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최준식.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최준식. Show all posts

2023/09/13

박정미 - 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박정미 - 바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미래를 묻고싶은... | Facebook
20230913

박정미
  · 
바람부는 날에는 예언이 그리워진다

삶이 기로에 서있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때 미래를 묻고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젊어서 뒤늦게 시작한 고시공부가 힘겨워졌을 때 친구 손에 이끌려 처음 철학관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생년월일을 넣고 사주를 대여섯번은 본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시험에는 떨어지고 결혼에는 성공했으니(내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미혼인 친구들이 많다) 굵직굵직한 것은 대부분 들어맞은 것 같다.

 하지만 이따금 그 사주쟁이 아저씨들 생각이 나면 꼬리를 무는 다른 의문이 떠오르곤 한다.
사주풀이가 맞았다면 팔자대로 내 운명이 흘러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기질이 말과 미래 예언에 대한 피암시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언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은 현실에 중립적인 쪽일까, 아니면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젊어서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비결서와 예언서도 뒤적여보곤 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봉우선생,  육관도사 , 증산교, 탄허스님의 관련서였다. 그들의 예언은 대부분 비스무레한 이야기였는데 김지하의 책을 읽다가 루돌프슈타이너까지 같은 말을 했다고 나와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알라딘: 예언 - 종교사상가들이 예언한 한국의 미래와 사명 최준식 2020

알라딘: 예언
예언 - 종교사상가들이 예언한 한국의 미래와 사명 
최준식 (지은이)
주류성2020-06-01

































미리보기

정가
18,000원
284쪽

“소태산이 밝혀놓은 ‘예언’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 202007 원불교신문

[사람꽃, 피다] “소태산이 밝혀놓은 ‘예언’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 사람꽃, 피다 < 인물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사람꽃, 피다] “소태산이 밝혀놓은 ‘예언’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기자명 이여원 기자
입력 2020.07.08
===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한국은 어떤 소명을 갖고 있는 나라’임을 말하는 이가 있다. 만일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우선 해야 할 일은 이 소명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소명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그가 최근 한 권의 책 예언을 내놓았다. 코로나19로 거리도, 공간도, 사람도 거리를 두게 하는 어느 오후, 그를 만났다. 세계의 모든 것을 바꾸는 뜻밖의 사태, 그의 예언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화는 그의 책 예언에 비중이 실렸다.



『예언』은 영능력자들이 바라본 한국의 미래가 그 주제다. ‘매우 기이한 주제를 다룬 책’이라고 언급했는데,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다면
 
한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나는 전부터 한국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한국은 그 미래가 궁금한 나라이지 않을까.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전 세계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나라가 지금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있다. 남북 대치 상황으로 북한 핵 위협을 위시해, 세계의 최 강대국 사이에서 난처한 상황에 있다. 그런 한국이 과연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것이다. 영능력자들의 예언을 통해 한국의 미래를 바라본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기운이 현재 어떠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영능력자들의 예언을 통해 분석했다. ‘영능력자’를 출중한 종교가, 영적인 존재라고 부언했는데, 영능력자를 선정한 기준이 궁금하다
일반인인 우리는 보다 정확한 예언을 고르기 위해 두 가지 관점을 유념하고 접근해야 한다. 영능력자를 선정하는 기준 하나는 그가 얼마나 사심 없이 살았고, 도덕심이 강하며, 사상이나 영성이 높은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공적인 이익을 위해 살았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중하게 선정한 영능력자들도 실수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또 예언을 했을 당시와 현재의 기운이 많이 달라져 예언이 어긋날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어떤 영능력자들의 주장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영능력자들의 경지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면 평가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성의 칼날로 영능력자들이 하는 예언을 분석해야 한다. 그들이 하는 주장에 내적인 모순이나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때에는 어떤 자비나 관용도 베풀면 안 된다. 아주 꼼꼼하게 그의 언행을 검사해야 한다.


예언들의 신뢰도에 따라 등급을 나눴다. 영화를 5점으로 품평하듯 영능력자들의 예언들에 점수를 매겼는데, 이렇게 등급을 표시하는 이유가 있다면 예언들의 신뢰성에 등급을 매긴 것이다. 이 평가는 주관적일 수 있지만, 내용의 내적 일관성 혹은 예언가가 지닌 영격(靈格)의 고하, 그리고 사회적 위치 등을 고려해 점수를 매겼다. 이렇게 등급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 예언을 수용할 때 참고해보라는 것이다. 등급 매긴 것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각 예언을 소개하고 그에 대해 해설하면서 그 신뢰도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예언의 신뢰성에 대한 등급 결과, 소태산 대종사의 예언이 5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이런 결과의 타당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참고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원불교인이 아니다. 내가 개인의 신앙에 편중돼 소태산을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태산을 선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말이 가장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의 예언은 매우 구체적이라 믿음이 간다. 게다가 원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원불교 교전』에 적혀있어 무게가 더 실린다.

그는 한국을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소태산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행한 예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불교 교전 대종경 전망품 23장, 변의품 6장이다. 소태산은 아주 간단하지만 단호한 예언을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예언이 놀라운 것은 당시에 한국이 처한 상황과 정반대의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역사 이래 최초로 나라가 없어졌다. 1920~1930년대의 세계지도를 보면 한반도 위에 나라 이름인 ‘Korea’는 없고 ‘Japan(Empire)’으로 되어있다. 나는 이 지도를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때 처음으로 봤는데, 그때 그 기분의 미묘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 나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길들여지고 절망하고 있을 때 소태산은 정반대의 예언을 한 것이다. 아마 당시에 한국의 앞날이 창창하다고 말한 지식인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을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이 정신적인 지도국이 되어야 소태산의 예언이 백퍼센트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라는 부문이 주목된다. 대종사가 생각한 한국의 미래는 정신적인 면에서 한국이 세계를 이끈다는 의미인가

소태산이 한국은 앞으로 용과 같은 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한국이 정치나 경제, 군사 등의 분야에서 가장 앞서는 나라가 된다고 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한국이 세계를 영적으로 인도한다는 것인데, 
한국이 저절로 세계를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끄는 나라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소태산은 원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인 것 같다. 원불교의 교리라면 능히 단시간 내에 사람들을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원불교에는 세계의 모든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일체 제법의 사리가 융통되어 막힘이 없음) 정신이 녹아있다. 다른 종교들과 교리적으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매우 탄력적인 교리 체계를 갖고 있다. 이것을 전 세계에 적용하면 한국이 정신적으로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다.


소태산의 예언처럼 한국이 정신적인 지도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종교인 원불교가 분발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세계를 인도하려면 일단 도덕적인 기반이 있어야 한다. 
도덕적인 사람이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은 도덕적으로 반드시 선하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선함이나 영적인 에너지를 갖추고 있다
이를 어떻게 배양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 여기에 원불교의 역할이 있다.

사실 원불교가 품을 수 없는 종교는 없다. 원불교는 교리 자체로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실천해 내는 일은 후진들의 몫이다. 원불교에 대한 국민들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 교단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소태산이 밝혀놓은 ‘예언’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인터뷰 말미, 최준식 교수는 
원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단의 혁신과 실천력을 강조했다. 
죽음과 생사학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갔다. 
‘원불교처럼 죽음에 대한 준비와 죽음 뒤의 세계를 자세하게 정리해준 교전은 없다’라고 그는 단언했다.

원불교가 걸어가야 할 길, 그의 예언이 말해주고 있다.

[2020년 7월 10일자]
===
어변-성룡, 魚變成龍
/-뇽/
명사- 아주 곤궁하던 사람이 부귀하게 됨.
---
魚變成龍. 어변성룡.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됨. 어릴 적에는 신통치 못하던 사람이 자라서 훌륭하게 됨을 일컬음. 魚 고기/물고기 어 變 변할 변 成 이룰 성 龍 용 룡
===





한국이 영적인 국가가 된다고?/최준식 교수 | 202004 서울신문

[열린세상] 한국이 영적인 국가가 된다고?/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 서울신문

[열린세상] 한국이 영적인 국가가 된다고?/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입력 :2020-04-21 


▲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나는 지금 매우 기이한 주제를 다룬 책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영능력자들이 바라본 한국의 미래’가 그 주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간략하게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능력자란 출중한 종교가일 수도 있고 영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예언 말고 또 ‘주역’이나 ‘정감록’ 혹은 ‘송하비결’ 유의 비결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탄허 스님이 ‘주역’을 통해 내린 한국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가 하면 외계인들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다는 황당한 주장도 있었다.

나는 이 예언들의 신뢰성에 대해 등급을 매겨 보았다. 영화를 5점으로 품평하듯이 이 예언들에 대해 점수를 매겨 본 것이다. 같은 예언이라 해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 평가는 주관적일 수 있지만 내용의 내적 일관성 혹은 예언가가 지닌 영격(靈格)의 고하, 그리고 사회적 위치 등을 고려해 점수를 매겨 보았다.


그 결과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이나 그의 제자인 정산 송규가 행한 예언이 5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반면 미국의 개신교 부흥사들이나 외계인이 했다는 예언은 최하위가 됐다. 그 중간에는 인지학(人智學)을 창설한 슈터이너 등이 내린 예언이 포진됐다.

그런데 이 등급이 어떻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예언들의 결론이 같다는 것이었다. 신뢰도가 가장 높았던 소태산은 물론이고 가장 신임할 수 없었던 미국 부흥사들 역시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예언일까. 한국이 앞으로 이 세계를 정신적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태산과 정산은 미래의 한국은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정신적 방면에서 제일가는 지도국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이들의 예언을 대할 때마다 이분들을 매우 존경하지만 이 예언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참고로 나는 원불교도가 아니다).

소태산이 행한 것으로, 한국은 앞으로 물고기가 진화해 용과 같은 국가가 된다는 예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이 예언은 맞았다. 한국은 이미 아시아의 작은 용이 됐고 지금은 세계적인 용이 되기 위해 도약 중이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수용할 수 있는데 한국인이 미래에 전 세계를 정신적으로 이끈다는 예언은 정녕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국의 정치나 교육, 종교 등의 분야에서 보이는 난맥상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뜻밖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이 예언이 실현될 수도 있겠다는 심산이 섰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전 세계는 중국발 역병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역병은 세계의 모든 것을 바꾸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역병을 대하는 각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계의 미래상을 보게 됐다.

이번 사태에서 한국인들이 보여 준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가장 선진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발전된 의료보험과 의료이용 체계, 그리고 정보통신 체계의 우수성 등등 외적인 면은 단연 세계 수위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국인들이 가장 뛰어났던 것은 그들이 지닌 성품의 ‘선함’이었다. 큰 위기 앞에서 자신의 안위나 불편함보다 사회나 이웃을 먼저 생각한 그 선함 말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의료진들의 불굴의 희생정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국민의 마스크 착용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 또 힘들지만 철저하게 자가격리를 준수하는 모습 등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인들의 선한 배려 정신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도덕적으로 매우 선한 심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영성은 바로 이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보면 한국인들은 영적으로 높은 민족이 되기 위해 시동을 건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의 미래가 자못 흥미진진해진다.

