기준도 아니고, 왕양명이 말한 양지(良知)나 심즉리(心卽理)처럼 내부적·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외부와 내부, 고정과 유동 사이에서 주관과 객관을 아우르는 기준이라고나 할까. 최한기는 바로 그러한 기준을 따라 평생을 살았음이 틀림없고, 양생에도 유의했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영광스럽구나!”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운양호사건 후 1876년 1월에 일본의 군함 5척이 다시 찾아와 조선에게 개국을 요구했다. 조선 측이 그것에 응하지 않자, 일본 군함은 서해 앞바다에 계속 정박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저 시간만이 지나가던 바로 그때, 최병대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은 인심이 동요하는 바로 지금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정사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도 즉시 현직 대신과 당상관을 소집해 대응책을 강구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최병대는 그때 이미 언관(言官)을 사직한 뒤였다. 전직 언관이 상소를 올리는 것은 조정의 법도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영의정 이하응(李昰應)에게 탄핵을 당하고 익산군(益山郡)으로 유배됐다.

그때 최한기는 아들을 배웅하면서 난색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네가 능히 말로써 죄를 얻을 수 있었으니 가히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화복 따위는 근심해야 할 일이 아니다.”(「惠岡崔公傳」)

최한기는 왜 조정의 법도를 어기고 상소를 올린 아들을 칭찬했을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최병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소한 법도에 구애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말로써 그것을 타파하려 했다. 최한기는 그것을 해낸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최한기 만년의 삶과 생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결과가 좋고 나쁨에 개의치 않고, 늘 바른 길을 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사회에 공헌하면서 살고,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게끔 깨우쳐주며, 장차 밝은 세상을 열게 이끌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고령세대의 몫이라고 그는 주장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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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미 pjm8929@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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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생각하는 노년, 수양하는 사회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09.11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조성환 원불교사상 책임연구원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말이 없는 스승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말이 없고자 한다(予欲無言).” 이에 놀란 수제자 자공이 반문한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후대에) 무엇을 전술합니까[述]?” 그러자 공자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성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논어>‘양화’)

이 대화는 내용상 공자의 노년의 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이란 젊었을 때는 혈기왕성하여 자기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도 나이를 먹고 인생을 알아갈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사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나를 키워주신 노년의 고모님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공자는 하늘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위의 대화는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년상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이 만물을 운행하고 생성하는 작용은 동아시아의 사상언어로 말하면 ‘덕’에 해당한다. ‘덕’이란 기본적으로 ‘힘’ 또는 ‘작용’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에서도 “자연의 가장 큰 덕은 생성하는 작용이다”(天地之大德曰生)고 하였다. 그런데 공자가 보기에 자연은 인간처럼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유덕무언(有德無言)의 존재이다. 공자는 이런 하늘의 덕, 자연의 덕을 닮고 싶다고 어느 날 제자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자가 선생이라는 점이다. 후학을 가르치고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이 어떻게 말이 없을 수 있는가! 노자식으로 말하면 “말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인 셈인데, 이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자공의 반응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영성과 성학(聖學)

대개 ‘말’(言)이란 남에게 자기를 표현하거나 지식을 전달할 때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말을 하는 유언(有言)은 이성과 감성의 차원을 말한다. 흔히 철학이란 이성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고(서양철학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문학이란 감성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공자와 같이 정치나 교육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철학과 문학에 탁월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논리적이고 감동적이어야 듣는 이들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무언’(無言)은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생성작용으로서의 ‘덕’이 말이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이성이나 감성과는 다른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학문적으로 어떤 세계에 해당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영성은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힘을 말한다. 가령 만물을 생성하는 하늘의 덕은 가장 큰 영성의 힘을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고전어로 바꿔 말하면 덕 또는 덕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르는 학문은 성학(聖學)에 해당한다.

물론 고전어의 덕(성)이 단지 영성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덕목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성학 또한 철학과 문학까지를 포함하는 폭넓은 학문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성학은 “이성과 감성과 영성을 포괄하는 덕성을 기르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만 문학(文學)이나 리학(理學)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성학(聖學)이라고 할 때의 ‘성(聖)’에는 영성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면 ‘성학’은 ‘영성학’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영성의 가장 큰 차원이 하늘의 생성의 덕이라고 한다면, 성학=영성학은 하늘의 영성을 닮고자 하는 ‘하늘학’ 또는 ‘천학(天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사람들은 대개 젊어서는 이성과 감성이 발달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영성이 발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영성의 힘은 마치 하늘처럼 말이 없어도 조직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길러준다.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 하늘을 닮아가는 사람,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생각한 바람직한 노년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자가 제자들에게 전술하고[述] 싶었던 것은 이성이나 감성이 아닌 영성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노년의 공자의 학문세계는 이성교육이나 이성철학 또는 이성정치에서 영성교육과 영성철학, 영성정치로 중심이 이동한 것이 아닐까?



없는 듯 있는 존재

공자의 “말이 없는 하늘”에서 ‘없음’(無)이 단지 언어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면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 될 것이다. 유영모가 보기에 하늘은 “없는 듯 있는” 존재이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애태타가 아무런 존재감이 없지만, 그를 한번 보는 사람은 평생 그를 잊지 못하듯이, 하늘 또한 가시적인 존재감은 없어 보이지만 만물은 그 하늘 아래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일종의 ‘없음’(無)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없는 듯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나 다석이 하늘을 닮고자 했다면 이런 ‘없음’의 존재방식을 닮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없음’의 존재방식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없음’(無)의 존재방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인들은 그것을 ‘비움’(虛)이라고 보았다. 즉 자기를 비우고 비워서 자기가 없는 영역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애태타가 사람들에게 주는 편암함은 여기에 있다. 자기를 비우니까 그 자리에 상대가 들어오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나는 나를 상실했다”(吾喪我)거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없다”(至人無己)고 하였다. 공자식으로 말하면 ‘자기’의 자리에 텅 빈 ‘하늘’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는 “나는 하늘처럼 텅 비어 있고자 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생각

하늘이 만물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텅 빈 그릇이나 거울과 같다. 그릇은 자기를 비워서 상대를 포용하고, 거울은 텅 빈 상태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비추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릇에 자기가 들어 있다면 배제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거울에 자기가 묻어 있다면 자기 의도대로 상대가 비춰질 것이다.

그래서 영성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는 수양이 요구된다. 자기 고집과 자기 주장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자기 부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수양이 쌓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이성의 힘은 약해질지 몰라도 영성의 힘은 강해진다. 즉 덕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덕은 쌓는다/길러준다”(德畜之)고 하였다.

이 축적된 덕의 힘은 지금 세대뿐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까지 미친다. 공자가 “과거 세대를 잇고 미래 세대를 열었다”(繼往開來)고 평가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영성은 “미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이 미래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지옥이 된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한국의 기성세대의 영성의 약화를 꼬집는 젊은이들의 비판이다.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를 세종은 “시후지도”(示後之道)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시후지도”는 “후세에게 보여주는 도”라는 뜻으로, 세종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정치를 했는지를 말해준다. 즉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단지 지금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는 일종의 영성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종의 성학(聖學)이자 영성의 정치였다.

영성없는 근대

한국말의 ‘생각’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에 대한 배려나 관심을 의미한다. 가령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라고 할 때에는 전자에 가깝고, “너 평소에 그 사람 생각하니?”라고 할 때에는 후자를 말한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아우르면 “생각은 배려가 동반된 사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가령 “생각 좀 하고 살아라!”고 할 때의 ‘생각’은 “자기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고려가 동반된 사유”를 말하듯이 -.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을 때의 ‘생각’은 상식적으로는 철학적인 사유를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전자를 이성적 차원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영성적 차원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생각하는 정치”는 이 두 차원이 결합된 정치이다.

흔히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한국의 근대화는 영성보다는 이성이 강조되는 시기였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배를 채워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구적 이성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장년층들은 이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이다. 즉 한 방향의 ‘생각’만 사용한 셈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영성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원불교처럼 “이성이 발휘되었으니 영성을 추구하자”는 운동이 사회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원불교의 슬로건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이다)

문제는 그 영향이 다음 세대에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시후지도”라고는 이성적 생각이 고작이다. 그래서 그 차원에서만 사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헬조선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 우리는 이 곤경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 이 생각의 불균형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노년세대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상적으로는 사회가 영성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생각의 균형이 잡히는 것을 말한다. 젊은이들의 이성 중심의 생각을 노인들의 영성 중심의 생각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인들만이 만들 수 있는 공공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이 ‘공공’(함께 한다)의 범위에는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가 모두 들어 있다. 영성의 힘을 가진 자라야 이 보이지 않는 세대까지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하는 도덕

영성으로 충만한 이들은 설교하기보다는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설교하기 좋아하는 어른들을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비판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신호를 보내 왔다. 다만 어른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교실이데아’라는 노래는 “됐어, 이젠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학생들의 ‘생각’은 들으려 하지 않고 선생들의 ‘가르침’만 주입하려는 답답한 교실의 풍경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뒤, 방탄소년단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 전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왜 해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쩔어’) 이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교실이기 때문이다. 오구라 기조 교수식으로 말하면,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도덕지향적” 교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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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138)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수의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 을 읽고서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2.07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오구라 기조 교수의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



오구라 선생의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을 받은 것은 12월 10일의 한 모임에서 김태창 박사를 통해서였다. 그분의 신간이 반갑고 고마웠다. 집에 들어와 이내 그 책을 폈다. 그리고 하루에 다 읽었다. 읽히는 글이었다. 읽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의 나쁜 버릇인 노루글(노루가 껑충껑충 뛰듯 책을 읽는) 이른바 적독(摘讀)을 하지 않고, 드물게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모두를 읽었다. 기쁘고 즐겁고 가슴이 후련하게 트임을 느끼면서.

오구라 선생과의 만남은 나에게 또 하나의 배움의 계기가 되었고 큰 가르침이었다. 글(文章)로써는 2016년 5월 9일자 동양일보의 동양포럼(5)에서부터, 대면(對面)한 것은 2016년 10월 1~3일의 동양포럼의 국제학술회의Ⅱ로 시작해 4번, 일본에 가서 1번이며, 그분의 저작(著作)에서는 <韓國은 하나의 哲學이다>(1998, 개정판 2011. 조성환 번역서 2017), <새로운 論語>(2013), <朝鮮思想全史>(2017), <京都思想逍遙>(2019),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2020)을 내가 가지고 있는 도서(圖書)이다.

오구라 선생의 모든 저술과 발표 내용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많은 경우 ‘00은 이렇게 말했다’ 류(類)인데, 그분은 ‘00은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라, 참다운 ‘자기의 학문과 그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예지(叡智)와 온축(蘊蓄), 양심(良心)과 덕조(德操), 청빈(淸貧)과 열정(熱情)’의 학자 세분 중의 한분이라고 생각하여 달리 보고 있다.

오구라 선생은 위와 같은 풍도(風度)의 학자인 것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연 국제회의마다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여러 국적의 대학원박사과정 학생들을 국제 감각에 익숙하게 하려고 여비를 마련하여 데리고 왔고, 세션이 끝날 때나 휴식시간에 그들을 불러서 찰찰히 귀띔해주는 것을 보고 나는 참교육자의 모습이라고 감탄하면서, 그분의 지도를 받는 학생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하고 우리의 교육풍토를 반성하였었다.

