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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7

Namgok Lee |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2)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가난과 이런 저런 사상의 편력 그리고 꽤 고생을 하고 살았지만, 그런 고생보다는 생애를 통해 귀한 인연들을 만나고 맺어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느끼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천재성(天才性)이 대단한 젊은 학자들을 만난 것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그 가운데 명상가로 세상에 알려진 박석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몇 년 째 저술을 하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재성이 있는데, 노력까지 치열한 사람이다.
동서(東西)와 종교 철학 문학 회화(繪畵) 음악 건축에 이르기까지를 회통하는 그의 서사가 머리에 가득하다.
너무 광대하다보니까, 그 무게에 눌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사상 인문의 보고(寶庫)에 새로운 창조물을 더해주리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2013년에 보내준 책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다시 읽고 있다.

1 장이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인데, 그 첫 번째 시작인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을 읽고 있다.

어떤 도덕경 해설에서도 만나기 힘든 동서양을 넘나드는 통찰을 읽으며, 감탄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명상가에서 인문운동가로 사회활동가로 삶을 바꾸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노자의 세계를 깊게 들여다보던 중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여름 방학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58년 생이니까, 계산해보니 그의 나이 36세경인 같다)
당시 나는 도가사상, 불교철학, 힌두교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인식주체와 객체를 초월한 궁극의 의식 세계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무기한 단식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49일째 아침에 마침내 내가 원하던 그 세계를 깨치게 되었고 곧 회복식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회복식 사흘째 새벽, 나는 기존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도는 주객과 시공을 초월한 절대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평범한 일상의 현재의식으로 되돌아오는 데 있다는 통찰이었다.
(중략)

새로운 통찰은  나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나는 사실 어릴 적부터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녔고 
명상을 하면서 현실 사회의 역사와 문명과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그 날의 통찰 이후 현실 사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 
뒤늦게 사회과학과 문명사, 동서문화를 공부하기도 하고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민단체 활동도 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내면의 세계만 들여다보다 비로소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 보니 이 시기에 내가 박 교수를 만난 것 같다.

나는 그가 경험한 명상의 세계를 모른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말들이 나에게는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늘부터 이 책을 읽으면서 박 교수의 그 폭 넓은 학문과 명상의 세계에 푹 빠져보려 한다.
특히 문명전환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박 교수의 연구가 무르익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2 comments
이병철
나도 박석교수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어 이태전인가 우리집에도 다녀갔지요. 
그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불어를 공부한지 얼마 안되어 꽤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불어책을 번역하여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언어에도 뛰어난 분이지요. 그의 역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Namgok Lee
· 
박석 교수의 책을 보면서, 메모를 틈틈이 남기려 한다.

원체 속독(速讀)하는 습관이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써보며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이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들께 혹 참고가 된다면 좋을 것 같아서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코드로 문명을 탐구 관찰하는 것은 나선형 순환, 즉 순환과 발전을 포함하는 관점인데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대체로 동의한다는 표현은 어떤 코드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오는 경우 그 코드에 의해 시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

‘문명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서 볼 때, 의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는 가장 핵심적 내용이다.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크게 두 가지 현실적 과제로 압축된다.

하나는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대화 소통 탐구 합의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편의상 ‘연찬(硏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어떤 점에서는 확증편향이 지식 개발의 동력으로 작용해 온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테일러도 전락(轉落) 이후 지식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약(LEAP)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는 분절 과정을 거쳐 무분절의 일체(一體)로 진화하는 것 또한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의식의 도약은 자기중심적 분절과 확신에 찬 탐구과정을 거치고 그 성과들을 포함하며, 자기중심적인 확증편향을 넘어 보편의 세계 무분절의 세계로 의식이 열려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락(轉落) 이전의 무분절과 도약 이후의 무분절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나선형 순환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물질의 소비와 소유를 위주로 하는 물질문명에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한 삶 속에서 정신적 풍요를 향유하는 정신문명으로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함에 대해서 ‘아름다움(美)’에 대한 박석 교수의 표현이 대단히 음미할만하여 적어보고 소개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세련된 소박미(素朴美), 
심오한 단순미(單純美), 
숙성된 평담미(平淡美)라는 표현은

단순히 미학적 관점을 넘어서 
미래 문명의 단순소박한 삶의 내용을 잘 표현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
Namgok Lee 

사람 사이에 합의(合意)가 가능할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각 기관과 입력된 정보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 간에 ‘뜻(意)’을 합(合)할 수 있을까?
실제의 경험을 통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한 말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있다. 자기 또한 타인에겐 지옥이겠지만)
이것은 인간 존재 특히 관념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타협(妥協)’이 있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이 ‘타협’이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분이나 계급, 국적이나 민족, 성별이나 나이 등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사회를 변혁하는 거친 과정들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은 이해관계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 간의 ‘타협’을 넘어 진리(뭐라고 표현하든 관념과 별개의 실재)를 추구하는 상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타협(無妥協)’으로 진리나 진실을 향해 합의(合意)를 도출하려는 지향이 있는 것이다.
무타협(無妥協)은 흔히 말하는 ‘비타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의 비타협은 ‘확증편향’과 겹친다.