2020-04-22 34면

2023/08/20

알라딘: [전자책]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 2013

알라딘: [전자책]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
[eBook]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  | 아까운 책 시리즈 1
강신익,강신주,강수돌 (지은이)부키2013-02-28 
====

책소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저들을 발굴, 조명하는 '아까운 책'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했지만, 내용과 의미는 '베스트'인 책.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이런 숨은 걸작을 골라 서평과 함께 소개한다.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은 매해 출간될 '아까운 책' 시리즈의 첫 책으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21세기의 첫 10년을 결산했다. 강수돌, 강신주, 우석훈, 듀나, 장석주, 정혜윤, 홍기빈, 하지현 등 이 시대의 '글쟁이' 46명이 필진으로 참여해 문학, 인문, 사회, 경제·경영, 과학, 문화·예술 등 6개 분야의 추천서를 소개하고 '함께 읽으면 좋은 책'도 안내한다.

-저자소개-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강신주 철학자
강인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
김갑수 시인·문화 평론가
김기태 출판 평론가
김낙호 만화 연구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김민영 (주)행복한상상 이사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이사
김보일 배문고 국어 교사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김은섭 경제경영 전문 서평가
김이경 작가·번역가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노태복 번역가
듀나 영화 평론가·소설가
류대성 수내고 국어 교사
박상진 경북대 명예 교수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반이정 미술 평론가
변정수 출판 평론가
손철주 미술 칼럼니스트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안상헌 MEANING독서경영연구소장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장
엄기호 인문학자
예병일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
오승주 (주)코이즘 대표 이사
우석훈 2.1연구소장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이기중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
이은희 과학 칼럼니스트
이정모 과학 저술가
이진숙 미술 칼럼니스트
이택광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장석주 문학 평론가
정혜윤 CBS 라디오 PD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
목차
문학 _ 왜 쓰는가, 왜 읽는가

김민영 ― 나는 작가다 『작가』 19
김보일 ― 전시륜과 에릭 호퍼, 그 가벼움과 무거움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6
노태복 ― 위대한 '숲의 사람' 『데르수 우잘라』 35
듀나 ― SF 입문자를 위하여 『당신 인생의 이야기』 42
이진숙 ―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라 『문장강화』 『모던 수필』 50
장석주 ― '진술'의 힘 『진술』 57
정혜윤 ―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책을 읽는가? 『칠레의 밤』 66

인문 _ 사람과 삶, 그 이치를 배운다

김원중 ― 2천 년 전 민관 토론 현장을 생중계하다 『염철론』 77
김진호 ― 학문적 상상력으로 재현한 '농부' 예수 『역사적 예수』 85
류대성 ― '고수'의 진짜 공부법 『몸으로 하는 공부』 93
신정근 ― 전도된 성 역할, 그 기원을 찾다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101
안광복 ― '약탈'이란 열쇳말로 본 서양 문명 『서양문명의 기반』109
안상헌 ― 당신은 어떤 신화를 살고 있는가 『신화와 인생』117
오승주 ―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125
이택광 ― 한 문제적 인간을 통해 본 20세기 철학사 『사르트르 평전』133
하지현 ― 독창성 넘치는 '본성과 양육' 이야기 『개성의 탄생』141

사회 _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다

강수돌 ― 거부하라 그러면 해방되리라 『노동을 거부하라!』 151
강신주 ― 바로 당신이 메시아이고, 메시아여야만 한다 『일상생활의 혁명』 159
강인규 ― '개발 마피아'와 끈질기게, 그러나 즐겁게 싸우기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167
김낙호 ― 담담한 부적응과 따뜻한 인간 관찰 『아날로그맨 1』 177
김이경 ― 마음으로 듣는 역사 이야기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184
박홍규 ― 여성 그리고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 192
엄기호 ― '요즘 아이들'이 궁금하다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200
임지현 ― 정의와 도덕, 용서와 참회가 서로 부딪칠 때 『해바라기』 208
최성각 ― 온몸으로 삶을 실험했던 참다운 거인 『스코트 니어링 평전』 216

경제·경영 _ 자본주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김대호 ―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자 망원경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 227
김민주 ― 애덤 스미스 이전에 맨더빌이 있었다 『꿀벌의 우화』 235
김은섭 ― 경영 구루의 행동하는 자기 경영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242
안치용 ―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스마트 월드』 250
우석훈 ― 경제 근본주의에 균열을 내다 『경제학 3.0』 258
유영만 ― 고독과 열정이 만나야 도약한다 『엘랑 비탈』 265
한기호 ― IT가 만든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빅 스위치』 273
홍기빈 ― 자본주의의 변화를 예측한 선견지명 『단절의 시대』 282

과학 _ 자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신익 ―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다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291
김명남 ― 진화의 비밀을 알려다오! 『삼엽충』 299
박상진 ― 지구를 지배하는 꽃의 전략 『꽃의 제국』 307
변정수 ― 자연과학과 안 친한 '지성인'들을 위하여 『원더풀 사이언스』 315
예병일 ― 수술은 최후의 치료법이다 『수술, 마지막 선택』 323
이은희 ― 당신의 몸은 얼마짜리인가? 『인체 시장』 331
이정모 ― 마침내 진화발생생물학의 쉬운 '복음서'가 나왔다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339

문화·예술 _ 보이는 아름다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김갑수 ― 한 번쯤 빡세게 붕가붕가!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349
김기태 ― 진짜 같은 가짜 혹은 가짜 같은 진짜 구별하기 『이미지와 환상』 356
반이정 ― 700번대 서가를 한참 서성이다 『현대미술의 이해』 365
손철주 ― 문양에 담긴 한민족의 생활과 의식 『한국의 전통문양』 373
이기중 ―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 『침묵의 언어』 381
최준식 ― 전통 건축에 드리운 '비늘'을 떼다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89

이 책에 소개된 48권의 책·396
찾아보기·399
=====
책속에서

『진술』은 어떤 연애 소설보다 더 지독하고 쓰린 아픔과 슬픔을 자아내는 연애 소설이고, 어떤 추리 소설보다 더 지독한 추리력을 요구하는 추리 소설이며, 작중 인물의 복잡한 내면 심리를 잔혹할 정도로 파헤친 심리 소설로, 한국 소설이 드물게 가 닿은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다. 한 살인 용의자의 진술 행위 자체가 서사의 근간을 이루도록 설계된 『진술』은 그 도저한 형식 실험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59쪽 장석주, '진술'의 힘 『진술』  접기

이건 칠레라는 특수한 나라에서 특별하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반대로 이 소설은 친숙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들도 세상에 내 말을 이해하는 수준 높은 인간이 모자란다고 투덜대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시궁창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고결하게 피해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세상에도 진부한 말이나 늘어놓는 낙담한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세상에도 불멸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도덕이 얼마나 많은가? -71~72쪽 정혜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책을 읽는가? 『칠레의 밤』  접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자본과 권력을 극복하는 노력이 충분히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 자체가 혁명의 과정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이 중요한 책은 아직까지도 방치되어 서가에서 먼지를 맞으며 외롭게 놓여 있다. 자본과 권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만족하는 독자들, 혹은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겠다는 일부 정치가들의 미사여구에 아직도 기대를 아끼지 않는 독자들. 아마도 그들에게는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불편했던 것이 아닐까. -165쪽 강신주, 바로 당신이 메시아이고, 메시아여야만 한다 『일상생활의 혁명』  접기

이 책은 한국의 '개발 중독'이 어떻게 개인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보여 준다. 그것도 개발주의의 폐해를 진단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에 맞서는 방법까지 체계적으로 보여 준다. 저자가 몸으로 겪은 생생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시작해, 구체적 싸움의 진행,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고 이후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까지를 완벽하게 담고 있다. -170쪽 강인규, '개발 마피아'와 끈질기게, 그러나 즐겁게 싸우기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접기

10년 가까이 '위안부' 수요시위와 정대협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행여 얼굴이 드러날까 마음을 졸였다는 윤순만 할머니.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자신의 이력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그녀는, 그러나 끝내 사진 싣기를 거부합니다. 그녀의 얼굴이 실려야 할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윤순만, 김창연(가명), 아홉 분 중 두 분이 그렇게 텅 빈 공백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남겨진 침묵의 페이지는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마음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할머니들이 기억으로 불러낸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얼굴 없는 증언, 가명의 역사를 강요하는 기억 상실의 현재, 그것이 우리를 참담하게 합니다. -189쪽 김이경, 마음으로 듣는 역사 이야기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접기

2000년대는 경제 근본주의와 함께 문을 열었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그게 2000년대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 광고가 새해 인사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한국 사회가 망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두 가지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것과, 네가 부자가 아니라... 더보기

이제 개인은 평생 자신이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줄 스승을 직접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런 스승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문제를 해결할 지식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그만한 스승으로는 책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상상력이 구현된 영상 미디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 더보기 - iamjune

글을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자랑하기에 급급해지는 순간이나 자기가 쓴 문장에 도취되는 노예가 되는 순간이 온다. 이런 글들에는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라는 이태준의 말이 효과적인 처방전이다. 역사가 짧으니 아직은 ... 더보기 - iamjune

삶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하는 일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23쪽 - iamjune
나는 누구인가? 남과 다름으로 나는 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 실수를 하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과 같아지는 순응, 남과 달라지는 차이 내기, 그 둘 사이의 타협점이 한 사람의 개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또 동시에 한 사람의 개체 입장에서 볼 때 ... 더보기 - iamjune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강신익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부산대 교수(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추상적 지식보다는 일상적 삶에 봉사하는 의학을 지향한다. 경기도 안양에서 나고 자라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변해가는 삶의 터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15년간 치과의사로 일했다. 마흔이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가 2년간 의학 관련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2000년부터 일산백병원 치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의료인문학을 가르쳤고, 2004년 인문의학교실을 개설해 전임교수가 되었다. 2013년 가을부터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인문... 더보기
최근작 : <시민의 인성>,<미래 인문학 트렌드>,<동서의 학문과 창조> … 총 31종 (모두보기)
강신주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철학과 삶을 연결하며 대중과 가슴으로 소통해온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동서양 철학을 종횡으로 아우르며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로 우리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다가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강신주의 역사철학 · 정치철학 3 : 구경꾼 vs 주체》 《강신주의 역사철학 · 정치철학 1 : 철학 vs 실천》 《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의 다상담》 《김수영을 위하여》 《... 더보기
수상 : 2011년 전숙희문학상
최근작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구경꾼 VS 주체>,<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 총 103종 (모두보기)
SNS : http://twitter.com/ShinContingent
강수돌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61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85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독일 브레멘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부터 2021년까지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경영학 분야는 물론, 경제, 정치, 사회, 노동, 심리, 교육, 생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좌우명 아래 공부한 것을 ‘나부터’ 실천하고자 한다. 직접 텃밭을 가꾸고 생태 화장실을 사용하며 세 아이를 키웠다. 교수로 재직할 때 5년 동안 마을 이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쓴... 더보기
최근작 :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부디 제발>,<[큰글씨책] 자본과 국가 권력을 넘어 교육자치의 새 길을 찾다> … 총 1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그 이름 불러 줄 때 비로소 살아나는 '아까운 책'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은 연인이었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리며 "버림받은 여자보다, 떠도는 여자보다,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힌 여자"라고 한탄했다. 출판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책 또한 그러하다. 죽은(절판된) 책보다 더 불쌍한 것이 잊힌 책이다. 정말 멋지고 좋은 양서이지만 독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아까운 책이 좀 많은가. 해마다 4만여 종의 신간이 나온다. 이 가운데 손에 쥐어 보거나 제목이라도 들어 본 책은 몇 종이나 될까?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순식간에 잊히고 만다.
부키의 '아까운 책' 프로젝트는 이런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숨은 걸작들을 출판사 스스로 조명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베스트로 인정받아 마땅할 책,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을 선정해 보자." 이런 소박한 아이디어가 출발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취지에 공감해 흔쾌히 동참해 주면서 작업이 궤도에 올랐다. 부지런히 책을 읽는 학문 분야별 전문가와 눈 밝은 서평가들이 전년도 신간 가운데 가치를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훌륭한 책을 골라내고 서평을 써서 독서를 위해 길 안내를 해 주는 것이 아까운 책의 기본 콘셉트이다. 도서 장르별 좋은 책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골라냄으로써 연례 발간될 이 책 한 권만으로도 한 해 출간된 도서의 정수를 확인하고 책에 반영된 시대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까운 책'은 외국의 많은 서평 전문 매체들이 한 해를 결산하면서 'Too Good to miss'(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책) 또는 'Top editor's picks'(최고 편집자들이 뽑은 책) 등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못한 양서에 아낌없이 지면을 할애하는 배려와 맥을 같이한다. '아까운 책'처럼 한 해 출간 도서를 종합하고 분야별 다수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뜻 깊은 명저를 찾아내는 작업은 우리 출판계에서는 처음 진행되는 기획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부키는 해마다 3~4월에 '아까운 책'을 정례 발간할 계획이다.