여비를 보상하려고 항공료 영수서를 청하면 대학의 출장비로 왔다면서 발표 사례비조차 받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나오면 누구에게나 유창한 한국어로 대화하고, 결코 일본말을 일언반구도 쓰지 않는다는 배려로 한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이다.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



Ⅱ.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은 제1장서부터 제9장까지의 내용이 첫째는 그 언설이 독특하고 예리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상과 주장이 참신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인격과 지향이 청랑(淸朗)하고 고상(高尙)하기 때문에 매료(魅了)된 것이다.

그 제1장에서 2장까지를 방법론과 개념규정으로 보고, 제3장에서부터 7장까지를 생명론, 특히 제3의 생명론으로 보며, 제8장은 경제론이고, 제9장을 코로나 재화 이후의 전망으로 매듭짓는 것으로 나누어 적어본다.

방법론에서 문명/ 문화/ 사상을 비교 조명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문화민족주의를 배제하고, ①문명/ 문화/ 사상을 어떤 국가와 본질적으로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배제한다. ②문명/ 문화/ 사상을 국가나 민족 등으로 틀을 짜지 말고, 그 지역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성에서 이해하는 시좌를 구축한다. ③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저의 부분으로 항상 되돌리면서, 그 인간이 만드는 다양한 결말의 상호관계를 인식하여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비교문명적·비교문화적·비교사상적 사고는 텍스트의 내부만을 탐색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다. 역사학, 경제학, 법학, 사회학 등의 많은 지혜와 교감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들 사상과 철학을 만들어낸 하부구조에의 이해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는 큰 가르침이다.

그 다음에 ‘군도문명과 대륙문명’의 개념인데, 군도문명을 해양문명과 굳이 구별하는 것은 일본이 독특한 문명과 사상성을 이룬 것이, 자연과의 조화라는 지정학적인 요구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やまと(大和=일본의 다른 이름)의 화(和)로서, (중국)대륙의 합치지 않으면 안 되는 합(合)의 이념과 구별하려는 것이라, 합당한 비교라고 보았다. 일본을 ‘자연재난의 보고’라서 중국시스템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해석도, 특히 우리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얼마나 은유적인 것인가? 역시 동아시아를 통(通)하고 통하게 하는 혜안(慧眼)이고 시각(視覺)이라고 생각하였다.





제3장 군도문명과 ‘논어’의 애니미즘, 제4장 제3의 생명, 제5장 세 가지 생명으로 문명을 해독함, 제6장 세 가지 생명으로 일본사상사를 해독함, 제7장 일본문화와 미의식인데, 이것들을 통틀어 핵심은 ‘제3의 생명’이라는 오구라 철학론의 가장 독특한 개념이다. 내가 그 ‘제3의 생명’론을 들은 것은 3년 전이었는데, 그때 나는 그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었다.

이번의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에서 ‘애니미즘과 제3의 생명’을 4개장에 걸쳐서 곡진하게 논술하고 있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공자(孔子)의 인(仁)도 제3의 생명이 빚어낸 보람이며, 맹자(孟子)는 공자의 사상을 역전시켰다고 하는 것 등은 얼마나 참신한 탁견인가?

애니미즘·샤머니즘·일신교를 세 가지 생명론으로 풀이하고, ‘제1의 생명’은 인간과 보통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것, 곧 육체적 생명과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이다. ‘제2의 생명’은 인간이 유한한 육체적 생명에서 오는 허무감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절대적 생명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 절대적 생명에의 동경과 소망으로, 인간은 어느 민족이든 종교로서 정신적(spiritual) 생명, 영(靈)의 생명, 제1의 생명의 유한성에 대하는 영생(永生)의 생명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제2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새로운 논리인 ‘제3의 생명’이란, ‘개인적 육체적 생명’도 아니고, ‘영생하는 영적인 생명’도 아닌 것이 우리에게는 있는데, 인류의 사상사(思想史) 종교사(宗敎史)에서 거의 무시되어 왔고, 혹은 주제화 초점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건 ‘사이’, 어떤 경우에는 물건과 물선 ‘사이’에 우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생명’, 그것을 ‘제3의 생명’으로 한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가엽다’나 ‘화기애애하다’로 표현하여온 ‘상태’,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미(美, 아름다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문화의 미의식에서 ‘もののあはれ=가여움’, ‘わび=스며드는 정취(情趣)’, ‘さび=한적(閑寂) 또는 청한(淸閑)’ 등은 우리가 말하는 ‘느꺼움’의 차원이다.

그분이 자신 있게 구사하는 한국어의 ‘아름답다’를 어근·어간·어미의 어원적으로 분석하면서 일본의 미의식을 말하는데, ‘아름답다’에서 아람(實⟶球)·알다(知)·알(卵)-알차다(充實)-차다(滿) -참(眞)으로 연상하고, 그래서 우리의 ‘아름답다’는 생명, 완벽, 공(球), 진리, 지식 등의 관념이 있다고 설파한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되는 한국의 미의식에는 보편성에의 강력한 지향성이고, 그와 함께 현저한 도덕지향성이라는 추리에, 나의 의식세계를 그분이 이렇게 꿰뚫고 있다는 생각에서 흠신(欠身)했다.

또 ‘くはし’와 ‘곱다’가 ‘예쁘다’는 뜻으로 동근(同根)이라고 하면서, ‘곱다’를 섬세한 미를 나타내는 말이며, ‘くはし’의 어근을 kuph라 하고 ‘곱다’의 어근 kop와의 유사성을 들고 있는데, 그것의 개별성과 시간성의 미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에서 본 ‘아람’과 ‘알’의 형상인 둥근꼴의 공(球)은 일본어에서는 ‘たま(玉)’인데, 그것은 일본의 고대어에서는 사람과 사물의 안에 있으면서 그 본질적인 생명력에 내장하는 ‘정령(精靈)’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언령(言靈)/ 진혼(鎭魂)=영혼(靈魂)을 예거(例擧)한다.

그리고 ‘たま’는 ‘-しい(←ひ)’라는 접사를 붙이어 ‘たましい’가 되어서 ‘혼(魂, soul+spirit)’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아름답다’의 ‘알’이 음성(陰性)모음으로 전성하면 ‘얼’이 된다고, 그러면 일본어의 ‘たましい’와 한국어의 ‘얼’은 뜻에서 근접성을 가지게 된다고 해석한다.





제8장의 경제론을 열었을 때에서는 의아해했다. 이분이 경제까지 관심하고 계신가? 학고. 그러나 이내 수긍했다. 철학적으로 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일본경제의 침체를 보고, 소련의 붕괴를 보고 논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두 가지 축을 물(物)자본주의와 돈(貨幣)자본주의로 보면서, 물물교환의 가치시대에는 생명유지라는 애니미즘 곧 ‘제3의 생명’이 존중되었는데, 돈의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생명유지가 아니라, 잉여(剩餘)의 활동과 나아가서 선진국에서는 취미나 여가를 위하여 대량생산과 유통을 하게 되었다는 것, 여기에서 일본 경제의 침체는 당연한 것이라는 본다.

공산주의는 왜 실패하였는가를 다루어서, 유물론(唯物論)이 생명도 물건도 물질이고, 모든 것은 물질적 기반으로 환원되고 설명하는데, 그것이 ‘제2의 생명’이다. 권력은 그 물질적 기반으로부터 생기고, 그 정신이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제2의 생명’으로서, 권력에 무한정의 힘을 부여하게 된다. 그 가장 성공한 나라가 북조선인데, 김일성이 국민에게 준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 ‘제2의 생명’이 비대하여진 까닭으로 국민의 ‘제1의 생명’은 피폐하고 마모하여서 국민의 생명유지라는 점에서 실패하여 붕괴직전이지마는, 국가의 생명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의 실패를 ‘인간의 의욕=성취욕을 간과(看過)한 데’서 보아왔는데, 오구라 선생은 국민의 ‘제1의 생명’ 유지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제2의 생명’을 강화하여, 그 근본인 ‘제3의 생명’을 철저하게 멸시 내지 도외시한 데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물신숭배(物神崇拜)라는 말로 ‘제3의 생명’을 적대시한 일이 실패의 연원이라고 한다. 섹스피아의 큇프로쿠(quid pro quo=something for=되갚음/ 대상물)를 나쁜 것으로 비판했는데, 그것이 곧 ‘제3의 생명’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경제는 지금 ‘가진 자는 더욱 더 소비하지 않고, 안 가진 자는 더욱 더 싼 것을 산다.’는 20년의 풍토로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곧 우리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 경제활동과 생명과의 관계를 재정의(再定義)하는 일이라 하고, 일본경제의 지난 잃어버린 30년의 결점은 ‘물(物)에 대한 감성의 상실’이니, 이제는 생(生)/ 생명이 빛나는 경제를 위한 두 가지로—하나는 물의 생생한 단면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間)철학’에서, 사(私, 제1의 생명)도 아니고 공(公, 제2의 생명)도 아닌 공(共, 제3의 생명) 곧 공공(公共)하는 경제행위— 가야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를 근원적으로 부활시키는 것은 물의 생생함을 느끼는 것과 교환/ 보수의 순간에 ‘제3의 생명’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경제에서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젊고 어린 세대들이 지금 물건 아까운 줄을 모르고 자라고 살고 있지 않는가?





이제 코로나 사태라는 지구촌 미증유의 환난을 격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그 이후의 정세를 살펴나간다. 그 환난을 겪으면서 모든 나라들이 ‘제나라’라는 경계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국경을 개폐(開閉)하는 고민, 또 하나는 UN이나 EU나 WHO 등 주권국가를 넘는 조직이 무력함을 드러냈다는 자각에서, 주권국가만으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강대국도 선진국도 그 허울과 너울이 적나라하게 벗겨지고 말았는데,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이란 무엇이며 선진국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더는 그 허망에 의존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제 ‘영향력 있는 국가’란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비전인 ‘soft power’ 곧 ‘제3의 생명’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3의 생명’만으로는 안 되고, 개별적인 군사력 곧 ‘제1의 생명’과, 보편적인 이념적 파워 곧 ‘제2의 생명’과,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사이’의 힘 곧 ‘제3의 생명’을 모두 강대하게 갖춘 주권국가라야 영향력 있는 국가라고 말한다.

이제는 ‘붉은 시대’도 지나갔고, 그러면 동아시아에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라는 구도는 동일화할 수 없으며, 세계가 중국적인 강권과 초월적 이념에 의하여 통어(統御)된다면, 일본은 인류를 위하여 스스로의 귀납주의적 경험주의적 반초월주의적 세계관의 존속‧ 갱신을 짊어지고, 몸을 던져서 군도성(群島性)을 발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군도문명은 대륙문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하고 포월(包越)하는 것뿐이다. 결코 일본의 민족주의에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명을 일본이 이끌지 않고 어쩌겠는가라는 것이다.

(이웃에 한국이 있어서) 한국은 어찌되고 있는가? 한국은 군도이면서 해양국가라는 말을 하지만 군도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의 문정권은 주체성을 북한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에 점점 군도성에서 멀어져 간다. 문명론적인 의미에서도 지금의 한‧ 일은 떨어져 가는 중이라고 본다.

한국은 ‘절대적인 진리’를 희구하는 니라이다. 한국의 정치방법은 중국의 ‘하달(下達)’식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아래에서 위로 저항한 것이나, 그것도 애니미즘은 아니었다. 한국은 미국중심의 세계적 가치를 자국에 가져오는 인재가 힘을 얻고 있다. 왕년의 한국 지성인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주체들이었고, 패권주의나 부정의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정신을 가진 참다운 지성이었으나, 지금의 주체들에게서는 그러한 비판정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으로 퍼져가고 있는데, 이것을 ‘동아시아의 위기’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구라 선생은 ‘공창하는 동아시아의 연대’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고, ‘논어’도 새로운 각도에서 본 것처럼, 미래도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함께 만들고, 도덕도 누구를 본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함께 만들며, 참다운 논어의 방법은 귀납적으로 ‘사이’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공(公)’과 ‘사(私)’를 매개하는 ‘공(共)’ 곧 모두 함께 만들자는 세계관이, ‘공창(共創)’이라는 것이다.