때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비타협적 투쟁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과정적인 것이다.
‘무타협’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와는 별개의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과한 상(像 또는 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이다.
그렇게 해서 아집(확증편향)에서 자유롭게 되는 상태로 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가리켜 말한 ‘무의(毋意)’는 바로 이런 ‘무아집’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의(合意)가 불가능하다는 실태를 넘어서, 무타협으로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은 동물 일반의 1차적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지향성(사랑, 자비)과 보합(輔合)한다.
그 둘을 결합한 말이 ‘성(聖)’이다.
보통 사람의 성화(聖化), 사회의 성화(聖化)가 가능할까?
인류 존속이 걸린 위기의 시대에 물어지는 질문이다.

우문(愚問)인가?

박석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이다.
===
4 comments
이병철
'성화'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개인과 사회의 성화,
공부하고 깨어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라 하겠지요.
 · Reply · 4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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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박석 (지은이)  들녘 2014



책소개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_ ‘대교약졸’로 꿰뚫는 동서 인문학 5

1장.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 16
대교약졸, 현묘한 직관 속에 감추어진 논리 41
대교약졸은 화광동진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57

2장. 대교약졸에서 미학의 코드를 읽다
플라톤과는 달리 미에 관심이 없었던 노자 72
나선형적 발전을 보여주는 아름다움들 80
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101

3장.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유교는 과연 종교인가? 학문에 불과한가? 120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135
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164

4장. 복잡한 인도 불교와 단순한 중국 선종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 186
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201
인도 종교와 중국 선종의 깨달음의 미학 224

5장. 철학: 치밀한 지적 탐구와 중후한 실천궁행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240
추상적/논리적 사유와 형상적·직관적 사유 263
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288

6장. 문학: 통일된 플롯의 강렬함, 수렴된 감정의 절제미
서사와 카타르시스, 서정과 잔잔한 울림 322
발산적이고 명료한 표현, 수렴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347

7장. 회화: 농염한 채색미와 담백한 여백미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 기운생동의 산수화 378
원근과 채색의 미학, 선과 여백의 미학 400

8장. 음악: 풍성하고 감미로운 소리, 성기고 그윽한 소리
숫자에서 과학으로, 바람에서 정치로 420
화성법에 금속성 악기, 미분음에 식물성 악기 440

9장. 건축: 돌로 만든 웅장함, 나무로 만든 조화로움
영원을 갈망하는 석조건축, 조화를 꿈꾸는 목조건축 464
정원, 동서양의 미적 안목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공간 493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 512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중국문화 550
새로운 대교약졸을 기대하며 581

나가는 글_ ‘나’를 잘 들여다보고 ‘세상’을 잘 내다보자 599
참고문헌 603
찾아보기 610
===
책속에서

P. 103~104 중국예술은 바로 분산적 통일미를 강조한다. 먼저 회화를 보면 서양회화가 초점투시를 위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는 하나의 시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중국회화는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국회화도 초점투시 위주의 그림들도 있다. 그러나 중국회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는 산수화에선 산점투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산을 밑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각과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산 뒤쪽의 감추어진 그윽함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한 폭의 그림에서 여러 개의 시각이 분산되어 나타나면 시각적 통일미는 분명 찾기가 어렵고,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어우러져 초점투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물에서도 중국은 분산적 통일미를 추구한다.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물, 예컨대 성당이나 궁전들이 대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궁전이나 사원들은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하나로 집중된 건물에 비해 통일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원림건축에서는 각각 분리된 공간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흩어진 각각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통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통일미인 것이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는 반드시 지휘자가 있지만 중국 전통음악의 합주에는 한가운데 서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지휘자가 없다. 각각의 악기들이 지휘자 없이 제각기 놀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 한 명의 지휘자가 수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어가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통일미가 부족한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속에는 조화로움이 있다. 다만 집중적 통일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16~117 사실 과학기술은 선진과 낙후가 있지만, 문화는 절대 객관적인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은 제각각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이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동일한 집단 내에서는 아름다움에도 어느 정도의 보편적인 기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칸트는 미적 판단은 취미판단에 속하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상호 간의 타당성, 즉 공통의 타당성을 가질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집단이 서로 다르다면 장자가 의문을 제기하였듯이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동양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의 영역에서도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근대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의 위력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어 문화 영역의 아름다움이란 영역에서도 그들이 만든 관점을 좇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주체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냥 겉으로 보면 서양은 교, 동양을 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보면 그 졸은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일 수 있다. 굳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성을 외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름다움에는 절대객관적인 기준이나 서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자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려미와 소박미, 다채미와 단순미, 농염미와 평담미, 집중된 통일미와 분산된 통일미, 전경을 부각시키는 아름다움과 배경과의 조화미, 그리고 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서 발산미와 수렴미, 이들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들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76~177 물론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신의 개념은 원래 아주 소박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의 족장시대의 신은 주로 엘로 불렸는데 초월적 개념은 거의 없고 부족의 번영을 약속하는 부족의 수호신 정도의 개념이었다. 족장시대의 유대의 신은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모세를 거치면서 유대의 신은 크게 변모한다. 우선 엘에서 야훼로 그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부족의 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바뀌었고, 거기에다 계약을 통해 유대민족이 약속을 잘 지키면 주변 민족들을 내리치면서 유대민족을 축복을 주다가도 유대민족이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엄격한 신으로 변모한다.
사실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착기의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유대민족은 전쟁을 치를 때는 전쟁의 신을 믿었지만,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뒤에는 농경의 신이었던 바알 신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숭배하던 자신의 민족을 질책하면서 야훼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요하곤 했다. 당시의 유대교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 외에 특별한 고등 철학이나 윤리도 없었다. 사실 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대의 야훼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했다.
기원전 8세기에 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등 윤리와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야훼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바뀌게 된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이 시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야훼는 이전의 가혹하고 무자비하고 희생 제물을 즐기던 모습에서 희생 제물보다는 사회의 정의를 강조하고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 신으로 점차 변모한다. _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접기