내로라하는 글쟁이 46명이 공들여 고르고 서평을 쓰다

이번에 나온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은 정기간행물 성격인 '아까운 책' 작업의 들머리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21세기의 첫 10년을 결산했다. 강수돌, 강신주, 김갑수, 듀나, 우석훈, 이은희, 장석주, 정혜윤, 하지현, 홍기빈 등 이 시대의 '글쟁이' 46명이 함께했다. 작업에 참여한 필자들은 먼저 아까운 책 후보로 소중히 여기는 책 서너 권씩을 추천했다.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책을 우선한다는 기준으로,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분야별 밀레니엄 베스트 도서 목록(2010년까지 발간된 도서 가운데 분야별 베스트셀러 100위까지의 집계)과 대조하여 순위에 들지 못한 책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필자가 한 권씩의 아까운 책을 골라내는 방식으로 선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도저히 한 권만 고르기가 어렵다며 두 권을 고른 필자도 있어(김보일, 이진숙) 결국 필자들의 면면만큼이나 다양하고 개성 있는 48권의 '아까운 책'이 탄생했다. 선정에 참여한 필자들은 자세한 서평을 통해 책을 소개하고 '함께 읽으면 좋은 책'도 안내하여 독서와 사유의 풍성한 확장을 돕는다. 접기

공감순 
     
하나하나 보고 읽어나가겠다. _  구매
영삼이 2011-07-29 공감 (5) 댓글 (0)
Thanks to
 
공감
     
책 고른 분들이 아무리 쟁쟁하다 하더라도 내용은 그저 신문 칼럼이나 잡지 수준 정도  구매
BlessedSJ 2011-09-01 공감 (3) 댓글 (1)
Thanks to
 
공감
     
와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 발견! 이 책만 있으면 당분간 책 고르기 좋겠군~  구매
원더북 2011-07-31 공감 (1) 댓글 (0)
Thanks to
 
공감
     
최근 10년간 간과되어온 책들, 좋은 책들 소개에 대만족. 이제는 찾아서 읽는거...  구매
ksigene 2011-09-23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값싼 성공보다 위대한 실패가 아름답다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 새창으로 보기
 

"당대의 세속적 성공에만 집착하는 얼치기들은 값싼 성공보다도 위대한 실패가 더 아름답고 인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가 아마도 힘들 것이다."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에 실린 작가 최성각의 글 중 한 대목이다. 이 문장은 이 책 전체를 묘사하는 데 써도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당대의 세속적 성공, 즉 베스트셀러가 되어 출판사의 매출을 올리고 저자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도 퇴색하지 않을 지혜와 가르침을 담고 있는 책들을 각 분야 전문가 46인의 글을 빌어 소개한다. 

 

 

이제껏 온갖 서평집과 책에 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을 읽었지만, 나는 이 책만큼 좋은 책을 소개하고 지금보다 나은 독서를 하고 싶다는 자극을 주는 책을 보지 못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난 10년 간 출간된 책 중에서 놓치기 아까운 책 단 한 권을 엄선했기 때문에 선정된 책의 수준이 높을 뿐더러, 지난 10년으로 기간의 제한을 두어 진부한 느낌도 없다. 읽고 싶어진 책이 수십 권. 새로 알게 된 저자가 여러 명이라 앞으로 다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듯. 후속 시리즈가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찾기로는 없는 점이 아쉽다.

- 접기
키치 2014-10-28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강수돌의 한줄 특강 새창으로 보기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우리가 이것만 제대로 안다면 훨씬 지혜롭게 살 수 있다.
 
 
- 접기
DreamPartner 2011-08-21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지난 10년간 내가 놓친 책 새창으로 보기
책에 관한 책을 읽는 기분은, 학창시절 나 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의 책꽂이를 훔쳐보는 기분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피하고 싶은 한편으로 자꾸 그쪽으로 향하는 눈길을 어쩌지 못하는 심정이랄까.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읽어야 할 책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숙제가 쌓인다. 아무도 검토하지 않는 과제를 한 권 한 권 해치우면서(?) 혼자 뿌듯해하는 마음도 잠시, 이제는 쌓이는 책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래서 책에 관한 책은 될수록 멀리하고 싶은데 하필 이 책 제호가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될 아까운 책>이다. 혹시나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펼쳤는데...역시 내가 놓치지 않은 책은 고작 몇 권에 불과했다.

 

이따금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평소의 편식성 독서를 조금씩 바로 잡아야겠다는 야무진 다짐을 해보지만...

 

94쪽...만들어진 책의 절반만 팔리고, 팔린 책의 절반만 읽히며, 그 책의 절반만 이해되고 나머지 절반만이 실제 활용된다고 하니 책은 언제나 그 나름의 운명을 가지는 것 같다.

 

일단 이 책에 소개된 책은 놓치기 아까운 책임에는 틀림없으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읽도록 노력해야할 터.

 

자, 당신은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었는지요.

 

1. <작가>박상우

2.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전시륜,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에릭 호퍼

3. <데르수 우잘라>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4.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5. <문장강화>이태준, <모던수필>방민호

6. <진술>하일지

7. <칠레의 밤>로베르토 볼라뇨

8. <염철론>환관

9. <역사적 예수>존 도미닉 크로산

10. <몸으로 하는 공부>강유원

11. <이중텐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이중텐

12. <서양문명의 기반>강유원

13. <신화와 인생>조지프 캠벨

14. <남희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남희근

15. <사르트르 평전>베르나르 앙리 레비

16. <개성의 탄생>주디스 리치 해리스

17. <노동을 거부하라>크리시스

18. <일상생활의 혁명>라울 바네겜

19.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20. <아날로그맨1>김수박

21.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증언팀 엮음

22. <엠마 골드만>켄데이스 포크

23. <페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사이토 다마키

24.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25. <스코트 니어링 평전>존 살트마쉬

26.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최윤재

27. <꿀벌의 우화>버나드 맨더빌

28.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찰스 핸디

29. <스마트 월드>리처드 오글

30. <경제학 3.0>김광수

31. <엘랑 비탈>윤철호

32. <빅 스위치>니콜라스 카

33. <단절의 시대>피터 드러커

34.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앤 해링턴

35. <삼엽충>리처드 포티

36. <꽃의 제국>강혜순

37. <원더풀 사이언스>나탈리 앤지어

38. <수술, 마지막 선택>강구정

39. <인체 시장>로리 앤드루스, 도로시

40.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션 B.캐럴

41.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붕가붕가레코드

42. <이미지와 환상>다니엘 부어스틴

43. <현대미술의 이해>팸 미첨, 줄리 셸던

44. <한국의 전통문양>임영주

45. <침묵의 언어>에드워드 홀

46.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김봉렬

- 접기
nama 2012-10-07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2023/08/11

[독서생활] [나를 바꾸기] 위한 [타오이즘]공부 - 나를 위한 간단한 일차적 정리

Sejin Pak | Facebook

[독서생활] <나를 바꾸기> 위한 <타오이즘> 공부 - 나를 위한 간단한 일차적 정리
---
-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도덕경>과 <노장사상> 공부를 해본다. 그런데, 그런 공부를 해서 뭐를 배울까? 어느 정도의 지적 이해를 얻는 것 이상 뭐가 남는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뭔가를 배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오이즘 Taoism/Daoism> 공부를 다시 한다.
- 이번의 포카스는 
(1) 동양에서는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불리우는 <철학 사상>으로서의 <타오이즘>과 
(2) <기공>같은 일종의 <수련문화>로서의 <타오이즘>, 그리고
(3) 흔히 <도교>라고 불리우는 <종교>.로서의 <타오이즘>간의
 <차이와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자는 데에 있다. 거기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다고는 전에부터 생각했다. 
- 나도 많은 사람들처럼 <삶의 철학>으로서의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보는 눈으로의, 또는 인생철학으로서의 노장사상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몸에 대한 동양식 이해와 제대로 실천은 하지 않았으나  태극권, 또는 요가같은 <몸 가꾸기>에 관심이 있었다.  <도교>라는 <종교적> 타오이즘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의 일종의 <미신적> 민중종교라고 생각하여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철학사상으로서의 타오이즘 (노장사상)과종교로서의 타오이즘 (도교), 그리고 수련이나 의학으로서의 타오이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설명하는 책들을 만났다. 첫번 째 만난 책이 종교학자 최준식의 책 <,,,>의 <노장사상과 도교>라는 부분 (장)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약 10년 전에 읽은 듯하여 어느 정도에서  최준식의 책을 다시 읽게되었고, 이 세 책에서 타오이즘에 대한 나에게는 가장 도움이 될만한 프레임이 떠 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 여기 기록해두려고 한다. 이 정리를 일차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앞으로 몇년 간 더 공부를 하면서 뭔가가 바뀔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 2차 정리와 제 3차 정리가 몇년에 한번씩 일어나리라 생각한다. 
---
- 우선은 휴스턴 스미스와 최준식의 <타오이즘> 이해에 대하여 말하자면, 타오이즘에 대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두 저자는<노장사상> 만이 아니라 <도교>에 대하여도 함께 논한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그러나 두 저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휴스턴 스미스는 타오이즘에는 세가지 면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철학으로서의> 타오이즘이고, 그 둘째는 <종교로서의> 타오이즘이다. 