‘진리’나 ‘생명’만이 아니라, ‘자아’라는 것도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논어와 군도문명이라고 생각이라고 한다. 이 4반세기 동안 일본에서 ‘공공철학(公共哲學)’을 제창하고 있는 김태창 박사는 ‘내발(內發)’이 아닌 ‘간발(間發)’이라고 하는데, ‘진리’와 ‘공공성’과 ‘도덕’과 ‘생명’과 ‘나(自我)’는 내면이나 외면이나 초월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제부터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강력한 방향성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사이의 철학’이라는 것은 ‘사이의 생명’인 ‘제3의 생명’을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철학이다. 곧 ‘공창(共創)’이라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세계에 이 ‘사이’의 가치가 인식될 때, 그 선구적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임이 일본에 있지 않겠느냐고 맺고 있다.



Ⅵ 맺음—오구라 선생을 위한 기도

책을 덮고 느끼는 것은 현하(懸河)의 웅변을 듣고 강력한 어조와 정곡을 찌른 정론에 감복하여 자리를 뜰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공감으로 자신을 깊이 뉘우치고 뉘우쳤다. 그리고 오구라 선생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우리가 갈구하는 동아시아의 공통가치, 곧 공복(共福)을 향한 지남(指南)이고 빛(光明)이라고 생각한다.

타의에 의하여 이 졸고를 폈으나, 나의 소졸함으로 오구라 선생의 넓고 크고 높고 깊은 학문적 서술이 오독-오판-왜곡으로 손상될까 두려운데, 제발 그런 착오가 적었기를 바라면서, 그분의 구도적 탐구의 전도가 더욱 탄탄하고 그 결실이 풍성하기를 기도한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지도자라는 위인(爲人)들이 사람을 잡고 질서를 파괴하는 풍랑(風浪) 속에서, 양심과 진리로 인간사회의 정도(正道)를 찾아 깨우치는 오구라 선생의 거조(擧措)에 건강한 정진만이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오구라 선생의 저술의 행간(行間)에서 넘치는 에너지를—그 은유와 함축이 무엇인지 폭발할 것 같은 힘— 보는데, 오구라 선생의 연구와 봉사가 ‘미래공창(未來共創)하는 동아시아에’의 소망 그대로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이상이 내가 오구라 선생의 신간 ‘群島의文明과大陸의文明’을 읽은 소감인데, 꼭 하나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책에는 방법론으로 시작하여 끝까지 시종일관 한국과 한국인 학자의 주장을 비교 인용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 학계에도 좋은 자극이 될 것으로 여겨서,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나와 널리 읽혀지기를 기대한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오구라 기조의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을 읽고 <오오하시 켄지·< 동양일보 2021

139.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을 읽고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139.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을 읽고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2.21 

글 오오하시 켄지·
야규 마코토

[동양일보 동양포럼 기자]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와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일본 교토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의 서평을 동양포럼에 보내왔다. <편집자>
오호하시 켄지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약간 옛날의 이야기가 되는데 세계적으로 큰 화두를 던진 새뮤얼 P. 헌팅턴 <문명의 충돌>(1996년)은 세계의 주요 문명들을 여덟 개로—서구· 이슬람· 라틴아메리카· 힌두· 러시아정교회· 아프리카· 중화· 일본─ 분류했다. 세계 8대 문명 중 하나로 ‘일본문명’이 손꼽힌 것으로, 위대한 일본문명이 드디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줄 알고 기뻐한 덜렁이 보수파 논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본문명에 대한 언급은 반드시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본문화는 “고도로 배타적”이며, 여기에는 타국과 공유될 만한 보편적인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없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그것을 전달해주어서 공통된 문화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없는 특수적이고 배타적인 ‘고립문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대문명으로서의 ‘대륙문명’과 비교하면서 일본문명을 ‘군도문명(群島文明)’으로 형용하는 오구라 기조(小倉紀藏)의 이 책은 일본의 ‘고립문명’을 상대화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시각에서 일본문명의 본질과 가치 해명을 시도한다. 저자는 한국철학· 사상의 전문가이자 비교문명학회 회원으로도 폭넓게 활약하고 있다. 일본 비교문명학의 선구자인 야마모토 신(山本新, 1913-80)은 1960-70년대에 발표한 논문집 <주변문명론(周邊文明論)>(刀水書房, 1985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근대 서양적 ‘대문명’ 대 비서양적 ‘주변문명’이라는 것이 비교문명학의 기본적인 틀이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와 같이 ‘대문명’을 우월적인 것으로 보고 ‘주변문명’을 일방적・ 일원적으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된다. ‘근대 서양-비서양’=‘중심-주변’이라는 서양 중심주의의 개념 틀로 문명을 고찰하는 ‘수직적인 축’ 이외에 서양 이외의 주변문명들끼리 비교하는 ‘수평적인 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대륙의 문명’과 ‘군도(群島)의 문명’은 비교문명학의 기본 틀인 ‘중심-주변’이라는 ‘수직적인 축’을 답습한다. 한편으로 과거에는 중국문명, 오늘날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의 서양문명에 흠뻑 빠진 일본과 한국이라는 ‘주변문명’ 즉 일본-한국이라는 ‘수평적인 축’에서 일본문명을 비춰보고 고찰한다. 이와 같은 고찰에 있어서 현대 일본에서는 저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문명을 집합심성적인 것으로도 생각했다. 그것은 일련의 사회· 경제를 큰 변화 없이 계속 살아가며 때때로 파란만장한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고 했다.(<문명의 문법Ⅰ 세계사 강의(文明の文法Ⅰ 世界史講義)> 1987년). 표층의 사회적 변동과는 별도로 그 중심을 관통하는 부동· 불변한 것으로 문명에는 당연히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자. 저자는 일본의 문명· 문화· 사상의 본질이 ‘애니미즘’적인 생명관, 정신성에 있다고 본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이 일본의 독특한 ‘미적 생명’=‘제3의 생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생명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제1의 생명: 생물학적· 육체적 생명=개별적· 객관적· 상대적· 물질적 생명.

제2의 생명: 영적 생명=보편적· 절대적· 종교(정신)적· 비물질적· 집단적 생명

제3의 생명: 미적 생명=간주관적· 우발적· <사이>적 생명, ‘지금· 여기’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

제1의 생명은 그렇다 쳐도, 제2의 생명인 ‘영적 생명’이라는 말에 약간 위화감을 느끼지만, 일본문명에 고유한 특질을 ‘미(美)’적인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외국의 연구자에게 흔히 보이는 일이다. 조치대학(上智大學)에서 '죽음의 철학'을 강의하고 일본 생사학의 제1인자로 2020년 9월에 서거한 아르폰스 데켄(Alfons Deeken)도 일본에는 ‘삶의 미적 측면’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세계가 ‘유용가치와 도구가치’를 ‘생명가치와 유기체적 가치’의 상위에 두는 ‘공리주의적 문명의 에토스’로 뒤덮여버린 것을 데켄은 몹시 개탄했다. 한편 아시아가 가지는 고유한 에토스, 특히 일본에서 뚜렷한 ‘미의 에토스’에 대해 언급하면서, “고도로 발달한 일본의 미적 에토스는 서양문화에서는 대부분 잠자고 있는 인간의 풍요로운 잠재적인 능력을 구미 사람들에게 깨우쳐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인간성의 가치를 찾아서(人間性の価値を求めて)> 아우치 마사히로(阿內正弘) 옮김, 春秋社, 1995년).

데켄이 말한 것은 감각적· 예술적인 ‘미’=미적 감수성인데, 저자는 한국어로 우주적· 보편적인 미를 나타내는 영적이고 생명적인 ‘아름답다’와의 대비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중기의 ‘마쿠라노소시(枕草子)’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서 사용된 ‘오카시(をかし)’와 ‘아와레(あはれ)’, 혹은 ‘유현(幽玄)’ ‘와비(わび)’ ‘사비(さび)’ ‘이키(いき)’ 등을 미적 생명적인 <제3의 생명>을 언어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셋으로 나누는 것은 저자의 특유한 세계관에 의한 것이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이 ‘제3의 생명’인데, 이것은 “사람들과의 ‘사이’나 사람과 사물과의 ‘사이’에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생명’”을 가리킨다.

미국과 중국 등 대문명 ‘대륙문명’에 대표되는 군사적 힘 같은 ‘제1의 생명’이나, 보편적 이념의 힘 같은 ‘제2의 생명’은 타자를 압도하고 지배하에 두려는 경향을 면치 못한다. 이에 대해 자기와 타자(사람· 사물)와의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제3의 생명’을 핵으로 하는 일본적인 ‘군도문명’을 저자는 높이 평가한다. 군도문명은 대륙문명을 배제하고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포월(包越; 포섭하고 뛰어넘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편협한 내셔널리스트’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세계를 ‘대륙문명’형으로부터 일본적인 ‘군도문명’형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문명을 일본에서 시작하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논자는 학자· 연구자의 테두리에 박히지 않는, 시대 구제의 뜻을 가진 사상가로서의 저자의 뜨거운 정열을 본다.