P. 226~227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하선사丹霞禪師가 겨울철에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단하선사는 본당으로 달려가서 목불을 들고 와 쪼개어 장작불을 지폈다. 그 절의 승려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발대발하면서 불제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단하선사는 태연하게 부지깽이를 들고는 장작 잿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승려는 의아해하면서 도대체 뭘 하느냐고 물었다. 단하선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승려는 어이가 없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사리도 없는 목불로 불을 땠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그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공안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상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다. _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접기

P. 314~315 서양은 대체로 이원성을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심한 경우에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있어서는 안 되고, 또한 서로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정신의 작용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의 영향을 받아 극심한 가뭄 때에 스스로 근신을 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던 조선시대의 임금의 행위는 정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연과 정신을 더욱 확연히 분리시킴으로써 정신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자연의 특징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즉 신이 인간의 정신에 부여한 이성적인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조되고 아울러 어떠한 정신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자연의 물질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철학자는 인간 이성의 힘을 더욱더 신뢰하고, 과학자는 신학의 간섭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자연에 대한 탐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_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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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석 (지은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학전공 교수

저서: <두보 초기시 역해>(솔출판사, 공저), <동양사상과 명상>(제이앤씨), <대교약졸,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들녘),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역락), <불가능한 누드>(들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들녁),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한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최근작 : <참선 잘하그래이>,<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하루 5분의 멈춤>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문화사 전체를 하나의 코드로 꿰뚫다
그리스로마?춘추전국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문화와 인문의 시공간을 탐사하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는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그것은 저자가 학자인 동시에 명상가로서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며 겪었던 다양한 종교적 체험들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사유체계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이 책만의 개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의 차이가 문학에서, 그리고 회화, 음악, 건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천 년에 걸친 서양과 동양의 문화사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그 전체적인 흐름을 압축해서 소개하고 서세동점 이후의 동양문화가 나아갈 바를 모색한다.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지만 ‘대교약졸’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현미경으로 분석하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특징이 손에 잡힐 듯 일목요연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무겁고 딱딱한 인문학적 용어를 지양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안내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동서양 문화의 깊고 풍부한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놀라운 인문학 코드, 수렴과 발산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인문학적·문화적 호기심과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예수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였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는 범속한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았을까? 왜 서양철학은 논리와 분석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철학은 직관과 통찰을 좋아할까? 왜 서양사람들은 확실한 이분법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사람들은 두루뭉술하게 하나로 보기를 좋아할까? 서양문학에서는 서사성을 중시하는 소설과 희곡이 크게 발달한 반면 동양문학은 서정성을 중시하는 운문이 주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회화에는 누드가 넘쳐나는데, 왜 동양회화에서는 누드가 없을까? 서양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왜 동양회에서는 수묵과 여백의 미를 더욱 중시할까? 서양음악은 화성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왜 동양음악은 화성법이나 대위법이 없는 것일까? 서양음악에는 지휘자가 필요한데 왜 동양음악에는 지휘자가 없을까? 서양 고전건축물은 왜 하나같이 주재료가 돌이고, 동양의 건축물은 나무일까?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위와 같은 의문을 지녀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의문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 관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별다른 뾰쪽한 답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위의 모든 질문들이 사실은 하나의 미학적 코드에서 나온 것에 놀라게 된다. 그 코드는 바로 발산과 수렴의 미학이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대교약졸에 들어 있는 논리와 미학을 탐색하면서 여러 가지 아름다움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발산과 수렴으로 나눈다. 그리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이 발산과 수렴의 코드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의 영역을 탐색하면서 그 차이점들을 하나씩 풀어간다. 한 절씩,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어 보이던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이 점차 하나로 꿰뚫어져 일목요연하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인문학적·문화적 궁금증과 호기심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10장에서는 거대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동서양 문명의 흐름을 탐사한다. 각 문화 영역에서 입체적인 비교와 분석을 통해 정리된 동서양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은 문명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차원 더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동아시아 문화의 현황은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 통찰들을 차분히 체화시켜 자신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도 적용해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내다보는 데 활용해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 책은 잘 일깨워준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숙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그림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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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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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인문학책이 범람하는 요즘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제목을 보고 흥미로와 주저없이 구입해 읽었다. 인문학 전반에 대한 개론이 아닌 저자의 30년넘는 치열한 수행후에 깨친 깨달음을 바탕으로 `대교약졸` 한마디로 동서양의 모든 분야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 놀랍다.  구매
산야 2013-11-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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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wow !!!