-














+5














25:38
Organized Daoism & Internal Alchemy (Neidan)
Let's Talk Religion

2023/08/10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2/17

안녕하세요 레이븐입니다
해당 포스트는 제가 2018년 무렵까지 운영했던 네이버 블
로그의 포스트들을 아카이빙 하기 위해 옮겨온 글입니다
당시 네이버 블로그에서 사용하던 문체는 티스토리와는 달
리 존대 없는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카이빙 과정
에서 별도의 수정 과정은 거치고 있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라며 혹여 네이버 블로그를 방
문하실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네이버 블로그는 더 이상 운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아카
이빙 된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차례로 삭제할 예정입니

1 중국 신선설의 등장과 발전
신선설의 발상지는 중국의 산동성으로 알려져 있다
BLACKEST BLACKIST : VI VERI…
blog.naver.com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3/17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신선설이 생겨났다 이 신
선설은 중국 고대에 있었던 산악신앙山嶽信仰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중국 종교의 원초적 형태인 무술巫
術자연숭배 등이 혼합되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술方術이 생겨났다 이 방술
은 전국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
다 방술을 행사하는 사람을 방사方士라고 하는데 방사
가 제왕과 밀접하게 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였
고 한무제漢武渧 때에는 제왕 측근에서 거의 떠나지 않
을 정도였으므로 방술은 상층사회에 굳게 뿌리 내리게 되
었다
한편 신선설이나 방술은 호소할 곳 없는 일반 백성들의 마
음까지 사로잡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향으
로 변천하였다 전한 말부터 전설의 임금인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초인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신선으로 꼽혀 황
로신앙黃老信仰이 대두하였다 방사들의 조작적인 선전
과 참위설讖緯說의 유행이 황로신앙을 가열시켰다 이러
한 황로신앙을 가미시킨 신선방술의 내용이 조정 확대되
고 신흥종교였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로 개괄되는 한
종교로 형태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2 도가사상과 도교의 구분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
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열자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
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초기 방술과 신선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갑골문 사진 제공 한국
경제신문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4/17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
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
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어 도교와 도
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
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
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3 종교로서 갖는 도교의 특징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
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
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
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
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
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
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노장으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과 구복적 성격의 도교는 구별되어야
한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5/17

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道家)역리(易理)음양(陰陽)
오행(五行)참위(讖緯)의술(醫術)점성(占星) 등의 법술
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어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이다 도교는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
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없이 받
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도교라는 명목으로 포괄되는 신앙이나 행사의 내
용이 매우 복잡해졌다 도교는 신선설과 연결되어 불로장
생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됨에 따라 건강관리
를 중시하여 심리적으로는 사과신적신앙(司過神的信仰)
과 주술적인 방법이 도입되었고 물리적으로는 조식(調
息) 벽곡(辟穀) 도인(導引) 방중(房中) 등의 방법이 채
택되었다
여기서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까지 연결되는 도교의학의
성립을 보게 되는데 그 극치가 금단(金丹)이다 그러나 금
단은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잃게 하는 독극물일 경우가 대
부분이어서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금단의 연조
(煉造)를 연금술 같은 물리화학적인 방술에서 끌어 내면서
수련적인 단학(丹學)으로 전개하여 도법을 닦는 의의와
결합시키는 데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도교의 금단도
(金丹道)는 연금술적인 외단(外丹)과 수련적인 내단(內
도교라는 종교는 결국 도가와 신선설 태극도설 등의 다양한 학풍에
온갖 구복적 요소들이 뭉탱이로있다가유링게슝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6/17
丹으로 크게 나누어졌고 결국은 내외단의 통섭統攝이
라는 방향으로 이론체계를 정립시켰다
4 도교의 세계관
도교는 신선설을 기조로 하고 있으므로 불로장생과 연결되
는 선단仙丹 불로초 영약靈藥 각 계층의 신선 초능
력이 따르는 각종 도술 천상과 지상의 다양한 선계 등 환
상적인 경지를 크게 개척해 놓았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구이므
로 도교에서 개척한 불로장생과 연결되는 환상의 세계
가 허황되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위안과 희열을 가져다 주
었으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도교에서는 천계가 욕계육천欲界六天 색계십팔천色界
十八天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 상사천上四天 또
는 사범천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 도
합 36천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하위의 욕계육천
에 사는 사람도 수명이 1만 년이고 그 위의 색계 십팔천
의 사람은 수명이 1억만 년이며 무색계 사천에 사는 사람
은 수명이 억겁 년이다 상사천부터는 사람을 죽게 하는 삼
재三災가 없어서 죽음이 취소되고 그야말로 장생불사하
여 무량수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
이 있고 그 아래의 옥청玉淸청미천淸微天 원시천존元
始天尊 상청上淸우여천禹餘天 영보천존靈寶天尊 태
청太淸대적천大赤天 도덕천존道德天尊 세 군데로 이
루어진 삼청경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으며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
伯선대부仙大夫가 있어 현세의 궁정조직 같이 되어 있
한편 도교에서는 또 십주十洲 삼도三島 십대동천十
득도하여 선인신선이 되면 인간의 수명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
을 정도로 장수한다고 한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7/17
大洞天 삼십육동천三十六洞天 칠십이복지七十二福
地 등 지상에도 선진인仙眞人이 사는 동천복지로 불리
는 각종의 낙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선진인이 사는 천지
간의 선계와 그 밖에 있는 속계가 있는데 선계와 속계 사
이에는 내왕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도교에서는 성수신앙星宿信仰을 받아 들여 북
극성北極星현천상제玄天上帝 북두성北斗星북두신
군北斗神君 남두성南斗星남극장생대제南極長生大
帝 문창성文昌星문창제군文昌帝君 삼태성三台星
등을 경배한다 한편 도교에서 받드는 신은 성황신城隍
神토지신삼관三官사어四御재신財神문신門
神조신竈神왕령관王靈官관제關帝낭낭娘娘용
왕팔선八仙여조呂祖마조媽祖 등 그 수효가 적지
않다
5 중국 도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1 원시 도교 교단
후한後漢 말년2세기에서 3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는 정
치의 난맥으로 혼란이 극심해지고 환관宦官의 횡포와 부
호들의 방종이 심해서 일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
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
五斗米道라는 종교 집단이 생겨났다
kaka
NICE신용점수 나이스지키미
마음이 놓이는 마이데이터, 더 든든해진 신용점수 케어로
https://www.credit.co.kr
우길의 태평청령도를 이어받은 장각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창
천이사 황천당립은 당연히 황사를 예견한 말은 아니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8/17
후한 순제順帝 때 우길于吉이 ≪태평청령서太平淸領
書≫를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집단을 만
들고 그 도서명道書名을 따서 태평도를 표방했다 우길
의 뒤를 이어 장각張角이 교주가 되어 태평도의 조직을
굳히고 도서道書부적符籍참회懺悔 등을 사용하여
시행한 질병치료의 방법이 주효해서 많은 도당을 얻어 왕
실을 타도하고 자기가 천하를 잡을 욕심으로 무장 봉기했
다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다 장각이 전사한
후 태평도는 몰락해 버렸다
태평도보다는 좀 늦게 장릉張陵이 후한 영제靈帝 때에
오두미도를 시작했다 장릉은 만년에 유학을 버리고 장생
법을 배워 황제黃帝의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했고
또 사천四川 학명산鶴鳴山에서 도서道書의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수많은 신이 강림해서 신출정일맹위법
新出正一盟威法을 그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장릉은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 주어 수많은 신도를 얻어 쌀과 비단
을 바치는 법을 정하고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들어 종
교집단을 이루었다
장릉의 손자 장노張魯가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그 교법
과 조직을 완성시켜 한 왕국을 방불케 하는 조직화된 종교
집단을 성립시켰다 장노가 조부 장릉을 천사天師라 칭
해 오두미도를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렀다 부父 장형
張衡을 사사嗣師 자신을 계사系師라 하여 조부손
이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같이 말해 삼장三張으로 합칭
하기도 한다
장노가 조조曹操에게 굴복해 죽으면서 교세가 약해졌으
나 천사도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正一敎의 전신으
로 도교 정통의 자리를 차지해 내려왔다 태평도와 오두미
태평청령도의 몰락하고 이후 촉한이 되는 한중 지역에서 장릉의 오
두미도가 성행하였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9/17
도 내지 천사도는 부적과 도록道籙을 존중한다 하여 부
록파符籙派로 불리기도 한다
2 단정파
복용하면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된다는 선단仙丹 또는 금
단金丹으로 불리는 영약靈藥의 연조煉造는 선진先
秦시대부터 전해지지만 후한 말기 오吳의 위백양魏伯
陽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참동계는 금
단도金丹道:금단을 연조하는 방법를 천명한 대표적
인 도서道書로 받들어진다 위백양은 자기가 저술한 ≪
주역참동계≫의 방법에 따라 연조한 금단을 먹고 일단
은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약을 먹고 진인眞人이 된 것
으로 전해진다
금단 연조에 주력하는 이 계열의 도인道人들을 단정파
丹鼎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晉의 갈홍葛洪이 저술
한 ≪포박자抱朴子≫ <금단>편에는 금단도가 구체적
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는 후한 말기의 좌원방左元放으
로부터 그의 종조從祖 갈선공葛仙公과 갈선공의 제
자 정군鄭君을 통해 전해진 ≪태청단경太淸丹經≫ 3
권 ≪구정단경九鼎丹經≫ 1권 ≪금액단경金液丹
經≫ 1권 및 구결口訣을 전수해서 금단도에 달통
할 수 있었다고 자술하였다
북송 초기의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雲笈七籤≫
에도 금단의 연조 방법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
다 금단은 외물外物의 도움을 받아 불로장생을 기하는
것으로 곧 외단外丹인데 독성이 심한 광물의 합금으로
연조된 것이므로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 금단
단정파에서는 중국의 연금술이라 할 수 있는 연단술의 연구가 활
발하였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0/17
도는 후세의 도사들에게 전하여져 금단이 연조되기도 하였
으나 그 금단으로 황제들까지 목숨을 잃고는 하였다
3 도교 교학敎學의 개발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을 거쳐 남북조시대로 내려오
는 동안 천사도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상층사회와 민간
에 두루 전파되어 신봉되었다 천사도에서는 진나라 때 ≪
상청경上淸經≫을 받드는 상청파上淸派가 생겨 전승
되어 내려와 남조송南朝宋의 도사인 육수정陸修靜
에 이르러 대량의 도경道經을 수집 정리하였고 배례拜
禮송경誦經사신思神의 세 가지 방법으로 수도하
여 마음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강조하여 도교의 신
학적인 수준이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상청파의 도법은 양대梁代로 내려와 도교학자이며 연단
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던 도홍경陶弘景에게 전수되었
다 도교의 신학은 도홍경에 이르러 집대성되었고 그는 강
소江蘇의 모산茅山에 은거하여 육수정의 도경정리사
업을 크게 진전시키고 도교의 교학 체계와 금단도까지 정
비해서 모산종茅山宗 또는 모산파茅山派의 창시자가 되
었다
4 신천사도新天師道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北魏의 도사인 구겸지寇謙之
가 신천사도를 내세워 도교를 철저하게 개혁하고 나섰
다 그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운중음송신과지계
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았고 천사도 개혁의 사명이 부
여되었으며 거기다 천사의 지위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신
천사도에서는 신선 설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삼
고 복이服餌복기服氣도인벽곡 등 양생법을 채택하
였다 불교의 체제의식조직 등을 모방하고 유교의 예도
禮度를 강조했으며 청허淸虛 등을 높여 도가사상을 끌
어 들였고 노자를 도교의 시조 자리에 확고하게 앉혀 놓았
다 조미租米 전세錢稅와 방중술 같은 오두미도의 폐
단을 배제하여 청정한 도교를 확립하려고 했다 말하자
면 신천사도는 부록파와 단정파의 교법을 조정 융합하기
에 이른 것이다
구겸지는 최호崔浩의 힘을 얻어 북위 태무제太武帝의
귀의를 받고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천사도의 단계에 와서 처음으로 조건을 갖춘 도교가 정
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1/17
5 수당隋唐 시대의 도교
수隋의 왕조도 도교 교학을 연구하는 현도관玄都觀
을 설치하고 ≪현도관일체경玄都觀一切經≫을 완성시
키는 등 도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는 수를 거
쳐 당唐에 내려와 북조의 신천사도와 남조의 교학 체계
의 종합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도
사 왕원지王遠知와 반사정潘師正이 국가의 도교정책
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갔다
당대에는 도교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 밑바탕에
는 도교교단을 국가의 행정지배하에 예속시키기 위한 엄격
한 정책이 깔려 있었다 도교교단이 국가에 예속되어 1
만 5천이 넘는 도사가 양성되었으며 2천이 넘는 전국의 도
관道觀에 배속되어 주로 국가를 위해 양재기복禳災祈
福하는 재초齋醮를 거행하게 하였고 기타 도교의 행사
와 습속을 관장케 했다 또한 당실唐室의 조상으로 받드
는 노자老子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의 존호
를 올리고 노자의 ≪도덕경≫을 민가에 두루 비치시키
고 과거의 과목으로 넣었다
당대에는 도교를 연구하는 기관인 숭현학崇玄學을 설치
하여 도력道曆을 제정하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 자연발
생적으로 생겨난 도교는 이렇게 해서 민간을 대상으로 하
는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사명은 퇴색해 버리고 국가가 관
장하는 관방 도교官方道敎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당대
라고 해서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도사
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안사란安史亂을 경계
로 해서 도교교단에 대한 당 왕조의 규제가 약화되면서 도
교는 다시 서민화의 현상을 다소간 드러낸다
중국 허난성의 형산 현도관 수 왕조 때는 도교의 교학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서 현도관을 설치 운영하였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2/17
당나라 말기에 국가 통제하의 도사가 아니고 도교에 지대
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종리권鍾離權과 여암呂嵒 두
사람이 있다 종리권의 자는 운방雲房으로 그에 관해서
는 한대漢代 이래로 생존했던 인물로 보는 전설까지 있
는데 그는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道法을 얻고 마
지막에는 공동산崆峒山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
어 진선眞仙이 되었다고 한다 종리권은 여암을 계도하
여 그를 도인道人으로 도화度化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종리권은 신라의 유당학인留唐學人 승자혜僧慈
惠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 세 사람을 종남산 광
법사終南山廣法寺에서 만나 많은 도서道書와 비결을
주고 내단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는 종리권이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진
여암의 자는 동빈洞賓으로 종리권에 의해 도화되기는 하
였으나 다시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초능력을 행사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특히 민간에서 많이 받들어졌
다 그는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
으로 받들어진다 이들은 수련적인 도교를 개발하여 전진
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 유파의 북오조北五祖
로 추앙받으면서 조사祖師로 받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오
대五代의 도교는 서민화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6 송원宋元의 도교
당대의 종리권과 여동빈은 팔선의 일원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
히 여동빈은 상제와 미륵이 하나임을 주창한 인물이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3/17
송대에도 진종眞宗과 휘종徽宗 등 도교를 좋아하는 임
금이 있어 도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관방 도교의 색채
를 다분히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당대唐代와는 상황이 달
라졌다 당실에서 노자를 숭상한 것과는 달리 송실에서
는 조신祖神 내지 수호신인 조현랑趙玄朗에게 호천옥
황대제昊天玉皇大帝로 존호를 올려 최고신의 호칭으
로 천존天尊 대신 옥황玉皇이 정착하게 된다
진종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만수궁관萬壽宮觀을 설치시
켜 천자의 무병장수를 기원케 하고 각지의 도관에는 국가
에서 제거提擧를 파견하여 보호와 관리를 담당케 했
다 또한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과 ≪만수도장
萬壽道藏≫같은 대규모의 도교 일체경一切經의 편찬
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전해지지 않으나 대체의 내용은 장
군방의 ≪운급칠첨雲笈七簽≫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
북송의 진종과 휘종은 도교의 마니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4/17
북송은 금金에 멸망하고 남송으로 들어가 국가는 극도로
쇠미해졌는데 이 시기에 정명도淨明道 태일교太一敎
진대도교眞大道敎 전진교全眞敎 무당도武堂道 등
새로운 도교 교파가 무성하게 생겨난다 이들 새로운 교파
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삼교혼합三敎混
合의 방향이다 원대元代에는 세조世祖가 천사도를
정일교正一敎로 개칭하면서 보호해 주었고 전진교도 번
성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원의 태종 10년1238에
태종太宗 어전에서 불교와의 교리 논쟁이 있은 뒤부터는
도교는 대체로 퇴색의 길을 걸었다
7 명청明淸의 도교
명태조明太祖는 즉위 후 곧 도교교단을 통제하는 현교원
玄敎院을 설치하여 도교를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다시
도록사道錄司로 개편하여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각 지방
에 도기사道紀司를 두어 도교교단의 행정을 관할하게 하
였다 또한 도사의 최고 칭호인 천사天師라는 호를 천자
의 권위를 침범한다 하여 사용을 폐지하고 진인眞人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헌종憲宗 때에는 국가에서 공공연하
게 도사와 불승의 도첩度牒을 팔기 시작하여 도사와 불
승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송오자라 불리는 성리학의 대부들은 태극도설에
대한 정리로 정명도를 비롯한 원명청대의 도교에도 큰 영향을 주
게 되었다
좌 베이징에 위치한 백운관 우 타이완 먀오리 위치한 영동궁 각
각 전진교와 정일교의 대표 사찰이다 명대에는 도교를 전진교와 정
일교의 두 종파로 통합하였는데 전진교는 명조에서 쇠퇴하고 정일
교가 자리하였으나 청대에는 정일교마저 쇠퇴하고 도교는 민간 신
앙으로 전락하였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5/17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조에서 정명도와 정일교의 지도자들
을 도교교단의 최고 행정관직인 우정일右正一이나 좌정
일左正一에 임명하는 등 도교교단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명실에서는 화북華北 지방의 도교를 전진교가
강남 지방을 정일교가 각각 나눠 맡게 하는 것을 기본 방침
으로 세웠으나 실제로 전진교의 세력은 극히 약화되고 정
일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정통正統 10년1445에 ≪정통도장正統道藏≫
5305권과 만력萬曆 35년1601에 ≪속장 續藏≫
180권을 편찬 간행하여 유일한 도교 일체경一切經으로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청대에 내려와서는 정일교에 대
한 청실의 태도도 냉각되고 전진교도 금단도에 기울어지는
등 도교 교학의 지도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청대의 도교
는 대체로 삼교 혼합의 방향이 현저해지고 서민화의 경향
이 실질적으로 뚜렷해진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8 근현대의 도교
근현대에 들어 공산당共産黨과 국민당國民黨의 내전
으로 도교의 역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대륙을 차
지한 공산당은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 종교를 인정하
지 않았으며 문화대혁명을 통한 종교 탄압을 자행했
다 이 와중에 도사들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강
제 환속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많은 도관과 절이 문을 닫
았다 가까스로 연명한 사람들은 대만 동남아 등지의 화
교 거주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간신
히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때문에 지금도 대만이나 화교 거
주 지역들에서는 이때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도교를 계승
하며 민간 신앙을 발전시켜왔다
이후 공산당이 전통 문화에 대한 연구 발전 및 지원 정책
을 펴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사라진 도관들을 재건되었
고 도피했던 도사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
이 종교의 통제와 관리를 하는 나라이기에 중국의 도교
는 학술적인 부분이나 양생養生과 관련된 기氣 수
련 무술만이 발전하였다
대만 및 동남아로 도망친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았
다 자체적인 교단 교리 경전을 갖추고는 있으나 원시 도
교 시절의 무축적巫祝的 기복신앙적祈福信仰的 성격
이 다시 대두되면서 주술적인 민간 신앙 정도로 취급당하
였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상좌부上座部 불교가 발달
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지게 되
었다 
8/10/23, 9:29 PM [도가] '도교사'에 대한 대략적 요약
https://raven-deadwire.tistory.com/88 16/17