한편 ‘제3의 생명’을 ‘영원의 생명’과 다른 미적인 ‘한순간의 미의 생명’ 혹은 ‘지금=여기에 출현하는 생명’으로 단정하고 강조하는 그러한 ‘지금· 여기’ 개념은 도겐(道元) 스님이 말하는 ‘이금(而今)’, ‘전후제단(前後際斷)’과 같은 선종(禪宗)의 핵심으로 절대현재에 사는 동양적인 깨달음의 도달점이지만, 반면에 모종의 찰나적, 몰윤리적(沒倫理的)인 것을 부를 수 있는 위험함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제3의 생명’의 참뜻이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공공철학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이 제창하는 ‘사이의 철학’과─김 주간의 정확한 표현에 따르면 ‘사이로부터의 철학’─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철학은 ‘개체’에 수렴되는 자기몰두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자들이 서로 매개하고 자기와 타자를 잇고 맺고 뛰어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머니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 지배 아래, 격차사회에 따른 분단과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불관용이 만연하는 현대 세계에서, 군도적(群島的)인 ‘제3의 생명적’, ‘사이적’ 문명을 일본이 앞장서서 세계에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공창(共創)하는 동아시아로’라고 호소한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신형코로나바이로스로 가로막히고 먹구름이 드리우는 나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세계 사람들, 거대한 재앙에 신음하는 현대문명에 대해 한 가닥의 밝은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번역: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학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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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규 마코토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오구라는 이 책의 벽두에서 비교문화의 방법론을 심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보통 ‘대륙’과 대비되는 것은 ‘해양’이다. 하지만 대륙·해양의 분류는 안보 또는 국제정치상에서 주권국가의 세력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오구라가 말하는 ‘군도(群島, archipelago)’는 바로 바다 위의 섬들에게 인간이 살고 문화나 문명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태를 나타낸다. 즉 대륙·군도라는 구분은 문명론적 시각에 의한 것이라고 오구라는 주장한다. 이와 같이 오구라는 나름대로의 문명론을 전개함에 앞서서 그 방법론을 꼼꼼히 살피고, 기존의 비교문명론이 범한 오류들에─문화 내셔널리즘, 문화 본질주의,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에의 의존, ‘인간’이라는 근본에 대한 자각의 결여 등─ 대해 경계한다. 이와 같이 철저한 방법론적 반성과 ‘제2의 생명’ 및 ‘제3의 생명’이라는 시각은 오구라 문명론을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유성종(劉成鍾),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두 분 선생님이 먼전 논평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먼저 그것을 살펴보고 나서 필자의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유성종은 이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의 전체적인 내용을 압축해서 요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군도문명은 대륙문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하고 포월(包越)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또 오구라가 논어도 새로운─‘제3의 생명’이라는─각도에서 다시 읽은 것처럼, 미래도 도덕도 어디 있는 것을 찾거나 누구를 본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함께 만들어야 하며, 귀납적으로 ‘사이’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공(公)’과 ‘사(私)’를 매개하는 ‘공(共)’, 곧 모두 함께 만들자는 세계관이 ‘공창(共創)’이다,라는 메시지를 도출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유성종은 “책을 덮고 느끼는 것은 현하(懸河)의 웅변을 듣고 강력한 어조와 정곡을 찌른 정론에 감복하여 자리를 뜰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공감으로 자신을 깊이 뉘우치고 뉘우쳤다. 그리고 오구라 선생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우리가 갈구하는 동아시아의 공통가치, 곧 공복(共福)을 향한 지남(指南)이고 빛(光明)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오구라의 논고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오오하시 켄지에 의하면 이 책의 제목에 있는 ‘군도의 문명/ 대륙의 문명’이라는 틀은 비교문명학의 기본 틀인 <중심-주변>이라는 ‘수직적인 축’을 답습하면서 과거에는 중국문명, 오늘날은 미국 발의 글러벌리즘에 흠뻑 빠진 ‘주변문명’으로서의 일본과 한국의 비교・ 고찰이라는 ‘수평적인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일본에서 이와 같은 고찰에서 저자와 견줄 만한 사람은 없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오구라가 일본문명에 고유한 특질을 ‘미(美)’적인 것으로 봄과 동시에, ‘제3의 생명’이라는 생명론적인 축을 도입한 데에도 독자성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오오하시는 오구라가 강조한 ‘제3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과 다른 미적인 ‘한순간의 미의 <생명>’, 혹은 ‘<지금=여기>에 출현하는 생명’인데, 이것은 중세 일본의 대표적인 선승인 도겐(道元, 1200-1253)이 말한 ‘이금(而今)’ ‘선후제단(先後際斷)’과 같은 선(禪)의 핵심이자 절대현제에 사는 동양적 깨달음의 도달점과도 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공허한 현실주의로 타락하거나 모종의 찰나적(刹那的), 몰윤리적(沒倫理的)인 것을 부를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오하시는 그것은 기우(杞憂), 즉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군도의 문명이─구체적으로는 일본문명─ ‘제3의 생명’에 기초한다고 주장한 오구라의 참뜻은 마지막 장에서 그가 스스로 밝혔듯이 결코 <개체>에 수렴되는 자기 몰두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제3의 생명에 기초하면서 타자들이 서로 매개하고 자기와 타자 ‘사이’를 잇고 맺고 넘어서고 다른 나라와 지역의 사람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개척하자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제1의 생명(물질적・ 육체적・ 생물학적인 생명)이나 제2의 생명(영적・ 보편적・ 영생적인 생명)과 다른, 덧없고 순간적이고 사람과 사람 또는 사물 사이에 떠오르는 제3의 생명이라는 시각에서 ‘문화’와 ‘문명’을 다시 읽으려고 한 오구라의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다만 이것은 중화문명・ 서양문명과 같이 제2의 생명에 입각한 이른바 ‘보편문명’의 시각에서 비하된 제3의 생명을 복권시키고 다시 빛을 바라게 했을 뿐, 만약에 제3의 생명(과 거기에 바탕을 둔 군도문명)이 고급하고 제1, 제2의 생명(그리고 대륙의 문명)은 저급하다고 착각한다면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오구라는 불교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일본적 영성’론에 의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년)의 도읍지인 헤이안쿄(平安京)에 살던 귀족들은 섬세한 ‘제3의 생명’의 기미에는 민감하게 정신을 집중시켰으나, 그 ‘생명’은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음은 있어도, 그 시대의 일본인들은 아직 ‘대지(大地)’를 모르고 ‘영성’을 몰랐다. 그런데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1333년)에 오면 헤아안쿄에서 멀리 떨어진 동국(東國)에 살던 무사, 농부, 승려들이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영성’과─오구라에 의하면 ‘제2의 생명’─ 만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안에서도 제2와 제3(그리고 당연히 제1)의 생명은 서로 상관연동하면서 삶의 영위와 역사와 문화와 문명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제1, 2, 3의 생명’을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지리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제2와 제3의 생명의 비율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에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군도의 문명에서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제3의 생명’이 상대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오구라의 생명론적 문명론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성과 문명・ 문화의 개별성의 양쪽을 아우르는 것이다. 만약 이 점을 간과한다면 오구라의 주장을 ‘제3의 생명’ ‘애니미즘’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군도문명=일본문명이 주도권을 잡고 지금 미국이나 중국이라는 대륙=해양문명이 좌지우지하는 세계를 바꿔보자는 신종의 문화적 패권주의의 주장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논자가 보기에 ‘제2의 생명’과 ‘제3의 생명’은 원래 그 원천이 다르다. 저자가 밝혔듯이 덧없이 살다 죽는 한계(제1의 생명)를 가진 인간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하나(1)’라는 관념을 극도로 추구한 결과 도달하게 된 것이 ‘제2의 생명’이다. 이에 대해 ‘제3의 생명’은 개별성, 순간성, 감각성을 지닌 것이고, 또한 어린 아이가 철들기 전에 많이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를 잘 살펴보면 그들은 이미 나날을 그렇게 살고 있다. 어른에는 생명이 없어 보이는 물건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주고 다루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린 아이가 아끼는 인형과 말하고 역을 떠나는 열차에게 손을 흔드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바로 그때 그(녀)와 인형이나 열차 사이에는 ‘제3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도 ‘다오야메부리(たおやめぶり)’ 즉 “덧없고 아녀자(兒女子)같은 것”이며 여성적이고 유약하고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것이 인정(人情)의 본래 모습이고, 이것이 곧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라고 말했다. 노리나가에 의하면 무사적인 “올곧고 씩씩한” 마음가짐은 오히려 ‘가라고코로(漢意)’ 즉 불교・ 유교와 같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꾸며진 정신이라는 것이다. (유약함이 곧 일본의 원래 정신이라는 노리나가의 주장은 무사사회 일본에서는 아주 이색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은 오구라의 절묘한 균형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민주주의 등의 정치, 새로운 복지와 교육, 리얼리즘도 설계주의도 아닌 외교 방식 등 사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저자가 ‘아니미즘’이라고 부르는 세계관에 의해 변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오구라 생명론과 문명론이 장차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면서 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조화사상(造化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화사상(造化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화사상 (造化思想)

대종교 개념 초월적 존재인 한인이 천도로 우주만물을 이룩했다고 여기는 대종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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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초월적 존재인 한인이 천도로 우주만물을 이룩했다고 여기는 대종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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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태초의 우주는 음양이 갈라지지 않고 홍몽(洪夢)한 채 암흑이 있을 뿐 텅 비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위의 더없는 으뜸자리에 삼신일체(三神一體)인 한얼님(하느님)이 계셨을 뿐이다.

이 삼신일체는 3신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한 몸이고 작용으로서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3대 권능을 두루 갖추어 한 몸에 지녔다는 뜻이므로 세검한몸[三神一體]이라고도 한다.

한얼님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만물을 끌어내고 온 누리를 통치하는 무한한 권능으로 신묘한, 밝은 빛을 내려 명령으로 하나씩 만물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광명(光明)이라는 우주의 하나뿐인 원소(元素)가 일정한 기간을 거쳐 태양계라는 우주를 형성하였고, 천도로써 만물을 만들고 진화팽창(進化膨脹)시켜 이루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갖 조화된 것은 형상이 있고 천지를 창조한 임자는 모습이 없으며,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들고 돌리고 진화시키고 기르는 이가 곧 한얼님이요, 형상을 빌려 나고 죽고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들이 바로 사람과 만물이라 하였다. 이렇게 한얼님은 생성·구성·진화의 과정을 거쳐 빈틈없이 천리(天理)에 맞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조화의 내력에 대하여 조화경(造化經)인 ≪천부경 天符經≫에서는 “하나란 우주의 근본이요, 만유(萬有)의 비롯되는 수이니, 이 하나보다 먼저 시작됨이 없다. 이를 분석하면 한울과 땅과 사람의 삼극(三極)이 되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一始無始一析三極 無盡本 天一 一地一二人一三).” 하였다.

하나인 한얼님으로부터 한울과 땅과 사람이 나왔다는 뜻을 숫자로 풀이한 우주의 조화설(造化說)이다. ≪천부경≫과 체용(體用)관계에 있는 ≪삼일신고 三一神誥≫에서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한얼님께서는 위에 없으신 첫자리에 계시사 큰 사랑[大德]과 큰 슬기[大慧]와 큰 힘[大力]을 가지시고 한울을 낳으시며[生天] 셀 수 없는 모든 누리를 주재하시며[主無數世界] 온갖 만물을 만드셨느니라. 그러므로 한얼님의 조화에서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으시고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길이 없느니라.”

≪삼일신고≫에서의 우주창조는 생천(生天)과 주재(主宰)와 조물(造物)이라는 세 가지 공정(工程)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조물이라는 말은 유태민족의 창세기에서 천지창조와 같은 뜻이 되겠으나, 생천이라는 말은 특이하여 찾아볼 수 없는 표현법이다.

우주물리학에서 최초의 우주는 한 덩어리 원소가 폭발하여 우주의 기본구조가 현재의 우주를 생성할 수 있도록 순간에 분산하여 이루어졌고, 이 원시물질이 모여 천체들을 만들면서 무한히 팽창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우주폭발설은 ≪삼일신고≫의 원리인 우주생천설(宇宙生天說)과 일치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생한다는 것은 모체인 어머니에 의지하여 완성품이 된 뒤 폭발적 방법으로 어머니 뱃속을 뚫고 일시에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출생 자체가 일종의 폭발적 출현이며, 원리적 하늘을 낳았다는 ≪삼일신고≫의 생천설과 우주물리학에서의 하늘물질 폭발설은 술어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뜻은 같다.

그리고 ≪삼일신고≫의 생천우주(生天宇宙)는 우주물리학의 폭발우주와 같고, ≪삼일신고≫의 조물우주(造物宇宙)는 우주물리학에서의 팽창우주와 같으므로 우주 생성에 관한 원리는 ≪삼일신고≫의 말씀과 천문학의 연구와 일치하고 있다.

대종교의 생천설과 조물설은 한얼님이 하늘을 내놓고 만물을 있게 하는 신공성덕(神功聖德)을 나타내는 데 쓰는 두 가지 방법이다. 이것을 강조한 것이 대종교의 조화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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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천부경(天符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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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우원상

뒤숭숭한 2014년, 우리에게 필요한 치화治化의 경전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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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한 2014년, 우리에게 필요한 치화治化의 경전
K스피릿
입력 2014.07.30 19:50기자명강만금 기자

2014 한얼교실 [참전계경 편] 한민족의 얼을 깨우는 우리 경전 교실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다. 세월호 참사는 100일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을 위한 여러 활동은 더디기만 하다. 눈을 조금 밖으로 돌려볼까. 7월 한 달에만 세 건의 비행기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에서는 잊을만하면 동해로 미사일 쏘기를 반복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공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된 것일까. 어째서 우리의 뇌를 '굿 브레인(Good Brain)'으로 만들어줄 '굿 뉴스(Good News)'는 찾기가 이리도 힘든 것인가.