두꺼운 페이지에 망설이고 있다면 기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물 흐르듯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동서양의 철학, 역사, 건축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엄청난 학식에 감탄하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에 두 번 감탄한다. 특히 1장의 노자의 도덕경 부분에선 무릎을 칠만큼 놀라운 '새로운 도덕경'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접해본 인문학도서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icepray 2013-12-22 공감(2) 댓글(0)


2021/11/05

Namgok Lee 2011 제2기 지리산 정치학교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교체에 대한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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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t11470caan0ihm1re2cf18  · 
이 달 19~21일 2박 3일 일정으로 제2기 지리산 정치학교가 실상사에서 열린다.

‘문명전환의 정치’를 대주제로 서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지난 8월 시작하여 우선 3년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주로 청년(10대에서 40대)들이 주체로 참여하고 있고, 나는 노령 세대로서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거들고 있다.
문득 ‘문명전환의 정치’를 생각하다보니, 저 축(軸)의 시대에 이미 그것을 시도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석가, 노자, 예수, 공자가 바로 그들이다.

공자는 다른 세 분과는 결이 다른 길을 갔지만, 어떤 점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실제로 실천하면서 근본적인 문명전환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생각한다.
석가나 노자나 예수는 정치에 무관한 성(聖)을 지향한 분들이 아니라, 현실정치를 뛰어넘어 문명을 전환하는 큰 정치를 상상한 사람들이다.

석가의 설화에 부처(佛)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갈림길에서 부처의 길을 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보다 근원적인 문명전환의 정치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1세기 물질과 제도 면에서는 2500여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후위기나 팬데믹 등 생태적 재앙 앞에서 인류의 존속이 물어지는 기로에 서 있다.
추락할 것인가? 도약할 것인가?
기술적 대응이나 임기응변으로는 추락의 길을 벗어나기 힘들다.
‘문명전환’을 통한 도약을 시도해야 한다.

굉장히 어려워보이지만,  25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선각자들의 길을 보다 좋아진 물질적 제도적 환경 속에서 현실화하고 보편화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문명전환’과 ‘현실정치’를 결합하는 것이 위기를 통해 시대적 요구로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2차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나라지만, 심각한 문화지체(文化遲滯) 현상 속에서 정치적 심리적 혼돈이라는 이중의 위기를 만나고 있다.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교체에 대한 요구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 서사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다방면에서 다원적으로 힘과 지혜들이 모여 그 주체와 동력을 만들어가고, 그것이 문명전환으로 이어지는 물꼬를 터가야 한다.
지리산 정치학교는 여러모로 미약하지만, 그 흐름에 나름의 특성으로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모인 곳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다음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는 21세기형 선진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경구가 떠오른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2021/10/26

Namgok Lee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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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tSph1d8 ·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제패하던 격변기에 우리 공동체가 꿈꾸었던 ‘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이 이상을 음미해 본다.

첫째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총수요를 넘어서는 총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물질 개벽이다.
이것을 가능케한 것이 자본주의였고, 그 동력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해방된 개인의 이익과 경쟁이었다.
지금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사회안전망의 획기적 구축방안도 튼튼한 물적 토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건강성과 효율성의 조화야말로 물적 토대를 튼튼하게 하는 기초다.
실물경제의 흐름이 갖는 자본주의 시장의 복합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의를 구현한다고 국가가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자칫 시장의 자율성과 활력을 떨어트려 어렵게 구축한 물적 토대를 허물어트릴 위험이 있다.
환상을 부추기며 실제로는 권력쟁취를 위한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이유다.

둘째는 주고 싶은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
총체적 물량은 풍부해졌지만 자기중심적인 탐욕이 수그러들지 않으면,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해지고 생태계의 조화를 깨트림으로서 생태적 재앙에 직면하는 위기를 낳는다.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익과 경쟁을 넘어, ‘자아실현과 우애’라는 동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물질적 토대를 튼튼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바탕에서 
주고 싶은 마음 즉 박시(博施) 보시(布施) 홍익(弘益)의 마음이 커지고 
소비 위주의 물질문명에서 단순소박한 삶의 풍요를 즐기는 정신문명으로 전환하는 것 만이 위기를 벗어나 인류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길로 보인다.
이것은 법규나 윤리도덕규범으로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남는 부분을 풀어놓는 것이 기쁨으로 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개벽이다.

셋째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이 어울려 제도화됨으로서 사회의 성화(聖化)가 완성되는 것이다.
주는 것(풀어놓음)의 순환 과정에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선물(膳物)의 사회가 보편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평화적이고 무리 없이 넘어서는 것이다.
국경이나 소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져갈 것이다.
이것이 제도 개벽이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혼돈과 위기의 시대일수록 어둠의 악순환에 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밝은 이상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북극성(北極星) 삼아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유장(悠長)한 꿈을 실현하는 첫 단추로 반드시 통과해야할 관문이 있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여야를 막론한 정경유착의 이권카르텔과 독점 그리고 위선과 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 개혁주체의 정치‧도덕적 권위가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대선 과정의 치열함 속에서 치부(恥部)와 환부(患部)가 들어나는 것은 하나의 기회로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장점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갖는 개혁 세력이 새 정부를 구성함으로서 새로운 문명의 물꼬를 틀 수 있도록 국민이 집단지성을 발휘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심정이다.