<참고문헌>
구보 노리따다,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출판
사, 20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종교학 다시보기 2008 불교평론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종교학 다시보기 < 기획시리즈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왜 종교인가? / 최준식
기자명 최준식   입력 2008.11.20 


1. 왜 종교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의 정의와 특질에 대해 보아왔다. 이것은 이른바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종교학은 주로 위에서 본 종교적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종교적인 현상이 이렇다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종교에는 인간의 다른 부분의 삶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교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신앙을 지키고, 동북아의 불교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인도 순례길을 갔던 것일까와 같은 질문에 선뜻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질문들도 이어진다. 지구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교 혹은 종교적 현상이 있는데 이들 현상들은 전부 다른 것일까? 아니면 그 다양함을 꿰뚫을 수 있는 어떤 원리나 공통점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수많은 종교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등등의 질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이렇다. 나는 종교를 처음 공부할 때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론 종교와 불교와 같은 비유일신론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 때문에 작지 않은 혼란에 빠졌었다. 그 이유야 자명하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대체로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 두 주장은 전혀 상반된 것이 되니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게 된다. 따라서 신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한 가지 경우에만 해당될 수 있다.

이런 정황이 나에게는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불교나 기독교(그리고 이슬람 등)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두 종교를 신봉했을 터인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반은 거짓을 믿어왔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붓다나 예수 같은 성자들이 전혀 다른 말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현들에게는 일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이 두 분이 상반된 주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그 종교 안에서 별 생각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만이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 반면 불교도들은 기독교의 신은 육도 윤회에서 천신 급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 윤회의 굴레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지구상에는 종교가 부지기수로 많다. 따라서 교리도 무척 다양하다. 기독교에만 해도 교파가 2만 개는 더 된다고 하니 그 다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전부 나름대로의 교리만 주장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종교를 만든 우리들은 다 같은 인간이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떤 공통된 특질 혹은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된 특질 때문에 종교라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현상이 이같이 다양한 것은 그 종교가 생겨난 각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모든 표현은 문화적인 것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은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다양한 종교적 현상 밑에 흐르고 있는 원리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 인류에게 종교라는 현상이 왜 생긴 것인지, 혹은 인간의 어떤 조건 때문에 종교가 생겨난 것인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보기로 하자.