오늘날 굿 뉴스를 찾을 수 없다면, 조금 더 과거로 돌려보면 어떨까. 한민족의 역사 속 경전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 주인공이다. 참전계경은 세상을 밝고 환하게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치화경(治化經)'이다. 원암 장영주 국학원장이 '2014 한얼교실'에서 소개한 참전계경의 면면을 아래에 정리하였다.



클릭 [8] "세상 사람들아, 모두가 단군이 되어 홍익의 삶을 살자!"

<단군 8조교(檀君八條敎)>를 살펴보자. <단군 8조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단군 조선의 건국의 이념이자 건국의 이유이기도 하니, 참된 삶을 위한 여덟 가지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의 유일한 목적은 '나의 백성들과 나의 후손들아, 너희들도 단군이 되어라!'라는 부탁과 소망이다."
제1조와 제2조에서는 전체 8조교의 원초적인 틀과 방향을 제시한다. 그중에도 1조는 한민족의 거룩한 개천삼경(開天三經)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함축하고 있다.

제 1 조
하늘의 법(法)은 오직 하나요, 그 문(門)이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순수한 정성이 하나 같아야 하며, 이로써 너희 안(마음)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天範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클릭 [15] "가위(人)도 울고, 바위(地)도 울고, 보(天)도 울고"

홍익인간의 마음은 천지인(天地人)이 하나 되는 마음이고 그것은 배워서 알아가는 마음이 아니고 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니 천심(天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가위’는 사람 ‘인(人)’ 자를 닮았고, ‘바위’는 ‘땅(地)’에 속해있고, 보는 모든 것을 보듬어 품는 ‘하늘(天)’을 뜻한다. 이 모두가 손바닥 안에서 ‘하나’가 된다.

가위, 바위, 보 놀이는 곧 ‘천지인이 하나 되기 놀이’이니 천부경(天符經)의 핵심 다섯 글자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있음을 아는 사람이 곧 홍익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놀이로, 이야기로, 노래로 밝고 환하여 당당한 ‘하늘마음’, 곧 천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준다.

참전계경 제290사는 모든 인간에 깃든 천심을 이렇게 알려준다. “천심이란 배운 바는 없으나 다만 본래의 천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선행을 말하면 그대로 따르고, 착한 일을 일러주면 그대로 행하며, 착한 마음을 일러주면 그대로 실천하여 비록 어진 것을 배우지는 않았으나 착하지 않은 것이라면 행하지 않으니 하늘의 복을 받을 것이다.”



클릭 [16] 하늘이 이미 내 안에 있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세월호의 선장 이하 일부 선원들은 남을 제치고 먼저 구조되었지만 그들은 결국 죽은 것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려던 자신의 생명도 보장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만의 구원에 집착하고 타인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기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을 기만한 것이다.

한민족의 조상님들은 <참전계경(參佺戒經)> ‘제 186사 만천(慢天)’ 을 통하여 하늘을 속이는 행태에 대하여 통렬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만천이란 하늘이 거울처럼 모든 것을 밝게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착한 일을 행하여 잘 성공하는 것도 하늘의 힘이고 악한 일을 행하다 실패하는 것도 하늘의 힘이며, 만용을 부리다가 능력 부족으로 중지하는 것도 하늘의 힘이다. 어리석은 사람도 착하게 행하면 하늘의 힘으로 성공하게 되고, 지혜 있는 자도 악하게 행하면 하늘의 힘으로 실패하게 되며, 재주 있는 자도 만용을 부리면 하늘이 그 능력을 시험해 보고 힘을 거두어들인다.”
(慢天者 不知有天之鑑也 行善而成 亦天力也 行惡而敗 亦天力也 行險而中 亦天力也. 濛者行善 天力成之 知者行惡 天亦敗之 巧者行險 天縱試而力收.)



클릭 [18] 단 한 사람도, 단 건의 법도 어기지 않는 나라

우리의 조상들은 단 한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단 한 건의 법도 위반하지 않는 나라와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희망의 해법을 오랜 역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 어떤 나라에나 통용되는 오직 단 한 가지의 방법이다. 그 해답은 한 사람으로부터, 단 한 명의 국민으로부터 출발한다.

다름 아니라 몸을 맑게 하는 것이다. 단지 몸을 맑게 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사회와 나라,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한민족의 위대한 진리서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은 세상을 밝고 환하게 다스리기 위한 ‘치화경(治化經)’으로 ‘다스림’은 ‘다 살림’이란 우리말이다. 치화경 참전계경은 제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두루 다 살려내기 위한 366가지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참전계경에 ‘담(淡, 맑음)’이란 가르침이 있다.

‘제339사 담(淡, 맑음)’ 몸이 맑으면 복이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덕을 이루어 천하에는 (인간성, 본성을 잃어) 실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나라에는 국민이) 단 한 건의 법도 위반하지 않게 된다. 모두가 나라의 근본을 밝혀 빛내며 사람끼리는 정으로 통하고 만물의 힘을 보호하여 (지도자와) 뭇 사람이 즐거움을 더불어 취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이를 다 같이 따라 행한다.
(體淡卽福應 全人成德 天下無一人失性 百姓無一事違法 明徵國體 切合人情 周護物力 樂取與衆 同爲準式)



클릭 [23] 해와 달처럼

을파소 선생은 백운산에서 수도하던 중, 하늘의 도움을 받아 참전계경(參佺戒經)을 고구려에 맞게 8강령(八綱領)으로 묶어 편집하였다. 그는 이를 널리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들을 수없이 배출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은 “신시 환웅시대에 이미 참전계(參佺戒)로써 교화대행(敎化大行)하였다”며 참전계경의 출처를 밝힌 바 있다. 즉, 참전계경은 기원전 3897년의 환웅 천제 때부터 이어 내려온 가르침이라는 것. 참전계경은 그 유구한 세월을 지나 을파소 선생 때까지 약 4,000년의 세월과 공간을 넘어 고구려에서 다시 새롭게 싹튼 셈이다.

참전계경은 신시 환웅시대부터 비롯되어 고구려, 발해를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연결되는 한민족의 치세방책이며 세계적으로 귀중한 인류문화 유산이다. 중국의 ‘사서삼경’, 유대인의 ‘탈무드’, 불교의 ‘팔만대장경’, 이슬람의 ‘코란’에 비하여 아무런 손색이 없다. 오히려 군더더기 하나 없으니, 이는 진리의 삶에 관통되어 이어져 있다.

이토록 빛나는 참전계경은 한민족의 인성교육을 집대성하고 있다. 참전계경의 제93사 ‘일월(日月)’을 보면 "낮이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달이 뜨며, 양기가 지나가면 음기가 오고 음기가 다하면 양기가 생겨나는 것이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믿음이다. 사람의 믿음도 마땅히 하늘의 믿음과 같아야 비로소 밝은 이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日爲晝 月爲夜 陽去陰來 陰盡陽生 分毫不差 此 天之信也. 人之信如天之信然後 可謂哲人之信也)


강만금 기자 sierra@ikoreanspirit.com

조민유화(兆民有和) 치화(治和)



조민유화(兆民有和)

국민의 화합과 나아가 인류의 화합을 지향한다는 뜻을 나타냄
==
최한기 철학 연구 -기(氣)의 형이상학과 윤리 2019 박미라
https://s-space.snu.ac.kr › bitstream

이에 후기 저술인 ≪. 인정≫(둘째 예문)에서는 '조민유화(一兆民有和)'을 오륜에 더하여 유교. 를 통해 전 세계인이 화합할 수 있는 이상향을 제시한다. 94

---
*【兆】(조짐 조)

총6획:⼉-4획,〔篠〕

(中) zhào (日) ちょう(キザシ) (英) omen, billion

▣ 字解(자해) ▣

1. 조짐. 그리 됨직한 징조(徵兆). 兆候. 吉兆. 兆足以行矣 而不行而後去<孟子>
2. 점(占). 점상(占象). 귀갑을 그슬려서 나타나는 잔금의 모양을 보고 길흉(吉凶)을 판단하
는 일. 兆占. 兆得大橫<漢書>

3. 조.

① 수의 단위. 억(億)의 만 배. 二兆三千億.

② 많은 수. 億兆蒼生 兆民.

4. 묘지(墓地)나 제단(祭壇). 兆域. 終葬汝於先人之兆<韓愈>

▣ 用例(용례) ▣

[兆卦]<조괘> 점상(占象). 점(占)에 나타난 형상.

[兆物]<조물> 많은 물건. 만물.

[兆民]<조민> 많은 백성. 만민(萬民). 조억(兆億). 억조(億兆). 억민(億民).

===
치화하다 뜻

https://ko.ichacha.net › korean › 치화하다

치화-하다【治化하다】. 
[타동사]〖여불규칙〗. ⇒ 치화1 (治化). 
치화: I 치화1 【治化】[명사]백성을 잘 다스려 교화함.
[파생동사] 치화-하다I I 치화2 【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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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발견
기초한문(韓文) : 政(정)ㆍ治(치) = 道(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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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4.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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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의 함의(含意) 政 = 正 + 攵 : 두드려서 바르게 펴다/잡다. 

01 바로잡다 : 정자정야(政者正也) <논어, 顔淵 17>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 <논어 子路 3>  반드시 이름을 고쳐 잡겠다.

02 근본을 세우다 : 

   본립도생(本立而道生) <學而2>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정본(政本) = 農者天下之大本 = 禮必本於天 <예기·예운(禮運)>

   

03 바르게 다스리다 : 이정치국(以正治國) <老子 57>

04 바르게 가르치다 : 치화(治化) = 교화(敎化) = 풍화(風化) 

 

05 바르게 갖추다 :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太和 乃利貞 <역 系辭上>

   건(乾)의 도가 변하고 화함에 따라 각기 성명을 바로 하니

   크게 화합을 보전하고 합해서 이롭고 바르다(貞 = 正).

 

06 바른 길로 인도하다 : 정경(政經) = 정도(正道)

   정도직행(正道直行)  ▲ 道 = 敎

   직도이행(直道而行) <논어 위령공 24> : 도를 바르게 하여 시행하다.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 <논어 위령공 28>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07 정사(政事)를 행하는 사람

   정사(政社) : 정치 이념과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 단체.

   ↔ 정당(政黨) : 사익(私益) 도모 패거리(分派) 단체

 

08 정치를 시행하다.

   정통인화(政通人和) <송(宋)·범중엄(范仲淹) 악양루기(岳陽樓記)>

   政事通達 人心和順  어진 정치가 행해져 인정이 넉넉하고 화목하다.

   

09 편리하게 관리하다

   정즉재간이능(政則在簡而能)  정치는 간략해야 이끄는 힘이 있다.

   덕즉재박이구(德則在博而久)  덕은 널리 베풀어 오래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충경(忠經)·정리장(政理章)>

 

10 적(敵)을 치다.  

   정적벌국(政適伐國) <사기(史記)·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19>

   적국(敵國)을 공격 또는 정벌(征伐)하다.

 

治의 함의(含意)

01 정도(正道) : 政者正也 <논어, 顔淵 17> 

02 상처와 병(病)을 낫게 하다 : 치담(治痰), 치료(治療).

 

03 어려운 사태를 수습하여 바로잡다. 