2021/10/20

Namgok Lee THE LEAP(보통의 깨달음)을 보며 저자와 다른 느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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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 h  · 
THE LEAP (보통의 깨달음)을 보며 저자와 다른 느낌들.
스티브 테일러

저자; 유년기와 깨어남 상태를 같다고 여기고 영적 계발이란 사실 유년기의 회복이라고 보는 전통들에 대해 지지하는 경향.
그 예로 도덕경과 예수의 말을 든다.

나; 저자가 소개하는 캔윌버의 견해.
'초개인적인 영적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에고가  계발되어야.
분리된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 분리를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안개 같은 무의식적 경험들 속에 빠져서 단순한 탈분화(☆영어 원문을 안보아서 모르겠지만 '탈분화'보다는 '미분화'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를 겪고 있는지 모른다'

내 경험과 감각으로는 캔 윌버의 견해에 더 가깝다.
어린 아이의 상태를 너무 이상화하는 것은 마치 원시 상태의 인류를 이상화해서 에고가 발생하는 인류사의 전개를 '전락'으로 보는 것과 같다.
(물론 저자도 단순한 원시 상태로의 회복을 THE LEAP로 보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노자도 '대교약졸' 등의 표현을 통해 단순한 회귀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인류 역사 속에서 인류의 깨어남은 억압되었던 에고(욕망ㆍ분절된 개아)를 해방하는 과정(자본주의ㆍ개인중심 민주주의)을 거쳐 그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감각이다.

그런 도약을 위한 물적 토대와 노골적인 억압ㆍ착취가 사라지는(개인의 에고가 충분히 발휘되는)제도적 뒷밭침이 이런 도약을 가능케 한다.
그럼에도 에고의 관성이 너무 강해 탐욕이나 권력욕 등이 엄청난 물질 개벽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변치 않는 심각한 문화지체를 겪고 있고, 인류의 위기(생태적 재앙)로 나타나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망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의  자유욕구가 인간의식의 보편적 도약을 가능케 하리라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솔직히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3,000년전의 주역이 지금의 인간의 심리나 행동을 해석하는데 유효한 것이 어쩌면 이런 문화지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주역 등이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것과 무관하게 되는 상태, 그것이 '도약'  혹은 '전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탐욕과 권력추구의 복마전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터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약(전환)의 길과 추락(쇠퇴)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도 포함되어 있는 우리 자신이다.
흔히 집단지성이라는 말도 하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하지만, 직선 코스가 아닌 거칠고 험한 과정을 거친다.
더 늦기 전에 집단적 깨어남의 '도약'을 보고 싶다.(아마도 내 생전에는 못보겠지만)
 인류는 생존에 실패한 종으로  기록될지 모르지만 지구나 우주는 그의 역사를 계속할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에 비하면 흔한 일이다.
이 책을 보면서 요즘 여러 현상들이 떠올라 두서없지만 하고 싶어지는 '머릿 속의 수다'다.

1 comment
백호현
거친과정이 깨어남의 도약을 위한 수순이라면
기다림이 해답일텐데~
작금의 우리사회의 추악한 복마전에
흔들리는 민심들을 보며
과연 민심이 천심이란것이 ~가당한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이끌고가는 어리석은 다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이러한 민심이 천심이란 의미에 가당한지
궁금합니다

2021/10/14

Namgok Lee ‘대장동’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9) Facebook
Namgok Lee
9 October 2021  · 

이 글은 오늘 새벽에 페북에 올렸다가 삭제한 글인데, 다시 올린다.
삭제할 때 들었던 생각은 이 글이 길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이런 글이 지금의 우리 정세와 상황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과제를 흐리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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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10여년은 우리가 털고 가야할 과제들을 대단히 거친 방식(중도의 길은 거칠고 험하다), 비이성적으로 편갈라 싸우는 우려스러운 외형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난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의 그늘에서 자라난 암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그 방아쇠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장동’이 그 방아쇠다. 반드시 제대로 털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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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시 올리는 이유는 새로운 정치와 문명을 이루어가는 주류의 철학이 뒷받침될 때라야 그 동안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자유와 다원성에 바탕을 둔 국민적 통합‘과 ’인류적 위기를 넘어서는 문명 전환‘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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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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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분절Ⅰ→무분절→분절Ⅱ에 대한 견해다.

깨달음의 세계나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야기할 때는 무분절이나 분절Ⅱ를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현실 문제에 부딪치면 분절Ⅰ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지금 우리는 분절Ⅰ의 격렬한 쟁투 속에 있다.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낸다.
한 편에서는 ‘사랑’과 ‘관용’을 이야기하다가도 어떤 현실과 만나면 ‘증오’와 ‘타도’의 잇빨을 들어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관념이나 그런 관념 안에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대할 때 ‘역지사지’하고 ‘구동존이’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내가 일관되게 제안하는 ‘합작’이나 ‘연합’은 분절Ⅱ의 세계로 나온 주체들 간에 이루어질 때라야 진실한 것이 된다.
깨달음의 세계처럼 엄정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세계는 ‘무분절의 세계’라는 이해 정도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그 상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인정만이라도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 오고, 자신의 삶과 사회적 실천도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격렬한 분절Ⅰ의 쟁투를 통해서 적어도 이런 진화라도 있어야 ‘헛고생’이나 ‘후퇴’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 자신도 다시 볼 겸, 옛 글을 공유한다.
좀 길지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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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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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
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
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

2021/10/13

Namgok Lee 스티브 테일러의 ‘THE LEAP (보통의 깨달음)

 Namgok Lee  스티브 테일러의 ‘THE LEAP (보통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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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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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인적인 사정과 여러 가지로 마음 쓰이는 일들 때문에 스티브 테일러의 ‘THE LEAP(보통의 깨달음)’를 읽는데 집중하지 못했다.