1) 인류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왜 인류 역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었을까?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류에게는 종교나 그와 비슷한 현상이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선사 시대는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정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종교 의례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보고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네안데르탈인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에게서도 종교의례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적 중에 어린 아이의 시신을 놓은 자리가 있고 그 시신을 중심으로 돌을 원이 되게끔 둥글게 나열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꽃가루 같은 것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는 꽃을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단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마 죽은 아이에 대한 일종의 사령제(死靈祭)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인류도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세계관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해 애도하고 장례를 치러준 것으로 보인다. 죽음에 대해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독특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어떤 동물이 동료의 시체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의례를 행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종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심도있게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비슷한 정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가 다소 밑으로 내려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꽤 보인다. 지척에 널려 있는 고인돌{{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전 세계 고인돌의 40%에 달하고 있다.}}은 말할 것도 없고 울주에서 발견된 반구대 유적도 종교·주술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이 유적에는 고래나 사슴, 물고기, 호랑이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조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런 동물들이 많이 잡혔으면 하는 바람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중론이다. 이른바 풍요주술이라고도 하고 종교인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방 주술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주술적 행위는 전형적인 종교적 행위이다. 유례를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청동기 시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다. 이것은 이미 종교가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아마도 꽤나 주술적이었을 샤머니즘이 주된 종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다양한 종교 행태는 대체로 이 '원시적인' 샤머니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 다음을 보면 어떤 인류 사회이든 종교적인 요소들이 없는 때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대종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불교(힌두교), 유대·기독(이슬람)교, 유교 등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체제 종교 시대를 맞이한다. 불교나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가 이 세계를 재패한 뒤에는 전 세계적으로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 가운데 국교로서 종교를 표방하지 않은 나라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굳이 예외를 찾아본다면 현대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소련이나 동구 같은 나라들밖에 없을지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어느 정도 보았으니 여기서는 약술(略述)하도록 하자.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에서 종교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주장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맑시즘과 종교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앞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종교, 특히 기독교와 맑시즘은 서로가 그렇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닮은 점은 교조적인 면이다.

기독교가 약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외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했듯이 맑시즘에서도 '맑시즘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이 두 집단에서는 아주 강한 태도로 응징하곤 했다. 엄청난 용기가 없다면 기독교 집단이나 맑시스트들에게서 이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기독교에서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처럼 맑시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고 유토피아가 오는 것도 구조 상 너무 닮았다. 그래서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를 은밀한(covert)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종교화 되는 가장 적나라한 예를 우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 숭배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종교에 대해서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한 것으로 유명하다. 샤머니즘은 거의 궤멸되었고 교회나 절들도 과시용으로 한두 개 남아 있을 뿐이지 실제로 신앙에 사용되는 종교시설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북한이 사실은 김일성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국가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한참 앞에서 이미 자세하게 보았는데, 이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김일성 유일신 숭배 국가 이외에 다르게 보일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죽은 김일성이 부활해 달에서 유훈통치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종교이지 세속적인 정치 형태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학자들이 북한 정치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들의 이론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은 북한이 종교국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을 신흥종교 집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볼 때 벌써 망했어야 할 국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종교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괴이한 신흥종교 집단이 그 어불성설의 교리나 마수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고 기이해 하는데 북한도 꼭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장 억압했으면서 사실은 종교국가 그 자체가 된 북한의 현실은 아이러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인류사에는 종교가 없었던 때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인류사에는 종교나 혹은 그 유사 현상이 없는 때가 없었던 것일까? 인간의 어떤 조건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 만들었을까? 또 동물에게서는 왜 종교와 비슷한 현상이나 행태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동물학자들은 동물도 마음이 있고 지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동물들이 왜 종교적인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점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 현상을 만들게 했을까?

아니,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기나 하는 걸까? 만일 있다면 그것은 질적인 차이일까(different in kind) 아니면 정도의 차이(different in degree)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여러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한꺼번에 다 답할 수는 없다. 우선 도대체 종교는 인간의 어떤 부분을 다루기에 인류와 역사를 같이 했을까 하는 질문부터 접근해보자.

2)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책을 제시

앞에서 우리는 종교의 정의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지만 한 마디로 종교를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까?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 가운데 종교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도 '궁극적(ultimate)'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총체적인 삶 가운데 종교가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국면이 있다. 먹고 배설하고 성관계를 하는 일차적인 것부터 예술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인 행위까지 수많은 국면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먹고 자고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위를 놓고 궁극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일차적인 것이라 다른 동물들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기초적인 조건이 충족되면 삶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인간의 죽음과 죽음에 대해 갖는 공포
이와 같이 의미를 찾기 시작하다 인간들은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여실히 느끼는 국면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 국면이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궁극적인 한계에 다다른다. 이것은 바로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죽는다는 절대적 명제에 다다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명제는 아니지만 어떤 인간이든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권세가 높은들, 또 아무리 돈이 많은들, 아무리 명예가 많은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돈이 아무리 많은들 죽은 뒤에 십 원 한 장 갖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아무리 많은들 자기 땅 가운데 한 평이라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서 인간이 부닥쳐야 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불안과 공포에 직면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비하면 그 어떤 것도 별 것 아닐 수 있다. 아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공포의 밑바닥에서 근본 공포로서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밤길에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공포에 질려 주저앉아 버린다고 한다. 자율 신경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것인데 인간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은 자기 제어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소설가였던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보면 전쟁터에는 신병들만 걸리는 정신병이 있다고 한다. 신병들은 치열한 격전상황에 겁에 질린 나머지 그 공포를 참지 못하고 안전한 참호에서 뛰쳐나간다는 것이다. 레마르크는 그 다음의 처절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뛰쳐나가자마자 날아오는 포탄에 맞은 신병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뒤에 있는 큰 바위에 흩뿌려졌다. 바위 위에는 신병의 몸에서 나온 피와 살과 뼈가 뒤섞여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병들에게 죽음의 공포는 그렇게도 컸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그것인데, 이 영화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앞부분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륙작전의 극사실성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전쟁 영화 가운데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모선에서 수륙 양용선으로 갈아탄 병사들은 1-2분 뒤면 해안에 도착해 적군의 기관단총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병사들은 '1-2분 뒤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실제로 해안에 도착해 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병사들은 총탄에 픽픽 쓰러져 간다. 이때부터 스필버그의 생생한 촬영이 시작되는데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배안에서의 병사들의 태도이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병사 가운데 어떤 이는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어떤 이는 심한 구토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연신 뭔가를 외우면서 기도를 한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다지도 막대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왜 그리도 클까?
기독교의 《신약》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는 다시 사망을 낳는다"고 말하면서 죽음이 인간의 부정적인 성향 때문에 초래되는 두려운 결과처럼 묘사하고 있다(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죽음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한다). 죽음은 이같이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가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죽은 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멀쩡하게 여기 있는 내가 (조금 있으면) 더 이상 여기에 없을 것이라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절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확실한 생각을 죽을 때까지도 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우리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만은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관성처럼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볍게 믿어버리고 만다. 그런 까닭에 내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절박한 심정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에 맞부딪치면 어마어마한 공포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내가 없어지는 게 너무나 두렵고 허망하다. 내가 없으니 이 세상도 아무 의미가 없다. 또 이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허탈감도 든다. 어찌 됐든 이와 같이 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를 가져온다.

두 번째는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두렵다. 가족처럼 항상 함께 지내왔던 중요한 타자들과 헤어져 나 혼자만 떠나니 그 슬픔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별은 나중에 다시 만날 기약이 있어도 슬픈 것인데 죽음으로 갈라지는 이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니 그 공포와 비통함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의 쉼터가 되고 의지처가 됐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기반이 없어지는 것이 되니 얼마나 두려운 체험이겠는가.

이러한 고통은 바로 세 번째 이유로 연결된다. 세 번째 두려움은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런 것 가운데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물에 대해 갖는 공포는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본성상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인식 체계에 구분 배치해놓는데, 그 체계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면 매우 큰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UFO나 귀신과 같은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체험한 것이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곤란하다.

따라서 죽은 뒤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미지이자 무지의 세계이다. 혼자 길을 떠나는 것도 고통스럽고 무서운데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니 그 고통과 공포는 몇 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아마존의 정글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어디인지도 전혀 모른다. 그때 느끼는 공포는 굳이 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다에서 표류되어 혼자만 남은 사람은 굶주림보다는 외롭고 두려운 것 때문에 빨리 죽는다고 한다. 그만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큰 것이다.

죽음은 일단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았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궁극적 문제'라는 명제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제목을 '일단은'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물론 죽음이 인간의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죽음이 그렇게 인식되게 되는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사고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종교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게 된다.

죽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는 것은 여러 종교가들의 체험담에서 귀동냥할 수 있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구한말의 거승이자 괴승이었던 경허의 경우를 들고 싶다. 경허는 본격적으로 참선을 수련하기 전에는 유명한 강사였다고 한다. 《화엄경》 같은 경만을 강의하던 강사였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어떤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휩쓸고 간 적막한 마을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절박한 명제에 부딪히게 된다. 죽음이라는 절대 허무와 상봉한 것이다. 그는 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까지 가르치던 경전을 다 버린다. 그리고 용맹정진을 하는 맹렬한 참선 수행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 다음 이야기야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의 관심은 경허가 부딪힌 문제에 있다. 종교학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경허가 궁극적 관심에 걸렸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말하는 궁극적 관심이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뜻한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말 그대로 그야말로 인생에서 궁극적인 문제로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 혹은 비슷한 질문이지만 '삶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를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이런 문제에 잘 부딪히지 않는다.

내면적으로는 무의식중에 인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면서 애써 이런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이렇게 외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성정적(性情的)으로 별로 예민하지 않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감성이나 이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만이 던질 수 있다. 하루하루를 대충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지 않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외면하는 그 다음 이유는 이런 질문이란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침잠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갖고 있는 심각성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외면하게 만든다.

이런 문제는 일단 봉착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너무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출가라도 단행해야 한다. 그런데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출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정리하고 처리할 게 너무 많다.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이 문제를 외면하고 모르는 체 하면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대강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대부분 궁극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극소수의 인류만이 이 문제를 천착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절묘하게 묘사해 놓은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 주장자는 동양종교 전공자가 아니라 서양 기독교 신학 전공자라 관심을 끈다. 주인공은 20 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 틸리히는 그의 저서 『신앙의 역학(Dynamics of Faith)』에서 믿음에 대해 대단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신의 아들인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고 그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믿으며 그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틸리히는 이런 신앙의 정의를 깨끗이 날려 보낸다. 그에 의하면 믿음이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자. "Faith is not a belief in something, but a kind of state, being grasped by an ultimate concern."}}

그러니까 예수가 구세주라느니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사로잡힌 상태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불교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붓다가 출가를 단행한 것도 바로 이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더불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삶-악과 고통의 문제와 함께
죽음과 삶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이다. 따라서 죽음이 문제가 된다면 삶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죽음의 문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우리의 오감이나 이성의 범위 내에서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삶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와 같은 문제이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내가 대관절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 역시 매우 궁극적인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들이 궁극적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답을 구할 수가 없는 문제들이라는 것이다. 죽음 뒤의 삶에 대해서 모르듯 삶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생전(生前)과 생후(生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사는 동안'에 관한 것이다.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은 '왜 사는가?'와 같은 의문일 것이다. 내가 살긴 살고 있는데 우연히 부모들의 성관계로 인해 내가 태어난 것인지 등부터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또 나는 왜 금생에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행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에 부모와의 인연 문제는 개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등등 자신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즉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유명한 화두인 '부모에게서 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와 같은 것도 사실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문도 죽음과 삶의 문제처럼 답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와락 달려들어서 모든 것을 걸고 진력(盡力)을 해도 답을 얻을까 말까 하는 그런 난해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유예적인 태도가 된다. 종교적인 문제는 이래서 힘들다.