   禮之於人也 猶酒之有蘖也  예와 사람의 관계는 술에 누룩과 같다.

   君子以厚 小人而薄         군자는 예에 후하고 소인은 예에 박하다.

   故聖王修義之柄禮之序      그래서 성왕은 義柄과 예의 차례를 닦아서

   以治人情                  인정을 적절히 다스린다 <孔子家語 禮運8>

 

04 목적과 용도에 맞도록 다듬다.

   치목(治木) : 목재(木材)를 다듬다.

   치석(治石) : 돌을 다듬다.

05 정리하다 : 치리(治理) 결 따라, 순리대로 다스리다.

   치산치수(治山治水) : 산과 물을 다스려 재해(災害)를 예방하다.

 

05 질서를 바로잡다 : 家齊而後國治 家를 다스린 다음 나라를 다스리다.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修身

   格物而後至致    知致而後意誠

   修身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나라를 다스린 다음 세상을 평화롭게 하다 <大學>

 

06 진정하다. 평정하다. 안정을 회복하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大學>: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다

   치란(治亂) : 난리(亂離)를 다스려 평정하다.

 

07 성취하다. 다스리다.

   능다자무불치야(能多者無不治也) <淮南子. 通玄眞經>

   ▲ 爲無爲則無不治 <老子 3> 무위로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08 배워 익히다 : 치기대례(治其大禮)  <周禮 春官 大宗伯>

                 치경(治經)  經學을 연구하다.

 

09 새로 만들다 : 치도(治道) 도로를 건설하고 보수하다. 치장(治裝)

10 교화(敎化)/풍화(風化)하다 : 치화(治化) 다스려 착한 길로 인도하다

   치안(治安). 치열(治熱). 치인(治人)

 

정치(政治)

예악형정 기극일야(禮樂刑政 其極一也) <예기(禮記) 악기(樂記)>


 禮以道其志(예이도기지)  예(禮)로써 백성의 마음을 이끌고

 樂以和其聲(악이화기성)  악(樂)으로써 백성의 소리를 다스리고

 政以一其行(정이일기행)  政치로써 백성의 행동을 일통시켰으며

 刑以防其姦(형이방기간)  刑벌로써 백성이 사악해지는 것을 막았다

 禮樂刑政 其極一也      예ㆍ악ㆍ형ㆍ정의 궁극목표는 하나다.

 所以同民心(소이동민심)  이른바 백성의 마음을 일치시켜

 而出治道也(이출치도야)  치세가 나오도록 하는 방법(道)이다

 

인평불어(人平不語) 수평불류(水平不流) <오등회원(五灯會元) 卷十八>

인인평등(人人平等)하고 인사(人事)가 공정하면 원망의 말이 없고(不語)

수면이 잔잔하면 물길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요동치지 않는다(不流).

▲ 人人平等 : A cat may look at a king. 고양이도 임금을 만날 수 있다

 

이정치국(以正治國) <노자 57>  바른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다.

정자정야(政者正也) <논어 안연(顔淵) 17>  정치는 바로 잡는 것이다.

자수이정(子帥以正)   그대(子)가 바름(正)으로써 솔선수범(帥)한다면

숙감부정(孰敢不正)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군인막불인(君仁莫不仁)  군주가 仁하면 인하지 않을 사람 없고

군의막불의(君義莫不義)  義로우면 의롭지 않을 사람 없다.

                          <맹자 이루(離婁)下>

군정막부정(君正莫不正)  정직하면 정직하지 않을 사람 없다.

 

정기본 만사리(正其本 萬事理)  <전한(前漢), 동방삭전(東方朔傳)>

正其本 萬事理      근본이 바로서면 만사가 순리대로 이루어지고

失之毫釐 差以千里  털끝만한 차이가 천리나 빗나간다. ▲ 鋏狀

 


도(道)의 계보(系譜) <장자(莊子), 外篇, 지북유(知北遊) 22>


 失道而後德   道를 잃은 뒤에 德이 나오고

 失德而後仁   德을 잃은 뒤에 仁이 나오고

 失仁而後義   仁을 잃은 뒤에 義가 나오고

 失義而後禮  義를 잃은 뒤에 禮가 나온다. <老子 38>

 

도자만물지오(道者萬物之奧) <노자 62> ; 道는 만물이 모여드는 안방과 같다

도지대원출우천(道之大元出于天) 도리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

天不變 道亦不變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전(傳))>

하늘이 불변이면 道 또한 변하지 않는다.

 

대도폐 유인의(大道廢 有仁義) <노자(老子) 18>

천지인天地人이 따라야 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가 없어지니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온다. <노자 38>

지혜출 유대위(智慧出 有大僞) 지혜 다툼이 일어나니 큰 속임수가 나온다.

육친불화유자효(六親不和 有慈孝 육친이 불화하니 孝子慈父가 필요하게 된다

국가혼란유충신(國家昏亂有忠臣) 家國이 혼란해지니 忠臣이 있게 된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上. 진심(盡心)上>

惻隱之心 仁之端也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

羞惡之心 義之端也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마음

辭讓之心 禮之端也   겸손하여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

是非之心 智之端也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

 

禮까지 무너지면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법(法)을 강화한다.

德ㆍ仁ㆍ義ㆍ禮ㆍ(智)ㆍ法 등은 모두

무너진 道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禮와 法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을수록 이상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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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의 본성, 조화 교화 치화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삼신의 본성, 조화 교화 치화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삼신의 본성, 조화 교화 치화란 무엇인가?
일신 즉 삼신
삼신은 근원에 있어서는 하나의 신(一神)이다. 하지만 우주만물의 전체에 깃들어 있어서
그것이 창조변화에 실제로 용사用事할 때에는 세 가지 공능으로 오묘하게 작용하여 자신
의 자취를 드러낸다. 이것이 ‘삼신 즉 일신’의 핵심 의미이며, 곧 삼신일체三神一體 논리의
틀이 된다. 여기에서 ‘삼신’은 각기 세 영역의 손길로 작용하는 신을 뜻하고, ‘일체’는 삼신
의 본체가 ‘전체인 하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삼신은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

그럼 세가지 손길로 작용하는 삼신의 본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해볼 수 있을까? <태
백일사太白逸史>의 기록에 의거하면, 그것은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정신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이 세가지 정신은 천지만물이 창조변화되는 모든 관점을 포섭할 수 있
고 통섭通攝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조화의 정신은 무엇인가?

먼저 조화의 정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화’란 ‘균형이 잡힌 화합(調和)’의 의미가 아니
라 글자 그대로 ‘창조創造’와 ‘변화變化’를 일으키는 정신이다.

창조는 새로움 짓는 정신이요 변화는 내적인 수렴과 외적인 분열을 짓는 정신이다. 창조의
정신은 존재의 정보체계 혹은 존재의 설계도를 담지하여 새로움을 짓는데 작용하고, 변화
의 정신은 그러한 존재의 정보나 설계도를 씨앗에 응축하여 분열을 준비하는 데에 작용한
다. 그래서 조화의 정신은 존재의 출현 및 한정성과 규정성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으로 생겨나 그렇게 규정되고 한정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유기체의 경우에서 조화의 정신은 개별적인 본성을 규정하는 주체가 되며, 외부적으
로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새로움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
다면 조화의 정신은 곧 유기체들이 스스로 진화의 과정으로 돌입할 수 있는 근거로 규정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화의 정신은 만유의 존재에 대한 정보나 설계도를 새롭게 창조하거나 맡아 유지하기도
하며, 형질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세계에는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
이 창조되고 있고, 종의 보존이 유지되거나 그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지구상
에는 조화의 창조정신에 따라 하루에도 동식물과 같은 수백 종의 유기체가 새롭게 창조되
고 있다. 특히 정보의 유지에 따라 무기물과 같은 바위나 돌, 금속이나 화학약품은 물론이
고, 사람은 사람을 낳고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고, 개는 개를 낳아 개로 성장하게 되며, 장
미를 심으면 장미가 나오게 되며, 형질 변화에 따라 종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까닭이 바로
조화의 정신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화의 정신은 창조변화의 주체가 되며, 존재의 규
정성과 한정성의 원리이다.

  교화의 정신은 무엇인가?
증산도 신神관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 창사특집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 창사특집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창사 26주년 특집>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기자명 박장미 기자
입력 2017.10.11 