여러 면에서 내가 생각해온 방향과 일치를 느끼는 기쁨도 컸지만, 이사(移徙)와 함께 나에게 맞는 명상(冥想)을 생활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 생각을 더 강하게 해주어서 이 책을 선물해주신 도법 스님께 감사한다.
가능하면 요가도 해보고 싶다.(몸이 굳어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章) 끝 부분을 옮겨본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겠지만, 희망을 위하여 같이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 기본적으로 분리와 부조화를 조장하는 ‘전락(轉落)’한 정신은 수천년 동안 세상에 점점 더 큰 갈등과 혼돈을 불러왔으며, 이제 분명 그 과정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 과정이 혼돈과 격변의 종말로 치달을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부를지는 현재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제때 집단적 변형을 이루어내어 하나의 종(種)으로서 생존한다면, 그때 세상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 테다. 
지난 수천년 동안 수많은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낳았던, 수면 상태(*전락하여 미혹(에고)이 지배하는 상태를 말함)의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이 깨어남의 밝은 새 세상에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인류는 만연한 물질주의, 권력욕, 집단정체성, 전쟁, 억압을 초월할 것이다. 

인류는 밝게 빛나는 새 세상을 보고 내면의 행복, 온전함, 모든 존재로 향한 감정이입, 인류애, 자연 세상⸝온 우주로 향한 연결성을 느낄 것이고, 내외적으로 평화롭게 될 것이다. 갈등과 고통이 만연했던 악몽(惡夢)에서 마침내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안도하며 조화와 편안함의 새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 세상이 환영(幻影)이 아니라 사실은 환영에서 벗어난 것이고, 더 깊고 진실한 실체를 깨달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가 생존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구는 결국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진화의 길에 역행(逆行)은 없다. 단지 일시적으로 느려지고 답답해질 수는 있다. 
결국 깨어나 확장성과 명료함을 경험할 새 생명체가 탄생할 것이다. 
진화는 심지어 그 너머로까지 나아갈 것이고, 그 때 얼마나 더 강력하고 확장적인 지각 능력이 생겨날지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다만 바로 지금 집단적 깨어남이 임박했으므로, 조금만 노력하면 이 과정의 전모가 드러나고 도약(LEAP)이 완수될 거라 확신할 수는 있다. 그 근거는 도처에 널려 있다.>



Namgok Lee
t4hSponsr2e  · 

얼마 전에 '개벽'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줄 수 있는 것이 있고(물질개벽),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정신개벽), 주는 것만으로 성립하는 사회(제도개벽)'
 인류가 '전락'하기 전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약(THE LEAP)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넘어 한 단계 더 높이 진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압축적인 표현으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내가 요즘 보고 있는 책 'THE LEAP(보통의 깨달음으로 번역, 나같으면 깨달음의 보편화라고 할 듯)'는 정신개벽의 여러 경로를 밝히고 있다.

종교적 영성과 과학적 합리가 잘 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물질개벽'을 이룩한 것은 자본주의이고, 
그 동력은 전락으로 표현한 
에고(분절1의 자기중심성)의 해방된 욕망과 경쟁이다.

그러나 이 에고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모순과 생태적 재앙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념에 오래 동안 이른바 물질개벽의 동력으로 작동해온 자기중심성(에고)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선조들은 '정신개벽'이라고 불렀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물질적 토대와 노골적 억압과 착취를 벗어난 민주주의의 토대가 이 정신개벽의 보편화를 가능케 하고 있다.(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실사구시라고 생각한다)
이 정신개벽의 핵심은 '주고 싶은 마음'이다.

당위나 의무가 아니라 기쁨(하고 싶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도덕이다.

표층의식은 진보나 개혁을 표방하지만 심층의식은 탐욕이나 권력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위선으로는 진보나 개혁을 근원적으로 이룩할 수 없다.
환상에 불과하다.
이 환상을 벗어나는  보편적인 정신개벽이 동력으로 되어 마침내 제도개벽을 이룩할 수 있다.
이것이 인류의 '도약THE LEAP'이다.

도약에 실패하면 인류는 생존에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구는 다시 회복될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가 이 이상을 향해 계속 진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스티브 테일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중의 위기, 인류의 생태적 재앙과 나라의 정치적 혼돈을 넘어서기 위한 근원적 바탕과 전망을 생각케 하는 책이다.

한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절실한 이야기.[다른 맥락?]

독후감의 일단을 적는다.
===

2021/09/15

Kang-nam Oh 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종교 없는 삶] 필 주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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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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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종교화 시대의 종교

오강남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 명예교수)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탈종교화 현상이다. 이른바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전체적으로 전통 종교와 상관없이 사는 탈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탈종교가 현재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현상인 셈이다.
종교 인구가 미미한 유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종교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했겠는가?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특히 10대에서 40대의 젊은 층,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탈종교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보고다.