그런데 삶에는 종교가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설명을 해줄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에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우선 이 세계에는 어찌 됐든 악이라 부를 수 있는 부정적인 힘이나 사건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악으로서, 서로 간에 미움이나 탐욕으로 점철되다 급기야는 서로를 살육하고 가진 것을 뺏고 뺏기는 전쟁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악의 문제에 대해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역시 종교의 할 일이다. 악은 시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야말로 종교가 아니면 대답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모든 종교들이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문제가 많은 종교는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들일 것이다. 이들의 교리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절대적 선의 입장에 선 신이 창조주로서 창조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튀어나온다.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왜 이리도 철저한 악이 만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동산의 신화로 설명하려 한다.

이 신화에서는 세상에 악이 생기게 된 원인을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신에게 불복종한 데에서 찾는다. 원래는 신과 함께 최고의 상태에 있었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신께 불충해 유토피아에서 쫓겨나서 고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른바 원죄론이다. 이 신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통찰력이 넘치는 신화인데 보다 확실한 분석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이런 신화 역시 종교가 아니고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점만 지적하자. 이런 설명은 종교에서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불교도 이 문제에서는 그리 자유롭지는 않다. 불교(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악의 근원을 보통 무명으로 돌린다. 우리 중생들은 이 무명만 제거하면 바로 성불이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는 것은 이 무명 때문이다. 이 무명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착심이 생긴다.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좋은데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이 악과 고통의 근원인 무명이 어떻게 생겨났느냐이다. 불교의 근본적인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성에는 무명이 있을 수 없다. 무명이 있으면 불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명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이 무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불성에는 무명이 없다고 했는데 이 무명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한 생각이 홀연히 생겼다고 표현하는데 그 다음 질문은 그럼 그 한 생각은 어디서 생겨났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유교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유교-공맹이 중심이 된 '원시' 유교-에서는 그다지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둔 것 같지 않다. 인간이 왜 악해지느냐에 대해 공자는 별 언급이 없었고 맹자에 와서야 인간은 처해진 환경 때문에 악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설명은 너무나 일차원적이라 깊이를 별로 느낄 수 없다. 한 마디로 인간의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인들은 인간의 깊은 심성이나 내세 같은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천착하지 못하다가 불교가 들어온 다음에야 궁구(窮究)하기 시작한다. 사정이 어찌됐든 악의 문제는 종교에서 최고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이 악의 문제와 더불어 난제 중에 난제로 꼽히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에 예기치 않게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어떤 고통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어떤 고통은 너무 우연적이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어떤 남자 대학생이 지방 도시로 답사를 갔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다방에 갔다 마침 탈영병이 들어와 인질로 잡혀있다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우연의 연속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가 그 다방에 들어가서 인질범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매일 다니던 다방도 아니고 답사 갔다 우연히 들렀던 다방인데, 왜 하필이면 그때 탈영병이 그 다방에 들어왔느냐는 것이다. 또 들어와도 잘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돌발적으로 죽게 되었다. 이런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는 이 고통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아들이 예기치 않게 일찍 죽어서 큰 고통을 받을 정도로 죄를 많이 지은 것 같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키고 슬픔에 싸인 당사자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다른 부문, 즉 정치나 경제 등으로는 결코 위안을 주지 못한다. 슬픔에 싸인 부모에게 군대 체제가 잘못 됐다든가 경찰의 테러 대응 태세가 잘못됐다고 말한들 통할 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 종교에서는 그들의 종교 전통에 맞는 설명을 제시한다. 가령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 우리들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신께서 그 아들을 더 중한 데에 쓰실 일이 있어 일찍 불러갔다느니 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업보설의 챔피언답게 업보이니 받아들이고 망자의 극락 천도를 빌자고 위로할 것이다. 그런데 각 종교가 제시하는 이런 설명들은 상식적으로는 전혀 검증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의 신자들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1980년대 초반에 유대교의 랍비였던 해롤드 쿠스너가 쓴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을 거론할 만하다. 쿠스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아들이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게 된다. 조로증은 말 그대로 남들보다 나이를 훨씬 일찍 먹는 병이라 쿠스너의 아들은 16세 때 70세 노인이 되어 죽는다. 이 아들을 보면서 쿠스너는 처음에는 아주 괴로워하면서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이 생기는가?"라고 자문했다.

자신이 그때까지 살면서 유대교를 통해-직접적으로는 경전이나 선현들을 통해- 그에게 계시됐던 신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고 항상 윤리적으로 살았는데 왜 이런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 자기에게 생겼는가 하고 되물었다. 한동안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왜 내가(Why me)'라는 질문은 사건의 해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신 그가 해결책으로 생각해낸 것은 우선은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도 이 경우에는 무력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는 신께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하느님, 저에게는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이미 일어난, 다시 말해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신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한다면, 이런 불가항력적인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마도 종교만이 그 해결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1-영혼과 내세의 긍정

위에서 우리는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가 분석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즉 죽음에 대해서 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 볼 차례이다. 죽음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 이것만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해결책은 사람은 안 죽는다고 하면 된다. 어떻게 안 죽을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내세이다. 인간이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신일 뿐이고 또 다른 몸의 형태인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남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 대체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으로 가면 꽤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영혼의 상태를 획득하려면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면에서-용어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기독교와 불교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같은 점은 그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별로 비슷하지 않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죽은 뒤 이른바 '영생'을 얻고 행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천당으로 가려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어떤 신조를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인다고 고백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이 신조를 요약해보면, 하느(나)님{{ 사실 한국어 문법으로 하면 하느님이 맞는 철자이고 하나님은 틀린다. 하느님은 아마도 하늘님에서 ㄹ이 탈락한 것일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신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용어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하나'가 아니라 '한'이 되어야 한다.

한국어에서는 '한 사람'의 경우처럼 '하나'가 관용어가 될 때에는 '한'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써왔기 때문에 관례를 따른다.

}}이 존재하고 그분의 아드님이 인간으로 내려와 인간의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속한 다음 다시 부활해서 승천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교리를 추호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평생 동안 교회도 열심히 출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구세주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선행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지락의 근원인 천당에 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른바 '영생'을 얻어 천당에 갈 수 있게 되며 그곳에서는 한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이에 비해 불교는 죽음 뒤에 인간이 다른 몸(이른바 중음신)의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죽은 다음 영혼의 상태로 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다. 또 불교에서는 어떤 교리를 특별히 신실하게 믿을 것도 없다. 절에 다니는 여부 역시 영혼의 진급을 결정하는 변수는 아니다. 불교 종파 가운데 기독교와 가장 비슷하다는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위해 반드시 불교도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극락 가는 것이 불교의 마지막 목표도 아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교리들이 전통 불교에서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불교도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 2 -- 궁극적인 행복의 획득

세속적인 해결법의 문제점 그런데 죽어서 영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할 때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답처럼 평범하면서도 적절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생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한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행복을 얻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령 나를 위해 돈이나 권력 등과 같이 세속적인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획득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유물을 더 많이 만들수록 행복해지리라는 것이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제일 조건은 돈이 아닐까? 사람들은 보통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점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다.

누구든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주는 직장으로 가려고 탐색을 거듭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지옥에라도 갈 태세다. 그러다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의 대열 속으로 들어간다. 욕망은 끝이 없다. 백만 원을 벌던 사람이 자신은 앞으로 천만 원만 벌면 더 이상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렵게 노력해서 천만 원을 벌면 기쁜 것은 잠시뿐이고 이제는 1억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목마를 때 짠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가령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어서 목이 굉장히 마르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마실 물이 없다고 짠 바닷물을 들이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바닷물도 물이니까 아주 잠시는 시원할지 모르지만 곧 더 많은 물이 먹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바로 이런 식이다. 욕망을 채울수록 더 많은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욕망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더 많이 하면 할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성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성교에서 겪을 수 있는 오르가즘 체험은 워낙 강렬해-인간이 약과 같은 외부적인 것의 도움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렬할 체험일 것이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그 체험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흔히들 더 많은 이성과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특히 남자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여겨진다.

남자들은 더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하면 더 많은 쾌락을 얻게 되고 그래서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가 될 여자와 그렇게 환장하도록 좋아해서 결혼을 했건만 몇 개월 만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는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희대(稀代)의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1700명인가 하는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데 상대가 어떤 여성이든 항상 곧 싫증을 느끼고 다른 여자를 찾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를 자주 바꿨건만 그는 외려 애정의 고갈 상태에 빠져 나중에는 인생에 대한 큰 회한을 갖게 된다. 가까이 했던 여자의 수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건만 질적인 면에서는 바닥이었던 것이다.

다른 욕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와 같이 극히 세속적인 욕망들을 추구하는 것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해서 자기가 목표로 삼았던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럴 때 만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청장이 되면 서울 시장이 되고 싶고 서울 시장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은 법이다. 그러다 진짜 대통령이 되면 성취했다는 만족감은 잠시뿐이고 곧 허탈감이 강하게 밀려온다. 정상에 서면 내려올 일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끝이 없고 적당하게 만족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 거꾸로 말하면 욕망의 추구는 막다른 골목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욕망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은 한시적이다. 욕망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찰나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붓다도 깨친 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출가하기 전 궁궐에서 온갖 감각적인 쾌락을 즐길 때 만약 그 세속적인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었다면 자기는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쾌락의 속성이 이런 데도 우리는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 또 더 자주 같은 쾌락을 얻기 위해 맹목적으로 욕망을 추구한다. 불경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온 우주가 보석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전부 소유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결코 만족해하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해도 그 갈증, 공허함은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밀랍으로 만들어진 이카루스가 결국 자기 몸이 다 녹아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쾌락 혹은 권력, 돈, 명예 등을 획득하려고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 결실이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 있다. 이 책은 종교적으로 무거운 책이 아니라 뜻밖에도 그림책이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애벌레인데 그의 앞에는 높은 기둥이 있고 기둥의 꼭대기는 구름 같은 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다른 애벌레들이 보이지 않는 기둥 꼭대기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둥을 올라간다. 이 애벌레들은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밑에 있는 애벌레를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악착같이 저마다 기둥에 붙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우리의 주인공도 베일에 싸인 기둥 위가 궁금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구름을 뚫고 나무 끝에 올라가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우화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대한 추구는 아무 끝도 없을 뿐만 아니라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궁극적인) 행복 획득법 이렇게 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세속적인 욕망의 추구를 통해서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세속에서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는 방법으로 행복을 획득하라고 권유하는데 이 시도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같은 목적을 위해 정반대의 시도를 권한다.

세계의 종교들은 이 면에서 대부분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진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은 물론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 반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남을 먼저-혹은 다른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혹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을 생각하면 결국 전 세계가 싸움터가 될 것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신에 세계인들이 모두 남을 먼저 생각한다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유토피아가 될 것이 그리고 이것이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이 제시하는 행복의 진정한 완성이다.