한국인의 인문정신을 접화군생으로 개신한 신라의 석학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그리운 한국인의 첫 번째 순서로 신라 말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857~?) 선생을 선정했다. 그의 사상과 삶을 그리고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4월 2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이날 좌담회에는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가 참석했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늘은 그리운 한국인 시리즈의 첫 번째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세계를 다니면서 공공하는 철학대화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제기되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세계 여러 곳을 다니시는데,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한국인의 철학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장 특징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했어요. 늘 마음속에 허전한 느낌이 남았고, 철학적 빈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한국인의 철학의 원초적인 모습은 접화군생적 영성의 철학이고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고운 최치원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해왔는데 마침 최영성 교수께서 보내 주신 ‘고운 최치원의 철학사상’(도서출판 문시헌, 2012)을 열심히 읽었고, 많은 시사를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당(唐)나라에 가서 최고의 문물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함몰되지 않고 자기의 사상과 철학을 더 심화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학문하는 자세에서 세계화의 참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라시대에도 그랬지만 우리가 21세기 오늘을 살면서 참다운 사상, 철학, 예술, 문화를 가꿔갈 때 안팎을 두루 살펴 밖에서 얻은 자극으로 안을 깊이하고, 안에서 나타나는 자의식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것을 계속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좋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 최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풍류도를 다시 한 번 우리가 한국사상의 원점으로 재부각 시켜서 이 시대에 갖는 의미와 미래에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치원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과 내일에 그 뜻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최영성 교수님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신라 말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857~?) 선생은 당대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최인연·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 삼최(一代三崔)’로 일컬어집니다. 당대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골품제에 얽매여, 중국 유학을 통해 온축한 경륜과 포부를 펴지 못한 채 시대의 불우(不遇)를 한탄하며 은거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학문할 수 있는 개방적인 풍토와 자율을 중시하는 육두품 집안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남다른 학구적 노력을 기울여 학자로서 대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상사·정치사·문학사 등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상적 경향을 살펴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유자(儒者)로 자처하면서도 불교 및 도가사상에 정통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사상을 한 몸에 체득하였던 천재적인 사상가입니다. 그는 원효와 함께 한국사상사의 서장(序章)을 장식하는 거봉(巨峯)입니다. 그를 문장가로 일컫는 것은 표피만 보는 단순한 평가입니다. 그는 철학자, 더 나아가 사상가-사상 운동가였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나말 여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적·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6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던 대표적인 중국통이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한국과 중국의 친선(親善), 우의(友誼)를 다지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중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라 하대에서 중요한 사상적 동향의 하나로 동인의식의 대두(擡頭)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지식인계층 내부의 의식세계가 투영된 이 동인의식을 크게 부각시키고 고양한 학자는 곧 최치원입니다.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우리 의식’은 바로 최치원 동인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철학사상은 바로 이 동인의식이 핵심이 되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동인의식’은 최치원 사상에 있어 결정(結晶)의 하나라 할 만한 것으로서, 그의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을 짐작하게 하는 관건이기도 합니다. 동인의식은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사상적 밑뿌리를 캐고자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그가 말한 ‘현묘한 풍류도(風流道)’를 지닌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동인의식으로 표출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한 뒤 그에게 있어서는 거의 모든 면(특히 사상·종교면)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여기서 최치원 사상의 핵심과 통일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 서(鸞郞碑序)’에서 화랑의 주요 행동 강령-실천 덕목을 예로 들어 풍류의 실체를 증언했습니다.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여덟 글자는 최치원이 해석한 풍류의 실체입니다. 앞의 것이 체(體: logos)라면 뒤의 것은 용(用: praxis)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입니다. 최치원 선생이 풍류를 ‘현묘지도’라 한 것은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신비적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인식에는 경험론, 합리론, 직관론 세 가지가 있는데, 신비주의는 직관론과 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도설교(天道設敎)’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묘지도’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학들이 고유의 사상과 종교를 범칭(汎稱)하여 ‘고신도(古神道)’라 일컬었던 이면에 이런 내력이 있습니다. ‘신도’ 이외에 적절한 명칭을 얻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고유사상을 비롯한 우리의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이를 선양함으로써 민족주체의식을 드높였습니다. 문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선진문화를 수용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류도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전통을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을 가지고 해석 설명하여, 당시 국제무대인 당나라에게까지 선양하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탐색하여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고유사상인 ‘풍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가치를 부각시키면서도, 풍류를 당시의 보편적 가치 기준으로 해석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은 단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사적 흐름과의 관련선상에서 이해하고, 또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측면에서의 국제화·세계화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화의 보편적 성격에만 함몰돼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망각하거나 외면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진감선사비문’ 첫머리에서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교를 하고 유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고 했습니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인도인·신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출신에 따라 진리와 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국경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성,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진리를 향해 중국이나 인도로 향하는 신라인의 향학열과 진취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위에서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人無異國)’는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의 보편성과 인간 본질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독존적(獨尊的) 경향이 유난히 강했던 당나라에 대해 ‘인무이국’의 논리를 가지고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치원 선생의 ‘주체의식’과 ‘문명의식’은, 신속화·정보화·세계화의 이 시대에, 동서 문명의 보편성 추구와 세계화 지향을 시대적 과제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국제화와 주체의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기도록 합니다. 넓게 열린 마음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가장 ‘민족적’이고 ‘원형적’으로 잘 살려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라고 할 때, ‘뿌리 있는 국제인’이 되기를 염원했던 최치원의 주체적인 사고와 열린 자세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인지 일깨우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인 ‘인간 주체’의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화적 보편성 및 독자성의 문제는 천여 년 뒤인 오늘에서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최치원은 그저 과거 완료형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의 철학사상 역시 단순히 역사상의 정신적 유산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연면히 생동한다고 하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고운 선생을 세계화시대에 맞춰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세계 시민성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 각도에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흔히 한국이 낳은 학자 중에 세계 시민성에 버금가는 이론의 토대는 19세기 해강 최한기 선생이 조민유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생의 세계 시민과 더불어 평화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세계 시민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최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동인의식은 독특성, 개별성, 독자성, 동문의식은 보편성, 세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이 아우러지는 의식구조를 최치원 선생이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동인의식이라고 할 때 ‘동’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경주 최씨의 시조인데 그가 말씀하신 동인의식이 25대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으로 이어진단 말이죠. 동인의식은 주체의식이면서 밝은 광명을 지양하는 의식이고 동시에 그의 영향력은 서학까지 포함하는, 동학적 가치관에도 연결된다고 볼 때 동인 의식에 관해 좀 더 논의해 보는 게 어떨까요. 두 번째는 ‘난랑비 서’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난랑’이라는 것은 장자에 나오는 봉황새처럼 한 화랑이 꿈을 펼치면 천하를 포용하고 날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대단한 기회를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난랑에 담겨 있는 의도가 과연 신라의 화랑에 국한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삼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우리의 원초적 뿌리가 삼랑과 연결된 게 아닐까요. 유불선 또는 도교가 이 땅에 외래종교로 들어왔지만 그 토대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것입니다. 그럼 그 토대의 심연을 우리가 어디까지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풍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 제 마음에 드는 풀이는 ‘풍’을 풍월에 비유한 것입니다. 풍월은 결국 배달입니다. 배달민족이 걸어갈 길. 한민족이 걸어갈 배달의 도로서 풍류도를 얘기했을 때 유불선 그리고 조망이라고 하는 포괄적 토월의 관점에서 환국의 환인에 대한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깊이 있게 보면 어떤 이야기가 깊이 있게 전개될 것인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께서 독특한 자극을 주셨습니다. 한국인의 윤리를 설명할 때 늘 세 가지 포인트를 둡니다. 하나는 합리주의, 정감주의, 영명성입니다. 합리성은 꼭 필요합니다.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대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정감성을 살려낼 지가 고민입니다. 이것은 감성의 상통인데 여기에 대한 독특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을 고운 선생이 한 포함삼교에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영명성은 감성과 이성 중심의 교육에서 한 차원 높은 것이고 다루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영명성을 다루는 교과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21세기 미래에서 이것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포함삼교에서 어떠한 힌트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최치원 선생은 인간존엄 사상에 놀랍게 눈을 뜨신 분입니다.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고 하셨지요. 환국을 강조하는 것과 인존을 강조하는 것이 진감성사비문에 고운 선생이 강조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데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궁금합니다. 이 둘의 연결이 잘된다면 놀라운 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최 교수 “김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모두 논문거리입니다. 미리 좀 말씀드리면 낙랑비 서문은 현재 전하는 것이 76자밖에 안 되거든요. 좀 더 많이 남았다면 좋았겠지만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있죠. 최치원 선생은 동녘-동(東)자를 자주 쓰면서 이 글자만으로 한 편의 철학적인 글을 씁니다. 동은 역시 광명이고, 동은 생명의 시작이다. 방위로 따지면 어질-인 자이고, 모든 변화의 꼭지점이 바로 동이다. 거기서 동은 변화를 나타내 ‘접화군생’의 ‘화’자가 바로 이어지거든요. 최치원 선생은 그냥 생화라 쓰지 않고 나아서 변화하고 변화해서 새로운 생이 되는 생화의 논리를 펴는데 거기에 주목하지 않으면 화자가 안 보입니다. 홍익인간까지 다 하나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보면 최치원이 가진 동의 개념과 확연히 다릅니다. 최치원 선생의 동자에 담긴 철학을 3분의 1만 받아 들였어도 동학의 굉장히 큰 종교적 체계가 정립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쉬운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 조상인 최치원은 큰 틀에서 제시했는데 아주 미미한 부분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최제우 선생이 자기 호까지도 ‘할아버지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라면 나는 물 위에 비친 수운 아니냐’ 하고 지었다는데, 최치원의 사상 체계에 비하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난랑비 서를 말씀하신 것에 동감합니다. 화랑은 576년에 제도화됐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것이죠. 신라에 와서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것뿐입니다. 신라의 교육기관이 왜 이렇게 늦게 세워졌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것입니다. 신라는 이미 대학이 성립되기 이전에 화랑도라는 인재 선발제도가 있어 굳이 국립대를 만들 필요성을 못 느낀 것입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학계서 검증될 문제입니다. 난랑비 서를 쓸 당시는 최치원 선생이 당대 최고 문장가니 영문왕의 능에 세워 놓는 비문이라면 보다 잘 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많이 퍼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분위기들을 반영해서 거기에 담은 것이죠. 단순하게 난랑만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들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삼랑은 삼신이고. 중국이 음과 양으로 나눠보려 한다면 한국은 삼원사상으로 얘기할 수 있고, 우리는 특히 삼원을 중시했고. 환국·천국·인국, 인간 중심, 군주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뭐든 많이 갖춰야 할 것이라고 하니 인간 중심주의의 극치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풍류에 대해서 주로 풍월도라고 하는 것이 그냥 붙은 것이 아닙니다. 풍월이라고 해서 좀 더 개념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풍류에 대해서는 바람-풍(風)자. 바람과 물을 갖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고 들으면 그럴 듯하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제가 최치원 선생 풍류를 연구하다 보니 개념부터 봐야 되겠더라고요. 최치원 선생의 문장 특징이 다 근거를 들이댑니다. 이미 중국에서 풍류라는 말을 썼고, 하나의 사상 체계로서의 풍류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가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다 보니 한 명이 떨어져 나와 유교를 만들고 해서 도교를 만들고 해서 나눠지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저는 틀림없이 거기서 따다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개념으로 바람과 물, 그 중에서 정감성 부분만 빼서 풍류라고 한 것은 한 측면으로 고착화시키는 폐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술 먹고 시 읽고 노래 잘하는 것만 남아 있어 아쉬운 점이 있는데 풍월도라는 명칭도 적지 않게 작동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해석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풍류란 말은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원래 있었던 말인데 끌어다 최치원 선생이 명명한 말에 가깝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사상체계는 천부경에서 얘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흡사한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부경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사상체계가 내려왔고 문자화된 것이 19세기지 그런 사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리고 합리성, 정감성, 영명성에 관해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한 가지만 질문 드리겠습니다. 고운 선생의 ‘동인의식’이란 혹시 서융(西戎)과 대칭된 것, 중국에서 옛날에 멸시했던 동이(東夷)는 현재 중국 동쪽의 고로로 발달한 동이(東夷)문화 아니었습니까? 그 당시 그들은 동이 서융이라고 했잖아요? 공자가 그리워한 주(周)나라는 서융에서 나온 나라이고, 요순(堯舜)은 동이라는 거 아닙니까? 맹자에서조차 순임금은 동이라고 하는데, 고운 선생의 이 동서의 동인, 서인은 동이와 서융과 연관해서 쓴 것이 아닐까요?”