왜 이런 탈종교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현대인들이 기복이나 상벌을 기본 전제로 하는 종교에 더 이상 매료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도 최근에 낸 <종교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극락이나 천국, 지옥으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종교는 이제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종교가 완전히 무용지물인가? 종교사회학자 뒤르켐(Durkheim)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사회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은 그의 책 <거대한 신들(Big Gods)>에서 한때 종교를 필요로 하는 시대,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렵시대 이후 점점 인지가 발달되면서 사회관계를 넓혀 가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인간들의 행동거지를 감시하는 거대한 감시자(Watcher)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신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이런 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나 사람들이 있다. 그런 믿음이 인간 사회가 오늘의 수준에 올라오기까지 일종의 사다리 역할을 했지만 이제 상당 수 앞서 가는 나라에서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 없는 사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미국의 기독교 설교자들에 의하면 종교 없는 사회, 신을 믿지 않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혼돈과 무질서, 범죄가 창궐하는 흑암의 사회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낸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안식년을 맞아 덴마크에 가서 1년여를 지나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범죄율이나 부패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신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들일 수록 번영과 평등, 자유, 민주주의, 여권, 인권, 교육 정도, 범죄 율, 기대수명 등에서 그만큼 덜 건강하다는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신을 가장 많이 믿는 이른바 바이블 벨트에 위치한 중남부 주들이 교육 수준이나 범죄율 등 여러 면에서 신을 가장 덜 믿는 서부와 동북부 주들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고 한다.
영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신의 역사>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미국이 유럽 국가들보다 도덕적으로 낙후한 것은 미국에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다.

주커먼은 전통적으로 받들어 오던 신을 믿고 종교적으로 열렬하게 살 때의 부작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의 주장을 보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칭 열렬하다는 근본주의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 한번 받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자연히 보수적이 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모든 것을 흑백·선악 등 이분법적으로 보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지금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는 몇몇 종교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일부 종교인들을 보라.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현 사회에서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이런 배타주의적 정신으로서는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종교 없이 산다고 허무하게 살아야 하는가? 주커먼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실증적 자료를 통해 명확히 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야, 신이 없어야’ 잘 산다는 것이다.
 
숨 막힐 정도의 전통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면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봄에 솟아나는 들풀 한포기, 바람에 나부끼는 잎 새 하나를 보고도 경이로움과 놀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부터 광대한 우주의 ‘경이로운 신비(awesome mysteries)’를 하나하나 발견하며 외경과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아하!(aha!)’의 연속이다. 이렇게 종교를 넘어서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사는 삶의 태도를 저자는 ‘외경주의(aweism)’라고, 그리고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을 ‘경외주의자(aweist)’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에 절실한 ‘종교 아닌 종교’라는 것이다.








283Namgok Lee, 박길수 and 2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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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범

개인적인 이해로는 탈종교화라는 표현 자체에 공감하는데, 그 의미로는 그 종교의 본질을 알고 완전히 겪어 드디어 벗어나는 것과 그것을 모르는채 감정적으로나 사회적 현상으로, 일종에 종교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은 개념으로는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탈종교화는 사실 그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 종교를 알만큼 알아 그야말로 졸업하는 것같은 의미여야 한다는 이해구요. 그러기에 부정적이긴 하지만 오늘의 그런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들도 그런면에서는 일종에 반면교사가 된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곧 종교의 폐해같은 경우로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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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욱

탈종교 사회는 괜찮은데 반종교 사회가 되면 위험할지도 ...
저는 평소 종교모임과 종교조직을 구분하는데,
전자는 아직 필요성을 긍정하는 편이고 후자는 부정하는 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종교적 모임과 종교적 조직이 다른 영향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또 일상적 대화에서 종교의 가르침, 가르침에서 파생된 교리, 교리에서 파생된 문화, 그 종교문화에서 파생된 특정 사회문화가 구분없이 너무 혼합되어 사용되는게 아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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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eop Kim

탈종교적 윤리(secular ethics)는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온 영역에서의 윤리성 회복을 의미한다면 A. 카이퍼의 영역주권과는 연계될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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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금선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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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n Soo Park

종교를 등에업고 자행되는 악행들,,,, 우리나라는 유래없이 1년 365일을 종교로 시작해서 종교로 끝을 맺습니다. 신년기도회~~송구영신예배, 그리고 매일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토요예배, 주일예배, 각종 성서세미나, 계절마다 부흥회,,, 종교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 사회는 우리를 “개독교”라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입니까? 탈종교화라는 말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죠. 교회에서 종교에 파묻혀 예배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며 “주여주여” 불러보지만 이 말씀이 대답을 합니다. 진작 우리나라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자면서 남북이 만난 2018년 4월27 눈물나는(개인적으로 눈물이 핑돌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그 주 4월 29일 예배때 담임목사 설교에서 일언반구가 없다. 통일기도회는 열자면서 이런일에는 성도들의 관심과 애정을 그리고 소원을 함께 해야하는데... 동감은 아니더라도 공감이라도 해야하는데...
종교는 공감을 뛰어넘어 동감으로 가야하는데 공감조차 없으니 누군들 종교를 갖고 싶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탈종교화 된 서구 몇 몇 나라들이 더 따뜻하고 서로서로 돕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당연히 탈종교화가 가속화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해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를 갖지않는다고 종교가 없는것인가?
믿는 자, 믿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잣대가 종교의 유무로 판단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참 이웃의 비유도 있지않은가?
탈종교화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보다 종교생활(행함)이 되어야하고 신앙이 좋아보이는 것보다 신앙생활(행함)을 함으로써 탈종교화로 진짜 예수님의 성품 본질로 돌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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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호