이런 삶의 국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가 불교에서 발견된다. 불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면, 지옥과 천당의 차이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지옥과 천당에서는 젓가락이 사람들의 팔보다 길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젓가락을 가지고는 음식을 자기 입속에 넣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젓가락을 가지고 자기 입속에 음식물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 반면에 천당에 사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자신만이 먹겠다는 생각이 없다. 대신 그 긴 젓가락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남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다.

서로를 위해서 좋고 배부르게 먹어서 좋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자기만 위하면 다 망하고 남부터 위하면 다 살 수 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도 이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중생은 자기만 위하면서 사는데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그 반면에 보살은 남만 위해 살려고 하는데 남도 좋게 될 뿐 아니라 결국은 자기도 이롭게 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각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대·기독 전통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불교가 주장하는 자비, 또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 등은 모두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 때만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이렇듯 역설적이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다른 사람이 '오 리(五里)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바로 제기되는 반론은 '그렇게 다 주고 나면 난 어쩌란 말이냐'는 것과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고 지금은 왜 내가 바로 여기서 남을 위해 살지 못하는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다 주면 예수가 역설하는 사랑이 완성된다. 사랑에는 자신이 남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교훈이 있는 것인데 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해야 될 것이다.

이 점은 불교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고 있다. 가령 진정한 보시가 되려면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이 주는 행위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남에게 자기의 것을 몽땅 주는 것으로 하면 붓다를 능가할 사람도 많지 않다. 붓다의 전생록인 『본생담(자타카)』을 보면 붓다는 깨치기 위해 수많은 전생에서 상상을 절할 엄청난 수행을 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매를 피해 전생의 붓다 품으로 들어온 작은 새(비둘기?)의 이야기일 것이다. 매가 그 작은 새를 달라고 하자 붓다는 대신 작은 새와 같은 무게의 자신의 살을 도려내 매에게 주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모이다. 이런 사랑의 실천 없이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게 이 가르침의 교훈이다.

그럼 종교에서는 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앞에서도 계속 이야기된 것이지만 종교에서는 최고의 행복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간의 행복은 강도나 순도 면에서 이 종교적인 행복을 능가할 수가 없다. 세속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순식간에 바꿀(transform) 수 없다.

그러나 종교 체험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을 한 순간에 탕아에서 성자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순도 역시 매우 높다. 세속의 행복은 지순한 종교적인 행복에 비해 탁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만족)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의식이 들어가면 언제나 욕심이 앞서고 따라서 탁할 수밖에 없다. 그럼 대관절 종교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은 어떤 것일까? 어떻기에 그렇게 강렬하고 지순하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 범인들은 이렇게 수준이 높은 종교 체험을 할 길이 없다. 대신에 우리는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종교 체험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떨어지지만 비교가 가능한 그런 일상적인 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종교 체험과 관련해서 일상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성격이 다소 비슷해 비교가 가능한 것은 연애(戀愛) 체험이라고 늘상 말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연애는 많은 연애 가운데에서도 초기의 연애를 말한다. 초기 연애 체험이란 게 무엇일까? 내가 어떤 여자를 너무나도 좋아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여자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눈에서는 그때부터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엄청난 열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이 있는 것도 부족하고 뭐든지 그와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좋은 것을 보아도 그와 함께, 좋은 음악을 들어도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등등 낮은 수준에서 상대방과 하나 되는 체험이 시작된다. 이때의 체험은 매우 강렬해서 공중에 붕 뜬 느낌을 받는다.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 체험과 비교된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애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절정 체험(The Peak Experience)』을 보면 미국 대학생들은 절정 체험의 전형(典型)으로서 이 연애 체험을 든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 대학생들이 평소에 가질 수 있는 체험 가운데-마약류를 하는 것은 제외하고- 이성과 연애하는 것이 가장 강렬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연애 초기에 격렬한 사랑이 시작되면 자신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진다. 이 체험은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일상적인 체험과는 많이 다르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하기 전에는 달이 저렇게 밝은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고 나뭇잎이 저렇게 푸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또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른지. 게다가 한 사람을 사랑하니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 자신이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같고 한없이 겸손하고 싶어진다.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 좋고 감사하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내 목숨까지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데 왜 환희와 기쁨은 쉴 새 없이 밀려올까?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데 왜 그리 좋을까? 이게 바로 종교적인 체험에 가까운 면이다.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체험도 나를 신이나 붓다 혹은 이웃에게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내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이 수행이 올바르게 되면 우리는 연애할 때와 비슷한-아니 훨씬 상하고 깨끗한- 환희 체험을 한다. 이상스레 자신을 포기하면 할수록 기쁨은 배가된다. 세속적인 행복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록 행복진다고 하는데 종교 체험은 정 반대이다.

그런데 연애 체험은 아무리 강렬해도 세속적인 체험이다. 세속적인 체험의 가장 큰 특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연애 초기에 느꼈던 그 강렬한 체험이 스러지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익숙해져 신선도가 떨어지면 밑에 숨었던 자아가 서서히 밀고 올라온다. 사랑하기 전에 항시적으로 작동 중에 있었던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사랑에 눈 뜨면서 잠깐 동안 한정적으로 기운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이 일상화 되면서 다시 이 자아 개념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다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가?' 혹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따위의 불만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애 초기의 그 생생했던 체험들은 사라져 가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나 다툼이 생겨난다. 이제부터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더 이상 없다. 그 다음부터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기술한 것처럼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사랑해야 하는 단계가 된다.

위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위할 때보다 자신을 내놓을 때 더 큰 행복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큰 행복 혹은 궁극적인 행복은 자신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나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궁극의 경지가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절정의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온전한 자기 포기의 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붓다나 예수 같은 성인들이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종교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이나 그 해결책에 대해 다 언급한 것일까? 이것으로는 좀 미진하지 않은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이렇게 쉽게 분석될까? 이렇게 쉬운 문제를 가지고 인류 최고의 천재였던 붓다나 예수가 목숨까지 내놓고 다년간 수련하고 그 법을 설교하고 다녔을까? 사실 우리는 이제 대강만 본 셈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분석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분석한 대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하는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를 면밀하게 궁구해야 한다. 왜 인간만 죽음을 인식하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문제가 우리가 다음에서 분석할 주제가 된다.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가 있다.

 최준식 cjskor@ewha.ac.kr

한국 종교 가운데 기복을 뺐을 때 살아남을 종교는? < 불교신문 2011

한국 종교 가운데 기복을 뺐을 때 살아남을 종교는? < 종단 < 기사본문 - 불교신문

한국 종교 가운데 기복을 뺐을 때 살아남을 종교는?종단
입력 2011.10.17 
기자명장영섭 기자


최준식 교수 ‘10월 결사’ 월례특강서 ‘고언’

10월 결사 월례특강의 키워드는 한국종교 지형의 변화였다. <한국 종교를 컨설팅하다>의 저자인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사진〉가 강의를 맡았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국 기독교의 몰락은 시간문제다. 교회의 도그마적인 교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럽 젊은이들의 정서가 우리나라에도 전이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의 득세로 한국이 예전의 중화문명권으로 복귀하게 되면, 미국의 비호로 성장한 한국 개신교에는 보수적인 극소수의 신도만 남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불교가 이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으리라 기대한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앞으로의 종교는 ‘기복’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교단의 가부장적 문화…비구와 비구니 차별

출·재가 비민주적 위계…어려운 한문용어 등 ‘구태’

지난 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에서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스님) 주최로 열린 월례특강에서 최준식 교수는 종교인구의 감소와 종교에 요구되는 새로운 역할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한국불교의 전근대성에 대한 고언도 섞였다.

그는 먼저 “개신교는 이미 성장세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천주교가 아시아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지만 그 세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다”며 현재의 종교지형을 진단했다. 역사가 오래된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에서 고작 수십 명의 노인들만 예배나 미사를 보는 유럽 기독교의 풍경을 소개하면서 쇠락의 이유를 설명했다.


철저히 이성화되고 세속화된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유일신의 ‘영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예언한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 <문명의 충돌>을 인용하면서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중국적인 세계관을 지닌 종교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여러모로 불교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형국이지만 지금의 역량으로는 불교의 미래도 암울하다. 최준식 교수는 “한국불교는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사회가 지닌 병폐를 불교 교단 역시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부대중 참여 공동체

하나만이라도 나온다면

올바른 이정표 되찾을 것

그는 교단사회의 가부장 문화,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문제, 출가와 재가의 비민주적인 위계질서, 어려운 한문교리용어 등을 구태라고 규정하면서 “사부대중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공동체가 하나만이라도 나온다면 한국불교가 올바른 이정표를 되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만일 한국의 종교에서 기복을 뺀다면 과연 살아남을 있는 종교가 몇이나 될까”라며 뼈 있는 질문을 던진 뒤 “종교는 세상보다 항상 앞서가면서 이 어지러운 세상을 인도해야 하며,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종교란 필요 없는 것이 된다”고 경종을 울렸다.

[불교신문 2757호/ 10월8일자]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유교) 뒷부분 중심 _ 최준식 저 - 문화/예술/패션 레포트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유교) 뒷부분 중심 _ 최준식 저 - 문화/예술/패션 레포트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유교) 뒷부분 중심 _ 최준식 저
1
2
3
4
5
6
7
8
9
10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소개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무교, 유교) 뒷부분 중심 _ 최준식 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무교란

한국의 종교문화와 무교
1)한국인의 놀이: 신들림과 신명의 한판
2) 유교와 무교
3)불교와 무교
4)도교와 무교
5)신종교와 무교
6)기독교와 무교
7)김일성 숭배와 무교


무교에 대한 비판
2)무교의 원초성
3)무교와 여성
4)무교의 문제점과 한계

신에게 끌려 다니는 무당


유교란
유교와 한국 문화
1)한국 역사 속의 유교
2)유교와 한국 사회-한국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유교와 그 실존적 의미

1)유교는 종교인가 아닌가
2)유교와 여성
3)유교의 현주소

본문내용


키워드
한국, 종교, 불교, 무당, 문화, 한국의 종교,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요약,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추천자료
지역사회 종교단체의 사회복지활동 - 천주교의 사회복지활동
베버의 비서구권 종교와 경제 연구
대중 문화 속의 종교(원음방송 사례를 중심으로)
기독교교육과정분석 (종교교육과정분석 - 기독교교과목, 기독교대안학교)
포스트 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주 5일 근무제 실시와 종교의 세속화
현대인이 원하는 종교의 양태- 파룬궁을 중심으로
[인문사회]종교의 정의
여호와 증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조사(종교차이를 중심으로)
중국 정치와 종교문제
[식민지][식민지제국의식][식민지국가권력][민족주의]식민지와 식민지제국의식, 식민지와 식...
[식민지]일제강점기(일제, 식민지시대)의 종교정책, 기독교정책, 일제강점기(일제, 식민지시...
[한국불교][불교][한국불교 중요성][한국불교 전개][한국불교 전통윤리][한국불교 예불의식]...
국제경제환경론4공통)종교에의한문화적차이가국제경제환경에미치는영향에대해기술하시오0k