▷최 교수 “그런 게 나옵니다. 최치원 선생은 사람인(人)자를 많이 쓰는데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의 방향입니다. 인방(人方)이라는 방위를 얘기하는 것인데 인자는 어질-인(仁)자와 같은 것이죠. 발음도 같고. 인방이라는 것은 동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산둥반도부터 한반도까지 포함한 개념이 인방이 되고 나중에 동이(東夷)가 됩니다. 최치원 선생은 이미 동이라는 시대에 살아서인지 인방이라고 했어요. 그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유 위원장 “당나라에 유학하신 분이고 그쪽의 사실(史實)에 시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결국 동인이라는 말씀 속에는 적잖이 한민족의 테두리인 동이족과의 관계를 대칭적으로 쓰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최 교수 “최치원 선생이 뭐라고 하셨냐면 그 이면에는 너희들이 중원이고 동방이라고 무시하는데 쉽게 말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선진문명은 동에서 나왔다. 순임금도 동이라고 나온 것인데 어떻게 중화문명을 얘기하느냐. 단순히 동쪽에 있다고 동이라면 말이 되느냐. 반박하는 데서 동자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김 교수 “제가 한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갑골문을 연구했던 분 중 유승국 선생이 광개토대왕 비문 원류를 찾다가 갑골문의 이(夷)-자는 오랑캐-이가 아니라 사람인이라는 것을 밝혔어요. 왜 그러면 동이는 동인인데 왜 오랑캐로 풀이하고 해석했는가? 아마도 중국이 한국적인 변방에 대해 갖던 가치 평가적 개념이 들어가 오랑캐라고 폄하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 주간 “여러분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새삼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 풍류(風流)에 관해서입니다. 최 교수께서는 최치원이 우리의 고유사상을 풍류라고 명명했지만, ‘風流’라는 말은 중국의 고서에 이미 나와 있고, 그것을 차용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헌학적으로 상고하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는 약간 다릅니다. 그것은 저 자신이 한중일을 왕래하면서 한중일의 학자·전문가·학생·정치가·사업가·주부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보고 거기서 걸러진 것입니다. 특히 바람과 관계되는 철학대화를 나누었던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여러 해전의 일입니다만, 아마도 북경에 있는 인민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제는 공공하는 철학을 중국철학-특히 공맹유학-과 비교하는 철학대화였습니다. 한 대학원 학생-스스로 중철 전문의 박사과정 후기생이라고 말했습니다만-의 예리한 질문에서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자께서 아는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는데-그것이 공맹유학의 핵심인데-공공하는 철학을 중국에서 펼치려고 하시는 김 선생님은 물과 산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와서, 저는 물과 산을 똑같이 좋아하지만, 바람을 더 좋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지자-도 아니고, 어진 사람-인자-도 아닐 텐데 어떤 사람입니까? 라는 반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찾는 사람-탐자(探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은 다시 묻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관적(靜觀的)이라는 게 공자의 말씀인데, 김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찾는 사람은 유희(遊戱)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저의 의도는 중국인의 사상―그것이 공자의 것이라고 해도―과는 다른 한국인의 사상의 한 모습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토대학에서 있었던 공공하는 철학대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소위 ‘일본적 영성’에 과한 대화였는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일본적 영성’은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교해서 한국적 영성이라는 게 있느냐? 있다면 어떤 영성이냐고 해서 구태여 말을 해야 한다면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제 역할을 하는 대지적 영성이라기보다는 아니라 천공적 영성-하늘 높이 비상하는 데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라고 대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바람’이란 공기-기-숨(호흡)-혼과 영-생명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그것이 다름 아닌 ‘목숨’이요 ‘이노찌(일본말로 생명인데, 호흡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국어의 ‘싱밍(生命)’도 현대 중국인이 자각하고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저 자신의 개인적인 중국 체험에 의하면, ‘싱(生)’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생명현상이고, ‘밍(命)’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작용하는 천지생물지덕(天地生物之德=천지만물을 낳고 기르는 큰 힘)을 낳고 살리는 대덕(큰 힘)=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물이 가지는 힘이라는 것이-물론 일부이기는 합니다만-중국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노자의 상선(上善如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를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한중일의 공공하는 철학대화의 두 토막 이야기를 말씀드리는가 하면, 여기서 중국의 풍수적 영성과 일본의 풍토적 영성과의 대비에서 한국인의 풍류적 영성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문제관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문제를 종교적 신학적 맥락에서 벗어나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탐구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둘째는 ‘포함삼교’에 관해서입니다. 물론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에서는 유교·불교·도교라는 세 가지 외래종교-사상-과의 연관 속에서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포함삼교’라는 최치원의 네 글자가 갖는 의미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즉응하면서도 그것들을 넘어서는 보다 보편적인 뜻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원대립적 상황을 합일(合一)적 사고로 해결하려는 중국사상이나, 이원대립 이전의 원초적 비대립-무(無)-로 환원시키려는 일본사상과는 달리 이원대립의 대립자 사이에서 함께·더불어·서로 끌어안고 넘어서려는(間越·包越·共越) 한사상의 삼차원 상관 연동적 매월(媒越) 또는 삼차원 횡단(橫斷)매개(媒介)적 개신(開新)을 차이화(差異化)시키려는 것입니다. 거대(巨大)한 중국대륙 국가와 강포(强暴)한 일본 섬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흡수·동화·통합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개성-고유성·자립성·독자성-을 유지·발전·개방시키기 위해서는 ‘사이에서 함께·더불어·서로서로 보익보완하면서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어갈-개신(開新)이 지상과제-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그리고 세 번째는 접화군생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글자의 뜻대로 ‘만나면 바뀌고 바뀌면 온갖 것이 다 살아난다’는 대단히 귀중한 알맹이가 담긴 사상입니다. 몸과 맘과 넋이 잘 어우러지는 만남을 통해서 타자와 자기가 진정으로 생명적 변화=생화를 겪게 되면 거기서 세상의 모든 일들과 것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개신개벽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경험·증험·효험의 과정을 통해서 체득한 바는 한국인의 영성은 접화군생적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적 영성이 일본 땅에서 모든 외래적인 것을 일본화시키는 습합(習合)적 영성과도 다르고, 모든 것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림으로써 어떤 차이나 이질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하면서도 그것은 한없이 높고 관대한 중화문명문화의 감화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문덕감화(文德感化)적 영성과도 판이한 특징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체험·경험·증험·효험의 축적에서 나온 문제 제기적 가설에 불과합니다.”

▷최 교수 “최치원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밝히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사상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삼원화인데 이것이 양극화로 비춰지는 폐단을 구제해야 합니다. 이것을 식자들이 어떻게 풀어야할 지 책무가 막중하고 무겁습니다.”

▷김 교수 “고운 최치원 선생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서 879년 당나라의 황소(黃巢)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작성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혼란기에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고 수용되지 않자, 유랑하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었습니다. 그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삼교를 포함하며 만물을 응접하고 뭇 생명들과 화합하는 이치를 담은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한’의 풍류도가 ‘셋’의 삼교사상을 포함하기에, 풍류도는 폭이 넓고 깊어 현묘한 사상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는 자생적이며 원초적이고 본래적 한국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고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밝히고자 노력했습니다. 풍류도는 ‘고신도(古神道)’로서 한국의 자연종교이자 고대신교(古代神敎)입니다. ‘난랑비서’에서 선사(仙史)와 풍류도를 상관연동으로 결합시켜 신선도의 의미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풍류도는 살아있는 개체생명이 대자연의 우주생명과 호흡을 함께하며 변화하는 이치를 살려낸 생명작용의 도를 말합니다. 나라의 풍류도는 자생적 한국선도이며, 삼교융화의 포함삼교(包含三敎)로서 종합성과 통일성을 나타내기에, ‘한’의 멋과 맛의 모델로서 한국인의 정신사를 관통하는 ‘생생(生生)’의 생성작용으로 표상했습니다. 풍류도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의미를 통해 기원에 있어 단군의 홍익·이화라는 살림살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전통사상입니다. ‘접화군생’은 생명생성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현묘지도입니다. 풍류정신이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으로 충효, 무위자연과 선악교화로서 공공실천을 지향합니다. 한민족의 인식으로 신인으로서의 선(仙)이라는 기조에 지상의 인간세계를 낙토(樂土) 또는 승지(勝地)로 연동하여 동인의 의식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화랑의 풍류는 신라 이전 고조선부터 전해지던 신선전통문화를 계승했습니다. 풍류에는 광명숭배의 신앙이 배어있고, 천신과 조상신을 섬기던 토착신앙 전통을 이어주고 매개합니다. 또한 우주의 진기를 살펴서 천리에 통달하는 신선법술이 이루어지고, 나라를 지키고 공을 세우는 무도의 강건함이 함께 살아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외래문화를 수용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세이화는 치화의 도리, 조화의 도리, 그리고 교화의 도리를 함께 포괄합니다. 밖에서 돌아와서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며,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가르침은 유교의 치화도리입니다. 무위의 일에 처하면서 말하지 않는 가운데 그 가르침을 행하고 순리에 따라 천지만물과 어울리는 가르침은 도가의 조화도리입니다. 그리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봉행하는 것은 중생을 건지려는 불교의 교화도리입니다. 고운 선생은 원리보다 실천행위의 차원에서 유·불·도의 도리의 삼교회통의 이치를 밝힘으로 ‘접화군생’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유·불·도에서 충효·무위·선행의 실천덕목을 서로 매개함으로 풍류도가 추구하는 접화군생의 공공생명 작용이 치화·조화·교화 도리의 삼원적 공공체계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을 치화하고 조화하며 교화하려면 행위주체의 공공성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 화랑은 명산대천에서 심신을 단련하게 되고 학술과 기예를 함께 연마하였습니다. 유가의 치화도리를 함양하면서 수신으로 군자가 되고, 도가의 조화도리를 함양하면서 심신을 허정(虛靜)으로 비우고 정기(精氣)를 바로잡고, 천지만물과 회통하는 신선이 되며, 불가의 교화도리를 함양하면서 하화중생·상구보리를 공공으로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고운이 ‘풍류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다는 언표는 심신수련·심신연마를 통해 국가적으로 리더십을 갖춘 군자가 되고,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진인이 되며, 반야의 지혜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길을 함께 닦는 묘리체득의 과정입니다. 삼보(三寶)의 덕목을 두루 겸한 최고의 화랑이 ‘국선(國仙)’이 됨으로 풍류도(風流徒)의 무리를 능소능대하게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포함삼교 이치로써 접화군생의 인연을 맺고 치화·조화·교화의 공공실천으로 풍류기풍을 국가차원에서 조성하면서, 단군조선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홍익인간·재세이화(弘益人間·在世理化)의 치화·조화·교화의 도리를 ‘한’으로 계승하였습니다. 고운의 풍류도에 나타난 ‘한’의 현묘지도는 공공의 생명작용으로 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운은 유불선이 천도의 부분으로 유도윤리와 불도의 각성과 그리고 선도의 양기는 사람 성품의 자연스러운 품부(稟賦)이자 천도의 고유성으로 동학이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아 이루어진 것으로 말했습니다. 풍류도는 한국고대의 제천의식, 하느님을 모시는 신앙에 모태를 두고 있습니다. 단군풍류도를 신라화랑도가 계승하고 다시 동학시천주로 이어지는 가운데 영부(靈符)와 선약(仙藥)을 공유했습니다.”

▷김 주간 “앞서 유성종 위원장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최 교수의 응답에 관련되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가설적 견해를 말씀드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동(東)은 언제나 개신(開新=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음)의 방향이요 영역이요 지역입니다. 그리고 동은 기본적으로 새벽의 때와 아침의 때로 나뉩니다. 저에게 있어서 한국은 새벽의 나라이고, 일본은 아침의 나라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중국은 대낮의 나라이고 유럽과 그 너머에 있는 미국은 저녁과 밤의 나라입니다. 새벽은 칠흑 같은 한밤중과 산뜻한 아침 사이의 아주 짧고도 아주 긴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생각할 때,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고, 밤은 하루의 끝남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벽은 시작입니까? 끝남입니까? 새벽은 하루의 끝남과 새날의 시작 사이에서 양쪽을 함께 안고 넘어서서 하루의 차원을 갱신하는 찰나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아침이 새 생명의 탄생이고, 대낮이 성장이고, 저녁이 성숙이고, 밤이 사망이라면, 새벽은 또다른 새 생명의 태잉(胎孕)와 태동(胎動)와 태교(胎敎)를 각성케 하는 시기(時機)입니다. 한사상은 접화군생의 영성이 타자와 함께 새 생명·새 사상·새 철학·새 문화를 잉태하고, 그 태동과 태교를 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타자와 자기의 상생과 상화와 공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인간사회 건설의 토대구축에 이바지하는 미래공창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제가 약 20년에 걸쳐서 전 지구적 시각으로 공공하는 철학대화활동을 해온 솔직한 감회를 말씀드린다면, 유럽대륙의 철학에는 합리적 관념론이 두드러지고, 영국인의 철학에서는 감성적 경험론이 우세한 데 비해서, 미국인의 철학에서는 의지적 실험적 행위론이 현저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어떨까요?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중국인의 철학은 합리적 설명이 장황하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인의 철학은 감성적 무상관(無常觀)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生)의 약동보다는 사(死)의 체념이 미화되는 경향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한국인의 철학에서는 생의 약동을 찬미하는 영성적 각성이 중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이원 대립을 그 사이에서 함께 끌어안고 넘어서는 간월적·포월적·공월적 영성철학이 아직 태동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 어떨까라는 것이 솔직한 소견입니다. 이번에 고운 최치원 선생을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기릴 수 있어서,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