아쉽게도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되고말았습니다 이땅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을 하늘로 되돌려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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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Jeong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로 Aweist, Aweism 이라는 새 단어 (나에겐) 를 만났습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숨을 쉬고, 신진대사를 포함한 모든 몸의일을 미묘하게 진행하고있는 나의 몸둥이를 내려다 보면 "신비" 하지 않을수 없지요. 선악의 구별보다는 우리 자체가 "Awesome!!! " 하다고 인지 (Awareness) 한다면....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는게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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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Sung Lee

종교없는 삶이 제일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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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Sung Lee

박진수! 오랜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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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kol Yu

거의 문맹이신 나의 할머님은 정규 교육을 받으신 적도 없으시고 절에도 다니시지 않으셨다.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베프시고 가난한 친척에게 도움을 주셨다.부엌뒤에 나무밑에 정화수 떠놓고 비시는것이 그분의 유일한 종교 활동이었다..그분에게는 스님도 목사도 절도 교회당도 경전도 필요치 않았다.그리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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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hee Yoon

오늘 아침에 종교와 신,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주신 양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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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eun Park

‘경외주의자(aweist)’ 라는 말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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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종희

신존재의 유무문제보다. 신의 계시ㅡ복음에 대한 해석과 태도가 문제가되어야 할것 같습니다.샬롬
복음=Evangelism(예수 천당) 일변도에서
복음=Missio Dei(J.P.IC)로의 파라다임 전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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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기

탈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14살 중이처럼 피해의식에서 반항과 교만이 싹트는것 아닌가 사람은 자연과 순리에 순복 해야한다고 생각 합니다 오로지 주의 은혜로 잘 살았다 함이 없다면 평안이 올까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살아기자고합니다

2021/08/21

Namgok Lee ‘왜 선한 지식인들이 나쁜 정치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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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들이 나쁜 정치를 할까?'

조선 선조 때 15년간의 당쟁을 분석한 책 제목입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나라가 망했습니다.
지금 비슷한 질문이 오랜 세월을 지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정의와 공정이라는 똑같은 말을 주구장창 외치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죽기 살기로 싸울까?'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나 집단이 자신들은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고 싸우는 정치문화를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염불(정의와 공정)보다 잿밥(이익과 권력)에 맘이 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정치의 주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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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는 2차대전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밑천을 장만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그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후진적인 정치문화입니다.
낡은 세력들이 차례로 붕괴하고 있지만, 이것을 대체할 새로운 주체가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편가름으로 나라가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분열과 대립의 와중에 있습니다. 거기다가 팬데믹현상이나 기후 변화로 실감하고 있는 지구생태계의 절박한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이중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은 그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우리 공동체가 간직해온 비원(悲願)이자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위대한 꿈입니다.
열린 마음의 광장에서 대화와 연찬을 통해 지금까지 단정과 확신으로 서로 대립하던 견해들이 실사구시의 자세로 같음을 찾고 다름을 존중하면서 합의를 도출해가는 신선한 경험의 공유야말로 새로운 정치문화를 위한 귀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나아가 시대에 맞는 정치제도의 창조를 통해 ‘문명 전환’이라는 인류 공통의 과제를 선도적으로 풀어나가는 동력의 작은 부분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지리산 연찬을 해오면서 이런 시대의 요청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심정에서 '지리산 정치학교'를 우선 3년 정도 실험을 해보자는데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다음의 후원 취지문을 보시고, 동의하시는 분들께 월 만원 3년간 정기후원을 간곡한 심정으로 부탁드립니다.
2021. 8. 9. 이남곡 올림
♠지리산정치학교♠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당신이 느끼는 것처럼, 지구생명공동체는 위기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것처럼, 삶-사회의 전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것처럼, 또 다른 정치가 절실합니다.
문명전환과 정치를 연결합니다. 지리산 생명숲과 정치를 연결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납니다.
사실은 이미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연결은 항상 ‘재-연결’입니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합니다.
새로운 판 열린 미래,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리산정치학교의 시간은 3년입니다. 3년이면 충분합니다.
꿈꾸는 3년일 수도 있고, 실험하는 3년일 수도 있습니다. 산고(産苦)의 3년일 수도 있고, 전환의 3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즐겁게 몸짓하는 3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3년의 마음과 몸짓과 부딪침이 30년, 아니 300년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님들의 지지와 격려와 적극적인 성원으로 함께 꿈을 이룹시다.
남곡, 여류, 도법 모심
.......................................
♠후원 방법 안내♠
1. 조금은 불편하지만, 지리산정치학교는 CMS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2. 2024년 12월까지 매월 일정액을 자동이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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